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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모순되는 현실 댓글:  조회:2524  추천:2  2014-04-09
애초에 친척방문, 약장사로 시작되였던 한국나들이가 중한수교를 맞이하면서 물고가 트이였다가 이제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이하면서 더는 신비하게 느껴지지 않고있다. 현재 50만명도 더 되는 조선족이 작은 한국땅에서 북적이고있는데 앞으로 점점 더 불어날 추세를 보이고있는것만은 부정할수 없는 현실이다.   20여년의 한국나들이를 돌이켜보면 실로 말그대로 희와 비가 그대로 깔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전에는 엄두도 못내고 꿈도 못꾸면서 그저 그림 같았던 한국으로만 생각하였댔지만 정작 물고가 트이자 가려고 서슴없이 밀항선에 올랐다가 지금까지도 종무소식인 사람들, 꼭 가고싶은 마음으로 숱한 빚을 내면서 시도하였다가 결국 사기당하여 자결한 사람들, 위장결혼이란 허울로 가정을 산산쪼각낸 사람들, 과로와 과음으로 한국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위험한 현장일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실로 이루 다 라렬하기가 힘들며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파오고있다.   한국나들이로 우리는 너무도 많은것을 지불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너도나도 한국나들이란 이 길목에서 북적대다보니 우리의 선조들이 피땀으로 일구어온 땅은 주인을 잃어가고있으며 조선족농촌마을은 비여가고있다. 이제 십년, 이십년후의 조선족농촌마을의 상태는 어떻게 될지 그려보기조차 무섭다.   전에는 그렇듯 단란하고 오붓하던 가정이 리산의 아픔을 겪게 되였으며 부부정이 좋아 잉꼬부부라는 말을 들으면서 남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던 부부도 하루아침에 남남이 되는 리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우리의 주변에서 심심찮게 찾아볼수 있다. 리산과 가정의 파탄은 결국 아이에게 아물수 없는 상처를 주고있는데 어려서부터 부모와 갈라져있은 요즘의 아이들은 이제는 현실에 습관되여서인지 그리움도 진하지 않을뿐만아니라 부모들의 리혼도 무감각으로 받아들이면서 오직 자신의 뒤바라지만 책임져주면 상관이 없다는 태도이니 그들의 성장을 책임진 학교가 모든 역할을 하자니 힘에 겨울뿐이다.   간혹 기한이 되여 한국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천방백계로 다시 한국행을 시도하고있으며 아직도 한국행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환률로 보면 한국의 로임상황이 그렇게 좋은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서 벌기보다는 낫다는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긴 한국나들이가 있었기에 도시에 아빠트를 살수 있었고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할수 있었으며 떵떵거리며 살아갈수도 있는것이다.   사회도 가정도 모두가 돌아와서 내 마을, 내 가정을 지키면서 그 옛날처럼 오손도손 살아가기를 바라는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있는 오늘의 현실이며 또 앞으로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마을에 돌아가서 농기계를 구전히 갖추고 농사일을 해도 벌이가 그렇게 나쁜것만은 아니겠건만 그런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도시에 들어와서 식당이나 기타 업종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이 더 많은것이 현실이다. 도시로 들어와서 하나의 업을 하려면 말그대로 쉽지만은 않기때문이다. 우선 자신의 경영능력과 독특한 비법이 있어야 할것이며 사회인맥관계도 좋아야 할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힘과 밑천에만 의지한다면 결국 문을 닫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일단 영업을 시작하면 대여섯 부문에서 달려와 이런저런 세금을 요구하니 웬만해서는 당해내기가 힘든게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곳에서 하는 일도 한국에서 일하는만큼 아니면 좀 적은 로임이라도 받는다면 그리고 무슨 일이든 하려고만 한다면, 여러부문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지지해준다면, 모든 일에서 공정적이고 밝아진다면 아마도 귀국하는 행렬이 늘어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최소한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는 한국행을 시도하지는 않을것이다.   중한수교의 해가 깊어갈수록 한국으로의 조선족이동은 더 자유로와지는 반면 지불해야 할 대가도 더 커질것이다. 현실적인 모순의 격차가 줄어든다면 잃는것보다는 얻는것이 더 많을것이며 우리 조선족사회도 더 밝아질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란강닷컴 4월 7일자  
55    의무와 임무 댓글:  조회:2475  추천:2  2014-04-04
 의무와 임무를 사전에서는 분명하게 해석하고있다. 이를테면 의무는 사회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보아 반드시 실행하거나 지켜야 하는것을 말한다면 임무는 맡아서 해야 할 과업 또는 맡겨진 일을 말한다. 사전해석에서는 의무와 임무의 차이를 알기 쉽게 뚜렷하게 밝혀놓았건만 우리의 생활에서는 의무와 임무의 차이를 딱히 리해하지 못하고 혼동하고있으며 그 혼동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앞에 아름답지 못한 풍경들이 출연되고있다. 지난 겨울의 어느날 저녁에 있은 일이다. 강변광장에 나가 건강체조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였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중의원옆 십자로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것이였다. 멀리서 볼 때는 몇몇이 둘러서던것이 내가 그곳에 다달았을 때는 이미 말그대로 사람들로 겹겹이 바자를 치고있어 발을 들여놓을 틈도 머리를 기웃거려 볼 틈도 없었다. 지나치면서 나이가 듬직하고 점잖아 보이는 분에게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모여들었냐고 물었더니 아무 일도 아닌데 경찰이 불이 번쩍번쩍하는 사이렌차를 세워놓고 서있으니 모두 무슨 일이 있냐 모여든것이 저런다는것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그자리에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그 자리에 겹겹이 사람바자를 둘러친 사람들 모두가 무슨 일이 있나 호기심으로 구경거리를 만나서 구경하고싶어 모여섰다는것인데 그것이 더욱 사람을 어이없게 만들면서 서글퍼지게 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제날 내가 농촌에서 보낸 동년시절은 지지리도 가난한 시기였기에 정말 구경거리가 없었다. 하여 일단 마을에 싸움이 나거나 장사군이 와도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무리지어 쓸어가고 쓸어오군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허구픈 일이 아닐수 없다. 그때는 지지리도 가난하여 사람들의 사상의식과 정신의식이 너무나 차하였기에 우매할수밖에 없었다. 허나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고 또 자고 일어나도 눈에 뜨이는 변화를 가져오고있는 오늘날에도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목을 빼들고 몰켜서있는 사람들이 있다는건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고보니 자연 의무와 임무에 대하여 다시 새삼스럽게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다. 살아가면서 단순히 의무와 임무의 차이를 리해하는데만 그치지 말고 실제행동에 옮긴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좀 더 밝고 따뜻해지지는 않을가 생각해본다. 특히 사회인으로서의 우리 모두가 도덕적범주나 행동에서 반드시 실행하고 지켜나간다면 우리 모두의 자질제고는 보다 높은 차원에 이를것임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문제는 맡겨진 일은 그런대로 해나가는데 도덕적범주나 행동에서 반드시 실행하고 지켜가야 하는것이 잘 되지 못하고있다. 하기에 교통사고로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도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지 팔을 걷어올리고 구원의 손길을 주는 사람은 적거나 없으며 환경보호일군들이 땀을 흘리면서 잔디밭이나 화원을 꾸려놓아도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무참이 밟아놓는 일은 심심찮게 볼수 있으며 분명 쓰레기적치장소나 쓰레기상자가 있건만 너무도 태연하게 아무곳에나 버리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찾아볼수 있으며 가래침을 아무곳에나 뱉거나 담배꽁초를 아무곳에나 버리는 일은 이젠 자연스러운 일처럼 안겨오고있는 현실이다. 이러루한 일들은 찾아보고 렬거하자면 정말 너무도 흔한 일이여서 말하는 자체가 부끄러워난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맡겨진 일을 제때에 참답게 완성해야 할뿐만아니라 반드시 실행하거나 지켜야 할 일도 잊어서는 않된다. 문제는 도덕적범주나 행동에서 반드시 실행하거나 지켜야 할 일은 고도의 자각성을 요구하는데 만약 그 자각성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우리 모두의 자질은 보다 높은 차원에 이른것일진대 그러면 곧바로 문명한 사회, 조화로운 사회는 이루어질것이며 참으로 살맛나는 세상을 꾸려갈수 있을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세계인 모두가 진정으로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나라로 동방에 우뚝 설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부여되는 의무를 참답게 수행해보자.
54    자각성과 적극성의 원심은 마음이다 댓글:  조회:2127  추천:0  2014-03-28
 저녁을 먹고 때로는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볼라면 강변의 광장에서 천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정연하게 줄을 서서 음악에 맞추어 체조를 하는 광경을 볼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운동이 되랴 싶은 의문의 마음과 더불어 어쩌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같이 정연하고 일치하게 할수 있을가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날부터인가는 나도 그속에 합류하여 곡에 맞추어 체조를 해보고싶은 충동을 억누늘길 없어 끝내는 그 대오에 가담하게 되였는데 너무도 예상밖이였었다. 문제는 흥겨운 곡에 맞추어 체조를 하니 마음이 즐거웠을뿐만아니라 체조 또한 팔, 다리, 허리 등 온몸을 다 움직일수 있어 너무도 거뿐하고 상쾌하였다. 그렇게 재미를 붙이다보니 하루 일상에서 빼놓을수 없는 일과가 되여 저녁밥술을 놓기 바쁘게 강변광장으로 달려가군 하였다. 나못지 않게 모두가 그렇게 열정적이였었는데 추운 겨울이여도 저녁마다 천명가까이 광장을 꽉 메우군 하여 참으로 보기좋은 풍경이였다. 지난번 이 겨울잡아 두번째로 내린 눈은 하루종일 내리다보니 발목을 넘어서게 내렸었다. 그날 나는 (오늘 저녁에는 눈이 이렇게 많이 내렸는데 체조를 할수 있을가?)하는 의문을 지워버리지 못한채 미심쩍은 마음으로 강변광장에 갔었다. 헌데 이게 웬 일이란 말인가? 강변광장은 언제 눈이 내렸나싶을 정도로 말끔히 치워져 있었으며 전날만은 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몇백명의 사람들이 체조시간을 기다리고있는것이였다. 알고보니 모두가 자각적으로 눈치는 도구를 가지고 와서 적극적으로 눈을 말끔히 쳐버렸던것이다. 그날 체조하는 내내 체조대오를 두고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건 어쩔수 없었다. 천여명 가까이 참가하지만 거의 모두가 시간을 맞추어 오고 간혹 늦어진 사람들은 조용히 다가와서 줄에 끼여들며 그 누구도 줄을 바로 서라고 지휘를 하지 않아도 자각적으로 줄을 똑바로 맞추어 서서 곡에 맞추어 정연하게 체조를 한다. 그 넓은 광장에 여러개의 방대로 나뉘여 체조를 진행하면서 어느 방대든 령솔자가 없지만 모두가 그렇듯 자각적으로 줄을 맞추어 적극적으로 동작을 일치하게 하고있는 광경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왜서일가? 저녁식사후 몸에 알맞는 운동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닿았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양잰썬초”라는 운동이 마음도 흥겹고 몸도 거뜬하게 하니 모두가 자연 거기에 빨려들어가게 되면서 거기에 대한 적극성과 자각성이 생겨난것이다. 우리들은 무슨 일을 하나 자각성과 적극성이 있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어떤 일에서나 자각성과 적극성의 역할이 자못 중요하며 일을 진척시키는 동력이 되거나 일의 성공여부를 결정하기때문이다. 헌데 때로는 자각성과 적극성이 없거나 모자라는 경우에 부딪치게 되는데 따지고 보면 그 일에 대하여 마음에 닿지 못했기때문이다. 마음에 닿지 않고 억지로 마지못해 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 일에 대한 자각성은 물론 적극성도 있을리가 만무할것이다. 그렇다하여 살아가면서 마음에 닿고 마음에 싶은 일만 하자고 해서는 않된다. 관건은 어떤 일이든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마음에 닿을수 있게 될것인즉 마음에 닿게 되면  자연 그 일에 대한 자각성과 적극성도 생겨날것이며 자각성과 적극성이 생기면 그 일의 성공여부도 가히 짐작해보거나 그려볼수 있을것이다. 한마디로 어떤 일을 시킬 때면 억지로 내리먹이기보다는 우선 대방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끔 잘 설득한다면 그 일은 차질없이 잘 될것이다.  또 어떤 일을 해야 할 때는 우선 마음으로 생각해보아야 할것이며 내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좀전과 달라질수 있을것이니 그러면 마음으로 생각해본것인즉 자연 자각성과 적극성이 생겨날것이기에 일을 해도 힘들지 않을것이며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굳건히 자리잡게 될것이다. 모든 일들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자각성과 적극성이 생길것인바 그러면 즐거움속에서 일을 할수 있을것이다.  
53    뉴스는 생활반영이여야 한다 댓글:  조회:2164  추천:1  2014-03-21
텔레비죤이 금방 보급되기 시작하던 80년대초반까지만 해도 텔레비죤방송국이 지금처럼 많지 않아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채널시청이 위주였었지만 디지털시대에 들어선 지금은 중앙으로부터 성, 시, 지어는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텔레비죤방송국이 있어 하루종일 텔레비죤을 마주하고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절목이 다채롭다. 어느 텔레비죤방송국이든지 하루 방송중 그렇게 다채로운 절목중에서도  뉴스방송을 최우선으로 하고있으며 또 최우선으로 하기에 뉴스방송은 하루방송중에서도 황금시간대에 방송하고있다. 저녁뉴스시청순서를 보면 중앙, 성, 시, 지방의 순서로 할수 있는데 모두 자기가 살고있는 지방의 뉴스도 중앙못지 않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청하게 된다. 원인은 아주 간단한바 지방뉴스는 그 지방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기때문이다. 헌데 지방의 뉴스방송을 보면 뉴스인지 아니면 령도들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다니는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루뉴스방송이 십여분되는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령도들이 어디를 내려가서 무엇을 했다는 보도로서 그들이 아니면 뉴스방송을 할수 없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바로 그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련휴일이 끼우면 지방의 뉴스방송도 쉬는것이니 정말 령도들이 없으면 뉴스방송을 못하는것이 사실이 되였다. 어느 지방에서나 령도들이 무슨 일을 하고있다는것이 중요한 일임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그 지방에서 무슨 일을 중요시하고있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으며 또 그들의 실제사업을 알아볼수 있는것이다. 허나 하루 뉴스중 필경 그것만이 꼭 방송해야 하는 뉴스는 결코 아닐것이다. 생활가운데는 너무도 새로운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있으며 백성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수 있고 또 그들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는 일들이 수없이 많을것이다. 허나 그런것들이 모두 망각되고 오직 령도들이 하는 일만 나오니 뉴스가 진정 백성들의 생활을 반영했다고 할수 없다. 언젠가 심수에 있는 동생네 집에 갔다가 그 지방 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송하는 뉴스를 시청하게 되였다. 뉴스중 한 어린아이가 호텔옆을 지나던중 호텔벽에 붙어있던 타일이 떨어지면서 공교롭게도 어린아이의 머리를 빗쳐놓아 아이가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사건이 방송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기자가 사건처리에 잇따른 취재를 진행하여 방송하겠다고 하였다. 이튿날 나는 그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였을가 하는 궁금증으로 뉴스방송시간에 맞추어 텔리비죤앞에 앉았었는데 아니나 다를가 호텔측에서 아이의 입원치료비와 정신손해비에 대한 부담을 지게 되였다는 사건처리결과에 대한 방송이 있었다. 참으로 마음에 닿는 뉴스였으며 모두가 관심을 돌리고 모두가 기다려지는 방송시간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비록 내가 사는 지방이 아니였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지방의 뉴스방송을 어김없이 시청하였는데 항상 백성들의 생활에 다가서서 실제를 반영하는것이였다. 우리들의 생활주변을 둘러보면 매일 뉴스로 보도할만한 일들은 많고도 많다. 하루하루를 참으로 곤난하게 살고있는 빈곤한 가정, 중소학교학생들이 등하교하는 좁은 길이 돌멩이투성이에다가 차가 꽉 들어막여 항상 신경을 도사려야 하는 상황, 좁은 골목길에 로점상들이 줄지어 서있어 다니기 불편한 상황, 상가들에서 하루종일 쉬지않고 노래를 틀어놓는데 볼륨이 높아 소음투성이인 주택구의 상황, 거리에서 판매삐라를 산발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거리가 아수라장으로 되는 상황 …  일일이 렬거할수 없지만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고있는 일로서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일들이 아닐수 없다. 이렇게 우리의 주변생활에서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일들을 뉴스에 방송하고 또 그것을 처리한다면 모두가 찬사를 아끼지 않을것임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하루 뉴스방송중 령도들이 한 일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중점적인것을 골라 방송한다면 백성들은 자기가 살고있는 곳에서 요즘 어떤 일들을 중요시하고있다는것을 알것이므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령도들이 한 일들을 방송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에 보다 접근하여 그들의 생활을 반영하고 해결해준 일들을 방송한다면 진정 마음에 닿는 뉴스가 될것이며 휴일이 없이 항상 보도거리가 있는 뉴스가 될것이다. 한마디로 뉴스는 백성들의 생활반영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52    선거다운 선거여야 한다 댓글:  조회:2346  추천:2  2014-03-13
우리 나라의 헌법에는 공민이라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권리를 향수할수 있다고 명백히 규정하고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민이 되기전부터 학교문에 발을 들여놓으면 선거를 하거나 선거되여보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립장이 되기도 한다. 내 기억에는 소학교다닐 때부터 나는 학기말이 되면 3호학생을 선거하거나 선거되여보았다. 그러다 공민이 되니 나라의 헌법에서 제정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권리를 당당하게 향수할수 있게 되였다. 지금도 사업터에서 우수를 뽑거나 직함평의를 할 때에는 무기명투표의 방식으로 선거를 하는데 이제는 선거가 우리의 일상에서 빼놓을수 없는 하나로 되여 늘 함께 한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것 같다. 하다보니 우리의 머리속에는 선거, 특히 무기명투표의 방식으로 하는 선거는 가장 투명하고 공평하다고 생각하여왔으며 또 생각하고있다. 내가 살고있는 곳에서는 지방인민대표대회가 열린다고 한달전부터 선민구에 따른 선민을 확정하면서 열기를 달구었었다. 그러다 며칠전에는 선민증을 내여주면서 선거장소에 가서 선거를 하여야 한다고 하는것이였다. 할 일들이 태산같이 쌓여있었지만 붉은 공인까지 박힌 선민증을 보니 어딘가 엄숙한 감이 들어 모든 일을 제쳐놓고 선거장소로 달려갔다. 선거장소에는 붉은 프랑카드가 걸려있었으며 붉은 투표함에 정복을 한 사업일군들까지 있어 제법 숙연한 감을 주었다. 헌데 문제는 투표였다. 투표용지에는 세사람의 이름이 박혀 있었는데 왜서 그 세사람의 이름이 그 용지에 씌여져서 투표를 기다리는지 알수가 없었다. 어떤 절차를 밟아 올라온걸 내가 무관심하여 몰랐다하고 이 세사람중 누구를 투표해야 하는가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헌데 그것 역시 문제였다. 거기에 씌여있는 세사람들이 남자인지 녀자인지 또 어느 단위에서 사업하고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맡아보는지 전혀 알지 못하니 관심을 가질래야 가질수가 없었다. 그때 앞사람들로부터 “첫사람에게는 ×를 치고 두번째사람과 세번째사람에게는 √를 치면 된다”는 말이 전달되여 왔다. 왜서 앞사람에게는 불동의의 표를 치고 뒤 두사람에게는 찬성의 표를 쳐야 하는지 알수 없었지만 어서 돌아가야겠기에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하고야 말았다. 돌아오면서부터 지금까지 내내 음식을 먹다가 파리를 삼킨듯 께름직하기만 하면서 그 세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가 생각해보게 되며 또 그들중 두사람이 인민대표인데 진정 인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줄수 있을가를 두고 고민해보게 된다. 물론 나의 고민이 아무런 힘도 효과도 없다는것을 알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선거를 두고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인민대표대회는 인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을 청취하고 심의채택하는 회의라고 생각한다. 하다면 그 회의에 참석하는 대표는 마땅히 인민들의 신뢰를 한몸에 안고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들을 반영하여 해결할수 있게끔 노력해야 할것이다. 그런 인민대표로 되려면 최저로 선거하는 장소에 나타나 얼굴쯤은 보여주면서 인민대표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어떻게 리행하겠다는 발언쯤은 한다든지 아니면 그들에 대한 략력이라도 간단히 써서 붙여놓는다면 선거하는 우리들도 조금은 선거다운 선거를 하는 기분이고 느낌일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인지도 또 이제 인민대표로 되여 어떤 일들을 반영하고 해결받을 타산인지도 모르고 그저 무작정 선거하는 선거는 선거하기 위한 선거이지 진정한 선거로 될수 없다. 선거는 선거하는 사람도 참답게 대해야하겠지만 선거받는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진지하게 대해야 할것이다. 선거가 진지하지 못하고 참답지 못한 선거다운 선거가 아니니 그 선거된 사람이 이제 진정 대표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할수 있을가가 자못 걱정돼온다. 우리는 늘 모든 사업에서 실속을 따지고 가짜를 배격하며 허위와 가식을 버리자고 말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민의 진정한 권리를 행사하는 선거에서 눈감고 야웅하는 식의 선거를 하니 리해가 가지 않는다. 모든 일에서 참답고 진실해야 하겠지만 선거는 더욱 진지하고 엄숙하고 참답게 하여 공민으로서의 진정한 권리를 행사하는 동시에 그 결과도 진정 모두가 바라는데로 가도록 하여야 할것이다.  
51    생각하기 나름 댓글:  조회:2203  추천:3  2014-03-12
“나름”이란 단어를 사전에서는 “제각기 자기 식대로의것”이라고 해석했는데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한다면 “생각하기에 따라”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싶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생각하기에 따라 삶이 달라질수 있게 된다. 아래에 적는 이야기는 비록 평범한 이야기지만 나의 가슴을 한없이 울렁이게 하였다.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르는 동생이 있는데 안해와 함께 작은 음식점을 차리고있다. 음식점이 내가 출퇴근하는 길옆에 자리하고있는지라 틈이 나는대로 들려볼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그들 부부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고 반겨주어 참으로 고마웠다. 음식상 네개를 놓은 음식점이라 복무원도 필요없이 부부가 함께 손을 맞추어 돌아치는데 손님이 많은 날에는 매상고가 그런대로 괜찮지만 때로는 하루동안 한두상의 손님밖에 맞이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허나 그들 부부는 늘 웃으면서 손님이 뜸할 때면 잠간 쉬여라고 서로의 등을 밀어주면서 보살펴주군 하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하루 수입이 돈 많은 사람들의 하루 용돈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걸로 고민하지 않고 부부가 서로 배려하는 즐거움속에서 살아가고있다. “돈은 얼마 벌지 못해도 우리가 함께 한다는 자체가 행복이고 즐거움이기에 피곤하지 않습니다”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하는 동생의 꾸밈없는 말이였다. 언젠가 퇴근길에 본 일이다. 내가 출퇴근하는 길량켠아빠트의 외벽을 같은 색의 도료로 칠하는 공정이 시작되였는데 그날 내가 그곳을 지날 때는 바로 점심시간이였다. 그때 도료칠하는 일을 맡은 부부가 밖에서 밥상을 마주하고 식사하고있었는데 오전내내 층집에서 바줄타기로 일하다보니 옷이나 얼굴에 도료가 꾀죄죄하게 게발려있었지만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었는지 그모양 그대로였다. 큰국수사발만큼한 비닐그릇에 담긴 밥우에 멀겋게 볶은 양배추를 얹어놓고 식사하는 부부는 온얼굴에 웃음을 담고 그렇듯 즐겁게 담소하면서 맛난 식사를 하고있었는데 나는 가다가도 몇번이고 그 전경을 뒤돌아보군 하였다. 보면 볼수록 그들이 부럽기만 하였다. 지난 여름 한국외국어대학 용인글로벌캠퍼스에 가서 연수할 때 있은 일이다. 용인글로벌캠퍼스는 용인의 왕산골에 자리하고있었는데 참으로 그림속같은 전경이였다. 나는 매일 아침일찍 맞은켠의 교정을 가로지나 등산을 하군 하였는데 그림같은 풍경은 참으로 매혹적이여서 기분은 이루형언할수 없었다. 헌데 하산할 때마다 교정의 잔디밭에서 더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같은 전경을 목격할줄이야.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 량주가 잔디밭에 보자기를 펴고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아침식사를 하고있었는데 상추로 곱게 쌈을 싸서는 서로의 입에 넣어주고 다시 풋고추를 장에 찍어 드시고는 서로 마주보면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의 느낌은 말그대로 울렁임 자체였다면 가장 적절할것 같다. 잔디밭우의 신선한 공기속에서 하는 아침식사가 맛나기도 하였겠지만 그보다는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더 젊어지게 할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매일 아침마다 하산할 때면 그림같은 그 전경을 보이지 않을때까지 몇번이고 뒤돌아보군 하였다. 지난 여름 학교의 잔디밭과 화단을 정리하면서 목격한 일이다. 벽밑의 갈라진 틈서리에 국화꽃 한송이가 피여나 있었는데 화단과는 외진 틈서리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 그 꽃이 나의 눈길을 끌기에는 너무나 족하였다. 벽밑의 틈서리다보니 화단보다는 흙히 충족하지 못하여 화단의 꽃에 비하면 좀은 왜소하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불평없이 꽃을 피워문 그 모습이 너무나 대견스럽고 장해보여 다시다시 바라보지 않을수 없었다. 정상인이라면 살아가면서 생각을 가져보지 않을수 없다. 생각을 가지는것은 정상이지만 어떤 생각을 어떻게 가지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또 그 결과도 달라질것이다. 요즘같은 세월에 일상에 부대끼면서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살기싫고 죽을만큼 힘들수도 있는데 이때 생각을 돌린다면 마음은 비온뒤의 맑게 개인 날처럼 될것이지만 외곬으로만 생각한다면 결국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게 될것이다. 벽틈서리에 날려간 꽃씨도 아무런 원망없이 꽃을 피워무는데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쉽게 말하면 모두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건 같겠지만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에 따라 사는 방법과 질도 달라질수 있다는것인데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면 가장 적절할것 같다. “생각이 바뀌면 마음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면 모든것이 바뀌여진다”는 말의 참뜻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50    한복의 의미 댓글:  조회:2257  추천:1  2014-01-06
지난 8월말의 어느날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일본에서 사업하는 제자의 결혼식사회를 보게 되였다. 그날 사회때 새로 맞춘 하늘색 한복을 입고 나섰더니 모두들 한결같이 참 보기좋다고 입을 모았었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기분은 날듯이 좋아졌으며 다시한번 한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기까지 하였다. 그러노라니 어쩌면 자신이 진정 백의겨레의 일원이 된 느낌이여서 설레여오는 가슴을 억제할수 없었다. 한복이라면 그저 우리 백의겨레가 입는 전통적인 의상쯤으로 알았지 그 기원이나 멋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하여서는 크게 생각을 가져보지 못하였기에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른 연기자들이나 대형활동때 남녀가 입은 한복을 볼 때마다 한복을 입으니 참 보기좋구나 하는 생각밖에 해보지 못하였다. 지난 여름방학 한국재외동포재단의 요청으로 한국외국어대학 용인글로벌 캠퍼스에서 두주일간 연수를 받으면서 한복에 대하여 똑똑히 알게 되였으며 그 진정한 의미도 나름대로 가슴으로 느끼였었다. 첫날수업은 시인이고 한국문화연대 대표인 고경희교수님의 “조선어교육의 중요성”이라는 강의였는데 고경희교수님은 고운 한복차림으로 강단에 나서서 참으로 의색적이였으며 보는 느낌이 너무나 푸근하고 정다웠었다. 고경희교수님은 자신은 일년사계절 한복을 입고 나서고있으며 한복만해도 보통의상과 같이 여러벌씩 된다고 하였다. 특히 출국할 때면 꼭 한복을 입고 나서는걸 잊지 않고있으며 그것도 여러벌씩 준비하여 갖고 가서는 자주 갈아입는다는것이다. 이는 자신이 자랑찬 한민족임을 과시하고 또 자랑찬 한민족이 된 자호와 긍지를 가슴뿌듯이 느낀다고 하였다. 그렇듯 화려한 미사려구가 아닌 말이였지만 고교수님의 페부에서 우러러나오는 진솔한 감정이 담긴 말을 듣는 순간 다시한번  님을 우러러 보게 되였으며 그 말이 여운이 되여 오래도록 가슴에서 메아리로 되여와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순간도 귀가에 쟁쟁히 울려오고있다. 연수중 전라북도 전주의 한옥마을을 참관하고 한옥마을에서 하루밤 체류하면서 체험생활을 하게 되였는데 그중 가장 인상깊은 일이라면 한복을 입는 방법과 자세를 배우고 직접 체험한 일이다. 그날 나는 강사님의 부름으로 연수생들앞에 나서서 한복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량반들이 쓰던 갓과 정자관을 쓰고 나서는 행운을 가지기까지 하였었다. 물론 그런 복색차림으로 나선 나는 평소와는 다른 나였기에 연수자일행들의 포복절도를 자아냈지만 난 그 순간이 어쩌면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으며 지어 행복하기까지 하였고 또 그런 복색으로 당장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기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참으로 잊을수 없는 순간이여서 지금도 잊을수 없는 그날의 장면을 찍은 사진을 자주 보군 한다. 한복은 력사를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시기에 기원하였으며 그로부터 오랜 시기를 거치면서 생활의 편리에 따라 개량되였다. 지금의 한복은 생활의 편리에 따라 많이 개량되였지만 전과 같이 가볍고 입기 편리한 특점은 여전히 변함없다. 특히 계절에 따라 색상과 원단이 다를뿐 평민이든 대통령이든 모두 같은 한복을 입는다는것이 한복으로서의 특점이라고 할수도 있다. 한복은 지금까지 우리 백의겨레만의 복장으로서 입으면 반듯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을 주고있다. 귀국하기전에 서울 동대문시장을 돌아보게 되였는데 촘촘히 들어앉은 가게마다 각양한 옷을 전시한 광경이 눈길을 끌었으며 더우기 손님을 깍듯이 대하는 태도는 시장을 나오는 내내 즐거운 마음이 되게 하였다. 동대문지하철을 리용하려고 역에 들어서니 한복전문 매점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눈이 부시게 화려한 원단들이 눈길을 끌고 발목을 잡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거기다 온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친절하고도 자상하게 원단과 한복의 종류를 설명하는 사장아저씨의 모습은 너무나 보기 좋았다. 연수에서 한복을 알게 되였고 또 한복에 갓과 정자관을 쓴 잊을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 있는데다 원단 또한 너무도 좋아 결국은 하늘색 한복 한벌을 맞추기에 이르게 되였다. 비록 옛식이 아닌 개량한복이지만 색상이 우아하고 또 가볍고 입기 편하여 새로 맞춘 한복을 입어보는 순간 실로 말그대로 날듯한 기분이였으며 이름할수 없는 심정이였다. 집에 돌아와 한복을 옷장에 정히 걸어놓으면서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복은 우리 민족 고유의 민족복장으로서 한복에는 민족의 넋과 얼이 그대로 슴배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한복을 모르고 한복을 잊는다면 결국 민족의 뿌리를 모르고 민족의 정신을 잊는다는것과 다름이 없을것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슬기롭고 지혜로운 민족이다. 한복자락을 날리면서 일제의 통치에 맞섰고 한복자락을 날리면서 구국의 길에 나섰으며 한점 후회없이 젊은 청춘을 바쳤었다. 또한 한복자락을 날리면서 남부녀대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살길을 찾아 여기 만주로 건너와 삶의 터전을 닦고 이제는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여 자신의 삶을 떳떳이 영위해나가고있다. 지금도 단오명절이나 추석명절 그리고 큰 행사나 모임, 환갑잔치나 결혼잔치때면 남녀로소가 한복을 입고 어울려 즐거움을 나누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며 타민족의 부러움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한복은 이렇듯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서 우리 민족과 함께 해왔으며 또 지금도 함께 해오고있다. 나는 오늘도 옷장에 정히 걸려있는 한복을 보면서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한복을 입는것도 좋지만 우리 민족의 넋과 얼을 잊지 않을것이며 더우기 우리 말과 우리 글을 가르치는 신성한 사업을 하는 나로서는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우리 말과 글은 물론 우리 민족전통문화도 옳바로 전수하여 그들이 계승발전시키게 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복을 입어도 떳떳할것이며 또 한복을 입은 나를 보고 모두가 보기 좋다고 칭찬한다면 진정 마음으로 부끄럼없이 받아들일수 있을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복을 입는 나로서의 진정한 의미가 될것이다.
49    비빔국수, 비빔정 댓글:  조회:2170  추천:0  2013-12-30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국수라면 그저 달콤새콤하면서도 시원한 육수에 꾸미를 얹어 먹는것으로 생각하였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가보고 지금 우리가 먹는 국수외에도 콩국수, 비빔국수, 김치말이국수 … 등 국수는 국수지만 재료와 먹는 방법에 따라 다름을 알게 되였다. 지난 여름 한국에 갔다가 한국생활을 피부로 느껴보려는 생각으로 며칠간 일하게 되였는데 때는 불볕무더위라 나의 힘에 알맞는 일이 주방설거지일것 같아 결국 주방설거지 일을 해보게 되였었다. 내가 일한 곳은 서울 신도림역에 붙은 디큐브백화점안에 있는 “사리원소반”이라는 한식집이였다. “사리원소반”은 3대째 이어오는 음시점으로서 일찍 황해도 사리원에서 남편의 병치료를 위하여 갖가지 과일양념에 소고기를 재웠다가 불고기로 대접하여 좋은 효과를 보았던 비방으로 물려온 음식점이였는데 불고기와 랭면이 위주였는바 랭면은 물랭면과 비빔랭면이였다. 처음에 물랭면, 비빔랭면하니 어리둥절하였었는데 물랭면이란 바로 육수에 꾸미를 얹어 먹는것이고 비빔랭면은 잘게 다진 소고기, 고추가루 등 양념으로 육수가 없이 말아먹는 국수였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10까지 열두시간동안 수없이 쏟아지는 그릇들을 가시고 다시 그것을 크기와 용도에 따라 분류해서 지정된 곳에 가져다놓는 외에도 불고기에 쓰이는 불판을 닦아서 공급하는 작업이 바로 설거지였다. 더우기 한식집이라 밑반찬으로 나가는 작은 재털이같은 그릇들과 크고작은 물컵들이 얼마인지 헤아릴수가 없어 한두패가 식사를 마치고 나가도 그릇들은 무더기로 쏟아져나왔었다. 게다가 백화점안의 음식점이라 쇼핑을 하다가 들어오기에 때와 시간이 없이 손님이 들이닥쳐 편히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면 그래도 매상고가 올랐다고 부장님이 일당에 팁을 올려주는데 그때면 하루의 피곤은 저만치 물러가고 걸음도 가벼이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주방안에는 주방장을 실장님으로 부주방장을 과장님으로, 밑반찬을 장만하는 녀성을 찬모로, 밥을 장만하는 사람을 밥모로 불렀었는데 내가 일하였던 “사리원소반”에는 실장, 과장외에도 실장보조로 일하는 젊은이가 더 있었다. 일하러 간 첫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담배쉼을 할 때 나는 중국에서 왔으며 체험삼아 해보려 한다고 하였더니 그 젊은이가 나를 찬찬히 보는데 그 눈길이 싫지 않았으며 어딘가 푸근하고 정겨웁기까지 하였었다. 그렇게 하루이틀 지나 알게 되였는데 그 젊은이의 이름은 김정연으로서 어릴때 목단강에서 살았었고 후에 청도에서 자랐으며 지금은 국적을 한국으로 옮긴 상태였었다. 식당의 일이란 손님이 들이닥칠 때도 바삐 돌아쳐야 하지만 하루일을 마무리하는 마지막정리가 더 힘들었다. 그때면 자기앞의 일을 깨끗하게 해놓아 이튿날 아침 아무런 지장없이 일할수 있게 해놓아야 하는데 짧은 시간 많은 일을 해야 하였다. 손님들이 떼를 지어 들이닥쳐 씻은 그릇들을 미처 옮기지 못할 때면 정연씨가 다가와서는 말없이 그릇들을 옮겨주었으며 퇴근전 마지막정리는 한번도 빼놓지 않고 나의 곁으로 다가와서 일을 도와주군 하여 제때에 깔끔하게 마무리할수 있어 항상 고마운 마음이였다. 내가 고맙다는 인사말을 할때마다 그는 그저 정다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씩 웃는데 그치군 하였다. 그날은 일요일날이라 오후 두시가 넘어서도 손님이 그치지 않아 담배한대 피워볼 사이없이 바삐돌아치고있는데 정연씨가 나의 곁으로 다가와서 “내가 잠시 일을 해줄테니 어서 이 국수를 뒤칸으로 가지고 가서 잡수세요”라고 말하며 비빔국수가 그들먹이 담긴 큼직한 국수사발을 내 앞으로 내미는것이였다. 언제부터 비빔국수가 어떤 맛일가 궁금했던 나는 얼결에 국수사발을 받아들고 뒤칸으로 가 국수를 비비고  가득 집어들었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목이 꺽 메여오면서 눈굽이 젖어드는걸 어쩔수가 없었다. 내 나라에서, 내 집에서 국수한그릇에 돈이 얼마랴만 이곳에서는 매일 눈요기로만 하던 국수가 아닌가. 헌데 그 국수를 같은 동포인 정연씨가 나에게 진심을 담아 권한것이다. 그렇듯 힘들게 일해도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건만 정연씨는 항상 날 도와주고 그렇듯 많은 랭면을 팔아도 누구하나 맛보란 말이 없었건만 정연씨는 나에게 권하지 않았는가. 한국인도 같은 동포이지만 정연씨는 동포이면서도 같은 조국에서 태여난 형제였기에 항상 함께 할수 있었다. 비빔국수는 비록 갖가지 양념에 비벼먹는 국수지만 국수의 참맛을 알수 있었다. 내가 한국이라는 곳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어울려 보낼 때 그속에서 정연씨는 나에게 참된 인간애와 형제의 정을 그대로 주어 감동을 먹게 하였으며 진정한 정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정연씨가 권한 비빔국수를 먹으면서 나와 정연씨가 맺은 정은 비빔정이라는 생각을 가져보았으며 그 정을 영원히 간직하리라 다지였다.
48    기회는 잡을줄도 만들줄도 알아야 한다 댓글:  조회:2442  추천:0  2013-12-30
지난달 무더운 여름을 맞아 강변에 위치한 문화광장에서 “화허”맥주제의 뒤를 이어 “쉐화”맥주제가 열렸었는데 두 맥주제가 근 이십여일동안 열린것 같다. 거리로 나설때마다 홍보가 요란스럽기에 저녁을 먹고 산보도 하는겸 천천히 걸어서 강변문화광장에 가보니 생각과는 엄청 규모가 크고 사람들 또한 발디딜 틈이 없이 꽉 들어찼었다. 사람들도 벅적이는데다 줄지어 늘여놓은 포장마차에 들어앉아 양꼬치에 맥주를 느긋하게 마시면서 즐겁게 담소하는 사람들이 이채롭게 눈에 띄였으며 거기다 겨끔내기로 자기들의 양꼬치와 독특한 음식을 소개하면서 손님의 발목을 잡기에 여념이 없는 장사군들 또한 땀동이를 쏟고있었다. 포장마차들과 좀 떨어진 곳에서는 문예공연과 곁들여 맥주마시기 시합도 끼워넣으면서 열을 올리고있어 말그대로 축제의 분위기를 그대로여서 그저 서있기만 해도 축제의 일원이 된 기분이였다. 그런 와중에도 자기도 모르게 포장마차에서 양꼬치구이나 다른 음식들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을 눈빗질해보게 되였다. 이 가운데 혹 우리 민족도 전통음식을 자랑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헌데 한족은 물론 몽고옷차림을 한 몽고족이나 신강옷차람을 한 위글족은 한눈에 안겨왔었지만 한복차림을 한 우리 민족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수 없어 다시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첫집부터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한족, 몽골족, 위글족들이 양꼬치구이나 자기들의 특색인 빵을 굽어파는 모습만 보일뿐 우리 민족은 보이지 않았으며 우리 민족이 보이지 않으니 우리의 전통음식도 보일리 만무하였다. 그러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한국TV에서 저녁마다 방송하는 “6시 내 고향”이 머리에 떠오르는건 어쩔수 없었다. “6시 내 고향”을 보면 마을마다, 곳마다 모두 자기들의 특산을 자랑하는 축제를 열고있는데 사계절마다 모두 자기 고장의 특산이 나름대로 있을것이니 한국전역에는 말그대로 사계절 모두 축제가 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렇게 열리는 축제는 자기 고장의 특산에 대한 자랑과 홍보일것이니 앞으로 밝은 전망을 약속하는 마당이라고 하는것이 가장 적절할것이다. 처음에 나도 그런 매일과 같이 열리는 축제를 보면서 어딘가 리해가 가지 않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앞을 내다보면서 밝은 전망을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수 없었다. 사람들이 비록 어디에서 무엇이 나고 어느 고장이 산좋고 물좋은 고장이며 어느 집 음식이 맛좋다는건 대충 알고있으나 속속들이 그렇게 세세히 아는 사람들은 필경 소수에 지나지 않을것이니 축제를 열어 홍보를 하는것은 자못 필요하지 않을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내 고장의 특산물이나 나만이 가지고있는 음식만드는 노하우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일수 있을것이니 즐거운 결과를 가져올것은 불보듯 뻔할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맥주축제의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마당에 우리 민족 전통복장을 입고 나서서 내 고장이나 내 고장의 특산물, 나만의 음식만드는 노하우를 선보인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볼수 없는것이 너무도 마음아파왔었다.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좋은 기회가 너무 적고 또 그런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고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하기 나름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가만히 앉아서 기회를 기다린다면 말그대로 기회가 적거나, 없을수 있거나 또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을수 있을것이지만 하냥 성공을 념두에 두고 사색한다면 기회는 잡을수 있을것이며 또 만들수도 있을것이다. 문제는 기회에 대한 인식을 옳게 가지는것이며 또 기회를 잡을줄 알고 만들줄 아는것이 곧 성공으로 향하는 디딤돌이 된다는 리념을 똑똑히 세워야 할것이다. 자기 고장이나 자기의 노하우를 자랑하려면 차례지는 기회를 잡을줄도 알아야 하지만 자기절로 기회를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것이다. 그 어디서든 축제가  열린다면 달려가서 자리를 잡고 홍보하기에 나서야 할것이며 또 자기절로 축제를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널리 알릴수도 있지 않을가? 남의 뒤를 따라간다는 생각을 없애고 남의 선진적인 리념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우리도 이제부터 한국의 축제를 우리의 고장에 접목시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생각해보게 된다.
47    자신심은 열쇠 댓글:  조회:2230  추천:1  2013-12-23
저녁식사를 마치고 강변로를 따라 산책하는것은 몇년전부터 시작하여 거의 매일이다싶이 견지한 일이다보니 나로 말하면 굳어진 습관이 되였다고 할수 있다. 지난해 여름이라고 기억된다. 그날도 나름대로의 생각에 골몰하면서 강변로를 따라 산책하노라니 강변광장에서 몇백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줄을 맞추어 울려나오는 신바람난 곡에 따라 체조춤을 추고있는 정경이 그대로 한눈에 안겨왔었다. 체조춤을 추고있는 그들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하기에 가까이 가서 구경하게 되였는데 그순간 참으로 좋은 운동이구나 하는 생각이 갈마드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나는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역시 강변로를 산책하다가는 다시 강변광장에 가서 체조춤을 추는 대오를 멍하니 바라보았으며 바라보면 볼수록 마음이 끌려가는건 주체할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 바라보면서 가진 생각이라면 나도 저속에 합류하여 추면 될수 있을가 하는 생각이였는데 비록 그런 생각을 가져보았지만 감히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며칠동안 내내 지켜보면서 나도 추면 될수 있을가 하는 생각을 거듭하기에 머무르고 말았었다. 그렇게 며칠 지나서 하루는 집을 나설 때부터 오늘은 나도 그 대오에  합류하여 단련을 시작하리라는 생각을 단단히 먹고 그대로 행동에 옮기게 되였는데 하루이틀은 처음 시작하는 일이여서 생소하고 어색하였으며 좀은 힘에 부쳤지만 진지하고도 참답게 배우노라니 차츰 동작도 익숙해지기 시작하였을뿐만아니라 생소하거나 어색한감은 꼬물만큼도 없었으며 오히려 하루 일상중 마지막으로 반드시 마쳐야 할 일과로 여기게 되였으며 내가 서야 할 자리가 어느 한곳에 당연히 있는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지금까지 체조춤을 매일이다싶이 견지하고있는데 춤을 추면서 자연 우리들의 생활과 련계시켜보게 되는건 어쩔수 없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고많은 일에 봉착하게 되는데 때로는 어떤 일에 자신도  참여하고싶거나 또 참여하여 아주 한번 멋지게 해보고싶은 마음이 생겨날 때가 있다. 허나 선뜻이 손을 대거나 몸을 담을 때는 너무도 적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인소가 작용하겠지만 주요하게는 자신심의 결여가 큰 작용을 일으키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자신심을 사전에서는 “어떤 일을 해낼수 있거나 꼭 이루리라고 스스로 굳게 믿는 마음”이라고 풀이하고있는데 나는 여기서 “나도 할수 있다”, “나도 될수 있다”라는 말로 나름대로 풀이하고싶다. 헌데 우리는 어떤 일에서 그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아 하고싶지만 선뜻 “나도 할수 있다”, “나도 될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자세대신 “나도 할수 있을가?”, “나도 될수 있을가?”라는 의문을 앞세우기에 용기보다는 주저심이 먼저 작간을 부림으로써 결국 선뜻이 나서지 못하게 되는데 그건 때로는 자기에게 차례지는 다시오기 힘든 더없이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리는데까지 이르게 하기도 한다. 결국 다 지나간다음, 다시는 돌아올수 없을 때에야 후회하게 되는데 일생에 후회약만큼은 없다는것도 그때에 가서야 심절히 깨닫게 된다. 그런들 결국 행차뒤 나발이고 다 쑤어놓은 죽인데 어쩌랴. 문제는 어떤 일이든 자신의 앞에 놓였을 때 그 일이 자신에게 합당한가 또는 자신에게 리로운가를 먼저 판단해본다음 그 일이 확실히 자신에게 합당할뿐만아니라 리로울 일이라면 더는 우유부단하\지말고 인차 행동에 옮겨야 할것이다. 물론 그러자면 자신심이 있어야 할것인바 자신심이 있다면 그건 곧바로 그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진것이라 할수 있다. 문열쇠를 가졌다면 들어가는데는 어려움이 없을것이 아니겠는가? 체조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며칠동안 우유부단하다 결국 행동에 옮기게 되였는데 그건 늦게나마 자신심이 생겼기때문이며 그 자신심은 결국 체조춤을 출수 있는 열쇠를 가진것이다. 늦게나마도 자신심이 생긴것이 다행이지만 첫날 체조춤을 보면서 참 좋은 운동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행동에 옮겼더라면 하루라도 더 일찍 체조춤대오에 가담하여 더 즐겁게 건강을 위했지 않았을가 생각해보게 되며 체조춤이라는 기회는 다행히 스쳐지나는 기회가 아니였기에 잡을수 있었다는 생각도 함께 해본다. 이제 어떤 일에서든 자신심을 가질것이리라 다져본다. 그것은 그 일을 할수 있는 열쇠를 가지는것이기때문이다.     
46    뿌리가 든든해야 건실하게 자랄수 있다 댓글:  조회:2286  추천:2  2013-12-23
얼마전에 있은 중소학생문체예술절의 검열식에서 중소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우리 민족복장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은 참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더우기 소학교학부모들이 민족복장에 상모를 돌리는 모습은 마음이 즐겁기에 앞서 감동과 격정으로 부풀어오르기까지 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상모돌리기는 우리 민족전통문화로서 오늘날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생소할수도 있다. 헌데 학부형들이 잊혀져가는 민족전통문화를 아이들앞에서 재현하니 어찌 감동을 먹지 않겠는가. 전에 우리가 자랄 때는 마을마다 청년활동실에 선전대가 있어 대대로 내려운 우리 민족문화를 접할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떠나가고보니 그런 일도 호랑이 담배피우던 옛일로 되여버린지 오래다. 하다보니 우리의 자라나는 후대들은 우리 민족문화를 접할수가 없기에 민족복장에 장고춤만 고유한 민족문화인줄로만 착각하고있게 된다. 그런중에서도 다행스러운것은 우리의 학교들에서 학생들의 능력발전과 민족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킬것을 념두에 두고 사물놀이, 상모춤, 장고춤 등을 배워주고있을뿐만아니라 해마다 예술절, 운동회 등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여 고유한 민족문화를 선보이고있어 삼복염천에 얼음물을 마신듯 거뜬해나는 마음이다. 내가 살고있는 시의 민족종교사무국과 조선족문화관에서는 해마다 음력설을 맞이하여 조선족음력설맞이 문예야회를 조직하고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널리 선보이고있어 매년 음력설림박이면 자연히 문예야회가 기다려지는 마음이다. 내가 몸담고있는 학교에서도 지금까지 한국으로부터 선물받은 사물놀이기구를 가지고 사물놀이활동을 진행하고있는데 네가지 타악기가 어울려 울리는 소리를 들을때마다 귀맛이 좋은건 물론 우리 민족문화가 잊혀지지 않고 전해내려가고있다는데서 더 즐거워나는 마음이다. 지난해 내가 몸담고있는 학교에서는 건교65주년 경축행사를 가지였었는데 학생들의 문예공연은 수준급의 가무단공연보다 못지 않아 모두의 혀를 끌끌 차게 하였으며 공연내내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끊기지 않았었다. 특히 학생들의 북춤과 장고춤, 상모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무용이여서 전반공연을 클라이막스로 끌어올렸을뿐만아니라 가슴에 감동을 그들먹이 부어주었다. 우리는 간혹 길을 가다가도 “아리랑”이나 “노들강변”노래가 들려오면 자기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왜서일가? 바로 우리 민족의 애창곡이자 대대로 전해내려온 민요가락이기때문이다. 헌데 문제는 이런 민족전통문화가 날따라 잊혀져가고있다는것에 가슴이 아프지만 멀리 흩어져 살면서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지성인들이 있어 조금은 위안이 된다. 허나 몇몇 지성인들의 노력으로는 힘겹지 않을수 없다. 우리의 민족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서 가장 주도적역할을 해야 할 부문이 바로 우리의 학교가 아닌가 생각한다. 배움에 어섯눈을 뜨고있는 소학생이나 한창 학구욕으로 끓어번지고있는 중학생들에게 고유한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전수하여 그들이 대대로 전해내려온 우리 민족의 문화를 알게 한다면 우리의 민족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이리라 믿는다. 그 어떤 식물이나 모두 뿌리를 가지고있음은 모두가 알고있는 일이며 뿌리가 건실하지 못하거나 썩는다면 그 식물이 건실하게 자라지 못하거나 죽는다는 도리쯤은 삼척동자도 알수 있는 일이다. 오직 뿌리가 땅속에 깊숙이 묻혀서 든든하게 자리를 잡는다면 더말할나위없이 건실하게 자랄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족전통문화를 한그루의 나무로 생각한다고 할 때 우리의 중소학교나 기층의 문화관은 바로 민족전통문화라는 나무의 뿌리라고 생각하는것이 합당할것 같다. 우리의 중소학교나 문화관에서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전수하고 계승발양시킨다면 우리의 민족전통문화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푸르르게 그 빛을 발할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중소학교나 문화관들에서는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보다 다양한 활동에서 체현시키기를 바라며 유관부문들에서도 물심량면으로 적극적인 지지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45    행복념주 댓글:  조회:2202  추천:1  2013-12-16
거위털같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안해는 메주를 쑨다고 콩을 삶았다.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는 순간 콩삶은 구수한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온몸에 그대로 퍼져왔다. 저녁술을 놓고 메주를 하는 안해를 도와 삶은 콩을 믹스기로 보드랍게 가노라니 저도 모르게 지나간 옛일들이 파라노마로 펼쳐지면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우리가 자라던 어린 시절은 참으로 지지리도 가난하던 시기라 군입질할것이라고는 오직 누룽지뿐이였는데 쌀이 귀하다보니 그것조차 흔치 않았다. 그때는 눈도 많이 내려 마을의 길량켠과 나무가리, 집가리에 항상 무릎넘어 오게 눈들이 덮여있었으며 입은 옷이 변변치 않아서인지 추위도 지금보다 훨씬 더 혹독하였었다. 일년중 가장 즐거운 날이 물론 설이였지만 설이외에도 즐거운 날이 있었는데 그런날을 꼽는다면 김장을 하는 날과 메주를 쑤는 날이다. 김장을 하는 날과 메주를 쑤는 날이 즐거운 까닭이라면 그날이 설날과 마찬가지로 여느날보다 먹을거리가 있기때문이며 따끈한 집에서 온집식구가 북적일수가 있어서이기도 하였다. 메주를 쑤는 날이면 어머니는 전날저녁부터 잘 다듬은 콩을 깨끗이 씻어 물에 담근다. 그렇게 담근 콩은 이튿날 점심무렵까지면 퍼질대로 푹퍼지게 되는데 그 콩을 가마에 넣고 부엌아궁이에 장작불을 피워서 몇시간을 들여 삶는다. 그때 당시 우리가 살고있던 집은 낮다란 토벽에 초가이영집이라 벽이 엷어 한기가 배여들어왔었는데 아궁이에 불을 피워 가마가 끓어번지면 인차 김이 뽀얗게 서리게 된다. 그러면 그 서려오르는 김에 토벽이 부실부실 떨어져 잘못될가봐 아궁이에 불을 피워서 김이 서리면 인차 화로에 장작이 탄 불덩이를 퍼담아놓아 김이 서리는걸 막아야 했다. 그렇게 화로에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퍼담아놓으면 우리는 인차 김치움에서 감자를 꺼내와 이글거리는 화로불에 파묻어놓는데 좀만 지나면 감자가 노랗게 익었었다. 그렇게 익은 감자를 꺼내여 까맣게 된 껍질을 바르고 호호 불면서 먹을때면 정말 진수성찬이 울고갈 정도로, 셋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으니 지금 그날을 그려보는 이 순간에도 입에서 군침이 스르르 도는건 어쩔수가 없다. 그렇게 몇시간을 두고 장작불을 피워서 콩을 삶노라면 콩가마가 끓어올라 넘치는 수가 있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하여 어머니는 된장을 몇숟가락쯤되게 꺼내여 풀어서는 콩가마에 넣는데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콩가마가 끓어넘치는 일이 없게 되는것이였다. 어머니가 푹 익은 콩을 가마에서 꺼내 메주를 할 때면 우리는 바늘에 실을 꿰여서는 푹익은 콩을 한알한알씩 그 실에다 꿰는데 다 꿰여놓으면 마치 구슬을 꿰여놓은듯, 념주를 꿰여놓은듯한것이  보기만해도 장한 일을 한것같아 스스로도 어깨가 으쓱해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렇게 실에 꿰여놓은 콩을 나무가리나 짚가리우에 쌓인 눈을 파헤쳐 묻어놓고는 집으로 들어와 어머니가 만들어놓은 메주를 하나하나 날라다 방웃목에 펴놓은 벼짚우에 줄지어 세워놓는것으로 어머니의 일손을 방조해주었다. 메주가 다 만들어지면 시간도 한참지나 눈에 파묻어놓은 콩을 꺼내는데 그사이 추운 날씨로 눈속에 파묻힌 콩은 꼬당꼬당 얼어있는데다 그우에 눈까지 새햐얗에 묻어 참으로 보기만 해도 군침이 스르르 돌았다. 그런 콩을 한알씩 입에 넣을때면 콩에 묻은 눈이 먼저 사르르 녹은다음 언콩알이 이발에 닿이는데 그때의 그 시원한 감각은 참으로 무어라 형용할수 없었다. 그렇게 한알한알 빼여먹노라면 재미도 재미지만 맛이 일품인것으로 하여 마치도 천하를 독차지한듯한 느낌이였다. 그렇게 만든 메주로 간장을 달이는 날에는 또 파잎을 그채로 뜯어서 그안에 금방 달여 식힌 간장을 넣고는 그 간장을 조금씩 빨아먹는 맛은 몇십년이 흘러간 오늘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믹스기로 콩을 갈다말고 아들애와 함께 그제날처럼 바늘에 실을 꿰여 그 실에다 메주콩을 한알한알 꿰기 시작하였다. 한알한알의 구슬을 꿰듯, 한알한알의 념주를 꿰듯 정성들여 꿰였지만 아빠트다보니 그 옛날 짚가리나 나무가리에 쌓인 눈에다 파묻던것처럼 파묻을수가 없어 결국은 베란다의 창을 열고 걸어놓는수밖에 없었다. 한식경이 지나 메주를 다 만들고 창밖에 걸어놓은 콩뀀을 들여와서 안해와 아들애 셋이서 한알한알 뽑아 먹게 되였는데 비록 눈이 묻지 않았지만 언콩이 이발에 대일때의 그 찡한 맛은 여전하였었다. 처음으로 그런 콩을 먹어보는 아들애는 너무나 신기하다는듯이 냠냠 맛나게 먹으면서 정말 별미라고 연신 외우는것이였다. 그러는 아들애를 바라보면서 나와 안해도 얼굴에 웃음을 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와 안해 그리고 아들애가 먹는것이 어찌 한낱 평범한 메주콩에 비기랴. 전에도 그랬거니와 오늘도 그것은 한알한알의 행복의 념주라면 가장 적절할것 같다. 전에는 어머니가 삶아준 콩을 한알한알 꿰여서 먹었다면 오늘은 안해가 삶아놓은 콩을 나와 아들애가 한알한알 꿰여서 세식구가 단란히 앉아서 먹고있지 않는가. 한알한알의 콩은 한올한올의 사랑의 마음이며 그 사랑의 마음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마음으로 새기였으니 그 사랑의 마음을 새기는 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했었다. 사랑의 마음은 한겹한겹 쌓여 이루어져야 감동을 줄수 있고 또 그 감동이 행복을 안겨주게 된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한줄에 꿰였으니 그것은 곧 행복의 념주가 아니겠는가. 지천명의 나이가 다 되여가는 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안해가 메주를 쑬때마다 행복의 념주를 한알한알 꿰면서 참사랑의 맛을 진정으로 음미하리라 나름대로 작심하였다.
44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댓글:  조회:2578  추천:3  2013-12-16
요즘 많은 쟁명이 일고있는 영화 “황해”를 이름할수 없는 감정과 무거운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보았다. 영화가 끝났지만 한동안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노라니 아파오는 가슴을 다랠수 없었다. 비록 영화이지만 “황해”를 보고나니 90년대부터 거세차게 일어난 코리안드림과 그로부터 변화되여온 우리 조선족사회를 뒤돌아보지 않을수 없었다. 한국으로 가기 위하여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부자의 꿈을 안고 밀항선에 올랐으나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무소식인 사람들, 고리대로 돈을 꾸어 한국행을 꿈꾸었지만 결국 사기당하여 툭털고 밖에 나앉게 되자 절망으로 저세상을 선택한 사람들, 기차역에서, 공항에서 서로 끌어안고 울면서 아이공부돈만 마련하면 인차 오마하고 굳게 약속하였지만 십년, 이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돌아오지 않고있는 사람들, 처음가서는 진빚을 갚기위하여서라도 돈을 부쳐오던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돈도 전화도 끊겨 행방불명이 되였거나 아예 가정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어찌 한둘뿐이며 한두가지 사례라고 할수 있겠는가? 안해나 남편을 떠나보내고 처음은 가정살림에 몰두하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뀜에 따라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 마작판이나 술판을 찾아다니기 시작한것이 인이 박혀 허송세월하다 결국 가정을 잃은 사람들, 겨끔내기로 애인을 하다 결국 소중한 가정을 잃고 후회막급인 사람들, 소식이 없는 안해를 찾기위하여 갖은 방법을 다하여 한국으로 갔지만 안해는 낯선 사람보듯하더라는 이야기도 우리에게는 그렇게 낯선 이야기가 아닌 사실로 각인되여 있다. 힘들고 어지러운 노가다현장에서, 식당에서 아글타글 한푼두푼 모으겠다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하다보니 병이 골수에 드는줄도 모르다 어느날인가 힘이 빠져 쓰러진것이 한국땅에서 영영 눈감은 이가 어찌 한둘뿐인가! 한국의 그 어느 공사장이나 모두 우리 중국조선족들의 구슬땀이 깃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좀더 잘살아볼 의념으로 한민족이라고 고국이라고 찾아갔지만 랭대를 받아야 했으며 기껏 부려먹으면서 로임을 미루다 결국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린 한국의 악덕사장들, 한국에 가고싶은 심리를 리용하여 꺼리낌없이 돈을 사기친 한국의 의미지를 흐리웠거나 흐리우고있는 사장들이 어찌 한두사람뿐이라고할수 있는가? 비록 김구남이 살인청부업자의 제안에 의하여 한국으로 살인을 떠나지만 그것은 빚을 갚고 소식이 끊긴 안해를 찾기위해서 어쩔수 없이 선택한 길이며 한국사회에 김태원같이 위선의 탈을 쓴 인간나부랭이들도 없지 않은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즘도 간혹 뉴스로 나오지만 사실이야 어떻게 되였든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범행을 저지르는것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비록 영화에 나오는 김구남이나 면정학, 김태원이 우리의 주변에서 실존하는 인물의 형상을 그대로 옮긴것은 아니지만 코리안드림이 일어난후의 중국조선족과 한국인을 바탕으로 부각되였음은 의심할수 없다. 하기에 영화 “황해”는 우리 중국조선족뿐만아닌 한국인들도 한번쯤 거울에다 자신들을 비춰보면서 뒤돌아보도록 한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것이며 한국이란 곳에서 열심히 그리고 착실히 일하여 부를 축적하면서 선진적인 리념을 배워야 할뿐만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의 가족도 지킬줄 알아야 할것이다. 한국인 역시 같은 단군의 후손으로서 보다 넓은 마음으로 포섭해주어 함께 보다 떳떳한 자세로 세상을 열어가는것이 좋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살면서 앞으로 내처 달리는것도 좋지만 가끔은 한번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서 다듬는것도 빼놓을수 없이 중요한 일이며 또 그렇게 한다면 앞으로 내달리는데 차질없는 더 큰 동력으로 될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영화 “황해”로부터 중국조선족과 한국인 모두 서로가 뒤를 돌아보면서 더 밝고 찬란한 래일을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비록 영화라고는 하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영화전반에 도끼질이 란무하고 연길이 현실을 떠나 너무 지저분하게 나오며 면정학이 연길의 호텔에서 최리사의 패거리를 도끼로 토막을 내는것은 현실을 너무 탈리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중국을 모르고 중국의 조선족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많겠는데 이런 장면을 본다면 오해가 생길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심도 가실수 없다.
43    나무가 점적주사를 맞았다 댓글:  조회:2194  추천:1  2013-12-09
 지난 여름에 퇴직교원이 자신이 애지중지 가꿔온 은행나무 두그루를 무상으로 지원하여 은행나무 두그루가 교정에 자리를 잡게 되였다. 은행나무는 우리가 살고있는 고장에서 웬만해서는 가꾸기 힘든 나무인데 그 퇴직교원이 담을 넘어서게 가꾸어온것을 교정에 옮겨오다보니 정말 운반으로부터 구덩이를 파서 그 구덩이에 옮겨 묻기까지 갓난 애를 움직이듯, 신주단지 모시듯 하였다. 은행나무는 잎으로부터 열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귀중한 약재라고 하는 귀한 나무인데다 묘목도 아닌 사람의 다리통만큼 굵고 높은 담을 훌쩍 넘어서게 다 자란 나무를 옮겨오다보니 자연 정성을 쏟게 되였던것이다. 만물이 싹을 틔우는 새봄이 되자 자연 지난해 교정에 자리한 은행나무에 눈길이 가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지난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잘 견디여는 냈는지? 생명이 말라가고있는지 아니면 끓고있는지? 의혹을 떨쳐버릴수가 없어 결국 나무가 서있는 곳에 가보니 웬걸 은행나무도 다른 나무들과 내기라도 하듯 겨끔내기로 물기를 올리면서 한창 가지에 싹을 틔우기에 바삐 돌고있을줄이야. 그런 은행나무를 바라보노라니 자연 지난해 금방 옮겨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금방 옮겨심은후 은행나무가 인차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영양실조가 와서 잘못될가 저어되여 또 뿌리를 어서 빨리 내리게 하기위하여 영양제와 성장제 점적주사를 놓게 되였었다. 하긴 내 나이 지천명의 고개에 올라서도록 나무가 점적주사를 맞는건 처음 보는 일이여서 매양 신기하기만 하였지만 그에 앞서 나무가 정말 점적주사효과를 볼수 있을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드는건 어절수 없었다. 헌데 봄이 날따라 깊어가는 오늘 은행나무가 묘목으로 옮겨와 먼저 자리를 한 나무들과 겨루기라도 하듯이 물을 올리고 싹을 틔우고있는것을 보니 과연 지난해의 점적주사가 효험을 보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문득 우리네 삶을 비춰보게 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여나서 살아가노라면 자신의 마음에 맞는 직업이나 환경에서만 살아갈수 있는것만은 아닐것이다. 때로는 렬악한 환경속에서 새로운 자기를 찾기 위하여 모지름을 써야 할것인바 그러자면 자연 적응이란것을 떠날수 없다. 아마 그래서 일찍 생물학자 다윈은 적자생존이란 말을 했을것이다. 환경을 개변할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적응이 더 필요한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응하려면 자신이 생활하는 주위를 세심히 관찰해야 할것이며 세심히 관찰하느라면 주위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것인바 그것은 곧 적응하는데 필요한 “영양제”가 될것이다. 또한 한 사람의 옳바른 성장을 위하여서는 그에게 따끔한 충고와 정확한 가르침이 있어야 할것인바 그것은 정말 그 무엇으로도 바꿀수 없이 보귀한것으로 될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뿌리를 내리고 옳바로 성장할수 있도록 도와줄수 있는 “성장제”로 될수 있기때문이다. 반대로 제멋에 사는 세상이라고 제멋대로, 자기가 아는대로 해나가면서 다른 사람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도태되기 쉬울것이며 또 자신의 옳바른 성장을 념두에 두고 하는 충고를 곡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돌이킬수 없는 후회의 고배를 마시게 될것이다. 시간이란 가면 다시 오지 않고 한번 건너간 강물을 두번 다시 건느지 못하며 기회란 쉽사리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은 영원한 불변의 철리이다. 애초부터 적응을 위하여 또한 옳바른 성장을 위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제”와 “성장제”를 마다하지 말고 스스로 찾아서 쓴다면 그 효과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것이며 날따라 경쟁이 치렬해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립지를 튼튼히 굳힐것인바 그것이 곧 적자생존이 아니겠는가. 우리 고장에서는 보기 힘든 은행나무가 자랄수 있은것도 그리고 다시 교정으로 자리를 옮겨와 뿌리를 내리면서 새롭게 자랄수 있은것도 모두 알심들인 정성도 있었지만 때에 맞는 영양제와 성장제가 크게 한몫하였기때문일것이다. 하다면 우리네 삶에도 때에 따라 영양제와 성장제가 필요하지 않을가? 나는 물을 올리며 싹을 틔우기에 한창 바삐 보내는 은행나무를 다시한번 바라보면서 앞으로의 멋진 모습을 그려보았다.
42    위기는 스스로 만들어가고있다 댓글:  조회:2622  추천:4  2013-12-09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오늘 이 시각까지도 알알해나는 가슴을 진정할수 없다. 고중2학년 학생이 선생님을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살고싶은 생각이 꼬물만큼도 없이 죽고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하여 선생님을 당황하게 하였을뿐만아니라 선생님이 그 학생의 마음을 돌려세우느라고 모든걸 제쳐놓고 며칠동안 보냈다고 한다. 알고보니 이 학생은 어려서 선후로 두 부모가 다 출국하고 년로한 할머니와 보내였는데 얼마전 할머니마저 저 세상으로 영영 가버리니 이제 더는 의지할 사람이 없게 되였던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정신적으로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할 그 학생이 너무도 눈물나게 불쌍하다. 금방 출국붐이 일어날 때는 한쪽부모나 량부모가 없는 학생들이 적어서 인척관계가 있는 분들이 맡아 돌봐주던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두가 떠나다보니 이제는 정말 인척관계가 있는 사람도 없어져 거의 완전히 홀몸으로 있는 애들로 되여있다. 내가 몸담고있는 학교도 지금 편부모학생들이 90,5%를 차지하니 우리 학생들의 정황을 더 말치 않아도 알수 있는것이다. 전에 저녁자습이 끝나서 학교대문을 나설 때면 어두운 밤길이 걱정되여 학생들을 마중나온 학부형들로 학교대문을 꽉 메운 풍경은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비가 내리는 저녁에 우산이나 비옷을 들고 학교까지 나온 학부형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세상부모의 마음을 헤아려볼수 있어 참으로 즐거워나는 마음을 금할수 없었으며  공부가 끝난 학생들 또한 부모님과 손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은 너무도 보기 좋아 퇴근길에 오른 나의 발걸음도 공연히 가벼워났었다. 헌데 지금 이런 풍경은 낡은 터에서 이밥먹던 소리격으로 되였으며 혹 가물에 콩나듯 간혹 몇몇 학부형들의 모습밖에 볼수 없다.. 언젠가 학부모들과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는데 저녁에 학생을 마중하는 학부형은 다섯중 한사람도 없었고 학생이 집으로 돌아와서 좀더 공부할 때 곁에서 동무해주는 학부형은 다섯중 한사람뿐이라는것에 나름대로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노라니 전에 북경대학입학생을 둔 학부모가 떠올랐는데 고중졸업까지 매일과 같이 아이가 하학하여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렸으며 함께 식사는 물론 저녁자습이 끝나서 돌아와 공부할 때면 따뜻한 우유를 한고뿌 풀어주고 곁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신문, 잡지를 보면서 아이를 동무해주었다고 한다. 제멋대로 자라서는 하늘을 치받드는 락락장송이 될수 없듯이 훌륭한 인재로 키우자면 가정교육이 최우선시되여야 함은 아마도 삼척동자가 아는 일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가정, 학생, 학교가 삼위일체의 교육망을 형성할때만이 우리의 학생들이 건실하게 자라날것이며 명문대입학생이나 큰일을 할 재목으로 만들수 있을것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용무가 있어 한족중학교로 가게 되였는데 마침 학생들이 하학할 시간대였다. 그때 학생들을 마중나온 학부형들이 대문을 꽉 메워 발을 들이밀 자리조차 없었다. 학교 대문당직실옆에는 학부형대기실로 크게 두칸을 만들어놓았는데 그 두칸에 학부형들이 차고도 넘쳐나 대문을 메우고있었다. 어쩌면 전에 우리 학부형들이 만들었던 풍경을 지금 한족들이 만들어가고있는것에 무거워지는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우리의 교육이 위기를 맞아가고있다고 직시한지도 손꼽을 정도로 오래전의 일이다. 처음에는 학생수의 격감으로 뒤따른 페교, 한족학교로의 전학 등으로부터 시작되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교육을 살리려고 발버둥치면서 교육을 선행하는 우량한 전통을 가지고있는 민족으로 자부해왔다. 헌데 지금은 그것이 점점 잊혀져가는 현실이 아닌가 자문해보게 된다. 학생수의 격감이나 한족학교로의 전학도 우리의 책임이지만 현재 학생들에게 부모로서의 따뜻한 사랑을 주지 못하면서 어린 나이의 가슴에 그늘을 지어주고있는것도 미뤄버릴수 없는 우리의 책임이 아닐가? 자식의 앞날을 위하자면 돈이 있어야 하고 또 그돈을 장만하는것도 좋은 일이지만 한번가면 다시는 오지 못하는 자식의 성숙의 시기를 곁에서 지켜주면서 사랑과 조언을 주는것은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제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교육은 정말 만회할수 없는 위기를 만들어가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삼위일체에서 하나만 빠진다면 이빠진 치륜이 돌아가듯 윤활하게 돌아갈수 없을것이다. 한마디로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나가는것이 바로 우리의 후대들을 바르게 자라나게 하는 명약이고 위기를 이겨나가는 바른 선택이 아닐가 생각한다.
41    뿌리없이 자랄수 있을가 댓글:  조회:2238  추천:6  2013-12-03
일전에 나의 이웃으로 있었던 당씨의 저녁식사초청을 받고 당씨네 집으로 다녀온적이 있다. 당씨네는 원래 나와 한아빠트단지에서 이웃으로 살았댔었는데 시내변두리에 가지고있던 단층집이 파가이주호에 들다보니 다시 이주하게 되였던것이다. 새로 이주한 당씨네 층집에 다달아보니 층집앞에 아름드리 비술나무가 모진 세월속에서도 그대로 드팀없이 버티고서있는것이 한눈에 안겨왔었다. 그날 저녁 당씨와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식사를 끝마치고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는데 전에 이웃으로 살았었지만 그날 저녁 당씨를 새롭게 알수 있었으며 또 그로하여 당씨를 더욱 우러러보게 되기도 하였다. 당씨는 만족이였는데 소학교공부도 바로 끝마치지 못하였다. 허나 그가 만족의 력사에 대한 구술이나 당씨가족사에 대한 구술을 듣노라면  그가 소학교공부도 바로 마치지 못하였다는 말이 의심될 지경이였다. 비록 만족의 언어문자는 잊혀져 자신도 모르지만 만족의 고유한 문화전통과 가족사는 반드시 알아야 조상들에게 미안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에서 스스로 자학하여 만족의 력사와 민족전통에 대하여 공부하였다는것이다. 더우기 품을 넣어 당씨가족사를 정리하였으며 당씨가족협회를 내와 당씨가 회장으로 활약하고있는데 일년에 한번은 대형활동을 만족의 풍속습관 그대로 진행한다는것이다. 이야기과정에 당씨는 스스로 편찬한 당씨가족사와 당씨가족활동때마다 기념으로 남겨둔 사진들을 보여주었는데 복장이나 행사장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만족들의 풍속습관대로 하였기에 말그대로 눈길을 끌었으며 만족을 료해하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될수 있을것 같았다. 그날 저녁 격동으로 도도하게 열변을 토하는 당씨를 보노라니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남을 어쩔수 없었다. 소학교공부도 바로 마치지 못한 당씨가 비록 잊혀진 자기 민족의 언어문자에 대하여서는 몰라도 전통문화에 대하여 그렇듯 숙달하고 또 자신의 가족사를 일목료연하게 정리한것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수 없었기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문화전통에 대하여서는 얼마나 알고있고 또 민족문화전통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얼마만한 노력을 들였으며 자기의 가족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나보았던지 질문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한 가정의 가족사가 근근히 그 가정의 가족사에만 국한되는것만은 절대 아니다. 한 민족의 구성원이 가정이라는 핵이 모여서 이루어진것이라면 한 가정의 력사도 마찬가지로 한 민족의 일부를 체현하는것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하다면 한 가정의 가족사를 옳게 정리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 민족, 한 시대의 축도로 될수 있는바 그것 역시 민족문화전통의 계승에서도 한몫할수 있을것이다. 력사는 흘러가는 물과 같이 한번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다면 지나간 력사를 옳바로 기록하여 후대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임무는 바로 현재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일것이다. 요즘같이 지구가 촌으로 되여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아가는 우리 후대들에게 조상들의 발자취를 알려주는것은 자못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다. 구경 자신의 성씨 본적지는 어디이며 조상들은 어느 년대에 월강이민이 되였으며 어디에서 보따리를 풀고 삶의 터전을 닦아 오늘날에 이르게 되였는가에 대하여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똑똑히 교대해주어야 하며 그들이 그것으로 가족과 우리 민족의 력사를 깨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 단군의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것이며 뒤를 이어 가족사를 열심히 써나갈것인바 그것이 바로 력사를 기록하는것이고 문화와 전통은 그로부터 자연 이어질것이라고 믿는다. 그날 저녁 당씨와의 이야기에서 나는 많은것을 깨쳤으며 또 새로운 마음도 먹게 되였다. 나에게는 아직 어머니가 계시기에 이제 더 미루지 말고 어머니에게서 우리 가족사에 대하여 상세히 알아본다음 내 능력껏 가족사를 정리하여 나의 동생들과 나의 아들에게 전해주리라 다지였었다. 뿌리를 똑똑히 알게 하여 부끄럼없이 떳떳이 살아가게 하고픈 마음이다. 당씨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오니 층집앞의 비술나무는 여전히 그자리에 그대로 끄떡없이 서있었다. 두사람이 팔을 벌려 안아도 다 안지 못할것 같았는데 아마도 백년은 실히 될것 같았다. 그런 나무를 바라보느라니 만약 뿌리를 든든히 내리지 못하였다면 또 뿌리가 적거나 없었다면 저렇듯 고목으로 자랄수 있었을가 하는 생각이 잠간 머리를 스치였었다. 순간 이제 가족사를 정리하면 제목을 “뿌리”라고 달것이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40    새 신을 신고 낡은 길을 가다 댓글:  조회:2099  추천:5  2013-12-03
이 십여년간 우리의 교육이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온것만은 부인할수 없는 현실임은 모두가 자인하는 바이다. 자질교육으로부터 시작된 요즘의 새로운 과정개혁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고견을 내놓았고 지어 책자로 펴내기까지 하였으며 수많은 강습반과 회의를 열고 보급하느라고 열을 올리였으며 지금도 열을 올리고있다. 특히 한족들인 료녕성의 위서생선생의 뒤를 이어 요즘은 또 산동성 두랑구중학교의 교수모식을 따라배우느라고 열을 올리고있는데 그들의 교수모식이 확실히 선진적인것만은 부정할수 없는 일이며 또 우리가 마땅히 따라배워야 함도 절실한것만은 사실이라고 본다. 우리보다 먼저 경험하여 좋은 성적을 따내고있으니 마땅히 우리도 그런 우수한 경험들을 우리의 교육과 결부하여 우리의 교육에 도입한다면 진정한 우리의것이 될것인즉 그러면 우리의 교육도 희망이 넘치는 교육이 될것임은 누구나 다 말할수 있는 리치이다. 문제는 새로운 교육리념을 어떻게 대하고 타인의 경험을 어떻게 들여오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다녀본 강습이나 회의를 본다면 새로운 감을 주는듯 싶지만 결국 따지고보면 전의 답습이 많고 새로운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는 생각이다. 또한 교수경색이나 교수연구회를 다녀오면서 참관교수를 하고나면 마음이 흡족할 때가 아주 적다는것이다. 문제는 교수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해서 개운하지 않은것이다. 마치도 무대우에서 연출하는 연극배우의 연기같고 학생들도 너무 일치해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일 때가 많다. 매시간마다 교원이나 학생들 모두가 저렇게만 한다면 그런 교수는 정말 말그대로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할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알아보면 한시간의 참관교수를 위하여 알심들여 조직한 한차례의 연극일뿐 평시는 그럴수 없다는것이다. 그러니 자연 한숨이 몰려올라오는건 어쩔수 없었다. 새로운 과정개혁이든 아니면 두랑구중학교 교수모식이든 관계없이 우선 관념을 갱신하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관념갱신이 바로 새로운 교수리념을 갖는다는 말로 될것인즉 새로운 교수리념을 가진다면 그건 쉬운 말로 새 신발을 신었다함이 적절할것 같다. 하다면 새로운 과정개혁에 따른 새로운 교수리념을 갖추었다면 이제부터 그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할것이며 또 실천에 옮길때야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고 효과를 가져올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리념은 가지고있지만 그 리념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전의 모식 그대로 해나간다면 새로운 리념은 아무런 효과도 일으키지 못하는것으로 될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새 신을 신었지만 새로운 길로 가지 않고 옛날의 흙길로 고집하고 걸어간다면 새 신은 새 신으로서의 빛을 내지도 못하고 낡은 길의 흙탕물을 뒤집어 쓸것이다. 허나 반대로 새 신을 신고 새로 닦은 길로 걸어간다면 활개를 치면서 걸어도 새 신에는 아무런 흙탕물도 튀지 않고 오히려 걸음도 거뿐할것인즉 그때는 새 신을 신은 보람이 있을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교수리념을 갖추고 새로운 교수모식을 배웠다고 할지라도 실제 교수에 실천하지 않거나 인입하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낡은 길을 고집하는것인즉 얼핏 생각에는 별일없어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후대들에게 죄를 짓는 일로 될것이며 자신을 한번쯤 반성해볼 일일것이다. 새로운 교수리념으로 새로운 교수모식을 배워서 그대로 실제교수에 실천하고 인입하는 일인자로 거듭난다면 그건 곧바로 새 신을 신고 새로운 길로 활개를 치며 대활보로 걷는것이 될것인즉 걸음도 경쾌할것일뿐만아니라 만인의 박수를 받을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허나 반대로 새 신을 신고 낡은 길을 고집한다면 그건 곧바로 눈감고 야웅하는 격일것인즉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 아닐가.  
39    사랑이란 서로를 메워주는것 댓글:  조회:1745  추천:1  2013-11-25
일전에 우연히 한국에서 돌아온 고향사람을 만난적이 있다. 한국나간지 10년도 넘어 20년에 가까워오니 참으로 반갑지 않을수 없었다. 한사람의 인생에 몇개 되지 않는 20년인데 그 20년 가까운 세월을 한국에서 보내고 돌아온 고향사람은 만난 첫순간부터 겉차림이나 말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변화가 많다는 느낌이였다. 전에 풍편에 남편과 리혼하였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지라 무람없이 이야기를 나누던중 왜 남편과 헤여졌는가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었다. 헌데 너무 뜻밖의 말이 그의 입에서 튀여나올줄이야. “너무도 늦게 리혼한것이 후회될뿐이오. 왜 그런 남자를 만나 살았는지 나 자신을 질책하게 된단 말이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어라 할말을 찾지 못하고 그녀만 멍하니 쳐다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주 담담히 그 말을 내뱉는것이였다. 고향에서 살 때 한생산대에서 일하면서 정이 들어 사랑을 속삭이다가 결혼하여 아들딸을 본 그였다. 지금 젊은이들은 겪어도 보지 못한 소설같은 련애사끝에 올린 결혼식이고 자식낳고 남편공대 잘하면서 마을에서는 말그대로 깨알이 쏟아지도록 금슬이 좋은 부부로 정평이 나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지만 고향에서 살 때 그들부부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억척스레 일하여 남먼저 벽돌기와집을 짓고 유족하게 살았었다. 90년대, 너나없이 떠나는  한국나들이는 그들부부도 잘 살아보려는 부푸는 가슴을 안고 떠나게 하였다. 그들이 떠나던 때만 하여도 그들은 마을에서 부자행렬이였지만 더 잘살아보려는 욕심은 어린 자식들을 떼여두고 한국행을 선택하게 하였던것이다. 헌데 함께 한국으로 간 부부였지만 몇년후에는 결국 리혼하여 남남이 되는 현실을 만들어야 하였다. 구경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하게 모르지만 비록 함께 간 한국이지만 하는 일이 다르다보니 함께 있지 못하게 되였는데 그것이 서로를 의심하는 화근으로 되였던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것이 결국은 헤여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였는데 자식들도 부모들의 처사에 따르겠다는 태도였댔다니 리혼은 너무도 쉽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게 되였던것이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까지는 거론하지 않더라도 부부가 동심일체인건 부부로 살아보았거나 현재 부부로 사는 사람들은 다 알것이리라 믿는다. 서로가 마음이 통하고 정이 통하여 부부의 연을 맺고 백년도 못사는 인생에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것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남녀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말 속담에 한입안의 혀도 깨물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서로 다른 성격으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인이 된만큼 모든것이 돌아가는 기계의 치륜처럼 척척 맞물릴수 없는것이 또한 부부사이가 아니겠는가. 하다면 살아가면서 서로의 부족점을 메워주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일것이며 그러면 관용이 이루어질것인바 또 그런 사랑이라면 그 어떤 암초에도 견디여 낼것이다. 혹 백년도 못사는 인생에 왜 하필이면 맞지 않는 사람과 걸리적거리면서 살겠는가 반문해올수도 있다. 하긴 질그릇이 땅에 떨어져 산산쪼각이 난다면 다시 원모습으로 되기는 힘들것이다. 문제는 땅에 떨어지기 직전이다. 그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멈추어서 무엇이 부족하였던가를 생각해보고 서로 한발 물러서서 서로를 메워준다면 흐렸던 하늘이 금방 개이듯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메워주는 일이 반복되여 간다면 부부일지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해할것이며 그런 속에서 석양을 맞이하게 될것인즉 살아가면서 부부가 사랑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고 공부하는대로 실천해나가는 일은 자못 중요한 일인바 그러면 아물지 못할 아픈 마음의 상처는 만들지 않을것이리라 생각한다.
38    목마른데 시급한것은 물이다 댓글:  조회:2034  추천:0  2013-11-25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알찌근해나는건 어쩔수가 없다. 현성중학교 교장질하던 분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 나눕자 그 밑의 젊은 교원을 교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도 못하겠다고 나눕었다는것이다. 전같으면 교장도 장자라 서로 하자고 하겠건만 지금은 하라고 추대하여도 하지 못하겠다고 나눕는 판이니 좀은 이상하다고 할지는 몰라도 실은 그 마음을 충분히 리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십년전까지만해도 우리의 학교들은 퍼그나 흥성한 편이였다. 물론 농촌소학교들은 문을 닫기 시작하였지만 현성에 있는 소학교나 중학교들은 그한시기만은 전보다 학생들이 불어났으니 흥성할법도 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헌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농촌소학교의 페교를 이어 향진의 중학교들이 학생고갈로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현성의 중학교들도 한해가  다르게 학생들이 눈에 뜨이게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문제란 다름이 아니라 학교를 꾸리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참새는 작아도 오장륙부를 다 갖추고있듯이 비록 학생수가 날따라 줄어들지만 갖출건 다 갖추어야 하고 할것은 다해야 하니 자연 힘들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거기다 몇해전부터 나라로부터 소학교와 초중은 학생들로부터 일전한푼 걷어들이지 못하게 하고 나라로부터 학생머리수에 따라 돈을 주는데 원체 학생수가 적다보니 내려오는 돈은 말그대로 새발의 피라 사무용품과 출장비지불도 에떼우기 힘들 정도라고 할수 있다. 그러다보니 겨울이 되면 일부 작은 학교들에서는 돈때문에 열공급을 제대로 할수 없어 손발이 얼어 고생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이런 정황에서 령도직책을 짊어진 분들은 자연 자나깨나 학교운영에 필요한 자금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하고 그것으로 발버둥질을 쳐야하니 그 압력이란 참으로 자신만 알고있는것이라면 어떨가? 일부 책임자들은 여러 지성인이나 단체들을 찾아서 손을 내밀고있지만 “빌어온 장이 사흘을 못넘기”듯이 그렇게 좀씩 얻어오는 자금으로는 근본문제를 해결할수 없는 상황이다. 몇해전까지만해도 대학입시만 끝나면 우리 조선족학생들이 문, 리과장원을 차지하고 자랑찬 모습으로 우리 나라의 명문대인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으로 떠나갔지만 이제는 그런 일들도 옛말로 다가설 날이 되여오고있다. 학생들이 많을 때니깐 어쨌든 좋은 학생도 많을수 있지만 지금은 초중졸업생이 고작 몇십명이여서 고중을 꾸리기위해서라도 제발 고중공부를 해주십사하고 불러들여야하니 진정 손꼽는 학생을 고르기란 말그대로 눈을 씻고도 힘겨운 일이 아닐수 없는 현실인즉 명문대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수 없는 일로 우리와 점점 거리가 멀게 될것이다. 이런 고충을 헤아려 우리의 교육을 관심하는 학자, 전문가 지어는 민족간부들까지 동참하여 우리 교육의 미래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리고있는데 참으로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일이 아닐수 없다. 헌데 문제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열띤 토론이고 리론이지 실제로는 아무런 일도 해결할수 없다는것이다. 우리의 민족간부들도 이런 회의에 참석하면 침방울을 튕기면서 당금이라도 큰문제를 해결해줄 태세로 나오지만 돌아앉으면 잊음이 너무 헤퍼서 아쉬움만 한가슴 가득 남긴다. 사막에서 갈증에 모대기여 입술까지 초들초들 마른 사람에게 그때 당시로서는 가장 시급한것이 한방울의 물이라도 입에 들어가는것이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물은 어떤 물을 마셔야 하며 물은 어디가야 얻을수 있고 또 어떻게 담아와야 한다는 등등 텅빈 말로 시간을 보낸다면 아마 그 갈증에 모대기던 사람은 갈증이 더 심해져 탈수로 쇼크를 일으키거나 잘못하면 생명도 위험할수 있을것이다. 우리의 교육이 획기적인 전변을 가져오는것도 자못 중요하겠지만 현재로서는 학교운영자금을 지원받는것이 더 시급하다고 본다. 어떤 회의에서의 열띤 발언보다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그건 너무도 감사한 일이고 또 우리의 교육을 진정 관심하는 지성인이나 민족간부의 미덕이 아닐수 없다. 실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여야 교육에서의 획기적인 전변도 있게 될것이며 따라서 더 많은 학생들을 명문대에 수송할수도 있지 않을가.  
37    배우며 실천하는 삶 댓글:  조회:1814  추천:0  2013-11-18
언젠가 봄에 있은 일이지만 기억에 새롭다. 봄날이였지만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련며칠동안 비가 계속 내려 출퇴근하기조차 불편하였다. 그날도 저녁자습이 끝나 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는데 비가 부실부실 내려 우산을 받쳐들고 비속을 걸을수밖에 없었다. 우산을 받쳐들고 목을 가뜩이나 움츠리고 내가 사는 아빠트구역까지 다가서니 희마한 가로등만이 외롭게 비속을 비춰주고있었는데 아빠트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의 대문은 닫혀져있고 밖에는 승용차 한대가 떡 버티고 서있었다. 이 비내리는 밤에 왜 그곳에 서있을가 하는 의문도 잠간 승용차가 울리는 경적소리를 듣고 대뜸 짐작이 갔다. 아빠트구역정차장으로 들어가야 할 승용차인데 대문이 닫겨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운전수가 내려 문을 열자니 비가 내리여 아빠트접수실의 경비를 부르느라고 울리는 경적임에 틀림없었지만 문을 열어줄 사람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대문에는 사람이 나드는 작은 문이 달려 열려있었지만 나는 선뜻 다가가서 대문을 활짝 열어 젖혀주었다. 문이 열리자 승용차는 서서히 움직이면서 안으로 들어왔는데 나의 옆을 스치는 순간 운전수가 차창을 내리우면서 “고맙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기는것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설레여 왔다. 층계를 올라 집으로 들어가는 내내 아니, 잠자리에 들어서도 흥분된 마음을 눅잦힐수가 없었다. 그러노라니 자연  북경에 있는 동생네 집에 갔다가 있었던 일이 떠오르면서 낯모를 그 처녀애가 눈앞에 우렷이 떠오르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해겨울 북경에 있는 동생네집으로 갔다가 하루는 너무도 심심하기에 동생이 만류하는것도 고집을 부리면서 8리교시장에 다녀오게 되였다. 8리교시장은 북경의 통주구에 있는데 역시 통주구에 자리잡고있는 동생네집에서도 공공뻐스로 거의 이십분넘어되는 거리였다. 문제는 8리교시장에 가면 물건값이 싸고 없는 물건이 없어 마치도 시골장거리를 방불케하였기에 나는 그곳을 다녀오기를 좋아했던것이다. 그렇게 시장에 가서 이곳저곳을 돌면서 눈에 띄우는 사고싶은 먹거리들을 가득사서 들고 공공뻐스역으로 나오는데 길거리에서 보험회사의 인원들이 설날이 가까워오니 주련과 복자를 새긴 광고용 붉은 종이를 무료로 건네주기에 받아보니 쓸만할것 같아 그대로 말아쥐고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니 마침 애된 처녀애의 옆에 빈자리가 있기에 엉뎅이를 붙이고 앉게 되였다. 차가 떠나자 나는 손에 말아쥔 그 붉은 종이가 풀리지 않고 또 구겨지지 않게 하느라고 자연 신경을 쓰게 되였다. 이때 옆에 앉은 그 처녀애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면서 나의 손에서 그 붉은 종이말이를 낚아채서 곱게 말고는 자기가 메고있는 가방에서 접착제를 꺼내여 여러곳에 정성스레 붙인다음 다시 나의 손에 쥐여주는것이였다.  “이러면 괜찮을거예요” 챙챙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 처녀애를 바라보니 이제 고중졸업반이 아니면 대학에 갓 입학하였을 나이였는데 얼굴에 생글생글 웃음을 물고있는것이 참으로 애되고 예뻤다. 너무도 뜻밖에 벌어진 광경에 나는 일순간 할말을 잊고 넋을 잃은채 처녀애만 퀭하니 바라보았다. 일파만파 일어나는 마음의 격동을 억누를수 없어 연신 고맙다는 말만 곱씹었었다.  내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릴 때도 처녀애는 나의 물건을 들어서 차문밖에까지 건네주면서 조심해서 다녀가라고 인사까지 깎듯이 하는것이였다. 공공뻐스가 흰연기를 뿜으며 나의 시야에서 멀어질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못박힌듯이 서서 부풀어오르는 마음의 격정을 억누르면서 처녀애에게 부디 행운이 깃들기를 마음으로 기원하였다.  동생네 집에 도착하여서도 나는 그 낯모를 처녀애를 머리에 떠올리면서 진정할수 없었다. 나에게 삶의 도리를 가르쳐준 처녀애가 고맙기만 하였다. 사실 내가 비내리는 저녁에 대문을 열어주고 운전수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게 된것은 전적으로 그 처녀애에게 돌려야 하며 또 그 처녀애의 덕분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또 살아감에 있어서 작디작은 일에서일지라도 타인을 위하여 타인에게 베품을 주는것에 대하여서 입이 반지르르하게 말은 잘해왔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겨 실천해보지는 못한 나 자신이여서 지금 이 시각까지도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길 없으며 또 자신이 작고 초라해보이기까지 해나는건 어찌할 방법이 없다. 헌데 그날 8리교에서 돌아오다 만난 처녀애의 행동은 무언의 깨우침으로 되여 나를 아프게 채찍질해주었으며 또한 나로 하여금 행동으로 실천해보게끔 하였는데 그 실천은 참으로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타인에게도 편안함을 줄수가 있어서 좋았다.  배움이라면 단지 지식의 배움뿐만이 아닌 여러분야의 각가지 배움이 망라됨을 새삼스럽게 느껴보았다. 그가운데서도 특히 삶의 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바 배우고 깨치며 실천하는  과정이 바로 신나는 삶, 즐거운 삶으로 만들어줄것이며 풍요로우면서도 후회가 적은 삶을 만들어줄것이다. 또한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면 자신의 인격적위치도 높아질것이며 대방에게 푸근하고도 편안함을 줄것인바 서로가 삼복간 무더위에 차디찬 얼음물을 마시기라도 한듯이 온몸이 시원해날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오늘 이 시각에도 나에게 이런 도리를 깨우쳐준 그 낯모를 처녀애가 고맙기만 하다. 그 처녀애가 깨우쳐주었기에 나는 대방에게 베품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되였으며 또 나의 생활에 실천을 해보게 되였는데 실천의 결과는 참으로 즐거움만 한가득 선사받게 되였다. 이제부터 살아가면서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참된 인간이 되는 참된 도리를 깨쳐 그 배운 도리를 실천에 옯기는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그러면 비록 이렇다할 업적을 쌓는 위인의 인생이 아닌 한낱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인생이라할지라도 나로서의 기쁨과 즐거움, 풍요로움과 다채로움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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