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dolaji 블로그홈 | 로그인
《도라지》문학지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2017년5기

전체 [ 5 ]

5    [수필]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김혁 댓글:  조회:542  추천:0  2019-07-18
 김혁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공책 하나―소울메이트 친구가 차를 뽑았다. 차 이름은 ‘소울’이였다. 가격이 너무 착해서, 차를 너무 갖고 싶던 차 이곳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는 형의 차를 샀다고 했다. 그리고 중고차라 혀아래소리로 굳이 밝히며 어딘가 자존심의 어깨가 처져있는 친구를 위로할 겸 나는 우스개로 한마디 했다. “중고가 좋아, 친숙해, 우리 사이도 이젠 중고가 됐잖아.” 즐겁게 웃고 나서 나는 차 이름 ‘소울’ 대신 다른 ‘소울’을 생각하고 있었다. 소울메이트는 령혼(Soul)과 동료(Mate)의 합성어로 서로 뜻이 잘 맞는 사이를 지칭한다. 문학, 예술, 스포츠, 비즈니스 등 분야에서 큰 성공을 한 사람에게는 흔히 도타운 소울메이트의 존재가 있다. 그 일례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가 괴테와 실러를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깊은 리해를 바탕으로 한 자극과 격려를 통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해나갔다. 두 예술가의 우정은 베토벤과도 이어졌다. 두 문호를 존경했고, 이들의 작품에 큰 령감을 받은 베토벤은 두 사람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 소울메이트들끼리 단순한 우정을 넘어 예술사에 한획을 긋는 일을 유발시킨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또 한쌍의 유명한 소울메이트이다. 동생 테오는 괴퍅한 성격을 가진 형의 재능을 알았고 힘 들게 번 돈으로 형을 위해 생계비를 대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고흐가 자살한 뒤, 애달픈 나머지 테오는 여섯달 만에 형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형제의 묘는 함께 나란히 놓여있다.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에게도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바로 송몽규이다. 둘이는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 석달을 차이 두고 태여났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명동학교도,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함께 다녔다. 송몽규가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자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여 자신의 작품에 날자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둘은 또 경성의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했고 학교에서 함께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당시 《문우》에 실었던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그의 룡정 자택 장례식에서 랑송되였다. 두 사람은 또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제경찰의 마수에 떨어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일제의 잔인한 생체실험으로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와 룡정 동산의 교회묘지에 묻혔다. 가족에서는 “‘시인 윤동주’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송몽규의 시신도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혔고 “‘청년문사(文士) 송몽규’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 윤동주의 묘소 곁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 듯한 곳에 둘이는 묻혔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오늘날 윤동주는 겨레 시인으로 높이 추앙되였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전에 등단한 문사이자, 철저한 반일지사인 송몽규에 대해 아는 이는 적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을 온전하게 나눈 진정한 소울메이트였으니깐. 공책 둘―간(肝)의 노래 남자들끼리 앉으면 간에 대한 화제가 많이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남성들이 녀성들보다 간암발병 위험이 7배나 높다고 하니 잦은 음주로 인한 간질병에 대한 걱정으로 남성들 화제의 일순위에 오르는 때가 많은 것이다. 인체에서 가장 큰 장기인 간은 복부의 오른쪽 웃쪽에 위치하는 내장기관으로 입을 통해 섭취돼 위장관에서 소화, 흡수되는 대부분의 물질들을 걸러낸다. 갑옷 떨쳐입고 칼과 창을 비껴들고 성문이나 궁문을 지키던 옛날의 무관들처럼 우리 몸의 ‘수문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영양분의 대사와 저장, 단백질과 지질의 합성, 면역 조절 등 정상적인 신체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생화학적 대사 기능을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고 저장하며 인체의 해로운 물질을 해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고마운 장기이다. 여기 간에 대해 읊은 시인이 있다. 윤동주,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되는 시가 바로 〈간〉이다. 바다가 해빛 바른 바위 우에 /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 너는 살찌고 / 나는 여위여야지 / 그러나 거북이야 / 다시는 룡궁(龙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매돌을 달고 /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경성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에 쓴 작품으로 알려진 이 시는 두개의 이질적인 설화를 결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시는 거북이의 꾀임에 빠져 간(肝)을 잃을 번했던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우리 민족의 ‘구토지설(龟兔之说)’과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어 신의 저주를 받고 매일 재생되는 간을 독수리로부터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희랍신화를 적절히 변용하면서 작품 속에 투영시키고 있다. 윤동주는 궁지에 몰려서도 슬기롭게 자기의 ‘간’을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속죄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프로메테우스의 처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 연세대학교 설성경교수가 윤동주의 시 〈간〉에 대해 저항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는 등 한국 고전소설의 난제를 해결해온 전문가인 설교수는 《윤동주의 〈간(肝)〉에 형상화된 ‘프로메테우스 연구’》를 출간하면서 이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는 “윤동주의 〈간〉이 저항시임을 외면한 채 그간의 연구자들은 시인이 희생적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오판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시 〈간〉은 윤동주시인이 프로메테우스에 자신을 빗대여 식민지 시절 손상을 입은 량심의 회복 의지를 노래한 것으로 해석돼왔다. 하지만 설교수는 “오히려 〈간〉은 일제시대의 가장 저항적인 시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심판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설교수에 따르면 그동안 학계는 〈간〉의 핵심 시어인 ‘프로메테우스’를 희랍신화의 영웅의 오기로 간주해왔고 이를 토대로 마광수 등 기존 학자들은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를 시적 자아인 윤동주의 상징으로 봤다. 순수성(불)을 상실(도적)한 시인 자신에 대한 비탄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설교수는 “프로메테우스의 의도적 변형을 통해 윤동주가 ‘가짜 영웅’일제의 패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인은 나라(불)를 빼앗고 착취(도적)한 일제에게 “목에 매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설교수는 “이 표현은 기독교에서 지옥과 사탄을 이야기할 때 사용했다”며 “시의 바탕에 기독교주의적인 민족주의가 깔려있다”고 설명했다. 설교수는 특히 윤동주의 시가 다른 저항시보다 한수 우의 경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리륙사, 한용운 등의 시에 등장한 저항은 아래에서 우로의 저항이고 세계문학의 모든 저항시들이 택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며 “하지만 이 시는 력사의 이름을 빌려 가짜 영웅을 내치는 심판시이자 동서양 신화의 접목이라는 측면에서도 탁월한 시”라고 평가했다. 윤동주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의 련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사라져가는데 대해 내장이 상할 만큼 맹독(猛毒)의 아픔을 느끼며 몸부림을 거듭했다. 그의 시편들은 비록 조용하고 어딘가 소극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부끄러운 자아의 응시로부터 력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성찰을 그 기저에 깊이 깔고 있다. 때문에 그에 대해 ‘저항시인’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해준다. 시 〈간〉에 대한 새로운 해제 또한 이를 뒤받침해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속출하고 있는 민족 공동체의 아픔과 그 위기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한 채 신상의 작은 질병에 대한 걱정에나 전전긍긍하며 무사안일의 나날에 버릇된 현대인들에게 윤동주의 시 〈간〉을 한번 읊어보라 권장하고 싶다. 공책 셋―‘별’을 쏘다 모 잡지에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라는 인물칼럼을 련작한 적 있다. 2년 반 되게 련재한 칼럼은 조선족 수십명 인걸들의 생애를 사전형식으로 가나다라 순으로 짧고 명료하게 다루고 있는 소전기물이다. 민족을 위해 커다란 족적을 남긴 기라성 같은 별들을 헤아리는 작업에 기꺼이 투신하면서 아낌없이 산화해간 별들을 두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한면 그 가운데 이름은 화려해도 아무런 빛도 내지 않은 암흑성(暗黑星)도 끼여있어 선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룡정의 명인들을 정리하면서 그러한 어려움은 곱배로 밀려왔다. 룡정에서 윤동주의 시대에 함께 족적을 남긴 저 유명한 동요〈반달〉의 작곡자 윤극영, 녀류시인 모윤숙 모두가 친일의 혐의에서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윤극영은 1926년경 피아니스트 오인경과의 애정행각으로 서울에서 룡정으로 도피를 했다. 윤동주와 문익환이 다녔던 광명중학교 등 학교들에서 음악교원으로 교편생활을 했다. 이후 1940년에는 할빈에서 예술단을 창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룡정에서 간도성 협화회(间岛省协和会)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이 투항하자 1946년 체포되여 3년형 선고를 받고 복역중 보석으로 겨우 풀려났다. 1950년대초 북경에서 조선족 음악인 김정평과 김철남이 윤극영의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 레코드로 취입했다. 노래는 근 30년간 애송되였으며 1979년 전국 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였다. 하지만 윤극영이 가담했다. 이른바 협화회는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협화회에는 조선인과 한족, 만주족 등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이 가담했는데, 이들의 역할은 일제의 충실한 주구로서 만중을 선동하고 감시하는데 있었다. 고 박창욱 연변대학 교수는 일찍 “협화회(协和会)는 소위 민중조직이라고 하나, 사실은 비밀공작을 위한 특무조직이다. 협화회는 일반적인 민중조직인 동시에 내부에는 특무가 있는 것이다. 협화회의 선무반, 특별공작반 등은 완전히 일본군 토벌대와 같이 독립운동 세력을 토벌하는 것이다.”고 밝힌 바 있다. 윤극영이 협화회 책임자로서 적극적 친일을 한 것은 90년대 소설가 고 류연산씨의 추적을 통해 속속 드러났다. 모윤숙 1931년 리화녀전 영문과를 졸업했고 그해 친지의 주선으로 룡정에 있는 명신(明信)녀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바로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과 나란히 이웃한 학교였다. 명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한 뒤 교사, 기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중 각종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강연 및 저술활동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친일강연을 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친일론설을 기고했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론리를 형상화한 〈동방의 녀인들〉(1942)을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고 지원병 참전을 독려하는 시 〈어린 날개--히로오카(廣岡)소년 학도병에게〉, 〈아가야 너는--해군 기념일을 맞아〉 등을 련달아 발표하는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했다. 이 시기 비슷한 주제의 시들을 창작한 로천명과 함께 문인 중 가장 로골적인 친일파로 전락했다. 몇해전 한국에서 펴낸 《친일파인물사전》사전편찬위원회에서는 친일파의 정의를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 규정했다. 편찬자들은 친일파선정 원칙에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밝혔다. 이어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쫓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다”고 밝혔다. 높은 위치의 정계인사들뿐 아니라 문화예술계의 이름이 쟁쟁한 인사들도 대량 포함되여 세간을 경악케 하고 있다. 한국 각계의 논란이 가열화 되는 등 역풍이 거세지만 력사적 진실 규명을 위한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세기 30, 40년대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에 우리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고 민족문학사가 실종된 칠흑처럼 어두운 시대였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물자를 수탈하고, 징용령을 만들어 조선인을 군인, 보국대, 로무자, 위안부로 징발했다. 1938년에는 조선어교육을 페지하고 아침마다 일장기를 향해 황국신민 서사를 암송하게 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단행해 조상이 준 이름을 일본식 대로 뜯어고치게 했다. 그 마수는 문화예술계에도 미쳤다. 조선말로 된 유명 일간지며 문학지들을 페간시켰고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 어용 문학단체를 만들어 침략전쟁과 징병제를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민족의 수난기에 안일과 부귀를 위해 일제에 무릎 꿇은 문인들의 친일행위였다. 그동안 민족주의 작가로 주목받던 문단의 대표적 인사들이 대거 친일문학의 대렬에 끼여든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오명을 진 문학인들로는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민족시의 전환점을 지었던 시인 최남선, 《화사집》, 《귀촉도》 등 탐미적인 시편들로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것으로 평가되였던 시인 서정주,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던 《감자》, 《운현궁의 봄》의 저자 소설가 김동인… 등이다. 그 전형으로 개화계몽기부터 1920년대까지 언제나 민족주의적인 립장에서 앞장섰던 《무정》, 《흙》의 작가 리광수를 들 수 있다. 리광수는 온갖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그 뛰여난 문필가의 기량을 황국 신민화, 징병징용학병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글을 써내는데 허비했다. 남보다 앞서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가며 창씨개명을 했고 “조선인으로서의 본질과 껍데기까지 모조리 던져버리고 일본인으로 변종할”것을 공공연히 웨쳤다. 일본에까지 건너가 류학생들을 선하며 일본군에 입대하여 천황페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지자고 선동했다. 근시안적이고 삐뚤어진 그들의 행태는 우리의 민족문학사에 치명적인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문단을 대표하고 민족의 지성을 상징한다는 이들이 하나같이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칭송하고 ‘황군(皇军)’을 위해 비루한 붓을 들고 있을 때, 숭앙했던 문인들과 자기 학교의 교장마저 친일에 앞장설 때 중국 동북변강의 오지인 룡정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작은 촌부락에서 태여난 한 문학청년이 괴로움에 찬 시편 〈참회록(忏悔录)〉을 내놓았다. 윤동주, 식민지시기 스물네살의 문학청년이 령혼의 잉크를 재워 각혈처럼 지었던 그 시작(诗作)은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을 전률하게 만든다. 〈참회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1942년 일본류학을 준비할 무렵에 쓴 시이다. 시인은 부끄러움을 담은 자기 고백을 또박또박 원고지에 각인해 내려갔다.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원고의 하단 여백에는 도일(渡日), 시란? 문학, 생존, 생과 같은 시인의 고뇌를 짐작케 하는 절절한 락서들이 남아있다. “… 래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굴욕, 치욕, 릉멸, 방황,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인다 해도 그때 그 시가 담고 있는 고뇌와 슬픔과 반성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란다. 그리고 2년 후 일본 도지샤대에 수학하던 윤동주는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여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일제가 전시에 수요되는 혈장을 얻기 위해 생리식염수를 투여하는 생체실험을 한데서 기인된 것이라고 한다. 윤동주는 식민지체재에 동화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던 여리고 섬세한 20대의 문학청년이였다. 당시 그에게서 생의 출구는 막혀있고 현실은 랭혹하고 폭력적이며 미래는 어둡고 삶의 리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분렬을 거듭했다. 윤동주는 ‘나약’했고 ‘감성적’이였지만 감정적이지는 않다. 그는 주변부 식민지의 생활과 속악한 삶의 행태에 수치심을 느꼈다. 의지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떠돌던 그의 마음은 종국에는 때묻지 않은 령혼의 시줄에 깃들었다. 윤동주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정신적 바탕은 시대적 현실에 대해 방관자적 립장에 처해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기반성과 고뇌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의 중심적인 심상을 이루고 있는 ‘부끄러움’은 이 같은 자기반성과 고뇌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물론 당시는 극한의 식민지 현실에서 그 누구도 정상적인 문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에 가장 먼저 민족문학의 전통과 자존을 지켜야 할 문인들이 저항은커녕 오히려 굴종과 어용과 변절로 민족문학사를 훼손한 친일행위에 민족사의 심각한 비극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지성인들이 사회의 압력과 역풍에도 친일인명사전을 굳이 간행한 것도 바로 이러한 력사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여 민족 정통성의 확립과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한 취지여서였다. 력사의 갈피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은 이러한 문인들의 행태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잘것없는 눈 높음과 영욕에 매달려 권력과 리념과 공리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철새처럼 이동하는 문인들을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윤동주를 다시금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윤동주,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먹먹한 시대를 돌아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부끄러워진다. 민족과 언어를 빼앗겼던 정말 암울하고 힘들었던 식민지 시대에 자아와 민족이 부재한 력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초극하고자 윤동주는 참회와 헌신의 신앙적 결의로 마침내 도래할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확신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시인의 고향의 하늘에 별은 오늘도 또렷하다. 그 밤하늘을 쳐다보노라니 윤동주의 〈달을 쏘다〉라는 산문의 한 구절이 뚜렷이 떠오른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우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무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매여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오늘날 우리는 “보람처럼 풀이 무성한” 고향의 언덕배기에 잠든 시인을 더더욱 기리고 있으며 시인이 읊었던 별의 밝음과 어둠을 낱낱이 헤아리고 있다. 찬란한 별무리 속에 은닉(隐匿)해있는 별조차 낱낱이 헤여보다 ‘좀 탄탄한’ 오안(五眼)의 빛을 ‘화살로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별’을 쏜다. 출처: 2017년 제5기 목록  
4    [수필] 도야지야 도야지야-신분희 댓글:  조회:569  추천:0  2019-07-18
신분희 도야지야 도야지야 바야흐로 뻐스를 추월하는 트럭 짐받이에서는 돼지 서너마리가 말려올라간 꼬리를 엉뎅이에 갖다 붙인 채 털썩거리는 조잡한 울림을 휘뚱거리며 온몸으로 받는다. 짐받이 란간이 간신히 만들어놓은 저가락세트 같은 그늘로 숨어들어 오물 속에 맥없이 철버덕 엎어져있는 ‘동무’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안스럽다. 조수석에 앉은 ‘빨간 런닝’은 담배 한모금을 맛나게 빨아들이고 고개를 돌려 운전수를 보다가는 또 백미러를 넌떡 들여다본다. 돼지가 란간을 물어제치고 뛰여내리긴 만무하겠지만 백미러를 들여다보는 품이 꼭 그렇다. 슈퍼돼지도 아닌 일반돼지가 발쪽을 곧추 세우고 3단 점프라도 할가 봐. 다저녁의 뜨거운 해살에 한껏 달궈진, 군데군데에 누런 녹이 쓴 차량번호판 우로 더께가 몹시 앉은 돼지의 두 귀가 너풀댄다. 시야에서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저 트럭은 돼지들을 싣고 어디로 가는 걸음인 걸가. 이십년전에 우리 집 어미돼지도 이런 트럭에 실려갔던 걸가… 돼지 세마리가 우리 안에서 노상 꿀꿀거리던 내 어린 시절, 돼지는 왜 밥이 아닌 죽을 먹나 하고 자주 심통을 부렸다. 죽이라 하면 점성이 좋고 차분한 죽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시골서 커오며 돼지죽냄새를 꽤 맡아본 내 또래들은 안다. 죽 세 바께쯔를 퍼나르고 나면 바지가랭이가 죽갈기에 맞아 흠씬 젖을 정도로 죽의 묽기가 물 같다. 돼지가 죽을 먹는 모습을 보면 왜 죽이 그 정도로 묽어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아작거리며 물어서 입에 밀어넣는 게 아니라 코를 죽물 속에 박고 뿌글뿌글 날숨기포를 내보내며 핥아삼킬듯 ‘텁텁텁’ 먹어야 하는 돼지의 생체특성상 별수없이 멀겋게 쑤어야 먹기 편하다. 죽을 가득 담은 바께쯔는 어린 언니와 나로서는 드다루기가 힘들었다. 조심하지 않아 쏟뜨리고 나면 세마리가 먹을 정량은 턱없이 부족해진다. 그러면 엄마는 귀가 닳은 밥주걱을 가져다 흙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죽물을 날래게 긁어서 바께쯔에 담았다. “야네 그걸 먹고 맹장(염)에 걸리무 어찜까?” 어렸을 적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은 적 있는 언니가 울상을 짓고 거뭇거뭇한 흙이 발린 바께쯔를 들여다보았다. “유리를 먹구두 소화시키는 눔들이다. 별 걸 다 걱정하네.” 벌름거리는 코끝에다 흙모래를 도돌도돌 붙이고 다니는 건 흔하게 봤지만 유리를 아작아작 씹어먹는 건 못 봤던 고로 언니와 나는 엄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유리도 삼킬 정도로 월등한 소화력을 자랑한다던” 돼지는 구유 밑바닥에 흙덩이를 수태 남겨놓고 죽찌꺼기만 골라먹었다. 툭 내던지는 듯한 엄마의 그럴듯한 론리가 순식간에 그릇된 것으로 시원하게 판명난 바람에 언니와 나는 배꼽을 잡았다. 분명한 건 돼지는 유리나 흙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굳이 더러운 점을 들어보라면 닭똥을 땅콩처럼 잘 주어먹는다는 사실 외에. 세마리 중 검정바탕에 배가 얼룩덜룩한 어미돼지가 출산하는 날이 다가오면 엄마는 벼짚을 보드랍게 잘 추려서 잠자리에 두툼히 깔아준다. 산통이 야금야금 파고들 때면 어미돼지는 땅에 끌릴 듯한 배를 가누며 쉴새없이 우리 안을 돌았다. 한바퀴, 두바퀴… 몇십바퀴를 돌고 나서 ‘베테랑엄마’답게 산좌에 턱 드러누우면 ‘새끼낳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징조라고 여겨도 좋다. 나랑 동생은 어미돼지가 놀랄가 마음을 졸이며 우리에 댄 널판자에 뚫린 구멍으로 갓 태여나 눈도 못 뜬 꼬물꼬물한 아기돼지들이 스스로 ‘엄마’ 젖을 찾아먹는 광경부터 묽은 죽만 먹고사는 줄 알았던 어미돼지가 홀쭉해진 몸을 일으켜세우고 움푹한 검은 눈을 번득이며 태반을 우걱우걱 씹어먹는 모습까지 지켜보고서야 “다 낳았슴다!”를 겨끔내기로 웨치며 밀치락닥치락 집으로 뛰여들어간다. 작고 힘없이 태여나 젖을 제대로 찾아먹지 못하는 새끼돼지한테 우유병을 물려주는 일도 다반사였으니 곧 앙증맞고 말랑말랑한 새끼돼지를 안아볼 수 있다는 들뜬 기대도 없지 않았다. 새끼돼지들이 포동포동 여물어갈 때가 되면 굳이 사구려를 부르지 않아도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귀여운 엉뎅이를 쌜룩거리며 마당을 헤집고 다니던 아기돼지들이 사람들이 다녀갈 적마다 서너마리씩 없어질 때 어미돼지 마음은 어땠을가? 새끼가 팔려가도 애처롭게 울 줄 모르는 짐승이려니 여겼기 때문에 ‘미련퉁이’라는 말도 안되는 특징이 더 명확해졌는지도 모른다. 콩가루를 넣어 죽을 맛있게 끓여줘도 통 먹질 않는다고 혼자말을 하던 엄마도 마음이 언짢고 어수선한지 우리 안에 드러누워 꼼짝도 안하는 어미돼지를 들여다보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였다. “꽤액 꽥―” 요란스레 울며 새끼돼지들이 한마리 또 한마리 삼륜차에 실릴 때면 “꿀꿀―” 하는 어미돼지의 낮고 굵직한 소리가 방불히도 “괜찮아, 괜찮아”로 들렸을 정도로, ‘돼지가족’의 원치 않았던 강제적이고 희생적인 ‘리산’으로 맞바꿔온 빨락지페는 근심걱정으로 찌프려졌던 엄마의 량미간을 펴이기에 늘 충분했고 어미돼지가 장장 8년 동안 ‘새끼낳이’를 해온 로고는 매번 언니와 나, 동생의 학비, 교과서비용에 모조리 충당되였다. 결코 저속하지 않는 속된 느낌을 주는 ‘로무주’(老母猪)는 암퇘지를 두루 일컫는 말이지만 8년을 새끼낳이로 보낸 ‘퇴역산모’ 어미돼지는 늙을 ‘로’자를 하나 더 선사받아 ‘로로무주’(老老母猪)로 불렸다. 어미돼지가 나이를 먹어 더이상 ‘새끼낳이’를 못할 즈음, 어미돼지의 육덕진 덩치를 탐내는 장사군들의 발길이 잦아졌고 엄마는 번번이 덩치가 크다는 핑게를 대며 값을 높이 쳤다. 머리를 홰홰 저으며 ‘형편없이 늙은 로무주라 고기가 질겨서 잘 팔리지도 않을거다’라는 잔인하지만 현실적인 장사군의 ‘설득’에 마음이 불편해지면 엄마는 두마디 안짝에 팔지 않겠으니 가라고 가차없이 문 밖으로 떠밀었다. 죽을 줄 때마다 ‘우리 집 복돼지’라고 등을 긁어주던 엄마 마음을 어린 나는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얼마전 더 불어난 ‘새 돼지식구들’의 먹이까지 매일 적잖은 량을 장만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조금이라도 덜면 좋을 텐데 하는, 몰리해식의 눈길로 엄마를 바라봤다. 그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어미돼지가 보이지 않았다. 구유에는 평소 그토록 맛나게 ‘텁텁텁’ 물어먹던 삶은 늙은 호박이 몇점 뒹굴고 있었다. 덩치가 하도 크고 몸부림도 심해서 트럭에 싣기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나중에는 눈에 불을 일구며 드잡이하듯 장사군한테 달려들길래 도끼등으로 머리를 갈겨 잠시 혼절시켜서야 트럭에 실을 수 있었다는, 두고두고 지독히도 아릿하고 끔찍했던 세부는 누가 나한테 얘기해줬던가… 그 뒤로는 차차 살림도 펴이고 부모님도 로문해지면서 돼지치기를 그만두게 됐지만 8년을 키워왔던 어미돼지를 생각할 적이면 언제나 축 늘어진 만삭배가 눈앞에 얼른거려서 마음이 착잡하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대학교 선배가 언젠가, 구정물 바께쯔에 쏟는 음식물 속에 이쑤시개라도 섞여들어갈가 봐 습관처럼 항상 조심하게 된다고, 돼지가 먹다가 혹여 목구멍에라도 걸리면 어쩌나 마음이 쓰이더라고 말하던 게 기억난다. 내남없이 궁핍했던 그제 날에 엄마의 한숨을 지워주고 그늘을 거둬준 돼지의 희생에 대한 묵직한 고마움은 세월이 흘러도 쉬이 잊혀지는 게 아닌가 보다… 검정바탕에 배가 얼룩덜룩했던 어미돼지, 맥없이 트럭에 실려간 뒤로 어디서 어떻게 마지막숨을 몰아쉬였는지 모르겠지만 궁금하지도 않고 더욱이는 구태여 떠올리고 싶은 장면이 아니다. ‘8년 동안 낳아놓은 귀여운 아가들과 함께 부디 희생과 아픔이 없는 좋은 곳으로 갔기를.’ 아득하게 멀어지는 트럭 꽁무니를 점도록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 고작 이런 말이라는 사실 때문에 좀 많이 괴롭다… 출처:2017년 제5기 목록  
3    [시]윤동주를 위한 랩소디-심명주 댓글:  조회:606  추천:0  2019-07-18
심명주       윤동주를 위한 랩소디 ―시인 탄생 백주년을 기리여   프롤로그 바람과 추위가 이어지는 푸른빛 기운의 파평교 소아래 차디찬 얼음 솟아 은빛 비늘의 잉어 한마리 지상으로 솟아오르니… 해를 따르는 아이 ―명동 1917―1931 월강곡 흐르던 북간도 솔거족. 삼형제 선바위가 완강한 그늘자락 드리우고 보지 않아도 보이는 추위와 어둠에 암묵의 륙도하가 예감의 바늘을 날카롭게 감춘 동네. 막새 기와 높이 얹고 목조의 우물 깊어 옛생각이 내밀한 집, 귀하고 서글픈 윤씨가문 장남 어엿하게 태여나니 이름하여 해환이라. 대굳은 조상, 지조 푸른 규암 숙과 그들이 세운 새 세상 명동 락원, 고샅길 짙은 마을 흰두루마기 청명하고 밤이면 자두와 뽕나무 사이로 별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곳. 한범아 익환아 무르익는 목소리로 〈새명동〉의 꿈에 젖어 해별을 사모해온 아이들, 재불에 감자 굽던 꽃다운 아이들, 담장 아래 바람 피해 자유로이 피여난. 소년으로 거듭나다 ―은진중학 1932.4―1935 유서 깊은 룡두레우물 가까운 곳에 이제 한 소년이 서 있습니다 이름 새로 세워 해환에서 동주로 몽규와 익환이와 어깨 결어 서로 동무 더기 우에 우뚝 솟은 은진의 기를 받아 깨끗한 소년 마음에 도도한 흰 릉선 여럿 키워 글과 운동으로 게으름이 없는 아스라한 경보소리 하늘 뚫어 슬픈 날들 우물 한모금에 지조 한웅큼 슬픔 한모금에 지혜 한자락 부끄러움을 따르던 바른 신앙 세상 불의에 무겁던 마음 담아 우물에 참회의 그림자 띄우군 합니다 뼈 굳힌 지조 푸르러 거듭나는 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짧은 날 깊은 추억 ―숭실전문학교 1935.9―1936.3 시가 외면된 나날, 문학을 찾아 숭실전문에 온 어깨동무 동주야. 숭실황천지에 게재된 첫 시〈공상〉, 어느덧 너는 십여수의 시와 동시 5수를 배출한 어엿한 18세, 나와 함께 아름다운 나이. 신사참배, 세상은 오물로 어지럽혀있고 하늘은 뒤담벽같이 음산해오는데 만주의 한여름같이 짧은 학업의 날, 가혹한 시련의 타향의 달밤들. 부푼 마음에 탑 하나 후둑 높이 쌓았는데 찰나에 반동강이 나버렸으니. 동주야, 거추장스러운 마음의 실루엣 우리 벗어버리고 맑은 령혼 의지해 고향으로 되돌아가자. 슬픔으로 쌓여질 지혜를 밟으러.                   ―늦봄(익환)이가 시로 꽃을 피우다 ―연희전문학교 1938.4―1941.12 풍요로운 달맞이 계절 꽃처럼 삐여난 기라성의 학우들 굴지의 엘리트 운집의 요람 장미의 향기가 포연에 흩어지고 아비규환 세상 값싼 가격에 생명이 거래되는 그나마 외딴섬 여기엔 지란지교 우정이 숲마냥 깊어가고 우리 글 민족사랑 영시(英诗)와의 아우름 사색이 영글고 눈빛이 밝아오니 〈새로운 길〉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만끽하는 문학의 향연 꽃다운 랑만들 흐린 세상을 시로 꽃 피워 꽃 피워 피여날 일만 남은듯 여름날 꽃 피듯 피여났어라 꽃다운 사나이가 시와 함께 오롯하게 륙첩방은 남의 나라 ―릿꾜, 도지샤대학 1942.1―1943.7 끝내는 잃어버렸습니다 이름 석자 욕되게 불리울 히라누마 도오쥬, 소우무라 무게이 〈참회록〉 써놓고 현해탄 관부련락선 고향은 끝없이 멀어집니다 아스라이 별처럼 향수와 자유와 평등이 〈흰 그림자〉, 〈순이〉와 〈희망의 봄〉이 오물처리 되는 이곳 륙첩방 남의 나라 〈쉽게 씌여진 시〉에 부끄러워 비 소리 후둑진 창가에 기차소리 흘러보내니 딛은 땅 수십번 마음으로 처형하나 차마 세상을 미워할 수 없는 외로움과 괴로움과 쓸쓸함들… 형장의 이슬이 되여 ―후꾸오까 감옥 1943.7―1945.2.16 운무가 흩날린다 형틀을 기대고 육신을 제물로 삼아 죄받이인양 비틀리며 죽음이 죄여온다 우지강 다리 우 마지막 그림자 〈나 고향으로 보내주〉 되뇌여 불렀던 마지막 아리랑노래소리 그 소리 식기전에 감히 누구에게 유린당하고 이토록 비참히 고개 떨구어야 하는가 참을 수 없는 고문과 배고픔 차디찬 바닥 에이는 동상의 아픔들 그리고 더더욱 아픈 마음의 고뇌 부끄러워 아름다운 혼 파릿하게 말라가고 새벽 성당의 종소리 아련히 부를 제 이슬도 움츠린 새벽 아― 커다란 웨침 한마디 마침내 깃처럼 허공으로 가나니 쇠창살 헤치고 훨훨 날리였나니… 에필로그 드디여 갔어라 지상에 잠간 머물다 하늘 날아오른 얼음 차가운 곳 한마리 잉어 마모된 육신을 흙 우에 벗어놓고 반성과 회한과 한숨의 끝없는 날개짓 적료한 고해에 굵다란 획 하나 그으며 스스로 별이 되여 우주에 닿은 소울아, 얼이여 푸르른 넋이여…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동산 그곳에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 출처:2017년 제5기 목록  
2    <<도라지>> 2017년 제5기 목록 댓글:  조회:883  추천:0  2019-07-18
특별초대인 - 류재순 하얀 무지개 (단편소설) 깨여진 유리조각의 한줄기 빛 (창작후기)   삼인 초대석 금  회  바람구멍 (단편소설) 남영도  로씨야 음악의 날개에 실려(외1편)(수필) 변창렬 꽃(외6수)(시) 남영도 '청담동사모님' (수필) 수필 마당 - 채복숙편 색즉시공 복장 세상의 밖   시조명 - 김남희편 은장도 (외8수) 김  몽  시작품에서의 은과 수 (비평)   수필 허무궁  오늘엔 말을 말해본다 김향란  "33세의 팡세' 신분희  도야지야 도야지야   중편소설 구용기 무는 유다(련재2)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김  혁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 (수필) 심명주 윤동주를 위한 랩소디(시) 박문파 아가의 아침 노을아(시) 박은화 별(시)   칼럼 리여천 마작과 낚시 그리고 독서... 신봉철 신앙과 충성(외2편)   신인코너 김성금 그리움(시) 김홍은 길 (시)   장편소설 량춘식 한몽가(련재3) 막  언 개구리 (련재19)   시인과 시 김창희 갈대와 코스모스 문학사 회원 3행시 모음
1    [시] 꽃(외6수)-변창렬 댓글:  조회:501  추천:0  2019-07-18
 변창렬 꽃(외6수)   보조개 뿐인가 그 속에 환장하도록 부드러운 속살 야릇한 눈길 갉아먹는다   팬티도 브래지어도 달거리도 싫어할 수 있다   홀린 게 나 뿐만 아니다 너의 그림자조차도 미쳐 헤벌린 입 다물지 못하구나   넌 꼭 얌전하게 지지 않을 거다 제발 더는 미치지 말자   로숙자    새는 그림자도 없는 하늘에 날고 있다   빌어먹기는 싫고 애걸할 데도 없는 허공에 맥 잃은 날개만 힘겹다   둥지를 지어도 허름한 지푸래기로 만든다 그 속에 빈 털만 남길 뿐 아무 것도 모아두지 않는다   바람 한모금을 이빨 사이에 물고 꽁지에 힘 추스릴 적에 부리는 입맛 다시지 않는다   구름 한조각이 그림자로 다가오면 너무 낯설어 한바퀴 빙 둘러보고는 울음소리도 남기지 않고 텅 빈 둥지로 돌아온다   둥지에는 그림자라곤 없다 바람구멍만 숭숭하다   새는 낮잠을 자고 싶어한다 배불리는 꿈만은 꾸지 않겠다고 부리를 날개죽지 속에 묻는다   얼굴이 시로 휘여질 때   주름 한오리 휘여서 갈고리 만들어 이마에 얹어놓았다 걸린 게 해빛이다   몸부림치던 해빛이 냅다 갈긴 오줌발 땀이였다   그 땀을 훔쳐 멀리 뿌렸더니 갈고리가 떴다 시였다 족보도 없는 무지개   지친 눈동자는 희미한 민낯에 걸려 그 시를 베끼고 있다   시    가마니 짜는 틀에 바디와 코로 엉키여 시가 짜여진다   바디가 한번 다지고 코가 한번 드나들면 수없이 매듭짓는 가마니가 한편의 시였다   가마니에  모래를 담으면 시어도 알갱이가 된다 한 가마니 두 가마니 재여두면 시집 한권이 되는 것이다 쌀도 왕겨도 자갈도 흙도 담았다   바디와 코는 아직도 짜고 있다 가마니 짜는 틀은 피를 짠다   오빠   애교가 무딘 마누라는 오빠란 말 죽어도 싫다고 한다  밖에서는 남자마다 오빠라고 아양떨어도 집에 있는 이 남자는 오빠가 아니라고 딱 잡아뗀다   오빠가 되면 남자가 아니고 남자가 되면 오빠일 수 없단다   오빠는 언제나 오빠일 뿐 남자는  언제나 내 것 하나란 고집불통   오빠랑 애기 낳으면 몇촌이 되냐며 빤히 쳐다보는 그 눈빛이 더 이뻤다   그물   거미가 만든 철학이다   헤치지 말자고 굳게 닫은 팔괘도 아니요 동그라미로 겹쌓은 손자병법도 아니다  지는 해와 뜨는 해를 죽은 할아버지와 산 손자로 기하학적 사고방식으로 얼버무린 울타리 같은 원심력으로 빨려드는 소용돌이의 짝사랑식 인터넷일가   동그라미 밖으로 외톨로 걷는 골목길에 코대 세운 지평선의 그림자에 갇힌 나   공자가 누구인 줄 모르는 뒤걸음질에 빠진 웅뎅이 속에 옹크린 거미 산지사방 넓히는 자기마당이여   그늘    넓히는 터전은 얌전하다 그 속의 펑퍼짐한 자리는 외롭다   어디까지 뻗을가 헤매는데 발이 열개라도 걸음걸이는 한발작이다   거짓말로 지어놓은 둥지는 바람이 먼저 와서 쉬고 가는 남의 집이다 출처:2017년 제5기 목록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