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liucaishun 블로그홈 | 로그인
류재순

※ 댓글

  •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홈 > 수필방

전체 [ 9 ]

9    겨울녀인 댓글:  조회:908  추천:0  2019-12-22
[수필] 겨울 여인 류 재순 쌓여진 가을 낙엽을 밟으며 단풍의 의미를 새김질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새파랗게 올려 붙은 겨울 창공에서 싸늘하게 불어오는 찬 공기가 빨간 귓불을 핥고 지나간다. 어느덧 나목이 된 양변의 가로수를 가로 지나며 기다란 산책길을 걷고 있다. 아직 미련을 다 털어버리지 못한 모든 의미의 풍경에 가차 없이 찾아온 계절을 실감하며 나는 움츠러지는 내 형체를 현실 앞에서 오롯이 자백시키며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산책길 옆에는 좀작살나무, 볼레나물, 산철죽, 개쉬땅나무 등등 봄, 여름 가을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키 낮은 관상용 잡목들이 즐비하게 줄져 있다. 이제는 그 이름을 분간하기 어렵게 똑같이 벌거벗은 모양새로 추위에 떨고 있다. 그런데 그중 한유의 나무가 유별히 눈길을 끈다. 꽃도 잎도 다 떨어진 나목이긴 한데 이 추운 겨울의 언덕에서 물 오른 봄버들마냥 초록빛 매끈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황매화(山吹)이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서서 바라본다. 조그마하게 쓰인 팻말 설명서를 읽는다. 황매화의 꽃말은 숭고, 고귀, 왕성 이란다. 나무 전체를 뒤덮는, 4~5월에 피어나는 노란 꽃은 개화 기간이 유난히 길 뿐만 아니라 가을의 노란 단풍과 추운 겨울에도 잃지 않는 매력적인 초록색 줄기로 관상용으로 인기가 높단다. 그리고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고 잘 자랄 뿐만 아니라 추위와 공해에 강한 것이 특징 이란다… 이 신비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내 머리 정수리에도 미약하게나마 분명 따뜻한 햇살 몇 오리가 집요하게 내 머릿결을 헤치고 입맞춤을 해 준다. 가슴 구석의 어느 세포가 봄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꽃잎마냥 환생의 입김을 불어 넣는다.   산책의 흥분을 안고 돌아온 나,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엔 분명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얕고 짙은 주름을 지닌 작은 키의 노녀(老女)가 서 있다. 아, 저 얼굴, 나는 누구인가? 내 나이는 얼마인가? 어느 날인가 손자 놈이 할머니하고 달려올 때, 나는 한번 깜짝 놀랐었다. 아직도 풋풋하게 느껴지는 내 가슴에 할머니라니!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텔레비전 앞에서 골몰하게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한마디 하였다. "당신 가끔 입을 벌리고 초점없이 티비 보는거 알어? 똑 마치 치매 걸린 사람같이 흐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화를 버럭 내였다. 남편은 웃으며 농담이라 하였지만 나는 당시의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장면을 나는 요양원 할머니들 속에서 본적이 있었다. 놀란 내 가슴은 슬픔으로 차 오르기 시작했다. 젊음, 아름다움, 능력, 민감, 많은 것을 잃어 버렸다. 우주의 섭리 속에 남겨진 부인할 수 없는 오늘의 나의 초상화다! 어느 날 인가는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완전 가능하게 치매 노인이 될 수도 있는… 환각일가? 거울 속에서 겨울동화 속 같이 새파랗게 물올라 있는 황매화가 예쁜 윙크를 보내고 있음을 보아냈다. 나는 내안의 또 다른 하나의 "나"를 발견하였다. 유치하고 감성이 넘치며 바다 저편의 신기루를 기다리는 귀여운 소녀 같은 천진한 눈길, 삭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절절한 삶의 추구를 가진 짓궂은 생명력, 어쩌면 볼품없는 겨울나무에 청사과(青苹果 )를 만들려는 착각은 아닐 가?   한번은 한 문학후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어머 선생님, 발톱 메니큐어도 빨갛게 하셨네요!"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웃으며 조용히 대답하였다. "응, 내 마음 가짐의 표현이야" 그렇다. 나는 멈출 수 없는 추구와 향기를 만들고 싶은 내 마음의 집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청춘은 얼굴에 크림 한번 못 바르고 예쁜 옷 한번 입어 보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처녀로 시집 온 나의 "새엄마"의 보얀 얼굴을 보고 그가 쓰는 "구루무"(크림)를 몰래 손가락으로 찍어 발라봤던 소녀시절 ,할머니에게 들키어 종아리가 빨갛게 회초리 세례를 받던 일은 나에게 오랜 아픔이었다. 그래서 이 나이에도 키 작은 자신을 보완하기 위하여 하이힐을 신고 다니며 문밖을 나설 때 면 옷장 안에서 내 기질에 맞는 옷을 고르느라 무지 기운을 뺀다. 여인들은 모임에 나설 때 면 옷장에 아무리 옷이 가득하다 해도 항상 그 상황에 대처할 마땅한 옷 한가지의 부족함을 느낀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조급히 고르다 시간이 되어버리면 아쉬움을 삼키며 급급히 블랙으로 된 옷가지를 몸에 걸치고 떠난다. 어느 장소에서나 무난한, 소화가 되는 색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장을 하면 꼭 립스틱을 바르는 걸 잊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를 그렸을 때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 넣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다. 바람이 불어 로녀의 머리를 푸시시 날리는 계절이면 여인 식 베레모를 예쁘게 쓰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브렌드나 유행을 따르는 건 질색이다. 스포츠 댄스도 다니고 가끔은 친한 친구들과 마주 앉아 마작도 치고 여행도 다니지만 나에겐 또 하나의 취미가 있다. 열다섯 살 소녀시절, 그때 아주 보기 드물었던 "음식 만드는 법"이라는 북조선에서 나온 책을 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해주는 밥만 먹으며 음식 작식법에 전혀 무관심 했던 나였는데 내용을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그 책을 한글자도 빠짐없이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곤 뒷장에다 엉뚱한 글 한 줄을 써 놓았다.__음식을 잘 만들어 가족의 건강을 지켜 주는 것, 이것은 여인의 직책__ 지금 생각하면 갖잖아 죽겠다. 그 나이에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도 좋은 요리책 사는 것이 흥취고 가족들에게 갖가지 영양 가치에 신경을 써 음식을 차려 주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일하러 갔다 돌아온 식구들이 내가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맛깔스레 먹는 장면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한없이 행복하다.   마음은 그런데도 내 성격은 탄력도 없고 유머도 없이 직설적인 표현에 가끔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가 있다. 가끔 내 얼굴의 굳은 표정은 상대방의 거부를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잘 다툰다. 군인 출신의 그와의 혼인 생활은 감성이 넘쳐나고 완벽함을 주장하는 나와는 달리 현실적이고 편안함을 좋아하는 같지 않은 개성으로 쇳소리 나게 부딪칠 때가 많다. 일평생 원망하며 사는 것 같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몇 년 동안 그와 갈라져 있을 때 나는 공중전화를 붙들고 그와 대화를 하다나면 그칠 줄 모르는 눈물에 말이 막혔었고 남편이 그 작은 맹장 수술을 하는데도 수술실 밖에서 엉엉 울어 뭇 사람들을 웃겼다. 애들 셋을 키우며 젖먹이 어린것을 등에 업고 방에 엎드려 밤을 새우며 글을 쓰던 그 나날에 내가 살림과 식구들에게 돌려져야 할 많은 시간을 할애 하여도 돈벌이도 안 되는 글쟁이가 되는 것이 어려서 부터의 소원이었다는 나의 한마디 말에 남편은 모든 것을 받아 들였다. 가끔은 나도 살짝 애교를 부려본다. ―아시죠? 나 글쟁이가 될 때야 만 내 가치를 찾을 수 있어요. 나는 "옛날 그 시절"이란 말을 문학 후배들 앞에서 절대 하지 않는다. 이십 몇 년이라는 중간의 창작 공백이 지금의 나를 얼마나 초라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또다시 글쟁이라는 주술에 빠져들고 말았다. 늦게 다시 시작한 문학 창작이지만 무뎌진 솜씨에도 글 한편을 금방 탈고 시키고 필을 놓는 그 순간, 산출의 그 환희와 쾌락과 행복감은 글쟁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세계적인 작가들도 초고는 끔찍했다고 말한다던데 나는 볼품없는 그 첫 탈고의 "성공'에 도취되어 자신이 아직은 청춘이고 최고인 줄 안다. 매번의 이런 유혹에 빠져 이 로녀의 마음에도 겨울 황매화의 초록색 줄기가 풋풋하게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내가 여생에 무슨 대단한 성과를 이루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사색의 고독 속에서 세상을 나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상을 잉태하여 글을 써 내는 주술에 빠진 인생을 즐기려 한다. 그것이 나라는 겨울여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숨 쉬는 시체ㅡ좀비 같은 존재를 면할 수 있는 내 특유의 길일 것이다. 나는 자신을 한수의 시와 같이 파해쳐 볼수록 의미 있는 향기를 풍기는 여인으로 로숙되어 가고 싶다. 그 속에 끊임없이 내 추구의 내용물을 리필 하련다. 그래서 내 인생의 마지막 퍼즐을 잘 맞추어 보리라   2017년 2월 9일 서울에서
8    '문학의 집'으로 가는 길 댓글:  조회:764  추천:1  2019-12-22
수필 ‘문학의 집’으로 가는 길 류재순   나는 매주 목요일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오류동 3번 출구를 나와 ‘문학의 집’으로 향한다. 한국 문인협회 구로지부 전임 회장이었던, 장편소설 『소설 이승휴』로 더 유명해진 김익하 선생님의 소설수강 날이다. 3번 출구를 나와 맞은 편 ‘오류동 교회’로 들어서는 골목길에 들어서 다시 좌측 갈림길로 쭉 걸어 올라간다. 좀 올라가다 보면 ‘문학의 거리’라는 팻말이 보이며 몇 미트 간격으로 채색 철판 이정표가 있다. ‘문학의 집’으로 가는 방향 화살표가 있고 그 위에는 눈길을 끄는 시화 액자들이 걸려있다. 구로문인협회 회원들의 작품들이다. 그저 스쳐 지나갈 수가 없다. 눈에 띄는 시편들을 음미하며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문학인으로서의 공감대와 그 사색의 끝을 상상해 본다. 이 골목길의 흥미로움이 눈앞에 펼쳐진다. 골목 양쪽엔 소담한 전통식 단독 주택들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음이 또한 신비스럽다. 길옆 한 집 회색벽면에 창문 하나가 보이는데 밤색 털을 가진 커다란 말 머리 하나가 쑥 얼굴을 내밀고 밖을 내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 커다랗고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에는 불안과 갈망, 아니 어디론가 튕기려는 욕망이 숨어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낡은 그림인데 그림 내용이 주는 인상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어느 날, 예술의 전당에 가서 토요 콘서트 관람을 갔을 때, 작곡가 무소록스키가 죽은 친구의 그림 전시회를 보고 편곡해낸 ‘전람회의 편곡'이란 라벨 편곡들을 감상하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이 벽화엔 문은 없고 머리 하나만 내밀 수 있는 창문밖엔 없지 않은가? 화가는 어떤 생각에서 저런 그림을 그렸을까? 유머러스하고 아이러니한 발생에 내 마음속에서도 알 수 없는 감성의 멜로디가 흐르는 듯하였다. 상상을 좀 더 해보면 그 어떤 라벨 편작 같은 것들이 윤곽을 그리는 듯하다. 그뿐인가 좀 더 걷다 보니 또 하나의 장면이 눈길을 끈다. 역시 그런 단독주택 벽인데 벽화엔 역시 자그마한 창문 안에 희미한 둥 불 아래서 한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갈래머리 여자애가 머리를 숙이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바로 돌아서는 옆벽엔 역시 또래로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생화 한 묶음을 들고 머리를 숙인 채 발끝만 내려다보는 광경이지 않은가? 갑자기 ‘꽃을 든 남자’란 노래가 떠오르면서 킥-또 웃음이 터진다. 그림은 초등학생 수준처럼 좀 유치하고 어설펐지만, 우리 문학이나 미술, 예술계의 사랑이라는 영구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작은 동네에서 엮어졌을 어떤 청춘 남녀의 애정도 상상해본다. 이런저런 골목길 풍경에 심취하면서 걷고 있노라면 어느새 화살표가 오른쪽 언덕으로 뻗어져 있다. 흙과 자갈이 뒤섞인 싱긋한 오르막 길이다. 그다음은 나무토막계단길이다. 계단 길 양옆엔 유난히 반질반질 빛이 나는 타원형의 옥잠화 푸른 잎들이 줄을 서서 마중을 한다. 팔,구월이 되면 하얀 꽃들이 향기를 쏟으며 앞을 다퉈 피어나는 모습에 오르막 길의 피로를 싹 가셔준다. 걸으며 무심결에 오른쪽에 자리 잡은 단독주택가 울바자에 눈길이 간다. 키큰 넝쿨장미 두 그루가 무성하게 뻗어 나가며 5월부터 빨간 장미 천지로 길손을 유혹하는데 그중 몇 떨기 장미는 12월까지 찬바람에도 끄떡없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향과 빨간색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다리쉼도 할 겸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오늘이 최고다. 내일이야 어떻든 간에 오늘에 열광하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라- 생각지도 않던 인생주문을 해보며 새삼스레 자신의 오늘을 반추해 본다. 드디어 계단을 다 오르고 나니 마침내 ‘문학의 집’이란 간판이 문 옆에 걸려있다. 평범한 단독 주택을 이성 구로구청장께서 구로 문인들의 발전을 위해 당시 김익하 회장님과 합의하여 지원 개설해 준 집이라고 한다. 실내는 크지 않지만 말 그대로 시화며 책자며﹍문향이 물씬 풍기는 자그마한 강의실이다. 우리 소설 반은 학생이 적었다가 많았다. 하지만 예닐곱은 거의 보장이 된다. 오늘 아침도 나는 거의 열시가 될 무렵 강의실에 들어섰다. 선생님도 일찍 나오시지만, 이 수강 반을 책임지고 있는 고선자 선생이 항상 먼저와 청소도 하며 환기를 시켜준다. 그리곤 선생님께 따뜻한 차 한 잔을 올리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 그녀는 구로문협 시 분과장이며 시로 등단한 시인이지만 벌써 오년째 김익하 선생님 아래서 소설을 배우고 소설로 다시 등단하여 제대로 된 작가가 되려는 꿈이 있다. 10시가 다 되어 수강생들이 거의 다 모였을 때 고선자 선생께 갑자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녀는 모르는 전화번호라며 수강도 곧 시작될 걸 생각해서인지 받을가 말까 머리를 갸우뚱거리다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자그마한 통화소리가 오가는 듯싶더니 그녀가 갑자기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을 때 나는 선생님이 무엇인가 예감하시고 눈에 전에 볼 수 없었던 광채를 뿜으시며 온 얼굴에 빛이 발산하시는 것을 보았다. “ 저 당선 됐데요. 신춘문예에!” 고선자 선생은 목갈린 소리로 울부짖는 듯했다. 너무나 뜻밖의 소식에 우리는 어리둥절함도 잠시 다 같이 함성을 질렀고 얼싸안고 한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농민신문』 신춘문예를 담당한 문화부 기자가 당선 소식과 함께 당선소감문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우리가 지난번 작품 합평회 때 내놓았던 소설 ‘흔들리는 땅’이다. 사실 그는 얼마 전 칠백만 대 상금이 걸린 공모전에도 도전했었는데 끝까지 소식이 없어 선생님이 여러모로 수소문해봤더니 최종심사 대상후보최종 3인 경색에서 탈락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 돈보다 최종 3인까지 올라가고 탈락한 안타까움에 고선자 선생은 술을 마시며 가슴을 두드렸었다. 이번엔 해냈다. 김익하 선생님의 소설 수강 반에서 정정 오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바쳤다. 별은 하늘에서 그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제부터 그의 어깨엔 한평생 ‘문학’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돈을 바라고 문학창작에 뛰어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피를 말리며 밤을 새우며 타자를 해온 그에게 놀랍게 찾아온 성취감은 아마 그를 무한 행복의 무아지경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나는 강의 때 선생님 말씀하시던 탁갑( 坼甲)이란 말이 생각났다. 씨의 껍질이 갈라져 싹이 튼다는 뜻이다. 그 말을 생각하며 강의실 문 위에 나무판에 새겨진 草 筐(초광)이란 글자를 바라본다. 즉 밀집 바구니란 뜻인데 우리 ‘문학의 집’은 바로 이런 밀집 바구니 속에서 껍질을 비집으며 작가라는 새싹을 키우는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도 문학의 집에 다니세요?” 사실 나는 중국에서 일찍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러나 후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이십몇 년이란 공백을 남겨 후배들에게 많이 뒤떨어졌고 특히 한국 생활을 하면서 중국에서 쓰던 언어 어휘 상용 어법과 문법 맞춤법 많은 것의 차이점에 놀랐다. 한국에서 글을 발표하려면 보통 사용하고 있는 ‘맞춤법 검사기’로만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김익하 선생님께 소설 한 편을 봐달라고 보냈다가 돌아온 원고에 빨간 줄 파란 줄이 꽉 찬 것을 보고 수치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중국 쪽에 보낼 때는 이러지 않았었다. 두 나라의 문화 차이점이다. 나는 창작의 질도 높일 겸 이런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 수강 반에 참석했다. 우리는 매번 학습 자료들을 프린터 해오시며 무료로 강의해주시는 선생님이 고마워 점심 한 끼는 수강생들이 맛난 음식점을 찾아 선생님을 모시고 더치페이하여 즐겁게 수다를 떨며 먹는다. 그리고 가끔은 좋은 영화 관람도 같이하고 문학 탐방도 간다. 우리 머릿속 영역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서다. 올 가을에 우리는 파주의 마장 호에 갔었는데 노랗고 빨간 단풍들도 좋았지만, 그 나무숲 속에서 지저귀는 가을 새들의 신비한 우수의 소리, 출렁 다리아래 찬란한 햇빛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마장 호의 까치놀의 매력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길섶 검불 같은 풀숲에 숨어서 조그맣게 새록새록 다시 피는 철 늦은 작은 꽃들을 헤쳐보며 문학 감성을 키우는 것 또한 무한의 향수였다. 물론 이 나이에 내가 무슨 ‘등단상’같은 문학의 월계관을 쓰기 위한 것은 아니다. ‘문학의 집’으로 가는 길은 아침 길 걷기 운동-즐거운 산책의 길이며 세상속에 조용히 숨어있는 구석구석의 숨결들을 알아보는 시간이며 사색의 나래를 펴보는 시간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오랫동안 비워놨던 문학이란 草 筐(초광)속에다 착실히 하나하나 내용물을 채워가는 길이다. 오늘도 나는‘문학의 집’에서 가져온 학습재료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며 필요한 것들을 기록해 놓는다. ‘문학의 집’ 수강 생활은 이미 나의 생활의 뗄 수 없는 한 과정이 되었다.   2019 12, 19 서울에서      
7    장미의 얼굴 댓글:  조회:947  추천:0  2019-11-22
수 필 장미의 얼굴 류 재 순   서울의 오월은 빨간 장미들이 한창 뽐을 내는 계절입니다. 공원가나 골목길을 거니를 때면 어디에나 영락없이 담 밖으로 한껏 목을 내밀고 기다렸다는 듯이 길손을 반겨주는 넝쿨장미들의 유혹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방글방글 꽃잎을 피우며 빵긋빵긋 웃는 모습에 눈길이 사로잡히노라면 생각지 않던 감동과 사색이 몰려옵니다. 벚꽃나무, 철죽나무, 진달래…이른 봄을 알리는 봄꽃들이 한자취 흔적을 남기고 사라질 무렵, 서울의 들녘에는 온통 흰 눈꽃과도 같은, 아니 소복소복 가득담은 입쌀밥 그릇 같은 이팝나무 꽃들과 노오란 좁쌀을 중간에 살짝 섞은 조기밥그릇 같은 조팝나무 꽃들이 장관을 이룹니다. 깊어가는 초여름의 짙은 녹음 속에서 하얀 별천지를 이루는 경관 중, 모닥모닥 피어나는 빨간 장미들의 요염하게 튀는 얼굴들이 선을 보일 때쯤 되면 봄날이라는 아름다운 한폭 유화의 마지막 완성품이 됩니다. 마치 다 그려진 물고기에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 넣어 살아난 눈부신 생명체를 발견하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아마 장미는 오월의 여왕으로 불리는 가 봅니다. 겹겹이 피어나는 장미 꽃송이들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 순간 그 송이 송이들은 하나의 이름 모를 얼굴로 떠오릅니다. 그 얼굴 속에서 나는 잔잔한 숨결을 느끼고 그 속에 묻혀있는 희로애락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슬을 머금은 아침 장미도 약동하는 생명의 구술 빛으로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슬픈 눈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숨겨놓고 있는 가시도 가끔은 톡 쏘는 사이다 같은 여인의 신선한 매력으로 보이고 가끔은 또 옛날 춘향이 같이 절개와 자존을 지키는 수호천사와도 같은 아름다움으로 보이며 어떤 때는 독을 품은 여자의 한으로 보입니다.   내가 갓 한국에 왔던 한 20여년 전 일이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동포들의 합법체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여서 중국에서 남 부럽지 않은 공직으로 일 하던 많은 친구들 까지도 생전 해보지 않던, 3D 업종에서 숨어서 일을 할 때였습니다. 그해도 넝쿨장미들은 봄을 맞아 어김없이 무덕무덕 피어나며 울바자 밖으로 빠끔빠끔 얼굴들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미꽃 얼굴을 보는 내 마음은 한없이 우울 했습니다. 어쩐지 울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장미의 모습은 울안에 갇혀 숨어서 일하는 우리의 얼굴 같았고 생계를 위하여 한국 늙은이에게 시집 온 고향 아줌마 고향 아가씨들 같다는 생각이 울컥하고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혹은 사랑하던 고향 머슴애를 버리고 한국 땅에 들어온 그녀들의 슬픈 영혼이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숨 막히는 담 벽 안이 싫어서, 그리운 고향 모습을 찾아 저렇게 매일매일 담 밖으로 한 많은 얼굴을 내밀고 뻗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얼굴을 다독여 주려 했습니다. 따끔하고 벌침에 쏘인 듯 손끝이 아팠습니다. 금방 빨간 피가 맺히더군요. 그때 나는 장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슬픈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독과 한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아아, 내가 가시장미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구나!…” 나는 물 젖은 마음으로 장미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오늘 나는 또 넝쿨넝쿨 담 밖으로 뻗어 나오는 오월의 장미꽃 울바자 길을 산책하고 있습니다. 마침 5월 14일 로즈데이 날이군요. 로즈데이는 미국에서 꽃가계를 하던 청년이 자신의 연인에게 가계의 장미를 모두 바치며 사랑을 고백한 날이랍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들은 장미꽃을 선물하는 유래가 되었다는 군요. 열렬한 사랑의 빨간 장미, 첫 사랑의 주황 장미, 순결의 하얀 장미, 질투의 노란 장미…제가끔의 사연과 의미가 있다네요.   그러고 보니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군요. 브러커에게 거액의 돈을 들여서 한국에 와서도 숨어서 일한다는 사연도, 돈 없는 동포 여자들이 혼인이라는 비극적인 절차를 밟아 한국 땅에 정착했다는 얘기도 이제는 모두 옛말이 되었습니다. 체류가 합법화된 고국의 땅에서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동포여성들의 별빛 같은 얘기들은 무시로 우리의 가슴을 흥분 시킵니다. 그들은 자유로이 고향과 고국을 넘나들면서 금융계에서 상업계에서 학계에서 언론계에서 지어는 정계에서까지 능력과 활약을 돋보이며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빌라를 사고 상가를 운영하며 축적된 부의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며 대통령상까지 탄 여걸들도 있습니다. 특히 끊임없이 고국에 유학을 오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 분발하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새로운 전망을 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아이러니 한 것은 이제는 적지않은 고국의 젊은 남자들이 우리 멋진 동포 아가씨, 아줌마들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사색에 묻혀 장미꽃이 흐느러진 울바자 밖 길을 걷노라니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에 장미꽃 향이 물씬 가슴에 안겨 옵니다. 그 향은 저 멀리 서있는 아카시아나무와 라이락 꽃나무의 향과 어울려 정말 환상적입니다.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붉게 타고 있는 장미꽃송이를 들여다봅니다. 요염하고 화려하고 콧대가 잔뜩 높아 보입니다. 그 속의 가시를 한번 건드려 볼가요? 아니요, 자존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아픔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그 싱거러운 향기의 유혹을 물리치긴 쉽지 않네요. 빨간 장미는 열정 욕망 기쁨 아름다움의 상징이랍니다. 나는 지금 그 열정 욕망 기쁨 아름다움을 그 얼굴에서 분명 보아냈습니다. 그것을 수호하기 위한 숨어있는 가시의 깊은 뜻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도 아직 저런 열정 욕망 기쁨 아름다움이 남아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으며 꿈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을 새우며 타자를 하며 사색에 사색을 멈추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실패를 거듭할 때가 많지요. 그러나 이튿날이면 그 욕망은 다시 살아납니다. 어느 날, 자그마한 성과를 이루었을 때 그 찰나의 기쁨과 환희는 나를 미치게 하며 그 누군가에게 왕창 사랑을 주고 싶어집니다. 물론 나에게도 빨간 장미의 열렬한 사랑도 있지만 노랑장미와 같은 질투도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해 하기도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창피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내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자나요. 그렇지만 이 노숙한 가슴에도 흰 장미와 같은 순수성과 천진성이 있답니다. 세상천지를 모르는 소녀같이 깔깔 거리곤 하지요. 그래서 자신에게 아직도 미래를 가진 동심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이 모든 속성 사색 갈망들은 분명 내 얼굴에 다 쓰여 있을 겁니다. 장미의 얼굴만큼 아름답진 못해도 말입니다.   2019, 5, 20 서울에서
6    수필 빨래널기 댓글:  조회:867  추천:0  2019-11-22
수필 빨래 널기   미국에 가서 반년 넘게 있는 동안 나는 켈리포니아주 토렌스에 있는 딸집에서 생활하였다. 태평양을 옆에 끼고 파란 하늘을 이고 사는 이 고장은 찬란한 태양과 청신한 공기가 조화를 이루며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났다. 전쟁의 세례를 겪지 않아서인지 수백 년 수령의 아름드리 거목들도 어렵지 않게 볼수 있었으며 지은지 수십년 된다는 별장 같은 주택들도 새 주택들 못지않게 풍채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집집마다 앞뒤 정원에 펼쳐진 넓은 잔디밭들, 무성한 과일나무와 싱그러운 꽃밭들...나는 가끔 눈을 지그시 감고 두 팔을 뒤로 한 것 젖히며 심호흡을 한다. 그 청신하고 향기로운 공기가 폐속으로 스며드는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우리 생활에서 아직은 '현대화'에 속하는 많은 설비와 가전제품들이 그쪽에서는 이미 200년 이라는 '이력'으로 미국인들의 생활 패턴 속에 완고히 엉켜있었다. 빨래 건조기가 바로 그랬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하고 무조건 빨래 건조기에서 오래오래 건조시켜 꺼내는 것이였다. 밖에서는 태양이 눈부시고 상쾌한 바다바람이 주택 뒤 넓은 정원에 선들선들 불어오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빨래가 건조기에서 덜커덩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몇 안 되는 그릇도 전용 식기 세척기에 넣고 긴 시간을 돌리는 것도 못마땅했지만 그나마 그건 뜨거운 세척기에서 그릇이 충분히 소독 될 거라는 생각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빨래 건조기를 쓰는 일에 대해서만은 끝내 나와 딸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딸애도 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뒤뜨락 잔디밭 파라솔 아래에 있는 탁상에 커피 잔을 갖다놓고 설명을 했다. 빨래줄에 널어놓으면 도시의 이미지에 영향주기에 미국에서는 정원에 빨래 너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다는 것이다. 큰길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제 집 뒤울안에서도? 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 이런 생각도 세대 차인가? 하긴 딸애의 구구한 설명은 나에게 수십 년 전의 일을 상기케 했다. 지난세기 70년대, 내가 처음으로 중국에서 제일 큰 국제도시인 상해에 갔을 때였다. 많은 고층건물과 화려한 상가들은 동북 태생인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어느 결에 주거와 상업시설이 혼합된 주상복합단지에 들어섰다. 거기에서는 이상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집집마다 창문을 열고 긴 장대들을 밖으로 내놓았는데 그 장대들엔 크고 작은 빨래들이 줄줄이 널려져 있었다. 여인들의 속옷들까지 넌지시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체적인 아파트 형체는 빨래 널기 장터 같았다. 참으로 볼품이 없었다. 앳된 마음에도 충격 이였다. 오랜 세월 내 마음속에서 '상해'하면 항상 이 찜찜한 풍경과 동반되여 상기되곤 하였다. 그러고 보니 미국의 법을 이해 할 만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리에서 아예 보이지도 않는, 해볕 좋고 바람 잘 부는 넓은 뒤뜰에 빨래대 하나 못 놓게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빨래에 대해 집착을 하게 된데 는 아마 소시 적 부터 몸에 익혀진 습관 때문이리라.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빨래터에 따라다니는 것이 큰 재미였다. 맑은 물이 콸콸 흐르는 꽤 큰 냇가에서 넓적한 돌 하나를 차지하고 할머니를 흉내 내여 타닥타닥 빨래를 두드리기란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작은 손아귀에서도 빨래는 방치로 두드릴수록 검은 때물을 줄줄 흘러내렸다. 그 다음 할머니처럼 빨래를 흐르는 물에 활활 헹궈내면 뽀얗게 변해버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 났다. 할머니보다 더 잘 해낸 것 같았다. 그러나 더욱 큰 재미는 큰 빨래함지를 머리에 인 할머니 뒤를 부지런히 따라 타박타박 걸어와서는 햇빛 가득한 집 울안의 빨래 줄에 빨래를 너는 일이였다. 할머니는 내가 성가시다며 옆에서 얼씬거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지만 나는 무조건 걸상을 가져다놓고 뒤뚱거리며 올라서서 내가 씻은 작은 빨래들-양말이며 수건 등을 기어이 내 손으로 널었다. 할머니가 탁탁 빨래를 털면 나도 그 작은 양말도 손으로 탁탁 치고 쫙 펴서 널었다. 그리고는 동네를 몇 바퀴 돌며 실컷 놀다 집으로 돌아오면 누르스럼 하던 광목 이불 호청들이 할머니 손을 거쳐 쨍쨍한 햇빛 아래서 옥양목처럼 눈부신 빛을 뿌리며 바람에 펄렁이고 있었다. 물론 할머니가 큰 솥에 재물을 풀고 빨래를 푹푹 삶은 것도 한몫을 한 것이다. 나는 영화 구경을 하듯이 울안에 꽉 찬 빨래들을 구경하다 비로소 바람에 날려 떨어진 작은 내 빨래들을 발견하고 왔다갔다 뛰어다니며 줍느라 바쁘다…할머니 슬하에서 자란 나의 동년시절의 생활 모방과 체험들은 나의 인생에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자리매김 해놓았다. 그러나 내가 성인이 된 어느 날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면서부터 내 생활에 오랜 세월 몸 배어온 빨래 널기 습관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물론 양지바른 베란다에 빨래를 널기는 하지만 울안에 빨래를 널던 그 대자연의 싱그러운 향은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 밝은 햇빛, 청신한 바람, 대자연이 주는 그 세례 속에서 빨래는 얼마나 깨끗이 소독되고 깔끔하니 화이트 되며 보송보송하니 상큼한 향기를 안겨주었던가. 그러니 정원의 그 좋은 천연 빨래 건조 터를 못 쓰는 게 큰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미국의 법이 그렇다고 하니 서운한 생각은 금할 수 없지만 역시 에누리 없이 지켜야 하겠지. 그러나 아쉬운 마음은 미국을 떠난 뒤에도 내 머리 속에서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 온지 1년이 되던 어느 날, 미국에 있는 딸이 위챗으로 뜻밖의 소식을 보내왔다. “엄마, 이제는 정원에 빨래를 널 수 있게 됐어요. 정원에 빨래를 널 수 있다는 새 법이 나왔거던요, 엄마,  빨리 놀러 오세요.  잔디밭 파라솔에서 커피 마시며  빨래 향기 맡을 수 있게 됐어요…” 오 마이갓!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내가 어리둥절해 있을 때 딸애의 설명이 따라왔다. “정부의 주장: 태양에너지를 이용하기에 전기 절약, 자외선으로 빨래 소독…” 허, 난 또 무슨 큰 발명이라고?! 우리 조상들은 원래부터 잘 해왔어!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폰을 닫았다. 아무튼, 마음은 너무 후련하였다. 서울에서
5    수필 과자는 높은 선반위에 댓글:  조회:873  추천:0  2019-11-22
수필 과자는 높은 선반 위에… 류 재순 어린이 명절이 다가왔다. 나의 딸은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아들을 위하여 수정궁이나 유명 랜드에 데려가 같이 놀아 주는 것도 필수지만 어떤 맛있는 음식을 사줄까 하는 것에 꾀 신경이 쓰이는 일인 것 같다. 지금의 영양과잉으로 눈에 띄게 불어나는 아들애의 몸무게를 바라보며 어김없이 또 사달라는 피자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미국에선 한국 돈으로 만 원 대라도 크고 맛있는 피자를 사 먹을 수 있는데 한국에선 애들이 선호하는 이삼 만 원 대의 치즈피자라도 몸에만 좋다면야 당연히 가격이 문제가 아니다. 딸은 아들애와 “진지”한 상의에 들어갔다.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이 어떤 것일까를. 행복하고 넉넉한 그들의 모습을 바라 보늬라니 가슴 깊숙이 묻혀있던 그날의 일이 떠오른다.   힘든 시골 생활은 아니었지만 자그마한 시가지 거리에서 우리 맞벌이 부부의 낮은 봉급의 젊은 가정은 언제나 바쁘고 빡빡하였다. 그때 우리는 설 명절이 되면 친척이나 직장 간부들에게 작은 선물이나마 마음을 표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믐날 오전이었다. 남편 직장의 나 어린 동료 부부가 선물 하나를 가져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선물은 역시 그 당시 제일 유행하던 계란빵( 鸡蛋糕 )함이었다. 빨간 모자, 빨간 치포를 입은 두 남녀 신동이 두 손을 한데 모으고 공희(恭喜)를 하는 전통 설 인사 표지를 한 계란빵 봉지는 그 시절 유행 선물이었다. 그나마 남편이 직장에서 작은 “깨알”( 芝麻 )급 직무를 가지고 있다고 우리 집에도 가끔은 이런 것들이 들어 왔다. 직장 동료가 정중히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기가 바쁘게 애들은 쪼르르 옆으로 달려와 계속 나에게 물어댔다. “엄마, 저거 우리 언제 먹어? 오늘 그믐날 저녁? 아님 낼 설날 아침?” “몇 번을 말해야 알겠니? 저거 너네 주라고 사 온 거 아니라니까.” 거듭되는 해석에도 애들의 끊임없는 보챔에 끝내 나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랬다. 그때 우리 생활에 들어온 선물을 성큼 풀어 애들을 먹일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도 또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야 하는데 그 돈을 절약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 것 뿐 이었다. 그해는 우리가 이미 선물을 줘야 할 집에 다 준 뒤여서 나는 그것을 애들이 걸상을 놓고도 닿지 못할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시원한 헛간에 건사하려니 그놈의 쥐 등쌀을 이겨낼 것 같지 않았다. 설 명절이 아니어도 또 다른 명절, 혹은 또 다른 수요 때 요긴하게 쓰기 위해서는 어디엔가 건사를 해 놓는 것이다. 그런데 그해는 그“기회”가 금방 닥쳐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급급히 밥 한술 지어먹고 애들 챙겨 유치원, 탁아소에 보내고 하루 종일 밖에서 팽이처럼 돌다 밤늦어서야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밥을 지어먹어야 했고 애들을 건사하여 녹초가 된 몸을 잠자리에 쓰러뜨리고…계란빵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체 어느 듯 한해가 지나가 버렸다.   또다시 설 명절을 맞이하였다. 선물들이 오고 갔다. 나는 갑자기 그 계란빵이 생각났다. 그믐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말하였다. “정말 저 선반위에 올려놓은 선물 깜박 했네요.” “그래? 나도 몰랐는데.” 성질이 급한 나는 더는 남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앉은뱅이 걸상을 잡아당겨 올라서서 그 계란빵을 내려놓았다. 손엔 뽀얀 먼지가 가득 묻었다. 그 당시 가장 인기 간식을 드디어 먹게 된다는 들뜬 기분에 애들은 마구 이리저리 퐁작퐁작 들뛰었다. 포장을 풀었다. 순간, 우리는 모두 아연 실색하고 말았다. 모양새를 분간하기 어렵게 새까만 곰팡이가 빵 껍질을 쫙 덮고 있었다. 냉장고라는 것도 모르고 살던 그 시절의 비극이었다. 애들은 와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애들의 울음소리는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었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지하고 무정하고 바보 같은 엄마라는 생각에 눈에 눈물이 나 애들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냄새 때문에 나는 급급히 봉지를 손에 움켜쥐고 집밖의 쓰레기 무지로 달려 나갔다.그런데 곰팡이 속에서 계란빵이 하나하나 땅에 떨어지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글쎄 계란빵 속엔 먹다 남은 반쪽자리가 하나 있었고 전통적인 전체 숫자에서도 하나 모자랐다. 새 상품이 아니었나? 나는 불끈불끈하는 혼잡스런 생각을 머릿속에 주먹다짐으로 꽉꽉 억누르며 집안에 들어오기 바쁘게 남편에게 화를 내였다. 전번에 이거 선물한 그 직장 동료 말이에요. 과자 새로 사서 가져온 거 맞아요? 왜? 나는 방금 목격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사실 그 시절, 우리같이 빡빡한 생활을 하는 소시민들의 생활 습성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조금이라도 돈을 절약하느라 포장도 뜯지 않은 채, 혹은 포장도 제대로 점검안한 채 빙빙 돌려 선물하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도 그럴 생각이었긴 하지만, 그 동료의 성의가 못 마땅해 내가 비양 거리는 말을 한창 하고 있을 때였다. 미쳤어? 제 정신이야, 남의 성의를 어떻게?! 남편의 꽥 하는 말투에 나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한참만에야 나는 중얼 거렸다. 그럼 그건 뭔데? 애들이 잠든 그날 밤, 남편은 소리친 것이 미안했던지 조용히 나에게 사과 하였다. 어느 날인가 자기가 집에서 술 한 잔 하는데 안주가 마땅치 않아 조금 꺼내 먹었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어처구니없어 말이 나가지 않았다. 금쪽같은 내 새끼 입에도 넣어 주지 못하고 올려놓은 것을!… 하긴 결혼 때부터 남편이 애들처럼 과자나 면식을 유별나게 좋아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그의 말에 의하면 부대에 갔을 때 제일 기분 좋았던 것은 끼니때 나오는 만두( 馒头 )때문이었다고 했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심부름 시킨 돈에서 가만히 과자 한 조각 샀다가 밥도 못 먹고 쫓겨났었다는 얘길 듣기도 했었다. 그날 밤, 나는 서른을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별의별 생각을 다 하였다. 도대체 남자들은 언제가야 철이 드는 걸까? 저렇게 큰 어른도 훔쳐 먹는 빵을 애들은 그동안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그와의 동고동락 속에서 그의 사람 됨됨을 잘 알게 된 나는 엉뚱한 생각을 떠 올렸다. 끝까지 큰 벼슬은 하지 못했어도 직장에 충실했고 동료들을 항상 그처럼 따뜻이 포옹하며 살아 온이 “깨알”벼슬의 당원간부가 그때 혹시 그 동료를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던지?… 아아, 사랑하는 내 새끼들아, 그땐 엄마가 너무 미안했어!   2007, 5. 8 서울에서
4    수필,-곶감, 그 추억 댓글:  조회:937  추천:0  2019-11-22
수필: 곶감… 그 추억   호텔에서 일어나기 바쁘게 전화가 왔다. 아침식사 하러 가자는 것이다. 어제 밤늦도록 우리 재한동포 문인협회의 연변작가협회소속인 몇몇이 상주 숲 문학 18기 출판기념과 “상주 문인의 밤” 축제 열기에 오래오래 들끓었다.   상주 숲 문학회는 2002년 연변작가 협회와 자매결연하고 벌서 15년째 꾸준히 손잡고 발전해 오고 있으며 공동 작품으로 숲 문학지를 운영해 오면서 돈독한 우정을 쌓아오고 있는 터다. 방금 전화를 해 오신 분은 바로 숲 문학회 장 운기 회장이시다. 장 운기 회장님은 상주시 산림녹지과장직 재직 중 이신데 1998년, 숲 문학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한맥 문학“ 시인으로 등단해 지금까지 한국 문인협회 (문화 개발 위원 및 경북 문협 회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다. 단단하게 생긴 중등 키에 짙은 박력감과 강인함을 가진 그의 얼굴엔 사람 좋은 웃음 가득히 우리를 데리고 식당으로 이끌었다.   시원한 북어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터미널로 와 버스에 오를 때 김 운기 회장님은 우리에게 선물 한 세터씩 손에 들려주었다. 버스에 올라 앉아 살펴보니 홍조 띤 어린 소녀의 볼따구니 마냥 발그스름하게 숙성되고 적당히 잘 건조된 곶감들이 정갈하게 줄을 지어 앉아 멋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 뜻밖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곶감으로 유명한 상주에 와서 긴박했던 밤 행사를 보내고 급히 떠나다 보니 곶감 하나 못 사가지고 가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었다. 우리는 장 운기 회장님과 연신 고마운 작별 인사를 드리며 박스 속에서 말랑말랑 먹음직스러운 유혹을 보내고 있는 곶감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나는 상주에 올 때부터 이 곶감을 생각하고 있었다. 곶감은 나에게 추억이며 아픔이다. 선물 받은 곶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귓전에 너무 익숙했던 한마디 말씀이 또다시 찾아 왔다. “휴~ 내 살던 고장엔 이맘때면 그 말랑말랑한 곶감 맛이 기가 막혔지…”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늦가을, 낙엽 깔린 느릅나무 마당에 가마니 한 조각을 깔아 놓고 몸에 겉옷 하나 걸친 나는, 짧은 담배 대를 입에 물고 물끄러미 앉아 있는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매번 널어놓는 그 푸념을 들어야 했다. 할머니는 이 땅에 온 후 부터는 그놈의 곶감이란 것을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같은 말을 되풀이 하신다. 그리곤 깊은 한숨을 내 쉬며 또다시 깊이깊이 담배 연기를 빨아드려 훌 내 뱉으시군 하시었다. 나는 매번 할머니의 고향 얘기를 들으며 저-기 어디 남쪽나라 어느 동내에 가을이 되면 감나무에 붉은 감이 대롱대롱 달려있을 정경을 상상해 보군하였다. 생감, 단감, 그리고 숙성 시킨 곶감…할머니가 제일 좋아한 건 역시 곶감이라고 하였다. 그 졸깃졸깃하고 달큼한 곶감은 배고픔을 달래주는 끼니였고 간식이었다고 하셨다. 넓디넓은 땅에 삽만 밀어 넣어도 양곡이 된다는 신화 같은 소문에 밀려 만주 땅-동북으로 건너와 아들 둘을 키우고 이제는 손녀까지 키우면서도 아직 한 번도 그때 그런 곶감을 보지 못하셨다는 아쉬움은 평생을 안고 사시였다. 하긴 매서운 긴 겨울추위에 자리 잡고 있는 만주 땅엔 감나무도 없었고 중국 땅에 아직 시장경제가 풀리기 전이였으니 남방의 곶감이 한 작은 현성에 까지 건너올 수도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어느 해 중국동북의 겨울 시장에 정말 뜻밖에 곶감이 나타났다. 아, 이게 할머니가 그렇게 외우시던 곶감이구나! 그런데 그 곶감이란 것이 무슨 하얀 가루 같은 것에 뒤덮이여 조그마니 땅땅 바짝 말라 있어 모양조차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것이 곶감이라니 나는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손에 사들고 부랴부랴 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 내가 사온 곶감을 손에 들고 한참 바라보시던 할머니는 한 입 입에 물다 말고 “에그, 돌덩이같이 땅땅하네!” 하시며 도로 내려놓으시는 것이었다. 그러며 또 그 남쪽 땅 고향 얘기를 시작하셨다. 뼈가 자란 그 옛 동내의 감나무 향을 다시 풍겨 놓으려는 듯, 얼기설기 엮어진 고향의 토막 얘기들이 풀려진 실타래처럼 끝도 없이 풀려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끝내 한중 수교를 기다리시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그렇게 할머니의 고향이야기도 끝을 맺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갑자기 정신을 차리신 할머니가 나의 손을 잡고 휑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었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에겐 할머니는 엄마였다. “너 삼촌 뼈가 조선전쟁터에서, 중국에서 뽑혀갔던 인민군인지 뭔지…그 땅에 묻혔을 텐데 이름 석 자 찍힌 열사증 ( 烈士證)만 돌아오고…아무것도 못 찾았다 하더라. 어떻게 희생 되었는지, 시체도 못 찾았다는 것이다. 같은 전역에 참가했던 수많은 어린 병사들이 그렇게 시체도 찾지 못한 체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너 아빠는 잔폐 되여서라도 돌아왔지만… 둘 다 감나무 집 울안에서 태여 났었지. 그 땅엔 다시 가 볼 수 없을가?…” 그랬다. 할머니는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꺽두머리 남편 따라 만주 땅으로 오셨고, 또 그렇게 혈기 넘치게 성장한 열 몇 살 밖에 안 된 어린 두 아들은 들끓는 세상사에 휩쓸려 약속이나 한 듯 어머니를 속이고 “애국”이란 정의로 조선 전방으로 나갔다. 할머니의 담뱃대는 둘째 아들의 열사증이 내려오던 날, 할아버지가 밤을 새우는 할머니에게 담배 잔득 담아 입에 물려주신 것이 시작이 되였다고 한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할머니가 그토록 일생을 외우시던 고향땅의 곶감 이야기 속에 뿌리 깊이 숨겨진 슬픔과 우수가 무엇 이였는지…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싣고 나는 창밖의 풍경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무에서 채 떨어지지 못한, 찬바람에 얼룩진 단풍잎들이 보였다. 무슨 미련인가를 호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내 무릎 사이에 놓여 진 곶감 선물 박스를 응시하였다. —할머니, 천지가 변했어요, 저는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토록 그리던 한국 땅에서 정착하면서 한국 문인협회 작가들과 우리민족의 문학을 위한 유익한 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눈물겨운 우리 한반도 이야기들을 글로 남겨가며 살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은 또 한국 땅에서 제일 이름 있는 상주 곶감을 선물 받아 가고 있어요. 할머니 제사상에 꼭 놓아 드릴게요! 그리고 삼촌도 이 땅 어디에선가 분명 감 향기를 맡고 계실 거예요…   2018, 4, 5 서울에서
3    가을의 향연 댓글:  조회:724  추천:0  2019-11-21
가을의 향연 류재순 조용한 멜로디가 내 귀가로 흘러들어 온다. 무거운 눈꺼풀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주섬주섬 운동복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간다. 아침6시, 시원하고 경쾌한 기운이 밤새 답답이 숨을 죽이고 있던 내 폐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스며든다. 매일 시작되는 나의 아침 산책ㅡ빠른 걷기 운동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바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다리 아래 영등포 수변 둘레길, 도림천 둘레길에 이르게 된다. 가을이다. 9월의 가을은 아직은 완연한 황금빛과 단풍 빛이 아닌 녹색의 미련들을 머리에 버티고 있는 계절이다. 언제부터인가 시나브로 생긴 황갈빛이 녹음의 원숙이 남아있는 그 독특한 진녹색을 헤치고 언뜻언뜻 선을 보이고 있다. 발효된 내음 같은 것이 저 멀리 숲속으로부터 우리 마음에 다가와 계절의 발걸음 소리를 노크 한다. 짙은 보랏빛, 연두빛 , 핑크빛 새벽 나팔꽃들이 싱싱히 피여서 길 량 옆을 수놓고 있다. 저 야트막한 오른쪽 둔덕길에는 넓은 부영 꽃 밭, 그리고 어디서나 눈에 띄는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길 량 옆 흐트러진 풀숲에서는 타닥타닥 무엇인가 여물어 가는 소리, 채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걷는 산책길 옆 자전거 도로는 벌써 자전거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비둘기들의 구구 소리, 까치들의 깍깍 반가운 소리와 모습이 자전거 행렬 속에서 흩어졌다 모였다 바쁜 날개 짓을 한다. “ 누님, 좋은 아침!” 칼칼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젊은 아저씨가 나에게 건네는 인사말,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아침운동에서 익숙해진 얼굴이다. 어쩐지 기분이 업그레이드 된다. 이름 모를 설레임과 즐거움을 안고 가슴을 쭉 펴고 뒤 발꿈치를 먼저 땅에 부착 시키며 제대로 된 걷기운동 자세로 활기차게 걸어간다. 생활 패턴이 각자 다른 낯설고 낯익은 사람들이 앞뒤로 스쳐 지나며 나름대로의 자태로 열심히 걷고 뛰는 행렬 속에서 나는 생명이 자기의 연장선을 위한 갈구와 분투의 소리를 듣는다. 길 양 옆의 가로수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성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기다란 녹색 터널ㅡ구로 올레길은 내가 꼭 거치는 코스다. 그곳엔 즐비한 운동기구와 다문다문 세워져 있는 시목( 诗木 ) 들이 넘 좋다. 여기에 오면 나는 동반하던 음악을 끄고 물 안개마냥 끝없이 피여 오르는 내 사색의 해양에서 유영 하게 된다. 눈앞엔 윤동주 시인의 “코스모스” 시목이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써늘이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 간다...“ 나도 소녀 시절의 안타까웠던 첫 사랑을 떠 올린다.그 여운은 오랜 세월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의 남편과는 저기 걷고 있는 노부부들처럼 한번도 정답게 나란히 손을 잡고 다닌 적 이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본분과 직책을 다하며 지금의 이 가정을 지켜 왔다. 어느날 나는 약을 입에 삼키지도 못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 “여보, 당신이 죽으면 난 어떻 하라구..” 내 입 옆에서 약을 든 손이 가볍게 떨리며 말하는 남편의 젖은 목소리였다. 나는 가슴이 뭉클하여 더 약을 먹을 수 가 없었다. 무심히 덤덤하게 같이 걸어 온 세월, 언제 이렇게 하나가 되였나, 그것은 분명 봄, 여름, 그리고 냉냉한 겨울도 겪었던,오랜 기간 발효된 탁주 같은 취향(醉香)ㅡ.오늘의 향연이였다 . 올레길을 내려와 다시 도림천 둘레길로 들어서는데 저 멀리에서 휠체어 하나가 다가온다. 벌써 며칠 째인가 오늘은 어쩐지 눈길이 자꾸 휠체어에서 떠나지를 못한다. 휠체어를 미는 여인의 긴 생머리가 아침 바람에 가볍게 흩으러지고 있다. 그 앞 휠체어에는 70대쯤 되여 보이는 할아버지가 힘없이 머리를 옆으로 떨어뜨리고 앉아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늦어진다. 오늘은 휠체어 한쪽에 예쁜 코스모스 몇 송이가 걸려 있다. 휠체어가 눈앞으로 다가오더니 서서히 옆으로 지나간다. “ 아빠, 눈 좀 뜨고 이 꽃 좀 봐요” 젊은 여인의 말이다. “ 애 데리고 매일 출근길도 바쁜데... ” 힘은 없으나 분명한 뜻이 전달되고 있는 할아버지의 말씀 이였다. 나는 금방 머리에 감이 왔다. 무엇인가 좀 더 듣고 싶은데 휠체어와 나의 간격은 벌써 멀리 떨어져 버렸다.. 이 세월에 조금은 낯선듯 한 오늘의 풍경,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 또다시 스펀지마냥 무겁게 퍼져 나가는 나의 생각...진주보다 더 귀한 자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아글타글 키우느라 아빠가 보낸 그 겨울, 봄, 여름의 헌신과 고투를 생각 해 본다. 그 무게는 저 늙고 병든 몸에 무겁게 무겁게 쌓여져 있을 것이다. 그 무거움에 비해 아침마다 병든 아빠의 건강을 위해 휠체어 산책에 나선 딸자식의 마음은 어쩌면 아빠의 넓은 바다 같은 수심의 몇 방울의 무게 뿐일 수 도 있다. 그런데 어이하여 지금 이 가을 햇빛 아래서 이처럼 오색령롱하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끝없이 높고 파아란 하늘, 자갈돌 위에 돌돌 굴러가는 맑은 개천 물, 늦은 사랑에 심취되어 예쁜 끼를 한 것 뽐내는 아름다운 들꽃들, 무르익어가는 과일과 곡식, 이제 곧 불타는 단풍이 올 것이고 바야흐로 풍요로운 황금 들녘이 펼쳐 질 것이다. 이 속에는 지나간 날 언 땅을 비집고 일어선 봄 새싹들의 의지와 갈구, 한 여름의 무성한 성장 진통이 수렴 되여 있다. 정말 뿌려놓았던 모든 것이 가식 없이 결실을 드러내는 긴 장막극의 에필로그다. 나도 지나간 나의 세월들을 반추해 본다. 열차 밖의 풍경처럼 언뜻언뜻 지났던 한번밖에 스칠 수 없었던 그 매매일의 “현재”를 혹 “다음 역에서 보자”는 게으름의 빙자로 모두 무심이 흘려버리지 않았는지? 내 마음 깊은 곳 어디에선가 느닷없이 꾸물거리며 올라오는 센티멘탈의 우수가 밀려온다. 그것은 항상 부족함의 기아를 안고 사는 인간의 상정 이라기 보다 분명 내 자신이 불충실함이 빚어낸 만회 할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다. 다시 되돌아 갈 수 있는 유턴의 신호는 인생의 어디에도 걸려있지 않다는 이 가장 상식적인 이야기는 왜 때늦은 뒷 풀이로만 되고 마는가. 복합의 멀티 맛으로 가득 찬 이계절의 특유의 칵테일이 각자 앞에 놓여있다. 가을이 선물한 내 앞의 이 찰랑이는 칵테일은 나에게 과연 어떤 맛을 선물 할 것인가?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해 본다. 저 넓은 들녘의 개미보다 못한 이 미소한 존재 에게도 후회 없는 삶으로 인생의 가을에 티끌같이 작은 아름다움의 향연이라도 남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20015 9 25        서울에서
2    감 향기 날려올때 댓글:  조회:500  추천:0  2019-11-21
감 향기 풍기는 날 류 재 순   컴퓨터 앞에서 한창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있는 중인데 사무국의 최미영씨의 전화가 들어왔다. 오늘 협회사무국 송연옥씨의 집으로 가서 “마당쓸기” 체험하려 가려는데 같이 동참 해주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무국이라면 김재연, 최미영, 송연옥 세사람이다. 며칠 전 송연옥씨의 수필 “마당쓸기”가 큰 공감을 일으켰었다. 지금은 건강을 되찾았지만 몸이 좋지 못하여 푸른 숲이 우거진 공기 좋은 곳에 한적하게 생활하면서 이 가을 감나무 낙엽 쓸기에서의 인생회감을 쓴 따뜻한 글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지 않아도 한번쯤 가서 연옥씨의 건강현황과 생활환경을 알고 싶어 하던 터였다. 특히는 연옥씨가 자기 글의 팬들에게 “감나무 집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마당에서 바비큐 하시고 싶은 분들 연락 주세요”하고 마중의 손길을 뻗히고 있는 터였다.   우리는 김재연씨의 승용차를 타고 숲이 우거진 대곡동을 향해 신나게 달렸다. 야트막한 언덕바지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조금은 연륜이 있어 보이는 2층 빌라의 1층에 자리잡은 남향집이었다. 작은 언덕바지들과 푸른 숲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분좋은 자연 경계, 그 숲속에서 빠끔빠끔 홍조띤 단풍잎들의 사이사이에서 보내오는 눈인사, 나뭇가지사이로 쫙 날개를 편 파아란 가을 하늘, 그 창공에 걸려 여름날의 공격적인 정열보다는 눈부시면서도 은근한 따사로움으로 온몸의 세포를 열어주는 가을 태양의 친화력이 가슴을 안아준다. 그리고 멀리보이는 텃밭들, 장마철이면 제법 큰물이 흐를 것 같은 내천 계곡위에 놓인 그리 세련되지 못한 겁먹을 만한 다리…서울 근처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몸과 마음이 힐링 받기에는 충분히 좋았다. 마당엔 정말 커다란 감나무 세 그루가 서 있었는데 한쪽으로 수북히 쓸어 넘긴 낙엽들과 푹 물러 꼭지에서 떨어진 홍시가 가끔은 땅에 얼룩을 놓고 있었다. 연옥씨가 수필에서 하루에 적어도 둬 번씩 마당 쓸기를 해야 한다던 말이 상기되어 미소가 떠올랐다.   도착한 때가 정오를 넘긴지라 우리는 분주히 바비큐 점심 준비를 하기에 바빴다. 연옥씨가 우리를 데리고 텃밭으로 갔다. 싱싱한 풋채들이 넓은 잎을 휘적거리며 벙긋벙긋 웃고 있었다. 배추, 열무, 쑥갓, 고추등을 푸짐히 바구니에 담아왔다. 부지런한 재연씨는 눈치껏 재빨리 야채들 씻기에 바쁘다. 가져온 삼겹살, 오징어 버섯 북어 방울토마토 등을 펼쳐 놓으니 야, 그야말로 푸짐한 한상이 되었다. 나는 아직은 속이 앉지 않은 그렇게 큰 생배추도 생으로 먹는것에 놀랐고 그 맛 또한 그처럼 별미인지 처음 알았다. 마트에서 사온 배추에는 절대 이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 싱싱함과 푸른빛이 너무 좋아 나와 재연이는 배추잎을 볼에 대고 머리를 흔들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벽에 걸린 스피카에서는 벌써 기분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며 우리의 가을 가슴을 다독여 준다! 밥상위에는 든든한 파라숄이 3개나 세워져 있었다. 연옥씨의 말이 가을의 이 파라숄은 물러떨어지는 홍시를 막아주기 위한 것이란다. 그래서 우리도 일제히 머리를 들어 위를 보니 이미 많은 잎새와 열매를 땅에 떨어뜨려 크다란 감나무는 조금은 휑등그레 해 보여도 무르익어 곧 떨어지려는 홍시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가만 놔두면 다 떨어지고 말테니 우리보고 많이 따가라고 연옥씨는 거듭 부탁하였다. 성격이 활달하고 몸가짐이 경쾌하며 행동이 날렵한 미영씨가 밥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연옥씨가 찾아준 ,그물망이 달린 긴 창대를 들고 감나무 밑으로 달려가 높이 달린 감들을 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서투러 창대 끝이 열매에 닿기만 하면 감이 제 먼저 땅에 떨어져 터졌다. 그러나 머리 좋은 미영이는 어느결에 그 비결을 터득하고 하나 둘, 그다음엔 세개식 그물망에 낙차없이 따 넣고 있었다. 우리는 박수를 쳤고 나는 그물망의 감을 밥상위에 꺼내놓느라 바빴다. “이젠 그만해요 좀 덜 익은건 남겨 두세요” 정신없이 따내는 미영을 보고 내가 말했다. “아유, 다 따 가요. 금시 다 익어 떨어져요. 우린 시골 시댁에 가면 또 많아요” 부자 집 맞 며느리 같이 푸근함을 주는 연옥씨의 말이다. 나는 상에 수북히 쌓여진 홍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경기도 이천에 사시다 두만강을 건너 추운 동북땅에 정착하시고 눈을 감을 때 까지 고향의 홍시, 연시, 곷감을 외우시던 할머니었다 밤늦은 가을 밤이면 중국 동북 땅에서는 생전 보지도 못한 그 열매들의 이름을 들으며 나는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영문도 모른채 애수에 젖은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 드리군 하였다.… 나는 또다시 홍시가 매달린 파란 창공을 바라보았다. 문득 이오덕 선생님의 유작시가 생각났다. 아침에/ 감나무 밑에 가서 바알간 홍시 하나 단풍잎으로 받쳐 먹고 쪽빛 하늘 쳐다 보니 … 시인은 그 하늘에서 하나님을 봤다고 했다. 나는 그리운 할머니가 보였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세상이 이렇게 바뀐 것을 알고나 계실까? 그리웠던 고향의 이런 홍시를 그곳에서 혹시 맛보고 계시는지…   우리는 배추며 열무며 홍시며, 지어는 연옥씨의 반찬 솜씨를 담은 나백열무 물김치며를 가득싣고 귀로에 올랐다. 떠나는 차안으로 여름내 이 울안을 가득 채웠던 감나무의 싱긋한 향기가 가을바람에 휘휘 날리며 물씬 풍겨 들어왔다. 연옥씨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당쓸기” 수필에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수확의 계절은 또한 어떤 시작의 계절이란 것이다. 그렇지, 이결실의 계절에 낙엽 밑에 묻히는 씨앗들도 이제 또 동면을 거치고 봄날의 해동을 거치며 줄기차게 성장할 성스런 생명력의 꿈을 키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붉게 익은 홍시를 키워 온, 모든건강을 되찾은 연옥씨의 가슴에도 또 새로운 강한 생명력의 싹이 꿈틀거릴 것이다.     2007 ,10, 15 서울에서
1    나의 사춘기 댓글:  조회:466  추천:0  2019-11-21
나의 사춘기 류재순   가끔,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사춘기를 떠올려본다. 그때마다 나의 열 한 살의 기억과 열다섯의 실수가 참을 수 없는 아픔으로 가슴을 찌른다. 나의 아버지 나이 열아홉에 내가 태여 났다고 한다. 양쪽 부모님들의 수선으로 일찍 장가를 간 아버지는 한 달도 채 못 되어 부모님과 어린 색시를 남겨놓고 전방으로 떠나셨단다. 게다가 열네 살 밖에 안 되는 유일한 남동생 하나까지 부모 몰래 빼돌려 같이 전방으로 가셨다고 한다. 바로 그해 내가 태어났는데 열일곱 어린 나이에 나를 낳은 어머니는 출산과 함께 나를 할머니 품에 안겨놓고 돌아 가셨다니, 나는 젖 한 모금 못 빨아보고 할머니 손에서 미음을 먹으며 자랐다. 딸은 못 낳아보고 아들 형제만 낳고 어떻게 단산이 되어버렸던 할머니는 어린 아들 둘 다 전방으로 ‘도망’가고 며느리마저 잃어버린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지시었다. 그런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나는 깊은 아픔이었으며 극진한 ‘ 사랑 선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은 물론, ‘엄마’란 이름을 입에 올려보지도 못했던 나는 다른 애들은 왜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부를까? 하는 착각의 유년 시기를 겪기도 했다.   할머니는 마을에서 소문난 ‘서울 댁’이었다. 비록 고향인 서울을 떠나 만주 땅에 힘겹게 정착하면서도 서울식 긴 흰 앞치마를 항상 앞에 두르시고 제비 같이 반들반들한 자그마한 까만 머리통에 짧은 은비녀를 가뜬히 찌른 그 뒷모습은 좀 작은 키와 단아한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키가 껑충하고 구레나룻이 시커먼 할아버지는 예쁜 할머니를 바라보며 늘 싱글벙글 하셨고 그 힘든 농경 일에도 집안 앞뒤일 다 잘 처리하시며 서울의 어린 시절에 익히지 못했던 한글을 ‘야학’까지 다니는 배움을 가지며 열심히 사는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안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할머니 등에서, 할머니 뒤꽁무니에서 항상 으썩거리며 어린 강아지처럼 붙어 다녔다.   그렇게 나는 열한 살이 되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공부할 수 있는 작은 독방 하나를 내 주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른 큰 방을 써셨다. 밤에 잠을 자다보면 나는 아무리 곤하고 오줌이 마려워도 아침까지 꾹 참고 일어나기 바쁘게 시원하게 한바탕 해소하군 했다. 그런데 그날 밤은 어떻게 된판인지 한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깊이 잠 들 수가 없었다. 자기 전에 물을 너무 많이 들이켰던 모양이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아무리 참으려 해도 오줌이 곧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급기야 방 미닫이문을 확 밀어 제치고 요강이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 뛰어 들었다. 이때 내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발견됐다. 맨 엉덩이를 다 내놓은 할머니가 요강에서 급히 일어서는데 배꼽아래 이상한 것들이 다 보였다. 나는 놀래서 무심결에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는데 눈을 감고 자고 있는 줄로만 여겼던 할아버지가 멀쩡히 눈을 뜨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할머니 쪽을 바라보시던 중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할머니가 저렇게 남자인 할아버지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맨 엉덩이를 가리지 않고 있다니? 그 시절의 순진한 열한 살 소녀의 머리로서는, 그것도 남 여구별에 예민하기 시작한 사춘기에 갓 들어선 나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되었다. 그렇게 내 마음의 ‘최고’였고 마을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던 할머니의 아름다운 형상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할머니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해 있었고 할아버지는 외려 싱긋이 웃고 계셨다. 나는 그것이 더 이해가 안 갔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요강을 두 손으로 내 방에 옮겨놓고 방 미닫이를 찌르륵 ‘쾅’하고 닫아 버렸다. 아마 그렇게 근 일 년을 할머니의 그 창피했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어 더는 자랑할 만한 할머니가 아니라는 나만의 ‘비밀’에 묻혀 있었다. 내가 할머니로부터 소원해지고 괜히 트집을 잡으며 말대꾸하는 나를 보고 하루는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너도 이담 커서 결혼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시작한 나의 사춘기는 열다섯에 이르러 최고봉에 이르렀다. 반의 한 남학생으로부터 처음으로 ‘연애’ 편지를 받았다. 당혹감으로 나는 일부러 그 남자애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남자애는 방과 후 여유가 생기면 우리 집 뒤 담장 밖에서 집 창문가를 바라보며 배회하기 일쑤였다. 무언가를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할머니가 그 남자애 앞으로 찾아가 냉철히 손을 휘저으며 무슨 말을 하는 것을 나는 방안에서 창문으로 보게 되었다. “제가 반장인데요, 부반장과 반의 일을 좀 상의할게 있어서요.” 그건 학교서 상의 할 일이지 왜 방과 후 집까지 찾아오느냐고 할머니의 야멸친 언성이 들렸다. 할머니의 매서운 눈빛에 그 남자애는 너무 무참하여 귀뿌리까지 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리곤 급급히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사실 그 남자애는 반에서 여자애들의 인기 남이었다. 할머니에게 된 무안을 당한 후로는 반에서 나와 눈 맞추기도 피하는 듯했다. 나의 마음은 무겁고 답답했으며 할머니가 꼭 그렇게 내쫓아야 했을까 달통이 안 되었다. 갑자기 어디론가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까지 무시로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병원 간호사로 있는 나의 절친한 친구가 생리를 하는 나에게 생전 보지 못했던 하얀 병원용 거즈로 만든 깨끗한 생리대 두 개를 주며 엇갈아 빨아가며 쓰라고 주는 것이었다. 자기 엄마가 만들어 준 것이라 하였다. 그때는 생리대라는 것을 파는 것이 없어서 우리 여자애들은 신문지를 둘둘 말아 팬티 속에 끼워 넣기도 했고 헌 헝겊 조각을 무어 대충 생리대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헌 헝겊도 많지 않던 시대여서 한번 생리가 올 때면 푹 젖은 그것을 온종일 끼고 있다가 밤에 급히 씻어 말려 이튿날 학교 갈 때 쓰는 게 보통이었다. 바로 내가 그랬다. 그 불편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말하자 할머니 시대는 이것도 없어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는 젊은 엄마를 둔 그 친구가 너무 부러웠다. 갑자기 몇 년 전 밤의 요강 사건, ‘남자친구’ 내쫓던 일, 생리대도 잘 만들어 주지 못 하는 일, 그리고 어렸을 때 가끔 회초리로 사정없이 내 장딴지를 후려치던 일… 많은 일이 삽시에 머릿속에 가득 떠올랐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한족 농촌 생산 대에서 수전 기술원으로 일하고 계시는 할아버지께 (원래 농사를 짓던 분이시라 시가지 생활에 적응이 안 되어 중국 촌에 가셨다.) 이튿날 떠날 준비로 무언가 서두르고 있었다. 첫 행차도 아닌데 나는 괜스레 이름 모를 화가 치밀어 오르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언제 돌아와?” “글쎄, 챙겨드리고 될수록 빨리.” “나도 엄마가 키웠음 좋았을 거야, 왜 할머니야?” 번연한 생활을 나는 이렇게 당치도 않는 트집을 잡으며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할머니의 손에 잡혀있던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털렁’ 들렸다. 할머니는 멍한 눈길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셨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한마디 하셨다. “그랬구나, …” 사실 친척들은 늘 할머니가 외동 손녀 하나를 너무 애지중지 손 받들어 키워서 앞으로 좋을 게 없다고 하였고 친구들은 동네에서도 제일 똑똑하고 대단한 할머니가 있다고 부러워하였다. “재순아, 할머니가 좀 놀랬다. 네 어린 것이 지금까지 엄마 생각을 그렇게나 하고 있었구나. 생각해보니 할머니가 네가 먹고 싶어 하는 물고기 한번 제대로 해먹이지 못했구나.”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돌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제정신이 돌아온 듯싶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사람이 죽으면 눈을 감게 된다며 어느 날인가는 할머니도 저 세상 사람이 될 터이니 우리 재순이를 어떻게 하냐며 한숨을 쉬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가끔 몸져누우실 때면 자그마한 손으로 성냥개비를 들고 할머니가 눈을 감게 되면 눈꺼풀을 받쳐 놓을 준비를 하는 어리석은 응석 등이었다. 할머니가 내 옆을 떠날 수도 있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알고 컸다. 그런데 왜, 어디서 그런 당치도 않은 거짓말과 오기가 생겼을까? 이튿날 내가 방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자그마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흰 밥상보를 열고 보니 처음 맡아보는 군침 도는 냄새, 이름만 들어보던 조기 생선찜이 놓여 있었다.   며칠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돌아오셨다. 그때야 나는 나에게 조기찜을 해놓고 떠나시던 날이 바로 할머니의 육순 환갑날 이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그때 전방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연대까지 졸업하고 새 가정을 이루며 중학교 교직으로 있다 ‘우파’로 몰려 어디에선가에서 자신의 보금자리도 유지하기 쉽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금쪽같이 키우는 손녀마저 ‘배신’을 하며 외로운 환갑날을 보낸 할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내 마음속에 깊이 묻혀있는 사춘기 시절의 그 용서할 수 없던 일들은 항상 아픈 피고름으로 괴여진다. 딸 삼아 손녀 삼아 모든 면에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 혼신을 다 하고 하늘나라에 가신 할머니가 만약 나의 이 속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할머니~!     2019 , 11 , 13 서울에서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