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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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자전거 & 운동 댓글:  조회:1986  추천:0  2019-08-19
 자전거 & 운동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조금 흐린 날씨다. 일기예보에 오늘은 구름이 많고 편서풍2_3급 최고 기온이 27도라고 했다. 자전거타기 너무도 안성맟움한 날씨다. 체력검증도 하는겸 바람도 쏘이는겸 오늘은 저전거려행을 하기로 하였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는 자전거에 올라 탓다. 목적지는 마반산6대 로선은  연천다리로부터 시작하여 브라하통하 북안 연하거리를 따라 소영촌을 거쳐 장대를  넘어 마반산에 이르는 코스다. 한쪽거리가 22킬로 정도다. 거리는 가까우나 산을 넘어야 하기에 쉽지만은 않다.        우선 연천교를  뛰여 건너고 벽수원림(碧水园林)을 지나 신민교 네거리에 다달았다. 련 몇일 내린비로 강물이 많이 불었다. 시커먼 강물이 사품치며 흐른다. 급방 자전거에 오른터라 두다리는 절주 있게 베달을 밟고 자전거는 쌩쌩 잘도 나간다.       자전거는 나의 업여애호중의 하나다. 자전거타기의 우점중의 하나가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갈수 있다는것이다. 자동차는 공로에 대한 요구가 높지만 자전거는 사람이 갈수 있는 곳이면 다갈수 있다.        천지교 네거리에 도착하여 신호등을 기다리며 거리를 보니 5키로메터로 나왔다. 나는 중간중간 자전거에서 내려 브르하통하량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렌즈에 담았다.       연신교는 한창건설중이다. 연신교밑은 원래 두갈래 통로였는데 시공원인으로 한갈래만 열어 놓고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통행시키였다. 이런곳을 지날때는 각별히 주의하여야 한다.       주위에는 자전거운동하는 사람이 많다. 허나 또 고추장맛보기로 며칠하다 그만둔 사람도 꽤나 있다. 재미를 붙혀야 견지 할수 있는 힘이 생긴다.   무지개다리우에 올라 서서 북쪽편에서 흘러오는 연길하를 바라보니 물살이 세다. 매년 연길강의 범람으로 유원지에 진흙이 올라 오고 강바닥이 뜯기여 나가는 재해가  발생한다.       하남다리밑을 통과할때는 자동차진동소리가 세다. 울림현상으로 하여" 웡웡"하는 소리가 세게 들린다. 이런곳은 될수록이면 빨리 통과해야 소음의 피해에서 벗어 날수 있다.       국자가다리밑도 통과하였다. 내가 금방자전거를 탈때 국자가 다리가 완공되였다.         어느덧 연동교가 보인다. 여기까지 10킬로메터다. 아무런 장애없이 쉽게 달려 왔다. 원래는 연동교밑을 통과하고 나면 연하로가 종점이였다. 전에는 이 시점에서 마반산으로 가려면 북쪽으로해서 과학기술대학을 지나 광흥(光兴)방향으로 가던지 아니면 남쪽으로 달려가서  개발구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개발구방향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시공한 연하로 연장로가 많이 진척되여 방향을 바꿀 필요 없이 그냥 달리면 된다. 새공로에 들어서니 차량이 적다. 자전거에 비끌어맨 음향에서는 흥겨운 노래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만 묶어 놓은 것인데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노래는 자전거 려행에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흘겨운 노래소리에 몸통도 같이 움직인다.       소영5대까지15킬로다. 다음 왼쪽으로 돌려 얼마간 달려 가노라면 소영촌촌부가 보인다. 소영자촌은 나의 고향마을이다. 어려서 여기서 공부하고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정다운 마을이다.       철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서 끝까지 달려가면 계동역전이다. 마을 이름은 소영이지만 기차역전 이름은 계동이란 말이 된다. 여기서부터 장대에 올라 붙어야 된다. "허기여차 허기여차"혼자서 흥을 돋구며 베달을 밟아 주지만 자전거는 얼마 나가지 못한다. 너무 가파롭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자.  한발만 한발만"이렇게 윽벼르며 한걸음 한걸음 자전거는 산을 톱아 오른다. 내리면 안된다. 다시 오르기가 힘들어진다.       정상에 도달하니 날것 같다. "만세 만세" 다음 부터는 내리막이다. 길이야 어떻게 생기였던 관계없이 내리막길에 들어 서면  기분이 난다. 속도도 최초의 시속 20에서 시속30 빠를때는 시속40이 나온다. 잠간사이에 산을 날아 내려왔다. 작은 다리 세개를 건너니 목적지 마반산에 도착하였다.       돌아오는 려정은 오후12:30분에 시작하였다. 특별히 지키여야할 시간대도 아니지만 이 시각에 떠나고 싶었다. 헌데 이로 인하여 물병아리가 되고 말았다.        마반산을 빠져 나오고 광흥1대 마을을 지나 외환도로에 붙는데 서쪽하늘이 심상치 않다. 그래도 다리에 힘을 주며 올리막길을 조이였다. 헌데 이때 작은 비방울이 떨어진다. 돌아서 갈데도 없다 . 마을에 내려 가려고 해도 시간이 필요한데 그 사간이면 다 젖을 판이다.       그런데 "꽈르릉 꽈르릉"우뢰소리가 요동치며 창대같은 소나기가 쏫아지였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허리 숙이고 베달을 밟았다. 숨이 차오른다. "에라 뛸곳도 없고 비막을 곳도 없는데 젖으려면 젖으라지 " 배심이 나온다. 그러다가 비가 하도 세게 내리니 자전거에서 내려 길옆에 서서 비를 맞았다. 머리로부터 신발까지 젖지 않은데 라고는 없다.         한 십여분지나니 비줄기가 약해진다. 나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탓다.  옆으로는 자동차들이 정신없이 달려간다. 처음에는 물이 "창창"튕기여 언잖았는데 이제 더 가릴것도 없다.  저사람들 보기에 내가 얼마나 불쌍했겠는가. 무슨 사람이 비속에서 정신없이 베달을 밟고 있는가고.       숨을 돌릴까 하는데 또 소낙비가 내린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오래만에 자전거려행을 나온 나를 사정없이 족쳐 준다. 이제는 더 고려할것도 없다. "젖겠으면 젖고 나는 길을 조이는 것이 임무로다. "이렇게  끊었다 계속하다를 반복하더니만 과학기술대학외곽도로에 들어서니 해가 난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물도 마시고 숨을 돌리였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 연변텔레비방송국을 지나고 립체다리에 올라섰다. 여기는 자전거길이 표시되여 있지 않았다. 안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이때 또다시 소낙비가 쏫아진다. 소주인상(苏州印象)네거리에 도착하니 큰길에 비물이 가득하다. 이동네에 친구가 사는데 이 내몰골 보았으면 얼마나 재미 있어 했겠는가.       발전을 거쳐서 원연길경기장북쪽 새로낸 공로따라 연변대학 동쪽대문까지 오니 하늘이 완전히 개이였다. 이제부터는 비를 맞을 근심이 없어지였다. 헌데 문제는 내 꼴볼견이다. 자전거 안전모자에 반팔적삼 반바지 신발 모두가 얼룩지였다. 흙탕물에 뜅기여 얼룩얼룩한데 방금 집에서 나온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의아해할 정도다.    " 남이야 뭐라던 무슨 대순가. 그대들은 나처럼 비를 맞으며 자전거 타고 산길을 달려보았는가. 이런것도 경력인데"       주정부 앞을 지나고 만달광장을 지나니 앞이 보인다. "해냈어 용하다구"나는 자기로 자기를 칭찬하였다. 그랬더니 어디서 나오는 힘인지 자전거 속도에 속도가 붙었다. 여러해에 거쳐 만들어낸 두다리에 붙은 근육은 내가 가고 싶은 목적지를 안전하고 빨리 도착하게끔 동력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오늘 하루도 재미 있고 의미 있는 하루다. 갈때는 구경에 집중되였고 올때는 비와의 전쟁이였다. 날씨 변덕으로 물병아리가 되였고 얼룩고양이가 되였지만 이것도 못해본 사람은 모른다.      길가에 인적없고    하늘은 먹장구름    꽈르릉 우뢰소리    창대같은 소나기    그속을 달려가는    자전거탄 사내    멋짐이 풍기네.
90    담임선생님 댓글:  조회:1847  추천:0  2019-08-16
 담임선생님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교사절이 된다. 우리반급에는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꽤나 많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친구들 고중 초중에서 열심히 강의하는 친구들도  있다.  우리동창들은 초등교육으로 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전반 전선에서 사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친구들을 배양해낸데는 단임선생님의 공로과 갈라 놓을 수 없다.        우리 단임선생님은 1956년생인데 멋쟁이다. 키도 크고 얼굴륜곽이 선명하고 곱슬머리다. 선생님은 고중을 졸업하고 농촌에 지식청년으로 내려가 4년 재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원래 학교시절 성적이 좋았고 머리가 비상하여 대학시험을 회복한 당해에 대학에 입학할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험제도를 회복한후 첫번째로 되는 Y대학 수학전업 졸업생이다. 이쯤하면 여러분은 우리 단임선생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감이 올것이다.       내가 H고중에 전학했을 때가 1985년 5월이 였으니 그때 선생님은 대학을 나온지 4년밖에 안되고 나이도 29세 젊은이다. 초보선생님이라 할수 있는 시기였지만 단임선생님을 맡고 있었고 열정 또한 대단하였다. 매번 교단에 오를 때는 서복에 넥타이를 매였는데 뒤로번진 곱슬머리는 항상 깨끗한 모습이였다.       선생님은 습관 용어가 있는데 바로"이렇게 하도록"이라는 말씀이였다. 지금은 그 말씀을 별로 안하지만 우리들끼리 앉으면  곳잘 그말을 외운다. 선생님은 잘 모르지만 우리 사이에는 이말은  부호(符号)와  같은 존재로써 선생님의 대명사였다.       그때는  선생님도   젊은 시절이라 결혼한지도 얼마 안 되였고 살림집은 학교건물과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한번도 선생님의 집을 가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친구들은 여러번 다녀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싸움하여 반성 할려 갔다 온 친구들 뭘 얻어 먹으려 갔다 온 친구들 하여간 이야기가 많았다.       후일 친구가 말하였다. 싸움하고 나서야 큰일을 저지른 것을 느끼였다. 이튿날 아침 싸움에 같이 참가 했던 친구와 같이 선생님의 집으로 반성할려 찿아 갔다. 마침 선생님께서 아침 식사하고 있었다. 싸움해서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손이야 발이야 싹싹 빌었는데 선생님은 가타부타 말씀이 없었다. 이 장면을 보던 사모님께서 반장을 올라 오라고 해서 아침 얻어 먹고 왔단다.       내가 대학을 나와서 얼마 안되여 동창행사가 있었다. 그때 선생님은 연길로 조동되여 왔는데 연변일중 서쪽대문옆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즈음 청도의 김사장의 연길방문이 있었다. 선생님께 인사드리겠다고 하여 내가 집 안내를 한적이 있다. 김사장도 선생님을 높이 모시였다. 뵙자마자 큰절을 올리는것이 였다. 처음 보는 장면에 나는 김사장도 학교시절 뭘 잘못한 일이 있는것이라고 판단했다.       연길에 이사 온후 선생님은 대학에서 근무하였다. 그학교에는 선생님의 제자도 같이 근무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니 사제간에 같은 직장에서 공작하는 일도 있게 되였다. 선생님께서는 2016년도에 정령퇴직하였고 학교측의 요구에 따라 일년간 더 근무하였다.       퇴직후 선생님은  부지런히 운동을 한다. 탁구 자전거운동을 열심히하는데 아직도  열정이 대단하다. 경상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룡정에 다녀  온다고 한다.       반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먼저 선생님께 요청을 한다. 교원절행사라든지 년말행사때엔 선생님께서도 흔쾌히 참석하여 제자들과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몇해전에는 미국방문길에 사온 양주도 기꺼히 내놓아 제자들에게 맛보게 하였다.       우리반 친구들은 선생님을 형님처럼 오빠처럼 모신다. 새해를 맞이하는 인사는 첫마디가 꼭 선생님께 드리는 인사다. 그만큼 선생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일 잘하고 신체건강에 주의하라며 답장을 주신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단임교원을 많이 해보았지만 우리반에 대한 인상이 각별히 깊다고 한다.      얼마후에는 선생님께서 출국방문길에 오른다. 퇴직후의 생활이 다양한데 제자들 보기에도 너무좋다.       선생님께서 항상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여러친구들에게 명절의 인사를 보낸다.                                                                                                                                                                                          2019. 8. 16
89    비가 내린다 댓글:  조회:1648  추천:0  2019-08-16
 비가 내린다        요지음은 태풍의 영향으로 하여 매일 비가 내린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 낮까지 연길시는 흐리고 큰비가 내리던데로부터 폭우가 쏫아 진다고 한다 . 지난주 토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이번비는 끊을줄 모른다. 지금도 쭈룩쭈룩 비가 내린다.        5월달 연길의  기후는 가물었다. 씨앗을 넣고  이제나 저제나 비가오나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기다릴때는 내리지 않더니 내리지 않아도 될때에는 많이도 내린다. 8월중순에 들어 서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듯 련일 비가 내린다. 태풍의 영향이라고 한다. 며칠전 성주정부에서는 홍수방지대책회의을 가지였다.         물과 불은 사정없다고 하였다. 큰비로하여 사람들은 많은 생명재산의 피해를 본다. 중국은 원체 나라가 크다 보니 자연재해가 빈번하다. 1998년도 중국은 큰물 피해를 당한적이 있었다. 그때 TV만 열면 홍수와 싸우는 군민의 모습이였다.       요지음 나는 매일 강변에 나가 본다. 련속 내린 비로하여 강폭이 전에 비하여 많이 넓어지고 높아지였다. 증폭속도가 무서울 정도 다. 오늘 아침에 나가 보니 심각한 상태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련일 내린 비로하여 토질은 수분이 포화상태에 이렀다. 이제부터는 비물이 기본상 그대로 흘러가게 되는데 큰비까지 겹치면 물이 급속히 불어나게 된다.          지대가 낮은 곳에 산다 던지 산비탈에 사는 사람들은 각별히 홍수를 주의해야 한다. 홍수는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큰비가 내린뒤  마반산에 가본적이 있었다. 우리집 대문앞에 커다란 바위돌이 길을 막고 있었다. 알고 보니 강바닥에 방치되였던 돌이 산홍수에 떠밀려 올라 왔던 것이다. 지면과 강바닥의 상대차이가 1. 5메터정도  되는 점을 감안하면 그 무거운 돌이 떠밀려 올라 올때 파괴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집이 산골짜기 옆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큰비가 올때 절대로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 물이 불어 집에 들어 오는 것과 산홍수가 집에 덮치는것은 완전한 다른 개념이다.  몇해전 큰물에 집을 잃은 사람이 말했다.          우리 마을 골짜기는 큰비만 오면 산홍이 발생한다. 집이 물옆에 있기에  우리집 은 큰비가 내리면 잠을 자지 못한다. 그때도 큰비가 내리였다. 집식구들 잠 잘수가 없다.  전지를 켜고 밖에 나가 상황파악하는데 먼데서 시커먼것이 밀려 왔다. 나는 당금 집에 들어가 안해의 손목 잡고 뛰여 나왔다.  집은 홍수에 밀려가 버리였다.        그번 피해는 천재(天灾)와 인재(人灾)가 겸한것이였다. 철로가 켄넬을 뚫으면서 많은 버럭이 산생되였다. 시공부문에서는 산생된 대량의 버럭을 골짜기에 그대로 방치하였는데 비가 내리면서 호수가 형성되였다. 소위말하는 淹塞湖다. 평소에는 큰 문제가 않되지만 큰비가 내리니 호수가터져 산홍과 합세하여 집에 덮쳐 들었던 것이다. 후일 공사장측에서 피해자들에게 새집을 짓어 주었다.           2017년초 겨울 반장 서기등 여러명이 걷기 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차를 동래사(东来寺)마당에 주차하고 눈을 밟으며 프르하통하와 해란강합수목 방향으로 걸었다. 2016년도에 비가 많이 왔었다. 그해 도문시 두만강광장에는 물이 들어오기 직전이였다. 우리 연변의 여러갈래 강물의 수위가 많이 높아지였다.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보니 강뚝에자란 버드나무 가지에 비닐봉지같은 쓰레기가 많이 걸려 있었다. 홍수당시 수위(水位)를 가늠케하는 참고물이였다. 어림 짐작하여도 1. 5메터는 넘게 수위가 올라온것이다.            다시 마반산 이야기로 돌아가자.   마반6대 골안은 그리 길지 않지만 많은 골짜기의 물을 받아 들인다. 내가 갓마반촌을 다닐때 황대장이 말했다.    " 이물을 업수히 보면 아이되오. 큰비올때는 물 바다요. " 큰비가 온다하면 골안에  산홍수가 지면서  돌들이 굴러 내려 온다. 꽝꽝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대낮에도 이런 광경을 보면 몸을 우츠려 뜨리게 된다. 한번은 내가 마침 혼자 집에 있는데 소나기가 쏫아져 내리였다. 비가 끊고 해가나니   곬물이 어느정도 불었는가 볼려 나갔다. 헌데 시커먼 흙물이 사품치며 흐르고  롱구뽈보다 더큰 돌들이  서로 부딛치며 꽝꽝소리 내는것이 아닌가. 무서운 광경이였다. 물건너집 집주인도 나와서 물길을 살펴 본다.         홍수가 지나고  며칠만 비가 안오면 골짜기는 언제 그랫나 싶게 조요하다. 맑은 시내물이 졸졸 흘러 내리고 물에는 돌쫑개가 보인다. 그러니 사람들은 표면현상에 속아 넘기 쉽다.       미우주무 방환미란(未雨绸缪,防患未然)이라는 말이 있다. 홍수방지는 미리미리 해 놓아야 한다. 제방을 높이 쌓고 든든히 해야하고 도로와  교량의 위험한 구간은 통제해야 한다.      순라대는 24시간 순라를 보증하며 홍수방비대는 항상 비상상태를 보존해야 한다. 홍수와 싸워이길 만단의 준비를 가추어야 한다.   강물은 어제보다 또 높아 지였다.       
88    동네 장터 댓글:  조회:1865  추천:0  2019-08-15
 동네 장터        지난해에 우리 집은 체육장근처로 이사 왔는데 처음에는 동네에는 장이 없었다. 다만 골목길에서 몇사람이 삼륜차에 걸터 앉아 파나 감자 오이 같은 채소를 팔고 있을뿐이였다. 품종도 량도 매우 적었는데 보매 근처 농민들 같았다. 그러니  퇴근길에 시내장에 들려서 필요한 채소나 과일을 사가지고 와야 했다.       지난해만 해도 우리 구역에는 주민호가 적었다. 물론 지금도 입주률을 놓고 말 하면  낮은 편이지만 그래도 작년보다는 주민이 많이 불었다.  인재시장 아파트 구역앞 십자거리 서북쪽에는 작으마한 공터가 있었다. 사람 모여 사는 동네에는 장터가 생기는가 보다. 올해 봄부터 본격적으로 이 공터에 장이 서기 시작하였다.        동네 장은 대게 오후 늦은 때 부터 장을 보기 시작한다. 장군들은 구역주민들의  소비 요구에 맟우어 채소와 과일 난전을 벌린다. 여기는 도시관리인원도 없는 진짜 자유 장터다. 지금은 일정한 규모를 갗우고 있는데 많을 때는  30명 정도의  장군들이 나온다. 해볓을 막으려고 세워 놓은 큰 양산들이 즐비하게 들어 섰는데 제법 장 모양새가 난다. 어디서 온 장사군들인지 모르지만 가지고온 채소생김새를 보면 잘 생긴것이 적은데 채소전문호들 같지 않다.       동네에 장이 생기니 생활이 편리하게 되였고 동네가 흥성흥성하게 되였다. 우리 동네에서 신풍3대 장마당까지 가려고 해도 3킬로정도 나간다.  그러니 동네에서 필요한 채소를 구입 할수 있다는 점과 볼거리가 생기였다는 점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 재미 있는 것은 채소의 래원이다. 내가 관찰한데 의하면 절반 가량의 장군은 뙤기밭 주인들이다.       이동네는 원래 소영진 인평촌 구역이였다.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이곳에도 몇년래 많은 아파트가 들어 섰다. 내가 료해한데 의하면 원주민들의 많은 땅이 팔려 나갔지만 그래도 일부 남아 있다. 그들은 한일 농사일에 뼈를 굳혀 온 사람들이라 일에 들어 가서는 막힘이 없다. 그리고 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체육장근처에 개간할수 있는 땅은 기본상 다 일구어 놓았다. 그리고 감자 고구마 파 오이 고추 배추 원두 상추 등 여러가지 채소를 심었다. 뙈기밭 주인들은 집에서 먹고 나머지를 장에 들고 나와 팔아 돈을 만드는것이다. 별로 본전이 아니든 채소라 팔면 좋고 못 팔아도 별로다.         장이 생기니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장군들은 장군들끼리 두줄로 나뉘여 앉고  난전을 벌려 놓고 가운데 길을 내여 손님들이 다닐수 있게 하였다. 로인들은 로인들끼리 장 끝머리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로인들은 볼거리도 있고 들을 거리도 있어 좋아 한다.         비록 자유시장이고 관리원도 없지만 장자리는 다 고정되여 있다. 어느 아침 운동할려 나가는 길에 장터근처를 지나게 되였다. 장꾼들은  별돌장이며 헌 이부자리며  나무 판대기등으로 다 자기 자리를 차지하여 놓았는데 비교적 질서가 잡혔다. 장자리는 신성불가침의 령토다. 듣는 말에 의하면 아이스크림 장사군도 자기구역이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을 가르켜 자률행위라고 한다.         장사가 가장 잘 되는 시간은 저녁 5시부터  6시반 사이다. 출근족들은 퇴근길에 동네장에 들여서 필요한 채소와 과일들을 구입한다. 이때면 장사군들은 사구려를 부를려니 근을 뜰려니 눈코뜰새 없다. 그나마 결산은 위챗으로 하다 보니 가짜돈 받을 념려도 거스럼돈 돌려 주는 일도 없어 편리하다. 요지음은 옥수수철이라 옥수수를 구워 파는 집이 서너군데 나왔는데 옥수수 굽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벌름거리게 한다. 그외에도 양고기뀀 파는 집도 두군데 있다. 장규모는 작지만 웬만한건 여기서 다 살수 있다.         장이란 것은 사람들의 수요에 의하여 산생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니 자연스럽게 장이 생기였고 장이 생기니 동네가 흥성해진다. 그리고 사람사는 냄새가 다분하다.      우리 동네 장터는 작지만 매력이 있다.
87    사진첩 댓글:  조회:1634  추천:0  2019-08-15
 사 진 첩        일전에 어느 친구가 위챗에 올린 사진과 글을 보게 되였다. 친구는 이제 며칠 후면 시집갈 딸애의 어린 시절 사진첩을 정리하고 있었다.  동년시절 추억과 행복을 가득담은  딸애의 사진을 감상하노라면 행복에 차 넘치던 지난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를것이다.        왜서 결혼식을 며칠 앞둔 이시점에서 사진첩을 정리하는 걸가. 사진첩정리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나 하는 일이다. 늘게 시간을 잡고 사진속의 기록되여 있는  자식의 성장과정도 화억하고 과거에 있었던 여러가지 재미나는 일도 돌이켜 본다면  진정 행복의 시간이 될 것이다. 허나 결혼을 며칠 앞둔 이 시점에서 체크 해야 할 일들이 많고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여 온 가족이 사진을 감상하고 정리하는데는 부모의 깊은 의미가 내포되였다고 본다.           하나. 부모들의 즐거운 마음과 아쉬운 심정이 교착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얼마전 까지만 하여도 부모님앞에서 재롱 부리던 자식이 어느덧 어른으로 성장하였고 결혼하게 되였다.  허나 정작 시집 보내려하니 기쁘기도 하지만 아쉽기도 하다.   집에서 일이라고는 별로 못 해본 애가  결혼해서 어떻게 생활을 할런지 근심스럽기도 하다.  한집 식구로서의 생활을 이로써 끝나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다.       시집 가도 한 도시에서 살게 되건만 왠지 허전한 심정이다. 결혼후 자주  부모 뵙우려 온다고 해도 이제부터  필경은 한 집식구가 아니다. 마치 새끼 제비가 커서 엄마제비를 떠나 창공에 자유로히 날아예듯 자식은 성인으로 변하였고 자기의 독립적인 삶을 시작하게 되였다.       부모 마음속에는 딸이 아직도  어린이로 보이지만  사실은 어른으로 성장하였고 일터에서는 어엿한 선줄군으로 탈바꿈 하였다. 그들은 또 자기들만의  희망과 꿈으로 가득 차있다.       신랑신부는 좋다고 난리지만 시집 보내는 부모들은  서운한 것도 있다. 딸을 곱게 자리운것이 꼭마치 사위놈한테 빼앗길려고 한 일같다. 20여년을 자리워 놓았더니 아빠엄마는 저쪽이고 남자친구만 좋아 한다.          부모 마음은 마치 연 띄우기를 하듯이 연줄을 놓으면 날아 버릴가 근심스럽고 너무 잡고 있으면 날지 못할가 걱정이다. 그러니 딸 가진 집에서 장래는 어떻게 호강스럽던지 결혼일에는  운다고 하지 않던가.        둘. 부모들의 바램을 보여 주고 있다.  20여년을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애지중지 키여왔던 딸을 시집 보내면 이제  부부만 남게 된다. 어찌 보면 사진첩정리는  시집 가는 딸에게 어린이 시절을 회억하게 함으로써 부모님을 잊지 말라는 부탁이다. 이제 부터는 아빠엄마 뿐이니 집에 자주와 달라는 바램이기도 하다.      교육이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은 항상 말 보다 더 효과적이다. 특히 부모들은  시종일관하게 자기들의 실제 행동으로서 웃 사람들을 살뜰히 보살핌으로써 자식들의 본보기가 되였다.  그리하여 자식들은 어린시절 부터 부모를 존중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량호한 습관을 키워 왔다. 부모들은 자식들로 하여금 반드시 부모님의 은덕에 감사 할 줄 알게끔 교육해야 함이  마땅하다.         셋. 부모들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부모는 언제던지 자식들의 든든한 받침목이다. 부모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자식들이 수요한다면 달려갈 준비가 되여 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힘든 일이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슴치 말고 말해 주기를 바란다. 부모로서의 책임은 한도가 있건만 뭣이든 다 해주려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맨날 자식 걱정이다.  우리 민족은 정이 많은 민족이다. 부모자식간의 정은 그 여느 민족족보다도 깊고 뜨겁다. 자식들이 결혼하여 손군을 보면 그누가 부르기라도 한듯이 달려 간다. 하나라도 더 도움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자신에게는 뭐나 아끼지만 자식들한테는 너무도 대범한 것이 우리 민족부모들이다.      시집 가는 딸도 시집 보내는 부모들도 평온한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한다. 시집 간다고 해서 남이 된 것이 아니고 일이 있다고 해서 부모들이 모든 것을 해 줄수 없다.  부모자식간의 정은 깊어 가되 자식들의 자립정신은 밀어 줘야 한다. 인류는 이렇게 한세대 한세대 번식하고 발전하여 왔다.      결혼은 인생중에 하나의 선택과 시작일 뿐이다. 어떻게 가꾸어 나가 하는가는 본인들의 문제다.  
86    결혼식 댓글:  조회:2908  추천:0  2019-08-13
 결혼식             오늘 우리는 동창의 큰딸 결혼식에 참가하게 되였다.  우리반 동창들로 말하면 두번째로 되는 자식결혼식이다.   자식들은  이미 결혼년령에 들어 섰고 상대를 만나 하나둘씩 혼례식을 올리고 있다.  오늘 혼례식은 어부용( 御芙蓉)례식장에서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례식장에 도착하니 신부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문가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손님 마중을 한다.   요지음 행사에 참가하여 보면 참석자들도 모두 깔끔한 명절옷 차림이다.  당사자들에 대한 당연한 례의라고 생각 한다.  많은 손님들은 벌써 대기중이다.          고중 단임선생님께서는 신체가 불편한것도 마다하시고 모처럼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여 주었다.  제자들의 자식결혼식까지도 서슴없이 참석하여 주는 단임선생님이 계심으로하여 우리86-5화룡동창들은 중심이 바르고  즐겁고 감사하다.  원래 문과반이였던 탓에 우리 반급에는 항상 남자가 귀하다.  오늘 혼례식에도 녀자들이 많이 참석한 반면 남자들이 적다.          여러 사람들의 기대속에 혼례식은 11:58분에 정식으로 시작되였다.  요지음 결혼식은 한막(一幕 )의 연출에 맞 먹는다.  대형스크린에서는 신랑신부의 사진이 떠오르며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하나 하나 소개한다.  례식장 량측에서는 번쩍번쩍  LED등빛을 비추어 댄다.  나팔에서는 음악소리도 높게 울린다.        신랑신부가 때로는 도시에서 때로는 교외에서 촬영한 가장 행복했던 화면들은 경쾌로운  배경음악에 포장되여 혼례에 참석한 모든 하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는 모두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한 예술공작자들이다.  졸업후에는 부모님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들로 음악학원을 꾸리고 어린이 음악교육사업을 하고 있다.  특히 신부는 기타와 피아노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평소에도 신부어머니는 위챗에 교육현장 영상물을 잘 올린다.  덕분에 우리동창들은 영상을 통하여 신부를 익히 알고 있고 또 수준급의 기타와 피아노연주를 감상할수 있었다.        혼례식 진행도중 아니가 다를가 사회자가 신랑신부에게 피아노 연주를 부탁한다.  나는 많은 혼례식에 다녀왔지만 혼례식장에서 신랑신부가 피아노 합동연주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주 신선하고 우아한 연출이였다.  한쌍의 젊은 신랑신부는 행복에 도취되여 때로는 서로 마주보며 때로는 음악에 취하여 랑만의 피아노 연주를 모든 하객들에게 선물하였다.          두쌍의 섬세한손이 건반위에서 날아예듯 춤을 춘다.  동시에 피아노에서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선률이 흘러 나온다.  신랑신부는 피아노반주에 맞춰 사랑노래를  부른다.   이때 대형스크린에서는 신랑신부가 록음실에서 노래부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신랑신부는 오늘 혼례식의 주인공이자 연주자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화려한 피아노연주로 혼례에 참석한 모든 하객들에게 아름답고 황홀한 혼례식을 보여 주었고 또 미래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동경을 그려내였다.  그들의 앞날은 기필코 아름답고 휘황찬란 할 것이다.          혼례식을 고조에 이끈 것은 뭐니뭐니 해도 신부어머니 친구부대 춤판이였다.  사회자의 요청에 따라 흥겨운 노래가락에 맞춰12명의 녀성들이 화려한 색상의 한복차림으로 무대에서 춤판을 벌리였다.  신부어머니를 선두로 하여  친구부대들은 한일자로 렬을 지어  뛰여 가며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중에는 우리반 동창들도 보인다.  춤부대는 무대위를 몇바퀴 돌면서  신바람 나게 춤을 추는데 실력 또한 만만치 않다.  신랑측 손님들은 연신 감탄을 쏟아 낸다.          하객들의 웃음을 제일 많이 자나 낸것은 바가지 던지기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민족결혼식에 바가지 던져 자식의 성별을 알아 맞추는 놀음이 벌어지였다.  조선족하객들은 자주보아서 별로지만 한족하객들은 어찌다 보는 놀이라 좋다고 신귀하다고 야단이다.           사회자가  신랑부모님들보고 손자와 손녀중에 택하라하니 손녀가 좋단다.  신랑신부가 바가지를  뿌려 놓으니 아구리가 위로 향한다.  손녀다.  두번째도 손녀다.  세번째로 뿌리니 바가지가 엎어지였다.  손자다.  모두들 좋다고 난리다.  내일에야 손자를 보던 손녀를 보던  상관이 없다.      오늘 행사가 즐거우면 그만이다.            혼례식이 거의 마무리 되여 갈때  우리는 신랑아버지의 건의로 다같이 축배의 술잔을 들었다.            한쌍의 젊은 신랑신부의 행복을 충심으로 축원한다.           새생활은 이제 방금 시작이다.     
85    8.15로인절 댓글:  조회:1900  추천:0  2019-08-13
 8.15로인절          로인절은 연변의 가장 큰 명정중의 하나다.   개혁개방초기인 1982년 룡정시동성용진에서는 매년 8월15일을 로년절로 정하고 여러가지 축수활동을 벌이 였다.   1984년 연변주위에서는  8월15일을 연변조선족자치주 로인절로 정하고 전주에 보급시키였다.   2010년에는 법적으로 8월15일을 연변조선족자치주"로인절"로 고정하였다.            로인을 존중하고 어린이를 사랑하고 녀성을 관심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많은 명절가운데서 우리 연변에서 가장 환영 받는 명절이 바로 "로인절", "아동절 ","부녀절"인것도 바로 그원인이다.              로인절을 전후로 하여 매개 가정에서는 행사를 가진다.   로인을 모시고 식당으로 간다 던지 아니면 집에서 음식을 차려 놓고 모임을 가진다던지 하는데 주제는 단 하나다.   바로 로인절축하행사다.   "오래 오래 앉으세요","내내 건강하세요","복많이 받으세요"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의 축복의 인사가 가득하다.            외지에서 사업하는 자식들은 축하금을 보내오기도 한다.    부모님께 집적 명절의 인사를 올리지 못한 마음을 전화로 위챗으로 표달하기도 한다.   부모님들은 동네에 아가서 자식자랑도 한다.   "우리 며느리가 랭면집에 초대해 주었소","우리 아들은 소비돈500원 가져왔소".    다 즐거워서 하는 말씀이다.    부모들이 살아 계시는 집에서는 행사로 분주하지만 부모님들 돌아간 집들은 조용하다.   그저 마음속으로 부모님들을 그리고 명복을 바란다.   명절이 있어야 행사가 있고 행사가 있어야 내용이 더욱 의미 있다.           로인은 가족의 기둥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한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머니란" 표현을 곳잘 쓴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례절이 바르고 시비관념이 강하며 남을 돕기 좋아 한다.   웃세대들이 실제 행동으로 아래 세대들에게  매사에서 어떻게 처사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배워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행사장에 가면 어떤 젊은이들은 이상분들이 수저를 들지 않았는데 마구 료리를 집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가정교육이 따라가지 못한 탓이다.   3대가 같이 생활하는 가족에서 자란 아이들에게서는 절때 이런 일이 발생 할 수 없다.    그들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많은 내용을 집에서 배웠다.    지금은 전문인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상식이 있는 인재가 부족하다.             로인들은 가정의 행복 원천이다.   우리 누님은 퇴직하고 북경에 가서 외손자를 봐주고 있다.   딸과 사위는 출근하기 때문에 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다.    외손자가 유치원에 가든 소학교에 가든 외할머니의 도움이 필요하다.   든든한 후근 보장이 있음으로 하여 자식들은 시름 놓고 사업 할 수 있고 손자손녀들은 즐거운 방과후 마음껏 뛰 놀수 있다.    보모 구실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 자식을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하는 일이다.   자식들이 마주한 곤난을 덜어 주어야 부모의 마음도 편하고 즐겁다.   자식들은 부모님이 고생한다고 또 이것 저것 챙긴다.    화목한 가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가.            로인을 공경하여야 자기도 존중 받는다.   자식들은 부모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고 따라 배우고 있다.   만약 부모가 자기부모한테 막짓을 하고 박대한다면 그것이 고스란히 자기한테 돌아 오게 된다.   산소 갈때 왜 자식을 데리고 가냐고 친구한테 물은 적이 있다.   친구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가 죽으면 우리 애들도  나한테 이렇게 하라고 교육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아주 소박하고 평범한 말이지만 일리가 담겨 있다.   존중 받고 싶으면 우선 집에서 부모님께 잘해야 한다.   자기가 못한 일을 자식한테 강요하여 서는 절때로 통하지 않는다.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고  부모들이 밝은 처사를 하여야 자식들도 배울수 있다.               중국에는 "중양절"이라고 있다.   우리로 말하면 중국로인절이다.   음력9월9일이 "중양절"인데 력사가 유구하다.   선진(先秦)시기에 이미 "중양"절을 쇠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그때는 관리계층이나 부자집에서만 쇠는 명절이였다.   당나라 때에 와서는 이미 서민 명절로 변하였는데 민간 4대명절 즉 "청명 ","칠석","중양 ","중추"절가운데 한개명절이다.            우리는   로인을 존중하고 로인을 방조하고 로인을 우대하는 사회적기풍을 수립하여야 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기풍은 "로인절"에만 국한되지 말고 일년 내내 쭈욱 이어져야 한다.         로인을 존중하는 사회야만이 진정한 문명사회다.   
84    중복(中伏)ABC 댓글:  조회:3838  추천:0  2019-08-05
 중복(中伏)ABC        요지음이 중복기간이다. 올해 중복은 7월22일에 시작하여 8월10일에 결속되는데 도합 20일이다. 해마다 중복이 들어 서는 시간은 조금씩 다르다. 한해 여름가운데 삼복철이 가장 덥고 삼복가운데 중복이 또 제일 무덥다.         요지음 해학적인 영상물들이 위챗에서 많이 나도는데 중복이라고 콩크리트 바닥 위로 걷는 닭마저 발이 뜨겁다고   폴짝폴짝  뛰여 다닌다. 진짜로 웃긴다. 뜨거워서 그렇게 걷는지 아니면 원래 걸음새가 그런지는 알수 없다. 겨울에 강뚝에 나가 보면 어떤사람들은 애완견에 신발을 맞춰 신기고 다닌다. 원래 동물은 신발이 필요 없는데 거기에 적응하고 나면 동물의 많은 본성을 잃게 될것이다. 이대로 라면 여름에는 애완견에게 산다라던지 장화를 신게해야 할 것이다.       금년 중복은 지난해에 비하여 그리 더운 편이 아니다. 지난해는 어찌나 더운지 밖에 나 가기가 싫어 졌다. 에어콘도 불이 나게 팔리였는데 물건은 구입하였으나 안장하지 못하여 줄을 서 기다리려야 했다. 안장공인이 부족하여 장춘에서 사람을 급파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람이란 항상 그렇다. 평소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가도 일에 부디치면 죽을둥 살둥 뛰여 다닌다. 소위 위기 의식이(居安思危,未雨绸缪)부족하다.       문명고국인 우리 나라는 계절에 관한 속담이 많다. 농촌에는 "중복에 무우 말복에 채 립추전후 큰배추"(中伏萝卜末伏菜,立秋前后大白菜) 라는 말이 있다. 계절에 맞추어 씨를 넣어야 건실하고 벌레가 먹지 않는다. 좋은 채소를 얻으려면 계절을 잘 맞춰야 한다. 어제는 마반산에 가서 무우 심으려고 감자밭을 정리하였다.        올해 우리집 감자농사는 쑬쑬한 편이다. 반면에 가지 농사가 잘 되였다. 오늘은 형님이 내려 가서 무우씨를 넣겠다고 하였다.  형님내외분은 시간만 나면 내려와 이것 저것 거두어 준다. 참 고마운 일이다. 지난해에는 무우 속가낸것을 별도로 말리였는데 국을 끓이니 아주 시원하였다.       요지음 중복이라고 슈퍼에 가면 더위를 몰아내는 음식이라든지 음료들이 대대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별라별 상품이 다 개발되여 나왔다. 우리 고모님의 말씀을 빈다면 "고양이 뿔 빼고는 다있다". 그런 상품들이 더위를 식히는 효력이 어느정도 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선조들이 하여 왔던  전통 방식이 더욱 유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열치열"(以热治热)이라고 개탕이라던지 소고기매운탕 밭죽등이 유효적이다. 삼복기간 뜨거운 개탕에 개장즙을 듬뿍 떠넣고  조이밥을 말아서 한두그릇 비워 보시라. 처음에는 머리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온몸에서 땀이 배여 나온다. 조상들 말씀에 삼복철개탕은 몸보신에도 좋다고 하였다. 더울수록 문을 닫고 개탕을 마셔야 제격이다. 남성들은 개고기에 소주도 몇잔하고 나면 거뜬하기로 더 말할나위가 없다.         어떤분들은 삼복기간에 삼계탕를 즐겨 드신다. 지난해 중복에 단위친구들 같이 삼계탕 먹으려 갔는데 집집이 만원이다. 5~6집을 돌다가 결국은 냉면집으로 바꾸었다. 요지음 생활질의 향상과 더불어 사람들은 자기몸에 더욱 신경 쓴다. 상가들은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리용하여 홍보전에 나선다. 요지음은 무슨 절기인데 뭘 먹어야 한다.  이런식의 홍보에 사람들은 잘 넘어 간다. 아무래도  먹어야 되는 판에 좋다는대로 해서 나쁠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며칠 후면 립추다. 립추에는 가지를 먹는 다던지 수박을 먹는 습관이 있다. 북경에서는 립추에 살을 찌게하기 위하여 고기를 먹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을 이루어 "고기를 붙인다"(贴膘)라고 한다. 하여 장마당의 고기매대에는 고객들이 아침부터 길게 줄을 선다고 한다. 장사군은 고기 팔아 좋고 시민들은 먹을 것을 먹어 좋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이런 풍습은 생활이 곤난하던 시절에 과동하기 위한 준비작업이 아니였나는 생각이 든다. 몸에 고기를 붙혀야 추운 동삼을 지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요지음은 덥기만  하면 에어콘을 틀어 놓는데 취할바가 못된다. 몸안의 열이 방출되여야 하는데 차거운 공기로 땀구멍을 틀어 막아 놓았으니 평형을 이룰수 없다. 음식점에 가면 모두들 차거운 맥주를 즐겨 마신다. 처음 한두잔 정도는 입맛때문에 찬맥주가 시원하고 맛이 있지만 많이 마셔야 하는 장소에서는 취할바가 아니다. 상온의 맥주는 위에 주는 부담이 적다.           여느 보도에 나왔는데 웬분이 더위를 식힌다고 차거운 광천수를 꿀컥꿀컥 마시였는데 심장이 자극 받아 돌아 갔다고 한다. 비록 극히 희소한 일이지만 어느정도 주의해야할 바이다. 우리도 한족들한테서 좋은 습관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그사람들은 찬물을 마시지 않고 더운 차물을  마신다. 찬물은 금물이다. 남방에 가보면 노인들이 년세가 있어도 허리가 꼿꼿하고 얼굴색이 좋다. 건강하게 살려면 좋은 습관을 가지는것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은 룡정 영성에 있는 친구집으로  놀려 갔다. 친구는 3월말에 한국에서 들어 왔는데 내가 일이 많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했다. 두주일전에 영성모임에서 만난뒤로는  전화만 통했을 뿐이다. 아침에 약속한 시간과 지점에 도착하니 친구부부가 이미 나와 있었다. 한국생활에 익숙한분들은 시간관념이 강하다.          정심에는 삼합에서 사왔다는 토닭을 삶았다. 닭과 햇감자을 넣고 끓인국은 진짜 감칠맛이다. 토닭의 고유한 단맛과 쫄깃쫄깃한 입맛은 양계장 닭과는 차원이 틀린다. 닭국에 삶기여진 감자 또한 별맛이다. 오늘과 같은 중복철에 친구와 만나 바람이 잘 드는 정자에 앉아 맛있는 음식도 나누고 이야기 하는 것도 행복이라면 행복이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풋옥수수를 먹을 수 있다. 어제 마반산에서 몇이삭 따왔는데 아직 좀 이르다. 왜지는 제철이다. 친구의 왜지 나무에는 붉게 익는 왜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먹기 보다도 자리우는 재미가 더욱 좋다. 봄이면 꽃이 피고 한여름이면 익어가는 왜지를 보면서 촌에서 사는 정취를 느끼여 본다.         덥다덥다할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여름더위도 당분간 지나가게 된다. 우리 연변은 8. 15만 지나가면 날씨가 매우 시원해진다. 8월8일이 립추다.    올해도 무더운 여름을 잘넘겨 보낸다.      건강한 여름을 보내고 시원한 가을을 맞이 합시다.  
83    고모 댓글:  조회:1430  추천:1  2019-07-31
 고  모         나의 아버지 고향은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 이다. 아버지는1921년도 생인데 18세 젊은 나이로 살길을 찿아 두만강을 건너 만주에 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만주땅을 바라고 고국을 떠나던 때가 바로 1938년이였다. 아버지는 동북의 여기저기서 산전수전 다 겪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 했고 또 동북해방을 맞이 했다.         1947년 흑룡강성 학강에서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고  장춘포위전 료심전역에 참가했고 무한까지 밀고 나갔다. 도중 상급의 명령을 받고 안동(지금단동)에 집합하였고  나중에 조선인민군위 일원으로 조선전쟁에 참가하였다. 후일 다시 중국인민지원군 번역관 신분으로 활동하다가 조선 정전협정이 되여 중국에 돌아 왔다.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소리가 귀청을 찟던 7년간의 전투생애를 마치고 지인의 소개로 연길에 오게 되였다.  고향을 떠나온 뒤로 다시는 고향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1985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전쟁이후 조선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였고 고향으로 향하는 길은 가로 막혀버리였다. 은마(银马)는  달리고 싶어 했건만  38선에서 멈추어 서야 했다. 아버님께서는 혈육하나 없는 중국땅에서 가정을 이루고 오직 안애와 자식들만 믿고 살아 오시였다.   우리 자식들은  한씨 가문의 친척이라고는 단 한분도 만나 본적이 없었다. 친척이라고는 외가집 밖에 없었다.  어머님도 형제분이 하나 밖에 없는 고로 외삼촌은 우리의 유일한 친척이였다.         어려서 학교에서 방과 하면 저도 몰래 다녀 오는 곳이 바로 외삼촌 집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몇번이고 외삼촌 집에 들려 온다. 그때는 외할아버님과 외할머님도 살아 계시였다. 남들에게는 익숙한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는 우리 형제들에게는 생소한 존재였다. 불러 본적도 없었다.         우리가 어릴때 아버님께서는 고향에 대하여 곧 잘 이야기 하시였다. 조선이 통일되면 우리를 데리고 고향에 간다고 늘쌍 말씀하였다.  아버님 형제는 8남매인데 막끝의 누이 동생이 일본에 시집갔다고 했다. 고모님의 이름은 한을남인데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에 사는 조선사람한테 시집갔다고 했다. 조선전쟁후 남과 북이 갈라져 있으니 고향소식은 물론이고  일본에 사는 누이 동생의 소식도 알바가 없었다.        1970년대 중기부터 남조선 소식이 조금씩 들려 왔다. 당시 메아리방송이라는 해외방송이 있었는데 정기적으로 리산가족찿기  방송을 하였다.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늘쌍 방송에 귀를 귀울리였다.  한국의 아무 아무개가 중국이나 사할린에도 살지도 모으는 자식을 찿는다 던지 중국에 사는 아무개가  한국에 사는 형제들을 찿는다는 방송을 종종 듣게 되였다.  40년째 고향과 아무 련락도 없었지만 아버님는 항상 고향을 잊지 않고 계시였다.  내가 지금도 노래하듯이  아버지 고향주소를 외우는것도 아버님의 당년의 교육과 갈라 놓을수 없다.         그러다가 둘째형님이 아버님의 지시대로 메아리 방송에 편지를 하게 되였다.  중국길림성 연길에 살고 있는 한아무개가 고국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형제 여러분을 찿는다는 내용이였다.       그뒤로 우리집에서는 메아리방송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게되였다. 얼마후 한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 사는 큰아버지께서 우리가 보낸 소식을 전해들었다는 내용이 메아리방송에서 나왔다는것이다. 그리고 고국에 계시는 친인들도 그동안 아버지를 애타게 찿았다는 소식이 무선전파를 타고 중국에 들어 온것이였다.        탈곡장에서 일하던중 아버님은 이 반가운 소식을 동네분들 한테서 전해 들었다. 그날 아버님은 그토록 기뻐 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보고 남조선의 친인들을 찿았다고 그들이 살아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아마 아버지의 인생에서 이날 같이 즐거운 날이 더 없었을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혈열단신으로 만주땅에 들어와 산전수전 다겪고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 다 참가하고 갈곳 없어 연변땅에 자리 잡고 처자를 거느리던 아버님이 아니였는가. 친인이 살아 계신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얼마나 즐거워 했는지 모른다. 저녁에는 힌술도   몇잔 마시였다. 오매불망 애타게 기다리던 고향소식에 아버님은 어린애 마냥 즐거워 하였다.         얼마후 남조선에서 혈육의정을 담은 편지가 날아 왔다. 큰아버님께서 친히 보낸 편지였다. 편지봉투에는 발신지를 대한민국이라고 밝히 였고 아버지이름자 밑에 귀하(贵下)라고 적어 놓았다. 주소도 아버님이 기억하신것과  거의 같았다. 다만 행정구역이 재획분으로 적으마한 변화가 있었을 뿐이였다.        "아우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네가 살아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만주땅에서  얼마나  고생 했느냐" 처음으로 온 편지는 편폭이 길지 않았지만 혈육의 정으로 가득차 넘치였다 . " 살아 생전에  꼭 상봉하길 바란다" 편지에는 또 녀동생이 일본에서 산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후일 내가 당년의 소중한 편지들을 따로 묶어 놓았다. 우리집의  력사기록물이였으니 말이다.       얼마후 일본 고모한테서도  편지가 왔다.  고모님이  조선글 야학교에서 배운 밑천을 발휘하여 한자 한자 또박 또박 쓴 편지였다.   "보고 싶은 오빠상전"    이렇게 시작을 뗀 고모의 편지에는 오빠를 애타게 찿던 누이동생의 절절한 감정으로 흘러 넘치였다. 그뒤로 우리집에는 거의 한달에 한번 꼴로 일본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매번 편지가 오면 나는 전화 있는 집에 가서  공장에 출근하던 누님한테 전화로 읽어 드리였다. 물론 일본에 보내는 편지는 기본상 누님과 내가 맡아했다.        고모님은 광복전 일본에 시집갔는데  자식을 1남5녀를 보았다고 했다. 일본에 가서도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태평양전쟁을 겪었고 미군의 점령시절도 보내였다고 했다. 여기 저기 피난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북해도에 정착하였는데  바찐꼬집을 차리고 지금까지 줄곳 북해도에 살고 있었다 했다.       고모님이 오빠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도 남달랐다. 매번 친필로 만장같은 편지를 보내여 왔다. 꼭 상봉라고 싶다고 하며 중국방문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때 총련조직에 있던 셋째사위가 고모님의 중국방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오빠와의 상봉을 실현하기 위하여 고모님께서는 많은 서류를 작성하였고 끝내 방문허가를 받았다.         3~4년간 얼마나 많은 편지가 오갔는지 모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랍누이 력사적 상봉은 1981년 7월 장춘공항에서 이루어 지였다. 중국말 한마디 못하는 고모님께서 아들 영채를 데리고 북해도에서 동경을 ,동경에서 북경을 ,또 북경에서 떠나 장춘에 도착하였다. 때를 마추어  아버님은  형님과 같이 장춘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40여년 만의 력사적 상봉 그러나 고모님께서는 근심스러운것도 있었다. 혹시 못 알아 보면 어떻게 하냐가 걱정되였던 것이다.  매사에 꼼꼼하신 고모님께서는 붉은 마후라를 목에 두루고 온다도 우리한테 편지를 보내왔다.         40여년만의 상봉은 그야말로 눈물이 없이는 볼수 없었다고 한다. 두분은 서로 부둥켜 안고 상봉의 기쁨에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고 했다. 왜 그렇지 않으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던 오빠와의 력사적 상봉이 아니였던가.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아무런 주저도 없이 크고 작은 보따리를 들고 중국에 달려왔을가!                    1993년 내가 일본방문때 고모님이 말씀하였다. "니기 아버지가 니기  형님 같이 나왔더라꼬 . 만나니 을남이냐고 말 하는데 나는 옛날 너 아버지 모습 찿지 몬했다. 서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가 내가 을남임니다하며 손을 잡았다. 금시 눈물이 앞을 가리였다.  너무 격동되여 부둥켜 안고 우는데 꿈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더라"       아버지와 형님은  고모일행을 모시고 연길로 내려 오시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장춘~연길은 특별렬차가 없어 온밤을 덜커덩거리는 기차를 타고 왔다.  사람이 너무도 많아  발딛을 자리 마저 없는 기차  땀내 지린내가 나는 기차를 타고 오시면서도 고모님께서는 아무 불편하다는 말씀없었다고 한다.        그날 우리집에서는 총동원하여 역에 마중나갔다. 그때만 해도  연길에 외국사람방문이 매우 적었다. 시정부 와사과에서는  모처럼 찦차를 내여 고모님을 우리집까지 모셔 주었다. 감사한 일이였다. 차에서 고모님이 형님보고 "차는 너 집에 거냐"고 묻더란다. 고모님께서는 우리집 실정에 대해 잘 모르시였다. 국정차이란  이처럼 큰것이였다.        때는 무더위로 가득한 7월달이였다. 비좁은 우리집에서 같이 자고 식사하면서도 고모님은 전혀 불편하다는 말씀 없었다. 일본땅에서 나고 자란 영채는  그당시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후일 내가 일본에 가서야 알았는데 중국방문전 고모님께서는 아들한테 단단히 교육하였다고했다. "불편한 사항이 있더라도 말하지 말아라. 참고 견디여라. 아니면 초면의 외삼촌 립장이 곤난하게 된다. "고모님의 우심 깊은 처사에 나는 다시 한번 탄복하고 말았다.        아버님과 고모님은 얼굴 모습이 많이 닮아 있다. 혈육은 속일수 없는가 보다. 허나 당시 우리집에 머물면서도 처음에는 고모님이 우리 아버지를 진짜 오빠인지  두루 걱정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물론 내가 일본에 갔을때 나보고 하는 말씀이였다. 그러다 어느날 고모님이 아버지 머리에난 흉터를 보아내고 진짜 내 오빠라고 단정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릴때 오랍누이가 장난라다가 낸 흉터자욱이라고 했다.       옛날  고향집에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 형제들 사이에만 간직하고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은 두분으로 하여금 다시 40여년전의  고향마을로 돌아가게 하였다. 아버님와 고모님사이에는 많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참으로 꿈같은 상봉의 한때였다.      고모님은 우리집에는  채색TV한대를 누나한테는 자전거를 형님한테는 사진기를 나한테는 록음기를 선물했다. 아버지한테는 프랑스나폴레옹 양주를 특별히 선물하였다. 그때 우리집에는 매일 손님으로 가득했다. 일본에서 손님이 왔다니 무슨경사가 난듯이 동네분들이 많이도 찿아 주었다. 그때마다 고모님은 이국땅에 사는 오빠한테 잘 해준 분들이라고 하며 오는 손님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를 드리였다.       사람마다 어느 한시기 혈육중의 그  누구와 닮는것 같다. 지금은 보면 누님이 당년의 고모모습과 흡사하다. 금년설 한국의 아버님 고향마을을 방문하기 전까지 나는 한씨네 혈육이라고는 고모님밖에 뵙지 못하였다. 형님과 누님들은 한국나들이 하면서 여러번 고향집에 다녀 왔었다. 사춘형님을 뵙는 순간 나는 우리 형님과 모습을 닮은데 놀라고 말았다. 실로 피는 속일수 없나 보다.        1993년 고모님의 요청으로 누님과 내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우리는 고모님한테 선물한다고 고사리며 버섯등속도 한박스 준비했다. 옛날 상해를 소개한 영화에서 여우목도리가 고급스레 보이길래 그것도 3000여원주고 사가지고 갔다.       우리는 북경에서 비행기편으로 동경에 도착했다 . 그때는 북경과 북해도 사이에 직항이 없던시절이 였다. 출국이라고 해야 조선에 가본것이 전부인 나에게는 설레이기도 한 려행길이였다.       동경 나리타공항에 내리니 북해도 사촌누님의 아들이 마중 나왔다.  우리말을 하도 잘하기에 어디서 배웠냐고 하니  조선학교에서 배웠고 지금은 조선대학 재학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호텔에서 하루밤 묶고 이튼날 북해도를 바라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시간 정도 지나서 북해도 지도세공항에 도착하였다. 중국에 다녀왔던 영채형님과  처음 뵙는 동경누님이 마중나왔다.         그때는 겨울이라 길에 눈이 많았다. 원래 북해도에 눈이 많이 내린다고 했다.  고모네는 바찐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 아래층은 영업방이고 웃층이 살림집이였는데 어림잡아도 1000평방이 넘을 같았다.    아래층 입구에서 고모님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너희들이 왔꼬나. 오느라 욕 봤다. 얼른 올라가자"     12년전에 중국에 왔을 때보다 조금 년로하여 보였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챙챙하였다.    거실 정면에는 외손자가 쓴"중국에서온  손님을 환영합니다"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고모님이 중국을 다녀간후로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를 여이였고 고모님은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다. 만일 당년에 고모님이 용단을 내리고 중국에 오지 않았다면  오랍누이 상봉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2006년 나는 다시  한번 고모를 만나려 일본에 다녀 왔다. 그번 걸음에 보니 고모님은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안타까운 심정이였다.      력사는 되돌아가지 못한다.  고모님께서는 자신의 행동으로 우리에게 혈육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었다.  하여 우리는 혈육의정이 무엇인가를 더 깊이 깨닳게 되였고 형제자매지간의 우정을 더욱 귀중하게 여기게 되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우리는 같은 피가 흐르는 혈육이기에 못 할 말이 없고 해결 못 할 일이 없다.   오늘 고모님을 그리는 글을 적으며 다시 한번  고모님께서 만수무강을 바란다.
82    광장무(广场舞) 댓글:  조회:1337  추천:0  2019-07-29
 광 장 무(广场舞)            지금  여느 도시라 할것없이 광장이 설치된 곳에서는  광장무 열성팬들을 만날수 있다.  규모가 좀 큰 광장에서는  여러 팀이 구역을 획분하여 동시에 춤을 추기도 한다.  저마끔 애용하는 곡과 춤사위도 다르다. 복장도 팀마다   다른데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색마다 선연하다.       곡이 울려 퍼지고 춤이 시작되면 진짜 가관이다.  각팀의 조직자들은 자기도 춤을 출라니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줄라니 정신이 없다. 더욱 희한한 것은 팀지간의 승벽내기 인데 음악소리는 겨루기 라도 하는 듯 점점 높아 진다.  여기서도" 쿵짜쿵짜" 저기서도"쿵쿵짜짜" 음악소리 귀청을 때린다.        광장무음악이 특정상 소리가 높고 률동성이 강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저 각팀들은 복장과 도구(道具) 의 선택에도 신경을 쓴다. 색상도 선명하고 짙은것일 수록 호평 받는다. 일전에 훈춘세기광장에 나가 보았는데 여러팀의 광장무  그리고 양걸이 거기다가 사교무까지 어울러져 진짜 광장은 가관을 이루었다.  광장무가 보급되려면" 장소,조직 ,팬 "삼여소가 구비  되여야 한다.          첫째로  광장무가 보급 될 수 있는 장소가 해결되여야 한다. 경제발전과 도시건설의 발걸음에  맞추어 전국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시대적 특색이 선명하고 지역문화특성이 잘 반영된 여러가지 광장을 건설하였다. 우리 연변으로 말하면 연길의 시대광장 도문의 두만강광장 돈화의 발해광장 훈춘의 세기광장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수 있다.  광장이 서니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행사가 열리게 되였다.  소위 말해 광장무가 보급 될 수 있는 장소가 해결을 본 셈이다.         둘째로 조직하는 부문이 있어야 한다. 광장무는 중국에서 만 볼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자료를 훝어 보면 광장무는 중국의 고대 제사문화에서 기원되였다는 설과 국외에서 류행되던 거리춤(街舞)에서 기원되였다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하지만 한10여년 까지만 하여도 지금 처럼 많는 사람들이 광장무에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하여야 자발적인  양걸이팀이나 소규모의 광장무팀들이 활약하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국가체육총국에서 앞장서서 동작을 규범화하고 편곡함에 따라  전국범위에서 재빨리 통일된 광장무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작은 사과»(小苹果)라는 광장무는 전국적인 대돌풍을 일으키였다. 내가 예컨대 단일한 춤 종목으로서 «작은사과»는 전국인민이 가장 많이 춘 춤이라고 생각한다. 장소가 해결되고 조직하는 부문이 있으니 광장무는  도약의 새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셋째로 열성팬이 있어야 한다. 광장무 열성팬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중로년의 부녀들이 주력군이다. 간혹 젊은 팬이나 나이 지긋한 분들도 참네 하지만 어디 까지나 적은 수자다. 광장무는45~65년령대가 주도 하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45_65년령대 부녀들이  주력인데는 세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  춤을 출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그들의 자식들은 대학을 입학했거나 이미 공작에 참가 했고 본인들은 대부분 정년퇴직을 앞두었거나 퇴직상태다. 하지만 젊은 축들은 자식들 뒤바라지를 하노라  시간적 여유가 없다.           둘.  이 녀령대의 부녀들은 표현욕구가 매우 강하지만 과거에는 마땅한 표현방식이 없었다. 요지음 젊은 녀자들은 현대무나 혹은 난이도가 강한 요가에 흥취가 있다. 그러니 45~65년령대 부녀들에게는 동작이 간결하고 곡조가 률동적이고 몸을 단련할수 있는 광장무가 자연히 첫번째로 가는 선택이 되였다.         셋.  가장 중요한 인소가  참여 의식이 강하고 조직규률성이 강하다. 전통교육을 받아온 이 세대들은 참여 의식 규률성이 강하고  헌신정신이 농후하며 교련을 존중한다. 광장무조직은 민간단체로서 기률을 자률에 맡기지만 규정된 시간만 되면 그네들은 달려 오고  조직을 위하여 무언가 분담하려고 노력한다.      장소가 해결되고 조직하는 부문이 있고 열성팬이 생기니 광장무보급의 "삼요소"가 다 구비되였다. 소위 호랑에게 날개를 달아 준 셈이다.         광장무를 단순한 업여체육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광장무는 집단정신 애국사상 교양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우리 단위에서 출근하다가 정년퇴직한 yy씨는 지금 강뚝에서 광장무를 배워 주고 있다. 그들 부부는 모두 광장무 열성팬이다. 새로운 춤이 나오면 보급에 힘 다 한다. 무슨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백여명이 되는 팀을 이끌고 광장무 보급에 너무도 헌신적이다. 결과적으로 백여명 시민의 신체건강과 정신건강 개선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계통에서는 8월달에 광장무시합을 조직한다. 요지음 각 부서에서 선발한 대원들은 중복 고열에도 땀을 흘려가며 교련의 지도하에 강도 높은 련습을 한다. 집단의 명예를 위하여서라면 그 어떤 고난도 동작이라도 배워 내고 숙달해내려는  의지를 잘 반영했다고 본다.       우리 나라 광장무는 외국에 가서도 선을 보였다. 유람길에 오른 우리 나라 부녀들은 모스크바에서도 파리에서도 광장무를 추며 휴식의 한때를 보내였다. 허나 음악소리가 너무  높아 주위사람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중국식 표현방식이 어느 나라에서나 다 통행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로서의 희열과 행복에 도취되여 있지만 다른 사람의 감수도 고려해야 함이 마땅하다. 호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사는 사회소구역에도 광장무가 있다. 여름이면 6시50분부터 7시50분까지 딱 한시간 동안 춤을 춘다. 교련선생님은 시간을 칼 같이 준수하는데 시간만 되면 음향설비를 들고 나온다. 새춤을 배워 줄 때면 앞에서서" 하나 둘 하나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매 한가지 동작을 배워 준다.  또 새춤에 비교적 숙달한 사람을 네면에 안배하여 춤추는 사람들이 여느 방향에서 든지다 볼수 있도록 하는 꼼꼼함도 보여 주었다.  덕분에 우리 동네 광장무팀은 춤동작이 일치하고 아릅답다.      광장무가 보급됨으로하여 사람들은 새로운 생활방식이 있게 되였고 신체를 단련할수 있는 새로운 도경이 있게 되였다.       광장무는 따로 시간을 팔지 않아도 되고 돈을 팔지 않고도 누구나 할수 있는 좋은 운동이다.   
81    대인관계 댓글:  조회:1198  추천:0  2019-07-24
 대 인 관 계        사람이 사노라면 여러사람과 교류해야 하고 어울려야 한다. 사람은 군체동물이라 혼자 사는 일이 외롭다. 사람은 태여나서부터 집단생활을 시작한다.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면서 삶을 살아 가는 것이다.        어려서는 유치원이라는 집단에서 선생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밥먹고 놀고 화장실 쓰는 법을 배운다.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까지는 기본상 학교측의 배치와 선생님의 구체적인 요구에 따라 공부라고 운동하고 사회활동에 참여 하게 된다. 학업이 위주인 이 시절에 다른 모든 사항은 공부에 길을 내 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중심이 돌출하고 목표가 뚜렷하다.        허나 사회에 나오는 순간부터 선택과 판단은 주로 자기로 해야하고 그 결과의 좋고 나쁨도 스스로 감당해내야 한다. 비록 이 시절에도 조직적인 관리와 교육이 뒤 따르지만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 모든 것을 자기로 판단하고 선택 해야 한다. 인생이란 판단문제고 선택문제다.       학교시절 동창사이 별 다른 모순과 경쟁이 없다. 모두들 사상이 비교적 단순하고 리해관계가 적다. 그러다가 사회에 진출하면 여러가지 구체적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뭉치려는 단합심과 깨뜨리려는 분렬심이 항상 충돌하게 된다. 누구는 사람들을 이끌어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내밀고 가는 반면 또 누구는 소집단을 만들고 시비를 걸고 자기를 내세우려 하고 있다.          친구의 딸애는  yy대학 조문전업을 나와 xx출판사에 취직하였다. 원래 인사성이 바르고 부지런한 품성이라 초기에 같은 부서의 선배직원들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되였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같은 부서에 사업하는 사람들의 시기를 받기 시작했다. 무슨 일에나 장애를 만들어 놓고 시비를 걸어 온다. 같이 직장에 들어온 어린 동무들은 살얼음을 건너듯 매사에 조심스럽다. 왜 그러냐 분석하여 보니 자기들의 일감을 빼앗는다고 그러는 같단다. 모든 일에 속도가 빠르고 에너지가 넘쳐나는 청년들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던것이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보호하고 두둔해주려 하지 않는다. 아마 어린 직원들 때문에 자기들사이 관계가 나빠질가 고려하는 같았단다. 결국 친구의 딸은 회사를 때려 치우고 일본에 갔다.          기관에는 젊은 사람도 있고 중년배도 있고 나이가 이슥한  분들도 있다. 매개 년령층의 흥분점은 다르다. 한개 처실(处室)의 직원들은 많으면 10명 적으면 5명정도 배정되여 있다.  젊은 축들은 경력 쌓기에 힘쓰고 중년배들은 령도강위에 눈독 들이고 년령이 많은 사람들은 비령도강위에 관심이 있다.         령도 자리라 든지 비령도 자리가 날 때면 난리다. 전화 오는 사람 집적 찿아 오는 사람 누구한테 부탁하여 말을 건네 오는 사람 그때는 모두가 상냥하고 공손하기 그지 없다. 한번은 모르는 전화가 끊임없이 들어 온다. 나는 원체 전화번호를 많이 저장하였기에 원만한 사이면 다 이름이 떠 있게 되여 있다. 결국 이튿날 친구를 통하여 소식을 전해 왔다. 자기 한테 한표 부탁한다는 것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일을 부탁할 때는 너무도 겸손하다. 하지만 일만 끝나면 언제 그랫냐 싶이 180도로 변해버린다. 너무도 뻐뻔스럽다. 그들은 모든 것은 자기 리익으로 부터 출발한다. 결국 그네들은 대인관계의 출발점은 리익이다. 약자에게는 사납게 나오고 강자한테는 비굴하다. 전형적인 노예성품이다.         오래 전에 « 두터운것과 검은것»(厚与黑)이라는 처세출에 관한 책을 접하게 되였다. 몇천년을 내려 오면서 우리 조상님들이 총화하여 낸 권세에 아부하고 아래사람에게 채찍질하는 방법을 담은 책이였다. 책을 보는 내내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우리에게는 빛나는 력사와 문화도 있지만 이처럼 적아라하고 어두운 내면도 있었다. 중국말에 "남을 해칠 마음은 없어야 지만  남을 방비할 마음이 없어선 안된다"(害人之心不可有,防人之心不可无)라고 말했다. 자기를 방비하는 각도에서  이런 책을 한번쯤 번져보는것도 좋을것이다.          사람은 밝아야 한다. 일에 맞대우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헌신할 줄 알아야 한다. 음침한 사람은 병에 걸리기 쉽다 . 맨날 허구한 날에 다른 사람을 헐 뜯고 사람과 사람을 비교해가며 자기 내속을 채우려는 사람은 심리가 삐뚫어진 사람이다. 결국에는 자기를 해친다. 밝은 곳에 있는 사람은 혹시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사람의 공격 목표가 될수 있다. 그래도 나는 밝게 살것을 제창한다. "사심이 없으면 천하가 넓다네"(心底无私天地宽)낮가죽이 아무리 투텁고 량심이 고약한 자라도 결국에는 마음이 넓고 밝으며 정의로운 인간앞에 꿇어 앉게 되여 있다.       사람은 밝아야 한다. 100살도 못사는 인생 암니옴니 타투고 시기하고 헐뜯고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태양이 떠오르면 어두움이 가신다. 임투할 시간이 있으면 운동이라도 하겠다.
80    자전거길 댓글:  조회:1306  추천:0  2019-07-23
자 전 거 길           자전거를 탈려면 자전거 길이 있어야  한다. 전에는 길에 기동차가 적고 자전거가 많았다. 출퇴근을 기본상 자전거로 해결하였다. 그때 뉴스를 보면 천안문앞 장안거리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마치 지금 동남아 나라에 가면 오토바이가  바글거리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때  향항 영화에서 나오는 자동차행렬을  보면서 나는  감탄했다. 언제면 우리도 저렇게 차를 타고 다닐까.         이제 자동차로 두다리를 대신하는 세월이 왔다.  연길에도  차가 밀리는 현상이 비일재일  발생한다.  6~7년전 까지만 해도 연길에는 차밀리는 현상이 기본상 없었다. 그때 한국에서 온 한사장이 말했다. "얼마 안지나면 연길에도 길이 막힐거요"지금 그것이 현실화 되였다. 길에 나서면 자동차 복새판 이다. 원만하면 차를 끌고 다니고 싶지 않다. 주차하기도 힘들다. 한번은 한성호텔에 가게되였는데 주차자리를 찿지못하여 그주위를 두바퀴 돌다가 결국은 연길백화지하 주차장에 내려가고 말았다.            지금 대도시에서는 자전거 대여가 류행이다. 환경오염도 줄이고 신체단련도 하고 알먹고 꿩먹기다. 몇해전에 광주와 심천에 놀러간적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간단한 조작을 하니 자전거를 빌릴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자전거를 타고 광주시내를 마음껏 돌아 다니였다. 어디를 가야 한다는 목표도 없다. 달리는 대로 가다가 힘겨우면 쉬고 구경하다가 전자지도를 리용하여 돌아 왔다. 지금은 참 편리한 세월이다. 외지(外地)가 외지 같지 않게  친숙하게 여겨진다.            광주는 자전거길이 잘되여 있었다. 연길에서 기동차선옆에 자전거길을 안배한것과는 달리 광주에서는 기본상 인행도로 옆에 자전거길을 배치했다. 그러니 기동차와 마찰될 위험이 적어진 것이다. 몇해전에 우리 이도백하진에 가보았는데 이건 완전히 자전거 전용도로가 설치되여 있었다.  길 건널목에는 자전거용 다리까지 걸려 있었다. 자전거 전용길의 건설은 자전거를 보다 편리하고 안전하게 리용할수 있는 보장이 된다. 자연히 자전거리용률도 높아지게 될것이다.          심천에 사는 동창의 집을 방문하고 호텔로 돌아 오는 길에 우리는 자전거를 리용하였다. 음역설 기간이라 도시에는 차량이 적었다. 남의 동네건만 우리는 마음껏 베달을 밟으며 시내를 꿰뚫으며  한시간 만에 호텔로 돌아 왔다. 자전거타고 하는 시내돌이는 너무도 즐겁다. 지하철을 타면 편리하지만 지리감이 없다. 뻐스를 타면 구경은 좋으나 도시와의 친밀한 접촉이 없다. 와중에 자전거 만이 랑만과 희열과 힘으로 가득찬 시내돌이 수단으로 된다.          우리 연길에는 기동차가 13만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50만명의 인구밖에 안되는 중소도시로 말하면 대단히 높은 비률이다. 자가용을 두대씩 가지고 있는 집도 적지 않다. 도시의 교통혼잡을 방지하고 환경오염을 줄이고 에너지를 절약하고 건강한 생활을 권장하는 각도에서 정부는 자전거타기를 제창해야 한다고 본다.          연길은 시내구역이 크지 않다. 웬만한 거리는 걷고 먼거리는 차를 리용하고 중간거리는 자전거로 교통문제를 해결하면 많은 교통체증을 해결할수 있다. 우선 자전거 전용도로를 확보해야 한다. 요지음 차량의 증가로하여 자전거를 탈려면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 많다. 하여 전용도로를 내여 안전도 보장하고 교통도 규범화시킬수 있다.         두번째로 큰 도시에서 다 그렇게 하듯이 자전거대여 회사를 인입해야 한다. 집집이 다 자전거를 마련하려면 경제적 부담도 되거니와 보관 주차등 방면에 문제가 생긴다. 대여 자전거를 리용하면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대로 세워두면 ok다. 돌아 올때는 다른 교통수단의 리용도 가능하니 선택의 여지가 많게 된다.          셋째로 자전거 문화를 보급시키여여 한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데려다 주는 자전거 얼마나 친밀한 벗인가. 토요일 아침 멜가방에 광천수 한병에 약간의 간식을 챙겨 넣고 교외로 떠나 보자. 코노래도 흥얼거리며 도심을 지나 논밭이 아득히 펼쳐진 벌도 지나고 개울물도 넘으며 산길도 달려보시라. 얼마나 즐거운 려행인가.         자전거사용자가 가장 많은 나라들로는 북구라파지역 나라들이다. 여러분들이 아시다 싶이 그 지역은 경제가 발달하고 수입이 높다. 허지만 그들은 자전거를 즐겨 사용한다. 건강한 생할의 표현이다. 우리에게도 자전거는 더는 빈곤의 상징이 아니라 새문화와 건강한 생활의 표현으로 되여야 한다.      자전거길이 즐겁고 행복한 길로 되기를 바란다.
79    옥수수 농사 댓글:  조회:1154  추천:0  2019-07-23
 옥수수 농사         터밭 찰옥수수 농사경력 10여년에 금년 처음으로 황당한 일에 봉착하게 되였다. 주로 세가지 문제였다. 하나하나 렬거해보기로 하자.          첫째로 발아률이 왕년에 비하여 현저히 낮았다.  봄에 너무 가물어서 씨앗이 뒤늦게 올라 왔다. 하여 밭에 잡풀이 파랗게  뒤덮혀도  기음을 매여 줄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였다. 기음을 맨다는것이 씨앗까지 매여 버릴가 근심 되였기 때문이다. 안 나오면 어쩌랴 싶었는데 뒤 늦게 나마 묘가 파릇파릇하게 올라 오니  한시름 놓게 되였다. 헌데 발아률이 낮다. 대략 70%가 조금 넘을가 싶은 발아률이다. 날씨가 너무 가물어 그렇겠다 판단 되여 좀 두고 보기로 하였지만 5월말이 다 되여도 그 새가 장새다.  하여 빈자리에 씨앗을 새로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연길 4~5월의 강우량이 왕년에 비하여 적었다.           둘째로 처음 보는 대면적의 옥수수 분얼현상이다. 분명히 옥수수 종자를  한알씩 넣었는데 이상하게 여러대가 나왔다. 하지만 자람새가 왕성하다. 벼가 분얼되는것은 자연현상이고 벼수확량에도 도움이 되지만 옥수수가 새끼치기를 하면 농사는 끝이다. 얻어 먹을 것이 없다. 하여 온밭을 관찰하여 가며 자람새가 제일 좋은 한대만 남겨 놓고 곁가지는 모조리 뜯어 버리였다. 이것도 큰 역사였다. 다른집의 옥수수밭을 관찰하여 보았지만 이런 현상이 없었다. 하여 안해한테 나쁜종자를 사왔다고 꾸지람을 듣게 되였다. 하긴 여하여하한 종자를 구입하라는 지시를 어긋내고 내 마음대로 종자를 사왔으니 말을 들어도 방법없었다. 촌에서 본격적으로 옥수수 농사를 짓는 친구가 나에게 하는 말이 "상점에는 여러가지 종자를 팔지만 가격과 종자는 관계없다.  거기서 거기야. 포장이 다를뿐이다"라는 말이였다. 헌데 이런 결과를 초래했으니 할말이 없다.          셋째로 옥수수 이삭 개수가 사람을 놀라게 한다. 곁가지를 다 처리하고 한시름 놓았다 했더니 또다른 변이현상을 맞이했다. 정상적인 경우에는  기껏하여야 옥수수 한대에  두개정도 이삭이 나온다. 그것도 두번째 이삭은 반에 미칠 정도로 작고  부실하다. 헌데 금년에는 5개의 이삭이 나온 옥수수가 너무도 많다. 새잎사귀 마다 한개 정도 나와있다. 이것 또한 처음 보는 풍경이다. 이렇게 자라면 아무것도 얻을게 없다. 이건 또 무슨 원인일가. 그러던차 친구의 집을 방문하게 되였다. 친구의 옥수수밭을 보니 아주 정상적이다. 분얼현상도 없고 이삭이 많이 달린 현상도 없다. 같은 종자 같은 날에 같은 기계로 심었으니 문제는 필경 밭에 있었다.         금년봄에 친구가 말했다.  "돼지똥 비료를 밭에 내줄게" 며칠 안되여 진짜로 두트럭 가득 싣고 왔다. 일단은 기계로 고루 펴고 또 밭을 갈아 번지였다. 이렇게 금년 시비(施肥)는 아주 원만히 해결하였다. 헌데 손바닥만한 밭에 두트럭이나  퇴비를 내였으니 땅기운이 너무 세진것이다. 사람으로 말하면 영양과응 현상이 발생한것이다.찾아야 했다. 百度를 이리 번지고 저리 번지고 하니 답이 나왔다. 옥수수 성장과정에거 대량의 수분과 비료를 수요하지만 과분하면 결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타낸다.  사람들은 흔히 비료를 많이 주면 옥수수의 생장을 촉진하여 크고 굵은 옥수수 이삭을 거둘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료를 너무 많이 주면 음식을 과다 섭취하면 사람이 신체가 불편하듯이 과잉반응을 나타낸다.  옥수수는 너무 많은 영양분을 섭취할수 없어 분얼이 생기고 이삭개수가 많아지게 된다. 아주 정확한 해석이였다.           해결방법은 오직 하나다. 한대에 옥수수 두 이삭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조리 뜯어 버리는 작업이다. 하여 일요일날 나는 마반산에 내려 가서 옥수수이삭 제거 작업을 벌리였다. 요지음 옥수수 홰초리도 이미 나와 있다. 키도 하루 멀다하게 쭉쭉 커져가고 있다.  머리에 모자를 썻지만 옥수수화분이 얼굴에  우수수 떨어 진다.     일하는 내내 나는 사색에 잠기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과거 한가정 한명 어린이정책으로 하여 집집의 어린이는 황제로 탈 바꿈하였다. 손을 내밀기도 전에 부모들은 무어든지 마련해 주고 해결해 준다. 사랑과 관심이 넘쳐난 결과 아이들은 사심이 많고 난관을 이겨내는 정신이 빈약하고 협력심이 부족하다. 곧게 자라야할 나무가 삐뚤어지는 판국이다.       어떻게 할가?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과분한 사랑을 근절하고 신체단련에 엄격히 요구하고 자립정신 협력심배양에 힘을 넣어야 한다. 죽은 글은 사람을 해친다. 충성심이 없는 능력은 한푼어치도 못간다.     오늘은  옥수수 농사를 하면서 자식농사도 검토해보는 시간이였다.
78    무리 댓글:  조회:953  추천:0  2019-07-17
 무 리        중국말 속담에는 "인이군분물이류거"(人以群分,物以类聚)라는  말이있다. 이말은 «전국책. 제책삼»(《战国策·齐策三》)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책은 서한말기 류향(刘向)이 편집한것이다. 이말은 같은 류형의 사람들이 경상적으로 같이 모이게 되고  마음이 맞고 길이 같은 사람들끼리 무리를 짓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갈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친구가 될려면 조건이 맞아야 하고 뜻이 같이 해야한다는 뜻이다.        평소에 도시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바로"도시를 떠나서 한적한 곳에 살고 싶다"는 말이다. 허나 정작 시골에 가면 며칠 못있고 도시로 되 돌아 온다.  그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시골의 적막함을 받아 들이지 못한 것이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그리워서다. 자기만 떨어져 외톨이로 살기 멋적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자기의 무리를 찿아 돌아 간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다시 돌아 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재직에 있을 때 사람들은 언제면 퇴직하겠는가 고대한다. 허나 퇴직하고 나면 재직시절을 그리워 한다. 이일은  원상복귀 할수 없다. 그러니 새로운 조직에 가입하여야 되고 새로운 지기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못 할 경우 사람이 외기러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원래 방식으로 못 돌아 가는바 하고는 힘 들더라도 빨리빨리 새로운 무리를 찿아 가는 것이 상책이다.          중국말 성어에 "군책군력"(群策群力)이란 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 무리"라고 하면 무슨 "소무리, 양무리, 승양이무리"쯤으로 생각하지만 무리란 나쁜 말이 아니다. "군책군력"이란 사람들이 모여서 책략을 내오고  집단의 힘에 의거한다는 말이다. 무리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준말이다. 요지음 우리나라 발전은 내수(内需)에 힘을 업고 있다. 내수의 주요 동력이 인간이다. 사람이 많으니 일할수 있는 청장년의 수도 많고 소비에 대한 수요도 많다. 즉 인간 홍리(红利)라는것 이다. 무리를 지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특히 초식동물의 경우에는 무리쳐 살아야 생존률이 높을 수 있다. 무리를 지어야  외세의 침략에 맞서 대항 할수 있고  종(种)을  잇어나가는데 유리하다. 잡식동물인 인간도 무리쳐 사는 본성이 있다.         70년대 말쯤  사회에는 "무리싸움"이라는 것이 많았다. 억눌리였던 사람들의 욕망이 어느 정도 풀리면서 나타나는 자아(自我)표현방식의 일종이라 하겠다.  아래동네하고 웃동네 젊은이들 지간의 싸움이다. 지금 보면 별일도 아닌 것을 자존심 때문에 벌리는 기싸움이였다. 한번은 xx마을 젊은이들이 자작파이프총을 괴춤에 찌으고  전투 하려yy마을로 떠났다. 무리싸움은 보통 저녁에 하는 일이 많다. 서로 편을 가르기 위해서는 목에 흰수건을 두른다 던가 아니면 모자를 꺼꾸로 쓴다 던가 방법이 많다.  겨울밤이고 춥고하니 모두들 산골짜기에 모여 들어  휴심겸 담배쉼을 하였다. 담배 안 피우는한 친구는 열심히 파이프총에 화약을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화약이 열을 받아폭발하였다. 총대에서  무철이  쏟아져 나오고 화염이 뿜기였다. 결국 싸움하기 앞서 부상병이 생겨나 그날 전투는 미리 철거 되였다.           호랑이나 북극곰 같은 왕들은 무리지어 활동하지 않는다. 먹이 사슬이 보여 주다 싶이 말이나 소 양같은 초식동물은 하위권에 속하고 승냥이나 호랑이 사자같은 동물은 육식동물은 상위권에 속한다. 하나님의 안배로 육식동물의 마리수는 초식동물에 비하여 현저히 적다. 우선 초식동물을 먹이로 해야하기에 마리수가 적을수 밖에 없다. 호랑이나 북극곰의 경우 더욱 적다. 호랑이나 북극곰같은 경우는 기껏하여야 자기 새끼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정도다.  그들은 무리를 짓어다니지 않지만 살상력은 대단하다. 자기를 먹여 살리고 외세의 침입을 막을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경우도 비슷하다.  임금이나 왕  장군같이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리 짓지 않는다. 그래도 천군만마를 지휘하고 천하를 호령하고 만민을 먹여 살군다.         중국말 성어에는 또 "군룡무수"(群龙无首)라는 말이 있다.  “군룡무수”라는 말의 뜻은 한무리의 룡이 모여 있는데 거기에 두령이 없다는  말이다. 뜻인즉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두령이 없으면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고 큰일을 이루어 낼수 없다는 말이다.  룡도 이러할진대 인간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어느 무리라도 두령이 필요하다. 두령자격이 없으면 자리를 내야하고 새두령을 세워야 한다. 동물세게 에서 두령의 산생과 토태과정은 매우 철저히 자연의 우생열태( 优生劣汰)규칙을 따른다. 야생말(野生马)의 경우에는 가장 힘있고 멋진 수말이 두령의 위치에 있다. 교배권도 자기가 우선이다. 허나 나이 먹고 힘이 빠지면 젊은 말의 도전을 맞이 해야 한다. 결렬한 싸움끝에 도전애서 실패하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고 쓸쓸히 혼자 살아야 한다. 비록 비참하한 과정이지만 종(种)의 번식을 위하여서는 필요하고 유일한 선택이다.          뜻이 같은 사람끼리 무리 짓고 또 같이 책략을 꾸미고 거기다가 좋은 두령까지 내 세운다면 세상에 당할자 그 누구있겠는가. 요지음 단체정신(团队精神)을 부르짓는 그원인이 바로 뭉쳐서 힘을 키우고 다같이 모략을 도모하고 령수의 가르킴 따라 앞으로 나가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고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다.  
77    큰형님 댓글:  조회:1284  추천:0  2019-07-16
 큰 형 님           오늘 우리는 뜻밖에 매부와 누님이 청도에 계시는 큰형님 보려 간다는 소식을 접했다. 매부는 한국에서 들어오자 바로 누님을 배동하여 형님집 방문길에 오른 것이다.  이윽하여 누님이 오늘은 형님의 생일이라며 위챗에 축하 메시지를 올리였다. 오 오늘이 형님생일이였구나. 오늘은 원래 형님의 74주세 생일날이였던 것이다. 매부와 누님이 큰형님 생일 축하려 직접 청도로 간것이였다.         나는 어려서 큰형님을 흑룡강형님이라고 불렀다.왜냐하면 큰 형님은 흑룡강성목단강시 목릉현에서 살았으니 말이다. 형님이란 우리와 아주 가까우면서도 또 머나먼 존재였다. 우리와 친형제인데  흑룡강성에 살고 있었고 자주 만날수도 이야기 할수도 없었다.          형님은 현농업기술보급소에서 사업하였다. 내가 셈이 들어서 형님이 처음으로 우리 집에 오신 때는 아마 20세기  70년대 초 였다. 형님은 그 당시 사업차로 해남도 출장이 잦은 편이였는데  해남도에 가서 벼종자 실험을 한다고 했다. 그때도 역시 출장길에 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연길에 석유곤로가 갓 류행될쯤 이였다.        형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불의 크기를 조절하고 또 어떻게 청결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형님은 전기 목수 악기등 분야에 많은 흥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재간 많은 형님이 계시는 것으로 하여 우리는 늘 자랑스러웠다.       당시 여느 집도 다 그렇게 했다 싶이 우리 집에도 벽에 사진틀이  걸려 있었다. 그중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들의 사진도 어울려 있었다. 그당시 사진이라도 많은 집은 역시 생활이 좋은 집 들이였다. 지금 보면 역시 자랑 항목에 속했다.         우리집 사진틀에는 외태머리를 한 젊은 녀자의 큰 사진이  들어 있었다. 우리집 방문하는 사람들중 많은 사람들이 물어 본다.   "이사람은 뉘시오?" 사진속의 주인공은 사람들의 관심을 가질 만한 이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분이 바로 나의 큰형수님이 였다. 환한 얼굴 두리두리한 쌍겹눈 그리고 새하얀 이빨을  소유한 미인이였다.      내가 어려서 어머니는 단 한번 큰형님집으로 다녀왔다. 그때 언제면 어머니가 집에 돌아 오나 하고 많이 기다리였다. 날자를 맞춰 역에 나가니 평소 보다 곱게 차려 입고 까만 구두까지 신으신 어머님께서 기차에서 내리시였다. 내가 셈이 들어서는 처음 나들이 하신것이다. 어머님이 1985년도에 돌아 갔으니 그 뒤로는 다시 큰 아들집에 가보지 못했다.      1976년 좌우에 큰형님이 일가족을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왔다. 우리집에 한꺼번에 5명의 식구가 불어난것이다. 처음 보는 형수님 그리고 귀여운 조카들이다. 큰조카는 나와 동갑인 송죽이고 그 밑으로 성남이와 성만이 세명의 형제들이였다.  형님은 성격이 매우 활달 하였는데 웃으개도 잘 하였다. 그때 집집마다 정주칸 벽면에  아래와 같은 통지을 붙혀 놓았다. "오는 손님은 량표와 돈을 결산하고 가시오"       이런 통지를 보던 형님은 하하 웃으시며 " 저것을 떼여 놓았다가 우리가 돌아간 다음 붙혀 놓으라"고 하였다. 우리 연변에서 쌀이 귀할때 흑룡강에서는 쌀 고생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소영에서는" 베쮼의사"라는 영화를 방영하였다. 영화보려간 우리일행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뉘집 자식들인가고 물어 보았다. 나는 자랑스럽게 나의 조카들이라고 말했다. 하긴 외가집 밖에 모르던 나에게 불씨로 이처럼 많은 친척이 생긴것이다.         1982년 나는 난생처음으로 큰형님집을  바라고 길을 떠났다. 목릉현 팔면통진 보흥촌으로 떠나간 것이다. 그때 내 나이가 18세였다. 우리집에서는 자식이 18세가 되면 팔면통에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팔면통에 갈려면 우선 계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도문에 도착한 다음 목도(牡图)선으로 갈아 타야 한다. 목단강역에 도착하면 또 동방홍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바꾸어 타야 하는데 한족말이 약한데다가 기차까지 두번 갈아 타야하는 로정이니  근심이 태산 같았다.         그때는 여름 방학이였다.  어렵게  팔면통역에 도착하여   홈에 나오니 먼발치에서 형님의 모습이 안겨온다. 얼마나 반갑던지.  형님은 호탕하게 웃으시며 "동생이 왔구나"라고 반긴다. 형님이 집적 오터바이를 타고 역전에 마중 나온 것이였다.          기차가 연착이 되여 원래 어제 밤에 도착하기로 했던 기차가 오늘 정심때에야 도착했던 것이다. 그당시 아무런 련락도 없이 하루를 기다려야 하는 형님의 마음이야 오죽 조급했으랴. 집에 도착하니 형수가 손방아로 찰입쌀가루를 낸다. 내가 왔다고 찹쌀가루 떡을 굽는단다. 그때 형수님 나이를 따져야 40살이 안되였다.        1983년 여름방학에 나는 또 다시 형님집을 다녀 왔다. 도착하던 그날이 바로 형님의 38세 생일날 이였다. 그날 형님집에는 계서(鸡西)에서 올라온 처가편 친척들이 많이 와 있었다. 그들은 내가 형님생일을  때문에 찿아 온 줄로 알고 형제우정이 깊다며 극찬하였다. 그날이 바로 36년전의 오늘이였다.   그날 형님은 작은 동생이 연길에서 왔다면서 대단히 즐거워 하시였다.         그뒤로 나는 다시 보흥촌에 가보지 못했다. 1995년 년말쯤 둘째조카 성남의 결혼식에 참가하려 목릉에 갔는데 그때 형님네는 이미 팔면통진에 이사해 살고 있었다. 앞마당에는 작으마한 채전이 있었는데 역시 농업기술 전문가답게 과일나무 몇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뒤 형님은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상하였다. 원래 튼튼하던 신체는 수술뒤로 몹시 쇠약해지였다.  기가 빠진 것이다.         두명의 아들은 일자리를 찿아 먼저 청도로 갔다.  그뒤 형님도 집을 정리하고 자식들을 따라 청도로 갔다.  한뉘 살아 오던 팔면통을 떠나 올때 형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는 말하지 않아도 알것 같다. 허나 어찌하랴. 자식들은 먹고 살아야하고 부모님들은 또 마지막 보탬을 해주려고 하니 말이다.          2009년 겨울 나는 사업차로 상해갔다 돌아 오는 길에 청도에 들리였다. 큰형님과 형수님을 만나 보고 싶었기 때문이였다. 청도에 있는 김사장이 차로 나를 형님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어렵게 집을 찿아 갔는데 큰형님을 뵙는 순간 나는 마음이 알알해났다.          과거의 힘으로 차 넘치던 풍채는 어느새 점차 사라지였다.  원래 넓던 어깨는 좁게 보였고 가슴도 엷어 지고  허리도 살짝 휘였다. 허나 호탕한 목소리만은 변하지 않았다.  "아. 동생이 왔구나"          그때 형수님은 중풍후유증으로 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원체 체구가 큰 형수님이였기에 운신하기가 몹시 힘들어 했다. 그뒤 2년후 나는 또 한번 청도를 찿았다. 형님 본인도  년세가 있는데 형수님 시중을 들려니 몸이 많이 수척해 보였다.          아. 사람이란 이런 것이 구나. 젊어서 날아 다니며 축구를 하고 크라네트 독주를 하던 큰형님이 년세에  걸맞지 않게  먼저 로문한 것이다. 형수님은 14살 어린 나이에 공소합작사로 출근하였다고 했다. 그뒤 형님을 만나 20살에 결혼하고 남편의 뒤바라지도 해주고 아이 3명을 자래웠다. 어러가지 곤난을 다 이기여 내고 자식들 결혼까지 시켜놓으니 당신들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였다. 참으로 한탄할 일이다.         몇해전 형수님은  먼저 돌아가시였다. 그뒤로 형님은  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면 안된다고 하였다. 금년 설에 전화로 설문안을 올리니 그렇게 반가워 하시였다. "신체는 건강하냐. 공작은 잘하냐. 아들은 지금 뭘하냐" 모든것이 궁금한 큰형님이였다.          오늘 큰형님의 생일을 축하하려 청도로 간 매부와 누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누님이 일깨워 주었기에 형님의 생일인것을 알았고 또한 큰형님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였다.   큰형님 부디 건강하시소.
76    두부 댓글:  조회:2919  추천:0  2019-07-12
 두부        남자들은 대부분 두부를 즐긴다. 모두부도 좋고 초두부도 좋다.  나는 두부만 있으면 다른 반찬을 별로 먹지 않는다.따끈따끈한 모두부에 양념간장을 한숱가락 언져 먹으면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있을수 없다.매끌매끌한 두부가 목으로 넘어가는 그 느낌 게다가 살짝 그을림 냄새가 나는 초물은 두부와 찰떡궁합이다.시장에서 파는 두부는 모를 크게 보일려 하다 보니 너무도 물렁거린다.      모두부를 맛있게 먹을 려면 좋은 고추가루를 써야 한다.과거 나의 처남되는분은 모두부를 먹을 때면 두부우에 고추가루를 한숱가락씩이나 언져놓는다.거기에 파를 썰어 넣은 미소간장을 곁들어 먹는다. 처남은 맵다고 훌훌하면서도 두부를 잘도 잡수었다.보는 사람도  같이 식욕이 당기고  같이 이마에서 땀이 돋아 난다.       기계로 가루낸 고추가루는 모두부를 먹는데는 맞지 않다.왜냐하면 기계로 가루을 낼때 고추가 열을 받아 익기에 고추의 특유의 향이 줄어든다.하기에 절구에 찌어 가루  내면 좋다.제일 맛있게 두부를 먹으려면 손으로 비빈 고추가루를 쓰는 것이 다. 처마밑에 걸어 놓은 빨간고추 다래에서 고추 몇개를 따다가  불에 살짝 구운 다음 손바닥으로 비벼서가루를 낸다. 고추가루에는  노란 고추씨도 섞겨 있다.이런 고추가루를 모두부위에 언져 놓고 후후 불어가며 떠 먹노라면 진짜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          뚝배기에  된장과 두부를 넣고 파와 풋고추를  썰어 넣으면 맛있는 두부장국이 된다.거기에 돼지고기를 썩둑썩둑 썰어 넣고 내기풀을 넣으면 맛이 더구나 구수하다. 두부는 특성상 자기의 맛이 강하지 않다.어느 재료와 배합되냐에 따라 부동한 맛을 낸다.       내가 어릴때 외할아버지는 맨두부를 잡숫는 법이 없다. 꼭 화로불에 쟁개비를 올리고 기름에 양파를 볶다가 모두부를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다음 보글보글 끓이면서  드신다.나도 옆에 앉아 먹어 보았는데 맛이 별미다. 국물은 전골국과 비슷하게  좀 짜면서도 감미로운 맛이다.지금 말로는 장문(酱焖 )두부인데 왕청배초구 장문두부는 많은 사람들이 찿는 인기 료리에 속한다.         이전 촌에서 살때는 집에서 두부를 자주 하였다.나는 어머니와 같이 매돌을 돌려 콩을 갈고 부엌에 불을 지펴비지를 끓이였다.끓인 비지는 바가지로 떠서 천으로 만든 자루에 부어 넣는다.다음  가마뚜껑을 번져서 가마우에 올려 놓고 자루를 쿡쿡 찔러주기도 하고 비틀어주기도 하면서 콩물을 짜낸다. 콩물을 받아내기 위한 작업인데 힘이 드는 체력로동이다. 다시 비지자루에 맹물을 부어놓고  주물럭거리기를 반복하면서 콩물을 받아 낸다.       콩물은 그대로 마셔도 된다.전에는 집에서 두부를 해야 콩물맛을 볼수있었다. 받아낸 콩물은 큰가마에 부어 넣고 슬슬 끓여 준다.화부 역시 기술이 있어야 한다.불이 너무세면 콩물이 넘쳐나고 가마에 눌러 붙게 된다. 이때쯤이면 어머니는 바가지에 서시덩어리를 받아가지고 뜨신물에 용해시킨다. 다음 사발에 콩물을 붓고 거기에 서시물을 탄다.숱가락으로 서시를 조금씩 떠 넣으면서 두부발이 서는것을 관찰한다. 성공이다 싶으면 서시를 큰가마에 타면서 두부발이 서기를 기다린다. 이때역시 기술이 필요한데 두부발이 서지 않는다고 서시를 너무 많이 넣으면 두부가 쓰다.나무주걱으로 한방향으로 서서히  돌려가면서 두부발이 서기를 관찰해야한다.           다음 큰함지에 천을 펴고 초두부를 붓어준다.다음 천으로  초두부를 잘 싸매주고 그위에 널판자를 펴고 매돌을 올려 놓는다.이로써 두부 생산과정이 대부분 끝났다. 나머지 과정으로는 칼로 두부를 베는 일 뿐이다.매번 집에서 두부를 하면 어머니는 두부판대기 가운데 가장 반듯한 두부를 떠서 아버지에께 대접하였다.        어릴때 명절이나 생일 군일이 있을 때면 의레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지금 식당에가면  두부전 녹두전등 음식이 잘 나온다. 전에 촌에서는 잔치집에서도  두부전 녹두전같은 음식을 많이 만들었다.두부전 녹두전은 다시 덥히지 않아도 먹을수 있고 쉽게 상하지도 않는 특점이 있다. 랭장고가 없던 그시절 우리 선조들은 매우 지헤로운 방법으로 전을  보존했다.나무로 만든 함지에 잘 다듬은 벼집을 잘게 잘라서 한벌 편다.벼집 한벌 전한벌 이런식으로 여러겹으로 언져준다.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보관하면 며칠이라도 두고 먹을수 있다.        어릴때 기억 때문이라 할가 나도 두부를 해 먹고 싶었다.하여  어느 한번 안해와 상의하고 마반산에 가서 두부를 하기로 하였다.반나절 매돌을 돌려 콩을 갈고 비지를 끓이였다.물론 어릴때 부모님들이 하던것을 본딴것이다.서시를 뿌리니 감사하게도 두부발이 서는것 이였다.처음 솜씨로서는 대성공이였다.후에는 전기 매돌도 구입하였다. 그러니 일손이 많이 절약되였지만 손매돌 두부와는 맛이 차나는 느낌이다.    시간이 날때 또 한번  매돌두부맛을 보아야 겠다.
75    휴가 댓글:  조회:1079  추천:0  2019-07-11
 휴 가        한국에는 여름 휴가란 말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무더운 여름철 더위를 피하여 해외나 국내 피서지를 다녀오는것으로 여름휴가를보낸다.하여한국에서취직한 중국사람들도휴가철을리용하여집에돌아오기도한다.여름한때면인천공항으로 빠져 나간 내국인 유람객이얼마얼마라고TV에서는맨날비명섞인즐거운 소리를 한다.       아직 우리에게는 휴가철이란 말이 없다.한것은 휴가문화가 아직 형성되지 못한것도 원인이 거니와 기업들에서 휴가를 내주지 않는것과 관계된다. 국외에서는 봉금을 타면서 휴가를 보낼수 있다. 이른바 대신(带薪)휴가를 말한다. 지금 공무원들은 대신휴가 제도를 집행하고 있다. 허나 제일 길어야 휴식시간이 15개 공작일뿐이다.       휴가제도는 매우 필요하고 또 중요한 제도다. 매일 고강도의 공작부하(负荷)는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해치게 된다. 비록 공휴일이 있지만 그것으로마는 해결이 안된다. 요지음 위챗에 오른 소식들을 보면 근간에 젊은 과학자들이 공작강위에서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장기간의 고강도 공작부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해로운것이다. 그러니 휴식이 우리 일상에서의 중요성이 더한층 알리게된것이다.        요지음 어떤 단위들에서는 잔업(加班)을 자주 안배한다. 공장에서 로다를 받고 밤낮이어 생산에 들어가는것은 좋은일이다. 일거리가 많다는 말은 결과적으로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는 말이다. 허나 기관에서 "5+2"라던지 "흑+백"이라며 일안배하는것은 제창할바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일안배가 제도화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과거 기관에서는 아무아무개가 경상적으로 잔업을 했다고 하며 이것을 간부들의 봉사정신과 련결시켜 놓았다. 시간적인 제한을 받는 총화라던가 통계분석등 특수업무를 내놓고 경상적인 잔업이 있다는건 일자체가 문제있다는 말이다.       어렵게 마련된 휴가를 우리는 유용하게 안배함이 마땅하다. 멍하니 집에서 할일없이 빈둥거린다던가 아침부터 텔레비죤과 씨름한다던가 하는것은 취할바가 아니다. 휴가의 목적은 휴가를 통하여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마음이 즐거워 져야 한다. 외국인들은 휴가철에 배낭려행이라던지 가정려행을 선호하는 편이다. 유람도 좋지만은 바쁜 일정을 소화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려행이 더욱 좋다. 최소한 필요한 물건만 챙겨 넣고 떠나는 길은 발걸음도 가볍다. 노트와 필은 기본이다. 려행의 감수를 적고 나름으로의 표현도 해본다. 결국 자기만의 시간을 만끽한다는 말이다.    잠시나마 일터를 떠나 대자연의 품속으로 돌아가 푸른하늘 흰구름 맑은 강물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공유하자. 모든 번뇌와 스트레스를 툭툭 털어버리고 마음껏 웃고 떠들고 소리도 쳐보자. 자전거를 씨엉씨엉 타고 공로를 달려도 보고 조용하고 아늑한 향촌 오솔길도 걸어 보자. 잠시나마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지자.     기계도 보양이라는것이 있다. 자가용은 5천공리에 한번씩 윤활유를 바꾸어 넣어야 한다. 새 차는 6년동안 년검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6년후 부터는 매년 년검을 해야하고 15년후부터는 반년에 한번 년검해야 한다. 하물며 피와 살과 뼈로 만들어진 인간은 더더욱 보양이 필요하다.  빼내여 쓰기만 하고 보양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를 해치는 부당한 행위다. 사회적으로도 휴가는 제창되여야 하고 제도화 되여야 한다.    휴가는 필수다. 좋은 휴가를 보내려면 일찍부터 계획해야 한다.
74    아침운동 댓글:  조회:3000  추천:1  2019-07-10
  아침운동         아침에 강뚝 나가면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활기찬 하루 생활을 아 침운동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달리기 하는 사람 태권도 하는 사람 자전거타는 사람 사람마다 운동 종목은 서로 다르지만 다 같이 활력으로 차 넘친다.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하여 연길의 아침은 더욱 매력적이다.    동쪽 하늘에 태양이 불끈솟아 오른다. 대지는 태양의 에네르기를 한껏 받는다. 거기에는 동물도 식물도 산도 물도 포함된다.  강바닥  풀 숲에서는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반갑게 들려 온다. 따사로운 아침 해살이 대지를 비출때  많은 사람들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강변이나 공원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춤을 추는 사람들 예술체조를 하는 사람들  운동기구를 리용하는 사람들 팀마다 항목이 구별되나 모두 열심히 운동한다.        오늘 강변을 도보하며 보노라니 별라별 운동이 다 있다.  둥그렇게 모여서 태극권 비슷한 운동을 하는데 정리운동으로 "하하하" 큰 웃음을 터 뜨린다. 그것도 다같이 여러번 한다. 정말로 통쾌한 웃음이다.  웃음으로 시작하는 하루는 역시 유쾌할것이다.       제기차기 운동은 어느 정도의 기교가 필요 하다. 청수공원 운동장에서는 일년사 계절 제기 차기하는 사람들을 만날수가 있다. 비교적 고정된 팀인데 나이를 봐서는 40대 후반이다. 허나 제기를 받고 진공하는 날랜 동작을 보고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진짜로 대단한 운동객들이다.       강변을 자주 걷다 보면 거의 매번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호상  어디서 살고 뭘하며 호명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저 지나치는것 만으로도 인상이 있다. 혼자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부끼리 걷는 사람도 있고 팀을 무어 걷는 사람도 있다.          운동는 사람들의 신체를 든든하게 하여 줄 뿐만 아니라 정신을 맑게 해주고 기분을 돋구어 준다. 운동의 좋은 점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관건은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꾸준히 견지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운동이 자기 몸에 가져 다주는 변화를 감지 할때에야만  운동욕구가 더 생기고 견지 할수 있는 동력으로 된다.       아침에 강변에 나가보면 운동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장년이 아니면 노인들이다. 젊은 축들은 대부분 늦잠 자거나 아니면 학교가는 애들을 위해 아침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아침 운동하고 젊은이들은 퇴근하고 탁구장에서 배드민톤장에서 헬쓰장에서 땀동이를 뺀다. 하지만 생활에 대한 애착은 너나없이 똑같다.      생활을 사랑하고 사업을  열심히 하는 사람 일수록 건강관리에 신경을 쓴다. 요지음 물질생활의 향상과 더불어  사람들은 운동에 대한 욕심이 더 많아지고 튼튼한 신체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진다. 질량있게 살려면 건강이 첫째다. 재부가 아무리 많아도 건강이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은 남의 것이다.       건강하여야  몸이 가볍고 정신이 유쾌하고 일할수 있는 밑천이 생긴다. 밑천도 없이 어찌 사업을 펼쳐 나가고 고난을 이겨 나가겠는가. 힘은 자기로 키우는 것이지 그 누구한테서 받는 것이 아니다. 무슨 포도당을 맞듯 외부에서 주입하여 줄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잃으면 적게 잃은 것이고 친구를 잃으면 크게 잃은것이고 신체를 잃으면 다 잃은것이다.       우선 자기몸부터 튼튼해야 한다. 그래야 일할수 있고 자식들을 도울수 있고 가정의 부담을 덜수 있다. 한마디로 튼튼한 신체는 자기를 위하여서도  필수다.       지금 같이 좋은 세상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려면 움직이여야 한다. 우리 다같이 운동이 가져다  주는 쾌락을 느껴보자.
73    사자성어(四字成语) 댓글:  조회:1058  추천:0  2019-07-10
 사자성어(四字成语)       나는 요지음 사자성어 공부재미에 푹 빠져 있다. 얼마전 친구가 위챗에 사자성어 맞추기 유희를 추천하면서 시간날때 해보라고 하였다. 헌데 거기에 빠져들지 생각도 못했다.       유희를 열고 보니 한꺼번에 열몇개의 성어가 나오는데  중간중간 글자를 비워 놓고 알아 맞추기 하는것이였다. 성어에 어느정도 흥취가 있는지라  나는 인츰 유희에 몰입하였다.       처음에는 간단하다 싶더니 점점 듣도보도 못한 성어들이 무더기로 쏫아져 나온다. 모를것이 있을 때는 기회도 준다. 다른 사람한테 광고를 보내여 주면 두번의 기회를 더주는 방식이다. 맞추기에 열중하다 보면 저도 몰래 다른 췬에 광고를 보내게 되는데 나중에 친구들 한테 나무람 듣기도 한다.  "무슨 꼭두새벽에 광고 보내는가?"       허나 나 인들 방법없다. 너무 재미있으니 말이다. 자기 한테 보내는 방법도 있는데 너무 빈번하게 사용하면 그것도 잘 말듣지 않는다.  그러니 눈가리고 "야웅"하는 식으로 은근슬쩍 내보내기도 한다.      이제 그 맞추기 내역을 보기로 하자. 어떤 화면은 보자마자 몇개의 알고 있는 성어들이 보인다. 비록 힘들게 하노라 여러개의 빈자리를 내였지만 나는 인츰 보아내였다. 우선 몇개를  맞추어 놓으면 신심이 생긴다. 다음 순서로는 밑에 라열한 제시(提示) 글자들을 살펴 본다.  제기글에서 힌트를 가지면 또 희열에 빠진다. "그러면 그렇겠지. 내가 누구라구"       아는 글자들을 네모꼴안에 적어 놓고 또 다시 화면을 훝어 본다. 더욱 유심히 훝어 보고 또 여기저기 맞춰보지만 알길 없다. 갈수록 심산이라더니 이런 것을 말하나 보다. 그렇다고 제시어에만 매달리려면 시간도 사간이려니와 번거롭고 남들한테도 페를 끼치는 일이다. 하여 두뇌을 돌리고 돌려 본다.       사자성어(四字成语)는 중국어의 정화(精华)라고 할수 있다.  몇천년를 내려오면서 다듬고 다듬어진 어휘다. 매개 성어의 뒤에는 이야기가 있고 출처가 있다. 간추려진 언어로 함의 깊은 이야기를 꼬집어 말할수 있다. 그러니 문학대가(大家)들은 문장이나 연설가운데 곳잘 성어를 사용하곤 한다. 성어공부를 하노라면 고시절(古时)이라는 말이 잘 나온다. 그러다 보니 어느정도 고문학습에도 도움이 된다.        2004년도 어느날 나는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성어소사전»을 발견하게 되였다. 펼져보니 중소학생수준으로서 경상성어 5천개정도가 수록되였다고 소개되여 있었다. 이정도만 알면 나에게는 만족이다. 하여 사전을 사서 판공실에 가져다 놓았다.  쯤이 나는 대로 나는 사전을 펼쳐보았다. 헌데 보는것만으로는 잘 기억되지 않았다. 그시절 독방을 쓸때였다. 사무를 처리해 놓고 문을 닫고 성어쓰기에 들어 갔다. 한획한획 써내려갔다.       글씨쓰기 연습도 할겸 성어학습도 할겸 일거량득이였다. 공부를 사작해서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성어들이 너무 적은 것을 실감하게 되였다. 하여 무작정 처음페지로 부터 써내여가면서 기억하기에 노력했다.   나는 사전 첫페지에 어느날 구입하였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거의 일년이 지날때마다 그날 날짜를 적어 놓군 하였다. 이미 15년이 되였다. 그중 몇해는 날자를 적지 않은 것도 보인다. 그것은 내가 룡정에서 사업할때다.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아마 집중할 일이 따로 이었나 보다. 사실 그당시 성어공부가 중단 된 것이다.         지난해 년말 나는 서안에 공부하려 가게 되였다. 매번 출장이 그러하듯 낮에는 공부에  바삐 보내다가도 저녁이면 할일이 없다. 그러던 차에 한 친구가 사자성어 유희를 소개해 주었다. 이번것과 구별이라면 그것은 매번 두개를 올려놓고 네모꼴에 맞추어 넣는것 이였다 . 그때 저녁밥만 먹고나면 성어맞추기 유희를 놀았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랐다. 헌데 어떤때면 확실히 모를 것이 등장한다. 이건 뭐지?        그럴때면  잠시 휴희에서 나와 다시 백도(百度)성어사전에 들어 간다 . 답안을 얻어 놓고 다시 유희에 돌아 온다. 여기왔다 저기왔다 하면서 성어맞추기를 하노라니 10일이란 시간도 잠시 잠간이였다.         요지음 성어휴희는 중독성이 있는 같다. 내가 무심결에 올린 휴희을 따라하는 친구들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제시어를 받기 위해서 다른 췬에 올려 놓은 것을 친구들이 보고 같이 하는 판이였다. 하기에 나도 그들이 몇관(关)을 넘었는지를 알수 있다. 하여 더욱 승벽이 생긴다. 지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이 더 빨리 맞추어야 한다.       유희도 인생인가 보다. 어떤 자세로 어떤 심태로 문제를 포착하고 어떻게 난관을 넘어야 할지는 사람 사는것과 꼭 같다. 아는 것이 나온다고 좋아 하다가도 모를 것만 꽉 쌓여 나오면 힘든다. 머리를 굴리고 굴려도 마지막 몇개의 제시어가 나올때 까지도 오리무중이다. 사람 사는것도 그렇지 않는가. 잘 나갈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다. 그러다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기분이 나고 또 도전하게 된다.     오늘도 계속 해볼판이다.
72    첫수확 댓글:  조회:1207  추천:0  2019-07-01
첫수확        요지음 일이 바쁘다 보니 마반산에 다녀 온지도 어언 두주일이 지나갔다. 그새 날도 잘 해주었다. 비도 오고 기온도 높았다. 터전의 채소는 어느정도 자랐을가 ? 무척 궁금하기도 하였다. 하여 오늘은 휴식일이라 아침 일찍 마반산으로 떠났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 라더니 아침부터 비가 쭈윽쭈륵 내린다. 날씨가 좋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마반산으로 가는 도로 상황이 좋아 져서 웬만한 비가 와서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다만 밭에 들어서 일하기가 말째일 뿐이다.       오늘 마반산에 가서 먹을 붙이개를 안해가 해놓았는데 아불싸 내가 잊어 먹고 그대로 떠났다. 다른건 다 차렸는데 새참이 빠진것이다. 뭔가 잊고 다니는 증상이 온것이다. 아직은 아닌데.       내가 처음 마반산에 다닐 때만해도 소영장대는 매우 가파로왔다. 웬간한 기술에는 차를 운전하여 장대를 넘을 념도 못했다. 비포장 도로고 졻고 가파 롭고 위험한 요소는 기본상 다 갖추어져 있었다. 당년에 송동무가 운전하고 마반산에 비닐장판을 가져 가게 되였다. 그날도 비가 왔다. 헌데 잘 올라 가던 찌프차 바퀴가 한자리에서 맴돌이친다. 또 한쪽으로 미끌어 내린다. 황당해난 송동무가 나보고 차에서 내리라 한다.  그리고 뒷바퀴에 돌맹이를 지들여 놓으라고 소리치였다. 나는 다급히 뛰여 내려 큼직한 돌을 지들겨 놓고 서야 후 숨이 나왔다. 살아 났다. 한바트면 차를 골짜기에 처 넣을번 했다. 그뒤로는 비가 온뒤에는 소영장대에 붙기가 싫어지였다.          그러던 소영장대에 2015년도에 고가교(高架桥)가 들어 섰다.  그 뒤로는 개발구 립체다리를 지나 거뜬히 장대를 오를수 있게 된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년에는 너무도 힘들게 다니였다. 고진감래(苦尽甘来)라더니 옛말 그른데 없다. 13년을 고생스럽게 다니다가 확트인 아스팔트 길이 열린것이다.      차를 대문앞에 세우고 나는 차에서 내리였다. 마을은 언제나 그렇듯 고즈넉하다. 비도 끊었다. 길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산도 푸르고 밭도 푸르다. 나무 잎에는 물 방울이 달려 있다. 너무도 환상적인 시골풍경이다.       집 울안에 들어서니 첫눈에 안겨 들어 오는것이 빨갖게 익은 앵두였다. 앵두가 너무 많이 달려 가지가 휘여져 있었다. 하나를 따서 먹어 보니 달콤하면서도 살싹 시쿨다. 올해 처음 먹어보는 앵두였다. 앵두는 심지 않아도 잘 자란다. 다람쥐가 앵두를 훔쳐 먹고 배설하면 당금 그자리에서 앵두가 자란다. 우리 집 울안에도 여러 군데 이런 앵두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힌다.       오이 밭에 들어가 보니 한뽐 크기의 오이가 가득 열려 있었다. 두 주일전에 내가 내려 와서 오이달대를 만들어 놓았다.  두주일이 지나니 또 손이 가야 한다. 넝쿨을 더 높이 매주는 작업이다. 한편으로 소랭이에  오이를 따고 한편으로 오이넝쿨을 달대에 매주었다. 오이는 매일 자라는것이 알린다. 내일 와보면 또 달려 있다.       다시 도마도 밭에 들어 섰다. 많이 열리 였으나 아직 익은 것이 없다. 어릴 때에는 언제 익겠는가 가다려지던 도마도였다. 그때는 너무 먹고 파 살짝 붉은 색만 띠면 뜯어서 쌀독에 파묻어 두었다. 하루가 지나면 금시 붉어 진다. 몇해전에는 방울도마도를 많이 심었다.  어찌나 많이 달리는지 우리 누님은 친구들과 같이 와서 뜯어 시내에 돌아가 소구역할마니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지는 자람새가 쑬쑬하다. 보배가 잎을 갈아 먹은 탓이다. 유기농사라 약을 치지 않기 때문에 저놈의 보배를 말릴 재간이 없다. 보배는 감자잎과 가지잎을 좋아한다. 그놈들이 갈아 먹은 잎에는 구멍이 숭숭 뚤려 있다. 나는 가지를 뜯어 낸후  가지 순을 주었다. 가지는 대가 실하고 키가 커야 오래 먹고 많이 수확할수 있다. 나의 농사 경험에 따르면 오이던지 도마도다 키가 커야 한다. 그래야 새순이 나오고 거기서 또 열매를 맺는다.      상추는 너무나도 잘 자랐다. 약간 붉은색을 띠는 상추가  제일 맛 좋다. 씨를 뿌려서 자란 것도 있고 지난해 상추대에서 씨가 떨어져 자란난 것도 있다. 로농들의 소개에 의하면 상추대에서  씨가 떨어져 나온 상추를 제일 먼저 먹게 된다고 한다. 내가 상추사진을 위챗에 올렸더니 장춘에 있는 친구가 불고기에는 붉은 상추가 배합이라고 한다. 이상한데가 있는데 상추에는 벌레가 끼지 않는다.       고추도 열리기 시작한다. 안해는 어느사이  가득 뜯어 내왔다. 요지음 고추가 맵지 않고 제일 맛있다. 시간이 지나면 고추가 독이 오르는데 그때는 진짜로 맵다. 나는 웬만한 매운 고추는는 무서움이 없지만 우리집 고추에는 손을 들었다. 고추가 매워지면 간장물에 담구면 된다. 매운맛은 적어진 반면에 특유의 간장 고추맛이 입맛을 돋군다.       올해 실패한 농작물도 있으니 바로 감자다. 뒤늦게 심어 놓았는데 심한 가물탓이 잎이 나온 것이 적다. 먹을 만큼 얻어 먹고 나중에 배추나 무우를 심을 예정이다. 욕심을 너무 부려도 안된다.      올해 옥수수농사는 애를 먹었다. 봄 가뭄탓이다. 하여 우리는 6월초순에 보종(补种)을 하였다. 마침 그때 비도 잘오고 기온도 높아서 먹는데는 별로 영향이 없을 같다. 보통 8. 15에는 먹게 되는데 늦은 종이라도 별로 차이가 나지않는다.       오전에  화단의 풀도 뽑았다. 봄가뭄에 꽃나무가 말라 죽었는가 했는데 지금은 새잎이 새록새록 나왔다. 내가 죽은 같다고 했으나 안해는 기다려 보자고 하며 갈때마다 물을 주었다. 그 덕분으로 끝내 꽃나무를 살리여 낸것이다. 뭐나 서뿔이 판단내지 말라는 안해의 말이 명언인 같다.      여러가지 채소를 뜯어내고 나니 정심때가 되여 온다. 배도 촐촐한지라 모든 채소를 차에 실고 연길로 돌아 오는데 길가에서 뀅 한마리를 발견하였다.       뀅한마리가 길옆 풀밭에서 나오더니 두리벙두리벙 사면을 관찰한다. 차속도를 죽이고 살펴 보니그 뒤로 다섯마리의 뀅병아리가 줄지어 나온다. 아. 원래 어미뀅이 길을 건너려고 관찰할려 나온 것이였다. 말못하는 짐승이지만 새끼에 대한 사랑은 사람과 꼭 같았다. 우리는 개네들을 놀리 울가 념려되여 길을 다 건넌후에야 차를 몰았다. 몇해전에도 이런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이는 우리 사는 마을이 환경보호가 잘 되여 있다는 증명이다.        올해의 첫 수확치고는  좋은 셈이다. 지금은 유기농 채소를  살려고 해도 마땅치가 않다. 헌데 자기손으로 키운 친환경유기농 채소를 먹게 된다는 것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봉황 버금으로 가는 뀅도 보았으니 기분이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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