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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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동 차 전차에 비해 성냥곽 같은 교통도구.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자동차만 있으면 누구보다 고귀하고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동차를 인간의 생명보다 값지다고 여기며 횡충직당(横冲直撞),방약무인이다. 자동차도 하나의 문화다. 자동차문화에서 자동차의 껍떼기와 기계보다도 중요한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동차운전의 룰과 윤리도덕성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자동차껍떼기만 중요시하고 껍떼기밖에 있는 인간, 인간의 규칙, 도덕성은 무시하고 있으니, 이 아니 어리석은가!   왕도 (王道) 근대 이단적인 학자 고홍명(辜鸿铭)이 중국의 “왕도”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천하 왕도는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왕도고 또 하나는 왕팔단도(王八蛋道)이다.” 고씨의 의하면 왕도는 중국인의 정통의 치국지책의 길이고, 왕팔단도는 중국의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는 폭력, 비적의 천하를 빼앗고 다스리는 엉터리같은 도리라는것이다. 사실 늘 부르짖는 왕도 보다, 왕팔단도가 현실 사회에서 발호하는 일은 고금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헤밍웨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헤밍웨이는 글쓸때는 언제나 서서 쓰는 버릇이 있었다. 그가 사망한 뒤 그의 묘지명은 이렇게 새겨 있었다. “내가 서지 못함을 용서해주십시오.”   니체의 입맞춤 세상의 이단아로 세인들에게 눈총을 받고 이해 받지 못한 천재적 철학자 니체는 어느날 거리에 뛰쳐나갔다. 그리고 우연히 주인에게 학대를 받는 말을 끌어안고 미친듯이 입맞춤을 했다. 사람에게 천대받는 말에서 처량하고 고독한 자신의 모습을 느꼈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여인 화가 밀러가 이런 말을 했다. “세인들은 피카소가 여색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피카소가 10명 여자를 거느렸거늘 그에게는 10가지 미학사상이 생겼습니다.”   강간 명나라 조크다. 한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강간당했다며 관원에게 하소연했다. “제가 우물옆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가 다가오는통에 뒤에서 당했어요.” “그럼 그때 왜 일어나지 않았나?” “일어 나면 혹시라도 그 물건이 빼질까봐……”   하하. 사실 화통이란 말이다.   불공평 “자연계의 모든 동물들은 수컷이 암컷보다 더 예쁜데, 인간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예쁘다. 이 아니 불공평한가!” 어느 호사가 남자의 말이다.   남편  퇴근하면 유치원에 들러 아이를 데려오고, 시장에 가서  채소감을 사서 집에 와서 상주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식사가 끝나면 설걷이를 하는 인물   아내  남편에게 24시간 바가지를 긁는 직업   시어머니 며느리를 관할 하는 여황, 요즘은 역전되여가고 있음.   《신화자전(新华字典)》 최근 보도된 중국뉴스에 따르면 ,《신화자전》은 2015년에 5억부를 넘은 동베스트셀러라 한다. “가장 환영받는 자전”과 “최다 베스트셀러”2개 항목에서 기니스북기록에 올랐다.   1953년 세상에 나온 뒤로부터 이 사전은 “중국인 여러세대를 영향준 사전”이라 평가를 받고 있다. 나 역시 소학교 1학년때부터 《신화사전》을 보풀이 일도록 보면서 자랐다. 세계인구제일대국인만큼 발행부수도 어마어마한건 경이로운 기록이다.   흥미로운 일은, 《신화자전》의 가격 설정 표준이 늘 1근 돼지고기값이라 한다. 이 사전 출판사인 상무인서관 한어중심의 주임 여계림(余桂林)씨도 이게 맞는 사실이라고 언명했다. 국민적 자전값을 국민이 애식하는 돼지고기값과 맞먹게 정하는 발상은 그야말로 식(食)의 대국 다운 발상이 아닐수 없다.   뱀 한 남자가 나무밑에서 뱀을 만나 겁을 먹고 꼼짝 안하고 섰다. 뱀도 사람을 보고 꼼짝 안고 있었다. 그 사람이 뱀을 피해 가자 뱀 역시 다른데로 사라졌다. 남자가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 일을 꺼내면서 “사람과 뱀이 누가 누굴 무서워 하는거지?”하고 물었다. 아내가 대답하기릴 “당신의 눈에서 그 놈은 독사지만, 그놈의 눈에서는 당신은  더 독한 상대이지요.”   근대의 명문작가 서지산(许地山)의 수필《뱀》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씨는 결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쌍방이 다 상대를 겁나해야 평화가 있는것이다. 만일 한쪽이 담대하게 접어들었다가는 서로 상대방을 상해주기 쉽다.”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가르쳐준 명문이다.   불행 일본의 한 남자가 1945년 8월 6일 동경에서 히로시마로 피난왔다가 원자폭탄의 피폭을 당했다. 그래서 8일날, 나가사키로 원폭을 피해 피난을 갔다. 9일 미군이 제2차로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폭의 피해를 또 당했다.   다행 홍루몽연구의 권위로 이름난 유평백(俞平伯)은 다난 다행의 학술대가이다. 그의 명작 《홍루몽연구》가 만일 문화대혁명시 모택동의 지명비판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것이다. 사실 모택동이 유씨를 비판한 진짜 용의는 대만에 있는 호적을 비난하기 위해서였는 바, 유씨는 불행하게 희생양이 됐던것이다. 《홍루몽연구》가 1920년대 금방 탈고 됐을때 유평백은 그만 그 원고를 부실하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학자 주자청(朱自清)이 헌 책방난전에서 우연히 그 원고를 발견하여 건져냈다. 원래 원고를 줏은 사람이 파지로 팔아넘겼던것이다. 이렇게 불행중 다행으로 원고가 《홍루몽변(辨)》이란 타이틀로 공식 출판하게 되었다.   1950년대, 유평백은 아버지가 작고했을때 서점에서 차금을 하여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그 빚을 갚을 돈이 없어서, 그 대신 옛날 원고에 문장 2편을 첨가하여 《홍루몽연구》로 재출간하였다. 이 책을 본 젊은 학자 이희범(李希凡) 등의 비판을 받아 유평백은 “부르조아반동학술권위의 대표”로 되었다. 이렇게 《홍루몽연구》의 비판이 문화대혁명재난의 서막을 열었다. 그러나 문혁종식후 90살까지 천수를 누린 유평백은 홍루몽연구대가로 평가받고 수많은 영예를 지니게 되었다.   해외여행 요즘 중국인의 해외 여행붐이 일고 있다. 쇼핑을 즐기고 타국문화를 이해하는 여행은 당연히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어떤 중국인 남자가 로마에 가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석조기둥에 칼로 새겼다고 한다. “왕모모, 도차일유(到此一游)!”  그 양반은 쾌재를 불렀다. “중국 고대 문인문객들도 나보다 못하단 말야. 그들은 기껏해야 국내를 유람하면서 제사(题词)하고 글을 새겼지만 난, 국외에까지 와서 글을 새겼으니까…”   진리 나는 공자를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욱 사랑합니다. 나는 고인을 사랑하지만, 자유를 더욱 사랑합니다.   양계초의 말이다. 무술변법 실패후 일본으로 망명한 양계초는 서양의 신사상, 관념을 수용하여 새로운 지식인, 계몽가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그의 스승인 강유위는 동시에 해외에 망명했지만, 여전히 옛것을 빌어 제도을 바꾸려는 이념과 함께 공자를 “국교”로 하는 보수적인 보교(保教)운동을 벌였다.   이에 반기를 든 양계초는 보수적인 사상을 타파하고 세계적조류에 맞게 진리, 자유, 애국 등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 역설했다. 결국 강유위는 보수적 지식인으로 끝났지만 양계초는 근대 중국을 주름잡는 신지식인의 대표로 민국시대까지 대활약했다.   유행 중국에서는 유행은 험난한 길의 과정과 같다. 이를테면 “유행음악”에 대해 건전하지 못하다고 비판 부정했다가 다시 또 스스로 유행음악을 살린다. 유행은 부정과 부흥의 자식이다.   거짓말 거짓말이 “진리”로 변장했을때 그 거짓말을 지어내 사람마저 거짓말을 믿게 된다.   《논어》와 주산 일본 근대자본주의의 대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치(涩泽荣一)는 《〈논어〉와 주산》이라는 명작을 발표하였다. 시부사와는 유교적 《논어》는 인류의 윤리도덕성의 심벌이고, 주산은 자본주의 물욕의 상징이라 밝히면서, “주산은 《논어》로 튕겨야 하며, 《논어》또한 주산에 의거해야 진정한 부유활동을 할수 있다. 그러므로 《논어》와 주산은 멀고도 가장 가까운 존재다”고 말했다. 부유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도가 넘으면 인류의 도덕을 실리 편향에 의해 인성의 위기를 초래하기 쉽다고 단언했다. 이를 치유하는 양약이 바로 유교문화고전이며 인생의 지침인 《논어》라고 지적.   시부사와의 견해가 일본 근대의 길을 상징한다. 일본은 유교와 근대화를 모순으로 보지 않고 협조와 합치로 보았다. 그러나 중국은 유교의 논리를 근대화와 대립충돌되는 장애물로 보았기때문에 유교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계몽운동이 일어 났던것이 아닌가. 70년대에도 유교비판을 하던 중국이 21세기에 들어와서 국학열을 올리면서 유교를 부흥하는 붐이 일고 있으니, 아이러니인지 무언지 모르겠다.
200    (86) 손문과 리홍장의 “량광독립” 밀모 댓글:  조회:3701  추천:16  2017-01-0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6) 김문학 손문과 리홍장의 “량광독립” 밀모     《국부년보초고》를 보면 1894년 6월 손중산은 “륙호동(陸皓東)을 데리고 리홍장에게 상서(上書)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국민당계렬의 손문전기에서 손문이 리홍장을 만나 직접 상서하는 이야기는 늘 등장하는 고정메뉴이다. 리홍장에게 “공상업발전, 교육제도개혁, 인재선발제도의 개혁 등 리상적인 플랭을 제기했다”고 하면서 리홍장이 “자네는 관화(북경어)도 모르는데 어찌 관리가 될수 있냐?”고 핀잔을 주며 지극히 랭담했다는 일화를 전하고있다. 이에 실망한 손문이 자체로 혁명조직을 무어 혁명에 투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만의 대표적인 문호, 문명비평가 리오(李敖)의 《손중산연구》에 따르면 이런 일화는 국민당이 손문을 미화하기 위한 날조라고 고증하고있다.   이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1900년 손문과 리홍장이 련합하여 량광(兩廣)독립을 도모했다는 력사사실은 확실히 실재했다. 지금 국내 사학자들이 밝힌 자료에 의해 필자도 이를 알게 되였다.     손문은 근대 중국의 국부로 불릴만큼 민주혁명의 대선구자이며 리홍장은 청말 원로중신으로서 당시 비스마르크,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세계 3대 제상”이라 불린 대정치가, 외교가였다.     손문과 리홍장, 이 서로 상이한 정치가들이 어떤 현묘한 관계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근대사의 관심사가 아닐수 없다. 필자가 섭렵한 근대사자료를 종합하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량자 사이에는 확실히 량광을 청나라에서 독립시키고자 했던 움직임이 있었던것은 사실이다.     시간적으로 보아 “량광독립”을 꾀한것은 의화단봉기와 때를 같이해 련쇄작용으로 8국련합군이 침공, 청나라정부가 대단히 약체화된 시기였다.     때는 바로 1900년이다. 일청전쟁의 패북으로 굴욕적인 “마관조약” 체결로 “매국노”로 지탄당한 리홍장은 실의에 빠진 몇년을 이겨내고 서태후의 중용으로 다시금 량광총독으로 발탁된다. 동산재기를 이룬 그는  서태후의 지시로 강(康)ㅡ량(梁)의 유신당을 탄압하는 중임을 맡은것이다.     그런데 리홍장은 강ㅡ량의 조상의 묘를 파헤치는 한편 암암리에는 강, 량과 간접적 거래를 하고 서신래왕도 했다. 관계는 참으로 기묘했다.     의화단운동의 발발로 말미암아 리홍장과 혁명당 손문의 관계 또한 복잡, 미묘하게 되였다. 의화단의 운동으로 여지없이 란을 겪고있는 사회와 조정을 노린 손문은 찬스가 도래했다고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혁명무장봉기발동을 예정한 동시에 리홍장과 손잡고 리씨가 주도한 량광독립을 밀모했다.     손문이 리홍장을 노린 리유는 무엇일가? 예로부터 그는 청정부에서 리홍장이 가장 개명하고 국제적 시야에 명석한 두뇌를 갖춘 예리한 정치가(또한 같은 한족)라고 판단하고 믿었기때문이였다. 따라서 리홍장에 대한 손문의 기대는 그만큼 지대했던것이다.     한편 량광독립을 갈망하고 적극 추진한 세력은 향항에 사는 상류계층과 광동의 상류계층이였다. 북방의 동란이 량광과 향항지역으로 파급되면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리익에 해를 끼칠것이라고 판단했기에 리홍장을 리용하여 사회질서, 안전을 보전하고자 했던것이다.     제임스의 《일본과 손일선》에 따르면 광동상인들은 2,500만냥 현금으로 리홍장의 북상을 막고 광동에 눌러앉게 하려했다.    하계(河啓)라는 향항의 상층사회 인물은 향항총독인 블랙크와 연줄이 있었는데 그의 힘을 빌어 리홍장의 독립을 권유하였다. 우선 리홍장의 심복인 류학순(劉學詢)을 찾아 리홍장이 독립의향이 있다면 손문을 일본에서 불러오겠다고 했다.     이 지극히 민감한 계책에 대해 리홍장은 말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하여 류씨가 즉시 손문에게 서한을 보내 리홍장이 북방의 의화단란으로 광동독립의향이 있으니 빨리 오라고 전했다.     이들의 종용에 손문은 1900년 6월 11일, 일본인 미야자키 도텐과 정사량 등 조수 3명을 인솔하고 일본에서 출발하여 17일 향항에 도착했다. 혹시 리홍장이 자기를 꾀여 체포할것을 경계한 손문은 일본인 친구를 파견하여 류학순과 회담을 하게 하고 자신은 승선하여 윁남으로 왔다. 무장봉기를 준비하면서 한편 리홍장의 량광독립을 획책했다.     그런데 6월 15일 청정부는 리홍장더러 “속히 북경으로 반환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리홍장은 경계하여 행동을 지연했다. 이때 북경으로 갔다가는 불길하다고 느꼈기때문이였다.     드디여 6월 21일 청나라는 외국련합군과 선전포고를 했다. 리홍장과 함께 량광총독 류공일, 호광총독 장지동을 위주로 “동남호상보호”협의를 맺었다.     7월 8일 성선회의 노력으로 리홍장은 원직회복으로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서태후가 재임명했다. 7월 16일 북상을 일부러 지체하던 리홍장은 광동을 떠났다.     광주에서 북상의 경로로 꼭 향항을 경유하게 되였다. 아직 리홍장에 대한 독립합작의 뜻이 남아있는 손문과 블랙크는 리홍장에게 최후의 간청을 들려 했다.     하루전날 향항해만에 도착한 손문은 리홍장과 면담을 기대했다. 그러나 향항당국은 영국정부의 지시에 따라 향항상륙을 거절했다. 단지 리홍장이 량광독립에 찬동한다면 손문의 상륙을 비준하고 면담을 허락할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이때의 리홍장은 광동, 향항의 리익보다 자신이 장악한 중국 전토의 국면에 더 관심했다. 따라서 손문과 밀약했던 광동, 광서 량광독립은 없던것처럼 포기하고말았다. 지어 손문을 체포할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리홍장은 손문의 혁명에 리해가 부족했던것이며 눈앞의 기득리익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이것이 손문에 비한 그의 약점이였다.
천지 (天地) 천지는 본디 무한히 넓으나  흉금이 비열한자는 스스로 좁게 하더라.               홍자성의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흉금이 비열한 자는             그 행동으로 세상을 좁게 해 자신을 조인다.   양약 (良药) 양약은 입에 쓰지 않을수 있다. 강제적으로 하는 일은 자신을 괴롭히는 쓴 약이다. 단것、맛있는것、좋아하는것、하고싶은 일을 해야 자신에게  양약이 된다. 그래서 양약은 입에 단것도 있다는 말이다.   신성함 그 누가 자신을 구세주로 여긴다면 나는 스스로 구세주의 반역자로  될것이다. 그 누가 자신을 성스러운 영자(灵者)로 간주한다면 나는 스스로 사념(邪念)으로 될것이다. 그 누가 자신을 인간이라 칭한다면 나는 스스로 귀신이 될것이다.              북경의 동년배 문화비평가 모라(摩罗)의 말이다.            오늘은 이런 반항정신이 있는            이단자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공처가  한 남자가 마누라에게 손찌검을 당하여 침대밑으로 피신했다. 마누라가 “빨리 안 나올꺼야?” 하자, 남편 왈 “나도 남자대장부야! 안나간다 하면 절대 안나가니까”   열광 일본은 1930년대 군국주의로 열광했고  중국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으로 열광했고 조선은 지금까지도 ?로 열광하고 있다.?가 무엇인지 당신은 안다.     경계선 “인류는 자신의 총명을 믿고 경계선을 그어 놓고 최후에는 사랑으로 그것들을 죄다 지워버렸다.”   독일의 세계적 문호  괴테의 말이다. 코스모폴리탄을 자인하는 괴테의 말처럼 요즘 글로벌 시대, 국경을 뛰어넘어 인구의 대이동이 벌어지고 있다. 사랑은 경계선을 지우는 보약.   민족혈통 “세계에는 절대적 백프로 순수혈통의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있었다면 재빨리 퇴화됐거나 멸종됐을것이다.”          저명한 역사지리학자 갈검웅(葛剑雄)교수의 말이다    이와 비슷한 일본 역사학자의 말도 있다. “중국 한족이 수천년을 줄곧 신선한 파워를 유지할수 있은 까닭은 외래 북방 이민족의 침습과 혼혈이 있었던 덕이다”         중국사연구의 대가 나이토코난의 말이다.   항전8년 항전이 어찌 그리도 쉬운가?! 몇사람이서 일본병사 한개 연대를 손쉽게 소멸할수 있다고? 만약 진짜 그렇다면 우리가 많은 형제들을 희생시키면서 간난히 8년동안이나 항전을 했겠는가?          금년 100세의 중국병사 마정신(马定新)이 중국TV에서 방영하는 항일신극(神剧)을 보고 감탄한 말이다.       항전에 손수 참전했던 병사도 황당해서 못 참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드라마일까!   애증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해, 드디어 사랑이 깡그리 지워졌을 때는, 처음부터 전혀 사랑하지 않았을때보다도 미움이 커진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애증에 관한 말이다.    사랑과 미움은 항상 병존한다. 미움은 사랑의 저쪽켠에 있는게 아니라 사랑의 이쪽에 같이 있다.   그래서 실연하면 흔히 이성을 미워하게 된다.   성취(成就) 사정의 쾌감과 함께 찾아오는 허탈감.   기념비 제아무리 견고한 화강암으로 세워도 세월의 풍우에 달아지거나 쓰러지는 돌. 장소를 잘못 택했다. 사실 마음속에 세워 두어야 할 비석.   늑대와 양  혜성처럼 나타난 작가 강융(姜戎)의 장편소설《늑대의 토템(狼图腾)》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1500만부나 팔린 대베스트셀러이다.  작가는 내몽골에서 10여년 하방생활체험을 적은 이 소설에서 중국문명은 한족의 농경문명과 북방 이민족의 유목문명의 융합이라는 테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한족문화는 유교이념으로 자유、독립인격을 박탈당한 온순하고 순복된 농민(양)이라 했다. 한편 북방의 유목문화를 늑대로 비유하며, 교활、자유분방하며 위엄있고 독립성 있는 늑대의 특질이 유목문화가 숭앙하는 토템이라고 했다.   강융의 해석에 따르면 “늑대”처럼 행동했을때는 위대한 문명의 업적을 쌓을수 있었지만 그 대다수가 온순한 “양”으로 정복됐을 때는 주변의 만이(蛮夷)민족과 서양의 열강, 섬나라의 억압을 당하며, 또한 대내적으로는 모종의 이데올로기의 순복양으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늑대”와 “양”의 특성을 문학적 서사방법을 원용하여 정채롭게 표현한 걸작이 바로 《늑대의 토템》이다.  
198    (85) 손문은 동북3성(만주)을 일본에 매각하려 했다 댓글:  조회:3333  추천:20  2016-12-1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5) 김문학   손문은 동북3성(만주)을  일본에 매각하려 했다     손문(손중산)  근대사를 재독하면서 발견되는 사실 하나가 있다. 손문이 신해혁명성공과 더불어 초대 림시 대통령으로 추대되긴 했으나 곧 북경의 원세개에 의해 좌절당한다.        흔히 손문혁명의 좌절은 원세개의 “혁명과실 절취” 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리해하는 성향이 있지만 사실 그 내막을 보면 사상, 이데올로기나 방침보다도 때로는 결정적요소가 다른데 있었다. 즉 금전, 자금의 유무, 다소에 따라 누가 혁명의 지도권을 장악하는가가 결정되기도 한다.   손문이 원세개에 의해 좌절당하고 또 그뒤 원세개를 타도하는 혁명(제2차 혁명)을 일으켰으나 자금조달문제로 큰 애로에 봉착했다.   일본국회도서관에는 실업가 모리가쿠(森恪)가 1912년 2월 3일 오후 6시경에 마스다(益田孝)에게 보낸 특병정보가 소장돼있다. 그 내용을 현대문으로 요약하면 대략 이런 뜻이다. “중국재정이 궁핍하여 년말까지 1,500만원이 조달되지 못하면 작전을 벌릴수 없다. 그래서 혁명정부도 혼란에 빠질것이다… 손문이 만주 매각에 관해 이미 승낙했다. 일본이 혁명군의 와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1,000만원을 차관해 준다면 손문 등은 원세개의 화해를 즉각 중지시키고 손문 또는 황흥이 일본에 즉시 와서 만주에 관한 밀약을 체결할수 있다. 만약 차관이 불가능하다면 혁명군은 곧 해산될 위기에 처해있다. 남경이 동요하면 손문이 기필코 변고가 생길것이다…”   모리가쿠(1882~1932)는 1901년부터 미츠이물산(三井物産)의 상해지사에 파견된 인물로서 선후하여 상해, 장사, 천진, 북경에서 활동한 미츠이재벌의 중국사무전문가였다. 마스다(1848~1938) 미츠이재벌의 총회장으로서 막대한 자금의 소유자였다.   무창봉기이후로 중국혁명당은 최대의 재정위기에 처해있었다. 남경림시국민정부가 창설됨에 따라 거액의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 자금이 있어야 북벌을 시작할수가 있었던 상황이였다.   1912년 1월 황흥은 일본 정계의 최고 원로인 야마카다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마스다에게 명하여 혁명당과 동북3성(만주)을 일본 소유로 하는 밀약체결을 하게끔 지시했다.   마스타는 이 사무를 부하인 모리가쿠에게 지시하여 실행하게끔 했다. 그래서 모리가쿠는 남경에 있는 손문의 일본인 비서 야마다(山田純三郞)를 통해 손문과 손문의 외우인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 호한민(胡漢民)을 불러모아 4자회담을 가졌다.   근대사학자 양천석(楊天石)의 고증에 의하면 1912년 2월 3일, 만주에 대한 일본의 매수조건에 대해 상담했는바 일본에 만주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손문의 혁명군에게 2개 사단몫의 무기와 현금 2,000만원(일설에 의하면 1,000만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본문 서두에 나오는 전보문은 곧 이 회담후 모리가 상사인 마스다에게 송전한 내용이다. 모리의 진술에 따르면 이 전보문은 그 자신이 중문으로 초고를 작성하여 손문과 호한민의 수정을 거쳤다고 한다.   이 전보문의 내용에서 추측할수 있는바 손문, 황흥 등 혁명가들은 무조건 간단하게 원세개와 타협하는게 아니라 남경림시정부의 재정의 궁핍으로 북벌전쟁을 전개할 자금이 급수됐던 절박한 배경이 있었던것이다.   모리가쿠의 2월 8일자로 마스다에게 보낸 장문을 보면 그날 손문과의 회담내막을 잘 알수 있다. 회담중 일본정부의 뜻을 손문에게 전달했다. “즉 현재 세계는 황인종과 백인종의 격투인데 백인종의 로씨야세력의 남침을 제지하기 위해 일본은 자신과 동아시아의 안전평화를 위해서라도 일본의 힘으로 만주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 중국정부는 만주를 보존할수 없으며 만주의 운명은 결정된 셈이다. 혁명정부는 전도에 곤난이 많고 지리적, 력사적 립장으로 일본의 특수 원조 없이는 성공의 가능성은 묘망하다.”   모리의 진술을 들은 손문은 이렇게 말했다. “동양평화를 위하여 만주는 꼭 동양인의 수중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거사에 앞서 나는 만주를 일본에게 위탁한다. 이로써 일본이 중국혁명을 지원할것을 희망한다. 단 내가 위급할 때 일본에서 발붙일려고 했으나 일본관헌은 나의 입국을 거절했다. 일본정치가는 나를 포용할 아량이 없음에 아쉽다. 지리적, 인종적 관계로 일본의 동정과 지원이 없으면 중국은 일사무성(一事無成)이다…”   손문은 혁명정부가 재정궁핍에 빠져 파산의 위기에 처했으니 음력 년말까지 군대를 유지할수 있는 자금이 필요하니 9일까지 1,500만원 경비를 조달해달라고 간청했다.   일본에서는 2월 6일, 8일, 11일 3차례나 손문, 황흥이 일본으로 와서 만주밀약체결을 독촉했다. 그뒤 답전을 보냈으나 일본에서 아무 련락이 없었다. 야마다의 회억에 따르면 륙군대신 이시모토(石本新六)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야마가다(山縣)의 말대로 “일청, 일로 전쟁에서 보귀한 선혈을 뿌린 만주땅을 꼭 돈주고 매수할 필요없이 그냥 수중에 넣으면 그만이다”는 주장이 압도적이였다.       손문이 재정위기에서 탈출하는 수단으로 만주매각을 예정했던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을 이미 식민지로 손아귀에 넣은 일본제국주의가 거금으로 살 필요없이 당시 이미 만주땅은 일본의 수중에 장악돼 있은것 또한 사실이다.                   
백도( 百度 )   한번의 불상사가 터진 근저에는 이미 백번( 百度)의 불상사가 묻혀있더라.   경마(京骂 )   노신선생이 지적한 국마(国骂) 에는 “TMD ”가 있듯이 수도 북경에는 “경마”가 있다. “싸비( 傻B   )”라는 말. 요즘 북경 인터넷에는 “수도경마JM연맹”까지 생겼다고 한다.경마가 유구한 북경의 문화라나! 축구경기장에서 빈발하는 경마를 들은 영국여성이 중국체류기간이 긴 남친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영국인 남친의 해석이 걸작이다. “우둔한 생식기”   중국축구    꿈에서 시작하여 꿈으로 끝나는 –꿈 그러나 꿈이 있는만큼 30년후에는 꿈을 이룰것이다.   구경꾼   노신이 일찍 간파하다싶이 ,중국인은 구경꾼기질이 많다.언제 어디서나 구경꺼리가 있으면 벌떼처럼 몰려드는 관습이 있다. 어느날 한 남자가 거리에서 많은 구경꾼들이 층층겹겹으로 모인 광경을 보고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쾌재를 부르며 비집고 들어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사람들이 하두 많아서 들어갈 방도가 없게 되자 잔꾀를 생각해냈다. 남자는 땅바닥에 앉아 엉엉 울었다. 구경꾼들이 “왜 그러세요?”하고 묻자 남자가 대답하기를 “그안에 쓰러진 사람이 바로 우리 할아버지올시다,어서 비켜주세요.” 그러자 구경꾼들이 쭉 길을 내주었다.남자가 이때라 들어가 본즉 죽은 돼지 한마리가 누워있었다.   독서   소년의 독서는 문틈에서 달을 훔쳐보는것과 같고 중년의 독서는 정원에서 달을 바라보는것과 같고 노년의 독서는 누각에서 달을 희롱하는것과 같구나   의 한 대목이다.독서 역시 인생의 열력과 체험에 따라 그 레벨이 달라지는법이다.어디독서뿐이랴.인간만사가 다 유사한 도리가 아닌가   귀족   이 나라에서는 벼락부자들이 고급별장에 살고 고급 외제자동차를 타고 고급바에서 고급양주를 마시고 고급맛사지를 받고 고급매춘부를 껴안고 고급백을 들고 고급여행을 떠나는것…을 귀족으로 여긴다. 그러나 진정한 귀족의 고귀한 정신,인품,교양,신사,숙녀,프라이드는 빠져있다. 부페   해외의 호텔 쌜프서비스 부페에서 중국인의 위용은 늘 화제로 된다.수박만한 접시로 새우요리를 퍼서 먹는 위용담은 세계를 진감했다. 하기야 공짜아니더라도 먹는데서만은 세계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니까.쌜프서비스(自助)의 극치를 발휘한 중국인다운 행위.   대림동,가리봉동   서울속의 중국. “중국병”을 한국에 전파하는 발원지.   낙서   어느 나라를 가도 화장실에 낙서가 많이 보인다.가장 고전적 명작은 영국런던의 공중화장실 남자용 소변기위에 씌여진 낙서.  “당신은 지금 인류의 미래를 쥐고있다.”   한편 북경공중화장실 남자 소변기위에 씌여진 낙서는 “당신은 문명으로 한걸음 바싹 드리대세요” 낙서라기보다는 현실을 반영하고 웃음이 안나온다.   박수갈채   “나는 영웅이 되기보다는 조용히 영웅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응원자로 되겠다.” 중국의 한 중학생소녀의 말이다.50명반급에서 늘 23등에 그친 소녀는 착하고 보통인으로서도 사회에 유익한 인간이 될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렇다,성공은 꼭 영웅에게만 해당되는 훈장이 아니다.   최고영예   사르트르는 노벨상 수상을 거절한 지성으로서도 유명하다.1964년,스웨덴 왕실 아카데미에서 “풍부한 사상과 분방한 자유의 정신으로 진리를 탐구한 작품으로 이 시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이유로 사르트르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사르트르는 이 세계 최고의 영예를 거절했다.   “나는 종래로 위로부터 오는 영예를 일절 거절한다” 세계적 최고영예를 과감히 거절하는 사르트르의 행위야말로 최고영예에 해당할것이 아닌가!   쾌락(쾌감)   세계적인 유명한 물리학,우주학자 S.W호킹은 연구의 쾌락에 관한 기자의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했다. “연구의 쾌락은 섹스의 쾌락과 거의 비슷합니다.단지 그시간이 더 길지요!” 정신적쾌락은 사실 육체적 쾌락과 상통하는데가 있는법이다.  
196    (84) 강유위의 두가지 얼굴 댓글:  조회:3453  추천:19  2016-11-2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4) 김문학 강유위의 두가지 얼굴   강유위   근대 중국과 세계를 진감한 무술변법의 지도자로서의 강유위(1858~1927). 강씨만큼 복잡한 얼굴을 한 근대 중국지식인도 흔치 않을것이다. 근대의 격동의 시대를 누볐던 강유위를 동아시아적 력사무대에 올려놓고 조망하면 그의 여러가지 얼굴과 그 명암이 현현된다.   강유위의 사전적인 해석은 대개 이렇다. “근대 저명한 정치가, 사상가, 사회개혁가이며 서예가, 학자이기도 하다. 자는 광하(廣廈), 호는 갱생(新生)이며 광동 남해사람으로서 ‘강남해’라고도 불린다. 주요저작으로는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일본변정고(日本變政考)》, 《대동서(大同書)》, 《구주11국유기(歐洲十一國遊記)》 등 다수가 있다…”   그러나 인물사전적인 해석은 강유위의 참모습, 복잡한 얼굴을 다 담기엔 아무래도 무리다. 많은 근대사자료를 탐독하면서 필자의 시야에 들어온 강씨의 참모습은 한마디로 극과 극을 달린 모순의 양상을 띤 인물이다. 즉 일언이페지하여 위대한 변혁가와 고루한 보수파이며 인물상 역시 저명한 군자인듯하면서도 옹졸한 소인, 용인(庸人)에 불과했다.   전자에 대해 세인은 추대하고 좋아하지만 후자에 대해 세인은 또 멸시하기도 한다.   1895년 “마관조약”  체결시 북경에서 회시에 참가하려던 그가 1,300여명의 거인을 련합시켜 “만언서”를 상서한 “공거상서”로 불린 일화는 전설적인 력사적사실로 중국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있다.      그뒤 1898년 광서황제를 부추켜 “무술변법”이란 유명한 개혁을 시도하나 근근히 100일천하로 끝났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뜬 이 유신은 획기적의의를 갖추었지만 중국의 사회적원인으로 결국 불행하게 패북으로 막을 닫았다. 그러나 이 변법의 력사적의의는 오늘날 재고해도 여전히 지고한 점수를 주어야 함은 의심할바 없다.  강유위   신해혁명후 중화민국이 시작된지 1년후인 1913년 기나긴 국외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한 그는 중국 최고의 보황당 수령으로서 공화제를 반대하고 청나라의 페제인 부의를 부식하여 복벽을 꾀하였다.      무술유신 실패후 그가 걸은 로정은 그의 애제자인, 역시 근대사의 거물지식인 량계초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버린다. 만년 량계초와의 알륵은 한마디로 량자가 택한 로선이 근본적으로 어긋났기때문이다.   강유위의 많은 관련 력사문헌을 읽으면서 재발견되는 그의 얼굴, 그리고 열길 깊은 속.   량계초와 달리 강유위의 깊은 속에는 “군자”, “성인”의 대극에 있는 속물적인 “속인(俗人)”, “용인(庸人)”이 크게 반거하고있었다.   최근 중국사학계에서 그의 “공거상서”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제출한 모해건(茅海建)과 같은 중견사학자도 있으나 유신파의 수령으로서의 지위는 부동(不動)할것이다. 그가 혁신파로부터 해외에 망명해서부터 보황파, 수구파로 공화혁명의 적으로 전락되는 뒤모습에는 그의 립장, 인격까지 크게 회의스러운 질책에서 탈피할수 없다.   강유위는 지식인, 문화인 답지 않게 지극히 공리를 추구하는 욕심쟁이의 일면이 그속에 도사리고있었다. 강씨의 공리성은 우선 권세에 대한 아부에서 표현된다. 1888년 북경에 향시 참가차로 갔을 때 “편알권귀(遍謁權貴)”해서 상서를 한것이 결국 북경관료들의 거절을 당했다. 물론 보수파관료의 관념탓도 있으려니와 한편 그의 아첨하는 비굴성과 “효장비도(xiao張卑蹈)”가 관료들의 반감을 샀다.   상해의 정관응, 북경의 채원배, 라가륜(羅家倫) 등 당대 일류의 지식인이나 실업가들도 강씨의 공리성에 반감을 가지고 그에 따르지 않았다.   강씨의 “호대희공(好大喜功)”의 성품에 대해 많은 식자들이 지적했으며 정치학문적인 “표절무단(剽竊武斷)”에 대해 후학들이 지탄했는데 량수명(梁漱溟)은 《동서문화 및 그 철학》에서 “강해남을 제외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은 죄다 존중한다”고 직언했다. 국학거두인 전목(錢穆) 역시 강유위의 《신학위경고》는 경학대사 료평(廖平)의 글을 베꼈다고 지적한다.   “이런 여러가지 신분의 인물과 시각에서 바라본 강유위의 그 인물 및 정치, 학술활동에 대해 종합하면 하나의 련관성있는 형상을 걸러낼수 있다. 강유위의 용기와 유신사상은 긍정할만 하지만 그의 자부, 부조(浮躁), 공리심의 많은것, 게다가 지나치게 주관의지로써 행동하는것도 사실이다.”[오상(伍常)]   사실 일부다처제의 봉건제도를 비판한 강유위는 그 자신은 6명의 처첩을 두었으며 만년에는 그의 과분한 공리성으로 거액의 금전을 수중에 넣기도 해 부화사치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1906년 세계 각국을 편력하던 강유위는 공리적인 상업활동에 투신했는바 메히꼬방문시 화교의 의연금으로 토지를 사들여 팔아먹음으로써 일확천금을 했다. 오늘의 값으로 치면 700만원 인민페의 거금을 하루아침에 벌었다. 그는 근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외국을 편력한 일류려행가이기도 하다.   만년에 강유위는 귀국하여 상해에 대실업가 성선회(盛宣懷)의 화원을 고가로 빌리기도 했으며 1921년에는 초호화의 원림식 주택을 거금을 들여 짓기도 했다. 그는 만면의 15년 동안 몸도 건강했으며 여기저기서 모은 돈으로 항주, 상해, 청도 등에 별장을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뿐만아니라 황하, 장강남북, 십여개의 산천명소를 유람하면서 만년을 무위무식으로 허송세월했다. 그러던 1927년 3월 8일, 상해에서 70고희 대축하연을 베풀고 21일 청도에 도착하여 30일에 객사했다. 광동성 불산시에 있는 강유위의 옛 집은 전국문물로서 세계적으로 소문난 명승고적으로 되고있다. 죽어서도 그는 영화를 누리고있는 희대의 인물이다.
자유   손중산이 아래와 같은 뜻의 말을 했다. “누가 중국인이 자유가 없다고 했는가?아무데서나 침을 뱉고 제멋대로 떠드는 중국인인데.” 쓰레기를 아무데나 던지고 ,여름에 남자들이 상반신을 나체로 활보하고,파자마차림으로 공중장소에 출몰하고,신호등을 무시하고 활보하고 ,줄을 서지 않고 큰소리로 제안방처럼 떠들고… 중국인의 “자유”가 너무 많고 발달하여 탈이로다.   행복감   “GDP” 세계제2의 대국으로 성장하였지만 ,국민의 행복감은 눈썹처럼 늘지 않았다” 상해 어느 택시기사의 말이다.   정책   위에는 정책이 있다. 그러나 아래는 대책이 있다. 흔히 정책은 대책에 밀리우는게 이 사회다.     노공( 老公)   공( 公)이란 본디 수컷이란 뜻,인간에서는 늙은 남자를 의미함.그런데 요즘 젊은 부인이 남편을 부르는 호칭으로 보급되었다.그렇다면 젊은 남편이 아내를 부를때는 노모( 老母)라 해야 하는게 안닐까?   정인술   마시는 술이 아니다.인간을 다루고 제어하는 기술을 가리킨다.5천년 중국사에서 중국인이 스스로 정리해낸 중국식 정인술( 整人术 ). 후흑학처럼 세계에서 가당 발달된 정인술은 복잡다단한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또는 투쟁기술이라 해야겠다.   아래 정리해보면 이렇다. (1)독심술( 读心术) 인간의 내심을 읽어내는 기술.상대의 욕망을 슬쩍 탐지하여 그 속내를 알아내는 방법.또는 이런 경우 자신의 본성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음.   (2)도언술(倒言术) 진심말과 그 반대말을 하여 상대방을 식별하는 기술.   (3)소면술 (笑面术 ) 겉으로 미소를 머금고 선인으로 가장하여 뒷전에서는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구밀복검( 口蜜腹剑)술이라고도 함.   (4)막수유술( 莫须有术 ) 죄없는 대방에 없는 죄를 덮어씌우고 무함하는 방법.   (5)도해술( 韬晦术) 상대에게 이길수 없을때는 잠적하고 힘을 키워서 때가 되면 반격한다.   (6)보복술(报复术) 일단 자신이 어느지위,권력을 장악하면 옛날의 적수에 대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보복하는 기 (7)밀고술(密告术) 배후에서 상대를 몰래 밀고하여 죽도록 무함하는 방법.   (8)적함족적술(贼喊捉贼术) 도적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을 도적으로 내모는 방법.자신의 죄나 책임을 도피하기 위해 타인이 한짓이라 무함하는 기술.   (9)소제대작술(小题大作术) 세세한 생활문제,프라이버시 등을 불려서 스캔들로 만들어 상대를 넘어뜨리는 방법.   (10)박마비술(拍马屁术) 아첨의 기술로서 상급이나 주위인간에 아첨하여 환심을 사는 기술.   직장   “일종의 닭장과도 같다.회사원은 닭장안의 닭무리 ,자유를 잃은 몸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닭장에서 나가버리면 이리들이 득실거린다.이리는 실업을 말함.” 누가 말한 말인지 참 묘한 비유다. 위대한 오빠 중국어에는 외래어를 수입할때 한자특성에 인해 한자의 뜻을 살리는 관습이 있다.남성의 성불능을 일시치유하는 비아그라를 중국어에서는 “ 伟哥”( 위대한 오빠 ,위대한 남자)라고 칭한다. 伟哥는 참 그럴듯한 이름이다.그도 그럴것이 서지도 못하는 “ 痿哥 ”를 우뚝 무소의 뿔처럼 서게하는  위대한 남자 “伟哥”로 돌변하게 만드니,이 아니 위대한 이름인가!    배움 영국경제학자 로빈슨 부인은 배움에 지극히 열성을 보인 여성이었다고 한다.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경제학을 배우는 목적은 경제학자의 기만을 당하지 않기위해서입니다.”  그렇다,앎은 위로부터의 기만을 간파하는 첩경이다.   태양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태양을 찾아 중국에 왔다.현지인들에게 “태양을 봤냐?”고 하나님이 묻자 , “태양이요? 그것 못봤어요.우마이(雾霾)한테 물어보세요”   추함 백양( 柏杨 )선생님은 현대중국의 가장 비판적인 지성의 한 사람이다.그는 명작 “추한 중국인”에서 중국인의 결함을 무자비하게 비판,해부하면서 “장독문화”라는 개념을 제기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 중국인의 추함은 우리자신이 추하다는것을 모르는데 있다” 참으로 정곡을 찌른 말이다.   교정 문명이 육성되는 학교정원. 그러나 요즘은 어린 여자학생을 집단구타,수모를 가하는 폭력,언어폭력과 같은 만행이 창궐하는 야만의 낙원으로 전락. 과연 문명의 교정(矫正)이 필요한 곳이다.    
194    왜 당대 중국의 문화번영은 어려운가? [주대가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021  추천:63  2016-11-12
〔문화대담〕 왜 당대 중국의 문화번영은 어려운가?   주대가 + 김문학     O. 들어가면서      내가 근년래 대학강의로 상해의 문턱을 자주 드나들면서 주대가교수와 나는 어느사이 호형호제의 벗으로 돼버렸다.   주대가는 누구인가? 당연히 주대가 (酒大家)가 아니다.  朱大可란 이름의 이사람은 당대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선봉적 문화비평가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인물이다. 현재 중국 문화계에는 “남주북하( 南朱北何)”라는 정평이 있를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남중국에는 주대가이고, 북중국에는 하삼파( 何三坡)를 가리키는데, 북경의 작가, 비평가 하삼파는 중국의 문학, 문화는 아직도 파워가 있다고 하면서 부정적 의견을 갖는 주대가와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주대가는 1957년 상해 태생, 원적은 복건성의 객가(客家)이며 화동사범대학 중문계를 졸업하고 오스트랄리아 시드니 과기대학의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동제대학(同济大学) 문화비평연구소 교수로 있다.     문학평론가, 문화학자, 문화비평가와 수필작가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바, 80년대에 이미 중국문화계의 선봉으로서 지대한 문명을 날렸다.     당시 중국 영화문학의 모델을 비판한 글로서 전 중국을 진감하였으며 해내외에서의 명성은 당시 중국사상계의 수령인 이택후(李泽厚)와 비견했다.     평론가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젊은 패기에 넘친 주대가는 “광기의 청년”으로서 대규모의 학술세미나에서도 다른 학자, 지식인을 무시하고 자신이 제멋대로 발언을 마치고는 당장에서 퇴장하기도 했다.     1994년 전성기의 주씨는 홀연 오스트랄리아로 유학길에 오르고 방문학자, 중문미디어에 종사하기도 하다가 8년후에 다시금 귀국, “주대가의 복귀”가 그때 중국의 문화사건으로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대가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문학립스틱을 바르고 문단에서 놀다》,《상해- 정욕이 절교한다》2편의 글로 문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그뒤 《유망의 성연》(流氓的盛宴)으로 비평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면서 문화계의 주대가 열조(朱大可热)를 일으킨다.     주대가는 이런 휘황한 경력의 주인공이다.     주씨의 최대의 매력은 그 예리하고 시리어스한 언어에 있다고 한다.  “그의 언어는 번개불에 낙전당한 전률같은 ‘통괘함’으로 인해 독자를 박장절교하게끔 만든다. 주대가는 언어연구의 프로이며 언어조종의 고수인바, 비평가인 동시에 더우기는 작가이다. 그의 비평은 작가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글쓰기는 비평가로 하여금 절망을 느끼게 한다.” (张守涛)     그의 독특한 이성과 감성이 믹스된 언어를 “주씨언어”라고 일컫는다. 그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냉철하고 예리에 찬 “독설(酷语)” 언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내가 처음으로 주대가를 만난것은 2년전 원단이 지난 후 쌀쌀한 날의 상해의 어느 멋있는 커피숍에서였다. 동글한 얼굴에 예지를 뿌리는 큰 눈동자가 인상적이였다. 키는 나와 비슷하여 왜소했지만, 패기가 있었으며 상상했던 그런 도고함은 없이 겸허함을 내비쳤다. 아무튼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무서운 흉신악살로 생각하는데, 기실은 그렇지 않지요!”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려 3시간이나 대담을 나누었다.     주대가는 나를 그때부터 “김형”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우리는 같은 직업, 같은 문화비평가, 작가로서 비평의 독설언어, 시리어스한 비판정신, 세계관 등이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서 서로가 서로를 아끼게 되었다.     내가 금년(2016년)여름 새 핸드폰을 쓰고 위챗을 겨우 배우게 되자 그는 “김형도 이제는 시대흐름에 맞추게 됐군!”하면서  매우 흐뭇해했다.  상해에 오면 우리는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환담하군 했다. “김형, X일 저녁에 유명 문화인들이 모이는 연회가 있는데 나오라고” 하는 위챗이 오면 나는 시간 맞춰 나간다. TV에서도 보는 감독, 작가, 화가들이 모여 있었다. 즐거운 미식과 환담…     주대가 교수는 중국 문화, 사회에 유니크한 견지(见地)를 지니고 우려를 자아내는 지식인이다. 그는 중국의 교육, 문화, 미래에 대하여 “노신”에 유사한 비관적 내지 비판적인 태도를 노정하고 있다.     노신의 “후계자”로 자임하는 주교수는 중국문학과 문화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성찰의식을 보이며 관망,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다.     수차례 대담을 아래 정리해 본다.   1. “문화공룡”이 오다    김: 중국 문화비평의 선봉이며 기수인 주교수님을 이렇게 만나서 중국문학과 문화에 관한 많은 얘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50대–60대의 중국인에게 있어서 1980년대의 중국을 그리워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요.      특히 지식인에게 있어서 80년대는 자유롭고도 활기에 찬 “황금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 중국문학만 보더라도 “현대파”와 “신사조”라는 낱말로 규정된 일종의 선봉성적인 선구적인 탐구가 바야흐로 왕성히 전개 되었고 사상계, 학술계도 전례없는 활성기를 맞게 되지요.      가평요, 막언, 마원, 홍봉, 소동, 여화…등 선봉대군들이 90년대 2000년대초기의 후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에 맞추어 문학비평을 위시로 문화비평계에서도 선봉파들의 맹활약을 벌이는데, 당시의 유효파나 주선생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주선생을 작고한 비평가 胡河清이 “문화공룡”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요!   주:  그때 지나간 사정을 잘 아시고 있네요. 80년대는 김선생 말마따나 지식계의 “황금시대”, 자유의 활약시기였습니다. 1983년 화동사대 중문계를 나온 나는 상해의 어느 대학에서 대학국문을 가르쳤는데 거이 글쓰기를 못했다가 1985년 하문대학에서 개최된 전국문예비평신방법심포지엄에 나간것이 내 “미래를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난 전혀 무명청년지식인이었는데 당시 모임에 전국에서 쟁쟁한 지식인들이 모였으니 내게 자극이 컸어요. 돌아와서 그길로 청년시대와 도시의 꿈에 관한 글을 써서 다음해 가장 전위적인 잡지《当代文艺思潮》에 발표했어요. 물론 치졸하고 살기에 찬 이 글은 운 좋게 그해 문학계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지요.   김: 1986년에 《谢晋电影模式的缺陷》이란 논평이 발표했지요? 나도 그 글을 읽었는데 정말 파격적인 우상파괴 였지요. 해내외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됩니다. 유효파의 《신시기 문화의 위기》도 그해 큰 충격을 몰고 오게 되지요.      어떻게 권위를 무시하고 우상을 파괴하는 비평을 하게 되었는지요?   2. 연경기성(年轻气盛) 의 광기   주:  80년대는 서양문명사조의 절대적 영향도 있었기 때문인지 전통, 특히는 고루한 전통문화 전통양식에 대한 반항정신이 유행했잖아요.      나 자신은 외독자인데다가 정신적으로 극도로 자유와 독립을 갈망했고 어렸을 때부터 고독하게 놀았기 때문에 사고를 즐기고 일단 자신이 생각했다면 자기 주장대로 하는 타입이었지요.   김: 일련의 글을 육속 발표하여 선생님은 중국비평계의 선봉적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문명을 날리면서 주선생은 “소년광기”의 도고한 인물이란 품평을 받기도 했습니다.(웃음)   주: 네. 그때 난 연경기성이라 광기가 충천했어요(웃음). 심지어 나는 당시 전국이나 지방의 규모가 큰 학술회의에서도 모든 회의 참가자들을 경시하고 자기멋대로 발언을 해버리고는 훌쩍 회의석상을 떠버리는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건 딴 사람은 안중에도 없으니까 말이예요.   김: 알만합니다. 소년득명하고 명성이 자자하시니 원래 소년의 광기란게 있잖습니까.      그럼 소년시기 유년시기는 어떤 애였습니까?   3. 유년시기 이미 문학의 길을 닦다   주:  (웃음) 소학 중학시기 성적표의 맨 뒤에는 언제나 한결같이 판에 박은 선생님의 평어가 꼬리처럼 따랐어요.      내가 “교오자만”하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부터 남다른 오기가 있었지만 늘 흉중에 깊이 숨기고 다녔다고 할수 있지요.   김: 기실 저도 같은 경험을 늘 해왔습니다. 성적은 전반에서 최고이지만 어딘가 오만하고 오기가 있었으니 담임선생님이 그걸 조심하라는 평어를 써주셨습니다.      주선생도 조숙한 소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어렸을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습니까?   주: 아, 내가 17살 나던해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 나는 하루아침 “성숙”되어버렸어요. 아버지는 민주당파 인사였는데 문화혁명시기 홍위병이나 직장에서 투쟁을 받고 숱한 고생에 시달리다가 병상에서 돌아갔습니다. 임종하실적에 곁에는 나와 우리 어머님뿐이었지요. 누구나 우리 집을 멀리 했고 그때 인심은 사막같이 삭막했으니까요.   김: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주: 매우 인자하시고 관용성있는 성품이었지요. 어머니는 학교 음악교원을 하다가 어문 교원을 했는데 아주 엄한 성격이고 잘 웃지도 않는 여성이어서 난 한번도 어머니 앞에서 감히 응석부리질 못했다니까요. 어머니가 교편 잡은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어머니는 늘 다른 학생과 같이 나를 엄격히 대했습니다.      내가 지금도 음악과 문학을 좋아하는것은 다 어머니의 영향이 컸기때문이고. 아버지는 역사교원이었는데 그 영향에 역사를 나는 무지 좋아합니다. 아버지는 한번도 나를 때리거나 욕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내가 늘 기대했던것보다 잘 했던 까닭이지요.   김: 굉장한 독서가였겠네요? 어머니의 영향이 컸구만요!   주: 네. 소학교를 졸업하기도전에 중국 4대명작을 다 읽어버렸어요. 내가 12살, 13살쯤에 부모님이 교편을 잡은 두 학교의 도서관을 부리나케 드나들면서 독서를 했고 중학교에 들어서서는 서양고전문학을 일일히 열독을 했답니다.   4. 조국을 객관화하여 바라보기    김: 아, 유년, 소년시기 이미 탄탄한 문학의 길을 닦아놓으셨습니다. 해외 유학, 학위 공부등 인생경력에서 나와 주선생은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데요. 나의 경우 사실 해외 유학생활, 정착생활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고양식, 가치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론, 글쓰기의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주선생은 오스트랄리아란 영어권 나라에서 유학, 학위공부를 하면서 해외생활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보십니까?   주: 사실 나의 유학생활은 김선생처럼 풍후한 장학금을 받으며 윤택하진 못했습니다.      오스트랄리아에서 난 한 신문사 주필을 하다가 또 실업의 고배도 마시고 그 다음엔 별 일을 다 해봤어요. 건축공사장에서 석고판을 다지기도, 소제공을 해보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광고회사, 상장회사에서 인터넷사이트의 책임자로도 있어 봤고 가장 길게 해 본것이 4년동안 한 신문사 총편집을 맡은겁니다. 그뒤로 시드니이공대학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귀국했지요.      나는 유학, 외국생활은 내 인생에서 매우 멋있는 둘도 없는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을 떠나 해외에서 조국을 객관화시켜 관망하는 기회와 시각이 생겼으니까요.      이런 방법, 시각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을 포괄하여 태어나서 자란 조국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안목은 나의 비평을 전례없는 차원으로 향상시킬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 오스트랄리아 재주시 주선생이 창설한 “문화선봉”이란 사이트가 중국지식계와 해외 중국인 지식계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주: 그렇지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외에서 중국을 관찰, 반성하는 시각에서 글들이 많이 나갔으니까 의미가 컸습니다.      1999년 오스트랄리아에서 쓴 문학비평논집 《聒噪的时代》를 출간하자, 국내 문학계에서는 주대가가 “부활”했다고 야단이었지요. 그리고 2001년 귀국해버렸습니다. 중국문학문화비평은 아직도 중국본토에서 해야하고, 내가 모어로 창작을 하니 아무래도 중국이 아니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오랫동안 영어권에서 살다보니 스트레스도 받고 하여 귀국했지요.   5. 문화비평의 신경계   김: 주선생의 중국문화계에 남긴 업적은 아무래도 문학, 문화비평의 신경계를 개척했다는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귀국후 평론가, 네티즌의 말에 따르면 “주대가의 귀국”은 그 자체가 문화사건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문단에 큰 선풍을 몰고올것이라 분분히 예측했답니다. 예측은 적중되고, 대중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주선생은 여러편의 글과 역작인 《流氓的盛宴》 《话语的闪电》 《21世纪中国文化地图》《记忆的红皮书》등 육속 출판하였습니다.     《流氓的盛宴》 한권으로 이미 새로운 문화비평의 경지를 열었고 전국적으로 “주대가붐”을 일으켰지요. 뭐니뭐니해도 주대가의 최대 매력은 그 언어의 예리함과 사색의 섬세함에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나도 그때 일본에서 주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시리어스한 언어, 래디컬한 비판문체에 심히 공감을 했어요.   주: 평론가들은 뭐 내 언어를 두고 “주씨언어(朱氏话语)”라고 격찬을 합니다. 번개치는 격렬함과 통쾌함, 감성과 이성이 조합된 정채로운 비유와 은유, 그리고 신조어들이 멋있다고 야단이었어요.   김: 밀란쿤데라가 말했다싶이, 언어의 은유는 그 나라민족의 문화언어환경속에서 시적인 예지의 서술적책략입니다. 주선생은 언어를 조종하는 마술사적인 능숙함으로 독자를 어느덧 그 속으로 빨려들이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어 어문의 언어를 통쾌림리 그 자체이지요.      혹시 언어의 특별한 수련을 하셨거나 롤랑 바르트 언어레트릭을 배우신건 아닌가요?(웃음)   주: 내가 언어에 민감하고 어렸을때부터 독서, 작문을 통해서 언어에 신경을 쓰고 의도적으로 어떻게 매력적인 언어구사를 할것인가에 부심을 했어요. 제가 생각컨대 진정하게 위대한 선지자는 종래로 계몽,계시자로서 그들은 언제나 언어를 통하여 견정하게 진솔한 정보와 진실의 사실을 전달하며, 또한 이런 도경의 방법을 개변하기도 합니다.   6. 독설문화는 어떻게 생겼나?   김: 저 역시 문명비평가로서 의도적으로 글쓰기에서 언어 표현양식, 문체를 여러가지의 레토릭, 시리어스한 언어 문체를 구사함으로써 독자를 공감시키는 시도를 해왔고, 또 그게 저의 문체특징으로도 됐어요. 비평가들은 “독설문체”를 창립했다고 하는데, 저는 주선생의 문체특징에서 중국비평계에 대한 큰 공헌의 하나가 酷语(혹어)라 칭해지는 독설(毒舌)문화의 정착이라고 생각됩니다.   주: 맞어요.나는 문자미궁을 의식적으로 고심경영하면서 혹어, 색어라고 칭해지는 언어의 세계를 만들어 갔습니다.      사실 까놓고 말해서 “주씨언어”라는것은 우선 준확한 판단과 영양가로 비평의 파워를 현시하고 그 다음으로 은유를 조합함으로써 예리하고 기발하며 풍부한 사상을 체현하는것이며, 문화나 시대에 대한 민첩하고도 심각한 성찰을 하는데 있습니다.   김: 어느 비평가가 평하기를 “주대가의 비평과의 조우는 번개에 맞은 감각이다. 간단한 문자가 고장(股掌)지중에서 기묘한 조합을 이룬다.”     그리고 저명한 비평가 호하청(胡河清)은 “주대가는 미래 중국문학사의 한분의 대사급 인물이다”고 하면서 “그의 목소리, 정신경계는 대사급 경계의 표징이다"고 격상했습니다.   주: (웃음) 호하청씨는 생전에 친한 문우이기도 했는데, 친구로서 좀 과찬이지요. 그리고 칭찬과 동시에 나는 많은 평사와 네티즌의 격렬한 부정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김: 그러나 주선생의 “주씨언어”나 그에 의해 줄줄이 이어지는 사상의 함양과 비평의 매력은 그 누구도 부정할순 없습니다. 자신에 대한 비난에 반격을 안 하시나요?   주: 반격도 자기변언도 안해요! 관점이 같지 않은 자가 서로 쟁론을 해봤자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내는것도 아니고 최종 누가 누구를 설복하지 못하고 구설만 낭비하고 말거든요.      차라리 자기자신의 창조적 활동에 몰두하는편이 퍽 낫습니다.(웃음)   7. 중국문단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공장인가?   김: 동감입니다! 저 역시 비난자들에 대해 일체 무시합니다. 왜냐면 욕말에 쓸만한 가치가 전혀 없기때문이지요. 화제를 바꾸자면, 중국문화, 문단에 관한 얘긴데 저는 세계적 시야로 보아 1990년대에 들어서서 문학이 점차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근년래 인터넷, 핸드폰이 전통적 문학읽기방식을 붕괴시키고 있으므로 “문학의 빈곤시대”라고 칭하고 싶어요. 이 점에 대해 선생님의 탁견을 듣고자 합니다.   주: 맞는 말씀이예요! 중국문화사를 회고해 보면 쉽게 발견되는데, 문화와 과학기술은 상반대로서 문화는 진화가 아닌 퇴화의 일도를 걷고 있어요. 중국문학의 고봉기는 선전(先秦)시기에 존재했고 그 뒤로는 당송, 근대,현당대문학은 우리에게 문학퇴화의 궤적을 전시해주고 있습니다.      보세요. 중국에서 발생한 문화영역의 3차 “어문혁명” 즉 한자혁명(간체자), 한자서사방식혁명(가로쓰기), 그리고 어음혁명(보통말)은 중국문명의 현대성을 정립시키지 못했고 되려 역사전통, 고전문화, 지역문화와 약소 소수민족문화의 붕괴를 초래했습니다.   김: 그럼 당대문학에 이르러서는 어찌 되였습니까?   주:  70후, 80후, 90후 내지 2000후 이런 세대간 단층법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건 저급적인 구분이고 젊은 문학일수록 더 좋아질거라는 우리의 환상을 조장시킬뿐입니다.      문학의 퇴화에 따른 도서 출판인과 매니저들의 도에 넘친 판매책이나 미디어의 그 많은 저질 문학상품에 대한 과대포장선전이 문단의 쓰레기화 효과를 자초해버렸지요.      21세기 현재 중국문화의 최대의 문제입니다. 출판상인들의 졸렬한 판매수법과 뇌물을 먹은 비평가들의 억지 예찬은 립스틱처럼 금방 나온 출판물에 마구 발라놓아서 책에서는 모조품의 싸구려광택이 나지요.      이건 훼멸성적인 상업”炒作”이고 기실 작가를 죽이고 작품을 죽이고 말아요. 그러니 중국문단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핀잔을 들어도 할말이 없습니다.(웃음)   8. 문학의 쇠퇴와 첩화(蝶化)   김: 사실 문학의 위축과 자아폐쇄, 사망에 관한 화두는 전세계적범위에서 전개된지 오라지요. 노벨문학상 자체도 “2류화”로 다운되는 운명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 자체가 근원은 바로 문학자체의 글로벌적인 쇠퇴와 다운에 있다고 보고 싶어요.   주: 그렇습니다. 제가 보건대 중국문화에 대해서 말하면 그 자기폐쇄와 쇠퇴는 3가지 측면에서 원인을 캘수 있어요. 1. 20세기 80년대이래 활약한 현역작가들이 대부분 쇠퇴의 주기에 들어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생대작가가 아직 성숙되지 못함으로서 세대 단층이 생긴겁니다. 2. 중상주의(重商主义)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문학에서도 시장점유률이 작가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주요기준으로 되었는바, 이런 보편적 금전 지상주의가 문학의 영혼과 창조력을 부식시켰고 따라서 전 문단의 쓰레기를 양산시키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3. 영화.TV, 넷트웍, 게임등의 발전흥기로 인해 전통문화의 생장공간을 압축시켰고 진짜 재질있는 작가와 가치성있는 작품이 공중의 인정을 받을수 없게 만들어 결국 문학은 쇠패의 심연으로 밀어넣었지요.   김: 탁론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또 한가지는 문학을 에워싼 대환경 보다도 문학자체의 변화, 변질에도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는데요. 주: 맞어요. 종이 인쇄에 의한 전통적 열독방법으로서의 문학이 수천년 흥성기를 누리다가 21세기에 꼭 기필코 쇠퇴하기로 되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매스컴시대 그것을 꼭 무너뜨려야 할 상대이니까요. 신매스컴이 우선 문학의 독자를 분쇄시키고 그들을 문학에서 따돌렸기때문에 이로써 작가들의 신념을 붕괴시키고 문학을 일종의 무시당하는 “페기물”로 전략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현재 바야흐로 나비처럼 탈변하여 옛날 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매체를 이용하여 영화,TV, 게임, 단신, 위챗등 여러 쟝르로 탈바꿈하여 문화현장에 되돌아 옵니다.      “첩화”된 문학을 화려한 “신물종”으로 변신했음에도 우리는 계속 그 고루한 껍떼기를 붙잡고 그의 사망을 슬퍼하여 울고 있습니다.(웃음)   9. 왜 중국의 문화번영은 어려운가?   김:  중국은 현재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자신감도 획득했고 “문화번영”을 국책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데 문화비평가로서 주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주:  역사적으로 볼때, 문학을 포괄한 중국의 유교문화가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과시했고 아무리 강대했다해도 세계의 공간적으로 보면 매우 제한되여 있었습니다.      중국이 문화에서 미국문화의 독점상태를 격파하고 세계적범위안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는 문화대국이 되자면 아직 머나먼 길을 걸어야 됩니다.   김: 세계를 지배할수 있는만큼의 이념체계, 지식체계, 가치체계를 정립하고 “유연한 파워”가 구비되는게 급선무겠지요.   주: 그래요. 우선 “유연한 파워”의 문화실력이 구비되는데, 유연한 실력이 세계적인가도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러자면 4가지 기준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봐요. 1. 유력한 독립, 자유, 비판적인 인문정신 2. 독특하고 탁월한 원창(原创), 창신, 창의의 특징 3. 인류의 공통적 가치를 추구하여 협애한 민족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4. 지역과 민족의 역사문화전통을 전승하고 동시에 인류의 미래에 개방적.   김: 그렇다면 중국문화번영이 어려운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  그 이유는 금방 말한 4가지 기준에 부합되기는 커녕 오히려 상반되는 방향으로 중국이 가고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 상황을 보면, 첫째로는 견유(犬儒)주의, 노예근성에 지배되여 있고 둘째로는 산채(山寨)주의에 지배된 나머지 창조의 에너지와 생태가 상실되고 있지요. 셋째로는 종족주의, 협애한 민족주의의 포로로 되고있으며 네번째는 공리적 물질주의와 위국학 (伪国学)에 엄밀히 포위되어 자아초월과 상상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문화상태하에서 이런 병폐들이 치유되지 않으면 중국문화의 자아번영은 영원히 백주의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10. 대사(大师)조작의 대약진운동   김:  “문화번영”화두와 연결된 화제인데요. 근년 중국에 자주 오면서 볼라니까 중국은 “문화번영”의 기상을 만들기 위해 각 분야, 특히 문화영역에서 “대사”를 만드는 대약진운동 비슷한 이벤트를 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실지로 나는 자칭 “××대사”라고 명함에 버젓이 찍어서 자기선전을 하는 화가, 서예가도 심심잖게 보고 웃었어요.   주: (웃음) 잘 보아냈네요. 요즘 중국은 “문화대사”계보를 만드는데 열중하고 무슨 “영웅”이요 “종사”(宗师)요,  “태두”요 “거장”이요 하면서 화려한 단어를 늘어놓으면서 국민의 자신감을 돋구어 주자고 합니다.      대륙에서 “대사”를 자주적으로 만드는데는 3가지 비결이 있어요. 1. 우선 그 “대사”는 초인간적인 재질이 있어야 하는데 비범한 기억력이 그것이지요. 이면에서는 전인각(陈寅恪) 과 전종서(钱钟书)의 사적을 과대포장한것 보면 이내 알수 있습니다. 2. 그리고 “대사”의 신체적 조건으로서 장수, 천수가 “대사”의 절대 조건이에요. 보세요. “문학대사” 冰心, 巴金, 钟敬文, “국화대사” 刘海粟 黄永玉 등도 90세이상이고 백세 넘은 사람들이지요. 3. 묘당(庙堂)과 강호(江湖)사이에서 독무를 출줄 알고 구레나룻이나 수염을 날리며 적절한 시기에 눈물을 흘리며 대중들에게 권장을 하는 테크닉이 있어야 하지요. 이른바, 눈물대사(含泪大师)이지요. 사실 중국 “대사”는 신체적 서사(叙事)의 금메달 달아주기 운동, 이벤트로서 그건 각 지역마다 “이미지공정”이고 민간에서는 일종의 엄중한 “문화조급증”을 의미합니다.   김: (웃음) 정채로운 비유와 독설이군요!   주: 기실 “대사만들기”는 문화위기에 대한 우려심을 완화시키고 의도적으로 “문화번영”의 가상을 인공적으로 제작하는겁니다.       솔직히 말하여 20세기 하반기이래 중국의 토양에서는 한그루의 “대사”라 칭할수 있는 식물이 생장하지 못했잖습니까?!      “위조대사” 역시 새빨간 문화립스틱을 창백한 입술에 발라서 이 인문정신이 결여한 빈곤의 문화시대를 분식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지요.   11. 원한이여, 안녕   김: 주선생은 노신의 “원한정치학”에 대하여 최초로 제기한 비평가의 한사람입니다. 2001년에 발표한 《殖民地鲁迅和仇恨政治学的崛起》라는 등 글을 통하여 노신의 연애와 결혼에서 나타난 인격적 결함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노신비판”의 선봉의 한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명한 저작 《流氓的盛宴》에서 “仇恨政治学”(원한 정치학)이란 신개념을 제출하고 증오에 찬 노신의 언어와 모택동의 언어가 방법론적으로 결합하여 중국의 “원한정치학”을 결성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지적으로서 현실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주:  중학시대 문혁후기에 나는 《노신전집》을 통독했으며 노신의 언어체계에서 자랐으니 모종의 의미에서 나는 “노신의 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웃음) 나는 1994~1999년에 오스트랄리아의 생활에서 내 심성이 인류화로 나아갔고 해외에서 이성으로 민족정신과 민족성격을 반성하는 계기를 가졌어요.   김:  이해가 갑니다. 해외에서 중국의 내실을 객관화시켜 정찰하는 찬스를    주:  노신을 반성하는것은 신문화운동의 전체적 반성의 일환이기도 하며 초창기 노신과 만년의 상해시기의 노신을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  완전히 동감입니다.   주:  북경시대의 노신은 중국 현대 가장 탁월한 작가이지만 상해시기에는 변모합니다. 만년에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원한, 증오만 남았어요. 그의 만년의 “원한정치학”은 또 역사폭력언어의 원천이 됩니다. 이게 노신의 비극이고 시대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상해시기 노신은 거이 한다하는 유명 문인, 지식인은 다 골고루 욕하고 인신공격을 하는데 노신의 욕을 먹은 지식인은 해방후기에도 계속 수난을 당합니다.      노신의 그런 인신공격의 방식은 20세기 하반의 폭력언어에 격진적인 모델과 도덕적 합리성을 제공하게 되지요.   김: 맞아요. 노신이 만년에 상해시기 거의 소설, 문학창작은 손떼고 잡문이라는 인신공격으로 타자를 공격하는데 정력을 기울입니다. 제가 노신 연구를 하면서 보니, 노신은 잡문으로 당시 유명인을 욕하면 발표가 쉽고 원고료가 금방 들어오니 생계의 수단으로 그런 잡문을 대량적으로 집필 발표했다고 봅니다. 그도 인간이고 처자를 먹여 살리는 가장이니까요. 이 점은 연구자들은 홀시하고 있습니다.   주:  그렇지요. 상해시기 노골적인 증오, 원한이 노신의 뇌리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일부분은 공공적 요소, 내지 “민중을 위한 증오”였고 대부분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었습니다. 문혁시기 노신식의 원한이 중국언어의 중요한 무기로 이용당하게 되는데 노신을 반성하는건 우리 자신의 반성이며 우리가 그런 유치하고 노골적인 인신공격의 증오학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노신의 유산을 계승한다면 그런 원한학은 버리고 그의 독립, 자유적 비판정신을 따라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12. 일체문명은 개방속에서 성장한다.   김:  2014년 6월 출간한 선생의 상하권 대작 《华夏上古神系》를 잘 배독했습니다. 이 저작은 지금까지 선생의 문학, 문화비평의 유연한 산문성격과 달리 학술성이 지극이 농후한 바, 중국신화에 대한 인류학, 고고학, 사회학, 비평학, 심리학등 여러 영역의 고찰이 돋보입니다.      주선생의 학문, 비평의 큰 전환이라고 봐도 괜찮습니까?   주:  그렇다고 얘기해도 무방하겠지요. 2000년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학의 쇠퇴이고 시장의 개방으로 대중의 문화적 소비가 커지고 나도 대중문화 비평으로 전향했지요. 그래서 문화비평을 하다보니까 전지구의 상고신화를 발견하고 전세계의 신의 이름이 다 똑같다는 발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미엘문명, 인도문명, 이란문명 또는 중국문명 그리고 머나먼 마야문명, 정도는 부동하지만 동일문명이 파열하여 그 파편속에서 생성 발전된거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김:  주선생은 이 장편대작을 통하여 중국신화의 생성발전은 물론 중국 역사중의 “허위제작”문화를 까발리기도 하고, 국학이 중국의 보수, 독자성을 증명하려는 자폐성이라 지적하기도 하면서 일체 문명은 장폐쇄속에서 자라나고 발전하는게 아니라 연결속에서, 관계망속에서 개방속에서 이어진다는 도리를 알기 쉽게 해명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으면서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선생이 일본어를 알고 계셨다면 이 저작이 더 풍부한 용량의 대작이 됐을거라는 아쉬움입니다.       왜냐하면 상고신화에 대한 일본학계의 연구는 방대하고 치밀한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본 학자의 연구업적을 참고하면 이 책이 많이 보완되고 완벽성에 가까워 질것입니다.   주:  아, 그렇습니까? 일본어를 모르니까 이면에서는 큰 손해네요. 그럼 앞으로 김교수의 자료, 문헌적 지원을 부탁하고자 합니다. 상고신화에 대한 투철한 이해없이 선진(先秦)철학에 대한 진상을 알길없으며 따라서 중국문화의 정신적 본원을 탐명하는데 지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21세기신문화운동”에 그리고 중국문화의 미래적 부활에 일조가 되리라는 염원에서 이 저작을 써냈습니다.   김:  좋습니다. 금후의 학술이나 비평에서의 구상을 얘기해주시겠습니까?   주:  요즘은 인터넷시대, 스마트폰 시대라 나는 여기를 무대로 계속 대중을 위한 학술, 문화비평가로서 현역에 있고 싶어요. 물론 젏은 시절의 격렬한 문체보다도 좀 부드러운 문체로 글을 쓸 생각이고 양보다는 질을 따지면서 쓸 예정입니다. 글쓰는 내가 글을 안 쓰면 내가 아니니까요!     대담자 소개   주대가 (朱大可) 당대 중국 가장 영향력있는 문화비평가, 문화학자의 한 사람. 1957년 상해에서 출생 1983년 화동사범대학 중문계 졸업 2004년 시드니과기대학 철학박사학위 취득 현재 동제대학 문화비평연구중심 교수   문화학자, 비평가 및 수필작가로서 그는 20세기 80년대 문화비평의 선봉, 기수로 전위문화의 중요한 수호자로 나섰다. 근년에는 중국문화연구와 비평에 종사하며 문화철학, 상고신화, 당대  대중문화등 영역에서 활약하며 사상과 문체는 독자적으로 일파를 형성하고 있으며 문화연구와 비평에 지대한 영향을 과시하고 있다.  
193    (83)《점석재회보》의 경이로운 세기말 중국사회 댓글:  조회:3735  추천:41  2016-11-0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3) 《점석재회보》의 경이로운 세기말 중국사회 김문학             수년전 필자는 《점석재회보(点石齋畵報)》 영인본 한세트를 입수했다. 이 화보야말로 19세기말 중국사회상을 리해하는 보물고적인 잡지이다.     1884년 5월 8일에 창간되여 1898년 페간된 이 화보는 당시 상해에서 신보(申報)라는 근대 유력지를 창간한 영국인 메이저형제가 출판한 화보였다. 신보는 1872년 4월 30일(동치 11년)에 창간된 중국어신문으로서 1949년까지 존속한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중국 최고(最古)의 신문의 하나였다.     《점석재화보》는 매월 6자가 붙는 날자(6일, 16일, 26일) 3차례 발매, 매 책의 페지가 8페지였는바 신보와 같이 배달되였다.     약 14여년 동안 4천폭이나 달하는 문자설명이 달린 그림, 삽화를 내였는데 이는 청말 중국사회의 여러 분야를 리해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북경대의 문학과 교수 진평원(陳平原)의 표현을 빈다면 “희귀한 보물고”이다.     당시 창간호 서문에서 존문각주인(尊聞閣主人)이란 이름으로 발간취지를 “유럽에서는 화보가 대거 류행하고있다…그런데 중국에는 아직 이런게 없다”고 밝히면서 중국식의 그림을 통해 화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타개하여 눈을 즐겁게 하는것, 또한 뉴스보도에 흥미를 가진 자의 고충을 돕기 위해서라고 언급한다.     《점석재화보》는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렸다. 창간호는 수일만에 매절이 되고 륙속 독자들의 요망에 의해 수천부씩이나 백넘버를 증쇄했다.     그래서 1888년과 1889년 2년 동안 상해를 넘어 북경, 남경, 항주, 호남, 광동, 사천, 산동, 귀주, 광서, 감숙 등 중국 태반에 점석재지사를 설립할 정도로 인기비등(沸騰)이였다.     아이디어적으로 탁월한 영국인 메이저는 당시 저명한 화가 오우여(吳友如)를 주필로 초빙하여 사회신문, 신선한 사건, 물건, 시민풍습, 일상생활모습, 외국의 일화, 기괴한 풍문 등 잡다한 소재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오우여외에도 유명한 화가였던 김계(金桂), 장지영(張志瀛), 전자림(田子琳), 하명보(何明甫), 부량심(簿良心) 등이 소속으로 활약했다.     그들의 필법은 섬세하고 중국회화의 요령에 서양화의 원근, 명암법 등을 구사하여 그림의 매력을 대폭 증가시켰다.     그중에서도 특히 다작인것이 김계와 부량심으로서 각기 천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점석재화보》의 내용은 사회, 정치, 문화, 경제, 민속, 뉴스, 일상 등의 방대한 내용이 망라되여있다. 1883년 이래 청불전쟁(정식 개전은 1884년)을 계기로 화보가 가동된다. 화보의 창간호에 이미 프랑스군이 청군의 주둔지를 습격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1894년 발발한 청일갑오전쟁의 그림 40여점이 게재되기도 했다.     《점석재화보》는 당시 시사와 사회신문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중대한 사회뉴스는 독립으로 다루었으며 집중단기련재방법을 취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리홍장이 로씨야 및 구미 각국 방문, 서태후의 50, 60탄신경축행사, 공동 3강에서 발생한 홍수재해 등을 리얼타임으로 그림으로 보도했다.     화보는 또한 시민의 풍습, 일상을 그리는데 치중했는바 청조 세기말 중국 도시생활풍경이 위주였다. 이런 그림은 청조의 사회실상과 서민의 생활을 리해하는데 지대한 도움이 되는 풍속화로서 가치가 있다.     그 실례를 들면 신혼의 왕가네 새색시가 강가에서 쌀을 씻다가 자나가는 비적 두명에게 잡혀 기생집에 팔려가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어린이가 유괴당한 뒤 인공적으로 잔지단벽(殘肢斷臂)시켜 장애인 “걸식아이”로 분장시킨 내용도 있다.      화보는 당시 서양과학기술, 선진문물을 소개, 선전하는 구실을 한다. 이외의 신생사물은 《점석재화보》가 취급한 주요 소재이기도 했는바 중국 근대에서 가장 일찌기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물을 소개하는 화보식 매스컴이였다.     이를테면 광서 11년 10월 15일, 세계 각국을 편력한 과학자 언영경(顔永京)이 상해 격치서원(格致書院)에서 환등을 리용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피력하는 장면을 그린 내용이 있다. 그리고 독일의 방탄의, 영국의 수저터널로 기차가 통과하는 수저행차(行車), 일본의 화산지진 등을 소개한것도 있다.     이 자그마한 《점석재화보》는 많은 중국 청소년에게 영향을 끼친다. 문호 로신 역시 《점석재화보》를 즐겼던 소년이다. 그림책을 매우 즐긴 로신은 그림에서 대포를 보고 대포가 륙지용인가 아니면 해상용인가 신경을 썼다고 한다. 오우여에 대한 로신의 언급 역시 그림을 좋아한 그의 애정이 스며있을것이다.     물론 《점석재화보》에는 기생, 도박, 비적 등에 대한 묘사가 많다. 이에 대해 로신은 “국외사정에 아직 어둡기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 가끔 그럴거라는 허구의 요소도 가미된다”고 지적했다.     중국내 학자나 일본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점석재화보》는 글과 글미이 조합하여 연출해낸 재미있는 잡지로서 시사와 신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큰 역할을 했던것이다. “이 방대한 그림에는 서구문화와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경악, 흥분, 오해가 횡일하다. 백여년전 세기말 중국인이 구축한 세계상을 어떻게 읽어낼것인가? 미술사, 문학사, 과학사, 종교사, 사회풍속사…여러 각도에서 그 가능성을 해독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의 한 학자가 한 말이다.
192    15. 신민 침묵 역사 역사교육 원숭이 독립인간 분유 타액 댓글:  조회:2682  추천:22  2016-11-02
신민(臣民) 아내가 나에게 이런 말을 늘 한다. “우리 집에서 당신은 황제이고 저는 신민,신자예요.당신말은 다 맞고 다 최고예요.당신이 하시는 일을 제가 어찌아니라고 할수 있겠나요?어쩔수 없죠.신민의 몸으로 페하에 신복(臣服)하는게 신민의 일이니까요.” 내가 한달 신책 구입비가 인민페 3~4천원에 늘 비싼 고가의 골동서화를 구입해도 그녀는 “당신이 필요해서 하시니 제가 반대할순 없죠…”하면서 언제나 NO를 말하지 않고 웃으며 수긍해주었다. “당신이 신민인 저를 정복하는건 당연한 이치지만 ,제가 신민으로서는 유일하게 황제페하께 신복하는것이 아닌가요!” 그녀는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예를 들어 집안의 고가 화병을 깨뜨렸다 해도 “괜찮아요”하면서 나를 위안해주었다. 아내의 유순한 기성,귀부인 다운 품성,치과닥터답게 이쁜 흰이가 드러나는 스마일… 아내는 영원히 내 상처받은 마음을 보다듬는 보금자리이고,10살 가까이 연하이지만 나의 누님이고 ,나의 어머니이고 또한 나의 연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행복한 비결은 아내의 바보스러운 “신복정신”이 뒤받침해주고 있는 까닭이다. 나는 영원히 아내와 손잡고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걷고싶다.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고마워,함께 있어줘서”하면서 숨지고싶다. 침묵 함구하고 말안한다고 하여 순종하고 찬성하는것은 아니다.고요한 침묵속에는 화산같은 반항이 잠적해있다.침묵하는 다수를 어리석게 보지마라.침묵이 폭발하는 날이면 화산같은 뜨거운 용암이 흐르리라. 역사 (1)지배자가 자신의 정당화를 도모하는데 이용하는 과거에 대한 기술. (2) “과거는 외국이다.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 영국작가 L.P.하틀리가 소설 에 쓴 첫대목이다.과연 명언이다.워낙 타국같던 과거를 자신의 이념으로 상상하여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역사교육 역사교육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교양으로 취급하는것이다. 또 하나는 애국교육의 일환으로 정체성확보를 위해 민족주의를 배양하는 프로그램. 원숭이  이런 실험을 했다고한다. 원숭이 열마리를 큰 조롱안에 가두어넣고 바나나를 던져 반응을 보았다.어느 한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기만 하면 관리원이 그 원숭이를 혹독히 방망이로 때렸다.이렇게 여러번 반복되면서 어느 한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기만 하면 다른 9마리 원숭이들이 집단으로 그 한놈을 공격하게 되였다.그러니 이쯤되면 밖에있는 관리원이 방망이로 손쓸필요도 없게 되였다. 이미 원숭이들은 관리원이 옆에서 감시를 안해도 자각적으로 공포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게 되였다. 사실 우리 인간들도 원숭이와 다른건 무엇일까? 독립인간 중국 현대 유명 모더니즘 시인 북도(北岛)가 말했다. “영웅이 없는 시대에 나는 다만 한인간이 되겠다”고 . 이말을 패러디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고싶다. “누가 하는사람이 없는 이 시대에 나는 다만 하는 인간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금지구역을 깨고 용감히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안하는 사람,시기자들로부터 공격받기 마련이다. 이는 역사가 가르쳐준 “인간법칙”의 하나이다.어쨌거나 나는 지적 모험,터브를 깨는 인간,모든 비난을 감당할 독립인간이 되고싶다. 분유 이 나라에서는 자기 민족의 후대들인 아기들에게 먹이는 분유에도 독을 타는 독유(毒乳)라는 이름의 분유가 독유(独有)하다.문명레벨이 낮다고 정평이 나있는 아프리카주에도 이런일은 없다. 타액 (1)입속의 타액선에서 분비되는 끈끼있는 소화액을 타액이라 한다.속어로 “침”라고 함. 중국인의 타액을 뱉는 일은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걸죽한 시누런 가래침을 뱉는 소리와 동시에 분출되는 광경은 가관이다.타액의 용도는 다양하여 한방약재로도 사용되였으며, 때로는 적수나 라이벌을 공격하는 자연무기로도 사용되였다.즉 적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음으로써 최고의 경멸을 표했다. (2)그런데 요즘은 국민소질이 향상되면서 그런 공격이 줄어들고 또 다른 은성형태로 나타나고있다고 한다. 레스토랑에서 태만하거나 서비스가 별로 좋지않은 복무원을 질책하거나하면 조심해야한다. 왜냐하면 그 복무원이 복수심으로 안보는데서 몰래 접시의 음식물에 가래침을 뱉아놓는다고 한다. 타액전쟁,중국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명심하시길.
191    중국인에게 어떤 정신이 필요하나? [전리군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366  추천:40  2016-10-28
〔문화대담〕 중국인에게 어떤 정신이 필요하나?  전리군(钱理群)+김문학 o. 들어가면서    전리군선생은 당대 중국 인문학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거물이다.    북경대학 중국문학계열의 권위적인 교수이며, 1980년대이래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을 과시해온 인문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노신, 주작인 연구의 태두로서 알려져 있다. 전교수의 20세기중국지식인의 정신사적 고찰과 20세기 중국사경험의 반성과 총화는 국내와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리군교수의 여러 저작을 읽으면서 그의 팬으로 되었으며, 내심에서 전교수를 존경하게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배견하고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은 심정도 매우 간절했다.     의외로 나의 소망은 생각보다 조속히 찾아왔다. 중국사회과학원 왕학태선생과 북경대학 중문계 주임 진효명 교수의 연줄로 쉽게 전리군선생과 연결이 되었다.     전화에서 들려오는 전리군교수의 목소리는 약간 쉰소리에 자장(磁场)이 있는 부드러운 소리였다. “아, 일본에 계시는 비교문화학자 김문학씨군요. 동아시아 3국비교 문화론저를 여러권 읽어서 벌써 알고 있었답니다.” 내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전교수 말씀에는 매우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였다. “아, 근데 어쩌죠? 내가 현재 북경시내에 살지 않고 창평(昌平)의 노인아파트에서 아내와 둘이서 살고 있어요. 북경시내서 여기까지 오시려면 불편하실텐데요…” “고까짓것 거리야 아무것도 아니죠! 전선생님을 뵈울수 있다면 바다를 건너서라도 찾아갈수 있습니다.” 내가 괜찮다고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나야 너무 환영하지요! 그러잖아도 김문학씨를 한번 만나뵙고 싶었던 차라, 그럼 여차여차하게 오시면 됩니다.’ 전선생은 차근차근 주소와 오는 길을 가르쳐주셨다. 2016년 6월29일 오후 2시, 우리 일행이 도착한 목적지는 호화로운 5성급 호텔수준의 노인아파트였다. 키가 작달막하고 동그란 얼굴에 백발이 성성한 인자한 노인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전교수는 흔히 길거리에서 볼수있는 온화한 할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작은 두눈은 예지의 빛을 뿌리고 있었다. “요근년에는 기자의 인터뷰를 포괄해서 거이 사람을 안 만나요. 김선생은 일본에서 온 귀한 손님이고 또 한번 만나보고 싶던차라, 잘 오셨어요…” 싱글벙글 전리군선생은 만면에 희색을 띄우며 반겨주셨다.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중국 인문학계의 태두이신 전선생님과 대담을 할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대담은 호흡이 잘 맞았으며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어느 사이 3시간이 흘렀다. 웅변가이신 전교수님은 종횡무진으로 구수하게 이야기를 펼쳐 나 또한 유쾌한 대담을 체험할수 있었다. 대담이 종료되자, 전교수님은 나에게 흔쾌히 제사(题词)를 써주셨다. “两脚踏三国大地,一心评东亚文明” 이 14자야 말로 내가 하고 싶었고 또 실천하고 있는 좌우명이다. 전리군선생과의 3시간의 대담을 아래에  간추려서 정리 해본다. 1. 행동하는 지식인 김: 전선생님은 말그대로 당대 중국을 대표하는 인문학계 학자의 한분으로서 현대문학, 사상,사회연구에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제가 전선생님을 존경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전선생님의 몸에 모든 수식어를 빼놓고도 선생님은 자신의 이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학자, 지식인의 본보기라는 점 입니다.       2002년 북경대학 교단을 떠난뒤로 중학교육에 혼신을 다해 실천해오셨습니다. 장장 12년동안 기층 중학교육에 투신했지만 많은 고배를 마셨고 실패를 했지만 선생님의 “행동하는 지식인”의 실천에서 또 많은 소중한 체험,경험들을 통해 교훈이나 방법을 모색했으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은 왜 대학교수직에서 정년퇴직 하신 다음  중학교육에 투신하셨는지요? 서재에서 글이나 쓰면서 정년퇴직후 생활을 얼마든지 즐길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전: 사실 난 1998년부터 중학교 어문교육에 관심을 가졌어요. 관심을 가진 동기는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중국의 문제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교육문제라고 느꼈습니다. 인간이 노년에 들어서면 모든것을 다 보아내고 절망할수 있지만 유일하게 아이들한테는 절망 할수 없지요. 애들이 있기때문에 우리는 절망에 반항할수 있거든요.     두번째로 대학교수가 중학으로 내려가는 것은 5.4의 전통이지요. 노신, 주작인,주자청도 다 중학교원을 한적 있잖습니까?     그래서 내가 우선 선택한 곳이 내가 18년동안 살았던 귀주였지요. 여기서 향토교재《귀주독본》을 편찬하여 “자신의 발밑을 알자”는 과제를 제기하고 변두리지역에서 교육을 전개시켰어요. 그전에 북경등 중앙지역에서 하다보니까 이데올로기의 장애물이 너무 컸거든요. 10여년동안 중학교육실천속에서 수많은 곤난에 봉착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아무튼 헛수고가 아닌 실천이었다고 자부합니다. 2. 무엇이 우리의 교육을 망치는가? 김:  2002년 퇴직후부터 2014년 12년동안 전선생님의 기층교육을 위한 실천, 눈물겨운 노력은 전 교육계, 학술계가 알아주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스스로 고백하다싶이 “누전누패 누패누전(屡战屡败,屡败屡战)”의 고난의 길어었어요. 그럼 중국의 교육 개혁에서 장애물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전: 지금 교육 개혁의 장애물은 관념문제가 아니예요. 바로 이익문제입니다. 교육 전체가 이익의 연쇄로 되었는데 이 연쇄는 굉장히 큰 괴물인거예요. 교육 행정부문만 아니라 거기에 연관된 모든 분야, 심지어 과목, 교과서, 보호자까지도 다 그러하지요!     이를테면 응시교육을 소질교육으로 전변시키겠는가? 어림도 없어요! 왜냐면 응시교육을 제거해버리면 많은 사람들이 철밥통이 떨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없어집니다. 그러니 그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기 마련이지요. 내가 중학교육에 개입하여 이런 교혁을 하자고 했지만 죽기살기로 날 몰아 쫓아내는 거에요. 이유야 불보듯 뻔하죠. 내가 그네들의 이익을 건드렸으니까요. 내 관점이 아니라 그들의 근본 이익을 침범했으니까 날 구축하는거죠(웃음) 김: 그러니까 중국교육은 이미 실이익이란 괴물에 완전히 점령당해버린거군요! 2014년 선생님께서는 고령이시기도 하고 중학교육에서 손을 뗀다고 하셨는데, 교육에 관심을 뗐다는 말씀은 아닌것 같습니다. 3. “대문제 • 소행동” 전: 물론 아니죠. 사실 저는 학자라기보다는 교육자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교원은 내 기질이나 이상에 더 맞는 직업이라 생각하거든요. 김: 실지로 선생님의 제자들의 말에 따르면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게 선생님의 저작을 읽는것보다 더 심각하고 정채롭다고 했습니다. 전: 맞어요. 내 학술저작도 기실은 엄격한 학자의 연구성과라기보다는 한 교원의 강의라 하는게 낫지요. 청년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제가 책 쓰기를 즐기거든요.(웃음) 김: 선생님은 행동하는 지식인, 사상가로서 “큰 문제를 생각하고 작은 행동을 실천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선생님의 “생명존재방식”이라고 어느 책에서 고백하셨습니다. 전: 솔직히 고백하여 이 말에는 현실앞에서 무가내하와 구체적 반항의 뜻이 내포돼 있는거죠. 이런 체제, 현실중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되도록 독립적인 진솔한 목소리를 내고 각성자, 비판자로 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겁니다. 언제나 자신의 독립사고를 견지하는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일을 하되, 자신이 하고 싶은, 할수 있는 일을 하며 사회에 유익한 작은 일들을 하는것으로 자신의 신념을 일상생활의 논리와 구체적 행동에 옮기는것입니다.     제가 《평민교육인문독본》을 시리즈로 편찬한것도, 《자원봉사자문화총서》를 펴낸것도 구체적 작은 행동의 일환으로 한 사소한 일이지요. 김: 정말 선생님께서는 중국사회, 교육에 사소한 행동으로 큰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시고 있습니다. 전: 요즘은 두문불출, 중학교육에서 손을 떼고 “교육밖에서 교육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진정한 교육자는 교육에만 관심할것이 아니라 교육을 초월하여 사회와 사회변혁을 관심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상자, 교육자로서의 실천 신념은 한마디에요. 즉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 도우면서” 4. 지금 왜 노신인가? 김: 과연 정채로운 좌우명입니다. 전선생님은 교육가로서 정말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전선생님은 중국 당대 노신연구의 태두로서, 노신에 관한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근년래 중국 학계, 교육계에서도 노신에 대한 의논이 분분한데 선생님은 노신에 대해 요즘 어떤 사고를 하고 계십니까? 전: 내가 요즘 가장 관심을 갖는 문제는 노신이 당대 중국에 어떤 의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대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청소년들에게 노신의 의의를 거듭 강조하면서 노신을 읽으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김: 노신의 당대적 의의, 매우 매력적인 테제이군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 노신이 우리에게 특수한 의의가 있는것은 다른 작가와 달리 현재에도 현실적 의의가 있다는 거지요. 노신은 여전히 현재 진행적인 존재이며 그 존재적 가치를 크게 발산하고 있습니다. 오늘 중국에 있어서 노신의 의의는 매우 중대하고 심원합니다.     노신은 우수한 비판성자원(批判性资源)입니다. 간단하게 실례를 들어서 근년래 중국의 민족주의가 팽창하고 있는 와중에 노신의 이 분야에 관한 적절하고 심각한 학견, 논술들은 우리에게 훌륭한 비판과 반성의 자원을 제공해주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원창성(原创性)적이고 또한 원천성(源泉性)적이기 때문입니다. 5. 노신의 참 모습 김: 투철한 지적입니다. 장기간 중국에서는 노신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왜곡당한 부분이 많았지요. “横眉冷对千夫指,俯首甘为孺子牛”라는 투사로만 부각시키고 경외할수만 있고 접근하기 어려운 신화적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노신은 “투사”의 얼굴뿐이 아니지요. 부모의 아들, 아버지, 남편, 청년의 지도자, 작가 그리고 미술애호가 등 여러가지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으면서, 비판성이 강하고 또한 인자한 아버지로 생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전: 맞어요. 노신의 참모습, 노신에 대한 기본인식을 잘 해야 합니다. 노신이 직면한 문제는 중국의 구체적 현실문제였는데, 문제에 대한 사고,해석은 지극히 심각한바, 아무 현실문제가 그에게 있어서는 민족문화, 지어는 세계문화에 대한 추궁으로 전향되고 인간성과 국민성에 대한 해부로 승화되지요.     그럼으로 노신의 작품은 현실과 보편성과 잘 결부되고 그 시대성을 초월하여 초시대적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노신의 글을 읽으면 마치 그가 오늘 우리가운데 살아 있는것같은 느낌이지요. 내가 늘 말하군 하지만, 어떤 작가는 그 시대에 국한된 작가, 과거의 작가이지만 노신은 아닙니다. 그는 오늘 현재 진행형의 작가로서 오늘의 의의를 지니고 있는겁니다. 김: 지당한 말씁이십니다. 노신은 사실 1980년대중반까지 줄곧 “민족혁명”의 화두로만 휩싸여 온 혁명의 “성인”이었지요. 전선생님을 위시로한 노신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노신이 신단(神坛)에서 서서히 내려와 참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노신에 대한 극단적인 숭배와 극단적 폄훼도 다 노신의 참 모습을 흐리게 하지요. 전선생님의 노신의 당대적 의의는 너무 적절하고 의의 깊은 지적입니다. 6. 노신의 당대적 의의 전: 노신의 당대적 의의에 대해 말하자면 아까도 언급했지만, 노신은 우리에게 풍부한 사상적,비판적 자원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 대한 노신의 사고는 우리가 오늘 중국을 인식하는데 어떤 의의가 있을까? 나는 이런 몇개 측면으로 보고 있어요     어떻게 중국 국정(国情)을 이해 할것인가 하는 문제.노신은 《随感录五十四》에서 중국 사회의 상태는 몇세기를 하나로 묶은거와 같다고 지적하고 있어요. 구체적 문장은 인용하지 않지만 중국 상황에 대한 노신의 명제는 지극히 심각해요. 중국문제의 복잡성, 다종 사회형태와 문제가 하나의 시공속에 공존한다고 지적한 곳에서 당대 중국도 역시 북경 상해와 같은 후현대사회, 서부지역과 같은 현대 내지 전근대사회가 공존하는 시기라는것을 연상할수있어요. 이게 중국의 기본 국정입니다. 김: 각종 사회발전단계의 공시성(共时性)사회가 곧 중국의 현실이고 큰 문제이기도 하지요.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혀서 관찰하면 일본이 포스트모더니즘 한국, 대만이 그 뒤를 따르고 북한이 전근대사회, 중국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그리고 전근대가 뒤섞인 사회덩어리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공동체가 잘 안되는 이유도 이 사회발전단계의 갭이 격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중국 내부 발전단계의 갭이 큰 문제는 중국의 문제를 산생하는 온상이기도 하지요. 전: 그렇지요. 중국문제의 다양성, 복잡성은 한가지 논리,한가지 사유로 관통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노신의 국정 해석은 우리에게 문제를 바라보는 풍부한 계시를 주고 있습니다.     노신은 또 《文化偏至论》에서 한 말인데요. 1907년 일본유학때 쓴 글인데 중국에는 동시에 두가지 병증이 존재한다고 지적합니다. 옛것은 중국 자신에서 자생하는 병이고 오늘의 것은 교통의 발달로 생긴 병으로서 이것으로 중국이 망가지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쇼크를 받았습니다. 20세기 초에 노신의 말이 바로 오늘 중국의 현실을 적중한 말이지요. 중국의 고유의 전제주의의 폐단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발전이 갖고온 서양문명의 폐단. 오늘의 중국은 바로 이 두가지 병폐에 걸린 시대이지요. 노신의 중국 실정에 대한 분석판단은 바로 오늘 중국의 현실에 대한 기본적 판단이라고 할수 있어요. 7. 누가 중국의 개혁을 가로 막는가? 김: 노신은 국제주의적 시야로 중국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당시 중국의 현실 개혁에 관한 글들은 많은 잡문을 통해서 발설했는데, 이 면에 대해서 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전: 중국의 개혁에 대해 노신은 그의 《小杂感》이란 글에서 이런 지적을 합니다. “曾经阔气的复古,正在阔气的要革新,要改革”  이 말엔 사실 매우 심각한 의미가 포괄돼 있지요. 누가 어떻게 개혁을 하고 개혁의 에너지는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노신의 분석은 3가지로 분류했는바, 첫번째는 “曾经阔气” 했던자들이 현재 실세하여 개혁을 하고자 하는데 개혁의 방향은 곧 “复古”입니다. 모택동시대로 회복하자는 논조가 바로 이거지요.     두번째는 “正在阔气的”한 자들이 현상태를 유지하자고 고집하는바, 중국모델론, 中国模式论자가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김: 이는 기득이익자들의 논조라고 생각됩니다. 현상유지를 통해 진일보 개혁을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보전하자는 심산이 아닐까 합니다. 전: 바로 이겁니다. 이건 전형적 기득이익자들의 논리로서 우리가 이미 정확한 길을 걷고 있으니 더 이상 개혁도 필요없이 현상유지로 가자는 거지요. 그런데 개혁이 대추세이니까 그네들도 개혁을 부르짖어요. 개혁의 목적은 눈앞의 그들의 기득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얄팍한 타산에서입니다. 나는 이게 아마 중국 목하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논조라고 봅니다.     세번째 개혁은 바로 “未曾阔气的人”인데, 권력도 세력도 없는 사람들이 당연히 현상 불만으로 개혁을 요구합니다. 민간개혁세력으로서 유권 (维权), 인터넷민주 (网络民主), 자원봉사자(自愿者组织) 등 방식으로 개혁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민간개혁자는 노신이 말한 “未曾阔气的人”에 속한자들이며, 내가 볼때 많은 백성, 대중의 이익을 대표하므로 이런 민간의 개혁을 지지해야 합니다. 대다수 백성의 이익을 위한 개혁이 개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되지요. 8. 중국인에게 어떤 정신이 필요하나? 김: 노신을 중국의 쉑스피어, 톨스토이로 보는 학자도 적지 않습니다. 노신이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학사, 정신사에서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는 이유는 풍부하고 심각한 정신적 문화재부로 되고 있기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에서의 노신 연구가 오히려 중국보다 앞선면이 있는데, 일본에서도 노신을 자신의 아시아의 공통문화재부로 간주하고 있기때문이지요. 선생님께서는 노신의 당대적 의의에 대하여 정채로운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노신의 의의, 노신의 정신적 재부로 말하여 현재 중국인에게 어떤 정신이 필요하신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전: 예, 노신은 《中国人失掉自信力了吗?》에서 매우 심각한 말을 했어요. 어문 교과서에도 나오는 문장이니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예로부터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결사적으로 일하는 사람, 민중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하면서 묵묵히 견인불발하게 일하는 우리 중국인의 자신감, 정신력을 높이 칭찬했지요.     나는 노신의 이 말이 우리에게 어떤 정신이 필요한가?라는 문제에 답장을 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중국인에게 수요되는 정신은 바로 견인의 정신과 또 하나는 지혜의 정신이지요. 김: 그러니까 목표를 위하여 견인불발의 의지력으로 달성할때까지 끝가지 노력하는 정신이겠군요? 전: 그렇지요. 조급해 하지 말고 유장하게, 지혜를 발휘하여 부지런히 견인성있게 분발하는 정신력입니다. 노신이 제창한 정신은 중국의 현실에 딱 들어 맞습니다. 중국이란 나라에서는 노신처럼 목표를 정하고 근기있게 서서히 유장한 마음으로 부단히 애쓰는겁니다.     왜냐하면 중국 같은 체제는 일조일석으로 변하는게 아니니까 이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안에서 자신을 보전하면서 견인불발하고 또 지혜롭게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요. 9. 모택동과 노신 김: 노신의 당대적 의미에 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젊었을 때 정신적 지도자는 노신과 모택동이라고 고백한적 있지요. 초기의 노신연구에도 모택동의 영향이 있었다고 하셨으며 대만에서 《毛泽东时代与后毛泽东时代》란 저작도 간행했습니다.     제가 보건데, 노신은 사후 모택동의 몇가지 위대한 수식어에 의해 규정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신은 사후 최고의 문화 성인으로 신단으로 모셔진 반면 그 높은 신단의 그림자도 길었는바, 최고수령의 자의에 의해 이용당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된것은 노신의 불행 그 자체입니다. 사실 노신의 작품은 이데올로기의 해석처럼 그렇게 작고 좁고 굳어진건 아니였지요. 오히려 노신의 작품은 어떤것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초시대, 초국경 의의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모택동이 노신을 좋아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혹은 이 두 인물의 공통점 내지 유사성은 무엇인지요? 전:  (웃음) 우선 아래 몇가지 에피소드를 듣겠어요. 노신은 공산당을 인정하면서도 또한 회의적인 태도로 관찰하였지요. 노신과 모택동사이에 이런 일화가 있었어요. 풍설봉(冯雪峰)이 모택동의 시 한 묶음을 상해에 있는 노신에게 갖다 보였는데, 《西湖•井冈山》을 읽더니 노신이 하하하 대소하면서 “모택동의 이 시에는 산대왕(山大王)의 기개가 있다”고 했어요. 풍이 모택동에게 이 말을  전하자 모택동은 나야 말로 산대왕! 혁명의 산대왕이다! 고 대소하면서 말했습니다. 모택동은 스스로 자신을 녹림대학의 호한이라고 칭했어요.     흥미로운것은 1920년대 현대평론과 노신이 논전을 벌일때, 영미파 신사들이 노신을 학비(学匪)라고 욕했는데, 노신도 답왈 “나를 비적이라 했으니만큼 나는 비적이 옳다. 어쨌단 말인가?”고 했거든요. (웃음) 김: 노신에게는 비적도 당해내지 못할 천연적인 반항의 야성(野性)이 있었지요! 전: 그래요. 모택동이 노신을 왜 현대 중국의 성인이라 했는가? 모택동의 내심에는 그의 초기 저작에서 강열히 과시하다싶이 자신이 성인으로 될 염원이 간절했지요. 모택동이 노신을 신성화, 영웅화시킨것은 자기 자신이 바로 민족의 공전절후의 영웅이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 모택동은 어느 노신기념회의에서 “노신학습과 자아개조”를 제기하면서 노신을 자아 개조계열에 넣었거든요. 노신에 대한 인식과 이용을 보면 “이용, 제한, 개조” 3단계 였는데, 이것이 중국공산당의 지식인에 대한 책략이었고 지식인을 노신처럼 개조하는것이었습니다. 10. 나의 정신적 낙원은 어디서 오는가? 김: 사실 해방후 노신의 불행은 정치이념의 이용물로 이용당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작인도 “(노신)이 사후에 제멋대로 조종당하였는바, 기념이라고 하지만 기실 어떤것은 조롱이다”고 조취인(曹聚仁)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고 있었습니다. 괴뢰로 조롱당하고 이용당한 지식인중 노신은 가장 심각한 전형이라고 생각됩니다. 생전에 그렇게 독립, 자유의 지식인이고 작가였던 노신이 사후에 그렇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거지요.     화제를 바꿔서 선생님의 노신연구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혹시 저 같은 후학이 빈축을 살 각오를 하고 말씀드린다면 선생님은 노신에 너무 빠져들어가 “노신연구”를 객관화시키는 시야를 잃지나 않았는가 걱정되기도 합니다(웃음) 전: (웃음) 일부 무술가들이 무술에 빠져 주화입마 (走火入魔)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요. 나는 사실 아직도 노신에 깊이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 지식구조상 노신과 거대한 거리가 있다는것을 느끼고 있어요. 지금 많은 연구자들이 노신을 중국전통문화의 반역자라고 하지만, 기실 노신과 전통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불교 등 전통문화에 정통해 있지요. 우리가 여기서 거대한 격차가 있기 때문에 깊이 파고들어 갈수 없습니다. 김: 전선생님의 정신적 낙원은 노신에서 많은 자원을 얻는다고 고백했네요? 전: 그렇구 말구요! 내 정신적 낙원의 중요한 자원은 노신의 정신이 원천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노신은 이미 너무 많이 얘기하여 싫증난다고들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안해요. 노신은 아무리 얘기 해도 무진장한 정신재부라고 느끼거든요.     그리고 내 정신적 기지(基地)는 북경대학과 귀주, 이 두개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 중심과 변두리, 엘리트와 서민, 이런 이원구조인데 목하 학술계에서는 나같은 사람이 적지요.     이 두가지를 다 어우르는것으로 고난을 정신낙원으로 전변시키지요(웃음). 11. 일본의 노신연구가 앞서가는 이유 김: 노신연구의 태두인 선생님앞에서 이런 말씀을 올리 자면 죄송합니다만, 저도 비교문화학자, 문명비평가로서 일본에서 노신에 오랫동안 주목해 오면서 나름대로 연구도 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의 노신연구에 관해 자연 주목하게 되면서 한가지 느낀 감상이라면 오히려 원산지 중국보다 일본의 노신연구가 앞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 맞어요. 일본인의 노신에 대한 인식이나 연구가 오히려 중국보다 객관적으로 우수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노신연구에서는 다소 “신화노신”이란 보따리를 지고 있지만, 일본은 학술자유의 사회라서 이런 보따리가 없지요. 나는 일본의 노신연구자 키야마히데오(木山英雄)와 마루야마 노보루(丸山昇) 같은 학자를 너무 좋아합니다. 노신은 거리를 두고 아까 김선생 말처럼 객관화시켜서 봐야되는데 나는 상대적으로 서양의 연구보다 일본의 노신연구를 더 좋아해요. 서양의 연구는 좀 모자라지요. 노신은 동아시아에 속하니까, 내가 “동아시아의 노신”이란 개념을 제기 한적 있습니다. 김: 동경대학의 노신연구가인 후지이(藤井省三) 교수의 노신 연구나, 하나하나 이름을 거론할순 없지만 많은 노신연구자들의 연구는 실속있고 노신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깊은 연구를 하며 괄목할 만한 실적을 쌓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주도의 중국식 학술의 통병이있기때문에 학문연구에서 항상 일본의 뒤전에 서서 따라가고 있는 중국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예전에 중국인민대학의 손욱(孙郁)교수와도 이런 이야기를 하자 그도 내말에 찬동을 하더라고요.     선생님, 한가지 여쭙고 싶은데요, 이건 제가 선생님의 여러저작을 읽으면서 느낀 바인데 선생님의 파란만장의 인생체험과 혁명-투쟁-문혁의 과정에서 형성된 학문스타일은 저 같이 인생열력이 옅고 또한 해외에서 장기간 형성된 지식구조나 학문스타일과 굉장히 이질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듭니다.     선생님세대는 자신의 열력, 체험에서 학문이 샘 솟듯 괴어오르는 느낌이에요. 풍부한 열력을 정신적 자원으로 승화시키는 그게 너무 멋있습니다. 12. 풍부한 고통은 어떻게 정신자원으로 승화하는가? 전: 참 좋은 화제를 꺼냈네요! 1936년생인 나는 말그대로 청장년시기를 혁명과 투쟁속에서 보냈습니다. 나 자신도 문화혁명시기 반혁명으로 누명을 쓰고 내 인생의 최대 착오, 혹은 죄도 문화혁명때 지은것이지요. 문혁의 최대의 죄악은 바로 인간성의 악을 유발시켜 그 악을 최대한으로 팽창시켜 인간이 금수처럼 변하고 이로부터 사회의 악을 조성한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나의 후회, 통한, 교훈등이 나로 하여금 수치를 알게 했으면 자신에 대한 반성, 해부, 비판을 하게끔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 고통을 통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미화하거나 자랑거리로 삼을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성찰하여 고통을 정신적 자원으로 승화시켜야 하지요.     나는 지식인으로서 이런 사명감을 갖고 출발했는바, 내 연구의 스타트점과 귀속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心灵的探寻》,이 저작을 쓰면서 문혁의 그림자에서 탈출했고 《丰富的痛苦-“唐吉诃德”和“哈姆雷特”的东移》등 책의 연구를 통하여 정신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김: 파금의 “진실을 말하는” 정신과 일맥상통한데가 있습니다. 선생님세대의 지식인의 사고방식이나 정신상태를 “풍부한 고통”으로 귀결할수 있다면 “정신적자원”으로 전변시키는것 또한 선생님세대 지식인의 지혜와 고통을 초극하는 방법론 내지 경험의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같은 젊은 지식인은 전선생님과 같은 혹독한 역사체험을 할수 없으며 영국의 문화비평가 테루이 에글레턴(Temyeagleton)이 말한 그런식의 “역사적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나 또는 애초부터 그런 역사의 존재를 느낄수도 체감할수도 없었다고 해야지요.     전선생님이 존경스러운것은 역사속의 자신을 그 시대환경에 돌리거나 그런 핑계로 안주함이 아니고, 자기와 자기의 자각적 담당을 짊어지고 역사를 자아적 “정신자원”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진솔한 용감하고 사명감 있는 엘리트의 행동양식입니다.     그리고 아까 선생님 스스로 언급한바와같이 가장 높은곳과 가장 낮은 곳 모두 다 어우러져 청년을 위해 연결하고 일을 하는 사명감은 정말 찬미해야 할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전: 김선생이 이렇게 예찬하시니 고맙군요(웃음)! 13. 민간의 파워, 민간의 길 김: “정신적자원”이 이제 화두가 되었는데 저는 중국인의 현시점의 정신적자원에서 가장 결핍한것이라면 신앙의 위기와 정신의 빈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전: 그렇습니다. 현재 중국이 GDP세계 제2의 대국이 되고 생활조건도 좋아졌지만, 또 더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제도를 재건하고 문화를 재건하고 가치를 재건하고 생활을 재건해야 하지요.    내 생각에 이러한 재건은 아래 3가지면에서 착수해야 됩니다. 하나는 역사적 경험교훈을 총화하는것이고 또 하나는 현실에 대해서 고찰하고 조사하여 사색을 해야 하는것이며 다음 하나는 이런것을 이론적 고차원으로 제련시키는것이어야 합니다.    지식인의 최대 임무는 정신자원에 결핍한 신 가치관, 신 이념을 제공하는것입니다. 그러나 난 역부족이지요. 내게 이론적 실력이 결핍하니까요. 그렇지만 종당에 신 일대들이 해 내리라 믿고싶어요. 김: 중국은 공자,맹자,노장의 윤리사상 말고도 세계에서 지식체계, 오리지널 독자작인 사상을 창립해야 하며 그런 면에서 공헌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관방, 민간이 함께 공동체가 되어야 할텐데요. 전: 난 관방에 대해 거의 기대를 안 걸어요! 관방이 뭘 해준다고 그럽니까? 그냥 지식인들더러 찬동하고 해석하기만을 요구할뿐인데 무슨 창조력이 있겠습니까!     나는 오히려 민간의 파워, 민간의 입장을 강조하고 싶어요.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민간의 길이 믿음직하지요. 물론 최후에는 아래서부터 위로,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법을 결합해야지만, 민간의 힘은 거대한겁니다. 14. 민족주의, 여기가 위험하다 김: 근년래 경제적 부유로 인해 중국의 민족주의, 문화적내셔낼리즘이 팽창하고 있는게 현저합니다. “수백년래, 중국이 이런 성세에 도달한적은 없다””돌연 세계 대국이 된 우리자신을 발견했다”등 민족주의의 자신감이 생기면서 전례없는 애국주의, 국가주의가 고양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 민족주의, 애국주의, 국가주의 이러루한 것들은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군국주의로 변질되기 쉬워요. 아시다싶이 세계 근대사,현대사가 이미 이 점을 입증해주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시아에서도 현대 일본이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팽창된 결과 군국주의로 변질되어 아시아 전역을 괴롭힌 과거가 바로 눈 앞에 있지요.     요즘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북조선도 그리고 중국도 민족주의, 국가주의로 서로 대항하고 있는데, 정말 역사를 거울로 삼고 교과서로 삼는다면 상호자제하고 지난날 처참한 군국주의가 발호하지 않케끔 경계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 기실 제가 보건데 중국에서 애국주의, 민족애를 대거 제창하고 있는 뒷면에는 되려 애국심, 민족애라는 팩터들이 결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애국, 문명, 평등, 자유… 등 이런 낱말들은 서양선진국, 특히 일본에서는 별로 잘 쓰이지 않는 사어(死语)로 될 정도지요. 중국의 화장실 소변기위에 까지도 “애국”,”문명”이란 글빨이 보이니 참 가관입니다.(웃음).  중국이 근대국가로 성장했지만, 성숙된 근대국가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성숙된 국민, 이를테면 중국에서 강조하는 공민(公民)이 아직 사회적으로 결핍하기 때문에 국민국가는 아직 미완성이지요. 15. “국민성개조”의 과제 전: 옳은 지적입니다. 중국이 경제, 물질적 생활면에서는 대폭 향상하고 부유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우리 국민의 내실 즉 소질은 큰  문제꺼리입니다.     노신이 필생을 다하여 중국 국민성개조에 정력을 기울였는데, 중국국민성의 약점이 문제였기 때문이지요. 1905년 노신은 중국이 입국(立国)하자면 관건은 우선 입인(立人)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입인이란 주로 개체적 개인의 정신자유, 독립인격을 말하거든요. 노신의 눈에서 물질이 풍부해지고 과학이 발달해도 중국인이 만약 개체적 자유, 독립인격이 없다면 중국은 현대문명국가가 아니기때문에 개체적 정신자유를 그가 추구하는 기본 목표였습니다. 김: 그러니까 아까도 선생님께서 누누이 언급하신것과 같이 노신의 당대적  의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씀이십니다. 전: 그래요. 노신이 중국국민성비판에 많은 것을 제기했는데 3가지만 요약해보면, 첫째로 국민성중의 노예근성문제, 두번째로 중국역사 및  근대사에 대한 노신의 판단은 일치일난(一治一乱)의 역사성과 그중에서의 노예성문제 셋째로는 중국사회에 대해 두가지 매우 준엄한 판단을 했는데, 하나는 중국민족은 식인(食人)의 민족, 사람을 잡아먹는 민족이라는거지요. 김: 사실 노신의 “식인”은 두가지 차원이 포괄됩니다. 하나는 정신적 비유이고 또 하나는 실제로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진짜 식인을 한 역사현상이지요. 《광인일기》소설을 쓰기전에 노신은 북경의 신문에서 진짜 사람고기를 먹은 신문기사를 여러번 보고 감촉이 깊었던것입니다. 전: 그렇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노신은 중국을 “문자유희의 나라”라고 지적하면서 연극을 놀고 간객에 능한 민족이라고 갈파했습니다. 결과 중국은 기만과 허위가 발호하는 나라로 되었다는겁니다. 김: 근년래 학계에서 “국민성”, 이 개념을 부정하는 학자도 있는데, 저는 비교문화,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국민성”은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민족성원중 개개인의 세부차이는 어느 민족내부나 다 존재하지만, 그 민족이 오랜 역사체험과 지리기후환경의 동일한 조건에서 배육된 국민적 성향, 민족적 성향은 유사성, 고도의 동질성을 보이고 있지요. 전: 맞어요. 어떤 과일이나 실물이 기후, 지리조건이 다른 곳으로 이식하면 같은 종이라도 전혀 이질된 양상으로 변하는 자체가 각기 부동한 지리, 환경내지 인물환경속에서 배육된 민족성이 다르다는것을 인식하게금 하지요. 16. 정치(精致)한 이기주의자들의 천국 김: 아무튼 중국인의 소질향상은 자타의 의향을 불문하고 중국인자체의 최대의 급무라고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은 근년에 중국의 보통 국민보다도 오히려 지식인, 대학교육의 병폐속에서 육성된 엘리트들을 “정치(精致)한 이기주의자”라고 질타했습니다. 전: 제가 몇년전 무한대학 전 학장 유도옥(刘道玉)이 소집한 대학교육에 관한 모임에서 한 말입니다.(웃음)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의 일부 대학, 북경대학도 포괄하여 지금 바야흐로 “정치한 이기주의자”를 배양하고 있다. 그들은 고지력상수이고 세속적이고 노회하며 연기를 잘 하고 잘 발라맞추면서 체제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 달성에 능하다. 이런 사람이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일반 탐관오리보다 더 위행성이 크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교육은 인간성교육에서 실패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정말 정채로운 지적입니다. 제가 지금 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느낀 점 역시 그네들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세속에 물젖어 있고 실이익만 따지고 세상물정에 노련해있음이 보이고 급공근리(急功近利)적이지요. 이 나라의 인문환경, 교육이 바로 이런 사람을 육성하는 거대한 훈련장이지요. 갈검웅(葛剑雄)교수님이 중국의 교육문제는 교육의 중국문제라 하셨는데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제를 바꾸겠습니다만, 요즘 중국에서는 자신감이 팽창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17. 21세기는 중국의 세기인가? 전: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환상이고 노신이 갈파한것처럼 일종 자대(自大), 애국의 자대이지요.     일부 애국자들의 소원이기도 하지만, 세계 어느 하나의 문화가 세계의 중심으로 된다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근년래 경제성장의 힘을 입어서 중국문화의 영향이 커지고 세인의 주목을 받는 가능성은 있어요. 그러나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라 하고 중국문화가 세계를 통치한다는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김: 그렇지요. 중국이 세계를 리드할 만한 지식체계와 가치체계를 창발하지 못하는 한 세계를 통치하기는 그냥 허언(虚言) 망언(妄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 내가 보건대 21세기는 다원문화의 세기입니다. 보세요. 세계적범위에서도 어느 문화, 이념이 전세계를 통채로 지배하는건 무리이지요. 영국이 그럴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됐어요? 미국도 마찬가지로 제생각대로 잘 안되지 않습니까?(웃음)     중국이 이런 생각을 품는다는것도 백일몽에 지나지 않아요! 중국문화가 어떻게 어떻게 될거라고 희언을 떠벌이지만 다 황당한 소리에요.     공자님이 중국을 구할순 있어도 세계를 구할순 없습니다. 그건 그냥 하나의 중요한 정신적자원에 불과합니다. 노신을 보더라도 내가 노신을 평생 연구해왔지만, 노신의 사상이 일체를 대체한다고는 종래로 생각한적 없어요. 난 그저 노신의 사상이 일종 홀시할수 없는 정신적자원이라 생각할뿐인데, 이것도 하나의 견해이지요.     그저 이렇다는 거지요. 더 이상 무슨 큰 역활을 할수 있겠습니까? 김: 그럼 선생님은 21세기 중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어떤 방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내 생각에는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우수한 부분을 섭취하는 방향이 좋다고 봅니다. 그리고 동양문화중에서도 일본의 경험, 인도, 한국의 경험도 우리가 중요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 가야할 길은 이런것들을 다 어우르는 초월성적인 방향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담자 소개 전리군(钱理群) 당대중국을 대표하는 인문학자의 한사람으로서 중국에서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있는 학자. 1939년생,북경대학 중국어문학부 베테랑교수,2002년 정년퇴직.20세기 중국사상,문학과 사회에 대한 연구,특히 20세기 중국인사와 정신사적 고찰,20세기 중국경험의 총화적성찰은 해내외의 큰 중시를 받음. 북경대학 재직시 “가장 환영받는 10명 최우수교수”의 수석으로 꼽힘. 주요저작으로는 《心灵的探寻》《周作人论》《周作人传》《丰富的痛苦》《1948:天地玄黄》《与鲁迅相遇》《钱理群讲学录》《新语文读本》《我的精神自传》《一路走来—钱理群自述》등 다수.
비아그라 미국 조크다. 어떤 중년남자가 아내와 밤일이 잘 안되어 고민끝에 비아그라를 복용했다. 그런데 아내가 급무로 외출해버렸다.약효는 딱 1시간밖에 안되는데. 급해난 남자는 약처방을 낸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비아그라를 지금 막 먹었거든요.아내가 옆에 없어서…” “그럼 옆에 누가 있나요?” “지금 가정부로 있는 젊은 여성이 있습니다” 의사왈 “그럼 그 젊은 여자와 해보세요.” “아니 선생님,그녀와 할때는 비아그라가 필요없는데요” 늘 새로운 환경이나 조건은 인간의 투지를 재생시키는 에너지로 되는법. 고환 여성의 자궁은 깊숙히 소중히 보호돼있는데 ,남성의 고환은 왜 체외에 노출해있을까? 인간의 고환은 무겁지 않다.체중 63.5킬로그람의 남자의 고환은 5.02 그람(황인종은 이 절반에 해당된다고 함) 체외에 노출되면 부상하기 쉬운 결함이 있는데도 하필 그렇게 노출시켜야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저온보존”이다.즉 본체보다 낮은 온도를 보존하여 정자의 생명을 길게하기 위해서다. 정자경쟁의 세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정자를 저온저장으로 대량 보존해두는것이 필요하기때문. 아하,남자는 쉽지 않은 동물이다. 키스 남녀가 키를 맞추어 스리슬쩍 입술을 맞추는 애정의 표현. 농후한 키스는 서투른 섹스보다 낫다는 말도있다. 연애 남녀의 정을 불타오르게 하고 불면을 부르는 몸살같은 열병이다. 실연하면 가장 효과적인 약은 기다림이다. 마치 전차 승차와도 같아서 이미 떠나는 열차를 무리하게 타려고 황망히 서두르다가 다치기 쉽다. 그냥 열차가 올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다음열차는 꼭오게 돼있으니까. 결혼 연애의 골인하는 종착역 . 그 역에는 자칫하면 기나긴 남녀의 동상이몽의 터널이 기다리고있다. 학교 학비를 비싸게 받고 교육을 게을리 하는 집중영 교수 교실에서는 배워주는 교수( 教手)요, 밖에서는 실속만 채우는 금수. 애국자 진짜 나라를 사랑하는 자는 “애국”을 부르짖지 않는다. 단지 그것을 이용하여 모종의 사욕을 달성하려는 자만이 “애국”을 목터지게 외친다. 첫눈에 반하기 아무  이유없이 전격적으로 한 이성에 반하는 연애적 정동(情动)이라고 심리학자는 해석한다. 그러나 이유없는것이 아니라,사실은 당사자가 이미 머릿속에 상대로 할 이성의 이미지를 미리부터 심어놓은것이다. 그러던차에 우연히 그런 이미지에 가깝거나 적합한 이성과 맞딱뜨리기만하면 서슴없이 감전된듯 반해버린다. 분만과 같이 오랜 나날을 임신하여 준비해오듯이 그런 오랜 준비끝에 첫눈에 반하는것이다. 오복(五福) 공부할 짬이 있으면 복이요 사람을 구제할 힘이 있으면 복이요 저술할 학문이 있으면 복이요 시비할 일이 없으면 복이요 박식한 친구가 있으면 복이로다. 의 한 대목이다.그러나 인간세상에서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어야 ,또한 그 시비를 바로 잡는게 행복이 아니겠는가!
189    (82) 근대 구중국은 일궁이백이였나? 댓글:  조회:3335  추천:16  2016-10-2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2) 근대 구중국은 일궁이백이였나? 김문학     중국 현대인 특유의 과거 “암흑사관”과 함께 병행하여온 고루한 인식패턴에는 근대 낡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이전)의 사회는 무조건 “일궁이백(一窮二白)”론으로 밀어붙이는것이 있다.   필자가 유년시절 중국에서 교육을 받을 때 신중국의 오늘날과 종적비교를 하여 구사회는 “암흑”하였고 “반동적”이였으며 경제면에서는 “일궁이백”이라는 관념적교육을 늘 받아왔다. “억고사첨(憶苦思甛)”이란 신 사자숙어가 정착될만큼 오늘날의 행복한 생활을 옛날 구사회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회억하면서 대조적효과를 노린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막연한 관념교육만큼 구사회, 근대사회가 “일궁이백”의 말이 허용하는 상황이였을가?   력사를 재독하면서 재발견되는 력사는 이 관념적인 구호를 일소하기에 충분한 소재들이 도처에서 쉽게 건져낼수 있다. 필자는 우선 아래 데이터적인 수치와 사실을 렬거하기로 하겠다.   1866년 12월 양무운동에서 탄생된 중국 최초의 기계조선공장, 마위조선공장에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1864년 중국 근대 최초의 천톤급 륜선을 제조했다.   1871년에는 중국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제작 탄생된다.   1882년에는 중국 최대급 철근 목조병선이 제조된다.   1889년에는 중국 최초의 철갑군함이 제조된다.   그리고 1907년 미위조선공장에서는 외국인 기사를 사퇴시키고 자체의 력량으로 목, 철 조합구조의 선박을 제조할수 있었는바 극동아시아에서는 최대규모의 조선기지라 한다.   1919년에는 중국 최초의 쌍익수상비행기를 제조하였다.   유명한 한양병기공장은 1890년 6월 저명한 개명파 관료, 지식인 장지동이 건설했다. 철공장에 이어 총과 포를 제조하는 병기공장을 설립하였으며 1895년 여름부터 소규모생산을 하다가 88식 모젤권총을 생산하여 1896년에는 1,300정, 1901년에는 2,500정, 기병총 316정을 생산했다.   1904년 호북병기공장으로 개칭한 이곳에서는 매일 보총 생산량이 50정에 탄환 12,000발이였다. 1907년에는 년도 보총 생산량이 9,000정으로 늘었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구중국은 일궁이백하여 서양의 성냥, 서양 못을 사용할수밖에 없었다”고 늘 기술해왔는바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였다.   일찍 1879년 광동성 불산현에 중국인 자체로 경영하는 교명(巧明)성냥공장이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성냥공장은 백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1920년 상해에서 설립한 류홍생(劉鴻生)의 “홍생성냥공사”가 유명했다.   세멘트공장을 보면 1906년 주학희(周學熙)가 창설한 “계신양회공사(啓新洋灰公司)”가 유명했다. 질좋은 세멘트를 생산했기때문에 계신공사에서는 전국 중대 건축공정에 대량의 세멘트를 공급했다.   회하철도교량, 화하대교, 경한철도의 대교들, 그리고 위해, 하문, 청도, 연태 등 부두건설과 북경도서관, 연경대학, 상해우전국 등 유명건축물은 모두 앞다투어 계신공사의 세멘트를 사용했다.   항일전쟁시기까지 계신공사는 중국의 세멘트시장을 14년이나 독점했으며 그 판매량이 전국 세멘트 총판매량의 92%나 독차지했다.   조선, 증기기관차, 자동차, 비행기, 각종 기계 등 분야를 살펴보아도 중국이 “일궁이백”하였다는 평가절하는 도무지 어불성설임을 알수 있다.   상해 강남조선공장에서는 1918년에 미국의 수주로 만톤급 화물선을 4척이나 생산했으며 그 우량한 질로 인해 미국정부는 매우 흡족해했다.               아래 중국 생산의 데이터를 종 더 라렬해 본다.   1862년 중국 최초의 증기기계가 안경군계소에 의해 생산된다.   1865년 중국 최초의 륜선 “황호”호가 역시 안경군계소에서 생산된다.   1867년 중국 최초의 선반(車床)이 강남제조국에서 생산된다.   1868년 중국 최초의 근대 군함이 강남제조국에서 생산된다.   1906년 중국 최초의 대형군함이 복주선정국에서 생산된다.   “석유가 구중국에서는 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근대사에서 중국의 석유채굴은 1896년 연장(延長)유광이 탄생되였으며 중국석유공업의 어머니라 불렸다. 1907년 4월 2일 채굴을 시작하여 일당 생산량이 1.5톤이였다. 이때 이미 중국대륙에 석유가 없다는 정설을 뒤엎은것이다.   재봉미싱을 보면 1898년 미국에서 “NEWHOMO”미싱을 청국으로 수입하게 되는바 1910년에 미국의 재봉미싱이 상해, 광주, 천진 등을 통해 대량으로 수입되였다. 1928년 상해에서 최초의 국산재봉미싱이 생산되였는데 그뒤 거룡패 등으로 해방후 엄청난 생산량을 자랑하게 된다.   이상 데이터는 “자유중국론단”에서 발취한것인바 이 단순한 경제적데이터에서 “사실은 만마디 웅변을 릉가한다”는 말과 같이 근대 구중국이 결코 현대인의 관념속에 박힌 “일궁이백”의 정설과는 반대로 오히려 경제능력이 나름대로 강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될것이다. “일궁”은 있어도 절대 “이백”은 아닐것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188    문학의 최고봉은 무엇으로 사는가?(하) [가평요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4026  추천:61  2016-10-12
문화대담(8)         문학의 최고봉은 무엇으로 사는가?(하)                           가평요(贾平凹)+ 김문학     13. 《폐도》그 이후 김: 《폐도》로 원기를 상하신 선생님은 1990년대 후반기에 착실하게 충전기를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96년에 《白夜》《土门》 98년에는 《高老庄》,2000년에는 《怀念狼》으로 부터 《秦腔》 《高兴》 《古炉》 《带灯》《极花》로 장편소설의 홍수가 쏟아냈지요.      포스트《폐도》는 의도적으로 《폐도》의 마이너스적 이미지를 만회하려는 노력이 보이는데요?   가: 그래요. 《폐도》그 이후로 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소설을 보다 순수하게 쓰며, 소설속에 형의상학적인 요소를 많이 넣으려고 했어요. 《폐도》이후 작품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난 그런데 아랑곳 안합니다. 아무리 날 비평, 폄훼해도 난 신경 안쓰고 내 방식으로 나아가거든요. 내가 무슨 작품을 어떻게 쓰든 다 숙명적인 인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때 모순문학상을 못탔을때 내게 문학상에 대해 물었는데 수상을 하든 못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그런것은 별 의의가 있는지 잘 모르겠고 나는 그냥 내 평정한 심경을 보전하면서 상을 받아도 못 받아도 계속 장인같이 꾸준히 써갑니다.   김:  2005년에 나온 《秦腔》을 그중 제가 좋아합니다.     이 소설에는 남자주인공 인생(引生)이라는 광인같은 소년이 짝사랑을 하다 못해 스스로 자신의 물건을 잘라내는 “거세”가 나오는데 , 제가 보기엔 이 거세는 바로 선생님의 자신의 글쓰기 정신사에 대한 절단이며《폐도》에 대한 절거라고 생각됩니다.   14. 순수문학 최후의 대사(大师) 가: 재미있는 지적이네요. 북경대학의 진효명교수도 유사한 말을 했어요. 확실히 나는 《폐도》와는 다른 풍격의 소설을 노렸습니다. 후기에서도 썼지만 이 작품은 내가 최초로 전면적으로 우리 가족과 마을을 쓴 소설이지요. 현재 현대화가 진척되면서 농촌고향은 내 기억속의 고향과 너무 멀어져가고 전통문화도 나날이 상실해가고 있기때문에 나는 내 필로 닳아져 가는 고향을 위해 비석을 세우고 싶었지요. 김: 북경대학의 진효명교수는 저와 친분이 두터운 평론가인데, 그의 가평요론은 언제나 독특한 데가 있습니다. 그는《폐도》가 20세기 말 90년대 중국의 도시 폐도를 썼으나 《秦腔》은 21세기 현재 중국농촌의 폐허의 풍경을 썼다고 하면서 전자는 “정신과 문화”이고 후자 역시 문화와 정신을 제시했다고 지적했어요.     《秦腔》을 통해 가선생이 도시, 황량한 도시를 관망하지 않고 자신이 나서 자란 농촌의 고향으로 글쓰기를 회전했다고 하면서 순문학의 “최후의 대사”, 또한 향토문학의 “최후의 대사”라고 극찬 했는데, 나 역시 진교수의 관점에 찬동입니다. 가: 고맙습니다. 《秦腔》은 파노라마식으로 한무리 인물들과 전 동네이야기를 써야 했기때문에 완벽한 스토리 전개를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열독시 비교적 곤란하다고 불만도 있었지요. 그뒤로 쓴 《高兴》은 그 수법을 개변하여 한,두명 주요인물만 쓰고 농촌을 떠나 시내에서 농민공으로 일하는 도시속의 농민들의 생태를 썼습니다.     만약 중국의 향토가 만구할수 없는 분리에 빠졌다고 하면, 이것은 어쩌면 시대의 진보이지요. 현재 중국이 가장 선진적인것과 가장 후진적인것이 서로 교차되였고 가장 전통적인것과 가장 현대적인것이 서로 엉키었어요.  또 도시와 농촌이 교차되고 많은 사람들이 엉켜서 사회 전환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복잡다양한 농촌의 상실과 도시로 진출한 농민공의 현실양상을 나의 “개인의 글쓰기”로써 내 시각에서 썼습니다.     15. 덜레우저의 “주름”과 일상의 세부 김: 가선생의 《秦腔》에서 시작 된 《高兴》 그리고 《古炉》《带灯》등 명작들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중국 당대 장편소설의 대산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가선생은 이런 소설대작을 통하여 현저하게 괄목한 성과는 유니크한 “가씨생활세부소설양식”을 창립했다는겁니다.     선생님은 스토리 전개의 명수인데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개보다도 일상세부의 “조밀한 기술”이란 기법을 쓰고 있지요. 가: 맞어요. 내가 《秦腔》후기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스스로 이런 소설기법을 “밀실한 유년식서사”(密实的流年式叙事)라고 명명했어요.      농촌시골의 “生老病离死,吃喝拉撒睡”란 일상 삶과 언제나 “시시콜콜 자질구레한 일상”을 쓰는 방법입니다.     《홍루몽》에서의 생활의 세부를 쓰는 기법과 유사한데, 쉽게 말하면 홍루몽의 영씨과 녕씨 두집의 충돌이 완전히 두집의 생활, 귀공자 아씨들의 일상세부의 자질구레한 서술에 의해 소설의 주요 줄기로 되고 독자들도 이 세부에 말려들어가서 두집간의 충돌의 이념을 망각하고 말지요.      내가 소설에서 노린 서사적효과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야기의 생활화, 세부화를 통해 소설의 유연성과 따스함이 가미 되였습니다. 김: 당대 프랑스 사상가, 철학가인 덜레우저(1925~1995)의 “주름”이론이 생각나네요. 그는 이 세계는 “무한의 주름”으로 구성되였는바, 때로는 늘 “유한한 주름의 흔적”으로 노정된다고 주장하면서, 주름은 물질적인것과 정신적인것  이 두가지로 분류하며, 정신의 주름은 무한한 양식으로 노정되며 거기엔 잔주름이 많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소설의 일상은 세부작 주름살을 펼침으로써 그 안의 안보이던 일상세부의 잔잔한 것을 세밀히 보여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또 중요한건 그 정신적 주름살을 펴서 보여주는게 선생님의 작가적 영위입니다.     제가 그중에서도 구성이나 스토리보다도 선생님의 문학적언어가 중국작가중 가장 유니크한 스타일을 자랑하고 있다고 보는데 아무리 칭찬해도 말이 모자랄것 같아요. 선생님은 언어에 대해 어떤 견해를 지니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16. 언어의 마술사 가: 언어란 무엇인가? 진정한 문학언어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컨대 준확하게 정서와 사유를 표달한다면 그건 훌륭한 언어입니다. 언어는 흔히 작가의 생명과 기품과도 연관이 있지요. 그래서 언어는 지나친 분식은 필요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요란하게 울긋불긋 화려하거나 미사려구는 좋은게 아니지요. 흔히 명품도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품격이 높은겁니다. 심령의 외부적 표현으로 언어가 너무 수사에 치중한다면 오히려 수준이 떨어집니다. 김: 진정한 거물작가는 흔히 글이 평명하고 소박합니다. 언어와 글의 최고경계는 오히려 제일 간단하고 평명하고 자연스러움속에서 가장 표현력이 있으며 가장 고차원의 사유와 심령를 담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선생님은 정말 “언어의 마술사”라 해야죠. 왜냐하면 선생님의 글은 한 줄만 읽었다면 금방 선생님의 글임을 알수 있거든요. 가평요의 독특한 서사 양식, 단어, 그리고 고문과 백화문을 절묘하게 조합한 문체, 단어단어들에서 튕겨나오는 분위기들…  선생님은 당신만의 언어로 그 마술사같은 언어로 독자들의 심금을 순식간에 끌어 당기는 매력이 있습니다. 가: 어느 직업의 최고경계는 다 비슷하기 마련인바, 진지(真知)를 체험했고 관통할수 있는 사람은 다 고인(高人)입니다. 이를테면 도교에서의 신선은 살아있는 실재의 인간인바 천지를 관통하고 사리에 밝지요. 인간이 인정(人精)으로 되면 곧 신선으로 되는것입니다.     인간이 정(精)으로 되고 위대해지면 한마디 말을 해도 인생의 철리요, 그 현금속에는 이미 고수준의 뭔가가 많이 쌓여있습니다.     배부른 사람이 발산하는 기가 틀리고 영혼이 포만한 사람은 에네르기가 풍부한것과 같이 문자도 신선하고 독특하게 되는 법이지요. 김: 독자들이 늘 저에게 질문해요. 글 잘쓰는 비결은 어디 있냐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자주 많이 읽고 쓰면 평명하고 간결하게 쓸수 있다고, 저는 글이 간결하고 평명하고 꾸임없는게 가장 최고경계라고 믿기때문에 그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초학자들은 흔히 미사려구요, 기교요 하면서 머리를 짜지만 저는 그럴수록 글은 죽는다고 생각해요. 산 글은 기교나 미사려구 없이 진솔하고 평명해야 하는것입니다.     선생님의 소설이나 산문은 진솔, 평명, 간결한 무기교의 최고 경계에 달했다고 보는데요?   17. 모든 문학작품에는 “경계”가 있어야 가: 나는 소설이나 모든 문학작품에는 “경계(境界)” 이 두글자가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싶어요.     이 경계는 의경(意境)이 아니라 또 다른 단어로 말하면 “格局”(구조와 격식)입니다. 그러나 나는 역시 “경계” 이 단어를 좋아합니다. 경계는 꼭 장대하고 광활하고 심도있어야 해요. 그렇지만 또한 세속을 강조해야 하구요.     여기서 난 통속이라 하지 않고 세속(世俗)이라 합니다. 왜? 세속에는 인간냄새, 생활냄새가 나고 흔히 말하는 향속(乡俗)과 시속(市俗)의 냄새가 나거든요.     이처럼 아(雅)와 속(俗)은 소설의 천성이지요. 난 상아탑같은 소설이 싫고 살아 숨쉬는 소설이 좋습니다. 김: 그러므로 선생님의 소설, 산문작품에는 언제나 살아 숨쉬는 민간의 풍속이 듬뿍 들어 있고 그것은 세속적인 먹고 마시고 싸고 누고 자고 하는 세속이란 일상의 세부를 통하여 전통문화와 현대의 갈등, 당금세계 인간들의 두터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高老庄》에는 많은 더러운 습관이 묘사되고 있지만 평용한 세속의 무료함을 피하여 높은 경계에 이르고 있다고 봅니다. 가: 《高老庄》중의 일부 향속, 그 생활습관의 “더러움”을 쓴 의도는 고로장의 불행을 안타까워한겁니다. 이런 “더러움”이야 말로 그들의 고루한 문화의 죽음, 인종을 퇴화시키는 열악한 환경을 말하지요. 우리가 실생활중 가끔 이런 일에 봉착 하지요. 친구나 친척중에 어떤 사람의 바지 자크를 안 채웠거나 눈에 눈꼽이 끼었을때 나는 작은 소리로 귀뜸해주지요.     농민들의 그런 더러운 습관을 벗겨주는게 농민의 아들로서의 양지와 책임이거든요.     18.  농민과 엘리트사이에서 김: 선생님은 늘 자신을 “농민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거듭하면서 아마도 자신을 “농민의 자식”에서 아이덴티티를 규정짓는것 같습니다.      저 역시 심양근교의 중국의 조선족 농민의 아들로 태여났습니다만, 저는 소시적부터 이 농민의 호적을 고치고 대를 가시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저는 공부에 열심했고 지금까지 해외유학,석박사공부를 하면서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고 엘리트의식이 지극히 강열하게 뇌리에 각인돼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농민을 배반하여 엘리트지식인이 됐다는데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선생님께 제가 탄복하는것은 “농민”내지 “농민의 아들”로서 자신의 아이덴티티의 근원을 두고 있으며 농민 소재를 쓰시고 농민의 아들로서의 양지와 사명감을 지니고 계신겁니다. 가: 내가 《我是农民》이란 책 한권까지 쓴 적이 있습니다.     나는 줄창 19살까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에서 살았고 사실 지금까지도 음식습관은 거의 농민의 습관입니다. 맥주는 못마시고 소주만 마시는것도 농민습성이지요.(웃음)     어려서부터 김선생과 세대차이가 있다고 보는데, 단 일반적인 전통교육을 받은면이 많고 전통적 인소가 많지요.   김: 그리고 선생님은 “농민”이라는 “아이덴티티”로 규정하고 계시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선생님을 전통적 사대부, 즉 전통적 문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그림이나 글속에는 현대적요소가 늘 보이며 현대지식인이라고 해도 어폐는 없겠지요.   가: 아무래도 내겐 현대적의식도 있거니와 굳이 어느게 더 비중이 무겁냐 따진다면 전통적문인쪽이겠지요. 농민식 문인, 내가 나서 자란 향촌에는 불교와 도교의 분위기가 매우 농후했답니다. 왜냐면 그곳은 기본상 교통의 경계선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지요.     하지만 현대 생활, 현대의식에 대한 선망, 학습, 흡취가 상당히 빈번했습니다. 내가 아는 우리 고향의 농민들은 겉으론 농민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상 사상은 여전히 현대적이었는데 단지 표현을 잘 안했을 따름이지요.     내가 형식을 강조하고 현대의식을 강조하지만, 나 또한 자기를 내세우는 그런 쿨한 인간은 아닙니다. 그러니 겉으론 아주 전통적사대부라는 느낌을 주게 되는데 사실은 오해입니다.     나와 자주 접촉해 본 이들은 깜짝 놀라는거예요. 왜냐하면 내 사상, 사유가 그들보다도 훨씬 현대적이고 모더니즘이라고요!     그래요. 내 사유, 사상방면에는 절대 농촌의 촌스러운 구석이 없거든요. 농민의 그런 협애하고 보수적이고 자사자리한 그런 버릇이 제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김선생이 말하다시피 개인 생활면에서는 매우 전통적이지요! 모순덩어리라고 할까요. 잘 모르겠어요.   19. 전통적 문인의 취미 김: 제가 중국의 당대 학자, 작가, 평론가 등 지식인들과 교제하면서 한가지 느낌이라면, 역시 아쉬운 부분인데요, 거의 붓글씨를 잘 쓰는 지식인을 못 봤어요. 만년필로 쓰거나 컴퓨터로 타자를 하다보니 붓을 멀리 한지도 오라지요.     제가 상대에게 싸인을 하는 붓글씨를 보고 오히려 내 붓글씨가 더 멋있다고 칭찬받습니다. 내 수준도 다 칭찬받는 정도이니, 웃끼죠.     근데 선생님은 특별해요. 제가 만난 문인가운데 진정하게 당대 최고의 “전통적문인”이라 할수 있는 까닭은 전통문인 답게 하나는 고완 수집가이시고 컬랙션도 이번에 와서 보니까 무진장 많습니다. 그리고 붓으로 서와 그림을 그리는 서화가라는 점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림이나 서를 딱 보면 금방 “가평요”품격이구나 알리지요. 가: 아, 이렇게 동양에서 온 지기가 생겨서 무척 기쁩니다!     내가 고완수장을 하는데는 사실 문물적가치나 경제적 가치를 안 따져요. 다 내 심미가치에 부합되면 그만이지요. 질박하고 대기(大气)하고 이런 분위기의 고완이 좋습니다.     나는 이런 기가 큰 기물에서 내 서예와 회화에 많은 요소를 섭취해요. 한 유명한 거물급 평론가가 내 글쓰기, 서법, 회화를 담론할때 그중에는 민간성, 전통성, 현대성이 내포돼있다고 평가했는데 난 이 말에 찬동합니다.     왜냐면 난 이면으로 의도적으로 노력을 기울였기때문이지요. 물론 보잘것 없는 수준이지만.     그러나 글쓰기야 말로 내 영구한 본업이고 서법, 회화는 과외흥취이지요. 김: 선생님의 주로 컬렉션을 보면 석(石),고토기, 도자기, 항아리가 많습니다. 이 많은 컬렉션을 보고 놀랐습니다. 저는 주로 서화나 문방사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가: 그럼 유명 문인들의 서예가 있겠네요? 김: 네. 예를 들어 손문, 이홍장, 오창석, 제백석, 대원군, 김윤식, 김옥균, 후쿠자와유기치,이토히로부미등 동아시아의 문인, 지식인들의 서화가 있습니다.   가: 다 거물들의 희소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네요. 김: (웃음) 그냥 취미로 하는겁니다. 제가 명인의 서화를 무지 좋아하거든요. 제가 선생님과 공감하는 부분도 “전통적문인”상이며 선생님의 서예나 회화가 상당 프로급 수준이라는데서 더 숭앙하게 됩니다. 중국에서 선생님의 묵보(墨宝)를 얻는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들었어요.   20. 서화명가로서의 가평요 가: 감사해요. 아마 내 서예와 회화중에서 회화가 더 좋은것 같아요. 그러나 난 그림은 거의 안 팔아요. 아깝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안미술학원에서도 겸직교수로 있기도 했는데 보니까 소묘를 해종일 그리게 하는데 난 나쁘지 않다고 보지만 소묘를 위한 소묘는 국화창작에 별 도움이 못돼요.     중국화에는 사의(写意)가 중요한바, 그것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의 공간을 주지요. 물론 사실(写实)은 아니고.     중국 옛날 글쓰기는 붓으로 쓰니까 간결한 문언문(고문)밖에 쓸수 없지요. 다들 내 글씨가 멋있다고 하지만, 그냥 그 정도고, 만약 옛날 고인들을 부활시키면 그들 어느 누구의 붓글씨도 다 현대 저명한 서예가 보다 훨씬 우수해요.     제생각에 현대 문인이 컴퓨터로만 쓰다보면 이제 100년, 수십년이 지나면 누가 붓글로 한자만 쓰기만 하면 다 서예가로 될수 있는거예요.   김: 재밋는 말씀이군요.     선생님의 서화 실력은 소설보다 뒤지지 않는데요. 선생님은 서예와 글쓰기 (소설)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 그건 깊이 생각한적 없습니다. 내가 서안에서 생활한지 이미 40여년이 돼오지만 여기에 이런저런 번뇌가 많아요. 그렇다고 떠날수도 없구요. 서북지역의 중심이고 난 외지사람이라 내 자신의 문학그룹을 형성시키지 못하고 기본상 단독으로 활동하지요.     북경, 상해는 정보량이 많고 교제가 많으니까 늘 독립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여기는 교제가 적어서 홀로 있기, 사고하기가 좋은 공간입니다. 난 늘 단창필마(单枪匹马)로 글쓰는데 습관됬지요.     그리고 서안에는 전통문화가 농후하게 남아 있으므로 이런 생존환경이 생존경험을 결정짓지요. 서안에 두텁고 장대한 문화적분위기가 있기에 글쓰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于右任, 柳青, 石鲁,张艺谋, 路遥등 명인 대가들이 많이 탄생한데는 다 이유가 있지요.     서법은 문자의 형식미의 극치이고 경외인데,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홀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이 철학, 의학, 서법, 회화에서 우리의 사유가 나오기 마련인데요. 문자만 보더라도 형상문자이고 가장 기본적으로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체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컴퓨터, 글러벌화, 서양화에 따라 동방인의 사유가 상실돼가고 민족문화가 상실될 위험성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지키는것이 우리 자신의 사명이 아닌가 해요.   21. “4차원문학”이란 무엇인가? 김: 저는 현실과 역사를 쓰는 명작가로서의 가선생님은 자각적으로 고차원 파노라마의 문학을 추구하는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파노라마문학”이란 무엇인가부터 말씀드리겠어요.     평명하게 말하여 이것은 간단한 현세문학의 모델에서 이탈하여 파노라마, 전경(全景)식 시야로 이 세상을 관망하고 글쓰는 문학의 방법입니다.     이 개념은 제가 만든 신조어 인데, 미국에 있는 저명한 문학평론가 유재복(刘再复)선생의 4차원 문학관 개념에서 힌트를 받은거지요.     유선생은 문학의 “4차원공간”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했어요. 즉 중국현대문학에는 오로지 “국가, 사회, 역사”, 이 1차원만 있을뿐, 그래서 단차론 문학이라는 거예요. 심미적 차원에서 또 다른 3차원이 모자라다는거죠. (1)  존재의 의미를 묻는 차원 이 차원에서 서양문학이 비교적 강세를 노정했는바, 카프카, 카뮤, 사르트르 등이 이 차원에 속하고 중국에 노신의 《야초》나 장애령의 《倾城之恋》이 있을뿐입니다. (2) 영성과 대화하는 차원 영성 즉 신과 대화하고 우리 지성의 한계를 넘어선 체험등을 가리키는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냐”의 문제의식입니다. (3) 자연의 차원 여기에서 자연은 대자연, 내향적 자연 즉 생명적자연입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자크 런던의 작품이 이런 차원에서 다루고 있지요. 이상 3차원과 “국가, 사회, 역사”의 차원을 합하여 “4차원문학”을 이루고 있답니다. 제가 이것을 종합하여 “4차원파노라마문학”이란 개념을 재창조했어요. 이런 “4차원파노라마문학”을 다 갖춘 작가야 말로 고차의 수준에 오른 작가라고 할수있습니다. 평론가들은  贾平凹 莫言 余华 史铁生 등 당대 작가들만이 이 레벨에 달한 작가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가:  “4차원문학”이란 파노라마문학의 신개념은 매우 의미있습니다.     저는 이 4가지를 이론적으로 자각했다고 할수 없지만, 글쓰기에 있어서 역시 이 4차원을 의식했을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론가, 평론가가 아니니까 이론적 고차의 설명은 어렵지만 이상 4가지 차원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글쓰기를 전개한것은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폐도》에서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차원에서 이 시대 정신 추락, 신념의 붕괴와 함께 지식인의 현실적 실존경우에 대해 캐물었거든요.     제2차원에서도 말하는 소, 돌의 그림, 불명비행물, 그리고 사망, 자연의 신비에 대해서도 많이 썼습니다. 제3차원 자연에서도 산, 물, 여우, 늑대, 소, 등 자연생태와 인문생태에 연결시키자고 애썼습니다. 김: 이처럼 선생님은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미 “문학4차원의 파노라마”의 고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제 생각에 중국작가가 앞으로 이런 수준으로 나아간다면 노벨문학상은 10년안에 또 한분 나올것입니다. 저는 틀림없이 가선생의 몫이라고 보고 있어요. 일본의 무라카미도 아시아 작가로서 가능성이 크지요.     선생님은 막언(莫言)과 막역지교로 알고 있습니다.   22. 막언(莫言)과의 막역지교 가: 저는 문단에서 서안이라는 서북 변두리에 있고 원체 성격이 내향적인데다 어눌한탓이라 그리 교제를 잘 하지 못해요.     그러나 몇몇 평론가분들과 막언씨와는 막역지교입니다. 아주 오래된 에피소드인데 어느 해 여름 북경에 있는 막언씨가 신강으로 가는 길에 서안에 들른다고 나더러 서안기차역까지 마중나오라는 연락전보가 왔습니다.     그때까지 난 막언을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기때문에 부랴부랴 종이 팻말에 “莫言” 두 글자만 써서 역전에 달려가서 기다렸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누구하나 나한테 말거는 사람이 없고 막언씨도 끝내 나타나질 않았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핸드폰으로 금방 위챗이나 똰씬이 되는것도 아니니까 도저히 연락할 방도도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나는 겨우 똰씬만 보내고 위챗은 할줄 몰라요. 사실 막언씨는 그날 급한 일로 서안에 오지를 못했습니다. 오후가 지나서 내가 한 승객에게 ××번 열차가 도착했냐고 물었어요. 그 사람은 내 손에 든 종이팻말을 꺼꾸로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 이제야 난 당신에게 말할수 있게 됐네요. 사실 난 그번 열차가 도착했는지 모르지요.”     (웃음) 그제야 나는 아차 하면서 팻말에 쓴 “莫言”두자를 깨달았어요.     “말하지 말라”는 이 두 글자는  참 멋있어요. 가석하게도 막언씨의 필명으로 되었습니다. 김: (웃음) 아. 그래서 끝내 못 만나셨군요. 그러고보니까 저번 선생님이 저에게 제 스마트폰으로 발신한것도 똰씬뿐이었네요.     그 뒤 막언선생과 관계는 막역지교로 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 약간 상호간 오해가 있었지만 서로 북경에서 만나고 서로 오해를 풀고 말마따나 “막역지교”로 되었습니다. 김: 사실 문학계에서는 우선 가선생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어야 할 수준인데 선생님이 교제나 자기 선전을 못하여 그렇게 됐다고들 하고 있습니다. 가: 노벨상 수상도 제가 바라는것이기도 하지만, 그게 역시 운명과도 관계 된다고 봅니다. 막언씨야 중국 당대문학의 거목이지요. 누가 받아도 다 우리 중국 문학의 영광이 아닙니까. 김: 천재가  천재를 알아본다는 말마따나 막언씨는 가선생님을 깍듯이 존경하고 문학의 거물로 모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당대 중국문학의 두 거봉이 사이 좋게 막역지교로 지내니 참 존경스럽습니다. 보기도 좋구요.     저는 지식인들끼리 “문인상경”의 도를 넘어선 인신공격엔 신물이 납니다. 서로 돕고 존중하면 다 자신께 되돌아오는데도 말입니다. 가장 똑똑해보이면서 어리석은게 지식인인가 해요. (웃음) 가: 그러게요.(웃음)   23.  누가 나를 영향주었나? 김: 이번에는 화제를 바꾸겠는데요. 선생님은 문학의 길에서 어떤 작가를 좋아하시며 어떤 작가의 영향을 받으셨는지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가: 사실 내 문학의 스타트점은 굉장히 낮았습니다.     초기 습작에는 글쓰기를 좋아하다 보니 늘 타인의 책을 읽고 계발을 받아서 모방하여 긁적거리기도 하고 시간이 가면서 대가들의 작품을 통해 열독과 열력이 넓어지면서 소설에 대한 인식이 깊게 됐습니다.     중국작가로는 손리, 심종문, 장애령,폐명을 좋아하며 또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대작가로는 庄子 陶潜 苏东坡 司马迁 蒲松龄 曹雪芹등 이 있구요.     외국 작가로서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좋아하며 《백년의 고독》을 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의 川端康成(카와바다 야스나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처음 카와바다의 작품을 접하고 그에 심취한 나머지 서점에 갈때마다 그의 작품을 찾군 했어요. 그의 한 단편하나를 읽자고 그 두터운 책을 사왔어요. 그리고 일본어번역가에게 편지를 써서 그더러 카와바다의 작품을 될수록 많이 번역해 달라고 했다니까요(웃음) 김: 카와바다는 저도 좋아합니다. 선생님은 그의 어떤 면을 좋아하하시는지요? 가: 그 작품의 맛, 그 감각이 너무나 좋아요! 그 분위기는 완전 가와바다의 독특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의 작품은 늘 나를 골치 아프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글 쓰기의 궤적을 찾을수 없으니까요.     난 거듭 감개무량했어요. 세계의 작가는 두가지로 분류할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이고 또 하나는 신이라고 생각 돼요. 어떤 작가는 그 작품을 읽으면서 서서히 그 규률성을 장악할수 있지만 신같은 작가는 그게 거의 불가능해요. 그냥 선망할뿐이지요. 중국의 庄子 苏东坡나 외국의 마르크스. 타골.헤밍웨이가 그렇고 카와바다야스나리가 그런 작가입니다. 김: 카와바다는 가장 일본적인 미를 일본적인 필치로 표현하며, 그런 미의 서술양식이나 문체는 일류이지요. 제가 또 그를 좋아하는 이유의 하나는 역시 전통적 문인취미의 문사로서 미술괴집가로서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가 괴집한 컬력션에는 중국 송나라의 비취색 청자나 고려 청자도 일급품입니다. 서예가로서 또한 특색을 나타냈는데 “深奥幽玄” 이란 4자는 그의 서예에 대한 깊은 조예를 표현했어요. 가: 카와바다의 감각은 내가 배울수 없는 경지입니다. 그는 동양의 작가로서 서양 모더니즘과 일본전통의것을 잘 조합시켜 독특한 경계를 창조했다는 이점에 나는 너무 감격했어요.     그의 작품에 일본적인것과 세계적인 현대의식이 잘 믹스되어 내게 큰 계시를 주었는데 그로 인해서 나는 서양의 현대파 철학, 미학, 문학의 책을 읽고 그 영양가를 섭취한다음 또 다시 의식적으로 중국고전문학예술의 학습에 돌아오고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도취했다가 내 고향에 시선을 돌리게 되어 이제 마침내 내 독자적 작품스타일을 양성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24. 영원히 육필로 글쓰기를 고집한다 김: 제가 아는 유명문인, 작가는 거의다 육필로 글쓰기를 고집 또는 견지하고 있습니다. 왕몽, 무라카미 하루키, 용응대(龙应台), 이오 (李敖), 막언(莫言), 그리고 선생님도 육필로 원고를 쓰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 자신도 수십권의 책을 다 몽블랑펜이나 수성볼펜으로 써서 원고지만 해도 제 키의 수백배나 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같은 육필로 글쓰는 작가로서 육필로 글쓰기를 하는 작가분들께 더 동감과 존경심이 가거든요. 가: 수십년 동안 나는 만년필로 글쓰기를 고집해왔습니다.     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컴퓨터에 흥취가 없고 그걸 다룰수 없으니까 그런거지요.     한때는 내가 쓴 원고를 아내가 타이핑을 해주었는데, 그녀는 문학하는 것도 아니고 문학에 관심 없는 여성인데 내 소설원고를 보고 잘 모르겠대요. 그래서 아예 딴 사람에게 타이핑을 시키지요. 김: 저는 늘 이런 말을 잘해요. 컴퓨터 건판을 때리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고 타가(打家)다. 진짜 작가는 필로 글을 써내는 사람이야만 (作家),작가와 타가의 차이는 바로 필에 있다고 (웃음) 가: (웃음) 정말 재밋는 말씀이네요!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군요. 김: 선생님의 글쓰기 스타일, 매일 어떤 스케줄로 글쓰기를 하십니까? 가: 매일 아침8시에 서재에 가서 점심 11시까지 글을 쓰고나서 11시부터 12시까지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고 한잠 잡니다. 이게 내 오랜 습관이지요. 낮잠을 잠간 잔 뒤 오후 5시까지 글쓰기를 하고 5~6시에 또 손님을 만나죠. 내 생활규률은 기본상 이 일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25. “문여기인(文如其人)”은 정말 그런가? 김: 대체로 하루 얼마만한 분량을 쓰시는지요? 가: 잘 되면 5천자, 특별히 순조로운 날엔 8천자 문제없습니다. 김: 글쓰기는 먼저 구성안을 짜고 초고를 쓰십니까? 가: 젊었을 때 산문, 중편소설을 쓸때는 초벌원고 한번 쓰고 나서 또 한번 정리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대강 맥락을 잡아놓고 노트에다 초고를 적은 다음 또 한번 수정하고 그리고 원고지 뒤면에다 베낍니다.     《古炉》를 쓸때만 해도 전후로 200만자가 되는데 무려 300개 싸인펜으로 썼어요.     “문여기인”(文如其人)이란 말이 있잖습니까. 기실 어느 정도 작품을 써내야 문여기인에 달할수 있다고 봅니다. 또 “득심응수”(得心应手)란 말도 있는데 맘속으로 생각했다해도 손이 척척 말이 들어 주는건 아닙니다. 김: 저도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사실 글은 많이 읽고 써야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야 글쓰기가 쉬워집니다. 모드 기교를 떠날 때 가장 득심응수의 경계에 달했다고 할수 있지요. 가: 옛사람들의 말이 멋있어요.     “  看山是山,看水是水; 看山不是山,看水不是水;看山还是山,看水还是水”     이게 작품이나 모든 사물의 최고 경계인데 이런 경계에 이르는건 어려운 일입니다.
하늘과 구름 “하늘은 문화이고 구름은 정치다” 나는 늘 문화강연에서 이말을 자주 한다. 푸른 하늘을 가리는 구름이 있다면 그런 구름은 좋은 구름이 아닐수 있다 눈꼽 눈에서 나오는 즙액이 말라붙은 물건.일본어에서는 “눈똥”이라고도 함.아주 보잘것없이 작은 물건을 비유한말. 일본 관료의 부패를 눈꼽으로 친다면 ,이나라 관리의 부패는 소똥이나,수박으로 봐야 하는 실정.그러니 이 나라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막심한가 가늠할수 있도다. 하품 졸리거나 고단하거나 할때 입이 크게 벌려지면서 나오는 깊은 호흡. 하품은 졸음을 깨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라고 생리학자들은 해석한다. “하품은 전염된다”는 속어처럼 전차안에서 맞은켠 승객이 하품을 하면 이쪽도 금방 하품이 나온다.자각( 自觉 )의 운동효과를 동반한다고 심리학자들은 해석한다. 연구에 의하면 졸음을 유발하는 환경탓이 많다는 연구결과가 나와있다. 일테면 무료하다든가 재미없다든가 지루하다든가 할때 하품이 잘 나온다. 이나라 관료의 스피치를 들을때나 관청에 가면 우리는 늘 하품이 나온다. 그 하품 또는 이 하품( 下品 )으로 통한다나. 웃음 “많은날중에서 가장 헛되이 보낸날은 웃지않은 날이다” 프랑스 비평가 샹 포올의 말이다. 이나라에는 웃음을 자아내는 웃끼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날마다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 해야하겠다. 모택동 생시에는 인간에서 신으로 제단에 모셔진 수령. 그러나 사후에는 신단에서 내려와 인간으로 되돌아온 인물. 이홍장 “시대가 창조한 영웅이지만 시대를 창조하지 못한 영웅”그는 스스로 자신을 시대의 표구사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했다. 원세개 과거에 낙제한 민국을 연 최고통치자. “소년시에는 재기( 才气),중년시기에는 영기(英气),만년에는 모기( 暮气)로 찬”인물로서 총명과 교활,용맹이 있었지만 앞을 예견하지 못한 비극적인물. 노신 중국국민성해부에 혼신을 다한 국민작가. 그러나 “그누구도 죽을때까지 용서하지 않은” 흉금이 좁은 문사로서 관용의 호적과 대조적이다. 호적 현대중국의 학문과 문화의 기반을 닦은 문화태두.노신과 대조적으로 관용적인 인격과 포용성이 강한 문인재사. 진인각( 陈寅恪 ) 물욕과 명예욕이 팽배히 횡일하는 사회 “자유의 정신,독립의 인격”을 보전한 문화인의 본보기. 학위가 한장없는 현대 가장 박람강기의 지식인 김학철 평생 부조리와 맞서 싸운 외다리 문사 적 외부로부터 오는 적은  일시 단합하면 물리칠수도 있다.그러나 내부의 적은 더욱 무서운 존재다,스스로 싸우기도전에 이미 내부와해 당해버리기 때문이다. 환경 천재를 원한다면 ,이 사회에서는 천재가 안 난다고 탓할게 아니라 ,천재가 탄생할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게 최우선이다.마치 해빛과 수원,비옥한 토양이 주어졌다면 ,수목화초가 무성히 자라듯. 길 “기실 지상에는 본디 길이 없었다.걷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자연히 길이 생긴다.”노신의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더욱 한심한것은 현재 눈앞에 길이 있는데도 가지 않고 걸어보지도 않고 “그 길이 위험하다”고 웨치기만 하는 사람이 있으니 답답하도다. 담벽 중국 도시에 가장 많은것은 담벽이다.문호 임어당(林语堂)은 “만리장성은 고대 중국의 거대한 담벽으로 페쇄의 심벌”이라고 지적했다.페쇄도 그렇지만 타자에 대한 불신,경계심같은 정신적,심리적 담벽이 오늘까지도 이나라 사람들의 심증을 가로막고있다. 손 의 저자 앰브로즈 비아서는 그 책의 “손”의 조목에서 이렇게 쓰고잇다.”인간의 팔목끝에 붙어있는 ,통상타인의 포켓에 들이대는 기묘한 도구” 그런데 나는 이렇게 정의 해본다.”인간의 팔목끝에 붙어있는 통상 타인을 공격하는 기묘한 무기”
자기 “이세상에서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이다.타인이 어찌 자신의 주인이 될수 있단말인가?” 붓다의 말처럼 누구나 자기 스스로를 다루는 주인이 되길. 승자 “전쟁터에서 백만인에 이기는것보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 이기는 자만이 최상의 승자이다” ( 法句经 )의 말이다. 자신안에 있는 또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만이 최후의 승자다. 교육 예전에는 “나사못”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좀 진화하여 “로봇”을 만드는 공장. 학술계 이사회의 청렴한 정토( 净土)라고 생각하지 마시길. 이나라의 학술계는 정계 뒤지지 않는 부패,부정,부조리로 꽉 차있는 썩은 부식의 상아탑. 목적 눈에서 보이는 표적.그표적을 손아귀에 넣기 위하여 인간의 갖은 욕망을 유발하는 약. 악수 친구의 악수는 우정 나누기 정치가의 악수는 득표수 노리기 상인의 악수는 돈 노리기 남녀 이런 말이 있다. (1) “남자는 고환으로 사고하는 동물, 여자는 자궁으로 사고하는 동물” 서로 이성이라 부른다.화성과 금성과 같이 이질된 성구의 동물.그만큼 서로 이해하기 어렵다.그래서 흔히 결혼하면 남편은 남의편이 되고 안해는 안하기로 되어있다. 항전드라마 이나라 특유의 항일전쟁드라마.계산된 프로퍼건더로부터 슈퍼엔터테이먼트 프로그램으로 전락. 황당무게한 스토리 설정과 일본귀자( 鬼子)바보취급으로 ,사실은 이쪽의 무력함을 노정시킨데 그 아이러니가 있다. 차라리 그 막대한 제작비를 민족자질을 향상시키는 교육,희망공정에 투자함이 낫겠다는 유식자들의 의견이다. 호적제도 본질적으로 동등한 인간을 도시/농촌으로 양분하는 신분차별제도. 지면을 기는 벌레도 자유롭게 경계선 없이 이동할수 있는데 인간은 이념과 제도로 자유로운 이동,이주가 지장이 있으니 슬프도다. 나이먹기
언설 사르트르는 “언설은 총탄과 같다”고 말했다. 나는 글쓰기란 발화행위가 바로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사회의 무지몽매,부조리,허위 ,정신적쇠사슬을 파격하는 발화행위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도움이 됐으면  한다. 성인 해외에서 유치원 원아들에게 가르치는 일상의 예의범절,에티켓,룰 이를테면 공중장소에서 큰소리로 떠들지 말고,횡단보도 건늘때 신호를 기다려야 하고 ,도시에서 아무데나 소변을 보지 말아야 하는것…등을 이 나라에서는 성인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실정이다. 가르쳐도 성인들은 여전히 누누히 범하고 있으니 괴재( 怪哉 )로다. 유치원아 최근 국제공항탑승장에서 목격한 일이다.중국인 관광그룹의 어른들 여러명이 공항지붕이 날아가도록 큰소리로 떠들썩하고 있다.옆에서 보고있던 5살쯤 돼보이는 일본유치원아가 엄마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엄마,저사람들은 어른들인데도 왜 저렇게 떠들어요? 우리 유치원선생님이 그러는데 공중장소에서 맘대로 떠들면 안된다고 했어요…” 문화적진화 하이예크에 의하면 문명의 발전 ,진화는 단순히 경제성장률,구체적으로 GDP 에 의한 경제성장의 지표가 아니라 ,지식의 성장에 달렸다.인구증대도 그렇고 경제성장보다도 개개인의 지식의 성장에 의해 문명이 진화,성장된다는것이다. 중국이 현재 편향된 경제GDP주의를 초월하여 국민개개인의 “지식의 성장”,교양,수양의 축적을 거듭해야 문화적진화,문명적성장을 이룩하여 진정한 세계적대국으로 될 가능성이 주어진다. 조국과 세계 자신의 조국만을 사랑하는 자는 아직 연약한 어린이와도 같다.모든 나라를 다 자신의 조국처럼 좋아하는 자는 강한 성인과 같다.그런데 세계 전체가 다 제 조국처럼 느껴지고 사랑하는 자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12세기 유럽의 사상가 성( 圣 )빅터 휴고의 명언이다.협애한 민족주의,국수주의를 넘어서 세계인이 되여야 한다는 메세지이다. 패션 인간은 옷이 단지 몸을 가리거나 쾌적해서 만족하는 동물이 아니다.멋과 스타일에 대한 창조력을 갖고있기때문에 옷도 “패션”이 된다.그래서 패션은 인간이 추구하는 미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방뇨 어렸을적에 시골에서 야외방뇨는 늘 했던 일이다.우리 아이들이 일제히 횡대렬로 서서 누가 더 멀리 싸냐는 방뇨시합이란 게임을 벌였다. 그런데 볼라니까 지금 대낮에도 상해,북경,심양,광주같은 대도시에서도 행인이 보는 자리에서 공공연히 방뇨하는 성인남자들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중국 도시의 육교밑이나 담벼락,공원숲에는 언제나 방뇨꾼들이 남긴 찌린내가 풍긴다.이역시 “중국특색”이라고 중국인 친구가 얘기한다. 중법(重法) 옛날 조선의 대감이 자기집 담벽에 소변을 보는 자가 많아서 엄법을 냈다.어느날 여름 네명의 남정이 그 일을 치르게 되였다.하인에게 발각된 남자들이 잡히워오게 되였는데 대감님이 노발대발 네명을 꿇어앉히고 재판을 내렸다. “네놈들이 죄를 지은 그 부분에 중벌을 주겠다” 대감이 첫번째 남자에게 물었다. “네놈 직업은 무엇이냐?” “대장입니다” “허허,좋다.이놈의 그것을 쇠망치로 치거라!” “둘째 네놈은 ?” “자물쇠장이 올씨다” “좋아,이놈의 그것에다 줄칼질을 해라!” “셋째 네놈은?” “소인은 목수입니다” “옳거니,거기다 대패질을 하여라!” “넷째 네놈은 ?” “저 엿장수올씨다” “어허,이놈의 그것을 잡아당겨 쭉욱 늘려라!” 요즘 대도시에서 백주에도 숱한 남자들이 당당하게 그 짓을 하고 있으니 그들에게도 이런 중법이 필요하지 않을까(웃음) 잠자리 머리만큼이나 큰 눈망울을 뜨고 여기저기 물가를 투명한 망상의 날개로 찾아다니는곳은 밤새울 잠자리일까?
작가 작가란 두뇌의 정신세계를 손가락을 통해 필끝으로 배설하는업의 전문직이다. 그런데 요즘은 다들 인터넷-스마트폰이 발달해 너무 쉽게 글들을 배설해내고 있다.말 그대로 전세계 만민이 자유롭게 그리고 너무나 꺼리낌없이 분방하게 글을 배설해내는 “전지구적인 작가시대”가 온것이다. 손으로 쓰는 직업을 작가(作家)라 했는바 ,그렇다면 글을 때려서 써내는 직업은 타가(  打家  )다. 지금은 작가가 줄어들고 타가들이 난무하는 시대.이래서 타가들은 상대방과 주위를 아랑곳않고 방약무인격으로 때리고 치고 멸시하고 매도,중상,비방,왜곡하는것도 중국인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래침 뱉듯 하지 않은가. 그러니 쓰레기들이 무더기로 쌓일수밖에. 오호라,나는 그런   打家가 싫구려! 나는 손으로 육필원고만 쓰는 그런 작가 ,21세기 최후의 문화수공업자를 견지하고있는 그런 작가외다. 누가 골동품이라고 해도 좋고 누가 시대의 낙오자라고 해도 상관안하외다. 미녀 원래 용모 단려한 아름다운 여성을 가리키는 말. 그런데 요즘 모든 여성을 부르는 범칭이 되여 이나라에서는 추녀는 사라졌다. 오,웃지도 못할 미녀의 대국. 조선족 재중국 조선인으로서 중국어,한국어(또는 조선어)내지 일본말(또는 영어)3국어를 사용하는 동아시아에서 유태인격의 지적집단.월경( 越境 )이 이민족의 특징. 현자 “아무리 큰 바람에도 끄떡이지 아니하는 암석과 같은 인간” 붓다가 한말이다. 필 필가는 필경 필경하는 필자로서 필가위에 놓인 필을 들어 필마단기로 부조리와 필사적으로 싸운다. 필간을 하거나 예리한 필봉으로 필전을 벌여 필유곡절끝에 필살의 일격을 안긴다. 때로는 필담,필로,필답,필설을 다해 필화를 피우다가 필화사건에 말썽이 되기도 했지만 ,필생 필승의 필명을 날리도다. 위의”필”자에 대해 한자를 맞춰보시길. 망각 누가 말했던가. 시간의 강물에서 아름다움은 영원히 도도한 흐름이며 ,아픔은 차츰 사라져가는 격랑위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지감정 우리는 일제식민지지배의 민족적 수모를 경험한 민족주의 감정을 강하게 지니고있다.그런 식민지 감정을 기반으로한 민족주의 감정을 이해하지만 민족주의감정이 우리 자신의 공정한 과거인식과 자기반성의 걸림돌이 된다면 ,우리 자신의 우(愚)이며 우리 자신의 손해로 직결된다.사실 식민지에서 해탈된지 근백년이 되어오는 우리에게 제2의 식민지감정이 재생산되는것은 우리의 유치성을 더 가증할뿐이다. 문방4보(文房四宝) 서재안의 필묵연지 ( 笔墨研纸 ) 의 총칭 서예에 심혈을 기울이고 그림을 즐기며,시를 지으면서 삶의 가치를 추구해온 전통적 문인 ,선비에게 있어서 책상위의 이 4품은 그야말로 4보( 四宝 )였으며 또 지보 ( 至宝 )로 된다. 서화를 즐기는 나는 전통문사처럼 문방4보를 사방에서 괴집해오면서 상심열목( 赏心悦目 )의 가경에 빠지고 있다. 특히 청,민국시기 조선시대나 메이지 이전의 여러종류 인석( 印石 )을 갖고 즐기는데 그중에서도 인석의 왕자로 불리는 깜직한 전황 ( 田黄 )인장을 늘 어루만지면서 장중지보로 애지중지하고있다. 이 광경을 늘 곁에서 익히 보아온 와이프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정말 와이프사랑을 이렇게 했으면 오죽 좋겠어요…”이에 내가 답하기를 “아니,와이프야 내 문방의 제일지보( 第一至宝 )지” 벼루 “부부싸움을 하느니 차라리 내게는 벼루를 닦아주고 연병( 硯屏 )의 먼지를 털어주는게 더 좋더라” 이말이 너무 좋더라! 고서화 나는 미술콜렉터답게 근대 동아시아 문인명사들의 휘호한 서예족자를 꽤나 수장하고있다.책이 지루해질때 ,필이 막힐때 신심이 고단할때 ,고서화를 바라보는게 무엇보다 유쾌하도다. 고완( 古玩 ) 고완이 왜 그리도 좋냐?고 묻길래 나는 선뜻 대답했다.”저멀리 역사속에 사라진 고인과 대화를 나눌수 있어 좋다”고.
183    (81) 왜 서민들은 무술변법혁신파를 '반역자'로 알았나 댓글:  조회:3250  추천:18  2016-09-1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1) 왜 서민들은 무술변법혁신파를   “반역자”로 알았나 김문학      력사를 해독할 때 우리는 왕왕 이런 굳어진 버릇이 있다. 즉 우리 현대인의 사유와 시각을 투영시켜 백년전의 우리의 선조를 바라보고 그것으로써 력사를 해석하며 착각에 빠지고있는것이다.   이를테면 100년전의 조선사회나 중국(청국)사회가 지금같이 밝았고 좋았다는 막연한 인식을 갖고있으며 “이런 좋은 사회를 그 어떤 적 또는 반동파가 암흑으로 내몰고갔다”는 “암흑사관”. 그런데 아이러니컬한것은 이런 “암흑사관”은 단순히 우리 현대인 자신의 막연하고 근거없는 유치한 환상일뿐 력사를 바라보는데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시선을 흐리게 한다.   이제 필자는 중국 근대의 처절했던 백일유신변법 혁명가에 대한 그때 당시 일반 백성들의 인식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왜냐면 당시 백성들은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있는것과는 달리 강유위, 량계초나 “6군자”에 대한 인식은 전면 부정적이였기때문이다.   북경의 선무문외(宣武門外) 차이스커우(菜市口). 근대 중국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명소이다. 금년 8월 북경 방문시 들른 차이스커우에서 필자는 살기등등한 피비린내를 분명 맡을수 있었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 이 자리에는 분명 음침하고 가슴을 억누르는 살기가 맴돌고있었다.   1898년 9월 28일이다. 바로 이곳에서 무술변법의 혁명가들인 담사동을 위시로 양예, 임욱, 양심수, 류광제, 김광인 “6군자”가 머리를 잘리면서 선혈이 충천했다.   바로 55초전에 담사동이 군기대신 강의(剛毅)에게 “할 말이 있다”고 웨쳤을 때 묵살당했다. 비분에 넘친 담사동은 앙천하며 한탄한다. “역적을 무찌를 마음만 있을뿐 무력회천(無力回天)이구나. 아아ㅡ죽어도 한이 없도다. 쾌재로다. 쾌재!”   력사의 기록에 의하면 “무술6군자”가 목잘리는 날 차이스커우는 구경군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동명 영화에도 구경군이 물샐틈없이 둘러싼 어마어마한 장면이 보인다.   륙군자의 “칸터우”장면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로만 간주한 시민백성들은 륙군자를 가리키며 “란신적자(亂臣賊子), 서생광도(書生狂徒)들아, 저놈들의 혀를 베라! 집안에서 책을 읽지 않고 뛰쳐나와 인심을 소란시키더니 싸다! 콱 썩어져라!” “어서 빨리 목을 베라. 꾸물대지 말구!” 라고 일제히 웨쳤다. 서민들에게 있어서 무순 6군자는 극악무도한 “간신(奸臣)”에 “반역자”였다.   서민들에게 있어서 강유위를 위시로 한 무술변법의 혁명가들은 일말의 동정도 가지 않는 세상을 소란시키는 역적, 간신에 불과했다. 오늘 우리가 위대한 변법혁명가로 높이 추앙하는것과 정반대였다.   《경자기사(庚子記事)》의 기술에 따르면 무술변법 발발후 유신파혁명가들과 관계가 밀접했던 조정의 장음환(張蔭桓)이 체포, 투옥되였는데 영국공사의 간섭으로 죄를 면하고 신강으로 좌천을 당했다. 신강으로 압송하는 도중 구경군들은  “대간신을 봐라”고 쑥덕거리며 뭐가 모자라서 유신을 도모하는가고 비아냥거렸다. “강당(康黨)과 결탁했으니 간신역적이다”고 서민들은 쾌재를 불렀다.   청일갑오전쟁실패후에도 북경시내의 서민들은 리홍장을 매도했는데 이번에는 또 강유위무리들까지 매국간적(賣國奸賊)으로 싸잡아 욕했다. 1900년 8국련합군이 북경성을 습격했을 무렵에도 강유위가 서양군대를 이끌고 진공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했다.   왜 유신변법을 주도했던 혁명가들은 머리를 잘리면서도 그들의 평가는 공정하지 못했을가? 왜 서민들은 그들을 모두 역적으로만 보았을가?   조선의 근대 갑신경장을 창도했던 신예혁명가 김옥균, 박영효 등의 실패와 김옥균에 대한 릉지처참과 아울러 “친일파”반역자로 몰리였던 사례 역시 같은 맥락에서는 민족의 비극이였다.   근본적 리유는 유교전통정치, 독재를 철저하게 실시해왔던 중국(조선도 포함)정치에서 서민백성들이 진상을 알기를 꺼렸던데 있다. “민은 사역할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알릴수는 없다.”란 말과 같이. 그러므로 서민은 늘 먹을거리, 입을거리 걱정만 하면 그만이였지 국가대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인민에게 알 권리”를 행사할 대신 철저하게 지적정보를 봉쇄해온 전제정권아래서 서민은 알아야 할것을 알수 없고 들어야 할것을 듣지 못한 “청맹과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 민족, 국민의 일개 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은 지극히 결여했으며 무술변법같은 혁명이 있을줄도 모르며 단지 우에서 주는 정보를 그대로 통채로 삼켜 혁명가를 단지 “역적”으로만 인식할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양인이 “중국을 국가가 아니라 흩어진 모래알의 사회”라고 비난한것 역시 이 상태를 두고한 말이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유신혁명의 참신한 주장을 알고 리해할수 없었으며 유신혁명가들도 광대한 서민을 향해 시선을 준적이 없었다. 위대한 유신혁명은 애초부터 대중적기반을 잃은 “모래성”에 불과했으며 그 빈약한 혁명은 따라서 대중의 호응을 획득하지 못한채 대중들(속히운 무지몽매한 대중)에 의해 혐오의 상대로 취급되는 비극에 조우하게 되였다. 조선의 갑신혁명도 이런 우를 범했던것이다. 유독 메이지유신이 성공할수 있은 리유는 광대한 대중의 호응을 얻은것도 큰 요소일것이다.      
182    문학의 최고봉은 무엇으로 사는가?(상)[가평요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5212  추천:83  2016-09-05
문화대담(7)          문학의 최고봉은 무엇으로 사는가?(상)                         가평요(贾平凹)+ 김문학   들어가면서        가평요(贾平凹)는 당대 중국 최고봉의 작가이다. 작품의 양이나 질이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학의 거대한 산맥을 이룬 작가라는 정평이 나 있다.     당대 문학사에서 가장 쟁논이 많고 명성을 떨친 작가로서 “가평요를 모르면 중국인이 아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는 중국문학계에서 “귀재”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거물이다.     저명한 문학평론의 대가이며 복단대학 교수인 진사화(陈思和)선생은 나의 외우이기도 하다. 내가 서안에 가서 가평요와 만나 대담을 나누도록 알선을 해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쪽의 귀재와 서쪽의 귀재의 상봉은 하나의 뉴스꺼리가 된다.”  뉴스가 될지 사건이 될지 나는 관심 없지만, 가평요씨와의 만남은 내 생애의 사건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7월12일 저녁 8시경, 비행기 연착으로 늦게 도착한 나를 찾아 서안 대담서시호텔까지 가선생이 비서와 함께 오셨다. 내가 “가선생님, 제가 절을 올릴까요?” 하면서 인사하자, 웃음으로 반기면서 그는 나를 악수한 다음 끌어 안았다. 따스한 선생의 가슴이 나를 포옹해주었다. “아, 너무 반갑습니다. 이렇게 가선생님을 뵙게 되니…” 내 말에 가선생은 이렇게 반기면서 답했다. “나도 옛날부터 김선생의 책을 좋아했어요. 일본에 오래 계신 선생을 이렇게 일찍 만날줄을 몰랐지요.” 가선생은 나와 함께 동행한 동생을 이미 예약한 호텔안 고금 중국요리점으로 안내하셨다. 가선생은 손수 갖고 온 모태주와 산도의 황주로 우리를 관대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선생의 비서장인 마리여사는 나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우리 가선생님은 김교수님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좋아했어요. 이번에 오신다니까 꼭 잘 환대해야 한다고 당부했답니다. 술도 그렇게 많이 못 마시는 편인데 오늘 기뻐서 평소보다 잘 드시고 말씀도 많이 하시는겁니다. 귀재는 역시 귀재를 알아보는거에요.” 당대 문학의 대가인 왕증기(汪曾祺)는 가평요와 좋은 사이였으며 그를 “귀재”라고 불렀다. 나는 가평요선생은 “귀재”라는 차원을 넘어선 문학의 태두, 일대 산맥이라 평하고 싶다. 가평요는 이미 틀림없이 “국민적 작가”의 대표로, 당대 문학의 산맥에서 최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다.   15일까지 나와 가평요선생은 그의 서재에서, 호텔에서, 가평요문화연구원에서 세차례나 장시간의 대담을 나누었다. 우리는 오랜 지기처럼 화기애애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 심적 코드가 잘 맞았다. 키도 비슷하고 취미도 똑 같았다. 서예, 골동품 컬렉션으로서 “전통적문인”취미로 애호가 동일했다. 대담기간에 가선생은 내가 요청을 하기도 전에 흔쾌히 붓을 들어 내 서재의 재명”文华堂” 3자를 휘호해 선물했다. 동생 김명학에게도 《静而远观》이란 4자를 휘호해 선물했다. 서예가로서도 명성이 자자한 가선생의 붓글씨를 거금으로 사는 사람도 많았다. 한중일 3국에서 출판과 영화사업을 하는 동생은 가선생의 묵보(墨宝)를 가보(家宝)로 소중히 하겠노라 싱글벙글했다. 가평요선생의 작품, 창작, 재질, 그리고 사상과 교양, 인품은 모두 일급이다. 가평요가 없었더라면 중국문학은 얼마나 허전했을까고 나는 늘 생각하군 한다. 사실 나는 가평요와의 대담을 한권의 책 《김문학, 가평요와의 대화》로 묶을 예정이며, 종합적 논평서 《가평요의 문학제국》을 집필 출간예정으로 있다. 올 가을께 가평요선생의 초청으로 문화강연을 하게 되며, 또 계속하여 대담을 나누며 가선생과 함께 가선생의 창작무대로 된 그의 고향, 상주를 일주하기로 약속했다. 우리의 3차례 대담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외부의 일체 지장을 차단하기 위하여 서다. 아래 대담은 3차례의 장시간 대담을 간추려서 정리 한 것임을 밝혀둔다. 상, 하 두편으로 구성된다.     1. 당대문학의 기적은 어떻게 창출했나? 김: 가선생님, 제가 지금 이렇게 선생님과 동석하여 대화를 나눌수 있는 자체도 저는 신비로운 영성의 힘이 도와주었다는 느낌입니다.        선생님은 30여년 중국 당대문학의 살아 있는 증인이기도 하며, “중국문단의 기적”이라는 정평이 있어요. 지금까지 110권의 작품집에 한자로 천만자를 넘는 거대한 한어문학을 창출해냈습니다. 소설, 시가, 문론, 서법, 회화,등 여러 영역의 예술장르에서 모두 걸출한 성과를 이룩했는데 이는 목전 세계 중국어로 글쓰는 문화권에서는 전인미답의 쾌거입니다.        개혁개방후 많은 문인작가들이 하해(下海)를 하여 중도하차를 했지만, 선생님은 서안이라는 이 고도에서 독실한 신도같이 문학에 생명을 걸고 종시일관하게 창작을 견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룩한 실적도 경이로운 기적 그 자체이지요! 무엇이 선생님의 창작을 지탱하게끔 했습니까?   가: 사실 여러가지 현란한 껍데기를 한층한층 베끼고 나면 나는 결국 “농민”입니다. 잘 생긴 미남도 아니요. 그렇다고 남들과 같이 청산유수의 웅변가도 아니지요. 어눌하고 사교를 좋아하지 않고 고독을 좋아 하는게 내 성격입니다.        그래서 나는 늘 자신을 “계란광주리를 들고 붐비는 장마당을 걷는 사람”이라 비유해요. 사람들속으로 비집고 들어갈수도 없거니와 더구나 사람들을 피할수밖에 없지요.가장 큰 자유는 마음의 자유이거든요. 나는 글쓰기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고, 또 제가 사교도 못하고 장사도 못하고 아첨도 못하니 장끼는 글쓰기, 그림그리기 밖에 없으니 할수 있은건 이것밖에 없지요. 아무영역이나 혼신을 다해서 전념하고 고집하다보면 물론 공 드린 만큼 성과도 나오게 됩니다. 글쓰기는 내 삶의 전부이고 또 삶 자체이기고 하지요.   2. 귀재. 그리고 미문(美文)의 탄생   김:  아, 기적은 이렇게 이루어졌군요!     선생님은 문단에서 이미 “천재”를 초월한 귀재, 기재, 괴재라는 별명으로 통합니다. 저는 소년시절 문학공부를 할때 선생님의 산문, 수필을 너무 좋아했어요. 선생님은 소설에 앞서 산문으로 우선 문명을 날렸으며 산문은 그야말로 미문이었습니다. 일테면 《月迹》(1982년)에 나오는 “丑石”라든가 “访兰”과 같은 명수필은 제가 습작시 많이 모방해온 범문이었지요.   가: 1972년부터 창작을 시작했습니다. 서북대학 중문계시절인데 주로 문예이야기를 쓰다가 산문창작으로 넘어 갔어요. 당시 제가 가장 큰 영향을 받든 작가는 천진에 계신 손리(孙犁)선생입니다.  표지가 없는 산문집을 탐독하다보니까 작자가 손리였지요. 제가 선생님께 팬레터를 써보내면 꼭꼭 답장을 해주었고 우린 망년지교로 되었어요. 1982년  첫 산문집《月迹》을 손선생의 추천으로 백화문예출판사서 간행하게 되었고, 손선생님은 또 손수 머리말까지 써주셨지요. 그해 천진에 손선생님을 찾아갔을때 선생님은 친히 물만두까지 빚어서 환대를 해주는데, 작별할때는 내게 물만두를 싸주기도 했습니다.   김: 선생님은 어느 글에서 손리 다음엔 심종문(沈从文),장애령에 심취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시기 굉장한 독서광이었지요?   가: 예. 그때는 사실 뭐 읽을꺼리가 없었거든요. 내가 소학 4,5학년땐가 삼촌집에 놀러 갔다가 3권으로 된 《홍루몽》을 발견하고 그걸 읽다가 몰래 훔쳐서 집으로 갔고 왔어요. 보풀이 일도록 읽다가 결국 책도둑이 발각돼 삼촌이 와서 책을 회수 해 갔지요(웃음)   김: (웃음) 소년 “공을기”이시군요!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책도둑을 했지요. 문학 소년은 다 비슷한 체험을 갖고 있는것 같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작품에는 《홍루몽》이나 《수호전》의 서사양식이 깔려있어요.   3. 전통과 현대사이에서 글쓰기   가: 그래요. 근대, 현대 중국문학의 근저에는 《홍루몽》《수호전》의 전통서사모델이 있어요. 명청 백화소설의 전통이 농후한것은 중국의 사정이고 전통이기도 해요. 심종문, 장애령, 폐명, 그리고 임어당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인데 이들의 전통이 내 창작의 밑거름이 됐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선생님의 산문, 소설에는 중후한 중국전통이 관철돼 있으면서 때로는 서양 현대양식을 조합한 양상이 보이는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관찰한데 따르면 가선생님은 “의식의 흐름”이나 “모더니즘”등 새로운 전위적 수법, 조류에 대해 대항하거나 의도적으로 가늠하는 태도로 조심함을 보이고 있는것 같습니다.   가: 예를 들어 먹는것으로 말하면 난 안 먹기로 하면 죽어도 아니 먹고, 먹는다 하면 죽도록 많이 먹는 타입이에요. 작가란 지식, 정보의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하지만, 중요한건 독립적 사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는 지혜가 아니죠. 서양의 사조가 중국에 들어오면 쉽게 작아지고 영혼을 잃어버릴수 있어요.      80년대 나는 서양 신사조에 열중했는데 내 문학관념은 거의 다 미술이론에서 힘을 입었어요. 중국 미술계가 문학계보다 서양문화를 수용하는데는 언제나 한걸음 앞었으니까요. 나도 현대적 글을 더러 쓰기도 했지만, 거기에 푹 몰두하진 않았습니다.   김: 관찰자적 아웃사이더란 말씀이네요?   가: 그래요. 나는 영원히 신 사물을 환영하지만, 나는 늘 그것을 관찰, 연구하면서 강기슭에서 관찰하고 관망해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물을 건너는가 세심히 보면서 내가 어느 곳이 깊고 옅은가를 눈여겨 보는거예요.   4. “자기 자신의 독특한 길을 걸어라”   김: 제가 보건대 선생님은 산문에서 소설로 전향한 다음 1980년대 후반 장편소설《浮躁》로 부터 이미 자신의 독자적 문학의 길을 형성하고 걷게된것 같아요. 중국 작가로서 이 장편소설로 최초로 미국의 美孚飞马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가: 국제문학상을 받은건 당연히 기쁜 일이지만, 내가 이것으로 내 독자적 문학의 길을 걷게된 심벌이기도 합니다. 1985년의《浮躁》이후 나는 농촌과 상주(商州)이야기를 시리즈로 소설 창작함으로써 내 자신의 유니크한 풍격, 방향을 형성하게 되었지요. 나는 지금도 내가 택한 길이 옳았다고 확신을 합니다.   김: 1987년 작가출판사에서 간행한《浮躁》를 읽으면서 저는 작가의 언어적 매력과 현실중국의 농촌개혁묘사에 탄복했어요. 장차 노신과 같은 대작가의 탄생이라고 혀를 차면서 읽었답니다. 노신화가 《伤痕》 으로 당대문학의 “상처문학”의 장을 열었다면, 선생님은 이《浮躁》로 들떠 있는 중국 80년대의 시대를 귀납했지요.   가:  “浮躁”라는 단어가 내 소설로 인해 중국에 널리 사용된건 사실입니다. 현실 개혁와중의 들뜬 심경을 포착했지만 저는 여전히 이 작품에 대해 맘에 안들어요. 나 역시 이 작품을 쓸 무렵 마음이 浮躁해 있었거든요.(웃음)     5. 작가는 무엇인가?   김: 가선생님은 작가로서 글쓰기의 프로패셔널중의 프로패서널이라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은 1979년 겨울 결혼날에 원고지를 신령으로 제단에 모시고 손수 경례를 했다는 에피소드는 너무 감격적이었어요. 문학에 대한, 글쓰기에 대한 혹애와 적자(赤子)의 마음이 잘 나타냈습니다.   가: 어떤 문단 호사가들이 날 두고 “글쓰기를 위해 글 쓰는 작가”라고 투정 대지만, 난 결국 작가니까 글쓰기에 전념하는게 내 일이잖아요. 목공은 가구를 만드는게 목공이고 요리사는 요리를 만드는게 요리사가 아닌가요!      작가가 글 아니쓰고 딴거 하면 작가가 아니지요. 작가는 작품으로 말을 하는게 아닙니까? 나는 숫벌이지만 여왕벌은 아니지요.여왕벌은 맛있는걸 먹을수 있으나 여전히 하는 일은 후대번식이니까요!   김: 《四十岁说》이란 수필에서 선생님은 글쓰기의 “문도”(文道)에 대한 감오나 많은 작가의 프로적 학견을 피로했어요. 참 멋있는 명문입니다.   가: 거기서도 내가 쓰다시피, 작가란 사실 수공예인과 같아서 글을 잘 쓰면 수공일을 잘 한것과 마찬가지지요. 내 일이 잘 되면 스스로 기쁘고 또 남을 유열(愉悦)시킵니다. 아주 간단한 도리에요. 만약 작가란 직업이 가장 마음이 자유롭다 한다면 또한 상반대로 가장 겉모양을 꾸밀수도 있습니다. 훌륭한 작가와 저열한 작가는 여기서 갈라지는거죠.   6. 먼 이계(异界)를 위하여   김: 우연인지 필연인지 잘 모르겠습니만, 선생님과 저는 글쓰기의 작법과 관념에서 많이 유사한 점을 보이고 있어요. 수년전 제가 요녕신문 기자의 인터뷰에서 조선족 글쓰기의 결함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닫혀진 감성의 폐역(闭域)에서 끌어내어 이적인 세계 즉 이계(异界)를 보여주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안주하고 있는 세계에서 귀렬(龟裂)을 뚫고 참신한것들이 거기서 분출돼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공포와 불안같은 경험이기도 하며, 또한 해방, 해탈, 유쾌, 괘감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동시에 가능케 해주는게 곧 문학이나 사상의 힘이다.”   가: 아주 멋진 말입니다. 작가, 좋은 작가라면 사회인생에 대한 태도를 표현해야 하며 이 태도는 자신의 것만 아니라 보다 많은 인간, 내지 인류의 것을 표달해야 합니다. 근대 중국에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学为体,西学为用)이란 관용어가 있는데, 문학에서 말하면 서양의 글쓰기 기교만 수용한다는 뜻이 되겠지만, 난 이 말에 늘 결함이 있다고 여겨요. 중국의 종교철학이나 서양의 그것은 구경 다 최고의 경계는 일치합니다.   김: 그렇죠. 따지고 보면 최고차에서는 거이 동일한 차원을 이루고 있지요.   가: 그래요. 구름위에는 다 찬란한 해빛인것과 같지요. 문제는 그 양광아래 각양각색의 운우나 풍설이 제각기 다채로운 양상과 미학을 자랑하고 있는겁니다. 여기서 동서양인의 사유방법수준을 분석해야 하죠. 수묵화와 유화, 희곡과 화극, 중의와 서의… 동양의 정체감 중시와 서양의 실험분석 중시를 인식해야 하며 그 독립성과 풍부성을 알아서 구름층을 넘어서 인류지고의 상통한 경계로 가야하지요.     “ 가장 민족적인게 세계적이다”는 언설을 난 그리 찬성하지 않아요. 이 “민족적”인게 인류 최후의 상통한 경계를 갖춰졌나가 관건 포인트입니다.   김: 맞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것, 내것만 고집하여 그것을 쓰는것도 좋지만 열린 작가라면 먼 이계, 이성을 위해 그들을 겨냥하여 글발을 쓴다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  멀리 후세에도 100년뒤. 500년뒤에서 남을 작품을 탄생시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봤을 때 중국작가들이 정치적 대환경하에서 쓰고 있는것은 안일한 현실터치에 가미된 이데올로기입니다. 아이러니 하게 이런 이데올로기적 작품은 더 좁은 폐색(闭塞)화 시키고 타자, 세계의 공감을 불러 일으킬수 없지요. 작가라면 의례 우선 ”아득히 먼 독자”에게도 전해질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쓰는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시, 공간적으로 떨어진 독자들에게도 읽힐수 있는 그런 리더블일수 있는 텍스트를 제공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사고와 저의 생각은 잘 일치되고 있어요. 앞으로도 “국민적작가”로서의 가선생님의 텍스트는 중국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가장 선구적인 표징이 될거라 확신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믿어주셔서   7. 《废都》는 왜 당대 최고의 위대한 소설인가?   김: 중국 당대문학을 거론 할때 가평요를 빠칠수 없고, 가평요의 문학에서 《폐도》는 누락시킬수 없는 이정비적인 거작입니다. 농촌 소재를 쓰다가 도시 지식인의 생태를 재현한 작품으로서, 민국이래 소설중에서 최고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히트작이었지요. 93년 여름 방학 일시 귀국했다가 심양 평론가 친구의 소개로 《폐도》를 사서 읽게 되었는데 저는 정말 열독의 쾌감을 만끽하면서 읽었지요. 일본에 갖고 와서도 또 세번 읽었습니다.     선봉파 작가의 대표적 인물인 마원(马原)은 《폐도》는 당대 최고의 위대한 소설이라고 격찬했는데 저도 그의 관점에 동감입니다.   가: 《폐도》는 1992년에 출간했지만, 1990년에 쓴겁니다. 지금도 재판되고 있는데 해적판만 해도 내가 장악한것만 무려 70여종이나 되며 불완전 통계에 따르면 8천만부이상이라고 전해지고 있어요.     나는 지식인의 부조(浮躁)를 통해 당대 문화의 溃败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 溃败를 초월할수 있는 성문화를 통하여, 그리고 그 문화적 전승의 맥락에서 1990년대 전통문화 부흥운동과 결합하여 뿌리를 찾고 싶었지요.   김: 그런데 세인들, 더구나 문학을 업으로 하는 평론가들까지도 시선이 《폐도》의 성적묘사, 너무 리얼리티한 성묘사에 쏠려 그만 선생님의 깊은 속심, 의도를 간과했던것이지요. 그래서 가장 큰 관심사도 쟁론이 일어난 것도 성적묘사에 대해서였습니다.   가: 맞아요. 성묘사에 눈길이 쏠리면서 내 작품의 모든것을 부정해버렸어요. 사실 지금 이 소설이 나왔더라면 별거 아닌데 말입니다. 일본에서 이 소설이 번역 출판되자 히트를 쳤고 번역자이며 문학평론가인 요시다교수는 “《폐도》야 말로 중국 5.4 이래 진정하게 인간을 쓴 장편소설”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인성과 인간의 약점을 묘사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 했어요. 그 뒤 프랑스에서 《폐도》가 프미나(费米那)문학상을 수상한 이유도 이것이었습니다.   8. 배설의 상징세계   김: 《폐도》는 현,당대 중국 최대의 쟁론을 일으킨 최대의 문제작으로 부상된것에는 성적묘사에 대한 쟁론, 곡해가 많았기때문이라고 봅니다. 《금병매》나 서양의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애인》,나버코프의 《로리터》와 비견할수 있는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폐도》는 완전히 봉살당하는 불운에 처해있었지요.     지금까지 대체로 주인공 장지접(庄之蝶)의 여러 여성과의 성접촉을 그냥 퇴폐,무료, 성에 대한 모독…등으로 편협된 관점으로 편향되여있지만, 나는 《폐도》를 수차례 정독하면서 작가의 경의로운 정신세계를 발견했어요. 흔히 사물을 바라볼때 두가지가 있지요. 오감(鸟瞰  )과 충감(虫瞰  )     그러니까 새들이 공중에서 지면의 물체를 바라보는 시점과 개미나 벌레가 지표에서 기면서 바라보는 시야가 전혀 틀리지요.   가: 그렇죠. 세인들 시선이 성묘사에 쏠려서 내가 진짜 의도했던 주제를 외면해버렸지요!   김: 지금까지 절대다수 평론가들은 그냥 충감으로 바라봤기때문에 작품중의 성묘사문 자체에만 확대경으로 바라보고 문제삼고 비판했지요. 좀 더 다른 이차원 (异次元)에서 이를테면 오감의 시야가 필요 하거든요.     저는 문화인류학, 비교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순문학평론가의 시각에서 이탈하여 보았어요.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 클리포오드 기얼즈의 유명한 해석 인류학 내지 상징인류학 이론이 있습니다. 그의 상징, 해석학적 이론을 빌어서 보면, 선생님이 쓴 《폐도》의 주인공 장지접은 지식인, 작가로서 물욕이 팽창되고 정신적으로 들뜬 90녀대(지금은 더함)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썼어요.     직언하면 장지접의 성적 배설, 복수(复数)의 이성 파트너와 빈번히 행해지는 성적행위는 작가의 또 하나의 정신적배설행위를 상징하는것입니다.   가: 흥미로운 지적이네요. 정신적 배설행위, 정채롭습니다.   김: 지식인, 작가로서 주인공은 두가지 펜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손으로 글쓰는 펜이고 또 하나는 남성의 심벌인 페니스, 이것도 신체적 펜으로서 자신의 글쓰기 배설의 펜이지요!   가: (웃음) 이런 발견은 그 누구도 한적이 없었습니다. 문화인류학자, 비교문화학자만 할수 있는 해독이지요.   김: 감사합니다. 그래서 들뜬 인문환경하에 지식인의 적응, 내지 대항상태로 자신의 두가지 펜으로 배설을 통한 울분풀이를 하는거지요. 여기서 성교는 퇴폐이기보다는 당대 지식인의 이 부세(浮世)의 홍역을 치르면서 자발적인 적응, 또는 정신적 향유, 반항의 배설이기도 한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 김선생의 귀재다운 정채로운 해석에 나도 나 자신을 재발견한 느낌입니다. 문학비평은 역시 문학텍스트의 글발에 매달리는게 아니라 보다 넓은 지적(知的)시야에서 관찰, 비교, 해석하는게 너무 필요하다고 봅니다.   9. “언어폭력”의 야만이 사람을 키운다    김:《폐도》는 기념비적인 명작이지만, 이로 인해 선생님은 당대 최대의 비난과 중상을 받으시면서 인내해야 할 경우를 겪었습니다.   가: 벼라별 욕을 다 먹었지요! 그렇다고 나는 한번도 그런데 대응한적도 없었어요. 작품이 나간 다음 타자가 의논하고 비평하는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봉살이든, 격상이든 쌍방에서 밀어올리는 동력이 있지요. 이것도 다 나의 타고난 복이지요. 나를 긍정하면 난 더 잘 써서 보여줄꺼고 나를 비난하면 난 불복하여 더 잘 써서 내 실력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물론 내가 강해야죠. 수화상제 방능연단(水火相济 方能炼丹)이지요.     사실 나 본인은 여러가지 언어폭력에 많은 심적 상처를 받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습니다. 《폐도》의 대논쟁은 이미 문학비평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대 사건으로 비약발전 되었고, 내 일상생활, 신변의 사람들까지도 누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편견, 누명, 이미지는 개변하기 어렸웠고 문학밖의 많은 부조리, 곡해, 폭언이란 야만이 나를 괴롭히는 존재였지요. 그러나 《폐도》를 거치면서 나는 홍역을 무사히 치르게 되듯이 나를 단련시켰고 아무리 큰 일이 나한테 닥쳐도 나는 늠름할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은 감옥 가는 거 빼고 다 겪었지요!   김: 저도 조선족과 동족내부에서 수많은 중상과 비방을 당한 “수난의 지식인”으로서 선생님의 심경을 너무 잘 이해합니다. 한편 저는 그런 비방자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적어도 마이너스적인 내 열성팬이니까요. 나늘 관심하고 주목하는 정열은 높이 봐줘야 그런 사람들의 지극감천의 정열에 걸맞는거니까요!(웃음)     모종삼(牟宗三)선생의 말이 생각나네요. “모든것을 용서해야 모든것을 승인할수 있고 모든것을 초월해야 모든것을 소탈할수 있다.”고      가선생님은 그런 초탈한 인간, 무욕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0. 초탈 무욕의 경계   가: 한 개인의 정신세계는 자란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지요. 난 원체 키도 작고 형상도 별 볼것 없고 나서서 활보할 것도 못되는데다가 그 시기 가정 정치성분이 나빠서 부친이 반혁명으로 몰렸지요. 그래서 뭇사람들 앞에서 잘난척도 못하고 교제도 싫어했습니다.내가 말해 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었고 다들 비웃기만 했어요. 마치 샹린아주머니(祥林嫂)처럼 억울함을 하소연해도 다들 번거러워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년시절부터 말수 적고 어눌하고 묵묵히 독서만 하는 소년이었으며 성격도 우울하고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한 고독을 즐겼습니다. 고독은 인간, 특히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문인, 작가에게는 더 없는 낙원입니다.     그리고 나는 책욕심, 글욕심외엔 큰 욕심이 없어요. 금전도, 이성도, 명예도 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연”(缘)의 세계니, 구태여 안깐힘을 써서 추구한다고 얻어지는것도 아닙니다.   김: 선생님의 작품중에도 불교, 선종의 초탈한 이미지와 분위기가 늘 농후하게 잠재해있고 선생님의 서재에도 그런 느낌이 다분히 들어요. 선생님의 50세를 기념하여 쓴 수필《50大话》에서도 선생님이 말한 “人生一片心, 不因人热;文章千古事, 聊以自娱”란 귀절은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가: 내가 원래 병약한 체질이라, 체약다병과 과언과욕(寡言寡欲)은 내 인생의 셋트처럼 따라 다녔어요. 내가 다병하니까 여기저기 기묘하게 아픈데는 많지만 그게 또 나로 하여금 많은 재난과 거북함을 무난히 넘기게 했습니다. 이를테면 누군가 날 보고 무슨무슨 직위에 올라야 하고 무슨무슨 문학상을 받아야 하는데 하면 난 그냥 난 병꾸러기이기 때문에 그런데 무연하다고 한마디로 답한면 그만이니까요!     인간이 욕심이 과다하면 여러가지 병, 정신질환에 걸리고 자신을 괴롭히지요. 문인, 작가, 지식인은 으례 욕심을 누르고 자신의 글쓰기나 연구에 몰두하는게 편하다고 봐요. 너무 과욕은 본말전도의 위험성을 자초하거든요. 작가는 글만 쓰고 평가는 타인에 맡기면 그만입니다. 11. 문학은 자유로운가?   김: 외견에는 연약해 보이나 내심은 강직한게 선생님이지요. 제가 선생님의 수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하나의  발견이라 할까, 정확히 말하여 놀란 사항이 있는데요. 선생님의 1970년대 초부터 수필, 산문이나 지금까지 장편거작을 쭉 읽어보아도 많은 작가, 문인에게 보이는 체제에 영합하거나 시류에 발라 맞추는 그런 글이 한편도 없는겁니다.     중국문학자체가 “文以载道” 의 전통을 전승하면서 또 흔히 정치나 정치포부와 밀착되어 영위해왔지요. 특히 현대,당대에서 혁명의 테제가 늘 개인 일상의 삶을 독차지 했으며 정치가 인간의 모든 정신세계 내지 글쓰기의 주제가 되지 않을수 없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건 1920년대 심종문, 장애령과 판이한 한계죠. 그러나 경의로운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선생님의 작품에는 혁명이나 정치에 영합한 인소가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고중시절인 1979년에도 습작시 4인방을 비판하고 개혁을 가송하는 그런 정치적요소를 듬뿍 넣었거든요.     1980년대이후로 중국문학은 전례없는 서양의 사조와 시야의 충격으로 가장 활약하게 됩닌다. 문학이 문학다운 80년대시대가 열리고 인간, 인성을 쓰는 문학이 열리게 됩니다.   가: 사실 말씀하다시피 나와 같은 연배의 작가들은 80년대에 들어서서 문학의 본연에 개안하고 문학을 하게 됩니다. 서양의 여러 유파나 사조들이 쉴새없이 밀려오고, 문학은 실험이 거듭되고 반짝 스타도 나타나고 어떤 작가들은 또 자발적으로 글쓰기를 포기하기도 했어요. 최초 전국문학상 수상자들인 王蒙,刘心武,卢新华, 张承志,张洁등등 많았지만 현재 그 중에서도 남은 작가가 많지 않아요.     30여년이 지나서 주요하게는 사고양식의 변화가 많았는데 물론 문학사유가 아직 철저하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출판사나 작가나 독자들이 문학에 대한 관념은 각가지로 분화되었지만, 가장 기본적인것은 여전히 5,60년대의 관념이 농후합니다.     이를테면 시대의 거울이요 사회의 기록자요, 인민의 대변인이요, 문학의 몇개 대요소요, 무슨 환경중의 전형모델성격이요 하면서 문학관의 집단무의식의 요소가 너무 굳어 있지요.     제가 30여년동안 해온 일도 이런 굳은 관념을 부수고 글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쓰기와 정치는 연관시키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12. 독립하라, 누구도 없는것 처럼    김: 문학은 자유로운가 하면 예스라는 대답이 어렵지요. 글쓰기의 대환경도 그러하거니와 가장 요긴한건 작가의 사유와 관념이 스스로 자신에게 정신적 족쇄를 무의식중에 채우고 글쓰고 있어요. 이를테면 위에서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작가든 편집이든 겁이 나서 스스로 자주 검열을 해버리는거예요. 이러니 작가는 많아도 고수준의 순문학작품이 태어날수 없지요.     선생님의 독립작가적 기품에 또 한번 놀란것은, 사실 오늘 낮 중앙에서 내려온 간부들과 회의를 하고 저녁만찬은 중앙어른들과 같이 하셔야 하는데도 선생님은 그들을 뿌리치고 저와 함께 식사하시고 말씀을 나눈것입니다. 선생님이 관장을 싫어하는 문인으로 유명하지만 저는 오늘 직접 체험했네요. 《폐도》가 나온 뒤 중국작가협회에서는 중선부, 조직부에 건의하여 선생님더러 남방을 체험하면서 중국의 개혁형세에 대하여 써보라고 했지만 가선생님은 섬서의 화서촌에 가서 부서기직을 걸고 개혁을 반영한 작품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정치적 칭화이(情怀)가 결여하고 문단의 관장에 관심없음을 보여주었지요. 현재 중국의 대학의 학자나 문인들도 관장에 비집고 들어가기에 여념없는데 선생님같은 독립적 문인은 “희귀종”에 속하지요. 제가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독립인격과 자유정신을 갖춘 지식이랍니다.   가: 감사합니다. 모종의 의미에서 지식인의 약점은 바로 용기가 부족하고 독립성이 결여한것이지요. 이 민족이 너무나 많은 고난의 역사를 겪었기때문에 중국인의 정치칭제 (情结)는 꼭 강렬하면 사명감도 있고 기회주의자나 영합, 아첨하는자들도 많습니다. 위기에 닥치면 그냥 뿔뿔이 흩어지고 독립성이 없거든요. 현실생활에서도 늘 볼수 있는게 독립정신이 결핍한 사람이 너무 많은것입니다.     그러니 중국 지식인은 가장 매수당하기 쉽고 초안 (招安)당하기 쉬운 무리이예요. 이를테면 지금까지 맨날 글을 써서 관을 욕하다가도 일단 관직을 주면 곧바로 변절해요. 사탕발린 소리를 하는거죠.(웃음)      작가가 이 현실과 충돌되는건 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충돌이 없으면 명작이 탄생될수도 없습니다.   김: 사실 작가나 지식인은 반시류의 독립정신이 그의 영혼이니까요!   가: 그래요. 내가 문학에서 작품의 “두터움”(厚)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사실 정신측면을 가리키거든요. 내가 간부가 되어 누구를 간섭하거나 하는건 내 적성에도 안 맞습니다. 중국의 정치적 현실을 작가가 도피하기는 어려워요. 문학이 여러가지 풍격, 스타일로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 작가에게 중요한건 독립인격, 독특한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독립적 정신사상과 글쓰기가 주어지는게 요긴하지요.   (이하 하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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