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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년세계》잡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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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글짓기에 묻혀살았던 그 세월 댓글:  조회:1098  추천:0  2021-03-30
글짓기에 묻혀살았던 그 세월 김일량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 막혀 2년째 출국도 못하고 집에 꽁꽁 갇혀있는 신세가 안스럽다. 경작지마저 이웃 동네 한족들에게 도급 주다보니 안해와 함께 여러집 터전을 함께 다루어주는 외에는 시간만 나면 부지런히 철에 따른 여러가지 산나물 뜯으러 다니는 게 일상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구질구질 내리다보니 산행을 포기하고 집에서 책장 문을 활짝 열어놓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한가한 시간을 달래보기로 마음을 비웠다. 책 뒤에 두툼한 서류봉투가 있어서 그것을 거꾸로 들고 툭 털어보았더니 내가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실려있는 신문, 잡지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그중에는 한복 차림의 안해와 행복하게 웃으면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화창한 산바람이 부드럽게 살을 간지럽히고 쾌청한 산새 울음소리가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는 산간마을에 나의 꿈과 삶과 사랑이 깃든 집이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야릇하게 간지럽히는 시골의 그윽한 정취에 마음을 푹 삶으면서 나는 대자연을 자아화하여 아름다운 글을 창작하며 나의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해나갔다. 말하자면 내 글이 쏟아져나온 아지트가 바로 시골이였다. 농사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문학창작을 은근히 꿈꾸고 있었으니 몸은 일하고 있어도 상상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날아예고 있었다. 어느 한번은 소수레를 몰고 마을과 멀리 떨어져있는 산골 콩밭을 후치질하러 갔는데 밭에 도착해서 보니 멍에를 가져가지 않았다. 할수없이 소를 풀밭에 풀어놓고 이미 중천에 떠오른 따가운 여름해를 머리에 이고 털썩털썩 집으로 돌아가는데 골어구에 나서니 안해가 그 무거운 멍에를 가녀린 어깨에 메고 힘들게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어찌나 미안했던지 금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또 한번은 아침에 일어나 부엌에 불을 지피고 절반 쯤 탄 장작불로 담배불을 붙인다는 것이 담배를 입에 무는 걸 그만 깜박하고 입술을 지져놓아 커다란 물집이 생겨 한참을 고생했다.  어느 하루, 우리 또래 셋은 제각기 소수레를 몰고 마을과 10여리 상거한 산골로 달맞이꽃을 베러 가게 되였다. 가을을 예고하는 양 미묘하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황홀한 대자연 속에서 숨박곡질을 하고 있는 늦은 여름날의 풍경은 한여름에 비하면 어딘가 산뜻하고 깨끗하고 눈부신 것 같았다. 우리는 잎담배를 한대씩 말아 피우고 달맞이꽃을 베려고 서둘렀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낫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밤 모 편집부에서 부탁한 원고를 마무리 짓느라고 온밤을 새우다싶이 하였고 아침에도 그 원고 때문에 들볶다보니 그만 깜박 잊고 낫을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여름 풀물이 완전히 가지 않은 달맞이꽃은 낫으로 베여야 하는데 손으로 꺾자니 뿌리까지 뽑히면서 잘 꺾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온종일 일하는 남들을 쳐다보다가 해질녘에야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사연을 알고 나서 안해는 동네가 창피하다고 바가지를 긁어댔다. 기분이 잡쳐서 친구네 집으로 마실을 갔다 와보니 내가 보배처럼 아끼던 《현대조선말대사전》과 원고지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 사전은 젊은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햇싸리부업을 해서 번 돈으로 힘들게 마련한 공구서였다. 그 때 향수구소에서 햇싸리를 수구하였는데 한근에 2.5전이였다. 며칠 동안 손을 얼구다싶이 일해서야 한사람에게 13원씩 겨우 차례졌다. 그 당시 13원이면 큰돈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그 돈으로 멋진 신발을 산다, 맛나는 음식들을 장만한다 신나 하는데도 나는 아버지에게 근들이술 한병을 사다준 외 나머지 돈은 장농에 깊숙이 넣어두었다가 어느 날 연길시 문화서점에 들려 두툼한 《현대조선말대사전》을 샀다. 그렇게 모르는 단어가 있을 때마다 사전을 뒤적이면서 어휘량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는 둘도 없는 보배였다. 그런데 분신마냥 내 곁을 지켜주던 사전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다니 분명히 안해의 작간이였다. 하지만 안해는 모르쇠로 발뺌을 하느라 그랬던지 한쪽으로 돌아누워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내가 밤 새워 정리한 원고들도 모두 사전에 끼워넣었던 터라 나는 급기야 안해를 깨워 자초지종을 물었다. 돌아오는 안해의 대답을 듣고 나는 하마트면 까무라칠 번했다. 까짓 돈도 안 나오는 책이 꼴도 보기 싫어 불태워버렸단다. 순간 가슴에 세찬 불길이 확 이는 것 같았다. 화가 난 김에 손이 가는 대로 책 한권을 쥐여 안해에게 뿌렸는데 면바로 안해의 얼굴에 맞힐 줄이야. 안해는 이내 얼굴을 싸쥐고 딩굴었다.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를 듣고 이웃에서 달려왔다. 화 날 대로 났을 텐데 안해는 얻어맞은 얼굴을 싸쥔 채 깨끗한 보자기에 곱게 싸서 사랑채에 감추어놓았던 나의 책들을 도로 가져왔다. 동네 아줌마들이 아무리 그래도 먹물이나 먹었다는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인가며 나를 나무라자 안해는 도리여 이 이가 가장 아끼는 책들을 감춰놓는 바람에 이런 빌미가 났다면서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렸다. 안해의 하늘 같은 아량에 다시한번 눈굽을 적셨다. 그 해 겨울, 나는 모 문학잡지로부터 내가 쓴 글이 대상을 수상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게 되였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안해한테 알리고 싶었다. 상금도 상금이겠지만 말은 안했어도 그동안 모든 고생을 홀로 씹어삼키며 내 곁을 묵묵히 지켜준 안해와 이 영예를 함께 누리고 싶었던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였다. 그 뒤로도 나는 여러가지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릴 때마다 그 기쁨을 가장 먼저 안해와 나누었으며 시상식에 꼭 안해와 동참해서 기념사진을 한장씩 남기군 했다. 오늘도 나는 안해가 차려주는 소박한 반찬에 소주 몇잔을 기울이는 즐거움 속에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깊은 상상에 잠겨있다.
69    륙십 청춘의 초상 댓글:  조회:679  추천:0  2021-03-30
륙십 청춘의 초상 최룡권 이제 갓 일곱살인 손녀딸이 어느 하루 생뚱맞게 그랬다. “우리 할아버지는 청춘이야.” 그래서 “청춘이란 게 무슨 뜻인지 알아?” 하니 “청춘이란 건 얼굴에 주름살도 없고 힘도 세다는 말이지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말이야.”라고 종알거렸다. 어린 것이 뭘 안다고 입에서 그런 어물한 소리가 나오나 싶으면서 기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내 나이 륙십 하고 다섯, 옛날 같으면 쓰다 남은 돌 같은 로인네겠지만 요즘 같은 백세 시대에는 륙십이 청춘이라니 어깨를 쭉 펴게 된다. 퇴직과 함께 35년을 근무한 직장을 떠날 때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했다. 출근할 때는 마냥 힘들고 바빠서 ‘언제면 퇴직해서 원없이 려행도 다니고 친구들과 모임도 자주 할 수 있을가.’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퇴직을 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이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무료함이라도 달래볼겸 활동실에 드나들며 마작판에 끼여들었다. 평생 부기원으로 살아오면서 수자와 씨름해서인지 기억력이 남들보다 월등히 좋아 거의 백전백승이였다. 소일거리 삼아 푼돈을 가지고 노는 놀음이라 큰돈은 나들지 않아도 손녀딸들의 소비돈 벌기에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놀이도 하노라면 하루해가 어떻게 넘어가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허물들이 하나하나 보였다. 한평생 담배를 입에 댄 적 없었던지라 활동실에 넘치는 담배연기가 딱 질색이였다. 반나절씩 있다 보면 목이 칼칼하고 기침과 가래가 끊이지 않았으며 눈마저 아물거렸다. 게다가 허리가 아프고 팔다리도 뻐근해났다. 출근할 때는 퇴근후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했는데 마작을 시작한 뒤로는 운동도 뒤전이였는지라 몸도 점점 무거워났고 혈압도 덩달아 높아졌다. 까다로운 식성 때문에 날마다 활동실에서 제공하는 식사로 끼니를 때우자니 그것 또한 고역이였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활동실을 찾은 노릇이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여온 격이 되는 것 같아 그 뒤로 활동실에 발길을 딱 끊었다. 마음을 먹고 발을 끊은 것은 분명 잘한 일 같은데 그 뒤로 일상이 공허해지니 어쩔 수 없었다. 텔레비죤을 시청하고 친구를 만나는 것도 어쩌다 한두 날이지 그 뒤론 스마트폰을 들고 방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하루 일과로 되여버렸다. 이러다 페인이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등산과 걷기 운동을 해보기로 마음을 잡았다. 등산을 즐기는 친구의 소개로 연변조선족자치주도보협회에 가입하면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아산을 포함한 주내 산과 벌을 타게 되였다. 모임 날이면 단체복을 맞춰입고 아침 8시에 출발해 등산한 후 함께 체조도 하고 기강도 다지며 체력을 올렸다. 매일 저녁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는 친구와 함께 하남다리부터 천지대교까지 왕복으로 한시간 반씩 걷기운동을 이어나갔다. 운동을 꾸준하게 견지하다보니 몸이 거뿐해지고 면역력이 높아진 건 물론 친구들과 어울리니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 우리 도보협회는 20대로부터 70대까지 다양한 년령층의 회원을 두고 있다. 나는 젊은이들한테서는 신생사물을 배우고 나보다 년세 있는 어르신들한테는 그들의 인생경험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세상 돌아가는 리치도 쉽게 배울 수 있고 사고와 지식의 폭도 넓어졌다. 아래우 세대를 아우르며 내 륙십 청춘도 무르익어가는 느낌이다. 등산하지 않는 날은 직장생활이 바쁜 딸을 도와 소학교에 갓 입학한 외손녀의 방과후 숙제를 책임져주고 주말이면 이제 갓 9개월이 된 손녀를 돌봐주기도 했다. 내 자식이 어릴 때는 그렇게 이쁜 줄 몰랐는데 손녀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다. 애들 간식을 사주느라고 퇴직금이 야금야금 축이 나도 전혀 아깝지가 않다. 그리고 퇴직전 나의 전공을 살려 정부구매 전문가시스템에도 등록했다. 아직은 내 여생의 불씨를 지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젊었을 때는 생계를 위해, 가족을 위해 치렬한 삶을 사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줄도 모르고 지냈다. 내 나이 륙십 고개를 넘어 자식들이 성장하고 직장생활에도 종지부를 찍으면서 삶에 여유가 생기고 보니 이제야 세월의 덧없음을 페부로 감지하게 된다. 공자는 “내 나이 륙십에 귀가 순해졌다.”라고 말했다. 공자의 이 말의 뜻은 60세가 되니 거슬리는 말도 리해되고 용서되여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되였다고 뜻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불쾌한 말을 들었어도 젊었을 때처럼 당금 화를 내거나 서운해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가슴을 비우게 된다. 또한 세상사가 뜻 대로 되지 않거나 남의 말이 달통이 되지 않더라도 역지사지 즉 상대방의 립장에서 너그럽게 생각하고 헤아려보게 된다. 나이를 먹으니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게 되는 게 나 스스로도 참 이상해난다. 쓸데없는 걱정과 잔소리도 줄어들었다. 언제부턴가 지나친 간섭은 젊은이들에게 귀를 때리는 잔소리로 다가갈 수 있다는 도리를 깨달았다. “내가 젊었을 적에는… 우리 그 때는…” 이런 말을 하면 요즘 젊은이로부터 ‘늙은이’로 취급받기 일쑤다. 호감 받는 어르신이 되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 하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지난 인생을 참 치렬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거칠고 서툴고 후회도 많지만 그리 아쉬운 것만도 아니였다. 지금껏 지칠 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온 나 자신에게 그리고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때로는 스무살의 청년보다 륙십 로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고 한다. 세월은 살결에 주름이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은 시들게 하진 못하거늘 내 나이 륙십,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창 익어가는 중이라고 소리높이 웨치고 싶다.
68    샘물터에서 맺은 인연 댓글:  조회:689  추천:0  2021-03-30
샘물터에서 맺은 인연 리영자 우리 몇몇 친구들은 일주일에 두세번씩은 대흑산에 가서 샘물을 길어온다. 크고 작은 물병을 넣은 가방을 메고 공공뻐스를 타고 대흑산 근처에서 내린 다음 2리 길을 걸어서 산어구에 있는 샘물터에까지 톺아올라 물을 받아 내려오는데 꽤나 힘든 작업이다. 길어온 샘물은 반은 갈라서 아들집에 가져가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전에 한번 샘물을 길어다 줬더니 손자가 나 보고 “할머니가 길어온 샘물은 저녁에 공부할 때 마시면 졸리지 않는 같아 좋아요.”라고 신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한마디가 힘이 되여 그 뒤로는 날마다 무슨 임무라도 수행하듯 샘물터로 오가군 했다. 샘물터로 가자면 울창한 소나무숲과 무성한 수풀을 지나야 했다. 우리 일행은 자연이 주는 선물에 흠뻑 취한 채 맑고 시원한 공기를 한껏 마시면서 때론 노래를 흥얼거리고 때론 익살스러운 우스개로 배를 끌어안고 웃기도 하면서 힘든 줄 모르고 산어구까지 씽씽 톺아오른다. 특히 무더운 여름날 샘물터에 이르러 샘물줄기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맑고 시원한 물을 몇모금 들이키고 나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가셔지는듯이 뿌듯해진다. 샘물이 보배라고 여기저기 소문이 나면서 요즘은 먼 대련시내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려객들도 푸술하다. 하많은 사람중에 조선족인 우리 셋의 목소리도 들려 기분난다. 우리끼리 조선말을 하며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울 때면 슬쩍 옆에 와서 혹시 조선족이 아닌가고 묻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우리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조선족 김치 너무 맛 있어요.” 라고 서투른 조선말을 하며 엄지손가락을 펴보인다. 그 때면 자부감 때문에 어깨가 절로 으쓱해난다. 저마다 싸들고 간 도시락에서 김치를 꺼내는가 하면 손수 빚은 물만두도 맛 보라고 넘겨준다. ‘선족’이라고 잘못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때마다 ‘조선족’이라 불러야 한다고 상냥하게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하루, 105번 공공뻐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로인증이 나지지 않았다. 멜가방 안에도 없고 호주머니에도 없었다. 뻐스에 오른 친구들더러 먼저 가라고 시늉을 하고는 정류소에 멍하니 서있었다. 로인증을 분실하면 다시 고향 연길에 가서 수속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걱정부터 앞섰다. 머리 속에 문득 샘물터에서 친구들과 반듯한 돌들을 주어다 그 주위를 다듬어놓은 기억이 떠올랐다. 가방이 열려져있는 걸로 보아 십중팔구 그 때 떨어진 거 아닌가 싶다. 그길로 스무근도 더 되는 멜가방을 둘러메고 샘물터로 돌아섰다.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혹시 로인증 같은 걸 보지 못했느냐고 물어보니 한결같이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였다. 헐레벌떡 샘물터 어구까지 이르러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한 녀인이 중국말로 “이거 혹시 어르신의 로인증 아닙니까?” 하면서 카드 한장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받아보니 과연 내 사진이 박혀있는 로인증이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녀인을 유심히 바라보니 웬지 낯설지 않았다. 전에 내가 맛 보라고 준 김치가 하도 맛 있다고 칭찬을 해서 포기김치까지 가져다줬던 분이였다. 샘물터에서 로인증을 주었는데 펼쳐보니 ‘김치할머니’ 사진이 박혀있기에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면서 힘들었겠는데 목을 추기라고 하면서 가져온 고뿌로 샘물까지 따라주었다. 시원한 샘물을 한모금 들이키고 나니 그 사이 어디 날아갔던 정신마저 다시 돌아오는듯 차분해났다. 잠간 휴식하는 사이 우리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올해 53살이였는데 집에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자기를 양딸로 삼아달라고 청을 드는 게 아니겠는가? 아들 둘을 낳고 평생 ‘목메달’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면서 딸을 그토록 부러워했는데 호박이 넝쿨 채로 굴러오니 별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후로 우리는 뻐스역에서, 샘물터에서 만나서 정을 나눴고 워이신으로 안부를 전하면서 모녀의 정을 쌓아갔다. 맛 있는 음식이 있으면 서로 나눴고 간혹 내가 몸이 불편하다고 하면 집에까지 찾아와서 보살펴주었다. 하루라도 서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샘물터에서 맺어진 인연, 피를 나누지 않고 민족은 달라도 우리 모녀간의 사랑과 우정은 석양으로 향한 우리의 삶에 사막의 오아시스마냥 생기와 기쁨을 가져다주고 있다.  
67    할머니가 홀제 그리워난다. 댓글:  조회:604  추천:0  2021-03-30
할머니가 홀제 그리워난다. 고향란 “할머니! 할머니!” 산소호흡기를 단 채 눈도 뜨지 못하는 할머니를 부르다 이불을 차며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꿈이였다. 어제 영상통화를 하면서 눈물을 훔치던 할머니 얼굴이 내내 마음에 걸려 이런 꿈을 꾼 게 아닌가 싶다. 녀자의 눈물은 진주와 같이 값지니 쉽게 흘리면 안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시더니 이젠 웬만한 일에도 쩍하면 눈굽을 적시는 할머니다. 꿈자리가 하도 어지러워 할머니와 함께 한국에 계시는 아빠한테 당장 전화를 하고 싶었는데도 새벽 세시를 가리키고 있는 벽시계를 힐끔 보고 나서 주춤했다. 아빠가 더 놀랄 것 같아 그렇게 뜬눈으로 날이 새기를 기다렸는데 일각이 삼추 같이 지루내났다. 1940년 11월의 엄동설한, 당시 8살이였던 할머니는 전쟁의 피해로 장애자가 된 증조할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해왔다. 재산이라야 집구석을 탈탈 털어 장만한 비단 몇필뿐이였다. 할머니가 13살 때 증조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두 동생을 돌봐야 하는 임무는 고스란히 할머니가 짊어지게 되였다. 한창 자랄 나이에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으면서 가난이란 게 뭔지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거치른 시절이였다. 기댈 만한 친척 하나 없으니 그 고달픔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남들이 붓을 날리며 멋을 부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끼를 해결하고 나면 다음 끼니가 걱정인 세월에 언제 그런 사치를 꿈꿀 수 있었겠느냐며 할머니는 옛일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에 허구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시절에도 할머니는 야학에서 눈을 비벼 우리글을 다 익혔고 학교 문은 들어가보지 못했어도 누구보다 인품 좋고 대바르게 살아왔다. 맏손녀여서인지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커왔다. 요즘은 예전과 달라 녀자애들은 귀하게 키워야 한다면서 주방에는 아예 드나들지 못하게 아꼈다. 그러면서도 녀자인 만큼 집안살림은 똑부러지게 해야 한다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작식을 조금씩 배워주었다. 사범학교입학통지서를 받던 날, 이제부터는 객지에서 홀로 서기를 해야 하니 기본은 꼭 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바느질과 이불거죽을 벗겨서 씻는 법부터 가르쳐주었다. 할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마을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는데 동네 처녀들의 결혼 한복과 이불은 거의 할머니가 도맡아하다보니 우리 집은 일년 내내 이웃들로 흥성거렸다. 할머니는 지금도 가끔씩 바느질, 뜨개질을 해서는 여기저기 선물하는데 그 때마다 입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릴 때부터 그 흥겨운 가락을 듣고 자라서 그랬던지 나도 입만 열면 〈노들강변〉, 〈도라지〉, 〈태평가〉, 〈한강수타령〉 등 민요들을 술술 풀어냈다. 동네 분들은 나만 보면 어쩜 말투에 이어 걸음걸이까지 그렇게 할머니를 쏙 빼닮을 수 있냐며 신기해한다. 내가 음악교원으로 될 수 있었던 데는 할머니의 음악정서를 많이 물려받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촌민들이 마을에 모여 회의를 할 때마다 할머니는 손녀를 자랑하고 싶어 등에 업고 다니면서 재롱을 마음껏 부릴 수 있도록 힘껏 밀어주었다. 사범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 개인이 피아노를 사는 걸 허락한다는 말을 어망결에 한 적이 있는데 할머니는 그 당장에서 손녀의 피아노는 이 할미가 사준다고 통쾌하게 승낙했다. 처음으로 겪는 객지생활이여서 그랬는지 사범학교에 다니는 내내 나는 시름시름 앓군 했다. 어느 한번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있는 내가 걱정스러운 나머지 할머니는 그렇게 말리는데도 손녀를 꼭 봐야겠다며 떠날 차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오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서 갈비뼈를 심하게 다쳤다. 그 후유증으로 할머니는 지금도 한쪽 어깨가 약간 기울어져있다. 할머니는 내가 우러르는 외유내강의 조선족녀성이였다. 12년전 피부암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는데도 할머니는 하루를 살아도 멋진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서 아침마다 의족에 의지하여 운동을 놓지 않고 이이갔다. 1992년, 중한수교를 계기로 한국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코리안드림’을 겨눈 조선족들의 출국붐이 본격화되자 아버지의 형제들이 함께 한국행에 나서게 되면서 큰고모네 자식 둘, 작은고모네 자식 하나, 작은아버지네 자식 하나, 거기에 우리 3형제까지 모두 당시 60세를 넘은 할머니 손에 맡겨지게 되였다. 할머니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우리 사촌형제 7남매를 모두 남부럽지 않게 키워냈다. 우리 사촌들은 그렇게 7년이나 한집에서 살면서도 할머니의 곧은 교육하에 언제 한번 티격태격 다투는 일이 없이 화목하게 잘 지냈다. 2000년에 이르러 우리가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게 되자 할머니는 한국에 있는 자식들 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한국에 가게 되면 할머니 곁에 누워서 옛이야기를 나누며 추억을 더듬는 시간을 가지군 한다. 할머니는 거의 반평생을 홀로 자식들을 키우면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 험난한 세월의 강을 건너왔다. 요즘따라 영상통화만 하면 눈가가 촉촉히 젖어드는 할머니를 볼 수 있어 애잔해난다. 다른 가족들은 다 한국에 자리 잡아 언제든지 모일 수 있는데 나 혼자 이곳에 남은 게 마음이 아파서란다. 작년에는 코로나로 한국에 가지 못하니 세상과 고별하기 전에 나의 얼굴을 한번 더 볼 수나 있을지 하면서 탄식을 한다. 해마다 한번씩은 꼭 한국에 가서 할머니한테 목욕도 시켜드렸는데 작년 한해는 코로나로 국내에 박혀있다보니 할머니가 더 그리워난다. 할머니가 그토록 반기는 송편도 직접 빚어드리고 감자부침개도 부쳐드리고 싶은데 마음처럼 안되니 곱절로 안타깝다. 아흔이 넘은 년세에도 할머니는 통화할 때마다 시부모한테 효도하고 남편 공대 잘하며 사업을 열심히 하고 어디 가서나 겸손하고 허심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그 때마다 나를 이토록 훌륭하게 키워주신 할머니한테 더없이 고마워진다. 동이 트자 바람으로 아빠한테 영상통화를 보냈다. 할머니가 밤새 안녕하셨다는 말을 듣고 나서 그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할머니가 응급실에 누워있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드렸더니 “꿈은 흔히 거꾸로인 거야. 근데 어쩌지, 너무 오래 살면 큰일인데…” 하며 할머니가 얼굴을 내밀면서 롱담을 건넸다. 코로나사태가 풀리는 대로 당장 날아갈 테니 그 때까지 꼭 건강해야 한다고 했더니 할머니의 얼굴에 금시 웃음꽃이 활짝 피여났다. 워낙에도 조글조글한 주름이 웃음 때문에 더 선명하게 안겨왔지만 오늘따라 할머니가 유난히 이뻐보이니 나도 덩달아 해시시해난다.
66    나는 소녀가장 댓글:  조회:879  추천:2  2021-03-30
나는 소녀가장 리단 “결과가 심상치 않아요. 아마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이걸 어쩌면 좋죠?” 할아버지를 초보적으로 진단하고 난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손발이 덜덜 떨리고 울음이 막 터져나와 선자리에서 휘청거리였다. 떨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가 쓰러졌어요. 지금 병원에 계시는데 병세가 심각해요…” 슬픈 기별을 알려드렸으나 기실은 새까만 밤하늘에 처절하게 울려퍼진 메아리나 다름없었다. 다 아시다싶이 2019년말부터 징그러운 코로나가 우리 일상을 휘저어놓으면서 마음이 불같이 달아올라도 여느때처럼 항공편으로 당장 연길에 날아올 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말하자면 두 발이 꽁꽁 묶인 촌보난행이였다. 사실 재작년말부터 할아버지의 병세가 나날이 기울어지는 것 같아 은근히 불안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뇌경색에 걸려 점적주사에 기대여 살면서 시름시름 앓던 할아버지가 급작스레 쓰러진 건 나한테는 설상가상의 타격이였다. 하늘은 무심하게도 하필이면 인원류동이 지극히 구애받는 이 시점에 이상이 생겼으니 부모님은 부모님 대로 애를 끓고 나는 나 대로 단 가마 우의 개미처럼 선자리를 쉴새없이 바장거리기만 했다. 하늘이 무너져내려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아무튼 철부지라 할 수 있는 나는 의사선생님의 분부 대로 가까스로 할아버지를 중증병실에 모셨다. 한밤중이여서 어른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아니, 한낮이라도 사실 도와줄 친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두 자식중 아들인 아버지, 딸인 고모가 부부 쌍쌍이 한국에 나가있다보니 연길에 남은 혈육이라고는 외롭고 처량한 나뿐이였다.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래도 평소에 믿고 의지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입원수속을 허둥지둥 마치고 할아버지를 구급침대에 눕히고 검사 받으러 이 부서 저 부서 휘청거리며 오고 갔다. 열이 펄펄 끓다 그대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할아버지가 당장이라도 운명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 때문에 관찰실에 모셔놓고 지켜보면서 눈을 붙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연구생 수업에 아르바이트까지 마치고 기진맥진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하필 그 때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으니 솔직히 지금도 제정신이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태여난 지 40일 만에 ‘코리안드림’을 이루고저 한국으로 떠났다. 그 때는 철부지였으니 아버지가 곁에 없어도 그런 외로움과 서러움을 느낄 나이는 아니였다. 네살 때 어머니마저 나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맡겨두고 한국으로 떠나가버렸다. 그 때는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과의 리별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인지 퍼그나 감성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때라 서럽기 그지없었다. 결국 눈물을 뿌리며 매달렸으나 갈라지는 설음 속에서 어디까지나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렇게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맡겨서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성장의 길을 서투른 대로 아장아장 걸어가게 되였다. 할아버지는 경륜 있는 출판일군이였고 할머니는 부지런하고 현숙한 가정부녀였다. 어른들의 손에 끌려 나는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붙었고 또 연구생과정에 도전하게 되였다. 편집경력자인 만큼 할아버지 집에는 문화적 분위기가 늘 물씬거렸다. 촘촘하게 꽂아둔 책장에서 책을 하나하나 빼내여 돋보기 너머로 들여다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싱그럽고 매혹적인 풍경으로 내 가슴에 자리 잡았다.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에 스스럼없이 빨려들어갔고 지금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있다. 마치 곁에 항상 계시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의 가르침과 사랑을 책에서나마 탐색하여 나를 풍요롭게 가꾸기라도 할 듯한 집념같이 말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되는 본능이 있나보다. 말하자면 부모님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두고 사는 현실이 환상적 궁합이라고 받아들이면 금상첨화일 텐데 그중에서 어느 한쪽이 비게 되여도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되니 말이다. 이전에는 팔촌들까지 10여명이 한구들, 한가마솥을 쓰면서 살았다는데 그러한 풍경이 우리들 세태에서 사라져가던 무렵, 이른바 4촌, 5촌, 6촌 친척관계가 경제관계, 혈육관계, 요즘 세태에서 썩 달갑지 않을 수 있는 이웃관계로 어정쩡하게 이어져가지 않으면 안되는 세태가 씁쓸해질 때도 있는 게 새삼스러울 뿐이다. 할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나는 공부에서만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소학교, 중학교까지 줄곧 학년에서 앞자리에서 달렸다. 학교로 애를 데리러 찾아오는 부모들을 볼 때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단 한번 만이라도 날 데리러 왔으면 얼마나 좋을가?’라는 생각을 하며 손가락을 깨문 적도 있었다. 다만 그런 풍경마저 어느 사이 저 언덕으로 사라져버렸다. 자식을 데리러 오는 부모들이 점점 줄어들더니 청일색의 할아버지, 할머니, 이웃으로, 지인으로 바뀌고 그러면서 달라지는 세태 속에서 일찌감치 적응되고 길들여진 내가 오히려 대견스러워보였다. 솔직히 부모님한테 대한 원망이 줄어든 것도 그 때부터였다. 이 세상 아이들은 똑같은 숙명에 길들어져야 했으니까. 그렇다고 나의 학잡비와 용돈을 남부럽지 않게 푼푼히 보내준다는 부모님의 막무가내한 궁여지책의 배려에 단맛을 들여서 그런 건 분명 아니였다. 오히려 어느새 부모님 없이도 내가 오뚜기처럼 서야 한다는 배짱을 가지게 되는 게 스스로도 장해보였다. 현실이 얼마나 거치르든 그게 정녕 가시밭길이더라도 우리한테는 헤쳐나갈 숙명밖에 차례진 게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떨어진 지도 26년 세월, 솔직히 손꼽아보아도 그 사이 부모와 만난 적이 10여번 되나마나하다. 그것도 한번에 고작 며칠, 한주일씩 머물 때가 있는가 하면 간혹 할아버지, 할머니 병간호 때문에 1년씩 묵어간 적도 있었다. 이게 기나긴 26년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전부의 만남이였다. 인생의 4분의 1이 될지 3분의 1이 될지 모르는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세월이였다. 그러나 내 공부뒤바라지를 위해, 또 로년에 봉양해야 할 부모님 말하자면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양할 경제력을 키우겠다고 결코 정상이라 할 만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애면글면하는 부모님 앞에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어른스러워졌다. “단이야, 괜찮아?” 하며 부모님께서 팔을 잡고 물을 때마다 나는 그냥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뒤돌아서는 순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젊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지.” 하며 난색을 하는 부모님 앞에서 지금 당장 때려치우라고 모질게 나오는 게 내가 그 사이 받은 교육과 례의 나아가 정감에는 아귀가 어울리지 않은 일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슬하에 오누이를 두고 있었는데 두 자식 다 운명같이 하나뿐인 자식들을 부모님한테 맡겨두고 부부가 쌍쌍이 외국으로 떠나갔다. 그래서 나는 사촌오빠와 같이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되였다. 나보다 세살 우인 사촌오빠는 지금 일본에 나가있다. 코로나에 막혀 병환에 계시는 할아버지 보러도 오지 못한다면서 전화로 불만을 쏟아낼 때가 많다. 할머니는 부지런하고 작식솜씨가 매끄럽다. 그 슬하에서 살가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는 동안 작식솜씨도 아쉽지 않게 퍼그나 배워갔다. 지금도 찌개, 떡국, 미역국 같은 료리를 거뜬하게 만들어 밥상에 올려놓는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고 부러워서 야단이다. 그럴수록 자립에 필수적인 기량을 갖추는 게 우리 같은 애숭이한테 얼마나 절실한지 스스로 저울질하게 된다. 우리가 부모 곁에서 자라지 못했다고 반쪽으로만 커가는 건 구실이거나 핑게거리로 될 수 없다. 배우려는 의욕만 있고 흥미가 있으면 모든 게 가능해진 스마트한 시대에서 살아가니 이런 어설픈 핑게는 더구나 통하지 않는다. 할머니와 지내면서 남긴 기억중 두어가지만 골라 쓰도록 하겠다. 할머니께서 세상 뜨신 지 몇해 되던 어느 날, 케케묵은 가을옷을 넣어둔 궤짝을 열어 밤색코트를 꺼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기 전에 정리해두려고 코트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봤더니 뭔가 손에 잡히기에 꺼내보니 퍼그나 닳아빠진 100원짜리 지페가 하트모양으로 꼬깃꼬깃 접혀져있었다. 언제인가 할머니가 요즘 종이접기를 배웠다고 싱글벙글하면서 나에게 건네준 거였는데 그 때 집어넣고 그대로 까먹은 게 분명했다. “할머니, 이런 건 또 언제 배웠대요?” “너희들 학교 앞길에 문구점이 새로 섰더구나. 거기서 너희들을 기다리면서 렴치불구하고 배웠지. 색종이로 접다가 돈으로 접어주면 더 근사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한번 시도를 해본 거지.” 하트모양으로 접혀진 돈을 보는 순간 할머니가 그리워나 코등이 시큰해났다. 이미 꼬깃꼬깃해진 지페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할머니는 나를 각별히 아끼셨다. 녀자애인 데다 엄마가 곁에 없으니 더구나 마음을 쓰신 게 아닌가 싶다. 친구들의 모임, 친인척 집에 마실을 다닐 때에도 나를 분신처럼 꼭꼭 데리고 다녔다. 차림새에도 항상 신경을 썼다. 가끔 추억에 잠겨 옛 앨범을 펼쳐보면 깔끔한 쌍태머리에 알록달록한 꽃리봉을 달고 하늘하늘 날듯이 부풀어오르는 원피스를 입고 할머니 품에 안겨 환히 웃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할머니는 내가 외로울세라 웃음을 넘치게 안겨준 천사였다. 중학교 2학년을 다닐 무렵,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 할머니께서 페암에 걸렸다는 충격적인 비보를 전해듣게 되였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할아버지는 눈가에 충혈이 가득 진 채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울먹한 목소리로 나에게 알려주었다.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 눈섭, 속눈섭까지 뭉청뭉청 빠져나간 할머니가 수척해진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할머니가 그렇게 낯설어보이기는 처음이였다. 거울 앞에서 속상해서 얼굴이 일그러지는 할머니를 지켜보다가 편하고 멋진 가발이라도 사드리고 싶었다. 가발상점에 가서 할머니께서 만족할 듯한 최신스타일로 골랐다. 그리고 나서 예쁜 선물곽에 정히 담아서 할머니한테 전해드렸다. 기운없이 헤쳐보던 할머니께서 활짝 웃으시더니 수줍은 새각시마냥 가발을 쓰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 때 할머니는 이미 팔순을 넘긴 고령이였다. 그래서 녀자의 마음 속에는 영원히 소녀가 살고 있다고 했나 보다. “할머니한테 선물도 하고… 다 컸네, 우리 손녀.”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대견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후 할머니는 하루라도 빠뜨릴세라 가발을 쓰고 다녔고 아침마다 정성스레 씻고 말리고 빗으면서 애지중지 여겼다. 할머니의 병소식을 전해듣고 부모님도 허겁지겁 항공편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한국에서 변변치 못한 일자리에 수입도 안정치 못했지만 병치료에 쓰라면서 할머니 앞에 돈 2만원을 내놓았다. 그렇게 암과 가족의 전쟁은 검질기게 이어졌으나 맹랑하게도 할머니는 나날이 쇠약해갔다. 통통하고 몰랑하던 팔다리는 앙상한 나무가지마냥 볼품없이 말라갔다. 설상가상으로 밤에 화장실에 가다가 넘어져서 뼈까지 다쳤다. 가뜩이나 운신이 힘들어 서러웠을 텐데 이제는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했으니 얼마나 숨 막혔을가? 할머니는 쩍하면 내 눈을 피해 눈물을 훔쳤다. 아쉽게도 고중에 진학하면서 할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학교외에도 다녀야 할 학원들이 한둘이 아니였으니 말이다. 어느 날 학원시간이 급해서 책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데 할머니가 안방에서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들어가보니 할머니는 반듯하게 누운 채로 흐린 초점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할머니, 왜 불렀어요? 어디 편찮으신가요?” “산송장같이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니, 빨리 죽어야지.” “할머니, 가족들 모두 할머니가 얼른 훌훌 털고 일어나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이런 맥 빠진 말씀 하실 거면 절 부르지 마세요.” 웬만해선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닌 내가 그 날, 괜히 속상해서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는 자리를 뜨려다가 문득 할머니가 살아계신 것에 고마워하고 마음 놓고 있으면서도 그 이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얼른 메고 있던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다시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간 만에 화투치기나 할가요?” “그럴가?” 할머니의 두 눈이 홀제 반짝거렸다. 얼굴에도 대뜸 생기가 넘쳐흘렀다. 나는 오래 동안 서랍 속에만 박혀있던 할머니의 애장품인 화투를 꺼내왔다 화투 앞에서는 례사롭지 않게 움직이는 할머니의 손놀림에 나는 “우와, 우리 할머니 역시 녹 쓸지 않았네!” 하고 감탄을 쏟아냈다. 몸져눕기 전에 할머니는 단 하루도 화투장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 날 나는 할머니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 학원에 가야 할 시간이 퍼그나 지났음에도 무아지경으로 할머니가 패를 떼는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았다. 그 뒤로 나는 대학교에 들어갔고 커가면서 우리는 살면서 때론 마주하고 싶지 않은 버거운 현실과 마주칠 수 있다는 섭리를 조금씩 깨치게 되였다. 할머니의 병세는 안정기를 찾아가는 듯했지만 끝내는 하늘나라로 떠나가는 비운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였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곳곳에서 할머니의 흔적과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정겨우면서도 가슴이 애달파났다. 하루라도 빠질세라 쥐고 있던 화투장, 지정석처럼 앉아계시던 쏘파, 물을 떠달라던 목소리,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옆침대에 송구스럽게 누워서 눈치 보던 그 얼굴이 눈앞에 알른거리면서 할머니가 아직도 누워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 때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곁에 거의 계시지 않았던 어머니가 이 사실을 가볍고 편하게 받아들였던 사정도 점차 리해해주기로 했다. 부모시대의 가슴 시린 사연을 주관적이고 자기만 똑똑한 듯한 일방적인 시각으로 작두질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후대들에게도 자기 의식을 가지고 커갈 권리와 자유가 있지 않은가? 시야비야 속에서 어느덧 수십년 세월이 훌쩍 흘러갔음에도 우리 태반이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완전완미란 걸 기대하는 건 어디까지나 사치였다. 어른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도 세상물정에 어섯눈을 뜨게 되였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여러가지 일을 맡아 아르바이트를 뛰여서 학비와 용돈도 마련했다. 한국에 교환대학생으로 나가있는 몇달 사이에도 어머니한테 칭칭 매달려 단즙을 빨지 않고 호프가게,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우리 또래들이 환장하는 전자제품들도 갖추었다. 앞으론 부모님의 신세를 지게 되더라도 지금 만큼은 내 힘으로 뭐든 마련하고 싶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이런 오기가 생긴 게 나한테는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라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27살 먹도록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도 자신에 넘치고 여유 부리는 나를 보면서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 사이 부모님 그리고 고모 대신 할아버지 곁을 지켜드린 일이 스스로도 가장 대견스럽다. 솔직히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도 어설프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쉬웠던 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그처럼 대견해하시니 시름이 놓인다. 그 때 학원 갈 시간이 늦었음에도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화투를 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른 척하고 학원으로 달려갔더라면 아마 평생 후회로 가슴을 잡아뜯었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로인들은 주변의 자그마한 배려에도 늘 목 말라있지만 우리가 너무 덤덤하게 지나쳐서 결정적 실수와 한탄을 빚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도 인젠 어엿한 성인이 되였으니 이역땅에 계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 할아버지 곁을 지켜드리면서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데 할머니는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고 고령의 할아버지마저 몸져누우셨으니 서글프기 그지없다. 할머니가 떠난 지 3년 만에 사촌오빠마저 류학길에 오르면서 연길에 할아버지가 기댈 언덕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할아버지가 누워계신 침대를 이리저리 밀고 다니면서 검사를 마치는데 문득 가장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나의 보호자가 되여 나를 태산같이 지켜주신 할아버지셨는데 이젠 내가 할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였으니 참 새삼스럽다. 문득 한국에 가서 교환대학생으로 있을 때 들었던 ‘소녀가장’이란 말이 떠오르면서 내가 바로 그 소녀가장이 아닌가 하는 행복한 상상에 빠져든다. 한국에서는 소녀가장이란 부모의 사망, 리혼, 가출 등의 까닭으로 미성년자만으로 세대가 구성되였거나 조부모 등 보호자는 있어도 고령, 장애로 부양능력이 없는 어른의 슬하에서 자라는 세대를 가리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어딘가 맞물리는 게 있는 듯한 소녀가장, 하지만 우의 경우에 비하면 나는 썩 홀가분한 소녀가장이였다. 검사결과는 썩 리상적이 아니였지만 점적주사의 은으로 힘들게 의식을 찾은 할아버지가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단이야, 고맙다. 네가 할아버지 곁을 지켜주어서…” 별로 도와드린 것도 없는데 그저 곁을 지켜주었다고 눈시울을 붉히는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가 원한다면 그냥 곁에 남아 지켜줄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나서 코로나에 길이 막혀 시간이 퍼그나 지난 요즘에야 연길에 돌아왔다. 그러니 이 참에 내가 소녀가장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점적주사를 맞고 있는 할아버지를 지켜드릴 때면 갖고 다니던 책을 옆에서 펼쳐드는 게 이젠 버릇으로 굳어져버렸다. 차홍의 뷰티에세이 《당신을 아름답게 하는 것들》, 필립 체스터빈드의 《아무도 네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등 책들 대여섯종을 번갈아 보다가 그중에서 이런 글들에 마음이 끌렸다. “사랑하는 아들아, 세상을 터무니없이 미화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의 말에 결코 현혹하지 말라. 다만 너는 랭혹한 현실을 헤쳐나가야 하며 아무도 네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명심하라. 아들아, 시간을 랑비하지 말라. 네 인생의 최고경영자가 되여 당당하고 지혜롭게 자신 있게 멋지게 사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라. 그러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저자가 아들한테 건넨 이 조언은 부모님한테는 딸자식인 나에게도 매한가지겠지. 이젠 자신이 소녀가장이라고 생각하니 은근히 자신감이 생긴다. 이제 내 인생도 새롭게 열어가야 하고 20여년 가까이서 거의 지내지 못한 부모님도 내가 모셔야 할 바다같은 아량도 키워가야 하고. 풀어가야 할 숙제는 그냥 있고 그런 숙제들이 남아있어 인생은 살 만한가 보다.
65    시아버지의 유산 댓글:  조회:671  추천:0  2021-03-30
시아버지의 유산 김염 며느리가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그리워한다면 가식일가? 하지만 나는 아버님이 돌아가고 나서 9년 동안 아버님이 그리워나 눈가를 적신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아버님은 훤칠한 키꼴에 모든 면에서 신사다운 분이였다. 말수가 적은 편이였음에도 기분 좋은 날엔 빙그레 웃으면서 지나간 일들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주는 소탈한 성격까지 갖추고 있었다. 가끔 시아버지 얘기가 지겨워서인지 가족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도 타향에서 일하다 어쩌다 고향에 돌아온 나는 마지막까지 남아 아버님의 청중이 되여주었다. 아버님이 했던 이야기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아리송한 기억으로 멀어져갔음에도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하던 그 얼굴은 아직도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잔병치레를 많이 하는 어머니가 안스러워 자식들은 집에 전화할 때면 늘 어머님부터 찾을 때가 많았다. 간혹 아버님이 전화를 받을 때도 있는데 어쩜 토 하나 바꾸지 않고 항상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셨다. “며느리요? 우리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사돈이랑 사돈댁이랑 사돈처녀도 다 무사하지? 나는 아픈 데 하나도 없소. 자네들이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되면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소.” 아버님은 젊었을 때 아주 멋쟁이였다고 한다. 좋은 세월을 만났더라면 영화배우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어머님은 괜히 들떠있었다. 심양에 있는 다이야공장에 출근했던 아버님은 어느 해 휴가철 고향에 놀러 왔다가 아릿다운 어머니한테 한눈에 반했다는 게 내가 들은 후문이다. 남색 중산복에 하얀 장갑을 낀 채 들에서 꺾어온 꽃다발을 들고 어머니한테 청혼을 했는데 글쎄 외할아버지가 심하게 막아나섰다. “농사일도 못할 저런 허울이 멀쩡한 놈한테 내 딸을 못 줘!”라며 외할아버지가 심하게 반기를 내흔들었음에도 두분은 결국 첩첩산중을 헤치고 백년해로를 언약했고 그 뒤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아 키웠다. 그중에서 아버님이 마흔살에 얻은 늦둥이인 남편은 큰아주버님과는 16년, 둘째 아주버님과는 12년, 시누이와는 8년 차이가 났다. 아버님은 난생처음이였음에도 농사일을 열심히 배우면서 척척 잘해나갔다. 새벽 서너시면 일어나서 어머니를 도와 아궁이에 불부터 피웠다. 외가집 근처에 살림을 차렸던지라 외할머니가 아플 때마다 아버님은 수레로 향병원까지 모셔다 드리면서 친아들 못지 않게 효도를 쏟았다. 마음씨도 어찌나 착한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량반이라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큰아들, 둘째아들은 분가를 시키면서 초가집 한채에 황소 한마리씩 장만해주었는데 막내인 우리한테는 결혼식은 물론 아무 것도 챙겨주지 못했다면서 아버님은 늘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한평생 농사일을 하면서 자식들 뒤바라지를 하다 나니 남편이 대학을 졸업할 때는 아버님이 어느새 예순을 훌쩍 넘기신 뒤였다. 남편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인차 취직을 했고 그 뒤로 다달이 부모님한테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내드렸다. 련애를 하던 무렵에 남편은 집에 전화기를 놓아드리고 텔레비죤도 새것으로 바꾸어드렸는데 시부모님은 이게 다 내 마음이였다면서 나를 복덩이처럼 이뻐하셨다. 얼마 뒤, 시부모님은 농사를 그만두고 목단강 시내에 있는 둘째아주버님 집에 가서 당시 소학교에 다니는 손녀딸을 돌봐주게 되였다. 시골 집이 몇년째 비여있자 아버님은 그 집을 팔겠다고 서둘렀다. 초라한 오막살이라도 30년 가까이 살아온 정이 남아있어 팔기가 아쉬웠을 텐데 막내인 우리에게 시내에서 집은 못 사주더라도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상 싶어 내린 결정이란 걸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아버님은 잊지 못할 추억들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시골집을 고작 1,000원이라는 헐값에 팔아넘겼다. 그런데 그 목숨 같은 돈을 뻐스에서 도적 맞힐 줄이야! 그 일로 아버님은 화병으로 일주일 넘게 드러누워있었다. 설에 모일 때면 아버님은 번마다 며느리들에게 술을 한잔씩 권했다. 술을 못하는 편인 나도 아버님의 사랑과 축복이 담겨있는 술이라 반갑게 받아마셨다. 만날 때마다 비슷한 말씀의 되풀이였지만 지겹지 않은 게 참 이상한 일이였다. 아버님은 술을 반기셨지만 절대 과음하는 걸 볼 수 없었다. 저녁 식사 때면 강술을 석냥씩 목구멍에 쏟아붓다싶이 했는데 그 힘든 재주를 남편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맥주를 쏟아부으니 처음에는 깜짝 놀라 기겁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님은 축구를 무척 즐기셨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도 마당에 나가 축구를 찼는데 “내 거!” 하며 소리는 크게 질렀어도 헛발질을 할 때가 많았다. 남편이 중학교 때부터 축구에 싹수가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먹고살기도 힘든 세월이여서 전문학교에 보낼 엄두마저 못냈다면서 아버님은 쩍하면 입을 쩝쩝 다시군 하셨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문어구에 우두커니 앉아 식구들의 구두를 반짝반짝 빛이 날 때까지 닦으면서 흐뭇해하셨던 아버님이다. 신발이 빛이 나야 앞길도 창창하다는 나름 대로의 도리를 펼쳐가면서 아버님은 가족들이 그렇게 말리는데도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가 혼인신고를 할 때 친정의 식구들은 대부분 한국에 계셨는데 그 때는 한번 모이는 게 지금처럼 쉽지가 않아서 결혼식을 잠시 미루게 되였다. 몇년이 지나 아버님 년세도 여든에 가까워지니 더 지체하면 안되겠다 싶어 우리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서둘렀다. 시부모님도 한국에 가려고 서둘러 려권을 만들고 비자를 신청했는데 호구가 시골에 있었던지라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였다. 그러던 어느 날, 베란다에 나갔던 아버님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입원하게 되였다. 젊었을 때 수레에서 떨어져서 허리와 다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늘 힘들어했던 아버님이였기에 이번에도 다리가 아파서 넘어졌나 싶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였다. 암세포가 머리와 페, 방광 등 여러곳까지 퍼져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밖에 있던 자식들이 모두 한달음에 고향으로 달려갔다. 암세포가 대뇌에까지 전이되는 바람에 아버님은 종종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면서 그나마 어머님이라도 기억하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였다. 가끔씩 몇십년전의 추억 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할 때도 있어 가족들은 오래 동안 마음을 졸여야 했다. 아버님은 암진단을 받은 지 보름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둘째아주버님은 아버님이 평시에 사용했던 물건들을 정리했다. 물론 값진 물건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 아버님이 쓰던 작은 나무바구니 하나를 유물로 남겼다. 하도 낡아 원색조차 알아보기 어려웠음에도 가끔씩 아버님을 떠올릴 수 있도록 뭐든 남기고 싶었다. 아버님이 그리운 날이면 바구니를 어루만지며 이런 사색에 잠긴다. 처자식을 위하여 한평생 살아왔던 아버님에겐 자기 꿈이 없었을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자리를 버리고 산골짜기의 작은 마을에서 농부로 보낸 평범한 일생을 아버님은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을가? 어머님이 잔소리를 할 때마다 아버님은 그저 허허 하고 웃어넘기면 그만이였다. 많이 화가 날 때는 “에이!” 하고는 집을 나가 뒤산을 한바퀴 돌면서 화를 풀고는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두 아주버님은 아버님의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가정적인 지혜를 모조리 물려받은 것 같다. 우락부락 모나고 억센 남편이 집에서 팔을 걷어올리고 설겆이랑 빨래를 한다면 남들은 잘 믿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힘들어할 때면 가정일을 도맡아주고 애들을 챙겨주었고 일요일은 아이들과 함께 보내려고 다른 일정들을 잡지 않으려고 왼심을 썼고 방학이면 꼭 한번씩 가족려행을 데리고 떠났다. 남편은 처가에서도 점수가 꽤 높은 편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남편은 아버님이 물려주신 가장 소중한 유산이였다. 남편은 가끔 아버님 생각에 쓸쓸해한다. 그런 날이면 나도 같이 아버님을 그리워하며 향수에 빠진다. 말수는 적어도 늘 따뜻했던 아버님의 소박한 사랑이 그립다. 아버님의 유산에 감사해하며 평범하지만 오붓하게 잘살리라 아버님과 약속한다.
64    송편에 깃든 엄마사랑 댓글:  조회:571  추천:0  2021-03-30
송편에 깃든 엄마사랑 리향옥 엄마가 손수 빚은 송편은 쫄깃쫄깃하고 류달리 맛 있었다. 눈꽃처럼 하얗고 엿처럼 달콤한 그 맛을 나는 여직 잊을 수가 없다. 어릴 때 그토록 질리게 먹었던 떡인데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찾게 되는 까닭은 아마도 송편과 맺은 깊은 인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득히 멀어져가던 25년전 추억쪼각들이 퍼즐마냥 머리 속에서 하나하나씩 맞춰진다. 아지랑이가 아물거리고 꽃망울은 수줍게 터질듯 꿈틀거리던 봄날이였다. 외사촌이모가 한국에 가게 되면서 서시장의 떡 매대를 엄마가 이어받게 되였다. 그 뒤로부터 엄마는 하루도 거를세라 입쌀, 팥, 사탕가루, 소금 등 재료를 대량으로 구매하여 송편을 알심 들여 만들어 가게에 이고 나가 팔았다. 송편을 맛보면 알듯이 만드는 데는 지극한 정성이 필수적이였다. 먼저 팥을 깨끗이 씻어 푹 불린 다음 삶아내여 으깬 후 따뜻하고 나긋나긋한 팥을 한입 크기로 길쭉하게 빚는다. 다음 입쌀로 보들보들한 떡가루를 내고 버무려 속을 넣은 뒤 가마에 쪄낸다. 쫀득쫀득한 떡을 손바닥 만한 크기로 동그랗게 밀어 팥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콕콕 찍어낸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떡과 달콤한 팥소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궁합이였다. 거기에 엄마의 손맛까지 더해져 떡이 맛 있다고 찾아오는 단골들이 날로 늘어났다. 어느 해 찌는듯 무더운 여름날이였다. 삶아둔 팥에 물이 조금 들어간 탓에 반나절도 안되여 팥이 모조리 쉬고 말았다. 고객이 송편을 가지고 매대에 찾아오자 엄마는 두말없이 돈을 돌려주었다. 쉬여버린 몇십근 되는 송편을 버리고 맥없이 앉아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코마루가 찡해났다. 새벽같이 일어나 팽이처럼 분주하게 돌아쳤는데 공든 탑이 그냥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하지만 엄마는 “돈을 내고 교훈을 샀다 치면 돼.”라고 하시더니 이내 훌훌 털고 일어나 다음날의 재료들을 준비하느라 서둘렀다. 온돌과 련결되여있는 가마에 떡과 팥을 쪄내기에 방안은 늘 찜통을 방불케 후끈거렸다. 장판마저 발바닥이 빨갛게 델 지경으로 뜨거웠다. 열기가 확확 와닿는 구들에서 엄마는 땀을 뚝뚝 흘리며 다리를 꿇고 앉아 송편을 빚었기에 무릎은 늘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떡 하나하나를 손수 빚다 나니 두 손도 늘 구운 고구마처럼 벌겋게 퉁퉁 부어있었다. 그렇게 송편을 판 수입으로 온 식구의 생활비를 마련했고 자식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해주었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 난방이 제대로 되여있지 않은 시장 안에서 온 하루 있어야 한다는 건 그야말로 견디기 힘든 고역이였다. 두꺼운 옷을 여러벌 껴입었다 해도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막기에는 태부족이였다. 추운 겨울인지라 시장을 찾는 고객들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물다보니 땅거미가 지면 밖에 나가 부들부들 떨면서 팔아야 했다. 하얗고 곱던 얼굴과 손은 얼어터져 감자처럼 터실터실해졌는데도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해 엄마는 일년 내내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을 만큼 부지런히 시장에 나갔다. 예약이 줄줄이 들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엄마를 도와 송편을 대야에 담아야 했다. 하루종일 쭈크리고 앉아서 몇백개가 넘는 송편을 대야에 담아야 했으니 기름이 발린 손은 끈적끈적하고 몸에서는 떡냄새, 땀냄새가 물큰거렸다. 주말이면 엄마와 함께 공원놀이도 하고 쇼핑도 하고 싶었는데도 우리한텐 그런 여유가 전혀 없었다. 엄마도 녀자인데 왜 꾸미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어깨에 짊어진 짐 때문에 엄마는 그런 사치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끔씩 일찍 하학하는 날이면 엄마가 떡을 파는 매대로 찾아갈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나를 매대에 세워놓고 자기는 밖으로 나가서 팔았다. 팥소를 넣은 송편은 하루만 넘기면 변질하기 십상이기에 날이 저물기 전에 팔아야 했다. 그 날도 도움이 되겠나 싶어 하학하고 엄마 매대를 찾았는데 해가 거의 질 무렵에 예쁘장하게 생긴 아줌마가 찾아와서 송편을 두근 달라며 백원짜리를 건넸다. 두근이면 거스름돈 96원을 찾아드려야 했는데 잔돈이 그렇게 많지 않아 밖에 있는 엄마한테 가서 잔돈을 바꿔가지고 와야 하니 좀 기다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줌마가 된다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엄마한테 달려가며 손에 있는 100원짜리 지페를 만지작거렸는데 촉감이 이상했다. 새 돈인데도 빨락거리지 않았다. 엄마는 돈을 하늘에 대고 빤히 쳐다보고 나서 툭툭 쳐보더니 가짜돈이라고 했다. 조심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또 온 하루 번 돈을 그냥 날릴 번했다. 그 뒤로 엄마는 떡장사를 5년간 더 이어갔고 나도 대학에 가게 되였다. 락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어느 가을날, 엄마가 숙소로 전화를 해서 이젠 떡장사를 접고 한국에 가서 일해보련다는 뜻밖의 속내를 터놓았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여서야 엄마는 외롭고 고난으로 얼룩졌던 타국살이에 종지부를 찍고 다시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요즘 엄마는 우리 식구들을 챙겨주랴, 어린 외손주를 돌봐주랴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이 보낸다. 오늘도 우리는 밥상에 빙 둘러앉아 엄마가 손수 빚은 떡을 먹으며 옛이야기꽃을 피운다. “네가 대학을 다닐 때 학비와 생활비까지 해서 일년에 꼭꼭 만원씩 들어갔어. 일년 내내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끼면서 모아봤자 너의 학비밖에 안되더라. 그 땐 네 동생도 어렸으니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외국에 나가는 게 짧은 시간에 목돈을 벌 수 있는 지름길이였어. 하지만 외국에 가서도 불법이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어. 갚아야 할 빚은 산처럼 쌓여있고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데 만약에 붙잡히기라도 하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면 어쩌나 하고 밖에서 싸이렌 소리가 날 때마다 꼼짝 않고 집에 박혀있었지…” 마흔의 문턱에 들어선 오늘에야 엄마가 급하게 한국행에 나서게 되였던 리유를 알고 나니 마음이 찡해났다. 항상 우리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엄마가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고 그렇게 서러워했는데 이 모든 게 우리를 걱정해서였다는 걸 알고 나니 고마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40대 중반에 남편과 자식을 두고 낯선 외국으로 떠나는 엄마의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한국에서 보모로 일하면서 주인집 아이를 볼 때마다 우리 얼굴이 눈앞에 삼삼해서 견디기 어려웠다고 엄마는 오늘에야 마음속 고충을 털어냈다. 으리으리한 별장인데도 보모한테는 창고로 사용하던 코구멍 만한 방을 침실로 내주었다. 난방도 안되는 선뜩한 바닥에서 며칠 자고 나서 하도 견디기 힘들어 주인한테 전기담요를 빌려달라고 했더니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안 주더라 했으니 얼마나 슬펐으랴. 오죽하면 엄동설한에 오돌오돌 떨며 고향에서 뜨끈뜨끈한 온돌에 앉아 송편을 만들던 추억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겠는가. 집주인의 끊임없는 잔소리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그래도 고향에 있는 남편과 애들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고 하니 마음이 미여질 뿐이다. 얼마 뒤 보모일을 그만두고 식당에서 그릇을 씻는 일을 했는데 하필 떡을 파는 가게였다. 그 날 따라 왼쪽 눈이 유난히 푸들거려 불안했는데 조심하지 않아 뜨거운 물을 쏟는 바람에 팔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상처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듯 아팠는데도 약을 대충 바르고 그대로 계속 일을 놓지 않은 어머니였다. 아파도 누워있을 겨를이 없었고 달마다 빚을 꼭꼭 갚아야 했기에 하루라도 편히 쉴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엄마의 팔에는 아직도 그 때 사고로 남은 상처가 흉측하게 남아있다. 어느 날 아침, 채소 사러 나가는 길에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나기에 별생각 없이 걸었는데 누군가 갑자기 어깨에 멘 가방을 확 채고 달아나버렸단다. 화들짝 놀라서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분질러 한동안 고생을 심하게 했단다. 돈은 항상 호주머니에 챙기는 습관이 있어 가방에는 별로 요긴한 물건을 안 넣은 게 불행중 다행이였다. 그래도 시퍼런 대낮에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당했으니 그 뒤로 얼마나 마음을 조이며 살았겠는가? “떡장사를 할 때는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도 매일 얼굴을 볼 수 있고 하루하루 커가는 너희들을 보노라니 힘든 줄도 몰랐어. 한국에 가서야 진짜 고생이란 게 뭔지 몸과 마음으로 실감했지. 8년 뒤에 다시 고향에 돌아오니 소녀였던 네가 결혼한다고 신랑을 보여주지, 겨드랑이 밑까지 겨우 오던 둘째마저 훤칠하게 커버려서 처음엔 얼마나 서먹서먹했다구…” 우리 곁에 있어줘야 할 나이에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깊게 남아있는듯 엄마는 가볍게 탄식했다. 온 가족이 송편을 함께 만들던 시절이 그리웠는지 요즘은 늘 그 때 일들을 돌이키며 지난 얘기를 곧잘 꺼낸다.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여다니며 재롱 부리는 자식들을 떼여놓고 떠나가며 시름이 놓이지 않았는데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선택을 한 거겠지만 엄마는 그 아쉬움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가난하긴 해도 가족이 오손도손 함께 할 때가 제일 행복했다면서 엄마는 오늘도 옛말처럼 자주 외운다. 그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이젠 우리가 다 커서 홀로서기를 하니 엄마는 늙었네 하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상을 물린 뒤에도 엄마의 송편 이야기는 끝이 날 줄 몰랐다. 엄마가 만든 송편 하나하나에는 가족과 자식에 쏟은 깊은 사랑이 녹아있었다. 눈바람이 휘몰아쳐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일년을 하루같이 매대에서 송편장사를 악착스레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외로운 타향에서 눈물로 세수를 하다싶이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자신의 두 손으로 가족을 지켜내고저 했던 엄마의 굳센 의지가 살아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월은 어느덧 엄마의 이마에 깊은 주름살을 그려놓고 머리에는 하얀 서리를 살폿이 뿌려놓았다. 고생으로 얼룩진 쓰디쓴 엄마의 인생은 알고보면 자식들한테 모든 걸 고스란히 바친 인생이였다. 인정은 물과 같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내리사랑에 비하면 치사랑은 너무도 초라하지 않나 라는 느낌이 갈마든다. 송편에 깃든 엄마의 이야기가 어쩌면 평생을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오신 우리 엄마 세대들의 살아있는 전설이 아닌가 싶다.
63    《로년세계》2021년 2호 댓글:  조회:867  추천:0  2021-02-04
62    아버지는 강한 사나이였다 댓글:  조회:679  추천:0  2021-02-04
아버지는 강한 사나이였다 장송심 지난해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보가위국의 기치를 높이 받들고 항미원조 전쟁에 참전한 지 7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당년의 참전용사들을 찬미하는 주류 매체들의 목소리가 뜨겁게 달아오를수록, 그들에게 쏠리는 세인의 경모의 눈길이 훈훈하게 와닿을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가슴에 사무친다. 아버지는 오늘의 이 희열을 맛 보지도 못하고 2006년 8월 14일에 그 쇠돌같이 단단하고 강의하던 생명의 약동을 멈추셨다. 지난해에 어머니마저 보내고 나서 그동안 무심하게 흘려보낸 날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후회가 새삼 갈마들어 늦게나마 아쉬움을 달래보려고 이 글을 적어본다. 1932년 9월 15일, 심심산골인 지금의 룡정시 삼합진 평두산촌 농회 회장의 둘째아들로 태여난 아버지는 16세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다.  1948년 1월, 아직 애티도 벗지 못한 16세의 나어린 아버지는 전우들과 어깨 겯고 가렬처절한 동북해방의 전장에서 영용하게 적들과 싸웠다. 전우들과 함께 밤행군하다가 밀물처럼 몰려오는 졸음을 쫓으려고 하늘의 뭇별을 세다가 그래도 졸려서 땅바닥에 궁둥방아를 찧은 적이 몇번이였는지 모른다고 한다. 2년후, 동북이 승리적으로 해방되자 그 기쁨을 만긱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는 상부의 명령을 받들어 집에도 들리지 못한 채 곧장 항미원조 전쟁에 나가게 되였다. 18세에 부패장으로 승급한 아버지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적들을 맹렬히 추격하다가 그만 적군의 눈 먼 폭탄에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시체가 산처럼 쌓인 전선에서 나젊은 아버지가 그렇게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하도 아쉬워서 전우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구출하여 담가에 실어 후방병원으로 호송하였다. 병원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의사가 오른팔을 잘라야 한다고 제의하는데도 기어이 오른팔을 남겼다. 비록 그 때 남긴 후유증으로 나중에 오른손 엄지를 잘 쓰진 못했어도 그후로 몇십년 동안 수판알을 튕기며 보낸 아버지의 여생에 한몫했다 할 수 있는 무엇보다 소중한 오른팔이였다. 당시 심장 부근에 깊숙이 박힌 수십개의 파편들 그리고 병마로 아버지는 그 뒤로 쭉 육신의 아픔을 동반한 여생을 보내야 했다. 1952년, 부대에서 퇴역한 아버지는 연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한어사범학원을 졸업하고 정책에 따라 당시 부모가 계시는 흑룡강성에 돌아가 호림현량식국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아버지는 입이 무척 무거운 편이였다. 아버지에게 중매를 서준 한마을의 이모마저 아버지가 영예군인이라는 사실을 감감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결혼한 뒤 흉터투성이인 아버지 몸을 보고 깜짝 놀란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어보고 나서야 아버지가 일찍 영예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고 하니 얼마나 깊숙이 숨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결혼식이 끝나고 3일 뒤, 아버지는 곧 출근길에 올랐다. 직장이 집과 퍼그나 멀리 떨어진 외지에 있는 데다 뻐스마저 통하지 않다보니 단위 숙소에서 지내면서 한달에 한번 쯤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일년후, 어머니는 집에서 첫아이를 해산하게 되였다. 난산으로 죽은 아이를 낳고 피못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어머니를 보고 그제서야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너의 집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 서둘러 집으로 오너라.”라는 전보문을 띄워보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품에 안고 넋을 놓고 펑펑 우는 바람에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굴이 눈물범벅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자식들은 여태껏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고초를 겪고 나서 아버지는 그냥 이대로 두면 사랑하는 안해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조직에 전근을 신청했다. 일이 예상 대로 잘 풀리지 않자 결연히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연변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였다. 몸에 박힌 파편들 때문에 남들처럼 힘든 농사일에 종사할 수 없었던지라 아버지는 얼마 뒤 촌부기원사업을 맡아하게 되였다. 그 무렵, 유치원 교원으로 있던 어머니가 촌의 부녀주임, 접생원 등 여러가지 일을 겸직하였기에 아버지가 집살림을 맡아할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남들은 상상할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어머니가 몸에 좋다는 보약을 그렇게 많이 대접했음에도 아버지는 그 뒤로 수술만 여섯번 받았고 급성간염, 페결핵, 페기종, 심장병 등 여러가지 병마에 시달리면서 일생을 보냈다. 내가 초중 3학년을 다닐 때 일로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를 따라 룡정시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보러 간 적 있는데 그 때 어머니는 의사선생님의 두 손을 꼭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애원했다. “선생님, 우리 애 아버지가 환갑까지라도 살 수 있게 어떻게든 잘 부탁드립니다.” 1991년 겨울, 내가 큰딸애를 낳느라고 병원에서 제왕절개수술을 받는 통에 아버지는 나의 산후조리를 맡게 된 어머니를 따라 연길로 오게 되였다. 마침 설 무렵이라 초담배가 떨어져 서시장에 갔던 아버지는 담배장사군들이 보이지 않자 담배쌈지까지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오늘부터 담배하고 인연을 끊는다.”고 다짐하셨는데 과연 그후로 담배를 한가치도 태우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전장터에서 피를 흘리며 싸운 아버지를 시종 잊지 않고 있었다. 1985년 7월, 항미원조에 참전한 부패장 이상의 참전군인들에게 리직휴양간부 대우를 주는 정책에 따라 아버지는 53세에 리직휴양로간부의 신분으로 첫 로임을 탈 수 있게 되였다. 아버지가 엮은 생명의 찬가, 비록 출세하여 만천하에 영예를 떨친 건 아니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아버지는 진정한 사나이임이 틀림없다.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했던 생의 마지막 나날에도, 페기종으로 쉴새없이 기침을 깇고 가래가 끓어올라 숨을 헐떡이면서도 아버지는 한번도 힘든 내색을 비치지 않고 생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고 미래를 동경하셨다.  어떻게든 환갑나이까지는 버티게 해달라고 애원했던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울린 것일가?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일흔 중반까지 우리 곁을 지켜주셨다. 가족에게 한량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남겨두고 75세에 유명을 달리하신 아버지, 생의 마지막까지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신 아버지는 진정한 사나이였다.   
61    가을 들녘 댓글:  조회:652  추천:0  2021-02-04
가을 들녘 최화숙 써늘해진 가을바람이 립추를 보내고 립동을 맞이할 차비를 서두르고 있는 계절의 변화를 암시해준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짙푸른빛으로 높아가는 하늘에 그리움을 실은 엽서라도 한장 띄워보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갑자기 단풍잎 하나가 머리 우에 살폿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그대로 발치에 미끄러져내린다. 가을은 사계절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만 자꾸 술렁대는 가을바람에 미처 채우지 못한 욕망 같은 게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면서 이름 못할 허전함과 아쉬움이 가슴을 파고든다. 이런저런 생각에 잡혀 느릿느릿 걷던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퇴근길에 어김없이 만나군 하는 그 다감한 풍경이 한눈에 안겨왔다. 고향의 사랑방인양 약국 앞 계단에 모여앉아 가슴깊이 담아둔 삶의 애환들을 하나하나 꺼내놓는, 언제든 반가운 동네 어머님들의 모습이다. 시든 떡잎처럼 주름진 얼굴로 먼발치에 있는 나를 어느새 알아보고 한마디씩 반갑게 말씀을 건네온다. 돌이켜보면 어머님들과 인연을 맺고 지낸 지도 강산이 한번 반 변할 만큼 긴 세월이 흘렀다. 조촐하게 미장원을 차리고 개업하던 날, 동네 어머님들이 찾아와 내 손을 잡아주며 그렇게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민족이라서 의사소통이 원활하여 이제는 원하는 머리스타일을 할 수 있게 되였다면서 반색하던 어머님들, 그 때부터 나의 미장원은 동네 어머님들이 오가며 다리쉼을 하고 담소를 나누는 동네 사랑방 노릇을 도맡게 되였다.  ‘이란댁’, ‘탕원댁’, ‘목릉댁’, ‘7층댁’, ‘가방끈’, ‘노랑머리’, ‘담배쟁이댁’ 그외에도 많은 호칭들을 익혀가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 할머니들이 ‘전라도댁’, ‘평안도댁’, ‘경상도댁’, ‘함경도댁’ 하며 서로를 부르던 호칭을 떠올리게 되였다. 거기에 개업 날 어머님들이 나에게 붙여준 ‘파마쟁이’란 호칭까지 모두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어머님들은 참으로 곱고 젊어보였다. 봄이면 아들딸이 사보낸 새옷을 화사하게 차려입고 미장원에 들려 머리를 곱게 다듬고 삼삼오오 모여 꽃구경도 가고 문구, 탁구 치러 가는가 하면 부채춤을 추러 다니기도 하고 마작이나 화투놀이도 했다. 몇년 뒤, 스마트폰이 보급되자 멀리에 있는 자식들의 얼굴을 보려고 뻐스를 타고 조선족문화관에 찾아가 무료로 가르쳐주는 스마트폰사용법을 익히던 어머님들이였다.  8년간의 한국생활을 접고 할빈이란 낯선 도시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갓마흔의 나이에 세살배기 작은딸을 돌보면서 한창 사춘기앓이를 하는 큰딸의 공부뒤바라지까지 하면서 일한다는 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는 일이였다. 그 때마다 나한테 위로가 되여준 건 어머님들의 살뜰한 관심과 보살핌이였다. 멀리 떠나간 자식들을 그리는 마음을 내게 쏟아붓는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봄이면 손수 들판에 나가 캐여 말쑥하게 다듬은 산나물을, 추석이면 송편을, 김장철이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김장김치를, 동지날이면 팥죽에 동치미까지 가져다주는 어머님들의 사랑을 수년간 듬뿍 받았다. 집에 인터넷이 끊겨도, 수도꼭지가 고장나거나 열쇠를 잃어버려도, 지어 물세, 전기료 미납통지서가 날아오거나 자식들이 부쳐온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갈 때도 먼저 나의 미장원에 들려 물어봐야 시름 놓던 어머님들, 파마를 곱게 하고 거울 앞에서 소녀처럼 다소곳이 미소를 머금던 어머님들, 어쩌다 끼니때에 맞춰 국수라도 끓여 대접하면 그렇게 행복해하던 어머님들, 가끔 명절날에 식당에 모시고 음식대접을 하면 맥주 한잔 기울이며 아리랑가락을 뽑던 귀여운 어머님들이였다. 할빈시조선족제1중학교 부근에 위치한 우리 동네는 아이들을 공부시키겠다고 방방곡곡에서 모여온 조선족들이 집거한 곳이다. 대개 젊은이들은 내지로,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고 로인들이 남아 어린 손군을 키우고 있는 형국이다. 민들레 홑씨처럼 어디든 뿌리만 내리면 하나가 되여 서로 나누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 미장원을 찾는 어머님들을 만나면서 감동으로 아침을 열고 감회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였다. 그녀들과의 소통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인생공부가 되였다. 몇해전부터 파마약에 심한 알레르기반응을 보이게 되자 미장일을 계속한다는 건 무리였다. 부득이 미장원을 접고 한국에서 갖고 온 헤어로션이며 염색약들을 어머님들에게 다 나누어주었다. 이사하던 날, 이른새벽에 이사짐회사의 차를 불러다 짐을 옮기고 있는데 어느새 기미를 챘는지 어머님들이 잇달아 미장원 앞에 모여들었다. 저마다 두루마리종이며 세척제, 가루비누, 식용유에 과일까지 두 손 가득히 들고 온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감격에 목이 꺽 메였다.  자식들이 보내온 돈을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채소마저 이삭을 주어 보태는 어머님들, 허리며 다리가 아프면 쑥뜸을 뜨고 파스를 붙이면서도 병원에 가기를 망설이는 어머님들이 비싸고 질 좋은 걸로만 골라 챙겨온 선물을 손에 쥐여주면서 애를 키우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이쁘다고 등을 다독여주던 그 따뜻한 손길을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그들 중 ‘이란댁’은 나의 미장원이 개업하던 날 찾아준 첫 손님이였다. 파란 웃옷에 연분홍 스카프를 두르고 갈색 모자까지 쓰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들어오던 멋쟁이였다. 한번은 우연하게 길에서 만나 1원짜리 무우청을 사드린 적이 있다. 한족장사군이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딸인가고 묻자 어머님은 서툰 중국말로 “맞소. 내 양딸이라오.” 하며 두 엄지를 척 내세웠다. 그후로 사이가 부쩍 가까워지게 되면서 어머님은 종종 미장원에 들려 파마기구에 앉은 먼지를 닦아주고 수건을 세탁기에 돌려주면서 나의 일손을 거들어주었다. 통원차에서 내리는 나의 작은딸을 대신 마중해주고 때로 저녁밥까지 안쳐놓은 ‘이란댁’은 모성애에 무척 목 마른 나에게 친정엄마처럼 살갑고 고마운 분이였다. 미장원을 그만두고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동안 나는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하군 했다. 그 때마다 동네에서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어머님들을 보면서 축 처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군 했다.  그렇게 내게 힘을 실어주던 어머님들이 가을이 깊어가자 다들 객지에 있는 자식들이 무척 그리운 모양이다. 겨울방학이면 한국에 있는 자식을 보러 간다며 빨간 고추를 실로 꿰여 창밖에 주렁주렁 내다는가 하면 고추떡을 찐다, 무우말랭이를 만든다, 각종 절임을 만든다며 분주히 돌아친다. 우리는 모두 신종코로나를 전승한 승리자들이라고 즐거워하던 어머님들이 요즘에는 한국에서 신종코로나가 꽤 말썽을 피운다며 그 곳에 있는 자식들 걱정에 마음을 졸인다. 참말로 이놈의 신종코로나가 지구촌 곳곳에서 여간만 큰 말썽을 부리는 게 아니다. 애들마냥 “우리 아들이 한국에 새집을 장만했다오.”, “우리 딸이 식당을 차렸다오.”, “우리 손주가 글쎄 아들을 보았다오.”, “우리 손녀가 중국말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였다오.”라고 하면서 자녀들의 자랑에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고 어깨를 들썽거리던 어머님들의 수심에 잠긴 얼굴은 오늘따라 자글자글 쏟아지는 가을해살에 주름살이 더 깊어보인다. 나는 일시 무슨 말로 위로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큰딸이 결혼하고 외손녀가 태여나 할머니가 되자 나는 방학하기 바쁘게 작은딸과 함께 외손녀를 보러 한국으로 가군 했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갈 수 있을지 희망이 묘연하니 조바심만 난다. 화상채팅으로 말을 번지기 시작한 외손녀가 “채인인 할머니 최고”라고 종알거리면서 죄꼬만 엄지를 척 내밀 때면 단박에 안아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나기까지 한다.  꽉 막혔던 배길과 하늘길이 다시 빠금히 열리고 있긴 해도 관련 수속이 까다롭기 이를 데 없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항공권가격에다 다른 비용까지 하면 한번 걸음을 걷는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에 로출될 가능성까지 커지니 더구나 발목이 잡힌다.  살같이 흘러간 세월 속에 온갖 비바람 속에서도 녀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준 어머님들, 그 꽃밭에 듬성듬성 생겨난 빈자리들이 나의 마음을 저민다. 홀로 손녀를 돌보느라 너무 힘들어 성격마저 과격해진 ‘욕쟁이’어머님, 한국으로 떠난 남편이 행방이 묘연해지자 어린 네 자식을 키우면서 삶에 부대끼다가 귀가 절벽이 되여버린 ‘귀머거리댁’어머님, 마흔을 넘긴 아들이 허구한 날 말썽만 피우니 그 뒤수습만 하다 돌아간 ‘통화댁’어머님, 그 밖에도 몇몇 어머님들은 이제 한줌의 꽃구름이 되여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버렸다.   내 평생에 잘한 일을 꼽으라면 말기암환자였던 ‘설안댁’어머님에게 마지막으로 파마를 해드린 거라 할 수 있다. 그 날, 워낙에 겁약한 나는 밤잠을 설칠 만큼 큰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침 일찍 푹 고은 토종닭과 함께 파마기구를 챙겨들고 ‘설안댁’을 찾아갔다. 그녀의 동생 분이 출근하고 나니 방안에는 나와 환자 둘만 남았다. “어떻게 해드릴가요?” “최고로 곱게 해주게나. 봄이라 이제 꽃들도 필 텐데 머리를 이쁘게 하고 꽃구경 가고 싶네. 여직 뭐하고 살았는지 꽃구경 한번 제대로 못했지 뭐야…” 울음조차 힘없이 토해내던 어머님,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어머님을 방석으로 받쳐준 뒤 파마를 곱게 말아놓고 나서 들고 온 닭곰을 꺼내여 살을 조금 찢어 입에 넣어드렸다. 힘겹게 입을 움씰거리며 한입 넘기는 둥 하던 어머님은 “자넨 이제 복 받을 게요. 마음이 착하니 딸들도 앞으로 다 잘될 거요.”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유난히 깔끔한 어머님을 위해 머리를 예쁘게 다듬어준 뒤 눈섭까지 정리해주었다. 문을 나서는 나에게 애에게 간식이라도 사주라면서 백원짜리 한장을 억지로 밀어주고는 내가 뿌리칠가 봐 문을 닫아버리던 어머님, 지금은 저 하늘의 한송이 꽃구름이 되였다…  손군이 대학시험을 칠 때도 신종코로나로 막힌 길이 트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식들이 오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매일 밤잠을 설친다는 어머님들, 신종코로나 때문에 한하늘 아래에서 살면서도 자유로이 오갈 수 없게 된 요즘이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날들이 길어지면 년세가 많고 기운이 쇠약해진 어머님들은 얼마나 두렵고 불안해하실가. 지금 가로수 가지 끝에서 조락하는 잎새처럼 허전한 웃음을 짓고 있는 어머님들이 더없이 애처로워보인다.   요즘 들어 부모님을 모시고 자식을 키우면서 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간다는 게 허다한 젊은이들에게는 사치스러운 꿈으로 되였다. 그러니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는 그들을 무작정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혹여 로모와의 리별이 영원한 아픔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삶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처지리라. 그리고 뼈속까지 사무치는 그리움과 짙은 고독을 감내하면서도 자식들의 앞날이 훤하기만을 기원하는 건 이 세상 모든 어머님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멀리서 ‘달래’어머님이 ‘콩나물댁’어머님과 ‘새각시댁’어머님의 부축을 받으며 자꾸 한쪽으로 기우려는 몸을 애써 지탱하며 꽃을 찾아드는 나비인양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저 훈훈한 풍경, 멀리 떨어져 지내는 자식들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서로 다독이고 부축하며 살아가는 어머님들이야말로 가을 들녘에 피여나 은은한 향을 풍기는 국화꽃이 아닐가 싶다. 어머님들이 그리운 자식들과 재회할 그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부디 그 날까지 견뎌내기를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다.  
60    학부모회의 댓글:  조회:787  추천:0  2021-02-04
학부모회의  김명화 설을 쇠고 개학하기로 한 어린 손주가 다니는 조기교육반이 세계를 휩쓴 신종코로나 때문에 몇달 뒤로 미뤄지게 되였다. 개학을 앞두고 학부모회를 한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아들며느리가 모두 직장에 출근하다보니 어린 손주를 조기교육반에 보내고 학부모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순리 대로 예순을 지척에 두고 있는 나의 몫이 되였다. 아무튼 갓 세돌이 지난 손주의 학부모회의에 모처럼 참석하게 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붕 뜬 아침이다. 애고사리 같은 손주의 보동보동한 손을 잡고 조기교육반 문 앞에 이르니 생기가 넘치는 젊은 선생님들이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일찌감치 대문 앞까지 나와서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마끔 아이 손을 잡고 해맑게 웃으면서 회의실에 들어가는 숱한 젊은 엄마들 가운데 훤칠하고 멋진 남자가 량손에 하나씩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알고보니 오누이쌍둥이를 둔 아빠란다. 오누이쌍둥이 아빠, 그러고 보니 나의 오빠도 오누이쌍둥이를 둔 아빠였는데… 그 남성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대학입학시험을 앞둔 고중 3학년 학부모회의에 오빠가 부모를 대신해서 참가한 일이 떠올랐다. 손꼽아 헤여보니 어언 40년전 일이다. 그 날은 마침 토요일이였는데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아버지처럼 듬직한 오빠가 학교 식당 문 앞에서 막내동생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 시골에는 소학교만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남존녀비사상이 심했던 외할아버지가 외삼촌 둘만 야학공부를 시키는 바람에 어머니는 남동생들한테서 몰래 글을 배워서야 겨우 조선글을 뗄 수 있었다. 어려운 나날에 그렇게라도 글을 익혔기에 참군한 오빠나 외지에서 공부하는 이 막내딸이 보낸 편지도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작은외삼촌이 길녘에서 주어온 탄알을 가지고 놀다가 터져 비명에 목숨을 잃는 바람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외할머니도 얼마 뒤 작은외삼촌을 따라 가버렸다. 해방후, 외할아버지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17살에 난 엄마를 시집 아니, 돈을 받고 시집이라고 보내놓고 외삼촌만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며 어머니는 두고두고 외할아버지를 원망하셨다. 그렇게 중국에 남은 어머니는 생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을 이제나저제나 학수고대했다. 이제 한국에 가서 친정식구들을 만나게 되면 먼저 글을 가르쳐준 남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고향집 마당에는 홍시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홍시를 유난히 반기는 딸을 위해 해마다 설날이 되면 언 감은 꼭 사다가 찬물에 담가주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특별히 심은 거라고 하면서 아직도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평생 학교문에 들어서지 못한 게 여한으로 남아서 그랬던지 어머니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우리 4남매를 남들 부럽지 않게 모두 고중공부까지 시켰다. 우리들도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세라 한결같이 공부를 잘했다. 어린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고 공부뒤바라지를 하느라 밤낮없이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하느라고 어머니는 한번도 우리네 학부모회의에 참가한 적이 없었다. 학부모회의를 앞둔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사무실에 불러놓고 이렇게 단단히 일러주셨다. “김명화, 이번 학부모회의는 아주 중요하니 부모님께서 꼭 참가하셔야 한다. 알았지?” 나는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지만 동네에 있는 학교에 다닐 때조차 학부모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어머니가 20여리의 먼 시골길을 걸어서 학부모회의에 참석할 리 만무하다는 걸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부모회의가 있던 날, 오전수업을 마치고 점심밥을 먹으려고 학교 식당에 가고 있는데 같이 가던 친구가 느닷없이 “명화, 너의 오빠야!”라고 웨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오빠가 학교 식당 앞에서 우리를 보고 반갑게 웃고 있었다. 오빠를 보는 그 순간 나의 두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오빠가 “명화! 막내야!”라고 부르면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오빠! 어떻게?” 나는 금시라도 두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질 것 같아 머리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막내야, 학부모회의가 있다는 걸 왜 미리 알리지 않았어? 너의 담임선생님께서 널 칭찬하시더라. 문장을 잘 쓰고 랑송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린다구. 게다가 춤도 잘 추니 앞으로 사범학교를 나와 교원이 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오빠도 너의 선생님과 같은 생각이란다.” 오빠는 이렇게 말하면서 호주머니에서 비타민C 한병과 돈 10원을 꺼내 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빠, 올케한테 드려요. 난 괜찮아요.” 그 무렵, 올케는 오누이쌍둥이를 낳고 영양실조로 황달간염에 걸려 링게르주사를 맞고 있었고 어린 조카들은 우유를 사먹고 있는 힘든 형편이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로서는 오빠의 마음을 선뜻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빠는 호주머니에서 비타민C 한병을 꺼내 보여주면서 한병 더 있으니 걱정 말고 얼른 받으라고 밀어주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반죽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토닥토닥 등을 다독여주는 오빠의 따뜻한 사랑 앞에서 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한마디 말도 못했다… 그 날, 오빠가 학부모회의에 기적처럼 나타나 나를 응원해준 덕분에 그 뒤로 매일매일 온몸에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여느때보다 공부도 더 열심히 했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비타민C를 한알씩 챙겨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밤자습이 끝나면 과자로 허기를 달래면서 밤을 새며 공부를 한 덕분에 대학에 이어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는 꿈까지 이루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우리가 사는 이 고장에도 한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이 불어 너도나도 돈을 번다고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어느 날인가 갑자기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막내야! 한국어시험에만 합격되면 한국에 갈 수 있는 정책이 나왔다는구나. 네가 대신 알아보고 좀 등록해줄래? 더 늙기 전에 돈을 벌어서 아들을 장가 보내고 로후대책도 마련해야겠구나. 막내야, 부탁한다.” 나는 오빠의 부탁 대로 어렵사리 인터넷으로 한국어시험 등록을 마쳤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어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오빠는 우리 한국어학과 선생님들마저 깜짝 놀랄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되였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오빠는 전화를 걸어와 회포에 잠긴 목소리로 속심말을 털어놓았다. “막내야, 고맙다! 네 덕분에 엄마가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한국에 가게 되였다. 이제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엄마의 고향 경상북도에 가서 엄마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외삼촌을 찾아뵐 거야. 생전이면 좋겠는데… 혹시 돌아가셨다면 산소에 찾아가 제사상을 올려 엄마의 마음을 전할 거야… 이제 돈을 많이 벌어올 테니 오빠 걱정 말아…” 그런데 막로동이 너무 고달팠던 걸가? 한국땅을 밟은 지 고작 26일 만에 오빠는 심장병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에 오르고야 말았다. 사랑하는 오누이쌍둥이 그리고 그동안 오빠를 아버지처럼 믿고 살아온 동생들과 작별인사 한마디도 없이… 이국땅의 반지하 세방에서 홀로 떠나야 했던 그 마지막 길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고 억울했을가. 9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가끔 터미널이나 기차역, 공항 같은 데서 오빠와 닮은 모습의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오빠!” 하고 부르면서 뒤쫓아가게 된다. 그리고 오빠의 친구 분들을 만나도 오빠 생각이 북받쳐올라 뜨거운 눈물을 훔친다… 그리운 고향에도 오빠가 돌아가신 후로 발길을 뚝 끊었다. 어머니와 오빠가 계시지 않는 고향은 이제는 추억으로만,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는 곳으로 남게 되였다. 나의 학부모회의에 참석했던 오빠의 모습을 새삼 되새겨보게 한 손주의 학부모회의, 모든 게 방불히 어제 일인듯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고 어린아이처럼 사랑하는 오빠를 애 타게 부르면서 흐느끼고 싶은 심정이다. 전화할 때마다 언제나 “오, 우리 막내, 명화구나.”라며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불러주던 오빠의 그 목소리가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59    아버지 댓글:  조회:655  추천:0  2021-02-04
아버지 리미옥 어제밤 꿈에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어언 3년이 된다. 그동안 한번도 꿈에 나타난 적 없었는데 느닷없이 어제밤 꿈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소스라치듯 잠에서 깨여나 마구 요동치는 가슴을 붙안고 한동안 꼼짝할 수도 없었다. 지난 상처가 다 아물었는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물 한 컵을 마신 다음 쏘파에 걸터앉았다. 가슴 속에서 일어난 방망이질이 이슥토록 가라앉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여직 마음속에 남아있는 걸가? 아니면 자괴감 같은 거라도 남아있는 걸가? 아버지는 그 곳에서 잘 계시는 걸가? 아직도 나에게 걱정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아버지. 두번다시 뒤돌아보고 싶지 않는 그 지긋지긋하고 힘들었던 시간들… 40대 중반의 한창나이에 일손을 놓다싶이 한 아버지는 모아놓은 재산이나 로후대책 같은 건 전무한 상태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학꿈을 접고 어린 나이에 한국행을 택할 때만 해도 나는 아버지한테 원망 같은 건 품어본 적 없었다. 단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고 키워준 사랑에 감사해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한국에 가서 몇년간 힘들게 벌어 아껴 모은 돈으로 아버지에게 아빠트 한채를 장만해드렸다. 그런데 그 아빠트가 나중에 아버지가 종종 나를 들먹이는 조건이 될 줄이야. 아버지는 무엇이든 필요한 게 있으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 집을 팔겠다고 으름장을 놓군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그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당신의 집이니 팔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야 잠시나마 그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자 하나 둘 결혼하는 친한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하루빨리 아버지한테서 해탈되고 싶었다. 얼마 뒤 남편을 만나면서 나의 인생에도 차츰 변화가 일어나게 되였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란 남편은 나랑 많이 달랐다. 그런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나도 점점 밝게 변해갔다. 진정한 사랑이 어떤 건지, 가족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화목한 시댁 식구들을 보면서 점차 배워갔다. 그 무렵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팽팽해졌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게 되면 다달이 당신에게 보내던 생활비가 끊길가 봐 내심 걱정하는 눈치였다. 결혼을 앞두고 시댁에서 요즘 신부들의 로망이라는 다이아몬드, 황금, 진주 3 세트를 결혼례물로 나에게 선물했다. 너무나도 기쁘고 감격한 마음에 그걸 아버지한테 보여드렸더니 대뜸 “이걸 팔면 돈이 되냐?”고 묻는 것이였다. 별로 기대를 한 건 아니였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서운한 나머지 화가 나고 허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상견례를 치를 때 시댁에서는 결혼례물로 한국돈 천만원을 우리 편으로 보내왔다. 엄마는 그 돈으로 새신랑한테 선물할 목걸이며 반지, 고급 양복 등을 갖추었다. 결혼식 전날 저녁, 나는 아버지에게 술상을 갖추어올리면서 앞으로 생활비는 계속 드릴 테지만 빈주먹으로 신접살림을 꾸며야 하니 도움을 드리는 데 한계가 있을 거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시댁에서 보내온 그 천만원은 당신이 챙겨야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였다. 그 돈은 신랑에게 줄 결혼례물을 장만하는 데 썼노라고 이실직고하자 당장 부모자식의 인연을 끊고 래일의 결혼식도 망쳐놓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모들이 한밤중에 한달음에 달려와서 설득을 해서야 간신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이튿날,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예쁜 모습을 보여야 할 날에 나는 눈이 퉁퉁 부은 채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아버지는 이번에는 축의금을 모조리 내놓으라며 한바탕 야단을 치더니 아무 것도 얻지 못하자 그 자리로 연길로 돌아간다며 려행가방을 챙겨들었다. 낳아서 길러준 은혜도 모르는 후레자식이라고 나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말이다. 수년간 쏟은 온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마음이 더없이 허탈해났다. 그런데 고모들마저 당신들이 내놓은 축의금은 아버지한테 몽땅 주라면서 나를 달달 볶아댔다. 내가 시집 가고 나면 아버지가 살길이 막막해진다는 리유에서였다. 결국 아버지에게 한국돈 500만원을 넘기고 나서야 간신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결혼 첫날밤, 나는 펑펑 목놓아 울었다. 자식을 낳고 키워준 은혜를 갚으라고 핍박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가. 자식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면 축복해주는 게 부모 마음일 텐데 하는 설음이 밀려들면서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남편은 말없이 나를 품에 껴안아주었다. 험난한 시련은 내가 임신한 뒤에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알콜중독증세가 갈수록 심해져 새벽녘에도 우리 신혼집 문을 두드려대니 나는 무거운 몸으로 시도 때도 없이 술상을 갖춰드리느라 들볶여야 하였다. 알콜중독이 점점 심해지자 아버지는 환각증상이 나타나면서 눈앞에 헛것이 나타나고 불안증세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병원치료를 한사코 거부했다. 임신 5개월차의 임신부인 나는 급기야 체중이 80근으로 떨어졌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태아의 머리에 물이 차는 사태까지 맞게 되였다. 귀한 첫 손주를 보게 될 시댁에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 때문에 무고한 남편이 함께 시달림을 겪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시댁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시댁에서는 남편이 넌지시 귀띔을 해주었기에 우리의 상황을 대강 알고 계셨다. 시부모님은 송구해서 몸 둘 바를 몰라하는 나를 오히려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일단 안정을 취하면서 2주 동안 태아의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는 의사의 분부에 따라 나는 남편과 상의하고 한국에 계시는 엄마 곁에 잠시 가있기로 했다. 그동안 아가를 위해서라도 출산전까지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태아의 상태가 좋아지자 시름 놓고 남편이 있는 연길로 돌아왔다. 그렇게 조용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곧 있게 될 아가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될 줄이야. 그 날은 마침 나의 생일날이였다. 아기가 태여나기 전에 차를 장만하기로 하고 우리 부부는 일찍 나가서 수속을 마쳤다. 점심은 내가 좋아하는 신선로를 먹기로 하고 나갈 차비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급촉하게 울렸다. 전화너머로 사촌올케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둘째삼촌(아버지)이 돌아가셨소.” 환갑나이도 안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환각증세까지 보이며 나를 괴롭힐 때 어렴풋하게 불안감이 찾아왔지만 배속의 아가를 지키려고 당분간 련락을 끊었는데 결국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가슴 아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사후 고인의 상태로 보아 돌아가신 지 하루이틀이 아닌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을 때 나는 그만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흔히들 말하는 고독사였다. 아버지의 형제들로부터의 비난이 비발쳤다. 임신 9개월이 된 만삭의 몸으로 나는 쏟아지는 그 비난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출산 예정일을 4주 앞두고 태아의 성장이 멈추면서 바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분부 대로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수술실에 실려들어갔다. 아이를 낳고 입원해있는 동안에도 친가에서 따뜻한 안부의 전화 한통 없었다. 아버지와 련계를 끊고 지내는 동안은 나에게도 퍼그나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였는데… 이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어디에 하소연하랴…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훈훈한 추억 한자락도 잡히는 게 없다. 나의 성장과정에 기억에 남을 만한 도움이나 조언 같은 걸 한번도 건넨 적 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떠올리면 마음이 한산하고 숨이 막힌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고중에 입학하여 또래친구 부모님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을 때도 축하하기는커녕 집안형편을 살피지 않고 공부하겠다고 설치는 철 없는 아이 취급을 받았던 나였다.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련민의 마음은 한구석에 남아있다. 평생 쪼들리면서 살다가 술에 절어서 지내다가 아무 것도 이뤄놓은 것 없이, 가족에게 따뜻한 추억 한자락도 남겨주지 못한 채 스러져간 아버지의 인생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먼 후날,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줄 만큼 훌쩍 자란 딸아이에게 늘 밝은 엄마에게도 어두운 턴넬 같은 힘든 길을 걸어온 시간들이 있었다고 들려준다면 딸애는 당시 이 엄마의 선택을 두고 어떻게 생각할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58    춤으로 배우는 인생 댓글:  조회:662  추천:0  2021-02-04
춤으로 배우는 인생 김경희 정년퇴직하고 나서 매일 집에서 빈둥거리려니 하루하루가 너무 지루하고 무료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심심풀이 삼아 집부근에 있는 춤교실에 다녀보고 싶었다. 등교한 첫날,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니 알록달록한 무용복을 차려입은 녀인들이 눈부시게 안겨왔다. 나는 쑥스러워 맨 뒤줄 구석켠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걷기를 기초로 하는 춤동작은 얼핏 보기엔 간단한 것 같아도 일일이 기억하려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일부러 뒤줄에 서다 나니 앞에 서있는 선생님의 동작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앞줄의 학원 한명을 정해놓고 그녀의 춤동작을 따라하기로 했다. 대렬이 바뀌면서 앞쪽으로 나갈 때마다 수십쌍의 눈이 혹시 나만 여겨보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였다. 바싹 긴장하니 손발이 맞지 않고 몸까지 휘청거리였다. 거울에 비낀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꼴불견이였다. 선생님이 다가와 어깨의 힘을 빼라고 일러주는데도 몸이 도무지 따라주지 않아 못내 당황스러웠다. 선생님을 따라 하늘하늘 률동을 타는 학원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고 슬쩍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누구든 그런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니 조급해하지 말라며 옆에 있던 학원들이 조언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조금은 위로가 되는듯 싶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오늘 춤교실에서 배웠던 춤동작을 한번 복습해보려고 거울에 마주섰다. 그런데 동작이 잘 떠오르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억지로 떠오른 동작마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모든 일엔 다 순서가 있다는데 어찌 단술에 배 부르랴. 하루하루 나아지겠지.’ 스스로 위안하며 몸을 천천히 움직여보았지만 여전히 그 상이 장상이였다. 이 때 친구 문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때? 춤은 배울 만하던?” “어이구, 말도 말아, 힘들어 죽겠어. 나만 못난 새끼오리 같은 게 얼마나 쑥스러웠다구.” “괜찮아.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그래도 일년치를 끊었는데 어쩌겠어. 울며 겨자 먹기로 다녔더니 반년 뒤부터 자세가 약간씩 잡히는 게 알리더라구. 그러니까 너도 꼭 잘해낼 수 있을 거야.” 밝고 씩씩하게 응원해주는 친구의 기운을 받으니 나의 목소리에도 조금 기운이 실렸다. “그래. 이왕 발을 들여놓았으니 열심히 해야지.” “남들과 비기느라 하지 말고 열심히 배워. 넌 워낙 춤을 좋아하니 잘할 수 있을 거야. 나한테 동영상이 몇개 있는데 보내줄 테니 눈으로라도 먼저 익혀두렴.” 잠시후, 문화가 조선춤 기본동작을 다룬 동영상을 보내왔다. 열어보니 춤사위가 우아하고 동작이 그다지 어려워보이지 않았다. 동영상을 거듭해서 보고 나서 큰 거울에 마주섰다. 그런데 첫 동작부터 제동이 걸릴 줄이야. 다시 동영상을 반복해서 연구하다가 될듯 싶어 해보았는데 이번에도 순리롭지 않았다. 슬슬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하긴 내 나이 쉰여섯이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였다. 거기다 몸까지 뻣뻣하니 동작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한나절이 되도록 역사질을 하니 그래도 서툴게나마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였다. 노루꼬리 만한 진보더라도 퍼그나 위안이 되였다. 팔을 많이 움직여서였을가, 그러는 사이에 지긋지긋하던 경추의 통증마저 가뭇없이 사라지니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신심이 용솟음쳤다. 이튿날, 문화가 여벌로 둔 무용복이랑 줄 테니 만나자고 련락을 해왔다. 맛집에 도착하자 바람으로 문화는 가방에서 널직한 까만 바지와 자주색저고리, 하얀 무용신을 꺼내놓았는데 얼핏 보기에도 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나한테 좀 널직하니 너에게는 딱 맞을 거야. 무용복을 차려입으면 기분이 좋아져 춤을 더 잘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 “고마워. 잘 입을게.” 이튿날, 무용복을 입고 무용신까지 신으니 과연 기분부터 확 달라졌다. 그 날 더욱 신바람이 나서 춤동작을 따라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련습하였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이 맥주 한잔을 기울이고 나면 동작이 예뻐질 수도 있다며 롱담을 던지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나는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하루도 거를세라 춤교실에 나갔다. 전날에 배운 동작을 반복해서 익히고 나서 새로운 동작을 배우는데 그 즈음이면 정력과 체력이 모두 슬슬 딸리였다. 몸이 심하게 힘든 날이면 집에 돌아와서도 춤동작이 잘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 때마다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그럴 때면 뭐든 배우려면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일찍 등교하여 다른 학원들에게 가르침을 청하군 했다. 내가 깨칠 때까지 차근차근 가르치면서 잊지 않고 응원도 해주는 학원들이 곁에 있어 너무 고마웠다. 하루는 사정 때문에 춤교실에 나가지 못했는데 다음날에 이어진 춤동작들을 전혀 따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날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고 심드렁해져 대충 수업을 때웠다. 수업이 끝나자 춤을 가르쳐준 적 있는 선배가 나한테 다가와서 전날에 오지 않은 연유를 묻고 나서 춤을 제대로 배우려면 한동안은 춤을 일순위에 놓는 것이 좋다고 따끔하게 일깨워주었다. 선배의 조언을 새겨들은 나는 그 뒤로 하루도 빠질세라 꼬박꼬박 춤교실에 나갔다. 한달 가량 지나자 선생님의 동작을 무턱대고 따라하던 데로부터 자신의 춤자세를 살펴보면서 조금씩 조률을 할 수 있을 만큼 수준이 부쩍 늘었다. 물론 몸 따로 마음 따로여서 애간장이 타들어갈 때도 있었지만 호흡, 손발의 놀림, 춤사위에 골고루 신경을 쓰며 열심히 춤을 배워나갔다. 논 자취는 없어도 공부한 공은 남는다고 어느덧 춤동작 몇개를 제법 멋지게 다룰 수 있게 되자 서서히 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였다. 어느 날, 시조카에게 요즘 춤교실에 다닌다고 자랑했더니 한복을 가져다줄 테니 무용복으로 고쳐입으라면서 진달래색 한복 한벌을 가져왔다. 시조카의 배려가 참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였다. 나는 이튿날로 문화와 함께 서시장에 찾아가 그 한복에 어울리는 곤색과 보라색 저고리감을 하나씩 끊어 복장집에 맡기였다. 빨리 입어보고 싶은 마음에 이틀후면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맙게도 급한 것 같으니 먼저 해주겠다며 시원하게 대답해주었다. 기분이 붕 뜬 나는 시장을 돌다가 빨간 바탕에 자잘한 눈꽃 무늬가 돋친 저고리감까지 한벌 더 사서 복장점에 맡기였다. “넌 역시 춤을 좋아하는 게 맞구나. 난 춤교실에 다닌 지 반년이 되여서야 겨우 무용복을 한벌 갖추었는데. 넌 틀림없이 잘 배워낼 수 있을 거야.” 문화가 꿀물이 뚝뚝 떨어지는 달콤한 말로 응원을 보냈다. 추운 날씨에도 함께 시장을 돌면서 저고리감을 추천해주고 자기가 단골로 다니는 복장점을 소개해준 고마운 친구의 끈끈한 우정에 나는 마음이 더없이 따뜻해났다. 이틀후, 복장점에서 무용복을 찾아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무용신에 받쳐신을 하얀 양말도 샀다. 예쁜 무용복을 차려입고 춤을 출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리면서 나는 무용복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어 가족 워이신 그룹에 올렸다. 어느새 둘째올케가 그걸 보고 이쁘다며 새것이나 다름없는 고급스러운 곤색치마가 있으니 가져다가 무용복으로 고쳐입으라고 하는 것이였다. 참으로 고맙고 반가운 일이였다. 다음날, 진달래색 치마에 보라색저고리를 받쳐입고 춤교실에 들어서니 학원들은 예쁘다면서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큰 거울에 비춰보니 확실히 나한테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저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기면서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여올랐다. 수업을 앞두고 우리는 예전에 배운 내용을 한번 복습했는데 옷이 예뻐서 그랬던지 춤동작도 여느때보다 더 우아하고 예뻐보였다. 춤교실에서 배우는 춤동작은 날이 갈수록 배우기가 힘들어졌다. 다리를 들고 솟구치는 동작을 할 때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돋쳤다. 선생님이 다가와 틀린 동작을 짚어주며 몇번이고 교정해주는데도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수십쌍의 눈길이 나에게 쏠리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였다. ‘오늘의 부끄러움을 참고 견뎌야 배울 수 있다. 이제 몇년만 지나면 이 순간을 떠올리며 얼굴에 미소를 지을 날이 기필코 올 거야.’ 나는 슬며시 어금이를 깨물었다. 천부가 없으니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고 마음을 추슬렀다. 요즘 들어 춤이 나의 하루일과로 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는 춤에 흠뻑 빠져있다. 학원들도 처음보다 몰라보게 나아졌다며 볼 때마다 고무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참으로 친절하고 따뜻한 분들이다. 내가 힘들어하고 흔들릴 때마다 해주었던 그들의 고무와 격려는 나에게 보약이 되고 지팡이가 되여주었다. 집에 돌아와 춤동작을 익히다가 어려운 동작을 어렵사리 해낼 때면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작은 성적에도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나의 행복비결이라고 할가. 두달을 넘어서자 나는 동영상을 보면서 〈노들강변〉 춤을 익혀냈고 몇가지 조선춤 기본동작도 소화해냈다. 이제 남은 몇가지 동작도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익혀나갈 것이다. 잠시는 고통이 동반되더라도 배움은 역시 즐거운 일임이 틀림없다. 나는 책을 보고 글을 쓰다가도 목덜미가 뻣뻣해나면 춤을 추군 한다. 반시간 가량 거울에 마주서서 춤 추는 그 시간 만큼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고 할가. 가끔씩 “돈도 나오지 않는 춤을 배워서 뭐하냐? 그 시간이면 차라리 돈이나 벌겠다.”라며 권하는 친구들도 있다만 춤이 너무 좋다. 춤을 배우게 되면서 스스로 몸단장에 신경을 쓰게 되였고 성취감과 함께 즐거움을 만긱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아직은 많이 서툴고 가끔씩 힘들 때도 있지만 흥겨운 가락이 나오면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게 된다. 전에는 쩍하면 침대에 몸을 맡기던 내가 이제는 수업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무용복을 입고 한시간 가량 춤련습을 하는데 그럴 때마다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행복의 엔돌핀이 용솟음쳐나오는 느낌이다. 매일 즐겁게 보내니 몸이 건강해지고 따라서 얼굴에도 생기가 넘쳐흐른다. 지난 30여년간 쭉 가정과 직장에만 충실해왔지만 요즘 들어 자신에게 속하는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도 역시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새삼 깨우치게 되였다. 춤교실은 우리 녀성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둘도 없는 아지트이다. 춤교실에 드나들면서 우리 부부 사이도 더욱 애틋해졌는가 하면 집안분위기도 한결 밝아지고 화기애애해졌다. 춤이라는 삶의 활력소가 나와 가족에게 행복의 깊이를 더해준 것이다. 생에 주어진 행복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가? 남은 생에는 내가 원하는 걸 하나씩 찾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익히려고 한다. 오늘은 춤교실에, 후날에는 노래교실, 랑송교실에 다니면서 더 늙기 전에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익히고 싶다. 오늘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춤교실로 가는 길에 올랐다. 마음은 진작 춤교실에 날아가있다. 방불히 귀전에서는 흥겨운 가락이 울리고 눈앞에서는 우아한 춤사위가 어른거리는듯 싶다.
57    이순지년의 천륜지락 댓글:  조회:664  추천:0  2021-02-04
이순지년의 천륜지락 오성호 이 세상에 천륜지락 만한 즐거움이 없다고 한다. 이순의 나이에 귀여운 외손녀를 얻은 후로 가슴 벅찬 행복을 누리게 되면서 이 말의 의미를 심심히 깨닫게 되였다. 남자들은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더니 환갑나이가 된 내가 요즘 들어 딱 그런 기분이다. 황혼로맨스가 아니라 귀여운 외손녀한테 푹 빠져 천륜지락을 누리면서 그 즐거움에 흠뻑 취해 점점 행복한 바보가 되여가는 중이다. 외손녀가 태여난 후로 우리 량주는 외손녀의 해맑은 웃음에 홀랑 넘어가 날이 가는 줄도,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그저 온 세상을 독차지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다. 외손녀와 함께라면 그 즐거움의 끝을 알 수 없다. 아침에 잠에서 깨여나서부터 귀여운 외손녀는 우리에게 더없이 찬란한 웃음을 선물한다. 실눈을 짓고 캐득거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귀여운 모습에 우리 량주는 앞 다투어 외손녀를 안아주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어댄다. 나는 어떻게든 외손녀를 좀 웃겨보겠다고 사력을 다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외손녀 앞에서 나의 18번 〈고향의 봄〉을 불러보기도 하고 얼씨구절씨구하며 어깨춤을 덩실대면 외손녀는 까만 두 눈이 올롱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짝 웃는다. 그러면 나는 더욱 흥이 나서 목청을 한껏 돋구고 팔다리에도 힘을 넣어 신나게 휘젓는다. 나중에 딸애가 찍어서 보여준 동영상을 보니 나의 그 우습강스러운 모습에 〈행복한 늙은 바보〉라는 제목을 붙이면 딱일 것 같았다. 그러나 가끔씩 섭섭할 때도 없는 건 아니다. 딸애는 내가 외손녀를 안을 때마다 잊지 않고 이렇게 한마디 건넨다. “아버지, 좀 조심스레 안아주세요.” 여리디여린 아기가 혹여 다칠가 봐 딸애는 한시도 시름을 놓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알아, 걱정하지 말아.”라며 퉁명스레 대꾸한다. 품에 안은 외손녀를 내려놓을 때에도 딸애는 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는다. “아버지, 좀 천천히 내려놓으세요.” 이렇게 매번 신경을 도사리는 딸애한테 섭섭한 마음이 들다 못해 저도 모르게 반발심까지 일어났다.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내가 뭘 어쩐다고? 외손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내 마음을 네가 뭐 안다고 그래.’ 그래도 나를 보며 방글방글 웃어주는 귀여운 외손녀를 봐서 화를 꾹꾹 눌러놓고 능청을 떨어댄다. “아가야, 넌 이 할아버지 마음을 잘 알지? 너는 이 할아버지와 언제나 한편이지? 그렇지?” 이렇게 ‘상처 입은’ 마음을 스스로 달래면서 딸애 앞에서 보란듯이 외손녀의 야들야들한 볼에 살짝 뽀뽀를 한다. 그러면 옆에 있던 안해가 외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한다는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호호, 얘가 무슨 할아버지와 한편이겠어요? 제 엄마와 한편이지.” “그런가?” 번연한 답인 줄 알면서도 되묻다가 안해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껄껄대며 멋적게 웃어버린다. 하긴 외손녀와 딸 그리고 나 사이에 무슨 편 같은 걸 가를 일이 있겠는가. 외손녀가 태여난 후로 우리 량주는 외손녀를 돌보는 한편 산후몸조리를 하는 딸애를 돌보느라 밤낮이 따로 없이 바삐 보내고 있다. 안해는 매일같이 외손녀와 딸애를 챙기느라 그들 옆에서 새우잠을 청하면서 하루도 편하게 쉬여본 적이 없다. 밤중에도 몇번씩 일어나 분유를 풀어 아기에게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느라 시름 놓고 잠을 청할 새마저 없다. 나도 덩달아 밤중에 여러번 일어나는 고역을 치러야 했는데 그 바람에 밤잠을 설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수두룩하다. 한번은 외손녀를 품에 안고 달래다가 그 맵시로 쏘파에서 끄떡끄떡 졸고 있는 안해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게 되였다. 쌔근쌔근 단잠이 든 외손녀를 꼭 껴안은 손목에는 너덜너덜해진 파스가 붙어있었고 물집이 잡힌 입을 맥없이 헤벌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짠해났다. 나는 딸애를 불러다가 외손녀를 안아가게 하고는 안해를 쏘파에 편히 눕힌 뒤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렇게 매일 버겁도록 힘든 ‘전쟁’을 치르면서도 우리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외손녀의 귀여운 표정,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우리는 집안이 떠나갈듯 웃는다. 가끔은 리유없이 시물시물 웃을 때도 있다. 처음 리유식을 받아먹을 때 숟가락을 꼭 물고 놓지 않는 외손녀의 엉뚱한 모습에 폭소를 터뜨렸고 안해가 옆으로 눕혀놓고 기저귀를 바꿔주는데 “뽕”하고 방귀를 뀌고는 머리를 돌려 제 엉덩이를 돌아보는 모습이 능청스러워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내가 안아주면 징징거리다가도 딸애가 안아주면 좋다고 들까불며 제 엄마의 어깨너머로 캐드득거리면서 숨박곡질하듯 나를 훔쳐보는 모습에는 맹랑해서 피씩 웃고 만다. 태여나서 5개월 가량 반듯이 누워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던 외손녀가 하루아침에 한다리를 들어 다른 다리 우에 포개놓고 어깨를 들썽거리더니 머리를 번쩍 추켜들고 엎치는 순간, 우리는 마치 대단한 기적이라도 일어난듯 박수를 치면서 “야, 만세! 우리 손녀 만세!” 하고 환호했다. 아픈 예방주사를 두대 맞고도 울지 않던 날에는 집안에 녀장부가 태여났다고 하면서 이제 커서 어떤 인물이 되려고 저럴가 하고 즐거운 상상에 잠겨보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금방 엄마가 된 딸애가 수술실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목이 메여 말없이 딸애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손녀가 태여난 기쁨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얼굴이 백지장같이 창백해진 딸애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 마음이 알알해났다. 이윽고 큰일을 해냈다며 손등을 다독여주니 딸애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였다. 내가 아기가 우리 이쁜 딸을 닮아 무척 귀엽다고 치하하자 파릿한 딸애의 얼굴에 금방 함박꽃웃음이 어리였다. 그 순간 만감이 교차하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났다.   나중에 딸애는 살폿이 웃으면서 우리 량주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아기가 저 보고 웃을 때면 기분이 참 좋아요. 아버지, 어머니도 전에 제가 웃으면 기분이 즐거웠지요? 참, 그 때 많이 웃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요.” 그러면서 밤새 창작한 작품이라며 시 한수를 우리에게 보내왔다. 그 시를 그대로 적어본다.   엄마가 되여 엄마에게         엄마가 되여서야 떠올랐습니다 훌쩍 뛰며 신나하는 내 모습에 행복해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엄마가 되여서야 떠올랐습니다 풀이 죽어하는 내 모습에 안타까워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   어린 외손녀가 딸애로 하여금 모성애의 진의와 부모 사랑을 새삼 깨우치게 한 모양이다. 우리는 딸애의 마음이 하도 갸륵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환갑나이의 우리를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바보’로 만들어주고 슴슴하던 생활에 활력을 부여해줌과 아울러 몸과 마음을 젊어지게 해준 외손녀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매일 하많은 재롱을 우리에게 선물하는 아가야, 사랑하는 아가야, 지금처럼 쭉 무럭무럭 잘 자라다오!
56    꿈의 기도 댓글:  조회:675  추천:0  2021-02-04
꿈의 기도 고려화 나이가 들수록 나를 더욱더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는 이미 과체중인 몸무게도 아니고 육아와 가게 일을 병행해 심신이 피페해지는 삶의 무게도 아니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무게, 그것이 제일 무겁고 두려울 뿐이다. 요즘 판타지드라마를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로 전후생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죽음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도 덜 두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예측 불가한 미지의 세계라서 그냥 희망사항에 그칠 뿐 그 무게와 두려움은 전혀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이는 결코 리해하기 힘든, 심장이 멈춰버릴 듯한 숨 막힘에 눈물도 안 나오게 만드는 그 무게를 처음 실감하게 된 건 11년전이였다. 2009년 6월의 어느 날, 무더운 날씨임에도 그나마 카텐 사이로 솔솔 불어들어오는 바람 덕분에 집요하게 덮쳐드는 낮잠과 싱갱이질하던 중이였다. 집이라는 편안한 환경에서 하는 일이라 유치한 핑크색 잠옷 바람으로 컴퓨터 앞에서 가격 타협에 관한 일본 바이어의 메일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기다리는 회신은 안 오고 한국 전화번호가 액정에 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워이신이나 무료 국제전화 앱이 아닌 고가의 국제 전화비를 내면서 련락을 하던 세월이였다. 오랜만에 외국에서 오는 전화지만 이 시간대면 식당일에 한창 바쁜 엄마의 전화일 리 없고 한국에 간 지 1년이 되도록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놀고 있는 아버지의 전화일 거라는 추측에 얼굴부터 찡그리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 썩 반갑지 않은 간단한 겉치레 안부가 끝나자 아버지는 본론을 끄집어냈다. “누구한테서 들은 건데 산동 쪽에 좋은 약이 있대, 그거 사서 부쳐줘.” “또요? ” “이번이 마지막이야.” 거의 애원에 찬 힘없는 목소리였다. 매일같이 약을 드시기는 해도 약과 상극인 술을 하루도 빠짐없이 마신다고 엄마가 얼마전에 전화에서 늘어놓던 푸념이 떠올랐다. 낮에는 술을 마시고 쉬고 나서 저녁엔 몸을 혹사하며 힘들게 일하고 퇴근한 엄마한테 주정 아닌 주정을 한다는 아버지를 리해할 수 없었다. 담보로 망한 집안 꼴을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보겠다고 출국을 했으면 열심히 일해서 보란듯이 귀국을 해도 모자랄 판에 술만 마시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크게 지장이 없는 병을 핑게로 일자리를 밥 먹듯이 바꾸며 거의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가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는 엄마가 불쌍했다. 엄마에 대한 련민이 커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굴린 눈덩이처럼 커져 이젠 약을 사서 부쳐주는 일도 싫어졌다. “아니, 아무리 좋은 약을 드시면 뭘 합니까? 술 마시면 그냥 심해지는데… 아버지는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한평생 고생만 시키고 미안하지도 않냐구요? 그리고 이젠 나랑 사위한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나도… 숨 좀 쉬자구요…” 결국 전화는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나의 원망 섞인 잔소리로 막을 내리고 그 흔한 몸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따뜻한 인사도 없이 끊어져버렸다. 누가 먼저 어떻게 끊었던지는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확인할 길조차 없는 그번 통화가 우리 부녀지간의 마지막 통화가 돼버릴 줄 누가 알았으랴? 그 날 밤, 마지막 부탁이라던 애원에 섞인 아버지의 힘없는 목소리가 자꾸 메아리처럼 울려와 온밤 뒤척이다가 이튿날 결국 그 약을 주문했다. 며칠후, 그 약과 함께 신혼집 사진 몇장도 한국으로 보냈다. 졸업후, 잠간 출근하다가 남편이랑 같이 장사의 길로 들어선 지 2년도 안되여 길림시에 우리 둘의 힘으로 신혼집을 장만했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은 우리의 신혼집을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썩후에야 엄마한테서 전해들은 얘기인데 약과 신혼집 사진을 받고 나서 아버지는 약보다는 딸내미의 신혼집 사진을 더 반가워하셨단다. 친척, 친구들만 만나면 고이 간직한 사진을 꺼내보이며 애처럼 자랑을 늘어놓았단다. 그 당시엔 시내에 층집을 산 친척, 친구들이 거의 없었고 내 또래에 자기 힘으로 마련한 거라니 아버지는 더욱 뿌듯해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버지한테 해드린 마지막 효도가 될 줄은 몰랐다. 똑같은 일상에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훌쩍 한달이 지나갔다. 7월 중순의 어느 날, 새벽에 엄마한테서 걸려온 전화에 비몽사몽이였던 나는 얼굴에 랭수 한그릇 맞은듯 잠을 확 깼다. 수화기 저편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말씀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해서 응급실에 실려와서 이것저것 검사를 받던 과정에 혼수상태에 빠졌고 방금전 중환자실로 옮겨갔다고 했다. 신분증, 호구부 등 필요한 서류들과 옷 몇견지만 대충 챙기고 남동생과 함께 무작정 떠나기로 결정했다. 일단 려권부터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려권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한국으로 날아갈 줄 알았던 어리석은 판단이였다. 그러나 려권이 나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하지만 비보를 접하고 나서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한국에서 아버지를 화장하는 날이 마침 나의 27살 생일날이였다. 생애 제일 우울한 생일날, 난 결코 울지 않았다. 아버지의 골회함과의 첫 대면에도, 골회를 강에 뿌리러 가는 길에 기절하신 엄마의 모습에도, 흰가루가 되여 강물이 흐르는 대로 멀어져가는 아버지의 뒤모습이 아른거릴 때도 눈물은 결코 나오지 않았다. 문득 ‘나에게 아버지란 과연 어떤 존재였을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과연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했을가? 어릴 때부터 뭐든지 꾹 참고 견뎌내서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 독종이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느끼게 되였다. 그 해, 인순이의 히트곡 〈아버지〉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눈물을 한순간에 펑펑 쏟아내고 말았다. 아버지와 나 사이를 설명해주는 마음에 와닿는 가사를 보고 또 보면서 나는 묵묵히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쳤다. 엄마는 아들을, 아버지는 이 딸을 더 이뻐해주셨단 걸 번연히 알면서도 어느 순간부터였던지 미운 감정이 한을 담은 담배연기처럼 슬슬 피여오르기 시작했음을 인정하기 싫었던 거였다. 본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버지는 그 번듯한 직장에서 쫓겨나고 엄마 가게마저 말아먹었다. 결국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났던 엄마는 사기당해서 되돌아왔고 진에 있던 기와집은 진작에 팔아버렸는지라 다시 농촌으로 돌아와 평범한 농사일을 시작해야만 했었다. 그 때라도 툭툭 털어버리고 용기 내여 일어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더라면 퍼그나 존경스러웠을 텐데 아버지는 결국 우리한테 나약함의 끝을 보여주고야 말았다. 역경은 친구를 시험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더니 잘 나갈 때 들러붙던 친구들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담보받고 도망친 친구에 대한 분노를 술로 삭히면서 아버지는 결국 집식구들한테 화풀이하는 그런 구질구질한 삶을 살아가셨다. 일말의 희망도 엿볼 수 없는, 연기가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집에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부터 직격탄을 맞은듯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였다. 빨리 그런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 바로 공부였다. 일부러 집과 멀리 떨어진 대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렇게 싫어했던 아버지였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아버지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를 다룬 노래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가 생전에 반기던 음식을 볼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건 무슨 영문일가? 그냥 물먹은 솜마냥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던 아버지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결혼식 때, 남들처럼 아버지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그 흔한 장면을 연출할 수 없어서 먹먹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처음 집에 데려간다는 4년 사귄 남자친구가 한족이라는 소식에 아버지는 뒤산에서 오래오래 슬피 울었다고 한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그 애틋한 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여서 뒤늦은 후회가 갈마든다. 내가 금방 태여났을 때, 남존녀비 사상이 심했던 아버지는 딸이란 말에 얼굴 한번 들여다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박차고 술 마시러 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로 아버지는 딸바보가 되여 친구와 동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항상 내 자랑만 늘어놓았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면서도 엄마 생일엔 작은 선물이라도 여러번 챙겨줬으면서 아버지 생일엔 생일을 축하한다는 간단한 메시지조차 보내주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난 엄동설한의 얼음물처럼 차가운 딸, 못된 딸이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통화마저 비수 꽂힌 잔소리로 상처를 주었으니 후회에 숨통이 조여드는 듯한 그 후유증은 지독하게 오래도 갔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면서 부모의 심정, 부모의 립장을 차츰 리해할 수 있게 되였다. 자식들이 아플 때면 대신 아파주지 못해 안달이 나고 내 자식이 다른 집 애들보다 잘 입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할 때면 누구보다 안타까운 게 부모 심정이 아닐가? 아버지도 분명 이런 심정이였을 것이다. 자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생활고를 겪는 현실 앞에 그걸 돌이키기엔 너무 무기력한 자신한테 화가 났을 것이고 가족 모두에게 더없는 죄책감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가끔 소등후 카텐 사이를 용케 비집고 새여들어오는 가냘픈 달빛을 바라보면서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버지가 사면팔방이 어둠으로 꽉 찬 마음이라는 작은 방에 갇힌 채 차가운 세멘트바닥에 앉아 좌절감에 빠져 방황할 때 내가 아버지의 은은한 달빛이 되여주었더라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소주병과 동무할 수밖에 없는 고독한 심정을 조금만 리해해줬더라면 그 이는 조금이라도 덜 외롭지 않았을가? 그 당시 모든 게 아버지 탓이라고 내몰지만 말고 이 또한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좌절이라고 다독여줬더라면 결과는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가? 원망 대신 조금이라도 응원을 해줬더라면 아버지는 술을 덜 마셨을 테고 그러면 페와 간이 반 이상 하얗게 되도록 그 아픔을 못 느낄 정도로 무뎌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가? 혹여 아버지가 아픈 걸 느꼈음에도 죄책감에 병원에 가보자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술을 마시면서 자신을 마비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떠올리니 목이 메여와 하나 또 하나의 실면의 밤을 보내야만 했다. 무수한 실면 끝에 힘들게 잠들면 꼭 아버지가 꿈에 찾아온다. 호기심에 눈을 한웅큼 먹고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는데 아버지가 나타나는 꿈을 꾸었는가 하면 아무 말 없이 흐뭇하게 웃으시다 홀연히 사라지는 꿈도 꾸었다. 아버지는 과연 이 못난 딸을 용서했을가? 수없이 용서를 빌고 또 빌었지만 그것 또한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핑게가 아닌가 싶다. 그저 아버지가 저세상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말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할 뿐이다.
55    첫눈 댓글:  조회:605  추천:0  2021-02-04
첫눈 최준봉 흰 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해변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도시에 내리는 첫눈이다. 올해 첫눈은 여느 해보다도 푸근하게 내린다. 하늘의 선녀인양 하늘하늘 춤 추며 내리는 흰 눈이 어느덧 온 대지를 흰 비단으로 뒤덮어 산과 들은 어느새 곱게 소복단장을 하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 창밖에서 쏟아지는 흰 눈을 하염없이 내다보았다. “눈이 내리는 게 그렇게 희한함둥?” 평소에 말수가 적은 안해가 나의 곁으로 다가오면서 한마디 건넸다. “희한하다기보다는 첫눈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설레는구만.” 안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눈길이 마주치자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나는 안해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쯧쯧— 왜 이러시우? 주책 맞게스리. 그러다 애들이나 보면 어쩌려구.” 안해가 나의 손등을 찰싹 후려치면서 눈을 힐끔 흘겼다. “첫눈이 내리던 날 우리가 혼례를 치르던 일이 생각나우?”  “그럼요. 그게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40년이 흘렀다니…” 먼산에 눈길을 주던 안해가 입을 열더니 말끝을 흐렸다. 우리 량주는 창가에 나란히 서서 밖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추억의 쪽배에 몸을 실었다. 1975년 봄, 나는 부대에서 제대되여 룡정역에 배치받았다. 그 때 이미 30살을 앞둔 로총각인지라 나는 장가 비위가 부쩍 동했다. 그러나 만나본 처녀마다 이런저런 구실을 대면서 구차한 우리 집에 시집 오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대에서 갓 제대한 나는 살림집이 없었고 늙은 어머니마저 시골에 계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한 처녀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나는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였다. 몸매가 늘씬하고 치렁치렁한 쌍태머리를 길게 드리운 함박꽃 같은 처녀였다. 첫 만남부터 나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숨김없이 들려주었더니 처녀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돈이예요. 사람만 좋으면 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인물도 예쁘지만 마음씨는 그보다 더 고운 속 깊은 처녀였다. 그후로 우리는 종종 만나서 사업과 리상을 담론하는 가운데 서로를 깊이 알아갔다. 어느 날, 우리는 라이라크향기가 물씬 풍기는 해란강강변을 따라 어깨나란히 거닐었다. 강변 곳곳에서 쌍쌍이 사랑을 속삭이는 청춘남녀들의 다정한 모습이 눈에 띄였다. 나는 용기를 북돋아 처녀에게 나의 진정을 고백했다. “동무를 안해로 삼고 싶소.” “저도 동무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어요…”  처녀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우리의 사랑을 축복이라도 하듯 그 날 따라 하늘의 뭇별들이 유난히 깜빡거리는가 하면 개울가에서는 개구리들이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댔다. 우리 둘은 날을 거듭하면서 서로에 대한 진정을 확인해가면서 청춘의 멜로디를 엮어갔다. “사돈보기도 안한 애가 만날 총각하구 붙어다니다 사달이라도 치면 어떻게 할라구.” 장모님 되실 분이 그런 우리를 지켜보면서 걱정스레 던진 말씀이였다. 우리는 서둘러 사돈보기를 하고 그 해 10월 24일을 결혼날자로 정했다. 그런데 그 무렵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마침 ‘문화대혁명’시기인지라 시집 가는 새색시가 너울을 쓰는 걸 자산계급의 썩어빠진 관습이라고 금지하던 형국이였다. 결혼식을 치르는 날에 새색시가 너울을 쓰지 못한다고 하니 못내 마음에 걸리였다. 대지에 가을자취가 채 가시지 않은 마가을, 우리는 예정 대로 결혼식을 올리였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새벽부터 흰 눈발이 날리였다. 여느 해보다 일찌감치 내리는 첫눈이였다. 우리의 결혼식은 더없이 검소하게 치러졌다. 나는 부대에서 갖고 온 데트론군복에 철로에서 발급받은 작업용 구두를 받쳐신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다음 뻐스도 통하지 않는 길에 올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눈발이 굵어지더니 함박눈으로 이어져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우리 뒤로 두쌍의 발자국이 흰 눈밭에 나란히 도장을 찍어놓았고 새색시의 머리에는 흰 ‘비단너울’이 들씌워져있었다. 우리의 결혼을 축복해주기라도 하듯 하늘이 내려준 흰 눈이였다. “야, 곱다야. 오늘은 새색시가 흰 너울을 썼구만.”  “이런 눈은 30년에나 한번 내릴가 말가 하는 눈이라우. 이런 날 시집 오는 색시는 아들딸 쑥쑥 낳구 잘살 거라우.”  예로부터 잔치날에 눈이 오면 색시가 친정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 시집에 마음을 딱 붙이고 잘산다느니 하면서 하객들이 이구동성으로 찬탄하는 소리에 우리의 아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순결한 흰 눈, 그건 안해에게 내려준 예쁜 ‘너울’이였고 우리의 결혼식을 축복하는 하늘의 선물이였다. 이렇게 첫눈을 맞으면서 들뜬 마음으로 장가 들고 시집 간 게 어제일 같은데 벌써 70 고개를 훌쩍 넘어섰다. 그동안 자식들도 모두 장성하여 잇달아 대학문을 나와서 가정을 이루었고 하나 둘 태여난 귀여운 손자, 손녀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으니 우리 량주는 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이 다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런 오늘의 우리를 축복해서 그 때 내려준 선물이였을가. 차마 즈려밟기조차 아쉬울 만큼 하얀 그 날의 첫눈,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 속의 첫눈이였다.
54    그대도 누군가에게 한줄기 빛이였기를 댓글:  조회:721  추천:0  2021-02-04
그대도 누군가에게 한줄기 빛이였기를 주련화 요즘 나는 15년째 이어오고 있던 직장생활을 접고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주택가에 위치한 90여평방메터 되는 1층짜리 집을 임대하여 각종 생활용품과 식품들을 팔고 있는데 쉽게 말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매점이다. 가게는 내가 사는 곳과 걸어서 15분 거리에 위치해있는데 그 거리를 나는 매일이다싶이 유모차에 두살배기 둘째를 앉히고 걸어다닌다. 먼거리도 아닌데 굳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리유를 짚으라면 자주 안아달라고 보채는 딸애를 달랠 수 있을뿐더러 유모차바구니에 도매해온 물건들을 싣고 다닐 수가 있어서이다. 또 한가지 빠뜨릴 수 없는 원인은 바로 내가 원하는 대로 속도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영업이니 출근 때보다 훨씬 자유로울 거라고 부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매상은 꼭 쏟아붓는 정력과 정비례된다는 걸 가게를 경영하면서 알게 되였다.  8시에 문을 열어서 저녁 11시에 문을 닫을 때까지 꼼짝없이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게 이 업종의 룰이다. 다른 가게들을 보면 보통 12시까지 영업을 하지만 아직은 어린 둘째 때문에 너무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할 수가 없어서 11시로 시간을 정하게 되였다.  막로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쉬운 일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오산이다. 수요에 따라 음료수를 박스 채로 옮기고 배달하는 일이 비일비재인가 하면 10전을 가지고 흥정하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과 입씨름을 하고 나면 온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까짓 몇십전을 안 받는다고 병이 나느냐 라며 비꼬는 분들도 있겠지만 소매점 경영이 워낙에 티끌 모아 태산이 되는 벌이라 나 역시 한발작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 돈에서 첫째 학원비에 둘째 간식비까지 나오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도매시장에 가야 할 때면 자리를 비운 사이 고객들이 가게에 들렸다 그냥 가는 게 두려워 유모차를 밀고 20분 되는 거리를 신나게 질주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아마 그 길을 자주 드나드는 분들이라면 한 중년의 녀자가 유모차를 끌고 머리칼을 날리면서 달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봤을 것이라 짐작된다.  다들 알다싶이 소매점은 저렴한 가격으로 남녀로소 불문하고 마음 놓고 소비할 수 있는 곳이거니와 갑질도 가능한 곳이다. 가끔은 내가 햇내기인 줄 알고 그 구멍을 노려 가짜 돈을 쓰러 오는 손님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데서 산 물건을 들고 와서 다짜고짜 물려달라고 어거지를 쓰는 어르신들도 있다. 인간관계가 사람을 이렇게 지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주는 손님들도 있어 그 온정에 눈시울이 뜨거워난 적도 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공유하려 한다.   첫번째 이야기 필요할 때마다 나는 가끔씩 20분 거리에 있는 시장에 가서 물건을 도매해온다. 가게에 나 혼자뿐인지라 유모차에 딸애를 앉히고 차바구니에 물건을 싣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그 날도 시장에서 찐빵과 국수를 도매해서 유모차 바구니에 실었다. 다른 때 같으면 쉼없이 쫑알거렸을 딸애가 그 날 따라 웬지 너무 조용했다.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딸애는 혼곤히 잠이 들어있었다. 유모차 덮개를 내리고 옷을 벗어서 배를 가려주다 어망결에 뒤에 멈춰서있는 검은 승용차 한대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길은 좁고 그 시간이였으면 출근길일 수도 있는데 승용차 운전사는 그대로 멈춰선 채 유모차를 끌고 가던 생면부지의 한 녀성을 위해 자신의 보귀한 시간을 할애해주었던 것이다.   낯선 사람의 작은 배려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였다. 고개를 살짝 내려 고마움을 전하고 나서 나는 갈길을 재촉했다. 그 날 따라 해빛이 유난히 따스했던 거로 기억된다.   두번째 이야기 몇년전, 워이신이 보급되면서 나는 틈만 나면 모멘트를 훑는 습관이 생겼다. 모멘트에 내 일상을 공유함과 아울러 지인들의 일상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이제 갓 두살을 넘긴 딸애는 아직도 새벽이면 한번씩 깨여나군 했는데 그 날도 이른새벽에 딸애를 달래서 자리에 눕히고 나니 잠이 말끔히 사라졌다. 뒤척거리다가 하는수없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약간 이른 시간대였음에도 모멘트에는 새로운 내용이 떠있었다. 어딘가 낯선 프로필 사진이여서 클릭해보았더니 며칠전에 친구로 추가된 우유배달원이였다.  박스에 가득 담긴 생우유를 배경으로 손가락으로 ‘v’자를 하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있었다. 얼굴이 크게 나온 걸로 보아 셀카임이 분명했다. 사진과 함께 “래일을 위해 분투하자!”라는 문구도 함께 적혀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창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는 시간에 주소 대로 우유를 한병씩 배달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리라. 엘레베터가 있는 아빠트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 얼마나 많은 계단들을 오르내려야 할가? 무심코 그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해보았다. 돌이 갓 지나보이는 작은 꼬마와 환하게 웃는 부부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였다. 한눈에도 무척 행복해보였다. 딸애가 곤히 잠든 시간에 기상해서 딸애의 뺨에 뽀뽀를 해주고 우유박스를 들고 아빠트단지 사이를 누비면서 우유를 배달하고 있을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날씨가 춥든 덥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견지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사진 속의 저 귀여운 꼬마 때문이였겠지? 딸애가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자세를 바꿔 누웠다. 배까지 내려온 이불을 꼼꼼히 여며주느라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진다. 말도 잘 번지지 못하지만 언제나 힘이 되여주고 날개가 되여주는 딸애의 존재로 또 활기찬 하루를 열어갈 힘이 생긴다.  그래 분투, 바로 그거야. 머리 속에 우유배달원의 모멘트 내용을 되새기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면목을 잘 모르는 사이지만 누군가로부터 기운을 받는 이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세번째 이야기 그 날도 거의 11시가 되는 시간에 가게일을 마감하고 나서 가로등 불빛을 온몸에 받으며 귀가하는 중이였다. 유모차에 앉은 딸애는 마냥 신나서 〈세상에서 엄마가 좋아〉라는 노래를 요청해왔다. 차량과 행인들이 한적해진 거리에서 발자국소리와 노래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면서 울려퍼져나갔다. 엄마가 되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더니 틀린 말이 아닌가 보다. 거리에서 고성방가를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을 언제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문득 부패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기에 고개를 들었더니 쓰레기회수가 한창이였다. 한 중년남자가 아빠트단지 생활쓰레기 박스를 한곳에 모아놓고 쓰레기차에 싣고 있는 중이였다. 아마도 역한 냄새 때문에 이 늦은 시간대를 선택한 모양이다. 바로 그 때, 철 없는 딸애가 쫑알거렸다. “엄마, 냄새가 너무 고약해.” 다섯개나 되는 아빠트단지의 생활쓰레기를 한곳에 모아놓았으니 그 냄새가 코를 싸쥐게 하는 건 당연한 일이였다. 에돌아가려고 유모차바퀴를 돌리는데 중년남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상통화요청이였다.  줄느런하게 널려져있는 쓰레기통들이 화면에 잡히는 게 두려웠던지 남자는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밤에 낯선 이의 통화내용을 엿듣고저 했던 건 아니고 다만 거리가 한산해서 본의 아니게 그 통화내용이 내 귀에 전해졌던 것뿐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아빠, 언제 와요?” 애된 목소리로 보아 아마 딸애랑 비슷한 나이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였다.  “아빠 인차 갈게. 일이 거의 마무리되거든.” “올 때 잊지 말고 막대사탕 사와요.” “그럼, 꼭 사갈게.” 이어 중년녀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일찍 들어와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알았어, 인차 갈게.” “아직도 안 끝난겨?” 이어 석쉼한 로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끝나니 어머님 먼저 쉬세요.” 중년남자는 일부러 톤을 높여 명랑하게 대답했다. 수백개가 되는 쓰레기통을 보면서 한숨을 짓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문외한인 내가 어림짐작해도 한시간은 더 이어져야 할 작업량이였다. 통화를 끝내고 쓰레기통을 나르는 중년남자의 손놀림이 분명 빨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한테 보이기 싫은 쓰레기더미가 나에게도 분명히 있을 터였다. 다만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기에 아닌 척을 하면서 모지름을 쓰고 있었을 뿐이였다. 곰곰히 사고하고 나서 나나 그 중년남자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중의 일원이라는 결론을 정리해냈다. ‘힘내세요.’ 나는 속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에게 하는 속삭임이기도 했다. 문득 이 시간대에 유모차를 끌고 나타난 생면부지의 중년녀인이 그 남자의 눈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가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이 시각에 왜 유모차를 끌고 그 자리에 나타났는지 그 남자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역시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족을 위해 자식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음을… 사람은 때론 나를 닮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를 받게 되니까. 사랑이라고 쓰기에는 버겁고 관심이라고 쓰기에는 무언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마냥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들, 나는 그것들을 위로라고 부르고 싶다.   이 세상에는 태양처럼 이글거리지도, 열렬하지도 않지만 조용히 한줄기 빛으로 다가와 우리들을 따스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위로가 되여주는 것들이 있어서 참 고마운 세상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텅텅 비여있는 가슴을 채우려면 얼마 만큼의 사랑이 필요한가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금이면 돼, 그게 정녕 위로라는 이름으로 다가갈 수만 있다면…”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작은 한줄기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빛이 넘치는 따스한 세상을 꿈꾼다.  
53    《로년세계》2021년 1호 댓글:  조회:1450  추천:0  2020-12-29
52    외할머니가 가신 길은... 댓글:  조회:893  추천:0  2020-12-29
외할머니가 가신 길은... 류정남 한마디로 외할머니는 밭에서, 들에서 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80세 고령에 이르러서도 외할머니는 5, 6리 떨어진 자류지 근처에 작은 괭이로 한뙈기, 두뙈기 밭을 일구어 감자를 심고 옥수수를 심어서는 가을이 되면 그것들을 등짐으로 집으로 거두어들이군 하였다. 온 집 식구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외할머니는 몰래 작은 호미를 등뒤에 감추어갖고는 대문밖으로 가만가만 빠져나가군 하였다. 후에 우리 집에서는 마을과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를 도거리 맡았는데 할머니는 나무를 꺾고 풀뿌리를 뒤엎어 자그마한 뙈기밭을 일구었다. 그리고 가을에 몇 마대 되는 감자와 곡식들을 거두어들여 우리 집 식구들을 무척 놀래우기도 하였다. 밭에서 집으로 올 때면 언제나 마른 쑥단이나 나무가지단을 등짐으로 지고 돌아오는데 동네사람들이 그걸 보고 마을에 들어서면서 “네 할머니가 나무짐을 지고 집으로 오고 있더라.”라고 일러주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싫은 마중을 가야만 하였다. 밭일이 없는 계절이면 외할머니는 또 동네를 돌면서 골탄도 줏고 나무가지도 주어오고 푼돈이 될 만한 페품들은 다 주어다 집마당에 모아놓군 하였다. 우리 외손주들은 그러는 외할머니 때문에 동네가 창피해서 못살겠다고 그냥 징징거렸다. 그렇다고 몇십년 동안 고집스레 쌓아온 습성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가 없었다. 부지런해서였는지 그 때까지 외할머니는 고뿔 한번 걸리지 않고 건강하였다. 이대로라면 외할머니는 100세까지는 쉽게 앉을 수 있을 거라고 동네사람들도 모두 입을 모았다. 평생을 사위집에 얹혀살아서 그랬던지 외할머니는 집식구들과 큰소리 한번 치지 않았고 음식타발 한마디 안했다. 주면 주는 대로, 입히면 입히는 대로 살아가는 데 굳어져버렸다. 다만 한가지에서만은 외할머니를 이기지도 돌려세우지도 못했는데 바로 밭에서든 울안에서든 일을 하는 할머니를 끌어들이는 일이였다. 그러던 외할머니가 86세 되던 해에 남들 모두가 동경하는 한국행을 하게 되였다. 서울 KBS 사회교육방송국을 통해 리별한 지 50년도 넘는 두 아들을 만나러 향항을 거쳐 비행기편으로 서울로 가게 되였던 것이다. 50여년전에 엄마를 유복자로 남겨놓고 박명한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몇해 뒤 한국에 있는 엄마의 삼촌이 중국에 찾아와서 조카 둘을 데려가게 되였는데 그들이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 때 큰외삼촌은 11살, 둘째외삼촌은 9살이였다. 11살밖에 안되는 나이에 엄마와 젖먹이 녀동생과 갈라지게 된 그 때의 그 리별이 얼마나 가슴 아프게 남았으면 50여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눈물을 휘뿌리면서 생리별을 했던 그 곳—흑룡강 림구현소재지 동쪽으로 10여리 떨어진 작은 간이역의 이름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가? 그 역에서 ‘ㅅ’자 모양으로 갈라진 어느 수레길로 얼마간 올라가게 되면 오른쪽에 나무 몇그루가 서있고 그 아래에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데 산소 앞에 이름을 적은 나무패쪽을 묻었다는 그림지도까지 그려서 보낸 게 아니겠는가? 생살점을 뜯기는 듯한 고통 속에서 두 자식을 그렇게 보내야만 했으니 일자무식이였던 외할머니였건만 그 때로부터 두 아들이 살고 있는 고장의 이름만은 가슴 속 깊은 곳에 꼭 새겨두고 있었다. “강원도 울진군 근남면 내살리…” 덕분에 세월이 많이 흘러간 뒤에도 방송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외삼촌 둘을 찾게 되였다. 외삼촌들이 기어이 엄마를 생전에 곁으로 모셔가겠다면서 비행기티켓까지 보내왔다.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였다. 동네 늙은이들은 우리 집 식구들을 만날 때마다 할머니가 이제 한국에 가게 되면 평생 상상도 못할 호강을 누릴 것이라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이제 한국에 갔다 오면 단번에 벼락부자가 될지도 모른다면서 대놓고 부러워하는 동네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 식구들의 기분은 그 때문에 많이 가라앉았다. 외할머니가 생전에 50여년 동안 갈라져있던 두 친아들을 만나게 된다니 어떻게라도 지지해줘야겠다만 외할머니를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내고 나면 우리 집 식구들과는 영원한 리별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에서였다. 하지만 엄마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한국에 갔다 오면 우리 집도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속구구가 없는 건 아니였다. 결국 우리 손주들까지 눈물을 휘뿌리면서 외할머니를 떠나보내게 되였다. 목단강역까지 배웅하면서 떠나기 전 기차에 함께 올라 마지막으로 보게 될지도 모를 외할머니를 안고 울면서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한국에 가서 외할머니 볼 수 있다”고 뻔한 거짓말 같은 위로의 말만을 해주었을 뿐이였다. 우리들 눈에서는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한국이란 곳이 얼마나 먼지 모르는 양 외할머니는 눈물도 말라버렸는지 멍한 표정뿐이였다. 이렇게 고령의 외할머니는 고역 같은 려행길을 시작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커다란 약가방 두개에다 운신이 불편한 외할머니를 부축해 가면서 엄마도 남은 인생의 기억에서 영영 잊혀지지 않을 고역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로서는 현대화 도시라 불리는 향항에 도착하여 엘레베터에서만 몇번이나 짐과 함께 뒹굴었는가 하면 고급호텔에 들어서는 날 밤엔 금방 숨이 넘어갈듯이 인사불성이 된 외할머니를 안고 소리내여 통곡을 하기까지 했었다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한국 인천에 도착하여 두 아들을 만나고 나서도 할머니는 그 뒤로 사흘 동안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는 외할머니를 두 외삼촌한테 모셔다 놓고 석달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과연 예견했던 대로 그것이 또 모녀간의 생리별이 되여버리고 말았다. 인천시교와 강원도 산골에서 살고 있는 두 외삼촌네도 가정생활이 썩 좋은 편은 아니였다. 뾰족하게 출세한 자식 하나 없었고 생활난으로 장가 못 간 벙어리아들까지 있다보니 외삼촌네도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런데도 생전에 마지막길을 편히 보내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고집을 세우면서 외할머니를 곁에 모셔간 외삼촌의 효성이 눈물겨웠다. 그렇게 갖은 애로 끝에 두 아들과 상봉을 하게 된 외할머니였지만 불행하게도 3년도 채 앉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화장실 변기에 앉을 줄도 몰라서 실수도 여러번 저질렀다. 그런데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니 일밭으로 가야 한다며 밖으로 나가겠다고 란리법석을 피웠다고 한다. 작은 골목 동네를 돌면서 종이곽도 줏고 남들이 버리는 페물도 집으로 끌어들여서는 모아두었다가 금란이네(큰외손녀)를 준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러는 외할머니를 지키는 게 외삼촌과 외숙모의 하루 일과로 돼버렸다. 그렇게 외할머니는 매일 어디서 주어온 것인지도 모르는 작은 호미를 등뒤에 감추고서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일밭으로 찾아간다고 란리를 부렸는가 하면 한동네 앞마을에 살았던 금란이네 집으로 찾아간다고 길에 나섰다가는 집을 찾지 못해 온종일 밖에서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는 밭으로 간다고 나간 길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외할머니의 손에는 작은 호미가 들려있었고 품속 호주머니에는 우리 집 여덟 식구들이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한장이 들어있었다. 이처럼 외할머니가 가신 길은 천당길도 아니였고 50여년간 가슴 속에 깊이 남겨진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따뜻한 길도 아니였다. 한국행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주름지고 메마른 외할머니 가슴 속에는 아마도 새로운 아픈 상처를 빚어가는 오불꼬불한 오솔길이 뻗어나갔을지도 모른다. 만약 외할머니한테 그냥 호미 한자루를 쥐여주면서 매일 일밭으로 나가라고 하였더라면, 동네사람들 보기에 구차할망정 실컷 동네를 돌면서 골탄이나 페품을 줏고 쑥나무단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더라면 외할머니는 긍정코 무병장수하게 100세를 넘겨 살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외할머니를 잘못 떠나보낸 것이였다. 그 길이 외할머니의 모든 고생과 뼈저린 지난 력사를 깡그리 지워줄, 채색꽃보라가 깔린 ‘천당’으로 향하는 길일 거라 착각한 게 우리의 잘못이였다. 지금도 내 꿈속에는 허리가 구부정한 외할머니가 저 먼 언덕길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뒤모습이 나타나군 한다. 외할머니의 쭈글쭈글 주름진 손에는 날이 다스러진 작은 호미가 들려있었고 활등처럼 구부정한 등에는 코를 찌르는 쑥향기가 짙게 풍기는 나무단이 지워져있었다. 아, 외할머니가 가시는 길은 초라할망정 신근한 로동의 길이였다. 어쩌면 그게 할머니의 숙명이였을지도 모른다. 《로년세계》2021년 1호
51    아버지의 축복 댓글:  조회:853  추천:0  2020-12-29
아버지의 축복 김해연 얼마전, 우연히 워이신계정에서 《금희와 은희의 운명》이라는 조선영화를 보게 되였다. 부모님 세대한테는 감회가 남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츰 가족채팅방을 열고 영화 링크를 보냈다. 그랬더니 바로 어머니한테서 답장이 왔다. “오래전의 영화네. 이 영화의 주제곡 〈자장가〉를 부르며 연이를 재웠었는데.” 연이는 나보다 8살 아래인 녀동생이다. 나는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보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자장가를 더 많이 듣고 자랐다. 아버지는 기분 좋은 날이거나 한잔하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영낙없이 이 〈자장가〉를 불렀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이 노래의 제목이 〈자장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축복〉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어린시절, 나는 아버지가 부르는 자장가, 녀동생은 어머니가 부르는 자장가를 들으면서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이 행복한 동년을 보냈다. 아버지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첫딸인 나를 보았다. 요즘 놓고 말하면 대학을 갓 졸업한 애숭이나 다름없는 나이에 말이다. 내가 열살이 되였을 무렵,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김서기가 큰딸을 안고 다니는 건 못 봤는데 작은딸은 늘 품에 안고 다니네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릴 적에는 멋을 몰라 이런 말을 듣고도 개의치 않았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보니 살짝 심술이 났다. ‘아버지는 내가 예쁘지 않았던 걸가? 왜서 동생만 안아주고 나는 안아주지 않았지?’ 나중에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면서 그 의혹이 풀렸다. “어느 젊은이는 로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제 자식 곱다고 끌어안구 있는 게 보기 구차하더라.” 옛날에는 젊은이들이 동네 어르신들이 계시는 자리에서 자기 자식만 안고 있으면 례의가 없는 집안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 고와도 웃어른들이 계시는 자리에서는 티를 낼 수 없다보니 그 시대의 젊은 아버지들은 자연스레 자식에 대한 애정표현이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들의 시선이 신경 씌여서 자기 자식도 마음껏 안아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그래서 아버지는 집에만 오시면 나한테 자장가를 불러주셨고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가문의 장손으로 태여난 아버지는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할 만치 우수하였다. 지난 세기 60년대초에 변방의 오지마을에서 연변1중에 진학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전 마을을 들썽케 하는 큰 화제거리였다. 그후 사회에 진출하여 나라의 공직자로서 당과 정부를 위한 사업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으며 퇴직한 뒤에도 오래동안 차세대관심위원회 주임직을 맡으면서 정열을 불태웠다. 내가 태여나서 자란 곳은 웃세대부터 아래세대까지 이웃끼리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자그마한 현성이였다. 소학시절에는 아버지의 동창이 나의 선생님이였고 중학교 때에는 아버지를 잘 아는 지인 분이 나의 선생님이였으며 고중에 올라가니 아버지를 배워주셨던 분이 나의 교장선생님이였다. 그러다보니 나는 내 이름보다 ‘누구의 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워낙 우수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보니 항상 선생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가 봐, 부모님한테 실망을 안겨드릴가 봐 전전긍긍할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자식들한테 특히 엄격했는데 칭찬에 린색했던지라 나와 동생은 하나같이 아버지에 대해 경외지심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는 출장이 잦았던지라 나한테 편지를 자주 써주었다. 물론 공부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였고 신문에서 오려낸 인물전기나 전국모범학생 사적에 관한 문장들도 가끔씩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장녀인 만큼 집안의 희망이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었다. 하지만 집안의 희망이라는 기대에 걸맞지 않게 나는 평범한 아이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나중에 가정을 이루고 자식까지 보고 나서 어느 날, 용기를 내여 왜 그 때 우리를 그렇게 엄하게 다스렸느냐고 넌지시 아버지한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가 그 때 그렇게 엄했냐? 하긴 그 때야 엄하게 다스리는 게 가장 효과적인 교육인 줄 알았지.” 하며 게면쩍게 웃으셨다. 아버지는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우리에게 책을 선물로 가져다주었다. 중국고전명작부터 세계명작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사다가 우리의 책꽂이에 꽂아놓았다. 명작을 리해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핍박’에 못이겨 할수없이 손이 가는 대로 펼쳐보게 되였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그 명작들을 다시 꺼내 읽었더니 책 내용뿐만 아니라 그 때 그 시절의 추억까지 고스란히 떠올라 참으로 행복하고 위로가 되였다. 동생 연이는 나와 달리 공부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특히 악기에 남다른 흥미를 보였다.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 손풍금이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 무렵 손풍금 하나를 장만하는 게 동생의 가장 큰 소원이였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사는 자그마한 현성에서는 손풍금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였다. 마침 그 때 아버지가 항주에 출장을 가게 되였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면서 손풍금 얘기를 슬쩍 내비쳤다. 얼마후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품에는 작은 손풍금이 안겨있었다. 덕분에 동생은 나중에 학교의 각종 행사에서 손풍금 독주자로 활약하였고 가문에 희사가 있을 때마다 신나는 연주를 하여 가족들의 흥을 돋우어주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칭찬 대신 “그만큼 배웠으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며 담담하게 얘기할 뿐이였다. 나는 1980년대 후반에 국가장학금으로 일본에 류학 간 외삼촌의 덕분에 남들보다 좀 일찍 일본류학의 꿈을 이루게 되였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떠나는 나에게 친히 시까지 써주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건 기대 만큼 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외국 류학길은 결코 생각처럼 록록하지 않았다. 석사공부를 마치고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박사학업을 이어갈 대신 육아의 길을 택했다. 귀여운 손녀딸이 재롱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보다 행복해했던 아버지였지만 적어도 나는 아버지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분명 내가 박사공부를 포기한 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45살에 다시 박사공부를 시작해서 48살에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오래동안 미루었던 숙제를 드디여 바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를 위해서 하는 공부는 아니였지만 나를 집안의 희망으로 떠받들었던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린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이제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였건만 요즘도 아버지로부터 오는 무형의 ‘압력’ 때문에 숨이 막힐 때가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압력’들을 축복으로 받아들여 라태해진 자신을 채찍질하는 지혜를 터득해가는 중이다. 그래서 아직도 아버지 앞에서는 조신하게 처신하는 나지만 이것이 결코 싫지는 않다. 이젠 칠십 고개를 넘어 금혼까지 맞이한 아버지는 성격도 많이 유순해진듯 싶다. 동영상으로 손군들의 얼굴만 보아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그토록 칭찬에 린색하던 분이 손군들의 재주자랑에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동생 연이가 〈자장가〉를 한번 더 듣고 싶다고 하니 부모님께서 동영상을 찍어 가족채팅방에 올려주었다. 어머니가 1절을, 아버지가 2절을 불러서 말이다 동영상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가 부르는 〈자장가〉에는 축복과 희망이 녹아있고 아버지의 엄한 단속 뒤에는 무한한 사랑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로년세계》2021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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