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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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한국입국 쉬워지니 폐단 커 댓글:  조회:6081  추천:4  2013-10-02
한국입국 쉬워지니 폐단 커 빚 지지 않는 한국행, 중압감 없어 정서적 해이 심해   무연고동포 신규입국 추첨에 의해 한국에 입국하여 6주기술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조선족 K씨는 학원 다니는 첫날 아침, 술에 만취해 곤드레만드레 큰길이 좁다고 팔자걸음으로 간신히 몸을 가누고 왔다. 수업에 참가하긴 했는데 제집에서 하던 버릇대로 피실피실 소리 내 웃기도 하고 이 소리 저 소리 헛소리 쳐댄다. 이튿날 술이 깬 상태에서 등원했지만 눈빛이 이미 맛이 간 알코올 중독자이다. 학원에 술 마시고 오지 못하게 교육시키느라 숱한 애를 먹었다. S씨는 학원이 쉬는 일요일 오전 만취상태에서 찾아와 동반 여학원생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난동을 부린다. D씨는 점심에 술을 잔뜩 마시고 괜히 시비 걸고 타인과 싸운다. D씨처럼 술 마시고 타인과 걸고 들어 싸우는 일이 수두룩하다. 학원은 학교와 같이 마땅히 지켜할 기율과 규칙이 엄연히 있다. 그러나 학원에 온다는 개념이 없이 6주기술교육생 중에 상기 추태가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를 다잡느라 학원관계자들이 진땀을 뺀다. 더욱 가관인 것은 2주쯤 지나면 남녀 학원생이 친해지기 시작해 서로 연애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처녀총각이 연애한다면 찬성할 일이나 고향에 어린 아이와 남편을 두고 온 20대 후반에서 30대 여성들, 어린 아이와 아내를 두고 온 남성들 가정 도덕과 윤리를 아예 팽개치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남남의 남녀가 동거생활이 오래된 일이고 숫자도 많지만 수년 전만 해도 한국에 온지 몇 해 지나고 고독을 이기지 못해 남남이 부부처럼 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 요즘처럼 한국에 오자마자 남남이 붙어사는 사례는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수년 전 한국에 온 조선족은 절대다수가 열심히 또 착실하게 살아왔다. 이에 비해 요즈음 새로 입국하는 초보자들을 보면 오자마자 추태를 부리고 남남이 붙어사는데 왜 이렇듯 대조적일까? 조선족에 대한 한국정부의 문호개방 혜택에 의해 입국자가 급증함에 따라 소질이 형편없는 자들이 밀려오는 것이 문제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도 더욱 중요한 원인이 있다. 수년 전에 입국한 조선족은 절대다수가 한국에 연고가 없어 사증을 받으려면 보편적으로 6~10만 위안 쯤 빚지고 온다. 열심히 벌어 갚지 않으면 이자가 높아 아이보다 배꼽이 더 커지고 한편으로 아이 학비와 가족 생활비 부담 때문에 중압감에 짓눌려 할 수 없이 돈을 악착 같이 벌어야 한다. 돈을 악착 같이 버노라면 다른데 눈을 팔 겨를이 없다. 몇 해 지나 보릿고개를 넘기고 나서야 한 눈 팔며 살 수가 있다. 새로 입국한 조선족은 로또 당첨 같은 추첨이란 행운에 의해 사증 값과 비행기티켓만 사면 한국에 올 수가 있어 빚을 지지 않는다. 한국에 이미 자리 잡은 부모나 형제 하다못해 삼촌 사촌이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오자마자 돈을 벌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빚이 없고 발붙일 곳이 있으니 열심히 또 착실하게 살아야 할 압력이 없다. 정서적으로 해이하다 보니 쓸데없는 짓거리에 신경 쓰고 있다. 취업도 마찬가지로 해이하다. 재한조선족 일세대들은 일자리만 생기면 열심히 노동에 종사했다. 일이 힘들던 월급이 낮던 쉽게 자리를 옮기지 않고 죽기내기로 일했다. 휴일이면 다른 직장에 알바로 파출부로 뛰었다. 한 푼이라도 빨리 벌기 위해서였다. 이에 비해 요즘 입국자들은 일자리를 골라 취직하고 주 4회 휴무를 선택하고 월급이 낮으면 아예 머리를 돌린다. A직장에서 일하다가 B직장이 월급 5~10만원 더 준다면 주저 없이 자리를 옮긴다. 그나마 일을 하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고상’하다. 일이 조금 힘들어도 직장에서 조금만 무시당해도 팽개치고 중국에 돌아가는 사례도 꽤 발생하고 있다. 빚 없이 왔으니 돌아가는데 아무 주저심도 없다. 물론 신규입국자 중 다수는 열심히 착실하게 잘하고 있다. 본문의 취지는 재한조선족 일세대와 이세대의 삶의 태도 차이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64    조작글, 사람 잡는다 댓글:  조회:6588  추천:2  2013-09-02
조작글, 사람 잡는다   어제 한 지인이 연변통신이란 사이트에 들어가 보라고 해 보았더니 나의 인생에서 처음 소름이 돋는 경악함을 금치 못했다. 철마라는 이름으로 올린 글인데 제목은 로 되어 있었고 글 내용은 조선족과 중국을 팔아먹는 문구들로 채워졌다. 우선 글은 ‘1950년 조선족 팔로군 남한 침공 진실해 지자’라는 소제목을 달았고 그 밑에 ‘김정룡 조선족 칼람니스트’라고 밝혔다. 글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없어 여기서 반복하여 말하고 싶지 않다. 혹시 나와 같은 동명인이 이런 글을 썼을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족 칼람니스트 김정룡’이라 밝히면 독자들은 내가 쓴 글로 오해할 수 있다. 연변통신에 철마라는 이름으로 올린 글이 내가 쓴 것이 아니라는 점 여기서 명백히 밝힌다. 첫째 글에서 철자, 어휘사용, 두음법칙, 뛰어 쓰기 등 문법상 너무 서툴러 나를 잘 아는 독자는 내가 쓴 글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칼럼을 칼람이라 하는 등 철자도 개판이고 전반 문장구성과 문맥도 매끄럽지 못함). 둘째 나는 300여 편의 글을 썼지만 정치와 역사에 민감한 문제를 여태까지 건드린 적이 없다. 일례로 내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수많은 강의를 해왔고 그때마다 수강자들로부터 고구려와 동북공정문제를 질문 받는데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어서 대답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셋째 2007년 나의 글은 조글로와 동북아신문 사이트를 제외하곤 나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함부로 게재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고 처음부터 현재까지 나는 조글로와 동북아신문 사이트에만 글을 보낸다. 넷째 조글로와 동북아신문에 발표된 글을 중국과 한국 측 정규적인 신문이나 잡지 혹은 국가 공인 언론매체에서 지면 혹은 사이트에 전재하는 경우는 많은데 이 범위를 벗어난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다섯째 지면을 놓고 말하자면 주로 중국동포타운신문에 게재하고 일부 중국 측과 한국 측 언론매체나 잡지에 간혹 전재하는 경우가 있다. 여섯째 요즘 조선족대모임 카페에서 나의 동의를 거치고 글을 올린다. 그 외 사이트나 카페들이 나의 동의를 거친 적이 없다. 나의 동의를 거치지 않는 사이트나 카페들이 올린 글 중 조작글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독자들은 유념하기 바란다. 일곱째 나는 한국식으로 글을 쓰지 조선어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연변통신에 나의 이름으로 된 글은 조선어식으로 쓴 것이므로 내가 쓴 글이 아니다. 얼마 전 조글로에서 한 네티즌이 나를 한국언론매체에 출연하여 조선족역사에 관련해 양심선언을 했다고 댓글을 달았는데 실로 밥 먹고 할 일이 없는 인간들이다. 나는 학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데 무슨 놈의 양심선언인가? 글을 많이 쓰다 보니 어쩌다 자그마한 신문의 주필을 맡고 있고 포럼을 개최하다 보니 연구소 소장이란 호칭을 갖게 되었고 장기를 좋아해 장기협회 회장, 연변일중 선생 출신이라 교사협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생활이 충실한데 뭐 밥 먹고 할 지랄 없어 양심선언을 한단 말인가? 더욱이 나는 조선족으로서 조선족을 팔아먹을 이유가 없고 중국사람으로서 중국을 팔아먹을 이유가 털끝만치도 없다. 나는 조선족을 상대로 강의를 많이 하는데 중국의 장점을 많이 말해 학생들로부터 어쩌면 한국에 온지 10여년이 넘는데도 중국에 대한 좋은 감정이 계속 살아 있는가고 말한다. 때론 한국과 한국인, 중국과 중국인 및 조선족을 비판하는 글을 쓰지만 반동이 되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 균형감각으로 이쪽도 저쪽도 잘 되자는 취지에서 쓰는 것이지 정치적으로 문제 되게 글을 써 본 적이 없다. 연변통신에 나의 이름으로 된 글은 여태껏 내가 쓴 글의 성향을 완전히 벗어나 한편의 반동 글인데 재차 성명을 발표하건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나와 동명인이 쓴 것이 아니면 백 프로 조작글이다.
63    다문화병에 걸린 재한조선족 댓글:  조회:6204  추천:3  2013-08-08
다문화병에 걸린 재한조선족 ‘재한다문화’란 말은 없다   인간이 이름이 있듯이 모든 ‘업체’는 간판이 있다. 간판은 하고자 하는 사업의 취지와 내용에 맞아야 하는 것은 상식적인 문제이다. 간판은 또 대중성을 띄기 때문에 더구나 상식에 맞아야 한다. 상식에 맞지 않는 간판은 그 업체 존재의 의미를 떨어뜨린다. 지금 재한조선족사회는 춘추전국시대이다. 언론이 많고 단체 또한 자고 깨면 생겨나듯이 우후죽순마냥 나타나고 있다. 대충 손을 꼽아보아도 30개 ‘업체’가 쉽게 잡힌다. 뚜렷한 취지나 목표의식이 없이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으로 ‘업체’를 설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질적인 내용이 없이 허세에 매달려 회장님이랍시고 폼을 잡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 어찌되었든 언론이 많고 단체가 많은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많을수록 경쟁이 심할 것이고 경쟁이 심하면 적자생존법칙에 의해 자연도태를 거쳐 우수한 ‘업체’만 남게 될 것이다. 문제는 남이 하니 나도 따라하는 사례가 많다보니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재한조선족사회에 다문화바람이 불고 있다. 조선족이 다문화에 속하느냐, 마느냐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 논쟁에는 관심이 없고 다문화간판에만 관심이 있다. 2천8백억원(다문화) 대 1천2백만원(조선족)의 정부 지원, 다문화에 유혹이 클 만도 하다. 조선족간판은 메리트가 없다. 다문화간판을 걸어야 메리트가 크다. 그래서 경쟁하듯이 다문화란 간판에 매달린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상식을 벗어나는 다문화간판이 나타나고 있어 사회의 웃음거리를 지어내고 있다. 며칠 전 필자가 대림동을 지나다가 우연히 조선족행사에 마련된 화환에 ‘재한다문화’ 00협회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재한다문화’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재한중국인 혹은 재한조선족이라 말하는 것은 중국에 이미 중국인집단이 있고 조선족집단의 존재가 있고 그 집단의 일부가 한국에 왔기 때문에 재한중국인 혹은 재한조선족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다문화란 어느 나라에 실체로 존재했던 것이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다문화가 이뤄졌기 때문에 ‘재한다문화’는 존재하지 않는 상식에 어긋나는 표현이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뿌리가 있는 집단의 일부가 한국에 오면 재한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있지만 뿌리가 없는 집단이 한국에 와서 새롭게 이뤄진 것은 재한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재한조선족사회가 다문화에 매달리고 있는데 다문화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다문화간판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다. 다문화란 말은 1957년 스위스에서 먼저 생겨났고 1970년대 캐나다를 거쳐 지구촌에 퍼졌다. 다문화, 그 뜻은 한 개 나라에서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저마다 갖지 않는 생활양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민족이 합쳐 전체 인구 중 30%를 넘으면 다문화사회로 인정된다. 스위스의 경우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등 언어가 국가공용어인데 진짜 다문화사회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스위스, 캐나다, 미국 같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국가들만이 다문화사회이다. 중국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법적으로 공존해 있지만 다문화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다민족국가라고 말한다. 현재 한국에 외국인 수가 150만 명(조선족 포함)이며 전체인구의 3%밖에 되지 않고 다양한 국가 사람들이 한국에 살고 있지만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어 진정 다문화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날로 증가하고 있는 외국인과의 화합과 공존을 위해, 특히 결혼이민자와 그 2세들의 한국생활정착을 돕기 위해 다문화란 개념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한국에서의 다문화는 결혼이민가족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에 따라 상응한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이민자 중심으로 이뤄진 한국다문화에 조선족사회가 명분도 없고 상식에도 맞지 않게 매달리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지?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62    동포정책 법무부가 주도하냐, '골목부'가 이끄냐? 댓글:  조회:7248  추천:3  2013-07-17
위명여권, 불체자 합법화 동포정책 법무부가 주도하냐, ‘골목부’가 이끄냐?   일부 단체 위명여권과 불체자 동포 구제정책이 나오기도 전 금전부터 챙겨 동포사회 혼란에 빠뜨려   “우리 00님이 적극적으로 데모한 덕분에 법무부가 위명여권과 불체자 구제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단체에 접수하면 선착순으로 먼저 구제받을 수 있다. 우리 00 보증으로 구제가 이뤄지니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우리 00를 찾아오도록 주변사람들을 동원하라.” 지난 6월 중후순경부터 동포사회에 시끌벅적하게 떠도는 말이다. 7월 1일부터 실시한다는 구체적인 일자까지 제시하면서 수속비까지 받았다. 한 개 단체의 사례가 아니라 여러 단체가 저지른 일이다. 동포밀집지역 여러 곳에서는 문어귀에 ‘긴급’이라 눈에 띄게 밝히고 위명여권과 불체자 조건 없이 구제함, 선착순 접수 등 내용의 전단지를 비치해 놓고 동포들을 유혹하고 있다. 바람이 일면 사기행각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은 이미 동포사회의 ‘관행’이라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본지가 입수한 소식에 의하면 00행정사는 외국인등록증 색이 칼라인 것만 구제되고 흑백이면 구제가 어려우니 120만원 더 내면 구제해주겠다고 하면서 추가비용까지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 한심한 사기극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요즘 동포사회는 흑백외국인등록증을 소지했던 동포들이 구제받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져 또 새로운 혼란이 조성되고 있다. 동포정책을 펼치는 법무부는 아직까지도 불법체류 합법화 구제정책을 공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미 법무부가 시행에 들어간 것처럼 일부 단체와 행정사들이 돈을 받고 있어 동포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데모 덕분에 구제정책이 나오게 되었다.” 마치 법무부가 본래 구제정책을 펼 의도가 없었는데 단체들이 데모하여 어쩔 수 없이 핍박에 의해 양산박에 오른 것으로 오도(誤導)되고 있다. 당당한 대한민국 정부 부처인 법무부가 일부단체에 끌려 다니는 모양새로 동포사회에 비춰졌다는 뜻이다. 동포들은 이를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고 접수시키고 돈까지 납부했다. 법무부 정책이 공지되기도 전에 미리 돈부터 받는 것이 위법이 아니냐는 여론이 뜨거워지자 일부단체들에선 회원비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회원비를 받을까? 찜찜한 구석이 있다. 일부단체들에선 여론이 뜨거워지자 환불처리를 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동포사회는 법무부보다 일부 단체를 더 신임하는 것이 현실이 되어 안타깝다. 이번 사태를 통해 법무부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과거 구제정책을 공지하기 전에 미리 법무부나 혹은 산하 출입국관리사무소 출신 일부 행정사들이 미리 소식을 알고 한발 앞서 접수에 들어가는 등 사회 혼란을 조성하여 언론은 늘 그들의 뒤를 쫓는 모양새가 되어버려 자기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사태는 법무부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권지도자와 법무부 책임자가 데모현장을 찾아 구제 약속을 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일부 단체들이 이를 이용한 것이 잘못일 뿐이다. 그렇지만 법무부가 하루 속히 정책을 마련하여 공지하고 언론을 통해 홍보가 잘 이뤄진다면 혼란한 동포사회가 어느 정도 수습이 빨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동포타운신문 251호
61    나는 신라통일 예찬론자다 댓글:  조회:7024  추천:12  2013-06-08
나는 신라통일 예찬론자다   “고구려가 통일했어야 했다.” “신라가 통일한 것이 다행이다.” 한국학계는 이 문제를 놓고 아직도 갑론을박 중에 있다. 조선족사회문화인들은 고구려통일예찬론(가설)에 빠져 신라통일을 영 못 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구려는 중원정권에 맞서 싸웠는데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즉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조개떡 하나 갖고 서울로 못 간다.’ 이북의 속담이다. 역사를 해부하고 진단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표면상의 어설픈 민족적인 감정을 갖고 역사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문화를 기본바탕으로 연구하고 그때 그 결과가 후예들한테 어떤 영향을 미쳐왔나를 충분히 공부하고 나서 발언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먼저 중국역사를 간단히 짚어보자. 중국은 통일과 분열 반복의 역사였고 그 동안 23개 왕조가 존재해 있었다. 23개 왕조 중에 위진남북조시대 일부이민족통치, 몽고족의 원나라 지배, 만주족의 청국 등 이민족의 천하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민족이 통치했던 아울러 통치기간이 어떻게 길었든 중국은 시종일관하게 한문화(漢文化)를 바탕으로 흘러왔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유명한 도사(道師), 유생(儒生), 법사(法師)를 불러들여 책사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오고 있다. 뜻인즉 중국을 다스림에 있어서 몽고문화가 아닌 중국전통문화(한문화)를 통치무기로 삼았다는 의미이다. 만주족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치포나 변발 등이 만주족의 문화였지만 통치무기는 여전히 한문화였다. 이 만문(滿文)자전인 것이 아니라 한문자전인 사실이 말해주듯 만족문화는 사라져가고 한문화사회였다. 그래서 중국역사는 문화역사라는 결론이다. 5천년 중국이 중국답게 흘러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튼튼하고 견고한 한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반도가 수차례 모자라는 천 번의 외침을 당해오면서도 오늘날까지 반도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반도의 삼국시기로 돌아가 보자. 고구려는 중원정권과 인접해 있었기에 중국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 례로 왕을 제치고 최고 권력을 휘둘렀던 막리지 연개소문은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은 청을 올린다. “전하, 가마솥의 받침대가 세 개이듯이 나라를 받치는 기둥도 마땅히 세 개여야 하옵니다. 우리고구려는 유교와 불교는 그런대로 보급되어 있으나 도교는 영 말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도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인 줄로 아옵니다. 그렇게 하려면 당나라에 요청하여 도사를 모셔오는 것이 시급하옵니다.”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청을 받아들였고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의 요청에 의해 도사를 파견하고 도관까지 지어주었다. 고구려왕이 직접 도사의 강의를 경청하였다는 이야기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외 김일연의 《삼국유사》에 기재되어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고구려는 문화적으로 중원정권과 발을 맞추기에 노력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아울러 고구려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국경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압력도 압력이거니와 더욱이 문화적으로 당나라가 많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중원문화에 대한 동경의 발로에서 생겨난 자발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화적으로 ‘대륙성’이 강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민족문화의 퇴화를 의미한다. 백제는 지리적으로 현해탄을 사이 두고 있는 일본과 가깝게 지냈고 아울러 중국 양자강중하류지역과 교류가 빈번해 문화적으로 많이 성숙되고 세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국제성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에 자민족문화성격이 점점 퇴화되어 가고 있었다. 고구려의 문화특징이 ‘대륙성’이었다면 백제의 문화특징은 ‘국제성’이었다. 고구려와 백제와는 십만 팔천 리나 다르게 신라는 문화적으로 ‘촌놈’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신라는 위치적으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몹시 편벽했다. 육지를 통해 중원으로 가는 길목은 고구려가 막혀 있었고 해상통로는 백제가 버티고 있어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겨우 중원정권과 교류가 시작되었을 정도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신라는 중원문화의 영향이 아주 미미했다. 일례로 불교가 4세기 초에 고구려에, 4세기 후반에 백제에 전파되었던데 비해 신라는 527년에 이르러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외래종교를 받아들임에 있어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유교가 유입되자 신라 사람들은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풍교일 따름이며 다만 그 이름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라 사람들은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풍교’라 불렀다. 썩 후에 불교가 유입되자 역시 같은 맥락에 의해 불교를 ‘석씨풍교’라 불렀다. 불교유입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신하들 앞에서 조카 이차돈의 목을 치면서까지 불교를 받아들인 제23대왕은 법흥왕이었다. ‘법’은 불교를 뜻하고 ‘흥’은 흥기를 의미하는데 법흥왕이란 곧 불교를 흥기시키는 왕이라는 뜻에 의해 지어진 호칭이었다. 제24대왕을 진흥왕이라 불렀는데 역시 불교를 진흥시킨다는 뜻에서 얻은 호칭이었다. 그런데 진흥왕은 비록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불교를 진흥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무기는 역시 불교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앞세워야 한다(興邦國, 須先風月道)”고 밀어붙였다. 아울러 본래 원화(源花)를 화랑으로 변모시키고 화랑도를 일으키는 것을 국가 으뜸의 대사로 추진했다. 화랑도는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 원화도(源花徒), 풍류도(風流徒)라고도 부른다. 화랑도 명부를 ‘풍류황권’이라 했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화랑도는 신라고유풍교에서 유래되었고 아울러 신라풍교발전을 절정에로 이끌어 신라인의 정신지주가 되었고 신라인의 혼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화랑도에 대해 할 말이 태산 같이 많지만 생략하고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신채호의 의미 깊은 지적을 빌어 마무리 하겠다. “화랑을 모르고 조선을 말하는 것은 마치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운운하는 것과 같이 우둔하다. 조선을 조선답게 만든 것은 화랑이다. 유감스런 것은 화랑의 유풍이 미연하게나마 남아 있었는데 국풍파인 묘청집단을 숭송파(崇宋派)인 김부식 집단이 소탕해버림에 따라 조선은 한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필자는 단재·신채호의 지적을 동의하면서 약간 견해를 달리하고 싶다. 즉 단재·신채호의 말에 따르면 고려 중기부터 조선의 혼이었던 화랑유풍이 자취를 감추고 한문화일변도로 흘러왔기 때문에 조선다운문화가 소실되었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임어당은 그의 저서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 유교를 숭상했지만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받들어왔다.”고 지적하였다.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문화라 하지만 인간은 문화보다 본능에 의해 세상을 살아가는 비중이 더 크다. 한 례로 유교는 강력한 사회질서를 구축하기를 강조해왔으나 중국인은 아직도 공공질서의식이 매우 빈약한 이유가 바로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함)’을 주창하는 도교의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도리로 반도에서 비록 고려 중기부터 한문화에 빠져 왔고 조선조 518년 동안 유교를 뼈가 절도록 받아들였으나 반도인의 인간타입은 반도고유문화에서 형성된 ‘멋’ ‘맛’ ‘판’이다. 대저 ‘멋’ ‘맛’ ‘판’이란 무엇인가? ‘멋’ ‘맛’ ‘판’은 풍류도의 정수이며 쉽게 말하자면 신라풍교에서 유래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 말하자면 신라풍교는 중국과 일본 및 중국동북쪽의 많은 민족과 다른 인간타입의 문화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멋’ ‘맛’ ‘판’이다. 아울러 ‘멋’ ‘맛’ ‘판’은 중국과 일본 및 동북쪽의 많은 민족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반도인만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잡아왔다. 필자는 이 세상에 없는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바람문화’이다. ‘바람문화’의 뿌리는 신라풍교이며 화랑을 거쳐 반도인만의 소유하고 있는 문화, 즉 ‘멋’ ‘맛’ ‘판’의 문화로 승화되었고 배달민족은 ‘선사(仙史)’를 창조해왔다. 전체우리민족은 세상에서 가장 ‘멋’을 좋아하고 아울러 체면문화를 비롯해 우리민족성격 90%이상이 ‘멋’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맛’은 단순히 음식 맛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삶 자체가 ‘맛’이다. ‘판’은 춤판, 노래판, 도박판, 술판 심지어 개판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은 일상생활의 다수 행위가 ‘판’과 관련이 있다. ‘멋’ ‘맛’ ‘판’은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는 중국어나 일본어로 번역이 되지 않는다. 왜일까? 우리민족만이 창조해낸 문화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류의 문화뿌리를 ‘멋’ ‘맛’ ‘판’으로 풀어낸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화제를 돌려서 신라문화가 어떻게 우리전체 민족의 문화로 되었는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답할 차례가 왔다. 답에 앞서 이런 가설을 해보자. 삼국 후기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가장 강했기 때문에 고구려가 통일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더라면 오늘날 반도의 민족문화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 한때 절반중국을 통치했던 거란족은 자취를 감췄고 268년이나 중국을 지배했던 만주족은 자체문자와 언어 및 풍속, 민속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이 고구려도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로서 당시 고구려는 중원에 문화적으로 동화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풍교를 비롯해 자체문화를 강력하게 지켜왔던 신라는 통일신라를 거쳐 고구려유민과 백제유민에 이르기까지 ‘바람문화’를 전파시키고 하나의 민족문화로 자리매김 시켜왔다. 중국문화가 이미 선진시대에 완성되었다면 반도문화는 통일신라를 거쳐 완성되었다. 이 대목에 이르러 밝힐 것은 필자가 지난 10년 동안 한반도문화를 연구해온 결과 고구려 문화는 부분적으로 민속으로 남아 내려온 것은 있으나 전체반도를 아우를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는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라문화는 현재까지도 반도인의 주체문화로 골격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유력한 증거를 더 제시하자면 현재 반도인이든 해외동포든 우리전체민족이 ‘멋’ ‘맛’ ‘판’의 문화가 강하고 남과 북 해외동포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문화차이는 존재하고 있으나 총체적인 인간타입은 거기서 그것으로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언어가 그 민족의 역사를 말해주듯 광복 후 한국가요에 ‘바람’이란 어휘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고 우리전체 민족은 아직도 일상생활에서 ‘바람’이란 어휘를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사실이 유력한 증거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역사흐름을 무시하고 다만 신라가 당이라는 강대한 외세를 끌어들인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옳은 역사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삼국 시기는 서로 자기네 이익을 위해 타국과 손을 잡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특히 그 시대는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이 거의 전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거란에는 한족이 재상을 맡은 시기도 있었고 발해 백성은 말갈과 거란족이 절대다수였는데 고구려 출신 대조영이 왕을 해먹었지 않았는가! 민족이란 개념은 100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고 오늘과 같은 민족의식은 반세기역사로 보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시기를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의 시각으로 보면 절대 안 된다. 신라가 당과의 연합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당은 대동강을 경계로 그 이북을 당에 귀속시키고 계림(오늘의 경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설인귀가 도독을 맡았다. 이렇게 되어 신라는 전쟁의 대가를 보상받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을 신라가 아니었다. 고구려유민과 백제유민과 손잡고 당과 맞서 싸웠다. 근 20년의 ‘독립운동’을 거쳐 끝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통일신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날도 국제관계는 서로간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이 빈번하다. ‘영원한 친구가 없고 영원한 이익만 있다(沒有永遠的朋友, 只有永恒的利益)’는 처칠의 말이 만고의 진리이다. 누구와 손잡던 그것은 당시 그 나라의 이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오늘날의 민족의식으로 그때 그 시절에 발생했던 사건을 재단할 일이 아니다. 다만 누가 통일의 주역이 되었든 간에 우리가 연구해야 과제는 민족문화의 연속성과 지속성이고 아울러 그 문화의 명맥으로 민족이 민족다운 인간타입을 유지해왔고 앞으로도 유지해 나아가는 것이 생존의 길이다. 동포문학 창간호        
60    중국인 폐쇄의식은 담장문화 때문 댓글:  조회:6228  추천:3  2013-06-03
중국인 폐쇄의식은 담장문화 때문   ‘시가지’를 뜻하는 말로 한국에서는 도시(都市)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성시(城市)라고 이름 한다. 도시와 성시가 얼핏 보면 같은 의미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문화적으로 엄밀하게 따지면 많이 다르다. 도시는 도(都)와 시로 이뤄진 것이고, 성시는 성(城)과 시(市)가 합쳐진 것이다. 도는 무엇이고 성은 무엇이며 시 또한 무엇인가? 먼저 성부터 살펴보자. 성을 논의하려면 북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다. 왜냐하면 북경이 가장 대표적인 성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북경의 고칭은 ‘계(薊)’, ‘계성(薊城)’, ‘연경(燕京)’, ‘유주(幽州)’, ‘금중도(金中都)’, ‘원대도(元大都)’ 등등이며 역사의 시기에 따라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대하고 웅장한 모습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지금 남아 있는 북경성(北京城)의 모습은 명·청 시대 유물이고 그마저도 1949년 이후 많은 성벽이 철거된 상태이지만 성에 대한 역사는 살아 있다. 명·청 시대 북경성은 궁성(宮城), 황성(皇城), 경성(京城) 등 세 겹의 성으로 구성된 ‘성지성(城之城)’이다. 당의 장안도 북경처럼 세 겹의 성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점이라면 궁성이 황성의 가운데 있은 것이 아니라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궁성(宮城)은 황성의 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황제와 그의 가족이 거주하고 황제와 황족을 시중드는 환관과 궁녀와 호위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자금성(紫金城)이 곧 궁성이다. 자금성의 성벽(城牆)은 둘레길이가 6리(3키로 미터)이다. 6리라는 수치만 보아도 자금성의 규모가 얼마나 큰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금성은 4개의 문(오문:午門, 신무문:神武門, 동화문:東華門, 서화문:西華門)이 있다. 황성은 성벽의 둘레길이가 18리(9키로 미터)이며 역시 4개의 문(천안문:天安門, 지안문:地安門, 동안문:東安門, 서안문:西安門)이 있다. 황성의 외곽이 경성이다. 경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눈다. 내성 성벽 둘레길이가 46리(23키로 미터)이며 9개의 문이 있고 그 정양문(大前門)이 가장 웅장하다. 외성은 1553년 건립 시에 내성을 둘러싸게끔 설계하였는데 자금이 부족하여 남성(南城)밖에 건설하지 못했고 둘레길이가 28키로 미터이다. 경성은 황제가 거주하는 정치 중심 수부라는 뜻이며 궁성과 내성·외성을 포함한 총칭이며 凸자형으로 되어 있다. 중화민국이 명나라 초기 수도인 남경에 자리 잡고 나서 북경을 북평(북평)이라 불렀던 것은 ‘경(京)’은 천하에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맥락에 의해 격하시킨 거에서 유래되었던 것이었다. 성은 담장을 의미하는데 성벽 높이에 의해 신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 의해 자금성의 성벽이 가장 높고 황성의 성벽 및 경성 외곽 성벽이 차등으로 낮아지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 의해 아문의 성벽도 급에 따라 높낮음이 결정되고 주택 담장도 신분에 따라 높낮음이 결정된다. 이는 신분이 높고 고귀할수록 평민과 더 멀리 거리를 두는 하나의 징표였다. 당연히 황제가 가장 신분이 높고 고귀하니 거주하는 궁성의 담장 높이가 가장 높았던 것이다. 성벽이 많으면 그에 따라 문이 많아진다. 북경이 성지성이기 때문에 문도 굉장히 많다. 문이 어찌나 많은지 북경시 주요간선도로는 절대다수가 문으로 명명되어 있다. 예하면 전문(前門), 복흥문(復興門), 건국문(建國門), 덕승문(德勝門) 등등의 수많은 문에 내외대가(內外大街) 혹은 동서남북의 위치에 따라 대가(大街)를 붙여 시가지 간선도로를 이름 지었다. 내가 1990년대 북경에 많이 다녔는데 길을 물으면 당지 사람들은 거의 다 00문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또 당지 사람들과 약속하면 거의 모두 00문으로 오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북경의 성벽과 성문은 북경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다. 실제로 스웨덴 학자 희인룡(중국명)은 북경의 역사와 문화는 성벽과 성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북경의 성벽과 성문》이란 저서를 출간하였다. 북경의 성문은 과거 역사문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에서도 굉장한 의미를 지녀왔다. 현대 중국인은 는 노래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현대 중국인은 북경에 가면 반드시 천안문구경을 빼놓지 않는다. 또 과거 황제가 외출할 때 사용했던 정양문(大前門)도 현대 중국인에게 매우 친숙했다. 바로 ‘대전문(大前門)표’ 담배 때문이었다. 아무튼 천안문과 대전문은 현대 중국인이 북경을 알게 되는 ‘키잡이’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는 도(都)의 의미를 살펴보자. 고대중국의 성은 주요하게 왕조국도(王朝國都), 제후봉지, 대부채읍(大夫采邑)의 중심 구역이었고 당연히 그들의 지위가 같을 수가 없었다. 《좌전》에 이르기를, “천자지역은 사방 9리, 제후는 7리, 후백(侯伯)은 5리, 자남(子男)은 3리이다.” 면적과 규모만 다를 뿐만 아니라 부르는 명칭도 존비에 따라 달랐다. 제후의 봉지를 도(都), 대부의 봉지를 읍(邑)이라 하고 도의 중에서 천자가 거주하는 곳을 경(京)이라 한다. 도는 크고 읍은 작으며 읍이 커지면 도가 된다. 민간에서는 크고 작은 성을 통칭하여 도읍(都邑)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도는 또 국(國)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국도(國都)라는 말은 있어도 국읍(國邑)이란 말은 없다. 하지만 읍의 의미는 작은 것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국가, 성시, 향촌, 이 세 가지 사구(社區:사회구역)를 모두 읍이라 부를 수 있었다. 주나라 때 800여 개의 제후국이 있었으니 그 규모를 따질 때 국보다 읍이 더 타당했을지도 모른다. 읍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글자 풀이에 따르면 위는 입 구(口)이고 아래 파(巴)는 인간이 변형된 모습이다. 사람(人)이 있고 구(口)가 있는 읍(邑)은 당연히 사구에 속할 것이다. 또 다른 해석에 의하면 읍(邑)자 위 구(口)는 인간의 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 울타리를 둘러쌓아놓은 토성(圍墻), 일정한 범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나는 후자의 해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중국인은 울타리 의식이 강하고 이로서 외부, 외지,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폐쇄적인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市)를 분석해보자. 중국에서는 도시와 농촌을 성과 향이라 부른다. 고대중국에서는 이 성과 향의 가운데 자리한 곳이 바로 시라 불렀다. 시(市)는 사람들이 모여 매매교역을 진행한 곳이었다. 즉 성 안의 아무리 고귀한 신분의 인간도 알곡을 먹고 야채를 먹어야 하고 과일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는데 그 내원은 향촌에서 온다. 아울러 성 안의 고귀한 인간들이 향촌에 가서 직접 구입할 수는 없고 하여 신분이 천한 촌민들이 성과 가까운 곳에서 매매교역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옛날 3일장, 5일장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성 안의 인구가 나날이 증가하고 알곡과 야채 및 과일에 대한 수요량이 증가하여 3일장과 5일장으로는 매매교역이 턱 없이 부족하여 주요 명절을 제외하고는 상시로 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또 가축에 의한 육류와 해산물 교역도 이뤄지고 땔감도 교역하고 옷가지 및 수많은 생활필수품을 교역해하기 때문에 상시 시장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점차 음식점도 생겨나고 기생집도 생겨나고 책방도 있어야 하는 등 문명의 발전과 발달에 의해 점차 시장이 활성화됨에 따라 시가 성과 가까이 옮겨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과 시가 하나가 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성과 시가 하나가 되었으나 여전히 귀천이 존재하고 이로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성은 고귀하고 시는 비천하다. 그 징표로서 성의 성벽은 높은데 비해 시를 둘러싼 토성은 낮았다. 그러므로 성벽은 장(墻)이라 부른데 반해 시를 둘러싼 토성은 담(垣)이라 불렀다. 한국인이 토성을 담장이라 부르는 것이 이와 같이 낮은 토성의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시 구역에서 장사하는 상인이 부자가 되면 주택을 호화롭게 짓고 담장을 높이 쌓는다. 그들은 비록 정치적인 신분은 없으나 경제적으로 부를 나타내기 위해 시민들과 격리하는 심리가 강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일반 소상인들은 주택에 간혹 담장을 쌓아도 낮게 하거나 보통 담장이 아니라 울바자를 쳐놓았다. 상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담장이 없다. 왜냐하면 가게가 시민들에게 격리감을 주면 장사가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도리로 향촌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호족이나 지주들은 주택 주위에 높은 담장을 쌓아 신분과 부를 과시하였다. 이에 비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평민들은 주택에 담장이 없었고 기껏해야 울바자를 쳐놓았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성, 성벽, 담장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 바깥세상과 이질적인 존재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그 이질적인 존재가 바로 신분이고 이로서 신분사회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또 성에 살고 있는 높은 신분의 인간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겨난 것이 시(市)였기 때문에 성은 고귀하고 시는 비천했다. 시정잡배라는 말은 있어도 성도(城都)잡배라는 말이 없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대중국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다르게 먼저 성이 생기고 성 안의 인간의 생계를 위해 시가 생겨나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 성과 시가 하나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극히 짧은 상해나 20년의 역사밖에 안 되는 심천(深圳)는 성이 아닌 순수한 시이다. 그러므로 성의 대표적인 북경과 시의 대표적인 상해 두 지역 시민들의 인생관, 가치관을 비롯해 문화가 매우 이질적이다(북경인과 상해인의 비교는 별도의 글로 발표하겠다). 고대중국은 물론이고 지금도 행정구역으로 진(鎭)이 있다. 진은 고대중국에서 군사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성은 정치 중심지였고 진은 군사 중심지였다. 무한(武漢)은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陽)으로 이뤄진 대도시이지만 습관적으로 무한삼진(武漢三鎭)이라 부른다. 고대의 무한은 군사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중국정부가 농촌과 도시의 최소 행정구획을 ‘사회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왜 이렇게 고쳤는지? 나는 실상을 잘 모르겠다. 다만 여기서 사(社)의 유래를 짚어보고 아울러 중국의 많은 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허신의 《설문해자》에 보면 ‘社’를 “흙을 뫼어놓아 사가 되었다(堆土爲社).”고 해석했다. 이 해석이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여기에 깃든 함의는 심오하다. 다시 말해 내가 중국 고향 동불사에 가서 흙을 쌓아놓기만 하면 사가 되는 것이 아니란 의미이다. 인류가 씨족사회에 진입해서 대지의 일정구역을 자기네 삶의 터전으로 간주했는데 그 일정구역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타씨족에게 알릴 징표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최초에 씨족이 차지하고 있는 땅 한 곳을 선택해 흙을 뫼어놓는 것으로 징표로 삶았다. 그러다가 단순히 흙을 쌓아놓는 것으로 씨족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부족하게 인식되어 쌓아놓은 흙 위에 나뭇가지를 꼽아놓기도 하고 또 일정 세월이 흘러 집을 짓고(사당) 씨족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한 개 씨족의 족장은 이 ‘사’ 내에서 부족민을 거느리고 제사를 맡고 농사를 책임지고, 부족민은 족장의 인솔 하에 ‘사’에 모여 제사를 올리고 농사를 짓는다. 대체적으로 한 개 부족이 공동한 ‘사’ 내에서 같은 언어, 종교, 생활관습을 갖고 공동한 생활을 영위한다. ‘사회(社會)’란 부족민들이 ‘사’에 모여 공동생활을 영위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씨족사회에서 생겨난 사(社)의 문화가 국가시대, 정확히 말해서 왕조시대에 이르러 성(城)의 문화로 진화되었던 것이다. 왕조시대 왕도(王都) 뿐만 아니라 하나라 1만 개에 달하는 제후국, 상나라 3천 개에 이르는 제후국, 주나라 800여 개의 제후국의 수부가 전부 성(城)이었고 제국시대 23개 왕조 및 천도사건까지 합쳐 수많은 성이 있었다. 중국에 왜 고적(古迹)이 있는 도시가 그토록 많은지? 성의 문화를 이해하면 답이 보인다. 역사가 유구하고 분포범위가 굉장히 넓은 성의 문화(담장문화)는 찬란한 중화문명을 창조해낸 동시에 내와 외, 자와 타를 구분 짓는 문화로 자리매김 되었고 아울러 중국인으로 하여금 폐쇄의식을 갖게 만든 결과를 빚어냈다. 중국 절강성의 00지역의 이야기이다. 불과 백 리 사이 두고 두 마을이 있는데 A곳의 사람들은 짐을 나르는 멜대(扁担:한국인은 지게로 물건을 나르고 중국인은 멜대로 물건을 나른다) 자료로 무게가 가볍고 단단하며 탄성이 강한 대나무를 사용하는데 비해 B곳의 사람들은 멜대 자료로 무겁고 탄성이 약한 버드나무를 사용한다. 중국남방에는 대나무가 흔하다. 그러니까 대나무를 구하지 못해 불편한 버드나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한테 영문을 물으면 대답이 아주 의외이다. “조상 때부터 버드나무를 사용해왔으니 우리도 이렇게 할 수밖에.”  
59    남북통일과 고려연방제논고 댓글:  조회:7005  추천:27  2013-05-09
남북통일과 고려연방제논고   1990년 내가 여행업에 종사할 때 한국관광객을 모시고 백두산관광을 온 한국 00여행사 사장이 “참 세월이 좋아졌습니다. 불과 이삼년 전까지 누가 중국으로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겠어요. 이런 추세라면 남북통일도 10년이면 가능하지 않겠어요.”라고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때는 절대다수 한국인이 남북통일에 대해 낙관적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현재 그때 상황에 비해 남북관계는 악화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으로서는 남북통일이 언제 실현될 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언제가 되던 남북통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통일은 분열보다 더 말할 것 없이 좋으니까. 문제는 한반도의 남북통일은 동서독일통일보다 힘들고 어려운 요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동서통일은 흡수통일이었지만 한반도의 남북통일은 흡수통일이 어렵다는 것이다. 흡수통일이 아니라면 대등한 위치에서 남북이 서로 자기네 수지(이익)가 맞아야 목적이 달성될 것이니 이에 엄청난 어려움이 닥칠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물론 서로 간에 많은 양보가 없이는 절대 통일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으나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이론보다 실천이 수백 배 수천 배 더 어려울 것이다. 국호부터 문제이다. 남측은 ‘대한민국’을 주장할 것이고 북측은 ‘조선’을 내세울 것이다. 이런 논쟁을 막고자 김일성 주석이 1974년 ‘고려연방제’란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를 영어권에서 ‘KOREA’로 부르는 것은 고려에서 유래된 것이니 문제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연방제(聯邦制)’에 대해선 논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방’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지? 그 유래는 어떻게 온 것인지를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 고려연방에서의 ‘방(邦)’은 방국(邦國)이다. 방국의 유래는 중국 주나라시기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하나라에도 방국이 있었고 은나라에도 방국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상황에 관해 고증이 어려운데 비해 주나라 방국은 하나의 정치제도로 완벽하게 자리매김하였고 고증도 충분히 되고 있기 때문에 주나라 방국을 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3천 년 전 주 무왕은 천하를 얻게 되자 방국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본래 상의 3천여 개에 달하는 부족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방국제도를 실시하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방국제도란 도대체 무엇일까? 주왕은 수하 제후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걸쳐 빼앗은 이민족의 땅과 본래 주에 속한 땅을 재분배하게 되었고 분배를 통해 새로운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토지재분배 방식은 다음과 같다. 가까운 형제와 친인척들에게 좋은 땅을 분배하고 전쟁에서 공로의 대소에 따라 차등으로 전국의 토지를 분배하였다. 토지를 분배하는 동시에 그 토지를 경작하고 지켜낼 책임자를 세웠다. 역사에서는 토지를 분배한 것을 ‘봉(封)’이라 하고 책임자를 제후라 부르는데 제후를 세우는 것을 ‘건(建)’이라 하며 봉건이란 이렇게 생겨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봉건이란 어휘는 명사가 아니라 ‘봉토건국’의 뜻으로 동사이다. 주왕조는 자신을 천하로 여기고 각 제후국을 통해 천하를 다스리는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래서 각 제후국 사이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국제관계였다. 문제는 800여 개에 달하는 제후국을 하나의 온전한 국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국으로 보자면 규모나 범위가 부족하고 부족국가로 보자 하니 하상시대 부족국가보다 범위가 큰 것이 사실이었다. 실질적인 딜레마였다. 국보다 작고 부족국가보다 큰 것이 방(邦)이다. 이로서 800여 개의 제후국을 방국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주나라 봉건제도를 방국제도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 방국제도는 폐단이 많았다. 제후, 대부, 사가 소유한 재산은 전부 사유재산이었고 천자는 ‘경영’에 개입하지 못한다. 천자의 의무는 세금을 거둬들이고 말썽이 있으면 때로 훈계정도일 뿐이었다. 천자가 직접적인 ‘경영권’이 없으니 제후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고 따라서 대부가 제후를 능가하는 사례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천자는 명분만 갖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허수아비였다. 그래서 각 제후국, 즉 각 방국 사이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되었고 천자가 완전히 통제권을 잃어 천하가 혼란에 빠졌다. 그 시기를 역사에서는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각 방국 사이 패권다툼은 점차 서로 너 죽고 나 사는 ‘겸병(兼倂)’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전국시대라 부른다. 800여 개의 방국이 전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진(秦)ㆍ초(楚)ㆍ연(燕)ㆍ제(齐)ㆍ조(赵)ㆍ위(魏)ㆍ한(韩) 등 칠웅이 남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진이 기원전 221년 육국을 멸하고 천하통일을 이룬다. 진은 상앙의 변법(영주제를 폐지하고 지주제를 실시한다. 세습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실시한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다. 정전제를 폐지하고 토지확대개간을 장려한다.)을 수용한 덕분에 부국강병을 이뤘고 영정시대에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며 중국역사상 봉건으로 이뤄진 방국, 즉 분권시대를 마감하고 중앙통일집권제인 제국시대에 진입한다. 방국이란 개념을 중국역사를 통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젠 한반도역사에서의 방국을 알아볼 차례이다. 인류역사는 원시공동체로부터 가족사회, 가족사회로부터 씨족사회, 씨족사회로부터 부족사회, 부족사회로부터 국에 이르렀다. 한반도 역사도 이와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왔다. 그런데 한반도역사에서는 중국의 서주·동주시기와 같은 봉건으로 이뤄진 방국시대를 찾아보기 어렵다. 4346년 전 단군이 조선을 세웠고 기원전 190년 전후하여 위만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고 북쪽에는 부여, 예, 맥, 저 등 부족국가, 남쪽은 변한, 진한, 마한의 부족국가들이 병립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부족국가들은 중국의 주나라처럼 하나의 왕의 지배하에 귀속되었던 것이 아니라 모래알처럼 흩어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방국’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기원전 57년 신라의 건국, 기원전 37년 고구려의 건립, 기원전 18년 백제의 건립에 의해 삼국시대에 진입하였는데 삼국시대 역시 방국시대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기원 661년 백제의 멸망,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통일신라시대를 열었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한반도역사에 방국이 아예 없었던 것일까? 있기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 방국이 도대체 어떻게 유래되었고 어떤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을까? 고증이 매우 어렵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같은 대형 서점에 가서 이 잡듯 뒤져보아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나의 방식대로 터득한 바를 여기서 풀 수밖에 없다는 점 미리 밝혀둔다. 김일연의 《삼국유사》진흥왕편에 방국이 언급된 대목이 있다. “제24대 진흥왕(재위 534~576)은 천성이 풍미하다. 그는 나라(방국)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먼저 풍월도를 앞세워야 한다(興邦國, 須先風月道)고 호소하였다.” 여기에 등장된 방국이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역사를 살펴보면 방국은 반드시 귀속이 있어야 한다. 진흥왕이 신라를 방국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신라는 어디에 귀속된 방국이란 말인가? 신라는 육로로는 고구려, 해로로는 백제가 버티고 있어 6세기 초까지 중원조정과의 독립적인 외교가 막혀 있었다. 이런 폐쇄적인 국면을 제24대 진흥왕이 타개하였다. 기원 564년 진흥왕이 처음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중국북방왕조인 북제(北齊)에 조공하였다. 이듬해 북제 무성제가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신라는 이렇게 당시 동아세아 국제질서이자 관례로 되는 조공책봉 ‘예의’에 편입되었다. 조공책봉 ‘예의’에 편입된 주변국들은 중원조정을 중심으로 하나의 방국이 아닌 방국으로 되었던 것이다. 물론 주나라 시기 방국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역사적인 맥락에 의해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리고 신라가 방국이었다면 고구려와 백제도 중원정권과 조공책봉의 예의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방국이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보다 일찍이 조공책봉 예의에 편입되고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원을 쫓았다. 신라는 비록 진흥왕이 동아세아국제질서에 편입되었으나 중원문화를 쫓는 것이 자국의 실제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는 건국하여서부터 고구려와 백제와 달리 정치적으로 대제국인 한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라는 22대까지 왕의 호칭을 중원에 따르지 않았다. 1대 박혁거세는 거서간(세상을 밝게 비춘다), 2대 남해는 차차웅(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사장, 무당), 3대 유리부터 16대 홀해까지 이사금(연장자, 이빨이 드세다 뜻), 17대 내물부터 22대 지증까지 마립간(우두머리 중 우두머리), 23대 법흥부터 56대 경순까지 왕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23대왕은 불교를 흥기시킨다는 뜻으로 법흥왕이라 불렀고 24대왕은 불교를 진흥시킨다는 뜻으로 진흥왕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러고 보면 중국식을 따른 것은 576년 등극한 진지왕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는 문화적으로도 고구려와 백제와 크게 달랐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에 분주했지만 신라는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풍교’라 하고 불교를 불교라 부르지 않고 ‘석씨풍교’할 만큼 풍교에 심취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라는 자체문화인 풍교를 매우 중시하였고 방국이 된 후 중원문화를 따르자니 머슴이 주인의 비단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맞지를 않아 역시 토착문화인 풍월도를 주체문화로 밀고 나아갈 것을 진흥왕이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라는 비록 형식상 중원정권의 방국으로 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방국 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그 후 통일시대에 들어서 신라는 당과 여전히 조공책봉관계에 있었으나 삼국시기와 다르게 방국의 의미가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본문의 주제에 다시 돌아와 논의해보자. 김일성 주석이 제안한 고려연방은 남측 대한민국과 북측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각각 두 개의 방국으로 보고 하나의 연합정부를 세우자는 것인데 과연 타당한지? 문제가 없는 것인지?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검토해보는 것이 무척 흥미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남과 북을 두 개의 방국으로 인정한다면 일이 굉장히 복잡해질 소지가 크다. 방국은 정치, 문화, 경제 등 제 분야에서 독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연합정부가 어떤 방법과 방식으로 통제가 가능한지? 혹시 각각 서로 현행체제를 유지하면서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실시하자는 것인지? 물론 이를 바라고 통일을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통일은 흡수통일도 아니고 일국양제도 아니고 고려연방제도 아닌 서로 간의 합의에 의해 하나의 완정한 통일국가를 이룩하는 것이다. 본문은 연방제에 대한 개념논고를 중점으로 전개하였을 뿐 고려연방제의 이와 폐에 대해 치중하여 논고를 전개하지 않았다. 나는 정치에 문외한이므로 연방제논고에 관심이 있는 지자들에게 토론의 참여를 발원한다.   후설 앞서 발표한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는가?’, ‘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의 두 편의 글은 필자가 현재 집필하고 있는 의 제목으로 된 중국역사문화를 해부하는 전체 작품 중 두개의 소제목이다. 의 작품은 중국역사문화의 흐름(流)을 짚는 동시에 ‘왜’라는 뿌리(源)를 밝히는 작업이다. 과거 10여 년 동안 꾸준한 준비과정을 거쳐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流’만 짚는 것은 에세이이고 ‘源’을 밝히는 것은 학문이다. 이미 18만 자 썼고 앞으로 5만 자 더 써야하는 시점에 이르러 한두 편을 미리 발표하여 독자들의 테스트를 받고 싶었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다행이다. 필자는 토법연강에 의해 취미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반응이 나에겐 크나큰 용기가 되었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힘을 얻어 기쁘다. 그리고 존경하는 독자께서 저자로서 독자들과 함께 깊이 있는 토론에 참여하기를 바라는데 죄송하지만 필자는 종래로 타인의 글이든 본인의 글이든 댓글을 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소신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독자들과 반드시 토론할 일이 있다면 별도의 문장을 지어 발표하는 것은 좋지만 일일이 반응하지는 않는다. 다만 존경하는 독자께서 필자가 겸허하게 테스트를 받고 있고 이를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하기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시기를 바란다. 이 기회를 빌어 저의 졸저를 관심 있게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58    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 댓글:  조회:7797  추천:44  2013-05-06
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   만약 대청제국이 조금만 융통성이 있었더라면 아편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8국 연합국의 침략도 없었을 것이며, 원명원이 약탈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러나 역사는 가설을 허락하지 않는다. 중국운명은 중국인이 스스로 빚어낸 결과였다. 중국, 중국이란 개념은 이렇다. 주나라 초기 중국이란 국호가 잠깐 등장했다가 그 후 청나라 말기까지 줄곧 중국, 중국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왕조호칭을 나라호칭으로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 서양이 중국을 침략하고 보니 역사와 문화가 유구하고 과거 지구상에서 가장 찬란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데서 중국, 중국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면서 중국, 중국인이란 호칭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때론 이민족이 통치하던 위진·남북조시대와 몽골족이 통치하던 원나라 및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나라시기 모두 자신들이 중국을 차지하고 있다는 관념이 강했다. 중국이란 말 그 대로 세게 중심이라는 뜻인데 본래 “중원을 차지하면 천하를 얻는다.”는 역사적인 맥락에 의해 어느 역사조대에서든 자신을 중국이라 여겼던 건만은 사실이었다. 어찌되었든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중심 국가, 또 문화가 가장 앞서 있었기 때문에 주변 이민족을 모두 오랑캐로 취급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중원을 기준으로 동쪽 이민족을 ‘동이(東夷)’, 남쪽 이민족을 ‘남만(南蠻)’, 서쪽 이민족을 ‘서융(西戎)’, 북쪽 이민족을 ‘북적(北狄)’이라 불렀다. 주나라 시기부터 중원의 천자를 중심으로 주변이민족과의 외교관계는 조공과 책봉의 패턴으로 굳어져왔다. 즉 주변 이민족은 중원조정에 특산물을 바치고 중원조정은 주변 이민족의 통치자를 00상장군, 00대장군, 00중장군, 00소장군 혹은 00왕의 식으로 책봉하였다. 중원조정은 주변 이민족과 단순한 조공과 책봉의 외교관계를 뛰어넘어 대국으로서의 위엄을 주변국에 보여주기도 하였다. 수양제(隋煬帝)는 정월 대보름이 오면 주변국의 사신들을 불러들여 대형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의 규모는 악사만 8천 명, 횃불을 든 자가 만여 명이었다. 음악소리가 사방 십리에 울려 퍼졌고 불빛이 사방 십리를 비추었다고 한다. 연회 기타 상황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연회에 참석했던 외국 사신들은 아마 대제국의 스케일에 기가 죽어 있었을 것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신라 및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 유학생이 2만여 명이나 장안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주변국 유학생들이 당나라에 가서 배운 학문은 주로 사서오경, 노자철학, 주역 등이었으며 과목이 단조로웠다. 지금처럼 학과가 세분화된 시대라라고 가정하면 유학생의 숫자는 아마 20만 명도 넘었을 것이다. 당시는 현시대처럼 국가 간 서로 유학생을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서 일방적으로 당나라로 몰려들기만 하였다. 당나라시기 때론 주변국에 유명 인사를 파견하여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일례로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에 도사(導師)를 파견하여 오랜 시간을 머물면서 특강을 진행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의 실세였던 막리지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을 올렸다. “폐하, 가마솥의 받침대가 셋이듯 나라를 받치는 기둥도 세 개여야 마땅하오나 우리 고구려는 유교와 불교는 있으나 도교가 없어 기둥이 두 개이니 온전치 못하옵니다. 그래서 당에 요청하여 도사를 모셔오는 것이 지당할 것이옵니다.” 허수아비인 보장왕은 실세 막리지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윤허하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도사를 파견하고 도관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도사의 강의를 보장왕이 직접 경청하였다고 적고 있다. 주변국 유학생이 장안에 밀물처럼 몰려들었고 또 도사를 파견하여 자기네 문화를 주변국에 전수하고 있었으니 중화사상의 우월성에 들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청나라는 비록 만주족이 통치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한문화 중심 국가였으며 여전히 한·당·송·명의 중화사상의 우월성을 물려받았다. 서구는 그리스 도시국가시대부터 무역을 중시해왔다. 그들이 무역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그리스는 땅이 척박하여 농경에 의해 생계가 곤란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무역에 의지하여 생존의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무역은 전체 서구에 전파되었고 따라서 서구의 무역은 점차 자유무역, 평등무역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은 한나라시기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해외(중국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해외라고 표현함) 국가들과 무역을 많이 해왔으나 관방주도의 무역이었을 뿐 자유무역, 평등무역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영국이 중국과의 무역 길을 열려고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영국의 왕은 “하느님이 중국 인구를 4억으로 만든 것은 우리 앵글로·색슨 민족에게 무역을 하여 부를 쌓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기뻐했다. 당시 영국의 복장 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중국을 고찰하고 나서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중국인은 수의(睡衣 : 잠옷)을 입지 않고 있다. 만약 중국인에게 수의를 입는 법을 가르치고 일인당 한 벌씩만 사도 4억 벌을 팔 수 있지 않는가! 당장 인도의 수의옷감을 독점할 것이다.”라고 몹시 들떠 있었다. 마치 한국인이 수년 전에 중국에 진출하면서 “13억 인구의 중국시장은 우리한테 기회이다. 일인당 칫솔 하나씩 사도 13억 개의 칫솔을 팔 수 있으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도 돈을 산더미로 벌어들일 수 있다.”는 자만에 찬 어리석은 판단과도 똑 같았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200년 전 영국인이 겪었던 착오적 판단을 한국인이 되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청나라 무역은 역시 관방의 주도로 통제하고 있었다. 영국 상인들이 청나라와 무역을 하려면 황제의 윤허를 받아야했다. 그래서 황제를 찾았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삼구구배(三叩九拜)’였다. 영국인은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예의가 없다. 그것도 한 번 아니고 세 번씩이나 머리를 조아리다니! 게다가 아홉 번씩이나 인사를 올린다는 것은 영국인에게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 한심하게 느껴진 것은 무역은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뭔 뚱딴지같이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아홉 번 인사를 올리다니 말이다. 영국 상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기 서양은 바티칸의 교황이 천하 중심이었듯이 중국은 중국의 천자가 세계 중심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영국 상인이 결국 중국인의 중화사상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 상인은 절대 ‘삼구구배’를 올릴 수 없다고 뻗히고 중국 관리들은 만약 ‘삼구구배’를 거절하면 당신들이 바라는 무역은 죽었다 깨도 성사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양쪽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결국 자유와 평등을 토대로 하는 ‘국제관례’의 정상 무역은 깨지고 남은 것은 영국인이 무력으로 중국 문을 여는 것이었다. 이렇듯 청나라 말기의 중국이 결국 중화사상 때문에 당하지 않을 침략을 당했고 결과는 참담하게 패배하여 반식민지국가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은 정확히 말하면 통상전쟁이지 아편전쟁이 아니다. 통상전쟁을 아편전쟁이라 표현한 것은 당시 영국의회 전쟁결의안에서 전쟁반대파들(262표)이 전쟁옹호론자들(271표)을 공격하며 비난조로 들먹인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남경조약을 살펴보면 오구(五口)통상, 홍콩 할양, 관세체결, 자유무역 등 거의가 경제에 관한 것들이다. 통상전쟁이든 아편전쟁이든 중국이 패배한 것은 서구의 선진과학기술과 민주정치에 무너졌고 그 전쟁을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중국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당시 조정에 여전히 예부(禮部)가 존재해 있었고 여전히 중화사상을 토대로 형성된 동아세아 조공책봉의 외교질서를 서구인에게 적용하려고 들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외교부에서 담당하는 국제관계 사무도 예부에서 취급하였기 때문에 나라와 나라 관의 관계는 평등관계가 아니라 여전히 중화사상을 토대로 형성된 외교관례에 따라 움직이려 들었기 때문에 서구세력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청국 조정의 규정에 따르면 영국 관원들이 청 조정에 보내는 문건은 ‘품첩(稟帖 : 관청에 내는 신고서)이라고 불렀다. 청나라 말기 중국의 사태는 바람 앞에 등화처럼 위태로웠으나 여전히 중화사상으로 무장된 수구파들에 의해 개혁이 이뤄지지 못했다. 엄복(嚴復)은 저서 《원강(原强)》에서 수구파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과거에 밝고 현재에 어두운 자는 하나는 얻고 둘을 잃은 것이다. 이들은 인류발전진화의 법칙과 서양 각국의 구체적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외국과 중국의 우열에 대해 세상 사람과 다른 고상한 견해나 내놓으면서 예의가 바른 백성이고 우수한 민족이며 주공과 공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고 예의로 다스려진다고 뽐낸다. 그들은 청일전쟁에서 여지없이 패하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러한 형세를 낳은 근본원인은 백성의 힘이 이미 약해졌고 백성의 지혜가 이미 낮아졌으며 백성의 덕이 이미 엷어진데 있는 것이지 결코 중국민족의 본바탕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수천 년 동안의 중국의 전제정치와 사회풍속에 의해 조성되어 결국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엄복,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을 비롯한 진보학자들이 서양의 자유와 민주, 데모크라시(민주)와 과학(사이언스)로 중국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이들은 중국역사는 문화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밝히는 ‘의고풍(擬古風)’을 일으키고 서양문화를 따라 배울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과 반대로 어릴 적에 영국 유학을 다녀왔고 9개 나라 언어를 마스터한 인문학자인 고홍명(睾鴻銘)은 수구파의 입장에서 서서 공자의 인의예지야말로 인류역사 이래 가장 지극한 윤리도덕이며 이상사회를 구축하는 최고 가치라고 주장하고 중국문화야말로 서양인이 배워야하는 모델이라고 역설하며 심지어 일부다처제를 찬양하고 부녀의 전족문화마저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중국인의 정신》이란 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먹은 진보파들이 아무리 목이 쉬도록 떠들어대도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굳어진 수구파들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보파는 재야인사들이고 수구파는 권력자들이었다. 전제국가에서 당연히 힘의 균형은 권력자들에게 절대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보파의 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보파들의 노력에 의해 서구의 민주와 공화제가 폭 넓게 홍보되어 기울어져가는 청나라 군대는 더는 희망이 없는 청조정을 위해 싸울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다. 1911년 10월 10일 무한(武漢)에서의 한 방의 총소리가 268년 통치했던 대청제국을 무너뜨린 결과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진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의 제국역사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참으로 비극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2천년 제국역사의 키잡이는 중화사상이었고 이 튼튼하고 견고한 키잡이로 만경창파를 헤가르며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제국역사를 창조해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키잡이로 세상에서 가정 먼저 부유한 나라로 되었으나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손을 보지 않고 사용해온 키잡이가 고장 나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다. 먼 바다건너에서 밀려오는 ‘덕선생(데모크라시)’과 ‘사선생(사이언스)’의 파워에 밀려 속절없이 무너졌던 것이다. 하지만 제국은 사라졌으나 강산은 여전히 남아 있다. 거친 바다에서 훌륭한 뱃사공이 탄생한다는 속담이 있다. 5천년의 문명에 2천년의 제국역사는 거친 파도와 같았다. 중화사상이 독이 되어 2132년의 제국을 무너뜨렸으나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온 중화사상은 필경 신주인(중국인)의 귀중한 재부이다. 다시 재정비하여 신주대륙(중국)을 이끄는 처방으로 활용한다면 보약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별도의 글로 발표하겠다.     .
57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나? 댓글:  조회:6491  추천:32  2013-05-01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나?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나? 이 질문은 100년 전 독일학자 막스 베버가 제기한 것이다. 막스 베버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발전된 이유를 저서《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통해 밝혔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특질과 프로테스탄티즘의 관계를 설명한 막스 베버의 대표작이다. 프로테스탄트란 개신교이다. 막스 베버는 개신교의 윤리의식을 청교도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나고 발달한 것은 청교도의 신에 대한 신앙과 책임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 시민계급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 개혁을 수용한 사람들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금전 추구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윤리적인 통제를 가함으로써 향락, 방탕, 재산을 낭비하는 일을 절제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금욕하는 것을 윤리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이렇게 얻은 자산의 양은 그의 신앙의 진실성을 나타낸다고 본다. 이는 재산의 획득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을 돕는다. 이윤추구의 동기에 의해서 작동하는 모험가적 자본주의는 어느 시대에서,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다. 그러나 윤리적 측면에서 영리추구를 긍정한 것은 자명한 일이 결코 아니었으며 어느 일정한 시대 이후 성립된 것으로 그것도 서구에서만 있었던 일이다. 이와 같은 사태가 생겨나기 위해서 서양의 시민계급은 어느 특정한 생활태도의 훈련을 받고 합리적이며 방법적인 노동을 도덕적 의무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생활태도를 가져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소명의식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인해 비로소 노동과 이윤추구 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금욕적 생활과 저축 관념을 매개로 근대적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베버는 서구 자본주의 발생과 발전 원인을 설명한 동시에 ‘중국은 왜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한다. 베버에 따르면 중국은 과거 찬란한 문화역사가 있었지만 중국인은 신앙이 없는 민족이다. 신앙이 없으니 현실생활에 치중하는 리얼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중국인의 리얼리즘은 이 현세 밖에 다른 이상사회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상사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동경과 추구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돈이 생기면 서구처럼 아름다운 미래를 추구하기 위해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색을 추구하는 것으로 허무한 세월을 보낸다. 번 돈을 미래 자본 확대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주색에 탕진해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 푼의 돈이 있으면 2할 정도 가계지출에 쓰고 5할 정도 후대에 유산으로 물려줄 궁리를 하고 나머지 3할은 주색에 써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인이 장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전혀 자본 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재래식의 장사와 근현대 자본주의는 성격상 본질상 다르다. 중국은 1천 년 전 송나라 초기 ‘자본주의맹아’가 있었다고 말한다. 근거가 있다. 첫째 시장발달이었다. 장택단(張澤端)의 그림 을 보면 당시 날씨가 화창한 청명 날 수천 명이 장터에서 붐비는 모습이 담겨 있다. 둘째 지폐(紙幣)의 출현이었다. 세계역사에서 지폐가 가장 먼저 세상의 빛을 본 것은 중국이다. 즉 송나라 초기에 이미 지폐가 유통되었던 것이다. 지폐가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은 물류교환시장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만약 중국이 송나라 초기에 출현했던 자본주의맹아가 줄곧 발전해왔다면 역사를 다시 써야 하겠으나 역사는 어디까지나 가설을 허용하지 않는다. 송나라 초기 출현했던 ‘자본주의맹아’가 어떻게 시들어지고 사라졌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경제적으로 잘 나가던 송나라는 군사력이 약했다.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은 지방할거세력에 의해 무너진 전 왕조 당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지방군사 세력을 전부 중앙정부에 귀속시키고 병력을 무력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런 조치는 모든 권력을 황제 일인에게 집중시키는 전제통치에 도움에 되었으나 역대 왕조 가운데서 군사력이 가장 약한 결과를 빚어냈다. 군사가 약하니 외래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하찮게 여겼던 말갈족(靺鞨族) 금나라한테 침략 당했고 패배했다. 전쟁에 패배한 송나라는 금나라에게 금을 바치고, 땅을 떼 주고, 비단을 바치고 미녀를 상납하는 조건으로 겨우 조정을 유지하였으나 금나라도 송나라 더러 남쪽으로 수도를 옮겨가는 조건을 걸었다. 결국 송나라는 북방을 포기하고 수도를 건업(建業 : 지금의 남경)에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남송의 역사가 개시되었다.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하게 되자 그 밑에 유능한 한족관리들이 오랑캐 밑에서 일하기 싫어 따라서 남쪽에 가게 되었고 돈 많은 부자와 유명 문인들이 대거 남쪽으로 이사 갔는데 역사에서는 이들을 ‘객가(客家)’라고 부른다. 싱가폴 이광요(李光耀 : 한국에서는 영어식으로 이콴유라 함) 총리, 등소평 등 인물들이 ‘객가’출신 후예들이다. ‘객가’에 의해 그때부터 중국은 남방에 인재가 많게 되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객가’들이 돈은 많은데 할 일이 없었다. 사내가 돈은 많은데 할 일이 없으면 뭘 생각할까? 송나라 초기 ‘자본주의맹아’를 살려 역사를 바꿔 볼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빤한 일이다. 식과 색이 아니겠는가? ‘객가’들이 할 일이 없어 일차적으로 먹는 것에 신경 쓰다 보니 요리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오늘날 중국요리가 세계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데는 남송시기 ‘객가’들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결과이다. 한편 ‘객가’들이 사나이의 본능인 색을 추구하다 못해 미련한 짓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전족(纏足)’문화이다.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인은 확실히 먹는 것에 관심이 컸고 신경을 많이 써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송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어떤 사람과 식도락을 논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섬서성(陝西省) 대여현(大荔縣)에서 생산한 양고기를 푹 삶은 것에 행낙(杏酪)을 부어넣은 요리는 젓가락이 아닌 손가락으로 먹어야 한다. 하남성 남양현(南陽縣)에서 생산한 최고급 보리눈으로 온면을 만든다. 그 조리방법은 먼저 면에 훼나무의 연한 싹을 넣어 삶고 난 뒤 하남성 수현(脽縣)의 말저(抹猪 : 돼지기름)를 넣어 비벼먹는다. 공성(共城)의 특산물인 향기나는 멥쌀로 밥을 짓는데 그것을 다시 새끼 거위의 뱃속에 넣고 쪄서 요리를 만든다. 절강성의 호주(湖州)의 요리사가 송강(松江)에서 잡은 물고기로 회를 쳐서 내놓았다. 나는 이러한 산해진미를 포식하고 난 뒤 다시 여산(廬山) 강왕(康王) 계곡의 염천(廉泉)에서 길러온 물로 복건성의 증갱(曾坑)에서 생산한 명차를 우려내어 마셨다. 이윽고 옷을 벗고 편안히 누워서 사람에게 동파 선생의 를 읊조리게 하였으니 또한 족히 한 번 웃으며 즐길 수 있었다. 문인의 식탐이 이 정도였으니 관리들의 식문화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사치스러웠다. 송나라 나대경(羅大經)의 《계림옥로(鷄林玉路)》에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대부가 경사(京師)에서 돈을 주고 여자 하인 한 명을 샀다. 그녀는 스스로 자기가 채태사(蔡太師) 댁의 만두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주방에서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루는 그녀에게 만두를 만들도록 하자 뜻밖에도 만들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서 주인이 그녀를 책망하여 말했다. “지난 번 자네가 만두를 만드는 주방에서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면서 어찌 지금 만두를 못 만든단 말인가?”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주방에서 만두 속에 넣을 파를 가늘게 써는 일만을 담당했으니 어찌 만두를 제대로 만들 수 있겠어요!” 대지주는 식탐이 심한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음식기호 또한 기괴했다. 사천 지방의 유명한 지주였던 유문채(劉文彩)는 오리의 물갈퀴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 요리를 만들려면 백여 마리의 오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송나라 여몽정(呂蒙正)의 음식기호도 특이했다. 그는 닭의 혀로 만든 탕을 좋아했다. 하루는 후원에서 높이 쌓여 있는 한 무더기를 보고 새로 쌓은 토산이라고 생각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토산이 아니라 닭털더미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여몽정은 자기가 닭 요리를 많이 먹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닭털이 산을 이룰 정도로 많이 쌓여 있을까라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닭의 혀는 하나뿐인데 공께서는 계설탕 한 그릇을 만드는 데 혀가 얼마나 필요하고 그 요리를 모두 몇 번이나 먹었는지 아십니까?” 막스 베버의 지적처럼 중국인은 확실히 돈이 있으면 소망을 갖고 미래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주색에 탕진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이 현실에 안주하고 충실하여 오늘 아침 술이 생기면 오늘 취해버리는 ‘하루살이’ 인생관이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던 전부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둘째 중국역사는 중농억상 사상이 뿌리 깊었다. 송나라 시장이 활성화되었고 그에 따라 유통의 수요에 의해 지폐가 등장하였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고 더는 자본주의로 발전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바로 뿌리 깊은 중농억상 사상 때문이었다. 은나라를 상나라라고도 부르는데 역사가들의 고증에 의하면 은나라는 상업이 발달하여 상(商)이라 불렀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장사를 상업(商業), 장사에 종사하는 자를 상인(商人)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상왕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3천 년 전 주나라가 상나라를 전복시킨 것은 인문문화가 무귀(巫鬼)문화에 대한 승리, 농경문화가 경상(經商)문화에 대한 승리였다. 주나라는 초기부터 분봉제와 정전제의 실시로 농업을 발전시켰다. 진대부터 청대까지 2천년 제국시대는 중앙통일집권제를 굳건하게 하고 황제들이 절대적인 권력 장악으로 전제통치를 위해 더욱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였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 진이 굴기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시 여불위를 비롯한 재부가 나라에 필적할 만한 거상들의 도움이 컸다. 상인의 세력이 막강해져 나라와 임금을 세우고 조정을 좌우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제통치 권력에 도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싹이 자라기 전에 미연에 잘라버려 우환을 제거해야 한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천하의 부자 12만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명분은 수도를 튼튼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실질은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또 상인들에게 장성을 건설하게 했으며 오령(五嶺)을 지키게 하였다. 한나라는 초기부터 억상정책을 펼쳤다. 장사꾼은 비단옷을 입을 수 없고 수레를 사용할 수 없으며 조세를 무겁게 매겨 그들을 곤혹스럽게 굴었다. 시정(市井)의 자손들은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규정까지 반포하였다. 아무리 이런저런 억상정책을 펼치고 조치를 취해도 때론 상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황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기원전 154년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오국은 장강 하류에 위치하여 염전도 많고 광산도 적지 않아 풍부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반란의 자금줄이어서 한 무제는 강온 양면책을 동시에 시행하여 법적으로 염철의 사영(私營)을 엄금하는 한편 폐업한 염철 상인들을 염관(鹽官), 철관(鐵官)으로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공업이나 상업의 관영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민간에서 운영하는 상공업은 지속적인 제국의 약탈과 수탈 속에서 간신히 생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렇게 한나라 초기부터 억상정책을 기본국책사업으로 추진해온 결과 역대제국은 민간자본 발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생겨날 토양이 없었던 것이다. 털은 가죽이 있어야 붙는 법이다. 가죽이 없는 털이 생겨나는 법도 없다. 이 속담이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충분할 것이다. 셋째 옛것을 숭상하고 지난 것에 집착하는 ‘인순수구(因循守舊)’의 전통 때문이다. 요순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인은 요순시대를 그리며 살아왔다. “그때는 자물쇠가 없어도 도둑이 드는 법이 없었고 물건을 줍으면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고 마을 사람끼리 다투는 일이 없었지. 태평성세요, 실로 태평성세였지.” 늘 이와 같이 되풀이를 반복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다음과 같은 격언을 좋아한다. “세상의 기풍이 날로 못해가고 인심이 옛날 같지 않으니 오늘이 과거보다 못하구나(世風日下, 人心不古, 今不如昔).” 절강성의 어느 어촌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원래 너무 가난하여 장가를 가지 못한 노총각이 수두룩했다. 심지어는 장가를 간 사람도 신부의 몸무게를 저울에 달아 근수에 따라 처가에 돈을 지불하여 데리고 오는 낡은 풍속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지역은 크게 발전하여 많은 지역민들이 부자가 되었다. 돈을 빌려주거나 빌린 돈을 갚을 때 아직까지도 돈을 세지 않고 저울에 달아 주거니 받거니 한다. 예를 들어 백 위안을 몇 근, 몇 냥 빌렸고 오십 위안 몇 근 몇 냥 빌렸다는 식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처럼 부유한 곳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생각은 안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서 풍기가 크게 문란하였다. 그래서 스무 살이 넘은 청년 중에서 ‘임칙서(林則徐)’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한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다. 현대화 중국에 아직도 이렇듯 황당한 일(물론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말이다.)이 있는데 전통사회 중국인은 더 어떠했을까?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전통을 목숨처럼 여기고 변혁을 거부하고 혁명을 거부해왔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봉건 영주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와 경제 시스템을 구축한 거대한 혁명이었다. 중국인은 1898년 개량을 요구하는 ‘무술변법(戊戌變法)’조차 실패하였는데 어찌 자체적으로 자본주의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56    음양학은 중국문화의 반창고 댓글:  조회:6011  추천:2  2013-04-15
음양학은 중국문화의 반창고   《홍루몽》제31회에 사상운(史湘雲)과 그의 시녀 취루(翠縷)가 음양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있다. 우선 취루가 사상운에게 음양이란 것은 형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으니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며 질문한다. 그러자 상운이 음양이란 사물의 성질이라고 하면서 예를 들어 설명한다. “하늘이 양이면 땅은 음이고, 불이 양이면 물은 음이며, 해가 양이면 달은 음이지.” 취루가 알았다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터득을 덧붙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햇님을 보고 태양이라고 하고 점치는 사람들이 달님을 보고 태음성(太陰星)이라고 하는 거군요.” 상운이 취루를 기특하다는 듯 미소를 짓자 취루가 재차 물었다. “그러한 큰 사물에게 음양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모기나 벼룩, 꽃이나 풀, 기와나 벽돌 같은 것에도 음양이 있나요?” “그렇고말고. 저 나무 잎사귀 하나만 보더라도 그래. 햇살을 받는 쪽은 양이고, 아래로 그늘진 쪽은 음이지.” 취루가 들고 있는 부채에도 음양이 있는 것이냐고 묻자 상운이 대답했다. “그럼, 이쪽이 정면이니 양이고 저쪽이 반대쪽이니 음이지.” 상운은 취루의 이어지는 질문에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새나 짐승은 수컷이 양이고 암컷은 음이다.” 취루가 크게 깨달은 듯한 얼굴 표정으로 물었다. “세상 만물에 음양이 없는 것이 없다면서 왜 우리 사람들에게는 음양이 없는 걸까요.” 상운은 나이 어린 계집애가 혹시라도 엉큼한 ‘19금 이야기’를 꺼낼까봐 눈을 흘기며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취루는 자신도 알 것은 다 알고 있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왜 제가 몰라요. 아가씨가 양이면 저는 음이지요.” 상운은 난데없는 그녀의 말에 잠시 당혹스러웠다. 아니 여자면 모두 음이지 어떻게 음양으로 나뉜다는 말인가? 그러자 취루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람에게 주인이 양이고 노복은 음인 것으로 정해진 거예요. 제가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도리를 모를까 봐요.” 취루는 이렇게 세상 모든 사물에 음양이 존재하고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성격이 다르거나 성별이 다른 사물에 음양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에도 음양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라지만 남자 몸의 기는 양이고 혈은 음이 된다. 같은 도리로 여자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하다못해 손의 경우 손등은 양이고 손바닥은 음이다. 또 산이 양이라지만 햇빛을 잘 받는 쪽은 양이고 햇빛을 잘 받지 못하는 쪽은 음이 된다. 일반적으로 남쪽은 양이고 북쪽이 음이라지만 산의 북쪽은 음이고 강의 북쪽은 양이 된다. 그래서 한국의 ‘한양(漢陽)’은 한강 이북에 있고 중국 ‘심양(沈陽)’ 역시 심수 이북에 위치해 있다. 이렇듯 음양은 모든 사물에 다 적용되니 반창고 같은 존재이다. 중국인 선조들은 반창고 같은 존재인 음양으로 우주를 바라보았고 음양으로 우주를 관찰하는 방법을 하나의 체계로 정리한 것이 바로 《주역》이다. 《주역》이 도대체 어떤 책인가? 《주역》은 단순히 사주팔자나 보는 하나의 ‘점서(占書)’가 아니다. 천문, 역법, 음악, 건축, 의학 등과 모두 연관시킬 수 있고 인간의 일생대사인 혼인과 제사, 먹고 사는 장사, 심지어 집을 사고 이사하는 일까지 모든 사회현상과 일상사에 가르침이 되는 지침서이다. 그래서 혹자는《주역》을 중국문화의 바이블이라고 말한다. 《주역》은 ‘역경(易經)’과 ‘역전(易傳)’ 두 가지가 있다. ‘역경’은 점복에 관한 것이고 ‘역전’은 철학에 관한 것이다. 은나라 때 점치는 방법은 거부기 껍데기를 태운다. ‘푸, 푸’ 타는 소리를 ‘복(卜)’이라 하고 타서 변하는 모양을 적은 것이 ‘갑골문’이다. 주나라 때부터 점치는 방법은 ‘괘(卦)’를 따지고 살피는 이른바 ‘계산(計算)’한다는 뜻으로 생겨난 ‘산괘(算卦 : 중국어 발음으로 쏸꽈라 함)’이다. ‘괘(卦)’는 양효(陽爻)와 음효(陰爻)가 있다. 쭉 뻗은 막대기 모양인 ‘양효’는 수컷인 남자를 뜻하는데서 유래되었고 가운데 구멍이 뚫린 ‘음효’는 암컷인 여자를 뜻하는데서 생겨났다고 한다. 음양은 중국인이 우주를 관찰하는 기본이자 근본이다. 모든 사물에 규율이 있듯이 음양에도 당연히 규율이 있다. 음양규율은 간단하다. 즉 일음일양(一陰一陽)이다. 한 번 음이 되었다가 한 번 양이 되고 또 한 번 양이 되었다가 한번 음이 되는 변화이다. 64괘는 음양의 조합과 일음일양 규율에 의해 만들어졌다. 음양학을 잘 파악하면 64괘를 쉽게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64괘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고 마지막 두 괘만 집고 넘어가자. 64괘 마지막 두 괘는 기제(旣濟)와 미제(未濟)이다. 제63괘가 기제라면 그것으로 끝나야 마땅한 것이 아니냐? 왜 기제 뒤에 또 미제가 따르는 것일까? 기제는 일의 성공과 완료를 뜻한다. 미제는 일의 미완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국철학의 심오함과 오묘함을 엿볼 수가 있다. 기제 뒤에 미제가 따르는 것은 ‘우환의식(憂患意識)’이다. 혁명이 성공을 거두했다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이 성공한 뒤에 할 일이 더 많다. 만약 혁명에 성공했다 하여 도취의식을 갖는다면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나태해지면 혁명에서 흘린 피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쉬운 말로 하면 애써 일궈놓은 것을 한 순간에 말아먹는 것이다. 음양학을 주축으로 이뤄진《주역》은 우주를 관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규율을 찾아내고 체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가장 오래된 고전이자 중화민족문화의 금자탑이며 중국인의 정신지혜이다. 현재 중국 총재국학반(總裁國學班 : CEO 강습반)에서《주역》을 필수과목으로 채택하여 중국고전에서 지혜를 얻고 있다.  
55    새해 첫날 받은 선물 댓글:  조회:5326  추천:2  2013-04-06
새해 첫날 받은 선물   계사년 첫날 서울에 눈이 내렸다. 옛사람들은 새해첫날 내리는 눈을 풍요와 다산의 징조를 알리는 서설(瑞雪)이라 했던가. 눈은 낭만을 불러온다. 지천명이라 젊은이들처럼 가슴이 할랑거리는 설렘과 낭만은 없으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사각사각 서설(瑞雪)을 밟으며 외식 길에 나선 기분이 참 좋았다. 동네 음식점에서 우린 지난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 해야 할 일들을 담론했다. 여행계획을 잡아보기도 하고, 늦둥이를 보는 것이 어떨까······. 희소(喜笑)를 날리며 잔을 비우고 있을 때, 한 20대 후반 젊은 사내가 반갑게 다가왔다. 6주기술교육을 수료한 나의 제자 윤민호였다. 음식점에 나타난 윤민호는 내가 눈에 띄자 얼굴이 매우 상기되었다. “자네, 새해 첫날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럼요, 선생님이 아시면 필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 그럼 기대해보지.” 나는 윤민호를 닦달하지 않고 일단 술잔을 나누고 나서 들어보기로 했다. 6주기술교육은 한국정부가 무연고동포들에게 한국에 올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고 대신 입국 후 6주 동안 기술교육을 이수해야 비자변경이 가능하도록 만든 제도이다. 시험이 없이 수료시간만 때우면 된다. 시험이 없으니 압력이 없다. 그들은 공부하기 위해 학원에 오는 것이 아니라 비자변경을 위해 핍박에 의해 양산에 오른 격으로 학원에 다닌다. 자의가 아니고 타의에 의해 등 떠밀려 학원에 온데다 한족지방에서 나고 자랐거나 고향이 연변이지만 한족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은 한국어는 고사하고 조선어도 젬병이라 강의를 알아먹지 못해 수업이 죽을 맛이다. 애먹이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중이 종치듯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쯤은 ‘고상’한 편이다. 그들은 억지로 죽치고 수업에 참가하는 것이 지옥이다. 윤민호는 심양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한족지방에서 살아온 탓에 우리말을 일상용어 몇 마디만 알아들을 뿐 입으로 번지는 건 젬병이다. 행위방식이나 사유방식도 99% 한족이다. 컴퓨터강의를 맡은 한국인강사가 같은 윤 씨라 반가워 ‘본’이 어딘가? 물었다. 한족이나 다름없는 윤민호가 ‘본’을 알 리가 만무했다. 문제는 그의 태도였다. 자신이 ‘본’을 모르고 있는 것을 창피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어온 강사를 오히려 못 마땅하다는 싸늘한 눈길이었다. 한국인 강사들은 조선족학생들과 마찰이 생겨도 훈계를 하지 못한다. 정서교감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변일중 교사출신이라 학생들에게 엄격했다. 그들이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지식 하나, 상식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한국생활적응에 도움을 주려고 열심히 강의에 몰두했다. 한글과 한국말을 모르는 학생이 30%이다. 그들을 위해 판서를 많이 하고 아울러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쓴다. 나의 강의는 한국문화, 한국역사, 한국민속, 한국법률 한국생활적응 등 사회통합프로그램이었다. 당연히 매 번마다 빼놓지 않는 것이 ‘본’에 관한 강의이다. ‘본’을 모르는 학생이 20%이다. “본도 모르는 자가 무슨 조선족이냐?”고 강력하게 야단친다. 다른 학생들이 침묵을 지키는데 윤민호가 중국말로 투덜댄다. “그런 걸 몰라도 지금까지 밥 먹고 살아왔습니다. 왜 하필 그걸 알아야 하나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조선족은 단군을 모르고 ‘본’을 몰라도 먹고 살아오는데 지장이 없었다. 2012년 한해 내가 교육시킨 6주기술교육생은 무려 413명이었다. 그 중 95%가 단군이란 ‘ㄷ'자도 들어본 적이 없단다. 민족의 조상을 모르고 살아왔다. 조상을 모른다는 것은 뿌리가 없는 집단이란 뜻인데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조선족 다수가 민족의 뿌리를 모르고 있을뿐더러 가문의 뿌리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더 큰 비극이다. 문제가 또 있다. ‘본’이 무슨 뜻이냐고 질문을 들이대면 아는 자가 한두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80%가 자신의 ‘본’을 알고 있었지만 그 ‘본’이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본’이란 그 가문의 조상이 살던 곳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조선족 절대다수가 가문의 조상 뿌리조차 모르고 어영부영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본’을 모르는 학생에게 하룻밤의 시간만 준다. 이튿날 대답 못하면 나의 강의를 수강할 자격을 박탈한다. 강력하게 밀어붙이니 당일로 부모한테 물어 알아낸다. 채찍이다. 동시에 나는 강의를 재미있게 하려고 심혈을 쏟고 정열을 불태운다.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나는 일단 교단에 서면 천리마가 광야를 달리듯 거침이 없다. 이렇게 당근과 채찍을 겸비해 전원이 수업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교사는 생리상 우수한 학생 부류와 애 먹이는 부류를 잘 기억한다. 413명이 되는 단기수업제자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 나는 윤민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새해 첫날 음식점에서 우연하게 인상이 있는 제자를 만나 나는 몹시 기뻤다. 연거푸 석 잔을 건배했다. “선생님은 저의 일생에서 가장 인상 깊고 가장 잊지 못할 스승입니다.” 제자의 진정이 가득 담긴 인사말이다. “무슨 소린가, 내가 강의한 시간이 고작 30교시밖에 안되는데······.” “비록 시간은 짧았지만 선생님 덕분에 저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가문의 뿌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왔으니 조상이 계시던 파평(파편 윤씨)에 가보고 싶어 오늘 다녀왔습니다.” “아니, 그까짓 것 몰라도 밥 먹고 산다고 큰소리치던 자네가 ‘본관’까지 찾아가다니!” 나는 농으로 한소리 했지만 내심으로 제자가 한없이 대견해 보였다. “어제저녁 조상의 뼈가 묻힌 곳에 찾아간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아버님께서······.” 그는 말하다 말고 뒤통수를 긁적거린다. “그래, 아버님께서?” 말을 잇도록 유도했다. “아들놈이 한국 가더니만 ‘사람 되었다’고 하시면서 몹시 기뻐하시는 모습이 전파를 통해 역력하게 전해왔습니다.” 교단에 서는 훈장은 제자들이 성숙되어가는 모습에 가슴 뿌듯하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끔 신선한 충격을 먹을 때가 있다. 새해 첫날 저녁 우연히 만난 제자가 밥값을 나 몰래 지불했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생활 10여 년 동안 한국인과 중국인한테서 수많은 대접을 받아보았다. 그 대접들은 서로 일로 얽힌 관계로 이뤄졌거나 친구로 친해 이뤄졌던 것이다. 한국생활 10여 년이 넘도록 내가 가르친 제자한테서 대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제자가 지불한 밥값은 단순한 수학적인 돈 계산으로 환산할 수 없다. 예로부터 훈장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스승은 제자들한테서 가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을 받으면 무한한 가치로 여긴다. 스승의 보람과 희열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새해 첫날 제자한테서 받은 선물이 나를 몹시 흥분케 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난 한해 있었던 일들이 필름처럼 떠올랐다. 지난 흑룡의 해에 나는 많은 일들을 해냈다. 예전처럼 글 쓰고 신문을 꾸리고, 민속장기대회를 개최하고, 교사모임도 열었다. 동북아신문 이동렬 대표와 손잡고 코리안드림 20년 넘어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여러 단체 132명을 이끌고 참관을 다녀왔다. 전 청화대 교수인 정인갑 선생과 힘을 모아 이동렬 대표를 수반으로 하는 ‘재한동포문인협회’를 출범시켰다. 많은 일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은 지난 한해에 행한 여러 가지 강의였다. 한국외국어대학 특강,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특강, 구로경찰서 특강, 구로구청 특강, 한국청소년교육센터 특강, 안산 모 고등학교 특강 등 한국인을 대상으로 많은 강의를 해왔다. KBS에 세 차례 출연했고, 북경중앙방송조선말프로 인터뷰도 7차례 했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수기공모작품 심사위원도 맡았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수많은 강의를 통해 조선족에 대한 이해와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 것이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지만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강의 중 가장 희열을 느낀 강의는 역시 6주기술교육생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사회통합프로그램교육이었다. 413명의 젊은이들한테 민족의 조상을 알려주고 가문의 뿌리를 찾아주었다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나는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는 강의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 훈장이 아니다.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일을 하여 밥 먹고 사는 인간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일 중에 강의가 나의 몸에 가장 잘 맞는 항목이다. 직업상 매일 강의를 진행할 수 없어 빠질 때가 있으면 학생들의 강의요청이 빛발 친다. 내가 가르친 6주기술교육생은 과거 연변일중 제자에 비해 반쪽짜리 제자이다. 반쪽짜리 제자한테서 받은 선물이 가슴을 더 설레게 한다. 새해 첫날 반쪽짜리 제자한테서 받은 선물이 더욱 나의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여러 가지 일 중에 새로운 한해에도 있을 6주기술교육 강의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고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54    금전과 색 교환 유래 댓글:  조회:5382  추천:4  2013-03-04
금전과 색 교환 유래   남녀 육체적 교합에 있어서 성을 즐기는 쾌감도가 여성이 남성보다 천배 만배 높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행복한 신음소리 내고 남자는 여자를 정복했다는 만족감에 젖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여자의 ‘표정’을 살핀다. 여성의 쾌감도가 남성보다 훨씬 높은 생리적 현상만을 따지면 마땅히 힘 빼고 고급단백질을 주고 쾌감을 주는 남자에게 여자가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 도리이건만 현실은 거꾸로 남자가 여자한테 금전적인 대가를 치른다. 어찌된 영문일까? 원시남과 원시여가 동굴에서 한바탕 ‘짓거리’가 있었다. 생리적으로 성 흥분이 빨리 사라지는 원시남은 사냥에 나설 준비에 서두르지만 여흥이 가시지 않은(餘興未盡) 원시여는 실 한 오라기 가리지 않은 채 누운 자리에서 ‘명상’에 빠져 있다. 이때 동굴어구에 야만적인 남자가 몇이서 ‘냄새’에 끌려 동굴 안을 살피며 서성거린다. 원시남은 어떻게 해야 하나? 사냥에 나서는 원시남은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시여를 지켜내려 한다. 첫째 원시여를 숨겨놓는다. 동양역사에 처녀를 규방에 가두는 관습이 이와 같은 역사맥락에 의해 생겨난 문화였다. 둘째 원시여의 얼굴을 가린다. 예쁜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베일을 씌운다. 지금도 이슬람지역 여성들이 거리에 나설 때 히잡을 착용하는 관습이 역시 원시여를 지켜내려는 궁여지책에서 유래된 것이다. 셋째 원시여의 두 발을 묶어놓는다. 다른 남자와의 ‘왕래’를 차단하려고 원시여의 두 발을 꽁꽁 묶어놓는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있었던 중국전족문화는 발이 성기를 상징한다는 의식과 아울러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소족숭배문화(小足崇拜文化)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화유래가 있겠으나 이와 같은 원시여를 묶어두는 방식이 한몫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 세 가지 방법은 원시여를 지켜내는데 있어서 모두 궁여지책일 뿐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다. 좋은 방법이 있다. 사냥에 나서는 원시남은 여흥이 채 가시지 않은 원시여의 보조개를 귀엽게 살짝 비틀면서 “요 예쁜 것, 내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꿩고기를 잡아올게, 기다려!”라고 말하면 원시여는 순식간에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컥 삼킨다. 아울러 금방 즐겼던 여흥이 온데간데없이 귀신처럼 사라지고 오로지 꿩고기를 들고 올 낭군님만 그리게 된다. 꿩고기를 포식한 계집은 감사한 맘으로 기꺼이 사내에게 색으로 갚는다. 꿩고기를 중국식 표현을 빌려 ‘반표(飯票)’라고 하자. 남자는 ‘반표(飯票)’를 제공하고 여자는 색으로 갚는 패턴이 인간사회에 정착되었던 것이다. 재미나는 것은 수천수만 년 전의 ‘반표(飯票)’와 색의 교환이 오늘날 현대화사회에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화대를 치르고 여자의 몸을 산다든지, 좋은 일자리를 찾아주고 색을 갈취한다든가, 연예인지망생에게 장래를 보장해준다는 감언이설로 성을 농락한다든가, 하여튼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여자의 몸을 사는 현상이 모두 본질상 ‘반표(飯票)’와 색의 교환이다. 또 고급주택, 고급승용차, 고급악세사리 등 형식이 달라질 수는 있으나 이러한 것들이 본질적으로 따져보면 ‘반표(飯票)’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일부관리들이 ‘정부(情婦)’를 많이 두는 것이 부패의 큰 요인이라고 한다. 십분 맞는 말이다. ‘정부(情婦)’를 많이 두려면 그만큼 ‘반표(飯票)’가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부패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53    엘리트교육과정이 없는 한국 댓글:  조회:5327  추천:6  2013-02-28
엘리트교육 과정이 없는 한국   중국에서는 중앙 최고 지도부 간부로 등용되려면 적어도 기층행정조직(향·진)의 당위 혹은 정부의 행정단련을 거쳐 현·시급 나아가서 성급 지도부간부로 승진하고 나서 소수자가 최고 권자에 오를 수 있다. 개별적으로 도시국유기업에서 기층간부로부터 정계에 진출하여 한걸음, 한걸음 위로 밟아 최고엘리트에 등극한다. 기층부터 중앙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청년단조직과 당교는 중국식 엘리트양성 전문기관이다. 미국과 일본은 중국에 비해 방식이 다르지만 엘리트과정을 밟는 교육이 있다. 클린턴과 작은 부시 같은 전 대통령들이 엘리트교육과정을 거쳤다. 일본에서는 하다못해 외무성공무원이 되려면 일본 내 엘리트교육과정을 거치고 중국담당을 맡자면 먼저 대만에 유학하고 다음 대륙에 가서 공부하고 그다음 구미에서 보는 중국을 알기 위해 구미에 유학 간다. 외무부공무원이 되기까지 8년 혹은 10년이란 시간이 수요 된다. 업무상에서 베테랑 수준급일 수밖에 없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 같은 엘리트과정이 없을뿐더러 중국처럼 기층조직부터 행정과정을 밟는 프로그램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대학교수가 장관으로 임명되고, 대학 총장 혹은 검찰출신 외 별 다른 정부계열의 행정경험이 없는 분이 총리후보로 지명되고, 변호사가 경관(京官:서울시장)이 되고, 학생운동권 출신이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도지사로 되고, 과학자가 대통령후보로 인기를 끌기도 한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이래 역대대통령을 살펴보면 기층조직부터 행정과정을 거친 분이 단 하나도 없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박사를 취득한 학자출신이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순 군부출신이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평생 민주화운동 하던 분이고, 노무현은 변호사출신으로 한때 해양수산부장관을 잠깐 지낸 경력이 전부이고, 이명박은 대기업사장출신으로 서울시장을 거친 것이고, 박근혜는 정당을 움직이는 정치는 잘했을지 몰라도 행정경험이 전무하다. 중국에 비해 한국의 엘리트교육과정이 없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필자는 문화로 해석하려 한다. 중국인은 물을 끓여 마시므로 하여 모든 일에서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즐기는 관습이 정착되었던 것이다. 식사하는데 몇 시간씩 먹는 현상이 바로 먹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가 결국 최고엘리트권좌도 잡다한 행정과정을 거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인은 겉(表)보다 내실을 다지는 문화를 즐기기 때문에 최고엘리트권좌에 오르려면 역시 내실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산 좋고 물 좋아 어디가나 즉석에서 냉수를 벌렁벌렁 마실 수 있기 때문에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에만 치중하는 문화가 자리잡아왔다. 그래서 한국인은 내실을 다지는 과정 같은 문화를 거부하고 결과에만 치중하게 되었고 결국 이(里:속)보다 표(表:겉)에 집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치경력이 전무하고 행정경험이 전무한 학자도 대통령후보로 인기가 대단했던 것은 역시 한국인의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에만 치중하는 문화의 발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정치에 있어서 인기몰이란 말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인의 특이한 문화 ‘멋’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멋’이란 문화는 역시 내실(속)을 무시하고 겉(表)에 집착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멋’을 추구하려면 역시 과정이 생략될 수밖에 없고 결과에만 매달리게 된다. 국회의원후보나 대통령후보로 나선 분의 과거 행정경력이나 혹은 앞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에 등극한 후 자격 적합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임시 ‘멋’이 있으면 그 쪽에 확 몰려든다. 엘리트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한국대통령이 엘리트교육을 받을 대로 받아온 중국주석에 비해 왠지 깊고 넓은 철학이 결여되어있는 느낌이 든다.  
52    생존이냐, 법이냐? 댓글:  조회:6098  추천:4  2013-02-19
  생존이냐, 법이냐? 본래 조선족은 재외동포에서 제외되어 있다가 2008년 1월부터 재외동포비자를 부여받게 되었고 불과 5년 가까운 사이 고무적인 수치로 늘었다. 법무부의 2012년 11월 통계에 의하면 재외동포비자(F-4)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이 11만5천583 명이다. 하지만 이 중에 수많은 조선족이 수난을 겪고 있다. F-4비자는 단순노무에 종사하지 못한다는 한국정부의 규제 때문이다.  장모씨(64세)는 3년 전 한국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는 딸애의 초청에 의해 재외동포비자(F-4)로 입국했다. 2012년 5월부터 양주소재 00제조회사에 근무하던 중 다쳤다. 산재보상은 받았으나 그것이 문제였다. 재외동포비자는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 없다는 정책이 있다. 법을 어겼으니 벌금 200만원 납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외국인이 벌금 200만원이상 납부하면 체류연장이 불가능해진다. 아내와 딸 한가족이 한국에 있는데 장모씨가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렵사리 합쳐진 가족이 또 이산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F-4를 소지하고 있는 조선족 중에 중국에서 의사, 교사, 변호사, 심지어 교수 등 직종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많다. 연변대학출신만 2만 명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에 와서 전공과 직종에 맞게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이다. 쉽게 말하자면 중국에서 교사생활 했다고 해서 한국에 와서 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다수가 단순노무에 종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한때 유학생 부모, 본과졸업생 부모, 공무원가족에게도 F-4비자를 부여하여 수많은 조선족이 혜택을 받아 한국에 왔다. 이들은 한국에 오는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한 것은 불 보듯 빤하다. 역시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  2012년 4월 11일 법무부는 국가공인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한 자에게 F-4비자를 부여한다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때마침 H-2 5년 만기가 맞물려 수많은 조선족이 한국인도 따기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여 F-4비자를 부여받았다. 문제는 단순노무이다.    신모(45세) 여인은 2012년 10월 위험물처리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여 F-4로 변경되었다. 기쁨도 잠시, 강남소재 00음식점에 근무하던 중 단속에 걸려 벌금 100만원을 납부했다. F-4는 단순노무에 종사하지 못한다는 정책 때문이다. 재차 걸리면 강제퇴거 될까봐 두려워 일을 하지 못하고 있어 한숨만 짓고 있다.  한국정부는 F-4비자소지자는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 없다는 규제를 제정했고 기능사자격증 취득자가 F-4로 변경 시 ‘단순노무 비취업 각서’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한다. 하지만 본래 단순노무에 종사했던 그 많은 조선족이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여 맞는 해당직종을 찾는다는 것 또한 하늘의 별따기이다. 예를 들어 한식자격증을 취득하면 반드시 주방장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족출신을 주방장으로 채용할 한국음식점들이 몇이나 될까?  수만 명에 이르는 자격증 취득자들의 실질적인 형편을 감안하여 이들에게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정책을 하루속히 펼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을 위한 노동이 죄가 되어 범죄자가 무더기로 양산될 수 있다.  할아버지 고향을 찾아 생존을 위한 단순노무가 죄가 된다면 한국역사에 불미스런 사건으로 한 페이지를 남기게 될 것이다.  
51    커피 없이 못 사는 한국인 댓글:  조회:5650  추천:3  2013-02-18
커피 없이 못 사는 한국인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 웬 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속을 태우는 구려 8분이 지나고 9분이 오네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 내 정말 그대를 사랑해 내속을 태우는 구려   오~그대여 왜 안 오시나 아~내사랑아 오~기다려요~~ 오~기다려요~~ 오~기다려요~~~   1968년 발표된 김추자의 노래이다. 당시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현재까지도 줄곧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가설을 해보자. 당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를 ‘차 한잔을 시켜놓고’로 바꿔 불렀다면 어떠했을까? 나는 자신 있게 말하노라. “인기는 고사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일까? 차는 한반도에서 1300년 역사가 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차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한반도사람들은 냉수를 즐겨 마시기에 뜨거운 찻물은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고 차를 마시려면 번거로워 복잡한 과정을 시끄럽게 여기는 한반도사람들은 다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커피는 한반도에서 역사가 극히 짧기 때문에 신생사물(新生事物)에 반하는 민중 심리가 있을뿐더러 차는 동양의 고유문화인데 비해 커피는 한국인이 동경하는 서양(실제로 미국)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커피가 전파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896년 고종황제가 처음으로 러시아공관에서 마셔보았다는 주장이 있고, 그 이전에 중국을 통해 이미 커피가 조선에 있었다는 유길준의 말도 전해오고 있다. 매체 보도 자료에 의하면 최초의 커피로 1923년 명동의 후타미(二見) 다방을 꼽지만, 실제 구한(舊韓)말의 역사 자료에는 1913년 남대문역에서 문을 연 ‘남대문역 다방’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커피가 시중에 나왔다는 증거이고 최초의 커피전파가 다방을 통해서였다는 증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극소수의 ‘귀족’들만 커피를 접할 수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커피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당시 미군을 통해서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 시기 한국인은 미군한테 두 가지를 몹시 부러워했는데 쵸콜렛과 커피였다. “우린 언제 쵸콜렛을 맘대로 먹을 수 있고 커피를 맘대로 마실 수 있을까?”가 꿈이었다. 한편 커피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고급스런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화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가 민중의 꿈을 담은 노래로서 인기가 좋았던 것이다. 한국인의 ‘커피꿈’이 산업화 후기인 1980년대부터 실현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는 커피가 거의 대중화 되었고, 2000년대 들어서부터 커피 없이는 못 사는 나라로 되어버렸다. 현재 한국엔 2000개 업소의 커피숍이 있고 직장마다 커피가 유행이고 거리마다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다. 한국인은 매일 평균 3~6잔의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한국인이 커피에 열광하는 이유는 선진문화에 대한 동경을 현실화시키는 욕망이 강한 것도 있고 또 한국인은 ‘멋’을 추구하는 민족으로서 세계적으로 유행을 가장 잘 타는 특징 때문인 것도 크게 한 몫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이 커피에 열광하다 보니 다방이 찬밥신세로 되어버렸다. 최초 커피가 다방에서 판매되었으나 현재 한국 다방은 고급차를 맛보기 위한 장소나 커피의 향수를 즐기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동네 못 사는 아저씨들이 혹은 중년 최하층 블루칼라들이 마담과 시중드는 아가씨들과 걸쭉한 농담이나 하는 장소로 전락되었다. 때론 아가씨를 사는 티켓다방도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동네 사무실 아저씨들이 커피 배달하는 아가씨들의 젊고 야들야들한 손을 만져보고 야한 엉덩이나 건드려보기 위해 커피를 주문받는 다방도 많다. 다방이라 하면 퇴폐업소가 떠오르고 있다. 물론 한국 다방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차는 촌스럽고 커피가 세련되고 ‘멋’져 보인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차 한잔 시켜놓고 연인을 기다리면 촌스러워 보인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연인을 기다려야 우아하고 고급스럽고 세련되어 보인다. ‘멋진’ 인간이다. 차 한잔 시켜놓으면 마치 연인이 도망가고 커피 한잔 시켜놓아야 연애가 잘 되는 것처럼. 이것이 현재 한국인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직장에서 점심 먹고 차 한잔 마시면 촌스럽고 키피를 손에 들고 있어야 ‘멋’져 보인다. 그래서 점심 후 커피 한잔이 기본생활규칙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특히 젊은 직장인들이 더욱 그렇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연인과 몇 시간 동안 연애했다는 이야기, 커피 한잔 시켜놓고 5시간 동안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는 이야기, 커피 한잔 시켜놓고 숙제를 할 겸 인터넷게임을 수 시간 동안 했다는 이야기, 네이버에 커피 한잔을 클릭하면 벼라 별 이야기가 다 뜬다. 유럽 커피숍 같았으면 진즉에 쫓겨 날 고객들이다. 그건 그렇고 커피는 보통 2~3분이 지나면 식어 ‘맛’이 간다. 아이스커피도 몇 분 지나면 ‘맛’이 간다. 그런데도 몇 시간 동안을 어떻게? 이러한 이야기들은 한국인이 커피의 ‘맛’을 즐기거나 커피를 마시는 묘미를 즐기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커피 한잔의 ‘멋’을 지나치게 추구하는데서 빚어지는 결과라 볼 수 있다. 요즘 언론매체에서 커피가 건강에 해롭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차는 커피보다 건강에 여러모로 이롭다. 중국인이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도 비만이 적고 고혈압이 적은 이유가 바로 차를 많이 마시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이런 도리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음식이 20년 전보다 엄청 담백해졌다. 간혹 한국인집에 초대받으면 싱거워 먹지 못할 지경이다. 음식이 싱거워야 건강에 이롭다는 논리이고 실천이다. 음식은 이렇게 바꾼다. 그렇지만 차는 촌스럽기 때문에 마시려 하지 않거나 아주 적게 마시고 커피는 ‘멋’이 있기 때문에 많이 마시는 버릇을 버리기 어려운 것이 현주소이다. 며칠 전 한국에서 2년간 방문교수로 있던 중국인 학자가 한국인이 커피를 잘 마시는 현상을 ‘소국의식’이라 꼬집은 글을 읽었다. 물론 그 분의 시각에 의해 그런 식으로도 풀이할 수 있겠으나 나는 한국인이 커피를 잘 마시는 현상은 선진문화에 대한 동경 심리에 의해 생겨난 유행이고 ‘멋’을 지나치게 추구하는데서 빚어진 결과라고 지적하고 싶다.
50    '멋'과 백의민족 댓글:  조회:5144  추천:5  2013-02-14
‘멋’과 백의민족     필자가 중학교 다닐 때 조선학교 아닌 중국학교를 다녔는데 중국아이들이 나보고 “너희들 민족은 늙으면 늙을수록 새하얀 옷을 입어 참 깨끗해 보인다.”는 말을 자주 했다. 확실히 그 시절 조선족노인들은 늙을수록 하얀 한복을 많이 입었다. 우리시골마을에 80세 훨씬 넘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해마다 연세를 물으면 여든이라고 대답해 ‘여든 노인’이란 별명이 붙었다. 하여튼 80세 훨씬 넘었는데도 아주 건강했다. 건강하다 못해 산 넘어 환갑 지난 딸이 살고 있었는데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딸 생각이 나 보따리를 이고 해발 500M 고개를 거뜬히 넘나들었다. 고갯마루에 올라 있을 때면 바람에 하얀 한복자락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신선을 보는 것 같았다. 노인의 모습이 그렇게 ‘멋’이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민족이 백의를 선호해 입었던 이유 중 신선을 숭상하는 풍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최치원은 에서 풍류를 말하고 조선의 역사를 ‘선사(仙史)’라고 표현했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나라에 현묘한 진리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이미 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풍류와 선사는 상호관계를 갖고 있다. 중국에서 풍교가 발전하여 풍류도로 진화했고 풍류도는 도교로 승화되었고 도교 수도의 최고 경지가 바로 득도성선(得道成仙)이다. 우리민족은 역사기재가 부실해 그렇지 사실 신선숭상사상이 중국보다 더 강했다. 풍교를 중국보다 더 숭배해왔기 때문이다. 신라는 불교를 불교라 부르지 않고 ‘석씨풍교(釋氏風敎)’라 불렀고,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풍교(禮儀風敎)’라 부를 만큼 풍교를 송상했다. 우리민족이 현재까지도 세상에서 일상생활에 ‘바람’이란 어휘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 역시 신라풍교의 영향 때문이다. 신선은 인간이 최고 경지에 이른 가장 ‘멋’이 있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선조들은 자민족역사를 ‘신선의 역사’로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은 복장만 백색이었던 것이 아니라 세수수건도 하얀색이었고 특히 이불안감은 가가호호 전부 백색이었다. 중앙과 성의 간부들이 조선족마을 시찰할 때 흰옷에 흰이불, 흰수건을 목격하고 “조선족은 정말 깨끗한 민족”이라고 칭찬하였다. 흰옷, 흰이불, 흰수건들은 쉽게 어지러워진다. 조선족부녀들은 흰 것들이 어지러워지기 전에 깔끔하게 빨래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더욱이 조선족부녀들의 부지런함에 탄복해마지 않았다. 조선족부녀들은 빨래할 때면 방치로 자꾸 두드린다. 강가에서 모여 빨래할 때면 방치소리가 진짜 가관이었다. 빨래들이 마르면 또 방치로 두드린다. 특히 베갯잇과 이불안감은 풀을 바르고 말리고 마르면 또 방치로 두드린다. 어릴 적 방치소리를 지겹게 들어 싫던 기억이 생생하다. 방치로 두드리는 것은 부드럽게 하려는 목적이 있을뿐더러 ‘멋’을 내기 위해서였다. 조선족부녀들이 방치를 잘 써 한족은 우리를 ‘까오리빵즈(高麗捧子:고려몽둥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49    中GDP성장과 민생 엇박자 댓글:  조회:4870  추천:22  2013-01-29
中GDP성장과 민생 엇박자   중국이 건국 후 반우파운동,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등 끝임 없는 시행착오 때문에 경제가 파탄의 변두리에 몰리게 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매년 GDP9%~10%의 급속한 성장을 거쳐 G2로 부상했으나 살기 좋은 나라로 평가 받기에는 아직 거리가 매우 멀다. 한 나라가 살기 좋다는 기준으로 흔히 정치안정, 과학기술발달, 높은 국민소득, 높은 국민의식, 인권보장, 풍부한 문화생활, 풍부한 물질, 교통발달, 청정한 기후 등등을 거론 한다. 하지만 필자는 한 나라가 살기 좋다는 기준은 민생이 가장 관건적인 요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중국인이 아직도 출국바람이 심한 것은 민생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즘 연변의 민생시장상황을 반영한 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았다. 2012년 연변의 민생시장 물가가 전년에 비해 평균 11%증가했다는 것이다. 월급인상은 기고 물가상승이 날고 있는 상황은 비단 연변만의 일이 아니고 아마 중국 절대다수의 현실일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에서 일반월급쟁이 한 사람이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국은 일반월급쟁이 아내와 아이 일가족을 먹여 살린다(물론 적금여유가 없이 그달 그달 빠듯하게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 월세방 잡고 중고가전제품과 그릇 및 생활도구를 갖추려면 한 달 월급이 채 안 든다. 냉장고, TV 등은 중고가격이 보통 5~10만원이기에 가능하다. 중국에서 중고를 갖춰도 한 달 월급으로는 어림없다. 한국에서 이혼 같은 민사사건(재산분할이 없고, 위자료청구액이 아주 적을 경우) 법인세가 2만원이다. 법원이 2만원만 받고 사건을 진행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이혼한 공문서를 번역, 공증·인증 절차를 거쳐 중국법원(연변)에 가면 를 발급하는데 인민폐 500원을 받는다. 한국은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공문서를 발급하는데 민원서류 건당 600~1000원을 받는다. 중국공공기관(연변)은 공문서 한 장 복사하고 도장을 찍는데 인민폐 54원(2009년 기준) 받는다. 양쪽 월급수입과 물가를 따지면 중국이 한국보다 20배 혹은 더 이상 비싸다는 말이 되겠다. 영화 관람 같은 문화생활이 민생에 속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필자가 요해한데 의하면 중국 영화표 값이 지구상에서 가장 비싸다. 한 장의 영화표 값이 평균 50~80원인데 중국인 1인 평균월수입의 3~5%이다. 요 몇 년래 중국영화산업 연 수입이 인민폐 100억원을 웃돈다고 한다. 얼핏 보면 경이로운 수치이다. 그런데 내막을 들여 보면 경축할 일이 못된다. 왜냐? 일인당 1원이면 13억 인구라 130억원이 된다. 이렇게 계산하면 중국인 100명 중 80명은 영화관에 가보지 않았고 근근이 20%만이 영화를 보았다는 결론이다(영화 본 사람이 달랑 1회만 관람했을 경우를 가정한 비율, 가령 한 사람이 여려 차례 영화를 보았고 수회 본 비례가 많아지면 중국에서 영화를 관람한 실제 사람은 5%정도밖에 안 된다). 1980년대 중국 영화표 값은 2~3角이었는데 당시 월급의 0.5%였다. 이 수치가 바로 세계 평균에 도달한다. 그때 무료로 볼 수 있는 노천관람 영화가 많았으니 평균 영화표 값이 0.5% 훨씬 미만이었고 백성 전체가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1990년대부터 영화표 값이 급격히 오르더니 2000년대 초반부터 월급의 5%까지 치솟고 있다. 이젠 영화가 민중의 문화오락이 아니라 소수 ‘귀족’만이 즐길 수 있는 특수오락으로 전락되었다. 홍콩은 영화표 값이 50~70홍콩달러, 구미 선진국도 평균 7~10달러, 한국은 평균 8000~9000원이며 2012년 기준으로 영화관 관객수는 1억9천489만2천244명으로서 국민 1인당 3.8회 영화관을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구미·홍콩 및 한국의 영화표 값은 일반백성의 월수입의 0.5%인데 중국은 3~5%이니 6배내지 10배나 비싸다는 얘기이다. 중국의 경제규모가 일본을 앞질러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국제적인 파워도 커져 목소리도 높아졌다. 중국00학자는 2050년이면 중국이 전방위적으로 미국을 초월할 것이란 주장을 내놓았다. 민생이 중요한 요소이므로 전방위적인이란 용어에 민생이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과연 2050년이면 중국민생이 미국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인가?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시도할 때 일부 사람들과 일부지역이 먼저 부유하라고 했다. 30여년이 지난 현재 중국은 등소평의 말대로 일부 사람들과 일부지역이 엄청나게 부를 쌓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각해졌다. 부유층에 드러나지 않는 부정축재가 심각한데 이들은 공직자이거나 국유기업 간부들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물가가 얼마 상승되던 집값이 얼마 오르던 민생이 아무 지장이 없지만 일반백성들은 살기 점점 어렵고 힘들다. 중국에서 대학본과 혹은 석·박사를 졸업하고 웬만큼 좋은 직장을 구하려면 인민폐 10만원, 근사한 직장을 구하려면 20만원 내지 30만원을 내야 한다(중국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님). 권력층이나 자영업으로 부를 쌓은 일부 부모들은 부담이 되지 않겠으나 일반백성 가문은 평생을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모아도 모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자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쓰고는 손가락을 빨아야 한다. 해외에 나간 사람들이 귀국을 꺼려하는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거주국의 민생문제가 편안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체류하고 싶을 것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벌어서 중국에 가서 소비하면 좋다고 했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한국에서 벌어서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중국에 가서 소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편안하다. 혹자는 10년 후면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따궁(打工)하러 간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민생문제 차원에서 볼 때 과연 그러한 반전이 가능할까? 삼림만 보고 삼림을 이루는 나무 구조를 모르고 어설프게 하는 말이다. 2020년이면 중국에 결혼하지 못한 노총각 홀아비가 4,5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가장 주요 이유는 역시 민생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중국 현상황에서 슈퍼스타 미국과 비교하고 견줄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한발 앞선 아세아 네 마리 용한테서 민생해결을 차근차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중국국정에 맞게.      
48    칠월칠석과 음양사상 댓글:  조회:11795  추천:1  2012-09-04
음력 7월 7일은 중국 전통명절 중 하나인 칠월칠석이다. 칠월칠석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하늘나라 궁전의 은하수 건너에 부지런한 목동 견우가 살고 있었다. 옥황상제는 부지런하고 착한 견우와 손녀인 직녀가 결혼하도록 했다. 그런데 결혼한 견우와 직녀는 결혼 후 사이가 너무 좋아 견우는 농사일을 게을리 하고 직녀는 베 짜는 일을 게을리 했다. 이렇게 되니, 하늘나라가 혼란에 빠져 지상의 사람들이 천재와 기근으로 고통을 받게 되고,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견우와 직녀를 은하수의 양쪽에 각각 떨어져 살게 하였다. 그래서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고, 이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까마귀와 까치들은 해마다 칠석날에 이들이 만나도록 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게 되었는데 이를 '오작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칠석날이 되면 오작교를 건너 서로 그리던 임을 만나 일 년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져야했다. 칠석 다음날이 되면 까마귀와 까치의 머리가 모두 벗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오작교를 놓기 위해 머리에 돌을 이고 다녔기 때문이다. 칠석날에 비가 내리는데 하루 전에 내리는 비는 만나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 다음날 내리는 비는 헤어지면서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다. 이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알려진 전설이다. 그런데 이팔청춘의 남녀가 왜 하필이면 음력 칠월칠석에 만나게 하였을까?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중국문화는 세상만물을 음양 사상으로 풀이하는 것이 주류로 흘러왔다. 본 이야기와 연관 지어 말하자면 1년 중 양이 왕성하던 여름이 가고 음을 만나는 날이 곧 음력 7월 7일이며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이며 인간을 자연법칙과 조화를 이루는 맥락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을 곧 자연의 양과 음이 만나는 날로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이란 ‘婚’은 본래 女변이 없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붙여놓은 것이다. 즉 결혼이란 ‘혼’은 본래 어슬녘을 뜻하는 황혼의 ‘昏’이었다. 그것은 ‘昏’은 하루 낮의 양기가 쇠하고 음을 만나는 시각이 곧 어슬녘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이러한 음양 사상에 의해 양인 남자가 음인 여자와 결합하는 시점도 역시 어슬녘으로 맞추는 관습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날 결혼식은 햇볕이 짱짱 내리비추는 한낮이 아니라 어슬녘에 거행한다고 해서 ‘結昏’이라 불렀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고전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춘향전’은 곧바로 이러한 음양 사상과 그에 따른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라 필자는 판단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춘향전’을 권선징악 관념으로만 평가하고 있으니 고대문화의 정수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중국학자 조국화 선생이 그의 《생식숭배문화사상》에서 “중국문화는 생식숭배문화를 핵심으로 형성되었다”고 지적하였는데 현재 중국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문화의 영향을 극심하게 받아온 한반도 문화도 생식숭배문화로 풀이하면 진정한 문화의 정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예하면 본래 달의 숭배는 생식문화에서 유래된 것이고 따라서 ‘강강술래’와 같은 민속이 생겨난 것인데 우습게도 400년 전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한국의 민속학자들이 도대체 뭘 연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동양의 고유문화본질을 파악하고 우리의 옛것을 찾아내 현재 우리문화로 만드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요, 발렌타인데이요, 화이트데이요 하는 서양명절에 열광하고 있으니 참말로 아이러니다. 중국에선 ‘애인절’을 2월 14일이 아닌 중국고유 민속을 상징하는 칠월칠석으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성공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를 회복하려는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것이다. 한국은 자체 고유전통이 사라져가고 있는데 중국과 같은 전통회복움직임이 미약해 보인다.  
47    식민지 영향이 큰 한국 댓글:  조회:6054  추천:0  2012-07-21
식민지 영향이 큰 한국 유기농기능사교재를 보고서   한국어 어휘 중 70%가량이 한자어에서 유래되었으니 한반도는 중국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는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게다가 36년 의 일제 치하에서 긴 세월을 보냈으니 현재까지도 식민지 영향이 크다는 것을 필자는 유기농기능사교재를 보고 절실하게 느꼈다. 지난 4월 10일 한국에서 국가 공인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한 동포는 재외동포비자(F-4)로 변경해준다는 법무부 공지가 발표된 이후 현재까지 수만 명의 동포들이 기능사자격증을 따려고 교육받고 있다. 기능사자격증엔 대략 120여 가지 종목이 있는데 동포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처리, 한식요리, 미용, 세탁, 오염물처리, 유기농, 금속창호 등등이다. 동포들에게 있어서 기능사자격증 종목들이 외래어가 많지 않으면 화학용어가 많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문명이 서양에서 옮겨왔으니 그럴 수밖에. 유기농만은 예외다. 동양의 농업역사가 적어도 7·8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즉 유기농기능사교재엔 서양식물과 일부 비료명칭 및 화학적 토양분석용어를 제외하고는 외래어가 아주 적어 동포들이 승산이 많다. 그런데 한자어가 90%이상을 차지해 동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왜 한자어가 그토록 많은가? 답은 간단하다. 한국은 법전을 비롯해 거의 모든 분야가 일본의 것을 베껴 쓰고 있는 상황이다. 유기농교재도 마찬가지. 일본에서 쓰고 있는 한자어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혹자는 동포들이 중국에서 왔으니 한자어가 쉽지 않겠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으나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농사에서 상용 비료인 인산, 요소 등은 한자어이지만 두음법칙에 의해 본래 린산(燐酸)을 인산, 뇨소(尿素)를 요소라 부르니 동포들의 머리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필자는 강의하면서 린산이나 뇨소라 알려주고 한문을 써주면 이해가 아주 쉽다는 반응이다. 한국어에 논과 밭이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교재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하고 일본식으로 거의 답과 전으로 표현한다. 이 일본식 표현은 중국에 비해 선진적이라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중국(조선족 포함)에서는 논을 수전, 밭을 한전이라 표현한다. 조선족은 논과 밭을 혼동한다. 수전을 논밭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일본식으로 논의 토양성격에 따라 분류되는 논은 사질답, 추락답, 천수답, 누수답, 노후답 등등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답’에 대해 한국강사들이 당연히 알겠거니 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조선족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답’은 한문으로 ‘畓’이므로 판서하면 아주 쉽게 이해한다. 풀기가 있는 토지를 점토라 하는데 한문으로 粘土, 성분이 다른 흙을 옮겨다 덮는 것을 객토라 하는데 한문으로 客土, 퇴비는 堆肥 등등의 용어들이 한문으로는 쉽지만 우리말로는 매우 어렵다. 광복이후 이북에서는 이남에서 말하는 두음법칙이 없다. 예하면 이남에서는 리씨 성을 이씨, 로씨를 노씨라 발음하는데 이북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없다. 한문음독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북에선 한국에서 말하는 한자어 어휘, 牽引車를 끌차로 우리말식으로 풀어서 표현한다. 또 외래어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다. 핸드폰을 손전화로 순수 우리말로 한다. 일제잔재청산이 잘되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남에서는 두음법칙에다 일본어와 일본식한자어에 외래어까지 가세해 실로 장마당이다. 혹자는 장마당식 언어를 사용해도 한국은 너무나 잘살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46    여자는 벗고 남자는 입고 댓글:  조회:6940  추천:3  2012-07-14
여자는 벗고 남자는 입고   요즘 날씨가 무척 무덥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절로 난다. 사우나가 따로 없다. 옷을 벗고 싶지만 벗지 못한다. 한즈봉이나 런닝 차림으로 출근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왜 남자라서. 더욱이 행사에 갈 때면 양복에 넥타이까지, 더워 미치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자라서. 그럼 여자는 어떨까? 밖에 돌아다니는 여자는 물론이고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마저 가슴라인이 파인 아주 가벼운 옷, 아래는 팬틴지, 한즈봉인지 허벅지가 다 들어나는 걸 입어도 상관없다. 한여름에 양말을 신고 다니는 여자를 본 기억이 없다. 신발도 다종다양하게 아무 신발을 신고 다녀도 무방하다. 이에 비해 남자는 한여름 무더위에도 양말을 꽁꽁 신어야 하고 사무실에 근무하면 신발도 반드시 답답하기 짝이 없는 구두. 필자는 요즘의 이런 세태를 ‘여자는 벗고 남자는 입는다.’로 표현하고 싶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세태가 벌어지고 있는 걸까? 유교적인 정조관념과 관련지어 풀이하자면 본래 여자는 입고 남자가 벗는 것이 말이 될 터인데 요즘 세태는 왜 상반되고 있는 걸까? 복식문화의 유래와 변천과정을 살펴보자. 원시인류가 옷을 발명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인류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인류가 신분과시를 위해, 정조관념의 생성에 의해 등등이다. 필자는 원시인류가 옷을 발명한 것은 일차적으로 정조관념의 생성과 큰 관련이 있다고 본다. 원시사회에서 우선 여러 남자가 한 여자를 탐하면 여자는 자기 음부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따라서 마음에 없는 사내한테 귀중한 음부를 드러내기를 꺼려 가리기 시작했다. 일정 세월이 흘러 남자도 자기 음부가 귀중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가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남녀가 음부를 가리기 시작한데서 점차 복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분사회에 들어서 인류는 옷으로 신분을 구분 짓기 시작하였는데 다양한 계층의 남녀가 옷을 신분장식용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종교문화의 보편화에 따라 옷은 인간을 속박하는 도구로 사용된 역사도 있었다. 이를테면 신이 통치하던 암흑의 세계였던 중세기서양에서는 여자를 불결한 존재로 여기고 성행위를 추접스런 짓거리로 보고 단순히 후대번식목적의 의미에서 옷을 입은 채 여성의 음부부위에 구멍을 내고 그 짓거리를 하였다. 바꿔 말하자면 옷을 ‘남녀격리’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서양의 역사를 돌아보면 중세기 여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복식문화가 발달(이슬람지역은 현재도 마찬가지)하였고 근대사회에 진입하면서 여성들의 사교계진출에 의해 미인계역할을 함에 따라 점차 가슴라인이 파인 윗도리를 입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유명 디자인 샤넬이란 여성에 의해 육체윤곽이 드러나는 현대적 바지문화가 인류사회에 출현했던 것이다. 1920년 미국대선에서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이후 이른바 여성해방이 이뤄짐에 따라 치마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하였는데 일명 미니스커트가 유행되었고 따라서 바지 길이가 짧아지다 못해 팬틴지, 한즈봉인지 구분이 어려울 만큼 더 이상 짧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동양에서는 당나라 때 상층가문의 여성들의 복식을 보면 가슴라인이 파인 옷을 입었고 청나라에 이르러 양 허벅지를 터놓은 만주족복장인 치포가 전국에 유행되었다. 한반도의 역사를 보면 신라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상층가문의 여성들은 역시 가슴라인이 파인 唐服이 유행이었다. 그러다가 유교를 뼈가 절게 받아들이던 조선조 5백년 시대엔 여성들의 정조를 강구함에 따라 다시 꽁꽁 싸는 복식을 입었다. 현대에 들어 서양의 개방적인 복식문화가 유행되었지만 한국에서는 1980년대까지 치마길이가 무릎을 초과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세위 놓았고 단속을 강화하였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이나 한국이나 여자들이 더 이상 벗을 수 없을 정도로 벗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어 버렸다. 필자는 여성의 정조관념은 복식문화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허황한 얘기인지 모르겠으나 중국조선족을 보면 개혁개방 전에는 여성들의 바지가 옆구리에 지퍼가 달려 있었는데 그 시절엔 불륜이 잘 가꿔진 논의 돌피처럼 아주 드물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되더니 여성들의 바지지퍼가 앞에 달렸다. 지퍼가 옆으로부터 앞에로 이동하게 된 것은 생리적으로 말하자면 편리해진 것이지만 문화적인 차원으로 접근하면 큰 변혁이고 혁명이었다. 이른바 성해방이다. 불륜이 많아졌고 지금은 불륜하지 않는 자가 오히려 돌피신세가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문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왜 여성은 벗고 남자는 입는가는 것이다. 여자가 살판 치던 모계사회에서 남자가 득세하는 부계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 되었고 그때부터 여자는 남자한테 잘 보여야 하는 강박관념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여성의 화장 문화가 그러한 사회배경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여자가 얼굴을 화장하듯이 남자한테 잘 보이려면 머리모양과 복식문화도 다양해져야 했다. 여성을 속박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정조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현대 여성들은 어떻게 하나 자신의 성적매력을 마음껏 뽐내고 싶어진다. 화장은 진하게 하면 할수록 좋고 옷은 벗을 수 있을 만큼 벗는 것이 좋다. 호주의 이슬람출신 국회의원이 현대여성의 복식문화를 두고 “생선을 건사하지 않고 고양이가 먹었다고 고양이를 처벌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성희롱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남자는 왜 벗지 못하는가? 아주 간단하다. 남자는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옷을 못 벗는다. 만약 남자가, 특히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남자가, 더 말할 것 없고 한 나라 대통령이 런닝바람에 한즈봉을 입고 맨발바람에 산다루를 신고 대국민연설을 한다고 치자 그럼 권위가 서겠는가 말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남자는 권위를 지키려면 반드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어야 한다. 그것이 질질 끓는 삼복철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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