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원(무형문화재<조선족 장례풍속>대표전승인)
발상(發喪):혼을 부른후 고인이 여전히 소생하지 못한다면 상주(喪主)는 서둘러서 상복을 바꿔 입습니다. 고인의 장자, 혹은 장손이 상주로 되고, 가속의 성원들은 모두 상제(喪制)가 되며, 기타의 친척들은 모두 복인(服人)이 됩니다. 상주가 이미 결혼하였다면 머리에 삼베로 만든 굴건(屆巾)을 쓰고, 아직 결혼전이라며 머리에 벼짚과 삼베 오리로 거칠게 꼬아 만든 수질(首絰)을 두르며, 몸에는 삼베로 만든 상포(喪袍)를 입고, 허리에는 허름한 요질(腰絰)를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전형적인 옛날 죄수 차림새이지요. 삼베옷(麻衣)이 바로 신라때의 죄수복이였는데, 삼베옷을 상복으로 하는 것은 상주가 부모를 살려내지 못한 죄인이란 뜻이랍니다.
동네 좌상어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고인의 혼백을 접습니다. 혼백이란 이미 육체를 떠난 고인의 영혼을 부착시켜서 임시 거처하시게 한다는 상징물입니다. 령구앞에 령좌를 차리면서 혼백을 중앙에 모시는데, 령구은 이미 생명공능을 상실하고, 자기사명을 완수하여 이제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대상이고, 혼백에 부착되여 있는 영혼이야 말로 바로 오늘 장례를 치러서 저승으로 륭중히 떠나 보내게 되는 중심 대상으로 됩니다.
상주가 상복을 바꿔 입은후 일동은 상주를 배동하여 령좌앞에서 곡을 시작합니다. 곡소리로 초상이 났음을 온 동네에 알리며, 그 곡소리가 높을수로 효자 가문이라고 동네 사람들의 호평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에 부자집에서 상(喪)을 당하게 되면 높은 소리로 곡을 할수있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쓰기도 하였습니다.
곡을 하는것을 호곡(號哭), 혹은 애호(哀号)이라고 하는데, 고인의 가속, 즉 상제들이 곡을 할때에는 “애고! 애고!(哀告)”하는 소리를 내고, 고인의 친속, 즉 복인들이 곡을 할때에는 “어이! 어이!(厄矣)”하는 소리를 냅니다.
장례는 일반적으로 삼일장, 오일장, 칠일장으로 하고 짝수일(双日)로 하지 않습니다. 음양학설에 원리에 의하면 喪事는 음(陰)에 속하고, 홀수는 양(陽)에 속하는데 장례와 장례날자가 서로 음양이 평형되여야만 이번에 당한 상(喪)의 위기를 최소한으로 극복하고 안전하게 넘길수 있다는 철학적 관념입니다. 그렇지 않고 2일장, 4일장처럼 짝수일로 한다면 喪事가 같은 陰氣에 힘입어, 가문의 위기가 가배로 엄중해 질수 있다는 관점이지요. 그리고 쌍수를 둘로 나누면 “같다” 혹은 ”중복되다”로 표현 되지만, 홀수를 둘로 나누면 “다르다” 혹은 “특수하다”로 표현 되므로 장례의 모든 상관 사무에서 홀수를 채용함으로써 장례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이런일이 중복되지 말기를 바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장례에서는 제물의 개수도 짝수로 하지 않으며, 혼을 부를때도 홀수로 세번 부르며, 절을 할때도 홀수로 세번씩 하며, 한잔술도 홀수로 세번 나누어 붓습니다.
우리민족이 장례시에 삼베천으로 상복을 지어 입는 풍속은 신라의 애국지사인 마의태자를 기념하면서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三國史記卷第十二》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935년 10월,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힘이 없게 되자,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하였습니다.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버릴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견결히 반대하였으나, 결국 이미 무능해진 왕실에 의하여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작성되었습니다. 태자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왕에게 사직을 고하고, 개골산(皆骨山: 金剛山)에 들어가 바위옆에 초막집을 짓고, 나라를 구하지 못한 죄인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당시 죄수복인 삼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내다가 한을 품고 죽었습니다.
그후 민간에서는 그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부르면서 가문에서 상(喪)을 당했을 적마다 생전의 그를 본따, 삼베로 거칠게 만든 허름한 죄수복을 입는것으로 망자(亡者)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시하게 되였다고 합니다.
소렴(小殮):렴습(殮襲)이라고도 하는데 유체를 목욕시키고, 유체에 수의를 입히고, 유체를 천으로 싸서 묶는 절차로서 마을의 덕망이 있는 분들이 책임지고 집행합니다.
집행인은 먼저 고인의 얼굴을 깨끗이 하고, 몸을 더운물로 닦고, 수의를 입히고, 명모를 씌우고, 악수를 끼우고,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남좌녀우로 고인의 손에 감아 놓으며, 버선을 신기고, 반함을 진행합니다. 수의를 입히면서 옷섶을 좌로 여미고, 단추를 채우지 않고, 고름을 매지 않는데, 이미 속세를 해탈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민족은 결혼을 하면서 부터 안해는 두 내외의 수의를 만들기 시작하고, 남편은 두 내외의 관에 넣을 봇(봇나무 껍질)을 준비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수의를 만듬에 있어서 평소에는 감을 마련하고, 만드는 것은 사년에 한번씩 있게 되는 윤달에 만들었는데, 윤달은 공짜달로서 저승과 상관되는 그 무슨일을 하여도 탈이 없다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환갑이 되면 자손들이 수의를 선물하는 전통도 있었는데, 효행으로 인정되여 왔습니다. 수의는 전통적으로 비단이나 명주같은 고급감으로 하였으며, 삼베옷은 죄수복이니 수의로는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와서 왜정시기에 나라가 빈궁해 지고, 물자가 결핍하게 되면서 삼베로도 수의를 만들게 되였는데, 삼베수의가 유체의 해화를 촉진시키고, 뼈의 색갈을 곱게 하는 공능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점차 삼베수의가 보급되였습니다. 수의는 보통 흰색으로 하는데, 만약 망자가 아직 출가전의 처녀거나 총각일 경우에는 색갈이 있는 고운 수의를 선택하며, 인형, 혹은 화상으로 망자의 신랑, 혹은 신부를 만들어 두었다가 입관할때 함께 넣어 줍니다. 그렇지 않고 망자의 처녀나 총각 신분 그대로 저승에 보낸다면 처녀망자는 “손각시”로 되고, 총각망자는 “몽달귀신”이 되여, 사람들을 해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민족 저승문화에 의하면 저승의 최고 관리자는 염라왕이고, 여러 부서에서 구체 직책을 맡고 있는 영혼은 神이라고 하고, 직책이 없이 한가히 보내고 있는 영혼은 仙이라고 하며, 출가전에 죽은 영혼은 鬼神라고 하고, 죄를 범하여 징벌을 받아 죽었거나, 자살해 죽은 영혼을 魔鬼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도깨비란 것이 있는데 주로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승의 호적 제도에서 귀신은 정상적으로 죽은 한사람 이상의 소개가 있어야 입적할수 있고, 마귀와 도깨비는 정상적으로 죽은 두사람 이상의 소개가 있어야 입적할수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소개인을 찾아 갈팡질팡 헤매다가 왕왕 애매한 사람들을 붙들어서는 죽게 한답니다. 그리하여 동네의 그 어느집에서 비 정상적인 죽음 사건이 생겼다면 재액과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로 자기집 대문에 처용랑(處容郞) 화상을 그려서 붙여놓는 풍속이 있습니다.
처용랑(處容郞)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의 헌강왕(憲康王)이 동해의 개운포(開雲浦)에 유람했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해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 안개가 온통 뒤덮이여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왕이 모사에게 물었더니, "이것은 동해 룡왕이 심술을 부리는 것이오니, 그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한가지 하사이다" 하고 모사가 대답합니다. 대왕은 곧 룡왕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울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자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걷힙니다. 그래서 그곳을 개운포라고 하였답니다. 대왕의 뜻에 감사하여 룡왕은 일곱 동자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기리하여 춤추며 음악을 연주합니다. 룡왕은 돌아 가면서 동자 한 사람을 대왕에게 바쳤고, 대왕은 그 동자를 서울로 데려가서 정사를 보게 하고,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처용은 급간(級干)의 지위에 올라 특별히 고운 미녀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심을 품은 역신(疫神)이 인간의 모습을 해 가지고 처용 아내의 침실에 침입했습니다. 처용이 밤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침상우의 이불밑에 발이 네개 보였습니다. 그것을 본 처용은 화를 내기는커녕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떴습니다(처용가: 동경 밝은 달밤에 밤드리 노닐다가, 들어가 자리 보니 가라리 네히러라, 둘은 내해요 둘은 뉘해언고, 본디 내해다마는 앗아날 어찌할꼬?). 역신은 처용의 이런 태도에 너무나 송구하여 그의 앞에 굻어 앉아, "제가 공의 부인을 너무 사모하던 끝에 이런 과실을 저질렀는데, 공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 바다같은 마음에 탄복합니다. 앞으로는 공의 화상(畵像)을 보는 것만으로 모든 악귀들이 공의 문 앞에서 얼씬하지 못하게 할것을 맹세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처용랑(處容郞)의 문자나 화상을 그려서 문짝이나 기둥, 벽 따위에 붙여서 전염병이나 악귀를 쫓는 풍속이 생겼답니다.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놓는 것은, 고인께서 지금부터 시작하여 자식들을 포함한 속세의 모든 일에 관심을 끄시고, 일심으로 헝클어진 실타래만 풀면서 안온한 마음으로 영원히 휴식하라는 뜻이랍니다. 이승과 저승은 필경 길이 다르니, 부모의 망령이 저승에 가서도 자식들을 잊지못해 이것저것 참견하면서 로심초사 하신다면, 저승에 계시는 부모의 망령에게 미안한 일일뿐만 아니라, 이승의 자식들에게도 참으로 고달픈 일이 된답니다.
반함이란 고인의 입에 쌀알을 넣는 절차인데,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세번에 나누어 쌀알을 고인의 입안에 넣어 드립니다. 쌀알을 넣을때 첫 숟가락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하고 외칩니다. 그 다음 구슬 세알, 혹은 은전 세잎을 하나씩 넣는데, 차례로 “백량이요”, “천량이요”, “만량이요”하고 외칩니다 (지금은 보통 엽전으로 대체 하거나 혹은 넣지 않습니다). 반함을 하는 의미는 고인께서 머나먼 저승길을 가시면서 써야할 식량과 로자를 충분히 마련해 보낸다는 뜻입니다.
반함이 끝나면 입을 다물구고, 약솜편과 면백으로 얼굴을 싸고, 전폭 백포로 전체 유체를 싸고, 백포오리(绞带라고도 함)로 고인의 어깨부위, 허리부위, 발목부위 등 세곳을 각각 묶고(다섯곳 묶기도 하고 일곱곳 묶기도 하는데, 묶을때 옭매지 않고 오리를 비틀어 묶습니다), 칠성판 위에 지금(地衾)을 펴고, 그 위에 렴습을 마친 유체를 모시고, 유체위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대렴(大殓):바로 입관하는 절차입니다. 전형적인 조선족 관의 모양은 장방형 립방체인데 관체와 관 덮개로 이루어 졌습니다. 먼저 령좌를 치우고, 유체를 옮기고, 관을 자리에 놓습니다. 입관할때 먼저 관 덮개를 내리고, 관 바닥에 칠성판을 깔고, 그우에 지금(地衾)을 펴고 그우에 렴을 마친 유체를 넣고 자세를 조절한 다음, 고인의 생전의 옷견지들과 아끼던 물건들로 공간을 채웁니다.
고대의 왕실, 혹은 부자집에서는 장례때 입관하면서 수장품으로 귀중한 물건들도 넣고, 진짜 은전들도 많이 넣었습니다. 고인이 저승에 가서 지내는 환경을 이승과 같은 표준으로 리해하면서, 저승에 가서도 돈과 재물이 많아야 고인이 행복할수 있고, 또 저승에서 고인이 행복해야만 이승의 자손들도 행복할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고대에서는 수장품을 모두 실물로 선택하였지만, 근대에 들어 와서 나라가 혼란하고, 도굴이 우심해 지고, 또 점차 과학상식이 보급되면서 수장품은 거의 모두가 상징적인 물건으로 대체되였습니다. 장례용 지전이거나, 종이로 만든 물건을 불에 살으는 것이 그 실례입니다. 그리고 저승으로 돈, 혹은 물건을 보내는 방법상에서도 직접 실물을 수장하는 방법을 쓰던 데로부터, 제사를 지내거나, 혹은 상징물을 불에 살으는 방법으로 대체하게 되였습니다.
유체를 관에 넣을 때, 사전에 봇을 준비해 두었던 가문에서는 봇 껍질로 유체를 싸는데, 봇 껍질은 부패를 방지하고, 유체를 깨끗하게 해화시키는 공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 입관한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고, 관 덮개를 덮고, 은정을 박아 봉관하고, 구의(柩衣)로 관을 덮습니다. 그리고 다시 병풍이나 만장을 당겨 놓아 령구를 가립니다.
수령(守靈):우리민족 전통 효도관념에서는 부모가 사망하면 그 경우가 어떻든 상관없이 모두가 자손들의 불효로서 그 죄가 참으로 심중하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부모를 살려내지 못한 죄이지요. 그러므로 상주는 전통 죄수복인 허름한 삼베옷을 입고, 죽물만 먹으면서, 장례가 끝날때까지 한시도 령구옆을 떠나지 않고 벌을 받습니다. 이것을 수령(守靈)이라고 하는데, 이제 얼마 안되는 시간 후이면 저승길을 영영 떠나가시게 되는 부모의 망령을 기리하여, 영결전의 마지막 얼마 안되는 시간이나마 함께 하여 드림으로써, 부모 생전에 채 드리지 못한 효도와 情意를 다소나마 표시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대부분 상주 어른들은 부모의 유체를 빈의관 랭장실에 물건처럼 맡기고는 제집에 돌아가 다리를 쭉 펴고 실컸 제잠을 자고, 장례날 아침에 버젓이 빈의관에 나오는데, 참으로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지난밤 부모님께서는 추우신 랭장실에 고독하게 홀로 갇혀서 얼마나 슬피 우셨을가? 우리의 인성이 어찌하여 이 정도까지 되였을가? 지금 조선족의 소위 장례는 장례라고 할수없으며 단지 유체처리라고 할수밖에 없습니다. 쓰레기 처리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밤에 부모님의 령구를 지키지 않는 현상은 아마 이 세상에서 우리 조선족이 유일한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 조선족은 죽은후 령구를 지켜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이미 가치가 떨어졌다는 표징이 아닐가 두렵습니다. 조선족의 죽음이 값이 없다면, 살아있는 조선족은 값이 얼마나 될가요?
현대 과학적 관점에서 많은 경우에 사람이 사망하시여 몇시간, 혹은 더 긴 시간동안에 의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육체의 공능은 이미 모두 상실 되였지만, 그들의 의식은 아직 완전히 사라진것이 아니므로 자기의 유체를 수숩하면서 당신들이 하는 모든 말을 그들이 듣고 계실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망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많은 사람들의 진술이 이미 이점을 증명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망 당날로 유체를 화장해 버리는 것은 망자에게 너무나도 잔혹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망자 생전에 끼친 미안한 일들에 대하여, 반드시 제사나 참회의 방식으로 망자의 용서를 빌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것이 병의 근원이 되거나, 재화의 발단으로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과보응 관념입니다. 저승과 이승은 공간상에서는 서로 상관이 없지만, 리념상에서는 중첩이 되는 세계이므로 저승의 영령들이 얼마든지 신통력을 발휘하여, 이승의 사람들에게 도움, 혹은 징벌을 줄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리하여 제사문화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민족 저승문화에 의하면 저승사자가 망자의 영혼을 모시고 저승으로 떠나는 시간이 장례 마지막 밤의 자정이라고 합니다. 삼일 장례일 경우, 첫날 밤 자정에도 떠날수는 있었지만, 저승사자들은 하루라도 제사음식을 더 맛보려는 욕심에서 마지막 날까지 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례날자가 길수록 저승사자들에게는 기쁜 일이며, 망자 영혼에 대한 보살핌에도 더욱 신경을 쓰게 된답니다.
망자의 영혼은 낮에는 양기가 너무 강하여 혼백에 부착되여 감히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밤의 자정이 되면 상주, 혹은 기타 가속 사람들의 꿈, 혹은 환각에 현령하시여 유언같은 것을 남기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밤에는 친속과 친구들이 상주를 동무하여 함께 밤을 새면서 령구를 지키는데, 자정이 되여 망자의 영혼이 현령하실수 있는 시간에 맞추어 새벽제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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