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생애에 대중들이 익히 알고 즐겨 부르는 가요 한두수만 창작해도 유능한 작곡가로 대중들의 애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작곡가 최연숙선생(79세)은 반세기 남짓한 작곡생애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타향의 달밤”, “두만강천리”, “진달래고향” 등 중국조선족이라면 누구나 익숙히 알고있는 대표적가요를 비롯한 근 800여수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청춘원무곡》, 《최연숙작곡집》, 《진달래고향》 등 3권의 작곡집을 펴냈으니 가히 천부적재능을 지닌 작곡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5년전, 연변인민출판사 《연변음악》잡지 가사편집을 담당하던 시절, 나는 작곡편집을 맡은 최연숙선생과 1년간 한사무실을 쓰게 되였다. 당시 선생은 고희를 훨씬 넘긴 고령임에도 가요를 창작할 때면 반나절 아무 말도 없이 가사를 곱씹으며 선률착상에 달라붙었는데 다가가 말을 걸어도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깊은 사유의 골짜기에 침잠해있군 하였다. 그런 선생의 모습을 보면서 선생이 명곡을 창작할수 있는 비결을 깨도하게 되였다.
최연숙선생의 고향은 조선이다. 1944년 이른봄, 최연숙선생은 부모님을 따라 조선 함경남도 함흥을 떠나 중국 안도현 오도양창에 터를 잡았다가 후에 룡정시 로투구에 정착하게 된다.
최연숙선생이 17살 되던 해에 조선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초중 2학년생이던 선생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압록강을 건너 초연이 자욱한 전장으로 달려갔으며 부대 문공단 악대에 편입되여 트롬본을 불었다. 선생은 때로는 전사들의 사기를 진작할수 있는 가요들을 창작하느라 전호속에 엎드려 흙먼지를 들쓰며 필을 놀리기도 했다.
전쟁의 총성이 멎자 최연숙선생은 조직의 배려로 하북성예술학교에 추천받아 음악리론과 여러가지 악기를 체계적으로 배울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3년간의 피나는 수련을 거쳐 학업성적이 월등했던 선생은 모교에 남아 바이올린, 피아노 등 학과를 가르치는 청년교원으로 되였다.
1958년, 선생은 연변조선족자치주문화처에 전근하고 선후로 룡정현문공단, 연길시예술단 등 단체에서 단장 겸 악대지휘, 연변인민출판사 음악편집 등 여러 직무를 담당하였다.
지난 세기 90년대로부터 최연숙선생은 가요창작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92년 연변음악가협회는 산수가 좋은 훈춘시 경신진에서 전 주 음악창작강습반을 개최하였다. 당시 리상각시인이 최연숙선생에게 가사 몇편을 주면서 작곡을 부탁하였는데 그중 화룡 토산자중학교 어문교원이 창작한 가사 “타향의 달밤”이 눈길을 끌었다. 인차 작곡을 끝내고 강습반에서 시창하였는데 반응이 좋았다. 후에 김지협가수의 은은하면서도 정서 깊은 목소리로 전파를 타면서 대뜸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20여년에 걸쳐 고향을 떠난 중국조선족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향수가로 자리매김되였다. 그외 선생의 대표작 “두만강천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등 가요들은 물의 흐름처럼 자유분방하면서도 곡선적인 음악선률로 가사와 한덩어리로 융해시켜 조선족들의 특유한 미적정서를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한시대를 풍미하는 인기가요로 부상하였다.
최연숙선생은 탁월한 음악적성취로 《중국음악가사전》, 《세계인물사전》, 《중국전문가사전》에 이름을 올렸고 “중국개혁개방문예종신성과상”,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50돐 문예사업 선진일군”, “진달래문예상”,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족문화사업 특수기여인물” 등 굵직한 영예를 받아안았으며 2010년에 국가우정부는 “중국예술인물시리즈우표”―“최연숙반신상”을 발행하였다.
김인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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