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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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창출에 심혈을 부은 동시집 ㅡ최길록시인의 세번째 동시집 ‘’아기와 그림자’’ 소평                최흔     “아기와 그림자”는 최길록동시인이 세번째로 발간하는 동시집이다. 최길록동시인은 이에 앞서 아동장편소설도 발간하였고, 수필도 30여편 발표한 우리 아동문학의 중견작가의 한 사람이다. “아기와 그림자”는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새로운 언어창출에 심혈을 부은 동시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언어창출은 시에서 막강한 힘을 가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언어창출로 하여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되고 새로운 이미지 생성으로 새로운 시가 탄생하게 된다. 새로운 언어창출은 변형을 통한 사물이나 사실로 구성되며 사물은 변형을 통하여 자신의 꿈을 말하게 된다. 시인이 새로운 언어창출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시인은 새로운 언어창출을 하였을 때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어찌보면 시라는 생명체는 새로운 언어창출인지도 련쇄인지도 모른다. 최길록동시인이 어떻게 새로운 언어창출을 시도하였는가를 몇수의 시로써 살펴보기로 하자.     아침해2   빨갛게 달아오른 하늘나라 프라이팬   짜르르 기름 튀는 소리   구름도 구워내고 비둘기도 구워내고 까치둥지도 구워내고 아침노을도 구워내고   하얗게 씻어 하늘 높이 걸어 놓았어요   이 시는 새로운 언어창출이 밀집된 한수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아침해를 하늘의 ‘빨갛게 / 달아오른 /하늘의 후라이팬’이라고 은유수법으로 해를 변형시켜 새로운 언어창출을 하고 있다. 은유는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직접 만드는 가장 간단하고 유력한 방법이다. 해와 후라이팬사이에는 일상적으로 말하면 동질성이 없지만 시인은 동질성이 있게 만들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후라이팬이라고 함으로써 해와 후라이팬의 색갈이 동질성이 나타났고 두 사물이 모두 둥글다는 모양을 착안함으로써 또 다른 동질성이 나타났다.   ‘짜르르/기름 튀는 소리’ 이것이 2련이다. ’1련은 시각적인 각도에서 썼지만 2련은 청각적인 각도로 바꿈으로써 동시의  색다른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하여 따분한 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경쾌한 감을 준다. 3,4련에서 시인의 상상은 다시 시각적인 이미지로 돌아앉는다. 시는 세부에서 승화를 꾀하는데 3련이 그 작용을 잘 발휘하고 있다.   구름도 구워내고 비둘기도 구워내고 까치둥지도 구워내고 아침노을도 구워내고   라고 하는데 3련 야릇하다. 후라이팬에 구워내는 것을 일상적으로 어떤 떡이나 어떤 고기나를 구워내는데 여기서는 떡이나 고기인 것이 아니라 구름이며 비둘기며 까치둥지며 아침노을이다. 후라이팬으로는 구워낼 수 없는 것을 구워낸다고 하겠다. 바로 이 구워낼 수 없는 것들을 구워내기에 일상을 떠난 초월이며 새로운 언어의 창출이 되는 것이 아니랴. 그러기에 이 시는 수준이 높은 작품으로 되지 않을가 가늠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구름, 비둘기, 까치둥지, 아침노을은 감각된 사물들로서 어떤 다른 의미를 내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런 언어들은 해체에 속하며 은어에 속하며 대체에 속하는 시적 언어들이라고 할 수 있다. 4련도 마찬가지다. ‘하얗게 씻어/하늘 높이 걸어 놓았어요’ 하는데 구름은 하얗게 씻었다면 말이 되겠지만 비둘기, 까치둥지, 아침노을을 하얗게 씻었다면 말이 틀린다. 그런데 이렇게 말이 틀리게 쓰지만 시에서는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것을 두고 아름답게 틀린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는 워낙 질이 다른 사물들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작업이고 틀린 말을 맞는다고 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왜냐구요. 시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일이 아니며 현실을 상상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필자는 언어창출의 한가지 방법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자벌레   꼬불딱 땅 한번 재고   꼬불딱 하늘 한번 재고   꼬불딱 꼬불딱… 무지개도 재고   어떤 언어에는 언어자체에 변형이 도사리고 있다. 할미꽃에는 할매가 있고 제비꽃에는 제비가 있고 아기풀에는 아기가 있다. 시인은 그것을 새롭게  직관하고 할미꽃에서는 지팽이를 집고 다니는 할매를 시적상관물을 끌어내여 시를 짓기도 하고 제비꽃에서는 제비를 끌어내여 하늘을 날게 하고 아기풀에서는 아기를 끌어내여 귀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최길록시인은 자벌레를 자와 벌레라는 합성어로 생각하고 ‘꼬불딱 /땅을 한번 재고// 꼬불딱 /하늘 한번 재고// 꼬불딱꼬불딱…/ 무지개도 잰다’ 고 한다. 땅과 하늘을 잰다는 시구에는 그만의 언어창출이 미미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지개를 잰다는 것은 위와 틀린다. 시인은 무지개를 잴 때에는 여러번 꼬불딱거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벌레가 무지개를 잰다는 말은 일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이 시구는 도약이며 비약이며 최길록동시인만이 상상한 언어창출이며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미지라겠다. 무지개는 자벌레의 희망을 상징할 수도 있고 기쁨을 상징할 수도 있고 성취감을 상징할 수도 있어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래에서는 “참새”라는 시를 보기로 하자.     참새   콩콩콩 하늘 뛰여가면서   콕콕콕 구름을 쪼아먹는다. “참새”의 전문이다. 피뜩 보면 별로이다. 하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꽤나 새로운 언어창출 맛이 난다. 참새는 하늘을 나는 새라고 생각되는 데 하늘을 콩콩콩 뛰여간단다. 참새는 벌레나 메뚜기나 곡식알따위를 쪼아먹는 새인데 구름을 쪼아먹는다고 한다. 이런 참새는 세상에 없지만 시인이 상상하는 참새는 하늘을 뛰여다니고 구름을 쪼아먹는 참새이다. 최길록동시인은 참새의 성질을 떠나서 참새를 이미지화하고 있다하겠다. 하늘을 뛰여가다와 구름을 쪼아먹는다는 환유이고 사물의 성질을 떠나서 새로운 언어를 창출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참새”는 일종 환상이다. 환상은 새로운 언어를 창출하는 한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수 더 보기로 하자     솔방울     소나무가지에 걸어놓은 파란 닭둥우리   봄아씨 살살 닭알 넣고   해아빠 돌돌 닭알 굴리고   가을 할배 나풀 병아리 날리고   “솔방울”은 네개련으로 된 동시이다. 우선 은유의 방법으로 솔방울을 닭둥우리라고 한다. 그담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봄아씨가 닭알을 넣고 해아빠가 닭알 굴리고 가을 할배가 병아리 날린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말인가? 완전완미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문학의 허구이며 가상이며 자크 라캉의 말대로 하면 실재이며 상징이며 영상이다. 솔방울이 어떻게 닭둥우리가 되고 봄아씨가 어떻게 닭알을 넣고 해아빠가 어떻게 닭알 굴리고 가을 할배가 어떻게 병아리를 날린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들이 련줄련줄 튀여나온다. 하지만 이것이 시에서의 상상의 힘이며 상상의 활력이다. 여기서 시인은 생소한 말을 하는 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솔방울을 둘러싼 사물들의 조화를 읊어보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 모든 사물들이 왜 이렇게 마음대로 변하게 되는가가 의문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는 두가지 특점을 가지고 있기에 사물들은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자유로이 맘대로 서로 전의될 수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세상의  사물들 모두가 동일성이 있다고 하겠다. 동물들은 어떤 동물들이나 다 눈, 코, 입, 귀가 있다. 동물과 식물, 그외의 모든 사물들은 다 지구라는 한집에서 살며 모두 다 해빛속에서, 물을 먹으며 살고 비를 맞으며 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시는  언어로 쓰는 글이다. 언어는 사물의 상징이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다. 언어는 높고 낮음이 없고 일률평등하고 자유로이 결합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하여 새로운 언어의 창출은 무진장한 것이다. 최길록동시인은 아마 이런 도리를 알고 시를 쓰는 같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길어지기에 여기서는 이런 명제만 제기하는데 부언할 것은 이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는 엉뚱한 언어의 조합을 할 수록 사이비함이 나타나며 그 사이비함은 미적 감수성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최길록동시인이 앞으로 중시할 것도 있는 같다. 시는 타자설일 수록 좋은 시가 탄생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방면에 대한 중시가 두텁지 않고 얇은 같다. 시속의 타자는 객관화이며 객관화는 원초적이고 영원한 곳에 닿는 지름길이다. 객관화를 떠나면 시가 예술로 가는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쪽으로 가게 된다. 이데올로기쪽으로 가는 시는 선전이며 교육이고, 예술쪽으로 가는 것은 사물을 떠올리고 사물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언어창출로 사람은 시를 새롭게 만들고 시는 사람을 새롭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은 ‘가’나 ‘사’가 아니고 ‘시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새로운 정진을 기약하면서… 2018년 8월 12ㅡ13일.
뚝뚝 뛰기 언어 예술 방산옥시인의 하이퍼 동시>를 읽고  최흔     >은 방산옥시인의 세번째 시집이고, 중국 조선족문단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하이퍼 동시집이다. 방산옥시인의 직업은 의사이다. 그는 의료계통에서 개성이 있는 의사로서 연변 뿐만 아니라 전중국, 해외에까지 이름이 있는 의사이다. 명의라고 불리는 방시인은 의료계통에서 뚝 뛰여나온 시인이다. 2014년에 하이퍼 시집을 내고,  2017년에 동시집을 내고, 지금 세번째로 하이퍼 동시집을 출판에 넘긴다. 필자는 열렬한 축하를 보낸다. 하이퍼 동시란 말을 연변의 문단에서 제일 처음으로 꺼낸 이도 방산옥시인이고, 오늘 제일 처음으로 하이퍼 동시시집을 발간하는 이도 방산옥시인이다. 이 시집은 툭 찍어 말하면 뚝뚝 뛰기 언어  예술이라고 하겠다. 왜 이런 이상 야릇한 말을 하는가. 뛰기는 하이퍼 시의 특점의 하나이다.  이라는 시집은 뚝뚝 뛰기 제재, 뚝뚝 뛰기 이미지, 뚝뚝 뛰기 언어로  된 하이퍼 동시집이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에서 언급한 대로 먼저 시들의 제재가 어떻게 뚝뚝 뛰였는가를 보기로 하자. 방산옥시인의 하이퍼 동시집에는 일반적인 자연물이 시로 되였는가 하면 주역적인 사물들이 있고 또 의학적인 사물들이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연물들에 대한 시 쓰기에 길들여져 있지만 주역의 사물들이나 의학의 사물들에 대한 시적인 연구는 결여되여 있다. 주역과 의학은 우리 시와 관계가 없는 듯이 생각하고 있다고 하겠다. 방산옥시인은 의료계통의 사람으로서 의학과 관계되는 사물을 제재로 다루고 있다. 례하면 제1장의 , 제2장의 , 제3장의 , 제4장의 , , 제5장의 제6장의 등 많은 시들이 의학적인 제재로 등장하고 있다고 하겠다. 초보적인 통계에 의하면 16수가 의학에 속하는 사물시들로서 18.8프로를 차지한다. 방상옥시인은 주역과 인연이 깊은 사람으로서 주역에 대한 조예가 자못 깊다고 하겠다. 시인은 주역의 사물들을 제재로 다루고 있다. 례하면 제2장 , 제3장의 , 제4장의 , 제5장의 , 제6장의 등 많은 시들에 주역이 등장하고 있다고 하겠다. 초보적인 통계에 의하면 도합 11수가 주역과 관계되는 사물시들로서 12.9프로를 차지한다. 뚝뚝 일상적인 자연속에서 뛰다가 주역속으로 뚝 들어가고, 의학속에서 뚝 나오기도 한다. 의학적인 사물과 주역적인 사물을 의식적으로 시로 표현하는 시인은 아마 유독 방산옥시인 만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생활과 주역과 의학은 세가지 색갈이 되여 때론 단독으로 때론 혼합으로 시를 구성하고 있으며, 죄다 새로운 사물의 생성으로 시속에서 움직이고 있기도 한다. 마치 세마리 말이 갈기를 날리며 들판을 달리기도 하고, 산악을 넘기도 하고, 하늘에 오르기도 하고, 하늘에서 다시 땅으로 내리기도 하면서 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도 한다. 아마 한권의 동시집에서 이렇게 뚝뚝 뛰기 언어들로 시간과 공간을 넓히고 깊이를 파보는 시집은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연박한 학식과 지혜의 결정이라고 하겠다. 에서는 사물들이 뚝뚝 뛰여나와 새로운 사물로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을 시마다에서 볼 수 있다. 왕왕 새롭게 나타나는 사물들은 원사물과는 별로 관계가 없이 뚝 뛰여나온다. 그것들은 새로운 상징들로서 무의식의 산물이라 하겠다. 순서대로 앞의 세장의 첫수의 첫이미지를 보기로 하자. 제1장의 첫수는 인데 람색하늘 오곡 싣고 토끼 찾아 달나라로 간다고 한다. 하늘이 오곡 싣는다는 것도 뚝 뛴것이고 토끼찾아 달나라로 간다는 것도 뚝 뛴것이다. 오곡과 토끼는 관계가 없지만 뚝 뛰니 서로 련계되고 있다. 제2장의 첫수는 인데 귀뚜라미가 귀뚤소리로 독수리를 낚는다고 한다. 한번 뚝 뛰니 귀뚜라미가 독수리를 낚는다는 이 엄청난 상상이 너무 뚝 뛰여 사이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에서는 사이비한 것이 아름다움을 낳는다. 제3장의 첫수는 인데 메뚜기와 귀뚜라미 무지개 줄을 돌린다면서 토끼가 줄을 뛰다가 계수나무에 올라 달쥬스를 마신다고 한다. 첫이미지도 두번째 이미지도 모두 뚝 뛴다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은 방시인의 상상이라기보다 환상이라고 함이 더 적절하겠다. 환상이라도 너무 기발하다고 하겠다. 뚝은 한 이미지가 새로운 이미지를 낳는 기교의 하나로서 하이퍼시로 말하면 도주나 탈령토화와 의미를 함께하는 것으로서 하이퍼 시의 중요한 기교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방산옥시인은 이 뚝을 령활하고도 재치스럽게 응용하여 꿈같은 이미지, 꿈을 꾸는 이미지를 우려내고 있다고 하겠다. 낱말과 낱말이 뚝뚝 뛰여나와 새로운 낱말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낱말들이 뚝하고 튀여나와 남들이 쓰지 않던 새로운 낱말이 된다는 것은 별로 새로운 말은 아니지만 시창작에서 이런 수법을 발휘한다는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닐것이다. 이질적인 두개의 낱말이 뚝뚝 뛰여나와 하나의 새로운 조어가 되면서 손과 손가락처럼 떨어질수 없는 것이 된다. 필자가 살펴본데 의하면 아래 낱말들이 뚝뚝 뛰여나와 새롭게 결합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무지개 줄(에서), 가지 입, 가지 눈. 가지 코(에서), 록용쥬스, 안개배(에서), 음양 배 (에서),  전화기 눈,전화기 입, 전화기 귀 (에서), 해살 지문, 바람 지문, 나비 지문 (에서), 심장터널 (에서), 바람 혈압(에서), 련꽃잎 침대(), 구름 쇼파, 바람 쇼파(에서), 광풍 갈구리(에서), 구름 풍금, 파도 풍금, 수림 풍금 (), 해님 손, 달님 손 (에서)... 이러한 언어들의 조합은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언어들이다. 방시인은 언어의 집에서 성질이 다른 언어들을 집어내여 짝을 묶어주고 있따.은 와 이라는 차원이 다른 언어를 키보드로 끄집어내여 짝을 묶어놓았다. 다른 언어조합들도 다 이런 언어들로 맞지 않는 말의 조합이거나 언어의 세분화를 나타내기 위한 것들로서, 방산옥시인이 모름지기 몰부운 언어의 결실로서 참신하고 생동하고 빛이 반짝이는 언어라 하겠다. 이런 언어들은 언어자체가 자유자재로 자유로이 결합될 수 있다는 언어기능에 의하여 조합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상으로 방산옥시인의 첫하이퍼 동시집 에서 뚝뚝 뛰기 언어 예술을 살펴보았다. 앞으로 언어를 더 세분하기를 바라며 언어의 흐름을 더 순하게 하기를 바란다. 방산옥시인의 새로운 창작을 기대해 본다.                         2017년 12월 21일
31    동시의 변형에 대한 고찰 최흔 댓글:  조회:953  추천:0  2019-05-22
 동시의 변형에 대한 고찰 최흔   시는 이미지다. 시적 작업은 이미지를 새롭게 만드는 작업이다. 이미지를 어떻게 만드는가? 이미지는 변형을 통하여 만들어진다. 변형이란 어떤것인가? 사유의 과정으로서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추상적인 사유이다. 변형이란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만드는 작업이며 한 사실을 다른 사실로 만드는 작업이다. 변형은 이미지를 이루는 과정이고 이미지는 변형의 결과이다. 변형을 연구하는 것은 결국은 이미지를 연구하는 것이며 시를 연구하는 것이다. 변형이 없으면 이미지도 시도 없다. 성인시도 이러하거니와 동시도 이러하다. 변형을 잘 하는가 못하는가에 의하여 시가 어떠한가를 판별하게 된다. 변형이 안되였으면 시가 아니 되고, 변형이 수수하면 시가 수수해지고, 변형이 뛰여나면 시가 우수해진다. 변형은 이미지의 산모일뿐만 아니라 시의 생명제조 공장이다. 현대시에서는 변형이라 부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에서는 변형을 해체나 대체라 부를수 있고 하이퍼시에서는 탈령토화 혹은 도주라고 부르게 된다. 아래에 나름대로 동시의 변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1은유적 변형.   은유는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기이다. 은유의 범위는 한없이 넓다. 그것은 사물은 모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모두 련결성이 있으며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 식물, 생물 모두가 이 지구에서 사는 사물들이며 모두가 형제간들이다. 그것들 어머니는 지구이고 그것들 아버지는 하늘이다. 모두가 해빛, 달빛속에서 살며 모두가 후대를 번식하고 모두가 태여났다가 사멸된다. 이런 동일성이 있기에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떤 다른 사물로도 다 될 수 있고 한 사물속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과 우주의 모든 사물이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식으로 시인은 시를 쓰게 된다. 이런 의식이 없이 좋은 시를 쓴다는 것은 공담이 될 수가 있다. 아래에 한문으로 된 동시들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수정나무/한그루 나무란다/영원히 시들줄 모르며/즐겁게 사는 나무란다// 수정꽃 한송이란다/피여서 질줄 모르는/결백하고 이쁘고/즐겁게 사는 꽃이란다.   중국시인 창푸썽(常福生)이 쓴 동시 (喷水)의 전문이다. 분수가 수정나무 되고 분수가 수정꽃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은유의 수법 이다.어떻게 분수가 나무되기도 하고 어떻게 분수가 꽃이 되기도 하는가. 그것은 세상사물의 동일성으로부터 착안하여 창출한 것으로서 시인의 상상이자 환상이다. 아래에 챈완청(钱万成)이 쓴 (荷叶)을 보자   둥그런 련잎은/작은 우산이란다/비가 오면 / 우산밑에 작은 고기들을 품어준단다//둥그런 련잎은/옥쟁반이란다/아침에 일어나/ 이슬 알들을 가득 담는단다/둥그런 련잎은/노래 카세트란다/그 카세트 방송하는 노래 /아무도 듣지 못한단다.   챈완청은 둥그런 련잎을 우산으로, 옥쟁반으로, 노래카세트로 변형시켰다. 성질이 완전히 다른 사물들의 전이다. 어떻게 이런 변형이 나올 수 있는가? 시인은 련잎의 둥그런 모양에 착안하여 둥그런 것으로 시를 쓰고 있다. 우산도 펴면 둥그렇고, 옥쟁반도 둥그렇고 노래카세트도 둥그렇다. 모양이 비슷하므로 이런 변형물이 나올수 있다고 하겠다   창푸썽이 쓴 동시와 챈완청이 쓴 동시의 변형은 조금 다르다.  는 인간문화적인 사물로부터 자연적인 사물로 변형시킨 것이고, 은 자연적인 사물로부터 인간문화적인 사물로 변형시킨 것이 다른 점이다. 창푸썽은 분수를 나무요 꽃이요 하였는데 얼핏 보면 동일성이 리해되지 않지만 챈완청의 동시는 모양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이 인차 알린다. 근거가 인차 알리는 동시와 근거가 인차 알리지 않는 동시가 어느것이 더 좋은가? 근거가 인차 알리지 않는 동시가 더 좋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동시도 흔상할 수록 고소한 맛이 우러나는 동시가 더 좋다. 그런 의미에서 근거가 인차 알리지 않는 동시는 흔상할 가치가 더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 근거가 인차 알리지 않거나 전혀 알리지 않는 동시가 존재하는가? 그것은 시인마다의 상상의 깊이와 넓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모종의미에서 말하면 근거는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록 환상에 더 가깝게 된다. 시는 환상이고 꿈이다. 시는 언제나 희망사항을 쓰게 되는데 꿈과 환상은 시인의 희망사항이다. 변형의 근거는 멀면멀수록 더 좋다고 생각된다. 동시는 애들의 눈높이로 쓰는 것이 아니라 애들의 상상의 높이로 쓰는 것이다. 애들의 상상은 어른들의 상상보다 범위가 더 무한하고 깊이가 더 깊다. 어른들 상상을 바가지로 푸는 샘물터라고 한다면 어린이들 상상은 룡드레 우물이라도 깊디깊은 룡드레 우물이다. 어떤 변형물은 근거가 없소 하는 말은 어른들이 기성의 관념으로 판단하고, 리성적으로 판단하고 상상적으로 환상적으로 사고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는 기성관념이나 리성적 판단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위의 동시 두수는 다 은유적인 수법으로 쓰인 시이다. 시의 변형물을 찾는 지름길이 은유로 통하게 된다. 은유는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기이며,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대체하기이며, 한사물의 리면에 숨어있는 새로운 사물을 파내기이며 드러내기이고, 은유는 령감의 순간적 번쩍임이고  은유된 사물은 절대 이미 체험한 경험이 아니라 새로 생성되여 용솟아오르는 참신한 사물이다. 이 사물은 시인이 발견한 새로운 세계이며 새로운 우주이다. 좋은 동시를 쓰려면 이런 은유의 수법을 리해하고 장악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환유적 변형   환유란 바꾸어 맞추기이다. 한 사물을 취환해내고 대체물을 그자리에 심는다. 대체물은 은어에 속하고 상징에 속한다. 은유는 두가지 성질이 부동한 사물들의 관계로 나타나지만 환유는 비교되는 사물은 나타나지 않고 비유된 사물만 나타난다. 은유는 두사물의 관계가 수직적으로 형성되여 련합성을 띠지만 환유는 시구의 흐름이 평행적이고 련결성을 띤다. 은유는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뛰여 갔다는 것이 알리지만 환유는 그런것이 알리지 않는다.은유는 문맥의 흐름에서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가 불쑥 튀여나와 결합된다는 감이 들지만 환유는 그런 감이 없이 흐름이 자연스러운 감이 든다. 아래에 중국과 외국의 동시들을 례로 들면서 환유에 대하여 말해보고저 한다. ㄱ) 짱쑈펑(张晓风)의 동시 (打翻了)의 마지막련에 이렇다   내 쬐만 꿈을 꽃피우라고 바람이 꿈마개를 열어놓았다   여기서 이란 언어가 나오는데 이 은 어린이들의 아름다운 희망과 아름아운 미래를 말한 언어로서 이라는 언어로 아름다운 희망과 미래를 취환하고 대체하였다. 취환하는 과정은 추상적인 사유의 과정이기에 보이지 않고 대체된 언어 만 보이고 있다. 꿈마개는 꿈과 마개의 합성어로써 꿈에 대한 사물화로써 보여주기를 하는 언어이다. 시는 변형물을 창출하기이며 이 변형물은 시인의 의사를 함축하고 시인의 의도를 사물에 의탁하여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 대륙밖의 시들을 례를 들면서 환유수법을 어떻게 썼는가를 보기로 하자   ㄴ) 영국의 리베이츠가 쓴 동시 의 첫련이다.   가죽신이 수림을 걷는다 저벅 ㅡㅡ저벅! 쟁쟁하게 들려오는 이 소리 나무가지 사시에 숨어버린다   여기서 이 걷는다고 하는데 이 이 사람을 대체하고 있어 은유에 속한다. 시는 왕왕 한사물의 어떤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가 본받을 바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언어는 세부화될 수록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세부는 문장에서 가장 힘이 있는 언어이며 세부가 잘 되지 못하면 어떤 문장이나 다 맥이 없게 된다. 가죽신이 수림을 걷는다는 사람이 가죽신을 신고 수림을 걷는다는 말이 되겠다.     ㄷ)베트남의 후광거(胡光阁)가 쓴 동시 (请进来)의 3련을 또 보자   통통통 누가 문을 두드리니? 꽃봉오리야 정말 꽃봉오리라면 너의 발가락을 보여주렴   여기서 시인은 꽃봉오리에게는 있지도 않는 이란 언어를 창출해 내고 있다.이란 꽃잎에 대한 대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꽃봉오리에 발가락이란 언어를 덧붙이므로써 꽃을 의인화하는 작용을 한다. 꽃봉오리는 문뜩 나타난 언어로서 무언가를 대체한 언어이며 환유이다. 꽃봉오리는 강아지나 돼지새끼나 송아지나 애기일 수도 있다. 탕탕탕도 아니고 퉁퉁퉁도 아니고 통통통이라는 가볍고도 부드러운 울림으로 표현하였으니 정이 묻어나는 의성어라 고 할 수 있으며 귀여운 사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환유란 이렇게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도 있는 같다.     리) 대만의 양환(杨唤)시인은 (快上学去吧)의 2련을 이렇게 쓰고 있다.   흐리멍텅해서 자려하는데 갑자기 녀석들 회의를 열었다 눈ㅡ좋아,난 창문을 닫고 소식을 차단할거야! 귀ㅡ맞아! 난 귀를 막고 일년동안 자게 하겠어! 코ㅡ그렇지! 신 난다 난 방학하겠어! 발ㅡ나도 영원히 다시 걷지 않겠어! 손ㅡ나도 영원히 다시 일을 안 해!   현실과 허상이 중첩된 2련이라고 할수 있다. 흐리멍텅하게 자려하는데 녀 석들이 갑자기 회의를 한다고 한다. 여기 녀석들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아래를 읽어가게 되는데 그 녀석들이란 눈, 귀, 코, 발, 손이다. 그녀석들이 회의를 한다는 건 의인화의 수법이라 친절하게 안겨온 다 . 눈이 말한다 이란 눈을 말하는데 창문을 닫고는 눈을 감고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는 대체에 속하며 환유에 속한다고 하겠다. 코는 이렇게 말한 다. 이 시구에서 방학은 이제부터 코는 숨을 쉬 지 않겠다는 말이다 . 한 말을 다른 말로 대체하여 쓰는것을 환유라고 할 때 이란 환유에 속하는 언어이다. 늦잠꾸러기에 항의하는 눈,귀, 코 , 발, 손의 표현들이 너무 생동하고 활발하다고 하겠다.     ㅁ)중국  류펑(刘凤)시인이 쓴 (闹春)의 2,3련을 보기로 하자.   버들가지 실을 뽑습니다 파란 오리를 기다랗게 늘여 봄을 짜고 있습니다   지렁이가  밭갈이 합니다 살진 밭고랑에 봄을 심습니다   2련의 첫줄에 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란 새싹이 나와 가지를 늘인다는 말이다. 2련에서 에서는 이 라는 언어가 현실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가상적인 것을 표현한 것으로서 지렁이가 기여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나 는 모두 환유에 속하는 언 어들이다.    우에서 다섯가지 례로써 환유는 시에서 어떻게 씌여지며 어떤 작용을 하는가를 살펴 보았다. 환유는 동시뿐만 아니라 성인시에서도 매우 중요한 수법의 하나이다. 환유를 자유로 쓸 수 있는 기질을 시인은 모름지기 갖추 어야 한다. 시는 곧이 곧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에둘러 말하는 글이다. 에둘러 말할 줄 모르면 시인이란 명칭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환유가 바로 에둘어 말하기 중 한가지 수법이라 하겠다.  시의 변형은 시의 첫행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절대 두번째 행을 초과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행에서도 변형이 나오지 않으면 시의 시작부터가 시시하게 되여 시의 참신한 맛을 흐리우게 된다. 이미지를 만 드는 작업은 령토화 ㅡ탈령토화 ㅡ재령토화라는 과정을 거친다고도 하는 데 령토화는 일반적으로 시의 제목을 가리키고 탈령토화는 사유과정으로서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다. 재령토화란 사유를 거쳐서 새로 탄생하는 사물이나 사실을 말 한다. 탈령토화란 언어는 바로 변형이란 언어와 맞먹 는다고 하겠다. 은유는 이런 과정 이 빤히 들여다 보이지만 환유는 이런 과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은유는 성질이 다른 두개의  사물이나 사실이 알리지만 환유는 표현되였거나 대체된 사물이나 사실만 알리고 원래의 사물이나 사실이 알리지 않고 숨어있기 때문이다.     3단선변형과 다선변형   단선변형이란 어떤것인가? 다선변형이란 또 어떤것인가? 단선변형이란 한수의 시에 이미지단위가 하나이고, 다선변형이란 한수의 시에 이미지단위가 여럿으로 되여있는 것을 다선변형 이라고 한다. 동시동네에 가보면 최문섭 한석윤 김득만등 시인들의 시비가 있다.최문섭시인은 이란 제목으로 썼는데 콩나물을 라면서 시루안에 동요가 빽곡히 차고 넘친다고 하였다. 그래서 단선변형이라고 하겠다. 음표는 원인이고 동요는 음표의 결과라고 하겟다. 원인과 결과로 되였을 때는 단선변형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 같다. 한석윤동시 은 해님을 이라고 변형시켰다. 둥지며 새며 하는 말이 있지만 다 금빛알의 배경이고 원인이므로 한가지 이미지단위라고 하게겠다.김득만 동시는 은 이라고 변형시켰다. 그외 나오는 두메골이요 초가집이요 하는 것들은 하얀 지팽이라는 것을 도출해내기 위한 가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래서 필자는 단선변형 이라고 말한다.   소학생들이 읽어야 할 동시 60수에는 림금산시인이 쓴 라는 동시가 실려있다.원문을 올리면 아래와 같다.   향기에 언제 발이 생겼지   향기가 막 걸어다닌다   향기에 언제 팔이 생겼지   향기가 막 팔을 젓는다   향기에 언제 곡이 붙었지   향기의 노래 포올폴 메아리쳐간다.   림금산시인의 시는 향기를 발로 변형시키고 향기를 팔로 변형시키고 향기를 곡으로 변형시켰다. 발, 팔, 곡 이 세가지 사물은 각각 성질이 완전히 다른 세가지 사물들이다. 발과 팔은 사람구조와 관계되는 별개의 언어이지만 곡이라는 언어는 앞의 두언어와 완전히 다른 사물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는 이미지단위가 세가지가 있다고 하겠다. 이런 시를 다선변형이라고 필자는 말한다. 이 시는 향기라는 사물의 다선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어느한 구조도 다른 구조의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고 독립성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이미지단위를 아무렇게나 바꾸어놓아도(각련을 아무렇게나 바꾸어놓아도) 시에는 손색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의 이미지가 다선변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는 다차원으로 이루어졌고 이미지들은 다양체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선변형은 다차원이나 다양체를 이룩한다고 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말하면 이런 동시를 하이퍼동시라고 하겠다. 단선변형은 중심을 만들지만 이 시는 중심이 없다. 발, 팔, 곡이 어느것도 중심이 아니다. 다 대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횡적 구성으로 되여있다.   시는 무의식의 재현으로 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이란 어떠한 것도 위하는 것이 없는 순수한 의식이며, 기성관념을 배제한 의식이다. 콩나물이 음표가 되였다는 것이나 하늘이 둥지로 되였다는 것이나 고드름이 지팽이로 되였다는 것이나 향기가 발이 되고 팔이 되고 곡이 되였다는 비유들은 다 무의식의 반영의 재현이며 새로운 사물의 생성이다. 그것들은 원래의 사물에 대한 의식을 배제하고 나타난 사물들이다. 시는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글이다. 때론 처럼 현실로부터 무의식으로 들어가고, 때론 이나 이나 처럼 곧장 무의식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때는 의식과 무의식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의식을 너무 길게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식이란 어떤것인가? 사물을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쓰는 것을 의식이라 한다. 의식은 설명이나 해석에 속한다. 동시라는 나라에서도  의식으로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으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으로 쓴 글은 사진처럼 되지만 무의식으로 쓴 글은 상징이 된다. 무의식으로 쓰는 동시는 순간을 쓰는 작업이라는 것을 상식으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차례의 무의식으로 씌여진 동시는 현대동시가 되고 두차례이상의 무의식으로 씌여진 동시는 하이퍼 동시가 된다.     4. 현실과 재구성   현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실이다. 재구성이란 객관적 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사물을 상상으로 다시 구성한다는 말이다. 현실은 변형이 아니고 재구성을 통하여 원 현실보다 다른 현실 즉 시적현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시의 기본이라고 한다. 우에서 세가지 방면으로 말하였는데 그 본질은 재구성에 대하여 말한 것과 같다. 재구성이란 언어는 사유과정을 말하는 추상적 명제로서 변형이나 탈령토화와 같은 언어이다. 그런걸 왜 다시 말하는가? 변형에 대한 리해를 더 깊이 해석하기 위해서다. . 돌은 한송이 꽃이다. 돌은 하나의 별이다. 돌은 한마리 새다 하면 여기서 말하는 꽃, 별, 새는 재구성되여 나온 언어들이다. 재구성된 사물은 원래의 사물과 같은 성질의 사물이 아니며 원래의 사물과는 아무런 련계도 없는 사물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할것같다. 이러한 것이 언어의 자유결합의 표현이며 사물들은 다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론리와 통하게 된다. 얼핏 보면 맞지 않는 이런 말, 련계가 안되는 틀린 말들이 시를 구성하게 된다. 현실문법과는 틀리지만 이런 틀림을 아름다운 틀림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쩡양(吴正阳)시인은 (能开出花朵来吗) 하는 시를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늘이 꽃을 피울 수 있을가? 한낮에 하늘은 해님꽃 한송이 피우고 밤에는 하늘이 달님꽃 한송이 피운다   바람이 꽃을 피울 수 있을가? 바람이 민들레밭을 지날 때 한송이 두송이 자잘한 꽃을 피운다   돌이 꽃을 피울 수 있을가? 돌이 물속에 떨어질 때 한무리 또 한무리 물꽃을 피운다   밤이 꽃을 피울수 있을가? 밤이 새까매질 때 밤은 한송이 꽃이 되여 슬그머니 려명을 열어놓는다   나도 꽃을 피울 수 있을가? 니가 날 춰주며 좋아할 때 난 한송이 꽃으로 핀다 호호호 사람도 꽃을 피운단다   꽃이란 풀이나 나무가 피우는 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풀이나 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고 하늘은 해님꽃과 달님꽃을 피우고, 바람은 민들레꽃을 피우고, 돌은 물꽃을 피우고, 밤은 꽃이 되여 려명을 열고, 사람도 즐거우면 꽃을 피운다고 한다. 시에 나오는 꽃들은 일상적인 사유로 말하면 꽃이 아니다. 그러니 꽃이 아닌것을 꽃이라고 한다. 이런 꽃들은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창조된 가상현실이며 시적현실로서 변형을 통하여 재구성된 사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바람이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건 생활진실이 아닌가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민들레꽃도 민들레가 피우는 꽃이지 결코 바람이 피우는 꽃은 아니다.   왕얜쥔(王雁君)시인이 쓴 (月亮说明书)라는 동시 한수를 더 보자.   어미쥐가 말햇다 동그란게 어떤 땐 접시야   새가 말했다 꼬부장한게 어떤 땐 쪽배야   코끼리가 말했다 또 어떤 땐 빠나나야   거부기 말했다 만져보면 따스할거야 해님처럼 뜨겁지 않으니까   기린이 말했다 아무때 보나 거기 걸려있는게 목화꽃일거야   꽃이 말했다 꼭 마술을 부리거든 꽃이 활짝 피면 달은 날마다 동그래지거든   꼬마꼼 이 말했다 냄새가 향기로운 걸 보면 어떤 땐 게화꽃인데 뭐    꿀꿀이가 말했다 먹으면 맛있을 거야 사람들 본따서 지가 만든 월병인데 뭐   전기담아 같기도 하고 손전등 같기도 하다 날이 어두워지면 우리들을 비춰주지 뭐! 그래 맞아 집으로 가는 우리 길을 비춰주고 우리들 집까지 바래주고 우리들을 엄마 품에서 자게 하지   는 무던히도 길어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실제로는 마지막련 로부터는 혹이라고 할 수 있다.어미쥐, 새, 코끼리, 거부기, 꽃, 꼬마곰, 꿀꿀이,어린이까지 도합 8가지 사물이 등장하여 달을 설명하고 있다. 어미쥐는 접시라 하고, 새는 쪽배라 하고, 코끼리는 빠나나라 하고, 거부기는 따스할거라 하고, 기린은 목화꽃이라 하고, 꽃은 마술을 부린다 하고, 꼬마곰은 게화꽃이라 하고, 꿀꿀이는 월병이라 하고, 어린이는 전기담아라 한다. 어느것이 맞고 어느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부동한 의식이나 상상에  따라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다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겠다.결국은 달에 대한 해체이며 달에 대한 재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에 대한 재구성은 한가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고 하겠다. 재구성을 통하면 터무니 없는 대상을 만들기가 일수이다.터무니 없는 대상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새로운 사물이 자유로 나타나게 되며 시가 엉뚱하게 되고 참신하게 된다.  첫머리에서 재구성된 사물들은 원래의 사물과 다른 사물이라고 말하였다. 돌은 새다, 돌은 강물이다, 돌은 하늘이다, 이러한 은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점이 꼬물도 없는 사물로 재구성되였다고 할 수 있고, 터무니 없는 대상을 재구성해 냈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시에서는 통한다.  그것이 맞는가 틀리는가를 가늠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왜 헛된 짓인가? 따지고 보면 필연적으로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처럼 생긴 돌이 있을 수 있으니 맞을 수 있고, 구불구굴하거나 기다랗게 생긴돌도 있을수 있으니 맞을 수 있고, 하늘처럼 파란 색갈의 돌이 있을 수 있으니 맞을 수 있다. 변형은 어느한 순간의 비슷함을 상상하여 비유하는 것이지 사물의 전체를 그대로 맞추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시는 리해되지 않아도 통한다고 말한다. 우에서 많은 시들을 례로 들었는데 터무니 없는 비유들이 많은 같다. 하지만  분석해 보면 터무니 없는 대상을 생성한다는 명제는 맞는 명제란 것을 어렵지 않게 가늠하게 된다. 이라는 시를 보면 달은 해체되고 분리되면서 여러가지 사물을 생성된다.여러가지 사물들은 또 여러가지 의미를 낳는다. 재구성도 일종 변형이다. 재구성된 사물이나 사실은 원래의 사물이나 사실과는 별개의 사물이며 별개의 사실이다. 이미 알고 있는 관념으로 재구성을 흥량하면 아니 된다. 반드시 시의 본연에 립각하여 분석하고 추리하여야만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언어가 가지는 의미는 한가지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시의 본연중의 한가지이다.한 언어의 다의미는 필연적으로 처럼 언어의 다양화를 초래하게 되며 이미지의 다양체를 생성하게 된다.   우에서 언어의 자유로운 결합이라고 말하였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언어의 자유로운 결합에 의하여 시인은 언어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언어창조자체가 변형에 속하고 새로운 이미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언어창조는 낯설기에 속하는 것으로서 한수의 시에서 한마디 새로운 언어창조라도 꼭 있어야 시가 낡투를 피면하고 시에 새로운 생기가 생기게 된다. 아래에 세가지 방면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는 명사와 명사의 새로운 결합이다. 바람이라는 명사를 가지고 새로운 언어조합을 해보자. 바람무지개, 바람나무, 바람풀,  바람고기, 바람토끼, 바람 잠자리, 바람바위, 바람쓸개,바람눈,바람다리, 바람봉우리, 바람 별…. 바람이라는 명사 하나를 가지고 여러가지로 할 수 있으니 세상에 많고 많은 사물을 가지고 다 이렇게 할 수 있으니 명사와 명사의 새로운 조합은 무궁하다고 할 수 있겠다. 둘째는 수량수사를 새롭게 만들어 보자. 노래에 관계되는 것만 어떠한가를 살펴보자.  노래 한줌, 노래 한마대, 노래 한줄, 노래 한다발, 노래 한톨,노래 한송이, 노래 한자락, 노래 한단…, 노래라는 하나에 이렇듯 많은 수량수사를 새로 만들어낼 수 있으니 여러 사물의 수량수사의 다양성은 끝이 없으리라 세째는 사물들의 소리로 만들어보자, 참새 꼬꼬운다, 비둘기 밤밤운다, 메돼기 꾸꾸 운다,황소 왕왕 운다, 개가 짹짹 운다, 호랑이 흐엉흐엉 운다 수탉이 짜릉쯔릉 운다.지렁이 카르르 운다… 시인은 이렇게 소리를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는 의무와 특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첫째든 둘째든 세째든 모두 전통적인 것을 벗어나서 필자가 자유로 만들어 본 것이다. 시인자신이 자유로 만든 자체가 창조이며 기성관념을 벗어나서  새롭게 언어를 다루어보았다는 증거이겠다. 이런 창조와 새로움은 시에서 얼마든지 용허되는 것이다. 이렇게 막해도 되는가 하고 말할 수도 있으나 시는 워낙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사유와 자유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언어들의 량이 많을 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엉터리같지만 실제는 엉터리인 것이 아니라 새로움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머언 후날 후세들이 우리 시를 보면서 옛날 사람들이 언어를 새롭게 다루어보느라고 애썼네 라고 할 것이다. 이상으로 변형에 대한 고찰을 마친다. 많은 지적이 있기를 바란다                    2018.12.
30    제2장 하이퍼 동시 창작방법 - 최흔 댓글:  조회:772  추천:0  2019-05-22
제2장 하이퍼 동시 창작방법 최흔   현대 동시와 하이퍼 동시는 창작방법상에서 한가지 공동성과 여러가지 구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가지 공동성은 이미지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구별이 있다는 것은 필자의 견해로는 아래와 같은 일곱가지 구별이 있습니다. 첫째 현대 동시는 단일체이지만 하이퍼 동시는 다양체입니다. 둘째 현대 동시는 중심이 있지만 하이퍼 동시는 중심이 없는 무중심 입니다.제째 현대 동시는 의미를 강조하지만 하이퍼 동시는 의미를 강조하지 않는 무의미 시입니다. 네째 현대 동시는 한가지 이미지가 고정되지만 하이퍼 동시는 그냥 변화됩니다. 다섯째 현대 동시는 일정한 질서가 있지만 하이퍼 동시는 뛰기라는 수법으로 현대 동시 질서를 파괴하고 하이퍼 동시 질서를 건립합니다. 여섯째 현대 동시는 자아를 강조하지만 하이퍼 동시는 자아라는 것을 모르는 무아이며 타자입니다. 일곱째 현대 동시는 련결과 원인을 강조하지만 하이퍼 동시는 단절과 링크를 내세웁니다. 아래에 하나하나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절 단일체와 다양체     현대 동시를 단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 동시는 단일체와는 방법이 다르게 쓰는 다양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일체라는 것은 이미지가 하나라는 말과 통하고 다양체라는 말은 여러가지의 이미지라는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가지 이미지라도 원인과 결과의 식으로 써내려가면 단일체에 속하고 다양체의 이미지들은 각각 자기의 독립성을 갖고 있으므로 원인과 결과로 련결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채취된 것으로서 단절되고 절편되는 이미지들이라 하겠습니다.   중국 조선족의 문학에서 하이퍼 동시는 윤동주시인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봄 윤동주   우리 애기는 아래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해님이 하늘 한 가운데서 째앵째앵   아마 이 동시는 중국조선족시단에서 가장 일찌기 나온  하이퍼 동시 한수라고 생각됩니다. 이 시의 구성의 특점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겠습니다. 첫째로 시의 이미지가 네개 단위로 되여있다고 하겠습니다. 애기의 활동, 고양이 활동, 바람의 활동, 해님의 활동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사물들 활동은 실제상 어떤 련계를 갖고 있는 것들이 아니며, 한 활동이 다른 활동의 원인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결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째로 이미지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집성에 참가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이미지마다 절편되고 단절된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동시를 필자는 하이퍼 동시라고 합니다. 이런 동시는 과거에도 많지 않았고 지금도 많지 않습니다. 이런 동시를 각광받게 하려고 제가 아는 것 만큼 론하려고 합니다.  이런 동시의 이미지 특성은 또 있습니다. 이미지마다 사물운동의 중간에서 채취된 것입니다. 1련에서 애기는 아래 발취에서 잘 때를 채취한 것으로써 애기 생활의 한부분 그것도 한 순간을 채취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양이도 가마목에서 잘 때의 순간을 채취한 것이고, 바람은 나무가지와 부탁쳤을 때만 채취한 것이고, 해님도 하늘 한 가운데서 떠있을 때를 채취한 것입니다. 모두가 그 사물의 어느한 장소 어느한 순간을 채취해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동시는 사물의 몇십분의 1초거나 몇백분의 1초의 시간을 이미지화한다는 말이 성립되는 같습니다. 계속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미지들은 순간에 나타났다가 위치를 바꿉니다. 애기가 나타났다가 밀려나고 고양이가 나타나고, 고양이가 나타났다가 밀려나고 바람이 나타나고, 바람이 나타났다가 밀려나고 해님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이렇게  하이퍼 동시의 사물들은 나타났다가 밀려나군 합니다. 이것은 사물이란 그냥 변화발전하고 그냥 새것이 낡은 것을 밀어내면서 세월이란 것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윤동주시인은 사물의 산생되면 사멸한다는 것을 념두에 두고 이런 시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자연의 리치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동시를 필자는 다양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이미지가 한수의 시에 모인 것이기 때문에.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이미지가 집성된 시를 다양체라고 합니다. 윤동주 하이퍼 시에 조금은 애석한 점이 있습니다. 각 사물들을 변형시킴이 약하다는 점입니다. 하이퍼 동시는 되였지만 사물들에게 은어를 주지 못해서 아쉽다면 아쉽겠습니다. 아래에 김봉순동시인이 쓴  하이퍼 동시 한수를 더 봅시다.   그늘    김봉순   그림자는 그릇이래요   동그란 그릇에 은행나무 나오고   네모난 그릇에 아빠트 나오고   세모난 그릇에 앞산이 나와요   그릇들 모여 구름도 해도 다 주어담는다   김봉순 동시의 전문입니다. 시인은 을 첨부터 이라고 새롭게 상상하고 있습니다. 의 이미지가 이 되였습니다. 당돌한 표현인것 같습니다. 그늘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는 데 김봉순시인은 동그란 그늘은 동그란 그릇이라 하면서 은행나무가 나온다고 하였고, 네모난 그늘은 네모난 그릇이라고 하면서 아빠트가 나온다 하였고, 세모난 그늘은 세모난 그릇이라고 하면서 앞산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림자 그릇에서 은행나마무가 나온다, 아빠트가 나온다, 앞산이 나온다고 한것은 역사유입니다. 역사유로 썼기에 야릇한 감이 듭니다. 야릇한 감은 언어의 새로운 감각의 표현으로서 시에서 종종 쓰는 아름다운 수법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릇들이 모여 해와 달을 주어담는다고 합니다. 그늘에 대한 상상이 아주 새롭고 형상적이고 생동하다고 하겠습니다. 련마다 한개 이미지단위인데 하이퍼 동시에서는  각각의 이미지가 대등한 관계로 라렬되는 경향을 갖고 있기에 어느 이미지도 다른 이미지와 종속관계를 가지거나 주인과 하인관계를 갖고 있는것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각 이미지를 바꾸어 시를 구성해도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의 각련을 아무렇게나 바꾸어 놓아도 시의 흐름에 손상이 없고, 시의 정체에도 손상이 가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또 독자들이 보다가 맘대로 한련을 써넣어도 됩니다. 례하면 가운데다 고 써넣어도 될 수 있고, 마지막을 더 연장하여 고 해도 될 수 있겠습니다. 윤동주시인이 쓴 도 같은 방법으로 한다고 써넣을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독자를 사유하게 하고 참여하게 하는 시가 하이퍼 동시라고 하겠습니다. 누구나 보다가 (응 ㅡ, 나도 써넣어도 되겠네!) 라고 생각되면 절로 써넣으면서 시를 읽는 재미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외국 동시 한수를 봅시다   핀은 머리가 있는데 머리카락은 없어요                     크리스티나 로제티   핀은 머리가 있는데 머리카락은 없어요 시계는 얼굴이 있는데 입이 없어요 바늘은 눈은 있는데 볼수는 없어요 날벌레는 잠을쇠 열쇠 없이 트렁크를 갖고 다녀요   시간은 빼앗길 수 있지만 빼앗아 올수는 없어요 옥수수 밭은 턱이 없어도 예쁜 보조개를 짓지요 산은 다리가 없는데 발(산기슭)이 있지요 유리잔은 줄기예요 뿌리가 아니죠   시계에는 손이 있는데 손가락은 없어요 장화에는 혀가 있지만 가수는 아니예요 강은 달립니다 다리가 없지만 톱은 이가 있어도 먹지 않아요   물푸레 나무는 열쇠를 갖고 있지만 잠그지 않아요 아기들은 삐악삐악 하지만 닭이 되지는 않아요   이 하이퍼 동시는 긍정과 부정의 방법으로 씌여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4행시라는 서구의 시법을 사용한 시로써 앞의 열네가지 사물들은 서로 련계가 되는 사물이 아니라 질이 다른 이색적인 사물들로 구성되였습니다. 이런 시를  다양체라고 하겠습니다. 내용을 리해하는데는 별무리가 존대하지 않기에 해석을 가하지 않겠습니다. 크리스티나 로제트의 시를 보면 다양체를 만들려면 우선 그냥 딴 사물을 변형시켜 써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긍정으로 표현한 열네가지 사물들이 다 다른 사물들일 뿐만 아니라 부정으로 표현된 사물들도 다 다른 사물들입니다. 그래야 다양체가 형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에서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다양체는 산을 쓰다가 별을 쓰다가 호랑이를 쓴다든가, 잔디를 쓰다가 강을 쓰다가 태양을 쓴다든가, 쥐를 쓰다가 진달래를 쓰다가 지렁이를 쓴다든가 아뭏든 그냥 딴것 딴것 또 딴것...을 변형시켜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쓰는 것이 다양체의 비법이라겠습니다. 단일체는 그리하여, 그래서의 대답으로 이미지가 련결될 수 있지만 다양체의 이미지는 그리고의 대답으로 되거나 또, 또의 대답으로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2절 중심과 무중심   현대 동시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둘러싸고 쓰는 동시이지만 하이퍼 동시는 다양체라고 했습니다. 다양체이기 때문에 중심이 없는 무중심이 되겠습니다. 이미지 만들기에서 많은 동시를 례로 들었는데 그런 현대 동시들은 다 중심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중심적인 이미지를 둘러싸고 이야기가 벌어지고 흘러내려가게 되여있습니다. 그래서 탑처럼 모양이 되여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양체는 이와 반대로 중심이 없고 이미지와 이미지가 평등하고 높고 낮음이 없게 됩니다. 하이퍼 동시는 탑처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평행으로 널어놓는 작업이라 하겠습니다. 아버지 아들 손자가 한가정 식솔되여 산다면 아버지가 제일 권위가 있고, 그담 아들이고 아들 밑에는 아무런 맥도 못쓰는 손자가 있습니다. 하나의 중심을 설정하여 시를 쓰게 되면 이런 집안꼴이 되게 됩니다. 다양체시는 이런 집안의 꼴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횡적으로 집성되였기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더 차요한 것이란 것이 없게 됩니다. 중요하다면 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다면 다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평등하니까.   나무이파리 하나 똑 따서 혹 불었다 하늘로 노란 기러기 훨훨 날아올랐다   시내물 한줌 꼭 쥐여 살살 만졌다 조약돌 등에 파란 산이 퐁퐁 올라탔다   구름부채 쪼옥 펼치며 춤 추었다 코스모스 손가락 박자가 엉덩이 흔들었다            ㅡ한설매 > 전문   이 참 재미있는 같습니다. 제목부터 신선한 같습니다. 바람도 꿈이 있을까요? 일상적인 사유로서는 떠오르지 않을 오직 시인의 상상에 의해서만 가능한 야릇함이 묻어나는  하이퍼 동시의 제목이라 하겠습니다. 세개의 이미지단위로 세개의 련을 구성하였는데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는 아무런 공동점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각성받이 같은 이미지들입니다. 나무이파리를 따서 부니 노란 기러기가 태여나고, 물 한줌을 만지니 조약돌우에 산이 퐁퐁 올라타고, 구름부채 춤을 추니 코스모스 손가락 박자가 엉덩이를 흔든다는 것이 시의 내용이자 이미지입니다. 이 세가지 이미지로 한설매시인은 이라는 시를 직조하였습니다. 시를 직조한다는 것은 사물의 명사를 씨실로 하고, 기교를 즉 변형이라는 수법을 날실로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문제는 이 세가지 이미지가 각성받이여서 완연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련계되지도 않는 불연속이고, 각각 자기의 독립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이 다른 것처럼 다르다는 말이 되겠습니다.이런 시를 필자는 하이퍼 동시라 이름을 짓습니다. 의 다른 하나의 특점은 운문처럼 쓴 것이 아니라 산문투가 짙어 딱딱한 맛이 없고 부드럽게 시줄이 흘러내려 간다는 점도 있겠습니다. 모든 문장이 여섯줄의 단일문으로 되여서 시인가 하면 산문 같고 산문 같은가 하면 시입니다. 운문과 산문을 중화시킨 하이퍼 동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친절하게 다가오면서도 문장마다 변형이 되여서 야릇하고 아리숭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천천히 새김질해 보면 시에서 고소한 맛이 우러난다고 하겠습니다. 1련에서 나무잎과 기러기가 조화를 이루고, 2련에서는 물 한줌과 산이 조화를 이루고, 3련에서는 구름부채와 코스모스, 손가락과 엉덩이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섯줄로 된 이 시는 자연의 조화를 보여주는 하이퍼 동시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면으로 살펴보면 세부를 포착하는 눈길이 례사롭지가 않습니다.  각련에 배치된 ,,언어들은 새로운 조어로서 빛이 반짝인다고 하겠고, 다는 바람의 행동이 재미있고도 형상적으로 안겨와서 감칠맛이 돌고,  는 시구들은 창조적인 새로움을 기의하고도 확연하게 보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은 중심이 없는 이미지 라렬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련이나 중심이 아니고 겉이나 곁이라고 하겠습니다. 1련을 중심이라고 하면 2,3련이 노여워하고, 2련을 중심이라고 하면 1,3련이 억울하다고 삿대질 할 것이고, 3련을 중심이라고 하면 1,2련이 주먹을 메고 달려들 것입니다. 중심이 없기에 각련을 아무렇게나 바꾸어 놓아도 시에 손색이 가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중심이 없는 시, 그런 시를 놓고 다양체는 무중심이라는 말이 되겠고, 그런 시가 바로 라고 하겠습니다.   나비 2 강려   나비는 노트북이야   꽃바람 도그닥 키보드두드린다   나비는 만두껍질이야   개나리 하얀만두 통통빚는다   나비는 책가방이야   이슬비 지퍼(拉锁) 쪼로로잠근다 이 시는 강려양의 동시 의 전문입니다. 강려동시인은 에서 세가지 사실 즉 세가지 이미지를 쓰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나비를 노트북이라 하고, 둘째로는 나비를 만두껍질이라 하고, 세째로는 나비를 책가방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가지 이미지는 성질이 다른 서로 련계되지 않는 이미지로서 어찌보면 세수의 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시는 이미지마다 자기의 주제가 따로 있다고 할 수 있을 같습니다. 이미지를 한 단위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나비는 노트북이야   꽃바람 도그닥 키보드두드린다 나비의 첫 두 련입니다. 하나의 이미지 단위라고 하겠습니다. 강려시인은 나비를 노트북이라고 합니다. 노트북은 접었다 폈다하며 쓰는 컴퓨터입니다. 나비는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며 날아다닙니다. 이런 현상을 포착하고 시인은 나비를 노트북이라고 한것 같습니다. 움직임으로 동일성을 찾은 같습니다. 그런다음 >고 합니다. 이 노트북의 주인이 꽃바람이라고 합니다. 꽃바람은 노트북을 리용하는 사람의 은어라고 하겠습니다. 나비가 노트북인데 꽃바람이 열어놓고 키보드를 두드린다고 합니다. 의인화 수법이겠습니다. 시의 주제의 핵심은 어떻게 변형시키고 변형물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나비를 노트북이라면서 꽃바람이 두드린다는 것은 시인이 창조한 하나의 새로운 세계이며, 이 새로운 세계가 시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 자체가 시의 주제로 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주제의  말대로 하자면 나비가 노트북이 되여 꽃바람이 키보드를 두르린다는 것을 노래하였다고 하겠습니다 . 제2련에서는 나비를 만두껍질이라고 하면서 개나리가 만두를 빚는다고 하고,  3련에서는 나비를 책가방이라고 하면서 이슬비가 내리니까 지퍼를 잠근다고 하였습니다. 왜 잠글가요. 책가방속의 물건들이 비에 젖을 가봐 잠그겠죠. 이러한 시구의 자체가 주제겠습니다. 2련에서는 만두껍질이라고 하였는데 껍질이라니까 얇다란 것을 나타내므로 나비와의 동일성이 보이는 같은데, 3련에서는 나비를 책가방이라고 하였으니 동일성이 보이지 않는 같습니다. 나비도 날개를 접으면 네모꼴 비슷하고 책가방도 네모꼴 비슷한 모양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동일성을 찾았으리가 생각됩니다. 이것은 사물들의 모양의 동일성으로 찾아보는 것이 되겠습니다. 실제상 시는 이런 동일성이 어떻게 왔는가를 고려하지 않아도 통한다고 해야 할것입니다. 언어기능을 말할 때 언어는 아무렇게나 자유로이 어울리며 조합된다고 하였습니다. 나비가 책가방으로 된 자체가 언어기능에 의하여 된것이라고 봐도 별문제 없을 같습니다. 나비라는 글은 나비라는 원사물의 상징일 뿐 원사물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통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변하면 통한다고 하였고, 서양의 당대  철학가들 즉 후기구조주의 철학가들은 그것은 필연적으로 맞으므로 왜 그렇게 변하느냐를 묻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ㅎㅎ 아다모끼 같지요. 아다모끼가 아닙니다. 덴마크에 가면 미인어가 있고, 파리의 부르그 박물관으로 가노라면 사자 몸에 녀자의 상반신이 붙은 조각상이 있는가하면 범의 몸에 남자의 상반신이 붙은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런 조각상은 짐승과 사람이 같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중국 명나라 때 왕양명이란 철학가가 있었는데 세상사물은 다 형제간이다. 땅이 어머니이고 하늘이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시는 사물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밝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새로운 관계란 사물들이 어떻게 서로 어울리고 조화를 이루는가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으로 글을 쓰는 것이 시라고 하겠습니다. 한 사물이 성질이 다른 여러가지 사물들과 어떻게 어울리는가를 쓰는 글이 하이퍼 동시의 한가지 수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신현득의 하이퍼 동시 한수를 봅시다 시인의 손에 놓이면 신현득   돌멩이 한개라도 시인의 손에 놓이면 달라 시가 되거든   몽당연필이라도 시인의 손데 잡히면 달라 시를 쓰거든   흔한 해빛이라도 나무잎이 받아지니면 다르듯이 과일이 살이 되듯이   흔한 물방울이라도 나무잎이 받아지니면 다르듯이 초록빛 피가 되듯이   버릴  만한 생각이라도 시인의 마음에 잡히면 달라 시를 빚거든 신현득의 하이퍼 동시는 다섯개 이미지단위로 씌여진 동시입니다. 이미지 단위마다에 등장하는 돌멩이, 몽당연필, 해빛, 물방울, 생각 따위들이 어느 것도 동시의 중심이 못되고 있다하겠습니다. 그래서 한개련쯤 삭제하여도, 또 다른 이미지를 첨가하여도 시는 손색도 없고, 변하지도 않습니다.왜 그럴가요. 이미지가 다 변두리고 겉이고 곁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중심 이미지가 없는 동시, 대등한 자격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로 된 동시, 그런 동시가 바로 하이퍼 동시라 하겠습니다.   제3절 의미와 무의미   현대 동시에서는 일상적으로  의미가 알리게끔 시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 하이퍼 동시에서는  의미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에 무슨 의미를 말했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알려면 시를 분석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라겠습니다.  중국의 시전통은 적어도 1500년전부터 시인은 자신의 뜻을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탁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이퍼 동시는 바로 이런 전통을 계승하여 새롭게 발전시키고 있다하겠습니다.  하이퍼 동시인은 시를 쓰면서 이 시에서 어떤 뜻을 말하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겠는가를 생각합니다. 시인의 추구하는 것은 의미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라겠습니다. 나비를 이렇게 쓴 시인이 있습니다.   가지 없이도 노랗게 피여나고   뿌리 없이도 하얗게 핀다. 김철호시인의 동시 대표작이라는 의 전문입니다. 이 시는  하이퍼 동시입니다. 혹자는 왜  하이퍼 동시인가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시의 이미지단위들은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각각 독립성을 지니고 있어서 두개련을 바꾸어 놓아도 별문제가 없습니다. 또 같은 맥락으로 꼬리 없이도 까맣게 피여난다고 더 써넣을 수 있는 여지도 있는 시이기에 하이퍼 동시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뿌리와 가지는 별개의 사물로서 성질이 다른 사물입니다. 마치 사람의 얼굴의 눈과 입처럼 얼굴에 있지만 성질이 다른 사물인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시인은 시에 자신의 어떠한 주장도 개입시키지 않고 그저 가지도 없이 뿌리도 없이 노랗게 하얗게 피는 것이 나비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시인이 추구한 것은 가지 없이 노랗게 핀 것과 뿌리 없이 하얗게 핀것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어느날 나비에 대한 상상이 섬광처럼 번쩍 머리에 떠올라서 이렇게 썼을 것입니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 시는 순간에 탄생하여 일필휘지된 것이라고 보아집니다. 좋은 시는 낑낑거리며 씌여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떠올라서 씌여지기가 일수입니다. 시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면 다른 이미지도 련속적으로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열달잉태요 하루아침의 해산이란 말이 시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가지 없이도 노랗게 피고 뿌리 없이도 하얗게 핀다니까 그것은 잎일 수도 있고 꽃일 수도 있겠습니다. 김철호동시인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서 말하지 않을가요. 독자가 생각해 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목과 련계시켜 보면 나비를 말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목을 무시하고 이미지만 생각한다면 시문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더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얼핏 생각해도 구름이 떠오릅니다. 구름도 가지 없이도 노랗게 피여나고 뿌리 없이도 하얗게 피여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태양도 달도 가지 없이도 노랗게 피여나고 뿌리 없이도 하얗게 피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니랍니다. 새들도 가지 없이도 노랗게 피여나고 뿌리 없이도 하얗게 피여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있습니다 비행기도 가지 없이도 노랗게 피여나고 뿌리 없이도 하얗게 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지와 뿌리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시인은 무슨 가지인가 무슨 뿌리인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지는 나무의 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풀의 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구름의 가지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의 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풀의 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구름의 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외에도 바위 뿌리 바위 가지 등등 많고도 많겠습니다. 시는 문맥에 표현된 것보다 엄청 많은 상상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렇게 새로운 상상을 부여할 수 있을 때 황금량이 많은 시라고 생각하게 되겠습니다. 시는 이렇게 어떤 뜻을 부여하여 교육적 가치를 토로하기 보다 상상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하는 글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가요. 여기에 시의 매력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시는 새로운 상상을 만드는 글이랍니다. 김철호시인은 시에서  나비가 아름답다는 표현을 한것 같습니다. 나비는 삼척동자도 아름다운 사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나비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비를 통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도 말할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심리세계를 어떠한 표현으로 보여주는가가 시에서는 중요하지 무엇을 노래했는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겠는가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지속에는 스스로 뜻이 담겨져 있게 마련입니다. 뜻이라는 것은 시가 된 다음에 론할 일로서 시인의 몫인것이 아니라 독자들이나 평자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독자들이나 평자들은 나름대로 뜻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므로 하이퍼 시는 한가지 뜻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뜻으로 나뉘여지게 됩니다. 한수의 시가 여러가지 뜻으로 나위여지거나 여러가지 상상을 불러올 때 그런 시가 좋은 시라 하겠습니다. 성인시도 동시도 다 이러합니다. 그래서 시의 뜻이 문면에 드러나면 피가 나오거나 골수가 나온다는 끔찍한 말이 있겠습니다. 김철호의 이 시는 아이들 언어인가 하면 성인들 언어이고 성인들의 언어인가 하면 아이들 언어로써 동시라고 보면 동시이고 성인시라고 보면 성인시입니다.   발볌발볌           단풍잎 내려놓은 가을  발볌발볌 간다.    눈송이 실은 겨울  발볌발볌 온다   별빵 먹은 조각달  발볌발볌 둥근다.    재미 있는 동시 은 윤옥자동시인이 쓴 하이퍼동시 전문입니다. 가을, 겨울, 조각달의 이미지를 한수의 시에 집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을과 겨울은 성질이 다른 사물이라는 의미도 있겠으나 세월이란 각도에서 보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니까 련계성도 없지 않은 같지만 실은 가을과 겨울은 각각 성질이 다른 계절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각달은 불쑥 튀여나온 질이 다른 이미지여서 하이퍼 동시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 같습니다. 지금 론하는 문제가 의미와 무의미이므로 이 시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하여 론해보도록 합시다. 윤시인은 1련에서 가을의 단풍이 어쩌는가만 쓰고, 2련에서는 눈송이 날리는 겨울이 어쩌는가만 쓰고, 3련에서는 별빵 먹은 달이 어쩌는가만 썼습니다. 시인의 심정이나 말하려는 어떤 뜻을 한글자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무의미시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의 운동만 썼지 시인의 감정이나 서정을 토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감정이나 서정은 시의 문맥속에 녹아있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이 시에 이 련마다 씌여있는데  하이퍼 동시에서 이런 언어를 링크라고 합니다. 여기서 링크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은 의 사투리라고 합니다. 은  발길이 가는 대로 목표 없이 천천히 걸어가는 모양이라고 사전이 해석을 붙이고 있습니다. 언어적으로 말할 때 사투리가 알맞는 곳에 씌였을 때 그 사투리를 문화어로 승격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며 언어를 풍부하게 다루는 작용도 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 아무런 목표도 없이 천천히 걸어간다, 겨울이 아무런 목표도 없이 천천히 걸어간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가을과 겨울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매짠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3련은 1,2련보다 더 매짜다고 할 것 같습니다. 고 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창출하였고 조각달이 아무런 목표도 없이 천천히 걸어가면서 고 하였습니다. 가히 절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각달에 대하여 쓴 이미지는 수없이 많지만 이렇게 조각달을 표현한 시구를 필자는 첨으로 대하는 같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짱입니다. 시의 마지막에 홱 돌아서서 앞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새로운 이미지가 불쑥 튕겨나오는 것을 영어로 위트라고 하고 우리 말로는 재치라고 하는 같습니다. 위트나 재치는 언어의 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하겠습니다. 탄력이란 어떤 언어를 말하는가? 탄력이란 일상적으로는 어울릴 수 없는 단어를 조합시켰을 때 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과 은 어울릴 수 있는 낱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의 기능으로 어울리게 하여 별과 빵이 간과 슬개처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서로를 끌어당기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탄력이라 하겠습니다. 미안하게 되는 군요. 본제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무의미로 쓰는 시는 왕왕 사물과 사물의 련관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시화할 때 나타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시화한다는 것은 새롭게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새로움이 없는 것은 시화인 것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무의미시는 그 원천을 사물시에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물시란 시인의 의사를 배제하고 사물들의 관계와 사물들의 운동만으로 쓰는 시라하겠습니다. 윤옥자동시인이 쓴 이 바로 이러한 시인것 같습니다. 중국 시인 우씨엔의 하이퍼 동시를 한수 봅시다.   해빛 우씨엔   해빛이 창문을 기여오르고 있다 해빛이 꽃잎에 앉아 웃고 있다 해빛이 시내물을 따라 흐르고 있다 해빛이 엄마의 눈에서 빛나고 있다.   의 전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짧은 넉줄입니다. 하지만 해빛을 여러가지로 변형시켰고 해빛이 여러가지 움직임으로만 씌여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빛의 따슨함과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이미지에서 받은 느낌이지 시에서 말하는 느낌이 아닙니다. 시속엔 이런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무의미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의미시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의미가 이미지와 혼연일체를 이루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시인은 의미를 발굴하기 위하여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하여 시를 쓴다고 하겠습니다. 시에는 새로운 사상이나 새로운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인은 사상을 발견하는 자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발견하는 자입니다.       제4절 고정과 변화      세상에 고정된 사물이란 없습니다. 모든 사물은 그냥 변하고 있습니다. 동물도 변하고 식물도 변하고 곤충도 변하고 사람도 변합니다. 산생도 변화이고 성장도 변화이고 죽음도 변화라고 하겠습니다.이런 변화들은 모두 무에서 시작되여 무로써 끝나기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변화를 상상이나 환상으로  쓰는 것을 시라고 하겠습니다. 왜 환상인가구요?  상상의 최고봉은 환상이라 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옛날에 사람이 날아다닌다고 하면 환상이라고 했을 겁니다. 옛날에 사람이 달나라로 간다면 환상이라 했을 겁니다. 달에 계수나무가 있고 옥토끼가 있다고 했습니다.이런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누구도 승인하지 않는 것이여서 환상이였을 겁니다. 상상은 일정한 근거를 요구하나 환상은 아무런 근거도 요구하지 않는 허망생각이라 하겠습니다. 시는 상상에 의한 꿈이고 환상에 의한 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필자는 상상보다 환상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상상과 환상은 아빠트처럼 어느것이 일층이고 어느것이 십층이라는 엄격한 구별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에서 두 사물을 비교하여 비유를 유출하였을 때 근거가 알리면 상상이고, 근거가 알리지 않으면 환상이라 할 수 있을 같습니다. 이미지는 터무니 없는 대상을 재구성한다고 합니다. 이 터무니 없는 사물이 아마 환상에 속할 것입니다. 바위가 뱀이 되여 기여간다, 뱀이 바위로 불쑥 솟는다 하면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환상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같고, 강물이 뱀이 되여 기여간다든가 뱀이 강물이 되여 흘러간다 라고 할 때는 상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강물과 뱀은 다 기다랗고 땅우에서 구불구불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는 상상과 환상으로 반죽되여 태여나는 사물을 생성하기에 그 사물은 천변만화하게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퍼 동시를 다양체라고 하였는데 그 다양체는 상상과 환상에 의한 여러가지 변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다양체를 만드는 방법을 령토화ㅡ탈령토화ㅡ재령토화라고 말합니다.  시를 보도록 합시다.   차창의 비방울 황희숙     쬐꼼한 굴렁쇠  또르르  굴러간다    하얀 지렁이  꼬불꼬불 오솔길 낸다    은빛 방울  따르릉 종소리 울린다   황희숙동시인이 쓴 전문입니다. 비방울이 굴렁쇠로 변하고 비방울이 지렁이로 변하여 오솔길을 닦고 비방울이 은빛 방울이 되여 종소리를 울린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차창에 떨어지는 비방울은 동그래지니까 굴렁쇠라고 하고 구불구불 흘러내리니까 꼬불거리는 오솔길을 닦는다고 하고 방울이라는 언어와 종을 치는 종이 비슷하니까 종소리 울린다고 한것 같습니다. 새김질해 보면 제2련이 희한하다고 하겠습니다. 오솔길을 낸다고 하였으니까 차창이 산이 되고 들이 되였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솔길은 산이 아니면 들판에 있으니까요. 마지막련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차창에 떨어지는 비방울을 방울이라고 하였는데 동음의이어로 매방울이나 소방울이 동그란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남다르게 방울의 소리를 파보면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퍼 동시는 꼬리, 대가리, 허리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시에 집성된 이미지가 어느것이 대가리고 어느것이 허리이고 어느 것이 꼬리인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이미지단위를 마음돼로 바꾸어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이퍼 동시의 구성형식의 특성이라겠습니다.하이퍼 동시의 이미지는 사물운동의 중간에서 채취한 것이므로 해석이나 설명이 필요 없이 결론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에서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령토화 ㅡ탈령토화ㅡ 재령토화입니다.황시인의 이 시가 바로 령토화ㅡ탈령토화ㅡ재령토화의 한 보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령토화는 일반적으로 제목이 되겠습니다. 탈령토화는 상상이나 환상의 과정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그러므로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추상적인 사유과정이겠습니다. 재령토화는 사물이나 사물의 움직임이 되여 우리 눈앞에 영상으로 떠오른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시의 첫련입니다. 을 라고 하였습니다. 은 제목이므로 령토화라고 하겠습니다.세상의 많고 많은 사물들 중에서 시인에게 선택된 사물이자 언어인 은 이 시에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첫령토로 되였으니까요. 시인은 을 은유의 수법으로 라고 하였는데 는 변형되여 나온 재령토화에 속하겠습니다. 비방울이 변하여 굴렁쇠가 되였기 때문에 재령토화라는 것입니다. 이 굴렁쇠는 상상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된 굴렁쇠입니다. 어떻게 변해서 비방울이 마지막으로 굴렁쇠가 되였는지 하는 과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과정을 탈령토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법을 은유라고 하는데 은유는 사물의 변화를 완성하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고, 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련에서는 이 이 되고 3련에서는 이 이 됩니다. 오솔길과 방울은 재령토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에는 굴렁쇠로 변하고 두번째는 오솔길로 변하고 세번째는 은빛 방울로 변하였습니다. 이렇게 련속 성질이 다른 사물로 변하는 것을 하이퍼 동시라고 하겠습니다. 프랑스 앙드레 이베르노 이란 하이퍼 동시 한수를 봅시다.   지나가는 시간   앙드레 이베르노   회색의 월요일 수국의 분홍색 화요일 파란색 수요일: 너 다시 올거지? 주중 다른 날들은   나무아래서 티티새와 놀이하는 초록색 목요일   그리고 당근의 빨간 색 토요일   일요일 그는 두팔사이 줄기위에 태양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의 전문입니다. 월화수목금토일 일주일의 날마다 색갈의 변화를 썼습니다.사실 월화수목금토일도 시간의 변화를 알리는 거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의 해설로 말하면 월은 달, 화는 불, 수는 물, 목은 나무, 금은 쇠, 토는 흙, 일은 태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고정되여 있는 사물이 아니라 늘 변하고 있는 사물이라 하겠습니다. 실은 시간은 정지되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각일각 변화되고 있으며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이퍼 동시는 이미지가 그냥 다른 이미지로 변하게 되여있다고 하겠습니다. 월화수목금토일처럼. 월화수목금토일은 중복되는 같지만 실은 그냥 새로운 시간을 나타낸다고 말해야 정확하겠습니다.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어는 시간들은 한번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변하는 것처럼 하이퍼 동시에서의 사물의 변화를 뛰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이런 련속적인 뛰기는 하이퍼 동시의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뛰기가 없으면 하이퍼 동시가 안됩니다.이런 뛰기를 통하여 하이퍼 동시는 다양체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하이퍼 동시에서 뛰기는 끝없이 무한히 계속 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인은 그런 뛰기 중의 일부만을 선택하게 됩니다.   제5절 질서와 뛰기   질서라는 말은 차례대로, 순서대로 라는 말이라는 것을 다 아는 해석이겠습니다. 하이퍼 동시 뛰기는 순서고 차례고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이퍼 동시에서 이미지가 뛴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어떤 때 어디로 뛰는 지는 시인 자신도 파악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시가 상상이나 환상에 의하여 씌여지니까 시인도 자기의 상상이나 환상이 어떻게 어디로 뛰는가를 생각할 사이가 없고 또 그런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상이 가는 대로 환상이 떠오르는 대로 이미지를 써놓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령혼에 령토가 떠오르는 것도 시간과 장소의 약속이 없는데 하물며 뛰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하이퍼 동시에서 뛰기는 어떠한 속박도 없이 제멋대로 뛰기, 아무런 구속이 없이 자유로 뛰기라 하겠습니다. 날벼랑이 평원이 되여도 좋고, 하늘이 땅이 되여도 좋고, 물이 불이 되여도 좋고,흙덩이가 수리개 되여도 좋고, 산이 술이 되여도 좋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다음 하이퍼 동시 두수를 보도록 합시다.     첫수    미끄럼   출렁출렁 떼목들은 강물미끄럼 타고   또르르 또르르 이슬은 풀잎미끄럼 타고   빵 ㅡ 빵 ㅡ 뻐스는 눈길미끄럼 타고     우르릉 우르릉 비행기는 구름미끄럼 탄다 ㅡ김봉순 전문     두번째 수   단풍잎   다이빙 선수들    노란선수 두팔 벌려  물위에 살짝   도토리 대굴대굴  돌이마와 딱!   빨간선수 공중 삼회전  땅우에 착    바람호각 쏴-- 단풍눈 펑펑   ㅡ윤옥자   상기한 두수의 이미지들은 뛰기가 된 보기라고 하겠습니다.  에서는 떼목, 이슬, 뻐스, 비행기 등 부동한 사물들이 뛰여나오고, 에서는 노란 선수, 도토리, 빨간 선수, 바람호각과 단풍눈이 뛰여나옵니다. 이질적인 사물들의 집합이라 하겠습니다. 첫수에는 네가지 이미지가 집성되여 있고, 둘째수에는 다섯가지 이미지가 집성되여 있습니다. 첫수에선 네번 뛰기를 하였고, 둘째수에서는 다섯번 뛰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같은 이미지가 아니고 죄다 차원이 다른 이미지들입니다. 하이퍼 동시의 이미지들은 뛰지 않으면 못사는 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개구리이며 노루이며 사냥개입니다. 개구리가 폴짝폴짝 뛰여 여기저기로 뛰여다니는 것처럼 그냥 장소를 변경하고 대상을 달리 하려고 합니다. 노루처럼 이산에서 저산으로 뛰여갑니다. 산을 옮기지 않으면 못사는 노루처럼 령을 넘어다닌다 하겠습니다.그냥 자신의 시간을 달리하고 공간을 달리하려 합니다 사냥개라도 굶주린 사냥개입니다. 아무것이나 사냥해야 합니다. 사냥한 것은 재령토가 되겠습니다. 또 개구리가 노루되고 노루가 사냥게로 되기도 하고, 사냥개가 노루로 되고 개구리로 되기도 하고,개구리가 사냥개로 되기도 한답니다.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놈들,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놈들이랍니다. 변해서 생긴 놈들, 변한 놈들도 수시로 변하기를 작정하고 있는 놈들이랍니다.어디로 어떻게 튕겨나가 무엇으로 변할지는 그것들도 모른답니다. 돌연적이고 기습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놈들이랍니다. 지적인 질서따위는 근본적으로 모르는 놈들이랍니다. 곽해룡의 이라는 하이퍼 동시를 한수 더 보도록 합시다.   매미가 나무둥치를 빨며 매음매음 쓰디쓰 쓰디쓰 시어이 시어이   오목눈이가 나무를 비켜가며 비리비리 비리비리   에서 처음에는 매미가 나무맛을 보는 것을 쓰고 두번째는 오목눈이 나무맛을 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것을 썼다고 하겠습니다. 매미는 나무맛이 맵고 쓰고 시쿨다고 하지만 오목눈은 맛도 보지도 않고 비리다고 합니다. 매미와 오목눈이 등장이 련계성이 없이 뛰기가 되였는가 하면 나무맛도 매미와 오목눈이 보는 맛이 완전히 다른 뛰기라고 하겠습니다. 현대 동시는 차례대로 순서대로 나아가는 질서가 있지만 하이퍼 동시는 이런 차례와 질서를 무시한다고 하겠습니다.사물들은 질서가 없이 자유로 뛰여다니지만 그로서의 질서는 따로 있습니다. 뛰여다니기는 현대 동시구성에 대한 파괴이며,그 질서에 대한 반역이며 그 질서에 대한 변혁이겠습니다.  뛰여다니기는 하이퍼 동시에의 건설이며, 다양체에 대한 수립이며, 재령토화의 동시 질서를 건립하는 것으로 되겠습니다.   제6절 자아와 타자   오리오리 물오리 우리집 귀염둥이   오리오리 물오리 하늘 나는 비행기.   이런 동시가 있다고 합시다.여기서 1련은 라고 합니다. 우리라는 그속에 나라는 것이 포함되여 있으므로 타자인 것이 아니라 자아입니다. 그러나 2련에서는 라고 썼으니까 나라거나 우리라는 인칭이 들어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시구는 자아인 것이 아니라 타자라고 합니다. 자아와 타자의 구별은 인칭이 어떻게 사용되였는가를 가지고 판단한다고 하겠습니다. 시는 보통 1인칭이나 2인칭이 직접 들어가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동시를 자아의 동시라고 하겠습니다. 3인칭으로 씌여진 동시는 타자의 동시, 혹은 무아의 동시라고 하구요.실은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은 구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의 이미지는 시인과 한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과 떨어져있습니다. 시인이 쓰는 시는 상상이나 환상이기에. 하이퍼 동시에서는 1인칭이나 2인칭을 요구하지 않고 3인칭만을 요구한답니다. 그래서 하이퍼 동시는 자아의 표현이 아니라 타자의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왜 이런 구별을 요구할가요? 1인칭이나 2인칭은 현대 동시로서 결국에는 제자랑을 하는 것이 되고,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3인칭은 남의 자랑을 하고 남을 존경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므로  객관적인 것을 강조하게 됩니다. 1인칭, 2인칭은 자기 제일이 되고 3인칭은 남이 제일이 되므로 시인의 겸손과 겸허를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중국 청나라 때에 왕궈위란 문학가가 있었는데 유아경의 시는 아무나 쓰지만 무아경의 시는 아무나 쓰는 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1,2인칭은 유아경에 속하고 3인칭은 무아경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아래에 하이퍼 동시로써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수   쌍둥이 버드나무 초록색 물 바줄 당기기 한다   구름 한점 개나리 꽃 한점 참새 한점 초가집 한점 골고루 얹어 해빛에 잘 구운 피자 한장을 바람이 조르르 말아간다   물새 들어갔다 붓꽃 들어갔다 다람쥐 들어갔다 해님 둥근 손이 찰칵 문 잠군다       나비3   하늘강에조개한마리 빠꼼문열고 까꿍   할미꽃한송이 하얀가발쓰고 해해   꼬리없는하얀연 나들이행차 나폴나폴   첫수는 한설매씨의 의 전문이고, 둘째수는 강려양의 의 전문입니다. 의 1련은 버드나무 두그루와 호수물의 조화를 쓰고,  2련은 둥근 호수를 변형시킨 내용이고,  3련은 석양을 맞이한 호수와 호수에 비낀 사물의 조화를 썼다고 하겠습니다. 에서는 나비 나들이를 환영 하는 것을 1,2련에 쓰고 3련에서는 날아예는 나비 본신을 썼다고 하겠습니다.  이 두수의 시에는 나나 우리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아의 시라고 할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경의 시인 것이 아니라 무아경의 시라고 하겠습니다. 타자의 시의 특점은 객관사물들이 변형되여 움직이는 것을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서는 물바줄 당기기를 하는 한쌍 버드나무를 썼는가 하면, 여러가지 사물을 넣은 맛갈스러운 피자를 바람이 말아가는 것을 쓰고, 3련에서는 호수우에서 움직이는 여러가지 사물들의 놀이를 쓰다가 해님이 꼴깍 넘어간 것을 썼습니다. 어디에도 1인칭이 작용하지 않았고 어디에도 1인칭 냄새가 풍기는 곳이 없는 입니다. 도 이와 같은 수법이겠습니다. 나비가 탄생하여 날아다니니까 조개가 문을 열고 까꿍 반기는가 하면 할미꽃이 하얀 가발을 쓰고 천진란만하게 웃기도 하는데 나비자신은 꼬리 없는 연이 되여 나플거립니다. 이 하이퍼 동시의 어디에도 1인칭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3인칭으로만 씌여진 하이퍼 동시를 무아의 동시 타자의  동시라 하겠습니다. 하이퍼 동시에서 타자(무아)를 추구하게 되는 것은 객관적 존재에 대한 추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에서 객관적 존재의 추구를 하게 되는 것은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사물에 닿아보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을 늘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하여 동시, 특히 하이퍼 동시로써 해결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추구해 볼 수 있을 뿐 정확한 답안을 찾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움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이퍼 동시는 여러가지 차원으로 이를 구명해 보려고 애를 뜯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이퍼 동시라고 깔볼 것이 못되며 비하할 것이 못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소유의 동시독자들이 이렇듯 엄숙한 문제까지 파고 들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들 절대 대부분이 자연사물의 변화와 서로의 조화를 알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리스 카레(프랑스)이라는 하이퍼 동시를 한수 더 봅시다.   색갈들 모리스 카레   ㅡ난 말이야 보라색을 좋아해 7월달 색이거든   원귤이 흰 족제비에게 말한다 ㅡ난 말이야 주황색을 좋아해 게다가 난 절대 반대하지 않아 오렌지가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ㅡ난 빨간색이야 딸기가 말한다 ㅡ난 말이야 노랑색이야 참외가 말한다   사과는 몹시 으시대며 난 빨간색이 아니면 노란색 난 경우에 따라 달라   연못은 파란색으로 옷 입고 벗꽃나무는 한얀 꽃으로 옷 입고 초록잎은 나무가지들을 즐겁게 하고 금은 불에게 마술을 건다 모리스 카레의 에서는 나라는 언어가 마지막련을 제외하고는 그냥 나오는데 여기서 지칭하는 나라는 언어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지칭하는 나입니다. 이 시에 나오는 나는 자아인 것이 아니라 무아이며 타자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을 지칭하는 나와 사물을 지칭하는 나는 근본적 구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물을 지칭하는 나가 시행에 있으면 친절감이 나지만 사람을 지칭하는 나가 있으면 고리타분한 감이 나게 됩니다. 사물을 지칭하는 나가 있으면 시의 구성의 신선성을 더하게 되지만 인간을 지칭하는 나가 있으면 어쩐지 고린내를 더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시 독자들을 어린이들에게만 국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어른들도 동시를 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동시를 사랑하거나 동시를 쓰는 어른들은 동시를 읽습니다. 동시문화는 인류문화의 한부분인 것이지 어느 한 부분의 사람들의 문화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시를 대중화할 것이 아니라 대중을 시화하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시도 대중의 의식에 머물을 것이 아니라 시라는 예술로 점진적으로 대중을 동시화하여야 합니다. 부단히 대중을 동시쪽으로 끌어들이고 동시의 예술로 이끌어가고 감화시켜 동시를 깊게 리해하면서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 동시인과 동시평론가들의 사명이라고 생각됩니다.   제7절 단절과 링크 하이퍼 동시는 사물의 생성을 씁니다. 잠재의식의 반영을 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성을 씁니다. 그것은 하이퍼 동시의 생성은 무의식의 생성이여서 잠재의식이란 무엇인지 모른답니다. 무의식이란 사물을 생성하는 빈장소이고 잠재의식이란 과거의 기억이 저장되여 있는 창고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슬금슬금 걸어간다 잠자리가 십자가 되여 하늘 난다 민들레 꽃새들이 모이를 쫏고 있다 땅거미가 야금야금 산을 먹는다 이렇게 사물이 현재라는 시점에서 가상현실(허상, 허구)로 변형되여 씌여진 것은 잠재의식의  작용이 아니라 빈장소에서 련속 생성되는 시적현실인 것입니다. 무의식(아무런 리해관계가 없는 순수한 의식)의 빈 장소에서는 늘 새로운 사물이 무수히 태여날수 있지만 잠재의식에서는 잠재된 기억 만큼한 사물이 태여날 수 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아래에 단절과 링크라는 본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동시 두수를 보도록 합시다. 우주의 만리장성(외1수) 방산옥   은하계가 우주만리장성쌓아요 자리빼앗는별들을막으려고   사막은 지구만리장성 쌓아요 날아갈려는 모래들을 막으려고   바다는 바다만리장성쌓아요 도망치려는 물방울들을 막으려고     연(1) 북두칠성 천지에 내리니 지구는 길 잃고 헤매요   갈매기 바다뺨 때리니 해일이 일어나요   병아리 안개말 타고 쪼각달 따와요   방산옥동시인이 쓴 두수의 시에는 언어중복이 있는 과 언어의 중복이 없는으로 씌여여졌습니다. 두수의 하이퍼 동시는 그냥 차원이 다른 이미지가 태여나는 데 그것들이 아무런 련계도 없이, 언어 중복도 없이 단절상태로 된 이 있는가 하면 이미지마다 란 이언어가 중복되면서 단절상태로 된 도 있습니다. 그저 단절상태로만 씌여진 은 초링크(초월적인 련계)라 하고,  이란 언어가 중복으로 씌여진 것은 링크(련결)라고 합니다. 링크나 초링크는 두가지이상의 이미지로 동시가 씌여졌을 때만 살펴보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에서 많은 동시를 례로 들었는데 링크와 초링크 관점으로 다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윤동주시인의 하이퍼동시 에는 같은 언어 중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초링크 하이퍼 동시라 하겠습니다. 김봉순시인의 에는 이라는 언어가 중복되여 씌여졌습니다. 그래서 링크가 있는 하이퍼 동시라 하겠습니다. 윤옥자시인이 쓴
29    제2부 동시창작론과 동시평 ㅡ 동시 창작방법 / 최흔 댓글:  조회:791  추천:0  2019-05-16
제2부 동시창작론과 동시평  최흔  동시 창작방법          차례   여는 말   제1장 현대동시 창작방범   1.             현실과 실재 2.             직설과 은어 3.             인식과 상상 4.             일상어와 시어 5.             동시와 이미지   제2장 하이퍼 동시 창작방법   1.  단일체와 다양체 2.  중심과 무중심 3.  의미와 무의미 4.  고정과 변화 5.  질서와 뛰기 6.  자아와 타자 7.  단절과 링크   닫는 말     여는 말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떤 구성을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새들은 대가리와 몸뚱이와 다리,날개 및 꼬리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고, 짐승들은 다리와 몸뚱이 대가리로 꼬리로 구성되였다고 할 수 있고, 나무들은 뿌리 줄기 가지로 구성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동시는 어떻게 구성되였을가요. 동시는 종적인 구성과 횡적인 구성으로 나뉘여졌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종적인 구성은 현대 동시에 속하고 횡적인 구성은 하이퍼 동시에 속하겠습니다. 현대 동시는 기승전결에 속하는 동시라고 할 수 있을 같습니다. 사물이나 사건의 발생을 쓰고(시적계기라고도 하지요) 승화시키고, 돌리고(과도시키는 것) 종결하는 따위를 현대 동시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현대 동시와는 다르게  하이퍼 동시는  한가지 사물이나 사실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한수의 동시에다 여러가지 사물이나 사실을 가로 배렬하여 쓰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동시들은 종적구성의 동시 쓰기를 하였습니다. 그건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문학이 처음에는 하느님 제일주의를 선양하였고 그담에는 인간제일주의를 선양하였습니다. 아마 이런 사연들이 현대동시를 낳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느님 제일주의나 인간제일주의는 중심 제일주의와 통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느님 제일주의는 모든 사연을 하느님과 련계시켜 쓰는 시이고, 인간 제일주의는 모든 사연을 인간이 제일이라는 중심을 둘러싸고 쓰는 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던것이 20세기 중반부터 자연 제일주의가 주목 받게 되였습니다. 자연 제일주의는 모든 사연을 자연을 중심으로 쓰는 생태 제일주의가 되겠습니다. 인간은 자연속에서 살며 자연의 일속으로 산다고 하겠습니다. 자연속에는 사물이 수천수만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사물들은 서로 련계되면서도 각각의 특성이 있는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이런 사물들은 지구라는 밭에서 살거나 우주라는 집에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 제일주의는 자연속의 모든 사물들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중심이라는 것을 수용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하이퍼 동시가 새롭게 각광을 받게 되는 같습니다. 하이퍼 동시는 자연에 순응하는 시적 창작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컴퓨터의 발견과 사용은  하이퍼 동시에 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마우스로 클릭하면 여러가지 사물이 나옵니다. 말이 나왓다 산이 나왓다 태양이 나왓다 물이 나왓다 불이 나왓다 합니다. 성질이 다른 이런 사물들이 마우스클릭에 의하여 산생됩니다.  하이퍼 동시는 바로 이런 특성을 살리는 시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저것 뛰여가며 쓰는 동시를  하이퍼 동시라 하겠습니다.                     사물 하나에도 순수한 한가지로 구성된 것이 없다고 할수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라는 이 사물에도 성질이 다르고 작용이 다른 눈, 코, 입, 귀, 살, 뼈, 피들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사물이 모여 얼굴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우리 학교도 그렇습니다. 선생님, 학생, 책상, 흑판, 벽보... 등등 여러가지 같지 않은 사물들의 집합터라고 할수 있습니다. 책가방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천으로 만든 가방이 있다고 합시다. 가방속에는 책이 있고, 필이 있고, 고무지우개, 콤파스가 있고 자대가 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사물들이 그것도 성질과 작용이 다른 여러가지 사물들이 모여서 책가방이라는 이름을 만족시켜 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우리는 여러가지 사물속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하이퍼 동시는 자연에도, 과학에도, 생활에도 부응하는 동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보면 지금까지의 거이 모든 우리 동시들이  현대 동시로 되여 활개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퍼 동시는 한쪽 구석에 쳐박혀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이퍼 동시가 새롭게 각광을 받을 때가 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현대 동시는 어떻게 쓰고, 하이퍼 동시는 어떻게 쓰는 가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담론해 보고저 니다.   제1장  현대 동시 창작 방법   제1절 현실과 실재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재라는 것은 우리의 다섯가지 감각 즉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에 의하여 감각을 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 6감각ㅡ 마음의 감각에 의하여 감각된 것으로서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6감각은 현실적인 다섯가지 감각을 승화시켜 새로운 비현실적인 다섯가지 감각을 만들어 냅니다.  먼저 시각적인 사물이 어떻게 실재로 되는가를 봅시다. 강물이 구비구비 흘러간다고 하면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강물이 뱀이 되여 구불구불 기여간다 하면 이건 실재라고 하겠습니다. 하얀 구름이 하늘에서 떠간다 하면 현실이라고 할수 있고 흰 구름은 흰 적삼이다 라고 하면 실재라고 하겠습니다.여기서 강물을 뱀이라거나 흰 구름을 흰 적삼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비유에 속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강물은 강물이지 뱀이 아니고 흰 구름은 구름이지 흰 적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를 쓸 때는 반드시 이렇게 한 사물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사물로 만들어 쓰게 되는데 이것을 심상이라고 하고 이미지라고 하고, 또 변형물이라고 하고 또 실재라고도 한답니다. 다음 청각이 어떻게 실재로 되는가를 보도록 합시다. 돌이 짜르릉 운다 하면 새로운 청각을 만들어 낸것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돌은 짜르릉 울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이것은 시각적인 사물(돌)에서 새로운 청각(짜르릉)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청각적인 사물이 산생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소리에서 파랑새가 날아난다 라는 문장이 있다고 합시다. 종소리는 청각이고 파랑새는 시각인데 청각에서 새로운 시각물이 탄생하였다고 할수 있는데 종소리는 절대적으로 파랑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파랑새는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혹은 가상) 즉 실재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한 감각이 성질이 다른 감각으로 전의되는 것을 공감각이라고 하겠습니다. 공감각에서 새로 산생되는 사물은 다 실재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촉각이 어떻게 실재로 되는가를 살펴봅시다. 뼈의 아픔에 불꽃이 튕긴다. 살이 찢기는 고통이 망치로 뒤골을 친다. 여기에서 뼈의 아픔과 살이 찢기는 고통은 촉각이고 현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불꽃과 망치는 존재하지 않는 실재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은 미각이 어떻게 실재로 되는가를 봅시다. 쓰거운 맛이 입안에 불을 지른다. 달콤한 맛이 노란 꽃으로 피여난다. 이런 문장에서 쓰거운 맛과 달콤한 맛이 미각에 속하지만 불을 지른다와 노란 꽃으로 피여난다는 상상이나 환상에 의하여 나타난 문구로서 실재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후각이 어떻게 실재로 되는가를 봅시다. 비린내가 콧방울을 만든다. 고린내가 맴돌면서 울바자를 세운다. 비린내, 고린내는 코로 맡는 후각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코방울을 만든다와 울바자를 세운다는 상상이나 환상적인 사물의 움직임으로서 실재에 속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엘리어트는 이런 수법을 시적상관물을 설정한다고 하면서  예술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춘수라는 시인은 이런 수법을 짝을 찾는다고 하였고, 1500년전에 을 쓴 류협은 사물과 사물을 비기여 심상을 창조한다고 하였답니다. 실재를 찾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한가지는 상상적 방법이겠습니다. 소리나, 성질이나, 색갈이나. 움직임이나, 성질이나,사물법칙이나,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한사물의 실재를 추구하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우에서 강물을 뱀으로 한것은 모양이 비슷하기에 찾은 실재이고, 흰 구름을 흰 적삼으로 한것은 색갈이나 모양을 보고 설정한 실재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이런 작법은 상상에 의하여 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한가지는 그어떤 비슷한 점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로 실재를 만드는 일이겠습니다. 소나무가 독수리되여 날아간다. 돌이 휙 별이 되여 하늘에 뜬다와 같은 것들이겠습니다. 소나무와 독수리, 돌과 별은 아무런 비슷한 점이 없는 사물들입니다. 하지만 소나무는 독수리로 탈바꿈하였고, 돌은 별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될수 있는가? 그것들이 무슨 공분모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소나무가 독수리로 된다는것은 둘 다 지구우의 사물이라 할수 있고 , 돌이 별이 된다는  것은 돌도 별도 다 하나의 우주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소나무와 독수리는 지구가 공분모이고, 돌과 별은 우주가 공분모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변할수 있는 겁니다. 이런 작법은 환상에 의하여 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촉각, 미각, 후각에서 례를 든 것들도 환상의 산물이라고 하겠습니다. 확연히 알리는 비슷한 점을 노리면서 실재를 만드는 상상적인 수법보다 아무런 비슷한 점도 없는 것을 가지고 실재를 만드는 환상적인 수법은 한수 높은 동시작시법이라 하겠습니다. 너무 엉뚱하죠? 이러한 현상은 언어기능에 의하여 발생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언어에 대하여 말할 때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렇게 마치겠습니다. 실재는 이미지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미지를 언급할 때 실재를 다시 살펴보도록 합시다.     제2절 직설과 은어   한석윤시인님이 쓴 시부터 볼가요   해님 한석윤   하늘은 둥지 파아란 둥지   무슨 새 낳아놓고 날아갔을가   둥지속에 번쩍이는 금빛 알 하나   의 전문입니다. 이 짧고도 짧은 한수의 동시속에 은어가 련마다 존재하고 있습니다. 은어란 감춤의 언어이며 대체의 언어입니다.  직설이란 보이는대로 말하는 언어입니다. 시는 감추는 언어, 대체의 언어로 쓰는 문체로서 의사를 완곡하게 드러내는 언어입니다. 직설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물의 그대로나 의사의 그대로 쓰는 언어입니다. 직설인가 은어인가에 의하여 시가 되는가 안되는가가 판정될 뿐만 아니라 좋은 시인가 아닌가도 판정되게 됩니다. 이 시에는 은어가 있기 때문에 시가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하겠습니다. 하늘은 /둥지/ 파아란 둥지/ 이것이 첫련입니다. 이 첫련에서 하늘을 둥지라고 한 둥지가 핵심적인 언어입니다. 이 둥지라는 언어가 은어입니다. 한석윤시인은 은유적인 수법으로 하늘을 둥지라고 하였습니다. 은유란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이동시키는 방법으로서 변형이라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하늘은 둥지라는데는 또 과장수법이 작용한것입니다. 과장수법은 확대하는 방법과  축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늘은 둥지라는 것은 축소하는 방법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하늘이란 한없이 큰 것입니다. 그것을 쬐꼬만 둥지로 축소한 것입니다. 하늘을 둥지라고 하였으니 이 둥지속에는 구름도 있고 바람도 있고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뭇별들도 있고 많고 많은 은하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둥지는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이 둥지는 우주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로부터 보아 둥지는 새둥지나 닭둥지와 같은 것을 말한것이 아니라 우주를 대체한 말이며 둥지라는 언어속에는 우주가 감추어져 있는 은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련입니다. 여기서 무슨 새라는 새자가 은어입니다. 시인은 무슨 새라고 할 뿐이지 새의 이름을 찍지 않고 있습니다. 반문구를 던져주고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새가 낳아놓고 날아갔으니 아래에 무슨 새일가 하는 의문을 던져주고 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무슨 새인가 아래련을 보도록 합시다. 라고 씌여있습니다. 결국 새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3련이 종련인데도 말입니다. 제목이 해님이니까 금빛이 번쩍이는 가 해님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새가 낳은 것이 금빛 알이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빛알은 해의 은어로 되겠습니다. 문제는 새입니다. 금빛 알을 낳는 새, 해님을 낳는 새가 무슨 새일가 하는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새란 것이 새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해님이 금빛알이 된것처럼 새도 어떤 새로운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은어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은어일가요. 해님은 동산에서 솟아올라 서산으로 넘어가는 우주속의 한 사물입니다. 그러므로 새는 시간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태양을 보게 되는 것은 태양을 에워싸고 도는 지구의 운행과 자전에 의하여 보게 됩니다. 새란 언어가 또 이런 것을 말하지 않을가요! 그것뿐이 아니랍니다. 시인은 우주의 도를 말하고 있는 같습니다. 도란 세계가 돌아가는 리치이며 사물의 운동법칙입니다. 해님에서 시인은 해님이 뜨고 지는 리치와 법칙을 말하고 있는 같습니다.이렇게 풀이 해보니 엄청납니다. 현대 동시도 성인시처럼 흔상해 보아야 하는 문학입니다. 흔상 가치가 있어야 동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상해 보게 되는 것은 동시에 은어가 있기 때문이라겠습니다. 은어가 있는 동시라야 예술적인 현대 동시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속에 예술이 있어야 진실한 현대 동시라는 말을 듣게 되며 차원이 높다는 말을 듣게 되겠습니다.     제2절 인식과 상상     인식이란 사물에 대한 이미 가지고 있는 기성적인 견해이고 상상이란 기성적인 견해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지이겠습니다. 인지란 인식하여 안다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저 아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안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아는 것이 상상이 되겠습니다. 새롭게 안다는 것은 이제까지 누구도 모르던 것을 시인이 새롭게 밝혀낸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인식은 사유의 범위가 결정된 것으로서 닫힌 생각이고, 상상은 사유의 범위가 열린 것으로서 무한하다고 하겠습니다. 현대 동시는 인식에 의거하여 씌여지는 글이 아니라 상상에 의거하여 씌여지는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소위 상상이란 탈관념이란 말이 됩니다. 탈관념은 원래 있던 관념을 떠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동시가 상상이 없거나 탈관념이 안된다면 호랑이 가죽에 어룽어룽한 무늬가 없어 소가죽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5월의 구름을 반죽하여 하늘이 국수를 누른다 해님 분틀에 누른건 금빛 오리 달님 분틀에 누른건 은빛 오리   필자의 졸작 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졸작이여도 인식과 상상이란 제목으로 해석을 할 수 있을 같습니다. 는 첫머리부터 이상스럽게도 구름을 반죽한다고 합니다. 하늘이 구름을 반죽하여 국수를 누른다고 합니다. 이 언어들의 흐름은 일상적인 언어들인 것이 아니라 조금은 이색적이고 상상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구름을 반죽하여 국수를 누른다는 건 아마 새로운 발상 즉 상상에 의한 새로운 발상이 아닐가 생각됩니다. 아래에는 해님 분틀, 달님 분틀이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명사가 불쑥불쑥 튀여나옵니다. 이런 언어들의 새로운 조합은 아마 시인의 새로운 언어발견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국수오리를 금빛 오리, 은빛 오리라고 합니다. 현실에서 옥수수가루를 반죽하여 누른 국수오리를 금빛 오리라 할 수 있고, 감분가루를 반죽하여 누른 국수오리를 은빛 오리라 할수 있겠습니다. 비가 온다는 것을 옥수수 국수오리나 감분 국수오리가 나온다는 것으로 시인은 상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총적으로 라는 시는 현실에서 받은 감각을 감각 그래로 쓴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현실을 승화시켜 새로운 감각으로 새로운 실체(사물)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하겠습니다. 이런 동시는 하늘과 인간과 땅이 련계되여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구요. 하늘과 구름이 하늘을 대표하고 국수는 땅에서 생산한 농산품으로 누릅니다. 국수를 누른다는 것은 실제는 사람의 행동인데 시에서는 해님 분틀과 달님 분틀이라고 하였습니다. 해님 분틀, 달님 분틀은 사람의 은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천인지합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같습니다. 상상은 문학의 모체이며 시의 모체입니다. 상상이 작용하지 않는 시는 시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으로 알고 있는 필자입니다. 성인시만 이런것이 아니라 현대 동시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제4절 일상어와 시어   어떤 언어가 일상어인가? 우리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꾸밈이 없이 말하는 언어를 일상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떠한 언어가 시어인가? 우에서 시를 보았다시피 상상으로 창출한 언어를 시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 동시 언어는 주요하게 명사와 동사로 씌여지기가 일수입니다. 그런데 이런 언어들은 상상에 의하여 변형에 의하여 조합된 언어들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석윤 시인에 의하면 해가 금빛 알로 되거나 필자의 시처럼 말하면 비가 국수로 되는 것입니다.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여버린다는 실재인 겁니다. 시어는 왜 이런 변화를 그것도 왕청같이 꿈같은 사물로 변화를 일으키게 될수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언어란 것은 어떤 사물의 명칭이거나 어떤 사물의 행동이나 모양을 나타내는 낱말입니다. 수천년 동안 언어는 입놀림에 의하여 발전하여 오늘의 언어로 되였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하고 발전할 것입니다. 나무, 강, 산이라는 언어가 있는데 언어자체가 그 사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어는 그 사물을 지칭하는 상징적 표기나 부호일 뿐입니다. 나무라고 할 때 우리는 숲의 영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여러가지 나무의 총칭이 나무입니다. 그래서 보통명사라고 하지요. 만약 소나무, 백양나무 하면 우리들 머리에 사철푸른 소나무의 형상이 떠오르고 백양나무 하면 학교두리에 서있는 커다란 백양나무의 형상이 떠 오를 수 있습니다. 사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도, 사물의 모양을 나타내는 형용사도, 사물의 수량을 나타내는 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어떤 사물의 움직임이나 모양이나 수량을 머리에 떠올리게 할 뿐이지 그 사물이 글로 표현한 것처럼 직접적으로 원사물이 행동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만약 누가 최초에 소나무를 백양나무라고 이름 지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소나무를 백양나무라고 할 것입니다. 만약 최초에 사람을 돼지라 하고 돼지를 사람이라 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사람을 돼지라고 명명할 것이며 돼지를 사람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부모가 이름을 지을 때 지금의 순이를 굴뚝이라고 지었더라면 순이를 순이라 부르지 않고 굴뚝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또 순이라는 이름을 꽃이라는 이름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구요? 언어라는 것은 그 사물의 호칭일 뿐이지 그 사물이 아니라는 것을 꼭 리해해 달라는 부탁이라고 하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실물과 언어는 사람과 사진과의 관계입니다. 한 사람의 사진를 송곳으로 찌르거나 가위로 베여던져도 사람은 아프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실물과 사진이란 실물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언어의 특성에 대하여 말해 보도록 합시다. 언어는 일률 평등합니다.  언어의 나라에는 법이 따로 없고 언어사이에는 급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언어들은 자유롭게 서로 어울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품사들은 서로 자유롭게 어울려도 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선 명사와 명사의 어울림을 봅시다. 소나무 돌, 돼지벼랑, 강물범, 사람꽃, 지렁이 막대기... 보는바와 같이 아무렇게나 조합되여도 말이 되고 뜻이 해석될수 있습니다. 명사와 형용사를 봅시다. 빨간 강물, 네모난 하늘, 파란 송아지, 동그란 벼랑.... 아무렇게나 어울려도 말이 되고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명사와 동사도 마찬가지로 되겠습니다. 새가 긴다, 산이 뛰여간다, 해가 웃는다, 지렁이가 날아간다... 아무렇게나 어울리여도 말이 되며 해석될 수 있습니다. 수사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수자에 명사가 어울리면 수량을 타나내는 것 같은 것은 말씀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겠으니 수사와 형용사 어울림부터 보도록 합시다. 셋이 빨갛다. 셋은 동그랗다. 셋은 기다랗다. 셋은 뿌죽하다... 수사와 동사도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습니다. 둘이 뛰여간다, 열이 그림 그린다.... 이러한 례는 보는바와 같이 시시하게 많습니다. 풀이도 어려움이 전혀 없다고 하겠습니다. 형용사와 동사도 제멋대로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빨갛게 뛰다, 노랗게 흐르다, 가맣게 엎어지다... 통하지 않는 언어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언어의 자유로운 어울림을 언어의 기능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는 이런 언어의 기능을 리용하여 언어를 새롭게 만들며 갈고 닦는 작업이라고 하겠습니다. 때문에 시를 언어의 집이라고 일컫게 되여있는 것이 아닐가요. 또 시인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인시만 그럴 뿐만 아니라 동시도 그렇겠습니다. 언어의 기능을 리해하는 것은 시(동시포함)창작에 무한한 경지를 열어놓게 된답니다. 언어의 기능에 의하여 조합된 새로운 언어들은 문법규정 같은 것을 무시하는 틀리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고, 기성의 문장결구와 맞지 않는 병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모인 것이 시이며 아름답게 틀린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름답게 틀린 말들은 자연에 부합되는 말이며 철학에도 부합되는 말이라고 할 수있겠습니다. 자연의 모든 사물들 다시 말하면 성질이 완연히 다른 사물들이 모두 지구라는 고장의 형제간들이 아니면 우주라는 고장의 형제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로 다르지만 모두 지구나 우주라는 공동체를 가지고 련계되는 사물들인 것입니다. 서로가 의존되고 서로가 조화를 이루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이 안개와 련계되고 안개는 구름과 련계되고 구름은 하늘과 련계되고 해나 달과 련계되는 것처럼 서로 련계되는 것입니다. 구름에서 내리는 비는 산의 동물과 식물과 곤충과 련계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다 일정한 련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바탕에 의하여 언어의 기능도 산생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동시 언어는 어린이들 말들로 이루어진 것이고, 성인시는 성인들의 말로 이루어진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제일 처음 소제목의 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였댔습니다. 앞으로 언어기능에 대하여 말할 때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렇게 마치겠>> 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런 동일성이 없는 사물들로 실재를 만든다는 것은 언어의 자유로운 결합이라는 언어기능에 의하여  실재가 태여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제6절 현대 동시와 이미지    이미지는 성인시에서만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이미지는 현대동시를 씀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방법의 하나입니다. 현대 동시와 이미지동시란 같은 말이 되겠습니다. 이미지는 동시의 창조성을 살리고 동시의 언어의 기능을 새롭게 발휘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될 필수적인 방법입니다. 우에서 은어,실재, 상상, 언어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결국은 이미지를 만들데 대한 준비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동시에도 이미지시 예술수법을 도입하면 동시의 현대적표현을 한층 풍부하게 할수 있습니다. 이미지는 변형으로 이룩되고 변형은 시적상관물로 이룩되고 시적상관물은 색갈, 모양, 움직임, 소리, 성질, 의인화, 사물의 법칙, 이름, ...등으로 설정한다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라는 책의 이란 장절에서 한 말들이지만 현대 동시 창작방법에서 필수적인 환절이고,하이퍼 동시의 필수적인 환절이도 하기에 약간 다듬어 다시 이미지 만드는 여덟가지 방법을 올립니다.     (1)색갈로 이룩한 이미지    색갈로 이미지를 설정하는것은 현대동시를 새롭게 좋게 쓸수 있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천차만별의 색갈은 천차만별의  이미지를 낳을수 있고 천차만별의 현대동시를 낳을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시 한수를 봅시다.          꽃 밭        위영남    대낮에 장미꽃도  등불을 켜들고  푸른 꽃밭을 태웁니다    오뉴월 태양이  지구를 태우듯이  채송화,백일홍이  노란 등 빨간 등 켜들고    꽃밭 가득 환히  꽃밭을 태웁니다    소식 듣고 찾아온  범나비 한쌍  불타는 꽃밭을 둘러봅니다    뜨거워 뜨거워  앉았다가 날아보고  새로 타는 새불길에  마음까지 빨려들어  나래 접고 달콤한  꿈과 함께 탑니다    동시 에서 시인은 장미꽃, 채송화, 백일홍이 빨간 노란 등불을 켜들고 꽃밭을 태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날아온 범나비 한쌍도 불타는 꽃밭을 둘러보면서 고 하였습니다. 꽃밭에 불이 난것은 꽃들이 등불이 되였기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꽃이 어떻게 등불이 되는가? 꽃은 색갈에 의하여 꽃으로부터 등불로 변형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 등불은 꽃의 새로운 이미지로 된것입다. 이 동시에서 이란 시구는 새로 피여나는 새 꽃이란 뜻으로 씌여진것입니다. 이만큼 해석하면 이 동시가 풀렸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동시 한수를 더 봅시다.   단 풍 잎               리창건    빨간 노랑 단풍잎은  금붕어    바람 불 때마다  꼬리를 흔들며 헤염치는   금붕어    그럼  가을산은  금붕어로 가득한   강          이 동시에서 단풍잎이 어떻게 금붕어로 둔갑하게 되였겠습니까? 그것은 빨간 단풍이나 노란 단풍이 빨간 금붕어나 노란 금붕어와 색갈이 비슷하기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단풍은 금붕어로 변할수 있는것입니다. 그럼 가을산은 어떻게 강이 된단말입니까? 단풍은 가을산에 있는데 그것이 금붕어로 되였으니 금붕어가 사는 곳은 물이여야 합니다. 노란 금붕어 빨간 금붕어들이 헤염치는 곳이니 산은 그만 강물이 되여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2)움직임으로 이룩한 이미지   현대동시에서 움직임으로 이미지를 이룩할수도 있습니다. 사물의 움직임이 천만가지여서 움직임으로 이미지를 찾아 동시를 쓰는것도 천만가지의 현대동시 이미지를 얻을수 있는 방법의 하나라겠습니다.    참새     윤동주    가을 지난 마당은 하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 공부를 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읽으며  두발로는 글씨를 련습하지요    하루종일 글씨 공부하여도  자 한자밖에 더 못쓰는걸    윤동주의 이 동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미지를 찾아서 쓴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선 동시가 의인화의 방법으로 씌여졌다고 할수 있습니다. 참새가 애들처럼 공부를 한다는것이겠습니다. 두번째로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눈이 온 가을마당을 색갈을 보고 변형시킨 표현이겟습니다. 이런 표현들보다 더 중요한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움직임으로 이미지를 찾은것입니다.  참새들이 눈 내린 마당에서 짹짹거리며 모이를 찾느라고 발로 눈을 파헤치는것을 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움직임으로 이미지를 찾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인은 하루종일 공부하여도 고 참새와 롱지거리를 하고있습니다.  다음은 최장길시인이 쓴 동시를 보기로 합시다.    줄장미에 핀 아침     최장길    바알발  바알발    줄줄이 줄을 타고  기여간다    꽃게가  꽃게가    엉금엉금  아침을 밝히려    하나씩  해를 업고    하늘로 뛰여오른다    풍덩!  풍덩!    출렁이는  하늘에    드리워진  해들    시인은 줄장미꽃이 가득 피여난 아침에 줄장미꽃을 보고 이 동시를 썼다고 할수 있습니다.  우선 줄을 타고 올라가면서 피여난 장미꽃을 꽃게라고했습니다. 두번째로는 색갈이라면 색갈, 모양이라면 모양으로 꽃을  게로, 또 해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래서 게가 해를 업고 엉금엉금 하늘로 오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게는 바다나 강에서 사니까 하늘은 또 물이 되여 출렁입니다. 뒤이어띠염띠염 피여있는 꽃들은 게가 되여 풍덩풍덩 물에 뛰여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작자는 피여있는 줄장미꽃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좋은 동시 한수를 창출하였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3) 모양으로 이룩한 이미지    사물은 모양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사물의 모양이 천만가지입니다. 모양으로 이미지를 이룩하여 현대동시를 쓰는것도 한가지 비결이라 하겠습니다. 사물과 사물의 모양을 비교하면서 이미지를 찾아쓰면 깜찍한 현대동시가 만들어지기도 한답니다.    별바구니   방원조    련못은  별을 담는 바구니    밤마다  별들을 하나 가득  별애기도  하나 가득    별이 되는 생각도  하나 가득 담아두는 련못    꿈을 담는 바구니  그리움을 담는 바구니    방원조시인은 련못을 라고 변형시키면서 깔끔한 동시 한수를 썼습니다. 어찌하여 련못이 바구니가 되는가가 여기서 문제입니다. 련못도 모양이 둥그렇고 바구니도 모양이 둥그렇다고 할수 있겠지요. 그러니 련못이 바구니가 된것입니다. 시인이 밤을 설정하여 련못을 바구니라고 이미지화한 것은 밤에 별들이 련못에 비치기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별들이 자연적으로 바구니에 담기게 되는것입니다. 문삼석시인이 쓴 를 한수 더 보기로 합시다.    손톱깎개   문삼석    손톱깎개는         앞이 두대뿐이죠  앞이 두개로  또각또각 먹지요    또각또각 앞이로  소톱도 먹고  또각또각 앞이로  발톱도 먹지요    이 동시를 읽어보면 손톱깍개가 앞이 두개라는것이 생동하고도 새삼스럽게 안겨옵니다. 시인은 앞이 두개라는것을 손톱깍개의 모양을 보고 추출해내였다는것을 우리는 어렵지않게 보아낼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이미지를 설정한 다음 어떻게 전개시키는가 하는 한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할 수있겠습니다. 손톱깍개가 발톱과 손톱을 먹는다는것으로부터 원사물과 가깝거나 관계있는 사물들과  련계시키면 이미지동시가 태여난다는 점이겠습니다.    (4)소리로 이룩한 이미지    세상에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잎소리, 말소리 … 하여튼 세상은 소리로 가득 차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소리에 천착하여 이미지를 창출하여 동시를 쓰는것도 하나의 훌륭한방법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시를 보기로 합시다.    귀뚜라미          김구연    따르르따르르  비켜나세요  별님 달님     캄캄한  밤중에   귀뚜라미가  자전거를 탑니다    정말 깜찍한 현대동시라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귀뚜라미가 우는가 하였더니 마지막에는 는 엉뚱한 이미지를 끄집어내지 않았겠습니까. 소리로 이룩한 이미지의 아름다운 결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소리는 자전거의 방울소리와 비슷한 점이 없다고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귀뚜라미가 자전거를 탄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시인이 밤을 배경으로 현대동시를 쓴것은 밤이면 귀뚜라미가 울기때문이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밤에 자전거를 타니까 달과 별을 피하라고 한 시인의 상상은 기발한환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 물         유경환    내물이 손풍금치며 흘러간다  도레미 도레미 노래한다  노래도 내물처럼 흘러간다  쏠라시 쏠라시 노래한다  언젠가 노래를 멈춰야 할것을  내물은 멀잖아 알게 되리라          한마디로 잘된 현대동시입니다. 내물이 어찌하여 고 하게 되였는가가 문제죠. 이것은 소리의 비슷함으로 이미지를 찾은것입니다. 물론 내물의 소리와 손풍금의 소리는 비슷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물은 흐르며 소리를 내고 손풍금은 치면 소리를 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물을 손풍금이라고 한것인지도 모릅니다. 소리로 이미지를 이룩하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가지는 한소리를 다른 소리로 옮겨놓는 방법이고, 다른 한가지는 한소리를 다른 한 사물로 옮겨놓는 방법이다. 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수 있고, 은 전자에 속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5)속성으로 이룩한 이미지    속성을 특성이나 성질이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사물에는 여러가지 속성이 있고 이 속성은 때에 따라 변하기도 한답니다. 속성의 다양성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은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러한 속성을 리용하여 사물을 변형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여 현대동시를 창작하는것도 한가지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색갈이나 모양, 움직임은 시각으로 볼수 있지만 속성은 시각으로 볼수 없는 추상입니다. 또 귀로 들을수 있는 소리와도 다른것이 속성이라겠다. 속성은 마음의 감각이며 추리된 관념이지 오관을 통하여 반영된 감각이 아니라겠습니다.  동시로 말해 봅시다.    우리 선생님              김운일    우리 선생님  털빛 고운  자상한 암탉  암탉이   어린 병아리들을 키웁니다    꼬꼬 꼭꼭꼭 말하면서  어린 병아리들과  숨박곡질을 하면서  다정한 친구가 됩니다     . . .    털빛 고운   자상한 암탉이  마당을 돌아다니면  병아리들이  쫄쫄 따라다닙니다.    우의 시에서 4, 5, 6련을 삭제하였습니다. 4, 5, 6련은 암탉이 병아리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것이며 먹이를 줏는것이며 비가 오면 병아리들을 품어주는것이며를 쓴것입니다.  이 시에서 중요한것은 암탉이 어떻게 선생님으로, 선생님이 어찌하여 암탉으로 되느냐입니다. 그것은 사물의 성질로부터 착안하여 이미지를 추출한것이라겠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거느리고 모이찾기, 모이쫏기 등 여러가지를 배워주면서 병아리들을 키우는것이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글을 배워주고 노래를 배워주고 생활을 가르쳐주며 키우는것을 비해보면 성질상으로 별 차이가 없기때문이라고 단정할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생님을 암탉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김진태시인이 쓴 동시 한수를 더 봅시다.    온 실  김진태          봄은 큼직한 온실을 만들었다  집보다도  공원보다도  산보다도 더 큰 온실이다  유리로는 덮개를 할수 없다  하늘도 파아란 뼁끼칠한  하늘로 덮었다    때 맞추어 물을 준다  새순이 상하지 않게  고이고이 보슬비를 내린다  엄마젖 같은 단비를    싹이 튼다  촉이 솟는다  아가도 덩달아 큰다.    이 동시에서의 핵은 이라는 언어입니다. , 이 온실은 대지와 하늘로 구성된 온실입니다. 봄이 오면 대지에는 봄비가 내리고 봄비를 머금고 새싹들이 대지를 파아랗게 단장하지요. 그것은 온실안에서 분수로 뿌려주는 물을 먹고 새싹들이 싹트고 자라나는것과 같은 성질을 띠였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대지를변형시켜 온실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었겠다고 생각됩니다.     (6)의인화 (의물화)로 이룩한 이미지  의인화(의물화 포함) 수법은 문학을 하는 작자들이 제일 즐겨 쓰는 수법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의인화수법으로  이미지를 만드는것은 아마 큰 발견은 아닌것 같습니다. 우리의 많은 작자들이 리론상에서, 실천상에서 이것을 너무 분명히 알고있다고 생각되면서 간단히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현대동시로 말하면 의인화는 좀 다른 의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린이들은 세상사물 모두가 친할수 있는 대상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무서운 범이나 사자도 친구가 될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진성이 있을뿐만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친구라고 하는 환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화의 수법으로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은 어리이들에게 가장 친절하게 다가가는 수법의 하나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폭포 정춘자   떠밀지마!! 겁먹은 소리로 애원을 해도   사정없이 떠밀어대는 장난꾸러기들.   우아아! 아이쿠!   엎어지고 자빠져도 아파할 사이도 없이   산이 떠나갈듯한 웃음 하얗게 부서지는 웃음                              의인화수법으로 쓴 이 동시는 넘 매력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폭포를 아이들 장난처럼   변형시키면                    여서 재밋고도 생생하게 폭포 흐름이 보이게 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웃음이라는 은어로                    는 새로운 상상을 우리들에게 부여하는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폭포는 폭포의 언어를 썼다고 하겠습                    니다.  이번에는 의물화로 쓴 동시 한수를 봅시다. 의물화 수법은 의인화와 반대로 사람을 사람외의 사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가 입은 앵두                  서정숙     아가 입은   앵두    엄마가  똑  하개 따먹어도  그대로 있고    아빠가   뚝  한개 따먹어도  그대로 있고   아기 입을 앵두라 하였으니 의물화의 수법으로 변형시킨 현대동시라 하겠습니다. 물론 여기는 색갈이 많은 작용을 하였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따먹는다는 의미는 아빠 엄마가 아가와 뽀뽀를 하는것을 말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7)사물발전법칙으로 이룩한 이미지    법칙이란 말은 꼭 그렇게 변화되여간다는 뜻이겠습니다. 한 사물의필연성적인 발전을 법칙이라고 할것입니다. 성질과 법칙은 좀 다른 함의가 있는 같습니다. 성질에는 일반적으로 한 사물이 고유한 특성을 말하는 경우가 많고, 법칙은 성질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겠지만 사물의 발전의 필연성을 지칭하는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면서 법칙으로 이룩한 변형을 이야기하고저 합니다. 올챙이가 크면 개구리로 되는데 이것은 올챙이의 법칙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이 법칙을 리용하여 김선홍시인은 라는 동시를 이렇게 쓰고있습니다.    태양 줏는 올챙이      김선홍    꼬리만 있는 올챙이  도랑물 올챙이  태양 주으러  꼬리를 흔들흔들  까불며 간다    가다가 가다가  뒤발 두개를 줏고  가다가 가다가  앞발 두개를 줏고  가다가 가다가  청개구리 한마리 주었다    가다가 가다가  태양은 못 줏고  가다가 가다가        자기를 감쪽같이 잃어버렸다    참 재미있는 현대동시라 하겠습니다.  를 여러번 반복하지만 한번 반복할 때마다 올챙이가 변하므로 싫은감대신 생동한감이 넘칩니다., ,는 등 의인화와 유모아가 결합된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동시의 매력을 돋구었다 하겠습니다.  김삼진시인은 이라는 동시를 이렇게 쓰고있다    법 칙        김삼진    토란잎에 마알간  이슬방울은  실에 꿰여 놀고싶은  옥구슬 금구슬    바람이 가만히  건드리면  간지러워 또로록  굴러내려요    아이들이 조금만 건드려도  대굴대굴  또로록  굴러내려요    긴 설명이 필요없겠습니다. 이슬은 건드리면 떨어지지요. 이것은 이슬의 특성이라면 특성이고 법칙이라면 법칙이겠습니다. 이슬의 이런 필연적인 변화를 틀어쥐고 김삼진시인은 현대동시 한수를 창작하였습니다.    (8)사물의 이름으로 이룩한 이미지    현대동시에서는 사물의 이름으로 변형을 이룩하면서 동시를 쓰는 때가 흔히 있습니다. 실은 이름 자체에 이미지가 내포되여있는 사물들이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제비풀은 제비로 쓰면 되고, 초롱꽃은 초롱으로 쓰면 되고, 버들강아지는 강아지로 쓰면 되고, 할미꽃은 할미로, 독수리바위는 독수리로, 인삼은 사람으로 쓰면 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실례를 들어보면 설명할 필요없이 알게 될것입니다.    방울꽃       림교순    조롱조롱  방울꽃 피였습니다  산바람이 살짝  건드리며는   조롱조롱  소리가 쏟아지겠지    조롱조롱  방울꽃 피였습니다  고 방울을 따다가  아기 주며는        조롱조롱 소리를   좋아하겠지    볼우물        조상국    아가가 방긋 웃는 얼굴에  볼우물이 옴폭 패였습니다  아가가 방긋 볼우물속에   웃음이 가득 고였습니다    아가의 방긋 고인 웃음을   엄마와 아빠가 퍼냈습니다.    첫 시에서는 방울꽃을 방울로 생각하고 두번째 시에서는 볼우물을 볼에 패운 우물로 생각하고 동시를 썼다고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어 말하면 한 사물을 변형시켜 그 사물과 다른 새로운 사물을 창출해 내는 것을 이미지를 만들기라고 할 수 있겠고, 또 한사실을 이동시켜 다른 사실로 말하는 것도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이겠습니다. 간단해도 아주 간단합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건 동시를 쓰는 이런 방법을 장악하고 쓰는 것이랍니다. 이것은 기술입니다.  기술은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작용합니다. 어머니가 밥을 지어도 쌀과 물의 비례를 맞추는 기술이 수요되고, 차를 몰거나 만들어도 기술이 수요되고, 집을 지어도 기술이 수요되고...정치,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가 기술을 수요합니다. 기술을 다 버리면 인류가 류인원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현대 동시를 써도 기술이 수요되는데 가장 핵심적인 기술은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의 기술을 어디가 배울가요? 시 기술은 중국고전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필자가 시 기술책을 몇권 소개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文心雕龙)이란 책을 봐야 합니다. 1500여년전에 류협이란 중국 사람이 쓴 것인데 시를 쓰는 의식이 어떤것인가? 시는 어떻게 시작해 쓰는가? 어떻게 쓰면 좋은 시가 되고 어떻게 쓰면 좋지 않는 시가 되는가를 낱낱이 말하였습니다. 필자는 세계의 시 교과서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과서의 한권이 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케케 묵은 책이 아니라 오늘에 막대한 현실적의의가 있는 교과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그외 청나라 왕궈위의 (人间词话)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책도 몇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을  읽는 것이 좋을 같고, 자크 라캉의 을 읽는 것이 좋을 같고, 롤랑 바르트의 를 읽는 것이 좋을 같고,질 들뢰즈와 필릭스 가타리 저서 을 읽는 것이 좋을 같습니다. 시의 기술들이 동양과 서양의 이 여섯권의 책안에 다 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시는 자기의식에 의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시적 기술의 지도하에서 써야 합니다.기술을 배우고 기술을 써먹으면서 기술을 발전시켜야 훌륭한 시인이 되리라고 믿는 필자입니다. 그외에도 많지만 이 여섯권만은 누구나 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한번 도전해 보시죠. 도전한 것만큼 꼭 효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천지에서 타오른 시의 불길 ㅡ를 보고 최흔     방산옥 시집 를 보았습니다. 이 시집을 말하면 이라고 함이 좋을 것 같 아서 시평이름을 달았습니다. 방산옥시인은 2년동안의 학습과 창작에서 동시 200여수를 습작하였고 그중에서 90수를 추려서 동시집 (비매품)을 묶어보았고, 현대시 200여수를 습작하였고, 하이 퍼시 200여수를 습작하였습니다. 하이퍼시 200여수 중에서 92수를 선택하여 오늘의 하이퍼시집 를 정식으로 출간 하였습니다.    아래에 두가지 방면으로 방산옥의 하이퍼시집을 이야기하고저 합니다. 하나는 시의 령역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시의 이미지문제입니다. 이 방면 에서 방산옥시인은 새로운 추구를 보여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령역을 개척한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의 제재령역을 어떻게 탐구할 것인가 하는 것은 시창작에서 주요한 부분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그 전형적인 실례로 남영전시인이 개척한 도템시가 있고, 김파시인이 개척 한 고구려 력사를 쓴 장편서사시 (상, 중, 하) 3권이 있고, 최 룡관시인의 련작시 ㅡ 녀인의 누두를 시로 쓴 가 있습니 다. 또 형식적인 것을 추구한 박운호시인의 가로세로 시가 있습니다. 제재 에 대한 돌파를 하려면 시인이 그 령역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탐구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시적 기교를 장악하고 시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 니다. 다시 말해서 제재령역과 시의 제휴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서 이 런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방산옥시인은 에서 시적 제재의 새로운 돌 파를 가져왔습니다. 주역과 의학을 생활과 결합시켜 시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집에서 주역으로만 시로 만든 것이 12수나 되는데 아래와 같은 시들 입니다. 봉선화, 8괘 합창단, 자궁을 랭동시키다ㅡ축토, 별들이 만든 새태 양 ㅡ인, 3월이 분만한다 ㅡ진토, 산중 도사의 혀는 57자 ㅡ간, 바람이 비 몽둥이에 맞아 ㅡ손2, 흙물에 짓는 련꽃 집 ㅡ태, 물의 별곡 ㅡ 감, 폭포 는 바람의 날개를 붙잡고 ㅡ손1, 우뢰가 우주의 귀뺨을 친다 ㅡ진, 버들과 련꽃 형제 ㅡ손. 이러한 작품들은 주역을 시화한 작품들입니다. 그외에서 많은 작품속에서 주역성격을 띤 이미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역을 쓴 시들의 제목을 보아도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집의 첫수 봉선화는 봉선화가 여물면 알이 터져나오는 것으로부터 착 안하여 주역을 끌어내였는데 씨앗들이 튕겨나오면서 하늘이라 부릅니다, 바람이라 부릅니다. 진동이라 부릅니다… 하면서 건, 손, 진 하고 자기 의 성을 소개합니다. 시에서 의인화의 수법이 자연스럽고도 아름답게 표현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궁을 랭동시킨다 ㅡ 축토, 별들이 만든 새태양 ㅡ인에서는 언어조합의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고, 산중도사의 혀는 57자 ㅡ간에서는 유모아와 풍자, 그리고 해학적인 이미지로서의 개 성에 매도되고, 바람이 비몽둥이에 맞아 ㅡ손2와 폭포는 바람의 날개를 붙잡고 ㅡ손1, 우뢰가 우주의 귀뺨을 친다 ㅡ진들은 참신한 이미지를 우리 앞에 던지고 있으며 그 이미지들은 돌발적인 것들로서 우리를 느닷없이 기 습하고 있습니다. 흙물에 련꽃집ㅡ태, 버들과 련꽃형제 ㅡ손, 물의 별곡ㅡ 감 등 테마들은 옹골차서 믿음을 주는 테마들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야릇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주역을 중심으로 썼지만 제목들은 이미지가 여러가지 표현으로 되여 과 히 딱딱하지 않고 엉뚱하고 새로운 느낌을 주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을 느 끼게 되겠습니다.    주역 뿐만 아니라 의사로서의 의학적(특히 성)인 것들에 대한 이미지도 직접 혹은 쐐기를 박는 식으로 쓰고 있는데 방산옥시집의 주요한 제재의 하나로 리용되고 있습니다. 옥문, 용천혈, 침모내기, 감초, 청진기, 처방전 1, 처방전2, 캡슐, 백내장1, 백내장2, 골반염 등등 시들이 의학적인 것을 이미지로 해설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침모내기, 우주핸 들 언어같은 것은 아주 새로운 것으로서 언어를 갈고 닦는 방법을 터득하 지 않았다면 이런 시적 언어의 새로운 발견은 어려울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방시인은 의사로서 성에 관한 박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시인의 시집 에는 성에 대한 시들과 시어들이 점철되여 있습니다. 시인은 성을 아름다 운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러가지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근 한가 지 표현만 보더라도 자라가 빼드는 목이다가, 물구나무이다가, 비몽둥이이 다가, 날개를 드리운 꿩이다가, 옹이다가, 태양이다가, 지렁이이다가, 도화 산 낚시대이다가, 시퍼런 검이다가, 대포이다가…    실로 여러가지 표현이여서 이루다 결거할 수 없습니다. 방시인은 한 사 물을 여러가지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공력을 들였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 었다고 생각합니다.    거이 모든 시들에 주역적인 이미지들과 의학적인 이미지들이 시집의 지 천에 널려있습니다. 시집은 세가지 골격을 이루었다고 생각됩니다. 한가지 는 주역이고 두번째는 의학이고 세번째는 우리의 현실생활입니다. 주역도 그렇고 의학도 그렇고 현실생활을 포함해서 모두가 이미지창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론 각자 존재혀식이고 때론 혼연일체를 이룬다 고 하겠습니다. 많은 시들에서는 이 세가지가 각각 하나의 이미지단위로서 하이퍼시를 구성한다고 하겠습니다. 주역이나 의학을 제재로 한 시들도 하 이퍼경향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집니다. 그러한 제재의 시들도 항이퍼 텍스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퍼시란 주지하다시피 중심이 없는 , 다선구조로 된 시라고 간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의 커트 를 방산옥의 하이퍼시집이라고 달았습니다.    다음은 시의 이미지문제에 대하여 말하고저 합니다. 시집에서는 새로운 이미지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도 가마속에 서 물이 설설 끓어번지듯이 말입니다. 이미지들은 뒤의 이미지가 앞의 이 미지를 밀어버리며 자리를 자치하는데 마치도 물결이 세차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이미지 설정에서 시인은 마구잡이와 상상성 두가지 방범을 령활 하게 운용하고 있습니다. 제1장에 오른 시들의 정채로운 이미지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제1장에는 모두 16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새로운 이미지가 콸콸 넘쳐흐르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대개 아래와 같습니다.   1.      우뢰가 우주의 뺨을 치다. 2.      재목나무 타고 별과 대화하던 룡을/벼락이 간을 뽑아 구름우에 심는다. 3.      서쪽에서 해가 뜨고/기차가 하늘로 달린다. 4.      장백산 천지는 구름우에 옮겨졌고/폭포는 화성에 쏟아진다. 5.      닭알이 벼랑에 떨어져/뼈가 부서집니다. 6.      우체통으로 날아가는 기차/벌벌 기여가는 비행기/성큼성큼 걸어가는 기차들 7.      지구층을 절단하다. 8.      호랑이 심장으로 기차 만들고/창자로 기차길을 닦았습니다. 9.      다람쥐는 발걸음 소리로/땀을 모아 금붕어 키우고 10.  코구멍에 펌프가 고장났는가를/식도가 컴퓨터화면으로 감시를 한다 11.  산새들이 산소통을 /등에 업고 날아내린다. 12.  메추리가 벼잎군함을 타고 항행한다. 13.  바람이 찢기는 한끝에/새들이 부딪쳐 떨어진다. 14.  바위돌들은 지렁이/ 골받이에 가루가 되여 15.  바위눈에는 등불이 켜져있고 16.  글자가 삐둘삐둘 길을 닦고/길은 모양을 조각하며/소리를 낳는다. 17.  안개가 … 아가 기저귀가 된다 18.  산을 뒤흔들던 메아리 가지에/새들이 앉아 노래 부른다. 19.  심장이 열리는 대뇌 ㅡ추최에 스며들어/옹이를 박는다. 20.  산새들이 주문을 외우고 /주문의 마디마디가/푸른 잎에서 쫑쫑 뛰여내린다. 이외에도 우주핸들, 노란 폭우 같은 새로운 명사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에서 보는바와 같이 시는 언어이며 언어의 새로움이라고 해야 할 것 입니다.시가 새로운가 새롭지 못한가, 시에 창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시속에서 새로운 언어들이 나와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성하는가 못하는가에 그 중요한 기준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일상적인 언어를 어떻게 새로운 언어의 흐름으로 다듬는가 안 다듬는가는 시의 생명력이 강한가 약한가를 가늠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방산옥시인의 시언어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계발을 준다고 하겠 습니다. 곰곰히 다시 읽어보아도 새말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언어의 창출과 이미지 창출인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 니다. 1500년 전에 중국 최초의 문학개론에서 류협은 수秀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수란 작품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말을 가리킨 다…수는 한 작품안에서 여타의 다른 부분들과 비교되는 특출함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획득한다(문심조룡 155쪽) 방산옥시인의 상기한 언어조 합과 이미지는 바로 작품안에서 두드러진 말이고, 한 작품안에서 여타 의 다른 부분들과 비교되는특출함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회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방산옥시인은 2 년 남짓한 동안 시를 배우고 익힌 시인으로서 초학자라면 초학자이고 시인이라면 시인이겠습니다. 초학자라는 것은 경력이 짧아서이고 시인 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시를 썼고 쓰고 있으며 앞으로도 쓸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방산옥시인은 문학으로 말하면 이방인입니다. 의 학자가 시를 하니까요. 방시인은 자기나름대로 그 어떠한 두려움도 없 이 시의 기교에 기대여 언어를 조합하고 이미지를 만드는데 공력을 들 인 같습니다. 그래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루강아지 역을 담당하였다 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고 방시인은 시 의 본연에 들어가 시적 기교로 언어를 다듬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의 본연은 바로 이질적인 언어의 폭력적 조합과 이질적인 이 미지의 폭력조합이라고 석학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상투 적으로 써서 미안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또 씁니다.) 우에 라렬한 이미지들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이 수법은 현대시 의 기본 기교입니다. 때론 근사성을 고려한다고 할 수도 있고 대론 아 무런 근사성도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물과 사물이나 언어와 언 어를 약혼시키고 결혼시킬 때도 있습니다. 마구잡이가 되는 조합들은 얼핏 보면 란장판같지만 기실은 따지고 보면 그 련계가 간접적으로 멀 리에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사물들이 고립적으로 존재 하 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상호의 련계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 겠습니까. 련계가 직접 보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기도 합 니다. 시인은 바로 그 잘 보이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언어의 마술사라 하겠습니다. 세상사물이 변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상대적일 뿐입 니다. 방시인은 변한다는 절대성에 의거하고 주역 오행설에 의거하고 있는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한두가지만 보도록합시다. 방시인은 침모내기란 언어와 지구핸들이라는 언어를 창출하였습니다. 침모내기란 언어는 이제까지 세상에 없던 언어입니다. 침과 모내기의 합성어인데 이렇게 맞지 않는 언어를 조합하는 것이 폭력적 조합이라고 하겠습니다.그럼 어떤것을 근 거로 이런 언어를 창출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사람의 몸에 침을 꽂으면 한대한대를 꽂는 자체가 모내기와 비슷한 것입니다. 침을 여러대 놓았 습니다. 우리가 침이 꽂힌 모양을 본다고 합시다. 그 모양이 모를 낸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얼핏 보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폭력적 언어조합이 성립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우주핸들은 상기한 것과 완전히 다른 형태라고 보아집니다. 우주와 핸들은 아무런 련계 성도 없는 단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의 하나의 명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상적인 사유로는 맞니도 않 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핸들하면 달리는 자동차의 방향을 잡아 주는 방향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속에는 핸들이 있지만 우주핸들이  란 것은 없는 겁니다. 두 사물사이의 어떤 련계성도 찾아보기 힘들고 또는 찾아볼 수도 없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습적이고 돌연적 인 단어에 놀라지 않을 수 없기도 합니다. 그리고 난삽다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왜 허용되는가가 문제로 나선다고 생각합 니다. 필자는 이런 견해가 있습니다. 시는 생활의 진실이 아니라 상상의 진실, 예술의 진실입니다. 우주핸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인 것이 아니라 시인이 만들어 낸 허사입니다. 이런 허사가 시에서 존재하게 되 는 것은 시속에 존재하는 사물은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실물인 것이 아 니라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시는 어찌보면 허상의 창조라고 할 수 있겠 습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우주핸들이라는 것은 우주의 질서에 대한 상 징물이며 우주질서를 물화한 상징적 언어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추상 적인 개념을 구상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 즉 이미지라고 할 때 추상적인 사유나 추상적인 언어들을 구상화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주핸들이란 언어가 시에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보아집니다.    우에서 례를 든 중에서 이미지 폭력적 조합에 대한 것을 하나 살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산을 뒤흔들던 계곡의 메아리 가지에 /새들이 앉아 노래 부른다는 시구가 있습니다. 여기서 계곡의 메아리 가지에 새들이 앉아서 노래 부른다고 합니다. 메아리와 가지의 어울림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물이 없습니다. 없는 빈 곳에 새들이 앉아 노래 부른다고 합니다.이런것을 이미지 폭력조합이라고 필자는 말합니다. 없는 사물에 어떻게 새가 앉아 노래 부르겠습니까. 그런데 가지에 새는 앉아 노래 부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아리 가지 는 우에서처럼 근거 없는 언어조합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또 시에서는 막부득이한 경우를 내놓고는 추상적인 언어사용을 극도로 절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사물의 움직임을 똑똑히 밝혀야 하는 것이 상례이기에 메아리는 보이지 않는 청각 이미지로서 그것을 시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추상어 메아리 뒤에 구상어 가지라는 것을 붙임으로써 보이지 않던 메아리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공감각의 일종인데 청각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하 겠습니다.     성질이 다른 사물이나 성질이 다른 언어를 련결해 놓으면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여기서 언어의 탠격이 생기게 되며 언어의 밀도가 빽빽하게 되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어의 탄력에 대한 추구, 언어의 밀도에 대한 추구는 시인들이 모름지기 장악하여야 할 기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추구는 시적창의가 절로 생성되게 되는 계기이며 도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사물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는 언어입니다. 언어란 것은 사물의 상징일 뿐이지 원 사물은 아닙니다. 물과 불이 끌어안았다 하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물과 불이라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상징하는 언어를 조합시킨 것이 되겠습니다. 해석하자면 긴데 본 텍스트가 방산옥 시인의 시집에 대한  평이므로 명제만 제기하고 략 합니다.    방산옥시인은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는 하이퍼 시집을 5가지 장으 로 나누어 92수의 시를 실었는데 필자는 첫장에 것만 례를 들어 말했 습니다. 나머지 장들에도 이런 멋진 언어조합과 멋진 이미지조합들이 수두룩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아주기를 기대합니다.    방산옥시인의 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는 연변에서 두번째로 출 간되는 하이퍼 시집으로서 방순애의 하이퍼 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와 함게 연변시단에서 하이퍼 시의 쌍벽을 이룬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시평을 마치면서 방산옥시인에게 한마디만은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시언어 다듬에서 더 윤활하고 더 깐지고 더 깨끗하고 더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시는 언어의 관을 넘는 것이 근본인데 이 근본을 넘는데는 열두고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몇 고개를 넘었는가 자체로 더듬어보고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기를 바랍니다.                 2014.년 2월 중순에.
27    방순애 황금률하이퍼시 서언 /최흔 댓글:  조회:697  추천:0  2019-05-12
방순애 황금률하이퍼시 서언 최흔    서언   필자는 저으기 격동된 심정으로 방순애 두번째 시집의 서언을 쓴다. 중국조선족문림에서 첫하이퍼시집 를 출간한지 일년남짓한테 두번째로 을 출간하게 되니 가히 경하할 일이다. 이것은 시인의 령혼이 뼈를 녹이는 노력으로 이룩한 성취이다. 필자는 시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는 탐구이며 새것이며,시인은 초행길만 걷는자이다. 황금률하이퍼시!! 아마 이런 시가 고금중외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그러니까 시의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였다고 하겠다. 우리 시에는 3장6구로 된 시조가 있었고 자유시가 있었고 민조시가 있었고 가로세로 시가 있었고 지금은 새로운 시 황금률이라는 시가 있다. 황금률이라는 것이 어떤것인가?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 방시인의 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생명 선률   점 문턱 밟고간 바다의 언어   동해의 물결을 타고 이그러진 얼굴에 시간을 뿌리고 미역을 감던 돌 자연의 소용돌이에서 사랑에 물들어     2. 려명직전   어둠 빛과 리별 짝짓는 금시간 허리띠를 푼 둥근 달자궁 영원히 잦아들지 않는 빈들판의 돌담들 흐느끼는 노을을 잠재우고 지평선에 떳던 소리의 다리를   3. 악수   긴호흡 팔벌리는 심장 쿵당 방아를 찢는 목젖  대야안에서 큰 진주를 걸러내는 하루 귀벽을 후치던 말소리 튕겨나와 파다닥 거리는 가슴팍사이 골짜기에서 경련을 일으키다 주눅들어 울고있는 파란 자존심 바람에 졸린                               여운으로 빳빳해지다   시 1에서는 첫행을 한자로부터 시작하였고 시2에서는 두자를 한단위로 시작하였고 시3에서는 석자를 한단위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들은 다 1.2.3.5…의 비율을 지키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러니까 방순애의 황금율시는 자유시가 아니고 율시이다. 황금율에 맞게 시문을 배렬하면서 쓴 시이다. 이것은 방순애시 인만의 발견이며 창조이다. 우리 시림으로 말하면 하이퍼시가 새로운 형태로 대두되고 있는데 거기다 황금율이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일정한 율에 의하여  시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다는 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황금율시는 방순애 시인의 시법이고 방순애시인의 시법은 황금율하이퍼시이다. 한시인이 한 시법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첫머리에서 경하드릴 일이라고 하였고 저으기 격동된다고 하였다..   2   시간과 세상은 사라짐과 탄생의 그라프를 그리고 있다. 한쪽으로 태여나고 한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다. 이런 움직임은 법칙이라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방순애시인의 황금율하이퍼시가 바로 이런 법칙에 기대여 시를 다루어지고 있다.      아침차 검은 안경을 낀 도시를 꿰뚫어 달린다 자신을 잃는 동안 늘어나는 둥근 시줄 입마다 벌리고 합창하는 이슬꽃들 새의 노래를 두려워할까 얼음도 햇님이 다가오면 굳어진 몸 푸는데 서서히 뻗어가는 세월 이파리는  단풍에 물들지 않을가 산맥을 타고 대렬을 지은 집들은 빨간 노을 모자를 쓰고     구름은 황금빛을 반죽하여 여기저기 걸어놓아         골짜기 따라 굽이치는 안개는 산촌의 머리를 쓸어준다   시 의 전문이다. 차의 움직임은 에 의하여 밀려나있고, 은 >에 의하여 밀려나 있으며, 그것은 또 에 의하여 밀려나고, 은 또 에 의하여 밀려나고...왜 이런가? 한사물에 가리워져있었거나 파묻혀있던 사물들이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튀여나온다. 튀여나온 사물들은 원래있던 사물들과 이렇게 말한다. 한다. 구불어온 돌이 백인돌을 빼버리는 격이다. 그러면 원사물은 튀여나온 사물에게 자리를 양보하는데 실은 밀려나기이며 사라지기다. 다시 말해서 한 이미지가 밀려나고 사라지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하고 움직이고 있는것으로써 무쌍한 변화를 일으킨다. 어찌 보면 이것이 자연의 조화이며 생명체의 운동이 아니겠는가. 하이퍼시는 이렇다. 한사물의 이미지가 시의 시종에 관통되는 것이 아니라 제약을 받으며 밀려나게 되며 새로운 사물의 이미지가 나타나서 운동하게 된다.  그래서 횡적구성이며 다선구조이다. 그래서 주제가 하나인 것이 아니라 다주 제이다. 방순애시인은 주어진 사물을 현실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변형시키면서 원초적인 것을 파보고있다. , , , , 등등은 다 변형이며 그 변형들은 원초적인것을 파내여보려는 시인의 시각에 의하여 부각된다. 방순애의 황금율하이퍼시는 이질적인 이미지집합으로서 이미저리를 이룬다. 이런 이미저리들은 여러가지 형상으로  의경(意境)을 이룬다. 그 의경은 시인의 상상의 산물로서 꿈의 재현이고 나름대로 추구하는 자연의 아름답고 황홀한 극치로서 시인의 유토피아이다.   3.   한수의 시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이 생명체는 자신의 모양새가 있다. 필자는 그것을 형태이미지라고 에서 밝힌적이 있다. 방순애시인은 에서 시의 형태이미지를 가꾸기 위하여 많은 공력을 들이였다. 가로행의 시도 있을 뿐만 아니라 세로행의 시도 있으며, 대부분의 시들이 층층계를 련상시키는가 하면  산을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려 명직전, 눈, 차향 등등), 초모자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새의 천국, 쉼터. 운 등등),   공작새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내안에. 가락, 건배 등등)  수양버드나무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 (연, 오랜 세월)…   형태이미지의 다종다양함은 시각의 새로움을 추구한 것은 물론이고 시의 새로운 분위기로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하리라고 믿는다. 특히 시의 제목과는 다른 형태이미지가 설정되여서 곰곰히 새겨보면 상큼하고 신선한 맛이 짙다. 이러한 형태이미지들의 조화가 신비롭기만 하다.   방순애시인의 는 새로움의 덩어리이다. 이 덩어리는 시문림에 새로운 황금빛을 눈부시게 발산하고 있다고 하겠다.                             2014년 10월 29-30     새로운 언어들의  대행진 ㅡ방순애 윤동주문학상 수상시집 소평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한 방순애 시집 를 읽었다. 이 시집은 새로운 언어들의 대행진이다. 감동과 자극의 도가니속으로 독자를 몰아부치는 새언어들의 그림이며 교향악이다. 왜 그런가? 세가지로 해부해 보려고 한다. 첫째는 황금률의 세계를 자유로 종횡무진하고 있고, 둘째로 이미지의 생성의 세계를 들락거 리고, 세째로 객관화의 도상으로 걸어간다.   1.       황금률의 세계를 자유로이 종횡무진 한다   방순애시인은 자기 시법이 있는 시인이다. 방시인은 2015년 6월에 이란 시집을 펴낸 시인이다. 그때 이라고 필자는 서언에서 지적한 적이 있다. 그 시집에서 시인은 1,2,3,5,8,13,21,…음수률을 원형대로 붙잡는 아집으로 시를 썼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그것과는 많이 틀린다. 한수의 시에 여러가지 황금률 격식이 나타난다. 차례로 음수률을 맞추며 쓰는 것을 필연이라면 이번 시집에서는 그 음수률들을 자유롭게 뛰여다니면서 자유를 향수하고 있다. 한수의 시에 5,8,13,21의 음수률이 있는가 하면 3,5,8의 음수률이 있고, 8,13,21의 음수률이 있기도 하다. 창출되는 이미지의 수요에 따라서 음수률은 자유롭게 라렬하 고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한가지 음수률을 몇행씩 배렬하면서 시의 분위기를 새롭 게 바꾸기도 한다. 하여 시들은 동그라미 되기도 하고 삼각형이 되기도 하고 장방형이 되기도 한다. 어떤 시는 붉은 색인가 하면 어떤 시는 까만 색이고, 어떤 시는 노란 색인가 하면 어떤 시는 커피색이고, 어떤 시는 하얀 색인가 하면 어떤 시는 파란 색이다 ... 이미지들이 횡대로 줄을 서기도 하고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덩어리로 묶이면서 리좀이 되고 재령토가 되고 새세상이 되고 새우주가 된다.    2.이미지 생성의 세계를 들락거리다.   방순애시인이 창출하는 이미지는 좀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냥 새로운 곳으로 도주한다. A로 나타났다가 B로 가고,  B로 나타났다가 C로 가고, C로 나 타났다가 D로 간다. 이미지 A,B,C,D는 영어A,B,C,D처럼 순서적으로 라렬된 것이 아니다. 저마다 어떤 사물의 중간에서 채취된 찰라의 사물들 상으로서 각각 독립성을 갖고 있으며,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시적으로 련결접속 되여있다. 어느것도 원인과 결과이거나 어느것도 순서적으로 나타남이 아니고, 어느것도 사물의 경과나 성질에 얽매인 표현이 아니라  초월이며 가상이며 허구이다. A,B,C,D의 이미지들은 어느것도 중심이 아니고 죄다 겉이고 곁이고 밖이고 삽입적이고 이것저것 라렬하는 드라마의 몽타쥬기법의 시적표현이다. 이미지의 현실과 생활의 현실은 불협화이다. 방순애시인의 이미지는 생활의 반영이나 의미의 반영이 아니라 상상의 생성으로써 무의식의 반복충동이다. 언어의 마술로써 언어의 평등과 언어결합의 자유를 지향하고 있으며 세상사물의 동일성과 통일성을 예리한 눈길로 집어세우고 있다. 이미지들은 생성의 도가니를 이루면서 복사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 그린 지도이다. 이미지마다 기이하고 돌발적인 성격이 다분하여  독자들 의식에 부응되여 쾌락을 주는 독자적인 텍스트인 것이 아니라 독자의 의식에 자극을 주며 반감을 주며 떨림을 주며 향수(즉 음미하게하는)를 주는 시적이고 예술적인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공감이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가지는 시의 텍스트를 옹호하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시의 텍스트를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것이다. 방순애시인의 시는 전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에 속한다. 그것은 이미지의 생성세계를 들락거리기 때문이 원인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3.객관화의 도상을 걸어간다.   방순애시인의 는 한마디로 말하면 이미지의 생성, 생성, 또 생성이다. 생성만 쓰다나니 대아를 말할 사이가 없고 자아를 말할 사이가 없고 객관 화만이 남게 된다. 하여 이 시집은 객관화의 도상을 걸어가는 시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시는 사물을 다루는 시인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들을 다루는 방법이 시인의 의식에 맞추는가 아니면 사물자체의 운동에 맏기는가가 자못 중요하다. 시인은 사물을 방출하고 사물의 스스로의 운동에 자유를 주어야 한다. 파운드의 이나 랭보의 처럼 사물들의 변용만 있고 해석과 설명은 삼가하여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많은 세월에 시인은 자기의 의식으로 사물을 다루는 길을 걸어왔다. 방순애시인은 이런 시작법에 도전을 하고 있고 반기를 들고 있다. 방시인은 사물이 나름으로 운동하는 것을 보고 있으며 따라가며 그리고 있다. 사물운동이 끝나면 그의 이미지도 끝난다. 방시인은 사물을 자기 의사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사물 운동의 보여주기를 한다.  그의 시는 객관화의 도상을 걸어가고 있는 이미지들 집합 혹은 집성이라겠다.    재생 방순애        별똥이 불타고  있다 자라나는 어움과 싸움하는 동안 별똥들 재로 되여  빈 벌판에 내려서  새하얀 눈이 된다   뿌리 뽑힌 자리에는 무심한 바람이 채워져 빗질하고 서리맞은 시간도 환절기 모 사리 하느라 늘어져있다   백조가  검은 탈의를 벗어 버린다 알몸으로 진흙을 반죽한 비너스  알몸으로 햇빛에 머리를 감는다   바다가  신기루가 일어선다 올라선다 날아오른다 구름도 문 열고 비도 문 열고 달도 문을 열고 들어온다   중간쯤에서 아무 시나 잡히는 대로 복사한 시다. 특별해 서 뽑아낸 시가 아니다. 첫련은 별똥이 불타서 새하얀 눈이 되는 것을 쓰고, 2련 에서는 뿌리 뽑힌 자리에서 바람이 어쩌고 서리맞은 시간이 어쩌고 하는 것을 쓰고, 3련에서는 백조가 검은 탈의를 벗어버리고 햇빛에 머리를 감는 것을 쓰고, 4련에서는 바다가의 신기루 움직임을 쓰면서 구름도 비도 달도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 한다.     네가지 이미지단위에 네가지 사물이 등장하며 그 사물의 운동과  다른 사물의 운동의 조화를 쓰고 있다. 시에서 자아는 철저히 축줄된 상태이다. 가히 사물운동이 객관화의 도상을 걸어간 시라고 할 수 있겠다. 방시인의 시는 다 이렇게 사물운동을 쓰고 있을 뿐 시인의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 없다.  객관화는 제3자를 작동시켜 시를 만드는 작업으로써 객관화속에는 보이지 않는 주관화가 있다. 시는 주관의식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며 사물의 이미지로써 객관화에다 주관화를 용해시켜야 한다. 그래서 시는 상으로 말하기라 하고 시인은 뜻을 상에 기탁한다고 하겠다. 시인은 시를 만들고 시는 시인을 만든다고 한다. 방순애시인은 를 만들고, 는 방순애시인을 새롭게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우에서도 이렇게 례를 들면서 평했어야 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며 흔상해보면 번연히 알릴 것을 필자가 구태여 례를 들면서 구시렁거릴 필요가 없어서 여기서만 례를 들고 초라한 해석이라도 하였다. 필자는 방순애시인의 시집 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시집이라고 판단하며 우리 시단에 이런 시집이 더 나오기를 기대 한다..   방순애시인은 앞으로 농경언어를 좀더 삼가하면서, 같은 추상어의 중복사 용을 피면하기를 바라며,  자신 시에  한계가 올 수 있다는 경각성을 가지기를 바란다.                            2018.8.28.
중국조선족 문단의 첫 하이퍼시집             -방순애  첫 하이퍼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를 보고 최흔                         들어가는 말   필자는 흥분된 심정으로 방순애의 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를 본다. 연변의 첫 하이퍼시집이라는데 그 의미가 크다.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하이퍼시가 싹이 트기 시작한것은 아마 2006년이라고 생각된다. 그후 려순희 황정인 심예란 허옥진 박장길 김견등 시인들이 하이퍼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하겠다. 하지만 하이퍼시를 써서 시집을 낸 시인들은 아직 없었다. 하이퍼시, 다선구조로 된 이시는 지금 유령마냥 일부시인들의 시상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하겠다. 다시점, 다초점, 다주제를 가지고 있는 하퍼시가 방순애의 머리를 삼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끼까지 방시인은 간고한 려정을 거쳐 [시간은 원이 되여]를 완성하였다고 하겠다. 시인은 동시 240여수를 썼고 현대시60여수를 썼고 하이퍼시 170여수를 썼다. 오늘 시인은 하퍼시 170여수중에서 88수를 선재하여 시집을 내놓았다. 한수의 시가 그녀의 한방울의 피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88방울의 피가 오늘 독자들과 대면하게 된다. 하이퍼텍스트는 새로운 도전이며 혁신이다. 하이퍼라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여 묶은 [시간은 원이 되여]를 어떻게 읽을것인가에 대하여 필자는 나름대로 말하려고 한다     도약하는 이미지   방순애시인의 하이퍼시는 도약하는 이미지를 창출해낸것이 하나의 특점이라고 할수 있겠다. 도약을 통하여 이미지들은 분렬도 조성하고 집성도 조성하면서 한수의 시를 이룩한다고 하겠다. 시인의 시는 산문적인 필치와 운문적인 필치 두가지 형태로 쓰였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산문적인 필치로 쓴 시 한수를 보자    어떤 바위 스님되여 앉아있다 얼굴부터 새겨진 법글이 쭉 내려오고 몸의 구석진 곳들은  전설쪼각이다 마음속에서 지줄대는 이야기는 강을 따라 흘러가고 무성한 이파리 매달려있는 줄거리들 줄줄 타래진다  구름이 펜을 들고 쉬고있다 눈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입은 닫겨있다  무거운 입술을 열면 하늘중심에서 우는 천둥이 지심까지 들썩인다 작은 귀뿌리는 점점 커진다 열쇠를 가지고 떠나는 사람들 갇히운 마음을 연다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이 시는 시집의 첫수이다.  보는바와 같이 1련은 스님에 대하여 쓰고 2련에서는 구름에 대하여 쓰고 3련에서는 귀뿌리에 대하여 쓰고있다. 스님에서 구름에로 도약하고 구름에서 귀뿌리로 도약하면서 시는 마무리를 짓고있다. 련과 련사이가 큰 도약을 이룩하였을뿐만 아니라 한개련에서도 도약이 진행되고 있다. 1련에서 스님은 전설쪼각이 되는가 하면 이야기가 강물처럼 흘러가는가 하면 무성한 이파리와 줄거리가 나온다. 2련에서는 구름이 의인화되면서 여러가지 사실이 나오고 있고 3련에서는 작은 귀뿌리, 열쇠가진 사람들이 나오는가 하면 진펄에서 헤매는 발걸음이 나오고 있다. 어찌보면 시가 대잡탕으로 이루어진 감이 난다. 이미지들이 아래와 같은 특점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각련의 이미지와 이미지가 련결이 되는것이 아니라 분리되여 있고 이미지들이 각자 존재를 한다. 어느한 이미지가 다른 한 이미지의 결과이거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중심에 의하여 조직된것이 아니라 중심을 떠나고 있어서 탈중심, 무중심을 이룩하고 있다. 이미지들은 또 현실적인 사실인것이 아니라 픽션으로 되여있는 허구이며 가상현실이라고 말할수 있다. 운문으로 된 시 한수를 더보기로 하자        상아의 노래   재빛나는 바다의 아침 상아는 검은색 옷을 입고 호화로운 요트에 앉아 입술에 노래를 담고있다   멍청한 후렴은 고해의 값을 벌거벗은 자연에 치르고 현기증나는 우수를 넓은 가슴에 대고 바순다   천개의 북이 물의 정적을 깨뜨리고 하늘속의 기류 바다의 조류를 률동키안에 주어담는다   [상아의 노래]전문이다. 의인화된 상아가 검은 옷을 입고 요트놀이를 한다[1련] 2련은 일년과는 관계없는 멍청한 후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3련은 천개의 북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한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가는것을 가히 도약이라고 하거나 뜀질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가 수백년동안 써오던 시의 구성이랄가 구조랄가 하는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수백년동안 써온 시는 단선구조이다. 단선구조는 하나의 사실을 중심으로 썼다. 하지만 이시에서는 상아, 멍청한 후렴 그리고 천개의 북이 나오고 있다. 이 세가지 이미지는 종적구성을 이를수 없는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등장하는 횡적구성을 이루면서 병렬적으로 배렬되고 있다. 시인의 시적사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유의 공간이 확장된다고 하겠다. 이것은 어느한 초점에 매여있는 시인것이 아니라 시인의 절대적인 자유로운 상상의 산물의 태여남이며 움짐임으로써 시적상상의 자유분방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수 없을것이다. 하이퍼시가 다시점 다초점으로 된다는것을 이러한 수법으로 쓴 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가 하고 짚어보게 된다. 시인은 이미지와 이미지사이에 공간 혹은 간격을 주어서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는데 (. 167쪽)는 조지p.란도의 말이 떠오르게 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겠다.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   재래로 시를 쓴다면 시적계기요 서두요 발전이요 결말이요 조응이요 하는 말들을 잘 살펴보아야 했던것이다. 오늘 시의 현주소도 그런 시가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방순애시인이 쓴 시는 이런 언어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있다. 또 기, 승, 전, 결이라는 언어로 방순애시의 시를 살펴본다는것은 아마 통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방시인의 시는 이런 용어들과는 무관하다. 방시인의 시는 어떤 시인가? 방시인의 시는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라고 함이 타당할것 같다. [시간은 원이 되여]하는 시집의 시들은  이미지 토막과 토막의 배렬로서 그토막과 토막들은 시작이자 결말이고 결말이자 시작이라고 하겠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것처럼 (동상 96쪽)     원이 되여 굴러간다 원에 붙어 달리는 다리 그리고 원을 꺼꾸로 돌리는 개미들 보송보송한 구름이 땅에 내려올 때 갈고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걷는 방랑자들 모래위에 집을 짓고 텅빈 갑옷만 입고 너덜거린다 한치도 안되는 삶의 공간은 무대위에서 졸고있다 어두운 밤 잠자는 눈을 움직여본다 문자 없는 필기장에 글을 갈겨본다 환히 밝아진 벽빛을 남의 눈에 주지 말고 나에게 비춰보라 그러면 찌그러졌던 얼굴이 보름달로 변해간다 들끊는 대기는 게으른 손을 잡아준다 활기찬 발걸음은 앞을 재촉한다                                -전문   이 시는 이미지 집성으로  되여있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토막들의 모임이다. 시인은 어떤 고정된 감정으로 시를 쓰고 있는것이 아니라 열린 상상으로 이미지를 편집하고 있다겠다. 시간,원, 다리, 개미, 구름, 갈고리,방랑자, 집, 갑옷, 무대, 구름, 필기장, 벽빛, 얼굴, 손, 발걸음 등등 사물들이 독자적인 이미지로 되여 한시속에서 움직인다 한수의 시라기보다는 한수의 환상곡이라고 할수 있겠다. 이런 이미지들은 다 자기의 독립적인 토막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문덕수시인은 토막을 단위라고 함] 이 토막들은 또 시인의 배렬처럼 요렇게만 놓이는것이 없다, 누구든 자신의 상상에 의하여 바꾸어놓아도 별문제이다. 어느것이 시작 인지 어느것이 결말인지 분명치가 않다. 사실 제일 마지막행을 앞에 가져다 놓아도 무리가 아니다. 줄글로 된 2련시인데 2련을 1련으로 만들어도 무방하다.어느한 이미지나 다 앞에 있어도 되고 뒤에 있어도 되고 중간에 있어도 된다.우리가 대 사막의 가운데 서있다고 하자. 어디가 사막의 시작이고 어디가 사막이 끝인지 보이지 않을것이다. 마찬가지로 배를 타고 바다속에 서있다고 하자 사면은 수평선이다 어디가 시작 이고  어디가 끝인지 누가 알랴. 하지만 사막은 사막대로 넘치고 바다는 바다대로 넘친다. 사막에 섰다면 선자리가 사막의 끝이고 시작이라고 해도 되고, 바다에 섰다면 선자리가 바다의 끝이고 시작이라고 해도 된다. 우에서 이미 언급되였지만 하이퍼시의 이미지들은 독립적인 각자 존재이면서 한시에 집합되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이러한 시를 이미지덩어리라고 할수 있지 않을가.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나 련계없이 절대적인 고립으로만 존재하는것이 하나도 없다. 어떠한 사물이나 한가지 성분으로만 구성된 사물도 없다. 하이퍼시구성은 자연과 문화와 우리의 사유에 부합될뿐만 아니라 오늘의 글로벌시대와 컴퓨터시대에 부응하 는것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시문학력사를 소급해보면 1960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시인 SJ 생종페르스의 시도 이런 수법이였고 201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도 이러한 수법이였다. 21세기에 와서 한국의 시인들인 문덕수, 심상운, 오남구, 김규화 등 한국시단을 리드하고 있는 전위적인 많은 시인들의 시들도 이러하다. 그러니까 방순애시인은 로 우리시와 세계의 시 흐름을  접목시키고 있다겠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완전완미하다고 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직도 부족한 점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폭력적 조합으로 된 이미지의  산재   방순애시의 이미지창출은 예측불가능이다. 한이미지로부터 파생되여 나오는 이미지도 그러하거니와 이미지와 이미지 링크도 느닷없이 새롭게도 돌발적으로  기이하고도 괴상하게 산출되고 있다겠다 하이퍼시의 언어로 명명해 본다면 알렉스이다.     여기서   돌은 하늘이 버렸을 때 침묵의 깃발을 든다 갈대숲은 겨울의 어둠속에서 하얀불을 지펴 자기를 지킨다 울창한 숲과 새들 그리고 나의 집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달은 구름속으로 숨어버린다 창백한 손은 이곳에서 떠다니는 거품을 거둬내고 무지개의 현에 맞춰 밤의 찬가를 부른다 날개가 없고 얼굴이 없어도 심연의 사색은 새벽 입김위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   >는 이 시집의 마지막 시다. 는 마지막 시의 첫구다. 모순되는 언어들의 집합이다. 의미가 심장하다. 하늘이 언제는 돌을 품고있었는데 버렸다는것이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증명할 어떠한 과학가도 고대학자도 없을것이다. 시인이 창출한 이미 지는  그로데스크하여 기이하고 괴상한  발상이라고 아니 할수 없다. 이 말을 풀이해 보면 하늘이 돌을 버렸다는것이다. 이 허구는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이라고 할수있 다 .하지만 너무 폭력적으로 조합했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아래 시구도 그렇다 갈대숲이 하얀 불을 켜고 겨울이면 자기를 지킨다고 한다. 갈대꽃을 불로 전의시켰음이 확연하다. 그런데 이 불은 불이 아니다. 불이면 갈대가 다 타버릴것이 아닌가. 모순 어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창백한 손은 , 등등 이러한 이미지조합들은 의미를 전달하려는 일상적인 사유로서는 맞지도 않는 말들의 조합으로서 폭력적으로 강압적으로 억지로 주어맞춘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이야 말로 시구를 새롭게 하고 시를 새롭게 하는 현대시의 데크놀로지 이 다..    다시는 펴지지 않는 잔디들 자갈이 깔린 울퉁불퉁한 길이 놓여있다 세상 파도는 닫혀진 막을 열고 깊은 곳에 닻을 내린다 새로운 고뇌보따리는 새끼를 꼬고 밤거리 모퉁이를 지나 차도를 넘어 등에 착 달라붙는다                          에서   심장이 톡톡거리며 멈출줄 모른다 대굴대굴 굴러가며 돌아가는 빛은 시계속으로 들어가고 달빛에 용해된 몸은 도시로 들어간다 가고있는 발길에 말랑말랑한 물방울이 달린다                       에서    파란 하늘에 둥둥 달려있는 커다란 바위덩이위에 번화한 도시가 앉아있다        읽혀지는바와 같은 폭력적으로 창조된 이런 이미지들은 방순애시의 도처에 심심찮게 산재해 있다. .(에서) >(에서) ()   선형적인 언어에 대한 일탈과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창조로 되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언어의 흐름을 새롭게 할뿐만 아니라 현실문법을 파괴하는 빛이 찬란하다고 해야 하리라. 시는 언제나 낡은것을 밀어내고 새것을 떠올리는 언어의 화살을 날림일것 이다. 이런 새로운 언어화살을 날리는것이 없다면 시의 창의성을 무엇으로 말할수 있겠는가. 이러한 언어로 된 이미지 창출이 많을수록 읽어보는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 를 보여줄수 있는것이다. 시인만이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가 없는 시들은 왕가물속의 풀잎처럼 나부라져 맥을 추지 못할것이다. 이러한것들은 언어의 폭력적조합이나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언어의 폭력적조합이나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은 현대시의 문턱이라고 할수 있다. 이 문턱을 넘어서야 현대시에 입문했다고 할수 있으며 하이퍼시에 도착할 가능성이  있는것이다. 이 문턱은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다. 언어연금술을 장악하면 이 문턱은 낮은것이요 언어연금술을 장악 하지 못하면 이 문턱은 높아지는것이다. 이 문턱은 다리가 길어서 넘어가는 문턱이 아니고 키가 커서 넘어가는 문턱도 아니고 시를 오래 썼다하여 절로 넘어가는 문턱도 아니다. 시적예술에 대한 피타는 노력과 새로운 탐구만이 이 문턱을 넘어서게 할것이다.  방순애시인은 이 문턱을 넘은것 같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창의성이 강하고 다채롭고 상상이 포만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시인은 언제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며 자유롭게 풀의 세포속에도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고 우주의 해나 달속으로도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행운아일것이다.         나오는 말     우리가 걸어온 시문학의 길은 대개 이러하다고 할수 있겠다. 해방이 되여서부터 문화혁명까지 대아를 내세우는 시를 썼고, 개혁개방후에는 자아를 내세우는 시를 썼다겠다.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으며 우리의 시인들중 현실시풍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시인들이 무아의 시문학을 추구하고 있다. 무아의 시를 추구하는것은 지금은 시내물처럼 조잘대지만 앞으로는 대하로 굽이 칠것이다 시내물처럼 조잘대고 있는 시가 하이퍼시가 아닐가. 방순애의 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는 하이퍼시로서  우리 시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는 시의 다선구조로 단선구조를 대체하였고, 객관이미지로 시인의 독백을 대체하였고,  사물을 변형 시키고 변현물의 움직임으로 설명과 해설을 대체하였고,  이미지의 편집자 자격으로 시에서의 자아를 축출하였다. 고정된 관념에서 일탈하여 무한한 상상을 펼치는 방순애의 시는 읽고 생각하던 시로부터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의 전의를 꾀한것 같다 애기가 금방 태여나면 눈도 뜨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나날이 자라고 커가면서 어른으로 되기 마련이다. 하이퍼시도 지금은 갓 태 여난 한 아기에 불과하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이 아기는 눈눈을 뜰것이며 말을 할것이며 힘차게 달아다닐것이며 싱싱한어른으로 자라날것이다. 방순애시인에게 아직도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는 추상성을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때가 간혹 보인다. 시간의 흐름을 령혼에서 맛 보고(나비) 내부에서 일어나는 순간순간을 피부에 입력한다(마음의 그림) 몽상도 좋고 환상도 좋다 (감초의 그림자) 가는 가을날 잡고/가슴에 남은 말을 건네려고 하는데/그리움만 우두커니 세워놓고(서쪽달) 이러한 시구들은 형상성보다 추상성이 짙어서 머리에 영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희미하게 떠오른다. 앞으로 극복할바라고 생각한다. 시구는 사물운동의 세부를 섬세하게 그릴수록 그 힘이 더 강해진다. 추상적 언어라렬의 멋진 말은 시에 손색을 주기가 일수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에 류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빈퉁재는 소리는 잘 나지만 속에 든것이 없는것과 같다. 쌀이 골독한 퉁재를 두드리면 소리는 잘 나지 않지만 속에는 쌀알이 가득 차있어 좋은것 이다. 방순애시인은 또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하고 더 다채롭게 쓰겠는가를 연구하여야 하며 그 연구를 시적으로 표현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방순애시인의 새로운 정진을 기대하면서.                                     2013년 5월 8일 서재에서
25    다선 ㅡ 다양체의 시에 대하여 ㅡ한춘시에 대한 탐구 /최흔 댓글:  조회:575  추천:0  2019-05-07
한춘시평.1   다선 ㅡ 다양체의 시에 대하여 ㅡ한춘시에 대한 탐구 /최흔                     한춘은 1990년 4월에 첫시집 “주소없는 편지”를 남기였고, 2003년에는 “무지개는 뿌리내릴 곳을 찾는다” 펴내였고, 2013년에 3월에 “높은 가지끝에 달린 까치둥지”를 출간한 시인이다. 그로 말하면 시집 세권이란 많은 수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집 세권이 중국조선족시단에 획을 끄은 이쁜 시집이다. 시인의 생전에 사람들은 그의 시를 몽롱시 난해시라고 몰아부치면서 타매도 많이 하였다. 독자들 말이 맞았다. 그의 시는 몽롱시 난해시였다. 그런데 몽롱시 난해시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그 한가지는 그의 시는 계몽이 드러난 시가 아닌 현대시였고, 다른 한가지는 많은 독자(필자도 포함)들이 시를 무엇을 위해 복무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였고, 더욱 중요한 것은 현대시란 어떤 시인가 하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쓴 것도 알아보지 못하던 당년에 여러가지 이미지로 시를 쓰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체에 속하는 것이였다. 시인자신은 이미지로 시를 쓴다고 하였고 자신은 주지주의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지로 시를 쓴다는 것은 맞는 말이였지만 그의 시는 주지주의를 넘어서는 때가 많았다. 다시 말하면 주지주의는 모더니즘이고 주지주의를 넘어선 시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한춘의 적지않는 시가 단선구조인 것이 아니라 다선구조였기 때문이였고 다양체였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선구조로 된 시들은 “주소없는 폊지”에서는 (12) (15) (22) (23)등등 많은 시들이고, “무지개는 뿌리내릴 곳을 찾는다”에서는 (그리움) (기타소리) (십년고독) (간단한 진실) 등등 많은 시들이고, “높은 가지끝에 달린 까치둥지”에서는 (무제18) (21세기 심우도(21)) (심야명상 (7)) (두견화) 등등 많고많다. 필자는 본 평론에서 한춘시의 다양체에 대하여 말하고저 한다. 아래에 한수의 시로써 구체적으로 살펴보려한다.   더위에 지지는 베짱이 울음소리, 목표는 박수소리가 아니라오. 해살과 록음사이, 암석과 강물사이, 초가삼간과 고속도로사이. 절벽과 바다사이… 모든 계절풍이 동쪽으로 불어요.   자꾸만 회답을 기다린다는것은 자꾸만 생명을 소비한다는 것이지만 맘속의 해살 한아름 건사한다는것은 생명이 진해도 빛보일 씨앗을 영그는 작업이라는것을 주해달지 않아도 알겠지요.   송화강대교 가로등에 물들은 붉은 구름이 이마를 스쳐가는 6층집 한칸에 한밤이 지새도록 어둠을 밀어내는 등불이 보이거든 살풋이 눈을 감아도 좋아요.   올빼미의 피빛 울음은 행복을 절단하여 절반은 몸에 걸치고 절반은 마음에 심어놓고 에이즈병이 무섭지 않다는 선언, 수리개만 하늘의 적자인것이 아니라요.   이 시는 “주소없는 편지(63)”의 전문이다. 벌써 1990년도 시집에 이런 시가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 이 시집은 개혁개방후부터 1990년도까지 쓴 시들을 추려서 묶은 시집일 것이다. 그러니 한춘은 언녕부터 이런 시를 썼다고 생각한다.  그때 저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이런 시를 볼줄 모르는 청맹과니였다고 생각되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런 시를 볼줄 모르는 시인이나 평론가가 한두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의 시마당에는 이런 시가 많고도 많다. 그의 이런 시구성은 대개 이런 횡적구성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이런 시를 다선시 혹은 다양체시라고 부른다. 우선 각련이 각각 한개 내용이라고 할수 있다. 그 내용들은 서로 련계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고 있다. 첫련은 더욱 세세하게 분리되고 있다. 련결이 아니라 분리되여 있기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쓰고 있는가를 가려내기 쉽지 않다. 네개의 련으로 구성된 이 시는  이미지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것이 차요하다는 것이 없다. 높이로 말하면 똑같은 높이이고, 인격으로 말하면 똑같은 인격이고, 급으로 말하면 똑같은 급니다. 어느것도 중심이라는 것이 없다. 다 변두리이고 겉이고 곁이다. 이런 시를 다양체라고 한다. 이런 다양체로 하여 이 시는 현대시인 것이 아니라 후기현대주의시이며 하이퍼시다.   필자의 졸견으로는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이 시는 시간과 공간이동이 강하다. 이 시에서 처음에는 사물과 사물사이를 라렬하였고,  어떤 회답에 대한 것을 썼고. 그담에는 송화강 대교에 대한 것을 썼고 그담에는 올빼미의 피빛울음에 대한 것을 썼다. 시를 한사물에 모를 박고 쓴것이 아니라 시의 사물(이미지)이 자꾸 딴것으로 바뀌며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 시간과 공간의 확장은 어떤 근거나 어떤 원인으로 련계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의 령혼에 떠오르는 상상적 형상이다. 상상은 언제나 자유롭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누구네 헛간을 생각할수도 있고, 어느 산을 생각할수도 있고, 어느 강물의 파도를 생각할수도 있고, 어느 남자나 녀자를 생각할 수도 있고, 범이나 나무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춘의 시는 이런 자유스러운 생각으로 시의 시간과 공간을 스스럼없이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를 생각하게 되며, 한수의 시에서 그런 여러가지 상상을 쓰는 것은 시인의 사유와 자유가 아니겠는가. 상상으로 성질이 완연히 다른 여러가지 사물을 떠올리며 시를 쓰지 못한다는 제한은 없는 것이다.   한수의 시에서 여러가지 사물을 떠올리는 것을 필자는 령토화 탈령토와 재령토화라고 생각한다. 한 이미지를 령토라고 한다면 그 령토는 무수한 다른 령토와 련결도거나 결합될 수 있는 문을 열어놓고 있다고 하겠다. 그 문으로는 어떠한 사물(이질적 인)이나 다 들어올 수 있으며 들어와서 원래의 령토와 련합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세상사물은 모두 음과 양이라는 동일성으로 구성되였으며 한사물속에는 우주의 사물 모두가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음과 양은 조건에 따라 서로 대방과 바뀌기도 한다. 남자가 녀자로 될 수도 있고 녀자가 남자로 될수도 있다. 나무가 뱀으로 될수도 있고, 강물이 산악으로 될 수도 있고, 하늘이 땅으로 될수도 있고, 땅이 하늘로 될수도 있다. 이것이 철학의 변증법이자 시의 변증법이다.  변증법에 부합되는 “주소없는 편지(63)”는 이 도리를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주소없는 편지(63)”은 이것저것 쓴 가작이다. 현대시의 사유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수법이다. 사물들은 계속 도주하고 있으며 뒤에 나온 사물은 앞의 사물을 밀어버리기도 하고 대체하기도 한다. 각련과 련사이가 그럴뿐만 아니라 첫련은 그밀도가 더 빼다. 밀면서 련합되고 대체된다. 처음에는 베짱이 울음소리와 박수(이질적인 사물임)를 결박시켰고, 그담에는 해살과 록음이 베짱이와 울음소리를 밀어내고 자기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그담에는 암석과 강물사이가 해살과 록음을 밀어내고 앞자리를 차지하고. 그담에는 초가삼간과 고속도로, 그담에는 절벽과 바다사이가 나타난다. 우리는 이런 시의 수법에서 적어도 시인의 사유의 자유률과 여울진 숨결의 맥박을 들을 수 있고 보아낼수 있다.   “주소없는 편지(63)”은 이색적인 이미지로 이루어진 이미저리라고 말할수 있다. 이미저리란 색갈과 모양이 다른 이질적인 사물들의 집합이다. 시를 약탕관이라고 한다면 약탕관 속에는 여러가지 약재가 있어야 한다. 시를 읽어보면 우리는 “주소없는 편지(63)”에서 여러가지 약재를 닳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베짱이 울음소리가 있는가 하면 박수소리도 있고 회답이 있는가 하면 송화강 대교도 있고 올빼미도 있다… 이런 수법은 하나의 사물을 보고 쓰는 재래식과는 틀린다. 수십년, 수백년을 써오던 재래식틀을 파괴하고  새로운 식으로 쓴 것이라고 하겠다. 파괴속에는 건설이 있고, 건설속에는 새로운 시풍이 있고, 새로운 질서가 있는 것이다. 시인의 파괴와 건설은 일상적인 상상을 뛰여넘는 출기불의(出其不意)이다. 왕청같고 엉뚱한 이미지 출현으로 하여 독자는 다음을 예측할수 없어 강타를 당하며 강타에서 오는 떨림을 받게 되며 혼돈을 느끼면서도 매혹되게 된다.   시는 대개 세가지 류형으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시, 현대주의시 (모더니즘), 후기현대주의시(포스트모더니즘)로. 계몽주의시는 봉건사회에서 쓰던 수법이고 모더니즘시는 근대주의에서 쓰는 수법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다국화시대, 세계화해주의 시대에 쓰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는 전자시대 ㅡ컴퓨터시대의 산물이다.  한춘시는 필자의 견해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시라고 할 수 있다. 때론 모더니즘 수법으로, 때론 포스트 모더니즘수법으로 씌여지고, 때론 이량자의 혼합으로 씌여졌다고 하겠다. “내”자가 들어가고 나의 정서를 말한 것은 모더니즘류형에 속하고 내나 나의 정서가 없이 여러가지 사물들 관계로만 엮은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류형(례하면 )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의 모더니즘시들은 읽으면서 생각하면 무엇을 쓴 것이 알리지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쓴 시들은 한두번 읽어봐서는 무엇을 썼는지 알리지 않는다.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자아를 바탕으로 쓰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무아를 바탕으로 쓰기때 문이다. 자아를 바탕으로 쓴 시는 일반적으로 이미지 하나를 둘러싸고 쓰게 되고, 무아를 바탕으로 쓴 시는 일반적으로 성질이 다른 이미지를 라렬집성하면서 다양체를 구성하게 된다. 이 량자를 다른 말로 하면 의식과 무의식의 차연이라고 하겠다. 의식으로 쓴 모더니즘시는 일정한 한계가 있고 일정한 주제가 있지만 무의식으로 쓴 포스트모더니즘시는 한계가 무한하고 풀이도 각자의 나름에 따라 다르게 된다. 모더니즘시는 하나의 주제를 둘러싸고 쓰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이미지단위마다 다른 주제를 지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절대적으로 소통을 위한 시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언어를 위한 시라고 말해야 할것이다. 풀이에서도 C가 고추라면 고추일수도 있고, N가 마늘이라면 마늘일수도 있고, D가 비행기라면 비행기일 수도 있다. 시에 대한 리해능력의 차이로 해석에도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하이퍼시도 포스트모더니즘 계렬이다. 소통과 언어 문제에 대하여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  말해보려고 한다.   많은 지적과 량해를 바라면서 각필한다.    2018.11.7 ㅡ
하이퍼 그리고 언어의 자유와 상 ㅡ한춘시집 소감 / 최흔 한춘은 우리 현대시의 기수이다. (이하 로 략함)는 그의 마지막 시집이며 그가 추구한 하이퍼시의 정수가 집결되여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집은 우리들이 배울바가 많은데 필자는 오늘 세가지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저 한다.   첫째. 하이퍼시기법을 중심으로   는 하이퍼시기법을 중심으로 한 시집이다. 하이퍼란 우리 말로 하면 강대하다는 뜻이다. 하이퍼시란 횡적구성으로 되는 시를 말하며, 이미지와 이미지가 련결되기보다는 차원이 다른것으로 된 시를 말하겠다. 하이퍼시라는 말은 영어권에서 온것이지만 그뿌리가 중국에 있다. 8세기 시인 맹호연으로부터 오늘의 뻬이도 쑤팅등 시인들에게 이르기까지 중국의 유명한 시인들은 횡적구성의 시를 쓰지 않은 시인들이 없었다. 중국사범대학 문학박사이며 한국의 외국어대학의 교수인 허세욱선생이 집필한 과 (상하)을 보면 하이퍼시가 중국시문학의 한개 굵직한 산맥을 이루어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하이퍼시를 서양시로만 보는것은 어불성설이다. 아래에 한춘시를 구체적으로 보기로 하자.   돌샘을 쫓아날고있다 연회색 구제비의 깃털은 봇나무 가지새를 쫓아 순은의 비늘이 번쩍이고 어느 가시덩굴속에 숨어 날름거리는 살모사의 혀   서리발 쓰러진 들국화의 마른 잎에 목숨으로 얼룩진 년륜 수리개 한마리 허공을 돌며 산림의 안정을 지켜볼 때 늑대의 울음소리도 없다   서천하늘 한끝에서 쭈욱 한일자 그으며 추락하는 별찌를 쫓아 시인은 풍령(风铃)을 흔들며 한밤중 홀로 단좌하고 때묻은 시첩을 뒤척인다    이시는 2008년 6월 15일에 쓴 시로서 의 심야명상에 오른 시이다. 1련에서 주요하게 시내물을 따라 날아다니는 제비와 가시덤불속에 숨어 혀를 날름거리는 뱀을 쓰고있다. 제비와 뱀은 서로 이질적인 사물이라는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수 있는것이다. 2련에서는 들국화, 수리개, 늑대등 세가지 사물이 등장하는데 이런 사물들이 차원이 다른 사물이라는것도 다 알수있는 우리들이다. 3련에서는 서천에서 추락하는 별찌와 바람의 종소리를 울리는 시인이 홀로 앉아 시첩을 뒤지는것을 쓰고있다. 보는바와 같이 이러한 사물들은 어느 사물이나 다른 사물의 산생이나 움직임이 원인이나 결과가 되는 사물들이 아니라 각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이다. 그것들은 한수의 시에 횡적으로 존재하면서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현대시란 종적구성을 말하고 하이퍼시란 횡적구성을 말하는 시이다. 한춘은 어느때부터 횡적구성을 썼는가? 에서 보면 그가 2004년부터 횡적구성에 집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알린다. 그것은 시집의 7쪽에 실린 가 증명해 주고있다.   무제(9)   또 눈이 내린다 설야의 라목이 주인이란다 높은 가지끝에 까치둥지 하나 계절의 유표한 맺음표 하나   배낭은 그러나 비여있었다 방안은 그러나 랭랭하다 사지는 그러나 지긋하다   유리는 있으나 없으나 뒤면은 똑같이 보인다 눈 덮힌 들녁한끝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열린다   그러나 또 눈이 내린다 2004년 12월 17일   1련에서는 눈이 내리는 속에 있는 까지둥지를 쓰고, 2련에서는 배낭, 방안, 사람의 팔다리 사지를 쓰고있고, 3련에서는 유리와 내가 갈 길을 쓰고있다. 마지막련은 1련과 조응시키는 수법으로 또 눈이 내리는것을 쓰고있다. 보는바와 같이 각련의 이미지들이 완연히 다른 사물들의 이미지이다. 2련은 련속적인 이미지변화를 쓴것인데 이런 것을 렉시아라고 한다. 한춘의 에는 하이퍼시가 시집의 지천에 널려있다고 할수있다. 필자도 처음 읽었을 때는 몇수가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여러번 읽으면서 자세히 분석해보니 의 기본 구성이 하이퍼시구성이라는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첫마당의 무제편만 례를 들어도  9, 13, 16. 19, 20, 21…이 당당한 하이퍼시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시집을 탈고하는  한춘의 마지막말은 정채롭다.  이란 제목부터가 주목을 돌릴 필요가 있다. 우선 시 쓰는 일은 홀로 향락을 키우는 일이라고 한다. 홀로 향락을 키운다는 말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홀로란 자기만이란 말이다. 향락이란  의미심장하다. 시는 쾌락의 텍스트와 향락의 텍스트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쾌락의 텍스트는 즐거움을 주는것으로서 일상적으로 사람들의 알만한것을 말하는 시인 반면에 향락의 텍스트란 것은 몽롱하여 독자의 일상적인 사유를 충격하여 독자의 취미, 가치관. 기억등을 교란시킴으로써 반복적으로 음미하여야 그 시에 접근할수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춘시는 쾌락의 텍스트에 속하기보다 향락의 텍스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춘의 이 말은 너무 하는것이 아닌가? 아니다. 한춘은 시공이 막 헝클어진다고 하는데 시간과 공간이 자꾸 바뀐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은 시속에서 사물들이 자꾸 바뀌여 나온다는 말이겠다. 그래서 사물들이 형체를 변형시키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서 의식하지 못했던 언어들이 잠에서 깨여다 퉁당퉁당 뇌리를 친다고 한다. 겨울에도 봄날의 노래가 들리고 사랑의 장미가 울분을 토한다고 한다. 그리고 거룩한 말씀, 이제까지 진리하고 생각했던 말씀들이 락엽처럼 되여 하수구로 빨려들어간다고 한다. 이 말자체가 자기의 시가 하이퍼시라는것을 긍정하는 말이 된다. 현대시인이며 하이퍼시인인 한춘의 이 말은 어째서 새로운것이며, 어째서 뜻이 깊은 말인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잘 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한춘은 하이퍼시에 대하여 계통적인 인식이 부족했던 시인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하이퍼시를 많이 썼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시를 잘 쓰면 자연적으로 하이퍼시를 쓰게 된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을 같다. 왜냐하면 한춘도 그랬거니와 우리 시인 모두가 하이퍼시라는 명제는 몰랐지만 다다소소하게 하이퍼시를 썼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이퍼시를 너무 신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 많은 시인들은 수백년동안 종적구성으로 시를 썼고 그것만이 전통인가고 착각하였다. 이제는 횡적구성으로 시를 써볼 때가 되였다. 에 있는 많은 시들은 횡적구성으로 시를 쓴 한 본보기라고 생각된다.               둘째. 언어의 자유세계   언어의 나라에는 중앙정부가 없고 왕이 없고 법이 없고 언어마다 일률로 평등하다. 그래서 언어들은 그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자유로이 결합될수 있다. 이것이 언어의 속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무라는 한가지 사물을 생각하자. 나무라는 언어는 나무의 이미지를 떠올릴뿐이지 나무 그 자체가 아니다. 자연의 나무는 나무이지만 문자로 표현된 나무는 실제나무와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다. 량자는 완전히 다른 사물이다. 산에 나무는 나무지만 글로 써놓은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글인것이다. 시를 쓴다는것은 글을 쓰는것으로서 사물의 명칭은 실제사물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사물의 상징어를 말하는것이다. 몇가지 경우를 살펴보자. 첫째 명사와 명사의 자유로운 결합 즉  나무라는 명사와 다른 명사들은 자유로이 결합할수있다. 나무강철, 나무산, 나무강. 나무무지개, 나무발, 나무기차, 나무개, 나무나비, 나무지렁이. 나무사람….. 명사와 명사들은 이렇게 자유로이 어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다음으로 동사와 나무를 어울려보자. 나무가 잔다. 나무가 뛴다. 나무가 노래부른다. 나무가 춤을 춘다. 나무가 성을 낸다. 나무가 영화를 찍는다. 나무가 어슬렁어슬렁, 나무가 빵빵 터진다. 보는바와 같이 어색한것이 없다. 다음으로 형용사와 결합해보자 나무가 아름답다. 나무가 작달막하다. 나무가 찬란하다. 나무가 분홍색이다…. 읽히는 바와같이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모든 부사와도 어울려도 마찬가지다. 한춘은 에서 언어의 이런 자유평등적 어울림을 많이 구사하고 있다.    청동색 그림자아래 다리쉼하며/첫째마당 계절의 배란기/올굳은 해살이 /아직도 출렁이고있을가/ 2쪽 별들도 요란히 /무너지다/3쪽 고독만이 서있는 절벽/4 잠언 메시지 한토막/ 절따말을 타고 왔다./9 다람쥐는 / 오늘저녁 돌덩이를 다 삼키고/ 모든 두려움을 다 버렸다./15 녹 쓴 청동색 그늘아래/17 구름우에 떠가는 헌신짝/20     이러한 언어조합들은 언어가 자유로이 결합된다는 언어의 속성에 의하여 묶어진것들이다. 어떤 언어조합은 낯설고 어떤 언어조합은 환상적이고 어떤 언어조합은 환각적이다. 시인은 언어련금사라고 한다. 바로 이런 자유로운 언어조합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랴. 어떤 이들은 이런 새로운 언어조합을 생경하다고 하는데 실제는 시에서 말하는 생경한 언어라는 것은 보이는대로 느끼는 대로 있는 그대로를 쓰는 언어들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시인은 한민족의 언어를 발전시켜 먼 후날에도 그것이 색이 바래지 않고 가치를 산생하여 그 민족의 언어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언어를 창출하는 사람이다. 시는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전의 둔갑시키는 언어를 추구하게 된다. 한언어를 다른 언어로 둔갑시킨다는것은 문학가들, 특히는 시인들의 특권이며, 의무라고 할수있다. 한수의 시에서 적어도 한두가지 사물들의 둔갑이 보여야 새맛이 나게 되고 시의 공간과 시간의 확장을 보여주게 되는것이다. 한춘은 에서 이러한 언어수법을 기용하여 광범위하게 시적공간과 시간을 확장하고 있다고 하겠있다.     민들레의 알맹이는 별우에 떠도는 얼굴/24 펄럭이는 어둠자락/24 거미줄이 세월을 녹인다/27 아침이슬과 흘레질을 할지니/30 눈물처럼 매달린 까치둥지에/ 긴 퉁소소리 내려앉는다/33 갑자기 입을 연 바람/37 풀리지 않던 매듭과 가지를/ 하나 둘 다듬질해놓은 아침/38 밤비가… 귀먹은 바람을 두드린다/50 그어떤 바람도 /삽질할수 있단다/109 잘 익은/ 욕망 한덩이/기발처럼 날린다/125   상기한 열가지 례들이 모두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변하거나 한 사실이 다른 사실로 변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자기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겠다. 시의 의미란 새로운 언어변형으로 이루어진 그자체라고 할수 있다. 한가지만 살펴보자 바람을 삽질한다는 언어는 아마 누구도 써보지 못한 언어라고 하겠다. 삽은 땅같은 것을 파헤치는 공구이다. 바람을 삽질한다는 것은 바람이 땅이나 쓰레기장이 되였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언어들을 음미하고 새겨보게 되면 한춘시어의 새로움이 알리게 된다. 이것은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작업인것이다. 즉 언어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여 시를 쓴다는 말이 되겠다. 또 우리가 일상적인 언어를 다시 갈고 닦아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언어로 만들었을 때 그 언어는 시어로 되는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무튼 언어에는 성역이 따로 없다. 언어자체는 어떠한 다른 언어와도 무람없이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춘시인이 쓴 이러한 언어기교를 잘 습득할 과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기성언어의 허물을 벗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성언어의 허물을 벗기면  새로운 나비나 잠자리!   새로운 나무나 풀! 새로운 호랑이나 사슴!   새로운 개구리나 시내물! 새로운 새나 꽃들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세째. 상, 사물 및 기타   공자가 말했다. 성인은 뜻을 상을 만들어 표현한다. 류협이 말했다. 시는 심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시란 새로운 상(이미지)을 만드는 일이다. 상이란 사물을 지칭하는 언어이다. 상이란 현실적인 사물을 표현한것이 아니라 변형으로 사물을 표현한 추상적인 텍스트이다. 시로 상을 만들어 뜻을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이다. 우리는 이 전통을 떠나지 말아야 하며 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어떻게 하는것이 전통을 계승하는것인가? 시에서 심상이 핵심이라는 것을 버리지 말아야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전통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하는가? 새로운 상(즉 이미지)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금중외에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상을, 시인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종합해 말하면 사물들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 한춘시인은 우리들에게 한 본보기를 제공하였다고 할수 있다. 시를 례로 말해보자.   애기의 첫울음처럼 요란하게 터지던 꽃망울(1) 한로의 음절너머 바줄을 놓쳐버린 코스모스(2) 숨차게 달려온 그 길에 눈부시게 세워놓은 기발(3) 그 아래서 외우던 영어단어 한점의 나비되였는데 돛배우에 기발이 되였는데(4) 서리우에 달빛이 비끼는 밤 기러기는 남으로 날아간다(5)   2010년 9월 16일에 쓴  시(세한도 (2))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다섯개의 이미지군으로 이루어진 시는 다섯가지 사물들의 움직임으로 씌여있다. (1)에서 이란것은 처녀작이 발표라 해도 좋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기쁨을 말한 것이래도 좋다. (2)에서 란 언어가 정채로운데 활짝 피였던 코스모스가 죽어간다는 의미를 표현하였고, 그것으로 사물의 생성과 죽음을 말하였다고 할수 있겠고 나이 든 자신을 표현하였다고 할수 있겠다. (3)에서는 이란것은 코스모스가 찬란히 피여났더란 의미도 있고, 시인으로서 이룩한 자신의 성과를 긍정하고 있다는 의미도 되겠다. (4)에서는 자기가 외우던 영어단어가 나비되고 돛배의 기발이 되였다고 하는데 아주 훌륭한 변형을 이룩한 것이다. 우리는 이 변형에 초점을 모을 필요가 있다. 영어단어가 나비되고 기발이 된다는 말은 사물의 어떤 비슷함으로 변형을 도출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의적인 것으로 새로운 상을 창출하고 있다겠다. 바로 이렇게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않고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둔갑시키는 것이 우리시의 전통이라 는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된다. 란 거시적으로 말하면 외국의 새로움을 말한것이고, 미시적으로 말하면 현대시를 말하는 것이겠고 나비와 돛배의 기발이 되였다는것은 외국의 좋은 것을 따라배우니 아름다움이 생기였고 새로운 출발이나 성과를 이룩하였다는 의미겠다. (4)에서 이미지적으로 새로움이 날카롭게  표현되지 않았으나  뜻을 표현하는데는 모자람이 없다. 시인은 자기가 나이들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애상으로 젖어있다. 앞길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있었는지도 모른다. 는 자아의 시인것이 아니라 무아의 시다. 왜 무아라 보게 되는가? 시에는 나라는, 혹은 자아의 감정발로가 없다. 있다면 한마디 한마디가 있다. 나머지는 객관사물들의 존재와 사물들의 새로운 관계 그리고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가 있을뿐이다. 시인은 내가 없이 나를 관조해보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는 자신의 시창작이나 인생에 대한 시인의 반추이며 성찰이라고 할수 있겠다. 총적으로 시는 심상(즉 이미지)을 만드는 일이며 심상으로 뜻을 표현하는 일이란 것을  시사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상으로 뜻을 말하지 않고, 감정이나 주제를 토로하는 것을 류협은 골수가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상을 만들어 뜻을 표현한다는 것은, 상에 기대여 창작한다는 것은 우리시의 전통의 핵심이며, 시본연이 무엇인가를 똑똑하게 알려주는 명구이다. 이 명구를  우리들 머리에 각인시켜야 할뿐만 아니라 시창작에서 꼭 지켜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작법이라해도 좋을 것이다! 한춘시인은 개혁개방초기에 현대시의 기수로 우리 시단을 리드한 전위적인 시인이였고, 첫시집 “주소없는 편지” 때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하이퍼시를 쓴 시인으로서 하이퍼시의 보귀한 경험을 남긴 한 시인이였다는 것을 시집을 통하여 증명하였다고 생각한다.               2016.5.12.
한춘시평1 한춘시의 사물에 대한 리해 ㅡ의 소평 /최흔                 한춘시인은 개혁개방후에 는 기발을 들고 우리 시단의 앞장에서 현대시의 혈로를 줄기차게 달려온 선두주자다. 그는 열렬한 현대시의 창작자였고 열렬한 현장평론 가였다.(아래는 까치둥지로 략함)는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내놓은 시집이다.   . 1.   한춘시의 기둥수법   애기의 첫울음처럼 요란하게 터지던 꽃망울 한로의 음절너머 바줄을 놓쳐버린 코스모스 숨차게 달려온 그 길에 눈부시게 세워놓은 기발 그아래에서 외우던 영어단어 한나절 나비 되였는데 돛배우에 기발이 되였는데 서리우에 달빛이 비끼는 밤 기러기는 남으로 날아간다.   이 시는 세한도(2)에 실린 2010년 9월 16일 작이다.시속에서 사물들이 강렬하게 태여나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다. 애기, 꽃망울, 바줄, 코스모스, 길, 기발, 영어단어, 나비, 돛배, 서리, 달빛, 밤, 기러기 등 시각적인 사물이 있는가 하면, 첫울음,  음절 등 청각적인 사물도 있다. 시는 한행이 길어서344음보로 된 11행이다.(한춘시는 대부분 이런 시행이 많다) 이 짧은 시에 행마다에 새로운 사물들이 태여나고있으며 태여난 사물들은 변형으로 이루어지고있다. 한춘의 시는 거이다가 이런 시기교로 씌여진 시들이다. 세상은 물질로 구성되고 물질이 없는 세상은 없다. 시속에서의 물질은 바로 이미지인것이다. 시인의 상상속에서는 이 이 되고, 놓친이되고, 이 되고, 길에는  이 세워져있고,    는 >, .  이러한 되기는 한사물이 그와 다른 성질을 가진 사물로의 이동이며 한물질이 그와 성질이 다른 물질로 되기이며,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도주한 행선지이기도 하다. 이질적인 두 사물들은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시의 핵심적인 수법인 변형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라고 하겠다. 엘리어트는 이렇게 짝을 짓는것을 시적상관물이라고 하면서 예술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되기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이라는 저서 112쪽에서 지적한것처럼 한춘시인은 자기의 시를 이라고 하면서 (세한도1)고 하였다. 시인의 는 는 한수의 시에 속하리라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서 해야 할 말이 또 있다. 왜 이렇게 맘대로 변형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인의 상상은 자유로운 상상이다. 자유로운 상상은 외계의 그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시인만의 상상인것이다. 기성론리도, 도덕도, 그어떤 진리의 한계와는 관계없이 시인은 생각하고 상상할 권한이 있는것이다. 그 상상은 한계가 없으며 한계를 가질 필요도 없는것이다. 아무리 변형시켜 보았자 지구우의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기이며 우주속의 한사물이 다른 사물이 되기일뿐이다. 지구나 우주가 사물들이 변할수 있는 공분모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렇게 변하는가 하는 물음은 임신한 녀자가 왜 아이를 낳는가고 묻는것처럼 소용없는 일이라겠다. 물질과 물질의 변형은 한춘의 시기법의 기둥수법이라고 할것 같다. 한춘은 이런 기법으로 자신이 개척한 현대시의 길을 총화하고있는 하고있는것 같다. 시인이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변형시키는것은 한사물의 리면에 있는 새로운 사물을 찾아서 보여주는것으로써 원초적인 사물을 들여다 보기라고 할수 있다. 인류는 원초적인것을 숭상한다. 시인도 원초적인것에 접근하려고 시를 쓰는것이다. 때묻지 않는 그 원초적인 순수를 시인이 꿈꾸고있는 것은 거기에 시인의 유토피아가 있기때문일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시들   에는 좋은 시들이 많은데 필자가 특별히 즐기는 시는 과 이다. 이 두편의 시들은 언어가 새롭고 의미가 깊어 흔상할 가치가 많은 시들이다. 그중 (아래는 3으로 략칭)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시인은 마른 우물에서 물을 긷는다 망가진 용드레 용드레소리는 들려도 시인은 천둥소리를 기다린다   주추돌에 깨여지는 비방울 두손으로 받아들고 지난겨울 찬 바람에 씻기던 잣나무의 노래소리를 또다시 꼼꼼히 검색한다.   하늘가로 비껴가는 새 그 부리에 화석 한점 물었다 2010.9.16.   우선 내용이 제목과 이질적이여서 좋다. 세한도란 추운겨울 지도라고 말할수 있는데 시인은 추운 겨울철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물을 긷는것을 말하고 있다. 시는 항상 제목과 내용이 분리되거나 내용이 제목에서 일탈되는것이 좋다. 시는 어디까지나 상징이기에. 물이란 무엇인가? 물이란 시다. 물도 마르고 룡드레도 망가졌으니 물을 길을수 없는것이다. 시인은 시를 떠나면 물을 떠난 물고기 신세가 되는것이다. 달가닥거리는 용드레소리는 들려도 물은 한방울도 길어올릴수 없는 답답함과 근심걱정이 속을 다 말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소나기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소나기 오면 우물에 물을 길어올릴수 있는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천둥소리는 령혼에 갑자기 솟구치는 령감이며 시인것이다. 는 시를 짓는 시인의 욕망이 좌절되는것을 표현한 언어로서 가히 언어속에 새로운 언어가 있음을 암시하는것이라겠다. 이것이 3의 내용인것 같아서 음미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3의 2련은 가련한 시인이 시를 찾는 과정을 묘사한 단락이다. 고대하던 비는 내리지만 시인한테는 비방울도 차례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주추돌에서 깨여지는 부서진 비방울을 손에 받아들었다. 시인은 그 부서진 비방울속에서 지난 겨울에 찬바람에 씻기던 잣나무의 노래소리를 꼼꼼히 검색한다. 절창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왜냐하면 돌발적이고 기습적인 이미지를 떠올린것이다. 한사물에서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사물을 떠올리는것이 시가 아닌가. 부서진 비방울이 잣나무의 노래로 둔갑된다는것은 시인이 아니고서는 근본적으로 상상할수 없는것이다. 시는 직선적으로 씌여지는것이 아니라 직선을 떠나서 씌여지는것으로서 탈직선화라고 말할수 있다. 진짜 .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27페지)라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말이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창출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련도 이채롭다. 우의 내용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새로운 이미지로 표현된다.   하늘가로 비껴가는 새 그 부리에 화석 한점 물려있다.   물과도, 주추돌에서 깨여지는 비와도, 잣나무노래와도 관계없는 하늘로 비껴가는 새, 부리에 화석 한점이 물려있는새, 와>의 출현은 불연속이며 원인과 결과와는 관계없는것이다.  새는 시인이 추구하는 상징물로서 시라고 말해도 되고 희망이라고 말해도 된다. 그런데 은 또 무엇인가? 화석이란 단단한 돌이다. 이 돌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음미의 가치가 있는 사물로서 각자나름의 판단을 허용하는 화석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화석은 의미를 직설적으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의미를 감춤이며 에둘러 말하는것으로써 1500년전에 류협이 >에서 말하듯이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사물에 의탁하고있다고 하겠다. 한춘시인의 이 시는 그저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말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기습적으로 돌발적으로 아무런 련계도 없이 집성되고 있다. 이 시의 구성은 재래의 현대시구성을 넘어서는 신선한 구성이다. 이 시는 조지p 란도가 말하는 하이퍼텍스트에 속하는 시라고 할수 있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리좀이며 다양체이다.  련과 련사이의 이미지들은 물론 2련의 과 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상호련결인것이 아니라 분리이며 성질이 다른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되여있다고 하겠다. 이미지들은 서로 인과관계인것이 아니라 대등한 독립성을 갖고있다고 하겠다. 물론 한춘시인은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가 있었던 시인이였다고 할수는 없다. 하지만 에는 이런 시들이 여러수 있다. 그것들은 현대시를 자주 쓰면서 일정한 득달이 오면 자연적으로 하이퍼시를 쓰게 된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다.    3.언어의 특성   까치는 나무가지를 물어다 집을 만들고 한춘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서 를 만들었다. 에는 여러가지 언어표현수법이 있겠으나 필자는 아래와 같은 두가지 방면으로 살펴보고저한다.   첫째 낯선 언어 만들기   낯설기란 말은 지난 세기20-30년대에 쏘련의 포르마리즘에서 나온 말이다. 낯설기란 언어자체의 의미 그대로 보지 않았던 생소한, 처음으로 보는 언어를 말하는것이다. 한춘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여 낯설기를 하고있다.  (3쪽), (17쪽), (20쪽),(24쪽) (28쪽)…. 앞머리만 대충 훑어보아도 이렇게 여러가지가 있다. 일상적으로 말하면 모두 말이 되는 말인것이 아니라 말이 안되는 말이다. 이런 언어들의 조합을 폭력적조합 혹은 강압적조합이라고 할수 있다. 시가 이렇게 말을 조작할수 있는것은 시어는 언어의 기능에 기대여 조합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능이란 우리 조선어로 말할 때 자음과 모음이 자유로이 어울려 글자를 만들고 단어를 만드는 일면도 있지만 또 중요한것은 시속의 사물은 상상속의 사물이지 현실속의 사물이 아니기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어는 영상을 떠올릴뿐이지 어느한 사물이 되는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사물과 떨어져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사물과 언어는 별개의 존재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실질이며 본능이다. 언어가 일상적인 언어조합의 궤도를 벗어나서 생산될 때야라만이 시적언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들뢰즈. 가타리작 83쪽)   둘째 언어의 몽롱성;   는 몽롱한 언어들이 이곳저곳에 많이도 산재하여 있다. 필자가 좋다고 말한  의 제1련을 아래에 적어본다.   지난 모든 일들을 작두날로 다 잘라버리고 모든 소란스런 말들을 만뢰구적으로 다 밀어버리고 모든  내던진 돌맹이를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이고   3개의 짝이 있는데 현실과 초월이 결합된 시행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에다 이런 의문들을 제기할수 있다. 작두날이란 무엇을 지칭하며 작두날로 잘라버렸다는 일들은 어떤 일들인가? 만뢰구적으로 다 밀어버렸다는 소란스런 말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인 돌맹이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털이 돌맹이를 거둬들일수 있기나 하는가? 이러한것들을 종합해서 한마디로 말하면 시인은 과거의 어떤것에 대하여 깨끗이 청리하였다는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그 망각의 대하에서 잊혀졌던것이 갑자기 뛰여나온다. 그것이 제2련이다.   그래도 적들은 쳐들어온다 모든 벽을 다 허물고 모든 괴물을 다 격파하고 모든 기관을 다 폭파가하고 손녀가 가지고 놀던 사기인형은 다 깨지고   여기서 말하는 적들이란 누구인가? 적들은 1년에 밝혀져있다.그것은 작두날로 잘라버린 모든 일들이고, 만뢰구적으로 처박았던 소란스런 말들이고,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였던 돌멩이들이다. 그것들이 단짝이 되여  벽을 허물고, 괴물들을 격파하고,  기관을 폭파해 버린다. 그리하여 손녀의 사랑하는 사기인형마저 다 박살이 난다. 모든것이 풍비박산이 나 재더미로 되는 이것은 무엇을 표현한것인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것만은 사실인것같다. 손녀의 인형은 어떤 순수한것임을 표현하는 언어일것같다. 시인의 사랑하는 시에 대한 이야기일가 아니면 첫사랑에 대한 어떤것일가 아니면… 필자도 이런 언어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다는 모른다. 시는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거리는 심리를 쓰고있다. 잠은 밤과 함께 인간의 일상을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욕망이다. 시인은 잠이라는 욕망을 달성하지 못하는 애모쁨을 썼는데 그것이 최저의 욕망도 실현하기 어렵게 살아가는 인간을 표현한것이 아닐가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시는 리해되지 않아도 통한다는 특성이 있다. 시인의 상상을 밑바닥까지 알이는 아무도 없을것이다. 시인은 왜 맞지도 않는 이런 말,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런 말을 하는가? 바로 여기에 시의 본색이 있는것이다. 시는 몽롱해야 하는것이다. 몽롱한것은 아름다움이며 예술이다. 흘러가는 내물처럼 밑바닥 모래알이 다보이는 시가 아니라 물이깊숙하여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 그래서 시는 음미하게 된다. 시는 의사를 전달하는 산문이 아니라 시인의 창조한 새로운 세계를 물질로 즉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하는것이다. 그래서 시는 리성을 중시하는것이 아니라 감각을 중시하게 된다. 종래로 리해하기 어려운 시들이 많았다. 밀턴과 단테는 과 을 쓴다음에 자신들의 시는 100년후에야 알아볼것이라고 하였고, 1500년전의 류협은 지인은 천년에 한번 통한다고 하였으리라. 좋은 시는 독해를 요구하지만 독해되기를 거부하는것이다. 그 거부로 인해서 시는  매혹을 잃지 않게 되며 독자나름의 해석을 요청한다. 우리가 지금도 리상의 시를 각자가 나름대로 리해하는것도 이때문이다 .  
22    하고 싶은 말 ㅡ제30차 두만강여울소리 발언고 최룡관 댓글:  조회:583  추천:0  2019-04-27
하고 싶은 말 ㅡ제30차 두만강여울소리 발언고 최룡관   1.      시인도 사상을 해방해야   개혁개방이니까 시인은 사상을 해방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주에 대한, 사물에 대한 사상을 해방해야 한다는 말이겠습니다.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제 생각은 세상의 모든 사물은 동일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모든 동물은 다 동일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우선 동물입니다. 사람과 동물은 모두 눈, 코, 입, 귀가 있는가 하면 오장륙부가 있습니다. 모두 짝짓기를 하여 후대를 번식합니다. 모두 먹고 싸고 합니다. 이것을 저는 동일성으로 봅니다. 사람과 동물은 모두 언어가 있습니다. 짐승이나 새들이 우는 것은 모두 녀석들의 언어이며 어떤 의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둔해서 녀석들 말을 알아듣지 못할뿐이죠. 그럼 동물과 식물은 어떤 동일성이 있을가요. 모두가 지구라는 땅우레서 살며 해빛속에서 달빛속에서 함께 살며 바람을 마시고 비를 맞으며 함께 삽니다. 그리고 식물들도 짝짓기를 합니다. 꽃이란건 실제상 식물의 성기입니다. 식물이 수분작용을 하여 열매를 맺고 씨앗을 생산하는 것도 동물의 짝짓기를 하여 후대를 번식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사물속에는 세상만물이 우주만물이 다 들어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속의 사물의 변화는 무궁무진한데 시인은 시인만이 보아낸 새로운 변화를 시속에 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만이 보아낸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시가 창견이 있고 발견이 있고 시인의 개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2.      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   언어는 시의 형식이자 내용입니다. 시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 입니다. 시의 새로운 언어창조에는 여러가지 수법이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은유와 환유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은유, 새로운 환유는 상징을 직접 만들어 냅니다.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내는 것을 아리스토 텔레스는 천재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상징을 많이 만들려면 언어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속성이 무엇인가? 저는 이렇게 봅니다. 언어의 속성이란 언어는 자유롭게 결합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선어는 명사, 대명사, 수사, 동사, 형용사, 부사들로 구성되였습니다. 이 여섯가지 품사들이 아무렇게나 결합되여도 말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소똥이 태양이다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할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말이 통한다나는 것을 우리는 승인해야 합니다. 일상과는 다르게 이렇게 새로운 언어조합을 하는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물은 불이다 강물은 나무이다 이러한 말들도 일상적인 사실로 따져보면 다 맞지 않는 같지만 시에서는 다 맞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말들은 다 명사와 명사의 새로운 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사, 수사, 대명사, 형용사, 동사, 부사들도 이렇게 서로 새로운 조합을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조합자체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상이며 가상이 바로 시의 현실이고, 시의 내용이고, 시의 주제입니다. 시는 상상으로 쓴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상상으로 쓴 것을 현실과 맞추어 생각하면 시는 동쪽에 있는데 평자는 서쪽것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시의 언어는 일상어를 새롭게 다듬고 창조하는 일이겠습니다. 시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탐구로서 남의 쓴말을 곱씹어서는 좋은 시가 나오지 못합니다. 시인자신이 창조한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창조한 말은 왕왕 아름답게 틀린 말들인데 이런 말들이 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3.      시는 무의식으로 써야   문심조룡에 기성관념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시를 쓰라 하였습니다. 1500년후에 독일의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란 말을 하였는데 무의식이란 기성관념을 깨끗이 쓸어버리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기성관념으로 시를 쓰면 말은 아름다울지 모르겠으나 시적으로는 모자라는 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가장 간단히 말하면 순수한 의식을 말하는데 상징을 생산하는 빈장소라고 하겠습니다. 무의식에서 생산되는 상징은 지난날에 있었던 상징이 아니라 시인이 새롭게 생산해내는 상징입니다. 즉 사물과 사물을 새롭게 비기는 작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시는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작업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작업은 몽롱성이 동반하게 되며 해석이 독자의 나름에 따라 다르게 됩니다. 시는 일정한 의도를 나타내는 작업이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를 떠올려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작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미를 제한하는 언어를 피하는 것이 좋을 같습니다. 어떤언어가 의미를 제한하는가? 추상어가 그 첫째이고 무스것처럼, 무스것마냥, 무슨것인 듯, 하는 직접비유를 쓰는 것이 그 둘째라고 하겠습니다. 세째로는 아름답다 좋다는 언어처럼 결론적인 언어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언어들은 될수록이면 피면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나나 우리라는 언어도 피하는 것이 좋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은 이미지 객관화와 어룰리지 않고 시인이라는 나가  시를 쓰는데 하필 나라는 말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나를 쓸때에는 의물화가 될때만이 용허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청나라 때 왕국유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유아경은 아무나 쓸 수 있지만 무아경은 아무나 쓸 수 있는 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아무나 쓸 수 있는 시를 쓸 것이 아니라 아무나 쓸 수 없는 시를 쓰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또 토 ㅡ가,ㅡ이, ㅡ는,ㅡ은,ㅡ을,ㅡ를 따위를 쓸 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은 삭제하면 좋다고 생각됩니다. 과거형은 현재진행형으로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추상어를 꼭 써야 할 때에는 색갈을 올리거나 명사와 결합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어떤시가 전통시인가? 사물을 보는대로 느끼는대로 쓰는 것이 전통시이고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는 시입니다. 어떤것이 현대시인가? 사물과 사물의 짝을 한번 맞추면서 시인의 주장을 드러내는 것이 현대시입니다. 어떤것이 하이퍼시인가? 성질이 다른 이미지만 라렬하는 것이 하이퍼시라고 생각됩니다. 현대시와는 다르게 시인의 주장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책을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남보다 책을 더 많이 보고 소화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책을 더 보면 시를 더잘 쓰게 될겁니다. 문심조룡, 구조주의와 기호학, 글쓰기 영도, 물과 꿈, 몽상의 시학, 욕망리론, 하이퍼텍스트3.0 , 천개의 고원을 추천합니다. 이런 책들을 착실하게 보면 당신의 시가 변할 것입니다. 오늘의 시는 언어를 구조주의 언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저의 소견입니다. 감사합니다.                   2018.10.16.
한수의 시로 시지평을 새롭게 연 시인의 새사유의 결정 ㅡ 김영건시집 에 부쳐 최흔   근일에 출간된 김영건의 시집 (아래 물결로 략칭)를 읽어보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의 지평을 새롭게 여는 시적사유의  결정이라고 할수 있겠다. 모두 5개부로 나뉘여진 시집인데 읽을수록 시맛이 살아나는 시집이였다. 필자는 라는 한수의 시에 담긴 예술적특색을 세가지 부분으로 말하는것으로 시집평을 대체하려 한다. 첫째 구성이 구성을 넘어서다. 둘째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다. 세째 현실이 현실을 넘어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시구성이 구성을 넘어서다.   우리시의 재래의 구성들은 한가지 심상을 말하기를 즐기였다. 하나를 틀어쥐고 시인의 해석을 하는것이 일상적인 현실이였다. 김영건시인은 많은 시들에서   일상적인 구성에 대담한 도전을 걸었다. 그의 대부분 시들이 한선을 가지고 시를 구성하는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이미지를 겹쳐서 시를 구성하는 특점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이런 구성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시들이 도시거리의 즐비한 층집처럼 늘어서 있다. 그 거리를 산책하느라면 산도 밟히고 강도 들리고 새도 락하하고 하늘의 해달별이 또렷이 살아나기도 하고  전설도 보인다.   돌이 산이였다는 사실을 바람은 오늘도 들려주었다 개미가 인간의 길을 내고 나비가 하늘길을 열고 물고기가 수평선 틔워놓았다 바람을 받쳐올린 제전이 돌임을 립증하는 날 우주의 그물에 걸린 별들 하나둘 따다가 탐험대의 길을 놓아주었다 아름다운 흙의 품안에 뼈로 솟아있는 암석을 나와 지상에 얼굴 내민 사내들이 돌의 시를 읽고있다 대지의 모든 나붓김을 안아준 암흑의 종자들이 오판된 생명의 근원들 수정하노라 일제히 강변에서 돌아왔다 강물은 돌의 살이다 돌의 춤이다 또 돌의 언어이며 미래이다 마를길 없는 영원한 돌의 노래이다                ㅡ 돌의 시 전문 정말 마음이 활 열리고 가슴이 활열리고 시정이 활 열리는 시다. 이 시에는 여러개의 이미지단위가 있다. 시인은 돌을 산에서 땅으로 끌어내리고 땅에서 강과 접속시키는 점층법을 썼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미지단위마다에 또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길이 번쩍이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놀람을 금하지 못하게 하고있다. 첫머리에서 바람이 돌이 산이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그 사실이 돌연성을 띄였다. 시인은 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것이 아니라 고 한다. 대담한 도약을 펼쳐보이는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아래의 엮음도 돌발적이다. 돌발적인 이미지창출은 진짜 강력한 상상의 결실이다. 시의 이미지가 돌발성을 띄였을 때 독자들은 놀라게 되는데 그 놀람이 바로 시의 진짜맛이다. 이런 놀람이 없으면 시는 시들하게 되고 시시하게 보이게 마련이다. 시인은 산에서의 돌의 이미지를 파헤친다음 땅에서의 돌의 이미지를 이렇게 파헤치고있다.   아름다운 흙의 품안에 뼈로 솟아있는 암석을 나와 지상에 얼굴 내민 사내들이 돌의 시를 읽고있다 대지의 모든 나붓김을 안아준 암흑의 종자들이 오판된 생명의 근원들 수정하노라 일제히 강변에서 돌아왔다   앞의 석줄이 한개 이미지 단위이고 뒤에 석줄이 한개 이미지 단위이고 마지막 줄은 단독 이미지이면서 다음의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한 과도구 작용을 한다고도 말할수 있겠다. 시인은 돌을 땅의 뼈다귀라고 하면서 땅속에서 사내들이 얼굴을 내밀고 시를 읽는다고 한다. 실로 기상천외한 이미지창출이다. 돌속에서 뼈속에서 사내들이 나온다는 자체가 너무 경의로운 일일뿐만 아니라 돌의 시를 읽는다는것도 경의롭게 읽어지는 시구다. 시인은 어떤 사물에 대한 모방을 하고있는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사실을 들춰내고있다. 일상적인 사유의 테두리를 과감하게 짓부시며 새로운 시적행동을 감행하고 있는것이다. 돌에 새겨진 시의 내용도 일반적이 아니다. 한다고 한다. 이 은유적인 언어들의 진의에 대해서는 언어가 언어를 넘어선다는 두번째 례에서 다시 보기로 하자.  일제히 강변에서 돌아온 돌에 대하여 시인은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강물은 돌의 살이다 돌의 춤이다 또 돌의 언어이며 미래이다 마를길 없는 영원한 돌의 노래이다    시의 결말로 된 이 시구들은 돌과 물의 관계를 읊은것이다. 시인은 강물은 돌의 살이라고 하기도 하고 돌의 춤이라고 하기도 하고 미래라고 하기도 하고 영원한 돌의 노래라고 하기도 한다. 이 수법은 련속변형으로써 렉시아라고 한다. 가히 이렇게 풀어쓸수 있는것이다. 강물과 돌에 대한 다섯가지 변형을 련속적으로 창출한 시인은 아마 김영건이 처음인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는 천재적 재능이라고 하였고, 류협은 시는 은유라고 하였는데 이런것을 두고 말하는것이 아닐가 하고 생각해본다. 이 천재적인 은유야 말로 아우라이다. 시는 이렇게 독보적인 형상을 창조함으로써만이 개성이 있는 시인으로 되는것이 아니랴. 이제 시에 대한 내용의 분석은 끝났다고 할수 있다. 이런 분석을 넘어서 필자가 말하려는것은 시구성이 일상성을 떠나서 새롭다는것이다. 시인은 산의 돌, 땅 다시말하면 버덕의 돌, 강의 돌 등 세가지 측면으로 고찰하였다고 하겠다. 돌의 존재의 공간을 이동시키면서 이미지를 창출하면 돌이미지의 립체성을 기하게 된다. 각각의 장소에서의 이미지의 이질성을 도출해내면서 시인은 시의 새로움을 획득하고 있다겠다. 산에서의 돌도 그렇고 땅에서의 돌도 그렇고 강에서의 돌도 그렇다. 돌은 부단히 변신을 하면서 자신을 다른 사물로 현시하고 있다. 왕양명(송명시대의 걸출한 철학가)은 이 세상사물들의 아버지가 하늘이고 어머니가 땅이라고 하였다. 사물들은 모두 형제간이다. 돌은 형제들과 서로 사귀면서 경쾌한 나들이를 하면서 이것저것으로 변해보고있다겠다. 이것이야 말로 시의 본연을 알고 쓰는 시적작업이라고 하겠다. 시는 워낙 사물의 변화를 쓰는 작업이니까. 공간의 이동은 시간의 이동을 동반하게 되며 공간과 시간의 이동은 사물의 변화를 생성하게 된다. 이것은 도이다. 시는 도에 도달하는것이 의무라고 하겠다. 주역에서 고 하였다. 시에서 돌이 자그만치 10여가지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별무리 없이 통하게 된다. 이런 변화에서 어떤 공동분모가 있는가를 찾는 일은 다 헛수고이다. 공분모는 없는것이 아니니까. 다 지구우의 사물이 아니면 이 우주속의 사물이라는데 공분모가 있는것이 아니랴.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한사물이 여러가지 사물로 변하면서 세개의 큰 이미지단위가 있는데 이 단위들을 바꾸어놓아도 시에는 아무런 손상도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시는 종적구성의 구축이 아니라 횡적구성의 구축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하이퍼시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하이퍼시는 중국의 고대의 시인 맹호연으로부터 오늘의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시대간을 이룬 시기법이다. 횡적구성으로 된 하이퍼시는 필자도 처음에는 서양의것인가 착각하였다. 실은 우리의 시문학전통이다. 김시인은 이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다겠다. 계승한다는것은 시종 심상을 틀어쥐고 놓지 않는데서 표현되고 발전시켰다는것은 돌하나로 10여가지의 새로운 이미지를 과감하게 창출하였다는데서 립증되고 있다.   2시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다.   김영건시인은 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작업을 끈질기게 해내고있다. 시는 언어이고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고 한다. 시인에게 이런 명칭이 주어지는 원인은 여러가지겠지만 필자는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작업을 시인이 하고있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언어가 언어를 넘어선다는것은 일상적인 언어련결을 떠나서 새로운 언어련결을 하고있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에서 시인은 언어를 갈고 닦으면서 그냥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작업을 하고있다. 전반 시에서 를 제외한 나머지 언어들은 죄다 언어가 언어를 넘어선다고 할수 있겠다. 첫번째에서 필자는 한다는 시구를 례로 들때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두번째에 다시 살펴보자고 하였다. 언어가 언어를 넘어선다는것은 일상적으로 두가지가 있다고 할수 있겠다. 한가지는 우에서 례를 든 시구가 은어로 된경우를 말할수 있겠다.  대지의 모든 나붓김이란 언어는 대지의 모든 생명체를 말하는것이고 암흑의 종자란것은 새로운 사물들이 암흑속에서 생성된다는것을 말한것이다. 애기가 어머니배속에서 자라는것도 암흑속에서의 나오는것이며 씨앗이 땅에서 움트는것도 암흑속에서 나오는것이며 알에서 새새끼들이 탄생하는것도 암흑속에서 까나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때문에 암흑은 모든 새로운 생명의 발원지이며 탄생지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한낱 자연의 법칙이다. 일상적으로 암흑이면 나쁜것으로 말하기 쉬운데 실제 그것은 시인이 말하다시피 잘못 판정된 인지도 모른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한것첨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분리되는데 기의가 기표와 다를수도 있다는것이다. 아무렇게나 이미지 한부분을 더 인용해보자   돌임을 립증하는 날 우주의 그물에 걸린 별들 하나 둘 따다가 탐험대의 길을 놓아주었다   사람을 아연하게 하는 이미지라고 할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말이 맞지 않는 말인것처럼 착각이 얼마든지 올수 있는 말이다. 돌이 별이 되고 별이 그물에 걸려있고 탐험대의 길을 놓아준다고 한다. 사물과 사물사이는 통일성과 동일성이 없지만 언어사이에는 통일성과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래서 언어의 나라에는 법률도 황제도 없고 오직 자유만이 있다고 하겠다. 돌과 별은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고 그물도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고 탐험대의 길도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다. 하지만 이 별개의 개념을 이루는 문자들은 아무런 주저심도 없이 한줄에 꿰여져있으며 신비한 세계를 구성해내고 있다. 왜 이럴수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시이기때문이다. 시는 바로 이런 언어들의 련계를 꿈꾸고 있으며 그 꿈을 시적현실로 만들고 있는것이다. 이제까지 글의 흐름속에서 자연적으로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것을 보았다. 에는 다른 한가지 수법이 또 있다. 그것은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둔갑하는 은유적수법이다.   개미가 인간의 길을 내고 나비가 하늘길을 열고 물고기가 수평선 틔워놓았다   강물은 돌의 살이다 돌의 춤이다 또 돌의 언어이며 미래이다 마를길 없는 영원한 돌의 노래이다   는 돌을 썼는데 돌의 언어이다. 이런 언어들은 죄다 은유로 된 언어이며 무엇이 무엇으로 둔갑하기이며 상생이다. 한사물속에서 다른 사물들이 련속적으로 태여나고 있다. 시는 이렇게 새로운 사물의 생성을 쓰는 일이지 모방하거나 추억하거나 회상하는 일이 아니다. 시에 생성이 없으면 낡투가 되기 마련이다. 시는 피끓는 청춘들의것이지 늙은이들의것이 아니다. 청춘들은 새것을 추구하고 늙은이들은 회억과 추억을 즐긴다. 우의 시구들은 련속부절히 한언어가 다른 언어를 불러오고있으며 한언어가 다른 언어에 대체되고 있다겠다. 그어떤 설명이나 해석이 없다. 시는 설명도 아니고 해석도 아니고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쓰는것이라겠다. 그것이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역활을 논다고 하겠다. 시를 쓰자! 넘어서자! 사물은 태여났다가 죽고 다른 사물이 생성되는것이 자연이고 인간의 문화도 생성되기도 하고 력사의 뒤안길에 묻혀지기고 한다. 그러니 앉은 자리에서 한가지 사물만 안고있는것은 보수가 아니랴. 언어는 한사물이나 행동을 나타내는 기표이지 그 사물이 아니다. 사물과 별개의 관계를 이루고있는것이 언어이다. 때문에 마음대로 결합시킬수 있다. 특히 시인이 언어의 마술을 부리는것은 바로 언어를 갈고 닦는 고된 작업으로서 잘 갈고 닦은 언어는 후세에 가서도 영양을 주게 되고 빛발을 뿌리게 된다. 그로 인하여 민족은 살아있게 되는것이다. 한 사람에게서 언어가 죽으면 생명도 끝나게 되고 한민족에게서 언어가 죽으면 민족도 죽게 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가. 김시인은 바로 이런것을 통감하고 언어의 다스림을 새롭고도 알차고 신선하고도 황홀하게 한것 같다.
20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댓글:  조회:509  추천:0  2019-04-27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존경하는 신세훈 사백님, 안녕하십니까. 주역을 보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어서 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있잖습니까. 민조시의 3456이 주역에 있다는 얘기 입니다. 세계가 움직이는 이치를 알려주기도 하고, 세상의 움직임의 법칙으로 되여있는 주역이라고들 합니다. 주역은 현대 한국의 주역권위라는 김승호선생의 고증에 의하면 10000년전에 창제 되였다하고, 현대 중국의 주역권위라는 傅惠生선생의 고증에 의하면 7000년의 력사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역은 인류의 첫 철학이며, 경이며 우리의 인문학의 뿌리가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세가지 경이 있다고들 합니다.     주역, 성경, 이슬람경 말입니다. 성경은 기원전 1500-400 년경에 나왔다하니 길게 봐야 3500여년으로 봐야 하고, 이슬람교는 1228년에 나왔다하니 길게 봐야 3000여년으로 봐야 할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경은 썩 그후의 일이니 참고할바가 못됩니다. 그러니 인류문명사의 시작은 동양이라고 보는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 시작을 대표하는것이 주역이 아니겠습니까. 회장님께서는 환웅기가  5912년이라고 하시는데 주역은 그보다 더 빠른 같습니다. 그런데 주역이란 중국 상고사 일입니다. 중국상고사란 어떤것입니까. 제가 알건대는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동아세아 상고사라고 생각 합니다. 특히 우리 배달민족의 피와 살처럼 대단히 밀접한 관계입니다. 우리의 성씨들이 중국 한족의 성씨들과 같은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중국 한족과 우리 조선민족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모가 같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공자를 동이족에 속한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의 공씨들은 다 공자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일본에 있는 공씨도 공자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동남아의 공씨들은 다 공자의 후손이라고 한답니다. 그러기에 중국밖의 공씨의 지성인들은 해마다 산동성곡부(공자의 고향)에 가서 공자제에 참가하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로부터 공자는 중국 한족의 조상일뿐만 아니라 중국 여러소수민족의 조상이라는 결론이 나오는것은 당연지사라겠습니다. 중국 조선족 남영전이라는 시인이 토템을 연구하고 토템시를 쓰면서 민족은 혈통에 의하여 갈라진 것이 아니라 문화에 의하여 갈라지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결론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민족을 단군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고대에는 조선민족이라는 명칭이 없었습니다. 불민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리성계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세종대왕이 훈민정흠을 창제한 이후로부터 우리 민족은 점차 조선민족 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는 오늘에 이른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었고, 훈민정흠이라는 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냥 한문권에 얽매워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을 조선민족이라고 부를수 있을가요?!  주역이 우리 문화의 뿌리라는것은 지인이라면 다 승인하 리라고 생각합니다. 중국고대 복희씨로부터 창제되였다는 주역의 핵심은 8괘입니다. 후에 감옥에 갇혀있던 주문왕이 8괘를 64괘로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8괘에는 건(乾:☰) , 곤(坤:☷),진(震:☳),손(巽:☴),감(坎:☵),이(離:☲),간(艮:☶),태(兌:☱) 가 있습니다.   8괘는 하늘[天]· 땅[地]· 우뢰[雷]· 바람[風]· 물[水]· 불[火]· 산【艮】· 연못 [澤]의 8가지 사물을 상징하며, 8괘의 2괘씩(가령 건·곤)은 서로 대립됩니다. 음(--)과 양(―)은 태극의 근본이며,  8괘의 근본인데 음양의 결합이나 교감에 의해 만물을 생성한다는 것입니다. 8괘는 양을 대표하는 부호와 음을 대표하는 부호로 조성되였습니다. 건너금 하나인 양부호(남자의 성기라고도 합니다)와 건너금 둘로 이루어진 음부호(녀자의 성기라고도 합니다)를 각각 효라고 합니다. 이 두효는 인류최초의 문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세상만물은 양과 음의 정기에 의하여 탄생하고 생장하고 소실된다고 합니다. 8괘의 문자를 다시 봅시다. 건(乾:☰)양이 세개로 된것으로써 천지인을 말한다고 합니다. 민조시 시작이 석자이니 바로 건에 해당하는것이라고 감히 말할수 있을 같습니다. 첫석자가 천인지를 대표한다는 것은 물론 다 아는 사실입니다, 곤(坤:☷)은 음이 세개로 된것이지만 점선이 6개로 구성되였습니다. 그러므로 민조시의 마지막구 6자와 맞먹습니다. 건과 곤은 하늘과 땅을 지칭하므로  민조시의 핵심이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손(巽:☴)과 이(離:☲)와 태(兌:☱)는 각각 사로 되였으니 민조시의 4음보와 같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간(艮:☶)과 진(震:☳)과 감(坎:☵)은 5로 볼수 있는데 그것은 민조시 345의 5 로 봐야 할것입니다. 4세가지와 5세가지는 또 시작인 3과 맞물립니다. 6은 또 3의 합이라고 할수 있으니 이들 모두가 천인지 3에 어울리니 그 오묘함이 이를데 없습니다.  손인 바람, 이인 불, 간인 산, 태의 연못, 진인 우뢰, 감인 물은 다 하늘과 땅사이의 만물의 대표들입니다.그러니 민조시라는것은 하늘과 땅의 만물을 가리키며 우주를 가리키는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역을 해석함에 있어서 음효를 6으로 하고 양효를 9로 한답니다. 에 출간한 28쪽에는 이런 해설이 있습니다. 주역에 벌써 디지털이 있었다는 엄중한 사실이나 론이는 제쳐놓고 이런 수자들이 민조시와 어떤 관계인가를 말해보려고 합니다. 신사백님은 민조시에서 를 강조하시였습니다. 6자계렬은 상육이 제일 높은 수자니까 민조시의 음보와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습니다. 9자계렬은 문제가 있는 같으면서도 없다고 봐야겠습니다. 초구는 333이라고 말할수 있고 4와 5의 합이라고도 말할수 있고 6(33)과 3의 합이라고도 말할수 있으니 문제가 있는 같으면서도 없습니다. 구이는 열한개인데 5와 6 이거나 344의 합입니다. 그러니 문제가 있는 같으면서도 없습니다. 구삼은 열둘인데 민조시 마지막 음보 6의 추임새나 거듭장단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있는 같으면서도 없습니다. 구사는 열석자인데 445의 합이라고 할수 있습니다.그러니 문제가 있는 같으면서도 없습니다. 구오는 도합 14에 그칩니다. 455와 맞아떨어집니다.그러니 문제가 있는 같으면서도 없습니다.  . 356, 446이면 맞아떨어지는데 이러한 음보는 민조시음보가 아니라 잡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경우에도 이러한잡종이 더러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상구라는것이 있는데 이는 96에 해당되는 열다섯이라고 볼수있습니다.  555나 456이 상구가 되는 같습니다 이렇듯 대단한 민조시를 창제한 신세훈사백님은 정말 거물급이시다라는 생각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민조시는 기필코 번영발전할 것이며 앞으로 주역처럼 퍼져나갈것이라고 믿습니다. 내내 강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15.12.9. 최룡관 배상
19    조룡남시인과 저 그리고 <<옥을 파간 자리>>/ 최흔 댓글:  조회:571  추천:0  2019-04-27
조룡남시인과 저 그리고 / 최흔                     오늘은 조룡남시인의 타계 일주년을 기념하여 연변작가협회에서 기념행사를 조직한데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 저는 조룡남시인의 지인으로서 조룡남시인이 생평과 작품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고저 한다. 지난해 12월 저는 덴마크에 있는 딸집에 가서 한가한 나날을 보내다나니 조룡남시인의 장례에 참가하지 못하여 느을 가슴이 쓰리였다. 저는 평소에 시인의 암이 가짜 암이라고 말하면서 덴마크에 다녀올만큼한 시간내에 조룡남시인은 타계하지 않으리라고 믿으면서 간다는 말만 전 하고 덴마크로 갔댔다. 그것이 마지막 리별일 줄은 전혀 몰랐던 그 아둔함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룡남 시인님이시여 죄송스럽습니다. 조룡남시인은 우리 로세대시인들 중에서 시개성이 가장 돌출한 시인중의 한사람이다. 제가 조룡남시인과 가까이 지내게 된것은 아마 장시 때문이였던것 같다. 이 시는 당년에 발표할 곳이 없는 문제작이였다. 지금 보면 아무렇지도 아닌 작품인데 문학지 편집이 도리머리를 저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파는 모자를 벗겨버렸지만 우파에 관한 시는 발표할수 없던 때였기 때문이였다. 아마 우파투쟁이 완전히 잘못 되였다는것이 해명된 초기였다고 생각된다. 저는 그전에 조시인한테서 보았던 그 문제작이 생각나서 원고를 달라고 하였다. 조시인은 발표할 수 있겠는가고 반신반의하면서 저에게 이라는 원고를 넘겨주었다. 저는 한글자도 손대지 않고 원고를 발간하였는데 반응이 열렬하였고, 후에는 전국 소수민족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조시인의 위망도 당연히 한급 높아지였다. 한번은 조시인이 병원에 입원하여 있을 때였다. 제가 병문안을 갔는데 시를 썼다면서 저한테 종이장을 넘겨주었다. 라는 시였는데 감정도 뜨겁과 환상도 풍부하여 저는 그 시를 가져다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웬걸 하늘땅이 뒤집힐 줄이야. 우파분자가 권토중래하여 공산당을 보복하는 시를 신성한 당보에 냈다고 란리가 벌어졌다. 며칠후 신문사 주필과 부주필들이 모여앉아 저더러 편집착오를 승인하라고 윽박질렀다. 족히 세시간은  말도 안되는 비평을 당했다. 퇴근시간이 되여 온다고 빨리 태도를 표시하라고 하였다. 눈치를 보니 괜한 짓들을 벌렸음이 알리였다. 저는 하고 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저와 조시인은 날이 갈수록 더 가까와 지였다. 그도 그럴것이 하마트면 둘다 비판투쟁을 받으며 고역을 치를 번 했으니까. 저는 조시인에게 울보라는 별명을 하나 달아주었다. 시를 쓴다는 것이 죄다 가슴에 응어리졌던 울분을 토하는 것이였다. 를 제외하고도 이며 , 를 제외하고도 고향을 노래해도 사랑을 노래해도 조시인의 시는 모두가 밑바닥에 울음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울분에 의하여 산생되였고, 눈물에 의하여 산생되는 것이였다. 그래서 저는 조시인의 모든 작품은 현시대의 한을 뿜어낸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한시대의 뒤안길을 쓴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후에 저는 조시인한테 또 라는 두번째 별명을 달아주었다. 그를 바보라고 부른데는 두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는 1950년대 초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스무살도 안되였던것이다. 이라는 유명한 동요와 라는 명동요를 발표하였고 후에는 라는 명동시를 발표하였다. 작가가 우파라는 모자를 썼든 말았든, 어떤 고관대작들이 그의 작품을 지옥에 처넣으라고 명령을 내렸든 말았든 백성들과 아니들은 줄창 하고 수십년을 기분나게 노래를 불렀다. 문화대혁명이 지나가고 작가협회가 다시 나타났지만 주석단에는 조시인의 이름이 없었다. 시간이 써억 지나서야 시분과 주임이란 이름이 차례졌고, 남들이 다 해먹은 다음에야 부주석이란 자리가 차례이였는데 그나마 말석이였다. 조시인은 언제나 제때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시인이였다. 이것이 첫번째 원인이다. 그는 퇴직후에도 그냥 출근하면서 일을 했다. 저는 그에게 이젠 일을 그만하고 자기가 겪은 우파생활이나 소설로 써보라고 권고했다. 22살 꽃나이에 우파에 걸려 45살이 되여서야 완전히 해방을 받았으니 그의 황금시절은 지옥에 묻혀있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을 장편실화라도 쓰면 얼마나 값진 것이랴! 그런데 조시인은 잃어버린 청춘으로 하여 일을 못한 것이 섭섭했던지 아니면 쓰기 싫어서 그랬던지 체계적으로 쓸 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바보가 아니고 우었이랴. 제가 이런 말을 하는것은 조시인의 작품을 리해하려면 조시인의 생애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시 와 같은 상징성이 강한 작품을 리해하려면 조룡남시인이 어떤 사람이였던가를 짚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시는 자아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조시인의 시는 그의 파란만장한 생활과 직결된다. 그의 시는 그의 사상,감정, 추구가 너무 진실하게 깔려있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일 것이다. 이제 조룡남시인의 대료작으로 될수 있는 를 구체적으로 보기로 하자   내 가슴에는 웅덩이 하나 그것은 오래전에 옥을 파간 자리 나는 모른다 그 옥이 지금은 누구의 머리를 장식했는지   내 가슴에는 웅덩이 하나 그것은 오래전에 옥을 파간 자리 오랜 세월이 흘러갔건만 오늘은 웅덩이에 허연 소금이 돋히여 마를 줄 모르는 비물 눈물이 고여있다.   고요한 환경에서 한번 읽어만 봐도 속으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옥을 파간 자리가 가리키는 것이 우파에 걸려 빼았긴 조룡남시인의 청춘이라고 생각해 보자. 너무너무 처절하다. 정말 분통이 터질 일이 아닐수 없다. 황차 그 옥이 누구의 머리 장식품이 되였고 누구의 빛나는 목결이가 되였단다. 스물두살, 얼마나 찬란한 나이인가! 스물두살 얼마나 창창한 앞길인가! 그 스물두살에 우파로 몰려 조시인은 스물두살보다 더 많은 스물세해동안 인권이 없는 생활에 시달리였다. 스물두살 시인을 잡아놓고 누구는 대단한 공로를 세웠을 것이고 누구는 행운아가 되였을 것이고, 누구는 급도 췄을 것이다. 조시인은 죽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23년후에 다시 문단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초기에 그를 동정하는 문인은 있어도 그를 알아주는 문인은 별로 없었다. 우파라는 그림자가 그냥 그의 뒤를 따라다니였다. 시 그대로 고 조시인은 쓸쓸하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고독의 비탄을 토해내고 있으며 한없는 억울함을 토해내고 있다. 조룡남시인은 전생에 468수의 시를 창작하여 발표였는데 시인의 3권의 시집에는 467수의 시가 실려있다. 한수가 빠진 것은 에서 직접 쓸쓸하고 황량한 우파생활을 쓴 한수이다. 조시인은 생전에 우리 조선족시인들이 받아야 할 문학상을 거이다 받았지만 만은 한번도 상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시인의 대표작을 꼽을 때에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 가 최대의 잇슈로 떠오르군 한다. 왜 그런가? 시란 상상의 산물이다. 이 시는 상상의 폭이 넓고 상상의 심도가 깊고 시적언어의 밀도가 비교적 치밀하다. 그러기 때문에 음미하여 보지 않으면 이 시의 알짜맛을 알기 어렵다. 이 시는 조시인의 피눈물이 앙금된 시이다. 조시인은 붓으로 이 시를 쓴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온 몸으로 이 시를 썼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시의 상상에는 재생적 상상, 복합적 상상, 생산적 상상 세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가지 상상중에서 제일 중요한 상상은 생산적 상상이다. 생산적 상상은 기억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 내야 한다. 즉 련상의 기초우에서 새로운 상상의 사물을 생산해 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상상할수 있지만 누구나 다 시를 쓸수 있는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생산적 상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상은 신비스럽고 환상적이며 바로 그러한 상상속에 예술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상속에서 태여난 사물은 실제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허상이다. 조시인은 자기의 시에서 이 허상을 잘 발굴하였다. 세상에는 세가지 보물이 있다. 금,은,옥이다. 시인 조룡남은 잃어버린 청춘을 옥이라고 하였다. 왜 옥이라고 하는가? 귀중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열줄의 짧은 시에서 이렇게 반복하고 있다. . 옥을 파간 자리가 주먹만큼한 것도 아니고 웅덩이 만큼하단다. 사람의 가슴에는 웅덩이라는 것도 없고 옥이라는 것도 없다. 가슴에 웅덩이가 있다는 것은 문학적으로는 통하지만 실제적으로 말하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시에서는 이렇게 새빨간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통하고 있으며, 이것이 곧마로 생산적 상상의 산물인 것이다. 가 좋다고 하는 것은 조시인이 바로 이 창조적 상상에 발을 붙이고 시를 창작하였기 때문이다. 시에서 나오는 웅덩이는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웅덩이가 아니고, 옥은 산이나 들이나 그 어떤 땅에서 캐낸 것이 아닌 언어로만 존재하는 옥인 것이다. 이런 옥이나 웅덩이는 시인의 오관에 의하여 산생하는 것이 아니라 제6감각에 의하여 창출해 낸 것이다. 6감각이란 어떤 것인가? 오관에 의하여 감각을 받았거나 련상에 의하여 떠오른 영상에 의하여 새로운 상상을 떠올린 이미지를 말한다.  조시인은 이렇게 시를 마무리한다. 그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이런 이미지로 이 시의 종지부를 찍었겠는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 아픔의 깊이를 다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허연 소금이란 어떤것일가? 썩지 않는 것이 소금이다. 화자의 생애에 영원히 아물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상처! 그 상처에 고여있는 것은 자연사물로서의 비물과 눈물이 아니라 화자의 설음이, 눈물이 그것도 인간의 뼈에서 우러져 나오는 설음이며 눈물이며 아픔과 한인 것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웃으며 사는 화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울며 사는 화자를 보게 된다. 그 어느 시각, 그 어느 장소에 선들 상처의 모진 아픔을 달래며 감내하지 않았으랴. 여기서 우리는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며 사는 화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조룡남시인이라고 생각할 때 실로 조룡남은 불쌍한 시인이며 울보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고통과 시는 정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시는 외롭기 때문에, 고독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기 때문에 쓴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시는 시인이 받은 스트레스 깊이와 너비에 의하여 심각성이 결정된다고 하겠다. 23년 동안 숨도 제대로 쉬며 살아보지 못한 조시인의 점철한 고통은 하늘이나 알 일이다. 마를줄 모르는 비통을  누구와 이야기하여야 23년 동안 쌓인 아픔과 한이 다 풀릴 수 있었으랴.  시인의 눈에 흙이 들어갔어도 그의 가슴에 패인 웅덩이는 메워지지 않았다. 그냥 력사의 상처로 남아서 후세를 울리고 있다. 영원히 사라질수  없는 이 웅덩이와 옥은 빛나는 등대로 남을 것이다! 조룡남 시인은 해방후 조선족문단에 데뷔한 제1대 시인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 조선족문단의 거목이시다. 이 거목은 력사의 증언자이며 시대의 불행아이며 시단의 기념비이다. 고 조룡남시인이시여 영원하시라.                                 2017년12월  
18    제4회 윤동주문학상시상식 페회사 ㅡ 댓글:  조회:488  추천:0  2019-04-27
제4회 윤동주문학상시상식 페회사 ㅡ 연변동북아 문학예술연구회 회장 최룡관   존경하는 석련화회장님을 비롯한 한국 귀빈 여러분. 친애하는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회원 여러분, 오매에도 바라던 제4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이 조촐하고도 열렬한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리게 되였습니다. 저는 연변동북아문학예술 연구회 회원들을 대표하여. 그리고 저 개인이 이름으로 한국 귀빈 여러분과 오늘의 수상자들에게 열렬한 축하를 보냅니다. 오늘 시상식은 참 잘 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시상식이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안습니다. 윤동주문학상은 중국조 선족문학의 진두에서 활약하고 있는 연변동북아문학예술 연구회에 막대한 힘을 부여하고 있으며, 우리 시문학의 새로운 사조를 견지하고 발전시킴에 있어서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는 문학상입니다. 첫시상식을 올리던 일이 어제 같은데 어느덧 제4회를 영광럽게 진행하였습니다. 4회의 시상식까지 도합 10명 시인들이 하이퍼시문학상을 따내였습니다. 하이퍼시는 연변시단 의 새로운 류파이며 연변시 력사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류파입니다. 시의 류파는 내용에 의하여 형성될수도 있고, 형식에 의하여 형성될수도 있습니다. 우리 하이퍼시류파는 형식에 의하여 탄생되고 발전하는 초현실주의 시 류파입니다. 이 류파는 문학의 본연을 중시하고, 언어의 기능을 중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이퍼시는 컴퓨터 시대, 글로벌시대에 새로운 각광을 받은 시이며. 전기와 후기 구조주의 철학이 뒷받침하고 있는 시이며, 자연사물들의 교감에 부응하는 시이며, 족보를 따져보면 중국고대시가에 원천을 둔 시라고 하겠습니다. 윤동주 문학상이 있었기에 많은 여론의 풍파에도 흔들림이 없이 하이퍼시는 성장발전하였고 인제는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당당한 대오로 성장하였습니다. 우리 연구회에는 국가에서 파견한 20대의 서울대학 박사연구생이 있고, 30대의 박사 도사도 2명이나 합세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구회 회원들은 이 뭔지도 모르고 시를 쓰는 시인들과 다르며, 프로이트 무의식이 뭔지도 모르고 시를 쓰는 시인들과 다르며, 롤랑 바르트의 라는 책이름도 모르는 시인들과 다르며. 자크라캉의 이란 책과 인연을 맺지 않고 시를 쓰는 시인들과 다르며, 질들뢰즈와 필릭스 가타리 저서 이란 책이 있는지도 모르고 시를 쓰는 시인들과 다르며,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를 쓰는 시인들과도 다릅니다.그외에도 해체의 개념도, 하이퍼텍스트 개념도. 구조주의 개념도 전혀 모르고 시를 쓰는 시인들과도 다릅니다. 연변동북아문학예술 연구회는 나날이 향상할것이며, 윤동주 문학상도 나날이 더 잘 되여가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한국 윤동주문학상제정위원회 석련화 회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에게 충심으로 되는 뜨거운 감사를 올립니다. 우리 모두 한피줄을 타고난 형제이고 겨레입니다. 세상이 흔들리여도 우리들의 우정은 변함이 없을것이고, 윤동주문학 상은 드팀이 없이 진행되여 가리라고 믿습니다. 중국조선족 시단에서 하이퍼시의 조류는 흔들림이 없이 발전하리라 믿습니다. 우리 다 함께 열렬한 박수로 제4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막을  내립시다. 감사합니다.  2017년 9월 14일
17    제2회 윤동주문학상시상식 페회사 댓글:  조회:529  추천:0  2019-04-27
제2회 윤동주문학상시상식 페회사   푸른 양떼들이  봄의 언덕을 오르고있는 아주 좋은 날에 우리는 여기에서 제2회 윤동주문학상시상식의 막을 내리게 되였습니다. 저희는 제2회 윤동주문학상시상식을 마련하기 위하여 물심량면으로 지대한 공로를 세우신 혜민고문님과 석련화회장님. 이종철사무국장님과 엄창섭평론가님께 충심으로 되는 경의를 드리며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윤동주문학상 제정위원회 여러분들이 애쓴 덕으로 앞으로도 해마다 줄곧 윤동주문학상을 영위하게 되여 저희와 연변동북아문학예 술연구회는 무한한 긍지와 영광을 누리고있습니다.  윤동주 문학상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의 기치이고, 중국조선족 시단의 새로운 활력소입니다. 윤동주문학상은 연변동북아 문학예술연구회의 브랜드일뿐만 아니라 앞으로 중국조선족시단, 나아가 중국조선족문단의 새로운 브랜드로 자리잡게 될것입 니다.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의 중점연구항목은 하이퍼시입 니다. 연구회는 하이퍼시로써 중국조선족 시단에 사상해방의 폭풍, 시혁신의 폭풍을 일으키고있으며,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고있습니다. 윤동주문학상은 연변동북아문학 예술연구회의 발전의 강대한 응집력이며 뒤심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연구회 회원들의 창작열정이 나날이 높아져 금년 1월10일에 집계한데 의하면 하이퍼시 2500여수를 창작하였고, 시집이 두권이나 출판되였고, 또 두권시집이 중국과 한국의 출판계획에 들어갔고, 중국의 신문잡지와 한국문학잡지에 발표된 하이퍼시는 200여수가 되였습니다. 문학은 새로운 창의와 새로운 언어로 쓰는 탐구길이며 보람찬 길입니다. 윤동주시인은 탐구의 보람찬 길을 걸은 우리민족의 시인이며 별의 시인입니다. 우리 연구회는 윤동주시인의 시탐구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길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것입니다. 한국윤동주문학상제정위원회에 또다시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사업을 책임지고 지도하여 주시는 연변문련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자리를 함께한 작가. 시인, 평론가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래년 이맘때 제3회 윤동주문학상시상식에서 다시 만날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회장 최룡관                                2015년 2월 28일
16    참신하고 신비한 가상현실 / 최흔 댓글:  조회:533  추천:0  2019-04-22
참신하고 신비한 가상현실              최흔                        필자는 박문희 시인과 일년동안 시를 함께 학습하였다. 그는 100여수의 시를 썼는데 오늘 82수의 시로 시집 (아래는 동산으로 략칭)을 내놓는다. 이 시집은 우리 문단에서 나온 네번째 하이퍼시집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규납하면 로 독자들에게 경이로움을 안겨주는 시집이라고 할수 있겠다. 그의 시적작업을 아래와 같은 몇가지 방법으로 고찰해 보고저 한다.        탑식구성을 허물고 평행라렬식구성을    우린 수백년동안 탑식구성의 시를 써왔다. 인젠 탑식구성에 찌들대로 찌들어있다. 그런 뾰족한 탑을 쌓는 종적구성을 뿌리치고 평행라렬식 횡적구성을 창도하고 있는 시집이 박문희 시인의 시집 이다.    허공을 정처없이 맴도는 왕잠자리 까맣게 탄 기다림에 날개짓 짙붉다.   팔매질에 수면을 뛰여가는 조약돌 한마리 새가 되여 날아간다.   이제 바람의 등에 실려 온 낙엽 창턱에 살포시 쪽잠이 든다.   발밑으로 맨발 밑으로 보라빛 그리움이 한길반 높이로 쌓였는데 왜가리 유리병 깡마른 꽃가지 초리끝에 가녀린 상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다 - 전문   는 시집의 첫수이다. 네개련으로 되였는데 앞의 세개련이 각각 한가지 내용이고 마지막 련은 두가지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란 이미지단위이다, 이 다섯개의 이미지들은 독립적인 각자존재다. 그것들은 어느것도 어느것의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다.다시 말해 련관성이 없다. 이러한 이미지라렬은 나 의 대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의 대답으로 되는 이미지들이다. 모두가 어떤 사물의 중간을 뽑아내여 쓴것으로써 련과 련을 바꾸어 놓아도 무리가 없다. 이것이 하이퍼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시인은 이 특점을 잘 살리고 있다 하겠다. 박문희 시인은 에서는 련과 련을 가지고 평행적 라렬을 하였지만 에서는 줄과 줄을 가지고도 평행적 라렬을 하고 있다.   말똥거르기   빗소리 나팔소리 휘파람소리 홰소리 영각소리 돼지 웃는 소리 벼랑가에 쥐 탄놈 노 젖는 소리 물에 튀긴 잡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기름진 엉덩이 두드려 주는 소리 가렵지 않은 넓적 배 긁어 주는 소리 찢어진 상처에 소금치는 소리 소금친 상처를 기워 매는 소리 고속철 맨드라미 기어가는 소리 인공위성 꽁지에 별빛 스치는 소리 고무줄 탄 소똥이 하품하는 소리 종이배 위 말똥이 잠꼬대하는 소리   보는 봐와 같이 시가 모두 열두줄이다. 기본적으로 줄을 단위로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는셈이다. 왜 셈이인가? 첫두줄은 명사들 로 된 이미지 라렬이고, 7,8 행은 중뿔나게 하나의 이미지이다. 시인은 성질이 다른 사물을 한시에다 라렬하고 있으면서 라는 언어를 반복하고 있다. 이 가 바로 링크(련결) 작용을 한다. 에서는 이런 련결작용을 하는 언어가 없다. 그런 시는 초링크라고 하겠다. 행마다 다른 이미지를 쓰는 것은 련마다 다른 이미지를 쓰는 것보다 더 강렬하다고 하겠다. 박시인은 때론 한개련속에서 여러가지 이미지의 라렬을 하기도 한다. 산문적으로 쓴 시에서도 줄이 짧은 시에서도 그런 경향들이 보인다. 하이퍼시는 어떤 방법으로 이미지를 라렬하든 관계가 없다. 그 방법이 여러가지 일수록 좋다 하겠다. 하이퍼시란 이질적인 이미지가 한수의 시에 여러개가 모여있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질적인 이미지란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운동이란 말이겠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은 어느것도 한가지 성분으로 구성된 사물이 없다고 할수 있다. 나무하면 뿌리, 줄기, 가지, 잎, 꽃으로 구성되였고, 돌이라면 철, 불소, 불... 등등에 의하여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고, 사람은 뼈, 피, 살. 똥으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다. 또한 여러가지 사물들은 여러가지 관계속에서 생활하고 있는것이다. 풀은 흙과 개미와 뱀과 해빛과 달빛과 짐승과 곤충과..... 의 관계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다른 사물들도 다 마찬가지다. 사물들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의 구성이 횡적으로 되는것은 사물들의 구성에 순응되며, 자연계의 사물들 관계에 순응하는 일이라겠다. 박문희 시집에서 평행적 라렬의 시들은 중심적인 이미지가 따로 없다. 모두가 밖이고 겉이고 곁이다. 그래서 시가 자연적으로 여러가지 주제를 내포하게 되고 여러가지 해석으로 풀이하게 될것 같다. 색갈이 다르고 모양이다른 이미지들이 한수의 시에 있기에 이미지가 활기를 띠게 된다. 이런 시를 다선시 혹은 다양체라고도 한다. 형상적으로 말하면 한수의 시가 작은 강물이라면 여러 개의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이 징검다리는 풀로 된것도 있고, 돌로 된것도 있고, 범으로 된것도 있고, 나비로 된것도 있고 새로 된 것도 있고, 구름으로 된 것도 있다. 이 징검돌을 건거가는 녀석들은 지렁이도 있고, 진달래도 있고, 꽹가리도 있고, 귀뚜라미도 있고, 번개도 있다. 이러한 사물들은 모두가 변형되여 등장하고 운동한다.   상상속에서 환각 잡기   시는 상상속의 사물을 쓰는 작업이지 현실 사물을 쓰는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자고로 심상(영어론이미지. 한어론 意像)이라고 하였다.  마음속의 사물이란 말이겠다. 그래서 시는 현실사물을 직접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상상속에서 떠오르는 사물의 환각이다.이 환각은 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시인은 이 환각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문자로 고정하여 영원을 기하려고 꿈꾸는 사람이다. 박문희 시인은 이런 이런 시를 쓰기  위하여 심혈을 몰붓고 있는 같다. 그의  마지막시에 이런 시구들이 있다. 1.배부른 아지랑이 만나면 2.굶은 벼락을 만나면 꼬리 베어주고 젖가슴 건졌네. 3.싱싱한 아치 쳐가는 목청 맑은 우물에서 이파리를 피우고 시어 길어 올렸네. 4.맑은 소리 닳여서 약에 쓰고자 5.머릿 속에 잠자던 해맑은 사색 잣송이 색동별로 빛나는 아침 1에서는 배부른 아지랑이라고 하는데 아지랑이에겐 배가 없는데 배가 있다고 그것도 무엇을 많이 먹은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현실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상상속에서 환각속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겠다. 2에서는 굶은 벼락이라고 라고 하는데 1과는 반대다. 벼락도 굶었다고 하는 것은 현실로 보이는 벼락이 아니라 상상속의 환각이겠다. 3에서는 싱싱한 아치 쳐가는 목청이 맑은 우물이라며 그 우물에서 이파리를 피우고 시를 길어 올린다고 한다. 어느것이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에서 오는 환각이라고 밖에 말할수 없다. 4에서는 맑은 소리 닳여서 약에 쓰고자 한다고 한다. 소리는 닳일수 있는 물이 아니다. 상상의 환각으로 떠올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시구가 나오겠는가! 5에서도 그렇다. 해맑은 사색이 잣송이 색동별로 빛난다고 한다. 과히 명창이라겠다. 이것도 환각이라는 이름밖에 더 붙일것이 없다. 환각! 시는 환각을 요구하고 환각은 새롭고도 참신한 이미지로 가상현실을 만들어 놓는다. 가상현실이란 상상으로 창출한 현실이라는 이름이겠다. 이런 가상현실이 시적현실이며, 시적현실이  없으면 좋은 시가 아니 되고, 이런 가상현실을 창출하는 사람이 곧 시인이라고 생각된다. 가상현실 창출에 매료되였을 때에는 시인 자신도 식별할 사이가 없고, 지각할 사이가 없게 되여 이미지가 주문처럼 흘러나오게 되는 것을 어찌할수가 없다. 그것들은 령혼속에 떠오르는 환각상태의 것이지 눈을 뜨고 바라보는 현실적인 사물들이 아니게 된다. 박문희 시인의 시는 가상현실에 모를 박은 것이기에 시의 새로움과 야릇함과 기이함과 아름다움을 획득하고 있다고 하겠다.   성벽깨기로 가상현실을 살지웠다.   우에서 환각으로 가상현실을 만들었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성벽깨기로 가상현실을 만든 박문희시인의 작법을 보기로 하자. 박시인의 성벽깨기는 주요하게 두가지인것 같다. 한가지는 언어의 성벽을 깨는 일이고, 다른 한가지는 사물의 성벽을 깨는 일인것 같다. 언어의 성벽깨기와 사물의 성벽깨기는 불가불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진행된다고 하겠다. 언어의 성벽깨기는 사물의 성벽깨기이고 사물의 성벽깨기는 언어의 성벽깨기이다. 소위 성벽이란 것은 일상적인 규례를 타파하는 것으로서 언어들의 새로운 조합과 사물들의 새로운 전의를 야기시키는 것이라겠다. 먼저 언어의 성벽을 깬 실레들을 보자    1. 동그란 네모꼴과 네모난 동그라미 (창과 방패) 2. 여우의 그림자 둘둘 말아 (수상한 그림자) 3. 낮달의 발뒤축에 매달린 오솔길이 팔자걸음으로 걸어온다. (아침) 4. 공기부스러기로 뜨개를 뜨고 있다. (터널) 5. 다년초의목에 두른 그린벨트는 번개의 날개 자르느라 분주하다. (여름[1]) 6.남새방목을 지켜본 시간의 뜨거운 이빨은 (미래의 행사) 7. 춤사위에 방울져 토실한 젖가슴 기름진 대지의 고름을 서서히 풀며 (가을) 8. 티끌의 숨결에 태산으로 우거진다. (돌의 언어)   상기한 례들을 곰곰히 살펴보면 네모꼴이 동그라미가 되기도 하고, 여우의 그림자를 방석처럼 둘둘 감기도 하고, 낮달의 발뒤축에 오솔길이 매달려 팔자걸음을 걷기도 하고, 공기부스러기로 뜨개를 뜨기도 하고, 그린벨트가 번개의 날개를 자르기도 하고, 시간의 뜨거운 이빨이 나타나기도 하고, 춤사위에 나타난 젖가슴이 대지의 고름을 풀기도 하고, 티끌의 숨결에 태산이 우거지기도 한다. 모두가 일상적인 언어(사물)들의 령역을 벗어나서 당치도 않는 언어(사물)들의 관계를 발생하며 서로 어울려 쟁쟁한 시구들로 사무쳐 오른다. 필자는 이런 짓들을 성역깨기라 한다. 성역을 깨는 일은 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겠다. 성역을 깨는 시구가 없으면 시는 고리타분하게 될것이다. 언어들이 서로서로 성역을 깨며 이미지를 새롭게 돋보이게 하는 수법은 참신하고 신비한 가상현실를 창출하는 핵심적인 시의 기교가 아닐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언어의 성역과 사물의 성역을 깨기 자체가 새로운 의미지 창출의 기본 도경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 성역안에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초롱속에 갇혀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것이다. 사물은 부단히 변화발전하기에 시의 성역도 부단히 변화발전하게 된다. 현실을 부단히 깨지 않으면 안된다. 깬다는 것은 일상적인 관념으로 보면 맞지 않는 언어들을 맞추는 일이고 성질이 다른 사물들이 서로 전의한다는 말이이겠다.  구라파에 가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이런 조각상을 보았다. 프랑스루브르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사자녀자 조각상이 있었고, 범남자 조각상도 있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의 바다가에는 미인어 조각상이 있었다. 이러한 조각상들은 사람과 짐승 및 물고기가 서로 전의되여 통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할것이다. 동물은 모두 머리에 눈코입귀가 있다. 시라는 것은 몇십분의 일초거나 몇백분의 일초의 찰라의 상상속에서 번개처럼 떠올랐다 사라지는 사물의 형상을 착안하므로 범남자, 사자녀자, 미인어들은 모두 통하게 되는 것이다.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먹으며 산다고 할수 있다. 잎이나 줄기나 가지나 다 해빛과 달빛을 먹고 비를 먹고 바람을 먹고 산다고 할수 있으며 모두가 태여났다가 죽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이나 식물이 서로 통하는 점이 있게 된다. 황차 동물도 식물도 짝짓기를 하여 후대를 번식하고 있지 않는가! 세상사물이 천만가지여도 모두가 통하게 되여있고 비슷한 점들이 있게 되고, 세상의 언어들은 서로 자유로이 결합된수 있는 기능이 있다.  시에서 사물(언어)의 이러저러한 변화를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공간이 너무 작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라고 하겠다. 박문희 시인은 이러한 세계관으로 가상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하겠다.    박문희 시를 읽으면 어디서 오는 소리인지 모르는 생신한 소리가 들리고, 어디서 나타나는지 모르는 뜻밖의 사물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새로운 감각을 투영시키고 있다. 시들의 언어들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활발하고도 자유로이 뛰여다니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부르기도 하면서 드라마를 공연하고 있는 같다. 시들의 이미지가 참신하고 신비하고 돌연적이여서 독자를 아찔하게 자극하기도 하고 머리를 젖게도 하고 감탄하게도 하고 탄복하게도 한다. 이런 것들이 박문희 의 시집이 우리에게 주는 가상현실의 작용이라겠다.    박문희 은 약점이 있기도 하다. 때론 큰 소리로 말하여 언어의 섬세한 점이 약하기도 하고, 고유어살리기를 무시하고 한자어를 심하게 아끼기도 하고, 의 토들이 절제되지 못한 구석들도 보인다. 앞으로 초링크만 쓰지 말고 링크가 시속에 직접 작용하는 시들을 더 많이 썼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질 들뢰즈와 필릭스 가타리가 (784쪽)에서 한 말을 덧붙이고 싶다.                      2917.3.22
15    어곡전마을 하이퍼시 세미나 개막사 / 최흔 댓글:  조회:487  추천:0  2019-04-22
어곡전마을 하이퍼시 세미나 개막사  / 최흔   시인 여러분 귀빈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년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가 5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들은 처음으로 외지에 나와서 하이퍼시 연구회를 하게 되였습니다. 저는 회장단을 대표하여 이 모임에 참석해주신 도라지 잡지사 주필 이상학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이 모임을 위하여 후원을 맡아주신 병원 원장이며 시인이신 오정묵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세미나에 참석하신 회원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5년동안에 우리는 아래와 같은 거창한 일을 해내였습니다. 방순애는 하이퍼시집 두권을 발간하였고, 문학에 무깍지였던 방산옥은 두번째 하이퍼시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원로시인 김파는 하이퍼시집으로 윤동주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외에도 황정인, 최려나 , 려순희, 김철호, 윤청남, 김향옥, 김봉순 등 시인들도 여러가지 상을 따내였습니다. 요즘은 최룡관 시인이 전국소수민족문학상 준마상을 따내였습니다. 모두가 경하하고 감축할만한 일들이였고 사변들이였습니다.   하이퍼시는 중국조선족시궤도와 세계적인 시궤도를 이어놓는 대사입니다. 이런 대사를 완성하기위하여 여러분들은 책도 많이 읽었고 시도 많이썼습니다. 우리에게 문을 열어준 도라지 잡지사 리상학주필에게 또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2014년으로부터 우리시 특간을 조직하여 주었습니다. 머지 않는 장래에 금년의 특간도 나올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기에 21페지나 되는 하이퍼시를 내주었다는것은 류례없는 거사였습니다. 우리는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조지 p란도가 쓴 로부터 시작하여 푸랑수아 도스가 쓴 ,테렌스 호옥스가 쓴 , 가스통바슐라르가 쓴 , , 프로이트가 쓴 을 거쳐 자크 라캉이 쓴 , 자크데리다가 쓴 , 질들뢰즈와 필릭스 가타리가 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보았습니까. 중국고전인 , , , 등도 읽었 습니다. 한국의 심상운이 쓴 문덕수가 쓴 등등 책들도 읽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책들에서 시의 본질을 알게 되였고 시의 기교를 장악하게 되였습니다. 이번에 룡정시 어곡전 마을에서 진행하는 하이퍼시 세미나에서는  두가지 돌파를 꿈꾸고 있습니다. 한가지는 시인이 평론을 쓰는 문을 열자는 것이며 다른 한가지는 동시도 하이퍼동시문을 열자는 것입니다.우리말에 시작이 절반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면 된다는 기백으로 앞으로 이 두가지를 잘 해낼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의 시인들은 3,40년을 시를 쓰면서도 평론 한편을 쓸 엄두를 못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세미나로부터 이 력사에 종지부를 찍을것입니다. 평론이라면 박사들만 하는가하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시인이 시만 쓰면 외다리로 걷는것이고 평론까지 하여야 두다리로 걷게 되는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준있는 시인이라면 시도 쓰고 평론도 썼습니다. 평론을 쓰노라면 시 기교를 똑똑하게 장악하게 되여 시도 잘 써질것입니다.   하이퍼동시를 쓰는 것은 중국조선족동시단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입니다. 종적구성의 동시를 쓰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하이퍼동시를 공개적으로 들고 나오는 것은 아마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가 처음으로 추켜든 기발로 될것입 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해내야 하며 해낼수 있을 것입니다. 윤동주에게도 하이퍼동시가 있었습니다. 강어금 시인은 100여수의 하이퍼동시를 썼고, 김봉순시인은 하이퍼동시로 두번이나 상을 받았습니다. 동시인들은 하이퍼동시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창작에 림하기를 바랍니다. 이것도 한차례의 동시혁명입니다. 혁명의 패자가 되지 말고 승자가 되여야 할것입니다. 이번 하이퍼세미나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8월 6일,      
자연 제일의 꿈을 꾸는 -         (2015.2)에 실린 이종철시인의 시를 보고 /최흔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라는 저서 36쪽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필자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지적에 맞는 시 한편을 보는 행복을 누리였다. 그 시가 바로 이종철시인의 시 였다. 이종철시인은 어머니와 자연을 유기적으로 융합하여 어머니에 대한 애모와 숭경과 사랑을 으로 표현하고 있다겠다.  이렇게 시작하는 가 례사롭지가 않다. 령적세계로 가신 어머니를 으로 변형시키고 또렷한 로 변형시켜서 어머니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였다고 한다.   시인은 변형을 통해서 상상과 꿈을 융합시켜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고있다. 별, 어머니가 자연의 일속이였다는 것을 직시한것이며 시인이  우주와 대화하고 있다는것을 암시하고 있는것이다. 망망한 밤하늘 아래서 타계하신 어머니를 애타게 그리는 시인의 모습이 짜릿하 게  안겨온다. 시인은 어머니를 멀리 보냈지만 보내지 않고있다. 어머니는 이 되여 시인의 지척에 있다. 별이 되였던 어머니가 신변의 등불로 전의까지의 어머니에 대한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절절하겠는가를 우리는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게 된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보내지 아니한 시적화자라고 말할수 밖에 없지 않을가. 라는 바슐라르의 지적은 일련에서 증명된 이미지였지만 시인은 2련에서도 이를 부각하고 있다겠다. 와 이 어머니의 으로, 로 재구성되는 2련이다. 사물이 사물을 떠나고 언어가 언어를 떠나는 시인의 상상력은 더 깊은 곳으로 달리고있다겠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현실물인것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속에 떠오른 환영들이라고 할수 있겠다. , , . 들은 시인의 감성을 표현하는것으로서 감각적이다.  시인이 여기에서 추구하려는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허상으로써 이 되였던 어머니를 자연속으로 돌려보내는 감성이며 언어들이라고 하겠다. 이런 언어들은 원초적인 경지에 도달하려는 시인의 추구라고 볼수 있겠다. 3,4련에서는 시인은 이 되여 푸른 숲속에서 목을 빼들고 울부짖는다. 어머니를 여읜 시인의 설음과 비통함과 애절한 그리움이 산꿩의 울음으로 되여 오뉴월의 하늘에 차고넘친다. 울음속에서 시인은 조용한 미소로 동년의 자아를 잠재워주던 어머니께서 불러주던 를 듣고 있다. 이 는 실은 자연이 불러주는 자장가이며 하늘이 불러주는 자장가라겠다. 이종철시인은 어머니를 통하여 어머니가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라기보다 자연과 하나로 된 어머니임을 알려주고 있다. 어머니는 자연이고 자연은 어머니라고. 그래서 시종 모자간의 일상을 떠나서 자연물과 련계시키면서 시를 끌고 나갔다고 할수 있겠다. 여기에서 시에 득달한 이종철시인의 창의와 발견이 엿보인다고 할수 있겠다. 인간을 자연화하고 자연을 인간화하는 역동적인 이미지들이 독자의 사색을 부풀리고 있다겠다. 시의 각련들을 살펴보면 불연속적이라는 조지P란도의 말이 떠오른다. 어머니라는 이 시는 련과 련이 각각 독립적인 이미지로 되여있다. 종적보다 횡적으로 배치되여서  각련들을 마음대로 바꾸어놓아도 시는 손색을 받지 않게 된다. 시구성이 신흥하는 새로운 기법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이종철시인의 를 읽으면서 필자는 오늘의 문학시대가 신의 제일 시대도 아니고, 인간 제일 시대도 아니고, 자연 제일 시대라는 생각이 스스럼 없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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