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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주 략력:
1986년 도문 량수 출생, 연변대학교 문학석사,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현재 연세대학교 시간 강사,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1. 시각적 이미지의 시대?
중국에서 녀성의 아름다움을 ‘전족’의 경우를 가지고 따진 시대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발을 비단 같은 천으로 꽁꽁 동여매고 가능하면 발을 작게 성장하게 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 전족은 남성의 성적 소유욕이 작용한 결과이다. 아프리카 호텐도트족들이 갖는 미녀의 조건은 유방의 길이라고 한다. 미인은 그 길이가 1미터쯤은 되여야 하는데, 아이를 업고 가다가도 등에 업은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있어야 했다. 물론 이 경우는 로동력이 그 종족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조건으로 변한 결과이다.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난파해서 한양으로 압송되는 서양인들을 보고 사람들이 ‘도깨비’라고 했던 기록도 있다.
전족의 시대나 어떤 종족의 ‘아름다움’ 또는 ‘잘생김’은 우리의 현대적 관점으로는 ‘더러움’ 또는 ‘못생김’으로 파악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나 잘생김 같은 미의 기준은 힘의 조건 또는 권력의 조건이라는 점을 알아차려야 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흉측하게 생긴 꼽추 콰지모도는 악의 상징이고, 아름답게 묘사되는 집시 에스메랄다는 선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선입견은 그 시대 대중들이 지니고 있는 그릇된 판단일 뿐이다. 이 소설은 악과 선은 그 모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부패와 대중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는 것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2. “아름답거나 잘생기면 다 용서된다?”
드라마에 낯선 이와 어깨를 부딪쳐도 상대가 잘생기면 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겸손을 떠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생김’에 약하다. 귀엽게 생긴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면 호들갑을 떨지만 두꺼비나 뱀을 보고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지는 않는다. 물론 동화책에 등장하는 악마나 질이 나쁜 주술사는 뱀이나 지네를 잘생긴 존재로 보기도 한다.
물건을 고를 때도 예쁘게 포장된 것을 고른다. 못생긴 것은 잘생긴 것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구매 의욕을 떨어뜨린다고 믿는다. 그래서 미디어는 끊임없이 잘생김을 소환하고, 이젠 개그맨조차 잘생기지 않으면 무대에 설 수가 없게 되었다.
예전에는 영화배우나 가수는 성형수술을 한 것을 숨겼는데, 이제는 대놓고 자신의 얼굴이나 몸에 ‘칼 좀 댔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외면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면의 아름다움은 잘 드러나지도 않고, 그 내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드물다. 왜 그럴까? 리유가 무엇일까? 혹시 사람들은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것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실천해 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닐까?
3. 잘생긴 ‘조선군’과 못생긴 ‘조선족’
한국 미디어나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군’과 ‘조선족’의 이미지는 ‘잘생김’과 ‘못생김’으로 량분화된다. 조선군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은 강동원(<의형제>, 2010), 김수현, (<은밀하게 위대하게>, 2013), 공유(<용의자>, 2013), 현빈(<공조, 2017), 정우성(<강철비>, 2017) 등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미남 배우들이다. 대체로 그들은 잘생기고, 아름다운 몸매를 지니고 있다. 더구나 그들은 특출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숨은 사연이 있는 멋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와는 달리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의 이미지는 대체로 ‘못생겼다’. 어둡고 칙칙하고 험상궂은 인물로 등장한다. <황해>(2010)에서 김윤식은 검정 선글라스에 텁수룩한 수염을 지니고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 짐승 뼈다귀를 들고 사람을 도륙하는 범죄자로 등장한다. <신세계>(2013)에서는 ‘연변거지’란 모욕적인 이름을 단 ‘못생긴’ 아저씨들이 나온다. 이들은 수염이 시커멓고 머리칼이 어수선하고 잔인하며 더럽다. 그런데 <범죄도시>(2017)에 조직폭력배로 등장하는 윤계상은 본디 잘생겼지만, 잔혹하고 소름끼치는 ‘못생긴’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의 오른팔이자 흑룡파 조직원 중 하나인 진선규는 빡빡이로 등장한다. <도굴>(2020)에서 조폭 두목으로 등장하는 리성욱도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은 가능한 ‘잘생김’을 숨기고 험상궂고 소름 끼치는 ‘못생김’으로 등장한다.
잘생긴 조선군들은 의리남, 순정남, 매력남으로 스토리를 이어가다가 결국 평화, 화해, 치유, 소통, 통일 등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이와는 달리, 못생긴 조선족들은 범죄자, 조직폭력배, 장기매매 등의 서사를 이어가다가 결국 정의에 의하여 소탕당하는, 지리멸렬하게 깨지는 운명을 맞이하는, 거지발싸개 같은 역할을 떠맡는다.
잘생김은 용서받고, 못생김은 원수가 된다. 잘생김은 끌어안고 포용 받아야 할 존재가 되지만 못생김은 차별받고 제외되는 이방인이 된다. 이분법적으로 대접받는 조선족은 분명 억울하다. 그래서 영화 <청년경찰>이 상영되였을 때 재한조선족 단체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은 그동안 한국 미디어에서 동포를 폄훼하고 악인으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잦아 조선족 이미지 외곡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영화가 조선족에 대한 ‘혐오표현’을 통해 그들의 이미지를 폄하시켰다고 인정해줬다. 다시 말하면 미디어가 조선족을 모두 못생겼다고 비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조선족은 분명 못생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4. 이분법이 지니는 비밀
모든 조선군이 잘생겼고 모든 조선족이 못생긴 것으로 나오는 건 아니지만, 미디어는 그 둘을 극단적으로 이분화시켰다. 왜 조선군은 과장된 ‘잘생김’으로 등장하고 조선족은 과장된 ‘못생김’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그 리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두 가지가 가능하다. 첫째로 ‘현실성’이고, 둘째로 ‘필요성’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성’을 설명하려면 간단하지 않다. 실제로 조선족들이 대림동 같은 지역에서 칼부림과 같은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분법에 숨어 있는 대답은 ‘필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조선군을 잘생긴 존재로 만들고, 그것에 대비시키기 위해서 조선족을 못생긴 존재로 내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허구이고 오류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름답고 잘생기면 다 용서된다”는 허황된 론리를 따질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는 그것을 역으로 리용하여 “용서하기 위해서는 아름답고 잘생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론리의 리면에는 “조선족은 못생겼으니까 포용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의미가 강하게 담긴다.
한국영화에는 한국인의 삶과 서사, 그리고 기억들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영화는 한국인들이 지닌 트라우마나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거나 드러낸다. 조선군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에게 ‘분단 트라우마’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분단 트라우마는 조선반도가 분단된 형태로 남아있는 한 그들이 끊임없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이 숙제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 분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는 통일을 어떻게 상상하고 포용해야 할 것인가? 통일은 가능할까?
그래서 그들은 대답해야 할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낀다. 이 분단 트라우마의 극복이라는 리념적 필요성에는 반드시 감성적 증오와 분노가 뒤따른다. 다시 말하면 조선에 대한 증오나 원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 대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감정이나 생각을 해소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그 감정을 림시방편으로 떠넘기는 방법이다.
첫째 방법이 바른 방향이다.
영화 <간 큰 가족>이나 <코리아>의 경우 사람의 통일로 분단의 장벽을 넘으려고 한다. 또한 <의형제>, <공조>, <공동경비구역 JSA> 등 영화는 제목만 봐도 공존과 소통 또는 화합을 통해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메시지를 시청자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하여 ‘잘생김’을 리용한다. 이왕이면 잘생긴 놈과 공조하고 싶고, 잘생긴 놈과 의형제를 맺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외모지상주의’ 욕망을 최대한 자극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 장벽 너머의 그 사람들이 잘생겼으면 좋겠고, 그래서 용서가 이루어진다고 바란다면 참으로 뜻깊을 수 있다.
문제는 둘째 방법이다.
이 방법은 증오와 원망을 다른 존재한테 떠맡긴다. 그리고 그것을 떠맡을 존재를 조선족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릇되고 어리석은 관점일 뿐이다. 왜 그러한가? 증오나 원한은 그 자체로 풀어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넘긴다면 반드시 되살아나고, 오히려 증폭되여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잘생긴 조선군으로 풀어낸 증오나 원한을 못생긴 조선족한테 떠넘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족을 한국인의 통일 프레임에 포함시키지 않은 짧은 소견이 문제가 된다. 한국영화 또는 여론을 이끄는 주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조선족은 ‘통일한반도’를 지향하는 물리적 령역권 밖의 존재라고 보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한민족이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정신적으로 ‘통일한반도’ 영역권에 귀속된다.
조선군과 조선족은, 한국인과 조선족은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존재가 아니다. 이미 분단 트라우마 이전에 리산과 식민 트라우마를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민족공동체이고 운명공동체이다.
식민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영화는 등장하는 족족 사랑을 받는다. <암살>, <밀정>, <동주>, <박열>, <봉오동전투> 같은 영화는 어느 정도 식민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 영화들의 배경 너머에 독립운동을 하며, 함께 피를 흘렸던 조선족의 이야기는 배제되여 있다. 그 서사에서 배제된 조선족은 분명히 한민족의 프레임 안에 소속된 아름답고 잘생긴 존재들이다. 한국영화나 그러한 력사의식을 지닌 주체들은 그것까지 관객들에게까지 전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군과 조선족은 증오나 원망 또는 과오를 서로에게 떠넘기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잘생김과 못생김으로 단순하게 나뉘는 이 이분법은, 겉으로 드러난 두 존재를 리간질 시킬 뿐이다. 어쩌면 력사 공동체이고 민족공동체인 우리 자신을 서로 리간질 시키려는 이 이분법의 비밀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 아직도 깊게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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