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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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21.추상적인 기계들(도표와 문) 끝 댓글:  조회:393  추천:0  2021-05-02
21.추상적인 기계들(도표와 문)971   기계란 탈영토화 과정에 있는 배치물에 삽입되여 배치의 변화와 변이를 그려내는 첨점들의 집합이다.(동상 633)   기계들은 언제나 하나의 배치물이거나 영토를 열거나 닫았다 하는 특이한 열쇠인것이다. … 기계는 표현의 질료가 출현할 때, 즉 배치가 성립할 때 이미 개입하고 있는 것이며, 배치물이 성립되는 시점부터 재빨리 배치에 작용하 는  탈영토화의 백터에도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상635)   추상적인 기계는 배치물들의 모든 탈령토화의 첨점들을 구성하고 결합한다.(동상270)   추상적인 기계 자체는 물리학적이거나 물체적이지도 않고 기호적 이지도 않다. 그것은 도표적이다(그것은 인공 과 자연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추상적인 기계는 실체 가 아니라 질료에 의해 작동하며, 형식이 아니라 기 능에 의해 작동한다. 실체들과 형식들은 표현 “또 는” 내용과 관련된다. 하지만 기능들은 아직 “기호계 적으로” 형식화되여 있지 않으며, 질료들은 아직 “물 리학적으로” 형식화되여 있지 않다. 추상적인 기계는 순수한 ㅡ, 즉 도표이며, 이 도표가 분배 할 형식들과 실체들, 표현들과 내용들과 독립해 있다 … 결과적으로 도표는 실체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며, 내용도 아니고 표현도 아니다. (질 들뢰즈/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271)   우선 플라톤의 이데아같은 초월적이며 보편적이고 영원한 추상적인 기계 또는 추상적인 기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구체적 배치물들 속에서 작동 한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배치물들의 네번째 측면, 즉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점들에 의해 정의된 다.추상적인 기계들은 이 첨점들을 그린다. 또한 추상적인 기계들은 영토적 배치물을 다른 사물 위 에, 다른 유형의 배치물들 위에, 분자적인 것 위 에, 우주적인 것 위에 열어놓으며, 생성들을 구성 한다. 따라서 추상적인 기계들은 항상 독자적이며 내재적이다. 지층들에서, 그리고 다른 측면하에서 고 려된 배치물들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반대로 추상적인 기계들은  형식과 실체들을 알지 못한다.  바로 이 점에서 추상적인 기계들은 추상적인데, 또한 이것이 바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계 개념이기도 하다. 추상 적인 기계들은 모든 기계론적 기계 장치를 초과한 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통상적인 의미의 추상적인 것 과도 대립한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과 형식적이지 않은 기능들로 이루어져있다.    각각의 추상적인 기계는 질료ㅡ기능들의 다져진 집합(계통과 문)이다. 기술의 “판”에서 이것을  잘 볼  수 있다. 기술의 판은 형식화된 실체들(가령 알루미 늄, 플라스틱, 전선 등)이나 조직하는 형식들(가령 프로 그램, 모델 등)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열함의 정도들(저항, 전도성, 가열,  연장, 가속 또는 지연, 유 도, 형질도입…)만을 나타낼 뿐인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과 비분 방정식 또는 더 일반적으로 “텐서”만을 나타낼 뿐인 도표적 함수들의 집합으로 만들어진다. 분명 배치물의 여러차원 안에서 추상적인 기계 또는 추상적인 기계들은 다양한 자유상태를 갖는 여러 형식들과 실체들 속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동시에 추상적인 기계는 자신을 조성하고 고른판을 조성해야만 했다. 추상적이며, 독자적이고 창조적 임, 지금 여기에 있음,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실재 적임,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임, 추상적인 기계 들에 날자와 이름이 붙어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인슈타인ㅡ추상적인 기계, 베베른ㅡ추상적인 기계, 나아가 갈릴레오, 바흐. 베토벤 등ㅡ추상적인 기계, 이는 추상적인 기계가 인물이나 실현하는 순간을 가리키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이름과 날자야말로 기계의 독자성과 그것의 실현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천개의 고원972)   그러나 추상적인 기계들이 형식과 실체를 알지 못한다면 지층도 또는 나아가 배치물들의 또 다른 규정인 내용과 표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 구분 역시도 추상적인 기계와의 관계에 의해 적실성을 잃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추상적인 기계는 이러한 구분의 조건이 되는 형식과 실체를 더 이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른판은 하나의 연속적 범주의 판이며, 각각의 추상적인 기계는 내 용과 표현의 변수들을 연속시켜주는 변주 의 “고원”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내용과 표현 은 거기에서 각각 가장 높은 상대성에 이르게 되 며, “하나의 동일한 함수의 기능소”나 하나의  동일 한  질료의 재료가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의미에 서  이 구분은 특질이라는 상태에서 존속하고, 심지어 재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내용의 특질들 (형식화 되지 않은 질료들 또는 강렬함들)과 표현의 특질 들 (비형식적 기능들 또는 텐서들)이 있다. 여기서 이 구분은 완전히 대체되거나 새롭게 된다.    이제 그러한 구분은 탈영토화의 첨점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탈영토화는 “탈영토화 하는 것” 과 ” 탈영토화 되는 것”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리고 각 경우마다 하나는 표현에, 다른 하나는 내용에 분배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행해지지만 언제나 이 둘 사이에는 상대적 구분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연속적 변주는 필연적으로 내용과 표현을 모두 변용 시키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여전히 하나의 동일한 생성의 요소들로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흐름의 양들로서 두가지 비대칭적 역할을 분배한다. 따라서 내용과 표현을 식별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이들 둘을 동시에 취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식별불가능하게 되는 것의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두 극을 결정하기 위해 이들 둘가운데 어느 한쪽을 통해 진행할 수도 없는 연속적 변주는 정의할 수가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내용의 특질들이나 강렬함들, 표현의 특질들이나 텐서들을 동시에 정의해야만 한다.(부정관사, 고 유명, 부정사, 날짜) 이것들은 고른판 위에서 서로 끌 고 가면서 교대된다. 요컨대 형식화되지 않는 질료, 즉 문은 결코 죽은, 천연 그대로의, 등질적인 질료가 아니라 독자성들 또는 들, 질들, 그리고 심지 어 조작들까지도 포함하는 운동ㅡ질료인 것이다. (순회하는 기술의 계통), 또한 비형식적 기능, 즉 도표는 비표현적이고 통사법을 결여한 메타ㅡ언어가 아니라 언제나 자국어 내의 외국어, 언어 속의 비언적 범주들을 포함하고 있는 운동ㅡ표현성이다(유목적인 시적 계통). 이리하여 형식화되지 않는 질료라는 실재의 차원에서 글을 쓰면, 이와 동시에 이 질료는 비형식적인 언어 전체를 가로 지르고 긴장시킨 다. 카프카의 생쥐, 포프만슈탈의 쥐, 모리츠의 송아지 에서와 같은 동물ㅡ되기, 혁명적인 기계는 실재적인 만큼 더욱더 추상적이다. 그것은 기표에 의해 진행 되는 것도 아니고 주체적인 것에 의해 진행되는 것도 아닌 하나의 체계이다(천개의 고원 974)   내재적이며 독자적인 추상적인 기계는 이와 같다. 하지만 특정한 추상적인 기계가 매우 특수한 조건에서 초월적인 모델로 기능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구체적 배치물들은 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과  관련되며, 그것들이 기계를 실현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들의 잠재성과 창조성을 고려하는 계수들에 의해 변용된다. 배치물들을 ”양 화하는” 계수들은 배치물의 가변적 성분들(영토, 탈영토화, 재영토화, 대지, )과 관련되여 있으며, 또한 배치물의 “지도”를 구성하는 다양하게 얽힌 선들(그램분자적 선, 분자적 선, 도주 선) 과도 관련되여 있고, 나 아가 각각의 배치물과 고른판의 상이한 관계들(계 통과 문)과 관련되여 있다. 예컨대 “풀한포기” 라 는 성분은 아주 근방에 있는 종들의 동물적 배치물들을 가로 질러 계수를 바꿀 수도 있다. 일반적인 규칙에 의하 면, 하나의 배치 물은 사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윤곽 없는 선들을 더 많이 제시하면 할수록, 또한 기 능ㅡ질료에 대응하는 변신(변형과 실체변화)의 역량을 더 많이 발휘하면 할수록 추상적인 기계와 더 친 화적이게 된다. 예컨대  기계가 있다.(동상 974)   우리는 특히 이형 조성적이고 인간 형태의 두 가지 거대한 배치물인 전쟁 기계와 국가 장치를 살펴보았다. 본성상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추상적인 기계 와 관련해서도 서로 다르게 양화된다는 점에서 이 둘 배치물은 문제적이다. 이 둘은 문 및 도표와도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며, 또한 동일한 선들, 동일한 성분들을 갖고 있지도 않다. 이 두 배치물과 그것들의 계수들을 분석해보면 전쟁 기계 자체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국가 장치에  의해 전유될 때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 드러난 다. 또한 바로 정확히 이 지점에서 도주선 그리고 이 선이 실현시키는 추상적인 생명선은 죽음과 파괴의 선으로 전환한다. 따라서 전쟁 ”기계”는 그것의 변 신 역량을 잃게 만드는 국가 장치보다는 추상적인 기계에 더 가까이 있다. (여기에서 전쟁 “기계”라는 이름 이 나왔다). 글과 음악은 전쟁 기계일 수 있다. 배 치물들은 연결접속들을 더 많이 열어놓고 배가시 킬수록, 또 강렬함들과 다짐을 양화하는 장치들을 가지고 고른판을 더 많이 그릴수록 그만큼 더 살아 있는 추상적인 기계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배치물이 창조적인 연결접속들을, 블록화를 만들어내는 접합 접속들(공리계들),  지층을 만들어내는 조직들(지층 측정기들), 검은 구멍을 만들어내는 재영토화들 (절편 측정기들), 죽음의 선들로의 전환들(파괴측정기들)로 대신할수록 그것은 추상적인 기계에서 멀어진 다. 이처럼 연결접속을 증대시키도록 고른판을 그리는 능력에 따라 배치물들의  선별이 실행된다. 분열 분석은 배치물과 관련한 추상적인 기계들에 대한 질적 분석임 뿐만 아니라 순수하다고 상정되는 추상적인 기계와 관련한 배치물들에 대한 양적 분석이기도 하다.(천개의 고원973)   아직 마지막 관점, 즉 유형하적 분석이 남아있다. 왜 냐하면 추상적인 기계들의 일반적인 유형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른판의 특정한 추상적인 기계들은 지층 들, 나아가 배치물들을 구성하는 조작들 전체를 소진시키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층들은 고른판 그 자체에 “달라붙어서”, 거기에서 다른 판의 축들 (형 식ㅡ실체, 표현ㅡ내용)에 따라 조직되고 전개될 조밀 화, 응결, 대(带)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각각의 지층은 고름의 통일성 또는 조성의 통일성을 갖고 있는데, 이 통일성은 우선 실제적 요소들 및 형식적 특질들과 관련되며, 이 다른 판을 주재하는 전적으로 지층적인 추상적인 기계를 증언한다. 그리고 세번째 유형이 있다.  즉 탈영토화를 재영토화 로, 그리고 특히 탈코드화를 덧코드화의 등가물로 상쇄해주는 추상적인 기계들의 배치물 특유의 이형 조성적 지층들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추상적인 기계들은 배치물들을 닫아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보았다. 명령어 기계는 언어를 덧코드화하고, 얼굴성 기계는 몸체와 심지어 머리를 덧코드 화하며, 노예화 기계는 대지를 덧코드화 하거나 공리 화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코 환상이 아니라 실재적인 기계적 효과 들이다. 이때 우리는, 배치물들이 고른판의 추상적인 기계와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지를 양적인 눈금에 따라 측정할 수는 없다. 서로 끊임없이 작용하고 또 배치물들에 질을 부여하는 추상적인 기계들의 여러 유형이 있다. 가령 독자적이고 변이를 만들어내며, 다양한 연결접속들을 가진 고름의 추상적인 기계들, 고른판을 다른 판으로 둘러싸는 성층작용의 추상적인 기계들, 총체화, 등질화, 페쇄적 접합적 속에 의해 진행하는 공리계 또는 덧코드화의 추상적인 기계들과 연관되어있다. 추상적인 기계들이 정치적, 경제적, 과학적, 예술적, 물리적, 기호적이기 때 문만이 아니라 서로 경합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상이한 유형들을 교차시키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 /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976)                          (끝. 경자년 설 전후)           [영어단어해석]   노드; 사이트를 구성하는 기본단위. 책에선 페지 도그마;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 데크닉; 데크니크, 수법, 기술 아우라; 예술작품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 다른 것과 구별되는 개성적 분위기. 파롤(빠롤); 소쉬르의 언어, 말, 가변적 개인적. 문학작품 언어. 랑그; 체계속 언어, 구조적 사회적. 모든 언어. 메커니즘; 어떤 대상의 작동원리나 구조 그래픽; 그림이나 사진을 위주로 편집한 지면이나 인쇄물 시퀀즈; 시간, 장소, 사건으로 한개의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단위. 삽입. 디페랑스; 차연. 차이와 지연.              이것임-주체 없는 객체화 무의식- 무의식은 상징을 생산하는 빈장소. 공장처럼 기능하는 빈장소 (따라서 표현이 아니라 생산이 문제이다) 리좀ㅡ 계층도 중심도 없고, 초월적인 통일도 또 이항대립이 대칭적인 규칙도 없으며, 단지 끝없이 련결되고 도약하여 일탈하는 요소의 련쇄이다.981 카오스ㅡ 무질서982 고원- 표면적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연결 접속되여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 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 부른다. 여러 가지 상징이 모여 있는 곳. 집단적행위-다양체 고른판=리좀증식. 이미지모음. 기관 없는 몸체 ㅡ 리좀499 입자-기호들-미립자들 지층ㅡ 사슬이며 집게이다305 CsO는 이행의 성분인 것이다. 밀도. 303 타자ㅡ 차이   [텐서(Tensor)] 변환 형식과 관련된 것으로 행렬로 표현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텐서의 정의는 '좌표변환 하에서 특정한 변환법칙을 따르는 양'이다. 물론 수학적으로 들어가면 쌍대공간. 텐서의 뜻: 삼차원 공간에 있어서 9개의 성분을 가지며, 좌표 변환에 의해 좌표 성분의 곱과 같은 형의 변환을 받는 양.   [마이다스] 뜻  미다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아의 왕) 뜻  ① 손에 닿는 것을 금으로 바꾸는 그리스신화의 왕                   [참고서] ‘하이퍼 텍스트 3.9’조지p 란도 작 커뮤니케션북스 ‘구조주의와 기호학’  테렌스 호옥스 작  서울 신아사 ‘글쓰기 0도’ 롤랑 바르트 작  동문선 ‘해체’  자크 데리다 작 김보현 편역  문예출판사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니콜러스 로일 작  앨피 ‘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필릭스 가타리 작  새물결 ‘물과 꿈’  가스통 바슐라르 작  문예출판사 ‘구조주의 역사’   푸랑수아 도스 작  동문선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우치다 타츠루  작  갈라파고스 ‘욕망 이론’  자크 라캉 작 문예출판사  
221    20. 여러 가지 개념 댓글:  조회:323  추천:0  2021-04-30
20. 여러 가지 개념     주체화는 도주선에 긍정적 기호를 강요하며, 탈영토화를 절대에까지 가져가며, 강렬함을 가장 높은 정도까지 가져가고, 잉여를 재귀적 형식으로까지 가져간다. (질 들뢰즈/ 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57-258)   코키토(인간중심의 주제 편자)는 항상 다시 시작하 며, 정념 또는 불평은 항상 되풀이 된다. 모든 의식은 제나름의 죽음을 추구 하고, 모든 열정-사랑은 제 나름의 끝을 추구 한다. 이것들은 검은 구멍에 끌려가며, 모든 검은 구멍들은 함께 공명한다. 이를 통해 주체화는 도주선에 끊임없이 그 선을 부인하는 절편성을 강요하며, 절대적 탈영토화에 끊임없이 그것을 가로 막고 우회시키는 소멸의 점을 강요 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표현의 형식들 또는 기호체제들은 여전히 지층이기 때문인 것이다. (천개의 고원258)    자신을 정점을 향해 가게 하지도 않고 외적인 종결에 의해 중단되게 하지도 않는 그런 방식으로 구성되는 연속적인 강렬함의 지역들을 베이트슨은 고원이라고 부른다. …CsO는 이행의 성분인 것이다.(동상 303)   CsO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다. 바로 유기체가 적인 것이다. CsO는 기관들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라고 불리는 기관들의 이 같은 조직화와 대립 한다. … 몸체는 몸체이다. 몸체는 혼자이다. 또한 기관들 을 필요로  하지만 않는다. 몸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는 몸체의 적이다.(천개의 고원304-305)    CsO를 너무 결렬한 동작으로 해방하거나 신중하지 못하게 지층들을 건너뛰면 판을 그려내기는 커녕  당 신  자신을 죽이게 되고 검은 구멍에 빠지고 심지어 파국 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동상 308)   련결접속하고 집합접속하고 연속시켜라… Cs0는 바로 이런식으로만 욕망들의 연결접속,  흐름들의  집합접속, 강렬함들의 연속체로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천개의 고원309)   얼굴성(이미지)은 구체적인 얼굴들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태여난다. 이 기계는 기표에 흰 벽을 주고 주체화에 검은 구멍을 주는 것과 동시에 얼굴들을 생산한다. 검은 구멍ㅡ흰 벽의 체계는 따라서 이미 얼굴이 아니라 톱니바퀴의 변형 가능한 조합들에 따라 얼굴을 생산하는 추상적인 기계이 다. 추상적인 기계가 그것이 생산하는 것, 그것이 생산할 것과 닮았으리라고 기대하지 말자. (동상323)   얼굴의 문헌에서 시선에 대한 싸르트의 텍스트와 거울에 대한 라캉의 텍스트는 현상학의 장에서 반성되거나 구조주의의 장에서균열된 주체성 인간성의 형식을 지시한다는 오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선은 시선 없는 눈, 얼 굴성의 검은 구멍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에 불과 하다. 거울은 얼굴성의 흰 벽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 에 불과하다.(천개의 고원328)   검은 구멍-흰벽으로 구성되여 있는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가 기능하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당위나 요소들과 관계되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의 선택과 관계 된다.(천개의 고원338)   얼굴,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자연스럽게도 얼굴은 모공 들, 평평한 부분들, 뿌연 부분들, 빛나는 부분들, 하얀 부분들, 구멍들을 가진 달의 풍경이다…얼굴을 비인 간화하기 위해 그것을 클로즈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커다란 판이며 , 자연스럽게 비인간적이며, 괴물적인 복면이다.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얼굴은 기계에 의해 생산되며 그리고 기계를 작동시키고, 탈령토화를 부정적인 것 안에 두면서도 절대에까지 밀어붙이는 특수한 권력장치의 요구들을 위해 생산되기 때문 이다(동상 362)   모든 번역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단 하나의 표현의 실체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기호론적 스크린과 그 요 소들을 보호하는 벽을 이용한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이산적이고 디지털화 되고 탈영토화된 요소들을 통해 진행되는 기표작용적 사슬들을 구성하고있다. 우리는 오직 외 부의 그어떤 폭풍도 사슬들과 주체들을 끊어가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만 두개의 사슬들 사이에서 또는  한 사슬의 각점에서 주체적 선택들을 이루고 있다. 우리 는 오직 중심의 눈을, 다시 말해 지배적인 기표 작용 들 못지 않게 지정된 변용태들을 초과하고 변형시키는  모든 것을 포획하는 검은 구멍을 소유하는 한에서만 주체성들의 씨실을 형성할 수 있다. 게다가 어떤 언어가 언 어로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부조리하 다. 특정 언어는 언제나 자신의 언표들을 고지하며 유통 중인 기표들이 해당 주체들과 관련해서 언표들을 가득 채우는 얼굴들 안에 사로잡혀있다. 선택들이 인도되고 요 소들이 조직되는 것은 바로 얼굴들 위에서이다. (천개의 고원342)     우리는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으로 절편화된다. 인간은 절편적 동물이다. 절편성은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지층들에 속해 있다. 거주하고, 왕래하기, 노동하기, 놀이하기 등 체험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절편화된 다. 집은 방의 용도에 따라 절편화  된다. 거리는 마을의 질서에 따라 절편화 된다. 공장은 노동의 작업의 본성에 따라 절편화 된다. 우리는 사회와 계급,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 거대한 이원적 대 립에 따라 이항적으로 절편화된다.(천개의 고원397)   이질적인 사회적 절편들사이에는 커다란 소통 가능성이 있어서, 한 절편과 다른 절편이 이어짐이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동상398)   중앙의 뇌 그자체는 뇌의 모든 대체 기능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러한 대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보다 더 절편화된 하나의 벌레이다.(천개의 고원399)   절편성과 중앙집중을 대립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절편성의 두 류형을 구분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는 원시적이고 유연한 절편성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적이고 견고한 절편성이 다.(천개의 고원400)   절편들 각각은 나름의 측정 당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편들 사이에는 단위들이 등가성과 번역 가능성이 있다. 중앙의 눈은 그것이 자리바꿈을 하는 공간을 상관물로 갖고 있으며, 이 자리바꿈과 관련해서는 그자체로 불변항으로 남아있다.(천개의 고원403)   견고한 양태 아래에서 이항적 절편성은 그자체로 유효하며,접적 이항화의 거대 기계들에 의존하는 반면, 유연한 양태 아래에서 이항성들은 “n차원을 가진 다양체 들”의 결과로부터 생긴다.(동상404)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은 크기, 단계, 자원 뿐만 아니라 고려되는 좌표계의 본성에 의해서도 구분되느 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절편이라는 말은 그램분자적 조직을 위해 놔두고 분자적 조성에 대해서는 적합한  다른 말을 따로 찾아야만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잘 규정된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을 정할 수  있을  때 면 항상 우리는그 선이 다른 형식하에서 량자들로 이루어진 흐름으로 연장된다는 것을 보아왔다.(동상413)   항상 무엇인가가 도주하고 있다.(천개의 고원414)   운동들은 모순들이 아니라 도주들이다.(동상418)   모방이란 흐름의 파급이다. 대립이란 흐름의 이항화, 이항 구조이다. 발명이란 다양한 흐름의 결합 또는 연결접속이다.(동상414)   상징에서의 지성은 비률에 기반한 류비를 비율 관계에 기반한 유비로, 한 유사성들의 계렬화를 차이들의 구 조화로, 항들의 동일화를  관계들의  동등성으로,  상대 적 변신을 개념 내부에서의 은유로, 자연문화의 거대한 연속성을 자연과 문화간에 유사성 없는  대응관계 를  배분하는 깊은 단층으로, 나아가 기원적 모델의 모방 을 모델 없는 최초의 미메시스(재현) 그자체로 대신한다.  … 구조주의는 커다란 혁명이였다.(천개의 고원450)   지각은 사물들 사이에, 자신의 고유한 근방의 집합 안에, 어떤  안에 있는 다른 어떤  의 현존으로서, 어떤  에 의한 다른 어떤 의 포착으로서, 어떤  에서 다른 어떤 으로의 이행으로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 니 운동들만 주시할 것.(천개의 고원534)   는 기초적인 표현의 사슬을 구성하며, 가장 덜 형식화된 내용들과 상 관 관계를 맺는다… (동상499)   점 체계의 주요 특성을 요약하자. 1) 점 체계는 두가지 기본선, 즉 수평선과 수직선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선 은 점들을 지정하는데 쓰이는 좌표로서 기능한다. 2)수평선은 수직으로 중첩 될 수 있고 수직선은 수평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그런식으로 수평의 주파수와 수직의 공명이라는 조건 아래서 새로운 점들이 생산되거나 재생산된다. 3)어떤 점에서 다른 점으로 선이 그어질 수(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려지는 경우 그것은 위치를 정할 수 있는 연결선의 형태를 취한다. 이경우 사선은 층위와 시기가 서로 다른 점들을 위한 연결선의 역할을 하며, 서로 인접하거나 떨어진 다양한 수평과 수직의 점들과 함께 빈도의 공명을 만들어낸다.(동상558)   목소리와 악기는 동일한 판 위에서  어떤 때는 대결 관게로, 어떤 때는 대행 관계로, 또 어떤 때는 교환이나 보충 관계로 옮겨진다. (질 들뢰즈 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581)   새는 성악이지만 곤충은 기악이다.(동상582)   분자(이미지)적인 것은 원소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을 소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바로 분자 적인것이 형식을 해체시키기  때문이다… “테마”는 이미 변주였다.(동상583)   원소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이 블록, 우주의 섬유, 사선 또는 복합공간을 만든다.(동상584)   환경은 카오스에 열려있으며, 이 카오스는 환경을 소진 시키거나 침입하려고 위협한다. 그러나 환경은 카오 스에 맞서 반격에 나선다. 이것이 바로 리듬 이다.(동상594)   리듬은 동질적인 시간ㅡ공간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블록들과 겹쳐가면서 작용한다. 방향을 바 꾸어나가는 것이다. (질 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595)     리듬을 갖는 것은 차이이다.(동상 596)   질이 바로 서명이다. 그러나 서명이나 고유명은 환전히 형성된 주체의 부호가 아니라 스스로의 영역이나 영토 를 형성해 나가는 주체의 부호이다. 서명은 한 개인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영토를 형성하는 불확실한 행위 이다. (천개의 고원600)   표현적인 질이나 표현의 질료는 상호 유동적인 관계를 맺는데, 그러한 관계는 표현적 질이 제공하는 영토와 관련해 충동이 만들어내는 내부 환경과의 관계를, 또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외부 환경과의 관계를 “표현 해 나간다.”(천개의 고원602)   표현적 질들은 또한 다른 내적 관계를 맺으며, 이러한 관계가 영토적 대위법이 되는 경우도 된다.(동상 603)   고름문제는 분명 하나의 영토적 배치의 성분들을 동시에 성립시키는 방식과 관계되여있다 (질 들뢰즈/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621)…   고름은 필연적으로 다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동상628)   고름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표현의 질료는 모티프와 대위법을 형성하는 소질 뿐만 아니라 표현의 질료에 작용 하는 억제 인자와 시동 인자와 관련하여 검토되어야 하며 또 표현의 질료를 변화시키는 생득성 또는 학습, 유전 혹은 획득 메커니즘과 관련해서도 함께  검토되여 야  한다 .(천개의 고원630 )   타고난 것은 생득 그자체라 하여도 탈코드화 생득이며, 또 획득  바로  그자체라해도 영토화된 획득인 것이 다.  타고난 것이란 영토적 배치물 속에서 생득과 획득 이 취하게 되는 새로운 양상을 가리킨다.(동상631)   고름집합은 매우 이질적인 성분들이 모여 다져지고, 형상ㅡ질의 규칙적인 연대신 계층의 단락 또는 역전된 인과 관계를 가진 차원들이 나타나 이질적인 재료와 힘 사이에 포획관계가 성립하는 경우에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마치 기계적 문 또는 탈지층화하는 횡단적 성의 요소, 차 원,  형상과 질료, 그램분자 상태와 분자 상태를 가로 질러 질료를 풀어놓고  힘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동상 637)   생명의 장은… 한편으로는 매우 복잡한 성층작용 체계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위와 형식, 실체를 전복시키 는 고름의 집합을 말이다. (동상638)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분열은… 중요한 분렬이란  우리가 어떤 곳을 볼 때 접하게 되는 한계성을 의미한다. 응시는 시야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을 상징하 며,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접하게 되는 경험, 즉 거세 공포를 형성하는 결여로 우리에게 제시된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205)   연구 노트는 바로 장갑의 손가락에서 안과 밖이 서로 바뀐 구조에 관한 것이다. 털이 가죽을 덮고 있는 원래 상태와 달리 겨울털장갑 속에서는 가죽이 털을 감싸고 있다. 의식의 ‘나는 나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 라본다’는 환상은 , 안과 밖이 바뀐 응시의 구조에 기초해 있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217)   하나가 둘로 만들어지면 원래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 결코 하나로 되돌아가지도 않고 새로운 하나로 되지도 않는다. 합(合)이란, 철학이 꾸는 달콤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316)   분석담론에 따르면 자신이 말하고 있음을 아는 동물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기표속에 살아 그가 그것의 주체가 된다. 그때부터 모든 게 환상의 차원에서 그를 위해 놀이를 한다. 그러나 환상은 아주 완벽하게 분해되여 그가 행동할 때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우리가 우주학의 윤곽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무의식’이라는 용어 가  지닌 영원한 모호성이다. (자크라캉 ‘욕망 이론’320)     주체와 존재의 관계는 환상에 의해 결정되고 지속된다… 도착증의 환상은 명확히 표현될 수 있다. 도착증의 환상에서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정지되여 고정된다. 그러므로 도착증의 환상은 비시간적이라기보다 시간을 벗어 나 있다는 의미에서 공간속에 존재한다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신경증의 환상에서는 주체와 대상 의 관계가 주체와 시간의 관계에 기초한다. 대상은 진실 이 나타나는 시간에 의해 그 중요성을 띠게 된다. 즉 이 진실이 나타나는 시간속에서 대상은 항상 빠르 거나 느리거나 혹은 이르거나 늦는다… 항상 미리 서 두른다는 점이 신경증 행동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150-151)
220    19. 다양체에 대하여 댓글:  조회:325  추천:0  2021-04-27
19. 다양체에 대하여     우리가 말하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 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류형들, 기관없는 몸체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 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단위들, 수렴의 CsO단위 들ㅡ 이것들은 글을 량화할 뿐만 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천개의 고원14)   다양체는 현실이며, 어떠한 통일도 전제하지 않으 며, 결코 총체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절대 주체로 돌아 가지도 않는다. 총체화, 전체화, 통일화는 다양체 속에 서 생산되고 출현하는 과정들일 뿐이다. 다양체들의 주요 특징은 독자성이라는 다양체의 요소들, 되기의 방식인 다양체의 관계들, (즉 주체 없는 개 체화)이라는 다양체의 사건들, 매끈한 공간과 시간 이라는 다양체의 시ㅡ공간, 다양체의 현실화 모델인 (나무형 모델과 반대되는) 리좀, 고원들을 형성하는 다 양체의 조성판 (연속적인 강렬함의 지대들), 그리고 고원을 가로 지르고 영토들과 탈영토화의 단계들 을 형성하는 벡터(방향량)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질 들뢰즈/ 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5. )   버로스의 잘라붙이기 기법을 보자. …다양체를 구조 안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相杀시키고  만다.(천개의 고원 17)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양 체의 본성이 변할 때 증가할 수 있다.(천개의 고원21)   도주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다양체가 실 제로  채우고 있는 유한한 차원들의 수가 실재한다. 둘째 다양체가 이선에 따라 변형되지 않는다면 그어떤 보완 적인 차원도 존재불가능하다. 세째, 이 차원들이 어떤 차 원이건 간에 이 모든 다양체들은 단일한 고른판 또 는 외부서의 판위에서 판판하게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 야  한다… n차원에 있는 판판한 다양체들은 탈 기표 작용적이며 탈주체적이다(천개의 고원.22-23)   짧은 기억은,,, 항상 불연속성, 단절, 다양체를 전제한다. (천개의고원36)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끈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천개의 고원46)   기관 없는 몸체는 기관들이 제거된 텅빈 몸체가 아니다. 기관없는 몸체 위에서 기관들 노릇을 하는 것들 (늑대, 늑대눈. 늑대턱?)은 무리 현상에 따라 브라운 운동을 하면서 분자적 다양체의 형태로 분배 된다. 사막은 무언가 우글거리고 있다. 따라서 기관 없는 몸체는 기관들에 대립한다기 보다 유기체를 이루는 기관들의 조직하에 대립한다. 기관 없는 몸 체는 죽은 몸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몸체이 며, 유기체와 조직화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더욱더 생동하고 북적댄다. 이(虱)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위로  뛰여든다.(천개의 고원67)   다양체들과 그 요소들의 본성이 나온다. 즉 리좀. 다양체 의 꿈이 갖는 그 본질적 특성중의 하나는 그 각각의 요소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다른 요소들과의 거리를 변경시킨다는 것이다. … 그 요소들은  본성이 바뀌게 된 다. 벌떼는 줄무늬셔츠를 입은 축구선수의  난투 또는 투아래그리족 무리로 변한다(천개의 고원 68)   .   늑대들 그것은 강렬함이요 속도이며 온도이고 분해될 수 없으나 끊임없이 변하는 거리이다. 그것은 득실거림이 요 북적거림이다. (천개의 고원 70 )   다양체는 나누어질 때마다 본성이 바뀌는 립자들로 이루어져있고, 또 변할 때마다 다른 다양체 속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거리들로 이루어져있다. 문턱에서 또는 문턱 저편에서 또는 문턱 이편에서 소통하고 넘나들며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거리들로 이 후자의 다양체의 요소들은 입자이며 그것의 관계는 거리이고, 그것의 운동은 브라운 운동이며 그것의 량은 강렬함들, 강렬함의 차이들이다. (천개의 고원72)   정신 분석은 모든 것을, 즉 군중과 무리를, 그램분자적 기계와 분자적 기계를, 모든 종류의 다양체를 으깨여 납작하게 만든다.(천개의 고원75)   모든 언표는 기계적 배치물, 다시 말해 언표 행위를 하 는 집단적 행위자의 산물이다(집단적 행위자란 말은 사람들이나 사회가 아니라 다양체를 이미한다.) 고유명은 개인을 지칭하지 않는다… 고유명은 다 양체에 대한 순간의 파악이다.(천개의 고원80)   다양체는 그것이 차원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다양체는 본성이 변하지 않고서는 나누어지지도 않고, 자 원을 잃거나 얻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양체의 차원 들의 변화는 다양체에 내재하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각각의 다양체는 이미 공생하고 있는 다질적인 항 들로 조성되여 있으며, 또는 각각의 다양체는 그것의 문턱들과 문들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다른 다양 체들로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 지이다.(천개의 고원473-474)   그 선이 고름을 갖는지, 다시 말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생의 다양체속에서 실제로 기능하는지, 또 다양체들 이 실제로 이행의 생성으로 변형되는 지는 각각의 구체 적인 경우에 따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동상 476)   음악가는 특히 이렇게 말할수 있다. “나는 기억을 증오한다. 회상을 증오한다.”음악가는 생성의 역량을 긍정하기 때문이다.(천개의 고원561)   점의 체계에 대립하는 것이 바로 선의 체계, 아니 차라리 다선적 체계이다. 선을 해방시키고 사선을 행방시켜 라. 이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은 음악가와 화가는 없다 . (동상 559)   다선적 체계에서 모든 선은 동시에 시행된다.(동상563)   리토르넬로는 고유한 음악적 내용. 음악에 고유한 내 용의 블록이라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음악은 리토르넬로를 탈영토화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조작이다. 리토르넬로는 본질적으로 영토적인 것이 며 영토화나 재영토화를 행한다. (천개의 고원568)   시각적 상관물(눈)을 가진 얼굴은 회화와 관련되 며, 청각적 상관물(귀)을 가진 목소리는 음악과 관련되 는 것이다.(귀는 그자체로 리토르넬로이다. 귀는 리토 르넬로의 형태를 갖고 있다). 회화가 얼굴의 탈영 토화이 듯이 음악은 특히 목소리의 탈영토화로, 이때 목소리는 점점 더 언어와 멀어진다.(동상571)   다양체는 현실이며, 어떠한 통일도 전제하지 않으 며, 결코 총체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절대 주체로 돌아 가지도 않는다. 총체화, 전체화, 통일화는 다양체 속에 서 생산되고 출현하는 과정들일 뿐이다. 다양체들의 주요 특징은 독자성이라는 다양체의 요소들, 되기의 방식인 다양체의 관계들, (즉 주체 없는 개체화)이라는 다양체의 사건들, 매끈한 공간과 시간 이라는 다양체의 시ㅡ공간, 다양체의 현실화 모델인 (나무형 모델과 반대 되는) 리좀, 고원들을 형성하는 다 양체의 조성판 (연속적인 강렬함의 지대들), 그리고 고 원을 가로 지르고 영토들과 탈영토화의 단계들 을 형성하는 벡터(방향량)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들뢰즈 가타리 ‘천개의 고원’5)   다양한 이미지를 동일한 주제 아래  모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물과 꿈’ 169)   이들 꼬드는 --우리가 인정하든 말든—의미를 변경시키 기도 하며, 더욱 중요하게는 생성하는 작용을 하는 데, 그 방법은 무구하다거나 자유롭다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바깥 어디엔가에 있는 객관적인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기 좋아하는 그것에, 언어자체가 제자 신의 중개적이며 형성적인 패턴(모형, 원형, 도안)을 부 과할 때의 복잡한 방법에 많이 닮아있다. 그 결 과, 적절히 분석되였을 경우의 텍스트가 드러내게 되는 것은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토도로브가 말하는 뚜렷한 일종의 다양성이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53)   작품의 불연속성과 무질서가 낳는 열매자체는 각각의 잠언이 이를테면 모든 잠언들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유일하면서도 변주되는 하나의 구조가 있다… 성찰들은 담론의 단상들이고, 구조와 광경이 없는 텍스트들이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의  0도’ 84)   잠언은 개별적인 덩어리들로 구성된 전체적인 불덩어리이다. 뼈대는 뚜렷한 모습이 상으로 광경적이며ㅡ    그리고 뼈들은 단단한것들이다. 잠언의 모든 구조는 그것이 고정되여있지 않다는 바로 그점에서 가시적 이다.(동상 85)    틀림없이 우리는 모든 경우에 영토성,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요인들을 동시에 작동시켜야만 한다. (천개의 고원573)   다양체간의 온갖 종류의 차이ㅡ계량적 다양체와 비계량적 다양체, 외연적 다양체와 질적 다양체. 중앙집중적 다양체와 탈중심적 다양체, 나무형 다양체와 리좀형 다양체, 셀수 있는 다양체와 판판한 다양체, 차원의 다 양체와 방향의 다양체,군중의 다양체와 무리의 다 양체, 크기의 다양체와 거리의 다양체, 절단의 다양체 와 빈도의 다양체, 홈이 패인 다양체와 매끈한 다양체 등.(들뢰즈 가타리 ‘천개의 고원’924)   하나의 근방에서 다음 근방으로의 련결은 규정되지 않으며, 무한한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이리하여 가장 일반적인 리만 공간은 서로 나란히 놓여있기는 하지만 서로 관계는 맺지 않는 조각들의 무정형의 모임으로 나타나게 된다.이러한 다양체는 어떤 계량적 체계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빈도 또는 오히려 근방의 집합에 적용되는  축적의 조건에 의해 규정 된다. (천개의 고원 926)
219    18. 리좀에 대하여 댓글:  조회:354  추천:0  2021-04-27
18. 리좀에 대하여     리좀ㅡ 땅밑줄기인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 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질들뢰즈/필릭스 가타리’천개의 고원’18)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는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개미떼를 죽여도 계속 나오는 이유는 그놈들이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더라도 끊임없이 복구될 수 있는 동물리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모든 리좀은 분할 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 되 고 영토화 되고 조직되고 의미화 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천개의 고원24)   리좀은 하나의 반계보이다…항상 단절을 통해 리좀을 따라가라, 도주선을 늘이고 연장시키고 연계하라. 그것을 변주시켜라. n(하나가 아니라 여러개)차원에서 방향이 꺾인, 아마도 가장 추상적이면서 가장 꼬여있는 선을 생 산 할 때까지. 탈영토화 된 흐름들을 결합시켜라… 글 을 써라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 를  넓혀라. 도주선이 하나의 추상적인 기계가 되여 고른판 전체를 덮을 때까지 늘려라.(천개의 고원27-28)   리좀은 …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낸다. 지도는 장场들의 련결접속에 공헌하고, 기 관없는 몸체들의 봉쇄ㅡ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 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자 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 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 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 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 상 해낼 수도 있으며,정치 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 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 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일 것이다. (천개의 고원30)   문제는 무의식을 생산하는 일이며, 그와 더불어 새로운 언표, 다른 욕망을 생산하는 일이다. 리좀은 이러한 무 의식의 생산 그자체이다(천개의 고원41)   리좀의 주요한 특성: 리좀의 특질들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특질들과 연결접속되는 것 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 체제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리좀은    여럿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리좀은 둘이 되 는  도 아니며 심지어는 곧바로 세, 넷, 다섯등이 되는  도 아니다. 리좀은  로부터 파생되여 나오는 여럿도 아니고 가 더해지는 여럿(n+1)도 아니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 루어지지 않고, 차원들 또는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 들로  이루어져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 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 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线型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 하나가 빼내 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 져있다. 반대로 구조나 점들과 위치들의 집합, 그리고 이 점들 사이의 이항관계들과의  위치들 사이의 일대 일 대응관계들의 집합에 의해 정의된다. 분할 선들, 심층작용의 선들이 여러차원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 라 최고 차원인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 선도 있다. 다양체는 이선을 따라, 이선을 따라가며 본성이 변하면서 변신한다.(천개의고원47)   기억이 아니라 망각, 발전을 향한 진보가 아니라 저개 발, 정주성이 아니라 유목, 사본이 아니라 지도로, 즉 리 좀학ㅡ대중분석이다. … 기표 작용을 하는 절단이 아니라, 지각할 수 없는 단절을 행하라.(천개의 고원 53)   n에서, n-1에서 써라. 슬로건을 통해 써라. 뿌리 말 고 리좀을 만들어라. 절대로 심지 말아라! 씨뿌리지 말 고 꺾어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여라!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속도 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빨리 빨리, 비록 제자 리에서라도!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 당신들 안에 있는 을 깨우지 마라! 올바른 관념들이 아니라,단지 하 나의 관념을 가져라!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라.(천개의 고원53-54)   강물은 감자를 심지 않네/목화도 심지 않네/심는 사람 은 잊혀지지만/ 유장한 강물은 유유히 흘러갈 뿐. 리 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 존재이고 간주곡이다.(천개의 고원54)    리좀962   지층 뿐 아니라 배치물들도 선들의 복합체이다. 선의 첫 번째 사태, 첫번째 종류는 다음과 같이 정해질 수 있다. 선은 점에, 사선은 수평성과 수직선에 종속되여 있 다. 선을 구체적이건 아니건 윤곽을 만든다. 선이 그리는 공간은 홈이 패인 공간이다. 선이 구성하는 수 많은 다양체는 언제나 우월하거나 보충적인 차원에서 에 종속되여있다. 이런 유형의 선들은 그램분자 적이며, 나무형태의, 이항적, 원형적, 절편적 체계를 형 성한다.   선의 두번째 종류는 이와 전혀 다른 것으로, 분자적이며 “리좀”류형을 하고 있다. 사선은 해방되거나 끊어지 거나 비틀린다. 이 선은 이제 윤곽을 만들지 않으며, 대신 사물들 사이를, 점들 사이를 지나간다. 이 선은 매끈한 공간에 속해 있다. 이 선은 자신이 주파하는 차원만을 갖는 하나의 판(=면)을 그린다. 따라서 이 선이 구성 하는 다양체도 이제  에 종속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고름을 획득한다. 이것은 계급들의 다양체가 아니라 군중이나 무리의  다양체이다. 그것은 유목 적이고 특이한 다양체이지 정상적이거나 합법적인 다양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성의 다양체 또는 변형 되는 다양체이지 요소들을 셀 수 있고 관계들이 질서 잡힌 다양체가 아니며, 퍼지집합이지 정확한 집합이 아니다… 파토스의 관점에서 이 다양체들은 정신병, 특히 분열증에 의해 표현된다. 실천의 관점에서 이 다양체 들은 마법에서 이용된다. 이론의 관점에서 다양체들의 지위는 공간의 지위와 상호 관련되여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사막이나 초원이나 바다 유형을 한 매끈한 공간에는 서식자가 없거나 근절되지 않으 며,  오히러 두번째 종류의 다양체가 서식한다(수학과 음악은 이러한 다양체 리론을 정교하게 만드는 일에서 아주 멀리 나아갔다).   그렇다고 해도 와 여럿의 대립을 다양체의 여러 유형간의 구분으로 대치시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두유형을 구분한다고 해도 이 둘은 서로 내재적이며,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상대방으로부 터 “나오기” 때문이다. 나무형태의 다양체와 그렇지 않은 다양체가 있다기 보다는 다양체의 나무화가 있다. 하나의 리좀안에 분배되여 있는 검은 구멍들이 함께 공명하기 시작할 때 또는 줄기들이 공간을 사방으로 홈을 파서 이 공간을 비교 가능하고 분할 가능하며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 때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특히 의 경우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또 “군중”의 운동들, 분자적 흐름들이 축적점 이나 응고점에서 집합접속되여 이 점들을 절편화하고 정정할 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리고 비대칭적으로 리좀의 줄기들은 나 무에서 멈추지 않고 빠져나오며, 군중과 흐름은 끊임없이 벗어나고, 나무에서 나무로 도약하며 뿌리 에서 벗어난 연결접속들을 끊임없이 발명해낸 다. 공간은 온통 매끈해져서 이번엔 홈이 패인 공간에 다시 작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영토조차, 아니 특히 영토야말로 이 깊은 운동들의 작용을 받는다. 또는 언어에 관해 말하면, 언어의 나무들은 발아와 리좀에 의해 동요된다. 이런 식으로 리좀의 선들은 사실상 이 선들을 절편화하고 심지어 지층화하는 나무의 선들과 이 선들을 탈취하는 도주선이나 단절선 사이에서 오간다.   따라서 우리는 세가지 선으로 만들어지지만 각각의 선은 나름의위험을 갖고 있다. 우리를 절단하고, 우리에게 동 질적인 공간의 홈파기를 강요하는 절편적인 성이 있으며, 또 이미 자신의 미세한 검은 구멍들을 운반 하는 분자적인 선들이 있고, 끝으로 자신의 창조적인 잠재력을 포기함으로써 죽음의 선으로 돌변해 순수하고 단순한 파괴의 선(파시즘)으로 돌아설 위 험을 항상 간직하고 있는 도주선들 그자체가 있다.   은 시작도 끝도 기원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 그것들은 점들이 아니라 선들로 이어져있다. 그것은 리좀인 것이다(천개의 고원499) 
218    17. 지층에 대하여 댓글:  조회:202  추천:0  2021-04-24
17. 지층에 대하여     중심 고리는 주변과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 주변은 새로 운 중심을 형성하고, 원래의 중심은 위에서 반응하 다가는 불연속적 겉지층으로 옮겨간다. (천개의 고원105)   지층의 중심 띠와 관련해서 매개 환경들이나 매개 상태들은 서로 “겉지층”을 이루고, 새로운 주변들에 대해 새로운 중심들을 형성한다. 이 또 다른 방식, 즉 중심 띠가 파편화 되는 방식, 이쪽저쪽 지엽말단까지 환원불가능한 형식들 및 그 형식들에 연합된 환경 으로 부서져나가는 이 방식을 “겉지층”이라고 부 르도록 하자.(천개의 고원107)    성층 작용의 표면은 두 층사이에 있는 보다 밀집 된 고 른판이다. 층들이 바로 그 지층 그 자체이다….. 사실상 기관 없는 몸체 자체가 고른판을 형성하며, 고른판은 지층들이 형성되는 층위에서 밀집되거나 조밀해진 다.(천개의 고원 86)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지층들과 지층에서 리탈한 고른판 사이에 이원론이나 피상적 대립을 설정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지층들 자체가 상대적 탈령토화의 속도에 의하여 활성화되고 정의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절대적 탈령토화는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으며, 지층들은 어디에나 현존하고 가장  일차적이고 언제나 내재하는 고른판 위에서 이루어진 부산물이자 집약이다. 또한 고른판은 에 의해 점령되고 그려진다. 추상적 기계는 자신이 그리는 탈지층화 된 판 위에 펼쳐져있다. 또는 그와 동시에 조성의 동일성을 정의하면서 각 지층 안에 감싸인채로도 있고, 또 심지어는 포착의 형식을 정의하면서  어떤 지층들 안에 반쯤 선채로 존재하 기도 한다. 따라서 고른판 위에서 풀려가거나 춤추는 것은 제 지층의 분위기, 파동, 회상, 또는 긴장을 담고 있다. 고른판은 지층들을 알맞게 보유하고 있어서, 고 른판 안에서 자기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지층들 로부터 변수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 …지층들은 형식 들과 실체들 안에서 취한 불연속적인 강렬함들 만을 인 식한다. 또한 지층들은 내용의 립자들과 표현의 항목들 안에 있는 나누어진 미립자만을 인식한 다. 또한 지층들은 탈령토화된 흐름 가운데서도 분리 접속되고 재영토화된 흐름들만을 인식한다. 반면 강렬함의 련속체,  미립자들 또는 기호립자들로 조합 된 방출, 탈영토화 된 흐름들의 집합접속같은 것들은 고른판에 고유한 세 요소이며,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 작동하고 탈지층화를 구성한다. 이 모든 것중 어떤 것도 카오스적인 하얀 밤이 아니고 무차별적인  검은 밤도 아니다. 규칙들, 즉 판짜기 규칙들, 도표를 만드는 규칙들이 있다. (천개의 고원139)   지층들의 체계는…강열한 련속체 안에서 지층들은 형식을 재단하고 질료를 실체로 형성한다. 조합된 방출작용 안에서 지층들은 표현과 내용을, 표현의 통일성과 내용의 통일성을, 예컨대 기호들과 립자들을 구분 한다. 접합접속 안에서 지층들은 흐름들을 분리해내고 그 흐름들에 상대적 운동과 다양한 영토성, 상대적 탈영토화와 보충적 재영토화를 할당한다. 이렇게 지층들은 운동에 의해 활성화된 이중 분절을 도처에 설치한다. 즉, 내용의 형식과 내용의 실체, 표현의 형식에서 절편적 다양체를 구성한다. 이것들은 지 층들이였다. 각각의 지층들은 내용과 표현의 이중 분절이었다. 내용과 표현은 실재적으로 구분되고 상호 전제 상태에 있으며 서로 뒤섞인다. 내용과 표현과 함께 가는 머리 둘 달린 기계적 배치물들은 자신의 절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한지층에서 다른 지 층으로 가면서 변이 되는 것은 내용과 표현 사이의 실재적 구분이 지닌 본성이며, 형식을 부여받은 질 료인 실체의 본성이며, 상대적 운동의 본성이다.   우리는 실재적 구분의 세가지 커다란 유형을 요약하여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 형식적ㅡ실재적 구분. 이것은 표현의 공명이 설립되는 크기의 질서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유도) 둘째. 실제적ㅡ실재적 구분. 이것은 표현의 선형성이 설립되는 상이한 주체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변환) 세째. 본질적ㅡ실재적 구분. 이것은 표현의 초선형성이 설립되는 상이한 속성들 또는 범주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천개의 고원142)   지층들이 경화되고 조직되는 것은 고른판 위에서이며,  이 판이 작동하고 구축되는 장은 지층들 속에 있다는 것 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양쪽 운동 모두 부품을 하나씩 하나씩, 착실히 반복하여 조작하면서 실현된다 는 것도.(동상640)   하나의 지층에는 도처에  이중 구조, 이중 구속, 가재가 있으며 도처에 모든 방향에 때로는 표현을 가로 지르고 때로는 내용을 가로 지르는 다양한 이중 분절이 있다. … 한 지층  안에서 분자들은  동일하지 않 더라도 밑 지층에서 차용한 분자적 재료는 동일할 수있다모든 지층에 걸쳐 실체는 동일하지 않더라도 실체의 요소들은 동일할 수 있다. 형식들은 동일하지 않으면 서도 형식적 관계들 또는 연결들은 동일할 수 있다(천개의 고원 95)    지층, 성층 작용957   지층은 대지라는 몸체 위에서 빽빽해지는 현상으로, 분자적인 동시에 그램분자적이다. 가령 축적, 응결, 침 전, 습곡같은 것이 그것이다. 지층은 ,  또 는  이다. 전통적으로 대략 세가지 지층이 구분 된다.   지층, 유기체적지층, 인간형태(또는 “이형조성적 [异性造成 的]“) 의 지층이 그것이다. 각각의 지층 또는 분 절은 코드화된 환경, 형식화된 실체로 구성된 다. 형식과 실체 코드화 환경은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든 분절의 추상적 성분들 이다.   하나의 지층은 확실히 아주 다양한 형식과 실체, 다양한 코드와 환경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지층은 다 양한 형식의 조직화    과 다양한 실체의 전개  를 갖고 있으며 그 결과 지층은 곁지층과 겉지 층으로 나뉜다. 가령 유기체지층이 그렇게 나뉜다. 지 층의 세부 구분인 겉지층과 곁지층 역시도 지층으 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목록은 결코 완결될 수 없다)  아무리 다양한 조직과 전개를 갖고 있다고 하더 라도 모든 지층은 조성의 통일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조 성의 통일성은 하나의 지층이 모든 형식이나 코드 에  공통된 형식적 특질과 관련되여 있으며, 지층의 모든 실체나 환경에 있는 실체적 요소 또는 공통된 재료와도 관련되여 있다.   지층들에는 커다란 운동성이 있다. 하나의 지층은 항상 다른 지층의 밑지층 역할을 하거나 다른 층과 충돌할 수 있으며. 진화적 질서와는 무관하다. 또한 특히 두 지층 사이에 또는 지층들이 둘로 나뉠 때 사이 지층 현상들 이, 즉 코드변환, 환경의 변화혼합 등이 나타난다. 리듬 은 이 사이 지층 운동과 관계가 있는데, 이 운동은 성층작용의 활동이기도 하다. 성층 작용은 카오스 로부터 세계를 창조하는 곳과 같으며, 이 창조는 연속적 으로 갱신되는 창조이다. 그리고 지층들은  을 구성한다.   고전적 예술가는 신과 같아 형식들과 실체들, 코드들과 환경들, 그리고 리듬들을 조직해 세계를 만든다.   하나의 층을 구성하는 분절은 항상  이중  분절이다. (이 중-집게) 실로 그것은 하나의 내용과 하나의 표현을 분절한다. 그리고 형식과 실체는 실재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반면, 내용과 표현은 실재적으로 구분된다. 그래서 지 층들은 옐름슬로우의 격자판에 부합된다. 내용의 분절 과 표현의 분절, 내용과 표현은 각각 나름의 형식 과 실체를 갖고 있다. 이 둘사이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일치관계도, 원인ㅡ결과 관계도, 기표ㅡ기의 관계도 없다. 실재적인 구분, 상호전제, 동형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각각의 지층에서 내용과 표현이 구분되더라 도  똑 같은 방식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세가지 커다란 지층에서 내용과 표현은 동일한  방 식으로 배분되는 것이 아니다(가령 유기체 지층에서는 표현의 선형화가 있지만, 인간형태의 지층에서는 초선 형성이 있다). 이런 리유로 인해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은 해당지층에 따라 아주 상이한 조합을 갖 게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운동, 어떠한 도약이 층들밖 으로 (웃지층) 우리를 끌어내는가? 분명 물리ㅡ화학적 지층이 물질을 전부 망라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 다. 형식화되지 않는, 분자보다 작은  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기체 지층이  을 전부 망 라하는 것도 아니다. 유기체는 오히려 생명이 스스 로를 제한하기 위해 자기와 대립시키는 존재이 며, 생명은 비유기를 재한하기 위해 자기와 대립 시키는 존재이며, 생명은 유기적일 때 더욱 강력하 고  더 강력한 법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형태의 지층을 사방으로 넘쳐나는 인간의 비인간적   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판도에 도달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판을 구성할 수 있을까? 또는 우리를 그리로 이끄는 “선” 을  어 떻게 하면 그릴 수 있을까? 왜냐하면 지층들 바깥에서는 또는 지층들이 없이는 우리는 더이상 형식과 실체 도, 조직과 발전도, 내용과 표현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탈구되며, 심지어 더이상 리듬에 의해 유지될 수도 없는 것같다. 어떻게 하면 형식 화되지 않은 질료, 비유기체적 생명, 비인간적 생성이 그저 순수하고 단순한 카오스와는 다른 것이 될 수 있을까? 따라서 모든 탈지층화의 시도(가령 유기체를 넘어서기, 생성에 몸을 던지기)는 우선 아주 신중한 구체적 규칙들을 따라야만 한다.    너무 갑작스런 탈지층화는 자살적인 것이나 암적인 것이 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즉 카오스, 공허 파괴에 빠지든지 아니면 점점 더 강하게 경화되 여가는 지층에 다시 갇혀 일정한 다양성, 분 화,  유동성마저 잃어버리고 마는것이다. (천개의 고원957ㅡ960)   탈지층화해라, 새로운 기능 위에, 도표적인 기능 위에 자신을 개방시켜라.(천개의 고원258)
217    16. 탈령토화에 대하여 댓글:  조회:216  추천:0  2021-04-22
16. 탈령토화에 대하여     대리보충은 디페랑스(차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74)   데페랑스는 지연운동이면서, 결코 스르로 현재하지 않는 어긋남의 운동인 까닭이다. 이때 연대는 하나 이상의 선에서 발생한다… ‘선 하나로는 아무런 의미 도 없으며, 의미를 표현하려면 반드시 두번째선이 필요하다. 이것은 중대한 법칙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230)   탈령토화된 기호의 자기 잉여로서의 기표여, 장례식장같은 공포 가득한 세계여.(천개의 고원 220)    제1정리: 혼자서는 결코 탈영토화 될 수 없다. 적어도 두개의 항, 손-사용대상, 입-가슴, 얼굴-풍경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두개의 항들 각각은 다른 항 위에 서 재영토화 된다. 따라서 재영토화와 초기의 더욱 이전의 영토성으로의 회귀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제2정리: 탈영토화의 두 요소나 운동에서 가장 빠른 것이 반드시 가장 강렬하거나 가장 탈영토화 되여있는 것은 아니다. 탈영토화의 강렬함은 운동이나 전개 속도와 혼동되여서는 안된다. 따라서 가장 빠른 것은 자신 의 강렬함을 가장 느린것의 강렬함과 연결접속시키고, 강렬함으로서의 이 가장 느린것은 가장 빠른 것을 뒤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층이나 다른 판 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입-가슴의 관계는 이미 얼굴성의 판위로 인도된다.   제3정리: 가장 탈영토화 되지 않은 것은 가장 탈영토화 된것 위에서 재영토화 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에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수직적인 재영토화의 두번째 체가 나타난다. 입 뿐 아니라 가슴, 손, 온몸, 도구 자체도 “얼굴화”된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제4정리: 추상적인 기계는 그것이 생산하는 얼굴 뿐만 아니라 몸체의 부분들, 그것이 (유사성이 조직화가 아니 라)리성의 질서에 따라 얼굴화하는 대상들 안에서 다양한 정도로 실행된다.(천개의 고원334-335)   력사가의 의무는 이 두가지 운동 (한편으로는 탈코드화 ㅡ탈영토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덧코드화ㅡ재령토화)이 공존하거나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기간”을 정하는  일이다.(동상420)   국가장치란 특정한 한계와 특정한 조건속에서 덧코드화의 기계를 실행하는 재영토화의 배치물이다.(동상424)   국가는 다른 점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모든 점들의 공명상자이다.(천개의 고원426)   되기(=생성)는 결코 상호간의 대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사성도 모방도 더욱이 동일화도 아니다.  (동상452)   결국 되기는 진화, 적어도 혈통이나 계통에 의한 진화 는 아니다… 되기는 역행적이며 이 역행은 창조적이다. (동상453)   운동은 오직 또는 주로 계통적 생산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개체군들 사이를 가로 지르는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되기는 리좀이지 결코 분류용 수형도나 계통수가 아니다. 되기는 결코 모방하기도 동일화 하기도 아니다. (동상454)   작가가 마법사라면, 그것은 글쓰기가 하나의 되기이 기 때문이며 글쓰기가 작가-되기가 아닌 쥐-되기, 곤 충-되기, 늑대-되기등 이상한 되기에 의해 횡단되기 때 문이다.(동상456)   인간 패거리이 건 동물 패거리이 건 하여간 패거리들은  모두 전염, 전염병, 전쟁터, 파국과 더불어 증식한다. (동상459)   모든 생성은 이미 분자적이다.(천개의 고원513)   의문의 여지없이 지각할 수 없는것ㅡ되기이다. 지각할 수 없는 것은 생성의 내재적 끝이며 생성의 우주적 정식 이다.(동상529)   문인화가는 자연의 본질을 이루는 선과 운동만을 지니고 있다가 뽑아낸다. 이어지거나 겹쳐진 ‘선’만 을  가 지고 진행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세상 모든 사람되기, 세계를 생성으로 만들기란 곧 세계만 들 기, 하나의 세계 또는 여러 세계를 만들기이며, 다시 말해 자신의 근방역과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를 찾 기이다. 추상적인 기계의  , 그리고 이를 실행하 는 구체적인 배치물인 각각의 세계. 다른 선들과 연속되고 결합되는 하나나 여러개의 추상적인 선으로 환원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무매개적으로, 직접 하나의 세계를 생산하기. 이 세계에서는 세계 그자체가 생성 되고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된다(동상531)   이 판에서는 여성ㅡ되기, 동물ㅡ되기, 지각할 수 없는것 되기 등 다양한 되기가 서로 결합될 뿐만 아니라, 지각할 수 없는 것조차  이 되 고,  동시에 지각은  이 된 다.  즉 여러 물질, 색, 음 사이에 위치하는 구멍 들, 미세한 틈들에 이르는 것인데, 거기에 도주 선들, 세계의 선들, 투명하고 절단된 선들이 몰려 든다. 지각을 바꿔라. (질 들뢰즈/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535)   비밀은 결코 정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관념이 아니다. 단지 비밀스러운 것의 생성이 있을 뿐이며, 비밀은 하 나의 생성을 갖는다. 비밀의 기원은 전쟁기계에 있  다. 여성ㅡ되기, 아이ㅡ되기, 동물ㅡ되기 등과 더불어 비밀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전쟁기계이다. (천개의 고원544)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ㅡ되기이다. (동상550)   소수자 되기는 자신의 요소들인 탈영토화 된 매체와 주체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생성의 주체는 다수성의 탈영 토화 된 변수로서만 존재하며, 생성의 매체는 소 수성의 탈영토화하는 변수로서만 존재한다. 우리를 하나의 생성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점점 커져서 당신을을 사로잡아 버리는 작은 디테일 없이는 당신들은 다수성에서 이탈하지 못한다. (동상552),   하나의 점은 언제나 기원적이다. 하지만 생성의 선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고 기원도 목적지도 없다. 따라서 기원의 부재에 대해 말하는 것,  기원의 부재를 기원으로 만드는 것은 형편 없는 말장 난에 불과하다. 생성의 선은 중간만을 갖는다. 중간은 평균치가 아니다. 그것은 가속운동이며 운동의 절대 속도이다. 생성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 우리는 중간 에서만 생성을 얻을 수 있다. 생성은 하나도 둘도, 또 둘사이의 관게도 아니다. 생성은 둘ㅡ사이이며, 경계선 또는 도주선, 추락선, 이 둘의 수직선이다.(동상555)   생성은 반(反)ㅡ 기억이다. 물론 분자적인 기억도 있지 만, 그것은 다수의 세계 또는 그램분자적 세계로 통합되는 요인으로서 그러할 뿐이다. 회상은 얹제나 재영토화 기능을 갖는다. 이와 반대로 탈영토화의 백터는 결코 규 정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자적 층위들에 직결되여 있다. 그리고 탈영토화의 정도가 높을 수록 그러한 연결도  더  강해진다. 분자적 성분들을 한데 “모아주 는”것이 바로 탈영토화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년기의 블록 또는 아이ㅡ되기는 유년기 회상과 대립한다.(천개의 고원556)   모방하는 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생성에 들어가며, 이 생성은 자신이 모방하는 것의 부지불식간의 생성과 결 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패 없이는 모방은 없으며, 실패할 때에만 모방이 있다. 화가나 음악가는 동물을 모방하 지 않는다. 화가나 음악가는 동물이 되지만, 이와 동 시에 동물도 화가나 음악가가 바랬던 것이 되 며, 화가나 음악가는 가장 깊은 곳에서 과 공 모하는 것이다…생성은 모방이 아니다. … 우리는 모방하 지 않는다. 생성의 블록을 구성하는 것이다. (천개의 고원577)   제5정리: 탈영토화는 동시에 생성하는 대 변수와 소 변수의 공존을 함축하기 때문에 탈영토화는 언제나 이 중적이다. (생성에서 두항은 자리를 바꾸지도 동화되지 도 않고 오히려 비대칭적인 블록으로 끌려들어가며, 거기에서 한항은 다른 항 못지 않게 변화하며 또한 그것 은 이 두항의 근방역을 구성한다...   제6정리: 비대칭적인 이중적 탈영토화는 탈영토화하는 힘과 탈영토화 된 힘을 부과할  수  있다. 통일한 힘이 해당”계기”나 양상에 따라 한값에서 다른 값으로 옮겨가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가장 덜 탈영토화된 것은 언 제나 가장 탈영토화하는 것의 탈영토화를 재촉하며, 그러면 가장 탈영토화하는 것은 가장 덜 탈영토화된 것 에  한층 더 반작용한다...   제7정리: 탈영토화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표현 역할을 하고, 탈영토화 된 것은 상대적으로 내용역할을 한 다…   제8정리: 탈영토화의 힘과 속도는 각 배치마다 다르다. (질 들뢰즈/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580)   엄밀하게 말해 환경의 성분이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차원을 가리키게 되였을 때, 또 기능적인 것이 아니 라 표현적인 것이 될 때 비로소 영토가 생기는 것이다. (동상597)   영토가 질의 지표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표가 영토를 만든다. 하나의 영토 내의 모든 기능 또한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능들은 영토를 형성하는 표현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토 그리고 이 영토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여러  다 양한 기능은 확실히 영토화의 산물이다. 영토화란 표현 성을 가진 리듬의 행위 또는 질을 획득해나가는 환경 성분들의 행위이기도 하다.(동상599)   영토란 우선 같은 종류에 속하는 두 개체간의 임게적(临界) 거리를 말하며, 이 거리를 표시하는 것이다. 내것 이란 우선 내가 가진 거리를 말한다. 나에게는 거리밖 에 없는 것이다.(천개의 고원 607)   영토는 같은 종의 구성원의 공존을 보증하고 조절하기 위해 구성원들 간에 거리를 둘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종이 가능한 한 많이 공존할 수 있도록 서로 다른 종을 분화시 키는 것이다. 풍경은 인물로 충족되고 인물은 풍경에 소속된다.(동상 608)   영토화는 다름 아니라 동일한 종의 코드의 여백 위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요인으로서, 이 종에 속한 각각의 개 체들에게 분화의 가능성을 마련해준다.(동상 612)   표현의 질료가 모여 영토를 성립시키고 영토적 모티프나 영토적 풍경으로 발전해 갈 때 이것을 리토르넬로라고  일컫는다(동상613).   영토화하는 가운데 변형을 초래한다. (동상617)   따라가는 것은 결코 재생산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재생산하기 위해 따라갈 필요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714   도주는 또한 정복적이고 창조이다. 따라서 도주선들은 영토성안에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들이 현존 함을 증언해주면서 영토성을 완전히 가로 질러 간다.(천개의 고원113)    탈영토화의 기능D(D탈령토화 표기)는 “누군가” 영 토를 떠나는 운동이다. 그것은 도주선의 작동이다. 그러 나 실로 다양한 경우가 제시된다. D는 그것을 상쇄하는 재영토화를 통해 회수되여, 도주선이 차단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D는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것이라도 재영토화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잃어버린 영토를 “대신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의 존재, 하나의 대상, 한권의 책, 하나의 장치나 체계… 위에서 재영토화 될 수 있다. 예컨대 국 가 장치가 영토적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국가 장치 도  D를 행하지만 이것은 즉각 소유, 로동, 화페 위에서 재영토화를 통해 회수된다.(공적 소유건 사적 소유건 토지 소유가 영토적인 것이 아니라 재영 토화하는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기호 체제들 중 에서도 기표 작용적 체제가 분명 높은 층위의 D에 이른 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기의 위에서, 기표 그자체 위에서 재영토화의 체계 전체를 작동시키기 때문에 도주선을 봉쇄하며 부정적D만을 존속시키는 것이다. 한편 D가 긍정적이 되고 다시 말해 그저 이차적 역할을 할 뿐인 재영토화를 가로 질러 자신을 긍정하고, 그러면서도 상대적인 것으로 머물 때 사정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러한 D가 그리는 도주선은 절편화되고, 잇단 “과정들”로 나뉘며, 검은 구멍들 속으로 빠지거나 심지어 일반화된 검은 구멍(파국)으로 종결되기 때문이다. 정념적이고 의 식적인 D를 동반하는 주체적 기호의 경우가 그러한데, 그것은 긍정적이지만 오직 상대적인 의 미에서만 그러하다. 여기서 이러한 D의 두가지 주요 형태는 단순히 진화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두번째 형태가 첫번째 형태에서 나올 수도 있고, 첫번째 형태로 갈수도 있는 것 이다.(특히 경합을 벌이는 도주선들의 절편화가 전체의 재영토화를 야기할 때 또는 절편들 중 하나에 유리하도록 도주선의 운동이 저지되는 경우에 그 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D의 아주 다양한 형태에서 빌려온 온갖 종류의 혼합된 모습들이 있는 것이다. (질 들뢰즈 /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968)   절대적D가 있을까? 그리고 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 먼저 D, 영토, 재영토화, 대지 사이의 관 계를 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선 영토 자체는 내부에서 탈영토화를 작동시키는 탈영토화의 백들과 분리될 수 없다. 이는 영토성이 유연하고 “여분 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순회적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영토적 배치물 자체가 자신을 둘러싼 다른 유형의 배치물들 위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D는 자신과 상관 관계에 있는 재영토화들과 분리될 수 없다. D는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다양하며 합성되여 있다. D가 다양한 형태들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특정한 순간에 “탈영토화 된 것” “탈영토화하는 것”을 지 정해주는 상이한 속도들과 운동들을 D가 한데 교차 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원적 작용의 재영토화는 영토로의 회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에 내재하는 이러한 미분적 관계들, 도주선에 내재하는 이러한 다양체를 표현한다(D의 정리들을 참조하라) 끝으로 대지는 결코 D의 반대가 아니 다. “타고난 것”의 신비와 관련해 이미 이 점을 보았다. 거기서 중심을 벗어난 것이건 강렬한 것이건 타 오르는 화로인 대지는 영토 바깥에 있으며, 오직 D의 운동 안에만 존재한다. 게다가 대지야 말로,  빙 원이야말로 우주에 속해 있으며, 인간이 우주의 힘들을 포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재료로 제시 된다. 탈영토화된 것으로서의  대지는 그 자체로 D의 엄밀한 상관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D는 대지의 창조자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단지 재영토 화가 아니라 새로운 대지, 하나의 우주의 창조자라고.   따라서 “절대”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절대란 결코 초월적인 것이나 미분화된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또 절대는 주어진 (상대적인) 모든 양을 넘어선 하나의 양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절대는 오직 상대적 운동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운동 유형을 표현할 뿐이다. 어떤 운동이 절대적인 때는 운동의 양과 속도가 어떻든 다양하다고 여져 진 “하나의” 몸체를 매끈한 공간에 관련시킬 때인데, 이때 이 몸체는 이 공간을 소용돌이치는 방식으로 차지한다. 어떤 운동이 절대적인 때는 운동의 양과 속도가 어떻든  로 여겨진 몸체를 홈이 패인 공간에 관련시킬 때인데, 이때 이 몸체는 이 공간 안에서 자리를 바꾸고, 또 적어도 잠재적인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직선에 따라 이 공간을 측정한다. D가 이 두번째 경우처럼 작동할 때마다, 즉 도주선들을 차단하는 일차적인 재영토화를 통해 작동하거나 아니면 도주선들을 절편화하고 좌절시키려하는 이 차적 재영토화와 함께 작동할 때마다  D는 부정 적이거나 상대적(이미 효과를 발휘하고 있더라 도)이다. 첫번째 경우에  따라  D가 새로운 대지를 창조할 때마다, 즉 도주선들을 연결접속하고, 도 주선들을 추상적인 생명선의 역량으로 데려가거나 아니면 고른판을 그릴 때마다  D는 절대적 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 절대적D가  반드시 상대적  D를 통과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절대적D는 초월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상대적 또는 부정적  D 는 자신도 작동하려면 절대적D를 필요로 한다. 상대적 또는 부정적  D절대적  D를 “총괄적인”  D,  총체화 하는 D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대지를 덧코드화하며, 그리하여 도주선들을 연결접속시켜 뭔가를 창조해내는 대신 도주선들을 결합시켜 이것 들을 정지시키고 파괴한다(이제까지 우리는 결합과 연결접속을 종종 아주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동의어로 취급했지만,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것들을 대립시킨다). 따라서 본래적으로 부정적인 또는 심 지어 상대적인  D들 안에 이미 끼여들어있는 제한적인 절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절대의 바로  이 전환점에서 도주선들은 차단되거나 절편화 될 뿐만 아니라 파괴선이나 죽음의 선으로 전환 된다. 이리하여 절대안에서는 부정과 긍정의 한판 승부가 벌어진다. 사방에서 대지를 에워싸는 장례와 자살적 조직의 대상처럼 띠를 두르고, 총괄되고, 덧코 드화 되고, 결합된 대지냐 아니면 수많은 생성으로서 대지를 가로 지르는 창조의 선들을 따라 공고화되고, 에 연결접속되고, 안에 놓이게 되는 대지냐 (니체의 말대로 “대지는 다시 가볍게 되 였다…”).따라서 적어도  D의 네가지 형태가 서로 대적하고 조합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체적 규칙들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천개의 고원970)  
216    15. 배치물에 대하여 댓글:  조회:239  추천:0  2021-04-19
15. 배치물에 대하여     문학은 하나의 배치물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 무런 상관도 없다. 이데올로기는 있지도 않고 있어본 적도 없다.(‘천개의고원’14)   자신의 표현된 형식으로서 의미 생성과 주체화를 강요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권력배치물들이다. 독재적 배치물 이 없는 의미 생성은 없고, 권위적 배치물이 없는 주체화도 없으며, 정확히 기표들에  의해  작용하며  영혼들  또는 주체들에게 행사되는 권력배치물들이 없는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혼합도 없다.( ‘천개의 고원’345)   배치물의 본성은… 첫번째 축인 수평축에 따르면 배치물은 두개의 절편을 포함하는데, 그 하나는 내용의 절편 이고 다른 하나는 표현의 절편이다. 배치물은 능동 작용이자 수동작용인 몸체들이라는 기계적 배치물 이며, 서로 반응하는 몸체들의 혼합물이다. 다른 한 편으로 배치물은 행위들이자 언표들인 언표 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이며, 몸체들이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 들이다. 하지만 수직 방향의 축에 따르면, 배치물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안정화시키는 영토화의 측면들 또는 재영토화된 측면들을 갖고 있고, 다른 한편 으로는 자신을 실어나르는 탈영토화의 첨점들을 갖고 있다.(천개의 고원172)   배치물들은 결코 같은 류형의 기관없는 몸체를 갖고 있지 않다.내재성의 장 또는 고른판은 한조각한조각 구성되며, 다양한 장소, 조건, 기술등은 서로에게 환원되지 않는 다. 오히려 문제는 그 조각들이 서로 이어질 수 있는 가,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어쩔수 없이 괴물같은 잡종들 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고른판은 모든 CsO들의 집합, 내재성의 순수한 다양체로서… 고른판은 일반 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속에 있다. (천개의 고원302)   지각은 온통 리좀작용을 한다. 이 특수한 인과성의 문 제는 중요하다. 어떤 배치물을 설명하기 위해 심리 학적, 사회학적인 인과성 같은 너무 일반적이거나  외 재적인 인과성을 거론하는 것은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확실히 어떤 배치물이 인과적 하부구조 를 포함하는 일은 결코 없다. 하지만 배치물은 창조 적인 과정 또는 특수한 인과성의 추상적인 선을, 자신의 도주선 또는  탈영화의 선을, 그것도 가장 높은 지점 에서 포함하고 있다.(천개의 고원537)   순수한 질은 우리가 보기에는 여전히 점 체계이다. 떠다니는 회상이건 초월적인 회상이건 환상의 씨앗이건 순 수한 질은 상기일 뿐이다. 이와 반대로 기능주의의 입 장은 질을 고려할 때 그것이 정확히 어떤 배치물에 서 수행하는, 또는 어떤 배치물에서 다른  배치물로 이 행하는 데서수행하는 기능만을 고려한다. 질은 그것을 파악하는 생성안에서 고려되여야만 하며, 생성이 원형 이나 계통발생적 회상의 가치를 지닌 내재적 질 안에서 고려되여서는 안된다.(천개의 고원 578)   기능적 블록은 상기와 환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아이ㅡ되기와 여성ㅡ되기로, 탈영토화의 성분으로 작용한다.(동상579)   내부 배치물에는 온갓 종류의 이질적인 성분이 개입되여 있다. 재료, 색채, 냄새, 소리, 자세 등을 결합하는 배치 물의 지표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방식으로 배치되여 하 나의 모티프로 편입되는 다양한 행동의 요소까지… 이질적 요소들의 “동시적 성립.” 이러한 요소들은 처음에는 퍼지집합이나 이산집합을 이루고 말지만 마침내 고름을 획득하게 된다.(천개의고원614)      배치물들은 이미 지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물론 배치물들은 지층들 속에서 만들어지지만, 배치물들은 환경이라는 탈코드화 지대에서 작동한다. 배치물은 우선 환경에서 하나의 영토를  솎아낸다. 모든 배치 물은 일단 영토적이다. 배치물의 첫번째 구체적 규칙은 배치물들이 감싸고 있는 영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항상 그런 영토성이 하나 있기 때문이 다. 예컨대 베케트의 등장 인물들은 쓰레기 통이나 벤치에서 하나의 영토를 만들어낸다. 인간이든 동물 이든,  누군가의 영토적 배치물을, 즉 “안식처” 를 찾아내라. 영토는 온갖 종류의 탈코드화된 단편들로 만들어진다. 이 단편들은 환경에서 차용한 것들이 지만, 또한 “고유성( =재산)”의 가치를 갖는다. 여기서는 리듬들 조차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리토르넬 로)  영토는 배치물을 만든다. 영토는 유기체와 환경을 한꺼번에 초과하며, 이 둘간의 관계를 초과한다. 그 렇기 때문에 배치물은 단순한 “행동양식”도  넘 어선다. (따라서 영토적 동물과 환경적 동물 간의 상대적 구별이 중요해진다.(천개의 고원960)   영토적인 것의 한 배치물은 아직 지층에 속해 있다. 적어도 배치물의 한 측면은 지층에 면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측면에서 볼 때 모든 배치물에서 내용과 표현이 구분된다. 각각의 배치물에서 내용과 표현을 찾아내고, 그것들 간의 실제적 구분, 상호 전제, 약간의 상호 개입을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배치물이 지층들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거기에서 표현은 기호 체제, 기호 체제가 되고, 내용은 실천 체제, 능동작용과 수동작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굴ㅡ손, 몸 체ㅡ말이라는 이중 분절이며, 이 둘간의 상호 전제이 다. 바로 이것이 모든 배치물의 일차적 분할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즉 모든 배치물은 한편으로는 기계적 배치물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언표 행위하는 배치물로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매 경우마다 무엇을 행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는지 둘 다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둘사이, 내용과 표현사이에는 아직 지층들에는 속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가 설립된다. 즉 언표나 표현은 몸체나 내용에 그런 것(성질)으로서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을 표현해준다. 지층에서 표현은 아직 기호를 형성하지 않았으며, 내용도 아직 실천을 형성하지 않았 다.  그래서 표현에 의해 표현되고 내용에 구속되는 비물체적 변형이 이런 자율적인 지대는 아직 실천을 형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표현에 의해 표현되고 내용에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의 이런 자율적인 지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기호 체제는 이형조성적 지층이나 인간 형태의 지층(여기엔 영 토화 된 동물도 포함 된다)에 전개된다. 하지만 기호 체제는 모든 지층을 가로 지르고 또 넘어간다. 내용과 표현의 구분에 종속되여 있는 한 배치물은 여전히 지층에 속한다. 그리고 기호 체제와 실천 체제는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넓은 의미에서 나름대로 지층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내용ㅡ표현의 구분은 새로운 모습을 띠기 때문에, 우리는 좁은 의미에서 지층의 요소와는 다른 요소에 직면하게 된다.( 천개의 고원961)   그러나 배치물은 또 다른 축에 의해서도 나뉜다. 배치물의 영토성(내용과 표현을 포함하는)은 첫번째 측면에 지나지 않으며, 또 다른 측면은 바로 이 배치물을 가로  지르고 탈취하는 탈영토화의 선들로 구성된다. 이선들은 실로 다양하며, 일부 선들은 영토적 배치물을 다른 배치물들을 향해 개방하거나 그리고 이행시킨다(가령 동물의 령토적 리토르넬로는 궁정이나 집단의 리 토르넬로가 된다), 또 다른 선들은 직접 배치물의 영토성에 작용해, 중심을 벗어난 태고적 또는 미래의 땅위로 배치물을 개방한다.(가령 가곡에서 또는 더 일반적으로 낭만주의 예술가에서의 영토와 땅의 놀이). 또 다른 선들은 배치물들이 작동시키는 우주 적이고 추상적인 기계 위로 이 배치물들을 개방 한다. 그리고 배치물의 영토성은 환경에 대한 특정한 탈코드화에서 기원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필연적으로 이 탈영토화와 선들로 연장된다. 코드가 탈코드화와 분리될 수 없듯이 영토는 탈영화와 분리될 수 없 다. 나아가 바로 이 선들을 따라 배치물은 이제 서로 구분되는 내용과 표현이 아니라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 탈지층화 된 힘들과 기능들을 보여준 다. 따라서 배치물의 구체적 규칙들은 다음 두 축에 따라 작동한다. 한편으로 어떤 것이 배치물의 영토성 이며, 어떤것이 기호 체제와 실천체계인가? 다른 한편 어떤 것이 탈영토화의 첨점들이며, 어떤 것이 이것 들이 작동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인가? 배치물에는 네개의 값이 있다. 1)내용과 표현 2)영토성과 탈영토 화. 가령 카프카의 배치물과 같은 특권적인 례에서는 이 네가지 측면이 드러난다. (질 들뢰즈 /필릭스 가타리’천개의 고원’ 962)  
215    14. 고른판(기관없는 몸체)에 대하여 댓글:  조회:267  추천:0  2021-04-16
14. 고른판(기관없는 몸체)에 대하여     고른판 또는 평면에는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질료들의 무차별적 집합이 아니라 이런저런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의 카오스도 아니다. 정말이지 고른판 위에서는 더 이 상 형식도 실체도 없으며, 내용도 표현도 없고 상대적 탈령토화도 각각의 탈영토화도 없다. 하지만 지층들의 형식과 실체 아래에서 고른판(또는 추상적인 기계)은 강렬함의 연속체들을 구성한다. 고른판은 서로 다른 형식들과 실체들로부터 추출해낸 강렬함들을 위해서 연속성을 창조한다. 내용과 표현 아래에서 고른판 (또는 추상적인 기계)은 기표 작용과 아무런 관계 없는 기호들을 가장 탈영토화된 입자들 안에서 기능하게 하는 입자ㅡ기호들(미립자들)을 방출하고 조합한다. 고른판 (또는 추상적인 기계)은 상대적 운동 들 아래에서 각각의 지표들을 절대적 가치로 변 형시키는 탈영토화의 흐름들을 집합접속시킨다.  (질 들뢰즈 /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139)   고른판은 모든 은유를 페기한다. 고르게 함께 있는 모 든 것은  (질재란 자크 라캉이 말하는 부 재)이다. 그것들은 몸소 나타난 전자들이고, 진짜 검은 구멍들과 실제 세포소 기관들이고, 진정한 기호 들의 시퀀스(하나의 에피소드단위)들이다. 그것들은 다만 자신의 지층에서 뽑혀나와 있고 탈지층화, 탈코 드화, 탈영토화 되여있는 것일 뿐이다. 고른판 위에서 자신들을 인접화시키고 상호 침투를 허용하는 것 이다. 말없는 춤, 고른판은 층위의 차이, 크기의 차 원, 거리를 모른다. 고른판은 형식과 형식을 부여받은 실체의 구분도 모르고 내용과 표현의 구분도 모 른다. 이것들은 지층들을 통해서만, 지층들과 관련해 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천개의 고원138)   고른판은 다양체의 차원수를 둘로(=이차원으로) 축소시키기는 커녕 판판한 다양체들- 이들이 몇차원을 지녔건 -  을 공존시키기 위해 그것들 모두를 재단하고 교차시 킨다. 고른판은 모든 구체적 행태들의 교차이다. 따라 서 모든 생성은 마법사의 그림처럼 이  고른판 위에 기록된다.이 고른판은 모든 생성이 자신의 출구를 찾게  되는 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 든 생성이 난관에 봉착하고 무로 빠져드는 것을 막아주 는 유일한 기준인 것이다.(동상477)   고른판에서는 모든 것이 지각불가능하게 되고, 모든 것은 지각불가능하게 되기이다.(동상478)   사실 하나의 아포리즘(론리나 사유가 막힘)이 주어지면 그것의 배치를 진정으로 바꾸고,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도약하게 하는 빠름과 느림의 새로운 관계들을  그것의 요소들 사이에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며, 심지어 필수적이다.(천개의고원510)   사람들은 하나의 판위에 다른 판을 끊임없이 재구축하거나 하나의 판에서 다른 판을 끊임없이 추출해낸다. 례컨대 떠다니는 내재성의 판을 표면에서 자유롭게  노닐게 내버려주는 대신  의 깊숙한 곳에 처박아넣고 묻어버린다면 그것만으로도 판은 다른 쪽으로 옮겨 가, 조직의 관점에서 보면 유비의 원리일 수밖에 없으 며 전개의 관점에서 보면 연속의 법칙일 수 밖에 없는 토대의 역할을 한다.(동상511)     고른판은 기관 없는 몸체이다. … 항상 도주선들을 봉쇄 하려고, 탈영토화의 운동들을 저지하고 차단하려 하며,  그 운동들을 무겁게, 재지층화하고, 깊이에서 형식들 과 주체들을 재건하려한다.그리고 역으로, 고른판은 끊 임 없이 조직의 판을 빠져나가고, 입자들을  지층밖 으로  풀려나가게 하고, 빠름과 느림을 이용해 형식 들을 교란시키고, 배치물들, 미시-배치물들의 힘을 이용해 기능들을 부순다.(천개의 고원512)   조직의 판은 그자체로는 파악될 수 없으며 항상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도출되거나 추론되고, 지각체계를 벗어 나있다. 이 판은 정확히 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동상537)   고른판은 특정한 배치물에 개입하는 다른 인과성들의 영향을 받아 배반당하거나 왜곡 될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성되면서 해체 될지도 모를 제나름 의 고유한 위험들을 스스로 낳는다.(천개의 고원539)   매끈한 공간은 끊임없이 홈이 패인 공간속으로 번역되고 이 공간을 가로 지르는 한편 홈이 패인 공간은 부단히 매끈한 공간으로 반전되고 되돌려보내진다. 홈이 패인 공 간에서는 사막조차 조직화되며 매끈한 공간에서는 사 막이 퍼지고 확장되여 나간다. 그리고 이 두가지가 동 시 에 진행될 수도 있다. (들뢰즈 가타리 ‘천개의 고원’907)   아마 모든 진전은 홈이 패인 공간에 의해 그리고 이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모든 생성은 매끈한 공간속에서 일어난다.(들뢰즈 가타리 ‘천개의 고원’928)   판은 숨겨진 원리일 수 있다….판은 본성상 숨겨져있다. (천개의 고원503)   형식에는 숨겨진 구조가 필수적이며, 주체에는 비밀스 런 기표가 필수적인 것이다…판은 목적론적 판이자 하 나의 구상정신적 원리이다. 그것은 초월성의 판이 다.  그것은 유비의 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로는 전개에 있어 탁월한 향을 지정하며, 때로는 구조라는 비율적 관계들을 설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의 정 신 속에 있을 수도 있으며, 생명,영혼, 언어 등의 무의 식 속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항상 자신의 고유한 결과들로부터만 귀결된다. 그것은 항상 추론에 의해 이끌어내진다. 설사 내재적이라고 얘기된다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부재에 의해서만, 유비적으로 (은유 적으로, 환유적으로 )만 내재적일 뿐이다. (천개의 구원504)      고른판 또는 조성의 판(평면대)은 조직의 판 또는 전개 의 판과 대립된다. 조직과 전개는 형식 및 실체와 연관되여 있다. 즉 그것은 형식의 전개와 동시에 실체 또는 주체의 형성과 관련되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른판은 실체나 형식을 알지 못한다. 이 판위에 새겨지는  들은 정확히 말해 형식이나 주체에 의해 진행되지 않는 개체화의 양태들이다. 이 판은 형식화하지 않는 요소들 간의 빠름과 느림의 관 계속에,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강렬한 변용태들의 조성속에 추상적이지만 실재적으로 존재한다 (이판의 경도와 위도). 둘째로, 고름은 이질적인 것들, 이산적인 것들을 구체적으로 고르게 재결합한다. 그것은 퍼지 집합들, 다시 말해 리좀유형의 다양체들의 다짐을 확보해 준다. 결국 이러한 다짐에 따라 이루어진 고름은 필연적으로  중간에서, 중간을 통해 작용하 며, 모든 원리의 판이나 합목적성의 판과 대립된 다. 스피노자, 훨덜린, 클라이스트, 니체는 그러한 고른 판의 측량사이다. 결코 통일화, 총체화가 아니라 고 름이나 다짐을 측량하는. 고른판에 새겨지는 것에 는  , 사건, 그자체로 파악되는 비물체적 변형 등이 있다. 또한 모호하지만 엄밀한 유목적 본 질이, 그리고 강렬함의 연속체 또는 상수와 변수들 모두 넘어선 연속적 변주도 거기에 새겨진다. 또 항도 주체도 없지만 서로를 근방역이나 비결정성의 지대로 끌고 들어가는 생성들이 거기에 새겨진다. 그리고 홈이 패인 공간을 가로 질러 구성되는 매끈한 공간이 거기에 새겨진다. 매번 우리는 기관 없는 몸체가, 기관 없는 몸체들(고원들)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 이한 개체화, 영도(零度)에서 출 발하는 강렬함이 생산 변주의 질료, 생성이나 변형의 매체, 공간의 매끈하게 되기 등을 위해서 말이 다. 지층들을 벗어나는 강력한 비유기적 생명은 배치물들을 가로 지르고, 윤곽 없는 추상적인 선, 유목민 예술의 선, 이동하는 야금술의 선을 그린다.(천개의 고원 966)   고른판이 기관없는 몸체들을 구성하는 것일까. 아니면 기관없는 몸체들이 이 판을 조성하는 것일까? 와  은 동일한 것일까? 어쨌든 조 성하는 것과 조성된  것은 같은 역량을 갖고 있 다. 선은 점보다 높은 차원을 갖고 있지 않으며, 면은 선보다 높은 차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입체는 표면보다 높은 차원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항상 분수차원의 수는 비정확하며, 부분들과 함께 끊임없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판은 가변적인 차원을 가진 다양체들을 선별해낸다. 따라서 문체는 판의 다양한 부분이 연결접속되는 양태 이다. 기관 없는 몸체들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함께 조성되는 것일까?   강렬함의 연속체들은 어떻게 연장되는 것일까? 변형들의 계열은 어떤 질서에 따라 만들어지는가? 항상 중간 에서 만들어지며,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분수차원에 따라 조각조각 판을 구성하게 하는 이 비논리적 연쇄들은 무엇인가?  이 판은 일렬로 늘어서 있는 문들과 같다.  그리고 이 판을 구성하는 구체적 규 칙들은 선별적 역할을  수행할 때만 유효하다. 실제로 바로 이 판이, 즉 연결접속 양태가 기관 없는 몸체에 필적하는 텅 비고 암적인 몸체를 제거할 수단을 제 공해준다. 또 그것은 매끈한 공간을 뒤덮고 있는 등질적인 표면을 처치할 수단을 도주선의 길을 바꾸는 죽음과 파괴의 선을 중성화할 수단을 제공한다. 나눔이나 조성의 각 층위에서, 따라서 증가 하거나 감소하는 질서 차원속에서 연결접속의 수를 증대시주는 것(나뉠 때마다 본성을 바꾸는 것,  조 성될 때마다 비교기준을 바꾸는것…)만이 유지되고 보존되고 따라서 창조되고 존속되는 것이다. (천개의 고원 967)
214    13. 문학에 대하여 댓글:  조회:205  추천:0  2021-04-14
13. 문학에 대하여     고전주의 작가들 역시 형태의 문제를 알고 있었겠지만, 론쟁은 글쓰기들의 다양성 및 의미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언어의 구조와는 더욱 관련이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설득 목적에 따라 생각된 담화의 질서만이 문제가 되였다. 따라서 부르죠아적 글쓰기의 특이성이 대응하는 것은 수사학의 다양성이였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 54)   모파상, 졸라, 도데의 그 글쓰기는 문학의 형식적 기호 들 (단순 과거, 간접화법, 씌여지는 리듬)과 사실주의의 역시 형식적인 기호들(민중언어의 덧붙혀진 조각들 거친 말, 방언 등)의 결합체이다. (롤랑 바릍트 ‘글쓰기 0도’62)   공산주의 작가들은 부르주아 작가들이 오래전부터 단죄했던 부르주아적 글쓰기를 요지부동으로 지지하는 유일한 자들이 된다.(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67)   프랑스 소설은 선들, 능동적 도주선이나 긍정적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기보다는 점을 찍느라 시간을 보낸다. 영미 소설은 전혀 다르다, 떠나라, 떠나라, 나가라!...... 지 평선을 가로 질러라…분리선을 찾고 그것을 따라가거 나  창조하라, 그것을 배반하는 지점까지. (질 들뢰즈/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355)    어떠한 변동이 있다할 지라도 실재계 자체는 다른 것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늘 그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것들이 다른 곳으로 망명해갔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121)   주체가 서로 자리를 바꾼다.(동상128)   모방에 대해 많은 론의가 이루어졌지만 그중 상당수는 엉터리다. 모방 현상을 적응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바로 그 한 례다. 나는 모방이 결코 적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동상206)   장자의 꿈 전문; 언젠가 장자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펄펄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여 유쾌하 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자임은 알지 못했다. 갑자기 꿈에서 깨여나보니 엄연히 자신은 장자였다. 그러니 꿈에서 장자가 나비가 되였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되여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자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물화라 부른다. 이때 물화란 사물의 변화, 만물의 끝없 는  유전(流转)을 의미한다.(동상209)   주체로부터 생겨나고 주체에게 애도를 요청하는 틈새, 혹은 구멍은 어디에 생기는가? 그것은 바로 실재계에 생긴다. 그리고 이 구멍에 의해 주체는 내가 앞 세미 나에서 배제라는 이름으로 제시했던 것과 상반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상징계에서 거부된 것이 실재계에 다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의해 생겨난 실재계 속의 구멍 역시 기표를 작동시킨다. 이 구멍은 없어진 기표가 투사될 수 있는 자리로서 작용하고 이것이 타자의 구조 속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이 기표가 없어지면 타자가 우리의 질문에 반응할 수 없게 된다. 이 기표는 우리 자신의 살과 피를 지불했을 경우에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면을 쓰고 있는 남근이라는 기표다.   바로 그 구멍에 남근의 기표가 자리 잡는다. 그러나 동 시에 그곳에 자리 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남근의 기표는 오로지 타자의 차원에서만 표출되기 때문 이다. 그 구멍으로 정신병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미지들이 남근의 자리를 차지하러 몰려든다 …. 수많은 이미지들이 남근의 자리를 차지한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178)   글쓰기는 말하기가 갖는 효과 즉 단순히 기교적인 차원을 넘어 새로운 것을 형성하는 효과를 가져야 한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 53)   사회주의적 현실에 완전하게 상응하는 공용어가 가능하다면 어떤 문학적 형식주의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56)    자신(을 쓴 샤토브리앙)의 마지막 그림속에 그 최상의 신비한 불완전성을 담아놓은 푸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불완전성은 완성된 예술보다 더 아름다운데, 시간의 떨림이다. 추억은 글쓰기의 시작이고 차례로 글쓰기는 죽음의 시작인 것이다.(그것이 아무리 젊은 때 시작된다 하더라도 말이다)(동상128)   문학은 분리시키고 일탈시킨다(동상 134)   대립들이 엄격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을 두개이상의 상이한 풍경이 아래로 쫙 펼쳐지는 산정상의 능선처럼 얇고 날카로우며 결정적인 일회식 사건을 통해 분리시켜야  한다….문학은 우연적인 진실을 영원한 개연성 (필연 성)으로 대체 한다(동상135)   백과전서적인 시적 세계는 언제나 어떤 비현실주의로 규정된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121)   문학은 정치적으로는 모든 독단론을 불신하고, 모든 전 제를 심지어 책임의 윤리나 책임의 정치에 깔려있는 전제조차 분석하여 어떠한 문제라도 제기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리를 부여받는다. 문학은 말의 자유 및 생각의 자유와 불가분하게 련결되여있다. … 문학 은 어떤 사회에서든지 내 머릿속의 비밀장소안에서 있을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식으로 무엇이든지 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15)   문학에는 한정된 의미나 정착 지점이 없다. 특별히 비평 적 방식이나 생산적 방식에 한해서 한정된 의미와 정착 지점의 탐색을 허용하긴 하지만 말이다. 문 학작품에는 결코 휴식이 없다. 그것은 소속도 없 다.  문학에는 돌아갈 집이 없다. 그것은 이상한 방랑자, 이상한 자유인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16)   텍스트는 ‘현재하지 않는 잉여’ 론리의 지배를 받는 ‘흔적들의 직조물’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155)   철학에서든 문학에서든 아니면 다른 무엇에서 든지 간에, 위대한 작품들의 등장은 변함없이 어느 정도의 몰이해와 당황, 망설임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위대한 작품에 대한 수용의 맥락이 바뀌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동상163)     해체는 문학에 어울린다… 해체는 모든 문학작품의 내부에서 특히 문학작품  내부에서, 언제나 이미 작동하고 있다.(니콜러스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85)   문학 없는 민주주의는 없으며 민주주의 없는 문학도 없다.(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86)   그(데리다)의 관심을 끄는 문학작품은 더욱 보편적인 변형에 참여한 작품들, 즉 우리끼리는 그것을 해체 라고 말했던것인데 서구적 사유를 뒤흔들고  전복 시키는 작품들이다.(동상 187)    궁극적인 아포리아는 아포리아 그자체의 불가능성이다. (아포리아란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뜻한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98)    쉐익스피어의 업적처럼 데리다의 업적 또한 비범하고, 경이로우며, 거창하고, 괴상하고, 비정상인 것처럼 보인 다.(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220 )   ‘나는 글이라고는 한번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쓰는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글을 쓴다… 새로운 글 을 시작할 때마다, 그것이 아무리 평범한 글일지라 도, 나는 마치 미지의 것 혹은 범접할수 없는 것을 대면할 때처럼 당황스어울 뿐 아니라, 어색하 고, 서툴고, 무기력한 느낌에 시달린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221)   ‘내가 한 말이 나를 놀라게 하고 나에게 내 생각을 가르쳐주 기도 한다’… ‘글쓰기가 위험하고도 괴로운 일인 까닭은 순수한 의미에서 그것이 창립적이기 때문이다.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223)   어째서 ‘문학이… 언제나, 말하자면,다른 어떤 것을 행 하고, 제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존재하 는지, 다시 말해서 어째서 문학자체는 제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일 뿐인지, 그 일관된 불일치성의 비밀 혹은 신비한 이질성과 관련되는 것이다.’ 데 리다가 보기에, 덱스트를 ‘위대하게’만드는것은 ‘의미로 탕진되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유발하는’능력에 있다. 그것은 또한 특히 메시지라는 보편적 자원을, 서 명이라는 궁극적 독서불가능성, 특히 문학작품이거 나 철학작품 개념에 관심을 보인다.(동상267)    나의 글씨를 먹고, 마시고, 삼켜서, 그것을 네속으로 져 날라라. 나로 하여금 너의 감로가 되게 하라.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276)   책의 첫번째 유형은 뿌리ㅡ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 방하듯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할 수  없게 된 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천개의 고원14-15)   고전주의 예술가의 사명은 신의 사명과 똑같이 카오스에 질서를 부여하는데 있다. 그는 그저 “창조해라! 천지 창조다! ”라고 외칠 뿐이 다. 랑만주의는… 새로운 외침이 울린다” 다. 영토와  다!” 낭만주의의 도래와 함께 예술가들은 권리상의 보편성에 대한 야심과 함께 조물주의 지위도 포기한다. 그는 스스로를 영토화하고 영토적 배치물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제는 계절들도 영토화된다. (천개의 고원642-643)   낭만주의에 의한 근본적인 혁신은,,, 형식에 대응하는 실체적 부분이 없고, 코드에 대응하는 환경도 없으 며, 형식의 범위 내에서 코드에 의해 질서를 부여받 는 카오스 상태의 질료도 없는 것이다. 대신 부분들은 표 층에서 성립과 해체를 반복하는 배치물에 가깝 게  되였다. 형식자체도 연속적 전개 상태에 놓인 대 규모 형식이 되며 모든 부분을 하나로 묶고 있는 대지의 힘들을 받아들이게  되였다. 질료 자체도 종속시키고 조직해야 할 카오스가 아니라 연속적 변주중에 있는 운 동상태의 질료가 되였다. 관계나 변화가 보편적인 것이 되였다. 질료의 연속적인 변주와 형식의  련속적인 전개, 이처럼 배치물들을 통과하면서 질료와 형식 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질료는 내용의 질료가 되 기를 그치고 대신 표현의 질료가 되며, 형식도 카오스 의 힘들을 억제하는 코드가 되기를 그치고 스스로 힘 이 되고 대지의 힘들의 집합이 되려고 한다. (천개의 고원 645)   고전주의적 연속체는 밀도가 동등한 요소들의 연속인데, 이 요소들은 차안된 것같은 개인적 의미작용에 대한 모든 성향을 제거하고 동일한 감각적 압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시적어휘 자체는 창안이 아니라 관 례의 어휘이다. 그속에서 이미지들은 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습을 통해 고립되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특수하다. …고전주의적 기교적 수식은 낱말들이 아니라  관계들의 기교적 수식이다. 그것은 창작의 기교가 아 니라 표현의 기교이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44)
213    12.무의식에 대하여 댓글:  조회:241  추천:0  2021-04-12
12.무의식에 대하여     보아스가  레비스트로스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문화 적 형상의 무의식적 특성에 대하여 강조하였다는 점과 이 무의식적 구조를 푸는 열쇠로 언어의 법칙을 들었다는 점이다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력사’ 42)   인간이 기표와 관련을 가진다는 말이 뜻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꿈에 관한 분석에서 무의식이라 부른 타자의 무대를 지배하는 법칙의 재발견이다. 무의식이란 언어를 형성 하는 매우 불안정한 요소들의 연쇄 속에서 발견되는 효과다. 그것은 결합과 대체라는 기표의 이중 운동을 통해 규정되며 환유와 은유에 의해 기의를 생성한 다. 무의식은 주체를 형성하는 결정적 효과인 것이 다. 이런 시도로부터 수학적 의미에서 하나의 위상 이라 불릴만한 것이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위상이 없다면 우리는 정신적 분석학적 의미에서 징후의 구조를 인식할 수 없다.   무의식은 타자속에서 말한다. 그것은 발화에 의존하여 야만 환기되는 바로 그 장소를 지시한다. 중요한 것은 지시가 타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발화도 타자가 개입해서 그것과 관련을 맺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 이다. 주체가 들을 수 있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무 의식이 타자 속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주체가 바로 그타자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실행하기 때문이 다. 주체의 의미화 작용은 기의를 만들어내려는 어떤 시도 보다도 앞서있는 것이다. 주체가 바로 그 장소 무의식속에서 형성된다는 말은 주체는 형성되기 위해 서 분열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자크 라캉 ‘욕망이론’278)   남근이 자신의 기능을 드러내는 곳이 바로 여기다.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남근은 허구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현상이 아니다. 또한 남근은 그자체로 현실과의 연관 성을 강조하는 대상(부분 대상,내적 대상, 좋은 대 상, 나쁜 대상) 등도 아니다. 남근이 남성 성기나 음핵 같은 신체의 기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더욱 진실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고대사람들의 형상속에 나타난 남근을 이야기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닌 것이다.   남근은 기표다. 이때의 기표란 분석이 갖는 상호 주관적인 경제속에서 남근이 신비 속에서 수행해왔던 기능들의 베일을 벗기는 역할을 한다. 남근은 기의가 갖는 효과 들을 온전히 명명할 수 있는 기표이다. 왜냐하면 기의가 갖는 효과들이 이미 기표에 의해 규제되기 때문이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279)   남근은 특권을 가진 기표이며 의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횡선을 표시한다. 횡선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 호와 욕망이 결합된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282)   남근은 의미작용의 련쇄속으로 편입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감추어야 하고 스스로를 감출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기표의 기능을 가질 수 있다.(동상283)   남근을 가진 여성이 있다(동상296)   무의식은 , 실재계에 결여되여 있어서 성적인 목표에 서나 획득될 수 있는 남근과의 관계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다…이때 남근이라는 주체가 거세 콤플렉스를 통해 자신이 남근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결정된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245)   남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느 때 처럼 프로이트는 미리 생각해보지도 않고 즉흥적으로 그것이 주체의 자기애적 요구라고 대답한다 … ‘자 기애적’인 것은 상상계와 련관된다(동상189-190)      힘과 권능의 기표인 남근 (동상192)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라는 무의식으로 성의 욕망에 대한 공식을 변형하면, 그것은 보여주기로 끝 나는, 일종의 타자측의 욕망에 대한 문제이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263)    정신을 개입하지 않고서도 문자가 인간에게 가능한 진리효과들을 모두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정신이 내건 주장들은 난공불락의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프로이트가 이런 사실을 발견해냈으며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무의식이라 불렀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73)   프로이트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기표로서의 각 이미지가 갖는 (개별) 가치들이 의미화 작용과는 아무 관계 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했다. …언어학적 훈련이 결여 된 정신분석 학자들은 문자를 자연적인 유사성에 기초 한 상징으로 혼동하고 있다. 물론 문자를 본능적인 이미지로 간주하는 것도 그들의 편견일 뿐이다 …무 의식이 문자라는 사실을 념두에 두지 않고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자크라캉 ‘욕망 이론’74ㅡ75)   무의식이란 기표의 활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동상75)   무의식은 존재의 근원이다.(동상96)   무의식은 인간이 기표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동상135)   무의식은 기원이나 본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표로  이루어져있다…연결과 대체는 전이 작용에서 기표에 주어지는 공식들이다.(동상90)   타자는 단순히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주체가 아니다. 타자의 존재는 타자성의 두번째 단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타자는 또 다른 주체가 아닌 주체가 환원시킬 수 없는 이질성으로 이해될 때에야 비로소 나와 다른 주체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이 타자(대문자로 표시되는)의 담론이라고 말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별 주체들을 넘어선 어떤 차 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거기서, 욕망은 타자에게 인 정 받기를 원하는 욕망이 된다. 달리 말하면 타자 란 그것이 없으면 거짓말도 가능하지 않을 내속에 있는 진리의 보증자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언어의 등장 과 함께 진리의 차원이 열린다는 것이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93-94)   타자가 갖는 이질성을 다른 주체들에 대한 인식 정도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은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 있어 타자의 존재는 마이다스왕의 귀와 같다 . (동상95)    무질서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동상98)   몸의 핵심에는 무의식이 있다. …무의식으로의 접근은 언어를 매개로 한다. (프랑수아도스’구조주의력사’ 61)    백조는 문학에서 벌거벗은 여성의 대용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73)   무의식에서 움직이는 모든 이미지와 같이, 백조의 이미 지는 남녀양성인 것이다. 백조는 빛나는 물의 응시에 있어서는 여성이며, 행동에 있어서는 남성이다. 무의 식에 있어서 활동은 행위이다. 무의식에 있어서 는 ‘어떤 현실적 행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떤 행위를 암시하는 이미지는, 무의식계에 있어 여성에서 남성에로 발전하는 것이다.(가스통바슐라르’물과 꿈’ 76   무의식은 언어의 산물, 언어 법칙들의 산물, 언어 코드 의 산물이 된다…나는 내가 있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 한다. 탈 중심적이고 분리된 주체라는 새로운 관점은 당시 인문 사회과학의 다른 분야들에서도 통용되는 일반적 개념이였다. (푸랑수아도스 ‘구조주의력사’ 173   레비스트로스는: 무의식은 상징적 기능에 귀속된 다...  잠재의식이란 개별적 기억들의 저장소인 반면 에 무의식은 언제나 비여있는 것이다… 특수한  기 능을 지닌 기관의 무의식은 구조적 법칙들을 부과하는 역할만을 한다. 이렇듯 레비스트로스가 정의하는 무의식 이란 개인의 정감이나 내용, 혹은 력사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무의식은 그저 상징적 기능이 수행되는 빈 장소인 것이다. 우리는 이 정의를 통해 가변요인에 대한 불변요인(빈장소)의 우위, 내용에 대한 형식의 우위, 기의에 대한 기표의 우위 등 구조주의 패러 다임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상징은 상징자체 가 상징하고 있는 바보다 더욱 현실적인 것이다. 기표는 기의에 선행하며, 또한 기의를 규정한다. (동상183)   무의식이란 상징적 기능의 위치, 그리고 이 상징적 기 능을 인간정신의 테두리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도록 하는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는 개념이다. 무의식의 개 념은 또한 이 상징적 기능을 시간적, 공간적 제한으 로부터 탈피해 철저히 독립적이고 추상적, 형식적 존재로서 리해가능토록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레비 스트로스는 어째서 무의식 개념을 응용하면서도 욕망의 차원을 배제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욕망이 과연 무의식을 이루는 근원적 차원이란 말인가? 나로서는 근본적으로 찬성할 수 없는 견해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185)   인간을 초월하는 상징적 차원의 외재성이야말로 무의식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상징적 차원은 사회적인 것에 속하지도 그렇다고 인간의 개인에게 속하지도 않는 것이 다.  (동상 188)   라캉의 무의식 주제는 영구히 분리되여있는 것, 어떠한 접근의 기도도 용납되지 않는 것, 존재할수도 없는 것, 언제든 다른 곳에 있는 것 등을 의미한다.  … 언 어학적 모든 기호가 모든 지시대상으로부터 단절되여  있듯이 모든 생리학적 현실로부터 분리되여있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196)   무의식은 언어의 조건이다… 인간은 언어 그자체이다…라캉에 잇어서 무의식은 상징계에 준거한다. …무의식에 대한 탐구는 단연코 언어학의 탐구령역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200-203)   무의식은 이제 초월적인 조직의 판의 숨은 원리가 아니라 구성되면서 자신 스스로 나타나는 내재적인 고른판의 과정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재발견해야 할 것 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개의 고원538) 
212    11 .형식과 내용에 대하여 댓글:  조회:231  추천:0  2021-04-09
 11 .형식과 내용에 대하여     형식 자체에는 비밀스런 지각과 행동양태, 즉 비밀스런 영향이라는 비밀의 두 병존물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병존물은 형식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재형성하 고 새롭게 방출하는 형식의 특질들이 되였다. (질 들뢰즈 가타리‘천개의 고원’546)   형식이 곧 내용이다 라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보고 있 기 때문에, 형식과 내용을 같다고 보는 낭만파 후기의 생각을 시인하는것이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41)    ‘불안정한 입자ㅡ흐름’은 딱히 입자나 파동이라고 할 수 없는, 세계를 이루는 기초인데 그것의 다른 이름이 질료 또는 물질이다. 실체는 질료로 형성(=형식화) 된, 다시 말해 질료와 형상이 결합되여 이루어진 거의 안정적인 단위들이다. 형상 또는 형식은 실체에 부 과되어있는 질서이다. 안티ㅡ오이디푸스에서 기계를 설명하는 대목이 여기서 대응한다. “기계는 절단 의 체계로 정의된다… 모든 기계는 무엇 보다도 연속된 물질적 흐름(질료)과 관계된다… 연합된 각각의 흐름은 관 념적인 (형상적인)것으로 여겨져야 한다….사실상 질료 는 물질이 관념안에 소유하고 있는 순수 연속성을 가리킨다… 절단은 연속성에 대립되기는커녕 연속성의 조건이 되며, 그것이 절단하는 것을 관념적 연속성 으로서 내포하거나 규정하고 있다 ”(천개의 고원87)   실체는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형식은 코드 및 코드화 양식과 탈코드화 양식을 내포한다.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인 실체는 영토성 및 영토화의 정도와 탈영토화의 정도에 관련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각각의 분절마다 코드와 영토성이 둘 다 있으며 그 각각의 분절 나름대로  형식과 실체 를 갖고 있다. 지금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분절에 상이한 유형의 절편성이나 다양체가 대응한 다는 점 뿐이다.(천개의 고원88)   질료라고  불리는 것은 고른판 또는 이다. 즉 형식을 부여받지 않았고 [유기적으로] 조직화되지 않았으며 지층화되지 않은 또는 탈 지층화된 몸체이다. 또한 그런 몸체위를 흘러가는 모든 것, 다시 말해서 분자나 원자 아래의 입자들, 순수한 강렬 함들, 물리학과 생물학의 대상이 되기 이전의 자유 로운 독자성들이다. 내용이라고 불리는 것은 형식을 부 여받은 질료이다. (천개의 고원92)   실체는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이기 때문에 형식 없이는 실체를 지각할 수 없다. 비록 어떤 경우에는 실체없이 형 식을 지각하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말이다.   …사실상 모든 분절은 이중적이기 때문에 내용의 분절과 표현의 분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용의 분절은 내용안에서 그것의 상관물인 표현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중적이며, 표현의 분절은 표현 안에서 그것의 상관물인 내용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중적이다. 이런 리유로 내용과 표현사이, 표현과 내용 사이에는 매개 상태들, 층위들, 평행 상태들, 교 환들이 존재하며 지층화된 체계는 이것들을 통과해 간다.(천개의 고원94)   충전과정을 통해 비슷한 입자들이 모여 원자나 분자가 되고 비슷한 분자들이 모여 더 큰 분자가 되며 가장 큰 분자들이 모여 그램분자적 집합체가 된다. 이는 이중 집게 또는 이중 분절로서의 “유유상종의 인력”이다. (천개의 고원96)   챌린저가 말했다. 이제 우리는 각각 나름의 형식과 실체를 갖고 있는 내용과 표현의 새로운 조직화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기술이라는 내용과 기호 또는 상징이라는 표현이다. 내용은 손과 도구일 뿐만 아니라 이것들에 앞서서 존재하며 힘의 상태들이나 권력구성체를 이루는 기술적ㅡ사회적 기계이기도 하다 .(천개의 고원126)    표현과 내용 각각이 자신의 형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개 상태들이 고유한 표현의 형식들을 내용에 도입하고 고유한 내용의 형식들을 표현에 도입하기 때문이다. (천개의 고원118)   표현은 그 자체로 독립적, 다시 말해 자율적인 것이 된 다.(동상119)     표현은 안면과 언어, 그리고 언어들일 뿐만 아니라 이것들에 앞서서 존재하며 기호체제를 이루는 기 호적ㅡ집단적 기계이기도 하다. 권력구성에는 도구 이상의 그 무엇이며, 기호체제는 언어이상의 그 무 엇이다. 오히려 권력구성체와 기호체제는 도구와 언어를 사용하도록, 그것들 상호간 또는 각각을 소통시키고 확산시키도록,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구성하도록 결정하고 선별하는 자로서 작용한다. 이 세번째 지층과 함께, 이 지층에 완전히 속해 있으 면서도 동시에 몸을 세워올려 자신의 집게발을 다른 모든 지층들을 향해 모든 방향으로 뻗는  이  출현하게 된다. 그것은 추상적인 기계의 두 상태 사이에 있는 매개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닐까? (천개의 고원127)   표현의 형식이 기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내용의 형식은 기의가 아니다. 이 점은 언어가 개입하는 지층들을 포함한 모든 지층들에서 진실이다. (천개의 고원131=132)   그어떤 경우에도 내용과 표현은 결코 기의ㅡ기표로 환원될 수 없다. (여기에 두번째 문제가 있는데) 내용과 표현은 하부구조ㅡ상부구조로 환원될 수 없다. 더이상 우리는 표현이 기표 작용적이기 때문에 우위에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고, 내용이 결정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표현에는 어느 정도 독립성과 어느 정도 반작용 가능성을 허용해 준다고 할지라도 표현이 내용을 반영하는 형식이 될 수는 없다.(동상133)    형식을 부여받은 내용이라면 모두가 몸체이다… 표현의 형식은 표현된 것이라는 날실을 통해 구성되며 내용의 형식은 물체들이라는 씨실을 통해 구성된다. 칼이 살에 박힐 때, 양분이나 독이 몸에 퍼져갈 때, 포도주 방울이 물에 떨어질 때에는 몸체들의 혼합이 있다. 하지만 칼이 살을 벤다, 나는 먹는다, 물이 붉어진다라는 언표는 이와는 본성상 아주 다른 비물체적 변형(사건) 을 표현한다…순간적 변형이라는 날실은 늘 연속적 변양 이라는 씨실속으로 끼워넣어진다 (스토아학파)(천개의 고원169)   내용과 표현은 서로 결합되고 연계되고 서로 촉진되기도 하고 반대로 재영토화하며 안정화 되기도 한다. (천개의 고원171)   내용이 인과작용에 의해 표현을 결정한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한걸음 물러서서 표현이 내용을 반영하는 힘 뿐만 아니라 내용에 능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해도 말이다.(천개의 고원173)   형식-질료라는 쌍은 힘들 –재료라는 짝짓기로 대체된다. (동상185)   우리는 비정형적인 표현이 옳바른 형식들을 거쳐서 생산된다고 믿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비정형적인 표현 자 체가 옳바른 형식들의 변주를 생산하고 형식들이 상수가 되지 못하게 한다. 비정형적 표현은 랑그가 탈령토화되는 정점을 이루며, 텐서의 역할을 한다. 다 시 말해 랑그를 랑그의 요소들, 형식들, 개념들의 극 한으로 향하게 하며 랑그의 이편 또는 저편을 향하 게 한다. 텐서는 말하자면 문장을 타동사 구문으로 만들 며, 뒤의 항이 앞의 향에 거꾸로 힘을 미치게 하 며, 사슬 전체를 거슬러올라간다. 텐서는 언어를 강렬 하게 그리고 반음계적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해준다. 라는 단순한 표현도 언어 전체를 가로 지르는 텐서의 역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고는 하나의 접속사라기 보다는 자신의 연속적으로 변주 시키는 모든 가능한 접속사들의 비정형적 표현이 다. 또한 텐서는 상수로도 변수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매번 상수의 값을 뺌으로써 (n-1)변수의 변주 를 보장해준다. 텐서는 그어떤 언어학적 범주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텐서는 간접 화법에 대해 서든 언표 행위라는 배치물에 대해서든 본질적으로 화행론적인 값이다.(천개의 고원192-193)    글쓰기에 의한 참여를 글의 내용에서가 아니라 형식 속에서 설정함으로써 그 주제를 혁신한다. 그에(롤랑바르트) 의해 언어 활동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푸랑수아 도스 ‘구조주의 력사’124)   수직성을 통해서만 질서가 잡히는 하나의 세계가 드러난셈이다. 미덕들, 다시말해 외관들의 유일한 수준에서는 그 어떠한 구조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구조는 바로 명백한 것과 감추어진 것 사이의 진실관계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97)
211    10. 예술에 대하여 댓글:  조회:175  추천:0  2021-04-08
10. 예술에 대하여     이 군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말라르메이 고,  문학이 민중과 련관되여 있다고 말한 것은 카프카 였고, 또 민중이 가장 중요하지만 또한 가장 결여되여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클레였다.따라서 예술가의 문제는 근대에 들어와 민중의 인구감소가 열대지로 이어지고 이것이 예술을 수단으로 하거나  예술이제공하는 것을 수단으로 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과 대지는 이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코스모 스의 사방팔방에서  폭격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끌 고 나가는 코스모스의 백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코스모스 자체가 예술이 될 것이다. 인구의 절  멸을 코스모스 규모의 민중으로 바꾸고 탈영토화를 코 스모스 규모의 대지로 바꾸고,바로 이것이 여기저기에서 어디까지나 국지적으로 존재하는 예술가ㅡ장인들의 바람인 것이다.(천개의 고원 658)   Shkrovsky는 ‘예술은 언재나 인생으로부터는 자유이고, 그것의 색갈은 도시의 성책위에 펄럭이는 깃발의 색갈을 결코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 일  예술이, 특히 문학이,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문학의 학술적 연구나 비평은 마땅히 애  매함이 없이 분명하게 확정된 고유의 자동영력을 가지고 있는 통일된 지적 활동이라야 할것이 다. ‘예술형식은, 예술 고유의 법칙에 의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라고 주장한 skrovsky의 분명히 구조주의 적인 일반 원칙에 따른다면, 위에 말한 그 령역은, 문 학이란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문학인가라는 것에, 즉 언어예술 전반에서의 특유한 성질에 밀접하게 연관되여 있다. 스크로브스키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이란, 작품을 될 수 있는대로 예술적인 것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 따라 특수한 기법으로 창작되여진 작품을 말한다”를 용인하는 것은 야콥슨의 결론인” 문학 연구의 대상은, 문학의 총체가 아니고, 문학성, 즉 작품을  문학작품이 되게 하는 그것이다” 를 역시 용인하는 것이 된다 …. 작가의 내부에서가 아니고 작품자체의 내부에 서, 즉 시인에서가 아니고  시의 내부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거기에 사용된 언어 의 독특한 용법에 깃들어있어야 한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83)   예술작품은 모방(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식적 견해를 제쳐놓고, 그 자리에 형식의 완전한 우월이라는 관념을 대치시키는 일이기 때문이 다. 이렇게 생각되여지는 문학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문학다운 것이다. 즉 다른 실체를 지각해볼 수 있는 창문이 아니라, 자기 충족적인 실체인 것이다. 내용이 란 문학형식의 한 기능에 불과하며, 형식을 넘어서서 혹은 형식을 통해서 감지될 수 있거나, 형식과 분리될 수 있는 그무엇은 아니다. 실은 작품이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인 것이다. 사실인즉 작품은 스스로의 발생, 스스로의 구성에 대해서  말하 고 있을 따름이다.(동상 91)   예술이라는 과정의 생명력은, 행동안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의 수법에 의존한다는 것이 포르마리즘의 중심 명제이다. 그리고 장치를 노출시킴으로써, 자신이 집필 할 때 의지하고 있는 비친숙화의 기법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문학예술가는 모든 장치들 중에서 더 할나위없이 중요한 장치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예술을 작동케 하는 과정에 은밀히 통해 있는 일탈감각인 것이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 95)   문학은 자신을 갱신시키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자기의 경계선을 다시 긋곤한다…. 모든 예술은 연속성안에  있다 는 것, 고등예술은 자신을 갱신키 위하여 그 연속성의 범위내에서 경계선을 정기적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유일하게 불변인 것은 문학 항시 나타내여야 하는 문학다움의 감각 이라는 것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떠한 시대에 있어 서든 문학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것의 구조적 역활 즉 그 시대의 비문학과의 대립인 것이다. (동상99)   양식은 자기 지시적이며, 그 양식이 바로 주제인 것이 다. … 문학예술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형식과 내용을 재통합하는데 소용되며, 또 본성을 유효토록 하기위해서 작품을 메시지의 용기가 아니라, 그 본성을 유효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령역을 넘어서는 지 시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생성적이고, 자기 조절적이고, 결국에는 자기 존중적인 본질적 통일체로 제시하는데 소용되는 것이다. 결국 작품은 Piaget의  말 을 빌면, 하나의 구조인것이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19)   특수화된 콤플렉스는 원초적 콤플렉스의 산물이기는 하나, 회화적 특징으로 스스로를 덮고, 객관적 아름다움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면서 우주적 경험 속에서 스스로를 특징화할 때에만 미적기능을 갖기에 이르는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315)   독자는 자신이 새로 발견한 글쓰기나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다르게 세계를 보게 되고 또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예술도 현실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그것에 대 처하며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방법인것이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202)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술 작품이란 세계를 내다보는 창문이란 견해다. 이러한 예술가는, 말과 이미지를 통해서 말과 이미지의 건너편에 있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런 류형의 예술가는 번역가라고 불리워질만 하다.   또 하나의 태도는, 예술이란 독립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들로 성립되는 세계이다 하는 견해다. 말, 그리고 말들과의 관계, 사고, 그리고  사고들의 비꼬임, 그것 들의 분산, 이러한 것들이 예술의 내용인 것이 다. 예술이란 것은, 창문에 비해질 수 있다 손치더 라도. 대강 그려진 창문에 불과 하다. (동상204)   중국전통을 보면 예술은 현실의 모방에 있는 완벽에 다름 아니다… 례컨대 나무로 만든 이 호두는 그것을 탄생시킨 예술을 나에게 환기시키겠다는 의도를 어떤 호두의 이미지와 함께 전달해서는 안된다. 소설적 글쓰기가 수행하 는 것은 그 반대이다.(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 35)   예술은 목적이 아니다. 예술은 삶의 선들을 그리기 위 한 도구일 뿐이다.(천개의 고원357)   예술 작품은 몇초, 십분의 일초, 백분의 일초를 표시해 야만 한다.(천개의 고원506)  
210    9. 구조주의에 대하여 댓글:  조회:230  추천:0  2021-04-05
9. 구조주의에 대하여     구조주의 전성기는 1960-1970년대이다. 구조주의는 싸르트의 실존주의를 밀어내였다. 구조주의에는 5인 방이 있다. 장  클로드,레비 스트로스. 알튀세, 미셀 푸코, 자크  라캉이였다.  뒤르켐(1895년의 )에서 구조주의라는 말이 나오는데, 앙드레 랄랑드의 에서는 1900-1926년 사이에 나 온 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편자 주)   밖으로 드러난 현실은 결코 중요한 현실이 아니며, 따라서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이러한 외양을 꿰뚫고 현실의 근원에 도달하려면 추상적 모델을 구성해야 한다.(프랑수아도스 ‘구조주의력사’37)   소쉬르가 시니피앙을 소리로, 시니피에를 개념으로 본 데 반해 레비스트로스는 시니피앙을 구조로, 시 니피에를 의미로 보았다.  (프랑수아도스 ‘구조주의력사’ 50)   약호의 기본 특성은 그것이 다른 약호로 번역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약호를 약호이게 하는 이 속성이 바로 구조라고 불린다. (레비스트로스/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력사’62)   나에게 구조주의는  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상징적인 것에 관한  리론이다. 언 어와 친족 규범들의 독립성은 바로 상징적인 것의 자률화, 기표의 자률화를 의미한다. (동상 63-64)   구조주의란 결국 언어학과 인류학의 만남이다. (레비스트로스/동상58)   사회현상은 사물도 사고도 아니다. 그것은 구조이다   (동상76)   구조주의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야콥슨에 의해서 사용된 것도 바로  이 회의에서였다.(1928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1차 국제언어학대회)  (푸랑수아 도스 ‘구조주의 력사’85)   미셀푸고, 장 클로드 밀레르는 보프에게서 고전 시대의 세계 즉 재현의 세계에서 벗어난 문법형성의 효시를 찾는다.(동상 88)   구조주의의 신화적 인물인 롤랑 바르트는 엄밀함보다는 기질로 만들어진 변화무쌍함과 섬세함의 화신이였다. (동상 123)   프라하학파는 소쉬르와 거리를 두고 있다. 우선 프라하 학파는 언어를 기능적인 체계로 정의한다… 게다가 프라하학파는 통시성/공시성이라는 소쉬르의 구분에 동조하지 않고, 이러한 구분을 넘을 수 없는 경계로 보지 않는다. 야콥슨은 수차에 걸쳐서 이러한 경계 선을 거부하고, 역동적 공시성의 개념을 선호한다. 공 시적이라는 개념은 정태적이라는 개념과 다르다. 그 러므로 언어학의 모델을 넘어서 구조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모델중의 모델은 구조음운론이라고 할 수 있다…야콥슨은 음운론이 실현하고자 하는 음의 기술을 12쌍의 이 원적 대립에 의한 관여적 자질로 작성된 표로 나타 내는데 이 12쌍의 대립은 모든 언어의 대립을 파 악하게 하고, 구조주의 경향을 고무시키는 보편성의 꿈을 실험시키고자 한다. 이원론은 음운론 체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점에서 소쉬르의 이분법 적 사고가 엿보인다. 기의와 기표, 또는 감각계와 관념 계로 양분 되는 기호의 이원론에 움운 체계의 이원성 이 부합된다(푸랑수아 도스 ‘구조주의 력사’103-104)   바르트의 중요한 관심은 문학적 표현의 형식 아래에서 이데올로기가 쓰는 가면들을 공격하는 것이였다. 그것은 자유와 동일시되였다.  그런데 문학은 거기에서 두가 지 형태의 타락을 극복하고 영도를 회복하여야 한다. … 하나는 습관과 명령으로 만들어진  일상적 언어 속으로서의 함몰이였으며, 다른 하나는 자급자족에 입 각한 양식을 지칭하며, 또한 작가를 사회로부터 차 단하고 고립적으로 축소된 사람으로 묘사하는 이데 올로기를 가리키는 문체론이였다… 그당시 바르트 의 중요한 관심은 문학적 표현의 형식  아래에서 이데올로기가 쓰는 가면들을 공격하는 것이였다.  (푸랑수아 도스 ‘구조주의 력사’124-125)    바르트는… 정치적 담론은   지식인적 글 쓰기는 유사문학(같은 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것이다. 이러한 탐구는 하나의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키며, 또한 바르트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글 쓰기 불가능성을 자각하게 하고  현대성 작가로서 의 집필자의 리론을 초안하게 하였다.(동상 126-127)   바르트는 (동상127)     1956년 세미나에서 에드가 포의 라는 단편소설을 분석하면서 기표의 우위성, 을 지적하는 동시에 을 밝힌다. (푸랑수아 도스 ‘구조주의 력사’175)   라캉은  (동상190)   유명한 라캉의 삼위체, 즉 실재계, 상징계, 영상계…상징 계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 (동상192)   실재계는 현실과 반대로 바로 이 현실의 리면을 이루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이다. 라캉의 실재계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며 불가능을 뜻한다…실재 계는 현실로서 존재할 수 없는 부재를 일컫는다. (동상 193)   푸코는  …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 져있는 사상들을 제거하는 미셀푸코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지식을 팔아먹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도  아주 겸손한 하나의 사고를 제시한다.(동상 229)   비꼬(vico)는 이탈리아의 법률가인데   (1725년) 그 당시에는 관심을 끌지 못했던 기념비적 작품. 비꼬의 연구는 … 영원히 계속되는 구 조화의 과정이 인간 정신에 대해서 지니는 마취적인 속박을  풀어버리는 최초의 근대적 시도의 하나로 손꼽힌다. (테렌스 오혹스 ‘구조주의와 기호학’ 17)    삐아제(piaget)는 구조를 전체성의 개념, 변환의 개 념, 자기 조직의 개념 등 세가지 개념으로 생각했다. 전체적이라는 것은 내적인 결합체를 의미한다.   변환적이라는 것은 정적이 아니다. … 구조는 변환의 절차를 행할 수 있어야  한다. … 언어는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구조로서, 갖가지의 기본 문장을 광범위하게 다양한  새로운 발화로  변환시킬 수 있는 터이나, 한편으로는 그 변환을 언어자신의 고유한 구조안에 머물러있게 한 다. …자기 조절적이란 변환수단을 유효한 것이 되게 하 기 위하여 제자신을 넘어서는 것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변환은 그 변환을 수행하는 고유의 법칙을 유지하고 보장하도록 작용하며, 다른 체계가 련관되지 않게 그 체계 를 봉인하도록 작동한다… 개라는 낱말은 …  언어구조  안에 존재하여 기능하고 있으며, 네개의 발을 가진 짖는 피조물이 실재한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8 ㅡ19)   사물의 참된 본성은 사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하고 그리고 지각하는 사물들 간에서의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동상 20)   구조주의자의 생각의 궁극적인 원천은, 항구적인 구조 즉 개개인의 행위, 지각, 자세가 그 안에서 조화되고 그것들의 최종적인 성질이 그로부터 이끌어내지는 구조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본성의 그 측면에, 즉 언어에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여 있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21)    소쉬르가 언어연구에서의 혁명적인 공헌은 언어를 실질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고 관계적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 일이다. (동상22)   두개의 기본적 차원에서… 즉 랑그라는 측면과 빠롤이라는 측면에 대해서이다. (동상24)   어떠한 경우에서든, 어떤 현상을 결정하는 것은 그 현 상자체의 어떠한 본래적인 양상도 아니고, 현 상들간에서의 관계이다 라는 것이, 구조주의 (그리고 음운론)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레비스트로스 /테렌스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 44   러시아 포르마리즘.(formalism,1920-1930) ...언어학자나 문학사가들. 모스크바언어학회와 뻬드로그라드 시적 언어연구회.(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80)   초기의 포르마리즘(1920-30년대 쏘련형식주의)은 상 징주의 및 실용될 수 있는 코무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형식에 대한 상징주의자적 관심을 기본원리로 해서 구축되였었다. 즉 자립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며, 언어 외적 리듬, 연상, 암시를 리용해서 언어를 보통의 일상적인 의미 영력을 넘어서까지, 늘려나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이다.(동상 81)   포르마리스트들은 전의적, 언어, 은유, 상징. 시각의 영 상 등은 시의 필요 조건인 것이 아니라 일상언어의 특징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문학 분석에서의 그들의 흥미는 이미지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가 적용되는 용법에 있는 것이리라. (구조주의와 기호학 84)   일탈은 포르마리즘의 중심적 관심사…일상의 언어와 비교해 볼 때, 문학 언어는 일탈을 발생시킬 뿐만 아니 라, 그자체가 일탈이기 때문이다… 장치, 기법은 문학 예술의 근간이 되며, 문학의 모든 요소가 그 곳으로 향해서 조직되고 있는 기본적 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 요소들을 심판하는 기준이기도 하다.(동상 85)   구조주의는 그자체가 언어학적 모델에서 발전했었는데 언어로 이루어진 작품인 문학에서 그 모델과의 유사성이상의 것을 가진 대상을 발견하고 있다. 양자는 동질이다 라는것이다.(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 120)
209    8. 변형에 대하여 댓글:  조회:221  추천:0  2021-04-02
8. 변형에 대하여     실체들은 변형되고 형체들은 와해된다. (천개의 고원210)   뒤메질은 또한 언어과학의 탄생의 기초적 개념이 되는 변형의 개념을 이 력사 문헌학의 동향에서 이끌어낸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평한다) (푸랑수아 도스 ‘구조주의 역사’69)   변형은 사회변화에 대한 반응이기거나 혹은 그 부산물로서가 아니고, 내적 요구에 의하여 재촉되고 추진되여 서, 자기 개성적이고 자기 페쇄적인 문체나 장르의 연속을 펼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참신 한 형식이나 문체는 낡은 것에 반역하는데서 출현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것들의 반대  명제로가 아니고, 영속성이 있는 요소들을 재조직하고 재편성하는 한에서 이 다. 이것 역시 일탈과정의 일부분이다. 기의한 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면 다른 것으로 바뀌여질 필요가 생긴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98)   패로디는 중요한 역활을 한다. 왜냐하면 패로디는 언제 나 다른 문학작품을 배경으로 삼고, 그것의 수법을 폭로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떠나기 때문이다….페물이 되여버린 수법은, 내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지 아니 하는 새로운 문맥에서 반복되여… 재차 지각 이  가능해진다. (동상98)    인간은 자신이 살고있는 세계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우리는 주어져있는 것을 변경하고 재구 축하는 것이다. (/바르트/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 력사’ 148 )   책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현실의 물리적 세계가 아니고, 다른 차원으 로 환원된 세계이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205)   사유는 어떤 무속에서 말을 배경으로 행복하게 솟아오르는 것 같았는데, 이런 무로부터 출발한 글쓰기는 점진적인 응결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했다. 그 다음 으로 그 만듦의 대상, 끝으로 파괴의 대상이였던 글쓰기는 오늘날 마지막 변신인 부재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10)   기계의 도판, 곧 이미지는 우선 대상 혹은 작업의 분산된 요소들을 분석하고 열거하며, 그것들을 독자의 눈앞에 테이블위에 던지듯 던지고, 이어서 마무 리하기 위해 생활장면, 다시 말해 삶의 두께를 덧붙이면서 그것들을 재구성한다.(동상 116)   서술하며 변형한다… 우리가 근원적 개념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을 토론에 부쳐서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거나 기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정상으로 보이는 것을 낯설게 만든다.  니콜로스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22)   대리보충은 출몰한다. 그것은 유령적이다. 그 자체로 는 현전도 부재도 아니며 흔적으로 남는 효과를 묘사 한다는 것, 그것이 지형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해체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동상123)     대리보충은 바이러스와 같다. 그것은 모든 것을 전염시 킨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 개념은 사로잡을 수도, 길 들일 수도, 교화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 독성이 매우 강하다’…’바이러스가 내 연구의 대상이 되여있을 것이다.’(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24)   ‘사람들은 대리보충에서 다시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근원자리에 대리보충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데리다의 저작전체는 대리보충의 가르 침, 즉 임시 가르침 또는 대체 가르침이 관념에 싸여있다.(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25)   변형과 재창조는 … 실재와 허구, 역사와 상상이라는 전 통적 구별법을 초월하는 텍스트의 과정 탐색이라는 영역을 개척했다. (동상218)   ‘변용’은 변용된 몸체의 상태를 가리키며 변용시키는 몸체의 존재도 함축하는 반면, ‘변용태’는 변용을 주고 받는 몸체들의 상호 변이를 고려하기 때문에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에로의 몸체의 이행을 기리킨다. (천개의 고원 23. .)   한 추상적인 기호계가 다른 기호계로 변형된다는 점이다. (비록 이 변형이 그자체로는 추상적이지 않다하더라  도, 다시 말해 변형이 실체로 일어나며 순수한 학자로 서의 “번역자”에 의해 수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전ㅡ기표작용적 체제안에서 어떤 기호계를 생겨 나게 하는 모든 변형을 유비적 변형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표작용적 체제 안에서는 상징적 변형, 반ㅡ 기표작용적 체제 안에서는 논쟁적 변형 또는 전략적 변형, 후ㅡ기표작용적 체제 안에서는 의식적 변형 또 는 모방적 변형이라고 각각 부를 수 있다. 끝으로 도표적 변형이 있는데 그것은 기호계들이나 기호 체제들을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탈영토화의 고른판 위에서 산산 조각내는 변형이다. 변형은 순수 기호 계의 언표와 혼동되지 않는다. 또 한 변형은 자신이 어떤 기호계에 속하는지 알기 위해 화행론적 분석을 해야만 하는 애매한 언표와도 혼동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혼합된 기호계에 속하는 언표와도 혼동되지 않는다(설사 변형이 그런 결과를 초래한다할지라도 말이다). 변형적 언표는 하나의 기호계가 다른데서 온 언표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 번역하는 방식을 표시해 준다. 또한 그럼으로써 변형적 언표는 언표들의 방향을 바꾸고 언표들의 변형불가능한 잔여 물들은 남겨두며,  역변형에 능동적으로 저항한다. 더구나 변형들의 목 록은 앞서 열거한 것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기 호계가 창조 되는 것은 항상 변형을 통해서이다. 번 역은 창조적일 수 있다. 새로운 순수기호 체제들은 변형과 번역을 통해 만들어진다. 거기서도 일반 기호 론은 없다. 오히려 기호계 변환이 있을 따름이다.  (천개의 고원262-263)   주체성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의미 생성은 없다. 기표의 잔재들을 끌고 다니지 않는 주체화는 없 다. 기표가 먼저 벽위에 튀여오른다 할지라도, 주체성이 먼저 구멍쪽으로 뻗어나간다 할지라도 기표의 벽은 이미 검은 구멍들을 포함하고 있고 주체성의 검은 구멍은 여전히 벽의 잔해들을 가지고 간다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혼합체는 검은 구멍-흰 벽이라는 분리불 가능한 기계에 기반하고 있고, 이 두 기호 계들은  마 치 ‘히브리인과 파라오’사이에서처럼 교차, 재절단, 가지치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서로 뒤섞인다. (동상347)   폭풍 속에 둘러싸인 보행자는 얼마나 쉽게 사모트라케의 승리를 상징하고 있는가! 그는 곧 작은 깃발이고, 국기 이며, 군기인 것이다. 그는 용기의 표시이고, 힘의 증거 이며, 토지의 점령인 것이다. 폭풍에 펄럭이는 외투는 그러므로 바람의 영웅에 내재하는 일종의 깃발, 빼 앗을 수 없는 깃발인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304)   눈을 깜박거리는 것의 행위는 현실적인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의 다른 행위는 그것이 수반하는 소리에 의해서 그 말의 뿌리역할을 하는 음향을 아주 잘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듣기 위 해서  ‘생산하며’ ‘투영’하지 않으면안 되는 일종의  대표적 의성어, 즉 떨어지는 눈꺼플에 소리를 주는 일종의 추상적 의성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폭풍이 지 나간 위에 나뭇잎에서 떨어지면서 이상에서 말한바와 같이 눈을 깜박거리며 빛과 물의 거울을 떨게 하는 물방울이있다. 그것을 ‘바라볼’ 때, 떠는것이 ‘들리는’ 것이다.(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353)
208    7. 기표와 기의에 대하여 댓글:  조회:405  추천:0  2021-03-31
7. 기표와 기의에 대하여     소쉬르식으로 말하면 담론 속에서 항상 작용하고 있는 기표 아래로 기의가 미끄러져내려가는 것이 꿈이다. 무의식이란 기표의 활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 75)   기표의 총체성에 의해서만 실재계에 난 구멍이 메워질 수 있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179)   소쉬르는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기표와 지칭당하는 대상인 기의로 이루어져있다고 했다. 그리고 언어는 차이 (혹은 관계)에 의해 변별의 기능을 갖는 자의적 체계 라고 했다.17… 그렇다면 기 표는 단 하나의 기의에 고정 되지 않고 관계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낳는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18)   기표는 기의에 선행하고 기의를 결정한다. /라캉/ (프랑수아도스 ‘구조주의력사’ 61)   기의는 부재에 의하여 특정지어지는 반면, 기표는 감각적인 실재에 의해서 정의된다(동상91)   문학은 우리가 세계를 가공하고 창조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여러 꼬드들에 의존하고 있다. 문학이란, 어느 의미에 서는, 꼬드를 창출하는 중요한 동인이 되는 꼬드의 중류장치일런지도 모른다. 문학은 독자에게 꼬드를 상기시키고, 그 꼬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그에게 보여준다. 문학의 언어비평성은 이러한 점에 있다 ….  우리는 글쓰기를 무슨 도구인양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도를 전달해주는 차량, 행동의 수단, 언어의 의복인양으로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바르 트는 말한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56)     능기를 분석하는 꼬드   1. 해석학적 꼬드; 설화적인 꼬드, 수수께끼를 구성해 풀어가는 꼬드. 2. 의미소 또는 능기의 꼬드; 의미의 깜박임 반시적 꼬 드-伴示 3. 상징적 꼬드; 群化나 윤곽구축, 대조(2,3은 분별이 불투명) 4. 행동꼬드(프로아이젝트); 연속적사실. 5. 문화적 꼬드(대상지시적 꼬드); 격언적, 집합적.   대시작용이라는 것은 보통으로는 언어사용에 있어서 말해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고, 반시(伴示)작용은 말해지고 있는 것 외의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일이다. 선행되고  있는  능기— 소기의 관계에서 생기는 기호가, 더 높은 단계의 기호의 능기로 되는 경우에, 반시작 용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 세계는 대시작용의 차원이고 둘째는 … 반시작용의 차원이 되 는것이다. (테렌스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 187-188)   청각적 기호는… 시간을 리용하고 …공간적 기호는 공간을 점하고... 청각적이고 시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상 상징적인 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는데 … 시각적이 고  공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에 있어서 도상(图象)적인 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능기는 고도의 다양성을, 말하자면 애매성을 나타내고 있다. … 기호론적으로 말하면 애매성은 꼬드의 규칙을  어기는 양식이라고 규정되여야 한다… 시는 일상적인 말씨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다 라는 야콤슨말에…(동상200)     (a) 상이한 레벨의 많은 메시들은 애매성을 지니고 조직화 된다 (b) 애매성은 정확한 설계에 따른다 (c) 어떠한 메시지에 있어서도, 거기에 들어있는 정상 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은 다같이, 다른 모든 메시지에서의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에 대하여 맥락상의 압력을 느낀다 (d) 한체계의 규칙이 한 메시지에 의해서 깨뜨려지고 있는 방식은 다른 체계의 규칙이 자신의 메시지에 의하여 깨뜨려지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 결과로 생겨나온 것은 미적 개인어 예술작품에 독특한 특수 언어인데, 이것은 독자들에게 그 대시를 새로운 반시로 부단히 전화시키고 있는 우주적 질서— 즉 확립되는 순간에 자기 확립된 의미의 레벨을 넘어서 끝없이 움직인다—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미적 메시지가 의미작용을 부단히 행하는 다차원의 체 계이기에, 의미작용이 한레벨에서 다른 레벨로 이행 하고 있어서 그것의 대시가 일종의 무한 급수적인 양상에서 반시로 된다는 것인 듯하다. 그 결과로 서, 미적 메시지에 대한 최종적인 꼬드풀이나 글읽기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터이다. 왜냐하면 애매성의 하나하나가, 다른 레벨들에서  더욱 많은 같은 계통의 규칙위반을 생성시키고, 또 예술작품이 어떤 점에서든 말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벗겨 버리거나 다시 조립하거나 하도록 노상 우리를 재촉하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와 기호학’ 200-201)   기호 체제는 정확히 말해 권력 조직들 또는 배치 물들을 표현하는 것이지, 내용의 표현이라고 가정되는 이데 올로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효과적 으로 작동하는 모든 사회적 기계들을 감추는 가장 고약한 개념이다.)(천개의 고원136)`   기호의 기표작용적 체제(기표작용적기호)의 공식은 아 주 일반적인 것이다. 즉 기호는 다른 기호를 지시하고 또한 다른 기호만을 지시하며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아간다… 중요한 것은 무정형의 대기(大氣) 연속체에 자신의 그림자를 투영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그 물망을 형성하기 위해서 기호가 어떤 다른 기호들을 참조하는지, 어떤 다른 기호들이 그 기호에 덧붙여 지는지를 아는 일이다. 바로 이 무정형의 연속체가 일 단은 ‘기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무정형의 연속체는 기표 아래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기표의 매체 또 는 벽노릇을 할 뿐이다. 모든 내용은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기의 속에 용해시키게 된다. 내용의 대기화 또는 세속화. 그리하여 사람들은 내용을 추상화 한다.(천개의 고원218-219)   정확히 말해서 기표의 이런 순수 형식적 잉여는 특별한 표현의 실체 없이는 생각될 수조차 없다.(기표가 기표를 참조한다)우리는 이 표현의 실체에 얼굴성이라는 이 름을 붙였다. … 얼굴은 기표작용적 체제에 고유한 이며,체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재영토화이다. 기표는 얼굴 위에서 재영토화 된다. 기표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얼굴이다. 해석할 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얼굴이다. … 기표는 항상 얼굴화 된다 .(천개의 고원213-214 )   기호의 기표작용적 체제는 8개의 양상 또는 원리로  정 의된다. 1,기호는 다른 기호를 제시한다. 그것도 무한히(기호를 탈영토화하는 의미생성의 무제한 성) 2. 기호는 다른 기호에 의해 돌려보내지며 끊임없이 회귀한다(탈영토화된 기호의 순환성) 3. 기호는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건너뛰며, 끊임없이 중심에 의존하는 동시에 중심을 바꾸어놓는다 (기호들의 은유 또는 기호들의 히스테리) 4. 원들의 확장은 기의를 주고는 다시 기표를 주는 해석들에 의해 항상 보충된다(시제의 해석 병) 5.  기호들의 무한한 집합은 하나의 주요 기표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 기표는 과잉인 동시에  결핍으로 나타난다.(전제군주적 기표, 체계의 탈영토화의 극한) 6. 기표의 형식은 실체를 갖는다. 또는 기표는 얼굴 이라는 몸체를 갖는다(재령토화를 구성하는 얼굴성의 특질들이라는 원리) 7. 체계의 도주선은 부정적 가치를 부여받으며, 기 표작용적 체제의 탈영토화 역량을 넘어선다고 비난 받는다 (희생양의 원리) 8. 그것은 보편적 기만의 체제이다. 이 체제는 도약들 속에, 규제된 원들 속에, 점쟁이의 해석에 대한 규제들 속에, 얼굴화된 중심의 광고 속에, 도주선을 다루는 태도 속에 동시에 들어있다.(동상227)   전-기표작용적 요소(원시적 기호계, 절편성은 계통들의 법칙)들은 항상 기표작용적 체제 안에서 작용하 며,  반-기표 작용적 요소 (유목민들 기호계, 절편성이 아니라 산수와 숫자 읽기) 들은 항상 기표작용적  체제 안에서 작동하고 또 현존하며, 후-기표작용적 요소 (의미생산에 대립되고 주체화라는 특별한 기법을 통해 정의된다)들은 이미 기표작용적 체제 안에서 존재한다.(동상 231)   전기표적 기호계. 여기서는 언어의 특권을 나타내 는 “덧코드화”가 널리 진행된다. 여기서 언표행위는 집단적이고, 언표들 자체는 다의적이며, 표현의 실체는 다양하다.  또한 여기서 상대적 탈영토화는 국가장치 를 막아내는 절편적 계통들과 영토성들이 대면함으 로써 결정된다. 기표작용적 기호계. 여기서 덧코드화는 기표와 기표를 방출하는 국가장치에 의해 완벽하게 수행된다. 순환성의 체제안에서 언표행위는 획일화되 고, 표현의 실체는 통일화되고, 언표들은 통제된다. 여  기서 상대적 탈영토화는 기호들 간의 영속적이고 잉여적인 지시에 의해 최고 지점에 이르게 된다. 반 -기표작용적 기호계. 여기서 덧코드화는 표현의 형식 또는 언표행위의 형식으로서 에 의해 확보되고 또 그것이 의존하는 에 의해 확보된다. 또 한 탈영토화는 능동적인 파괴선 또는 소멸의 선을 따른다.  후 기표작용적 기호계. 여기서 덧코드화는 의식의 잉여에 의해 확보된다. 비록 여전히 부정적인 방식 으로이기는 하지만, 권력을 내재적으로 조직화하고 탈영토화를 절대적인 것으로 끌어올리는 정념적 선 위에서 언표행위의 주체화가 산출된다.(동상260)   우리는 의미생성의 리상적 체제. 즉 해석적-편집증적 체 제와 의미생성의 주체적 체제, 즉 후ㅡ기표작용적 정념적 체제를 대립시킬 것이다. 첫번째 체제는 기만적인 시작에 의해, 하나의  관념주위에서 조직 되는 내생적인 힘들을 증언하는 숨은 중심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그것은 무형의 련속체에 의해, 가장 작은 사건일지라도 포착되는 미끄러지는 대기 위에서 그물망 모양의 전개에 의해 규정된다. 또 그것은 원형으로 반사되는 조직화에 의해, 원형 방사를 통한 모든 방향으로의 팽창에 의해 규정된다. 여기에서 개인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건너뛰고, 중심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며, 예 견하고 회고하는 것이다.(천개의 고원232)   원형으로 퍼져나가는 그물망으로부터 하나의 기호나 기호 다발이 떨어져나온다. 이 기호는 스스로 작동하 며,  마치 좁게 트인 길을 따라가듯 직선으로 펼쳐지 기 시작한다. 이미 기표작용적 체계에는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이 그어져있고 이 선은 탈영토화된 기호들의 고유한 지표를 넘어서있다. (천개의 고원235)   언표 행위의 주체는 언표의 주체로 밀려난다. 언표의주체가 자기 차례가 오면 다른 과정을 위해 언표 행위의 주체 를 공급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언표의 주체는 언표 행 위의 주체의 응답자가 되였다.(천개의 고원251)   화행론은 이미 두개의 성분을 제시한다. 첫번째 것을 발생적 성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 추상적 체제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혼합된 기호계들을 형성하는지, 어떤 변이를 갖는지, 그 체제들이 어떻게 조합되는지, 그리고 어떤 체제가 지배적인지를 보여주 기 때문이다, 두번째 것은 변형적 성분이다. 그것은 이 기호 체제들이 어떻게 서로 번역되는지, 그리고 특히 그것들이 새롭게 창조되는지를 보여준다. 발생적 화행 론은 혼합된 기호를 본뜨는 반면, 변형적 화행론 은  변형의 지도를 만든다… 두번째 성분은 가장 심오 하며. 첫번째 성분의 요소들을 측정하는 유일한 수단 이다. (천개의 고원267)   화행론은 언어의 정치학이다.(천개의 고원161)    기표가 기의를 지배한다… 기표와 기의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다. 단어와 사물들간의 완전한 일치를 주장하는 모든 토론들이 부딪힐 수 밖에 없 었던 난국들을 넘어선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57 )      기표들은 의미생성을 위하여 다른 기표 속으로 침투하고 또 다른 기표를 포섭하기도 하며 상대방에게 서로 의존한다. 궁극적으로 기표들은 창의를 만들어내는 요소로 환원되고 동시에 완결된 체계를 이루려는 목적으로 서로 결합하기도 하는 이중 운동을 수행한다… 문 자란 통합된 의미를 불가능하게 하고 총체적인 의미를 분산시켜버리는 기표들의 구조이다 … 기표들은 목걸이의 고리들처럼 연결되여 있지만 그 목걸이 자체도 이미 고리들로 또 다른 목걸이 속의 고리일 뿐이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63)   이제 우리는 기의가 끊임없이 기표 아래로 미끄러져 갈 뿐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소쉬르는 이것을 마치 창세기의 축소판인 것처럼 높고 낮은 물들이 굽이치는 모양으로 례증한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65)   기표가 사물의 죽음을 구현하는 한, 한편으론 죽음이, 다 른 한편으론 소생이 교차하게 된다. … 기표의 분할 가 능성은 전체를 만들어내는 통합적인 활력으로 설명될 수 없다. (동상119)   기표는 어느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특이한 것이며 근본적으로 결핍만을 드러내는 상징이다.(동상 120)   기호와 존재는 놀라울 정도로 산산이 흩어져 서로 충돌할 때 승리를 거둔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129)   기표는 실제적인 사물들의 언어의 법칙에 종속되여 기이가 되도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물들은 횡선 아래로 내려가 기의가 된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277)
207    6. 시에 대하여 댓글:  조회:192  추천:0  2021-03-26
 6. 시에 대하여    시적 언어의 파렬은 절대적 대상을 성립시킨다. 대자연은 수직선들의 련속이 되고, 대상은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로 채워진재 갑자기 일어선다. 그것은 메워지지 않는, 따라서 끔찍한 하나의 세계를 구획할 뿐이다.낱말들 ㅡ대상들은 관계가 없으며,그것들이 파열하는 모든 폭력으로 치장되고, 이 폭력의 순전히 기계적인 떨림은 다음 낱말에 기이하게 충격을 주지 만 곧바로 소멸된다. 이런 시적 낱말들은 인간들을 배제시킨다. 결국 근대적인 시적 자본주의는 없다. 이처럼 수직적으로 서있는 담화는 공포로 가득한 담화이다. 다시 말하면 인갖들을 다른 인간들과 련관시키는게 아니라 하늘, 지옥, 불가침한 것,어린 시절, 순수한 질료 등 대자연이 더없이 비인간적인 이미지들과 연관시킨다. 이 점에서 시쓰기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다.왜냐하면 모든 윤리적 중요성을 파괴해 버리는 자률의 폭력을 지닌 언어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어적 몸짓은 대자연을 수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물주와 같다. 그것은 의식의 태도가 아니라 강제의 행위이다.이것이 바로 최소한 근대적 시인들, 자신들의 의도를 끝까지 밀고 가는 그 시인들의 언어이다. 그들은 시를 정신적인 실천, 영혼의 상태, 혹은 입장의 게시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 꿈꾸어진 언어의 찬란함과 신선함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시인들에게는 시적 감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역시 쓸데 없다. 례컨대 샤르같은 사람의 경우, 절대로 간주된 근대적 시는, 분명 하나의 글쓰기임과 동시에 통상 시적 감정이라 불리는 그 확산된 어조와  그 값진 아우라를 넘어서 있다.(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48)     ‘시는 천상 간결하고 생략적이여야 한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혹은 명백하게 확장될 수  있다고 할지 라도 말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 들’274)     인접성위에 유사성이 들게 놓이므로서, 시는 완전히 상징적이고 다양하고 다의적인 본질을 부여받게 된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08)   시는 보통 언어를 그냥 장식하는 것이 아니고, 별개 종 류의 언어를 구축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시적이라는 것은 수사상의 장식으로 술화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고, 술화와 그 구성요소 모두를 전면적으로 재평 가하는 일이다…. 시적이라는 것이 경합해서 존재하는 다른 어떠한 기능들 보다도 더 높은 차원으로 높아졌을 때, 시가 생기게 되는 것뿐이다… 그래 서 시적 기능은  언어예술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고 다만 그중에서 지배적이고 결정적인 기능인 것뿐이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12)   의미는 그 특징상 전의할 뿐만 아니라, 전의될 수가 있고 또 전의되여야 한다.(동상116)   밖으로 드러난 현실은 결코 중요한 현실이 아니며, 따라서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이러한 외양을 꿰뚫고 현 실의 근원에 도달하려면 추상적 모델을 구성해야 한다.(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력사’37)   만일 코뮤니케이션이 메시지 그자체에게로 지향하고 있다면, 이 때는 시적 혹은 미적 기능이 우세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의 시적기능은 … 기호를 명확히 인 식하도록 촉진시킨다. 그 결과 능기와 소기, 기호와 대상간에서의 어떠한 관계라도 자연스럽다거나 분명 하다고 보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부숴뜨리리게 된다 . (동상118)   참다운 포에지(시, 시작법, 시학…)라고 하는  것은 눈 을 뜨게 하는 기능을 말한다. (바슐라르 ‘물과 꿈’37)   저작자의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능기에 주목해야 하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능기를 넘 어서서 능기가 암시하는 소기에게로 옮겨가려는 우 리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굴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58)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우리로 하여금 텍스트를 통해서 예정된 현실세계를 바라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언어자체의 본성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이 작가스러운 텍스트 는, 독자가 읽어나가면서 저작자와 더불어 자신의 현재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위험은 있으나 상쾌한 작업에 독자를 끌어넣는다… 독자스러운 텍스트에서 는 능기가 행진하는데 작가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춤을 춘다. 역설적이지마는 (실체의 글 읽기를 요구 하지 아니하는 ) 독자스러운 텍스트는 흔히 말하 는 “독해가능한” 것인데, (고된 글읽기를 요구하 는)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흔히 “독해불능”이라 고 말해진다. (테렌스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60)   쾌락의 텍스트(독자스러운 텍스트)란 것은 행복환상을 충족시키며 용인하는 것인데, 문화로부터 태여나서 문화와 절연되지 않고, 글읽기의 편안한 실천에 련 계된다. 향락의 텍스트(작가스러운 텍스트)는 결락감 (缺落感) 을 안겨주는 것인데, 독자의 역사적이고 문 화적인 심리적 가정과 그의 취미, 가치관, 기억 등의 일관성을 (어쩌면 따분하리만큼) 불쾌하게 하고 불안하 게 하여, 독자와 언어와의 곤계에 위기를 가져온다.   이러한 향락의 텍스트나 향락의 순간에 대해서 우리가 보이는 창조적 반응은, 읽어감에 따라서 우리를 무아경 에 빠져드는 저작자로  변모시키는 그것이다.(동상162)   글쓰기는 결코 코뮤니케이션의 도구도 아니고, 말할 의 도만이 통해가는 열려있는 통로도 아니다. 정밀이니 명료니 하는 것과 같은 초역사적인 보편적 문체의 양식이나 조건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무구명료함이이란 순수하게 수사학상의 속성이지, 일반적으로 어떠한 시 대 어떠한 장소에서도 가능한 언어 특성은 아니다. … 부르조아지는 자신이 분류해내지 못하는 것은 인정하지  아니 하려고 하며, 일체의 인간경험을 자신의 고유한 세계관과 합치되도록 고쳐서 그것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승격시켜나간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51)   모든 시는 자신을 표현하는 그 방식이 어떠하든지 본질의 상태로, 힘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잠재적 산문 의  장식적, 암시적, 혹은 과장된 방정식에 불과하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42)   죽은 의미반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생생한 반복이 데리다의 새로운 ‘정체성’인데 데리다는 그것을 ‘유일성(단독성)’이라고 명명하였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2)   의미의 반복이 가능하겠지만, 데리다의 텍스트는 동일 한 의미를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이 있다면 다른 의미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1)   존재는 주체 앞으로 스스로를 제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곳에 주체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존재는 주체를 대신한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그의 영혼을 가지고 사고하는 것과 같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88   1990년 엘리자베스 웨버와 한 인터뷰에서,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미래는 필히 괴물이다. 오로지 놀라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맞을 준비조차 할 수 없는, 미래의 모습 은… 괴물의 형식으로 고지된다. 괴물이 아닌 미래는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예측 가능하고, 계산가능 하며, 설계가능한 래일에 지나지 않는다 ’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226)   괴물성이란 오로지 ‘몰인정’의 대상이므로, 승인도 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다만 사후에, 즉 그것이 정상이나 규준이 되였을 때, 인정 받을 수 있게 된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228)   절대적으로 순수한 단독성은 … 독해가 불가능할 것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244)   글쓰기를 향한 꿈의 순수성은 ‘접근불가능’하다… ‘한편의 시, 나는 결코 서명하지 않는다’ 광기의 짧 은 순간에만 나타나는 서명(판독)불가능한 욕망, 즉 이 러한 불가능성에 가장 날카롭고도 가장 불쾌하게 참여시키는, 모종의 텍스트 혹은 경험이 아마도 한편의 시일 것이다. (동상  252)      ‘오로지 타자에게만 나타나며, 그것은 생과 사를 동 시에 가져다주는 광기의 짧은 순간을 제외하고는 결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불가피하다게 나만의 언어와 나만의 노래의 창안을 꿈꾼다. 다시 말해서 자아의 속성이 아니라 차라리 강조된 나만의 글자 삐침, 즉 나의 가장 독해불가능한 력사를 나타내 줄 음악적 서명을 말이다.(동상253)     걸작은 부식되지 않으려 저항한다. 는 구절이 있다.  다시 말해서 걸작은 읽어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읽히지 않으려 저항한다는 뜻이다. 걸작은 어쩔수 없이 독서불가능하다. 그 독서불가능성으로 인해 걸작이 매혹적인 것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264 )   문제는 “시인으로서 살것인가 아니면 살인자로서 살것인가”다.살인자는 분자적 집단을 조직해 현재의 민중들을 폭격하는 자로서, 이 집단은 끊임없이 모든 배치물 을 페쇄해 계속 크기와 깊이를 늘려가는 검은 구멍으로 이 배치물을 밀어넣는다. (질 들뢰즈 필릭스 가타리 ‘천개의고원’657)   질료는 충분히 탈영토화되였을 때에야 비로소 분자적인 양상을 띠며, 오직   이외에는 돌아갈 곳이 없는 순수한 힘들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천개의 고원659)   코스모스적 힘은 이미 재료속에, 거대한 리토르넬로는 소박한 리토르넬로속에, 대규모 조작은 소규모 조작 속에 들어있다. 그저 우리자신이 그만큼 강한 힘이 있는지 확신이 없을 뿐이다. 우리는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직 선과 운동들을 갖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슈만)(천개의 고원 667)   압축은 기표들의 포개짐이다. 은유가 중요한 수법으로 등장하고 Dchtung이란 말에 드러나는 것처럼 압축은 선천적이고도 고유한 시의 기능으로 간주된다…방 향 전환은 환유속에서 검열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기도 하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75-76)   괴이함이란 온갖 종류의 무의식의 분출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무너짐으로써 환상이 해체되고 환상이 다른 주체의 이미지와 새로이 결합할 때 환상 속에서 발생하는 불균형과 연관된다(동상158)   진정 변별적이고 영원한 인간 특성은, 라는 능력안에서 식별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신화를 창조 하며 또 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능력과 필요성 인 것으로 나타난다… 시적 예지라는 재능은 그러니 까  구조주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생활방식에 성격을 부여하는 원리이기에, 인간이다라는 것은 구조주의 자이다  라 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다. (테렌스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7)
206    5. 물질에 대하여 댓글:  조회:194  추천:0  2021-03-24
5. 물질에 대하여     우선 파괴적인 철학자들만이 미에서 모든 접미사를 떼여내고, 나타나있는 이미지 뒤에 숨어있는 이미지를 찾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상상하는 기능의 뿌리 자체에 이르는 이 막중한 일에 손을 댈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의 근원에는 어두운 하나의 식물이 자 라고 있어, 물질의 밤에는 검은 꽃들이 피여있다. 꽃들은 이미 벨벳(털이 보시시한 천)의 꽃잎과 향기의 방식을 갖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 르 ‘물과 꿈’10)      꿈의 우주론에서 물질적원소는 근본적 원소 그대로이다. (가스통바슐라르 ‘물과꿈’14)   몽환적인 풍격은 여러 인상으로 가득 차 있는 하나의 액자가 아니고, 부풀어오르는 하나의 물질인 것이다 . (물과 꿈 15)    존재란 무엇보다 먼저 각성이며, 더욱이 이상한 인상의 의식속에서 눈을 뜨기 때문이다.   (‘물과 꿈’ 20)   고향이라는 것은 공간의 넓이라기보다는 물질이다. 즉 화강암이나 흙, 바람이나 건조함, 물이나 빛인 것이다. (물과 꿈 21)   심리적 대립감정의 기회를 갖지 못한 물질은 끊임없이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시적 분신을 찾을 수 없다. (물과 꿈 28)   실체가 없는 작품은 생명력이 없다. (동상35)   물질화하는 몽상ㅡ 물질을 꿈꾸는 저 몽상ㅡ 은 형식의 저쪽에 있는 것이다. 보다 단순하게 말하면 물질은 형식의 무의식이라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그것은 덩 어리속의 물 그자체이다. … 다만 물질만이 복잡한 인 상과 감정의 무게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은 감정의 재산이다. (동상 101)   물은 일종의 우주적 고향이 되여, 하늘에 고기를 번식시 키는 것이다. 고생하는 이미지가 깊은 물에 새를, 그리 고 하늘에 물고기를 주는 것이다. 별ㅡ 섬이라는 무력하고 양의적인 개념으로 나타낸 도치가 여기서는 새ㅡ물고기라는 살아있는 양의적 개념으로 표현되 여있다. 이러한 양의적 개념을 상상력 속에서 구 성하도록 노력해주기 바란다. 이렇게 하면 아주 보잘 것 없는 이미지가 갑자기 얻게 되는 매혹적인 애매성을 맛보게 될 것이다.   ( 가스통  바 슐라르 ‘물과 꿈’103)   물질적 몽상은 조각하는 것이다. 조각하는 것은 언제나 몽상이다.(동상 213)   몽상가는 이제 더 이상 이미지를 꿈꾸지 않고, 물질을 꿈꾼다. (동상124)   형식은 완성된다. 그러나 물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 다. 물질이란 끝없는 몽상의 도식인 것이다. (‘물과  꿈’ 213)   물질적 상상력만이 끊임없이 전통적 이미지를 활기차게 하며, 몇몇 오래된 신화적 형식을 부단히 소생시키는 것이다. 물질적 상상력은 형식을 변형시킴으로써 형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형식이 변형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양식에 반대되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25)   물질적 상상력은 근원적 법칙의 한 례가 있다. 즉 물질적 상상력에 있어서 가치부여 된 실체는, 미소한 량이 라도, 다른 실체를 매우 큰 덩어리에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힘의 몽상의 법칙 그자체. 즉 손바닥 속의 작은 량으로 우주적 지배의 수단을 지니는 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형태로서는 열쇠가 되는 말이나 조그만  말이 아주 깊숙이 숨겨진 비밀도 드러나게  할 수 있다는 리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물질적 상상력으로 선택된 행동의 윤리적 의미에 달린 것으로서, 만약 그것이 악을 꿈꾼다면, 불순성을 전파하여 악마적 싹을 개화시킬 것이고, 만약 선을 꿈꾼다면 순수한 실체의 한방울을 신뢰하여 자비로운 순수성을 빛나게 할 것이다. 실체의 행동은 스스로의 내면성에서  원했던 실체적 생성으로서 꿈꾸어진 다. 요컨대 그것은 어떤 인격의 생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행동은 모든 상황을 뒤엎고 모든 장해를 뛰여넘으며, 모든 경계를 부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악한 물은 음흉하나, 순수한 물은 예 민하다. 두가지 의미에서 물은 의지가 된다. 모든 일상적 성질이나 표면적 가치는 부차적 특성의 한 단계로 옮겨진다. 명령하는 것이 바로 내면인 것이 다. 실체적 행동이 빛을 발하는 것은, 중심적인 점이나 응집된 의지로부터인 것이다.(물과 꿈 269)   물질적 상상력에 전적으로 복종하게 됐을 때, 스스로의 원소적 힘속에서 꿈꾸어진 물질은 정신이나 의지가 되기까지 앙양되는 것이다.(바슐라 르 ‘물과 꿈’ 272)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 의미 사이에 ‘교감’이 있다고 할 때, 그러한 비유의 심리학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 고ㅡ 속임수로 감추어진 것이다.그때의 교감은 련상일 뿐이리라. 사실 교감은 감성적인 여러 인상의 살아있 는 통합인 것이다. 참으로 물질적인 상상력의 진전을 사는(生) 자에게 비유적 의미는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모 든 비유적 의미는 감성의 일정한 무게, 즉 일정한 감성적 물질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러 한  영속적인 감성적 물질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 (동상273)     물질적 상상력은 세계를 깊이에서 연극화한다. 물질적 상상력은 인간의 내면적 삶의 모든 상징을 여러 실체들의 깊이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동상280)   라캉은; 사물들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단어들의 세계이다. (푸랑수아 도스 ‘구조주의력사’168)  
205    4. 언어에 대하여 댓글:  조회:243  추천:0  2021-03-22
4. 언어에 대하여     우리가 언어속에서 구성된 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할지라도 언어속에 구성된 대상은 단순히 지정된 대상이 아닌 개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물이란 기표 자체 도 명사로 사용될 때는 이중적이고도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58)   대체물을 선택하는 기준은 지칭된 대상들 사이의 유사성이 아니라 언어표현의 동일성이다. 이처럼 사물속에는 동일성이 없지만 적어도 단어 속에는 통일성과 동일성이 존재한다….프로이드에게는 사물이 폭발하여 동일성을 잃어버려도 단어는 여전히 사물의 동일성을 복원해 주거나 새로운 동일성을 만들어준다. (천개의 고원62)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언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며, 언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사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 42)     모든 언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있는 실재이다. (촘쓰키)(천개의 고원180)   사실 고유명사는 촉매작용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채울 수 있고, 확장할 수 있으며, 그것의 의소적 골격 이 지닌 사이들을 무한한 추가물들로 메울 수 있 다. 고유명사의 이와같은 의소적 확장은 다음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각각의 이름은 우선 불연속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출현하는 여러장면들을 포함하지만, 이것들은 련합하여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되기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야기 하는 것은 일정수의 충만한 단위들을 환유적 방식을 통해 련결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의 0도’148)   고유명사는 흉내이고, 아니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환 영이다. (이것은 의구심이 들지만 맞다) (롤랑 바르트 ‘구조주의 력사’150)   언어는 다질적인 가변적 실재… 한 랑그의 통일성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권력을 장악 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동상195)   각자는 소수어, 방언, 또는 나만의 말을 발견해야만 하며, 거기에서 출발해야 자기자신의 다수어를 소수 어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소수파라 불리는 작가들의 힘이며 이들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유일하게 위대한 작가들이다.(동상203)   작품의 언어의 다양성과 변화하는 빛의 생명을 지니기 위해서는 감상적 요인이나 심정적 요인이 형식적 요인으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질의 이미지가 형식, 즉 소멸하 기 쉬운 형식, 공허한 이미지, 변화하는 표면에서 멀어 짐에 따라, 사람들은 본질과 내면의 깊은 곳에서 꿈을 꾼다. 그것은 무게를 가지며 핵심을 갖게 되는 것이 다.(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9   에드거포의 말 ‘만일 가능한 론리와 과학을 비주체화해야  한다면,  반대로 어휘와 통사론을 비객체화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불가결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대상의 이 러한 비 객체화가 없다면, 또 대상 밑에 우리가 물 질을 볼 수 있게 하는 형식의 변형이 없다면, 잡다한 사물들로 움직이지 않고 생기없는 고체나 우리들 자신들과 무관한 것으로, 세계는 흩어져버릴 것이다. (동상 29)   소쉬르는 … 라고 말한다. (푸랑수아도스 ‘구조주의력사’ 90)   언어학은 구조주의적 기획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되며, 가시적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효률적인 방법 론을 갖춘 선도학문이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든 인문 사회 과학의 도가니, 멜팅팟의 역할을 하게 된다. (동상 92)   언어는 기의에 치중하는 의사 소통의 기능이나, 또는기호 그자체를 중시하는 시적기능을 가진다. (동상 100)   기표는 한정된 어떤 개념에 련결되여있지 않다 (동상177)   빠롤은 물우에 나타나 있는 빙산의 일각이다. 랑그는그것을 받쳐주는 그리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다 같이 느껴지면서도 결코 그자체는 모순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더 큰 빙산덩어리인 것이다.(동상 25)   나무라는 청각이미지 즉 능기와 그것에 수반되는 개념 즉 소기, 그리고 지상에 실제로 자라고 있는 물리적인 나무 사이의 연결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적합성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나무라는 낱말에는 요컨대 자연 그대로인 혹은 나무다운 성질이 없다. 그러니 언어의 구조를 떠나서 현실에의 보증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나무라는 낱말이 땅 우에서 자라고  있는 잎이  있는 물리적 물체를 의미하는 것은, 그 언어의 구조가 그 낱말에 그 물체를 이미지시키고 있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낱말은 그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테렌스호옥스‘구조주의와 기호학’ 31)   시적 언어는 용이주도하리 만큼 자기식적이며 자기 각성적이다. 그것은 자체내에 포함되여 있는 메시지이기를 떠나서, 두드러지게 매체가 되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 에게로 끌어들이는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또 제자신의 언어적 특질을 체계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 시에 사용되는 낱말들은, 단순히 사상 전달의 신분을 지니고있을 뿐만 아니라, 그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율적인 구체적 실체인 것이다.(동상 86)   시는 낱말과 의미를 분리시키기보다는, 오히러ㅡ 놀라운 일이겠으나ㅡ  낱말이 취하게 되는 의미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이런 점에서 시는 또 다시 보통의 언어 활동의 정도를 한층 더 높인다… 낱말의 시적 용법 에 의하여 애매성은 낱말의 운용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이렇게 됨으로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옮겨가는 낱말이 낱말의 구조사의 역활이 전환되여 진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87)   언어가 정보전달에 사용될 경우에는 인식적 혹은 지시적 기능에서 작동하고, 말하는 자나 글 쓴 자의 기분이나 태도를 나타내기에 사용될 때는 표현적 혹은 정감적 기능을 볼 수 있고…언어가 …   보통의 사용법에서 최대 로 일탈될 때, 그 언어는 시적으로 혹은 미적으로 사용되여진다   …체코의 언어학자 얀 무카로브스끼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전경화 현실화라는 행위는 중요 하다. 시적 언어는 코뮤니게이션(소통)을 위해서 사 용하는 것이 아니고, 표현행위 즉 언어행위 그자체를 전면에 내놓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동상103)   구조주의의 최대의 특색은, 바로 형식을 내용이 되게 하는 일종의 변환작업에 있는 것 같다… 즉 문학작 품은 언어에 관한 것이며, 언어사용 그자체의 과정을 가장 본질적인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37)   문학은 언어의 내부에서 모든 언어에 생래적으로 깃들여있는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그것이다. 문학의 술화의 본 질은 언어를 넘어서가는 일이다. (만일 그렇지가 않다면 문학의 존재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문 학이란, 언어가 자살을 기도할 때 사용하는 흉기와 같 은 것이다.(테렌스 호옥스 ‘구조주의와 기호학’147)   언어체는 한 시대의 모든 작가들에게 공통적인 규정들 및 습관들의 조직체이다... 언어체가 작가의 파롤에 어떤 형태를 주는 것은 결코 아니며 자양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실들의 추상적인 원과 같은 것이 며, 이 원을 벗어 날 때 비로소 밀도 있는 고독한 언어가 쌓여지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15)   글쓰기는 언어를 넘어선 지점에서 언제나 뿌리 내리고 있으며, 하나의 선이 아니라 싹처럼 전개되고, 어떤 본질을 나타낸다. 어떤 비밀의 위협인 그것은 반소통 이며 위압갑을 준다.(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 23)   언어는 당연히 그자체의 파괴를 향하고 있다. (동상38)   시적 언어와 산문적 언어는 그것들의 타자성을 나타내는 기호들 자체가 필요없을 만큼 충분히 분리되여있다… 고전주의 사유는 지속이 없으며 고전주의적 시는 자신의 기교적 배치에 필요한 사유 만을 지닌다.그 반대로 근대적 시학에서…  낱말들은 일종의 형식적 연속체를 생산 하며 이 연속체로부터 낱말들 없이는 불가능한 지적 혹은 감정적 밀도가 조금씩 비롯된다. 따라서 말은 보다 정신적인 배태의 빽빽한 시간이며, 이 배태속 에서 ‘사유’가 준비되고 낱말들의 우연을 통해서 조금씩 자리 잡힌다. 따라서 의미작용의 무르익은 열매를 떨어뜨리게 되는 이와같은 언어적 기회는 시적 시간 을 상정하는데, 이 시간은 더 이상 제작의 시간이 아니라 어떤 기호와 어떤 의도의 만남이라는 가능한 모험의 시간이다. 근대적 시는 언어의 모든 구조를 포착하는 차이를 통해서 고전주의적 예술과 대립되 며, 이 두 사이에는 동일한 사회학적 의도 이외에 는 다른 공통점을 남기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0도’ 43)   낱말은 무한한 자유로 빛을 발하며 불확실하고 가능한 수많은 관계를 향하여 빛날 준비를 하고 있다. 고정된 관계 가 무너짐으로써 낱말은 어떤 수직적인 기회만을 지닌다. 그것은 의미들, 반사들, 잔상들로 이루어진 어 떤 총체속에 잠기는 덩어리이고 기둥이다. 요컨대 그것은 서있는 기로이다. 여기서 시적인 낱말은 직 접적인 과거가 없는 행위이고, 그것에 결부된 모든 기원들의 반사들이 드리우는 두터운 그림자 만을 제안하는 주변 없는 행위이다… 각각의 시적인 낱 말들은 예기치 않은 대상이고, 언어의 모든 잠재적 가 능성들이  날아오르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것이 다.따라서 그것은 특별한 호기심, 일종의 신성한 식도락을 가지고 생산되고 소비된다. 대문자 낱말의 이와같은 절대적 갈망은 모든 근대적 시에 공통 적인데, 시적인 말을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말로 만든다. 그것은구멍들과 빛들이 가득하고, 지나치게 풍 부함을 주는 기호들과 부재들로 가득한 담화를 확립하지만. 이 담화는 의도의 예상도 연속성도 없으 며 따라서 언어의 사회적 기능에 매우 대립되기 때문에 어떤 불연속적인 말에 단순히 의존하기만 해도 모든 고유한 초자연들의 길이 열리게 된다. (동상46-47)    언어의 어떤 질서에의 모든 예속에서 해방된 백색의 글쓰기를 창도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70)   의식적인 작가는 이제 조상 전래의 전능한 기호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 78)   근대적 예술전체가 그렇듯이, 문학적 글쓰기는 역사의 소외와 역사의 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필연성 으로서 그것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 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여넘고자하는 노력 자체이다. 그것은 그것자체의 고독에 대해 끊임없이 죄의식을 느끼고 있음에도, 여전히 낱말들의 행복에 탐식하는 상상력이며, 어떤 꿈꾸어진 언어를 향해 달려간다.언어가 더 이상 소외되지 않는 새로운 아 담적인 세계의 완벽함을 일종의 리상적인 예견을 통해서 나타내는 신선함을 지닌 그런 언어를 향 해.  글쓰기들의 다양화는 새로운 문학을 확립한 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문학은 오로지 하나의 기획이 되기 위해서만 자신의 언어를 창안한다는 점 때문이 다. 이 기획은 문학이 언어의 유토피아가 되는것이 다.  (동상79)    해체는 비중심의 힘을 사유하게 한다… 언어는 재미있는 놀이감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떤 이질 적인것( 언어)이 지금  우리들의 일상 언어에서 작동한 다.  (니콜러 스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84)   재창조의 유희ㅡ ‘멋대로 해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이른바 ‘자유로운 유희’개념을 환기하게 된다. …다양한 방식으로 환기되는 언어 타자 즉 ’언어를 넘어서있으면서 언어를 소환해내는 것으로서의 타자라는 관념이다.(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91)   언어를 믿지 않고는, 그것을 믿게 만들지 않고는 거짓 말도 불가능하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 리다의 유 령 들’97)   연속적 변주는 만인의 소수파되기를 구성하며, 의 다수적 과 대립된다. 의식의 보편적 형상으로서의 소수파되기는 자율이라고 불린다.확실 히 방언같은 소수어를 사용하거나 게토나 지역주의를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혁명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 다. 오히려 수많은 소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접 속시키고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자율적이고 돌발적인 특수한 생성을 발명하게 된다. 다수파양식(长调)과 소수파양식短调은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양식인데, 전자는 언어에서 상수들을 뽑아내는 방식이고 후자는 언어를 련속적 변주로 만드는 방식이다.   (천개의 고원205-206)   고유명사는… 보통명사의 모든 특징들을 부여받고 있지만 모든 투사적 법칙을 넘어서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유명사를 근거지로 하는 하 이퍼 의미성 현상의 대가 ㅡ혹은 날쁜점ㅡ이다.이 현 상이 고유명사를 시적인 낱말과 매우 유사하게 만들 고 있음은 물론이다.(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146) 고유명사가 하나의 주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하나의 명사(=이름)가 고유명사의 가치를 띠게 되는 것은 형식이나 종과 관계관련해서가 아니다.. 고유명사는 우선 사건, 생성 또는 의 질서에 속하는 무엇인가를 지칭한다, 그리고 고유명사의 비밀을 쥐고  있는 것은 바로 군인과 기상학자로, 이들은 전략작전이 나 태풍에 고유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고유명사는 시 간의 주체가 아니라 부정법의 인자이다. 고유명사는 경도와 위도를 명시한다. ,, 등의 진정한 고유명을 갖는 것은 이들의 성격을 특징 짓는 유과속의 명명 때문이 아니라 이들을 조성하는 속도들과 이들을 채우는 변용태들 때문이다. 즉 그것은 꼬마한스 의 말ㅡ되기, 늑대인간의 늑대-되기, 스토아주의자의 진드기ㅡ되기(이것들 또한 고유명사이다) 등 스스로 그리고 여러 배치물들 안에 존재하는 사건 때문인 것 이다.(들뢰즈 가타리 ‘천개의 고원’500)      피상적인 포에지와 같은 포에지를 구별하는 이러한 밀도를 사람들은 ‘감성적 가치’ 에서 ‘감각적 가치’ 로 이행시킴으로써 맛보게 될  것이다. ‘감각적 가치’  와의 관계에서 바르게 분류할 수 있을 때에만 상상력의 교의가 밝혀지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단지 감각적 가 치만이 ‘만물조응’ 을 부여하는 것이다. 감성적 가치 는 번역밖에는 주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감성적이란 의미는 감각과 지각의 수용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감각적이라 함은 지각하고 감각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수있다.  ( 바슐라르 ‘물과 꿈’46 주해에서)
204    3. 이미지에 대하여 댓글:  조회:227  추천:0  2021-03-19
3. 이미지에 대하여     시적 이미지는 하나의 물질을 갖는 것이다.  (바스통 바슐라르’물과 꿈’12)   콤플렉스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에너지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문화의 콤플렉스는 이러한 변형을 계속 한다…만약 승화작용이 개념에 관한 단순한 일이라면, 이미지가 개념론적 도식속에 갇히게 되자마자 곧 그 작 용을 멈추게 된다. 그러나 색갈은 넘쳐흐르고, 물질은 부풀어오르고, 이미지는 스스로를 교화한다. (동상40)   한편의 시를 낳는 꿈의 이러한 항구성을 갖기 위해서는 현실적 이미지 이상의 것을 눈앞에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속에서 태어나 우리의 꿈속에서 사는 이 이미지, 물질적 상상력을 위해 무궁무진한 양식인 풍부하고 농밀한 꿈의 물질로 가득찬 이 이미지를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꿈’42 )   만약 독자가 시인의 모든 이미지를 현실로 인정하고 자신의 리얼리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그는 여행에 의 유혹을 겪게 될 것이며, 이윽고 그자신도 ‘이 상함의 미묘한 감정에 감싸일’ 것이다. “자연의 관념은 아직 존재하고 있으나 이미 변질되여, 그 성격에 있어 흥미 깊은 수정을 받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의 신비하고 장엄한 균형이며, 감동적인 균일 성, 마법적인 정정인 것이다. ” …환영이 현실을 정정하 는 것이다. 환영은 현실로부터 이음매나 비참함을 떨 쳐버리는 것이다.(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98-99)   죽어가는 어머니의 추억은 에드거포의 작품에서는 독창적으로 두드러진 것이다. 그는 동화의 힘과 괴상한 표 현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토록 다양한 이 미지가 어떤 무의식의 추억에 강하게 덧붙혀있는 것은 이미 그 이미지들이 미래의 긴밀함을 서로들 사이에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아무튼 바로 이것 이 우리의 주체이다. 물론 이러한 긴밀성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또 직접적으로 현실적이지도 않다. 현실 속에서 나무 그늘이 물결에 빨아들여지는 것을 보 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적 상상력은 이미지와 몽상의 이러한 긴밀성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  이미지의 측면 그자체, 표현수단의 단계 그자체에 따라 발전시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거듭 되풀이 되여 말하지만, 우리의 현재의 연구가 바쳐  지는 것은, 이미지에 대한 보다 표면적인 심리학에 대해서인 것이다. (동상112)   새로운 분석방법에 따라서 책을 읽게 되자마자 멀리 떨어져있는 이미지를 받아들여, 다양한 길로 상상력을 자 유로이 비약시키는, 매우 변화 많은 승화작용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 고전적인 문학비평은 이러한 다양한 비약을 구속한다. ( 동상114)   이미지의 자연스런 싹, 물질적 원소의 힘에 의해서 길 러진 싹에 의해서만 이미지는 번식되고 모아지는 것이다.  (동상161)   모든 이미지는 부재이며, 하늘은 텅 비여있으나, 운동은 생생하고 원만하게, 또 리듬을 지닌채 거기에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247)   이미지가 갖는 특징이 전혀 현실주의적인 기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을가? 그것들의 특징 은 꿈꾸는 존재의 투영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다. 물에 비친 달속에서 다시 오필리아의 이미지를 발견하 기에는 강한 시적 교양이 필요한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167)   지극히 뛰여난 명철성에 지극히 대단한 비현실성이 흔히 대응한다. (동상100)   이미지들은 텍스트와 분리시킴으로써 는 대상의 하나의 자율적인 도상학에 진입하고 있었 다. … 의 도판들은 대상을 제시하고 이 제 시는 예시의 교육적 목표에 보다 무상한 미학적 혹은 모상적 정당화를 덧붙이고 있다.(동상 105)   일반적으로 대상의 생산은 이미지를 거의 신성하다할 단순성으로 이끈다… 창조의 간결한 엄격성, 거래의 화려 함  이것이 백과전서적 대상의 이중적 체제이다 (동상 109)   이미지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터무니없는 대상을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첫번째 자연이 일단 분해되고 나면 첫번째것처럼 형성된 또 다른 자연이 출현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를 부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가 영원히 차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시선- 우리 시선- 이면 족하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123)   일직선적인 글쓰기와 이 점에서 반대되는 이미지의 특권은 그 어떠한 독서의 미로도 강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론리적인 백커가 언제나 결핍되 여있기 때문이다.(동상117)
203    2. 은유, 환유에 대하여 댓글:  조회:376  추천:0  2021-03-17
2. 은유, 환유에 대하여     욕망은 환유이다. 대상은 신기루처럼 잡는 순간 저만 큼 물러난다. 대상은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에 인간은 대상을 향해 가고 또 간다. 죽음만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이다. 욕망은 기표이 다.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 빈 연쇄고리이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19.)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15)   돌발적인 은유, 놀라운 대담성, 전격적인 아름다움이 독창적인 이미지의 힘을 증명할 수 있다…. ‘물은 불타는 물체이다’‘물은 젖은 불꽃이다’ 라고 말하는 노발리스의 수수께끼같은 완벽한 말도 똑같은 말이다. (가스통바슐라르 ‘물과 꿈’ 183-184)   본질적인 몽상은, 그야말로 반대물들의 결혼인 것이 다.   (동상185)   사랑과 공감의 감정이 은유로 나타나면 나타날 수록, 근원적 감정속에서 힘을 길어올리러갈 필요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동상218)   현실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심리학적으로 광기어린 은유는, 그러나 시적 진실인 것이다. 그것은 은유가 시 적인 혼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자연의 현상이며, 우주적 자연 위에 던져진 인간적 자연의 투영 이기도 한 것이다.(동상 343)   무의식이 활용하는 다른 수사학적 방식은 환유이다. 거기서는 명칭의 전의가 중시되는데,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나는 한잔 마신다처럼 어떤 용기로 대체한다든가 일부분으로 전체를 지칭한다든가, 원 인을 결과로 혹은 추상적인 것을 구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 등이다. 다시 한번 조엘도르가 제시하는 예를 살펴보자. 는 것을 흔히 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푸랑수 아 도스 ‘구조주의력사’175)   은유와 환유라는 두개념은 라캉의 관점에서는 무의식의 과정이라는 개념의 주된 두 부분을 형성한다. (동상176)   은유와 환유는 의 비유인 것이다. ‘그 차는 딱 정벌레처럼 전진해 갔다’와 같은 은유에서는, 딱정벌레의 움직임이 자동차의 그것에 등가인 것으로서 제시 되여있고, ‘백악관이 새로운 정책을 검토한다’ 라는 환유에서는, 어떤 특정의 건물이 합중국의 대통령에게 등가인 것으로 제시되여있다.(/야콥슨/동상105)   소쉬르의 개념을 적용하면 은유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질상 상합적이여서 언어의 수직관계가 리용되는데, 환유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성질상 연합적이여서 언어의 수평의 관계가 리용된다.(/야콥슨/ 동상 106)   특이한 떨림은 무엇보다도 놀라움이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118)    객관적으로 이야기 된 단순한 대상의 은유 자체는 무한히 떨리는 대상이 된다.(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 122)          사실 파격구문은 거리의 시학으로 이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학적 노력이 친화성들, 상응들, 유사성들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작가의 기능이 자연과 인간을 단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공감각적인 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나 문학의 근본적인 문채인 은유 역시 분리의 강력한 도구로서 리해될 수 있다. 특히 은유는 샤토브리앙의 경우 풍부한데, 두 성분 뿐 아니라 비소통을 우리에게 표상한다. 마치 하나는 다른 하나에 대한 향수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문자적 요소들, 다시 말해 은유적인 방법을 통해 갑자기 덥석 물리고, 쳐들려지며, 떼어내지고, 분리된 뒤후 일화의 자연스러움에 내맡겨지는 문자적 요소 들을 제공한다. (그것은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준비도 없이 폭력적인 파격구문에 따라 억지로 도입된 새로운 말은 환원 불가능한 어떤 다른 곳과 갑작스럽게 이 요소들을 대면시킨다. 샤토부리앙은 죽어가는 어떤 젊은 수도사의 미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캐시미 르계곡에서 여행자를 위로하는 그 이름 모를 새소리를 듣고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대목도 있다.“이곳에서 누가 태여났고, 누가 죽었으며, 누가 울었는가?   저 하늘 높이 있는 새들은 다른 고장들을 향해서 날아간다” 샤토브리앙의 작품에서 은유는 사물들을 접근시키는 게 전혀 아니다. 그것은 세계들을 분리시킨 다. 기교적으로 말하며 (왜냐하면 기교나 형의상학을 말하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은유 는  (시적 자유에서와는 달리) 단 하나의 기표에만 관 련되는 게 아니라, 담화의 커다란 단위들에 확장되여 연사莲词 생명력자체에 참여하는 것같다. 언어학자들은 연사가 언제나 말과 가깝다고 말한다. 샤토브리앙의 커다란 은유는 사물들을 분활하는 여신인데, 언제나 향수적이다. 그것은 반향을 증식시키는 것처럼 나타 나면서도 인간을 자연속에 불투명한 것처럼 남겨두고 있고 그에게 결국 직접적인 진정성의 기만을 면제해 준다.문학은 분리시키고 일탈시킨다.(동상 133-134)   은유와 환유는 단지 결과일 뿐이며, 이미 간접화법을 가 정하고 있는 경우에만 언어에 속한다. (천개의 고원 150 )   환유는 단어와 단어간의 련결에 의존한다… 은유는 시적인 섬광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비유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69)   은유가 가진 창조적 섬광은 단순히 두 이미지의 제시 즉 두 기표가 동시에 구현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 섬광이 두 기표사이에서 번뜩일 때 한 기표는 의미연쇄 속에서 다른 기표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자리를 빼앗긴 기표는 억압되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지만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연쇄 속에 있는 다른 기표들과의 (환유적) 관계를 통해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또 다른 단어가 어떤 단어를 대체하는 것은 은유의 공식이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70)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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