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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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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집'으로 가는 길
2019년 12월 22일 17시 56분  조회:805  추천:1  작성자: 류재순
수필
‘문학의 집’으로 가는 길
류재순
 
나는 매주 목요일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오류동 3번 출구를 나와 ‘문학의 집’으로 향한다. 한국 문인협회 구로지부 전임 회장이었던, 장편소설 『소설 이승휴』로 더 유명해진 김익하 선생님의 소설수강 날이다.
3번 출구를 나와 맞은 편 ‘오류동 교회’로 들어서는 골목길에 들어서 다시 좌측 갈림길로 쭉 걸어 올라간다. 좀 올라가다 보면 ‘문학의 거리’라는 팻말이 보이며 몇 미트 간격으로 채색 철판 이정표가 있다. ‘문학의 집’으로 가는 방향 화살표가 있고 그 위에는 눈길을 끄는 시화 액자들이 걸려있다. 구로문인협회 회원들의 작품들이다. 그저 스쳐 지나갈 수가 없다. 눈에 띄는 시편들을 음미하며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문학인으로서의 공감대와 그 사색의 끝을 상상해 본다.
이 골목길의 흥미로움이 눈앞에 펼쳐진다. 골목 양쪽엔 소담한 전통식 단독 주택들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음이 또한 신비스럽다.
길옆 한 집 회색벽면에 창문 하나가 보이는데 밤색 털을 가진 커다란 말 머리 하나가 쑥 얼굴을 내밀고 밖을 내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 커다랗고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에는 불안과 갈망, 아니 어디론가 튕기려는 욕망이 숨어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낡은 그림인데 그림 내용이 주는 인상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어느 날, 예술의 전당에 가서 토요 콘서트 관람을 갔을 때, 작곡가 무소록스키가 죽은 친구의 그림 전시회를 보고 편곡해낸 ‘전람회의 편곡'이란 라벨 편곡들을 감상하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이 벽화엔 문은 없고 머리 하나만 내밀 수 있는 창문밖엔 없지 않은가? 화가는 어떤 생각에서 저런 그림을 그렸을까? 유머러스하고 아이러니한 발생에 내 마음속에서도 알 수 없는 감성의 멜로디가 흐르는 듯하였다. 상상을 좀 더 해보면 그 어떤 라벨 편작 같은 것들이 윤곽을 그리는 듯하다.
그뿐인가 좀 더 걷다 보니 또 하나의 장면이 눈길을 끈다. 역시 그런 단독주택 벽인데 벽화엔 역시 자그마한 창문 안에 희미한 둥 불 아래서 한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갈래머리 여자애가 머리를 숙이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바로 돌아서는 옆벽엔 역시 또래로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생화 한 묶음을 들고 머리를 숙인 채 발끝만 내려다보는 광경이지 않은가? 갑자기 ‘꽃을 든 남자’란 노래가 떠오르면서 킥-또 웃음이 터진다. 그림은 초등학생 수준처럼 좀 유치하고 어설펐지만, 우리 문학이나 미술, 예술계의 사랑이라는 영구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작은 동네에서 엮어졌을 어떤 청춘 남녀의 애정도 상상해본다.
이런저런 골목길 풍경에 심취하면서 걷고 있노라면 어느새 화살표가 오른쪽 언덕으로 뻗어져 있다. 흙과 자갈이 뒤섞인 싱긋한 오르막 길이다. 그다음은 나무토막계단길이다. 계단 길 양옆엔 유난히 반질반질 빛이 나는 타원형의 옥잠화 푸른 잎들이 줄을 서서 마중을 한다. 팔,구월이 되면 하얀 꽃들이 향기를 쏟으며 앞을 다퉈 피어나는 모습에 오르막 길의 피로를 싹 가셔준다. 걸으며 무심결에 오른쪽에 자리 잡은 단독주택가 울바자에 눈길이 간다. 키큰 넝쿨장미 두 그루가 무성하게 뻗어 나가며 5월부터 빨간 장미 천지로 길손을 유혹하는데 그중 몇 떨기 장미는 12월까지 찬바람에도 끄떡없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향과 빨간색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다리쉼도 할 겸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오늘이 최고다. 내일이야 어떻든 간에 오늘에 열광하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라- 생각지도 않던 인생주문을 해보며 새삼스레 자신의 오늘을 반추해 본다.
드디어 계단을 다 오르고 나니 마침내 ‘문학의 집’이란 간판이 문 옆에 걸려있다. 평범한 단독 주택을 이성 구로구청장께서 구로 문인들의 발전을 위해 당시 김익하 회장님과 합의하여 지원 개설해 준 집이라고 한다. 실내는 크지 않지만 말 그대로 시화며 책자며﹍문향이 물씬 풍기는 자그마한 강의실이다. 우리 소설 반은 학생이 적었다가 많았다. 하지만 예닐곱은 거의 보장이 된다.
오늘 아침도 나는 거의 열시가 될 무렵 강의실에 들어섰다. 선생님도 일찍 나오시지만, 이 수강 반을 책임지고 있는 고선자 선생이 항상 먼저와 청소도 하며 환기를 시켜준다. 그리곤 선생님께 따뜻한 차 한 잔을 올리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 그녀는 구로문협 시 분과장이며 시로 등단한 시인이지만 벌써 오년째 김익하 선생님 아래서 소설을 배우고 소설로 다시 등단하여 제대로 된 작가가 되려는 꿈이 있다.
10시가 다 되어 수강생들이 거의 다 모였을 때 고선자 선생께 갑자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녀는 모르는 전화번호라며 수강도 곧 시작될 걸 생각해서인지 받을가 말까 머리를 갸우뚱거리다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자그마한 통화소리가 오가는 듯싶더니 그녀가 갑자기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을 때 나는 선생님이 무엇인가 예감하시고 눈에 전에 볼 수 없었던 광채를 뿜으시며 온 얼굴에 빛이 발산하시는 것을 보았다.
“ 저 당선 됐데요. 신춘문예에!”
고선자 선생은 목갈린 소리로 울부짖는 듯했다. 너무나 뜻밖의 소식에 우리는 어리둥절함도 잠시 다 같이 함성을 질렀고 얼싸안고 한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농민신문』 신춘문예를 담당한 문화부 기자가 당선 소식과 함께 당선소감문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우리가 지난번 작품 합평회 때 내놓았던 소설 ‘흔들리는 땅’이다. 사실 그는 얼마 전 칠백만 대 상금이 걸린 공모전에도 도전했었는데 끝까지 소식이 없어 선생님이 여러모로 수소문해봤더니 최종심사 대상후보최종 3인 경색에서 탈락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 돈보다 최종 3인까지 올라가고 탈락한 안타까움에 고선자 선생은 술을 마시며 가슴을 두드렸었다. 이번엔 해냈다. 김익하 선생님의 소설 수강 반에서 정정 오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바쳤다. 별은 하늘에서 그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제부터 그의 어깨엔 한평생 ‘문학’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돈을 바라고 문학창작에 뛰어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피를 말리며 밤을 새우며 타자를 해온 그에게 놀랍게 찾아온 성취감은 아마 그를 무한 행복의 무아지경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나는 강의 때 선생님 말씀하시던 탁갑( 坼甲)이란 말이 생각났다. 씨의 껍질이 갈라져 싹이 튼다는 뜻이다. 그 말을 생각하며 강의실 문 위에 나무판에 새겨진 草 筐(초광)이란 글자를 바라본다. 즉 밀집 바구니란 뜻인데 우리 ‘문학의 집’은 바로 이런 밀집 바구니 속에서 껍질을 비집으며 작가라는 새싹을 키우는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도 문학의 집에 다니세요?”
사실 나는 중국에서 일찍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러나 후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이십몇 년이란 공백을 남겨 후배들에게 많이 뒤떨어졌고 특히 한국 생활을 하면서 중국에서 쓰던 언어 어휘 상용 어법과 문법 맞춤법 많은 것의 차이점에 놀랐다. 한국에서 글을 발표하려면 보통 사용하고 있는 ‘맞춤법 검사기’로만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김익하 선생님께 소설 한 편을 봐달라고 보냈다가 돌아온 원고에 빨간 줄 파란 줄이 꽉 찬 것을 보고 수치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중국 쪽에 보낼 때는 이러지 않았었다. 두 나라의 문화 차이점이다. 나는 창작의 질도 높일 겸 이런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 수강 반에 참석했다.
우리는 매번 학습 자료들을 프린터 해오시며 무료로 강의해주시는 선생님이 고마워 점심 한 끼는 수강생들이 맛난 음식점을 찾아 선생님을 모시고 더치페이하여 즐겁게 수다를 떨며 먹는다. 그리고 가끔은 좋은 영화 관람도 같이하고 문학 탐방도 간다. 우리 머릿속 영역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서다. 올 가을에 우리는 파주의 마장 호에 갔었는데 노랗고 빨간 단풍들도 좋았지만, 그 나무숲 속에서 지저귀는 가을 새들의 신비한 우수의 소리, 출렁 다리아래 찬란한 햇빛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마장 호의 까치놀의 매력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길섶 검불 같은 풀숲에 숨어서 조그맣게 새록새록 다시 피는 철 늦은 작은 꽃들을 헤쳐보며 문학 감성을 키우는 것 또한 무한의 향수였다.
물론 이 나이에 내가 무슨 ‘등단상’같은 문학의 월계관을 쓰기 위한 것은 아니다.
‘문학의 집’으로 가는 길은 아침 길 걷기 운동-즐거운 산책의 길이며 세상속에 조용히 숨어있는 구석구석의 숨결들을 알아보는 시간이며 사색의 나래를 펴보는 시간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오랫동안 비워놨던 문학이란 草 筐(초광)속에다 착실히 하나하나 내용물을 채워가는 길이다.
오늘도 나는‘문학의 집’에서 가져온 학습재료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며 필요한 것들을 기록해 놓는다. ‘문학의 집’ 수강 생활은 이미 나의 생활의 뗄 수 없는 한 과정이 되었다.
 
2019 12, 19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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