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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궁금이 · 방송 전금화
신종코로나바이러스의 한해였다. 끔찍했던 지난 설을 어떻게든 보내고 이제 다른 한해의 설을 앞두고 있다. 북경은 요며칠 사상 제일 추운 겨울을 맞고 있다고 한다. 바이러스는 추운 겨울에 얼어죽을 법도 하건만 오히려 머리를 쳐들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는 역학조사를 피해 휴대폰을 꺼놓고 집회를 하는 종교인들이 있다고 한다. 신앙인지 아니면 어떤 특정 군체의 리익인지 바이러스 앞에서도 사람들은 수판알을 튕기고 있다. 머리를 많이 굴리고 있는데 아무리 교활한 여우도 사냥군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꼬리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여 있다.
출근해 달력을 보니 지난 주말이 2020년의 마지막 주말이였다. 다사다난이란 말은 해마다 년말이면 여기저기서 굳어진 단어로 등장하는 고정 “출연자”다. 어느 한해에도 빠져본 적이 없다. 웬만한 연예인도 이정도 장수 고정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올해 같은 해가 올 줄을 미리 알았더면 그 전의 어떤 해에도 입 밖에 내지 못했을 표현이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다. 생명의 위험부담 앞에서는 모든 것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올해 마지막 주말의 등산도 매주마다 가는 공원으로 갔다. 마지막 주말이라는 걸 의식했더면 좀더 의미를 부여해 다녀왔을 걸 유감스럽게도 오늘에야 느끼게 된다. 사실 부단히 순환하는 자연계를 놓고 말하면 처음과 마지막은 그렇게 엄격한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해마다 첫눈이 오면 흥분해서 모멘트에 사진도 올리고 시도 쓰고 그런다.
그런데 자연의 계절은 년초에도 겨울이고 년말에도 겨울이다. 2020년을 례로 들면 사실상 올해 년초 겨울에 처음 내린 눈이 첫눈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2019년의 마지막 눈이라고 여긴다. 그리고는 오히려 2020년이 다 가는 겨울에 내리는 눈을 올해의 첫눈이라고 부른다. 눈은 그냥 기후 변화에 따라서 와야 되겠다 싶을 때에 왔을 뿐인데 우리는 거기에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하면서 의미를 부여한다. 요즘 류행어로 하면 “의식감”이다.
이렇게 같은 현상에 부여하는 다른 정감세계에 대해 제3자의 립장에서는 자기가 리해하기 나름이다. 같은 작품을 놓고 다른 평론가가 상반되는 리해와 주장을 펼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어떤 평론가는 항상 옳고 어떤 평론가는 늘 공격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각도와 립장과 견해와 주장이 다를 뿐이다. 평론은 작품성의 승격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한 작품의 개성을 문질러버릴 수 있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독자의 취향과 선택이 천차만별인 것도 마찬가지다. 다름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어느 개별적인 악플러에 맞춰서 글을 쓰지는 않는다. 여러번 퇴짜를 맞아 수정하다가 나중에 포기하고 제일 처음의 것을 다시 들고 갔더니 이제야 제대로 된 보고서가 나왔다고 칭찬하는 상사도 있다. 결국은 처음의 것이 마지막 걸로 돼버렸다. 이렇게 같은 내용도 다른 시간대에 다른 심정에서 만나면 상이한 결과를 낳는다.
영국이 모레면 정식으로 EU에서 탈퇴한다. 사실 8년전부터 나돌았던 얘기고 4년반전부터 본격 추진해서 드디여 현실화된다. 영원한 친구는 없나 보다. 이제 관광을 가도 EU비자와 영국 비자를 별도로 받아야 된다. 시작은 서로의 리익에서 출발했지만 결과는 나의 리익에서 마무리되였다. 영국이든 사람이든 시작이 좋다고 하여 끝도 원만한 건 아닌가 보다. 아무리 공리적인 심리가 없다고 해도 리해 관계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냥 잠시 가려졌을 뿐이다.
동물농장 프로에 보면 자기 꼬리를 물겠다고 끝없이 뱅뱅 돌아가는 강아지를 보게 된다. 천년만년 돌아도 결국에는 헛수고다. 그 꼬리가 어떻게 못나고 잘못했든 간에 결국에는 자기 몸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예 신경을 끄고 돌아보지 않기만도 못하다. 하물며 머리든 꼬리든 우리가 그렇게 명명했을 뿐이지 바꿔서 불러도 그 존재는 어디 가지 않는다. 결국 척추로 련결된 한 몸의 두 부분이다. 하물며 다른 강아지의 꼬리는 아무리 함치르르하고 탐스러워도 결국 남의 것이다.
년말 총화의 계절이다. 제일 싫은 게 이 절차다. 내가 멋있게 쓴다고 안 한 일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적게 말했다고 해놓은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굳이 본인의 입으로 여차여차한 일을 했다고 말해야 한다. 물론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내가 한만큼 객관적으로 개괄해놓는 게 총화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을 다른 사람이 들여다봤을 때도 그런 의미일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대공무사하게 오로지 조직을 위해 묵묵히 일했지만 어떤 이들의 눈에는 공리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고 눈치만 살펴가며 표가 나는 일만 골라서 했는데도 박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립장에서는 허무하고 김이 새는 일이지만 사람은 생각보다 일을 오래 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 어느 게 여우꼬리이고 어느 게 소꼬리인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여 있다. 필경 그걸 알아보는 머리는 꼬리보다 명석하기 때문이다.
주말에 공원에 갔더니 그 안에서 머물며 일하는 분들이 키우는 누렁이 한마리가 심하게 짖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들여다 봤더니 뒤에서 꼬리는 살살 흔들면서 입으로는 끊임없이 지저대고 있었다. 짖는 입과 흔드는 꼬리 사이에 무슨 련계가 있는 신호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친절하게 불러주면 고개를 쳐든 채 빤히 쳐다 보며 계속 꼬리를 흔드는 걸 봐서는 적의가 있는 짖음은 아니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리해하는가에 따라 마실을 나간 주인더러 빨리 오라는 부름일 수도 있고 오늘은 전날보다 사람들이 많이 보여서 외롭지 않다는 환영의 인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날따라 원래 기분이 울적했는데 운 나쁘게도 날아가던 새한테 변테러까지 당했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인데 이때 마당에서 난데없는 개까지 짖어댄다. 그러면 당시 기분에서는 개한테 돌을 던질 수도 있다. 보통 경우에 개가 짖는 건 적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짖지 않는 개가 문다는 견지에서 보면 침묵이 더 무서울 수도 있는데 말이다.
자초지종이라는 말이 있다. 조사연구가 없으면 발언권이 없다는 유명한 말도 있다. 책망조로는 꼬리대가리 없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밑도끝도 없다는 말도 있다. 공원 안의 강아지든 사회생활 속의 인간이든 다 사연을 안고 산다. 차분한 마음으로 알려고 하면 바늘 구멍도 보이고 화로 밀어붙이려 하면 눈은 떴어도 까막눈일 수가 있다.
꼬리와 머리는 다 몸체를 위해 존재하고 몸체를 통해 이어진다. 중간 상태를 떠난 량극은 존재의 기초도 없고 의미도 없다. 천재도 영재도 다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있어서 존재한다. 누가 처음이고 누가 마지막이라고 따질 필요도 없다.
머리부터 나와서 흔적 없이 사라지는 자연현상의 순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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