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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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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8 ]

8    알리무노:몽등교(수필) 댓글:  조회:457  추천:0  2019-07-09
몽등교   알리무노   채운 남쪽에 위치한 운룡, 종래로 가볼 생각을 안해본 이곳의 잠들어있는 문을 노크한 것은 오직 꿈속의 다리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른아침, 현성에서 출발한 우리는 비강 沘江을 따라 올라가며 마음 안에 풍아한 멋으로 남아있는 다리를 찾고 있었다. 도로는 산 사이의 협곡을 완연하게 뻗어나갔고 계곡 량안의 제전에는 무서리가 한벌 깔려있었다. 시들어진 마른풀이 벌거벗은 산마루를 차지하고 있고 들쭉날쭉한 마을이 계곡 량안에 드문드문 앉아있다. 밀봉이 잘 안된 차창틈으로 찬바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차안은 찬기운으로 감돌았다. 겨울 아침, 낯선 이 땅, 어쩌면 현세거나 혹은 후세에 다리 우의 덩쿨마냥 나와 엉킬지도 모를 이곳이 나로 하여금 서리 내린 땅을 편안하게 내딛게 한다.   내가 본 첫 다리는 장신향의 안란교였다. 안란교는 현수교悬索桥였으며 다리 옆에 세워진 대리석판 소개비에는 이 다리가 성급 중점보호문물이라고 적혀있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오래 전부터 안란교는 량안의 산사람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 속에서 나는 신 모과를 등에 진 늙은 말의 뒤를 모과의 시큼한 향을 더듬으며 휘청이는 안란교를 건넜다. 발밑에서 흐르는 비강은 영원히 음표가 변하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다리어구의 주추돌 아래로 발 두쌍이 나와있었다. 한쌍은 누런색 고무장화를 신었고 다른 한쌍은 수공으로 만든 검정색 헝겊신을 신었다. 나는 이 두쌍의 발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교각에 기대여 강물소리를 사이두고 발 두쌍의 주인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누런색 고무장화 주인의 말소리만 들려왔다.  “가자. 그만하고 집에 가자고. 돼지죽도 아직 안 줬어.”  몇분이 지나서야 검정색 헝겊신 주인이 입을 열었다.  “이담에도 날 때릴 거야? 안 때린다고 담보해야 돌아가.”  고무장화 주인이 거칠게 말했다.  “안 때려. 한대 때렸다가 온 오전 쫓아다니는데 그 짓을 왜 해.”  고무장화 주인이 일어서니 헝겊신 주인도 일어섰으며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리어구를 떠났다. 이번에 나는 어떤 농가의 채마밭 변두리에 둘러놓은 돌 우에 앉아 곁눈질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집의 들보에는 온통 옥수수가 가득 걸려있었고 참새 한마리가 옥수수들 사이에서 포르릉 포르릉 날아다녔다. 나는 마치 속세 밖에 놓여있는 한알의 먼지인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계속 전진하여 통경 풍우교에 이르렀으며 이 다리의 본명은 대풍랑교라고 했었단다. 비강이 산굽이를 돈 곳에 다리가 세워져서 물살이 세고 파도소리가 리유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청나라 건륭시기에 세워진 다리는 현비식悬臂式이고 단공목량单孔木梁에 교량 본체는 나무 각재를 교착가첩交错架叠 형식을 채용하였으며 다리어구로부터 층층이 강심을 향해 가려내다가 량쪽 9메터 거리에서 5개의 굵은 횡목으로 련결하였고 그런 후 나무판자를 깔았다. 교량 바닥에는 태량식抬梁式 나무구조의 교옥桥屋을 지었고 다리 량쪽 끝은 강남수향江南水乡 풍격의 륙각정을 만들어 사람들이 휴식하고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해놓아서 풍우교风雨桥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고대의 아름다운 녀인이 란간을 짚고 멀리 바라보는 풍경도 없고 과거시험에 락방한 선비가 우연히 미인을 만나는 일도 없이 묵묵히 존재하고 있을 뿐 그냥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휴식과 비를 피하는 장소로만 제공되고 있다. 강 량안 시골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운룡의 주민들 대부분은 남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며 이런 풍우교는 운룡의 향마다에 하나씩 있다고 한다. 순탕을 빠져나와 멀지 않은 곳에 운룡 경내의 마지막 등교가 있다. 어쩌면 낡고 피페한 이 다리가 언제 세워졌는지 아무도모를 수 있다. 말라 끊어진 덩쿨은 쇠줄로 바뀌여있고 쇠줄도 오래된듯 세월의 풍파에 녹쓸어있다. 담배를 붙여물고 눈을 감은 채 담배연기를 둥글게 뱉어내면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연기는 마치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을 영현影现하는 것 같다. 강건너 장터로 가던 아석阿昔은 일곱달 된 임신한 몸을 이끌고 산고개를 넘던 중 등교가 보이는 비탈길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비강의 파도 속에 삼켜져버렸다. 아석은 그 날 강을 건너가서 꽃천 두자와 성냥을 살 생각이였다. 나는 덩쿨 사이로 두발을 뻗어 바람 속에 내놓으며 발끝에 차거움이 닿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담배연기의 몽롱함 속에서 어제 밤의 춘몽을 돌이켜보았다. 록음이 우거진 다리 우에 한가하게 누워서 다리를 건너던 어느 남자가 나를 데려가기를 기다린다. 장작불을 피워서 연기가 자오록한 집안에 데려들어가며는 화로의 각척 우에는 따뜻한 강낭죽을 끓이고 돼지우리 안에서는 돼지가 구유를 에워싼 채 먹이 달라며 보채고 닭장 안의 암탉은 몸을 옮겨 새하얀 닭알을 드러내며 공 세운 걸 알아달라는듯 꼬꼬댁 운다. 서쪽으로 기울어진 저녁해가 장작 틈 사이로 천만갈래의 잔잔한 빛을 들여보내여 시커먼 얼굴의 남자 몸에 비춘다. 나는 그 집의 아석이라 부르는 녀주인이다. 긴 머리로 상투를 틀고 빨간색 머리수건을 걸치였으며 어깨에 둘러멘 광주리에는 햇강낭이 가득 담겨있다. 현악기를 타는 셋째삼촌의 손가락이 나비처럼 날고 있는 게 똑똑히 보인다. 푸른빛 그림자가 뛰여노는 등교가 비강의 잔물결 속에서 휘청거리고 다리 건너 떠나간 뒤모습은 갈수록 멀어지는데 리아국은 긴 적삼에 짧은 홑저고리 차림으로 붉게 타오르는 홰불을 높이 들고 나에게 맑은 웃음을 지어보인다. 나는 우물가에서 소금을 끓이며 생활을 건조시킨다… (천년목 옮김) 출처:2018제1호  
7    김수연: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1(시, 외2수) 댓글:  조회:413  추천:0  2019-07-09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1 김수연     가을바람의 소리 아, 멀리서 그리움이 걸어오는 소리다    가을바람의 얼굴 아, 추억이 길을 찾아떠나는 뒤모습    가을바람의 냄새 아, 네 안에서 너를 읽던 시간의 향기다    가을바람의 손길 아, 네가 내 안에 들어서던 순간의 설레임   가을 속에 세상이 익어가고 있다 아, 너라는 한 사람으로 꽉 찬 세상이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 2   그냥  그대가 내 손을 잡아줬을 뿐인데 그게 뭐라고 그게 뭔 대수라고 가을조차 물들이지 못한 세상이 홀연 노란 금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아, 대수 맞네요 그 빛에 눈이 먼 나에게  이젠, 내 손을 잡아준 그대만 보이는걸요     아무렇지 않은 가을    사랑은 딱 그 깊이 만큼 가슴을 허비는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내 어깨를 만지는 가을비가 아무렇지 않게 내게 툭툭 던지고 갑니다    이 비가 멈추면 추위는 아무렇지 않게 이만치 더 가까이서 우리의 옷깃을 파고들 테지요 그러면 오늘 가을비 속에 흩날린 기억들은 아무렇지 않게 저만치 나에게서 멀어져갈 테지요 아,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고 떠나갈 가을 속에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가 봅니다 열심히 태운 이 시간들이 무엇으로 남을지는 아무렇지 않게, 그냥 정말 아무렇지 않게 선뜻 하늘의 뜻에 맡기는 법을 익혀야 할가 봅니다   이제 조금 더 촉촉한 가슴으로  이 가을을, 이 시간을, 이 사랑을, 이 기억을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듯이 안아주겠습니다 출처:2018제1호
6    박영화: 외할머니 전 상서(수필) 댓글:  조회:721  추천:0  2019-07-09
외할머니 전 상서 박영화   높아진 하늘을 따라 그리움이 늘어가는 추억의 계절이 다가왔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한자락에도 괜히 울컥해지는 감성 충만한 계절에 가을의 쓸쓸함과 고독을 유독 많이 담은 윤동주시인의 을 읊어본다. 부끄러움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은은하게 들려주고 자아성찰과 반성이 얼마나 멋들어진 일인지를 가장 느낌 있게 전달하는 시인, 윤동주 만큼 가을에 어울리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이름 석자만 대충 알고 지냈던 소시적에 작문선생님을 따라 무작정 윤동주 생가에 다녀온 뒤에도 마냥 이런 시인이 이런 곳에 머물렀었구나, 이 마을 사람들이 자주 모여서 무슨 일인가를 많이 했나 보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평화치 않던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처럼 차분하고 분위기 있는 시를 지어낸 시인에 대한 동경도 따라서 커져갔다. 그러면서 하나의 별에 자신의 고민과, 마음과 그리고 온 우주를 담고 싶어했던 시인의 먹먹함이 조금씩 마음에 와닿았다. 그렇게 시인 윤동주는 비물이 호수에 담기듯이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에 다가와서 조용히 내 감성을 적셔주곤 했다.  들판에 추수를 기다리는 곡식들이 온통 황금빛을 자랑하는 이맘 때면 산타마냥 자식들에게 나눠줄 선물꾸러미들을 옹기종기 쌓아놓고 기다리시던 외할머니가 더욱 그리워진다. 민족과 시대를 잃은 거창한 부끄러움과 그것들을 지켜내지 못한 반성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끄러움과 아픔, 그 감정들만은 시인을 꼭 닮은 채 살다 가신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난치병을 앓는 큰아들을 둔 자책감과 그에 따른 온갖 설음과 짐들을 오롯이 홀로 짊어지고 감당해내신 분이셨다. 늘 다소곳하고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억척스럽게 삶의 현장을 지켜오신 외할머니는 큰아들을 앞세운 아픔의 무게를 못 견디고 치매를 앓다 세상을 떠났다. 처음으로 외할머니가 부재한 세상에서 살게 된 막내외손녀가 오늘은 윤동주시인의 의 쓸쓸함과 감동을 빌려 높은 가을 하늘에 외할머니 전 상서를 띄워본다. 외할머니한테도 아무 걱정 없이 자연을 마주한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을가. 다시 생각해보니 단 한번도 외할머니께서 어느 곳이 경치가 좋더라, 어떤 꽃이 예쁘더라고 하셨던 기억이 없다. 이곳저곳 마을 사람들과 려행을 다녀오신 뒤에도 그 사진 속에서도 외할머니의 눈빛은 늘 자연을 즐긴 사람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려행 후일담에도 자연에 대한 감상평은 없으신 채 큰외삼촌이 어느 곳을 갔는데 힘들어했다, 어디에선 좋아했다 뿐이였다. 외할머니 생활의 대부분은 큰외삼촌 챙기기로 채워져있었지만 정작 그 정성과 마음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큰외숙모가 선택한 결혼이였지만 지병이 있는 아들을 장가보내서 딸의 인생을 망쳤다는 사돈들의 눈초리는 명절 때면 더욱 심해졌고 그럴 때마다 젊은 시절 성우로 활약할 만큼 재능 많고 의젓했던 큰아들이 위축되는 게 싫어서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뒤돌아 술로 서러움을 삼키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심심찮게 보아왔었다. 그렇게 외할머니에게는 삶의 어느 모퉁이에도 숨통이 트일만한 곳이 마련되여있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라도 곁에 계셨더라면 덜했을 외로움과 서글픔들을 그 때는 너무 어려서 미처 깨닫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림도 잘 그리고 손수 가구도 만들고 기관사로도 지낸 적이 있는 다재다능한 분이셨다고 한다. 불같이 급한 성격을 가진 외할아버지는 그 당시에도 큰 병은 아니였던 기관지염으로 고생하셨고 중병을 앓는 큰아들의 병치료만으로도 버거웠던 가정형편을 걱정하여 식음을 전페하고 약도 안 드신 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남편을 여의고 자책감의 무게를 키워온 외할머니의 생은 한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가슴 시린 삶이였다. 그럼에도 외할머니는 끝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감쌀 줄 아는 마음 따뜻한 분이였다. 엄마 손에 이끌려 외할머니댁에 가는 게 동년시절에는 제일 신나는 일이였고 제일 행복한 려행이기도 했다. 조금 더 커서는 틈만 나면 옷가지를 대충 챙겨가지고 혼자서 찾았던 외할머니댁은 항상 사촌들과 마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했던 원인도 있겠지만 손주들은 물론이고 사돈아이들까지도 외할머니를 잘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어린 우리들에게 류행가를 가르치고 그 당시엔 리해하지도 못하는 온갖 신기한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때론 술에 취해 춤도 곧잘 추던 외할머니댁은 우리에게 가장 큰 놀이터였고 따뜻한 쉼터였다. 가갸거겨도 겨우 알가말가 하는 손주들을 불러놓고 일본어로 개사한 노래를 가르치며 어렸을 때 학교에서 일본어로 수업하고 일본어만 사용하게 했다는 외할머니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신기했고 깨끗하게 정돈될 틈이 없을 정도로 늘 어질러진 채로 분주했던 외할머니 집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 이어 큰아들마저 앞세운 외할머니는 끝내는 슬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야 말았다. 외할머니의 모진 인생이 더 힘들어진 것도 큰아들 때문이였지만 외할머니의 유일한 삶의 끈 또한 큰아들이였다. 남편을 잃었을 때도 큰아들을 살리겠다는 의지 하나로 꿋꿋하게 버텨오던 외할머니는 큰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마지막 한오리의 지푸라기마저 놓았던 것 같다. 손톱, 발톱이 빠지도록 큰아들을 위해 새벽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밭일을 하면서 안 좋은 심장 탓에 거친 숨을 연거푸 내쉬면서도 늘 강철마냥 탄탄해보이던 외할머니는 그렇게 한순간에 맥없이 무너졌고 더 이상 고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던 할머니의 손발은 나어린 우리 것보다도 희고 곱게 변해갔다. 늘 숨이 차서 헐떡이던 모습도 차츰 사라져 아이처럼 평온하게 잠에 들곤 하셨다. 명절에 들어오는 선물을 한달이고 두달이고 감췄다가 다른 자식들 몰래 큰아들 집에 올려가시던 외할머니는 계절마다 제철 과일도 찾고 드시고 싶은 음식도 사다달라고 했다. 그렇게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6년 동안 치매를 앓으신 외할머니는 막내딸인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늘 우리 집을 큰아들 집이라 우기셨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막내딸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된 현실부정이겠지만 엄마도 나도 당시엔 그게 늘 서운했다. 그러면서도 전화만 받으면 내 이름만 부르곤 해서 다른 손녀들의 서운함까지 산 외할머니, 하루종일 한마디도 안하시고 그 긴 시간을 천장만 하염없이 쳐다보며 무슨 생각들을 하셨을가? 어쩌면 외할머니가 좋아하던 모든 아름다운 말들을 되뇌고 있던 건 아닐가. 언젠가 젊어서는 ‘고운 새댁’으로 불리웠던 적이 있다고 롱담처럼 하셨던 말씀 대로 외할머니에게도 밝고 싱그러운 청춘이 있었을 테니가… 그리고 어쩌면 백일홍을 그리워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언젠가 여름방학에 찾았던 외할머니댁 터밭 가장자리에 피여있던 꽃을 보며 막연하게 ‘꽃을 심을 여유도 있으시네.’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외할머니는 늘 빚을 진 자세로 힘겹게 삶을 감당해냈던 것이다. 언제 어떤 연유에서 심어진 꽃들인지는 자세히 몰라도 아마 모두가 잠든 희붐한 새벽녘에 당신의 고뇌와 아픔을 담아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희석시켜보려고 심었던 것은 아니였을가.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온 아픔들이 그 순간이나마 꽃으로 피여나고 꽃으로 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그 꽃 하나하나에 당신의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그리웠을 어머니를 담아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때늦은 바람이라 부질없긴 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유독 오래동안 피여있는 꽃이 백일홍이기도 하다. 쉽게 피였다 쉽게 지는 여느 꽃들과는 다르게 적어도 일년에 백일 동안은 외할머니 곁을 밤낮없이 지켜줬으니 참 고마운 꽃이다. 또 어쩌면 끔찍이도 아끼고 우애가 깊었던 형제자매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젊어서 요절한 막내녀동생과 셋째동생과 고국에 남겨진 남동생과 마지막까지 의지했던 큰오빠를… 아니면 조용히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장에 씌여져있던 외할머니의 이름 석자를 보고서야 안해로 어머니로 할머니로 누이, 동생, 언니로만 살다 가신 외할머니의 고독과 외로움이 너무나도 서글프게 안겨왔으니까. 그이들을 추억할 잠간의 여유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불공평한 운명에 내버려졌던 외할머니를 위해 좋은 기억만 허락한 6년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랬으면 참 좋았을 시간이였다.  이제 내가 대신 외할머니가 좋아하셨던 그 존재들의 이름을 불러드릴가? 그러면 잠시나마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달래질 수 있을가? 외로움과 그리움과 서글픔으로 반죽된 인생을 힘겹게 견뎌온 외할머니, 이제 외할머니가 누워계신 파란 언덕에도 수많은 별빛들이 내려앉아 말동무도 되여주고 술친구도 되여주었으면 좋겠다.  아스라이 먼 별로 떠나셨지만 또 손에 닿을듯한 거리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계시는 외할머니, 외할머니의 별에도 백일홍이 피였다가 진 시원한 가을이 왔기를, 별 하나하나에 외할머니를 추억해본다.  출처:2018제1호  
5    허은명: 벽(壁)(단편소설) 댓글:  조회:386  추천:0  2019-07-09
벽(壁) 허은명   출항 상해 우숭구국제크루즈터미널. 출렁이는 바다 속에 거인같이 서있는 8만톤 크루즈, 드디여 승객들이 하나 둘씩 탑승하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한시다.  오전 열시부터 와서 내내 대기만 몇시간째다. 투덜거리며 내 불만 만큼이나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크루즈에 올랐다. “SkySea 탑승 환영합니다!” 예쁜 서양 승무원이 탑승입구에서 구면처럼 웃어준다. 벌써 이 놈의 낡아빠진 늙다리 크루즈에 오른 지 다섯번째라 별로 신나지도 않는다. 안전검사 마치고 방키를 받아들고 나는 방이 아닌 11층으로 곧장 향했다. 11층에 위치한 SHISKIN, 스파와 면세점이 같이 있는 회사 운영 매장이다. 이곳 스파에 회사 아카데미가 있다. 륙지에서는 여러 법규 때문에 진행 불가한 프로젝트들이 여기 공해를 리용해 진행된다. 난 이번 아카데미 진행과 강의 통역을 담당한다. “직원이 또 바뀌였네…” 나는 빠른 걸음으로 프런트데스크를 지나 아카데미 라이브가 진행될 스파룸 두개를 하나씩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로 온 녀직원이 역시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 들어온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가요?” “래일 라이브 진행 시 침대를 오른쪽에 더 갖다 대주세요. 탁자 우 모든 물건은 다 치워주세요. 수술포 펼 자리예요. 룸 두개 사이 문은 열어주시고 테이프로 고정해주세요.” “아…” 그제야 직원은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무영등도 잘 고정해주세요. 배가 많이 움직일 수도 있으니.” “아, 네.” “방마다 하나씩요.” “네…” 대답에 귀찮음이 묻어난다. 그러는 직원을 보며 난 약이라도 올리듯이 “부탁해요” 하고 웃어보이며 스파를 나섰다.  뒤죽박죽인 가방 속을 한참 휘저어 방키를 꺼내보니 418번 룸, 실망이다. “아 뭐야 짝수잖아…” 짝수는 배머리 쪽, 홀수는 배의 뒤부분, 스파는 배의 뒤부분, 11층 식당도 배의 뒤부분… ‘출근길’이 멀다. 한참을 찾아 겨우 방에 들어오니 침대 두개인 심플한 방이다. 창으로는 바다수면이 거의 눈앞에 보인다. 특별히 요구한 2인실이다. 여기서 설명하자면 크루즈 룸과 룸 사이 방음은 안 좋다. 난 옆방 휴대폰 벨소리도 방구소리도 말소리도 코 고는 소리까지도 다 들은 적이 있다. 예민해서 잠도 깊이 못 자는 나에겐 정말 최악인 셈이다. 하여 이번엔 특별히 침대 두개로 왼쪽이 시끄러우면 오른쪽에, 오른쪽이 시끄러우면 왼쪽에 이렇게 번갈아 잘 생각이다. -띵똥- “잘 도착했어?” “밥은 먹었어?” 남자친구다. “응, 이따 먹으려고.” “감기는 좀 어때?” “내가 사다준 홍삼차는 두고 갔더라? 왜 갖고 가서 마시지.” “래일 몇시부터야?” “자기야, 나 짐정리 좀 할게.” “그래 알겠어…” 조금 풀이 죽은듯한 남자친구와의 대화를 끊고 나는 그대로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을 떠보니 벌써 방안은 어둡고 창밖엔 검은 바다가 넘실거린다. 휴대폰을 보니 신호가 없다. 곧 공해에 들어선다는 표시다. 쿵쾅대며 등을 켜고 인터넷련결을 결제하려고 SkySea 메신저앱을 등록하는 순간 문자 하나가 들어온다. 크루즈 내 메신저 앱, 방번호로 서로 련락이 자유롭게 되여있다. “안전훈련(安全演习)에 안 가셨어요?” 헉, 누구지? 하고 발신 방번호를 보니, 416번 바로 왼쪽 옆방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안전훈련시간이다. 출항하기 전 가장 중요한 안전훈련이다. 승객전원은 물론 선원들 모두가 대극장에 모여 안전훈련을 진행한다. “놀라지 마세요, 금방 그쪽 방에서 소리가 크게 나서.” “…” “려행이신가요? 전 그렇습니다만.” “… 어디서 유시진의 말투를…” 난 무시해버리고 49불을 지불하고 인터넷을 련결했다. 순간 띵동띵동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자기야 밥 먹었어?” “출항했어?” “난 지금 퇴근하는 길이야.” “지금 뭐 해?” 옆방이 신경쓰인 나머지 난 조금 짜증이 났다. “얼른 밥 먹고 쉬여. 이제 출항이야.” “그래 이따 또 련락할게~” 남자친구 문자가 끝나자 바로 또 들어오는 문자 한통. “그럼 좋은 려행 되세요.^^”   공해 전쟁이다. 공해의 깨끗한 비취색 바다를 구경할 틈도 없이 나는 원장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 어렵게 모셔온 국제전문가시라 한치 불편함도 갖게 해서는 안되는 게 내 역할이다. 강의부터 시작하여 라이브 동시통역까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의대를 나오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의료업계에서 그것도 삼년씩이나 일하게 되였는지 나조차도 신기할 따름이다.  “제니는 의대 가자.” 원장님이 제일 자주 하시는 롱담이다.  “차라리 원장님한테서 지방흡입수술 받는 게 더 쉬워요!” 뚱뚱하다고 지방흡입하라고 하실 때마다 홀랑 벗고 어찌 수술해요, 수술 받고 나서 어떻게 원장님 얼굴 보고 일해요, 하면서 머리를 젓던 나다. “실리프팅의 여러 방식 중 고정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가 큽니다. 고정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요. 요즘은 측두부위 절개하여 고정하는 방식으로 하기도 합니다. 효과는 좋은 반면 유지기간이 짧다는 단점이 있지요.” “이번 아카데미에서는 먼저 간단한 모노실과 가시가 달린 코그실을 리용한 시술방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진땀이 난다. 누군가는 통역이 얼마나 쉽냐고 입만 놀려 돈 번다고 하겠지만 징그럽게 힘이 드는 게 통역이다.  특히나 강의통역을 위해 몇날 밤을 꼬박 샜는지… 얼굴 신경과 동맥 이름은 왜 그리 어려운지… “커피 한잔 하자.” 원장님의 뒤를 따라 11층 뷔페식당에 들어섰다. 식사시간대가 훌쩍 지나 이미 메인료리들은 치워져있고 샐러드와 과일만 보였다.  손에 커피 한잔씩 들고 갑판에 올라갔다. 바람이 시원하다. “언제 결혼하니?” “다음해 2월에요.” “예비신부가 나 때문에 맨날 외박이구나.” 곧 결혼을 앞둔 내가 출장 나온 것이 조금은 미안하신지 원장님이 장난스럽게 놀리신다. 나는 웃으며 대답 대신 어두운 밤바다를 멀리, 최대한 멀리 바라보았다. 저기가 끝인가? 아니면 더 가야 끝인가… “집사람이랑 딸이랑 같이 탔으면 좋았을걸.” 원장님은 가족이 그리우신가보다. 다시 11층에 내려와 라이브를 저녁 여덟시까지 마치니 11층 로천BAR에서 파티가 열렸다. 다들 손에 맥주 혹은 칵테일을 들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다. 평소 꽁꽁 봉인을 해뒀던 령혼들이 풀려나와 자유롭게 소리지르고 광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그들 속을 간신히 빠져 지나가려던 그 순간 나의 손을 스치고 지나는 손 하나! 흠칫 놀랐지만 내가 예민한 거겠지 생각하며 가까스로 사람들 속을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가슴이 뛴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남자친구의 문자가 수두룩이 들어와있다. 첫번째 문자를 확인하려는 중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갑자기 긴장이 되고 옆방 쪽으로 신경이 쏠린다. 방문 쪽에서 이쪽 창가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난다. 뚜벅뚜벅… 창가에 멈췄다 다시 랭장고 쪽으로 걸어간다. 뚜벅뚜벅… 그러다 다시 침대 쪽 정확히 내 옆에 앉는 소리가 난다. 나는 다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불도 켜지 않은 방안에서 난 한참을 숨 죽이고 옆방에 신경쓰고 있었다. “아침에 정장 입고 나가는 모습이 예뻤어요.” “!” 내가 듣고 있는 걸 알기라도 한듯이 416번 방에서 날아온 문자, 여전히 도둑고양이마냥 숨 죽이고 듣기만 하는 나… “12층 다용도실에서 강의하시는 걸 봤어요. 예뻤어요.” 여전히 숨 죽이고 있는 나… “손이 차거웠어요.” “!” 또 한번 가슴이 뛴다. 아까 나의 손을 스치고 지나가던 손 하나가 생각난다. 부드러운 손이였다. 아니, 이 남자가! “무례하시네요. 다시 문자 보내지 마세요.” 하고 아주 바보 같은 답신을 보내고 난 급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문자를 무시라도 하듯 또다시 날아온 문자. “래일 후꾸오까 려행, 저 혼자인데 같이 할래요?” 그리고 나의 방에도 그의 방에도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참 후 날아온 그의 문자… “잘 자요. 래일 봐요.” 그렇게 나는 수두룩이 회신을 못한 남자친구의 문자를 멍하니 보며 결국 잠을 설쳤다.   후꾸오까 후꾸오까 하까따항의 맑은 경치를 구경하며 원장님이랑 크루즈에서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난 자유의 몸이 되였다. 원장님은 바로 크루즈를 내리셔서 후꾸오까-서울 비행기로 돌아가셨다. 벌써 방문 앞 복도는 시끄럽다. 맞은켠 방도 방문을 활짝 열고 후꾸오까 관광에 들뜬 소리란 소리는 다 내고 있다. “뭐 입지?” 하며 옷장에 걸어놓은 옷들을 만지던 중 첫날 입었던 정장이 눈에 들어온다. 저도 모르게 어제 밤 그 한마디가 생각난다. “래일 후꾸오까 려행, 저 혼자인데 같이 할래요?” 귀신에라도 홀린듯 난 그 정장을 꺼내입었다. 려행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불편한 정장차림, 그럼에도 이 설레임은 뭘가? 떨쳐내듯 와락와락 벗어내고는 간단한 반바지에 티를 입고 도망치듯 방문을 나와버렸다.  후꾸오까는 귀여운 도시다. 낮고 아담한 지붕이며 정갈한 나무들이며 고운 백사장이며 오래 머물렀다간 사랑이 싹틀 것 같은 신비로움마저도 있다. 그 도시 속을 걷고 있으니 이 한달간 아카데미를 준비하며 고생한 모든 지겨움들이 다 씻겨내려가는 기분이다.  “자기야, 나 지금 후꾸오까 도착했어.” 남자친구한테 사진 한장 찍어 보냈더니 10초 만에 문자폭풍이다. “기분 좋아?” “후꾸오까는 좋아?” “날씨는 어때?” “운동화 신었지? 편하게 하고 다녀 알았지?” “감기는 어때? 약은 먹었어?” 남자친구답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친구는 정말이지 나 바라기이다. 나 밖에 모른다. “나 후꾸오까 벌써 세번째야…” 언제부턴가 난 나의 무뚝뚝함을 남자친구의 열정을 죽이는 무기로 쓰고 있는 것 같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여있다. “선물 뭐 사다줄가? 저번에 그 안약?” 남자친구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살갑게 굴어봤다. “아니야, 자기 사고 싶은 거 많이 사고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 돼, 난 됐어.” 착해서 얄밉다. 가끔은 저 착함이 날 피곤하게도 한다.  우리는 촬영이라는 같은 취미 때문에 우연히 서로를 알게 되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만났음에도 장장 6년이라는 시간을 련애만 해왔다. 서로 사귀자는 말도 없었고 결혼하자 프로포즈는 더욱 없었다. 불 같은 나의 성격과는 달리 온순하고 잔잔한 성격의 남자친구는 마냥 나를 받아주고 예뻐하기만 했다. 조금은 심심하고 큰 변화가 없을 것 같던 우리의 관계가 결혼으로 넘어가게 된 건 내가 삼십대 중반으로 넘어가자 로산이 걱정이 된 나머지 남자친구의 아버지가 결혼날자를 받아오셨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후꾸오까에는 유명한 이색스타벅스가 있다. 이 스타벅스만 다른 인테리어로 되여있다고 한다. 후꾸오까에 올 때마다 들리는 곳이다. 오늘도 나는 홀로 이곳에 들려 아메리카노 한잔 주문하고 멍을 때리기로 작정했다. 천장의 나무격자 인테리어는 보고만 있어도 빠져드는 묘한 느낌이 있다. “반바지도 이쁘세요.” 하고 해살같이 웃으며 내 앞에 앉는 한 남자. “스토커예요?” 그 웃음에 홀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잘 잤어요?” 그의 눈은 크지는 않으나 눈동자가 깨끗하고 빛났다. “결혼하셨네요?” 결혼반지를 낀 그의 손가락은 길고 부드러워보였다.  “전 재하라고 해요.” 그는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저 애인 있어요.” 심장이 쿵쾅대고 있다. 분명 나는 화나고 당황한 것일 거다. “밤에 크루즈에서 같이 맥주 한잔 해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몸에서 싱그러운 향이 나의 얼굴을 감싼다. 그렇게 안절부절하는 나를 남겨놓고 그는 사라졌다. 크루즈의 밤은 항상 열기가 넘친다. 후꾸오까 하까따항을 떠나기 시작하는 크루즈의 움직임에 따라 내 마음도 야릇하게 숨가빠온다. 꼭 무엇을 기다리기라도 하는듯이 나는 조급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방에 돌아가면 왠지 안될 것 같은 마음에 갑판에서 밤바람을 쐬여보지만 머리는 여전히 뜨겁다. 그렇게 젊은 피들의 파티가 조용해질 때까지 멍하니 있는 나의 옆으로 싱그러운 그 향이 다가온다. 아까 낮이랑 조금 다른 느낌으로. 큰 키는 아니지만 곧고 다부진 체격이다.  “한잔만 해요.” 그는 역시 홀리울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나의 손에 맥주 한병 쥐여준다. 호가든의 향긋함이 코끝을 스친다. 어데서 난 용기인지 나는 머리를 돌려 과감히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그도 웃으며 바라본다. 나와 남자친구가 이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부인은 같이 안 타셨어요?” 나는 그의 결혼반지를 슬쩍 보면서 입을 열었다. “헤여진 지 2년 됐어요.” 그의 눈에 한오리 슬픔이 살짝 비추었다가 연기같이 사라진다. “어떤 분이셨어요?” 실은 헤여진 리유가 궁금했다. “강한 녀자예요. 강한 나머지 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맥주병을 입에 갖다 댔다. 한모금에 반이 내려갔다. “제가 어떻게 사랑해줄지 몰라서 보내줬어요.” 문득 얼마 전 다투던 중 남자친구의 한마디가 귀가에 울린다. “너 너무 강해서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왜 갑자기 그 한마디가 다시 떠올랐는지… 갑자기 그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로 훅 들어온다.  “저기요!” 당황한 나머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요!” 여전히 내 얼굴 가까이에서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나의 대답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는듯이 그는 낮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손만 잡을게요.” 차거운 내 손 우로 그의 부드럽고 기다란 손가락이 올라탄다. 조금씩 조금씩 손끝에서 손등으로, 그리고 약지를 스치며 나의 손바닥을 펴서 깍지를 낀다. 나는 얼어붙은 자세 그대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이 당황스러움과 마음을 간지럽히는 그 무엇이 나를 어쩔 바를 모르게 하고 있다. 그러는 나를 그는 꿰뚫어보기라도 하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다.  “참 예쁘네요.” 그의 목소리는 선체를 치는 파도와 바람소리와 잘 어울리고 있다. “놀랐어요?” 역시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그는 나를 끌어당겨 갑판 란간에 기대선다. 나의 손을 잡은 채로. 나는 그 손을 뺄 힘도 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말없이 손만 잡은 채 나란히 서서 보이지도 않은 밤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나의 모든 신경은 깍지를 낀 손에 쏠려있고 그의 향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였다. “놓으세요!” 갑자기 정신이 들기라도 한듯 손을 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나의 몸 뒤로 그의 눈빛과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방에 들어온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가슴을 붙들고 있었다. 나의 손에는 아직도 그 온기와 향이 남아있다. 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나를 따라다닌다.  나는 오른쪽 침대에 누워 왼쪽 방 문이 열리는 소리를 기다리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공해 마지막 하루다. 간밤의 숙면 덕에 몸도 머리도 가볍다.  창문 밖에 보이는 파도가 예쁜 에메랄드 보석처럼 부서지고 있다. 그 파도들을 보고 있으니 어제 밤 갑판이 생각난다. SkySea 메신저 앱을 열어보았다. 문자가 없다. 뭐지? 내가 지금 뭘 기다리는 건가? 이러는 나 자신이 못마땅하면서도 나는 저도 몰래 왼쪽 침대로 자리를 옮겨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조용하다. 이름 모를 실망감이 밀려온다. 옆방 그 사람한테도 이러는 나한테도. 캐리어에서 3일 간 잊고 살았던 책 한권을 꺼낸다. 커피를 마시려고 포트에 물을 올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또박또박. 제 구두소리가 자동차 바퀴소리와 어울려 너무도 생생히 들리는 늦은 밤의 귀가길 속에서 녀자는 자기의 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아스라이 머나먼 곳에 있는 별들처럼 자신의 꿈도 저 멀리 있는 현실이 서글펐습니다…” - 속 구절 인용   얼마나 읽었을가… 복도 저 끝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발걸음소리 천천히 그리고 무게 있게 한걸음 한걸음 이쪽을 향해 아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뚜벅뚜벅… 그 발걸음은 내 방 앞에 몇초 간 멈추었다 다시 옆방 문앞으로 간다. 이내 들려오는 방안의 소리들…  그는 웃옷을 벗고 있다. 그의 웃옷은 옷장에 걸리고 있다. 그는 구두를 벗고 있다. 그리고 창가로 걸어가고 있다. 마치 그가 나의 방안에 있기라도 하듯이 나는 그를 보고 또 듣고 있었다. 그는 뭔가를 꺼내든다.  ‘탁~’ 하고 맥주캔 따는 소리가 난다. 바로 나의 휴대폰에 문자 하나가 들어온다. “방에 있죠? 같이 마셔요.” 아까 내 방 앞에서 몇초 간 멈춤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맨발로 조심조심 문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들을가 두렵고 또 묘하게 흥분이 된다. 가만히 열었음에도 문에서는 ‘덜컹’ 소리가 천둥소리 만큼이나 크게 난다. 문 앞에는 맥주 세캔이 놓여있다.  귀신에라도 홀린듯 나는 왼쪽 침대에 앉았다.  ‘탁~’ 나는 용기를 내서 캔을 땄다. “오늘은 파도가 유난히 이뻐요.” 그는 나한테도 이쁘다고 했었다. “그러네요. 오늘은.” 나도 모르게 ‘오늘’에 힘을 주게 된다. “곧 밤이 어두워지겠죠.” 그의 문자에는 아쉬움이 묻어나있다. 나 역시 이름 모를 아쉬움에 마음이 떨린다. ‘탁~’ 다시 들려오는 맥주캔 따는 소리…  나도 두번째 캔을 땄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요.” 그의 얼굴과 미소가 또다시 보인다. “여전히 무례하시네요.” 지금 나의 미소를 그는 보았을가? “우리 같이 있을래요?”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쿵쾅쿵쾅. 심장이 튀여나올듯이 뛰기 시작한다.  그 소리가 들킬가봐 나는 가슴을 꼭 부여잡았다. 그가 침대에 올라 벽 쪽에 다가온다.  “가까이 와요.” 그의 문자가 그의 목소리로 변해 내 귀가에 울리는 듯하다. 나는 손을 들어 벽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천천히…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곳에 멈추어 등을 대고 앉았다. 그의 향기가 또다시 나의 얼굴을 살랑살랑 간지럽히는 듯하다. ‘탁~’ 나는 세번째 캔마저도 땄다. 이어 한뼘 벽 뒤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난다.  묘한 행복함이다. 가슴 속에 노루만 뜀박질을 살살 해준다면. “제가 갈가요?” 그는 달콤하게 그리고 위험하게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나는 대답 대신 살며시 벽에 얼굴을 댔다.  그 역시도 미동조차 없다. 창밖으로 높아진 파도소리만 출렁출렁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나는 등뒤로 그의 온기를 느끼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마치 사랑을 나눈 뒤 련인마냥 말없이 조용히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띵똥 “래일 아침에 도착하지?” “데리러 갈게.” 남자친구다. 뭐라고 회신을 해야 할지 몰라 괴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미안하다. “주차장이 머니까 걸어나오지 말고 출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찾으러 갈게.” 남자친구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꼭 마치 길을 잃은 나를 찾으러 나온듯이 매 한글자마다 나를 잡아끌고 있다. “보고 싶어 많이…” 문자 속에 남자친구의 착한 얼굴이 나를 슬프게 바라본다. 난 발치에 놓인 따기만 하고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맥주 세캔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난다.  배가 흔들거리며 방도 침대도 내 눈물도 같이 부르르 떨린다. 이미 차겁게 식은 벽에 대고 나는 가만히 얘기했다. “잘 자요.”   하선 “승객 여러분, 상해 우승구국제크루즈터미널에 도착하였습니다. SkySea 크루즈를 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방문 앞에 멈춰서서 머리를 돌려 방을 둘러보았다. 창가엔 페지가 접힌 책 한권과 따뜻한 커피 한잔이 놓여있다. “좋은 아침!” 나는 만족하며 방문을 나섰다. 출처:2018제1호  
4    최창륵: 가치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지성인(인물전기) 댓글:  조회:398  추천:0  2019-07-09
가치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지성인 -김병민선생 략전 최창륵     선생은 20여권의 저서, 백여편의 론문, 수십편의 문학평론과 수필 등 정열적인 문필활동을 펼치며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주류 학계에서 조선-한국학연구의 대표 주자로 활약한 저명한 학자이다. 또한 10여년 간 연변대학교 부교장과 교장을 력임하며 제도적 정비와 통합캠퍼스 신축을 통해 21세기 민족교육의 새로운 기반을 구축한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교육가이기도 하다.  선생은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후 태여나 ‘개혁개방’을 전후한 시기에 학업을 완성하고 탈리념적인 글로벌 시대에 학문활동을 펼친 전형적인 중국조선족 3세대 학자이다. 그리고 이 세대 학자들은 다원적인 시각과 리론에 의한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의 구축, 력사와 현실 그리고 세계와 지력사회의 력동적 관계 속에서 중국조선족 교육 및 사회문화적 전통의 계승과 갱신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완성하여야만 하였다.  중국조선족은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침략 및 중국 동북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과 맞물린 근대 이민과정에서 형성된 극히 현대적인 특수 집단이다. 이들이 해방전쟁,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 력사적 사변들과, 중·조, 중·한 관계의 복합적인 력학 관계 속에서 체험한 삶은 타집단의 추측을 불허할 만큼 특수하며 복잡한 것이다. 그 다난한 현대 과정에서 겪은 특수한 력사적 체험은 사회, 정치, 문화 및 지역적 경계지대에 위치한 다중성과 더불어 중국조선족의 사회·문화적 특징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라 할 것이다. 력사적 체험이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개개인의 삶의 경험이 루적되고 합쳐져 집단적 기억과 경험이 되는 법인 만큼 ‘중국조선족’의 사회·문화적 내포는 리념과 리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얻어지는 것이였다.  연변대학교의 ‘평민교장’으로 널리 존경받은 선생은 실제로 가장 평균적인 중국조선족으로서의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학계는 물론 중국의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 연변대학교의 동료들이나 제자들, 외국의 지인들 모두에게 늘 감동으로 다가가며 젊은이들에게조차 친근한 벗인 선생은 바로 중국조선족의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 지혜와 미덕을 일신에 지닌 분이다. 그럼으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살피는 작업은 곧 중국조선족의 력사적 현장과 사회·문화적 의미를 되짚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1. 가난이 준 선물 1951년 음력 9월, 선생은 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 향수촌(响水村)에서 태여나셨다. 향수라는 마을 이름은 마을 서북쪽을 감돌아 흐르는 목단강 물이 락차로 인해 멀리까지 그 여울소리가 들린다 하여 얻은 이름이다. 이곳 입쌀은 예로부터 황실에 공납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화산폭발로 인해 형성된 현무암 우의 충적층에서 자라기 때문에 차지고 빛갈 곱기로 유명하다. 선생의 가문은 1918년 할아버지이신 김인국(金仁国)이 자식들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으면서 중국에 정착하였고 선생은 조선족 9세대가 오붓하게 모여사는 작은 동네인 웃향수에서 태여났다.  선생은 부친 김윤학(金允学)과 어머니 천숙선(千淑善)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는데 태여나서 50일 만에 촉한을 앓던 아버지를 여읜다. 그 때 어머니 년세가 33세, 큰형이 11살이였다. 그리고 36세에 남편과 시숙을 잃은 큰어머니가 딸과 조카딸을 데리고 선생의 집에 들어와 살았으니 그 가난이야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선생의 7살 되는 셋째형과 4살 되는 누나가 동시에 페염에 걸리는데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맞아야만 살아날 수가 있었다. 페니실린 한대 값이 쌀 한가마니 값이였고 집에는 식량이라고는 고작 쌀 두가마니 뿐이였다. 선생의 어머니와 큰어머니는 의논 끝에 쌀 한가마니만을 팔아서 셋째형을 살리고 가슴 터지는 아픔을 누르며 누나가 죽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만한 가난이였다. 언젠가는 어머니가 식량에 보태기 위하여 동네에서 30 리 가량 떨어져있는 산으로 도토리 줏기를 떠난 적이 있었다. 어린 선생은 호기심으로 그 뒤를 따라갔고 점심으로는 몸에 지닌 수수떡 하나가 고작이였다. 그것을 선생에게 먹이고 난 어머니는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쓰러지고 만다.  그럼에도 가난이 선물한 것이 있으니 끈끈한 사랑과 사은(谢恩)의 마음이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섬약했고 유복자나 다름없는 막내였기에 어머니와 형님들의 류다른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선생은 집에서 10여리 떨어진 학교를 매일 오고가야 했는데 “신발과 털모자는 형님들이 쓰던 것을 물려받았지만 엄동설한이라 발이 얼고 귀가 얼기가 일쑤였다. 그 때 겨울은 왜 그다지도 추웠던지 꽁꽁 얼어서 동태가 되여가지고 손을 호호 불면서 울상이 되여 집에 들어서면 어머니는 랭수를 담은 토기대야에 내 발을 담가서 랭기를 빼주면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의 그 모습은 오늘도 내 가슴을 한없이 아프게 한다.”(1)소박한 도리이지만 이 세상에서 정녕 값진 사랑은 가난 속에서의 사랑인 법이다. 그것은 삶에 희망을 주고 어려움을 이겨가는 방법을 배워주며 무엇보다 스스로의 소중함과 인간적 존엄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편, 가난은 삶이란 많은 이들의 도움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중국어 속담에 ‘물 한방울의 작은 은혜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한다(滴水之恩, 涌泉相报)’는 말이 있는데 이는 주변 사람들이 흔히 선생을 형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선생은 산문집 《와룡산 일지》에서 자신에게 베푼 타인의 은혜에 대해 일일이 적고 있다. 례컨대 조선 류학시험을 앞두고 직접 기숙사를 찾아 시험 지도를 해준 허문섭선생에 대한 고마움이나 선생의 건강을 념려해 돼지염통을 구해다가 보이라실 연탄불에 구워준 김동익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감명깊이 전하고 있다. 선생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살펴보도록 한다.    사람은 세상에 태여나서 남들의 구원을 받고 도움을 받고 출세를 한다. 제가 잘나고 수준 있고 능력 있어 출세했다고 득의양양해서는 안된다. 불행아인 너의 인생길에 길목마다 귀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지어다. 그래서 너는 좋은 운을 가지게 된 게다. 은인을 잊는 자는 소인배다. (…중략…) 반드시 지나친 욕심과 야심을 버리고 량심을 지켜라. 이것이 인간도리이니라.(2)   이처럼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태여난 선생이 가난과 가족, 고향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지혜는 인정을 소중히 여기는 소박한 농가의 정서였으며 그 사랑과 보은의 마음이 선생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였다.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선생의 큰형이였다. 열한살에 아버지를 잃은 큰형은 듬직한 소년가장이였다. 소학교 시절에 오전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 어린 선생을 업어 달래곤 하였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단과대학인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하였으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자퇴하고 사범학교 단기반을 거쳐 소학교 선생으로 취직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민족교육사업에 평생을 바친 큰형의 훈육으로 선생은 1957년 강서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 간 우등생으로 공부하였다. 특히 시와 산문에 능한 문학청년이였던 큰형은 일찍부터 선생에게 그림책, 동화, 아동소설을 사주어 책을 가까이 하게 하였으며 선생은 중학시절에도 큰형의 서가에서 《서유기》, 《삼국지》 등 중국의 고전은 물론 조선현대문학 작품선집 등을 접하게 된다. 일찍부터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운 선생은 살벌하였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서점을 들이쳐 반동적인 서적이라며 닥치는 대로 책을 불사를 때에도 면목이 있는 홍위병에게 사정하여 《청춘의 노래》, 《홍기보》 등 중국 당대 작품들을 몰래 빼내 읽곤 하였다. ‘문화대혁명’의 발발로 하여 청소년기의 선생은 큰 역경에 처하게 되는데 다행히도 가장 힘든 고비마다 큰형이 삶의 방향타가 되여주었다. 1966년, 선생은 발해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고중 입시를 준비하던 중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다시 1968년 4월에 이르러서야 녕안중학교 고중부 2학년에 편입되나 같은 해 10월 정부의 지시로 귀향하여 농민이 되고 만다. 그 당시 선생이 계속하여 지적 성장과 사회적 진출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군복무였다. 1970년 12월, 입대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게 된 선생을 앞에 앉혀놓고 큰형은 정중히 3가지 엄명을 내린다. 첫째는 중국어 수준을 제고해야 하며 둘째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군관으로 발탁되여야 하며 셋째는 시골 처녀에게 련애편지를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이였다. 그만큼 큰형은 선생이 훌륭한 사람이 되여 더 너른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랐고 장차 선생의 사회적 진출을 위해 고심참담하였던 것이다. 큰형의 가르침 대로 군복무 기간 선생은 매일 중국어로 된 신문 읽기와 독서를 견지하였다. 모르는 한자가 있으면 휴대용 사전인 《신화자전》을 찾아보곤 하였는데 군복무를 마칠 때가 되여서는 사전의 글들을 거의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어로 일기를 쓰고 독서필기를 하였으며 집에 보내는 편지도 중국어로 쓰곤 하였다. 하여 선생의 중국어 수준과 필력은 빨리 제고되였으며 중대 지도원의 눈에 들어 보고서와 흑판보 작성, 무기 관리 등을 담당하는 중대 문서로 발탁이 되였다. 비록 군복무를 마칠 때 공교롭게도 군편제 축소가 실행되여 군관으로 발탁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그간 닦은 중국어 실력은 장차 선생이 거대한 지식의 장이자 인류문명의 주요한 패러다임의 하나인 중국문화에로 시야를 넓혀갈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  선생이 제대한 뒤, 군련대 정치부에서는 성실하고 공부에 열중하며 많은 성과를 올린 제대군인이니 직업배치를 해주거나 대학에 추천하는 것이 좋겠다며 지방정부에 특별히 추천서를 보내주었다. 이에 지방정부에서는 선생에게 수력발전소 혁명위원회 부주임 자리를 제안하나 이때에도 큰형은 그 유혹을 물리치고 대학진학을 선택하도록 한다. 이에 선생은 대련경공업대학교에 추천되나 큰형은 공과보다 문과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지방정부와의 몇차례 교섭 끝에 선생이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하였다.  큰형은 무엇보다 시골 소년인 선생에게 보다 큰 세상을 향한 포부와 꿈을 심어준 분이였다. 선생의 좌우명인 왕지환의 “더 높은 봉에 오르라(更上一层楼)”라는 시구는 젊은 시절 큰형이 종이에 써서 늘 벽에 붙여두었던 시구이기도 하였다.(3)실로 큰형은 선생에게 역경과 다난한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다른 한 힘, 즉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마음가짐을 심어주어 이 또한 선생의 삶에는 큰 선물이였다. 선생은 1975년 9월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되며 비로소 본격적인 학문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선생은 은사이신 정판룡선생을 만나 자신의 인간적, 학문적 폭을 키우고 큰 학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맞는다. 정판룡선생은 1950년대 중반에 쏘련 류학을 떠나 모스크바대학교에서 후보 박사 학위를 따낸 외국문학 학자이다. 정판룡선생은 국제적 시야를 지닌 학자였을뿐더러 뛰여난 식견과 드넓은 흉금, 문화 융합적 리념으로 시대를 선도한 대가였다. 선생이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는 정규적인 교육이 불가능하였다. 학생들은 1년 간, 연길에서 북쪽으로 수십키로 떨어져있는 황초구(黄草沟) 학교농장에 이르러 오전은 로동을 하고 오후에야 수업을 보곤 하였다. 그 때 정판룡선생은 기숙사 구들 우에서 흑판이나 준비된 강의안조차 없이 즉흥적으로 엥겔스의 《반 듀링론》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시공간의 무한성이며 물질과 정신의 관계 등에 대한 명쾌한 해석들이 선생의 마음속에 현상 너머의 철학적 세계에 대한 탐구심과 동경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1978년 7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선생은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중국현대문학강좌에 교원으로 남게 된다. 이에 학부장이였던 정판룡선생은 선생더러 중산대학교 중문학부에 이르러 1년 간 연수를 하고 돌아오라고 하명한다. 명문대인 중산대에는 거물급 학자들이 많으므로 “중산대학교에 가서 학문이 무엇인가를 알고 오오. 큰물에서 큰 고기가 노는 법, 사람도 깊은 물에 들어가보아야 용기도 생기고 지혜도 커지는 법”(4) 이라며 선생을 격려하였다고 한다. 1979년 2월 21일, 선생은 사흘 간 꼬박 일반석에 앉아 광주에 이른다. 연수 기간 지도교수인 중문학부 학부장 오굉총(吴宏聪)은 항일전쟁 당시 곤명에서 설립되였던 전시 림시 대학인 서남련합대학교 출신으로서 중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학자인 문일다선생의 애제자이기도 하였다. 중산대학교에서 선생은 중국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게 되였으며 로신 연구로 유명한 진측광(陈则光)교수의 명강의를 들으며 로신문학에 심취되기도 한다. 불타는 학구열에 선생은 연수기한을 1학기 더 늘였으며 중국 고전문학과 고대한어를 포함한 다양한 학과목들을 청강하였다. 이처럼 중산대학교에서의 공부는 선생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학문적 눈높이를 키워주었을뿐더러 중국의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에 대한 탄탄한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선생이 장차 중·한 비교문학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을 다져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광주에서의 생활은 가난의 련속이였다. 선생의 월급은 고작 38원이였는데 호조금 5원과 식비 29원을 빼고 나면 한달에 4원 정도 남곤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생은 중문학부 자료실을 통해 많은 책을 구입하다나니 88원이라는 거금을 빚지게 되였다. 마침 약혼녀 김인옥(金仁玉)녀사가 결혼식에 입을 진품 외투를 사오라고 일금 150원을 보내오는데 선생은 그 돈으로 밀린 책값을 물고 대신 값싼 ‘짝퉁’ 외투를 사서 돌아간다. 그 사실이 나중에 들통이 나고 말아 친인척 간에 유명한 일화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 2월 선생은 대학 동기이자 평생의 반려자인 김인옥녀사와 결혼을 한다. 사모님은 장녀로 태여나 성품이 너그럽고 의연한 분으로서 사정이 어려웠던 시댁 식구들을 오랜 세월 일일이 보살피며 선생을 열심히 내조한 분이다. 또한 선생께서 마음 편히 공정한 공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러차례 연변대학교 교수로의 전근기회를 단호히 물리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번역국에서 전문가로서 많은 성과를 내신 분이다.  결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은 중국 교육부의 외국류학연구생시험에 합격하여 1982년 9월에 김일성종합대학교로 떠나게 된다. 그 때 역으로 환송을 나온 정판룡선생은 꼭 학위를 받아가지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선생은 김일성종합대학교 박사원에서 리동원(李东源)교수를 지도교수로 현대문학을, 김춘택교수에게서 고전문학을 공부하게 되며 1985년 4월 15일 문학 준박사학위를 수여받는다.  나중의 일이지만 선생은 1992년 3월에서 5월까지 방문학자로 한국의 한양대학교를 다녀왔으며 방문 기간 고전문학연구회, 민족문학사연구회, 동방비교문학연구회 등 학회의 월례 학술회의에 참석하여 론문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학계와도 많은 학문적 소통을 하게 된다. 또한 1995년 7월에서 1996년 1월 사이에는 국제교류재단의 지원을 받아 특별연구원으로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에 머물면서 서울대 조동일교수, 고려대 정규복교수, 성균관대 임형택교수 등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문학 연구자들과 창작과비평사의 백낙청, 최원식 등 저명한 학자들과도 인연을 쌓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력으로 하여 선생은 남북을 아우르는 포용적인 학문적 시야를 갖출 수가 있게 되며 학문 활동의 폭도 넓혀갈 수가 있었다.  평양에서의 류학생활을 마치고 모교로 돌아온 선생은 1987년 9월에 정판룡선생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리암, 김관웅 등 선생과 동기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정판룡선생은 박진석, 리홍순, 주홍성, 주칠성, 허호일 등 연변대 최고의 학자들을 조직하여 연변대학교 1기 박사연구생들을 위해 조선사, 동방철학사, 일본문학사 등 다양한 학과목을 개강함으로써 이들의 학문적 폭을 키워주기에 힘쓴다.  1990년 3월, 선생은 박사학위청구론문 의 집필을 완성하였다. 정판룡선생의 요구에 따라 중국어로 론문을 작성하여야 했고 이에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특히는 보풀이 일 정도로 현대한어사전, 수사학사전, 문학묘사사전 등 중국어 사전을 뒤졌다고 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학위론문을 완성한 선생은 다음과 같은 체득을 얻는다. “첫째, 학문은 노력의 결정체이며 둘째, 연구자 인격의 반영이며 셋째, 연구시각과 방법론이 성패를 결정하며 넷째, 학문적 열정이 곧 론리의 힘으로 작용하며 다섯째, 성실하게 타인의 성과를 받아들여야 좋은 론문이 된다.”(5) 1990년 6월 27일, 박사학위론문 심의를 통과한 선생은 연변대학교에서 양성한 첫 박사가 되였다. 이에 9월 26일, 연변대 본관 4층 회의실에서 성대한 학위 수여식이 거행되였는데 선생은 겸연쩍다 하여 학위복 착용을 한사코 거부하다가 지도교수인 정판룡선생에게서 꾸중을 당하기도 하며 선생에게 학위증을 수여한 박문일교장이 학위모의 술을 왼쪽으로 돌려주는 것을 잊고 지나치는 등 적지 않은 일화를 남기기도 한다.  《맹자》에 이르기를 “하늘이 장차 한 사람에게 큰 소임을 맡기려 할 떄에는 필시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몸을 고단하게 하며 배고픔과 야윔에 시달리고 가난케 하며 하는 일을 어지럽힘으로써 마음을 움직이고 강인함을 키워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법이다.”라고 하였으니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선생의 성장 과정과 늘 힘겨운 고비를 넘겨야 했던 배움의 길은 선생을 대성(大成)으로 이끈 시대적 기운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바탕에는 어머니에게서 터득한 사랑이, 큰형에게서 자극된 세상을 향한 진취적 욕구가, 스승이신 정판룡선생을 모시고 갈고 닦은 인간적 폭이 아로새겨져있다 할 것이다.    2. 학문적 폭과 깊이 1990년대 중반 선생은 중국 조선-한국학연구의 대표적인 학자로 부상한다. 이는 개혁개방 이후의 사회적 성과와 탈랭전시대의 세계사적 변화가 맞물리는 시점에 선생이 조선-한국학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지난 시기 불안정한 시대적 상황과 지역적 한계, 중국어와 외국어에 능란치 못한 언어적 한계 때문에 중국조선족 학자들의 학문 활동이 미비하였던 상황에서 왕성한 학문 활동을 통해 조선-한국학연구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리론적 높이에로 끌어올렸으며 그 영향력을 널리 과시하였던 까닭이다.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우선은 근대 이행기를 기점으로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고 중·한 비교문학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냄으로써 폭넓은 학문적 령역을 개척해냈음에 있다.  선생의 본격적인 첫 학문성과로는 김일성종합대학교 준박사학위 청구 론문인 을 들 수 있는데 선생은 2년 반 동안의 심혈을 기울여 1984년 12월에 원고를 완성하고 1985년 2월에 론문 심의를 통과한다. 계몽기 소설을 총괄적으로 다룬 이 론문은 그간 학계에서 간과되여오던 1910년대의 많은 작가와 소설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근대소설 창작의 문학사조적 특징과 창작방법 등을 천명함으로써 근대소설의 전체적 양상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선생의 학문적 출발로서 이 론문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조선문학은 물론 동아시아문학 전반에 있어서도 근대이행기는 커다란 분수령이였으며 근대이행기란 고전과의 내적인 계승 관계를 지니고 있는 한편 근대적 기획의 다양한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선생은 지도교수인 리동원선생으로부터 신채호 문학유고가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되여있음을 알게 되자 1984년 겨울 학위론문 집필이 끝나는 대로 자료 수집과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3개월 동안의 자료 수집에 이어 선생은 다시 3개월의 시간을 리용하여 20만자에 달하는 저서 《신채호 문학연구》를 탈고한다. 선생은 신채호선생의 애국정신과 통찰력, 달필에 심취되여 밤낮 없이 붓을 달렸으며 그 유고도 정성껏 필사하였는데 손에 물집이 생겨 늘 붕대를 감고 글을 써야 했다. 이에 김일성종합대학교 위생소에서는 의사를 파견하여 한주에 한번씩 치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단재 사상의 변화 과정과 미학사상, 다양한 쟝르에 걸친 문학 창작에서 보여준 주제와 예술성 등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와 평가를 시도한 《신채호 문학연구》(1989)는 나중에 중국과 한국에서 출간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북경대학교의 박충록교수가 서평을 써주었고 한국에서는 문학과지성사의 김병익선생이 일면부식의 한 젊은 해외 학자를 위해 단행본 서언을 써주었다. 신채호의 문학창작에 주목한 첫 연구로서 이 저서는 국내외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별도로 편집 출간한 《신채호 문학유고선집》(1995)과 함께 지금까지도 신채호 연구의 귀중한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선생은 (2014) 등 1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여 신채호와 아나키즘의 관련성, 중국에서의 활동 등에 대해 지속적인 보완작업을 이어갔다.  다시 선생은 박사학위 과정을 거치며 보다 앞선 시기인 자발적인 근대적 사상이 태동하던 18세기 실학파 문학에 관심을 지니게 된다. 특히 은 1991년 정상급 학술지 《외국문학연구》에, 은 2002년 중국 최고의 학술지인 《문학평론》에 발표가 되면서 중국학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 한다. 또한 박사학위론문 《조선중세기 북학파문학연구-청대문학과의 관련성 겸론》(중문판, 연변대학출판사, 1990)은 북학파를 하나의 문학류파로 파악하고 그 형성 발전 과정과 문학관, 미학, 작품 창작의 실제와 의의 등을 체계적으로 접근, 론의했다는 점에서, 북학파문학과 청대문학 간의 관련성을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비교문학, 수용미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방법론과 리론적 시야를 동원해 고전문학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 등에서 론문심사위원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북경대학교의 위욱승(韦旭升)교수는 한국의 조동일교수에게 “중국의 외국문학 박사학위론문으로서는 최고의 수준이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론문은 나중에 연세대 허경진교수의 주선으로 한국에서도 단행본으로 출간이 되며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문학 연구자들인 정규복, 임형택 등 교수들도 선생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 그 발상의 새로움이나 론리적 힘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선생은 북학파문학연구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령역을 고전문학으로 확대하였을뿐더러 특히는 중국문학과의 관련성 연구에 주목함으로써 학문적 폭을 크게 확장하였다. 중·한 비교문학연구를 통해 선생은 중국문학과 영어·로씨야어문학연구가 주도적인 중국 주류학계에서 조선-한국문학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다. 편저인 《조선문학의 발전과 중국문학》(1994), 《조선 실학파문학과 중국문학의 관련성 연구(전2권)》(2007) 등과 (1993), (2001), (2002) 등 론문들을 통해 선생은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중·한 비교문학의 새로운 과제들을 개척하였다.  선생은 근·현대문학연구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바 주요 론문으로는 (2002), (2005), (2017) 등이 있다. 실제로 근·현대문학과 고전을 아우름으로써 선생은 중국에서의 조선-한국문학 연구령역을 넓히고 수많은 차세대 학자들을 양성해낼 수가 있었다. 실제로 선생의 많은 제자들이 현재 학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이들은 고전문학, 근대문학, 현대문학, 중국조선족문학 등으로 학문적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이에 동아시아 한문학 연구의 대가인 남경대 장백위(张伯伟)교수는 “중국의 한국학 영재는 모두 김문(金门)에서 양성되였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바가 있다. 다음으로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시대에 앞서 남과 북을 아우르는 통합적 연구시각을 이루어내고 새로운 리론과 연구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조선-한국문학연구의 풍조를 일신함에 있다. 중·한 수교 이전에 중국에서의 조선 근·현대문학에 대한 리해는 랭전체제의 영향으로 주로 조선의 지식체계에 근거하였으며 리광수, 김동인 등은 물론이요 렴상섭이나 한용운, 정지용 등을 포함한 많은 민족주의 계렬 작가들이 문학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못하는 상황이였다. 1994년 선생이 펴낸 《조선문학사(근현대부분)》는 당시의 지적 상황에서 급시우와도 같은 존재였는데 그동안 거의 반 이상이 루락이 되여있던 근·현대 작가, 작품 및 문학적 사실들을 통합적 시야에서 복원한 기념비적 저서이다. 문단상황, 문학사조, 창작방법, 문학비평 등의 발전과정에 대해 깊이 있게 서술하였으며 그 체계성과 론리성의 명징함, 풍부한 문학적 사례 등으로 선후하여 4번에 걸쳐 간행을 거듭하며 지금까지도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및 기타 중국 내 한국어학과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선생은 다양한 리론적 시야를 조선-한국문학연구에 도입함으로써 중국 내 주류 학계와의 학문적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일찍 (1989)에서는 수용미학 방법론을, (1993)에서는 비교문학에서의 영향연구 방법론을 활용하고 있으며 (1992)에서는 원형 비평 방법론을, (1995)에서는 맑스주의 철학리론을, (2005)에서는 비교문학에서의 류형학 방법론을, (2016)에서는 탈식민주의 비평리론을 활용하여 연구의 깊이를 더하는 한편 연구의 다양성을 기하기도 하였다.  방대한 량의 저술을 펴낸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쉽게 정평을 내리기가 힘들다. 특히 로익장으로 선생의 학문연구는 지금도 진행형인바 2014년 10권으로 된 《중국현대문학과 한국 자료총서》를 펴낸 데 이어 2016년에는 로 조선족 학자로서는 최초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무게 있는 연구 프로젝트인 국가사회과학기금 중대과제를 따냈다. 그럼에도 굳이 선생의 학문 전반에 관통된 학술사상을 언명한다면 특히 두가지가 주목된다.  우선 선생은 인간의 주체적 노력에 의한 사회발전관에 기초하여 꾸준히 북학파문학 및 근대문학이 담지하고 있는 근대지향성과 원동력을 밝히는 데 주력하여왔다. 선생의 제자인 류연산은 “선생님의 학문과 인격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 두분” 가운데 한분이 신채호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6) 선생이 신채호를 사표로 삼은 데는 무엇보다도 단재의 인격적 독립성과 주체성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근대적 혁신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신념에 체현된 미래지향적 가치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이 북학파문학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지닌 리유 또한 중세의 암흑에서 헤쳐나기 위하여 미래적인 지향을 보인 력사적 주체들에 대한 긍정에서이다. 선생은 박지원의 소설 에 대하여 그 문화적 반성을 높이 평가하며 “이 소설을 통하여 독자들은 중세기의 어둠 속에서 몸부림친 18세기 지성인들의 웨침을 엿듣게 된다. 그것은 그대로 력사의 교체기를 자각한 조선의 웨침이였고 시대의 웨침이였다.”(7) 고 평가하고 있다. 선생이 (《한국한문학연구》 36, 2005)에서 근 150년이라는 시간을 뛰여넘어 현대 중국의 대문호 로신과 18세기 조선조 박지원의 문학사상을 비교할 수 있었던 것도 두 작가 모두가 시대가 부여한 소명을 다한 선구자라는 인식에서였으며 시대를 앞서간 연암의 근대지향성과 로신의 투철한 근대 계몽적 정신이 내적 동질성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의 이러한 학문적 사상은 다난한 사회적 현실을 이겨온 선생의 삶의 현장에서의 고투 및 그 체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신이 몸소 겪은 사회적 변화의 현장에서 선생은 사회적 합리성과 ‘진보’를 갈망하여왔으며 개개인의 삶에 미치는 그 진실한 영향과 의미를, 그리고 시대를 개척하는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선구자적 투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 깊이 있게 체득하였던 까닭이다. 다음으로 선생의 학문적 사상은 타문화에 대한 포용적이며 개방적인 자세와 문화의 상생적 가치에 대한 긍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생이 주된 학문적 대상으로 하였던 신규식, 신채호, 류자명 등 근대적 인물들이나 북학파 문인들은 모두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나든 초월적 인물들이였으며 그들의 중국서사 혹은 연행문학은 중·한 문화 융합지대 혹은 탈경계적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선생이 북학파문학에 대해 큰 관심을 지녔던 또 하나의 리유는 “북학파들은 명을 ‘대중화’(大中华)로 보고 조선을 ‘소중화’(小中华)로 보면서 청清을 오랑캐(胡)로 보던 기성된 인식에서 뛰여나와 자신들을 스스로 ‘호(胡)’로, 청과 같은 존재임을 시인했고 아울러 청과 화하(华夏)를 평등한 것으로 인식하였다.”(8)는 평가에서 보다 싶이 문화적 평등관에서 기인한 것이였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관은 문화적 교류에 있어서 주체성이 지켜질 때 가능한 것이였다. 선생은 에서 북학파 시인들의 시문이 청 문단에서 일으킨 큰 반향을 강조하는 동시에 “북학파 문인들의 왕사정 및 그 문학에 대한 수용과 창조적 응용은 조선문학의 대외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중·조 문학의 쌍향교류를 힘있게 추진하였다”(9)며 일방적인 영향관계를 넘어선 상호 영향 관계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선생은 나아가서 문화융합과 그 상생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량계초의 수용을 두고 선생은 “조선 근대소설에 미친 량계초의 영향은 일면으로는 량계초 소설리론의 시대성과 국제적 의의를 충분히 과시하며 타면으로는 중·조 두 나라 근대소설발전의 융합성과 생명력을 실증해주기도 한다.”(10)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선생은 반일투쟁 과정에서 이루어진 중·한 련대가 지닌 반폭력, 반파쑈적 성격과 의미를 높이 사며(11) 류자명의 중국체험 서사를 자신의 언술능력을 상실한 식민지 지식인이 중국이란 제3의 공간에서 저항담론을 일구어냄으로써 “조선민족의 정신사적 공백을 망명공간에서 슬기롭게 메워나간”(12) 사례라고 파악함으로써 근대 중·한 관계의 복합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선생은 일찍 중국조선족 문화를 론함에 있어서 중국조선족은 중·한 문화교류에 있어서 단순한 가교적 역할이 아니라 문화융합 촉진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선생은 “오늘 우리 민족은 중국이라고 하는 이 망망대해의 한汉문화권에서 자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하여 주체민족인 한족과의 문화적 교류를 끈질기게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13) 즉 선생은 문화경계 공간에서의 삶의 체험을 통해 민족문화와 중국문화라는 두개의 좌표축 내에 스스로를 위치함으로써 협소한 민족인식 혹은 문화관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상보·상생의 가치 탐구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3. 실천하는 지성인 선생은 1990년 3월, 박사학위 청구론문의 집필을 완성하자 바로 조선언어문학학부 부학부장을 맡게 되며 2년 뒤인 1992년 3월에는 학부장을 맡게 된다. 그 때만 하여도 학과 내의 학문적 분위기가 저조한 상황이였다. 이러한 시기에 선생은 ‘정판룡 교육종사 40주년 학술회의’를 조직하여 학과 내의 학문적 분위기를 쇄신하고 1992년 8월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중국조선민족문화학술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중국조선족 학계의 학문적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학문적 소통과 교류를 무엇보다 중시하였던 선생은 그 이후로도 국제고려학회 문학분과 주최의 ‘세계 조선민족문학’ 국제학술회의(1997), 중국조선-한국문학연구회와 한국한문학연구회의 공동 주최로 된 ‘한문학의 전통과 전망’ 국제학술회의(1999), 창작과비평사와 공동으로 주최한 중·한 수교 10주년 기념 학술대회인 ‘중·한 문화교류의 력사와 전망’ 학술세미나(2002.7) 등 영향력이 큰 학술행사들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1992년 9월, 선생은 연변대학교 교무처장으로 임명이 되여 1996년 6월까지 4년간 중임을 맡는다. 일찍부터 학문에만 뜻을 둔 선생은 이를 여러차례 사절하나 결국 학교 지도부의 간곡한 당부에 등이 밀려 본격적인 학교 행정 직에 몸을 담그게 되였던 것이다. 임직 기간 선생은 중국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학점제 교무 관리 시스템을 개발하여 연변대학교에 도입한다. 선생은 학점제란 시장경제라는 보다 거시적인 사회적 변화와 맞물린 대학제도 개혁의 핵심적 사안임을, 학생의 종합 능력과 개개인의 창의력 양성에 그 취지가 있음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미국,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 대학들의 앞선 경험을 널리 수용하여 선생이 몸소 집필한 은 기타 4개 대학의 실천안과 함께 학점제 개혁의 전범으로 뽑혀 청화대학출판사에서 묶은 단행본 《중국학점제》에 수록이 되며 길림성 교수연구 성과 1등상을 수상한다.  한편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젊은 교원들의 양성 특히는 학문적 시야를 넓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으며 이에 이들의 외국류학을 적극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3년 사이에 영어와 일본어 등 출국 류학시험에 통과하였으나 마땅한 대학교와 련락이 닿지 않아 류학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22명의 젊은 교원을 전부 외국의 대학교와 연구기관으로 파견하였다. 특히 선생은 한국의 대학교들에 일일이 편지를 보내여 연변대학교의 교원과 직원들이 연수를 다녀올 수 있도록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선생은 교무처장 임직 기한이 끝나는 대로 학과에 돌아가 학자로서의 삶에 전념하려 하였으나 교육부의 개혁조치에 의하여 연변대학교과 연변의학원, 연변사범고등전과학교, 연변농학원, 연변예술학원 등 연변의 5개 대학이 합병을 하게 되면서 박문일 교장의 부름을 받아 1996년 7월에 사범학원 원장을 맡게 된다. 당시 연변대학교 사범학원은 교수진과 학생이 모두 한족 위주인 단과대학 연변사범고등전과학교와 구성원 대부분이 조선족인 연변대학교의 일부 인문학과를 합병한 대학이였으며 교직원 360여명에 학생 3000여명의 큰 규모였다. 선생은 학생 자질 양성을 위한 사범교육 개혁을 중심으로 학과 간 모순을 봉합하였고 인내심과 포용력 그리고 공정성과 원칙성을 지킴으로써 사범대학 내의 진정한 융합과 민족단결을 추진하였다.  그 이후, 선생은 1998년 11월에 부교장으로 발탁이 되고 다시 2003년 1월에는 교장으로 임명이 되여 2012년 6월에 이르기까지의 9년 반 동안 연변대학교의 최고 지도자로서 소임을 다하게 된다. 선생은 교장 임직과 동시에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도 당선이 되여 직업 행정인의 길을 걷게 되였지만 스스로를 랭정이 반성하면서 학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중국조선족 교육과 문화 및 학문 발전을 위한 지성인으로서의 력사적 소명을 다하는 한편 ‘학자형 교장’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연변대학교는 비록 1996년에 연변 지역 5개 대학의 합병을 완성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모양새에 그치고 실질적인 융합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였다. 이에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내적인 통합이 가장 주된 숙제라고 판단하였으며 우선 설립 50년이 넘도록 명문화되지 못한 학교 교훈과 건학리념 등을 정비함으로써 대학정신을 새롭게 부각하는 작업에 착수를 하였다. 연변대학교의 건학 취지와 정신사적 의미들을 깊이 있게 읽어내기 위하여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많은 학자들과 의론, 소통을 거듭하였으며 친히 수많은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연변대학교의 력사에 대해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력사 현장 속에 살아있는 선현들의 지혜와 참된 뜻을 추출해내게 된다. 선생이 몸소 정립한 연변대학교 교훈인 ‘진리, 선행, 융합’에는 지식과 사물의 궁극적 원리에 대한 추구라는 대학의 기본 정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회에 대한 기여라는 휴머니즘적 인문정신 그리고 다민족, 다문화, 다원적 가치의 융합이라는 연변대학교의 지역적, 구성적 특징에 기초한 문화존중과 가치창조의 정신이 담겨져있다. 이와 함께 선생은 주변부만이 지닌 문화적 힘을 자각하고 다문화 경계지대의 우세를 살리며 학문을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질 높은 대학교육을 실시하는 등을 골자로 하는 구체적인 건학리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 선생은 제도적 역할을 중시하여 학문성과를 주된 평가기준으로 하는 인사제도와 장려제도를 확립함으로써 효과적으로 학문 연구에 대한 교수들의 열의를 동원하였다. 선생이 갓 교장으로 부임하였을 때 연변대학교는 대학 평가에서 길림성 6위에 그쳤으나 2006년에는 3위로 부상하였으며 2012년에는 중국 내 126위로 부상하였다. 실제로 SCI 등재지 론문의 경우만 하여도 2002년의 30편에서 2012년의 300편으로 급증하였으며 조선언어문학학과가 국가 중점학과(2004)로, 조선-한국연구센터가 교육부 중점연구기지(2006년)로, 장백산 생물자원과 기능분자 실험실이 교육부 중점실험실(2007)로 선정되여 정부지원을 받게 되였다. 교장 재임기간 선생이 이룩해낸 주요한 성과의 하나는 세간에서 ‘제2의 창업’으로 일컬어진 연변대학교 캠퍼스 확장공사이다. 1949년에 개교한 연변대학교는 1958년에 연변대학교,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연변공학원으로 나뉘였으며 나중에 설립된 연변예술학원까지 포함하여 연길시 및 룡정시의 여러 캠퍼스에 나뉘여져있었는데 수십년 간 각자의 전통과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나니 행정효률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자원에 대한 랑비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캠퍼스 확장공사는 2004년에 기획을 시작하여 2007년에 착공을 하였고 2010년 8월에 이전이 끝났으며 2011년 5월 16일에 준공식을 마무리하였으니 실로 ‘대장정’이라 표현할 만한 것이였다. 그 과정에서 선생의 로고 또한 막심하여 후두염으로 수술을 받게 되여 캠퍼스 이전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등 인고의 시간을 견디여내야만 했다. 2010년 8월 28일 이전식이 진행되는 날, 선생은 북경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었다. 수많은 위로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자 선생은 그간 뜻을 함께 한 이들에게 “장백산의 기상과 두만강의 랑만에 실려 통합캠퍼스 공사를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라는 진정어린 메시지를 날린다. 또한 선생이 2003년 교장에 부임하였을 때 연변대학교의 채무는 그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수자에 가까운 3억 2천원이였다. 이에 선생은 정부의 자금지원, 은행대부금과 사회자금의 유치 등을 위해 불철주야 동분서주하였으니 선생이 친히 방문한 국가와 각급 정부의 지도자, 기업 총수들은 100명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여러번 병환으로 몸져누웠으나 “연변대학교를 위해 지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겨냈다. 한편 젊어서부터 학자로서 고고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선생은 “연변대학교를 위하여 머리를 수그려야 한다”, “연변대학교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곤 하였다고 한다. (14) 2005년 선생은 연변대학교를 ‘성부공건(省部共建)’ 대학교로 격상시키기 위하여 여러차례 교육부 주제(周济) 부장을 방문하였다. ‘성부공건’이란 준교육부 직속 대학교로 인정을 받아 교육부와 소속 성정부에서 공동으로 중점 지원하게 되는 국가차원의 프로젝트였는데 연변대는 이미 서부건설 대학으로 선정된 탓에 중복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이였다. 교육부를 찾아간 선생은 정문 초소에서 검문에 걸리면 다시 뒤문 초소를 찾아가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증을 내보이고 들어갔으며 부장이 난색을 지으면 ‘앉아 버티기’, 끈질긴 설복과 협상 작전을 벌였다. 선생은 처음부터 연변대학교 통합캠퍼스 추진을 제안한 바 있는 주제 부장에 대한 믿음으로 “민족지역 대학인 연변대학교의 건설은 교육부와 길림성정부의 공동 건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장님과 저 역시 소명을 다해야 하는 력사적인 사안입니다.”라고 맞장을 뜨기도 하였다. 침묵이 이어지던 중, 주제 부장은 선생이 그간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부황을 뜬 자국이 목덜미에 선명히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묻고 나서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연변대학교는 끝끝내 ‘성부공건’ 대학교로 선정이 되며 해마다 정부로부터 2천만원에 이르는 지원금을 받게 되였을뿐더러 캠퍼스통합에 필요한 토지 양도세의 반환 등 여러가지 정책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였다.  연변대학교의 캠퍼스 확장공사는 그 전체 면적이 57.36만평방메터, 건축면적이 총 37.5만평방메터이며 투자금액은 14억 8천만원에 달한다. 선생은 재임 기간 연변대학교를 위하여 38동이나 되는 강의동과 기숙사 등 현대식 건물들을 신축하였다. 더우기는 룡정시에 있는 농학원 부지를 그대로 보유한 채 자신이 임직하기 전에 이미 있던 학교 채무조차 대폭 줄였으니 사업가로 비유하여도 그만한 업적을 이루기가 힘든 것이였으며 력사적 사명감이 없이는 도무지 불가능한 불가사의를 이루어냈다고 할 것이다.  교장 재임 기간에 선생은 행정 관료가 되고 마는 것을 스스로 늘 경계하였으며 중국조선족 학계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선생은 한국 고등교육재단의 후원에 힘입어 연변대학교 아시아연구센터를 설립하고 110만딸라의 지원금을 유치하여 ‘와룡학술상’을 설치하고 학술 년례행사인 ‘두만강포럼’을 개최하였다. 또한 일본의 마루한회사 및 북경 억리(亿利)그룹의 후원을 받아 장백산 생물자원과 기능분자 실험실 주관의 ‘장백산포럼’을 개최함으로써 두 포럼이 자연과학 분야와 인문과학 분야의 2대 학술 브랜드로 성장하게 하였다. 한편, 선생은 한국녀성문학회의 지원으로 룡정시 비암산 기슭에 ‘강경애 문학비’(1999.8.8)를 세웠으며 중국조선족 문화단체의 지원으로 연변대학교 캠퍼스 뒤동산에 ‘정판룡 문학비’(2004.10.7)를 세움으로써 선현들의 문학적·학문적 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에도 앞장섰다.  특히 선생은 연변대학교에만 그치지 않고 다양한 학술활동을 통해 중국조선족학계와 중국 조선-한국학연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선생은 중국의 《문학평론》, 《외국문학연구》, 《사회과학전선》, 《외국문학》, 《민족문학》 등 정상급 학술지에 많은 론문을 발표하여 학자로서의 학술적 영향력을 확대하여갔을뿐더러 정판룡선생의 뒤를 이어 중국 조선-한국문학연구회 회장의 중임을 맡아 학회를 개편 확대시켰으며 중국비교문학학회 리사(2002)와 상무리사(2014), 동방문학연구회 부회장(2005), 길림성사회과학련합회 부주석(2003) 등 주요 학술단체의 중임을 맡음으로써 중국 주류학계에 한국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실로 선생은 중국조선족을 대표하는 교육가이자 사회 지도자로서 소신 있는 삶을 살아온 분이다. 선생은 확고한 교육·사회 리념을 지니시고 몸소 실천하신 분으로서 그것은 우선 학문과 인격의 독립성을 으뜸가는 가치로 내세웠음에서 볼 수가 있다.  선생은 학문에 대한 사랑과 집요함이 유난했다. 보직생활 내내 연구와 글쓰기를 멈춘 적이 없었음에도 선생은 행정에 몸 담고 있는 자신을 ‘반쪽학자’라고 자평하곤 하였다. “저명한 국문학자이신 서울대학교의 조동일교수 앞에서 스스로 반쪽학자라고 평하였을 때 조교수는 ‘민족대학을 위해 봉사해왔다는 하나만으로도 뿌듯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15) 달리 보면 이는 선생이 얼마 만큼이나 학문에 대해 신성시하고 소중히 여겼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선생은 학문의 근본적 의미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이는 중국조선족 정신사의 귀한 전범이 되고 있는 《와룡산 일지》에서 많은 례를 찾아볼 수가 있다. 연변대학교의 선현들을 기리는 50만자에 달하는 《와룡산 일지-인물로 보는 연변대학의 력사와 전통》은 선생이 2009년 개교 60돐을 계기로 2012년까지 지속적으로 창작한 실기 작품이다. 선생은 2005년 5월부터 심한 불면증에 시달려 그 이후로는 매일 수면제를 복용해야 했다. 이에 선생은 밤마다 객실에 나와 밥상을 마주하고 《와룡산 일지》를 쓰면서 선현들과의 령혼의 대화를 통해 그 불면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 글들에서 선생은 대학의 가치를 사회의 세속적 특징과의 차별성에서 찾고 있다. 선생은 “행정권력중심이 아닌 학술전문가중심, 대학자치 혹은 학술자치, 나아가서 학자의 인격독립은 대학문화정신을 지켜가는 담보”(16)라 보았으며 교수는 대학의 령혼이고 대학운영의 주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선생은 실생활에 있어서도 늘 학문연구를 첫자리에 두었다. 4년 동안 연변대학교 교무처장으로 있으면서도 대외 교섭이나 술자리 등을 모두 외면한 채 근무 이외의 모든 시간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래서 정부 기관이나 중학교, 교장들조차 선생이 연변대학교 교무처장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부교장으로 승진 결정이 내려졌을 때 길림성당위 조직부의 지도자가 선생에게 그 소식을 알리며 소감을 물으니 “별다른 느낌이 없다.”고 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선생이 연구생 강의를 하면서 사무실 전화선을 뽑아버리고 출입문에 ‘수업중,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큼직한 글자를 써서 붙인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17) 선생은 아무리 공무가 바쁘더라도 “집에 들어오면 먼저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뒤적거려야 되고 침대에 누워도 꼭 책을 몇줄 보고야 잠들 수 있다. 출장 가도 책을 갖고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꼭 무엇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반드시 시간을 충족히 내여 책을 읽어야만 시름이 놓”(18)여하는 성품이였다.  다음으로 선생의 교육·사회 리념으로는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사고에 기초한 지식인의 사회적 사명감을 중요시하고 있음을 들 수가 있다. 선생은 교육은 미래를 위한 사업으로서 “대학은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를 중요한 사명으로”(19) 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생은 연변대학교 초대교장인 주덕해의 공적에 대해서도 지방병 예방치료, 사과배 재배, 연변황소 신품종 육성 등에 기울인 노력을 들면서 연변대학교가 ‘지역경제와 사회발전의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수행케 하였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외에도 선생은 지성인의 사회적 사명감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족 의학자 로기순박사에 대해서 “개인의 영달과 명예보다는 연변인민들의 부름을 따랐다. 이것이 바로 의사이며 학자인 로박사의 인격적인 매력이다.”(20)고 보고 있다. 2012년 8월 16일, 선생의 교장 퇴임식에서 당시 연변대학교의 당위서기였던 김웅선생은 “김병민 교장은 학문을 숭상하고 진리를 추구할뿐더러 지고의 선과 조화로움 및 공존의 정신을 사랑하는 인격자이며 겸허하고 드넓은 흉금과 과학적인 사고 및 실천적 예지를 지니신 분으로서 국내외에서 공인하는 조선-한국학 연구령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일뿐더러 연변대학교의 가장 존경스럽고 친근하며 사랑스러운 교장입니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실제로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학문적·사회적 사명을 다하였을뿐더러 중국조선족 지성사의 미덕을 집대성하고 그 지혜를 일일이 실천하신 분이라 할 것이다. 비록 교장 퇴임식에서 선생은 “연변대학이 한그루 나무라면 나는 이름 없는 나무잎이 되리라.”는 시구로 그 겸허함을 보이고 있음에도 선생은 미시적인 담론이 성행하는 이 지리멸렬한 시대에 학문과 교육 그리고 인격의 근본적인 가치를 몸소 실행하고 주어진 사회적 사명을 다함으로써 직업인이 아닌 가치자(价值者)로서의 길을 당당히 걸어온 지성인이자 사회적 지도자였다.  2013년 3월 5일, 선생은 한국의 제17회 KBS 해외동포상 인문사회부문상을 수상한다. 수상소감으로 선생은 여생을 학자로 남겠다고 밝힌다. 실제로 2014년 2월, 선생은 명문대인 남경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수석전문가로 초빙되며 같은 해 6월, 산동대학교 인문사회과학 1급 교수로 초빙되여 학문으로의 귀환을 실행하였다. 실로 선생은 가난한 중국조선족 시골 어린이로 태여나 다난한 세월을 거치면서 학문의 길을 통해 변화된 세상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간단없이 스스로를 완성해온 인격체라 할 것이다. “난 큰 일물은 절대 아닙니다. 진실하고 책임성 있게 살았을 뿐입니다.”라는 선생의 자평(21)은 많은 후학들의 심중에 오래도록 메아리로 남을 것이다. (1)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415페지. (2)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74페지. (3)한정일·량고범, , 《길림신문》, 2006.5.9. A2면. (4)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173페지. (5)김병민, , 2017년 8월 17일 필자에게 제공한 원고. (6)류연산, , 《도라지》 3, 길림시조선족예술관, 2005, 2~11페지. (7)김병민, , 《동아시아문화연구》 20, 한양대학교출판부, 1992, 85페지. (8)김병민, , 《동아시아문화연구》 20, 한양대학교출판부, 1992, 89페지. (9)김병민, , 《文学评论》 4,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2002, 64페지. (10)김병민·吴绍纨, , 郑判龙主编: 《조선학―한국학과 중국학》, 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93, 327페지. (11)김병민, , 2017, 미발표작. (12)김병민, , 《한국문학과 예술》 21,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7, 354페지. (13)김병민, . 《예술세계》 4, 연변인민출판사, 1992, 47~49페지. (14)김병민, , 2017년 8월 17일 필자에게 제공한 원고. (15)전윤길, , 장연하, 전윤길 외, 《신화를 엮어가는 겨레의 선두주자들》, 연변인민출판사, 2013, 47~57페지.  (16)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422페지.  (17)최일, , 《문학과 예술》 6, 연변문학예술연구소, 2012, 16~21페지.  (18)김병민, , 《청년생활》 3, 연변인민출판사, 2003, 17페지.  (19)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11페지.  (20)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82페지. (21), 2017년 8월 13일 김병민선생이 필자에게 보내준 메일. 출처:2018제1호  
3    마성욱: 엄마의 밥상(시) 댓글:  조회:383  추천:0  2019-07-09
엄마의 밥상 마성욱     딸깍, 딸깍… 어머니의 흔들거리는 틀이  부딪치는 소리 째깍, 째깍… 시침 돌아가는 소리가  경주하듯 절주 있게 들려온다…   순수하고 조촐한 밥상이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넉넉히 보여지는 아침상 낡고 깨끗한 그릇들은 소리 없이  각자 사명들을 끝까지 할 것처럼  점잖게 자리 틀고 있다.   구수한 갈비장국 물론 맛은 옛맛이지만 예전처럼 구수할 리가 없다 가난에 물젖었던 그 때 그 시절과 비교는 안되지만 년로하신 어머님의 건망증과 정성이 함께 어우러져 끓인 갈비장국이다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맛있게 먹는다 이제 몇번 더 먹을 수가 있을가, 생각해봤다. 그리고 개뿔 같은 타발도 늘여놓는다 그래도 어머니는 타령으로 들으신다 세상 어머니들은 그 멋에 사는 것일가? 끝까지 자식새끼들에게   하늘 같은 정성 깡그리 다하심이 그렇게도 즐거우실가… 그래서 인생이란 이름자가 붙여진 걸가?  또다시 들려온다 째깍째깍… 딸깍딸깍… 그릇 부시는 소리  엄마의 틀이소리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행복해진다 저 시계바늘도 언젠가는 멈춰버리지나 않을가…   아롱아롱 엄마의 손때 묻은 밥상 우의 낡고 깨끗한 그릇들   얼굴은 파였지만 고왔던 밥상처럼 어느새 활처럼 구부정한 나의 영원한 밥상 출처:2018제1호  
2    강혜라: 흙냄새는 밥냄새보다 구수하다(시평) 댓글:  조회:340  추천:0  2019-07-09
흙냄새는 밥냄새보다 구수하다 -북방 강효삼 원로시인의 근작시에 기대여 강혜라   북방 조선족시단에는 본래 3두마차가 있었다. 의 리삼월시인(본명 리경희), 의 한춘시인(본명 림국웅), 의 강효삼시인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이제 리삼월시인과 한춘시인은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셨고 망팔을 넘어 70대 중반의 강시인이 아직도 지칠 줄 모르는 문필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며 건재함을 세상만방에 알리고 있다. 특히 강효삼시인은 다른 두분에 비해 짙은 서정이 특징적이며 요즘은 현실고발의 명칼럼들을 쏟아내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리삼월시인이나 한춘시인이 도시적인 시들을 쏟아내신 데 반해 강효삼시인은 오로지 흙에 두발을 깊숙이 파묻고 헌걸찬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북방의 흑토에 대한 다함없는 감정을 활화산마냥 분출해오신 원로시인이시다. 원로시인이라는 호칭에 늘 의견이 많은 강시인은 밥냄새보다 흙냄새를 더 구수하게 여기고 농민들의 삶을 항상 눈물 그렁한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농사를 짓지 않는 농민시인이다. 그의 시에 너무 몰입된 탓일가? 그한테서는 어쩌면 된장에 풋고추 냄새가 날듯하고 밭두렁 흙냄새마저 그대로 묻어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런 강시인의 구수한 근작시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럴 때는 커피 대신 숭늉 한대접 옆에 떠놓고 권연 대신 구수한 엽초를 실팍하게 말아쥐고 성냥을 드윽 그어 불을 붙인 다음 원고를 마주하는 것이 어울리리라.   는 아닌 게 아니라 북방의 강이 등장하고 있다. 시작부터 우리 말들이 들려온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이 풀린다더니’ 이 한행으로 이 시는 시독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우리 민속도 속에 함몰시켜버린다. 이어 등장하는 ‘북방의 강’은 ‘움찔움찔 몸을 풀 차비’를 하고는 ‘울컥거리며 제 목소리를 낸다’ 북방 농민의 모습에 다름 아닌 강은 그렇게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여럿의 소리를 합칠수록’ ‘웅글은 소리로 범람한다’. 그것은 어떤 소리인가? 그것은 ‘두터운 얼음장에 눌렸어도 / 침묵하지 않았기에 낼 수 있는 소리’이다. ‘모두가 제 목청을 감추며 사는 계절에 / 남먼저 목청 터진 저 강물의 소리는 … 깊은 어둠 쪼개는 칼의 소리’인 것이다. 순박한 농민의 목소리다. 순수하지만 자신만의 색갈이 있다. 해토무렵의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살펴보면 례사롭지 않은 목소리요, 그런 목소리의 여운은 사뭇 길다고 해야겠다. 에서는 락엽을 ‘노오란 교훈’이라고 이름을 달아주고는 삶과 죽음의 철학을 펼쳐보이고 있다. 살아가면서 가지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가장 힘들다는 결론은 시인의 인생 나이테에서 우러나온 경험일 것이고 ‘저렇게 말끔히 가진 것 다 내려놓고 … 본래의 그 무로 돌아갈 수 있는가’라는 시구는 락엽에 대한 최고의 칭송이며 시인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이다. ‘가장 낮은 땅바닥에 뒹구’는 락엽이고 ‘가진 것이란 온통 절망할 것들 뿐’인 락엽은 결코 후회도 원망도 없다. 또 ‘더러는 아직 아픔이 남아있는듯 / 밟으면 아삭바삭 뼈 부스러지는 / 소리 들리기도 하’는 락엽이다. 시인의 세심한 관찰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인은 세심한 관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철학을 견인해낸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세상에 보여주고저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쉽지는 않지만 버리며 살아야겠음을 느끼게 해주는 시이다. 에는 거거익심, 점입가경, 흥미진진, 화룡점정 등 사자성어들이 총동원될 수 밖에 없다. 나무잎 하나를 가지고 시인은 시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나무잎 하나하나는 그대로 문장부호가 된다. 그리하여 나무는 많은 문장을 품에 안고 있고 수림은 나무가 쓰는 대작들을 집대성한 서림으로 된다. 또 산은 서림을 가득 진렬해놓은 도서관이다. 시인이 상상력을 극대화시킨 결과이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승승장구한다. 그토록 ‘혼신을 다해 쓴 글이지만’ 한해가 지나면 ‘나무는 미련없이 훌훌 다 지워버리고’ 단 한줄만 몸통 속에 나이테로 새겨둔다. 시에서 ‘유명하다 저명하다 따위 / 턱없이 춰올리는 형용사는 외면하는’ 나무의 덕성을 닮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겠지만 여기서는 저명한 시인이 아니라도 이렇게만 쓰면 유명한 시가 맞다고 우기고 싶다. 시인의 타이틀이 되다 싶이 한 을 보기로 하자. 시인의 눈에서 북방은 ‘진창에 흙이 매달려도 걷고 싶은’ 곳이며 ‘솔나무가 한결 더 싱싱한 곳’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인 북방은 ‘도처에 빙판길’이여도 그리움도 즐거움도 되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무덤’이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하얀 백골’이 있는 곳이다. 배고픈 우리에게는 그대로 찰떡이 되는 곳, 내 겨레가 있고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인 것이다. 이 시에는 북방에 뿌리 내린 시인이 고향땅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끝없는 사랑을 그대로 려과없이 토파하고 있다. 북륙의 칼바람에서 푸른 기상 잃지 않는 소나무의 지조를 가진 시인의 고향사랑이 눈물겹다. 에 대한 시인의 풀이를 들어보자. ‘고향’, ‘어머니’라는 말처럼 따스한 좋은 말이 정이란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 비빔밥처럼 섞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꽁꽁 언 사람에게 김이 문문 나는 따끈한 국밥 같은 것’이란다. 정은 ‘흩어져 제각기 제 갈길만 가던 물줄기들이 / 한데 모이는 것’이란다. 묵은지로 끓인 찌개 같은, 질박한 옹배기 속 텁텁한 탁배기 같은, 메주내와 썩장내가 감돌거나 함지 냄새, 돌절구 냄새 같은 그 모든 것이 고향으로 대변되고 그 모든 것이 정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과 두고 온 고향과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시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강효삼, 강효삼 하는 모양이다. 우리 민족의 상징인 는 시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가. 이번 근작시들 중 가장 짧은 시이다. 그런데 단시의 묘미를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다.    분명 제 또래들보다 일찍  바람난 시골 계집애가 분명하다  사랑이 무엇인지 딱히 몰라도 이성에 대한 집착만은  놀랍도록 무서워서  부끄러움도 잊고 왈칵 터뜨린  빨간 사랑고백                                       - 전문   그랬다. 진달래는 봄이면 가장 먼저 꽃이 핀다. 그리고 그 꽃은 핑크색이다. ‘일찍 바람난 시골 계집애’라는 표현이 찬탄을 자아내고 ‘부끄러움도 잊고 왈칵 터뜨린 / 빨간 사랑고백’에 엄지손가락을 펼쳐들게 된다. 내숭도 없고 짐짓 부끄러움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순수한 그대로 토종 그대로의 것이다. 그래서 사랑스럽다. 진달래도, 시골 계집애도 그리고 이런 시를 터뜨린 원로시인마저도… 이상 강효삼시인의 근작시 몇수를 살펴보았다. 모두어보면 북방을 대변하는 원로시인 강효삼선생은 흙냄새를 밥냄새라고 생각하고 북륙의 흑토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을 토로함에 있어 잔잔한 시내물이 아닌 폭포수처럼 쾅쾅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주고 있다. 언젠가 《도라지》 문학행사에 같은 뻐스로 동행한 적이 있었다. 아침 여섯시 출발하는 뻐스라 우리 젊은이들이 아침 챙겨먹지 못할 것을 미리 짐작하신 선생은 찰떡을 사가지고 뻐스에 오르셨다. 그 때 먹었던 그 콩고물의 찰떡맛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배고플 때 찰떡 같은 존재이신 강효삼시인께서 새해 더욱 문운형통하시기를 기원해본다. 출처:2018제6호  
1    리태복: 겨울 뒤에는 봄이 정말 있을가(작품평) 댓글:  조회:362  추천:0  2019-07-09
겨울 뒤에는 봄이 정말 있을가 -소설 와의 정신분석학적 대화 리태복     1.  텍스트 속 인물들의 동면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김경화의 손을 거쳐 생성된 텍스트를 접할 때면 언제나 표제를 은유나 상징적인 맥락에서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과제에 먼저 부딪치게 된다. 한 것은 그의 소설표제들이 대개는 련상이나 상징에 의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의 표제 역시 그러하다. 라는 표제에서 우선 련상되는 표상은 무엇일가?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 ‘동면’일 것이다. 그 리유는 우리가 처하고 있는 북온대의 지리적 환경에서 개구리의 겨울철 존재양상은 ‘동면’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구리의 동면은 주지하다 싶이 일종의 생존을 위한 방어메커니즘이다. 가을에서 봄으로 통하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겨울이라는 단계에서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과도적 양상인 것이다. 이러한 양상의 생성에는 혹독한 추위라는 외적 환경 즉 기후변화의 법칙과 생명증후를 조절하는, 례하면 영양물질의 축적과 소모절감, 최소한도의 호흡보장 등 개구리 자체의 능동적 선택이 아우러져있다. 개구리를 하나의 주체로 상정한다면 이는 욕망을 최소한도로 응축시킨 결과이며 쾌락원칙이 억압되고 현실원칙이 작동한 결과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개구리가 인간과 같은 의식적인 존재가 아니라 본능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맥락에서의 해석은 이 텍스트를 리해하는데 한층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서 작중 인물들의 ‘동면’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우선 제1주인공이며 3인칭 객관적 시점 인물인 ‘그’의 상황을 보자. ‘그’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진취적 방향이 아닌 퇴행적 방향을 선택한다. 작품에서 ‘그’는 ‘모든 것이 처음’인 경험을 하며 한국으로 떠난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여러 일자리들을 전전하면서 부딪쳐보지만 결과적으로 더 높은 단계로의 ‘진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돈은 계속 딸린다. 이는 ‘그’가 새로운 환경과 질서에로의 진출에서 적어도 그 때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답보양상은 어쩌면 ‘그’의 무의식으로 하여 초래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한계를 벗어난 저돌적인 실험은 원래의 자신마저 잃을 수 있다는 위험을 인지한 데서부터 생겨난 자기방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그’는 용식이가 잣 따는 일을 부탁하자 기꺼이 승낙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은듯 페로부터 나오는 깊은 숨을 내쉬였다. 오랜만에 쉬는 깊은 숨이였다.” 그러니까 ‘그’의 쾌락은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 과거와 현재의 자신에게 알맞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때 그의 결핍사항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으로 보완되고 욕망도 제한적으로 충족되는 양상을 보인다.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된 후에도 그는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내고 자신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샘골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길을 선택한다. 양로원에 맡기고 자신은 한국으로 돌아가 한번 더 새로운 질서에로의 진입을 시도해볼 기회와 조건이 주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산을 선택하고 잣따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그’가 겉으로는 인정하기 싫지만 그의 무의식 혹은 의식의 기저에는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이나 포기가 깔려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에서 소설의 첫머리에 나오는 ‘적당한 온도의 물’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개구리는 그 ‘적당한 온도’에서 결국은 모지름을 쓰다가 죽는다. 자신도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한국이라는 ‘적당한 온도의 물’에서 ‘모지름을 쓰다’가 죽어가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이 ‘그’의 의식에서 방어메커니즘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퇴행적 자기방어 행위는 언제나 따뜻한 동굴과 같이 안전함을 제공해주는 딱딱한 껍질이나 말랑말랑한 보호막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현실원칙으로서의 보호막들이 사회 도덕적 기준에서 선(善)의 범주로 분류될 때 그 전통성과 당위성은 한층 용이하게 확보된다. 환언하면 여기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리타(利他)적 리유(사실은 핑게이다)들은 정당성을 얻어 독자들과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장치로 치환된다. 양로원의 렬악한 환경, 음침한 분위기, 동생의 몰인정, ‘그’와 동생 민호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 등은 이러한 ‘핑게’를 정당화하는 소재들이고 또한 효도와 보은이라는, 수천년을 내려온 딱딱한 껍질을 가진 도덕적 허상들은 ‘동면’을 위해 준비된 ‘땅속’이요 ‘동굴’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한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도전을 시도해보았고 그곳에서 ‘민주’라는 재도전의 리유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원래의 자리로 물러서서 ‘동면’을 선택한 인물이라 하겠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긴 동면을 경과한 인물은 ‘그’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벌목사고로 남편을 잃고 청상이 된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과부의 인생을 살아간다. 수십년 동안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수많은 유혹이 있었을 것이고 강압도 있었을 것이지만 어머니는 ‘끝내 버텨냈다’. ‘아릿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숨을 죽이는’ 아들들을 지켜내며 버텨냈다. 물론 이러한 어머니를 바라보는 문학적 시선은 다양할 수 있기에 그녀가 왜 자식들을 버리고 새 출발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도 다양할 수 있다. 그녀는 두려웠을 수도 있다. 자식을 버린 나쁜 년이라는 사회적 지탄이, 어린 자식의 원망과 먼 후날 성장한 자식들의 외면이 그리고 결과를 가늠할 수 없는 새로운 선택에 수반되는 이름 모를 불안과 예견되는 고통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을 피해갈 수 있는 선택을, 즉 과부인생의 선택을 합리화해주는 여러가지 환경적 요소들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였을 것이다. 사회활동에서 ‘외삼촌’의 ‘아버지’ 역할의 분담, 렬녀나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에 대한 주위 여론의 찬사 등은 장기간의 ‘동면’에 대한 선택을 가능케 한 방어메커니즘 작동의 외적인 요소라 하겠다. 새로운 선택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삶의 리유들이였던 남편과의 정, 자식들에 대한 사랑 등을 모두 부정해야 하고 사회적 도덕이라는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온전한 이미지를 갈갈이 찢어버려야 하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행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역시 전통적 미덕이라는 견고하고 포근한 ‘동굴’ 속에서 기나긴 동면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2. ‘그’와 민주는 한 사람일가 두 사람일가 한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혼란과 곤혹을 겪고 있던 ‘그’는 민주라는 ‘손도 조그맣고 발도 조그맣고 목소리도 작은’ ‘조그만 녀자’를 만나자 바로 마음의 설렘을 느낀다. 소설의 내용 대로라면 엄밀하게 말하면 이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두 인물은 만남 그 이전에 경력의 교집합이 전혀 없고 또한 이성 욕망에 대한 사전 서술도 없기에 사랑을 배태시킬 환경적 여건이 마련되여있지 않다. 때문에 두 인물의 상호간의 신속한 흡인과 인지는 오히려 동일시에 의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한층 적절하고 합리적이라 하겠다. 인간은 스스로를 온전한 이미지로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유아가 파편적으로 자신을 인지하듯이. 그리고 유아는 거울을 통해서 처음 온전한 자신의 이미지를 인지하게 된다. 아, 내가 원래 저런 모습이였구나 하고. 하루하루를 일과 잠으로 채우고 번 돈을 중국으로 보내는 것만을 위해 살아오던 ‘그’는 자신의 모습을, 정신과 육체가 어울린 자신의 형상을 돌아볼 겨를도 인지할 리성도 미처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를 보는 순간 ‘그’는, 그의 유아단계의 의식은 아! 저게 바로 나의 현재의 모습이다! 고 놀랍게 인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는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민주도 주저없이 ‘그’에게 다가선다. ‘그’는 위태한 ‘동면’의 과정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유리잔 대하듯 조심스러웠고’, ‘녀자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며 그는 난데없는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위태함과 통증을 사실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서 느끼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정확할 것이다. 다만 무의식의 작동이기에 그 자신의 의식이 이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동일시는 대상과의 분리를 거부하고 소유의 욕망을 유발하게 된다. 마치 유아가 엄마와의 동일시 때문에 엄마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과 같이. 하여 ‘녀자와 그 사이에 둘만의 비밀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그의 몸을 달구’게 된다. 그리고 ‘그’와 민주 사이의 상호 동일시는 서로의 경력과 현황의 확인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의 차원으로 그 외연이 확대된다. 맏이로서 어머니의 로후와 동생의 공부 뒤바라지를 위해 현재의 고생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그’, ‘삶의 무게’, ‘맏이라는 이름의 무게, 아버지가 부재한다는 현실의 무게,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바로 이러한 선택과 삶의 리유로 내세워지는 ‘그’다. 그리고 막내지만 철이 들면서부터 늙어버린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민주, 어머니를 양로원에 맡겨둔 죄책감과 결혼을 하는 남자친구와 헤여지게 된 원인 제공의 짐을 ‘가냘픈 어깨’로 떠메고 있는 민주가 ‘그’와 함께 있다. 때문에 ‘그는 자신과 녀자 사이에 어떤 통로 같은 게 생겨나는 느낌을 받았다. 이때까지 작품 속 두 인물은 사실 동일한 의미를 가진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 같은 것이여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시점까지. 그러나 서로가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참조물로서 혹은 메커니즘으로서 서로를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사라지고부터 이러한 성격의 중첩은 균렬을 가져온다. 어머니의 뇌경색과 반신불수로 ‘그’는 한층 큰 부담을 짊어지게 되였고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퇴행적 ‘동면’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반해 민주는 어머니의 죽음과 형제들과의 사실상의 절교로 그녀를 억압하고 압박하던 많은 요소들이 사라진다. 즉 ‘동면’을 할 정당성과 합리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분리는 두 인물의 리별로 현실화된다. 서로 기댈 당위성이 사라진 것이다. 혹시 일부 독자들이 민주가 왜 샘골에 남아 ‘그’와 함께 생활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과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괜찮은 답일듯 싶다.   3. 겨울의 뒤에는 정말 봄이 있을가 겨울개구리는 동면을 끝내면 다시 세상으로 나와 산란도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 속 인물들의 ‘동면’의 끝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가? 정말 따뜻한 봄이 기다리고 있을가?   이미 ‘동면’이 끝난 인물, 결과가 알려진 인물은 두 사람이 있다. ‘그’의 어머니와 동생 민호이다. 우선 어머니, 그녀에게 따뜻한 봄날은 결국 차례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은혜를 기억하며 효도를 다하는 살가운 아들들도 없고 무릎에 앉아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손자손녀도 없다. 남은 것이란 작은아들의 ‘배신’, 큰아들의 무덤덤함, 아무 색채도 없는 허름한 산속의 방 그리고 그 자신의 ‘아무 것도 담겨져있지 않’는 ‘텅 빈 눈’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동면’을 시작하면서 환상하고 희망한 것들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쾌락욕망을 억압하며 참아온 ‘동면’의 과정에서 소유하고 있던 것들마저도 모두 상실하여 거의 절대적 결핍상태에 놓이게 된다. 긴 ‘동면’에서 깨여나보니 봄은 없고 한층 혹독한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였다. ‘그’의 동생 민호도 단계적 과정이 완성된 인물이다. 민호는 ‘담배도 안 피고 술도 안 먹고 대학 다니는 동안 바보라는 소리, 별종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련애도 안하고. 죽어라 공부만 한’ 인물이다. 학비를 제공해주는 형님에게 보은을 맹세하고 자신을 학대 수준으로 억압하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민호는 드디여 새로운 질서에의 편입에 성공한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불안한 상태임을 텍스트는 알려주고 있다. 그는 현실원칙에 따른 성공을 위하여 자신의 무의식을 지속적으로 억누르고 배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한 상태는 그의 의식에 투사된 하나의 환영일 수도 있기에 어떤 예상치 못한 계기를 맞으면 삽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그 자신도 이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층 무자비하게 과거와 선을 긋고 자학적인 울분을 토로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결과만 본다면 민호에게는 봄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존재양상은 위태로운 상태의 지속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으며 욕망의 응축과 억압으로 이루어져있기에 봄이라고는 하지만 진정한 기쁨과 쾌락이 결여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품고 있는 칼’이 언제든 남을 찌를 수도 있고 자신도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막 ‘동면’을 끝낸 민주에게는 봄이 찾아올가? 소설에서 민주는 ‘그’와의 데이트 중 영화보기를 제안했고‘지루하고 재미없어’하는 ‘그’와는 달리 영화에 몰입한다. 어쩌면 이 대목이 독자들에게 중요한 단서와 징후를 제공해주는 부분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영화는 ‘잣따기’와 대립되는 문명을 상징하는 기호이며 현실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세상의 표상이다. 이 장면에서 그들의 선택은 이미 결정이 되였는지도 모른다. 민주는 세상을 하직한 어머니의 시체에 눈길도 주지 않을 만큼 과거와의 결렬에 단호하다. 장례식을 끝으로 언니 등 혈육으로 이어진 과거와의 끈들을 확실하게 정리하였다면(긴긴 잠을 매개체로) 그녀가 샘골을 찾아온 것은 마지막으로 남은 남녀 사이의 정을 끊기 위해서일 것이다. 민주는 ‘끝내 고개를 돌리고’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나 민주의 이러한 결연한 선택이 그녀에게 봄날을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녀가 편입하려는 질서, 그러니까 텍스트의 표현 대로라면 ‘남에게 서빙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서빙을 시키는’ 그러한 질서에 편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록록치 않고 그녀의 력량이 그 견고한 질서를 뚫기에는 너무나도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혹독한 시련과 겨울을 또 겪더라도 그녀가 다시 ‘동면’의 상태로 회귀할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에 실린 그녀의 의지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물론 ‘그’의 ‘동면’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텍스트 속에 명시된 ‘동면’의 리유 대로라면 어머니가 돌아가면 새로운 선택이 가능해질듯이 보인다. “그래,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겨울이 지나면 꽃이 피고 따스한 바람이 불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 올 것 아닌가.” 하고 텍스트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만 독자들이 그대로 믿기에는 여건들이 너무나 빈약하다. ‘그’에게 차례질 봄날의 의미를 민주와의 재회나 결합이라고 상정한다면(다른 욕망은 텍스트에서 읽어낼 수 없다) 그것은 ‘그’에게는 지난한 목표이다. 그 전제가 바로 민주가 욕망하는 질서에 편입되여 성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총체적으로 살펴본다면 ‘동면’ 후 ‘그’가 맞이하게 될 미래는 한층 험난한 도전이 아니면 더욱 소극적인 퇴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봄날은 아직 텍스트의 주인공에게는 너무나 아스라하니 먼곳에 있는듯하다. 이 점에서 독자나 평자는 지은이가 텍스트의 마무리에 펼쳐놓은 근거 없는 환영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랑만적 환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만 있다면.  출처:2018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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