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行하는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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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낮은곳에 덕이 모여(시조한편) 댓글:  조회:1236  추천:0  2021-09-30
덕있는자 공경함은 내덕쌓기 위함이고 어진이에 다가감은  착해지기 위함이라 섬김에 존경있고 낮은곳에 물이 모이니 덕있는자 그깊음은 낮은곳에 있음이라.
129    심어야 거두리(시조한편) 댓글:  조회:1116  추천:0  2021-09-29
오늘은 이걸 쫒고 내일은 저걸 쫒고 복(福)을 쫒고 부(富)를 쫒아 남는것 하나없네 복과 부는 쫒는게 아니오라 거두어야 하리니 지가 심지아니하고 어디서 거두리오.
128    이것도 지나가니 (시조한편) 댓글:  조회:988  추천:0  2021-09-28
세상흔드는 그힘도 지나간담 지나가고 죽을듯 힘들던 그 일도 어느새 지나갔네 세상에 아니가는일 없으니 뭐가 대단하리오.
127    마음(시조한편) 댓글:  조회:1132  추천:0  2021-09-27
하늘나라 저 달님도 어디에 묶이여서 아침이면 사라지고 저녁이면 다시오고 매일오는 저햇님도 저기지고 여기뜨니 여여부동 내마음에 삼라만상 다담았네
126    고독(시조한편) 댓글:  조회:1144  추천:0  2021-09-26
새는날고 별은기고 달님은 날따르고 간밤에 일월성신 저하늘에 갇이였네 혼자서 빛을내고 허공속에 머무르니 별도달도 햇님도 외롭기는 나와같소. 
125    욕망(시조한편) 댓글:  조회:957  추천:0  2021-09-26
어제는 가버렸고 앞날은 알수없소. 래일이 먼저올지 죽음이 먼저올지 간것은 이젠없고 올것은 허망한데 아직도 무얼찾아 그렇게 분주하오.
124    재물(시조한편) 댓글:  조회:1074  추천:1  2021-09-24
쓰고나면 없어진듯 아니써도 거기있는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도 아니한데 잠간만 빌려쓰고 떠나면서 두고가오.
123    수행(시조한편) 댓글:  조회:977  추천:1  2021-09-23
생각이 틀리다면 바른생각 되돌리고 말씀이 지나치면 어김없이 삼가하고 행동이 그르면은 용하게도 고침이니 잘못된 나자신과 싸우는게 수행이네
122    질문(시조한편) 댓글:  조회:1732  추천:0  2021-09-22
가려거던 어디가고 살면서는 무얼할가 여기왔다 저기갔다 헤매이다 죽으니 아쉽다 이놈아 물어보지 그랬냐
121    목표 (시조한편) 댓글:  조회:1814  추천:1  2021-09-18
    산길도 길이고 가는길도 길이거늘    오르락 내리락 어디메가 내길이냐   가야할곳 못찾으면 가는곳이 정처없다.
120    재물신이 오시는 날에는 댓글:  조회:2902  추천:9  2021-02-16
   나는 베푼다는 말보다는 나눈다는 말을 더 좋아한다. 어쩐지 베푼다는 말속에는 위에서 아래로 던져주는 듯한 오만함의 의미가 깃든 듯해서,  좀 더 평등한듯, 부드러운듯한 나눔이라는 말뜻이 한층 더 좋아져서이다. 금년 춘절에는 여느때보다도 폭죽소리가 요란하다. 특히 코로나19로 전세계가 다 같이 피해를 입는 이때 다들 폭죽을 터뜨려서 그 역병을 물리치려는 심리가 작용한 모양이다. 중국에서는 나쁜 귀신을 쫒거나 액운같은것을 쫒을 때도 폭죽이요, 결혼이나 좋은 모임에 혹은 누군가를 영접하는 훌륭한 날에도 폭축을 터치는것이 상례다.   오늘은 선방에서 조용히 명상을 하다가 멀리 시내쪽에서 울리는 폭죽소리에 깨어났다.  매년 이맘때면 떠들썩한 술자리보다는 참선방에서 명상을 하며 , 가끔씩 글도 쓰고 차도 마시면서 조용히 지내는것이 관례가 되였다.   위챗을 들여다보니 오늘은 마침 정월 초닷새다. 민간에서 재물신을 맞이하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시 요란하게 폭축을 터뜨리나부다. 어디서나 재물을 좋아하기는 사람이라면 마찬가지인가 본다.  민간에서뿐 아니라 불교에도 황재신이라고 해서 어려운자들에게 재물을 주는 신이있다. 정월 초닷새에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재물을 점지하나 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재물신을 청한다.   중국 명나라때까지만 해도 민간에서는 대부분 백성들이 재물신이라기 보다는 灶神이라고 해서 부뚜막신을 모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궁핍한 상황에서 재물보다도 부뚜막에 불을 지펴 밥을 먹을수 있게 해달고 기도하는것이 그 유래였던것이다. 청나라 후기에 들어와서야 점차 재물신을 모시는 민간신앙이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할수 있다. 정월 초나흘에서 초닷새 자정에 들어서기 전까지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자정이 들어설때 폭축을 터뜨리며 재물신을 청한다. 집안의 가장과 남자 가족들이 함께 폭죽을 터치고 나서 큰소리로   (迎财神了! )라고 외친다. 그리고 집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대문까지 왔을때 다시  (财神进门了!)라고 한마디 한다. 이때 집안에 있던 가족들이 다 같이  (迎接财神爷)라고 큰 소리로 화답한다.  이어서 그런식으로 재물신을 집안의 정문까지 들여서 비로서 가족의 가장이 대표로 집안에 모시고 있는 재물신의 상이나 족자에 향을 사르고 초불을 밝힌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절을 하면서 새해에 많은 재물을 모을수 있기를 기원한다.   재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수단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서 어떻게 쓰느냐가 인간에게 있어서는 더 큰 숙제이다. 언젠가 아들놈하고 미래 비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과연 당연한 대답이 왔는데 였다.  그게 나누는 즐거움일 것이다. 우리는 뭔가를 나눌때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 재물뿐이 아니다. 미소를 나누어도, 좋은 말을 나누어도,  격려의 포옹을 나누어도 좋다. 우리는 뭔가를 먹고나면 필요한 만큼 남기고 소화기관을 통해서 다시 자연에 돌린다.  만약 먹기만 하고 변비가 심하다면 큰일이다. 그게 힘든 줄 모르고 요즘 사람들은 재물을 모으기만 하고 쓸줄을 모른다. 변비에 걸려도 크게 걸렸다. 그러나 진정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나눔의 의미를 안다. 그래서 재물을 가치있게 쓸수 있기를 기도한다. 가치있게 쓸수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부와 재물이 차례지는것 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재물신은 참으로 복 받은 신이시다. 언제나 주실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시랴. 여기에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재물신을 청하면서 하는 기도문이다. 재물신에게 기도할때 그냥 하거나 하면 아니된다.  먼저 동서남북과 중앙을 합해서 다섯방향의 재물신 모두의 명호를 차례로 부르면서 각 방향의 재물이 모여들기를 기원한다. 이어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재물신도 재물을 바르게 쓰는 자에게 더 많은 재물을 준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신에게 재물을 빌기전에 우선 재물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쓰겠다는 준비가 되여 있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기 때문이다. 준비된 자야만 재물은 가장 유용하게 쓰임을 재물신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말에 는 말이 있다. 바로 재물이 모이지 못함은 그것의 쓰임을 몰라서임을 알려주는 명구이다. 몇해전에 공부하다가 재물에대해 닿는 생각이 있어서 써놓은 우리 말 시조 한편을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제목은 그냥 이라고 달았다.   쓰고나면 없어진듯 아니써도 거기있는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도 아니한데 잠간만 빌려쓰고 떠나면서 돌려가오.     이렇게 글을 적다가 보니 벌써 섣달 초닷새의 자정이 지나간다. 문뜩 유대인들의 속담이 떠올랐다. 는 말이다. 정말 멋진 말이 아닌가?! 이 세상의 어머니들은 신들이 다하지 못하는 영역에 서서 우리를 보살피는 신의 역할을 하신단다. 그와 마찬가지로 재물신이 오시는 날 재물을 나누면 나도 재물신과 다름이 없다. 언제 어디서나 재물을 나누는 자는 받는 자에게는 재물신이다. 나도 위챗으로 먼저 내가 존경하는 몇몇 스님들께 작은 돈을 보내 드렸다. 수행하시다 요긴하실때 쓰시라는 용돈의 의미의 공양이다. 이어서 주변에서 장학재단과 같은 좋은 일들을 하고 계시는 분들의 위챗에도 좋은 일에 써달라는 문구와 함께 작은 돈이지만 성의껏 보내 드렸다. 재물도 재물이지만 우리는 가지고 있는 많은것을 나눌줄 알아야 한다. 바로 나눔을 행하는 자가 재물신이며, 재물신께서 우리곁에 오시는 날의 바른 의미도 나눔임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재물신이 오시는날 폭죽보다도 나눔을 실천한다면 그게 재물신과 복신을 청해들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2021년 음력 정월 초닷새 축시 도문 일광산 수월선원에서.
119    아버지로의 성장 댓글:  조회:3069  추천:26  2021-02-10
아버지로의 성장   김문일      요새는 코로나19 때문에 지구촌이 하나 같이 부산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떤 리유이든간에 자연이 우리에게 경종을 주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코로나19로 인해서 년말련휴기간인데도 어디 나다니기가 거북스럽다. 나도 오랜 만에 한가한 시간들을 만나게 됐다. 그래서 집안의 서재에 들어박혀서 《西藏生死书》라는 책을 읽고 있다. 절강대학 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인데 자못 흥미진진하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몇년 전 한국어판으로 번역된 다.  한국의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책인데 우리 글이 뜻문자가 아니라 소리형 문자여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중국글에 더 익숙해서 그런지 몰라도 여러가지로 알아보기가 힘들었었다. 마침 이번 년말에 고향에 돌아오면서 공항 서점에서 중국어판본을 보게 되여 선뜻 사왔다. 한국어 판본과 중국어판본을 서로 대조하면서 보게 되니 자못 더 흥미롭다.     책을 읽다가 피곤해서 잠간 쉴려고 외지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과 위챗으로 통화를 했다. 여러가지로 오래동안 아들과 상담을 하면서 오히려 내가 많이 배우는 느낌이다.    마치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듯이 나도 그렇게 함께 배우면서 아이들과 같이 성장을 한다. 실은 나의 마음도 아직 아이들처럼 천진하고 랑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강함이 없어서 우리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지 못했다. 또 나는 싸울 줄 잘 몰라서 우리 아이들을 악착스럽게 키울 수 없었다. 나의 두 아들은 그렇게 부족한 아빠한테서 착함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 뺏기면 두개를 빼앗아오라고 시킬 때 나는 손해보는 것이 리득보는 것임을 아이들에게 리해시키려 애썼다. 다른 사람들이 자녀가 한대 맞으면 두대 때리고 오라고 시킬 때 나는 양보의 미덕을 가르쳤다. 그게 바보처럼 보여서 안해의 핀잔도 가끔씩 들었지만 나는 내 게 없는 것을, 그리고 내가 볼 때 아닌 것을 가르칠 수 없었다.   한비자는 라는 말을 했다. 즉 눈앞의 리익에 매달리다 보면 큰 리익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이다.  당연한 말이고 당연한 일이나 실생활에서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다. 부부싸움에 쌍방 부모가 서로 자기 자식편에 서서 싸우질 않나, 자그마한 부부간의 모순에 서로 자존심 상한다고 섣불히 리혼을 하지 않나, 요즘은 정말 나로서는 리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옛날 춘추시대에 진(晋)이라는 강국이 괵(虢)이라는 나라를 멸망시켰을 때의 일이다. 괵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우(虞)나라의 령내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준마와 옥을 주고 길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우나라의 중신들은 "괵나라가 멸망하면 다음은 우의 차례입니다."라고 말하며 반대했지만 우나라의 왕은 선물에 눈이 어두워 진의 요구를 수락했다.   그 결과 , 괵나라가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도 진의 침공을 받아 멸망해 버렸다고 한다. 우왕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는 쉬우나 그런 립장에 자신이 처해지면 같은 실수를 범해 버리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가?!   그 당시는 바보처럼 보였지만 양보를 하는 우리 아이들 주변에는 친구가 많아졌다. 더 많은 친구들이, 또 더 순수한 우정들이 하나, 둘 모였다. 나는 그래서 감사했다. 건강하고 착하게 커줘서 감사했고 바르고 씩씩하게 커주어서 감사했다.   우선 아버지이기 전에 나는 자녀였다. 집안의 막내아들로서 부모님과 두 누님의 사랑을 가득 받으면서 자란 나는 고생이 뭔 지 모르고 컸다. 그렇게 청춘을 흘러 보내면서도 나는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내 인생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인생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보다 더 값진 것이 있는지 질문하지도 않았다. 인생의 가치나, 소중함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의심할 바 없는 바른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 그리 휩쓸려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뜩 나는 한발자욱 성장한 내 자신을 바라보게 되였다. 코로나로 인해서 외지에서 설 쇠러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 아들놈이 처음으로 고향생각, 부모생각이 났나부다. 태여나서 처음 부모를 떠나서 혼자 쇠는 설이다. 자리에 누워서 끙끙 앓고 있는 아들놈을 보는 순간 갑자기 내 가슴이 아파왔다. 뭔가가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 내 심장을 쿡 찔렀다.  아~그때에야 나는 내가 비로서 아버지로서 한 발자욱 성장을 했음을 깨달았다. 자식을 곱다고 키우고만 있었지 어떤 것이 아버지인 줄을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따뜻한 차 한잔과 잔잔한 일상에 감동하고 배우면서 나는 삶을 배워가고 있다.   문뜩 라는 말이 떠올랐다. 지난세기 유명한 프랑스의 극작가 크로텔이, 그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마리아에게 고함》에서의 한 구절이다. 이 대사 앞에는 이런 말이 더 있다. 라고 그는 반문했다. 물론 크로텔이 죽음을 찬미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죽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은 죽기 위함이 아니라 살기 위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은 어떤 형태를 끝맺음으로서 삶의 모습을 완성시킨다.   그러니 이제와서는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야 말로 나에게 있어서 최대의 문제가 되였다. 몇년 전 써두었던 라는 시가 떠올라 여기에 적어본다.   나는 질문 없이 살았어요 주어진 대로 생각나는 대로 그러다보니 세월은 가고 어느새 내 얼굴에 주름이 지네요   질문을 했다면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면 왜서 이렇게 사는지 어째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걸 질문했다면 나는 기필고 이렇게 후회하진 않았을거예요   질문은 내 삶을 빛나게 하고 질문은 해답보다 중요한 것이죠 질문하는 자에게는 해답이 올 터이니 질문만 하면 되는것을 나는 몰랐어요   아직도 늦지는 않을거예요 이제도 기회는 있는 것이죠 나는 왜 이 길을 선택했으며 내게는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을가요? 그렇게 질문하다 보면 어느새 내게도 더 낳은 길이 보이겠죠. 지금보다 더 바른 길요.  
118    심어야 거두리 댓글:  조회:3717  추천:5  2020-04-04
  오늘 청명에는 바람이 몹쓸게 불어쳤다. 어렵사리 차린 제사상에 날리는 심한 모래바람에 바르게 제사를 지낼 수 조차 없었다. 중국 당나라 시기에 두목이라는 시인이 청명을 쓴 시가 있다. 清明时节雨纷纷,路上行人欲断魂。 借问酒家何处有?牧童遥指杏花村。 이라는 구절이다. 청명절에 비가 오는데 길가에 행인들은 선친을 그리는 마음에 가슴들이 찢어진다. 술집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에게 목동이 멀리 보이는 행화촌을 가르킨다는 시이다.   청명을 맞으면서 언제나 떠오르는 시다. 예전에는 잘 몰랐었는데 요즘 나이가 들면서 새록새록 어릴 때 외워 두었던 시구들이 떠오르면서 공감을 느끼군 한다. 아마 삶과 시간속에서 시속의 구절들과 대응되는 상황들을 발견할 때가 점점 많아 지나부다. 언제부터 인지는 몰라도 청명에 날이 개일때를 거의 보지 못했다. 특히 산소로 제사를 지내려 가려고 할 때면 언제나 같이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리군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과 헤여 져야 하는 숙명을 안고 산다. 한마디로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이다. 죽음은 우리를 언제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만 우리는 마치 천만년을 살 것처럼 엉뚱한 곳 만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기우뚱거리며 걸음마를 익히는 철부지처럼 그 본질적인 숙명을 외면한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본래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결점은 정신의 장님이다. 그것은 사람을 미혹시킬 뿐만 아니라 그 미혹마저 사랑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인간성의 부족함을 정곡으로 찌르는 철학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이라는 불교 우화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사는 지붕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고 있는데도 그 안에서 뛰쳐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오늘 뭘 먹을가?》를 걱정하고 《래일 무슨 옷을 입을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죽음앞에서 모든 금전과 권력도 보잘것없는 것임을 우리는 요즘 역병을 통해서 배워오고 있다. 또 우리는 언제인가 잃었다는 슬픔과 잃을 것이라는 걱정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필연적인 결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까스로 외면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가장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자기 변명으로 무장한채 계속 불타는 집안에서 《이 불이 어디에서 제일 먼저 붙었는지?》 《불타고 있는 지붕은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불을 붙인 사람은 누구인지?》 《불을 지붕에 붙인자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를 따지면서 산다.   아니 사는게 아니라 죽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역병이 대폭 터지기전에 연길시의 모 양로원에 우리 회사의 제품을 납품했던적 있다. 이제 다시 일들을 시작하게 되니 어제는 그 상태를 점검하러 다녀 오게 됐다. 양로원의 중간 복도에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줄줄이 앉아서 창문 틈으로 새여 들어오는 햇볕 쪼임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별로 할말도 없는지 모두들 묵묵히 앉아만 있다. 오전내내 일을 보며 그 사이를 들락거리는 내 마음은 참으로 무겁다. 이제는 죽기를 기다리는, 아니 삶을 더욱이 열망하는, 그 로인네들이나 지금 지붕이 불타고 있는 집안에서 오늘 점심에 《국수를 먹을것인지? 아니면 빵을 먹을 것인지? 》를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내가 무엇이 다른 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 고서인 채근담에는 《勿恃久安 勿惮初难》이라는 말이 있다. 즉 오래 지속되는 안녕을 의지하지 말고, 처음 부딪치는 어려움을 겁내지 말라는 말이다.   중국의 또 다른 고서인 역학(易学)에서도 비슷한 의미로서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채근담에서 이야기하는 이 구안(久安)이란 길게 계속되는 운이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초난(初难)이란 최초로 부딪치는 곤난이다. 따라서 《오늘의 행운이 언제까지나 계속 된다고 생각지 말며. 처음 닥치는 어려움에도 겁내어 도망치지 말라는》 깊은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운이 붙을 때면 운 있는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 결과 불행이 닥쳐오면 순간 당황해 버린다. 무슨 일을 하든 지간에 어려움은 있게 마련이다. 시련이 두려워서 포기해서는 않된다.   벌써 봄바람이 세차게 분다. 산불을 조심해야 할 때이다. 분주히 제사를 마무리 짓고 내려오는데 바람이 죽지를 않고 더욱 세차게 불어 친다. 청명에 불어치는 이 거센 바람이 이 지구에서 기승을 부리는 역병을 뿌리채 다 뽑아 날려보내 주십 사 큰 소리로 기도를 해봤다.   오늘 아침 꿈에는 돌아가신 아버님을 보았다. 살아 계실 때처럼 밝게 보였다. 이제는 몇년이 지났는데도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슬픔이 남아 있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청명이나 제사날을 맞추어 꿈에 오시 군 한다.  나는 천성으로 이별에 약한가 부다. 그래서 이런 날이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청명이 지나면 이제는 씨앗을 심을 시기가 온것이다. 춥고 거센 바람도 실은 봄 바람이다. 오래전 시조 쓰기를 배우면서 써두었던 시조 한편이 떠올라 읊어 본다. 오늘은 이걸 쫒고 내일은 저걸 쫒고 복(福)을 쫒고 부(富)를 쫒아 남는것 하나없네 복과 부는 쫒는게 아니오라 거두어야 하리니 지가 심지 아니하고 어디서 거두리오.
117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사라지는 우리 말1 댓글:  조회:3294  추천:10  2020-03-21
  우리가 어릴 때 교과서에는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인가? 》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위위라는 작가가 쓴 조선전쟁시대의 중국 지원군을 대표해서 쓴 글이다. 물론 긴 우주의 계보에서 볼 때 전쟁은 인간의 욕망을 대표하는 장난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시대마다 대의(大义)를 위해서 선뜻 나서는 사랑스런 사람들이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집 불이 꺼졌다 해서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언제 불이 다시 피여 옆집으로 퍼질지 모른다. 이제는 지구촌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중국말 속담처럼 이제는 이 불가능 해졌다. 혼자만 깨끗해 질려고 해서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19신종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인간과 바이러스와의 또 다른 전쟁이다. 생과 사의 박투인것이다.  그 전쟁에서 언제 어떻게 희생될지를 모르면서도 선뜻 사지로 뛰여드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참 사랑스럽다. 이 시대의 가장 사랑스런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사랑이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뜻이 포함되여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 있고 부모자식간의 사랑이 있고 민족과 나라에 대한 사랑이 있다. 종교적으로 볼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 있고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자비로움이 있다... 프랑스의 작가 생 떽쥐베리는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다.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 보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같이 어떤 방향을 향해가는 사랑이야 말로 올바른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어릴때만해도 부모님들이나 어르신들중 부부라면 서로 《동무》라는 말을 썼다. 그러다 중국과 한국이 수교를 하면서부터 어느 날인가 한국에서 온 선배가 듣기  거북했던지 한마디 했다. 《에키, 부부간에 어떻게 동무가 되는가? 》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하는데요? 》 《여보,라고 부르던지 아니면 당신,이라고 불러야지 동무가 뭐야 동무? 부부가 어떻게 동무가 될 수 있어. 》 그때는 한국의 경제가 잘 나가고 있고 우리보다 많이 발전해 있었기에 우리는 그 말들이 다 맞는 줄 알고 있었다. 한류의 영향으로 젊은 이들중 하나 둘 말을 바꾸다 보니 이제는 부부간에 동무라는 말을 거의 들을 수가 없다. 사전을 뒤져보면 여보라는 말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쓰인다.)고 돼있다.  실지 여보는 《여봐라, 여기 봐라》의 줄임 말이다. 봉건시대 부부간에 서로 애칭을 부르기가 쑥스러워서 《여기 봐》라고 부르던 줄임 말이 그렇게 쓰여 진 것이다. 다시 《당신>이라는 말을 보자.  2인칭인 소유대명사로 쓰이는《당신 누구요?》 라는 식의 당신이 있고 , 3인칭의 존칭인 《어머니는 당신의 아이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신다. 》라는 식의 당신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냥 당신이라는 말은 《부부사이의 호칭이다. 》 라고 돼 있다.   그냥 내 개인적인 기호일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인생을 함께 가는 길동무라는 의미로서의 동무라는 애칭이 훨씬 더 산뜻하고 다정다감하다.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서로 손을 잡고, 짧지만 긴 인생의 려정(여정)을 함께 가는 동무가 진정한 부부가 아니겠는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말인가? 왜 언어에 꼭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을 가져다 붙이는지 나는 아직도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체호브의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매형은 무한시로 의료지원을 떠나면서 슬그머니 보험을 사놓았나부다. 코로나 치료를 갔다가 사망시 거액의 보험금을 누님앞으로 사놓은것이다. 보험회사에서 가족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누님에게 전화가 와서야 그 사실이 알려졌다.  위챗으로 따지는 누님에게 매형이 슬쩍 한마디 한다. 《여기 올 때 살아서 돌아갈지, 죽어서 돌아갈지 누가 아오? 내가 죽어도 동무는 꼭 가족들과 함께 잘 살아야지 않겠소? 》라고 말하는 매형의 말에 누님은 그냥 엉엉 울어버렸다.   어느 작가는 《사랑이란 우리의 영혼 중에서 가장 순결한 부분이, 어떤 미지의 것을 향해 포옹하는 성스런 동경이다.》라고 말한다. 사랑은 단순한 맹목적인 애정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시련을 뛰어 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손을 잡고 나가는 정열이 아닐까 싶다.
116    악마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한다. 댓글:  조회:3575  추천:5  2020-03-03
  오늘 새벽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심각하던 일들도 깨고 보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마치 우리 살아있는 삶도 너무나도 반듯한듯 하지만 언젠가 꿈에서 깨고 보면 그냥 꿈처럼 하얀 기억만 남을 뿐이다.   우리의 삶이 꿈처럼 허망할 진 대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애쓰는 일들 역시 그러하지 않을 가? 가장 두려운 것은 뭔가 조금 알고 있는 듯한 사람들이 세상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미신인지 알고 있지 못하는 우매함의  울타리가 바로 미신이다. 중국 글에서 미신이라는 글자는 미혹될 미(迷)자에 믿을 신(信)자가 붙는다. 중국의 한자는 상형문자이다. 글자 그대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두개의 십자 길 여덟 방향에서 갈팡질팡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뭔가를 믿고 따라감의 변이 붙어 있다. 내가 잘 모르는 걸 믿는 것을 미신(迷信)이라 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는 종교 집단이 그러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지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신도를 발전시켜서 자기들의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런 무식한 신도들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자기 자신만을 미신하는 광신도들이다.  그들이 진정 생각하는 인생의 가치는 자기 자신 뿐이다.    너무 무섭다. 자기 자신만을 믿는다고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의 울타리를 전부로 생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유한한 지식을 미신하는 사람들의 우매함이 두려울 뿐이다. 나의 주변에도 우수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지만 그들 역시 어느 정도 높아지면 오만함의 늪에서 헤여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냥 안타까울 뿐이다.   유럽문단에서는 유명한 몽테뉴는 《가장 탁월한 재능도 무위도식을 계속하면 사라진다.》라고 한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도 끊임없이 갈고 닦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모럴리스트인 몽테뉴는 종교전쟁 시대에 남 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 났다. 38세까지 법률가로 지냈ᅌᅳ나 은퇴후 독서와 사색의 생활에 몰입한다. 그런 그가 47세에 그때까지 써두었던 소감과 고찰들을 정리한 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좌우명으로 두고 있는 그는, 수상록의 간행후에도 새롭게 독서에서 얻은 지식과 사색의 결과를 추가하여 수정하는 일을 59세까지 계속했다고 한다. 자신의 말한대로 스스로 실행한것이다.   《정말 인간처럼, 놀라울 정도로 여러가지이며 변하기 쉬운 것 도 없다. 인간에 대해 일정하게 변하지 않는 판단을 내리기는 참으로 어렵다.》라고 몽테뉴는 말하고 있다.   사기(史记)를 보면《四时之序,成功者志》라는 말이 있다. 四时之序란 춘하추동의 변화를 말한다. 봄은 봄의 역할을 끝내면 여름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고, 여름은 여름의 역할을 끝내면 주인공의 자리를 가을에게 남겨준다. 인간의 삶도 그러하다는 뜻이다. 우리 각자의 삶은 스스로의 계절이 있다. 그 성숙함의 시기를 정확히 붙잡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하는 관점을 가지고, 새롭게 사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사람만이 언제나 발전하는 삶을 살아 갈수 있다. 또한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올바른 길을 선택할수 있는 것이다.   로시푸코의 에서는《인간의 가치는 과일과 같이 제각기 계절이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란 과일이 익어서 먹을수 있을 때를 말한다. 실지 사람들마다 각자의 인생의 성숙기는 저마다 다르다. 더욱이 성숙한 때 스스로 정확히 붙잡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자신은 어느 계절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잠언이라는 것은 17세기의 프랑스의 사교계가 탄생시킨 싸롱 문학의 하나이다. 잠언속에는 기발한 말들이 많이 들어 있다. 같은 시대의 파스칼이 쓴 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심리를 정확히 표현한 것도 상당수 있는 것이 일부 특징이라 하겠다. 이번 역병은 우리에게는 큰 가르침을 많이 주고 있다. 그냥 지나쳐서는 않되는 인생의 큰 계발이다. 왜서 이번 역병이 한국의 신천지라는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폭발 했을 가? 중국 말 속담에 라는 말이 있다. 나쁜 행실을 많이 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말이다.   라는 종교를 표방한 집단이 기독교의 성경을 표방해서 한국에서만 200만명의 신도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심지어 중국 연변에까지, 무한에까지 신도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한다. 문뜩 어릴 때 읽던 섹스피어의 희곡집에서의 한마디가 떠올라 적어본다. 《악마도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한다.》는 말이다. 섹스피어의 에서 나오는 말이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 사악한 종교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도 더 무섭다. 올바른 세계관과 바른 인생관이 어느때보다도 더 필요 할 때이다.   우주의 커다란 계보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일까? 누군가가 정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는 있을 가? 또 누가 걱정하고 있을 가? 인간의 최종적인 삶의 목적은 또한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며,  또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 ?  아니면 우리는 그냥 누군가가 싫어하는 우주의 바이러스일 뿐일까? 
115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댓글:  조회:3809  추천:15  2020-02-27
  벌써 2월이 다 지나간다. 역병으로 인해서 설부터 꼬박 집안에 박혀 답답한 시간을 보내는데 그게 모두들 힘든 가 본다. 공자의 말씀 중에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한 말이다.  그의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그린 시 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그는 장님이였지만 비파를 뜯으면서 사람들에게 시를 랑송해 주었다고 한다. 이런 호메로스는 인생은 짧고 유한하기 때문에, 무위(无为)로 지나쳐 버리는 각각의 시간을 아쉬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실지 우리가 안일하게 랑비 해버리는 시간은 또한 얼마나 될까? 짧고 유한한 인생에서 차를 마시며 수다 떨고 드라마 보며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웃고 울며 우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한시(武汉市) 코로나19치유를 위해서 의료 지원 출정을 떠난 매형이 퇴근후의 사진을 위챗으로 보내왔다. 무한시는 이미 영상 20도를 넘어섰다고 한다. 환자들의 2차감염을 위해서 에어컨도 돌릴 수가 없다. 다섯벌의 방호복을 입고 마스크에 방호 용 안경까지 온몸을 감싸고 8시간을 꼬박 일해야 한다고 한다. 자칫 피부가 로출(노출)될 경우 코로나19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화장실에 갈수가 없다. 하루동안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한다.   화장실에 가는 것을 막기위해서 될수록 적게 먹어야 한다고 한다. 일하는 도중에 물도 마시기 힘들다. 그러나 하루에 흘리는 땀은 거침이 없다. 몇겹의 방호복속에서 피부는 완전히 찜통속에서 쪄낸 것 처럼 흐드러진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어선 매형은 이번 의료지원팀에서 가장 나이 많은 의사에 속한다. 요추간판 돌출이라는 병도 있다. 그런 매형의 땀에 절인 얼굴에 방호용 안경과 마스크의 자리가 깊이 박혀있다. 사진을 보고 누님은 한참을 울었다.   현재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다. 국제적인 상황도 너무 명랑하지 않다. 이웃나라인 한국도 일본도 심각한 상황이다. 유럽에서도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때일수록 집에서 가만히 있는 우리는 그냥 시간만 보내서는 안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일수록 우리는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살고 미래를 계획해야 한다.   중국 춘추시대의 사서(史书) 의 하나인 대학(大学)에는 《小人闲而不善》이라는 말이 있다. 뜻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시간이 있어도 변변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 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 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술이나 마시고 잠이나 자면서 세월을 허송해서는 아니된다. 미래보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로인(노인)들 뿐이다.   중국의 현대 작가 로신(鲁迅)은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않는 인간의 대부분은 영원히 전진하고 영원히 희망을 갖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큰 부자들도, 우리가 보기에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또 다른 희망을 안고 산다. 희망이 사람들을 이끄는 횃불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이 있고 두려움이 있다.   이번 역병이나 자연재해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구사하는 바가 크다. 마치 고난이나 역경이 한사람을 단련시켜 강하게 만들 듯이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않된다. 뭐든지 생각한대로 되는 만족한 경우는 , 왕왕 사람을 못쓰게 만든다. 교만하게 되거나 이상하게 옹고집이 되거나 오히려 남에게 미움받는 수가 많다. 물론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부자유스런 경우도 힘들다. 언제나 적당함이 좋다. 축복 받은 듯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 둘 즈음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花看半开,酒饮微醉》라는 말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의 유명한 고서인 채근담《菜根谭》에서 하는 가르침이다. (술에 관한 저자의 관련 글 술의 경지(境界)를 참고 바람. ) 채근담에서는 술 마시는 방법이나 꽃을 보는 방법을 이야기 하는 같지만 실은 인생의 생활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매형에게 응원을 보냈다. 연변 주 부련회와 매형 병원의 간부들이 출정나간 의사와 간호사들의 가족 위문을 다녀 갔다고 한다. 그래도 세상은 참 훈훈하다.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 세상에 지나가지 않는 일이란 없다. 행복도 불행도, 즐거움도 어려움도, 그리고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지진과 황충, 그리고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는 역병도 다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문뜩 금강경《金刚经》의 한구절이 떠오른다. 라는 말이다. 글 면의 뜻대로만 보면 과거의 마음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은 더욱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불혹의 나이를 넘기면서 내 마음속에 와닿는 가장 큰 울림이다.
114    출사표<出师表>를 내는 매형 댓글:  조회:4380  추천:27  2020-02-21
   매형은 의사다. 그것도 병원에서는 손꼽히는 의사로서 이제 얼마 있으면 퇴직할때도 되나부다. 그런데 이번 역병으로 인해서 의사 지원자를 찾을 때 무한(武汉)을 지원해야 한다하니 자기가 가겠다고 지원을 했다고 한다.    역병이 의사들을 피해간다는 보장은 없다. 무한시 그곳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옷깃을 스쳐도 병균을 옮길수 있는 무서운 지역이다. 그런 불구덩이로 스스로 뛰여 든다고 하니 소문을 들은 친지들은 아연실색을 했다.     매형의 이런 선택을 위대한 어떤것에 가져다 붙인다면 오히려 그 선택에 대한 모독이 될지도 모른다.  매형은 위대하다기 보다는 평범한, 그리고 의사로서 당연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병원을 대표하여 출정하여 무한시로 출발해야 하기에 나도 새벽 일찍 일어나서 차로 매형을 바래다 드렸다. 연변에서 모두 25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자원으로 출정해서 떠난다고 한다. 역병기간이라서 출정식은 간소하고 짧게 진행되였다.   요즘 역병이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가 했더니 전 세계적으로 황충이 하늘을 뒤덮고 지진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무엇때문일가? 무슨일인가? 요즘 우리는 집안에 들어박혀서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 뒤돌아보며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한다. 《인간은 이 우주의 불량 소년이다. 》라고 슬퍼한 미국의 시인 오펜하임이 있다. 또 영국의 극작가 길버트는 《인간은 조물주의 유일한 실수이다. 》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아마 전쟁이나 인간파괴 요즘 같은 환경과 자연을 략탈하는 인간들의 행위를 말하는게 아닌가 싶다. 실은 이라고 한다. 괴테가 한 말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말이다. 누구라도 일생을 회고할 때 아아, 그때 이런 일들이 나의 인생을 결정하는 계기였구나 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그 의 결정을 하게 된 매형에게도 어떤 내재된 사명감이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순간을 결정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사명이 있다. 그 의 중요성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기원전 19년 루비콘강을 건넌 시저의 결단이 그것이다.   루비콘강을 거너는 일이란 다름아닌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왕이 되느냐, 아니면 죽느냐에 있었다. 그는 강가에 서서 잠시 생각한다. 물론 지금 후회해도 늦지는 않다. 되돌아 갈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크게 외친다. 이는 섹스피어가 의 극중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겨울이 춥다, 춥다 하다가도 곧 따뜻한 봄이 오는것처럼 천지의 법칙은 존재한다. 그리고 달은 점차로 차서 보름달이 되고 또 점차로 이지러지게 된다. 언제까지나 늘 보름달인 채로 있을 수는 없다. 이게 중국 고서인 에선 말하는 의 도리이다. 천지의 도는 극에 이르면 곧 뒤집어지고, 차면 곧 기운다는 뜻으로서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너무 크다. 그래서 이번 역병도, 또 어떤 재해도 꼭 이겨나가리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섭리도 이와 같다. 점차로 올라가 정점에 이르고 나면 더 이상의 정점이 없어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내려 감 뿐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빠져서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또한 올라가는 길 뿐이다. 그래서 정상에 올랐을 때 교만해서는 않되고 한층 더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밑바닥에 떨어진다고 해서 결코 락(낙)담할 필요 또한 없다. 초조하거나 허둥대지 말고 , 힘을 저축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출사표》를 내는 제갈량처럼 길 떠나는, 전쟁터로 나가는 장군에게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하지만 가족들은 모두다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다. 매형 병원의 어린 간호사도 지원했다고 한다. 현재도 하루에 수천명씩 환자가 늘고 수십명씩 죽어나가는 그곳으로 자식을 보내는 어머니들의 마음은 또한 어떨가 싶다. 벌써 의사와 간호사도 많이 죽은 전쟁터이다.    길림성에서는 의사와 간호사 모두 합해서 170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물론 연변의 25명을 포함해서이다. 이 글을 쓰는 사이 매형이 위챗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무한시에서도 제일 위험한 중환자실로 가기로 했다고 한다. 매형이 병원에서도 중환자실 주임으로서 경험이 많다고 그리 신청했나부다.  주정부에서는 처음으로 보내는 무한시 지원 출정이다. 걱정이 가득한 가족들의 눈빛들이 떠나가는 버스를 바랜다. 그동안 잘 참고 있던 누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113    역병을 통해 보는 인과의 법칙 댓글:  조회:3071  추천:11  2020-02-15
   하늘에서는 흰 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여느 때 같으면 벌써 밖에 나가서 바람을 쏘였음직 했지만 꼼짝 않고 창밖만 내다본다.   요새는 역병이 기승을 부린다. 그래서 모두들 집안에 들어박혀서 역병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가끔씩 휴식일이 왔을 때면 한두날 휴식하는 것이 좋아서 늦잠을 자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좋을지 몰라도 이렇게 두달이 다 되도록 꼼짝 못하고 집에 들어 박혀 있으라고 하니 모두들 마음이 답답한가보다. 그나마 요즘은 인터넷이 있고 TV에서 각종 재미있는 프로를 매일 쏟아내고 있는데도 말이다. 무한에서 시작된 이번 역병은 야생동물을 잡아먹은 인간들때문에 생긴 전염병이라고 한다. 박쥐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 박쥐의 병균이 인간에게 전염이 된것이다. 그것이 이렇게 전 세계적인 역병으로 번져졌다. 무서운 일이다.   중국말 속담에는 는 말이 있다. 물론 말을 함부로 해서 화근을 부른다는 쓰임이지만 요즘에 맞추어 보면 오히려 음식을 탐하는 인간의 행위를 말하는게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세치 혀바닥을 통한 즐거움을 찾아서 온갖 일들을 저지른다. 박쥐는 그냥 보아도 징그럽고 무서웁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시장에서 파는 많고많은 검역을 거친 고기들을 제외하고 각종 뱀이며 고슴도치며, 두더쥐며, 심지어는 갓난 쥐의 새끼를 생것채로 먹는다.   인터넷을 통해서 생쥐새끼를 접시에 놓고 먹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그만 그날 먹은 음식을 다 토해버렸다. 그것도 광동에서는 라는 료리라고 한다. 중국말 뜻대로 보면 세번 소리 낸다는 것이다. 아직 털도 채 자라지 않고 눈도 뜨지 않은 쥐새끼들이 접시에서 오물오물 거리는데 젓가락으로 집을 때 한번 하고 소리를 내고 다시 입에 넣을 때 하고 소리를 내고 다시 씹을 때 하고 소리를 낸다고 해서 라고 이름했다는 료리다.   중국사람들은 무엇을 먹으면 인간의 어떤 몸을 보신한다는 말을 믿는다. 즉 동물의 심장을 먹으면 인간의 심장도 좋아지고 동물의 간장을 먹으면 자신의 간장도 좋아진다고 믿는것이다.   거짓말도 열번하면 정말이 된다고 하는데 너무 황당한것이지만 이제는 정말처럼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몸보신을 한답시고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것이다. 물론 신기하거나 재미로 그렇게 살생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나부다. 요즘은 금지하고 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중국 광동지역에서는 산 원숭이의 대골을 빠개서 그 뇌를 퍼먹는 료리가 있었다. 밤 시장의 한구석에서 조롱속에 원숭이 무리들을 가두어 놓고 있다. 그 원숭이 대골을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을 믿고 사람들은 가게 주인에게 돈을 주고 원숭이를 산다. 조롱속에 원숭이들은 그 손님이 자기들중에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새된 소리를 지르며 바들바들 공포에 떤다.  가게 주인은 쇠집게를 원숭이 조롱속에 집어 넣은데 원숭이들은 바들바들 떨며 그 쇠집게를 피하겠다고 조롱속의 구석으로 피한다. 그러나 마음이 쇠덩이 같은 가게 주인에게는 막무가내다. 그렇게 원숭이가 목이 집혀나오면 밥상중간에 파놓은 구멍에 원숭이의 목을 조이고 머리만 상우에 내놓는다. 마치 옛날 죄인들에게 씌우는 칼처럼 말이다. 차마 글로 표현 못할 상황이다.   인간들은 자기가 잘 살겠다고 그렇게 살아있는 원숭의의 대골을 망치로 깨서 그 시뻘건 대뇌를 퍼먹는다. 글을 쓰다보니 그때 그 원숭이들의 그 두려움에 떠는 눈길을 보는같아서 등골이 다 서늘하다. 그렇게 동료의 죽음을 보며 도망갈데가 없어서 조롱속에서 두려움에 새된 소리를 지르는 원숭이들이 마치 현재의 우리와 같지 않은가? 역병은 마치 그 마음이 쇠덩이 같은 가게주인이고 우리는 그 조롱속에 갇힌 원숭이들이다. 언제 쇠집게에 집혀갈지 알수 없다. 그래도 살겠다고 집안에만 있어야 한다. 살아야 하니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 철학자들의 말씀들이 하도 많아서 다 인용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필연성을 가지고 산다. 또한 는 말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우리는 자기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냥 다른 동물들보다 좀더 똑똑한 동물일 뿐이다. 현시대의 과학적인  우주관으로 볼 때 지구는 우주에서 작은 티끌 같은 존재다. 불교의 세계관에는 라는 말이 있다. 태양을 에워싸고 도는 8대행성을 (2006년 8월24일,국제천문학련합회 제 26차 대회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던 9번째 행성이였던 명왕성을 태양계의 행성에서 취소하기로 표결을 하였다.) 하나의 세계로 보았을 때 이런 태양계 같은 세계가 천개를 합치면 하나의 소천세계라고 한다. 이런 소천세계가 천개가 모이면 하나의 중천세계라고 한다. 또 그런 중천세계가 천개가 합치면 하나의 대천 세계라고 하는데 그런 대천세계가 삼천개가 모여있는 것을 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믿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천문과학을 통하여 우리는 그 지혜를 엿볼수 있다. 이렇게 삼천대천세계에서 지구는 그냥 티끌 같은 존재다 물론 그 티끌속에 인간들은 그냥 우리가 느끼는 세균 같은 존재일 뿐이다.   괴테는 그의 글에서 라는 말을 했다. 여기에 중요한 구절은 자각이다.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를 사고하고 자각으로 이르는 지혜를 이루는 것, 그것이 삶의 목표가 아닐까?   요즘 중국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영국에서는 세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이라는 대 시인이 있다. 그가 실명의 불행속에서 쓴 은 영국에서는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락원에서 추방되여 죽음의 공포에 떠는 아담을 향해 천사 미카엘이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밀턴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없이 이다.   우리 몸도 어찌보면 하나의 우주이다. 우리 몸속에, 어찌보면 그속에  삼천대천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심장속에 하나의 우주가 있고 또 그속에 또다른 태양계가 있고 우주가 있고 또 다른 지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도 우주에서는 하나의 세포일수도 있다. 어찌보면 그속에 세균들이 우리들이다. 우리는 명리를 탐하고 성공이라는 이름을 걸고 전쟁을 하고 략탈과 살생을 서슴지 않는다. 역병도 별거 아니다. 과학적인 우주관에서 볼때에는 그냥 세균들의 전쟁일 뿐이지 않는가?! 여기에 정의니 사함이니 선이니 악이니 갖다붙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볼때는 심각한 일이기도 하다. 커피 한잔을 타서 마시며 창문가에 서서 여느때 보다 조용한 길거리를 보고 있을려니 문뜩 철학자가 된 기분이다.    공자의 론어에는 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가 받아들일수 없는 일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듯이 동물들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세균 또한 그러하다. 또 는 말이 있다. 우리는 죽임을 통해서 죽음과 가까워 지고, 나눔을 통해서 부의 번성함의 도리를 배우고 있을 뿐이다.   이 무서운 역병도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심은 행위는 어떤 씨앗으로 심어져서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 올것이다.   그게 인과의 법칙이다.
112    사소한 시작 댓글:  조회:3366  추천:0  2016-07-02
  여름은 소리도 없이 성큼 다가왔다. 벌써 아침햇살이 무척 따갑다. 지난해 시골별장에 손수 심은 포도넌출에는 작은 포도열매가 조롱조롱 달렸다. 호박넌출이 길게 뻗어서 손수 넌출들을 작은 천으로 매달았다. 그 넌출들이 한쪽 담장에서 다른 편 담장으로 옮겨오더니 중간즈음에서 양쪽 넌출이 서로 마주쳐서 악수를 하듯 인연을 맺었다. 마당가에 심은 오얏나무에는 봄에 하얀 오얏꽃이 가득 피더니 그 자리에 어느새 작은 열매가 가득 피여난다. 벌써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듯 연한 오얏가지가 길게 바닥에 드리웠다. 토마토씨를 화분통에 옮겨심었었는데 거기에도 토마토 열매가 아직은 작지만 탐스럽게 가득 열렸다. 그게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분통의 흙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고 우리는 그냥 물만 줬는데 어떻게 그렇게 크고 탐스러운 열매가 가득 달리는지 의문이 간다. 식물이 땅에서 영양을 가져가지만 더 많이는 하늘이 주는 태양의 양분을 흡수하는게 아닌가 싶다. 태양의 에너지가 아버지라면 땅의 에너지는 어머니이다. 그런 음양의 조합으로 이 땅에 많고 많은 식물이 생겨난게 아닐가 싶다. 우리도 그중의 일원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도 동물과 식물과 다름없는 자연의 자식이다. 그런데 탐욕스런 인간의 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자연의 파괴는 이제는 놀랄만큼 무섭다. 지구 온난화로 세계의 명승지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아프리카에 가보니 아프리카 적도에서 유일한 눈덮인 산으로 그 척박한 열대의 가뭄을 이겨내는데 큰 힘을 보태주던 킬리만자로산우의 빙설이 15년안에 다 녹아서 없어진다고 했다. 이미 80%가 사라졌단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부동산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물을 아래위로 막아서 그나마 물이 고인 강변을 만들었다. 그 주변에 아파트를 가득 지어서 비싼값에 팔기는 했는데 그게 얼마나 생태를 파괴하는 일인지 모두들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눈앞의 리익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정치가 아닌 미래 백년을 내다보는 정치를 하는 정치인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될수 있다. 임기가 끝나면 바람처럼 사라지는 정치인이 아닌 백년, 천년이 지나도 그 정신을 기리는 정치인이 이 땅, 이 민족에게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오늘따라 간절하다. 물고기는 알을 낳기 위해서 상류로 올라가는 습성이 있다. 그걸 아래위로 막아버렸으니 거기의 물고기는 그냥 갇혀버린 신세가 된것이다. 요즘 같으면 도시보다도 농촌이 더 심각하다. 다종경영으로 부업을 해서 돈을 번다는 욕심에 사람들이 저마다 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든다. 여기저기에 낚시터고 지천에 고기잡이 군들이다. 부모님과 함께 언젠가 시골에 내려갔을때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 생각난다. “예전에는 이 강물에 물이 많아서 키를 넘었었는데 지금은 개울물보다도 못하구나. 그때는 애들이 물에 빠질가봐 어른들이 애들을 물가에 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모두 난리였단다.” 부모님의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어릴적 물가에서 놀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냥 스쳐지나갈만한 소리같지만 이제 겨우 20년이 지났는데 강물은 말라서 허옇게 바닥을 드러낸다. 어디나 그렇다. 중국의 도교에서는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 이 땅을 하나의 생명체로서 그들은 존중하고 경의를 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오히려 자연의 파괴를 능력으로 생각하고 자연을 정복하려고 꿈꾼다. 자연은 정복하는것이 아니다. 자연과는 타협하고 친해지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나라 지도자가 정한 조화사회와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의 목표일것이다. 사람이 뇌졸중이 오는것은 혈관이 막혀서이다. 신선한 혈관이 인체의 구석구석에 깨끗한 영양분을 전달해줘야 인간은 건강하게 오래 살수있다. 우리 지구도 그렇지 않겠는가?! 지구안의 지하수는 우리의 림파선이고 지구위의 강물과 호수는 우리의 혈관이다. 그것들을 여기저기 끈으로 조이고 막아버린다면 우리는 뇌출혈이 백번도 더 일어났을것이다. 자연에게 행하는 인간의 이런 행동은 조만간에 큰 화를 자초할것이 자명하다. 요즘 지구촌에서 빈번해지는 자연재해를 본다면 공감이 갈것이다. 조그만 방심, 예사롭게 흘려버리는것이 큰 사건으로 발전하는게 이 세상의 상식이다. 전기를 내기 위해서 강을 막으면 리익이 있는 대신에 꼭 페해가 생기기 마련이다. 동전의 량면이 있듯이 음양의 법칙은 어디에도 존재하는 법이다. 고대로마의 정치인이며 웅변가인 키케로는 라고 했다. 아무리 안전성이 높다는 항공기도 작은 실수로 대참사를 일으킨다. 천재이변이라고 하는 호우나 산사태도 결과적으로 보면 개발을 성급하게 하여 일어났을수가 있다. 조잡한 설계로 인한 인재(人灾)이지 천재가 아니다. 요즘 뉴스에서 자주 다루는 중동쪽의 전쟁이나 큰 사건, 그리고 기업의 도산 등 모든 일들의 시초는 모두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긴것이다. 중국의 황하나 장강의 원류를 가보면 그냥 자그마한 강물일뿐이다. 큰일은 모두 작은 일에서 일어난다. 바꾸어말하면 세인을 놀래킬 엄청난 기획안도 세심함과 치밀함이 쌓여서 구석구석까지 신경이 미칠때 좋은 결실을 얻게 되는것이다. 한비자(韩非子)는 “산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개밋둑에 결려 넘어진다.”라고 했다. 큰일에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나 작은 일에는 쉽게 마음을 놓아 실패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업도 99%에서 그만두면 미완성이 된다. 물이 정상적인 상황에서1도가 모자라도 끓지 못하듯이 말이다. 더 많은 지성인들이 소리치고 질타를 해서라도 잘못된 우리의 작은 행동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의 목소리가 얕고 힘이 없을 지라도 함께 목놓아 외치다보면 차차 그 힘이 커져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것이다. 요즘 류행하는 인터넷을 보라. 처음에는 그냥 작은 모임처럼 보이던 인터넷문화가 요즘은 세계 정치, 경제, 문화를 뒤흔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는가. 이제는 호방한 담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섬세함과 순수한 정열이 더 필요할듯 싶다.
111    우리 민족 바른전통2-이 개보다 못한 자슥아 댓글:  조회:3673  추천:1  2016-04-10
  글을 쓴다는것은 순간순간의 생각의 멈춤이다. 그런 순간순간의 생각들을 글속에 담아 내면서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매일매일 내 마음을 갈고 닦는 시간을 가진다. 강의할때도 그렇다. 무엇보다 강의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배우는것처럼 글을 쓰면서 역시 내가 가장 많이 배우고 있는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어이없는 상황을 목격했다. 내 친구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모친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얼마나 가슴아플까 싶어서 다른 도움줄게 없냐고 문안을 하고 시간을 맞추어서 이튿날 화장터(연길)로 올라갔다.  그런데 황당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다른 친구들 말에 의하면 그냥 귀찮아서 식도없이 간단하게 치른다는것이다. 살다보면 가끔씩 그런 광경도 목격하게 되는지라 그러려니 했는데 그 모친의 골회가 나올때 그 아들이라는 자가, 바로 예전의 내 친구라는 놈이 모친의 골회를 신문지에 싸가지고 나왔다.  묘소도 않세우고 그냥 골회를 날릴건데 골회함을 사서 뭐하냐는 것이다. 돈 낭비가 아닌가 하는것이다.     나는 그만 아연실색했다. 세상에 이런일이? 그것도 바로 내 주변에서 이런일이 벌어진다는데 나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이때 돌아가신분의 큰 아버지 되시는분이 그 아들되는 놈 (예전의 내 친구라는 놈)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대성질호한다.     “야 이 개보다 못한 자슥아.....”   알고보니 내 친구였던 그자는 어릴때 입양되여 키워진 양자였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녀가 없어서 입양을 했겠지만 정말 두 로인은 그자를 친자식처럼 금이야 옥이야 곱게 키웠다. 어릴때 남부럽잖게 키운다고 벼라별 놀이감도 우리보다도 많았다. 그래서 그가 입양된 양자인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양자였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핏줄처럼 키워온 부모를 마지막길 보내는데 골회함 살돈이 아까워서 신문지에 싸가지고 나오는 그런 무지막지한 인간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너무 씁쓸해서 나는 그만 발길을 돌려 나왔다.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아니 짐승보다도 못하다.  그런자와 친구였다고 한때 지내온 내가 부끄러워 몸둘바를 모르겠다.   사람의 가치는 살아있음에 있다고 생각들지 모르겠지만 죽음을 맞이할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평가받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렇게 리기적이 되고 우리의 바른 전통을 잃어버렸을까? 이제는 이런 형편없고 어이없는 짓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그것들이 당연한줄로 알고 바라만보고 있는것이다. 그 총대가 언젠가는 다시 우리를 겨냥하게 되는줄도 모르고 말이다.   전통이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과거로부터 이어서 내려오는 바람직한 사상이나 관습, 행동따위가 계통을 이루어 현재까지 이루어지는것을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바람직하냐 아니냐 하는것이다. 자기  부모의 묘소를 만들면 나쁜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냥 날려버리면 좋다더라고 어디서 류언비어가 떠돌더니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중 귀너르고 우직한 사람들이 그냥 그 말을 정말로 믿고 따라하고 또 저들의 황당한 행동에 대한 변명으로 삼아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   마치 사이비 종교를 믿는 신도들처럼 말이다.   “한국에 가서 돈벌이 하는데 언제 묘소를 관리하겠소?” 라고 그냥 골회를 날린다. “묘소를 잘못쓰면 오히려 자손들에게 해한다면서” 라고 떠들면서 또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유물론적으로 볼때 우리가 잘 되고 잘못되는것은 자연의 섭리일뿐이다. 불교적으로 볼때는 각자의 업보때문이다. 우리가 지은 업을 우리 스스로 받을뿐이다. 우리 인생을 누가 대신해 살아줄수 없고 돌아간 조상의 귀신이 와서 자손을 해칠수도 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로소 죽은자의 정신을 기리는것은 유물론을 행하는 공산당도 지지하는 일이다. 우리 연변에 마을마다 렬사기념비를 왜서 만들었단 말인가? 집권당인 공산당에서 할일없어 심심해서 만들었겠는가? 그럴리가 없다.   우리의 바른 전통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꼭 묘소를 만들었다. 봉분을 만들어서 해마다 명절이나 집안에 큰 경사가 있을때마다 찾아가서 조상에게 알리고 후손이 잘되게 해달라고 빌군했다. 요즘처럼 국가에서 토지관리때문에 화장을 제창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신문지에 싸서 날리는 일은 정말 있으면 아니된다.  이제는 우리가 바르게 알고 고치고 개선해야할 때이다.   옛날 고려장 이야기가 떠오른다. 늙으신 부모가 나이들면 쌀축을 낸다고 산속에 버리는 풍속이 어느 옛날 고려시대에 있었나본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늙으신 부친을 지게에 메고 산에가서 내려놓고 오는데 그 아들이 낡은 지게를 다시 메고 내려왔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할아버지를 이미 메여 왔으니 그 지게는 그만 두고 가도 된다.” 라고 할때 손자가 말했다.  “이제 아버지가 늙으시면 나도 이 지게로 메여올려 산에 버려야지 않겠나요?” 그말에 아버지가 부끄러워서 다시 자기 부친을 지게에 메여 집에 돌아와서 잘 모셨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우리의 바른 효에 대한 전통이였고 우매함에대한 반성이였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은 힘들게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이민왔다. 우리는 커다란 중국땅에서 언제나 전통과 문화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민족이였다.  (나의 글: 조선족이여 자부심을 가져라. 참조) 그런데 그 전통과 문화가 점점 무지막지한 인간들의 우매함에  까맣게 물들고 있다.  한국가서 배웠다는것이 가장 배우지 못하고 우매한 사람들이 하는 황당한 짓거리를 배워가지고 와서 그게 좋다고 따라한다면 우리가 어찌 사람으로서 사람소리 들으면서 살수 있을것인가?    기업을 운영해본 사람들은 다들 잘 알겠지만 유행은 언제나 우로부터 아래로 퍼진다.  마찬가지로 력사상 많은 성인들이나 왕후장상들의 행동을 본받아서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닦아왔다.    유물론을 숭상하던 중국에서 수십년간 미신을 때려부신다고 전통을 버리고 혁명에만 몰두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는 공자묘를 부수고 전국의 사찰들을 마스고 불질렀다. 그리고 이제와서 국민의 도덕이 바닥에 떨어지고 사회 질서가 문란해지니 그제사 를 부르짓고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배우란다. 그리고 이제 전통문화를 찾는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래도 전통문화를 찾겠다는 의지를 가지기 시작했다는것은 얼마나 놀랍고 대견한 일인가?    이제 우리도 늦으면 아니된다. 우리 스스로 바른 전통을 찾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해야 한다. 내 일신이 편안해지기만을 바라는 리기적인 사람은 발전이 있을수 없다.  유교문화와 전통을 중시하는 중국과 한국의 모든 크고 잘된 가문을 돌아보라. 어느 가문에 조상의 사당이 없는 집안이 있는가. 어느 재벌가가 귀찮아서 부모님의 유골을 날리는걸 본적있는가?    절대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골을 그대로 날려보내서 잘된다는 도리가 없다. 부모님의 가시는 길을 영위롭게 해드려야 한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삶과 이웃을 대하고 이제 우리 모두에게 돌아올 죽음에 마저 감사할줄 하는 사람만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할수 있을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고려장 이야기”가 백년후에 “연변 날리장” 이야기가 된다면 이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참괴해서 어찌 후손들을 볼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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