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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사가 정리한 <중국의 개혁, 개방사>
2012년 08월 08일 11시 37분  조회:2962  추천:0  작성자: 백화상조
중국의 개혁, 개방사

중국의 15억정도 되는 인구는 대단한 자원임과 동시에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은, 진, 한, 오호십육국, 수, 당, 송, 원, 명, 청,나라시대에 그들이 세계의 중심국가라고 했던만큼 아시아지역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중의 하나가 서양의 물문을 빨리 받아들임의 요인도 속할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로 닫혀있던 중국이 자유화 물결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대 중국의 개방·개혁의 진행과정과 홍콩반환후의 모습 후 변화된 중국의 모습을 알아 보겠다. 또한 이러한 기회를 통해 중국의 개방사를 알게해준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1.배경

1)개방전의 중국
♠1949년~1952년
1949년~1952년까지의 경제회복기를 통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한 후 1953년 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함으로써 소련의 스탈린주의식 개발전략인 '불균형 성장모델'을 모방하여 중공업 우선 발전 전략의 계획경제 체제를 채택하게 된다.

1949년 이전의 중국경제는 8년간의 항일 전쟁과 약 4년간의 국공내전으로 파탄상태에 있었으며 농촌은 극히 피폐되어 있었다. 1951년 평화적으로 태베트를 해방하고 나자 타이완과 진먼.횡후.마주등이 섬과샹깡.아오먼만을 제외한 중국대륙 전체는 통일이 되었다.

1950년 겨울부터 개혁.개방전의 중국은 우선재산 소유제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종전의 사유재산제를 폐지하고 사회주의 공유제라는 공유재산제를 도입하였다. 이는 중국농촌의 정치,사회.경제.사상에서의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대대적인 반혁명적 세력의 진압을 실행하여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전제정치를 공고히 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에서 내전이 폭발하였고,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이름으로 펑떠화이를 사령관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여 북한지원에 투입되었고, 1953년 7월 정식으로 정전협의가 타결되고 한국전쟁은 끝이 났다. 1950년과 52년사이에 중국에서는 정권의 안정분야에서 「공동강령」의 원칙에 따라 민주정치를 통해 지방의 각급 정권을 수립하는 동시에 위로부터 아래로 국가 기본제도로서의 인민대표대회 제도가 건립되었다. 이어서 국가기구의 편제를 정비하여 간소화하는 작업도 이어지게 되었다. 중화민공화국의 건국 후 중국정부는 소수민족 지구에 민족적인 자치구역 정책을 실행하여 민족의 평등.단결.공동발전을 실현한 것이다.

1951년 겨울부터 다음해 봄에 국가기관과 경제부문, 각 기업과 사업의 단위마다 반부패, 반낭비, 반관료주의를 추방하는 '3방운동'을 전개하는 정치를 해나가기 시작하였고, 1952년 중국 정부는 국유화과정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불법적인 개인기업가들을 소멸해 버리기 위해 '5반운동'을 전개한다. 이때는 또한 농업과 기타 중요한 농·공업 생산성과는 모두 역사상 최고기록을 초과하고 있으며, 국내외무역도 모두 신속한 회복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1953년~1957년
1953년 중국은 계획적으로 대규모의 근대화를 향한 발전에 착수했는데, 그 발전 방침은 중국공산당이 제출한 '과도시기의 총노선'이라는 것이었다. 즉, 마오쩌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개조를 기본적으로 완성하기까지는 하나의 과도시기이다. 이 과도시기에서의 당의 총노선과 총임무는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할 것이며, 기본적으로 국가의 공업화와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적 상업의 사회주의에로의 개조를 실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53년~57년)이 소련의 도움으로 실시되었다. 이 계획은 농·공업의 연평군 성장률은 11.9%에 달하였고, 그 가운데 공업은 연 18%, 농업은 4.5%, 경공업은 연 12.9%, 중공업은 25.4%의 성장률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1차5개년 계획 동안 중국지도자들은 노동력 활용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집약적 공업투자에 치중하여 실업문제가 야기되었고, 농업부문의 성장률을 저하시켰으며 국제수지 불균형의 문제를 악화시켰다.

1954년은 제1계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고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켜서, 중국이 법치국가로 나가는 중요한 지표가 제시되었다.

1955년 런따 제2계 제2차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 병역법」과 법규.조례를 통과시켜, 인민군의 의무병역제, 계급제, 봉급제를 실행하여 인민군 정규화의 중요한 조치와 지표를 마련했다. 여름이후로는 개체농업과 수공업과 자본주의적 상공업을 사회주의로 개조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급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56년에는 농촌지역에서는 토지개혁, 농업합작화, 농촌인민공사등의 방식을 통하여 소유제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도시에서는 국민당정부가 운영하던 공영기업은 몰수, 사영공상기업은 '공사합영'으로, 개인수공업은 '합작화'방식으로 소유제를 개조하여 사유재산제도를 기본적으로 폐지하였고 해마다 공유제의 비중을 높여 갔다.

1957년 2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전국에 5백만 이상의 지식인들이 있는데, 그가운데 10%이상은 우파라고 추산하여, 재능있는 지식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을 제거하였다.

♠1958년~1960년
1958년에는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는 것이 목표였고 모택동은 농.공업 분야의 침체일소와 비약적인 발전을 목표로 한 2차5개년 계획(1958~62년)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노동력이 조직화되어 농촌지역에서는 '농촌인민공사'가 조직되었고 농촌의 집체화를 통한 '정사합일'체제가 확립되었다.

농민의 재산은 모두 인민공사에 헌납하여 공동소유로 하였고 생활은 남녀 공동 합숙소에서 생활하였는데 1959년부터 3년간의 홍수, 가뭄, 해충등의 자연재해로 인하여 농업생산량이 격감하는 등 실패를 맞게 되었다.

1960년7월 소련정부는 갑자기 일방적으로 몇 백개에 달하는 계약을 철회하고, 자연재해로 인하여 60년에서 51년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참고]집체소유제 : 사회주의적 전민소유제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적 성격을 가지는형태.

♠1961년~1965년
대약진운동은 많은 문제점들을 남기고 실패함에 따라 중국 당국은 대약진 정책을 수정하였는데, 모택동이 후퇴하고, 등소평이 전면에 나서서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1962년말이 되자 상황이 많이 호전되면서 농업생산력과 생산 수준도 더이상 하락하지 않았다.

1963년에서 65년까지 다시 지속적인 조정이 있어서 공업총생산은 국민소득과 국가재정수입, 주요농업, 공업 생산량에 있어서 1957년을 초과하였다. 이에따라 경제적 장려제도가 부활되고 정권수립 후 처음으로 농업부문의 성장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자유시장제가 도입되고 전문관료와 기술자의 경영 참여가 허용되었으며, 농업생산성이 향상되는 등 정책은 비교적 성공적이어서 중국경제는 급속히 회복되었다. 하지만 모택동이 권력회복을 위하여 유소기와 등소평을 주자파로 몰아 처절한 권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경제상황을 마비시키게 된다.

♠1966년~1976년
문화대혁명시기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이 당시의 실세 권력자인 유소기. 등소평등 소위 실무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일으킨 문화적 정풍운동으로 시작 되어 모택동과 그 추종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1975년 당시 총리인 주은래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 기술의 '4개현대화'를 제시하였고, 주은래 및 모택동의 사망후 화국봉이 이를 승계 추진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은 등소평 집권 후 중국을 개혁.개방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1976년 9월9일 사망한 모택동이 후계자로 지명한 화궈펑은 명백히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다. 화궈펑은 요즘의 강택민처럼 당시 중국공산당 주석 중앙군사 위원회 주석, 국무원 총리 등 당·정·군의 최고위직을 모조리 독점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강택민이 최고 실력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회의의 막후 실력자는 따로 있었다. 11기 3중전회는 덩 샤오핑의 뜻대로 진행됐고, 덩샤오핑의 뜻에 따라 개혁개방 정책이 결정됐다.

화궈펑의 집권시 중국공산당은 66년부터 76년까지 10년동안 계속 된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의 어수선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홍위병들 이 중국 대륙 전역을 누비며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문화대혁명은 76 년 1월8일저우언라이(주은래)총리가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종말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4월5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베이징 중심부의 천안문광장에 홍위병 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의 손에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모하는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시민들은 잠시후 자신들이 가 져다놓은 꽃다발을 치워버리려는 공안경찰 인민해방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에는 1만여명의 공안경찰과 인민해방군이 출동, 곤봉으로 광장에 모여있던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해 해산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1차 천안문사태였다.

9월9일에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7월6일에는 주 더가 세상을 떠났다. 중국공산당 1세대를 이끌던 세 개의 '큰 별'이 잇달아 떨어진 것이었다.

10월6일 중국공산당은 화궈펑에게 당중앙 주석과 당중앙 군사위원 회 주석을 맡기는 결정을 내렸다.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명한 화궈펑이 무력을 쥐고 있는 예지엔잉 당시 국방부장과 잘 '협의' 한 결과였다. 10월14일 중국공산당은 4인방이 '분쇄'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화궈펑은 당·정·군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국면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인방을 분쇄해놓고도 문화대혁명은 찬양하는, 헷갈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요즘도 중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베스트셀러 '교봉'은 "4인방이 없는 문화혁명이 계속되던 시기" 라고 표현, 중국 지도자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그런 분위기에서 77년 7월에 열린 제10기 3중전회는 등소평을 당 부주석과 중앙군사위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로 복권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군을 쥐고있는 예지엔잉이 "덩샤오핑 동지 같은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적 손해"라면서 복권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1977년~1978년
1978년 10개년 경제개발계획을 확정하고 급속한 발전을 추구하는 급진정책을 계획하였다. 농업의 기계화 및 120개의 대형 프로젝트건설 추진 등 중국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킨다는 의욕적인 계획으로 부족한 자본과 기술을 서방이나 일본으로부터 도입하겠다는 방침이었으며 '양약진'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비현실성으로 경제를 더욱더 어렵게 하였으며, 농업생산량은 저조하였고, 경공업투자부족으로 생필품은 품귀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경제를 중시하는 실용주의노선 표방과 양약진 추진 동안 실무파들의 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1978년 12월 당 11기3중전회에서는 사회주의 현대화,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의 기본방침이 채택되어 등소평 노선이 확정되고 1979년 4월 중앙공작회의에서 '조정.개혁.정돈.향상'의 신팔자 방침을 채택함에 따라 중국은 모택동의 계속혁명론을 포기하고 혁명보다는 경제 건설에 치중하는 실용주의 노선에 의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중국 경제개발전략의 변화와 특징> 기 간
부분간 우선순위
기술선택
지원수단
유인체계

1차5개년 계획기(1953~57)
중공업, 경공업, 농업
자본집약적
대규모 소련원조
물질적유인

대약진기(1958~65)
중공업, 경공업, 농업
노동집약적
소련원조 중단 자력 갱생
비물질적 유인

경제조정기(1961~65)
농업, 경공업, 중공업
자본,노동집약적
자력 갱생
물질적요인

문화대혁명기(1966~76)
중공업, 농업, 경공업
노동집약적
자력 갱생
비물질적요인

2)중국의 개혁,개방후
♠농업개혁시기(1979년∼83년)
경제개혁을 농촌에서부터 시작한 이유는 첫째가, 중국최대 다수의 인구인 70% 이상이 농촌에 거주하였고 농민과 농업문제가 중국혁명과 건설의 근본 문제이다.

둘째로, 농촌인민공사 체제는 실행과정에서 생산효율의 저하로 농업생산의 정체를 가져와 중국 경제발전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었다.

'농업생산 책임제'는 생산대 소유의 토지를 여러종류의 청부생산제하에 분배하는 방식으로 토지는 여전히 공유제이나 농민이 자주적으로 생산 및 경영하도록 하는 거이다. 1980년 중국정부는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농업생산 책임제를 실시토록 하여 2~3년 후에는 약 90%이상의 생산대대에서 농가생산 책임제가 시행되었다. 또한 이중 경영체제를 수립하여 집체경영과 개인경영을 다같이 중시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농촌경제개혁은 1980년대 중반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도시상공업개혁시기(1984년∼88년)
도시를 중심으로 한 개혁으로서 1984년 10월 당 12기 3중전회에서 경제개혁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채택하였다.

첫째로, 기업의 활성화를 중심 고리로 하여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는 자주권을 확대시키며, 기업경영과 관리방식을 개혁하여 공장장에게 생산.일반관리 권한을 주고 기업활동의 전반에 걸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공장장책임제가 실시되었다.

둘째로, 시장메커니즘의 제한적도입으로 상품가격과 노무가격의 왜곡과 가격체제를 조정 개혁하였고, 셋째로는 기존의 경제체제하에서 국가가 기업의 관리라는 미시적 경제활동에 따라 거시적 경제 관리 업무에 소홀히 하였던 바, 거시경제 조정체계를 수립.건전화시키는 일이다.

넷째는 공유제를 주체로 한다는 전제하에 다양한 소유제경제를 발전시키고, 마지막으로는 국가.집단.개인간 그리고 중앙과 지방간의 합리적인 국민수입분배국면을 형성한다.

♠치리정돈시기(1988년∼91년)
1988년 봄 가격개혁의 실시단계에서 소매몰가의 폭등으로 인플레이션심리가 만연되어 상품 사재기, 예금인출등의 사태가 발생하였고, 하반기에는 물가가 상승하여 '경제환경에 대한 처리, 경제질서에 대한 정돈'이라는 조정정책을 실시하였다. 1989년 6월 천안문사태를 계기로 주도권을 장악한 보수파는 정권 및 테제 불안의 비상시국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치리정돈'정책을 이용하여 비교적 안정되었다. 또한 1991년에는 북경 아시아게임의 성공적 개최로 유리하게 작용되었고, 1991년 8월3년간의 긴축정책을 종결하였다.

♠개혁심화·개방확대시기(1992년∼1997년)
1992년 등소평은 개혁.개방의 확대와 심화를 독려하는 내용의 소위 '남순강화'를 발표하였고, 이를 위하여 경제발전을 가속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이 담화는 1992년 2월 당 중앙 2호 문건으로, 1992년 3월 당정치국 전체회의에서 당 중앙 4호 문건으로 구체화 되어졌다. '남순강화'의 '개혁.개방 가속화'요구 내용은 당 14기 전국대표 대회에서 그대로 수용되어 경제운용 기본노선의 근간이 되었으며, 현재 중국이 추진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탄생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경제체제 개혁에 있어서 국유기업의 경영체제를 시장 대응형으로 전환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였으며, 대외개방에 있어서는 '4년개방'으로 불려지는 전 방위 지역 개방과 무역, 금융, 백화점 등 3차 산업을 개방하고, 무역체제 개혁을 통한 시장개방작업을 추진하였다.

강주석과 주부총리는 '상해방'은 연고지인 상해를 향후 95계획의 중점발전지역으로 밀어붙여 광동성등 다른 연해지역과 내륙지방의 반발을 샀으며, 특정지역에 대한 편파적인 특혜라는 분위기가 지도부내는 물론 다른 지방에 팽배해 있었다. 등시대에는 지방에 대폭 경제권한을 위임하는 방임자세를 취했지만 3세대 지도자들은 중앙의 권위강화가 바로 체제의 안정과 지결된다는 판단에서 위임권한의 회수에 전력하였다. 즉, 95계획안은 각 파벌과 지방세력이 자기의 이익을 위한 힘겨루기 이며 장기발전전략보다는 지역적인 파당권익만이 반영되는 비효율적인 타협안이었다.

♠개혁·개방 연표
▲77년 7월=덩샤오핑 복권
▲78년 12월=11기 3중전회에서 4개 현대화노선 채택
▲79년 1월=미국과 수교
▲79년 2월=리셴녠,계획경제를 위주로 시장경제를 보조수단으로 하는「주보론」수립
▲79년 6월=제5기 전인대 2차회의,「조정·개혁·정돈·제고」현대화8자 방침 결정
▲80년 8월=선전 주하이 산터우 경제특구 지정
▲84년 10월=제12기3중전회,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경영 사태로 자오쯔양 총서기실각.장쩌민 총서기 취임
▲91년 3월=국민경제·사회발전 10개년계획(1991~2000)발표
▲92년 2월=덩샤오핑,남순강화로 개혁·개방 촉진
▲92년 10월=당 14전대회,「사회주의 시장경제」표현 결정
▲93년 3월=헌법개정안 채택
▲93년 6월=주룽지 국무원 부총리,인플레억제책 시행
▲94년 7월=회사법,대외무역법 제정.주룽지 제1부총리 경제대권 장악
▲97년 9월=세계은행, 2020년 중국 GDP규모 미국,일본이어 세계3위 전망
▲98년 3월=주룽지 총리 취임

3)중국의 이론 피라미드
'사회주이 초급단계론'이 전체의 기본을 이룬다. 그리고 사회주의이기는 하나 아직 생산력이 낮은 초급단계에 처해 있는 중국에서 채택해야 할 목표노선으로서 이 하나의 중심과 두 기본점이 제출되었다. 그 내용은 경제건설이 모든 활동이 중심목표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본 노선이 네가지 기본 원칙과 개혁.개방의 견지라는 것이다. 지금하나의 중심과 두 기본점이 목표하는 바는 경제발전 수준을 낮은단계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점에 있어서는 경제건설이 지상명제이고, 그 방법론은 네가지 기본원칙으로 공산당 독재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개혁.개방으로 경제발전을 꾀한다고 한다.

2.중국의 개혁, 개방후

1)등소평사망에 따른 중국
등소평<1904∼1997>의 죽음은 중국경제에 대혼란 사태는 오지 않았다. 중국경제는 등소평이 없어도 자생력이 있으며, 정권승계되 이미 다 이루어진 상태여서 강택민체제가 갓 출범한 정권이 아니기 때문에 큰 혼란은 없었다. 오히려, '세계 최대의 개발도상국'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고, 등소평에 이어 개방정책기조를 그대로 이어받는게 확실했다.

새 정권은 과거의 계획경제로 되돌아가진 않을 것이다.되돌아가면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개혁 그 차체가 빚은 급격한 사회변화도 다른 불안 요인으로 지적된다. 국영기업 효율화 등의 여파로 실업자 1억명 이사이 발생, 대거 도시로 몰려들고 있어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또한 등소평이 평소 시장 경제의 '필요악'이라고 지적해온 빈부차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관료의 부패와 권한 남용에 대한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강택민 주석을 비롯한 3세대 후계지도자들은 고도성장 위주의 등소평 노선으로 인한 부작용을 시정하는 차원으로 인플레억제, 지역간 경제격차 해소,농업중시,국유기업 활성화등의 정책을 적극실시,등이후 시대의 체제안정을 확보하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등소평
등소평은 중국을 부국을 향한 시장경제 사회로 개방한 인물로서 위대하다. 1980년 이후 등소평이 제시한 중국의 3단계발전전략은 주효했다.

첫단계로 1980년부터 1990년까지는 GNP를 2배로 성장하여 의식주를 해결하고, 두 번째 단계로 1991년부터 2000년가지는 GNP를 두배로 늘려 개발 도상국가의 중간 정도로 끌어올리며, 마지막 단계로 21세기의 중엽까지는 중국을 현대화한다는 것이 등소평이 미국 기자들에게 한말이었다. 키도작고 서방경제에 그리 해박해보이지도 않는 부도옹등소평이 이런 구상을 발표하면서 중국의 GNP를 4배로 성장하여 1인당 GNP 1,000달러인 제2단계를 2000년에 마무리짓겠다고 할 때에 믿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등소평의 구상을 5년이나 앞당겨 1995년에 달성하여 세계7위의 경제 대국이 된 위대한 날, 위대한 국민이라 할 수 있다.

등소평이 개혁이전이 중국은 전형적인 계획경제국가였다. 상품소매가격의 97%를 국가가 결정했고, 공업용 원자재 출고가격의 100%를 국가가 결정했다.

그러나 등소평의 개혁 정책 추진이후 1994년 중국 상품 소비가격의 국가 결정론은 7.2%로 줄어들었고, 국가가 가격을 지도하는 부분이 2.4%로, 중국이 시장경제에 가격을 자유화시킨 비율은 물 90.4%가 되었다. 공업용원자재도 국가가 가격을 결정하는 부분은 14.7%, 국가가 가격을 지도하는 부분은 5.3%로 시장에서 자유롭게 가격이 결정되는 부분이 80%로 늘어났다. 이쯤되면 완전 개방이라고 해도 좋다.

등소평의 개방과 개혁 정책이 수행되면서 1995년가지 중국에는 10만개에 이르는 각종시장이 생겨났다. 이 중 농산물 도매 시장이 2100여개, 공업용 도매 시장이 600여개, 생산품 원자재 시장이 800여개, 그리고 소규모 상업 체인망은 무려 1천 400만개나 늘어났다. 이리하여 1995년 현재 중국은 시장 상품 가격 지배율이 90%가 넘는 국가가 되었다. 대외개방은 4개의 연해 지역에서 경제 특구와 해남 대특구라는 이름으로 시험적으로 시작되었다. 4년 후에는 대외개방 경제 특구가 열 네 곳으로 늘어났다. 1985년에는 양자강과 주강, 그리고 민남의 세 삼각주로 개방했다. 이어서 1988년에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그리고 환발해 지역을 개방하여 연해 지역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였다. 뒤이어 중국은 장강 내륙14개 도시를 개방하여 연해 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국경 지역에 이르는 전 중국 개방을 단행했다.

2)홍콩반환
♠영국의 홍콩강점
홍콩은 원래 광동성, 신안현에 속하며 주강구 연해의 작은 어촌이다.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은지 10여년후 청조가 태평천국(1853-1864)의 난에 의해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아편무역을 합법화하기 위해 1856년 10월 광주의 황포에서 청조 관헌이 영국 국기를 걸고 있던 중국인 소유 상선 "애로우호"에 타고 있는 해적을 체포하자 영국의 광주주재 영사는 이 배는 영국선이라고 우기며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프랑스와 공동 출병, 1957년말 광주를 침략하여 소위 '제2차 아편전쟁'을 발동했다. 1858년 5월 영불 연합군이 천진 입구의 대고의 포대를 함락하자, 청조 함풍제(재위 1851-1861)는 영국·프랑스와 각각 <천진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후에 이를 내심 반대한 청조의 공격에 후퇴당했던 영불은 다시 1860년 7월 2만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9월 천진을 점령, 명·청간의 번영을 상징했던 북경 근교의 황궁 원명원을 철저히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10월 북경을 함락, 청조를 굴복시켜 각각 <북경조약>을 체결했는데, 영불은 이 <북경조약>에서 <천진조약> 일체를 다시 인정받아 천진을 추가로 개항시키고, 또 영국은 홍콩섬 맞은편 '구룡사지방'(현재 구룡반도 남부의 계한가 이남의 영토)을 할양받고, 영불 연합군은 군사비 배상으로 각각 800만냥을 받기로 결정했다. 한편 러시아는 이 강화를 중간에서 조정한 대가로 1858년의 <아이흔조약>에 이어 1860년 11월 <북경조약>에 의거 동북지역인 흑룡강 이북의 영토와 우수리강 이동의 연해주 및 쿠릴열도(사할린)를 포함한 100만㎞²의 광대한 영토를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획득했고, 이후 19C말까지 서북지역의 51만 Km2를 또 획득해 갔다. 그외에도 중국은 상해로부터 서쪽으로 양자강 상류까지의 주변 일대는 영국의 세력하에, 대만과 복건성 및 만주와 한반도는 일본 지배하에, 산동 일대는 독일의 세력하에, 만주 위쪽과 외몽고·내몽고 일대의 긴 북쪽지역은 러시아의 세력하에, 그리고 남쪽 광동·광서·해남도·곤명 일대는 프랑스의 세력하에 각각 배타적으로 편입되었다.

게다가 1895년 청이 중일전쟁 패전이후 열강이 다투어 중국에게 '조차'를 요구할 때, 영국은 1898년 6월 9일 다시 홍콩 부근을 광동일대의 프랑스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북경에서 중·영<전척향항계지전조>란 것을 체결하여 지금 심천 이남의 신안현의 심천하 이남과 구룡반도 계한가의 이북지구의 넓은 지역과 이 부근에 속한 235개 도서를 99년간 조차해 갔다. 후에 이 중국대륙과 연결된 지역을 '신계' 즉,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칭해지게 되었는데, '신계'의 빌리는 기간은 1997년 6월까지로 했다. 위의 모든 할양받은 지역과 빌린 지역을 합쳐 간단히 '홍콩'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신계' 지역은 홍콩 전체 면적의 92%를 점할 정도로 크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댓가로 어떤 보상도 받은 바 없다. 이처럼 힘없는 중국은 완전히 제국주의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 떨어지게 되고 열강은 엄청난 이익을 중국을 포함해 전세계로부터 탈취해 간 것이다.

♠홍콩중국에 반환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됨에 따라 중국대륙은 50년동안 1국가 2체제(일국양제)유지를 약속을 했지만, 적지않은 홍콩인들과 외국자본이 해외로 빠져 나갔으며, 중국정부가 상하이등 연안도시들을 무역항으로 집중육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홍콩이 '자유항'으로써의 이점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을 하였지만, 반환이 된 후 증시는 좋았고, 부동산 경기 또한 좋았다. 즉, 경제력만 놓고 보면 홍콩은 중국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것이다. 중국의 자본이 홍콩으로 진출하였고, 중국과 화안이 합작으로 설립한 은행도 생겨났으며, 홍콩의 부족한 인력난을 인건비도 싼 중국 출신 인력이 매워졌으며, 문화적 동질성까지 공유하여 홍콩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3.중국의 개혁, 개방 후 문화
현대 중국인의 색생활은 아침 일직 북경의 거리를 나가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거리 곳곳에 있는 유조 또는 유배라 불리는 밀가루 음식과 조로 쑨 죽 또는 두장을 사서 먹거나 집으로 가지고 가서 먹는다. 점심 또한 마찬가지이고, 저녁은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서 먹지만 현대 생활에 그럴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북경을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에는 외식 산업이 성업중이다.
중국의 노점상들은 현대화를 정돈된 도시로 파악하는 정부정책에 밀려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이 그렇듯 국가도 세금 걷기에 불리한 노점상을 고깝게 볼 리가 없다. 더욱이 공산화 50주년을 맞아 가로사업을 대대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노점상들의 어려움은 적지 않다. 또한 개방과 함께 할인마트인 '까르프'의 중국식 표기인 지아러프는 '가정에 기쁜 복'이라는 특유의 감각으로 만들어진 신조어다. 한국에서 '이마트'나 '킴스클럽'으로 알려진 대형할인마트는 중국 대도시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아러프의 성공이후 '홈클럽'이라는 할인마트가 생기는 등 종류도 다양해 졌다. 이곳도 한국의 할인마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가전제품에서 식료품까지 모든 것을 구비해 놓고 있다.

백화점, 이제는 시들어가지만 그래도 천진은 중국에 여행온 여행객들이 쇼핑을 위해 들리는 곳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건이 싸고, 종류가 많은 곳이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대형백화점과 거리시장이 있는 '빈장다오'(濱江道)다. 이곳은 중국을 대표하는 쇼핑공간중에 하나다. 특히 빈장다오의 거리를 타고 길게 뻗어있는 노점상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거리상점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중국공산화 50주년을 맞아 완전히 현대식 상가로 변모했다. 우선 좌판 자체가 금지되면서 상점들이 완전히 상가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규모에서의 위용은 잃지 않아, 지금도 거대한 상가가 밀집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남대문을 생각나게 한다.

중국에서도 백화점은 이미 쇄락해가는 조루현상을 보이고 있다. 할인마트 등 가격이나 질에서 급격하게 도전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화점은 모든 제품이 안정적인 품질로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할인마트와는 변별력을 갖고 운영되고 있다.

중국에서 이혼율은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최근들어 급증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신장된 여권과 여성의 고등교육화로 인한 결혼 필요성 감소, 경제적 독립이 늘어가면서 더욱 심해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4.중국의 현시점
1999오늘의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이 설계하고 장쩌민이 시공하는 새로운 역사적 실험이 진행중이다.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실험은 자주 대신 개방을,투쟁대신 개혁을 새로운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자본주의는 경쟁이나 투쟁이 아닌 협력과 모방의 대상이며 부의 축적은 전체보다 개인이나 소집단에 의해 선도될 수 있다는 참으로 혁명적인 발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1997년 말 기준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60달러에 달해, 사상처음으로 '저 소득 국가(785달러 이하)'에서 벗어나 '중등소득 국가(786∼3125달러)'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국민총생산(GNP)도 1조달러를 돌파, 국가별 순위에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이어 7위 에 올랐다.
지난 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채택이래 중국의 발전은 실로 눈부시다. 79년부터 97년까지 중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9.8%에 달한다.

지난 78년 대외무역액은 206억달러로 세계 27위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난해는 3251억달러를 기록, 10위로 껑충 뛰어올랐다.78년 1억 7000만달러에도 못미쳤던 외환보유고는 97년말 1399억달러로 불어나, 일본에 이어 세계 2위가 됐다. 여기에 홍콩의 외환보유고(928억달러)를 합치면 중국은 외화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된다. 세계의 투자가 중국으로 몰리고 있다는 얘기다.

문화혁명의 대혼란에서 벗어나 경제 건설을 국가 제1목표로 설정 한 뒤, 12억 중국인들은 20년만에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경제 기적' 을 이룩했다. 이들의 고도 성장세는 이미 한국을 추월한지 오래이고, 세계경제강국의 대열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97년 여름부터 아시아를 휩쓴 경제위기에도 끄덕하지 않고, 올해 8%에 육박하는 성장을 이룩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무서운 '성장의 관성'은 향 후 수년 동안 쉽게 무너질 것 같지도 않다.

여기에다 주룽지(주용기)정부는 올 초 국유기업과 정부개혁, 금융개혁 등 3대 개혁과제를 설정하고, 3년내에 이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이에 따라 올 한해 국유기업과 정부부문에서 수많은 실업자가 쏟아져나오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주룽지 정부는 개혁 드라이브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다.

이미 중국은 일부 품목에서 세계 제1, 2위의 '공장'이 돼 있다. 컬러TV의 경우 중국은 세계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차이홍 캉자 등의 전자업체는 세계적인 TV수출업체로 발돋움하고 있다. 냉장고 에어컨 VCR VCD 컴퓨터 등 중급기술 제품들도 생산능력 과 기술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시멘트도 중국이 최대 생산국이며, 화학비료는 세계 2위이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연간 소득 1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이 3000만명에 달하고, 3000달러 이상의 중산층이 1억에 달하는 엄청난 내수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이 거대시장은 외국인 투자를 부르는 가장 큰 흡인력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대중국 투자의 감소세를 말하기 도 하지만, 이 시장을 외면할 기업은 별로 없다. 이에따라 21세기에 도 중국의 '세계 공장' 역할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북대태평양과기발전센터는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된 1,2,3층 수천평 매장은 IBM, 컴팩, 삼성,LG등 외국유명 업체와 리엔샹 베이다팡정등 국내 업체들로 가득차 있으며, 2002년까지 이 건물 옆에 20층짜리 ‘연구개발빌딩’이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은 전시-계약-판패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미래 정보산업의 메카가 될것이다.

군사면에서 중국은 21세기에도 지속적인 군사력 강화를 추진할 것이지만,'경제 우선'의 원칙에 따라 '다극화'와 '평화공존'의 외교 노선을 견지할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은 그동안 '경제를 먼저 발전시키면,군사 현대화도 가능하다'는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내부적으로 군사 현대화에 박차를 가해왔다. 중국은 이 군사력을 '전쟁 억 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경제를 '중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당분간 국가 에너지를 몰두할 것으로 예상된다.

급속한 경제발전 혜택이 중국 전지역에 골고루 미치지 못했다.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21세기 첨단산업과 우마차를 이용하는 운송수단스카이 라인이 화려한 도시와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는 농촌이 공존하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부유 도시에는 호화 빌딩과 호텔들이 즐비하고 승용차가 자전거전용도로를 점령할 정도로 급증한 반면 이에 비례해 매연과 범죄,매춘,노동착취,마약문제도 폭증했다.

중국인들은 모든 사람이 가난한 것은 참아도, 불평등한 것은 참지 못하는 심리가 있다. 지역간의 지속적인 경제불균형은 사회불안요소로 이어질 수 밖에없다. 따라서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부연해지역과 서부내륙지역의 경제 격차를 해소하는것이 시급하다.

5.중국과 우리나라
지난해 홍콩에 대해서는 100억 달러의 흑자를, 중국에 대해서는 28억 달러의 흑자를 보았다. 2000년에는 홍콩과의 교역규모는 250억 달러, 중국과의 교역규모는 450억 달러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따라서 이중 홍콩으로부터는 230억 달러의 흑자를, 중국으로부터는 30억 달러의 흑자를 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교역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00년에는 중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 의존도가 26.3%, 2005년에는 33.4%, 2010년에는 39.9%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중국과 홍콩을 합칠 경우 우리 수출의 17.4%를 차지해 미국을 제치고 최대시장으로 부상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이는 한국의 대 중국 의존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향후 중국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통찰하고 대 중국정책을 펴나가야 한다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의 생산력과 홍콩의 자본·기술·관리·마켓팅 능력등이 합쳐지면 곧바로 한국 제품과의 경쟁범위가 확산될 것이 예상되고 해외시장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며 우리의 최대 경쟁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더구나 중국은 매년 유치되는 외자가 400억 달러에 이르러 한국의 외자유치가 시작된 1962년부터 1995년까지 투입된 외국자본 총액인 180억 달러와 비교할 때, 중국 1년간 외국인의 투자액이 30여년간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투자액 보다도 2배 이상 많다는 놀라운 점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홍콩 사이의 관계는 날로 긴장될 것으로 전망되므로 한국은 제품의 가격·품질·기술면에서의 경쟁력 제고와 합리적인 기업운영, 국제경쟁력 및 협상능력 제고, 정부의 올바른 경제정책, 정치적 신의와 역량증대 등으로 중국과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반드시 중국과 선린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강화해 남북한의 힘을 집중·단결하고 경쟁력을 제고해서 우리의 대 중국 경쟁능력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6.중국의 미래성
중국은 지난 96년 3월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21세 기 '중국경제 청사진'이라 할 수 있는 '9·5계획과 2010년 장기목표 요강(이하 요강)'을 채택했다. 이 '요강'은 제9차 5개년 계획기간 (1996년∼2000년) 동안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8%로 유지하고, 오는 200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지난 80년의 4배 수준(약 1000달러)으로 끌어올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2010년까지는 국민총생산(GNP)을 2000년의 2배로 배증시킨다 는 계획이다. 이에 앞서 지난 87년 중국은 '3단계 발전 전략'을 통 해 21세기 중반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중진국 수준(약 4000달러)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결국 중국은 1인당 국민소득을 2000년까지는 1000달러로, 2010년까지는 2000달러로 끌어올려 '소강(약간 여유가 있음)'을 실현한다 는 계획이다. 한국과 대만 등이 이미 여러해 전에 달성한 경제 목표를 중국은 21세기중반까지의 과제로 설정한 셈이다. 하지만 '요강'에는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중국인들의 경제적 욕구만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요강'은 중국의 '전통적인 계획경제 체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과 경제성장 방식을 '조방형'에서 '집약형'으로 전환한다는 2개의 체제전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전자는 '생산관계'의 개혁을, 후자는 '생산력의 발전'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울러 '요강'은 농업에서부터 교통운수 통신 에너지 기계 전자 석유 자동차 건축 등 각 산업 분야와 과학기술 교육 국유기업 개혁 등 장기 개혁 과제를 설정하고 있다. 경제구조의 근본을 바꾸고, 사 회 모든 부문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이다

중국은 최근까지 연평균 12%의 경제성장률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2010년까지 8~9%, 2020년까지 8%의 성장을 지속한다면 2020년의 중국은 국민총생산이 미국을 능가하여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불과 앞으로 20년이면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정부는 전국토를 벤처기업과 첨단지식경제의 동부, 자원공급지역인 서부, 서부개발을 지원하고 동부의 산업을 이어주는 중부를 각각 특색있게 개발한다는 전략하에 전국토 3분대게발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목표는 건국100주년인 2050년까지 8,000-1만달러 수준까지 끌어 올려 부강하고 문명하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중국경제가 세계경제호조, WTO가입,확대재정정책 효과 등에 힘입어 올해를 기점으로 상승기조로 전환될 것이라는 중장기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 중국의 미래는 그러나 온통 장밋빛만은 아니다. 향후 수 년간 중국지도자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실업과 정치 민주화 문제가 될 것이다. 2000만명을 넘는 실업자들은 생존권 확보를 위한 시위에 나서는 등, 이미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불안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들의 불만은 대학생 지식인 기업인 등의 정치 민주화 요구 와 결합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 주도의 정치체제를 고 수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길게 보면 중국은 한 세기 전 서구 열 강의 '반식민지' 상태로부터, 21세기를 앞두고 세계사의 전면에 다 시 등장하는, '100년만의 대반전'을 이룩했다. '중국의 세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7.에필로그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한국의 속담이 있다. 정말 중국은 10년 동안에 1인당 국민 소득을 2배로 올린 세계의 유일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통계에서 보면, 일본은 35년이 걸렸고, 미국은 50년, 한국은 17년이나 걸린 것을 중국은 단 10년에 달성한 나라이다.

그들의 15억인구의 힘은 이렇듯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좀더 잘 살기 위해 개방을 택한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힘을 발휘하였다.

요즘 내가 느끼는 중국은 모든 물건에 MADE IN CHINA로 새겨 놓았다. 즉 그들은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여 모든 물품의 공급의 기지가 되어버린 듯 하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욱 더 심화 될 추세일 것이다. 21세기의 중국은 중국인 자신들만 자기 나라에서 먹고 입고 사는 시대가 아니라, 중국인이 만든 모든 제품이 전 세계인에게 공급되는 시대일 것이다. 거기다가 세계제일의 자유무역을 자랑하는 홍콩까지 포함하니 그거대한 땅과 거대한 노동력이 나는 부러울 수 밖에 없다.
내가 중국인에게 바라고 싶은 점이 있다면, 잠시나마 회사에 머무르고 있던 시절 중국과 거래를 하였는데, 행동이 타국에 비해 좀 느리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좀더 민첩해 지는 것과 더불어 우리나라와 중국간의 사이에 있는 북한과의 관계가 평화와 번영을 함께 달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최대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끝으로, 중국에관한책과, 홈페이지등의 자료등이 무수히 많은 것을 보고 놀랐고, 사회주의로만 인식하고 있던 나에게 중국의 개혁·개방사는 중국의 새로운 면을 보는사고전환의 기회를 주었다.


 

출처: 서적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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