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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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타산지감계(他山之鑑戒) 댓글:  조회:3003  추천:14  2011-02-19
타산지감계(他山之鑑戒)                                                                                   2010-11-29 요즘 대련의 도로는 승용차의 급속한 포만으로 길이 차하(車河)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자라의 걸음 속도가 부러워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기동차의 쾌속,쾌적이라는 그 원초적인 의미가 그 수량의 증가에 정비례로 상쇄되면서 급거 이채를 잃어가고 있다.   대련의 기동차 수가 9월에 언녕 80만대를 훌쩍 뛰어넘고 현재까지 하루 평균 400대이상 속도로 불어나는데 차의 증가가 산술급수라면 교통체증은 기하급수적으로 가심화된다는 것이다. 약 2년 전 내 출퇴근 길이 버스로 20분 가량이었고  택시라면 극상 10분 거리였는데 지금은 40분 혹시 길에서 급체가 생기면 한시간 이상으로 걸리기도 십성이다.여타 직원들도 원래 한 시간 정도 길이였다면 지금은 일약 한 시간반 지어 2시간이 걸리는 때도 푸슬하다.대낮엔 어디의 구석구석도 차량 천지인데 꽉 찼다는 말로 밖에 형용이 안된다. 택시를 리용하려 하려해도 러시아워때면 잡기도 어렵거니와 버스보다 별반 앞서지 못하는 생생한 형국이다.그래도 생계가 우선인 이유로 버스에 짐짝처럼 실려 맞비빔을 당하며 무결근을 지켜내는 수 밖에는 없는 샐러리맨 계제이다.보행으로 행선지를 가려면 유유자적으로 다니던 때가 까마득한 옛날이라 승용차로 꽉 찬 인행도를 요리조리 에돌아 다니며 쓰이는 신경 역시 만만치 않은 지력노동이다.   일각에선 환성소리가 진짜 등등하다.주차장 관리인들은 어거리풍년을 만났다고 어기영차 소리에 눈초리를 꼬장꼬장하게 치세우고 희번뜩거리며 돈 내라!는 채근에 여념이 없다.즐거운 비명의 연발이다.교통 경찰은 시도때도없이 주차 반칙의 벌금 고지서를 붙여댄다.관리한다는 신경은 쓸 필요성이 반반도 없다.길에 나서면 어디서도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교통위반 차량이니 말이다.붙이다 붙이다 맥이 기진하면 철퇴하는 볼성이 소슬한 장면이 심심찮게 보인다.   가담항설에서는 거친소리를 쩡쩡하게 뿜어댄다.버스에 콩나물처럼 선 사람들은 비비닥 거리며 천백가지의 푸념을 쏟아내고 택시기사들도 장사가 안된다는 하소연을 소방호스의 분수마냥 내갈긴다. 그래도 이상한 것은 나처럼 차를 버리면 그만인데도 여봐라고 자가차를 몰고나서서 길이 막혀 못살때라, 걷기보다 못하다,돈이 들어 못산다,과태료가 물려 못배긴다 아무튼 아우성을 굉굉한 장파음으로 뽑아대는 것이다.     어느날 공공버스 기사와 한담을 나눈 적이 있다.2년전보다 동일한 거리를 달리는 데 가소린 소모량이 얼마 증가되는가?고.대답이2,30%정도인데 계속 더 빨리 증가될 건 불보듯 빤하단다.아연하고 말았다.이 막대한 수량들의 동시적인 에너지 낭비,몇십만 사람이 한결같이 잃는 여유와 시간,도시 관리비용의 증가,온실가스의 대량 방출 등등 산술적 계산이 안되는 막대한 손실,이건 뭘로 어떻게 산출하노? 거기다 가파로운 가심화의 상승 일로인데….   고향 연길을 보면 비록 대련과 비교는 안 되지만 주민 축적의 증가와 수요의 다양화로 자동차 보유량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지금이다.만약 어느때 운수가 트여 이 백민이 고향의 교통 청문회에 초청받는 행운을 감수한다면 나는 멱살을 잡혀 드잡이를 당해도 아래같이 제안을 정리해 가지고 역설하는 용맹을 떨쳐 보려한다. 대련이 이러이러한데 나의 사랑하는 고향은 지금이 만절(晩節)이라도 아직은 당절(當節)이니 살손을 콱 대여 대중교통을 발전시키고 ,공무차량을 엄격히 제한하고,자가용차의 보유,사용을   길과 차량이 조화하는 과학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고,택시차의 이용을 격려하고 자전거의 사용을 대대적으로 제창하면 어떤가?고...
23    비판론(批判論) 댓글:  조회:2842  추천:17  2011-02-12
비판론(批判論)                                                                     2011-02-07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이 생존하고 발전하려면 꼭 해야 할 적극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시종 반듯한 생활을 영위해야 하고 비틀어진 부분을 바로잡으면서 안택정로(安宅正路)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사회의 행보에서 인간의 이 행위가 병행되지 않는다면 살맛이 나는 세상이 될 수가 없다.때문에 공동체 내부에는 자연히 행동규범으로 되는 상하한(上下限) 금지선이 그려지고 촉금(觸禁)한 자는 불문법,성문법,관습법중 어느 것에 의해 제재를 받게 되는 게 상식이다. 이 목적을 이루는 극상등의 병장기는 다름 아닌 비판이다. 비판이야말로 사회에서 속병을 진단하는 엑스레이이고, 만병통치의 구급약이고, 급병 대비의 상비약이고, 약체 보신의 활력소이고, 병균 저항의 항생소면서 질병 예방의 백신이기도 하다.이같이 비판의 은혜는 이루다 말할 수 없다.   사회의 변혁,발전과 고급단계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시종 비판이란 인간의 내재적이고 천부적인 행위가 동행이 되고 지렛대가 되어 왓다는 실례를 든다면 실없는 잔소리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판이란 오차적인 관념과 언동 및 시행착오에 대한 분석,부정을 말하는데 비판,자기비판,반비판이 세가지 형식으로 분류된다.사회라는 유기체에 이 가 부족하다면 즉시 어느 기능에 부전이 생기고 공해병,돌림병,합병증이 윤번으로 들리는 와중에 말려들게 된다.이 점은 명심해야 할 력사의식이다. 인류는 적년루월의 세월을 거치며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과정을 부단히 성찰하면서 전진을 하여 왔다는 점은 맑스주의철학의 핵심 부분의 요소이기도 하다.   오늘 조글로 홈에서 온가보 총리가 지난 달 24일 국가래신래방국에 친림하시어 고소자들과 지척에서 대면하시고 애로 사항과 희망 사항을 문의하시면서 정부에 대한 감독,비평을 독려하셨다는 기사를 보고 천사만감이 얼기설기 교차한다.그야말로 대중과 동고동락하시는 거연한 옥자(玉姿)이다.총리께서 다사 중에 민중의 고충을 자상히 알아보시는 근엄한 자태는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위업이 끊임없이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축도가 아닌가 보아진다.지엄한 총리께서 민초들를 찾아 세평을 사들이는 마당이지만 오늘날 비판 문화의 만휘군상(萬彙群象)을 보면 늘 눈이 시려나는 장면을 외면할 수가 없어 유감스럽다.    어느때도 입맛이 감빨리고 귀맛이 당기우는 모택동의 명언-아는 것은 다 말하고 할 말은 끝까지 하고; 말한 자는 죄가 없고 들은 자가 삼가하고;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노력한다.-은 항간에서 자취를 감춘데 상반으로 도처에 표양,자아표양,서로표양이 난무하는 민망스런 양상이다. 비판이 예사롭게 진행되는 플랫홈과 정의로운 비판 의식을 확립하는 것은 현시대의 건강한 사회의 제일의 징표로 된다는 점에 세인들의 공감대가  이뤄진지도 오래다.   오늘 사람들의 정신생활에서 유행되는 모더니즘(modernism)를 보면 접수하고 복종하는데만 습관되고 페쇄적이고 온정적이고 파행적인 명철보신적 생활에 안주하는 색채감각이 너무나 짙은 같다. 비판의 무기가 없는 의무성의 결여.자기비판이 없는 겸허성의 결여. 반비판에 주춤대는 정의성의 결여는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서의 문화적 함정일 것이다.   항시 비판과 반대의 개념을 혼동한다.누가 자기를 비판하면 즉시 반대라는 개념으로 바꿔가지고 자기의 대한 모독이라고 억지을 쓰며 거센 몽둥이질 맞공세를 들이댄다. 정의로운 비판에 대해 남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식의 역공(逆攻)적 우행(愚行)은 법적인 의무를 등지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사자리적 횡포이외 다른 것은 아니다.   비판을 당하면 즉시 무리한 요구, 어처구니없는 불만이라 밀어붙이고 올가미를 씌우면서 말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만약 자기가 행한 것이 정의라고 인정할 때, 책임있는 태도라면 직면한 사실에 대하여 관계인들에게 소상하게 알려주고 합리적인 이해와 요구로 자리매김하도록 안내해야 한다.남의 눈과 귀를 싸매놓고 우격다짐으로 불화를 해소하려는 시도는 불온을 온양하는 암장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안 된다.   자기비판을 할라치면 내 몸의 벼룩은 나절로 다 잡았으니 의심치 말라는 호소로서 기술(奇術)적 탈바꿈을 하고 카멜레온식의 색채관리 묘기로 일신을 감싸는 것이다.어느 현인군자도 자기 역시 범민과 똑 같은 칠정육욕(七情六慾)을 가진, 자기만의 자물쇠가 따로 있는, 다시말하면 부처가 아니라는 이 점을 이실직고해야 할 것이다.   비판을 감내하는 것은 공정한 민주적 사회와 그의 건설 과정중에서 매개 사회 성원이 치러야 할 응분의 대가이다. 비판은 인간 자체의 발전과 독립적 의지의 형성을 추진하며 사회의 신경지 개척을 추진한다. 절묘한 옛말을 기억해야 한다. 양약은 입에 쓰거워도 치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려도 중행(中行)에 이롭다.(良药苦口利于病,衷言逆耳利于行)   비판을 정시하고 자기비판에 주저가 없고 반비판에 두려움이 없는 문명 정신의 수립은 삶의 질을 제고하고 자아를 초월하는 개량행위의 촉진제로서 사회의식의 자정작용(自淨作用)을 일으키는 최고급 이다. 모택동의 명언을 재추천한다.허심하면 진보하고 교오하면 낙후한다. (虛心使人進步,驕傲使人落後)   비판이 율동하는 사회의 건설은 칠난팔고의 험로로소 반드시 지나야 할 극악봉(極惡峰)이지만 말끔한 사회를 실현하는 첩경이기도 하다.공정과 공평을 기반으로 한 부정과 비리를 수시로 파헤치는 건전한 비판이 정착되는 세상이 천하일가가 화목한 살아가는 사회라 한다면 지탄을 받을 오류일가!                                                                                 
22    춘만 촌감(春晩寸感) 댓글:  조회:3086  추천:11  2011-02-08
춘만 촌감(春晩寸感)                                                             2011-02-04 세모날 술놀이를 마치고 제정신을 잃었다 가눴다하면서 과년(課年)으로 열리는 CCTV춘만(春節聯歡晩會)을 보고 듣는데 비몽사몽간에 아나운서의 프로필에서 라는 소리가 도두들리기에 채심하고 신경을 몰아갔다.   등장인물은 하북성의 어느 시골에서 왔다는 량가 여자애로서 기타 반주에 라는 제목의 노래를 잔잔히 부르는데 그 서글픈 가사와 은은한 멜로디는 어쩐지 심문을 밀고들며 가슴의 한 구석을 점령한다. 초라한 신세의 량갓집 규슈라는 홍보에 필이 꽂히어 오늘은 일부러 인터넷을 열어놓고 그 이력을 들춰보았다.   이름은 임월여(任月麗), 지체장애 아버지와 정신지체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면서 모성애란 맛보지 못한 기구한 운명의 불운아였다.가난 때문에 할수없이 초중 일학년에서 중퇴하고 가사를 돌보다 16세에 적빈여세의 집을 떠매고  살아야할 태짐을 고스란이 받아멘채 북경의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 일하게 된다.한 달이 지나 로임을 청구하니 주인 어른은 숙식을 해결해 줫으니 그것으로 만족해라! 게다가 이것저것 잘 하지도 못했으니 첫달 로임 300원은 전액 불지급이라는 볼호령이다. 해서 월여는 불지소향으로 막연하게 거리를 해매는데 우연히 지하도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객의 일거일동에 눈이 끌리어 유심하게 여겨보니 오가는 행인들이 가끔씩 관람료 삼아 연봇돈 삼아 돈냥을 놓고 간다. 눈이 번쩍 뜨인 월여는 나도 노래 기호와 장기가 있지 않는가, 어지간한 수입도 얻을 수 있는데하고 생각을 되작거리며 그 자리에서 거리 가창을 선택하는 결단을 결연히 내린다.   이때부터 월여는 수년간 북경 서단(西單)의 어느 지하도에서 만장홍진의 혼탁한 공기를 기껏 들이마시며 리상을 위하여 부모, 할머니의 공양을 위하여 날과 달을 이어가며 애처로운 노래를 부르고 불러왔다.각가지 잡색 잡물이 섞갈리고 천만가지 욕망을 분출하려 헤갈고 다니는 과객이 물결처럼 합수치는 지하도에서 차마 되뇌기 어려운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때론 애틋한 인간애도 받으면서 자기 생명의 에너지를 거침없이 풍진세상에 발산한다. 이번에 부른 가 바로 그때 야반삼경이면 향수에 젖어 고향과 친인들을 그리면서 막막하던 심경의 더덜이없는 토로였을 것이다.   시대도 일취월장으로 거듭나고 그 받침목이 되는 고신기술의 작용력도 가공할 만하다.어느때인가 한 현인군자가 임월여의 창가 장면을 몰래 촬영하여 웹사이트에 올려놓고 란 이름을 달아 놓은 것이 십진급수 속도로 확산 되며 폭발적 인기를 올리는 월여의 심외지사가 인터넷이란 세계에서 일어난다. 그는 네티즌  세상에서 일약 생의 귀감이 되어 장미빛 꿈을 부풀리는 젊은이들의 심금을 천둥같이 울려놓았다.이 민중 여론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월여는 뜻밖으로 이 나라 민중 예술의 성당이라 불리는 춘만의 화려한 무대에 올라선 것이다.   디스플레이에서 그 사적란의 리플을 번져보니 네티즌들의 감격에 겨운 리플이 쇄도하고 있있는데 개중의 두 개만을 골라 적어본다.   하나⊕ 두툼한 솜옷을 껴입고 손가락이 잘린 장갑을 끼고 헌 기타를 들고 노래 부르는 가련한 여자애, 한풍이 감아치는 겨울의 길가에서 생활과 이상을 위해 찬란한 생명의 빛발을 뿜어내는 순박한 월여를 진화장에 명브랜드 치장을 하고 흐물대며 지나가는 공작부인들에 견줘보면 비할 데도 없이 거룩하다. 적자생존의 칼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번화한 거리에서 월여의 애어린 심장은 새날의 희망을 알리는 장엄한 고동을 울려내지 않는가! 월여는 성결한 우상으로서 나의 가슴에 요지부동으로 자리 잡았다.   둘⊕ 월여는 남을 나무리지 않는다.그는 조물주가 자기에게 차려준 모든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나는 그보다 백배나 나은 인간락을 누리면서도 돈이 없고 출신이 미천하다고 타발하며 바라는 목표에 도전할 엄두도 못 내는데…. 월여는 천운을 냉시하고 속설의 타매와 속물적 인간들의 경멸을 초개같이 여기며 자기의 가녀린 두 발로 인생가치를 실현하는 고행길에 서슴없이 올랐다.오늘 임월여의 선량하고 깨끗한 심령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는 나의 혼탁한 영혼속에 쌓인 검부저기를 마구 쓰레질한다 .전도는 바로 눈앞에 있고 길은 바로 발밑에 있다.나는 임월여를 사랑한다.   춘절을 앞두고 수만만의 민공들은 도시인들이 천대하는 힘겨운 공사장에서 피땀을 쏟다가 몇백원의 도 마다하고 고향으로 집으로 달려간다. 부모﹑처자와 상봉하고 일가 단란의 천륜지락을 맛보려는 순민심은 분파(奔波)마냥 도도히 흘러간다. 중앙은 이 인간의 숭엄한 정염(情炎)을 실현시키려고 거국적 대책을 마련하면서 가능한 편리를 꾀해주고 뜨스하고 구전한 서비스를 펴놓았다.   오늘 거대한 추진력으로 이뤄지는 네티즌들의 힘의 모멘트도 무색한 상민인 임월여를 시청율이 최고라 자랑하는 CCTV의 특설무대에 떠밀어 올렸다.여기는 내로라하는 거물급 연예인들도 비집고 올라서려고 살인적 경쟁을 벌리는 몽환경이다.이 황홀경에서 월여의 애잔한 정감을 갈무리한 -망향가는 한결같은 운명을 감내하면서도 말없는 노동자들의 가슴만을 미어지게 한다..   사회의 진정한 유권자들인 민초서민들이 진짜 주인대접을 받는 새로운 역사적 화면이 아닌가는 감명에 가슴이 약간 뿌듯하였다.                                                                                
21    무산자의 혁명 로선 댓글:  조회:2697  추천:6  2011-01-17
무산자의 혁명 로선                                                                2011-01-14 연년이 요맘때 즈음이면 돌아오는 계절과 동반하여 대졸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려 나다니기 시작하는 격동이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된다.   나도는 구직자들의 면면은 따로따로이지만 고학력자들과 고실력자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가정이 유족하고 인맥을 갖추고 부모와 친인척들의 후광을 업은 삼골(三骨) 집의 낭자낭자(郎子娘子)들은 앞문을 열고 늘름거리다간 뒷문을 들락날락 하면서 진로의 바다를 주름잡으며 별걱정도 없이 상등석을 선점한다.약삭빠른 고명들의 더러는 앞재주 뒷재주에 귀신이 곡할 묘수까지 부리면서 지어는 세상의 이치나 자연의 섭리까지도 능멸하는 작태를 어떠해도 안하고 만천하에 들어내면서 선접하여 명당을 껴안는다. 허나 가난한 범골(凡骨)집의 갑남을녀은 너와 나를 위하여 젊음을 태워보려는 마음보 하나만을 딸랑 들고 말재주 손재주를 해가며 온 일신을 던져서 일하겠다는 가슴을  헤쳐보이며 합격을 갈망하는 외 별수는 없다.기업에서 일하다 보면 직원의 영입으로 숱한 애들과 마주하고는 얄팍하게 머리를 굴려대면서 그중 몇만을 살짝 골라 내고 간장을 태우는 다수들을 내쳐 버리는 것이 예상사인데 그래도 금전만능의 삭풍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떨치기 어려운 민망스런 감회로 하며 종종 가슴을 들먹거리게 된다.   힘과 부를 앞세우고 방약무인으로 설치는 세력가들은 언외이고 사회적으로 문제시되고 물목에 특히 부각되는 것은 이 줄짓는 약체들의 일자리고 안식처이고 이들의 힘을 끌어내어 가치 창조의 추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사업이다. 장미빛 꿈만으로 가슴팍을 부풀려오다가 적자생존이란 무한 경쟁의 잔혹한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 젊으신네들이 운명을 개변하고 보람있는 삶을 영생해 보자는 보짱만은 또랑또랑 보이지만 어떡하면 소망스러운 인생을 개척하며 잘 살겠는가는 기성 해법을 내놓으라면 아마 없을무 이외는 없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가 얼마나 큰가를 맛보지 못한 신참들, 생존경쟁의 담금질 속에서 무산자의 궁색한 처지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을 얻고 바라보는 대안에 이르려면 사이에 가로놓인 이 풍진세상의 얽히고설킨 딜레마 속을 어찌해야 원전활탈(圓轉滑脫)하게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내가 사는 도시에서 90년대에 단돈 몇백원을 꼬기꼬기 거머쥐고 들어와 피와 땀을 태워가며 백수로 자수성가한 몇몇 조선족 청년자제들의 이력을 들척이어 살피었는데 비록 각자의 하는 일과 개성과 가치관에는 현격한 차이가 보이지만 기중에서도 넘쳐나는 인간적인 사명감과 순리에 따라 만사를 풀어가는 준수한 지혜라는 공분모를 암중모색해 낼 수 있었는바 이것이 빈털털이들의 참고라도 되잖을가 궁리를 궁글려보았다..   우선은,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나는 어떤 인생을 보내야 하는가?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똑바로 확립하고 개인의 영달과 가정의 행복뿐이 아닌  사회의 발전과 타인의 복지에도 기여한다는 넓다란 흉금과 사회를 개인적 부의 공급원천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사업을 진행하는 건설장으로 삼고 공헌의 대가로 부와 영예를 일괄 취득하려는 넉넉한 마음새가 있었다.재언하면 타인에게 이익을 주는 사회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꿈과 비전을 갖고 도전적인 정신으로 노력을 경주한다.   둘째는,내가 무엇을 하겠는가보다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자신이 어떤 적성과 능력의 소재인가?를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의 제일 능사를 골라 잡는데 뛰어난 판단 능력을 품고 있다.사업의 선택과 아이템의 결정에서 늘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한가는 여부를 잘 분석하고 그 한도를 초월한다면 즉시 내침으로서 그때그때의 기권승(棄權勝)을 거둔다.     셋째는,평정한 삶의 자세로 만사에 임하는 엄숙한 태도의 소유자들이다.우선 기성적인 틀을 벗어난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삶의 모습으로 기존세계와 고정관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의식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새로운 자신을 꾸며가는 진취적인 성격을 가진 부류들이다.그들은 사회적인 협동과 공조적 인간관계의 확립에 유념하며 타인의 사상과 생활방식을 존중하고 타인을 포용하는 능력이 빼어나고 공존공영의 정신의 소유자들이다.또한  즉 경쟁자들과의 유대 관계의 유지를 사업 성공의 고리마디로 삼고 초지일관으로 관철한다.   넷째는,정확하게 살지만 총명하게 사는데서도 처세술이 대단히 능란하다.사회라는 바다에 올라서면 벼라별 순식간의 상황에 다 맞닥뜨리게 되는데 많은 일은 정의의 주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장면마다를 지혜롭게 실시간처리를 진행하고 몸을 빼돌리며 살아야는게 인간세상이다. 만용을 삼가하고 모든 사태를 유연하게 대처하며 진공과 방어,참여와 회피,경쟁과 화해.견지와 후퇴를 순시에 결정하는 마당에서 시점(時點),역점(力點),타점(打點)의 일순간을 준확하게 다잡는다.   다음은,참고 견디는 견인불발의 의지가 있으면서도 수시로 선택한 목표의 정확성을 점검해 보면서 불가능하다 싶으면 즉시 착수중인 최선을 포기하고 차선을 선택한다.차선이  최선임을 신속히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담은,좋은 뒷모습을 남기기에 신경을 도사린다.자신의 참다운 이미지를 타인들의 맘속에 새겨놓고 사회 일반에 진기록을 남기기 위해 일거수일투족에서 조신한 성품을 보이며 타남들이 자기에 대한 평판의 호불호를 시시로 확인해 본다.   마지막,친구 사귀기를 성공을 좌우하는 요부의 하나로, 난제를 해독하는 열쇠로 특히 중대시한다. 그들의 말 두 구절을 곧이곧대로 옮겨놓는다. ① 곡창으로 따라간 쥐는 낟알 먹다 도망가고 뒷간으로 따라간 쥐는 똥을 먹다 도망간다. ② 개를 따르면 측간으로 들어가고 호랑이를 따르면 수림으로 들어간다.   인생을 영위하는데 있어서는 각자위심으로 다양한 가닥을 잡고 있겠으나 사회에 발을 내미는 신출내기로서 타산지석의 모습으로부터 자기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충고를 얻어내는 것 역시 운명을 개변하는 하나의 지름길이란 점도 공성명수한 무산자들의 기본적인 좌우명이었다.                                                                                   
20    셋째 누나 댓글:  조회:3215  추천:8  2011-01-15
셋째 누나                                                               2010-12-13 北风吹、             북풍이 불어오고 雪花飘,             눈송이 날리네. 雪花飘飘、          눈송이 날리며 年来到。             설날이 오네. 风卷雪花、          눈꽃은 삭풍에 휘감기네, 在门外…             저 문 밖에서… 风打着门来门自开.그 바람살에 문이 절로 열려요.   我盼爹爹快回家,      아버지!어서 오세요..나는 기다려요 欢欢喜喜过个年.      아버지가 오시면 설을 쇨래요.     ,이 노래는 지난 세기  5.60년대부터 중국 누리의 구석구석마다에서 인구에 회자되던 민요이다.긴 세월을 두고 이 심금을 파고드는 노래 가사와 명쾌하고 은은한 멜로디는 고난속을 행방없이 헤매이던 참담한 시절을 회상하는 청산별곡으로서 어루러기 진 가슴을 어루쓸며 숙원(宿怨)을 묵새기는 명상곡이 되었었고 지금도 불후의 민족 명곡으로 중화문화의 터전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 콤팩디스크를 틀고 다시 듣노라니 일찍이 명계(冥界)로 떠난 누나의 깊은 추억속에 빠져 이 시간을 애상(哀想)과 함께 한다.뇌리에 각인된 셋째 누나의 살아 생전에 있었던 참모습의 재생이다..   욕망이난망(慾忘而難忘)의 유례없던 , 현재 50대라면 적어도 어느 정도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의 소위 계급대오청리에서 모범 공산당원이였고 모범 생산대장이였던 아버지는 공포의 역선풍에 깊숙히 말려 들어가시였다.빌미라면  아버지가 14세때 마을의 전체 어른들께 끌려 어데 갔다왔다는 죄였다. 진작 밝혀진 확실한 사실이고 그 시기의 말로도 문제 취급이 안 된다면서도 공개적 심사의 칼도마에 올려놓은 것이다.   아버지를 과녁으로 계급투쟁이 개시되었다. 이라면 금시초문의 혹형과 고문, 목욕과 무함이 전부였다.집체를 위해 헌신한 전부가 죄행이었고 집단을 위하여 자기 희생을 몰부은 대접이 몽둥이 ,주리틀기,욕설과 신체의 잔학인 것이다. 미증유의 혹형속에서 아버지는 7번이나 생명의 경각을 다투었는데  실신한 아버지를 끌어다 팽개치고 소생하여 잠간 걸음이 되다 싶으면 또 끌어다 심형준형(深刑埈刑)의 되풀이를 거뜬하게 진행하였었다. 몇개월이나 되풀이 되던 유린에 시달려 사지가 마비된 아버지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시지 못하였다.뭇사람들은 이젠 인생의 막을 내린다고 재기를 단념하였었다.하늘의 보우였던가?어머니 사랑의 부름이었던가? 아버지 원기를 돌리시고 인생의 벼랑에서 천천이 돌아서시였다. 그때 그 참상을 그릴 말과 글이 지금도 없다. 주먹크기로 일그러진 귓바퀴는 이승이 아버지 몸에 남겨놓은 였다.       그 68년도 가을의 어느 싸늘한 저녁이었다.어머니, 둘째누나, 셋째누나는 아버지의 비판투쟁대회에 참가하여 하늘에 사무치는 아버지의 을 인식하고 계급적 계선을 가르라는 엄명을 받았다.10대 초반의 나와  여동생은 너무도 어린 탓에 집에 남아있었다.차디찬 구들에서 공포에 떨며 등불도 감히 켜지 못하고 식구들의 귀가를 기다리며 우들거리던 마음은 무엇이엿던지 기억도 없다. 바스럭 소리만에도 온몸이 으스스 떨리였다.   한 밤중, 셋째 누나가 갑자기 달려오자 바람으로 얼굴을 파묻고 울고 또 울었다.아버지는 맞아 죽었고 어머니도 맞아 인사불성이 되었단다. 우리 집은 인젠 모든 것이 끝장이란다.그때 아버지가 어찌 소생하였을가?아직도 풀리지 않은 미제이다.   확연히 그때부터다.내성적이고 말수 적은 누나는 조용한 시간이 되면 노래를 부르며 정적의 시간을 풀어가는 차수가 부쩍 늘었고 처량한 선율은 몸서리 치던 그날의 추억을 불러오고 늘 나의 아픈 가슴을 헤집고 들어 허비군 하였다.오늘도 선혈이 흐르던 덴가슴을 만지며 천국의 누나를 따라 를 무성음으로 불러본다.   기황과 동란의 기나긴  터널을 손잡고 지나오던 셋째 누나, 날과 달을 이어 세월이 흘러 가도 누나가 더 그리워 진다.아무 사람은 하느님의 우주에 천국이 있다는데 그것이 진실이라면 저그만치 기쁘랴.그렇다면 어느땐가 누나에게 이승의 호소식도 전해드리는 눈물겨운 재회도 있으련만…                                               
19    백 락 론(伯 樂 論) 댓글:  조회:5327  추천:8  2010-12-31
           백 락 론(伯 樂 論)                                        2010-12-29 당나라 문인인 한유(韓愈)의 말: 세간에는 백락이 있은 뒤 천리마가 있게 되고 천리마는 흔하나 백락은 과소하다(世有伯樂, 然后有千里馬,千里馬常有,而伯樂不常有).   이 말구절은 오늘도 인재 등용에서 자주 회자되는 인용구로서 항간에선 마치 어떤 고정관념으로 자리매김을 한 모양새다.이 구시대에 내려온 어느 때 한 마디가 아직도 인재의 육성과 선발에서 카리스마적 작용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사상해방의 범주란 심각한 사안으로 문제 삼아 풀어봐야 할 과제일 같다.   이 구절은 생산력이 낙후하던 그 시대의 청운지사들이 장원급제를 간원하고 인생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의 상층을 건너다 보면서도 운수와 인맥과 선조 후광의 부족으로 어느 하느님의 사자인 백락이 자기를 선택하도록 갈망하면서 실토하던 반박지탄(斑駁之嘆)이다.   이 말의 뜻에 원색적 풀이를 해 본다면 천리마는 늘 있지만 백락은 가물에 콩씨 나듯 드문드문 언뜰거리고, 백락이 나와야 천리마가 있고, 백락이 없으면 천리마도 그냥저냥 보통 말이 아니면 병든 말의 취급을 받으며, 백락의 눈에  띄어야 천리마도 명마가 되고 아니라면 영원히 출세의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들은 제도적인 질곡에 얽매인 자기의 운명을 주재하는 주체가 아니라 만민 위에 군림한 이른바 백락에 의해 임의로 배포가 가능한 신하인 것이다.   백락의 천리마 고르기란 이 역사적 산물은 여느 귀인의 선택을 침울하게 기다리는 천리마들의 애처로운 비애였다. 예전 사회에서 등급에 의해 고착된 특정된 권위성적인 개체 혹은 군체 즉 백락이 천리마를 뽑는다면 여기는 분명히 치명적인 시공간적인 제한성이 뒷따른다.우선 이 백락 자신의 인식의 국한성이고, 그 시야의 불가피적인 협애성이고, 사회적 규준을 이탈하는 원인 해소가 불가능한 것이고, 사정(私情)과 사리(私利)와 사견(私見)과 사욕(私慾)의 추구로 인한 개인적인 이익과 취향의 우선 작용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의 의혹을 불식할 수 없어 대중의 불신임을 환기시킴으로서 사회적 모순을 부추기고 사회의 면면에 부정과 부조리 발생의 씨앗을 심어놓는 것이다.  개별적 우연성적인  예외는 차치하고…   사회가 일취월장으로 변화하는 오늘 백락이란 무엇이고 천리마란 무엇인가? 현대의 백락이란 경마장의 관중이며 심판관은 그들의 수명법관(受命法官)이며 천리마란 경기에 나선 선수 말중에서 뽑혀진 우량 말이다.   백락과 천리마는 평등한 사회의 성원으로서 .백락은 공인된 경기규칙에 따라 천리마를 선발하고 명마들은 그 지휘에 따라 치뛰고 내리뛰어 득점을 해야 한다.백락을 대변하는 집행자와 선수 말들 가운에서 누구든지 반칙한다면 그들은 동시에 벌을 받거나 축출당하는 대접을 감수해야 한다.   관변측이 백락의 지위에서 천리마를 선택하는 행위는 엄연한 룰에 따라 대중의 의지가 일이관지(一以貫之)되는 공개,공평,공정,감독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만호중생이 믿음직한 투명한 사업 과정이어야 한다.여기에는 추상같은 도덕율과 법율이 적용되어야 하며 자율과 타율을 전제하는 비리의 배지(培地)를 제거하는 강력한 제도적 장치가 뒷따라야 한다.   기업의 인재 선발 과정중에서 백락과 천리마는 상호이익의 관계.공급과 수요의 관계,교호승리(윈윈)의 평등한 관계이다.일정한 조건에서 양자의 위치가 서로 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회는 공평한 경기를 펼칠수 있는 경기장을 건설하고 그 기능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Upgrade)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서 유권자들이 자유로이 참가하고 공정한 평판이 내려질 수 있도록 취소불능의 보증수표를 제출해야 한다..   오늘의 천리마도 내일의 경기에서 조건 미달이면 가차없는 교체가 가능해야 하며 부적자라면 그 무리에서 명찰을 끌러버려야 한다.   매개 유권자들의 천부적인 권리로서의 백락의 자격과 천리마로 뽑힐 수 있는 자격은 보편적인 사회적 가치로서 고양되어야 한다.   백락선마(伯樂選馬)라고 은유되는 인재 선발에서의 재래적인 방식과 관념은 타파되고 있는 역사적 과정에 있으나 아직도 힘센 관성과 깊이 박힌 관념형태의 뿌리가  남아있는바 민주,평등,정의를 의미하는 불구일격 새장선마(不拘一格,賽場選馬)식 인재 선발의 사회적 메커니즘(Mechanism)의 확립은 상당한 이정을 걸어야 할 실천의 짐으로서 개혁의 길에 남아있다.                                                                                    
18    행 복 론(幸 福 論) 댓글:  조회:4093  추천:12  2010-12-23
            행 복 론(幸 福 論)                                                       2010-12-22 신문지를 번져보고 방송을 틀어보면  경제,GDP,돈으로 뒤덮히는 세태이다. GDP다,돈벌었다,배부르다, 편안하다, 따뜻하다 등등  소리는 귀가 따갑게 들려도 행복하다 행복졌다는 소리는 빗들으려 해도 듣지 못한다.돈 보따리가 크면 행복일가?인간의 진정한 목표가 과잉소비이고 포식난의(飽食暖衣)뿐이 아닐 같다.행복의 요체(要諦)는 무엇인가?인간의 진정한 행복의 가치가 어디 있는가 곰곰이 해아려 보고 싶다.   행복이란 심리적인 욕망이 만족되었을 때의 희열의 상태를 말한다.     동일한 조건에서 이 사람은 행복하고 저 사람은 불행할 수 있는 듯이 매인에게 걸맞는 행복의 기준을 명쾌한 개념으로 정의할 수가 없다.   행복이란 그의 생활환경,가치관에 따라 복잡하게 표현되지만 그 본질을 보면 상대성을 가지는 바 경제적 지수와 행복의 지수는 정비례 관계가 없는 것이 특징적이다.   개인의 차원에선 소득이 증가에 따라 총 행복감이 커지나 사회의 차원에서 소득이 증가가 동일한 비율로 행복을 체증(遞增)하지 않고 심지어 체감(遞減)하는 오늘이다.소득증대가 일정한 기준점에 이르면 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에 대한 추구는 본질적으로 물질과 정신면으로 구분되는데 정신면에서의행복이 물질면의 행복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서민들의 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집은 좁아도 살지만 맘이 좁으면 못 산다는 옛이야기가 행복에 대한 철학의 단적인 표현이다.   경제와 별개인 조건들이 행복감의 증대를 좌우하는 경우가 가시화되는 현대사회이다.  즉 교육환경, 고용환경, 사회안전망, 노후보장, 의료보장, 주거확보 등등 민생에 관련되는 조건들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추진하는 은 이런 맥락에서 추진되는 위업이다   자원을 최대한 절약하는 행복이어야 한다.아니라면 오늘의 행복은 전세대가 후세대의 행복을 약탈한 것이다.   자연을 아끼는 이성적인 행복이어야 한다.오늘의 살기에 혈안이 되어 후대에게 오가잡탕이 낭자한 터전을 떠넘긴다면 천추의 죄악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빈부격차의 확대가 아닌 축소 일로로 가는 행복이어야 한다.사회 재부의 대부분을 소수인이 차지하고 다수인이 박탈감속에서 허덕거리면 GDP의 높이와 관계없이 소수인의 행복은 빈자의 가슴에 한이 되고 빈부상쟁의 적대감을 조성하는 불행의 불씨가 된다.   정부 활동의 목표는 거대 물량의 생산이 아니고 물질,정신,문화,민주가 서로 조화되고 주권자인 전민이 공정하고 평등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조직하는 것이다.   미국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행복감이 으뜸인 나라로는 덴마크가 수위로 꼽히는데 그 원인으로 첫째는 최적화된 사회구조 즉 사업,가정,사회 생활에서 개개인의 평등이고 도농간 균형이고 빈부차이와 계층간의 차별의 최소화하기 위한 일관적인 전사회적 노력; 둘째는 사회성원 상호간의 신임 즉 개인과 개인간, 조직과 조직간,민간과 정부간의 친밀한 뉴대 관계었다.행복지수가 높은 사회의 특징이라면  전사회적으로 투터운 믿음이 깔려있는 분위기였고 법적 제도의 절대적 권위성, 사회적 공정, 전민적 공평성이 그의 근저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는 그것이였다.     행복이란 한 개 점이 아니고 무한한 연장선이다.어떤 설정한 행복의 목표에 도달하였다면 동시적으로 그 행복의 의미가 사라지고 새로운 기몽(綺夢)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인간 심리이다. 우리가 개혁과 개방을 진행하여 온포(溫飽)를 해결하고 경제와 사회의 조화적인 과학적 발전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이 객관성을 반영하는 역사적인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조화적인 사회 건설의 핵심적 내용은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전민의 희열과 안거락업을 실현하는 사회의 건립으로 봐도 무가내일 같다.                                                                                    
17    관 용 론(寬容論) 댓글:  조회:3420  추천:12  2010-12-15
관  용  론(寬容論)                                                      2010-12-14 생에서 얼기설기 얽힌 대인관계 속을 비집고 나오다 보면 갖가지 모순 충돌을 외면할 수 없으며 지어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시비곡직과 이해득실을 판가름하는 한계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이 경우 분노하거나 반격하거나 지어 손해를 안겨주려는 충동이 치미는 심리현상을 인간사회의 예상사라고 말하는 오늘이다.이때에 본능적인 공격은 삼가하고 이성적인 관용을 베푼다고 가닥을 잡는다면 시대적 인간의 참모습이라 봐야 마땅할 것이다.   관용이란 겸허하고 후덕한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의미이다.   생활에서 관용이 없어도 안되고 관용만 있어도 안된다.관용이 없으면 존중을 받을 수 없고 관용만 있다면 존엄을 상실한다.그러나 관용은 종시 불용의 밑절미가 되어야 하고 불용은 관용을 주입하는 들머리가 되어야 한다.   불의를 당할 때 관용을 선택하면 꼭 과거를 잃는 결과가 아닐 것이지만 불용을 선택하면 즉시 미래를 잃는 결과와 마주하게 될 소지를 안게 된다.   관용을 받는 데는 자괴지심을 가지고 관용하는데는 자율지심을 가져야 한다.   관용은 군자의 무기(武技)이고  불용은 소인의 천골이다.   관용이 관용을 낳고 불용은 불용을 낳는 것이 인간사라면 관용은 예지이고 불용은 단시이다.   관용은 남을 기쁘게 하면서 자기도 편안하고 불용은 남을 괴롭히고 자기도 불편하다.   남안테 구걸하여 받은 관용이 진실한 관용일 개연성이 아주 회박하다.   관용은 자기와 타인간의 차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화합,친밀,포용과 늘 자아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관용의 기본 자세이다.   자기 이익을 지키면서도 관용을 시발점으로 이기(利己)와 이타(利他)간의 임계점를 구해내는 영명한 지혜가 바로 현자의 인의지도(仁義之道)이다.   관용을 베푸는 데도 기지가 필요된다. 는 금언을 명기해야 한다.   사회의 정의를 위하여 때론 무자비한 칼부림식 엄징이 필요하다.그러나 이 찰나에도 되뇌어야 할 한 마디 말이 있다.는 프랑스의 근대 문인-위고의 명언이다.                                                                                
16    고 독 론 (孤獨論) 댓글:  조회:3230  추천:6  2010-12-15
고 독 론 (孤獨論)                                                       2010-12-14 누구도 가끔씩 고독에 시달리게 되고 고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디지털시대로 대변되는 지식시대에 들어서 개체 활력이 높아가고 인간의 활동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지며 적자생존이라는 소슬한 바람속에서 자아주의와 고군분투의 의식이 팽배해 짐에 따라 고독한 시간이 부쩍 늘어나는 시답잖은 현실이다. 만약 고독이 그 어떤 심리이상 혹은 특이한 성격에 연유하지 않는다면 고독의 원인은 많더라도 동일한 고독에서 받는 감수와 얻는 결과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판이할 것임이 틀림없다.   지자(智者)는 당연지사로 고독을 맞이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독은 창조의 시간이고 자아실현의 난득 호기(難得好機)이다.우자(愚者)는 극력 고독을 회피한다.그들에게 있어서 고독이란 시운불행이고  노이로제 촉발물로 변성(變性)할 개연성이 다분하다.   강자는 고독의 해탈을 위하여 대승적인 충실과 초탈을 시도하고 약자는 고독을 해탈하기 위하여 소승적인 위안과 자극을 추구한다.전자는 고독으로 승화되지만 후자는 고독으로 타락한다.   나태자에게 있어서 고독은 지독한 무료이기에 그는 무료할지라도 고독은 감내하지 못한다.지성인의 고독은 잠간의 적막이다.고독하고 적막한 사람은 냉철한 사고에 시간을 이용하고 고독하고 무료한 사람은 군짓으로 시간을 허비한다.   중인의 반대에 부딪쳐 고독할 때 군자는 일신을 점검하여 부족분을 미봉하고, 소인은 남의 원인과 결함만 꼬집고 불평을 쏟아낸다.   군중의 배척에 의해 고독할 때 호남아는 자유의지를 거듭 다지며 재기의 시기를 노리고 졸장부는 증오의 불씨를 심어놓고 복수의 기회를 겨냥한다.   선각자는 벗이 고독할 때 위안을 보내주고 후각자는 벗이 흥성할 때 상빈 대접을 받으려 서두른다.   경박한 사람은 것보기가 번성치만 내계가 허무하고 냉정한 사람은 고독한 듯하지만 가슴이 충실하고 희망이 창창하다.   고독의 그 순간을 알차게 경험하는 사람은 날카로운 혜안으로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한계성을 집어내어  책임 가능한 성숙된 행동을 영글림으로서 남보기도 끌끌한 지구촌의 시민으로 될 수 있다.                                                                                   
15    나의 아이들에게 댓글:  조회:3564  추천:11  2010-12-09
나의 아이들에게                                                        1999-12-18 찬바람이 세차게 창을 때리며 지나 가는구나!   아버지가 대련에서 맞고 보내는 다섯 번째의 이 겨울 추위는 여느 해보다 엄동에 설한까지 겹치는 같다. 기상예보를 보니 그쪽의 추위는 여기보다 훨씬 맵짜구나. 이상 기후가 일으킨 정서장애의 작용인지 독침 숙소에서 심드렁해나며 뭔가 보려해도 건성일 뿐 신경을 몰아갈 수 없고 읽으려 해도 도저히 손이 쥐지 않는다.너들이 보고 싶다는 연연한 마음 하나만을 허상 로켓에 달아 날려보낼 뿐이다.이 대자연의 횡포속에 잠겨있을 너들을 멀리두고 타향에서 처량하다는 한마디 이외에 할 말이 없구나.   아마도 천륜이라는 이 무서운 촉매제가 골육지친의 끈끈한 정에 더 큰 활성을 불어넣어 아이들에 대한 경경불매의 그리움을 돋구는지도 모르겠다. 옛사람들이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의 은정을 안다던데 아버지도 예외일 수 없을 같다.사랑이란 는 말이 새삼스레 떠 오른다.딴 사람들은 몰라도 나에는 똑 맞아떨어지는 잠언적 명언이다.만약 내가 자식 사랑의 1/10로 부모를 공경했더라도 고향에 적어도 아버지의 번듯한 효성비가 세워져 있을 지도 모른다. 너희들도 때가 되면 잘 알 것으로 믿는 아버지기에 이 부류의 노변담은 더 지그럭거리지 않겠다.   오늘은 요즘 세월과 짝을 지은 너들의 일언일행에서 성숙을 의미하는 영액이 간간이 슴새고 있음을 뜨겁게 느끼며 철부지 취급도 인젠 지나간 역사자료로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가다듬고 있다. 이전엔 간혹 우리들 사이의 한담설화에서 내가 지나온 나날과 오늘의 면면을 대비하여 시비를 불러오면 너희들은 일치 단결하여 아버지는 고리타분한 고착관념에 머물렀다고 비판하고 그건 그때의 사정이 아니였나고, 오늘은 확 변하고 있다고 항변하였었지.비록 그땐 할 말의 일부만 한다는 맥락에서 너의들 말을  많이 들어두고 있었지만 오늘은 성숙되는 너들을 보며 다만 아버지가 살아오면서 세상사에 쌓아온 체험과 선조들이 물려준 의지만을 자꾸 되풀이하여 너들이 참고라도 하였으면 하는 진심만은 양지(諒知)해 달라고 구걸해 보고 싶다.이것은 선배들이 고행길에서 피와 땀의 대가로 얻어온 무가지보라고 가슴에 사무치게 확신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지나간 역사의 장면을 돌려놓고 이야기해 보겠다.   내가 어린시절의 이만큼 어느 때의 차디찬 겨울 저녁, 너의 할아버지가 동치미 물을 마셔가며 흥부와 놀부,농부와 뱀,거부기와 토끼 달리기 등 민담들을 주시면서 선조들이 나락같이 쌓아논 삶의 섭리를 들려주시고, 인생길에서 얼마나 많은 비바람과 설한풍의 세례를 겪어야 하며 얼마나 긴 형극의 길과 산을 넘어야 한다는 불가피성을 가르치시고, 명기하여야 할 덕목들을 또박또박 가르치군 하셨단다. 그때 코를 흘리며 어렴풋이 들어두었던 이치들이 오늘에 돌이키니 맘속에서 짙은 감동으로 살아나군 한다.   숨막히듯 지지리한 가난속에서 할아버지 생활의 힘의 원천지가 바로 대자연과의 교전에서 갈무리된 티없이 맑은 생활에 대한 갈망과 한 인간으로서의 사명감에 대한 신념이 아니였겠는가!고 나이가 든 오늘에야 알게되니 너무도 늦게 드는 셈을 너들에게 이실직고한다.옥죄이는 궁핍속에서 할아버지가 태고순민의 끈끈한 절개로 빈부를 초개같이 여기고 참인간으로서의 길만을 올곧게 나가시던 당찬 모습은 아직도 우리들의 귀감이 되고 가족의 얼과 자긍으로 부조전래(父祖傳來)되고 있음을 정중히 재확인하는 바이다.너희들에게 이 선지(先志)를 계승하고 란 조상의 이념을 만고불변의 가훈으로 받들고 이어가야 한다는 절망(切望)을 말해주고 싶다.   너희들은 아직 인간사의 간고라는 쓴맛을 모를 바이지만 삶의 길에는 확트인 대통로도  구름다리에 돌다리도 있을 게지만 기나긴 천리만리 길은 길잡이가 없이 홀로만 걸어야하는 어두운 함정와 뭉글대는 소택지와 가시덤불이 쫙 깔린 수림길의 연속이란 현실을 미리 알아둬야만 된다.불운한 인생을 지나온 아버지는 너희들만은 나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열망이 있기에 사회의 초행길에 오르기 전에 길채비가 잘 되고 맞받아 올 만난을 슬기롭게 피해갈 수 있는 너들이라면 이상의 안심은 없을 것이다.   되풀이 한다만 벼아프고 괴로워도 우리 가족의 정혼을 철 같은 불문율로 굳게 지키기 바란다.한생을 결정하는 순간은 우연한 어느 한 발자국이므로 는 선인들의 부탁을 시시각각 명기하고 매 한 발자국을 꼭 맞게 내디디여라. 이담에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돌고 에돌아 가더라도 목표를 향해 끝끝내 나아가라.장애나 난관을 이유로 주저앉거나 대책없이 방황한다면 재기 불능의 패배자로 전락되고 말 것이니 재삼 부탁이지만 앞길이 천험하더라도 무소처럼 드팀없이 나가거라.   너들도 오래잖아 풍진세상의 고해에 뛰여들게 되는구나.너들이 오로지 정의로운 길에 서 있다면 서태지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마이클잭슨의 춤을 따라 추든 아버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맘 속으론 영원한 행복을 빌고 빌면서…   달력을 보니 묵은 해도 며칠이면 끝막이를 하는구나.이 편지를 너들의 새해 행운을 기원하는 마지막 축원으로 보낸다. 이 겨울의 강추위가 땅위의 만물을 깔끔이 얼궈놓아도 백화만발의 봄의 유혹은 이기지 못한다. 무르녹는 새봄에 너들과 손잡고 풍류를 즐기는 새날을 머리에 그려본다.                                                                                    
14    자식의 미래를 선택하는 순간에… 댓글:  조회:2396  추천:43  2010-12-09
자식의 미래를 선택하는 순간에…                                                       2010-11-20 근간에 고향 친구와의 한담에서 조선족 애들의 한족 학교 입학이 눈에 띄게 증가되어 어떤 한족반은 조선족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소식을 귀담아들었다. 아예 유치원부터 한족 유치원에 보내기도 하는데 주요한 원인이라면 중국에서 살면 한어를 잘 해야 하고 조선어는 얼추 글말이나 되면 충분하다는 이유이고 어떤 집은 자초에 몰라도 상관없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회사에 30대초반의 조선어 부지의 조선족 직원이 있는데 70년대 유치원부터 한족반이여서 조선어가 감감부지인데 조선족 학교의 진학이 충분히 가능하면서도 포기해 버린 부모들을 나무리며  유감스러운 군소리를 곱씹군 한다.이 직원의  곤혹을 일으키는 현상이 오늘도 여봐란듯이 맥락을 이어가니 너무도 탈시대적 우를 범하는 행실이 아니냐?고 웃음이 나간다. 후대의 미래에 너무나 간이한 판가름을 내려버리는 부모들의 호담한 독선에 안타까운 걱정이 부풀어난다.   부모의 자식사랑이야 더 해질지언정 티끌 변함이 있으랴! 눈에 꼭 밀어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다.생명까지 얹어줘도 채 주지 못하는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허나 진로를 결정하는 분수령에서 애자지정의 권리행위가 장래에 득일가 해일가를 심각히 고민하고 가치판단을 내리라는 뜻으로 옛어른들의 숙고이후 움직이라!는 삼사이후행(三思而後行)을 권고하며 몇개 제안을 감행해 보려한다.   문제 하나, 유소년기 자식의 첫걸음의 선택은 대체로 부모들의 몫인데 결과의 출현은 10~20년 이후이라는 점을 명기하고 시세의 사회를 잘 판단해야 한다.중국의 발전과 세계화 수준의 제고,중한 교류의 미증유의 발전,조선반도의 역사적인 변화,조선족 인구의 급감에 의한 조선족 인재 수요의 상대적 급증 등등 시대적인 변화에 부응하여야 한다는 지론을 되풀이 하고 싶다.이 무연한 기회를 어떤 사람들이 잡을 것인가? 기성세대들에게 다각도의 비교연구를  간권한다. 눈앞의 기지수만 보고 출현가능의 미지수를 보지 못하고 패착을 둠으로서 애들의 순로를 차단하여 후회를 남긴 전례를 많이 보아왔다.자식의 미래를 선택할 때 먼 앞날을 보라는 간언(諫言)을 자꾸 되풀이 한다.   문제 둘, 중국이기 때문에 조선어를 더 잘 배워야 한다.중국어는 모국어로서 수시로,임의로,저절로 배워지는 호조건인 반면 조선어 공부는 학교가 아니면 바늘귀만큼도 안되는 악조건인데 학교교육에서 이탈하여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도 소아적인 사고방식이다. 조선족 고중을 졸업하면 익숙한 두개 언어를 지니고 즉각 두개 문화권에서 드나들며 자기 인생을 영위하는 행운을 누리는데 뭇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옥답을 버리고 별개 전답을 일구려는 근시안적  작태가 의구스럽다.타향살이의 세월에 조선어를 팽개친 젊은이들이 한어와 영어를 남달리 잘하는 위인을 본적이 없다.어쩐지 조선어를 잘하면 한어도 잘한다.조선말을 배우면 한어를 못한다는 직접추리는 도를 넘치는 단세포적 발상이 아닐가?   문제 셋, 조선족은 자기 문화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 내가 사는 도시의 조선족 사장들은 전부가 중한 두 문화를 꿰뚫는 고수들이다.조선어를 잘 배우면 적어도 또 하나 세상의 을 소지하는 우세를 가진다. 켤코 방구리로 볼 수 없는 중한교류의 영역과 한민족 네트웍에서 조선족은 중국 공민이라는 남다른 장점,즉 이것이 우리의 우세라는 점 명기하자!조선어를 잘하면 지식시대의 주도권을 잡는데서 하나의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조선족의 첫째 우세가 중한 두 개 문화권에서 동시에 활개치게 되는 바로 이것이 아닐가!? 극소수의 예외는 추후 이야기로 남겨두고……   문제 넷, 진로 선택은 자녀의 차례이다.자식이 인생의 주인이고 부모는 조연일 따름일 뿐 부모 책임은 어느땐가 자체로 자기의 개성과 적성과 가치관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이것이 순리이다.자기의 일방적인 탐욕으로 무리수를 두어 애들의 인생에 피멍을 남긴다면 자식의 비가역적 아픔이 되는 것이다.자기의 생각.능력,수준에 따라서 다양한 분야에서,가급적으로 여러개의 문화 천지에서 스스로 전도를 결정하도록 이끌어 세계 공민으로 되도록 기반을 다져주는 선조라면 더욱 빛발치는 갈채가 차려진다.   문제 다섯, 용 꼬리보다 뱀 대가리가 되도록 가르쳐라.조선어를 잘 하면 적어도 골목대장이라도 우두머리가 될 개연성이 퍽 커진다는 점은 더 말할 것도 없다.내 도시에서 회사의 일인자 조선족 중 조선어를 모르고 성공한 위인을 손가락을 꼽아도 번번히 꼽히지 않았다.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에 당신의 무지한 소치로 오착이 생겨 그 업보를 그들이 떠메고 간다면 한심한 일이다.바로 생존경쟁의 소슬바람이 몰아치는 무정세월에 말려들 아이들인데 인생의 초행길에서 각고(刻苦)의 고통을 감내하며 스스로의 변신을 통하여 진화를 꾀하는 지혜를 키워주고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부모들의 여세구진(與世俱進)의 야무진 교육철학이 꼭 필요하다는 교훈을 명념하기 바란다.     새지식과 새문화가 도도히 밀려오는 격변을 바라보며 정적(靜的)이 아닌 동적(動的)인 열린 사고로 후대에게 울창한 앞날을 그려 주자!                                                                                  
13    선생님은 조선어로… 댓글:  조회:3288  추천:12  2010-12-06
  선생님은 조선어로…                                                         2010-11-11 회사에 우수한 신참 조선족 여직원이 있다. 맡겨진 제반 업무를  오달지게 완수하고 주위 사원들과 상호협력이 원활할 뿐만 아니라 인정미 푼푼하고 사내의 업무 추진에서 알찬 작용력을 발휘함으로 상사와 직원들의 갈채를 만끽하는 대졸생다. 또한 높은 학구열의 소유자라 업무 관련의 지식외에 영어,한국어 등 여러면의 공부에도 각고면려하는 모습이 은은히 보이여 인상적인 뒷맵시가 참으로 기특하다.   회사내 소속 부서중 유일한 조선족여서 한국과의 연락, 중한문 번역 등이 주업무인데 일단 문장을 주고받는 데는 차가 있을지언정 큰 무리가 없으나 대화가 문제거리로 부각되면서 멋쩍은 장면이 종종 발생한다.듣기라면 두세 마디 안팍에 귀에서 윙윙 소리로 울리고 대화라면 입술을 강력접착제로 붙혀놓은 듯 안 열리여 성질이 급한 한국인을 만나면 곤혹에 빠져 눈물이 찔끔 날 때도 몇 번 있었단다.기업경영은 문을 여는 순간부터 언어 줄다리기인데 기업 영리의 극대화를 전제로 이익의 합일점을 찾아내는 속이 끓어나는 공방취사(攻防取捨) 동작의 연속이기에 나약한 신출내기들에겐 늘 있을 법한 예상사이다.   그가 자라온 내력을 들어 보았다.조선족의 산재 지역에서 태여나 유년기부터 집 밖의 생활은 한어 환경이였고 조선족 중소학교를 다녔어도 어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은 한어 교수로 진행되었었다.과외의 모든 활동도 거의 한어인데다 애들과의 놀음놀이는 불언가지로 한어 대화이고 어문 선생님들도 수강외는 다부분 한어를 쓰신다는 것이다. 현재 자기의 수준도 부모들의 조선어에 대한 집착과 본인의 최고의 노력에 의해 얻어낸 최대의 수확량이란다.작문 수준이 이 정도라면 노력파의 실말임이 틀림없을 것으로 믿음이 갔다.   본인의 이야기다.사회에 첫출발하여 교감이 넓어지면서 최우선의 느낌이라면 조선어의 가치와 사용가치 그리고 학교에서의 민족어 교육의 중요성과 교학의 과학성었다.물론 조선족 교육이 유례없는 좌충우돌하는 현실에서 나의 성장 과정의 전반에는 선생님들의 비지땀과 노고가 깔려있다는 점 잊을 수 없다. 다만 사회실천에서 받은 감명이라면 문자,문장 교육도 물론 중요하지만 홀시 불가의 긴요한 부분인 선생님들의 조선어 구사가 부족하였다는 유감이 아련히 남아있다.특히 이점을 지적하는 까닭은 선생님들과의 매 한마디 면담이 으뜸의 공부였던 기억이 새삼스럽기 때문이다.스승들이 교학과 학교 생활에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최대한으로 조선어를 사용함으로서 학생들의 듣기와 말하기의 환경을 조성하는 이점은 중소학교 12년이란 장장 세월에서 너무 큰 언어교육이 아닐 수 없다.나는 선생님들께 최대한으로 제자들에게 조선어를 들려주시고 발언을 계발하시는 수교방식이 바람직하다는 간곡한 희망을 전달하고 싶다. 직원의 실토정이다.내가 실감한 몇개 지역의 조선족 학교들에서의 현실과 대조하면 직원의 이 지론은 진솔한 속내의 표출임을 확신하게 된다.   조선족 교육이 칼바람 도전에 직면하고 다사다난이 산적한 작금에 선생님들을  향해 왈가불가 부담되는 푸념을 던지기는 너무 안스러운 현실이다. 그래도 어찌보면 오늘은 범조선족을 대상으로 한 중소학교 교육에서 선생님들의 신고스런 노동과 여사구진(與世俱進),임기응변의 뛰어난 슬기가 날로 더 필요해지는 무정세월이다.허나 기업인으로서 인력을 영입하는 과정중 필수 요건인 민족어 교육수준이 하강 일로로 나가는 현실에 대해 톤(Tone)을 높혀 강조하기 싶어진다. .하여 자사 직원의 염원에 동조하면서 조선족 학교, 더욱이는 산재 지역의 학교들에서 교육 실무의 전반에 걸쳐, 회화 교육을 극대화하시는 지혜로운 대안을 찾으면 어떨가?우선은 선생님들이 학교 생활의 전부에서 가급적으로 조선어를 구사하시면 바람직하다는 건의안을 제출한다.   조선족 교육의 간고성,중요성,절박성이 일익 높아가고 다양한 지원(至願)이 역사적 과제로 가로놓인 오늘, 후대 육성의 키를 잡고 노심초사하시는 선생님들,바로이들이 민족 앞날의 운명신이라는 선언을 되풀이하게 된다.조선족이 잘 사는 미래, 민족 수림속에서 우수한 구성원이 되는 미래,  남에게 우르러 보이는 미래를 위해 선생님들이 언어를 핵심으로 하는 조선족 문화의 전수(傳授)에 더더욱 호기만발하시기 간구하는 바이다.                                                                                  
12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댓글:  조회:3574  추천:9  2010-12-02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2010-11-29 회사 직원이 업무 처리의 차질로 거래처에 손실을 조성하여 결국 당사가 클레임에 걸리는 뜻밖의 불이익을 당하였다. 기업의 황제라는 고객의 경영에 손상을 입히고 심기까지 건드려 녹아웃에 얻어 맞을 최악의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최우선으로 거래처를 방문하여 이마 껍질이 벗겨지도록 고두사죄하면서 다시 발생하면 어떠어떠한 벌이라도 감내하겠다는 숱한 를 내고 일단 사태는 마무리 지었다.   사고의 전말을 캐내고 사원에 대한 비평은 당연지사이다.직원은 이러이러해서 잘못을 저질러 참 부끄럽고 회사의 이메지에도 새까만 물감이 튕기는 악과를 빚어내서 황송한데 속담에 라 하였거늘 이번 교훈을 거울로 절대로 재범은 않겠다는 맹세를 거듭 하면서 재발생하면 전액 배상을 한다는 호언장담을 내뿜었다.들어보니 맘속으로 깨우치는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여 포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그래도 어디가 미적지근하여 한참 고민을 자초하였다.   이튿날 직원들의 조회를 불러 이 사건을 모델로 치켜들고 교육의 목적론을 강조하면서 생각의 두루마리를 한참 풀어대는 촌극을 벌였다.   테마는 이다.   지난날 이 성구는 사회생활에서 널리 활용되었었고 오늘 역시 사업자들이나 공부 장소들에서 자주 회자되는 빈도가 높은 숙어라 하겠다.허나 아날로그 시대에 널리 씌여지던 이 문구가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그 함의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여 업그레이드 시켜야 될 필요성을 바짝 체감하게 된다. 아래 몇개 부동한 각도에서 이 명제를 조명한다.   우선 철학적인 면에서 투영해 본다. 성공과 실패는 대립통일의 관계로서 성공이 실패를 자초한는 화근이 되고, 실패의 아픔이 황홀한 성공의 단초가 되기도 하며; 다른 측면에서, 실패는 새 도전을 촉구하는 서릿발 같은 고들개채찍이고 될 수 있고 성공은 협애한 인간들이 자멸을 따오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즉 실패는 일정한 조건에서 성공에로 전화하고 성공도 일정한 조건에서 실패로 전화하다는 이런 의미로 성패의 관계를 이해하면 알맞을 것이다.가 줄곳 진리로서 전래되어 온 당위성이 바로 이 변증법에 연유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실천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본다. 우선,성공하려면 개변하려는 객관사물이 자기의 노력에 의해 예상했던 가공물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불가능한 물건에 노력을 억수로 퍼부어도 실패의 연속일 뿐 그  실패는 실패의 어머니일 뿐 결코  성공의 어머니로 될 수 없다. 다음,가공자가 자기의 능력상 그 대상을 개조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하고 싶은 게가 아니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능력이 반푼이면서 분수에 넘치는 도전으로 웃음거리를 만들어 낸 사례도 많고많다. 그다음,가공자는 끈질긴 의지, 사명감과 지혜의 소유자여야 한다. 즉 실천 과정에는 냉정한 사고,불굴의 신념과 림기응변의 재주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는 성공에서의 불가결의 조건이다. 천시,지리,인화등 조건을 파악하고 실천력을 걸출하게 발휘한다면 실패라는 이 가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이 경우 이른바 실패는 실패가 아니고 예정된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성공에의 접근이고 큰 성공중의 작은 성공으로 봐야 마땅하다. 이러한 의외에 봉착하여 기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근원을 찾고 정확한 방향으로 핸들을 돌린다면 그는 성공을 재촉하는 기폭제로도 작용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실패는 실질상 작은 성공이고 이 작은 성공의 루적이 최후 성공을 이룬다.즉 이다.   불가능한 목표를 선택하였다면 신속히 포기쪽으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아니라면 작은 실패는 더욱 큰 실패의 어머니로 되고 만다.목표가 정확하면 초기의 소위 실패는 최후 성공의 한 단계가 된다.결국 실천적 의미에서는 이다.   론리적 면에서의 관찰해 본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면: 실패가 앞세워야만 성공이 거둘수 있는가.? 실패란 어머니가 성공을 출산한다면 그럼 그 어머니는 꼭 실패여야 하는가? 실패없이 성공하는 사례도 많은데 이 성공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실패하였다면 이 어머니는 성공이란 를 꼭 출산하게 되는가? 첫 실패가 치명타로 되어 완벽한 실패로 종치는 경우는 뭐라 해야 되는가? 얼핏 생각으로 해답을 해도 가 되고 말 것이다.   귀납한다면 란 명제는 우리에게  사업 과정에서 반드시 모순과 실패의 내적 관계를 투철히 파악하고, 실천적 면에서 냉철한 분석과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론리적인 면에서의 정확한 판단과 추리의 사유방식을 갖춰야 한다는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만약 이 사상로선이 금과옥조로 된다면 그가 나가는 길에는 비록 우여곡절은 있을지라도 성공적인 삶은 꼭 이뤄지리라 밑는다.   당사 모씨의 실수는 실패가 아닌 사업 과정 중의 불가피적 좌절이라는 점은 충분한 이해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의 함의를 오해하고 심지어 방패막이로 역이용하면서 착오를 변명하는 자위(自慰)의 무기로 사용한다면 회사는 물론 본인의 미래에도 상당한 암초가 따른다는 경고를 내리고 이야기를 끝맺었다. 성공하려면 패배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성공의 정상에 오르는 디딤돌로, 성공의 전당에 진입하는 통과의례로, 보람된 성공을 위한 자아 담금질로 승화시켜 사업 과정에서 힘있는 발휘력을 보인다면 그 인생은 이룸의 연속인 입신출세의 빛나는 여정일 것이다.   성공의 뒤뜰에도 패조(敗兆)의 암운이 서려있고 실패라는 궁상에도 희망의 서광이 반침(伴寢)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성공과 실패는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완전무결이라는 욕망에 따라 확연히 구분을 지으려 한다면  경계색이 모호할 뿐더러 그 사이의 기묘한 연관성을 간과할 수도 없다.그럴진대 성공에 찬미를 보내면서 실패에도 격려와 찬사을 보내준다면 자타의 번영에 백익무해할 것이다.
11    조부의 손자 <사랑> 댓글:  조회:3615  추천:8  2010-11-30
          조부의 손자                                                         김인섭       2010-11-05 먹고살다 보면 식체가 올 때 산패액을 토설해 버려야 속이 시원하듯 자기 일이 아니면서도 불만이 쌓인 경우에 타인에게 실토하면 사뿐하던 감을 누구도 한두 번 쯤은 경험했음 직하다.본인도 가슴에 얹힌 지난 실사를 하나 되끄집어다 뭇사람들 앞에 까놓아 신물을 쏟아내는 듯한 쾌감을 맛보려 시도한다.   늘 죽이 맞아 길사﹑액사﹑연중행사는 물론 일상 생활에서도 빠짐없는 정보교환과 서로돕기를 꼬박꼬박 해오는 현재 진행형의 지기지우(知己之友)이다.   어느 때였던가 오래간만인데 소회도 풀겸 한잔 하자는 유력한 주문이 건너왔다.보고프던 차라 일을 내치고 달려가 마주앉아 대작에 붙어 통음(痛飮)하니 그야말로 감지감미 그 자체였다.사회 생활상에 대한 견해부터 세상살이의 천자만태, 고담준론,한담설화로 도도한 맞장구를 치면서 좌석을 아울러나갔다.주흥에 맞춰 아들, 며느리 순번에 뒤이어 5살 손자도 조부의 어명대로 신통방통한 자세로 술을 따른다.조부의 희열이 극점에 이르는 모양이다.살아오다 아들이 아니고 손자를 본게 젤 큰 기쁨이고 무상의 행복이며 눈에 집어 넣어도 아프지 않게 이뻐서 기사지경[幾死之境]※이란다.하늘이 맺어 준 천륜지정을 틀림없었다.   뒤따라 말발을 세우며 손자의 격찬을 주워섬긴다.총명이 절세가인이다부터 자랑 아이템을 쭉 나열하고 요놈이 증손자를 내놓을 때까지 살겠다며 자답으로는 요것을 조선족 학교에 절대 안 보낸다는 결론으로 찬미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낌새가 이상하여 하니 즉답이 야,중국에서 살문 한어면 되지 뭐 ××같은 조선어야.조선족 학교엔 안 보낸다!는 단호한 입장을 재확인한다. 하,이놈이 취중에 정신없는 소리를 하네.추문하려다 흐리터분한지라 집에 돌아와 곯아떨어졌다.   후일이다.함께 주말을 보내며 그날의 설화를 끄집어내며 아들은 어른답고 며느리는 숙녀답고 아이도 똑똑하다 등등 발라맞추며 손자를 유치원부터 한족 학교에 보낸다는 진위를 변죽치기로 의중 타진을 해 보았다.옌장,취중에 한 말들을  글자하나 틀림없이 되풀며  중국이니 한어면 충분하다는 벽설을 집요하게 고집한다.   네는 조선족이기에 국유기업의 당위서기도 했고 아들은 조선족이기에 한국 거래처와 장사를 해 집을 사고 차도 사고 남하는 흉내는 다 하며 살잖아? 며느리도 그 덕에 한국 기업에서 웬만한 월급을 받는데 말이야. 중국에서 살길래 조선어를 더 잘 배워야 될거 아냐? 그 언어 값이 얼만데 그리도 조련하게 포기하느냐?고 간단한 등가교환 원리를 달아가며 당위성을 소상하게 설명하였으나 재차 바람이 휙 날리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다는 결론을 재반복하는 것이다.부언이라면 거기다 영어를 잘 하면 그만이야!내 손자일은 내가 하는 탓이다!며 결연히 결정권을 행사하면서 의 요구를 선언해 온다. 구변머리 불량인지라 주억대면서 대간사충(大奸似忠)의 계교를 부려 장면을 의뭉스럽게 눙쳐버렸다.가락산 중미합작소의 형구들을 전부 빌어다 고문을 들이대도 강철같은 의지는 구푸릴 수 없겠는데 더 말해도 이 되겠다고 생각되어 재언급을 접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심중 매듭을 짓고 말았다. 내가 다 뭔데, 하물며 조부의 가감없는 진정한 사랑인데야….   그후 만남에서는 이 논제에는 완벽하게 불언불어의 원칙을 붙혀 놓았다.그래도 민족에 대한 도를 넘는 경시와  후대 거취에 대한 거친 결론이 왜서 급기야 문화 이탈과 이어지는가? 가슴이 알알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우금(至于今)※도 아지못게라!※ 이 친구가 왜 자기 고유문화에 반기를 번쩍 치켜드는가? 조선족인 이유로 감탕을 톡톡히 들이마시면서도 말이다.타민족이라면 감지덕지하며 민족 우수성에 고음파 홍보를 걸쭉하게도 해댈텐데…, 머리를 광자로켓 속도로 굴려봐도 이해가 안 갔다.혹시 조선족에 무슨 서리서리 맺힌 한이 있을가 싶으면 이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애의 골수에 박힌 문화를 내뽑아버리고 생다른 문화에 포복전진을 시키며, 원조(元祖)의 터전과 전생의 연을 달리시키는 결행인데 철없는 아해에게 문화 편식을 시킨다면 어느때엔가 필히 이 생길게 아닌가!.적어도 천연물 을 섭취하는 천부자격을 박탈하는 애석한 처분이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그것도 자의가 아니고 선배에 의해 철모르는 시절에 말이다.자유선택이 아닌 이 짐짝은 손자가 조부에게 떠밀리어 떠메고 만리 여로를 내걸어야 한다.어느땐가 물정이 들어 인생 선택의 대실패라 뼈아프게 통탄하면 어떡할 작정인고! 명쾌한 해답은 후일이겠지만…   대련의 모 조선족 교수는 5개 언어를 무기로 과학연구,해외교류,교학지도 등 다방면에서 중견으로 학교와 사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과시한다.현재 나의 사업중 중국어를 제외하면 한민족 문화가 제일 값진 행세를 하는데 주요하게 전세계의 한민족 학자들과의 협력에서 문턱 없는 문화가 뒷바침되기 때문이다.오늘의 민족 교육의 실태를 보고 세계화 추세를 보면 약 10년 후부터 조선족 인재들이 대량 수요될 텐데 바로 지금부터 미래 지향적 민족 인재의 육성이 시급하다.교수가 역설하는 견해이다.   대련의 조선족 경제인들,급속도로 발전하는 강대국인 중국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에게는 한민족 전지구적 네트와의 긴밀한 연계, 한반도의 미래 변화에 부응할수 있는 주동적인 태세를 갖추며 해 나가는 것이 우리 세대의 역사적 과업이고 중임이며 역시 조선족만에 차려진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절감하며 공감대를 이룬지 오래다. 민족 문화를 지양하고 발전시켜야 자체 발전과 더불어 나라에의 공헌을 극대화시키고 자기 위상도 배가로 제고할 수 있다고들 설파한다.내 친구의 논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심중소회들인데 이런 타입의 언설이 구년친구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아 막무가내이니 걱정도 팔자인 골샌님은 싱거운 걱정뿐이다.   순결하고 희맑은 손자의 심령에 막잡이로 락서를 감행하는 조부이다.선조란 신성한 권리로 손주의 방향타를 갈팡질팡 휘둘러대는 선배, 이는 로 번지지 않을가도 고심이다.진짜 편협하고 일그러진 가치관의 횡포가 아닌가? 의심스러워도 별수없는 자신이 우스꽝스러워 난감하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윤리적 무기로 손자의 출입 권리를 원천봉쇄하고 깔끔히 차단하려는 할아버지,정말 사랑일가? 진짜 가해일가? 숙시숙비(孰是孰非)※의 해답자는 미래의 이 옥동이다.어쩌면 이 귀동자가 동량지재로 자라는 그날까지 생명의 연장선을 그어가고 싶어진다.                                                                                                      ※주   1.              아지못게라:  ‘알 수 없다’의 감탄조 2.       지우금 [至于今]: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3.  숙시숙비[熟是熟非]: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분명하지 않음    
10    신<맹인모상(盲人摸象)> 댓글:  조회:3260  추천:10  2010-11-25
                                                              신                                                                2010-10-04 글을 보다보면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라는 사자성구-맹인모상(盲人摸象)이 자주 뜨고 일상에서도 자주 회자된다.이는 생활 속에 이 논리와 연결되는 케이스가 많다는 명증이다.   주지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이 우화의 우의(寓意)라면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서 전체를 봐야 하며 자기도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의 입장과 멀리 떨어질 수 없다는 자성적 사고방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경종이다.  유장한 세월,이 소박미가 수북한 우화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높혀주고 착오인식을 깨우치는데 수발한 작용을 일으키는 충고로서 작용하여 왔다.   현실에서 옹고집을 부리며 편협한 자기주장만 관철하려 시도하고 주위의 정확한 의견을 귀넘어듣는 맹인모상식의 발상들이 늘 발생하는 점을 감안하면서 현인들의 지혜로 이 옛이야기를 업그레이드 해본다.   *맹인인상(盲人認象) (맹인이 코끼리 알기)   하루는 왕이 신하에게 령을 내려 코끼리 한 마리를 끌어오게하고 여섯 장님더러 그를 만져 보고 어떤 동물인가 판단하도록 하였다. 어명대로 장님 A는 상아를, B는 귀를, C는 다리를, D는 배를, E는 등을,F는 꼬리를 각기 만지었다.. 왕의 물음이다.  코끼리란 어떤 동물이냐? A장님이 말하였다. “폐하, 무같이 생긴 동물입니다.” 이어 B장님의 대답이다. “아닙니다, 폐하. 그는 곡식을 까부는 키같이 생겼습니다.” C장님이 큰소리로 대답한다. ”둘 다 틀렸습니다. 마치 커다란 절굿공이와 흡사한 동물입니다..”   계속하여 D장님은 장독같다 목청을 높이고,  E장님은 평상(平床) 같다고 땅고집을 부린다.   유독 꼬리를 만진 어린 F장님만이 잠자코 있는 것이다.   왕 왈: 너,이놈 왜 대답이 없는거냐? F  왈: 페하,제가 만진 부분은 밧쭐 같았사옵니다. 왕 왈:그럼 대체 코끼리란 어떤 동물이란 말이냐? F  왈: 페하, 황공하옵니다만 다시 한번 만지도록 용서해 주시옵겠나이까?   왕은 기웃하다가고 허락한다.   차례로 다 만진 F는 왕께 아뢴다:   들은 왕은 무릎을 치며고 칙명을 내리었다.   여기로부터 몇개 철리를 끄집어 내려한다. 1.장님의 착오는 만진 부분을 코끼리라고 결론한 것이다. 국부로 전체를 대체한 것이다. 2.사물의 분석에서 부분적 현상에 매달리지 말고 전면적 관점에서 출발하고 이로서  실천을 이끌어야 한다. 3.인식의 국한성은 인간의 본성이다. 객체의 무한성과 복잡성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의 편면성,주 관성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인해야 한다. 4.속단과 아집은 본질을 파악하는데서 큰 걸림돌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부동한 의    견을 포용하는 대승적인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에서의 인식론적 내용을 지양하고 한층 업그레이드한, 제한성을 극복하고 공존과 실천적인 방식으로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져오는 의미의 맹인인상(盲人認象)을 신조어(新潮語)로 추천해보려 한다.    
9    치킨 게임(Chicken game) 댓글:  조회:3214  추천:12  2010-11-19
        치킨 게임(Chicken game)                                                                                                                               치킨게임은 가상공간의 자동차 게임에 사용되는 술어이다. 중국어로는 나부박혁(懦夫博弈)이라 씌여 지는 바 두 사람이 차를 몰고 마주 보고 돌진하는데, 어느 한 쪽이 피하지 않으면 둘 다 함께 재난을 당한다. 그러나 먼저 핸들을 꺽고 피킨 사람이 치킨 즉 겁쟁이가 되는 게임이다. 이 경우 승자는 살아만 있다면 승리를 뽐내며 개선곡을 울릴 것이고 패자 역시 목숨을 부지하였다면 굴욕감으로 풀석 주저않는다。 실제로 이 게임은 1950년대 미국에서 유행된 적도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16세가 되면 운전면허를 취득할 자격을 부여하였는데 어린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 게임이 유행되어 이를 자기의 호기(豪氣)와 용맹을 자랑하는 호기(好機)로 삼았다. 끝내는 저참한 결과를 안더라도 승자의 기쁨에 무아도취되어 흥얼대보려는 간단한 목표인 것이다.이와같이 서로 양보없이 죽더라도 승자가 되려는 극단적 게임이 치킨게임이다.1950~1970년대에 들어서 미국과 소련 사이의 군비경쟁으로 세계가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살면서 그들의 냉전을 꼬집는 용어로 차용되면서부터 치킨게임이 국제정치학 술어로 굳어져 있다.오늘날 치킨게임은 시장에서의 가격인하 경쟁과 같은 극단적인 경쟁이나 무의미한 감정 싸움에 치닫는 상황을 가리킬 때에도 많이 인용되는 신조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치킨게임이 독버섯 같이 생명력을 시위하는 근원지는 어디일가? 우선 인간생태학적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고찰한다.   지배욕: 인간은 남을 지배하고 우위를 선점하려는 강열한 본능적 욕구를 가진다. 경쟁욕: 인간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자기의 우위를 과시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공격욕: 대립되는 대상이나 지어는 직접적인 이익적 연관이 없으면서도 혐오하는 어느 일방을 공격하려는 본능을 가진다. 배타욕: 자기 혹은 자기 집단의 이익과 위배되는 타인을 배척하는 본능을 가진다.   본능의 종류도 많지만 이러한 원초적 욕망의 실현으로 모종의 쾌감을 느끼려는 인간 본능이 여차한 극단적인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기폭제일 것으로 추리된다。 이같은 욕구의 발로로 양자가 양립불가의 상황에 치달을 시점에서 치열한 란전이 벌어진다면 한 쪽이 패배를 한다 하여도 승자 역시 코피 범벅이 되는 상황이다. 승리 일방이 정복감은 얻었지만 자신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보는 때가 다수이다.애초에 접었다면 양측 공히 이익일 것이란 생각은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패착을 순 본능이라 결론한다면 부당하다고 취급할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파다한 사회적 단면상을 보면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현실적으로, 새 력사를 개척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소멸하거나 강압으로 정복해서만 태평성세가 이루어지는 혁명 운동도 자주 발생한다.그러나 오늘 사회에서 무수한 개체와 개체 및 군체와 군체간의 모순,다양한 이익관계의 모순은 욕망의 이성적인 억제와 조율,사회가 공인하는 법율,도덕율,상호이익율에 의해 풀어질 수 있다.하지만 격돌로 인해 공동피해로 이어지고 지어 공동피고로 되는 장면도 심심찮케 볼 수 있다.공동이익을 면전에 두고도 외면당하는 경우가 수없이 발생한다.   이성,자제력을 소유한 동물이 인간인데 서로간의 쟁투로서 자기보존을 시도하고 자기만의 부유천하를 꾀한다면 이것은 욕망의 본능적인 발로로서 자기,상대,사회에 불리일 뿐 결과적 대접이란 부메랑 이외는 없을 것이다.악장치며 자기만의 이익을 위하여 싸움을 해대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타협,포용,담합을 통해 서로간의 교감을 키우며 근연을 맺는 지혜로운 마음과 자세를 가지는 것이 현대사회의 인간상이 아닐가? 아무러하든 사회 마당의 방방곡곡에서 치킨게임 논리로 서로 어깃장을 부리는 실상이 만연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자기의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쉽지만 않을 같다. 대립하는 동시에 평화공존하고,모순의 조화중에서 이익의 임계점을 찾아내는 열린 사고로 쌍영(雙赢) 즉 윈-윈(win-win)을 실현하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천근 중임이고 심각히 고민해야 할 난제일 것임이 틀림없다.  
8    아버지 서거 30년제 추도문 댓글:  조회:3409  추천:12  2010-10-23
아버지 서거 30년제 추도문                                                           2008-09-14(추석) 아버지 ! 오늘 아버지의 후손과 인아친척[姻婭親戚]을 대표하여 이 아들이 영전에 섰습니다.   이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께서는 만고풍상의 곡지을 지나시며 몸소 꾸리신 일가족들과 이별하시고, 회한 많았던 금생에 깊은 교훈과 애환이 가득 찬 기록을 남기시며 속세의 영욕과 진세인연(塵世因緣)을 끊고 옛나라로 가신지 옹근 삼십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이 파란만장의 성상(星霜)에 아버지께서는 비록 우리들과 유명을 달리하셨어도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마음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아버지가 걸어오시던 피와 눈물과 고난으로 점철하였던 구절양장의 만리길을 다시 더듬지 않을 수 없으며 미여지는 가슴을 당할 길도 없습니다. 근대의 어수선한 세상에 강림하신 아버지께서는 민족과 국가의 명암이 헸갈리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근,병마,추위와 무시무시한 생명의 위협이 수시로 머리위에 도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섬약한 몸으로 우리 이 가족의 기원을 개척하셨고 우리 후대를 이어 오셨습니다.인간의 이상과 실날같은 생존의 희망마저 가차없이 짓밟히던 풍진 세월에 아버지께서는 오로지 참된 삶에 대한 태산같은 신념과 미덕으로 가족을 굳건히 거느리시고  마구엉킨 가시밭길을 헤치고 나오셨던 암울한 역사와 현세대인들이 믿기 어려운 아버지의 풍상고초의 장면 장면을 여기서 전혀 외면할 길 없고 말글로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먹구름이 뒤덮힌 기나긴 나날의 사회의 불측변화를 불구하고 상상극한을 초월한 삼재팔난을 지나면서도 부동한 시대의 때때마다 약자를 돌보시고 대중에 봉사하는 선량한 본성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계셨음으로 하여 많은 사람들과 그 집단은 줄곧 아버지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한살이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연이어 이어지는 영명를 안겨 주었으며 작금양일까지 뭇사람들 속에서 아름다운 기억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이것은 그 어떤 검불덤불 속에 파묻히고 옥죄는 질곡에 묶이웠어도 한 진정한 홍익인간의 독실한 실천자로서만 누릴 수 있었던 영광의 우로지택(雨露之澤)이었습니다.   잊을 수 없습니다.60년대의 시세의 급전과  때아닌 악천후로 광풍이 불어치고 만민이 전율할 때 아버지께서는 그 속을 헤여나오시지 못하고 세상천지 미증유의 가장 참혹한 재난을 당하셨고 인간계 금시초유의 가장 야만적인 정신적 신체적 혹형을 받으셨습니다.그러나 아버지는 그 수난속을 끝내 뚫고 나오셨습니다.아마 아버지의 한량없는 미덕이 하늘을 감동시켰던 보답으로 생명을 지켜주는 천우신조의 은덕을 볼 수 있었을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그 사람 입으로 번복이 어려운 공포와 절망속에서 수천수만의 사람들은 보귀한 생명을 무참히 잃고 무시무시한 화해(禍害)를 대피하여 생명을 미련없이 버리고 소슬한 세상천지를 하직하고 표표히 구천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기적적으로 살아 남으셨습니다.그 치떨리던 육체적 고문과 정신적 유린속에서 바로 자식에 대한 끝없는 기대와 새생활에 대한 동경과 진리에 대한 믿음이 아버지의 생명을 지탱해준 기둥이었음을 너무도 늦게야 절감하게 됨을 더없이 후회하게 됩니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정의가 기탄없이 짓밟히던 나날의 무자비한 타격의 세례를 겪은 아버지께서는 불가사의의 생명력으로 일그러진 심신을 다시 추스르고 문턱을 짚고 일어서시던 그 처량한 장면입니다.아버지는 뭇사람들의 능욕과 멸시와 냉대를 무시하면서 의연히 대중을 위한 사업에 동분서주하시고 후손들께 무한한 사랑과 희망을 심어주시던 역사 기억은 기어이 남아 있습니다.그 나날 처량하던 아버지 비운의 모습이 세겨진 우리의 가슴벽은 천금같이 간직하다 때가 되면 아버지의 안식처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시는 날 작별하려 온 뭇사람들이 또다시 아버지의 곡절도 많았더 뜻깊은 한생을 진설하실 때 우리는 이야말로 정도로 나가는 진인만이 맛 볼 수 있는 특전이라는 것을 맘속으로 깊이깊이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불운한 세월과 비틀린 사회적 알륵속에서도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선구자로서 우리들 대가족을 일쿼세웠고 우리의 살아 갈 앞날을 제시하시고 조상의 계보에 피눈물로 얼룩진 그러나 장엄한 한 페지를 펼쳐놓으셨습니다.아버지께서는 이를 위하여 온갖 노역과 치욕과 모욕을 달갑게 받으시고 후세에 길이 남을 이념적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오늘 이 자산을 우리들이 에누리없이 이어가고 있음을 아버지께 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의 이름만이 우리 일가를 장식할 수 있는 황금 표찰인 것입니다.   오늘 전해드리건대 아버지께서 두고 가신 후손들은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옳바른 인생을 개척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조하는 사업에 진력하고 있으며 그중 5 명은 박사의 신분으로 인류의 과학사업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이미 인류의 생명과학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습니다.이 역시 아버지 생명의 찬란한 빛발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변천을 거듭하는 능곡지변의 시대입니다..우리들의 생활 역시 인간적 책무의 지속으로 다사다난이 되풀이 되는 현실입니다.허나 아버지께서 지나오시던 음침하고 어두운 기나긴 터널을 돌이켜 보면 이는 너무도 미소합니다. 오로지 아버지가 남겨주신 인생의 집념은 언제나 찬란한 등대로 되어 우리 앞길을 가리키고 있으며 아버지께서 쓰라린 평생에 남겨 놓으신 삶의 모델은 우리들로 하여금 삶의 원정에서 매진하도록 고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앞길을 가리키시는 영원무궁의 수호신(守護神)이 될 것입니다.   전체 가족들이 기원하는 명복을 아버지께 삼가드립니다..     *1978년8월24일 오후 2시 아버지 서거.  
7    청초의 드림 댓글:  조회:3018  추천:7  2010-10-19
청초의 드림                                                     김인섭  2010-08-20 일에 지쳐 기분이 잔뜩 말째면 뒤산의 림도를 걸어본다. 원생태 대기를 들이 마시고 가슴속의 얼키고 설킨 솔가리를 풀어 버리려는 심사이다.   산속의 선코 영빈객은 까치들인데 사람 자취가 날라치면 야릇하게 주위를 맴돌며 자기들만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톤(Tone)을 올린다.혹자는 못생긴 인간이 자기의 터전을 짓밟는다고 경고음을 울리는 야합이 아닌가고 생각이 들기도 하나 옛날 어느 때이던가,(煩悶時等候喜鵲唱枝頭) 하던 경극 가락의 뒷울림이 동반되어 무비의 희열에 잠기군 한다.하,이눔이 무슨 호소식 전해 주는 것 아닌가?! 번번이 기대를 걸다 낙망으로 돌아지는 재순환이면서도 희망은 비켜가지 않는다.   게다가 종종색색 미물들의 건울음 소리와 비행음도 그 간주로 듣다보면 자기도 대자연의 조화에 방참(傍參)한다는 개운한 기분이 더더욱 고양된다.하늘을 향해 붙박이로 우중충 도열한 나무도 건드러운 그늘을 던져주니 여기가 인간의 본 고향으로 제격이 아닌가 싶다.지천으로 짝 펴진 청초들, 이들은 꾸밈없는 구색으로 만물상을 이루는데 뭇사람들은 늘 가리보며 스치기도 하나 바로 이들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대지,물,공기,양광 사이에서 계절의 사박자를 맞춰가며 기묘한 교환 운동을 해주며 숲속의 공존을 이뤄가는 사자로서 넉넉한 들이다. . 아마도 자연 철학의 유유상종(類類相從)이 원인이 되는가보다.범민의 생을 누리다보니 숲속이 기여들면  청초에 대한 느낌이 마냥 나긋하다.(沒有花香,沒有樹高,我是一個無人知導的小草).이 동요는 이 숲속에 제일 적격이고 흥얼거리고 나면 가슴에 환열과 애련을 치느낀다.   오늘도 를 흥얼이며 민초 친구들을 그려본다.   개혁개방의 시책으로 중국은 경골같은 계획경제로부터 사회주시장경제에로의 위대한 방향전환을 실현하였다.하여 재래의 산업 구조는 심각한 해빙기를 초래하여 직성스레 일하던 친구들이 월급 줄이 끊어지고 일자리를 떼우고 대책없이 실직의 대열에 가담한다.사회의 변혁에 둔감했던 그들이 애들의 공부는 어쩌고 병든 안해는 어쩐단 말인가! 자기의 두 손으로만 살아야 하는 가련한 무리들이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 들여야만 하는 신세이다. 지난날엔 너나없이 사회 모범이었지만 알가난 빈민층 꼬리가 기나긴 사회의 절친들이 고향을 등진 유랑민의 대열에 가담하여 이역으로 타향으로 밥줄을 찾아 떠난 지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이들이 각자도생으로 지금은 어데서 뭘 하고 있을가? 아마 우선은 3D업종일 것이다.즉 위험하고(Dangerous) 더럽고(Dirty) 힘든(Difficult), 그 나라 사람들이라면 노속자까지 동사 직전이면서도 외면하는 최비천의 벌이터다.그러나 그들에게는 생계가 우선인 이유로 감내해야만 하는 선택이다.금전만능 지휘봉이 번뜩이는 혹사 작업장에서 그들이 받고 있을 입밖에 내기도 어려운 수모와 흘린 피땀은 얼마며 가족과의 이산으로 가슴에서 일렁이는 향수를 달래며 보내던 서러운 밤 그 얼마였으랴 !   희망이 지극하고 마음도 지순하다 .열심이 일하고 처자를 살리고 노후에 자족하려는 것이다.이를 위하여 오늘도 어느 귓그시락에서 혈한을 쏟고 있을 것이다.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칼바람이 매몰차게 불어치는 풍진세월에 이 동아리들은 오로지 빈곤탈출과 가계 수준의 향상을 향해 질주 일변도로 나가고 있다.사랑하는 벗들이 언제가면 어두운 고행 길에 종지부를 찍고 이같이 고요한 피안에 이르러 겨례붙이들의 단란지락을 누릴 수 있을가?   시류에 밀려 어려운 곡지에 묻길 때마다 손을 잡아 주던 지란지교의 벗들이 그리워 진다.      오늘 병주고향(竝州故響)의 숲속에 서서 세시의 행사마다 환락경 연석에 둘러앉아 서로간의 우정을 확인하고 다져가는 여유의 나날을 바란다면 이것은 뚜꺼비가 두루미 고기를 탐닉하는 남가일몽일가?  
6    불구일격강인재(不拘一格降人才) 댓글:  조회:2942  추천:8  2010-09-27
불구일격강인재(不拘一格降人才) -55~65세 퇴직자의                                                           2010-09-20 별나게 야릇하고 얄궂다.엊저녁까지도 웃통을 벗어제치고 산책하고 찬물 목욕으로 더위를 달래면서 잠을 겨우내기로 불러 왔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서니 귀신을 울리는 낮도깨비의 농간인가 찬바람이 확 쓸어들어 대책없이 농짝을 뒤지며 춘추내복을 껴입고 긴팔 옷들을 들춰 입는 무언극을 벌렸다.   어제 저녁까지 20C°를 웃돌던 기온이9C°로 내리꽂이를 치는 것이다.기고만장으로 뽐내는 찬바람과 음습한 날씨 속에서 산속 공원의 림도를 걸으려니 불어오는 삭풍이 에돌아치며 얼굴을 희롱하는데 나이 대접을 받으려 그러는가? 영풍유루(迎风流泪) 증세의 발작인지 눈물샘이 자꾸 문을 열어제낀다.   항시라면 발밑 땅만 고이 보며 걷는 습관인데 왜바람의 작간에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갈쌍거리는 눈물을 문지르며 보일보 내미는데 무심히 지나치던 주위의 만상이 자꾸 눈에 굴러들어 온다.어느새 나무 잎사귀들에 단풍불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뭘하느라고 철의 흐름에 이토록 무감각했을가?확연한 가을인데.아마 더위에 찌들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못한 감성마비였으리라.지구가 태양 두리의 공전에 연유하여 어김없는 사계절의 환절을  불러오는 것이다.   대기속 산소의 비중이 떨어지면 침울한 기분을  불러오고 부정적 정감을 부추긴다 하더라. 음습한 날 가을의 쓴맛을 맞보게 되니  우리네 인생도 이와같이 영낙없는 가을이 되어있음을 연상하였다.   우리네 이 퇴직 반열에 밀려든  55~65세대의 신세를 말함이다.청년 실업이 문제시 되는 현실에서 회사 직장에서는 50이 되어 일한다면 기이한 눈초리질을 당하고  55세나이라면 거의 흔적을 감춘지도 한참도 되었을 상싶다.공직사회라는 55세면 무조건 방석을 올려 바쳐야 함이 철칙으로 된 것이다.이것이 바로 더덜이 없는 인생의 석양이 된다는 언도이다.   지난날을 돌아본다.이 세대들이 태여나던 시기는 국내 경제 사정이 최악인 격변 시대였다.그 시기의 고난을 되뇌인다면 신세대는 피식 웃어버린다.인간 세상에 어찌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냐?고 질문을 들이댄다.새국가 건설초기의 어려움 속에서 자라는 그 나날, 그것은 말그대로 기아와 추위를 만포식하는 시대였는데 젊은 놈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우리 성장의 시대는 천지를 진감한 의 동란속에서 애꿎은 운명을 감내하는 무정세월이였고, 사업하는 시대였다면 나라 경제와 사회에 얽히고설킨 응어리를 풀어가는 개혁,개방의 긴나긴 30년이었다.허나 시장경쟁과 정년퇴직이라는 당위성 앞에서 무력하고 처절히 한자리에서 밀려내려 곁눈질을 뻔질나게 해대는 좌불안석의 모습들이 우리 세대들이 궁색한 처지이다.혹시 술좌석에 모이면 옛날에 숲속을 헤가르며 호랑이 잡던 고담준론도 난무하지만…   이 군중들이 허수한 마음의 둘 곳을 찾지 못해 다람쥐 채바퀴 굴리듯  탑돌이를 반복하면서 제자리높이뛰기를 거듭한다.어디가도 신구교체라는 그 합리성이 기세높이 경적을 내는데 오로지 이 세대가 안고있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쌓은 값진 경험과 삶의 지혜는 교체로 처리할 하자품은 아닌 것 같다는 회오리 생각이 겹겹히 감아친다.   오늘까지의 30여년에 이르는 개혁개방,이 위대한 역사사변의 실천자이고 견증인들인데 사회주의 시장경제에로 전환을 이루는 시대적 혁명에서 나이가 이유로 되어 길섶에 버려진다면 아기를 씻고 물과 함께 내 버리는 부조리한 냉각처리가 아닐가고 뇌까린다.꼭 여차한 것도 아닌데 옥생각이 맴돌이친다.누가 우리를 역시 사회의 재부로 인정하고 당신들의 힘을 재발굴한다고 말씀만 한다해도 얼마나 감사할가?! 어느 자리던 맡긴다면 자신있게 유형무형적인 가치가 이룰수 있다고 장담도 해 본다.오늘의 변혁가운데 산적한 까다로운 난제들을 풀어내는데 이 중인들의 쓸모가 나름대로 따로 있을텐데…   고장난 차를 몰고 수리부를 찾았던 경험이다.늙수구레한 노인 어른이 나오시여 발동을 걸라고 지시하고 마찰음,진동음,배기가스의 색상을 진맥하시더니 어디가 고장!하고 대뜸 짚어낸다.이는 긴 세월에 숙성시킨 경력이 바탕이 안된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유의행동이다.이 노인의 어정쩡해 보이는 순간적 발휘가 얼마만한 편의,절약,수명보장을 이뤄겠나?! 감동받던 기억이 빤하다.사회란 이 거대한 엔진의 작동에서도 위와 같은 모순을 피치 못할터인데 고참들의 지혜를 재부각시킨다면 현실에 직면한 난제를 풀어가는데 많은 실마리가 쉬이 잡히지 않을가 싶다.   이 산산히 흩어지는 주옥들을 꿰매여 구슬로 바꿔놓을 지혜와 대안은 없을가?   옛날 모택동씨가 즐겨 흠상하시던 청나라 시인-공자진(龚自珍)의 시구를 더듬어 본다.   九州生气恃风雷,구주의 생기는 폭풍뢰에 달렸거늘 万马齐喑究可哀;만마가 움추리면 그 얼마 적막하랴. 我劝天公重抖擞,왕님께서  호기만발하시기 소인은 바라오니 不拘一格降人才。예격을 버리시고 인재를 내리시라.   궁기에 몰려 옹색한 늠이 주제도 모르고 격에 맞지않게 호매로운 노래를 부르지만 뭔가 얼마라도 쌓아보려는 범민으로서 열망의 표출만은 진심이다.한세대가 짜놓은 기틀이 차세대 사업의 기반이 되어야 하면서도 생리 년령이 간단히 그의 거취를 판결하는 이 안된다면 좋을 같다.   이들의 가치 창조의 여력을 발굴하고 그들에게 생기발랄한 희망을 주입해 주어 황혼층이 진정 저녘노을을 향해 주억거리는 군체로 몰리지 않기를 바라는 당사자이다.   이럴진대 이들을 금후의 기나긴 나날에 단순한 생물적인 생활에 내몰지말고 그들에게 진정 조화사회를 건설하는 약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의 적극성과 창조성을 조달하고 이용하는 사업을 전사회적 의 영역에 편성해 넣음으로서 제도,법규와 정책으로부터 사회통념에 이르기까지의 체제적인 정비를 바란다면 이것은 노인들의 허무맹랑한 사치욕망은 아닐 것 같다.
5    조선족의 정의(定義) 댓글:  조회:2343  추천:13  2010-09-17
[수필] 조선족의 정의                                             김인섭       2010-08-24 항간을 팔방돌이하다 보면 한족들과 자주 만나 상담하는 시간이 많게된다. 억양이 이상한 관계로 한두 마디 지나면 어디 사람인가고 묻는데  조선족은 능가선무(能歌善舞)의 민족이라 점찍고 능갈주(能喝酒)라는 연의적 평판을 접붙인다.이 능갈주가 바로 악센트로 되면서 는 조선족을 지칭하는 코드(Code)로 되어 버린다.그래도 어조에서 보면  우수한 문화적 민족이란 우의가 다분하기는 하다.   허나 조선족으로서 듣기 즉시 나다분한 역심이 솟아오르고  속이 식상해나는 감정도착이 발작한다.이 양반들이 우리를 뭘로 본단 말인가?  부랑족-코카서스인종(caucasus)인 떠돌이 집시란 말이 아니냐?하는 옥생각이 들 때도 있다.많은 경우 해석을 주려해도 가랑가랑한 국사발속 건더기를 건져내는 격이라 충족이유률로 해석이 안된다.조선족의 일부의 부실한 생활행태가 빤하지 않은가?   밥접에서 상등 백미밥에 모래알이 한 알 씹히면 댓바람에 도마질이고 2알이면 웨이트리스(waitress)를 불러 전부 돌이다!고 환치 명령을 내릴 것이며 치아가 상햇다면 몇 배인지 모를 배상을 뒷붙쳐도 법률적인 합리일 것이다.이것이 인간사이다.   오늘날 조선족 사회에 이 를 적용하면 과분하지나 않을가?! 양약고구이어병,충언역이이어행(良藥苦口利於病,衷言逆耳利於行)이란 금언의 철학에 비춰 能喝酒로부터 조선족 행태를 추리해 보려한다.   역사의 원연을 따져 본다.   한민족은 근대 격변시대에 열강들의 시장분할 각축전 속에서 회피책을 꾸미고 존립의 틈을 노리는 곡예적인 생활이 숙명이었다.대국의 쟁탈전에서 종횡으로 끌려다니며 좌고우면의 눈치작전으로 압박속의 고생문을 들락날락하는 약소 민족인 것이다. 종주국의 강권,내국의 관권,봉건의 질곡,양반의 기시,경제의 낙후, 자연의 유린 등 고생고생에 피곤죽된 행진이었다. 이런 경황에 조상들께서는 엄청나게 누적되었던 한과 원을 알콜로 문질러보니 날카롭던 신경이 마비되고 응어리가 중화되는 쾌감을 느끼고 소리치고 몸통젓기를 시작한 것이 의 본초(本初)가 아니였을가?   이 강박관념 해소의 일시적 구급양방이 열병처럼 퍼진 것이 구연세월중에 생활화, 풍속화, 문화화로 전변한 것이다.거기다 현대의 부유한 소프트 환경에서 이 는 돌연변이를 일으켜 되어 愛酒能歌善舞란 정성적 득명을 하게 된 것으로 추리된다。   사회발전에 동반하는 문화 예술적 요소는 차치하고 수난 속에서 구곡간장에 쌓인 철천지한과 억울원통의 해소가 술이란 물리적 작용에 의뢰하는 습관성이 페습으로부터 오늘의 악습으로 전화하는 것 아닌가 고찰한다.   조선족 술생활의 현상을 알파벳순으로 기술을 해 본다.   A,애주이니 씀씀이가 크다. B.창가에다 마구리발방 몸통, 네활개를 휘두르니 폭주이다. C.무지한 시간허비에 사업 지장은 불문가지이다. D.외인의 경멸이 필지이고 급여인상, 직무승진이 부진이다. E.폭음에 뇌신경 파괴로 치매 직전이다.. F.알콜의 동체 파괴로 병원 단골이 당연지사다.   조선족 집거 구역이면 어데없이 이 생활의 순환을 체감하게 된다.   이 작태의 부단한 라선식 상승운동이 오늘 조선족의 단면상이다.돈까기,시간 낭비.건강 부식,사업 지체,가정 불온 등도 난문제지만 급소는 생활의 정도(正道),지혜,의지,신념,기치관 전부가 걸레쪽 같이 내팽개쳐지고 문화적 인간형을 이루지 못한 그것이다.파생물 또한 기막히다.사회 해체,문화 사막화,인구 격감 등 사회적 위기와 나태, 허망에 뒤따르는 과소비,과사치,과유흥,과휴일,과자가용 등등 과분수의 생활적 위기다.   되풀이 비론이지만 위에서 말씀하시는 한족 분들의 평판이 부정적인 악평이라 한다면 이 행태를 에 대입해 볼 때 우리가 유구무언이 아닐가?   물론,원거리 관측에서 수많은 우수한 공직자,과학자,경제인,군인,학자들이 주류사회의 화려한 주축이 되어 있어 중국의 56개 민족의 화원속에서 빛나는 일원으로 언녕 알려진 바지만 근거리 관찰에서 그 생화를 떠밭친 잎사귀엔 검누른 반점이 역력하고 병상이 덕지덕지하다면 그는 백포속의 흑점하자같이 선연할텐데 인간 본능으로 주목 부위가 백포일가 병반일가?   애주의 독소가 만연하는 흐린 풍토를 보며 지성인들의 호소와 노력을 경주하는 모습도 역력하다만 거거익심이다.영락 일로로 가는 조선족 사회를 보며 역사조류불가항거라는 역사법칙을 적용하며 이는 불가피의 발전 단계요, 발전 행정에서의 진통이라 이르는 낙관적인 논의도 귀에 들린다.그러나 개혁,개방과 세계화 시류에 말려든 우리가 주동으로 민족의 터전에 를 뿌리고 무공해 를 관개하고 증상에 맞는 를 분사하는 노력이 없다면 락후한 민족으로 될 수 밖에 없다.   수많은 독지가들이 민족의 전답에서 호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견도 하다.조선족이 단수 분실은 꿰지르고 쌍수 분실에는 감감한 * 마인드와  근시안적 생활 방식과 이주민식 의식구조에서 해탈하여 진정 총명하고 지혜롭고 우애로운 싱싱한 모습을 전망하기도 한다.   민족 나란히 근대사회에 현란한 화면을 그려오던 역사 정신을 되살려 매말라지는 문화 박토를 옥토화시켜 수려한 민족화원을 건설함으로서 56개 민족중 우수성원으로 소문이 나면 안 될가?   우리에겐 누구보다 우세인 전지구적 경제,문화,인문의 자원, 중국의 비약적 발전, 글로벌 한민족네트웍등 남부럽잖은 버팀돌이 있다.감염 부위를 후벼내 버린다면 우리는 나라에 공헌이 있고 타인에  이익을 주는 민족으로 절대 가능하다.피타는 자아실현,각고면려,자강불식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언제 가면 청청한 참모습을 되찾아 내가 조선족!하고 신상을 공포할 때 너는 의 민족!하는 업그레이드(Upgrade)된 재정의를 받을 수 있을가?       [속담] 부엉이 셈 치기 부엉이가 수를 셀 때 반드시 짝으로 하므로 하나가 없어지는 것은 알아도 짝으로 없어지는 것은 모른다는 데서 나온 말로, 세상에 몹시 어두운 사람의 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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