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http://www.zoglo.net/blog/sy10088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사회단체

나의카테고리 : 문화경전

사계전서(沙溪全書) 상례비요(喪禮備要)-2
2012년 08월 10일 15시 02분  조회:3224  추천:0  작성자: 백화상조
사계전서(沙溪全書) 제32권
상례비요(喪禮備要)-2
성복(成服)
성복의 제구(諸具)
최상포(衰裳布) : 참최(斬衰)에는 아주 거친 생포(生布), 자최(齊衰)에는 그다음 거친 생포, 기년(朞年)에는 그다음 생포, 대공(大功)에는 조금 거친 숙포(熟布), 소공(小功)에는 조금 고운 숙포, 시마(緦麻)에는 아주 고운 숙포를 쓴다. 한 사람마다 포백척(布帛尺)으로 35, 6자씩을 준비하는데, 베의 폭이 좁아서 폭을 이어야 하면 52, 3자로 한다.
효건포(孝巾布) 및 관량포(冠梁布) : 각기 입는 복에 비하여 조금 더 고운 것을 쓴다.
관량(冠梁)의 종이 : 두꺼운 종이나 배접한 종이를 쓴다.
영무포(纓武布) : 자최 이하는 각기 입는 복에 비하여 조금 더 고운 것을 쓴다.
중의포(中衣布) : 새[升]의 수는 입을 복과 같이 한다.
대나무 : 참최의 상장(喪杖)감이다.
오동나무 : 자최의 상장감이다. 《가례집설(家禮集說)》에 의하면, 오동나무가 없으면 버드나무를 대신 쓴다고 하였다. 대개 버드나무[柳]는 유(類)의 뜻을 갖고 있으니, 이는 오동나무[桐]가 동(同)의 뜻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곧 칡[葛]이 없는 고장에서 칡과 비슷한 경(顈)을 쓰는 의미이다.
띠풀[菅] : 혹은 볏짚도 쓴다. 참최와 자최의 신[屨]감이다.
삼[麻] : 부장기(不杖朞)의 신감인데, 참최의 부인도 같다.
노[繩] : 혹은 삼베도 쓴다. 대공의 신감인데, 장기(杖朞) 이하의 부인은 삼베를 같이 쓴다.
부인의 최상포(衰裳布) : 남자의 최상포에 준한다.
개두포(蓋頭布) : 남자의 관량포에 준한다.
두수포(頭 布)
죽목잠(竹木簪) : 소렴(小殮) 조에 나온다.
시자(侍者)의 옷감 베 : 조금 거친 생포(生布)이다.
바늘[針]
실[線]
 
남자의 복제(服制)
상복을 마를 적에는 손가락자[指尺]를 쓴다. -수질(首絰)ㆍ요질(腰絰)의 둘레가 9치 또는 7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살피건대, 상의(上衣)의 몸체를 베 두 폭을 쓰고 소매 역시 두 폭을 쓴다고 한 것은, 예전에는 삼베 폭이 반드시 2자 2치이기 때문에 세로와 가로의 방정(方正)을 취하자는 뜻에서였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삼베는 폭이 아주 좁아서 반드시 폭을 이어 써야만 옷에 몸이 들어갈 수 있고 소매에 손을 꽂을 수 있는 동시에 세로와 가로의 방정을 취하는 제도에 들어맞을 수 있다. 어떤 이는 폭을 이어 쓰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나, 이는 통달하지 못한 논리이다.
상의[衣] : 삼베 두 폭을 각각 4자 4치로 마르되, 정수(正數) 외에 솔기의 여분으로 양쪽 끝을 똑같이 1치씩 남긴다. -아래에서도 모두 같다.- 각 폭을 절반으로 접어서 길이 2자 2치의 앞뒤 두 쪽을 만들면 두 폭을 합쳐서 모두 네 폭이 되는데, 앞의 두 쪽과 뒤의 두 쪽을 접어서 금을 내어놓고 나서는, 먼저 뒤의 두 쪽을 봉합하되 윗부분 4치는 꿰매지 않은 채 남겨둔다. 그러고 나서 앞뒤의 네 쪽을 포개어 네 겹을 만든 다음, 곧 꿰매지 않고 남겨두었던 부분에서 가로로 4치를 마름질하여 들이고 이를 다시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나누어 접어서 각각 두 어깨 위에 씌우면 좌우의 적(適)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벽령(辟領)이다. -부판(負版) 1치씩을 꽂는다.- 이미 마르고 난 것을 접어서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하고 나면 그 앞뒤와 좌우의 빈 곳이 각각 사방 4치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활중(闊中)이다.
소매[袂] : 삼베 두 폭을 쓰는데, 역시 각기 4자 4치로 말라서 상의의 몸체 길이와 같게 한다. 이를 절반으로 접으면 역시 2자 2치가 되는데, 이를 각기 상의의 몸체 좌우에 봉합한다. 잘라 내지 않은 온폭을 또 각기 그 끝에 봉합하여 소매를 만든 다음, 또 소매의 끝을 아랫부분 1자만 봉합하고 윗부분 1자 2치를 남겨두어 소맷부리[袂口]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소매통[袪]이다.
동정[加領] : 별도로 길이 1자 6치, 너비 8치의 삼베를 쓰는데, 세로로 접어서 절반으로 나눈 다음, 그 아래쪽 절반은 두 끝을 각각 사방 4치씩 잘라 버리고 중간의 8치만 남겨 두어서 그것을 뒤쪽 활중(闊中)에 씌우고, 그 위쪽 절반은 전체 1자 6치를 잘라 내지 않은 채 베의 중간을 목 위에서 좌우로 나누어 맞접은 다음, 앞으로 드리워 앞쪽의 활중에 씌운다.
깃[袷] : 동정 밑에 씌우는 것으로, 길이 1자 6치, 너비 1자 4치의 삼베 한 가닥을 쓴다. 이것을 쪼개어 세 가닥으로 만든 다음, 두 가닥은 동정에다 덧대고 꿰매어 앞쪽 활중에 씌우고 한 가닥은 가로로 접어 두 겹을 만들어 뒤쪽 활중에 씌우고 나서 모두 동정을 붙이면 곧 세 겹이 된다. 양씨(楊氏)가 이른 바 ‘세 가닥으로 나누어 깃에다 붙이되, 남음도 모자람도 없이 딱 알맞게 한다’는 것이다.
대하척(帶下尺) : 세로로 된 높이 1자의 삼베를 위로 상의에 붙인 다음, 가로로 허리에 두르되 허리의 너비를 기준으로 삼는다.
임(衽) : 양 겨드랑이 밑에 붙이는 자락인데, 각기 삼베 3자 5치를 쓴다. 아래위로 1자씩 남겨두고는 그 사방 1자 외에, 위로는 왼쪽 가장자리에서 6치를 마름질하여 들이고 아래로는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6치를 마름질하여 들인 다음, 1자 깊이가 끝나는 부분에서 서로 마주 향하여 비스듬히 마름질하고 나서는 다시 그 두 가장자리를 좌우로 마주 포개어서 상의의 양 옆[傍]에 붙여 꿰매어 아래로 드리우면 마치 제비꼬리와 같이 되는데, 이것으로 치마의 양쪽 가장자리를 덮는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소(疏)에 “참최의 임(衽)은 앞자락이 뒷자락을 덮고 자최의 임은 뒷자락이 앞자락을 덮는다.” 하였다.
최(衰) : 길이 6치, 너비 4치의 삼베를 왼쪽 옷자락 앞의 심장이 있는 부분에 붙여 꿰맨다.
부판(負版) : 삼베 사방 1자 8치를 깃 아래 등에 해당되는 부분에 붙여 꿰매어 드리운다. ○ 오복(五服)의 상복 솔기는 모두 바깥쪽으로 나오도록 꿰매며, 다만 참최는 가장자리를 감치지 않고 자최 이하는 모두 감치되 바깥쪽으로 펴서 낸 다음 실로 꿰매어 고정시킨다. -《의례》에 나온다. ○ 대공 이하는 부판ㆍ벽령ㆍ최가 없다. 살피건대, 《의례》에는 오복에 모두 최ㆍ부판ㆍ벽령이 있고 《가례(家禮)》에는 대공에서 비로소 이 세 가지를 없앴다. 그러나 오늘날 예를 행하는 자들은 양씨의 설에 이끌려 비록 조부모 및 아내의 상이라도 쓰지 않으니, 이는 예의 본뜻이 아닌 듯하다. 마땅히 《가례》를 바른 것으로 삼아야 한다.
옷고름[衣繫] : 곧 소대(小帶)이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네 가닥을 안팎의 옷깃에 붙여 꿰매어 옷깃이 서로 여며지도록 한다.
상(裳) : 앞쪽은 세 폭, 뒤쪽은 네 폭인데, 앞뒤의 것을 서로 잇지 않고 폭마다 세 첩(㡇)의 주름을 잡는다. 주름을 잡는 방법은 매 폭의 위끝을 손가락으로 조금 들어올려 오른쪽으로 접고 또 조금 들어올려 왼쪽으로 접어서 양쪽이 서로 맞닿게 한 다음 실로 꿰매어 고정시키고, 그 속은 비워두어서 주름을 만드는데, 이처럼 세 번을 한다. -《예기보주(禮記補註)》에 의하면, 최상(衰裳)의 주름은 맞닿는 부분을 바깥쪽으로 나오게 하므로, 복건(幅巾)의 주름과는 같지 않다.- 치마의 길이는 편의에 따라 마르며, 또 너비 4, 5치의 삼베를 세로로 접고 앞뒤 일곱 폭에 붙여서 양쪽으로 꿰맨 다음, 허리를 한 바퀴 돌려 묶도록 하고, 양끝에 끈을 단다. ○ 오복에서 치마의 솔기는 모두 안쪽으로 넣어 꿰매며, 다만 참최의 경우는 가장자리를 감치지 않고, 자최 이하는 가장자리를 감치되 안쪽으로 말아 들여서 실로 꿰매어 고정시킨다. -《의례》에 나온다.
중의(中衣) : 곧 옛날의 심의(深衣)로, 그 제도는 습(襲)조에 보이며, 최(衰)를 받쳐 입는 것이다. 더러는 중단의(中單衣)의 제도를 쓰기도 하는데, 나쁠 것은 없다. 살피건대, 비록 참최라 하더라도 심의는 역시 삼베로 선을 두른다.
관(冠) : 풀먹인 종이를 재료로 쓴다. 너비는 3치, 길이는 정수리의 앞뒤를 씌우기에 넉넉하도록 한다. 삼베로 싼 다음 세 첩의 주름을 잡되, 대공 이상은 모두 오른쪽으로 향하도록, 소공 이하는 모두 왼쪽으로 향하도록 접어서 세로로 꿰매는데, 이를 벽적(襞積)이라 한다. 무(武)는 참최에는 삼끈으로 만들고 자최 이하에는 삼베로 만드는데, 이마 위에서 벽적에다 묶고 나서 뒤로 돌려 목 뒤에서 교차시킨 다음 앞으로 돌려 오다가 각기 귓가에서 묶는다. 굴관(屈冠)의 양쪽 끝을 무 안으로 넣은 다음 다시 바깥쪽으로 접어서 무에다 꿰매는데, 이를 외필(外畢)이라 한다. 무의 나머지는 아래로 드리워 갓끈을 만들어서 턱 밑에서 묶는다.
수질(首絰)
요질(腰絰) : 수질과 요질은 소렴조에 나온다.
지팡이[杖] : 대나무 지팡이인데, 높이는 가슴과 가지런하며, 밑둥치가 아래로 가게 짚는다. 오동나무 지팡이도 마찬가지인데, 깎아서 위쪽은 둥글고 아래쪽은 모나게 한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지팡이의 굵기는 질(絰)과 같이 한다.” 하고, 그 주에 “질은 요질(腰絰)을 말한다.” 하였다.
신[屨] : 《의례》 상복에 “참최의 간구(菅屨 띠풀로 삼은 신)는 간비(菅菲)인데, -띠풀이 없으면 짚으로 대신한다.- 외납(外納)한다. -끄트머리가 바깥으로 나오게 엮은 것이다.-” 하였고, 또 “소최(疏衰 자최)에는 소구(疏屨 거친 삼으로 삼은 신) 또는 표괴(藨蒯 풀로 삼은 신)를 신는다.” 하였으며, 또 “부장기(不杖朞)에는 마구(麻屨)를 신는다.” 하였다. 《예기》 상복소기에는 “자최 삼월의 상과 대공의 상에는 모두 미투리[繩屨]를 신는다.” 하였다. 《의례》 상복의 주에 “소공 이하는 길구(吉屨)에 신코를 꾸미지 않는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의하면, 자최에는 풀이나 삼으로 하되 마무리하고 남은 풀 끄트머리를 거두어 안쪽으로 향하게 하고, 대공에는 삼베를 쓰며, 소공에는 흰 삼베를 쓴다.
효건(孝巾) : 오복(五服)의 복인(服人)과 시자(侍者)들이 쓰는 것이다. 살피건대, 예(禮)에는 대머리인 사람은 최건(縗巾)을 쓰고 그 위에 수질(首絰)을 쓰게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 풍속에는 으레 상관(喪冠) 밑에 효건을 쓴다. 이는 비록 예의 본뜻은 아니지만 《가례의절》에도 있는만큼 풍속을 따르더라도 무방하다.
방립(方笠)
생포 직령(生布直領) : 모두 출입할 때에 쓰는 것인데, 비록 옛 제도는 아니지만 풍속을 따르는 것이 역시 좋다.
 
부인(婦人)의 복제
최(衰) : 삼베의 새[升] 수 및 마르는 제도는 모두 남자와 같다. 다만 대하척(帶下尺)이 없으며, 또 임(衽)도 없다.
상(裳) : 삼베 여섯 폭을 세로로 엇갈리게 찢어서 열두 폭을 낸 다음, 심의의 상(裳)과 같이 상의에 붙여 꿰맨다.
수질(首絰)
요질(腰絰)
효대(絞帶) : 이상은 모두 소렴조에 나온다. ○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가례》에 남자의 최복(衰服)은 순전히 고제(古制)를 썼으나 부인의 것은 고제를 쓰지 않았고, 아울러 질(絰)과 대(帶)의 문구도 없으니,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마땅히 예경(禮經)을 옳은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지팡이[杖] : 남자와 같다. -이상은 모두 《의례상복도식(儀禮喪服圖式)》에 나온다.- ○ 어떤 이는 《가례》에 의거하여 대수(大袖)와 장군(長裙)을 만들기도 한다.
대수(大袖) :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오늘날 부인의 단의(短衣)처럼 통이 크고 길이는 무릎까지 내려가며, 소매의 길이는 2자 2치이고, 제도는 남자의 최의(衰衣) 제도에 준한다.” 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곧 우리나라의 장삼(長衫)이다.” 하였다.
장군(長裙) : 구준이 말하기를 “삼베 여섯 폭을 열두 폭으로 마름질한 다음 잇달아 치마를 만들되, 그 길이는 땅에 닿게 하며, 제도는 남자의 최상(衰裳) 제도에 준한다.” 하였다. 《국조오례의》에 “곧 우리나라의 상(裳)이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가례》를 살펴보니, 부인의 복제는 《서의(書儀)》에 근본하여서 대수 이하는 모두 고제가 아니므로, 지금 특별히 요질 한 조항을 보충해 넣었다. 이는 예에서 남자는 머리에 중점을 두고 부인은 띠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가장 중점을 둔 것을 남겨두어서 뒷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통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개두(蓋頭) : 구준이 말하기를 “상의와 치마보다 조금 고운 삼베를 쓰는데, 모두 세 폭으로, 길이는 몸체와 같게 한다. 참최에는 가장자리를 감치지 않고 자최에는 가장자리를 감친다.” 하였다.
포두수(布頭 )
죽목잠(竹木簪) : 모두 괄발조(括髮條)에 나온다.
신[屨] : 《의례상복도식》에 “명문(明文)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남자와 같은 듯하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참최와 자최에는 마혜(麻鞋), 장기(杖朞) 이하에는 삼베, 소공 이하에는 흰 삼베를 쓴다.” 하였다. ○ 《국조오례의》에 “모두 흰 면포로 만들되, 시비(侍婢)는 흰 가죽으로 만든다.” 하였다.
배자(背子) : 구준이 말하기를 “중첩(衆妾)의 경우 배자로써 대수(大袖)를 대신하며, 길이는 몸체와 같게 하고 소매를 짧게 한다.” 하였다. 《국조오례의》에 “곧 우리나라의 몽두의(蒙頭衣)이다.” 하였다.
 
동자(童子)의 복제
예에 동자는 8세 이상이라야 복을 입게 되어 있다. ○ 살피건대, 《예기》에 “동자는 관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오늘날 풍속에서 두건과 수질을 씌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 ○ 《의례》 상복의 소에 “동자는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서동자(庶童子)이다.” 하였다. 《예기》 문상(問喪)에 “동자라도 당실(當室 가장(家長)이 됨)의 경우에는 문(免)을 하고 지팡이를 짚는다.” 하였으니, 이는 적자(嫡子)를 이름이다. 당실의 동자는 비록 어리더라도 최복으로 싸 안고 있고 지팡이도 둔다. ○ 《예기》 상복소기에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는 딸이 부모상을 당했는데 남자 형제가 없어서 지팡이를 짚지 못할 경우, 시집가지 않은 딸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는다.” 하고, 그 주에 “남자 형제가 없기 때문에 동성(同姓)을 대신 상주로 삼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옥조(玉藻)에 “동자에게는 시마복(緦麻服)이 없고, 당실의 경우에만 시마복이 있다.” 하고, 또 잡기(雜記)에 “동자는 슬피 울지도 않고, 발을 구르지도 않고, 지팡이도 짚지 않고, 짚신을 신지도 않고, 여막에 거처하지도 않는다.” 하였다. 대덕(戴德)은 이르기를 “예에서 성인이 되지 않은 자에 대한 복제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성인이 되지 않은 자는 마음을 한곳으로만 쓸 수 없기 때문이요, 복을 입을 수 있는 자 또한 금지하지 않은 것은 제도로만 처리하지 않고 오직 그 능력에 맡기자는 것이다.” 하였고, 초주(譙周)는 이르기를 “동자도 소공 이상은 모두 본친(本親)의 최복을 입는다.” 하였고, 유울지(庾蔚之)는 이르기를 “예에 일컬은 동자란 똑같은 것이 아니니, 내가 볼 때는 당실이란 바로 8세 이상의 예를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당실이기 때문에 성인과 같은 것이다.” 하였고, 사자(射慈)는 이르기를 “8세가 되지 않은 자가 가까운 친족의 복을 입을 경우에는 삼베 심의가 예의 본뜻에 맞을 듯하다.” 하였다. ○ 혹자는 이르기를 “모든 복은 반드시 서로 갚는 것이므로, 장자(長者)가 동자에게 삼상 체감(三殤遞減)의 제도가 있는 이상, 동자도 장자에게 역시 그 복을 체감해야 한다.” 하였으나,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시자(侍者)의 복제
《의례》 상복의 소에 “사(士)는 신하가 없기 때문에 종이나 머슴 등이 신하 노릇을 하는데, 조복(弔服)에다 마대(麻帶)를 더한다.” 하였다.
효건(孝巾)
환질(環絰) : 이 제도는 괄발조(括髮條)에 나온다.
요질(腰絰) : 제도는 효대(絞帶)와 같으나, 그 둘레는 환질에 비하여 5분의 1을 줄인다.
생포의(生布衣) : 제도는 세속의 직령(直領) 또는 중단의(中單衣)와 같다. ○ 시비(侍婢)는 구준(丘濬) 《가례의절》의 중첩(衆妾)의 복제를 따라야 한다.

그 이튿날,
대렴의 이튿날이자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살피건대, 양씨가 이르기를 “비록 대렴은 마쳤더라도 자식 된 마음에 차마 제 어버이가 죽었다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차마 서둘러 성복을 하지 못하고 반드시 나흘이 되고 나서야 성복을 한다.” 하였으니, 이 설에 의거할 때 대렴과 성복을 같은 날에 병행해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이 더러는 염구(殮具)가 미비하다 하여 사흘이 지나서 대렴을 하고는 이어서 그날로 성복을 하기도 하는데, 예의 본뜻을 너무 잃은 처사이다.

오복의 복인들이 각기 자신의 복을 입고, -대공 이상으로서 요질(腰絰)을 풀어 늘어뜨린 자는 묶는다.

들어가서 제 위치에 나아간 뒤에는 조곡(朝哭)을 하며,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부인은 마루의 제 위치로 나아가 남쪽을 윗자리로 하여 곡하고, [《의례상복도식》에 ‘마루 동쪽에서 서면(西面)한다.’ 하였다.] 장부(丈夫)는 문밖의 제 위치로 나아가 서향하여 북쪽을 윗자리로 하고, 외형제(外兄弟) [주에 ‘이성(異姓)으로서 복을 입는 자이다.’ 하였다.] 는 그 남쪽에 있는데 남쪽을 윗자리로 하며, 손님은 그 뒤를 이어 나아가 북쪽을 윗자리로 하되 문 동쪽에서는 북면하여 서쪽을 윗자리로 하고 문 서쪽에서는 북면하여 동쪽을 윗자리로 하며, 서쪽에서는 동면하여 북쪽을 윗자리로 한다.[소(疏)에 ‘외빈(外賓)의 위치에서는 다 곡이 있다.’ 하였다.] 주인이 제 위치에 나아가면 문을 여는데[辟], [주에 ‘벽(辟)은 연다[開]는 뜻이다.’ 하였다.] 부인은 가슴만 치고 곡은 하지 않으며, 주인이 매 방면에 있는 손님을 향하여 절을 세 번씩 하고 나서, [주에 ‘먼저 서쪽에 절하고, 이어 남쪽과 동쪽에 절을 한다.’ 하였다.] 오른쪽으로 돌아 문으로 들어와서 곡을 하면 부인은 발을 구른다. 주인은 마루 아래에서 동서(東序)를 대하여 서면하고, 형제들은 모두 제 위치로 나아가되 문밖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다.[주에 ‘형제로서 자최ㆍ대공인 자는 주인이 곡을 하면 따라서 곡을 하며, 소공ㆍ시마인 자도 제 위치로 나아가서야 곡을 한다.’ 하였다.] 경(卿)과 대부(大夫)는 주인의 남쪽에 서 있고, 제공(諸公)은 문 동쪽에서 앞으로 조금 더 나간다.[주에 ‘손님들이 모두 이 위치로 나아가면 이에 슬피 곡하고 나서 곡을 그친다.’ 하였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남자는 영구(靈柩)의 동쪽에서 서향하고 여자는 영구의 서쪽에서 동향하되, 각각 복의 경중으로 차례를 정한다.” 하였다.

의식에 따라 서로 조문한다. -《가례의절》에 “모든 자손은 조부(祖父) 및 제부(諸父)의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서 슬피 곡하고, 또 조모(祖母) 및 제모(諸母)의 앞에 나아가 앞서와 마찬가지로 한다. 여자는 조모 및 제모의 앞에 나아가 곡하고는 드디어 조부와 제부의 앞에 나아가 남자의 의식과 같이 한다. 주부(主婦) 이하는 백숙모(伯叔母)의 앞에 나아가 곡하되, 앞서와 마찬가지로 한다.” 하였다.
 
[주D-001]의례 상복의 소 : ‘동자하이부장(童子何以不杖)’ 조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이다.
 
 
복제(服制)
1. 참최 삼년(斬衰三年)
남자 : 아버지를 위해 입는다. -《의례》 상복에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는 딸이나 시집갔다가 돌아와서 집에 있는 딸이다.” 하였다.- 맏손자로서 아버지가 죽어서 할아버지 또는 증조할아버지나 고조할아버지를 위해 승중(承重)한 자가 입는다. -살피건대, 《통전(通典)》에서 하순(賀循)이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어서 아직 빈(殯)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할아버지의 복은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서막(徐邈)은 이르기를 ‘기년이 되어 복을 벗고 나서는 소복(素服)으로 제사에 임하여서 심상(心喪) 3년에 의하여 3년을 마친다.’고 하였다.] 빈을 한 뒤에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다. 또 살피건대, 《의례경전통해(儀禮經典通解)》에서 송민구(宋敏求)가 의론하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삼년상 안에 죽고 맏손자가 할아버지를 승중하는 경우는 예령(禮令)에 그 문구(文句)가 없습니다. 대저 밖으로 장례를 치르고 안으로 영위(靈位)를 받들어 소상과 대상, 그리고 담제를 지냄에 있어 주제(主祭)하는 자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장례를 인하여 다시 참최를 제정하여 삼년복을 입도록 해야 합니다.” 한바,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는데, 지금의 복제에는 이를 빼버렸으므로 맏아들이 아버지의 상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죽은 시기가 소상 전이면 맏손자로서 승중을 한 자가 소상 때에 복을 이어받아 입고 소상 후이면 심상을 입도록 함으로써 모두 3년을 나고 복을 벗도록 하였다. 또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아버지가 죽고 없을 경우 어머니를 위하여’라는 구절의 소(疏)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3년 안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는 그대로 기년복을 입고, 아버지의 복을 벗고 나서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는 어머니에게도 그대로 삼년복을 입을 수 있다.” 하였는데, 이는 3년 안에는 자식 된 자로서 차마 그 어버이가 죽었다고 여기지 못하는 뜻이다. 어머니에게나 할머니에게나 의당 다를 바가 없으므로, 한편에서는 다시 참최를 제정해야 한다고 하고 한편에서는 기년복을 그대로 입어야 한다고 한바, 《의례경전통해》에 모두 기록해 두었으니, 어느 것을 좇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는 큰 절목(節目)이어서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 없으므로, 우선 그 설만 붙여두어서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아버지가 후사가 될 맏아들을 위해 입는다. -관직은 해면(解免)하지 않는다. 《예기》 잡기에 “아버지가 맏아들을 위하여 지팡이를 짚고 있다면 그 맏아들의 아들은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가지 못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할아버지는 손자를 싫어하지 않으므로 맏아들의 아들도 지팡이를 짚을 수는 있으나, 다만 할아버지와 같은 곳에서는 지팡이를 짚을 수 없다.” 하였다. 금제(今制)와 국제(國制)에서는 강복(降服)하였다. 《의례》 상복의 소에 “할아버지ㆍ아버지ㆍ자기에 걸친 3세(世)는 곧 맏아들을 위하여 참최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승중을 하였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 있으니, 첫째는 정통의 혈통이 승중을 할 수 없는 경우로, 적장자가 폐질(廢疾)이 있어서 종묘의 주관을 감당할 수 없는 때이고, 둘째는 승중자가 정통의 혈통이 아닌 경우로,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때이고, 셋째는 혈통이기는 하나 계통이 바르지 못한 경우로,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를 삼은 때이고, 넷째는 계통은 바르지만 혈통이 이어지지 않은 경우로, 맏손자를 세워 후사를 삼은 때이다.” 하였다. ○ 살피건대, 소에 “남의 아들을 입양하여 후사를 삼은 경우도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 하였다.
부인 : 시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이 승중을 하였을 경우 따라서 입는다. -살피건대, 승중손이 조부모의 상을 당하면 그 아내는 당연히 남편을 따라 복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그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와 이를테면 증손 또는 현손이 승중을 하여 증조부모 또는 고조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그 어머니와 할머니와 아내가 입을 복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제각각이다. 그러나 고례(古禮)에 며느리는 시부모에 대해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던 것을, 송(宋)나라 때에 와서 위인포(魏仁浦)의 상주(上奏)로 인하여 비로소 시부모에 대해 입는 복은 자최이건 참최이건 일체 그 남편을 따르되, 승중도 똑같도록 하였던 것이다.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이굴(理窟)》과 주자(朱子)의 《가례》에서도 당시 임금의 제도와 함께 남편을 따라서 입는다고는 하였으나, 시어머니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는 아무 설도 없다. 그렇다면 숭중자의 아내가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도 그럴 성싶지 않거니와, 증손과 현손의 아내 역시 남편을 따라 복을 입는다는 데는 의심이 없다. 가령 승중의 증조부가 죽었는데, 그 조모 및 어머니가 다 살아 있을 경우 그 조모는 응당 시부모에 대해 삼년복을 입을 것이요, 그 어머니도 아무리 아들에게 승중은 시켰더라도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이미 승중을 한 이상, 남편이 비록 죽었더라도 역시 복을 입는 것이 옳을 성싶다. 퇴계(退溪)도 일찍이 《예기》 상복소기의 “혈연 관계를 따라서 복을 입는 자는 따랐던 사람이 비록 죽었더라도 복은 입는다.”는 한 단락을 인용하여, 아주 정확한 논리인 듯하다고 하면서, 다만 그 남편이 아직 승중을 하지 않은 채 일찍 죽은 경우에는 또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남편이 남의 후사로 양자를 갔을 경우 아내는 따라서 입는다. ○ 남편을 위하여 입는다.
계후자(繼後子) : 양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아들이 없이 죽은 자에 대해 그 아내가 3년 안에 후사를 세웠을 경우 양자로 들어온 그 아들이 소급하여 복을 입는 절차, 이를테면 단(袒)ㆍ괄발(括髮)ㆍ성복(成服)은 일체 초상과 같이 해야 한다. 《통전(通典)》에 “소상 뒤에 양자로 들어온 자의 경우 저 상(喪)에서는 비록 강쇄(降殺)하였어도 자신의 막중한 임무는 이제 시작이다. 예제를 다시 바꾸고 달수를 멀리 잡는 것이 의리상 무에 나쁘겠는가. 그리고 지난날에는 방존(旁尊)으로서 복이 한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그의 아들이 되어 예제(禮制)의 가장 중한 데에까지 이르러 경중(輕重)이 너무도 현격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이어 계산하여 3년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승중손이 양할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다. -증조할아버지ㆍ고조할아버지의 승중손도 같다. 《의례》 상복의 소에 보인다.
첩 : 군(君)을 위하여 입는다. -군은 남편이다. ○ 이상은 금제(今制)와 국제(國制)가 같다. ○ 첩이 남편의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에 며느리가 시부모에 대해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으므로, 첩이 남편의 친족에 대해 입는 복도 여군(女君 적실(嫡室))과 같았는데, 송(宋)나라 때에 와서 시부모의 복을 올려서 삼년복으로 하였다. 《가례》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따라 행했으므로 첩의 복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의례》에 이미 여군과 같다는 문구가 있는 이상 첩이 남편의 부모에 대해 입는 복 역시 삼년복으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금제(今制)】
남자 :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는 딸 및 시집갔다가 돌아와서 집에 있는 딸도 같다. ○ 계모(繼母)를 위하여 입는다. ○ 자모(慈母 자기를 길러 준 서모(庶母))를 위하여 입는다. ○ 양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 서자가 생모(生母)를 위하여 입는다. ○ 맏손자로서 아버지가 죽고 없을 때 그 할머니ㆍ증조할머니ㆍ고조할머니를 승중할 경우에 입는다.
부인 : 남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이 승중하였을 경우 따라서 입는다. ○ 서자의 아내가 남편의 생모(生母)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이 남의 후사로 양자를 갔을 경우 따라서 입는다.
계후자 : 양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 승중한 손자가 양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 금제 이하는 모두 국제에 없다. 살피건대, 이것은 비록 당시 임금의 제도이기는 하나 지금에 와서 다 따를 수는 없고, 우선 실어두기나 하여서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국제(國制)】
남자 : 군사(軍士)로서 삼년복을 원하는 자는 들어준다.

2. 자최 삼년(齊衰三年)
남자 :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첩의 아들이 적모(嫡母)를 위해서도 같다. 국제도 같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에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하였는데,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상소(上疏)하여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에도 삼년복을 입기로 한바, 송나라 때에도 그대로 따랐다. 《가례》가 당시 임금의 제도를 따른 것이므로 지금은 마땅히 주자의 것을 따라야 하나, 그 뒤에 나온 정론(定論)은 예경(禮經)을 정례(正禮)로 삼은 것이다. 시집가지 않은 딸 및 시집갔다가 돌아와서 집에 있는 딸도 같다. ○ 《의례》 상복의 소에 “아버지가 죽은 지 3년 이내에 어머니가 죽을 경우 기년복을 그대로 입고, 아버지의 복을 벗은 뒤에 어머니가 죽을 경우 이에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다. 《통전》에서 두원개(杜元凱)가 말하기를 “만약 아버지를 장사하고 나서 어머니가 죽은 경우라면 어머니에 대한 복을 입는다.……” 하였다.[중상(重喪)을 벗기도 전에 경상(輕喪)을 당할 경우의 조항에 나온다.] 살피건대,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殯)도 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죽을 경우, 현재 상태를 차마 고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통전》의 “아버지를 빈하지 않은 상태에서 할아버지의 복을 입게 되면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유추하여 어머니에 대해 기년복을 입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 아버지의 상(喪)을 마칠 무렵에 또 어머니의 상을 당한 경우라면 역시 아버지 상의 3년 이내라 하여 그대로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 없어 일단 제설(諸說)을 덧붙여두는 바이다.- 사(士)의 서자(庶子)는 그 어머니에 대해 똑같이 삼년복을 입으나, 아버지의 후사가 될 경우에는 강복(降服)한다. -국제에는 없다.- 맏손자로서 아버지가 죽고 없어서 할머니ㆍ증조할머니ㆍ고조할머니를 승중한 경우에 입는다. -할아버지 또는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강복한다.- 계모(繼母)를 위하여 입는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강복하고, 계모가 집을 나갔을 경우에는 복이 없다.- 자모(慈母)를 위하여 입는다. 서자에게 어머니가 없어서 아버지가 자식 없는 다른 첩에게 명하여 자기를 기르도록 한 경우를 말한다. -이상은 국제도 같다.
부인 : 시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남편의 계모를 위해서도 같으며, 첩의 아들의 아내가 남편의 적모(嫡母)를 위해서도 같다. 시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는 강복한다.- 남편이 승중하였을 경우 따라서 입는다. -증조할머니와 고조할머니를 위해서도 같으나, [《의례상복도식》에 나온다.]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에는 강복하고, 남편이 남의 후사가 된 경우에는 따라서 입으며, 승중하였을 경우에도 따라서 입는다.[참최조에 나온다.] 어머니가 후사가 될 맏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예기》 상복소기에 “어머니는 장자를 위해 삭장(削杖)을 짚는다.” 하였다. 《의례》의 소에 “남편의 생존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것 역시 3세(世)를 계승한 장자(長子)이다. 금제와 국제에서는 강복하였다. 아래에서도 같다.- 계모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다.
첩 : 군(君)의 장자를 위하여 입는다. -역시 3세를 계승한 자인데, 금제와 국제에서는 강복하였다. ○ 군의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참최조에 나온다.]
【보복(補服)】
남자 : 할아버지가 죽은 뒤 할머니의 후사가 된 경우에 그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계후자 : 양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승중한 손자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를 위해서도 같다. ○ 《통전》에서 허맹(許孟)이 말하기를 “양어머니 및 양할머니가 쫓겨났을 경우 복이 없다.” 하였다.
【국제】
남자 : 군사(軍士)로서 삼년복을 입기를 원하는 자는 들어준다.
양자 : 수양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세 살 전에 거두어 양육해 준 경우를 말한다.[가례도(家禮圖)에 또 나온다.] 자기의 부모가 살아 있는 자 및 아버지가 죽었어도 장자인 경우는 강복한다. ○ 사대부(士大夫)가 천인(賤人)에 대해서도 강복한다.

자최장기(齊衰杖朞)
남자 : -《의례》 상복에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하고, 그 소에 “심상(心喪)은 그래도 3년을 입는다.” 하였다. 노이빙(魯履氷)은 말하기를 “1주년이 되면 영상(靈床)을 치운다.” 하였고, 《통전》에는 이르기를 “영연(靈筵)을 3년 동안 설치해 둘 수 없다.” 하였다. 살피건대, 《가례》가 비록 당시 임금의 제도를 따라서 아버지가 살아 있어도 어머니를 위해서 역시 3년을 입는다고는 하였으나, 주자도 일찍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있어서 어머니에 대해 기년복을 입는 것은 어머니에게 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높음이 아버지에게 있으므로 어머니를 다시 높일 수 없기 때문이니, 모름지기 《의례》를 좇아 정례(正禮)를 삼은 것이다.” 하고, 또 “노이빙의 의론이 옳다.”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제도가 예경(禮經)과 같은만큼, 오늘날 마땅히 그대로 따라야 한다. ○ 살피건대,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면 어떻게 아버지가 죽었다 하여 바꿀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모든 복은 다 처음 제정한 것으로 단안한다.” 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어머니가 죽은 지 3년 안에 아버지가 또 죽을 경우 어머니에 대해 그대로 기년복을 입게 한 것이다.- 아버지는 죽고 할아버지는 살아 있을 경우, 맏손자가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증조할머니ㆍ고조할머니를 승중한 경우도 같다. 살피건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계모와 적모를 위하여 입는다’는 구절을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는 구절 다음에 추가해야 마땅하니 ‘아버지는 죽고 할아버지는 살아 있을 경우 맏손자가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는 구절 역시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는 구절 뒤에 추가해야 마땅할 듯한데,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재가한 어머니와 쫓겨난 어머니를 위하여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복을 입지 않는다. -그래도 심상 3년은 입는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계모가 재가할 때 같이 따라간 자가 그 계모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의례상복도식》에 최개(崔凱)와 왕박의(王博義)는 계모가 재가할 적에 따라가지 않았더라도 기년복은 입는다고 하였으나, 왕숙(王肅) 및 《개원례(開元禮)》와 송나라의 법제에서는 따라가지 않았을 경우에는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 경문(經文)을 상고한바, 재가할 적에 따라간 경우만 말하고 따라가지 않은 경우는 말하지 않았고 보면, 입지 않는 것으로 단안을 내린 것인 듯하다.-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보복(補服)】 대부(大夫)의 서자(庶子)는 아내를 위하여 장기복(杖朞服)을 입고 대부의 적자(嫡子)는 아버지가 죽어야 아내를 위하여 장기복을 입는다. ○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주에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상장(喪杖)을 짚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주상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하고, 그 소에 “천자(天子) 이하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버지가 서자의 아내를 위하여 주상 노릇은 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모두 아내에 대해 상장을 짚을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의거할 때 아버지가 주상 노릇을 하면 남편은 상장을 짚지 않고 아버지가 주상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남편은 상장을 짚는다. 이는 대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서인도 그러하다. 다만 《예기》 분상(奔喪)에는 “무릇 상(喪)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아버지가 주상 노릇을 한다.” 하여 이 소의 내용과는 다르므로, [상주를 세우는 조항에 자세히 나온다.] 우선 실어두어서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 또 살피건대, 《예기》 잡기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있으면 아내를 위하여 상장을 짚지 않고 이마도 조아리지 않는다.” 하고, 그 주에 “이는 맏아들은 아내가 죽었지만 부모가 다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예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대부는 맏며느리의 상에 주상 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 남편이 상장을 짚지 않는 것이요, 만약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만 살아 있어서 어머니가 주상 노릇을 하지 않는 경우라면 아들이 상장을 짚을 수 있으되 다만 이마만 조아리지 않을 뿐이다. 이는 아울러 말해 두어서 문장의 표현 때문에 그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가례》의 부주(附註)에 “부모가 살아 있을 경우 아내를 위해서 부장기복을 입는다.”는 설도 아마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나 주석의 설에 의거할 때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만 살아 있을 경우 상장을 짚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시 상고해 볼 문제이다.
부인 : 시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시어머니를 위한 복은 남편의 복을 따른다. 남편이 승중하였거나 양자일 경우에도 같다.
【보복】
계후자 : 양아버지의 아내와 그 아들을 위해 입는다. ○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맏손자가 할머니를 위해 입는다. ○ 《통전》에서 허맹(許猛)이 말하기를 “양어머니 및 할머니가 쫓겨났을 경우에는 당연히 복이 없다.” 하였다.
【금제】
남자 : 맏아들과 여러 아들이 서모를 위하여 입는다. 서모란 아버지가 아들을 본 첩을 말한다.
부인 : 맏아들과 여러 아들의 아내가 남편의 서모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
남자 :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어머니를 위해서는 벼슬을 그만두고 심상 3년을 한다. ○ 재가한 어머니와 쫓겨난 어머니를 위해서도 심상 3년을 한다.

자최 부장기(齊衰不杖朞)
남자 :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계조모(繼祖母)를 위해서도 같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조부모 및 제부(諸父)의 형제를 위하여 아버지가 태복(稅服 상기가 지나서 소급하여 복을 입는 일)을 입을 경우 자신은 입지 않는다.” 하였다.[왕숙(王肅)은 이르기를 “형제란 아버지의 형제를 말한다.” 하였고, 장량(張亮)은 이르기를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자를 말한다.” 하였다. 아래도 같다.]- 딸은 비록 시집을 갔더라도 강복하지 않는다. ○ 서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는 입지 않는다. -살피건대, 역시 심상 1년은 입는 것이 옳겠다.- 백숙부모(伯叔父母)를 위하여 입는다. ○ 형제를 위하여 입는다. ○ 중자(衆子)를 위하여 입는다. -그 어머니도 같다.- 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고모와 자매로서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거나 시집을 갔어도 남편과 자식이 없는 자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딸이 있는 자는 자식이 없는 자로 논할 수 없을 듯하다.- 맏손자 또는 증손자ㆍ현손자로서 후사가 될 자를 위하여 입는다. -할머니도 같다. 국제에는 강복하였다. ○ 서손으로서 적손이 된 자를 위해서는 강복한다.[《의례상복도식》에 나온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전(傳)에 “적자가 있으면 적손은 없다.” 하였다.- 시부모가 맏며느리를 위하여 입는다.
부인 : -시집간 딸이 친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남편과 자식이 없는 자가 그 친형제자매 및 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소에 “남편과 자식이 없는 자는 친부모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 하였으나, 일설에는 삼년복이라고도 한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시집간 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된 형제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주에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여느 형제와 같다.” 하였다.- 재가한 어머니와 쫓겨난 어머니가 그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아들이 비록 아버지의 후사가 되었더라도 복을 입는다. ○ 남편의 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계모가 재가했을 때 전 남편의 아들로서 자기를 따라온 자를 위하여 입는다.
첩 : 여군(女君 적실(嫡室))을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는 없다.- 남편의 중자를 위하여 입는다.
계후자 : 생가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양의(楊儀)에 “벼슬을 그만두고 심상 3년을 입는다.” 하였다. -국제에도 같다. ○ 양가(養家)의 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의붓아들 : 같이 산 계부(繼父)를 위하여 입되 부자가 다 대공(大功)의 친족 관계가 없는 경우이다. ○ 양의에 “부모가 살아 있는 경우 아내를 위하여 입는 것은 고례(古禮)와 다르다.” 하였다. -이 설은 장기조(杖朞條)에 나온다. ○ 자매는 이미 시집을 갔어도 서로 복을 입는다. -이 설은 대공조(大功條)에 나온다.
【금제】
남자 : 아버지가 후사가 될 맏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어머니 및 계모와 자모도 같다. 국제에서도 같다.
첩 : 군(君)의 맏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도 같다. ○ 군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이 설은 참최 조에 나온다.
【국제】
남자 : 계조모를 위하여 입는다.
양자 : 생가의 부모가 살아 있을 경우 그 양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그러나 벼슬을 그만두고 심상 3년을 입는다. 생가의 부모가 비록 죽었더라도 장자(長子)는 기년복을 입고 벗는다.

자최 오월(齊衰五月)
남자 : 증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계증조모에게도 같다.- 시집간 딸도 강복하지 않는다.
【보복】
계후자 : 양가의 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자최 삼월(齊衰三月)
남자 : 고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계고조모에게도 같다.- 시집간 딸도 강복하지 않는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의하면, 무릇 4세(世) 이상의 체사자(逮事者 직접 섬긴 자)에 대해서는 다 자최 삼월을 입어야 한다.
의붓아들 : 같이 산 계부(繼父)를 위하여 입되 그 계부에게 아들도 있고 대공 이상의 친족도 있는 경우이다. ○ 같이 살지 않은 계부를 위하여 입는다. 이는 처음에는 같이 살았으나 지금은 같이 살지 않은 자를 말하니, 원래 같이 살지 않은 경우는 복을 입지 않는다.
【보복】
계후자 : 양가의 고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상복】
남자와 부인이 종자(宗子)와 종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고 하였다. 그 전(傳)에 “종자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종자의 아내의 복은 입지 않는다.” 하였다. ○ 살피건대, 《통전》 위령(魏令)에 “관장(官長)이 관리를 거느릴 경우 서리는 모두 자최복을 입는데, 장사가 끝나면 벗는다.” 하고, 진령(晉令)에 “서리들이 자최복을 입고 일을 보되, 대리자가 올 것 같으면 모두 벗는다.” 하였다.

3. 대공 구월(大功九月)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달수로 칠 경우 윤달도 친다.” 하였는데, 장자(張子 장재(張載)) 역시 “대공 이하는 윤달도 친다.” 하였다.
남자 : 백숙부(伯叔父)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중손(衆孫)의 남녀를 위하여 입는다. -할머니도 같다. ○ 《의례상복도식》에서 범선(范宣)이 말하기를 “예에 할아버지를 승중하여 후사가 된 자는 삼년복을 입는데, 이 경우는 적서(嫡庶)가 공통이다. 서손이 적손과 다른 점이라면 다만 아버지가 서자를 위해 삼년복을 입지 않고 할아버지가 서손을 위해 기년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손자가 할아버지의 복을 입음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없다.” 하였다. 살피건대, 할아버지가 서손을 위해서는 승중인 경우에도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 중자(衆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어머니도 같다.- 형제의 아들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부인 : 남편의 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계조모에게도 같다.- 남편의 백숙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이 남의 후사가 된 경우 생가 시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 자매가 시집갔을 경우 서로 복을 입는다. 살피건대, 이 조항에 대하여 양의(楊儀)에 “부장기복을 입는다.” 하였으나, 주자(朱子)는 또한 “자매가 시집간 뒤라면 형제에 대해서는 강복을 하지만 자매에 대해서는 강복을 한 적이 없다.” 하였다. 다만 살피건대, 《의례》 상복(喪服) 대공(大功)에 “시집간 여자가 고모와 자매를 위하여 입는다.” 하였고, 또 소에 “두 딸이 각기 출가하였을 경우 재차 강복하지는 않는데, 이를테면 두 아들이 남의 후사가 된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하였으며, 또 《가례》에 “딸이 시집가면 친정의 친족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강복한다.” 하였다. 이에 의거할 때 비록 재차 강복하지 않더라도 한 등급 강복하여 대공으로 함은 의심할 게 없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보복】
남자 :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형제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
부인 : 맏손자를 위하여 입는다.

4. 소공 오월(小功五月)
남자 : 종조조부모(從祖祖父母)와 종조조고(從祖祖姑)를 위하여 입는다. 할아버지의 형제 -그 아내까지이다.- 와 자매를 말한다. ○ 종조부모(從祖父母)와 종조고(從祖姑)를 위하여 입는다. 아버지의 종부형제(從父兄弟) -그 아내까지이다.- 와 종부자매를 말한다. ○ 종조형제자매(從祖兄弟姊妹)를 위하여 입는다. 종조부(從祖父)의 아들(5촌 당숙)을 말하는데, 이른바 재종형제자매이다. ○ 형제의 손자를 위하여 입는다. ○ 종부형제(從父兄弟 종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외조부모(外祖父母)를 위하여 입는다. 어머니의 부모를 말한다. -《의례》 상복에 “쫓겨난 아내의 아들은 외조부모에 대해 복이 없다.” 하였다. 《통전》에서 보웅(步熊)이 말하기를 “외조부를 위해서는 그래도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다. 《의례》 상복에 “서자로서 후사가 된 자는 자기의 외조부모와 종모(從母), 외삼촌에 대해 복이 없고, 후사가 되지 않았으면 중인(衆人)과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외삼촌을 위하여 입는다. 어머니의 형제를 말한다. -《의례》 상복의 소에 “이성(異姓)에 대해서는 출입(出入)에 따른 강복이 없다.” 하였다.[아래에서도 같다.] 종모(從母)를 위하여 입는다. 어머니의 자매를 말한다. -《통전》에서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한 사람으로서 내외친(內外親)을 겸하였을 경우 복을 입을 때 마땅히 가까운 쪽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외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였다.-생질을 위하여 입는다. 자매의 아들을 말한다. ○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형제자매를 위하여 입는다. ○ 자기를 젖을 먹여 길러준 서모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는 없다.- 서자가 적모(嫡母)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위하여 입는다. 적모가 죽었을 경우 복이 없다. -금제와 국제에는 없다.- 어머니가 쫓겨났을 경우 계모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위하여 입는다. -우씨(虞氏)가 말하기를 “비록 10명의 계모가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모당(母黨)에 비해 한 단계 낮은 복을 입어야 한다.” 하였다. 《예기》 복문(服問)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의 일가를 위하여 복을 입는데, 어머니의 일가를 위하여 복을 입을 경우 계모의 일가를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다.- 딸이 형제와 조카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이미 시집을 갔어도 강복하지 않는다. ○ 적손 및 증손ㆍ현손으로서 후사가 될 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그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입지 않는다. -조모도 같다. 국제에는 없다.- 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부인 : 남편의 형제의 손자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형제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고자매(姑姊妹)를 위하여 입는다. 시집간 자도 강복하지 않는다. ○ 남편의 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보복】
부인 : 시어머니가 맏며느리일 때 시아버지의 후사를 위하여 입지 않는다. 살피건대, 《의례》에 종자부(從子婦 질부(姪婦))는 대공이고 중자부(衆子婦)는 소공으로 되어 있는데, 위징(魏徵)이 주의(奏議)하여 중자부를 대공으로 올렸다. 오늘날 맏며느리가 시아버지의 후사를 위하여 입지 않는 것은 중자부와 같으니, 마땅히 대공으로 올려야 할 것이다.
계후자 : 양아버지의 아내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 《예기》 단궁 상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소공에 태복(稅服) -소급하여 입는 것이다.- 하지 않는다면 이는 멀리 사는 형제는 끝내 복을 입을 수 없다. 이래도 되겠는가.’ 하였다.” 하였는데, 그 소에 “강복하여 시마에 해당되는 자는 역시 태복하고 그 나머지는 하지 않는다.” 하였다.

5. 시마 삼월(緦麻三月)
남자 : 족증조부모(族曾祖父母 종증조부모)와 족증조고(族曾祖姑)를 위하여 입는다. 증조할아버지의 형제 -그 아내까지이다.- 와 자매를 말한다. ○ 형제의 증손을 위하여 입는다. ○ 족조부모(族祖父母 재종조부모)와 족조고(族祖姑)를 위하여 입는다. -할아버지의 종부형제(從父兄弟) 및 그 아내와 할아버지의 종부자매를 말한다.- 종부형제의 손자를 위하여 입는다. ○ 족부모(族父母 재종숙)와 족고(族姑)를 위하여 입는다. 족조부(族祖父 재종조부)의 아들을 말한다. -그 아내와 족조부의 딸까지이다.- 종조형제(從祖兄弟 재종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족형제자매(族兄弟姊妹)를 위하여 입는다. 이른바 삼종형제자매이다. ○ 증손과 현손을 위하여 입는다. -조모도 같다.- 종모형제자매(從母兄弟姊妹)를 위하여 입는다. 종모(從母)의 자식을 말한다. ○ 외손을 위하여 입는다. -조모도 같다.- 외형제(外兄弟)를 위하여 입는다. -아버지의 자매의 자식들이다.- 내형제(內兄弟)를 위하여 입는다. 외삼촌의 자식을 말한다. ○ 서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그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그러나 어머니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위해서는 복이 없다. -국제에는 없다. 살피건대, 《의례상복도식》에서 양씨(楊氏)가 이르기를 “승중(承重)한 첩의 아들은 만약 적모(嫡母)가 없거나 적모가 죽었을 경우 생모(生母)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으나, 경문(經文)에는 단지 “그 어머니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는다.”라고만 하고 다시 ‘적모가 없을 경우 생모를 위해 입는다’는 문구는 없다. 이는 승중의 의리를 중시한 뜻에서일 것이니, 양씨의 설은 좇을 수 없을 듯하다.- 서손부(庶孫婦)를 위하여 입는다. -조모도 같다.- 사(士)가 서모를 위하여 입는다. 아버지의 첩으로서 아들을 둔 자를 말한다. -《통전(通典)》에서 서막(徐邈)이 이르기를 “두 첩의 아들은 서로 서모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다.- 유모(乳母)를 위하여 입는다. ○ 형제의 손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종부형제의 아들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아내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아내가 죽고 나서 별도로 장가를 들었을 경우도 같다. 따라서 아내의 친어머니가 비록 재가했다 하더라도 복을 입는다. ○ 사위를 위하여 입는다. ○ 여자가 자매의 아들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생질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외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조모도 같다.
부인 : 남편의 형제의 증손을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형제의 손자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조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증조부모와 고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조조부모(從祖祖父母)를 위하여 입는다. -남편의 종조조고(從祖祖姑)를 위하여 입는다.[《가례의절》에 나온다.] 남편의 형제의 손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조부모(從祖父母)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부형제(從父兄弟)의 아들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부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외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는 없다.- 남편의 종모(從母) 및 외삼촌을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는 없다.- 남편의 종부자매(從父姊妹)를 위하여 입는다. 시집간 자도 강복(降服)하지 않는다. -살피건대, 시집간 딸은 종부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당연히 보복(報服)을 입어야 함에도 《가례》에는 없으니, 이는 누락된 것인 듯하다. ○ 양의(楊儀)에 “동거자를 위하여 입는다.” 하였다. ○ 친구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경문(經文)에 단지 ‘친구에 대해서는 시마복을 입는다’라고 하였으니, 조복(弔服)에다 마질(麻絰)을 가한 것과 같다.” 하였다. ○ 대부(大夫)가 귀첩(貴妾)을 위하여 입는다. 비록 아들이 없더라도 복을 입는다. ○ 사(士)가 아들을 둔 첩을 위하여 입는다.[이상은 금제와 국제에 모두 없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주에 “여군(女君)은 첩에 대해 복이 없다.” 하였고, 《통전》에서 서막은 말하기를 “두 첩은 한집에서 함께 은혜를 입었으니, 의리상 서로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다.
【금제】
남자 : 종부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도 같다.
부인 : 남편의 종부형제를 위하여 입는다.
계후자 : 남의 후사가 된 자가 생가의 외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
남자 : 외삼촌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부인 : 남편의 양가(養家)의 증조부모와 고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조고(從祖姑)를 위하여 입는다. -《가례의절》에도 같다.
양자 : 양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곧 사대부가 천인인 양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상복(殤服)]
《통전》에 “상자(殤者)에 대한 복은 해를 셀 적에 한 달을 한 해로 치고 해를 쓰지 않는다.” 하였다. ○ 《개원례》에 “장상(長殤)ㆍ중상(中殤)ㆍ하상(下殤)의 초상은 처음 죽었을 적에 목욕 및 대렴과 소렴을 성인(成人)과 같이 한다. 장상에는 관(棺) 및 대관(大棺)이 있고, 중상과 하상에는 관이 있으며, 영상(靈床)ㆍ제전(祭奠)ㆍ진식(進食)ㆍ장송(葬送)ㆍ곡읍(哭泣)의 위(位)는 성인과 같다. 희생과 명기(明器)의 경우, 장상에서는 3분하여 2분을 감하고 고복(皐復)을 하지 않으며 반함(飯含)도 없다. 또 상구(喪具)를 마련하여 장사를 지내고 나서 신주를 세우지 않으며, 우제를 지내고 나서는 영상을 제거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가례》와 정자(程子)와 주자의 설에 의하면 8세 이상은 다 신주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상복(殤服)은 차례대로 한 등급씩 강복한다.
나이 19세에서 16세까지는 장상이고, 15세에서 12세까지는 중상이고, 11세에서 8세까지는 하상이다. ○ 기년복을 입어야 할 경우에는 장상이면 대공 구월(大功九月)로, 중상이면 칠월(七月)로, -금제에는 구월로 되어 있다.- 하상이면 소공 오월(小功五月)로 강복한다. 대공 이하의 복을 입어야 할 경우에는 차례대로 강복한다. 8세가 못 되면 무복(無服)의 상(殤)인데, 하루를 한 달로 쳐서 곡만 하며, 태어난 지 석 달이 못 될 경우에는 곡도 하지 않는다. -살피건대, 정현이 말하기를 “하루를 한 달로 친다는 것은 태어난 지 한 달일 경우 하루를 곡한다는 말이다.” 하였는데, 그 에 “이를테면 7세일 경우 한 해가 12개월이므로 84일을 곡한다는 것인데,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나 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 친속은 관계가 없다. 아들 중에서도 적장자(嫡長子)의 경우는 성인이라면 참최 삼년복을 입지만, 지금 상사(殤死)라 하여 중자(衆子)와 같이 하는 것은 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곡식이 아직 여물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상사자(殤死者)는 똑같이 대공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였고, 왕숙(王肅)과 마융(馬融)은 “곡하는 날수로 복 입을 달수를 바꾼다면 기년에 해당되는 친속일 경우 13일을 곡하고, 시마에 해당되는 친속일 경우 3일로 제한한다.” 하였다. 두 설이 같지 않으므로 일단 함께 실어두어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남자로서 이미 장가를 갔거나 여자로서 허혼(許婚)했다면 모두 상(殤)으로 치지 않는다. -《예기》 상복소기에 “남자로서 관례(冠禮)를 올렸으면 상으로 치지 않고 여자로서 계례(筓禮)를 올렸으면 상으로 치지 않는다.” 하였다. 국제(國制)에 의하면, 남자가 벼슬을 받은 경우에도 상으로 치지 않는다.
【상복】 상복(殤服)의 복제(服制)
대공 구월과 대공 칠월 : 자녀의 장상과 중상, 숙부의 장상과 중상, 고자매(姑姊妹)의 장상과 중상, 형제의 장상과 중상, 적손(嫡孫)의 장상과 중상, 남편의 형제의 자녀의 장상과 중상, -국제에는 이상의 중상은 모두 소공이다.- 대부(大夫)의 서자가 적곤제(嫡昆弟)의 장상과 중상, 공대부(公大夫)가 적자의 장상과 중상 -에 이르기를 “적자는 바로 정통으로서, 성인의 경우 참최이나, 지금은 상사(殤死)하여서 대를 이을 수 없기 때문에 대공에 넣은 것이다.” 하였다.- 에 입는다. 금제에는 적증손과 적현손 및 형제의 자녀의 장상과 중상에 입는다. ○ 살피건대, 《의례》 상복에 “그 장상은 구월이고 중상은 칠월이다.” 하고, 그 소에 “오복(五服)의 정복(正服)에는 칠월의 복이 없으나, 이 대공의 중상에만 있다.” 하였다.
소공 오월 : 숙부의 하상, 맏손자의 하상, 형제의 하상, 고자매의 딸의 하상, -국제에는 이상은 모두 시마복이다.- 남의 후사가 된 자가 그 형제의 장상과 중상, 종부형제(從父兄弟)의 장상과 중상, -국제에는 장상이 시마복이다.- 남편의 숙부의 장상, 형제의 자녀의 하상, -국제에는 시마복이다.- 서손녀의 남편과 서손자의 아내의 장상과 중상, -금제에는 중상과 하상이 시마복이다.- 남편의 형제의 자녀의 하상, 고모가 조카의 장상과 중상, -살피건대, 고모는 곧 출가한 고모이다. 금제에는 중상과 하상이 시마복이고, 국제에는 삼상(三殤)이 모두 시마복이다.- 대부(大夫)의 서자가 적곤제(嫡昆弟)의 하상, 대부공(大夫公)의 형제와 대부의 아들이 그 형제의 서자와 고자매의 딸의 장상과 중상, 대부의 첩이 군(君)의 서자의 장상에 입는다.
시마 삼월(緦麻三月) : 서손의 하상, 종조부(從祖父)의 장상, -살피건대, 종조조부(從祖祖父)의 장상을 예에서는 비록 말하지 않았으나, 역시 시마복을 입는 것이 옳다.- 종조형제(從祖兄弟)의 장상, 종부형제의 아들의 장상, 형제의 손자의 장상, 종부형제의 하상, 고모가 조카의 하상, 종모(從母)의 장상, 남편의 숙부의 중상과 하상, 남편의 고자매의 장상에 입는다. -이상은 국제에는 없다.- 금제에는 외삼촌의 장상에 입는다. 국제에는 증손과 현손의 장상과 중상, 당고모의 장상에 입는다.
[강복(降服)]
《의례》 상복의 소에 “외친(外親)은 비록 시집을 갔더라도 강복하지 않는다.” 하였다. ○ 두 아들이 각각 남의 후사가 된 경우 재차 강복하지 않는다. ○ 두 딸이 각각 출가하였을 경우 재차 강복하지 않는다. ○ 정씨(鄭氏)가 말하기를 “비록 외친이라 하더라도 두 계통은 없다.” 하였고, 가씨(賈氏)가 말하기를 “이미 양가(養家) 모당(母黨)의 복을 입고 나서 또 생가 모당의 복을 입는다면 이것은 두 계통이다.” 하였다.

남의 후사가 된 남자나 시집간 여자는 사친(私親)에 대하여 모두 한 등급씩 강복하는데, 사친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집간 여자가 강복(降服)의 기간이 차기 전에 쫓겨왔을 경우 본복(本服)을 입으나, 이미 벗고 나서 쫓겨왔을 경우 복을 다시 입지는 않는다. -《예기》 상복소기에 “소상 전에 돌아올 경우 기년복을 입고 소상 후에 돌아올 경우 그대로 끝난다.” 하였다.- 부인이 남편 일가를 위해 복을 입었을 때 상기(喪期) 내에 쫓겨날 경우 복을 벗는다. ○ 첩이 그의 사친을 위해 복을 입을 때는 중인(衆人)과 같이 한다.

[심상 삼년(心喪三年)]
남자 : 《의례》 상복에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하였다. 살피건대, 적모(嫡母)와 계모(繼母)에게도 같다. ○ 맏손자가 할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증조할머니ㆍ고조할머니에게도 같다. ○ 쫓겨난 어머니와 재가한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양의(楊儀)에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비록 복을 입지 않더라도 심상은 입는다.” 하였다. ○ 서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스승을 위하여 입는다.” 하였다. 왕숙(王肅)이 말하기를 “예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복이 없고 조복(弔服)에다 마질(麻絰)을 가하여 입고 가서 침전에서 곡을 한다.” 하였다. 《의례》 상복의 소에 “마질이란 환질(環絰)을 말한다.” 하였다. 정칭(鄭稱)이 말하기를 “무릇 조복에 마질을 가한 자는 석 달 만에 벗는다.” 하였고,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장사를 지내고 나면 벗는다.” 하였는데, 초주(譙周)는 말하기를 “비록 복은 벗더라도 심상 3년을 한다.” 하였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스승에게는 입복(立服)을 하지 않는 법이니, 입복을 할 수 없다면 마땅히 정의의 후박과 사안의 대소에 따라 대처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선비 황간(黃榦)이 그의 스승 주자(朱子)의 상에 조복을 입고 마질을 띠었는데, 조복의 제도는 심의와 같고 마질은 관질(冠絰)을 썼다. 왕백(王柏)은 그의 스승 하기(何基)의 상에 심의에다 요질(腰絰)을 띠고, 관에 면사(綿絲)의 무(武)를 가하였으며, 왕백이 죽어서는 그 제자 김이상(金履祥)이 상을 치르는데, 백건(白巾)에다 수질(首絰)을 가하되 수질을 시마복의 것과 같이 하고 소대(小帶)는 고운 모시를 썼다. 황간ㆍ왕백ㆍ김이상 세 사람은 모두 주자의 정통 제자인만큼, 스승의 상복을 마련함에 있어서 상고한 바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후세에 스승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여 복을 입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이를 기준으로 삼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은 말하기를 “스승의 경우 그 정의(情義)의 정도에 따라 심상 3년이나 1년, 또는 9월이나 5월 내지 3월로 하고, 친구의 경우는 아무리 많이 입더라도 3월을 넘기지는 못한다.” 하였다.
부인 : 시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시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남편이 승중이나 후사가 된 경우도 같다. ○ 남편의 생가 부모 및 재가한 어머니와 쫓겨난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서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의 아내가 그 남편의 생모를 위해서도 같다. ○ 친정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계후자 : 생가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양의(楊儀)에 나온다.-살피건대, 양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양어머니를 위하여, 그리고 승중의 양할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양할머니를 위하여도 같으며, 증조모와 고조모에게도 같다.
양자 : 자기의 부모가 살아 있을 경우 양부모를 위하여 입으며, 역시 벼슬을 그만둔다.

[복제 식가(服制式假)]
송(宋)나라 때의 상장(喪葬) 식가 규정은, 재직 중에 상을 당하지 않은 경우 기년에는 30일, 대공에는 20일, 소공에는 15일, 시마에는 7일이다. 국제에는 재직 중인 자도 같으며, 외조부모에게는 15일을 더 주고 처부모에게는 23일을 더 준다.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주인 및 형제가 비로소 죽을 먹는다.
여러 자식들은 죽을 먹고, 처첩(妻妾) 및 기년인 자와 구월인 자는 거친밥에 물을 마시고 채소와 과일은 먹지 않으며, 오월인 자와 삼월인 자는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되 잔치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이때부터는 까닭없이 밖에 나가지 않으며, 만약 상사(喪事)나 어쩔 수 없는 일로 출입을 할 경우는 꾸미지 않은 말에 삼베 안장을 씌워서 타고 가마는 흰 가마에 삼베 휘장을 친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선비는 조부모의 기년복 기간 내에는 과거(科擧)에 응시하지 않아야 한다.”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이회숙(李晦叔 이휘(李煇))이 묻기를 “장자(長子)의 삼년상 및 백숙부모와 형제에 대해 모두 기년복을 입고 벼슬을 그만두지 않고, 선비는 과거에 응시를 허락합니다. 모르기는 합니다만, 벼슬을 하는 자와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그때에 다시 길복을 입어야 합니까, 최복을 입어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이러한 일은 다만 조정의 법령만을 따를 뿐이나,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에 편하지 않아 과거에 응시하고 싶지 않다면 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 벼슬자리에 있는 자의 경우 벼슬을 그만둘 수 있는 법조문은 없다. 이천 선생(伊川先生)께서도 학제(學制)를 자세히 상고해 보고서는 역시 슬픔을 무릅쓰고 상법(常法)을 지키는 일을 금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다만 어쩔 수 없어 잠시 최복을 벗었더라도, 역시 서둘러 길복으로 갈아입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아버지가 복을 입고 있으면 집안의 자식들이 음악을 연주하지 않고, 어머니가 복을 입고 있으면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며, 아내가 복을 입고 있으면 그 곁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옥조(玉藻)의 주에 “아버지가 상복을 입고 있으면 자식이 길복을 입을 수 없다.” 하였다.

무릇 중상(重喪)을 아직 벗지 않은 채 경상(輕喪)을 만날 경우에는 중상의 복을 입고 곡을 하되, 월삭(月朔)에 영위(靈位)를 설치하고 경복(輕服)을 입고서 곡을 하고 곡을 마치고 나서는 다시 중복(重服)을 입으며, 중복을 벗게 되면 역시 경복을 입는다. 만약 중복을 벗고 경복은 아직 벗지 않았을 경우라면 경복을 입고서 남은 날짜를 마친다. -《예기》 간전(間傳)에 “참최의 상에서 우제와 졸곡을 마친 뒤에 자최의 상을 만났을 경우 경시(輕視)하는 부위에는 복을 덮어씌우고 중시(重視)하는 부위에는 복을 특별히 남겨둔다.” 하였는데, 그 소에 “참최복을 받아 입을 때에 자최의 초상을 당했을 경우, 남자는 허리를 경시하므로 자최의 요대(腰帶)를 띤 채 참최의 요대를 함께 덮어씌워서 띠고 여자는 머리를 경시하므로 자최의 수질을 띤 채 참최의 수질을 함께 덮어씌워서 띤다. 남자는 머리를 중시하므로 참최의 갈질(葛絰)을 특별히 남겨두고 여자는 허리를 중시하므로 또 갈대(葛帶)를 띠지 않고 참최의 마대(麻帶)를 특별히 남겨둔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최마(衰麻)의 추세(麤細)가 같을 경우 함께 입는다.” 하였다. -《의례상복도식》에 자세히 나온다.- 두원개(杜元凱)가 말하기를 “아버지를 장사 지낸 뒤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우제를 마칠 때까지 어머니의 복을 입고, 아버지의 복을 입어서 이미 소상을 지났을 경우 어머니의 복을 입으며, 아버지의 복을 벗을 수 있을 경우 아버지의 복을 다 입은 다음 벗고 나서 어머니의 복을 입는다.” 하였다. 살피건대, 두원개의 설은 《예기》 간전과 같지 않고 《가례》와도 서로 다르므로, 일단 여러 설을 실어두어서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증택지(曾擇之 증조도(曾祖道))가 묻기를 “삼년상 중에 다시 기년상을 당한 자는 당연히 기년상의 복을 입고 그 초상에 제전(祭奠)을 하여 일을 마치고 나서 처음 입었던 복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혹자는 막 중복을 입고 있는 참에 경복으로 갈아입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혹자의 설은 잘못이다.” 하였다. -이는 마땅히 《예기》 분상(奔喪)과 《가례》의 “자최 이하는 상이 난 소식을 들으면 곡위(哭位)를 설치하고 곡을 한다.”는 조항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 살피건대, 할머니의 승중상을 당하여 장사를 지낸 뒤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마땅히 두씨의 ‘동시에 상을 당했다’는 설을 따라야겠으나, 칭호만은 복에 따라 고칠 수 없으므로 ‘애손(哀孫)’의 칭호를 그대로 쓰는 것이 옳겠다. -《통전(通典)》에 나온다.

[아침에 곡한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주인 이하가 모두 해당하는 복을 입고 들어가 제 위치로 나아가서 -위차(位次)는 앞에 나온다.- 존장(尊長)은 앉아서 곡하고 항렬이 낮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서서 곡한다. 시자(侍者)는 관즐(盥櫛)의 도구를 영상(靈牀) 곁에 배설해 둔다.

조전(朝奠)을 올린다.
혼백을 받들어 내어 영좌(靈座)에 모시고 난 뒤에 조전을 올리는데, 집사자가 소과(蔬果)와 포해(脯醢)를 진설하고 축(祝)이 손을 씻은 다음 향불을 피우고 술을 쳐 올리면 주인 이하가 두 번 절하고 매우 슬피 곡한다. -조전의 전물(奠物)이 도착하고 난 뒤에 석전(夕奠)의 전물을 철상하고, 석전의 전물이 도착하고 난 뒤에 조전의 전물을 철상하되, 각각 상보를 덮는다. 만약 더운 계절이어서 음식이 부패될 염려가 있다면 한 식경 뒤에 음식물은 가져가고 술과 과일 따위만 남겨두고 상보로 덮는다.

밥 먹을 때 상식(上食)한다.
조전의 의식과 같다. -살피건대, 상을 연거푸 당했을 경우 나중에 당한 상의 성복 전에는 먼저 당한 상의 조전과 석전 및 상식을 일시 그만두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리고 부모의 상중에 죽은 자는 장사 전에는 평상시와 같이 소찬(素饌)을 올리고 우제 때에 가서 비로소 신으로 섬겨서 고기를 쓰는 것이 옳을 듯하다. 퇴계(退溪)가 어느 질문에 답한 내용 역시 이러하다.

석전(夕奠)을 올린다.
조전의 의식과 같다. -《예기》 단궁 상에 “조전은 해가 뜰 때 올리고 석전은 해가 지기 전에 올린다.” 하였다.

[저녁에 곡한다.]
주인 이하가 혼백을 받들고 들어가 영상 앞에 나아가서 매우 슬피 곡한다. -살피건대, 《의례》에 의하면 조석의 곡(哭)과 전(奠)은 애당초 두 가지 일인데도 어떤 이는 한 가지 일로 여기니, 이는 잘못이다.

일정한 때가 없이 곡한다.
아침저녁으로 슬픈 생각이 날 경우 상차(喪次)에서 곡한다.

초하룻날의 경우 조전에 반찬을 진설한다.
반찬은 육류ㆍ어류ㆍ국수ㆍ쌀음식ㆍ국ㆍ밥 한 그릇씩을 차리며, 예절은 조전의 의식과 같다. -《의례》 사상기(士喪記)에 “초하룻날에 만약 천신(薦新)을 할 경우에는 안방에서 올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소에 “대렴과 소렴의 전(奠)이나 조전과 석전 등에는 모두 서직(黍稷)이 없고, 오직 안방에서 올리는 평소의 전에는 서직이 있었지만 지금 이처럼 성대한 제전에서는 이미 희생이 있는 외에 또 서직이 있다. 그러므로 안방에서 다시 밥을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大夫) 이상은 또 월반(月半)의 전(奠)이 있으므로 역시 안방에서는 밥을 올리지 않는다.” 하였다. ○ 살피건대, 삭전(朔奠)에 이미 밥과 국을 진설하였으면 그날 조상식(朝上食)에 다시 진설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어떤 이가 묻기를 “모상(母喪)의 삭전에 아들이 상주가 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무릇 상에는 아버지가 상주였으므로 지금에 와서 아들이 상주가 된다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하였다.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상주를 세우는 조항에 ‘무릇 주인이란 장자(長子)를 이르며 장자가 없을 경우 장손(長孫)이다.’ 하였는데, 지금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아들이 상주가 되는 예는 없다.’고 하니, 두 설이 서로 같지 않다. 어째서이겠는가. 대개 장자가 궤전(饋奠)을 받드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게는 은혜도 무겁고 복도 무겁기 때문이고, 삭전의 경우 아버지가 상주 노릇하는 것은 삭전은 성대한 제전이므로 높은 사람으로 상주를 삼기 때문이다.” 하였다. 《예기》 상복소기에 “부인의 상에 우제와 졸곡에서는 그 남편 또는 아들이 주상(主喪)이 된다.” 하였다. 우제와 졸곡은 모두 성대한 제사이기 때문에 남편이 주상이 된다는 것이니, 이것 역시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아버지가 주상이 된다는 것을 이름이다. 삭제(朔祭)에 아버지가 주상이 되는 것도 그 의리는 우제ㆍ졸곡의 경우와 같다.

새로운 음식물이 있으면 천신을 한다.
의식은 상식(上食)의 의식과 같다. -새로운 음식물이란 벼[稻]ㆍ기장[黍]ㆍ피[稷]ㆍ보리[麥]ㆍ콩[菽]ㆍ백과(百果)ㆍ소채(蔬菜) 등 일체의 갓 익은 음식물을 말하는데 큰 소반에 담아서 영좌 앞 탁자에 진설한다.
◆ 조문자가 전물(奠物)ㆍ부의(賻儀)를 올리는 서식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아무 물품 약간.
이상의 물건을 삼가 전인(專人)을 통해 아무 분 -《가례의절》에서는 ‘아무 관직 아무 공’이라 하였다. 여자의 상인 경우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 쓴다.- 의 영연(靈筵)에 올려 겨우 부의 -향다(香茶)나 주식(酒食)의 경우 ‘전의(奠儀)’라고 쓴다.- 를 갖추오니 삼가 흠납(歆納)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벼슬 아무 성씨 아무개 올림. -평교(平交) 이하일 경우에는 글 안에 연호는 쓰지 않는다. 다른 데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봉투에는 “아무 관직 아무 공 -여자의 상인 경우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 쓴다.- 의 영연에 글을 올립니다.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근봉(謹封).”이라고 쓴다.
 
◆ 답장[謝狀]의 서식
삼년상을 당하여 아직 졸곡을 지내지 않았을 경우 다만 자질(子姪)로 하여금 답서[謝書]를 발송하게 한다. -자질이 없을 경우 족인(族人)으로 대신한다.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아무 물품 약간.
이상의 물품을 삼가 받았습니다. 존자(尊慈) -평교에는 ‘인사(仁私)’로 쓴다.- 께서 아무개 -발서자(發書者)의 이름- 의 부친 또는 모친께서 세상을 버렸다 하여 부의 -수의(襚衣)냐 전물(奠物)이냐에 따라 달리 쓴다.- 를 특사(特賜)하시므로 -평교에는 ‘주심[貺]’으로 쓴다.- 하성(下誠) -평교에는 이 두 글자를 쓰지 않는다.- 에 감사하는 심정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글발을 갖추어 사례하는 바입니다. -평교에는 ‘삼가 글발을 올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쓴다.-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올림.
 
봉투에는 “아무 관직의 좌전(座前)에 글을 올립니다.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근봉.”이라고 쓴다.
 
◆ 조제문(弔祭文)의 서식 -《가례의절》에 나온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歲次) 간지(干支) 몇월, 간지삭(干支朔) 며칠 간지에 첨친(忝親) -관계에 따라 일컫는다.- 인 아무 관직의 아무 성씨 아무개가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의 전물(奠物)로써 아무의 부친 아무 관직 아무 공의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합니다.……흠향하시옵소서.
 
《광기(廣記)》에 의하면, 친지의 상에 가서 곡하지 못할 경우 사자(使者)를 보내어 전부(奠賻)의 물품을 전하게 하되 외차(外次)에 나아가 조복(弔服)을 입고 두 번 절하고 곡하며 사자를 보낸다.
 
문장(門狀)의 서식
 
아무 벼슬 아무 성씨 아무개.
위의 아무개는 삼가 문병(門屛)에 나아가 -평교에는 ‘삼가 문병에 나아가’라는 말을 뺀다.- 아무 벼슬의 어른을 공손히 위로하고 -평교에는 ‘아무 관직’이라고 쓴다.-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평교에는 이 말을 뺀다.-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벼슬 아무 성씨 아무개 올림.
 
◆ 방자(榜子)의 서식
 
아무 관직 아무 성씨 아무개가 위로드립니다.
 
◆ 부모를 여읜 사람을 위로하는 글[疏]의 서식
승중한 맏손자를 위로할 때도 같다. -《광기》에 “길이 멀거나 연고가 있어서 조문을 가지 못하는 자는 글을 써서 위문한다.” 하였다.
 
아무개는 머리 조아려 두 번 절하고 말씀드립니다. -강등의 경우 ‘머리 조아립니다’만 쓰고, 평교의 경우 ‘머리 조아려 말씀드립니다’만 쓴다.- 뜻하지 않은 흉변(凶變) -죽은 사람의 관직이 높을 경우 ‘나라가 불행하여’라고 쓴다. 이 뒤에도 다 같다.- 으로 선(先) 아무 벼슬 -관직이 없을 경우 ‘선부군(先府君)’이라 쓰고, 계분(契分)이 있을 경우 ‘아무 벼슬 부군’ 앞에 ‘몇째 어른’을 더 쓴다. ○ 어머니의 경우 ‘선 아무 봉작’이라 쓰는데, 봉작이 없을 경우 ‘선부인(先夫人)’이라 쓴다. ○ 승중의 경우 ‘존조고(尊祖考) 아무 벼슬’ 또는 ‘존조비(尊祖妣) 아무 봉작’이라 쓰는데, 나머지도 모두 같다.[《주자어류》에서 어떤 사람이 묻기를 “남의 첩모(妾母)의 죽음을 조문할 경우 무어라고 일컬어야 마땅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그저 그 아들이 평소에 일컫던 대로 일컬으면 될 듯하다.” 하였다. 어떤 이의 말로는 오봉(五峯) 호굉(胡宏)이 첩모를 소모(小母)라 일컬었다고도 한다.]- 께서 갑자기 영양(榮養)을 버리셔서 -죽은 사람의 벼슬이 높을 경우 ‘갑자기 관사(館舍)를 버리셔서’로 쓰거나 ‘갑자기 훙서(薨逝)하셔서’로 쓰고, 모친의 봉작이 부인(夫人)에까지 이른 경우에도 훙서로 쓴다.[살피건대, 우리나라는 임금의 죽음을 ‘훙’으로 쓰므로 사대부는 감히 쓸 수 없다.] 만약 살아 있는 사람이 관직이 없다면 ‘갑자기 색양(色養)을 버리셔서’로 쓴다.- 부고를 받들매 놀라움과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伏惟] -평교의 경우 ‘공손히 생각건대[恭惟]’로, 강등의 경우 ‘아득히 생각건대[緬惟]’로 쓴다.- 순수하고 지극한 효심(孝心)에 사모하는 울부짖음을 어떻게 견뎌 내시겠습니까. 일월(日月)이 덧없이 흘러서 벌써 순삭(旬朔)이 넘었는데, -계절이 지났을 경우 ‘어느덧 계절이 지났는데’로 쓰고, 이미 장례를 치렀을 경우 ‘벌써 양봉(襄奉)이 지났는데’로 쓰며, 졸곡ㆍ소상ㆍ대상ㆍ담제도 각기 그 시기에 따라 쓴다.- 애통함은 어떠하며 망극함은 어떠하겠습니까. 도독(荼毒)에 걸리신 뒤로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우고(憂苦)’로 쓴다.- 기력은 어떠하십니까[何如]? -평교의 경우 ‘어떠한가?[何似]’로 쓴다.- 삼가 바라건대[伏乞] -평교의 경우 ‘삼가 바라건대[伏願]’로 쓰고, 강등의 경우 ‘오직 바라건대[惟冀]’로 쓴다.- 억지로라도 죽을 더 많이 드시어 -이미 장례를 치렀을 경우 ‘거친밥[疏食]’으로 쓴다.- 예제(禮制)를 굽어 따르십시오. 저 아무개는 역사(役事)에 얽매여 있어서 -관직에 있을 경우 ‘맡은바 직무가 있어서’로 쓴다.- 위문을 가지[奔慰] 못하니, 근심하고 연모하는 하성(下誠)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평교 이하의 경우 ‘위문하지[奉慰] 못하니 슬픔 심정 한층 더합니다’라고만 쓴다.- 삼가 글[疏]을 올리오니, -평교의 경우 ‘글[狀]’로 쓴다.- 삼가 바라건대 감찰(鑑察)하여 주십시오.[伏惟鑑察] -평교 이하의 경우 ‘복유감찰[伏惟鑑察]’ 네 글자는 뺀다.- 갖추지 못하고 삼가 글을 올립니다.[不備謹疏] -평교의 경우 ‘더 쓰지 않고 삼가 글을 올립니다[不宣謹狀]’로 쓴다.[《예기보주》에 의하면, 나이 어린 사람은 ‘불구(不具)’ㆍ‘불실(不悉)’ㆍ‘불일(不一)’로 쓴다.]
연호 월 일에 아무 벼슬 -강등의 경우 군망(郡望 한 고장 사람들이 부르는 존호)을 쓴다.- 의 아무 성씨 아무개가 아무 관직의 대효(大孝) 점전(苫前)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대효’를 ‘지효(至孝)’로 쓰고, 평교 이하의 경우 ‘점전’을 ‘점차(苫次)’로 쓴다.- 에 글을 올립니다.[疏上] -평교의 경우 ‘소상(疏上)’ 대신에 ‘장상(狀上)’을 쓴다.[배의(裵儀)에 “부모가 죽어서 나달이 오래되었을 경우 ‘애전(哀前)’으로 쓰되, 평교 이하의 경우 ‘애차(哀次)’로 쓴다.” 하였다.]
 
봉투에는 “아무 관직의 대효 점전(苫前)에 글을 올림.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근봉. -강등의 경우 면첨(面簽)을 써서 ‘아무 관직의 대효 점차에 올림. 군망(郡望)인 성명 아무개가 글을 근봉.’이라고 한다.”이라고 쓴다.
겉봉에는 “아무 관직 -대효 점전- 에 글을 올림.[疏上] -평교의 경우 ‘소상(疏上)’ 대신에 ‘장상(狀上)’을 쓴다.-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근봉.”이라고 쓴다.
 
◆ 조부모를 여읜 사람을 위로하는 계장(啓狀)의 서식
승중(承重)이 아닌 자를 이른다. 백숙부모(伯叔父母)ㆍ고모(姑母)ㆍ형제자매ㆍ아내ㆍ아들ㆍ조카ㆍ손자의 죽음에도 같다.
 
아무개는 계(啓)합니다. -살피건대, 본조(本朝)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문자에 모두 ‘계(啓)’ 자를 쓰므로, 사서(私書)에는 감히 쓰지 못할 듯하다. ‘백(白)’ 자로 대신 쓰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뜻하지 않은 흉변으로 -자손에게는 이 구절을 쓰지 않는다.- 존조고(尊祖考) 아무 벼슬께서 갑자기 세상을 버리셔서, -할머니의 경우 ‘존조비(尊祖妣) 아무 봉작’으로 쓴다. 관직과 봉작이 없는 경우와 계분(契分)이 있는 경우는 이미 앞에 나온다. ○ 백숙부모와 고모의 경우 ‘존(尊)’ 자를 더 쓰고, 형제자매의 경우 ‘영(令)’ 자를 더 쓰며, 강등의 경우 모두 ‘현(賢)’ 자를 더 쓰되, 한 등급을 강등한 친척이 몇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항렬상의 서열을 더하여 ‘몇째 아무 벼슬’로 쓴다. 또 벼슬이 없을 경우 ‘몇째 부군(府君)’으로 쓰며, 계분이 있을 경우 ‘아무 벼슬 부군’ 위에 ‘몇째 어른, 몇째 형’을 더 쓴다. 고모와 자매의 경우 남편의 성씨를 써서 ‘아무 댁(宅)의 존고모(尊姑母), 영자매(令姊妹)’로 쓴다. ○ 아내의 경우 ‘현합(賢閤) 아무 봉작’으로 쓰되, 봉작이 없을 경우는 ‘현합’으로만 쓴다. ○ 아들의 경우 ‘복승(伏承) 영자(令子) 몇째 아무 벼슬’로 쓴다. 조카와 손자의 경우도 모두 같다. 강등의 경우 ‘현(賢)’으로 쓰며, 관직이 없을 경우 ‘수재(秀才)’로 쓴다.- 부음을 받들매 놀라움과 슬픔[驚怛]을 견딜 수 없습니다. -아내의 경우 ‘달(怛)’을 ‘악(愕)’으로 고치며, 자손의 경우 ‘놀라움과 슬픔을 이길 수 없습니다[不勝驚怛]’만 쓴다.- 삼가 생각건대[伏惟] -‘공유(恭惟)’와 ‘면유(緬惟)’는 앞에 나온다.- 순수하고 지극한 효심에 가슴이 무너지고 창자가 찢어지는 슬픔과 아픔을 어떻게 견뎌 내시겠습니까.[哀痛摧裂 何可勝任] -백숙부모와 고모의 경우 ‘친애는 더욱 융숭한데, 애통함과 침통함을 어떻게 견뎌 내겠습니까[親愛加隆 哀慟沈痛 何可堪勝]’로 쓴다. ○ 형제자매의 경우 ‘우애는 더욱 융숭한데[友愛加隆]’로 쓴다. ○ 아내의 경우 ‘배우의 중한 의리에 슬프고 침통한데[伉儷義重 悲悼沈痛]’로 쓴다. ○ 자질(子姪)과 손자의 경우 ‘자애가 융심함에 비통하고 침통한데[慈愛隆深 悲慟沈痛]’로 쓰며, 나머지는 백숙부모와 고모의 경우와 같다.- 맹춘(孟春)의 날씨는 아직도 차가운데, -한온(寒溫)은 계절에 따라 쓴다.- 존체는 어떠하십니까?[尊體何似] -조금 높을 경우 ‘동지는 어떠하십니까?[動止何如]’로 쓰며, 강등의 경우 ‘소리는 어떠합니까?[所履何似]’로 쓴다.- 삼가 빌건대[伏乞] -평교 이하의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너그러이 자제하심으로써 자념(慈念) -그 사람이 부모가 없을 경우 ‘원성(遠誠)’으로만 써서 연서(連書)하고 별행으로 올리지 않는다.- 을 위로해 드리십시오. 아무개는 사역(事役)에 얽매여 있어서 -벼슬자리에 있을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직접 나아가 위로를 드릴 수 없으니, 걱정되고 연모되는 하성(下誠)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평교 이하의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삼가 글을 올리오니, 삼가 바라건대 감찰(鑑察)하여 주십시오. -평교의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불비(不備) -평교의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하고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벼슬의 성명 아무개가 아무 벼슬의 복전(服前) -평교의 경우 ‘복차(服次)’라고 한다.- 에 글을 올립니다.
 
봉투와 겉봉의 서식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 조부모를 여의었을 때 남의 계장(啓狀)에 답하는 서식
승중이 아닌 자를 이른다. 백숙부모ㆍ고모ㆍ형제자매ㆍ아내ㆍ아들ㆍ조카ㆍ손자의 죽음에도 같다.
 
아무개는 아룁니다. 가문이 흉화(凶禍)로 -백숙부모와 고모, 형제자매의 경우 ‘가문이 불행하여’로 쓴다. ○ 아내의 경우 ‘사가(私家)가 불행하여’로 쓴다. ○ 아들ㆍ조카ㆍ손자의 경우 ‘사문(私門)이 불행하여’로 쓴다.- 선조고(先祖考) -조모의 경우 ‘선조비(先祖妣)’로 쓴다. ○ 백숙부모의 경우 ‘몇째의 백숙부모’로 쓴다. ○ 고모의 경우 ‘몇째의 고모’로 쓴다. ○ 형이나 누나의 경우 ‘몇째 가형(家兄), 몇째 가자(家姊)’로 쓴다. ○ 아우나 누이의 경우 ‘몇째 사제(舍弟), 몇째 사매(舍妹)’로 쓴다. ○ 아내의 경우 ‘실인(室人)’으로 쓴다. ○ 아들의 경우 ‘소자(小子) 아무개’로 쓴다. ○ 조카의 경우 ‘종자(從子) 아무개’로 쓴다. ○ 손자의 경우 ‘유손(幼孫) 아무개’로 쓴다.- 께서 갑자기 세상을 버리시어[奄忽棄背] -형제 이하의 경우 ‘세상을 떠나서[喪逝]’로 쓴다. ○ 자질(子姪), 손자의 경우 ‘갑자기 요절하여[遽爾夭折]’로 쓴다.- 가슴이 무너지고 창자가 찢어지는 슬픔과 아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痛苦摧裂 不自勝堪] -백숙부모와 고모, 형제자매의 경우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과 쓰라림을 참을 수 없습니다[摧痛酸苦不自堪忍]’로 쓴다. ○ 아내의 경우 ‘최통(摧痛)’을 ‘비도(悲悼)’로 고친다. ○ 자질ㆍ손자의 경우 ‘비도(悲悼)’를 ‘비념(悲念)’으로 고친다.- 삼가 존자(尊慈)의 특사(特賜)의 위문을 입으니, 슬프고도 감사한 하성(下誠)을 견딜 수 없습니다. -평교와 강등의 경우는 앞과 같다.- 맹춘(孟春)의 날씨가 아직은 차가운데, -한온(寒溫)은 계절에 따라 쓴다.- 삼가 생각건대[伏惟] -‘공유(恭惟)’ㆍ‘면유(緬惟)’는 앞과 같다.- 아무 벼슬의 존체(尊體)께서는 기거(起居)가 만복(萬福)하시겠지요. -평교의 경우 ‘기거’를 쓰지 않으며, 강등의 경우 ‘동지만복(動止萬福)’만 쓴다.- 아무개는 요즈음 시봉(侍奉)하면서 -부모가 없을 경우 이 구절을 쓰지 않는다.- 다행히 별다른 고통은 면하고 있으나, 직접 나아가 슬픔을 호소할 수 없으니, 목이 메이고 가슴이 미어질 뿐입니다. 삼가 글을 올리는 바입니다.[謹奉狀上] -평교의 경우 ‘진사(陳謝)’로 쓴다.- 불비(不備) -평교의 경우 앞과 같다.- 하고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군(郡)의 성명 아무개가 아무 벼슬의 좌전에 글을 올립니다. 근공(謹空). -평교의 경우 앞에서와 같다.
 
봉투와 겉봉은 앞과 같다.

조문(弔問)을 한다. -《예기》 곡례 상에 “상주는 알고 망인은 알지 못할 경우 조문은 하되 슬퍼하지는 않고, 망인은 알고 상주는 알지 못할 경우 슬퍼는 하되 조문은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단궁 상에 “죽음에 조문하지 않는 경우가 세 가지가 있으니, 외(畏)ㆍ압(壓)ㆍ익(溺)의 경우이다.” 하였는데,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외(畏)는 구렁텅이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유형이고, 압(壓)은 바위나 담벼락 밑에서 치여 죽은 유형이고, 익(溺)은 까닭없이 배를 타지 않고 헤엄을 치다가 죽은 유형이다.” 하였다. 또 《예기》 단궁 하에 “조문하는 날에는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고 음악도 연주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단궁 상에 “빈소 [주에, 삼년상이라 하였다.] 를 모시고 있을 때 멀리 있는 형제의 부음을 받을 경우 비록 시마복(緦麻服)이더라도 반드시 조문을 가나, 형제가 아닌 경우 [이성(異姓)의 경우] 에는 비록 이웃이더라도 가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삼년상 내에는 조문을 가지 않으며,……유복친(有服親)으로서 가서 곡을 해야 할 경우 죽은 친척에 대한 상복을 입고 간다.” 하였다. ○ 《예기》 소의(少儀)에 “자기보다 항렬이 높은 존장(尊長)이 상을 당했을 경우 곡할 때를 기다려야 하고 혼자서 불쑥 조문하지 않는다.” 하였고, 그 소에 “조석(朝夕)의 곡할 때를 기다려야지 아무 때나 혼자서 불쑥 조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부인의 상에는 친척이거나 그 아들의 친구로서 일찍이 마루에 올라 배면(拜面)한 자가 아닌 경우 빈소에 들어가서 술잔을 올리지 않는다.” 하였다. ○ 《광기(廣記)》에 이르기를 “무릇 죽은 자가 평교 이상인 경우 절을 하고 젊을 경우 절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상주가 두 사람 이상일 경우 아는 자에게만 조문을 한다. ○ 기년이 지났을 경우 곡을 하지 않는데, 정의가 두터울 경우 곡을 한다.

모든 조문에 다 소복(素服)을 입는다. -《가례의절》에 “금제(今制)에 국상(國喪)에만 삼베로 사모(紗帽)를 싸고 그 나머지의 경우는 허락하지 않는다. 벼슬이 있는 자는 옷은 흰 것으로 바꾸어 입을 수 있으나 갓은 바꾸어 쓸 수 없다. 벼슬이 없으면 소건(素巾)을 쓸 수 있다.” 하였다.

전물(奠物)은 향(香)ㆍ차[茶]ㆍ초[燭]ㆍ술[酒]ㆍ과일[果]을 쓴다.
내역을 적은 글발이 있으며, 음식물을 쓸 경우 별도로 제문(祭文)을 짓는다.

부의는 돈[錢]과 명주[帛]를 쓴다.
내역을 적은 글발이 있으며, 오직 친척이나 친구로서 친분이 두터운 경우에만 있는 것이다.

명자(名刺)를 갖추어 이름을 알리고,
손님과 주인이 모두 벼슬이 있을 경우 문장(門狀)을 갖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명지(名紙) -방자(榜子)- 를 마련하여 뒷면에 써서 먼저 사람을 시켜 알린 다음 예물과 함께 들여보낸다.

들어가서 곡하고 전물을 올리고 나서, 상주에게 조문하고 물러난다.
이름을 알리고 나면 상가(喪家)에서는 불을 켜고 촛불을 붙이고, 자리를 깔고서 모두 곡을 하며 기다린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주인 이하가 각기 제 위치에 나아간다.- 호상(護喪)이 나와 손님을 맞이하면 손님은 따라 들어가서 마루에 이른다. 그리고 상주 앞에 나아가 읍(揖)하며 “삼가 아무가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놀랍고 슬픈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들어가 잔이나 올리고[酹], -제전(祭奠)을 하지 않을 경우 ‘잔이나 올리고’를 ‘곡이나 하고[哭]’로 고친다.- 아울러 위례(慰禮)를 펼 것을 청합니다.” 한다. 호상이 손님을 인도하여 들어가면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서 슬피 곡하며 두 번 절한 다음 향불을 피우고 꿇어앉아서 -《가례의절》에 의하면, 손님이 여러 사람일 경우 존자(尊者) 한 사람만이 나아간다.- 차 또는 술을 따라 올리고 -집사자가 꿇어앉아서 잔을 받들어 손님에게 건네주면 손님이 받았다가 다시 집사자에게 돌려주어서 영좌 앞에 올려 놓도록 한다.-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호상이 곡을 그치게 하면 축(祝)이 꿇어앉아서 제문을 읽고 손님의 오른쪽에서 부의의 글[賻狀]을 드린다. 마치고 일어나면 손님과 주인이 다 같이 슬피 곡하고, 손님은 두 번 절한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제문은 불사른다. ○ 제전을 하지 않을 경우 분향(焚香)과 재배(再拜)만 한다.- 주인이 곡하며 나와서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면, 손님도 곡하며 동쪽을 향하여 답배(答拜)하고 앞에 나아가서 “뜻하지 않게 흉변(凶變)을 당하여 아무의 어버이 아무 벼슬께서 갑자기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죽은 사람의 벼슬이 높을 경우 ‘관사를 버리셨습니다’로 한다.- 삼가 생각건대 애모(哀慕)하는 심정을 어떻게 견뎌 내시겠습니까?” 한다. 주인이 “아무의 죄역(罪逆)이 심중(深重)하여 그 화가 아무의 어버이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삼가 제전(祭奠)과 친위(親慰)의 은혜를 함께 입고 나니 -제전을 올리지 않을 경우 ‘제전과……함께’라는 말은 없다.- 슬프고 감사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또 두 번 절하면, 손님은 답배를 한다. -살피건대, 호의(胡儀)에 “만약 조문자가 평교라면 한쪽 무릎을 내리고 손을 편 채 지팡이를 짚고 반답(半答)을 표시한다. 만약 상주가 높고 조문자가 낮다면 몸을 돌려 자리를 비켜 서서 상주가 엎드리기를 기다린다. 다음으로 낮은 자가 곧장 꿇어앉는다. 돌아 나올 적에도 모름지기 동작을 잘 조절하여 꿇어앉고 엎드리는 자세가 상주와 일치되지 않도록 한다.” 하였다.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조례(弔禮)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절할 때 손님은 답배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조문객이 왔을 때 주인이 절하여 사례하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답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의》와 《가례》에는 풍속을 따라 답배하라는 문구가 있다.” 하였다.- 또 서로 마주 보고 슬피 곡하다가, 손님이 곡을 먼저 그치고 주인을 위로하기를 “수명의 장단이란 운명에 달린 것인데, 슬퍼한들 어찌하겠습니까. 바라건대 효심을 억제하고 예제를 굽어 따르십시오.” 하고는 읍하고 나온다. 주인이 곡하며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호상은 마루까지 전송하고, 손님이 다탕(茶湯)을 들고 물러나면 주인 이하가 곡을 멈춘다. ○ 존장이 손님에게 절하는 예도 이와 같다. -만약 조문하는 예만 행한다면 각기 여차(廬次)에서 조문을 받는다. ○ 《의례》 사상례에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조문을 할 경우 휘장을 걷고 [소에 “휘장을 걷어 올렸다가 일이 끝나면 내린다.” 하였다.] 주인이 [《예기》 상대기에 “임금의 명이 있을 경우 상장(喪杖)을 버린다.” 하였다.] 침문(寢門) 밖에서 맞이하되, [주에 “침문은 내문(內門)이다.” 하였다. 《의례》 사상기(士喪記)에 “뭇 주인은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손님을 보고 곡을 하지 않은 채 먼저 문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북쪽을 향하여 선다. 조문자가 따라 들어가서 서쪽 계단으로 올라 동쪽을 향하여 서 있다가, 주인이 중정(中庭)으로 나아오면 [주에 “주인이 마루로 올라가지 않는 것은 신분이 임금보다 천하여서이다.” 하였다. 소에 “대부(大夫)의 상에 그의 아들은 마루에 올라가서 명을 받는다.” 하였다.] 조문자는 명을 전한다.[소에 “사자(使者)는 마루에 올라가서 명을 전한다.” 하였다. 주에 “명을 전하며, ‘임금께서 당신의 상 소식을 듣고 아무개를 시켜 조문하게 하였습니다. 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불행이 일어났습니까?’ 한다.” 하였다. 《국조오례의》에 “남쪽을 향하여 명을 전하며, ‘조문을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한다.” 하였다.] 주인은 곡하며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발을 구른다. 손님이 나오면 주인은 외문(外門) 밖까지 전송한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에 “부인은 영송(迎送)할 때 마루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며, 마루 아래로 내려오더라도 곡을 하지 않는다. 남자는 침문 밖으로 나와서는 사람을 보아도 곡을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에 “부인도 평교에 있어서는 본래 마루 아래로 내려오지 않지만, 만약 군부인(君夫人)이 조문을 왔다면 마루에서 내려와 뜨락까지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되 곡은 하지 않는다. 남자 역시 평교에게는 문밖까지 나오지 않지만, 만약 임금의 명이 있다면 나와서 맞이하되 역시 곡은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단궁 상에 “공자(孔子)께서는 들판에서 곡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하였는데, 그 주에 “‘그냥 아는 사이라면 나도 들판에서 곡을 한다.’라는 말을 부자(夫子)께서 일찍이 하셨으니, 이는 반드시 영위(靈位)를 설치하고 휘장을 쳐서 예를 이루어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싫어한다는 것은 들판이나 길가가 곡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 하에 “제(齊)나라가 거(莒) 땅을 습격할 때 기량(杞梁)이 거기서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길가에서 영구(靈柩)를 맞이하여 슬피 곡하는 것을 보고 장공(莊公)이 사람을 시켜 조문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대답하기를 ‘선인(先人)의 폐려(弊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조문을 받는다면 임금님의 명에 욕됨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하였다.[《춘추좌전》에는 제나라 임금이 그의 집에서 조문한 것으로 나온다.] ○ 《예기》 단궁 상에 “문자(文子)의 상에 제상(除喪)을 하고 나서 월(越)나라 사람이 조문을 오자, 주인이 심의(深衣)에다 연관(練冠)을 쓰고 사당에 대기하고 있다가 눈물을 흘렸다. 자유(子游)가 이 광경을 보고, ‘예서(禮書)에도 없는 예이지만, 그 행동이 예에 잘 맞도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1]의례 상복의 소 : ‘서자부득위장자삼년불계조야(庶子不得爲長子三年不繼祖也)’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2]의례 상복의 소 : ‘위인후자……약자(爲人後者……若子)’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3]의례 상복의 소 : ‘부졸즉위모(父卒則爲母)’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4]의례의 소 : 상복의 ‘모위장자(母爲長子)’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5]의례 상복의 주 : ‘위처하이기야처지친야(爲妻何以期也妻至親也)’ 조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이다.
[주D-006]상복 : 《의례》상복 편을 말한다.
[주D-007]의례 상복의 주 : ‘첩지사여군(妾之事女君)’ 조에 대한 정현의 주이다.
[주D-008]소 : 《의례》상복의 ‘무복지상이일역월(無服之殤以日易月)’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9]상복 : 《의례》상복 편을 말한다.
[주D-010]소 : 《의례》상복의 ‘공위적자지장상중상대부위적자지장상중상(公爲適子之長殤中殤大夫爲適子之長殤中殤)’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11]예기 옥조(玉藻)의 주 : ‘호관현무자성지관야(縞冠玄武子姓之冠也)’ 조에 대한 정현의 주이다.
[주D-012]문장(門狀) : 사대부들이 다른 사람을 방문할 때 쓰던 명자(名刺)이다.
[주D-013]주 : ‘부인영객(婦人迎客)’ 조에 대한 원(元)나라 진호(陳澔)의 주이다.
 
 
문상(聞喪)
분상(奔喪)의 제구(諸具)
사각건(四脚巾) : 《주자대전(朱子大典)》에 의하면 사각건의 제도는 다음과 같다. 사방 한 폭의 삼베 한 장을 준비하여 앞쪽 양 귀에 두 개의 대대(大帶)를 달고 뒤쪽 양 귀에 두 개의 소대(小帶)를 단 다음 정수리에 덮어씌워 네 귀를 아래로 드리운다. 그리고 앞쪽의 것으로 이마를 감싸 뒤로 돌려 뒤꼭지 부분에서 대대를 묶고, 다시 뒤쪽의 귀를 거두어들여 상투 앞부분에서 소대를 묶는다. 옛날의 관(冠)을 대신하는 것인데, 복두(幞頭)라고도 부른다.
백포적삼[白布衫]
승대(繩帶)
마구(麻屨)

어버이의 상(喪) 소식을 처음 듣고는 곡을 한다.
어버이란 부모(父母)를 말한다. 곡으로써 사자(使者)에게 답하고는 또 슬피 곡한 다음 그 연고를 묻는다. -《예기》 분상에는 ‘사자(使者)’ 밑에 ‘진애(盡哀)’ 두 글자가 있고, ‘그 연고를 묻는다’는 말은 ‘또 슬피 곡한 다음’이라는 말 앞에 있다.

역복(易服)을 하고,
삼베를 찢어 사각건을 만들고 백포적삼을 입고 승대를 두르고 마구를 신는다. -살피건대, 여기에는 마땅히 머리를 푸는 절차가 있어야 하나 《가례》에 나오지 않으니, 이는 윗글의 초종(初終)의 의절에 연결시킨 것이다. 《가례의절》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는 영구(靈柩) 앞으로 나아가 재차 옷을 갈아입는다.”는 조항에 “동쪽으로 나아가 초상과 같이 머리를 풀어 흐트린다.”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처음 상 소식을 듣고는 머리를 풀고 맨발을 하지만, 분상(奔喪)을 할 때는 머리를 풀고 길을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머리를 거두어 사각건을 썼다가 집에 가서 다시 머리를 풀고 발을 벗는 것이다.

드디어 길을 떠난다.
하루에 백리(百里)를 간다. 그러나 밤에는 길을 가지 않으니, 아무리 슬프더라도 해(害)는 피하자는 것이다. -《예기》 분상에 “부모의 상에만은 별을 보고 길을 떠나고 별을 보고 길을 멈춘다.” 하였다.

중도에서도 슬픔이 북받치면 곡을 하며,
곡할 때 시끄럽고 번화한 시읍(市邑)은 피한다.

그 주경(州境)과 현경(縣境), 그 성(城)과 집이 바라보이면 다 곡을 한다.
집이 성에 있지 않을 경우 그 고을이 바라보이면 곡을 한다.

대문 안에 들어가서는 영구 앞으로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다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제 위치로 나아가 곡을 한다.
처음 옷을 갈아입을 적에는 초상 때와 같이 영구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앉아서 슬피 곡하며, 재차 옷을 갈아입을 적에는 대렴ㆍ소렴 때와 같이 한다. -《예기》 분상에 “집에 가서는 대문 왼쪽으로 들어가서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 빈소(殯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앉아 곡을 한 다음, 괄발(括髮)을 하고 한쪽 어깨를 벗는다. 그리고 마루 동쪽으로 내려와 제 위치로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서서 곡을 하고는 [주에 “이미 빈소를 차렸으면 제 위치는 마루 아래이다.” 하였다.] 서(序)의 동쪽에서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다시 꿰어 입고 질(絰)을 갖추고 효대(絞帶)를 띤 뒤에 [주에 “집에 도착한 이튿날이 아니고 지금 질(絰)을 갖추는 것은 발상(發喪)한 지가 이미 며칠 지났으므로 여기에서 절제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소렴하기 전에 도착한 자는 집에 있던 자와 같으며, 산대(散帶)를 하지 않는 것은 시구(尸柩)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 소에 “집에 있던 자와 같다는 것은 위의(威儀)와 절도가 집에 있던 자와 같다는 말이며, 질(絰)ㆍ대(帶) 등은 본래 분상한 일수(日數)에 따라 쓴다.” 하였다.] 제 위치로 돌아가서 손님에게 절한다. 상례(相禮)하는 자가 여차(廬次)로 나아갈 것을 고한다.[주에 “여차란 의려(倚廬)이다.” 하였다.] 또 두 번째 곡을 할 적에 [주에 “집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이다.” 하였다.] 괄발을 하고 성용(成踊 발을 세 번 구르는 의식)을 한다.[주에 “모상(母喪)에는 문(免)을 한다.” 하였다.] 세 번째 곡을 할 적에도 [주에 “그 이튿날 아침이다.” 하였다.] 역시 괄발을 하고 성용을 한다.[주에 “모두 마루에 올라가서 괄발을 하고 한쪽 어깨를 벗되 마치 처음 도착한 자와 같이 한다. 반드시 두 번째 곡을 하고 세 번째 곡을 하는 것은 소렴과 대렴 때를 본뜬 것이다.” 하였다.] 모상의 분상도 모두 부상(父喪)의 분상례와 같으나, 두 번째 곡에서 괄발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분상 온 자가 집에 도착하면 집에 있는 남녀가 각기 제 위치로 나아가서 곡을 하고, 분상자는 영구 앞에 나아가서 절을 하며 곡을 한 다음, 존장(尊丈)에게는 배조(拜弔)를 하고 항렬이 낮거나 나이 어린 사람에게는 배조를 받는다. 그러고 나서 동쪽으로 나아가서 갓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버선을 벗으며, 초상 때와 같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서 어깨를 벗고 괄발을 하되, 상식(上食)할 때에는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꿰어 입고 백포두건[白布巾]을 쓰고 그 위에 환질(環絰)을 쓰며, 허리에 요질(腰絰)을 갖추어 삼 밑동을 늘어뜨리고 그 끝에 아울러 효대(絞帶)를 갖춘다.” 하였다. ○ 살피건대, 《가례》 및 《가례의절》은 《예기》와 각각 다른 점이 있어서 일단 함께 실어둔다.

집에 도착한 뒤 넷째 날에 성복(成服)을 한다.
집안 사람들과 서로 조문을 하며, 손님이 왔을 때 처음과 같이 절을 한다.

만약 아직 길을 떠날 수 없다. -《예기》 분상의 ‘아직 길을 떠날 수 없다면 [若未得行]’에 대한 소에 “이는 임금의 사명을 받들고 수행하던 일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을 경우 자기의 사사로운 일로써 공적인 일을 폐지할 수 없기 때문에, 성복을 하고서 임금이 다른 사람을 명하여 자기를 대신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하였다.- 영위(靈位)를 설치하되, 전물(奠物)은 차리지 않는다.
교의(交椅) 하나를 설치하여 시구(尸柩)를 대신하고 좌우 전후에 곡위(哭位)를 설치하여 의식대로 곡을 하되, 다만 전물은 차리지 않는다. 만약 초상집 쪽에 자손이 없다면 여기에서 의식대로 전물을 차린다. -《예기》 분상에 “분상을 하지 못할 경우 영위를 설치한 다음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성용(成踊)을 한다.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다시 꿰어 입고 수질(首絰)ㆍ요질ㆍ효대를 하고 위치에 나아가 손님에게 절을 하고 본 위치로 돌아와 성용을 한다. 또 두 번째 곡을 할 적에도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성용을 하며, 세 번째 곡을 할 적에도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성용을 한다.” 하였다.

변복(變服)을 한다.
역시 상 소식을 들은 지 나흘째이다. -살피건대, 변복은 나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아래에 성복 절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변(變)’ 자는 ‘성(成)’ 자의 잘못인 듯하다.

길에서 집에 이르기까지의 의식은 모두 위와 같다.
만약 초상집 쪽에 자손이 없다면 길에서도 아침저녁으로 영위를 설치하고 전물을 올리며, 집에 가서 변복만 하지 않을 뿐이다. 서로 조문하고 손님에게 절하는 절차는 의식대로 한다. -살피건대, 《예기》 분상에 “제상(除喪)을 하고 난 뒤에 돌아왔을 경우에도 괄발을 한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할 때 성복을 하고 분상을 하는 경우에도 마땅히 괄발의 절차는 있어야 할 듯하다.

만약 장사를 지내고 난 경우라면 먼저 묘소로 가서 곡을 하고 절한다.
묘소로 가는 자는 묘소가 바라보이면 곡을 하고 묘소에 이르러 곡을 하고 절하되 집에 있을 적의 의식과 같이 한다. 아직 성복을 하지 않았을 경우 묘소 옆에서 변복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곡을 하고 절한다. 나흘째 날의 성복은 의식대로 한다. 이미 성복을 하였을 경우도 역시 집에 돌아와 영좌 앞에서 곡을 하고 절하되 변복만 하지 않을 뿐이다. -《예기》 분상에 “분상을 하는 자가 빈(殯)하기 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경우 먼저 묘소로 가서 북쪽을 향하여 앉아 곡을 한 다음, 괄발을 하고 [주에 “위치는 동쪽이다.” 하였다.] 수질ㆍ요질ㆍ효대를 하고서 또 곡을 한다. 드디어 관을 쓰고 돌아오면 대문 왼쪽으로 들어가서 북쪽을 향하여 곡을 한 다음,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는다. 또 두 번째 곡할 적에도 괄발을 하며, 세 번째 곡할 적에도 마찬가지로 괄발을 한다. 사흘째에 성복을 한다.[소에 “분상하는 날까지 치면 나흘이 된다.” 하였다.] 만약 제상(除喪)을 하고 난 뒤에 돌아왔다면 묘소로 가서 곡을 한 다음, 동쪽 위치에서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수질ㆍ요질을 갖추고, 손님에게 절을 한다. 그러고 나서 또 한번 슬피 곡하고 드디어 상복을 벗는다.[주에 “묘소에서 상복을 벗고 집에서는 곡하지 않는다.” 하였다.]

자최(齊衰) 이하는 상 소식을 들으면 영위를 설치하고 곡을 한다.
존장은 정당(正堂)에서, 비유(卑幼)는 별실(別室)에서 한다. -《예기》 분상에 “자최 이하는 제 위치에 나아가 슬피 곡하고 나서 동쪽에서 문(免)을 하고 수질을 쓰고는 위치로 나아가 어깨를 벗고 발을 구른 다음,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꿰어 입고 손님에게 절을 한다.” 하였다. ○ 《예기》 잡기에 “집에 빈소가 있는데 [소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아직 장사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하였다.] 외상(外喪)의 소식을 접할 경우, [소에 “멀리 사는 형제의 상을 말한다.” 하였다.] 다른 방에 가서 곡을 하며, 들어가서 제전(祭奠)을 올린다.[소에 “이튿날 아침에 부모의 중복(重服)을 입고 빈소에 들어가서 전을 올림을 말한다.” 하였다.] 전을 마치고 나와서는 옷을 바꾸어 입고 위치로 나아가기를, [소에 “중복을 벗고 아직 성복하지 않은 새 상의 복을 입고 어제의 다른 방의 위치로 나아감을 말한다.” 하였다.] 처음 상 소식을 접하고 위치로 나아가던 예식처럼 한다.” 하였다. ○ 《예기》 분상에 “부당(父黨)의 곡은 사당에서 하고 모당(母黨)과 처당(妻黨)의 곡은 침전에서 하며, 스승의 곡은 사당문 밖에서 하고, 친구의 곡은 침문 밖에서 한다. 또 그냥 아는 사람의 곡은 들판에서 하되 휘장을 친다.” 하였다. ○ 관례(冠禮)ㆍ혼례(婚禮)ㆍ제례(祭禮) 중 상을 만난 경우는 모두 《예기》의 증자문(曾子問) 및 잡기에 나오므로, 여기에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 《예기》 분상에 “멀리 사는 형제의 상 소식을 이미 제상(除喪)을 하고 난 뒤에 들었을 경우에도 문(免)ㆍ단(袒)ㆍ성용(成踊)을 한다.” 하였고, 그 주에 “시마복의 경우 비록 태복(稅服)은 하지 않지만 처음 들었을 때 역시 변복(變服)은 한다.” 하였다.

만약 분상을 한다면 집에 가서 성복을 한다.
분상을 하는 자는 화려하고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 버리고, 행장이 꾸려지면 즉시 길을 떠나며, 이미 도착하여서는 자최복을 입을 자는 고을이 바라보이면 곡을 하고 대공복을 입을 자는 대문이 바라보이면 곡을 하고, 소공복을 입을 자 이하는 대문에 이르러서 곡을 한다. -《예기》 분상에 “시마는 위치에 나아가서 곡을 한다.” 하였다.- 대문 안에 들어가서는 영구 앞에 나아가서 곡을 하고 두 번 절한 다음, 성복을 하고 위치로 나아가 의식대로 곡을 하고 조문을 한다. -《예기》 잡기의 소에 “소공 이하는 주인이 성복하는 절차를 만나면 주인과 함께 성복을 하고 대공 이상은 반드시 날수를 채운 뒤에 성복을 한다.” 하였다.

만약 분상을 하지 않는다면 나흘째에 성복을 한다.
분상을 하지 않을 경우 자최복을 입을 자는 사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영위를 설치하여 회곡(會哭)을 하며, 나흘째 아침에 성복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대공복을 입을 자 이하는 처음 상 소식을 듣고 영위를 설치하여 회곡을 하며, 나흘째에 성복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매월 초하루에 영위를 설치하여 회곡을 하되, 달수가 이미 찼을 경우 다음달 초하루에 영위를 설치하고 회곡을 한 다음 복을 벗는다. 그사이에도 슬픔이 북받치면 곡을 할 수 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2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22 족보 도서관 2012-08-11 0 3467
21 朝鮮王朝의 法典 2012-08-11 0 3535
20 사계전서(沙溪全書) 상례비요(喪禮備要)-1 2012-08-10 0 4734
19 사계전서(沙溪全書) 상례비요(喪禮備要)-2 2012-08-10 0 3224
18 사계전서(沙溪全書) 상례비요(喪禮備要)-3 2012-08-10 0 3461
17 사계전서(沙溪全書) 상례비요(喪禮備要)-4 2012-08-10 0 3362
16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1 2012-08-10 0 3659
15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2 2012-08-10 0 2963
14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3 2012-08-10 0 2872
13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4 2012-08-10 0 2940
12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5 2012-08-10 1 3188
11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6 2012-08-10 0 2995
10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7 2012-08-10 0 2695
9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8 2012-08-10 0 2778
8 동방 전통문화 경전 묶음 2012-08-07 0 2526
7 위키백과 우리모두의 백과대전 2012-07-31 0 2344
6 네이트 사전 2012-07-31 0 2317
5 (문화사료) 오늘의 과학상식 2012-07-31 0 2393
4 사례편람 원문보기 2012-07-18 0 4510
3 한국고전종합검색 2012-07-18 0 2876
2 주자가례(朱子家礼) 2012-07-15 0 3483
1 우리민족 특색문화 2012-07-15 0 10759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