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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되는 것(최해선) 댓글:  조회:1768  추천:0  2019-11-20
[대림칼럼] 1    고양이 세마리와 함께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동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동물들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게 되고 동물들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였다.   그런 나는 처음부터 고양이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 일이다. 동네 이웃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어쩌다 우리집에 들어온적이 있었다. 고양이의 귀여운 모습이 탐이 나서 몰래 키우려는 마음을 품게 되였지만 그 마음도 잠간이였다. 고양이의 습성상 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얄미워서 이불장위에 집어던졌던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고양이에 대해서 아는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강아지는 충신, 고양이는 간신”이라는 세속의 고정관념만 믿고 있었던 터라 누군가가 강아지를 좋아하느냐 고양이를 좋아하느냐고 질문하면 관례적으로 강아지를 좋아하고 고양이는 싫다고 대답했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나는 종종 아무런 리유없이 고양이에게 가했던 폭행을 떠올렸고 그럴때마다 자신의 내면속에 잠재되여있는 폭력성과 잔인함에 몸서리쳤고 오래동안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였다.     둘째 고양이 쿠로와 함께.   그 죄책감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게 된 것은 고양이를 입양하고나서부터였다.   10년전의 늦가을 천진의 어느 상가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새끼고양이를 줏는 계기로 얼떨결에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되였고 이 작은 계기의 불씨가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번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후로 나는 두마리의 길고양이를 더 입양했고 한국으로 이주할 때 까다로운 반려동물 해외반입절차도 마다하고 몇개월의 시간과 거금을 들여 세마리를 모두 데려오게 되였다.   어떤이는 극성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이것은 나의 한 생명에 대한 책임이자 가족에 대한 사랑이였다.   한국의 저명한 동물행동학자인 최재천 교수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라는 책의 서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게는 소박한 신념이 하나 있습니다. ‘알면 사랑한다’는 믿음입니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미워하고 시기한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돌에 맞아 싼 사람도 왜 그런 일을 저질러야만 했는지를 알고 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 심성입니다. 동물들이 사는 모습을 알면 알수록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은 물론 우리 스스로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믿음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천번만번 공감이 되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주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쉽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쉽게 싫어하고 배척한다. 이런 서뿌른 판단이 오해와 편견을 초래하고 혐오를 생산하는 것이다. 2   한국에 정착한지 어언 5년이 지났고, 여기서 생활하면서 한가지 발견한것은 한국사회와 중국동포사회는 서로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였다.   개인적으로 경악을 금지 못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2018년 10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이였다. 게임 아이디가 한자라는 이유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가해자를 조선족으로 추측하고 사이버상의 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경찰이 중국동포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은 국적을 취득한 조선족이거나 부모중에 조선족 출신이 있을 것이라고 근거없는 댓글을 람발했다. 게다가 가해자의 생김마저 “조선족스럽다”라는 것이다. 그저 가해자는 조선족이여야만 했었고 이런 잔인한 수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절대 한국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조선족 전체를 범죄자로 몰아갔다. 그후 진상이 규명되자 조선족을 비방했던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듯이 순간에 사라져 버렸지만 중국동포들의 마음은 상당히 불편했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 이렇듯 한국사회에서 중국동포들은 범죄자와 일탈자로 락인이 찍혀버렸다.     2007년 로터리 장학재단 주최 효고현(兵庫県) 아와지시(淡路市)관광 중 시즈노사토 공원(静の里公園)에서.   이 사건을 접했을 때 가장 소름이 돋았던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시기의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 사건과 오버랩된 것이였다. 1923년,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재난으로 인한 사회불안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근거없는 랑설이 확대되면서 6천여명의 조선인이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정말로 소름 끼치게 공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한편, 내 머리속에는 만약 중국동포에 대해 그 이주력사와 한국으로의 재이주과정을 잘 알고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조선족 혐오”가 사회적으로 문제화되었을가 하는 의문이 맴돌았다.   많은 중국 동포들이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한국의 88올림픽이후 급속하게 팽창하는 재개발위주 경제발전과 중국의 개혁개방시기 력동력의 자유이동이 적절하게 잘 맞물렸기 때문이다. 한국은 값싸고 언어가 통하는 안정적인 노동력이 필요했고 다수의 농촌출신에 생산수단과 기술력을 갖고 있지 않는 중국 동포로서는 코리안 드림이 경제적 부를 꿈꿀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오랜 단절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동포 로동자들은 바로 한국의 산업전선에 투입되였고 상대적으로 한국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3D업종을 도맡아 종사하게 되였다. 어쩌면 중국동포들의 한국에서의 신분은 동포보다는 외국인로동자가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현시대의 가치관은 철저하게 인간의 가치를 생산성으로만 판단한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진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저성장, 저출산, 청년 일자리 문제, 로인 빈곤문제 등 일련의 사회문제들은 아직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 이런 미래 불투명의 불안과 생존권마저 장담할 수 없는 사회적 불안은 급기야 중국동포들이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인식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재중동포들이 한국에서 정착해서 살아가는 것은 한국의 자원과 세금을 축내는 존재로 알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온갖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해오다 어느날 갑자기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존재로 전락했으니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재한 중국동포들은 억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재한 중국동포들의 현주소에 대해 조금만 더 잘 알고 있었더라면 어느 한 개인의 잘못으로 전체 중국동포들을 평가하거나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일이 없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   사실 나는 중국동포 4세이다. 이주력사가 다소 빠른 집안이다보니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중국에서 태어났다.   나는 새중국에서 태여나고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국적을 부여 받았기에 근대 국민국가적인 나의 신분은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인이고 반도에 루트를 갖고 있는 한민족이다.   중국동포들은 광복후 중국의 복잡한 사회변형속에서 자신들의 루트를 제대로 알아갈 기회를 잃고 지금까지 오게 되였다. 필자도 한국의 력사와 지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배운적이 없었으며 배운건 고등학교때 세계사 교과서에 실린 3페이지 분량의 ‘3.1운동’이 전부였다.   그나마 조선에 대해서 알게 된것은 과외독서로 따라오는 이야기책, 집안 어른들의 구술, 소신있고 량심적인 력사선생님들의 번외가르침 덕분이였다. 어릴 때부터 조부모와 부모로부터 가족의 이주력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전해들었지만 그것만으로 반도에 대해 애착이 생기기엔 어딘가 조금 부족했다.   그러던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몸소 겪고 단편적인 정보들을 지속적으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점점 이 땅에 대해 애착이 생기기 시작했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치 한국이라는 선조의 나라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중국의 동북처럼 뼈를 저리는 추위도 없고 일본 렬도처럼 찜통과 같은 무더위도 없는 한국의 쾌적한 날씨는 최고가 아닐 수 없다. ”아름다운 강산”이란 말이 그저 국가권력에 강요된 찬양의 말이 아니었던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풍수지리가 좋은 곳에 선견지명의 조상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특히 옛사람들의 문화유적을 둘러보고 그들의 삶의 자취를 하나하나 알아갈 때면 슬기로운 선조들의 모습과 깊은 문화에 존경심마저 생긴다. 4   올해의 추석연휴 마지막 날에 고궁을 다녀왔다. 작년에는 경복궁과 덕수궁을 다녀왔기에 이번엔 종묘와 창덕궁을 다녀왔다.   종묘는 경복궁이나 창덕궁, 덕수궁처럼 티켓만 구매하면 바로 구경할 수 있는 개방된 곳이 아니다. 사전에 예약을 해야 구경할 수 있고 지켜야 할 에티켓도 많다. 례를 들어 종묘의 정문 외대문안에 들어서면 돌로 깔아놓은 길이 쭉 뻗어있다. 길은 세갈래로 나뉘어져있고 가운데 길이 가장 높고 량쪽으로는 살짝 경사져있다. 가운데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신로라고 한다. 신로의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이고 왼쪽이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때문에 종묘에 가서 아무길이나 막 걸으면 안된다.     2003년9월 경복궁에서.   종묘는 조선시대의 국가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태조임금이 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한양으로 천도한후 가장 먼저 만든 것이 경북궁도 창덕궁도 아닌 종묘와 사직이라고 한다.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최고의 존엄한 사당이며 조선왕조의 정신과 력사가 숨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근간이 유교였고 유교의 핵심이 효와 충인지라 종묘의 의미는 백성들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전파하면서 권력과 통치를 강화했다.   신을 모신 곳이기도 하기에 단청을 사용하지 않고 최대한 색상을 절제하여 다른 궁궐에 비해 보다 단조롭고 심플하면서 근엄하고 고귀한 기품이 흐르도록 지어졌다.   정문으로 들어갔을 때 눈에 띄는 것은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 사각형 못이다. 이는 천원지방의 원리를 따른 것으로 사각형 못은 땅을, 둥근 섬은 하늘을 의미하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 둥근 섬에는 향나무가 심어져있고, 종묘의 특성상 못에는 물고기도 꽃도 없다.   종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례는 철저하게 남성중심으로 진행되고 제사 음식 장만에서부터 제관집사, 악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성들이 담당했고 녀성의 출입을 금기시했다.   이런 종묘가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해인사의 장경판전, 석굴암과 함께 한국의 최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5월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선정되였다. 다른 궁궐은 임금이 살지 않아서 박제된 력사라고도 하지만 종묘에는 임금의 영혼이 깃들어있고 예전과 같이 제사 의식이 진행되고 있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책정될 때 산 력사가 진행된다는 점이 크게 평가받았다고 한다.     2018년 10월 고궁나들이중 북촌에서.   종묘를 구경을 하고 나니, 한층 더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하고 조선왕조의 희로애락이 느껴졌고 그들의 정신에 대해서 리해하는 뜻깊은 앎의 시간이였던 것 같아서 뿌듯했다. 지금까지 집에서 지내던 전통이라고 믿고 왔던 제사문화와 비교도 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였다. 또한 여기서 생활하는 시민으로서의 주체성도 뚜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5   이렇듯 알게 되면 더 알고 싶어지고 알면 좋아하는 마음이 싹트고 존경심과 긍지감이 생기고 사랑의 마음이 생긴다. 알고 리해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립장에 설줄 안다는 것을 의미하며 서로의 소통에 도움이 되고 인식을 함께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아직 많은 중국동포들은 한국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 찬란한 문화를 통해 자긍심을 느끼지 못한다. 한국인들도 중국동포들의 이주력사와 형성, 한국으로의 재이주에 대해서 모르니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느끼고 서로 공감하기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조금만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편견과 차별이 없이 감정적 대립이 없이 평화롭게 공생할 수 있지 않았을가. 평화롭게 공생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상대방의 차이에 대해 인정하고 알고자 노력한다는 것이 아닐가.   앞으로 서로에게 더 많은 앎의 기회들이 주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될테니까.     최해선 약력: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일본 에히메대학 사회학 석사, 일본 칸세이가꾸인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수료, 현재 한국 모 IT회사 해외마케팅 팀장.   동북아신문
60    우리는 무엇을 물려줘야 하나?(김동수) 댓글:  조회:1549  추천:0  2019-11-06
[두만강칼럼]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70년전 모택동 주석은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을 전세계에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중화민족 대가정의 당당한 성원으로서 중국 조선족은 새 중국의 창립을 위하여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모택동동지께서 말씀하다 싶이 오성붉은기에는 조선민족의 붉은 피도 슴배여있다. 중국 조선족은 당의 민족정책의 해빛 아래 전국의 56개 민족 가운데서 우수한 소수민족이라는 긍지와 자랑을 안고 뿌듯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우리 민족 앞에는 많은 위기와 넘어야 할 과제들이 불거져 학자나 지성인들의 관심을 자아내고 있다. 속담에 “나라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민족의 평범한 일원으로서 후대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남겨주고 물려줄 것인가를 늘 심사숙고해보았다. 며칠전 북경에 갔다가 연길로 돌아오는 고속렬차에서 연변 유람을 온다는 몇몇 한족들과 동석하게 되였다. 중국 조선족에 대하여 얼마나 아느냐고 물었더니 첫마디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춘다는 것이였다. 옳바로 맞추었다고 내가 엄지손가락을 내흔들었더니 그 밖에도 랭면과 개고기를 즐겨 먹으며 녀성들은 현숙하고 깨끗하며 남성들은 술을 잘 마시고 축구를 잘한다고 덧붙였다. 참으로 맞는 말이였다. 조선족의 집거지인 연변은 한때 교육의 고향, 가무의 고향, 축구의 고향으로 전국적으로 이름 났고 그 위망이 대단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차분히 랭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런 이야기도 이미 한물 간 어쩌면 ‘낡은 터에서 이밥 먹던 일’로 되지 않았나 하는 위구심과 함께 심각한 고민과 사색에 빠지게 된다.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형제 민족들도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상전벽해와도 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고 축구를 잘하는 것은 이제는 더는 우리만의 ‘대명사’가 아니다. 무엇을 더 알고 있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즘즉해지더니 나더러 말해보라고 반문하는 것이였다. 나는 당신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는데 바로 새 중국의 창립을 위해 피 흘린 조선족의 중대한 공헌이라고 말머리를 떼고는 흑룡강성 목단강시 강변 공원에 세워져있는 ‘8녀투강’(八女投江)조각군상에 깃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38년 10월, 항일련군 제5군 1사의 8명 녀전사들은 적들을 유인하고는 우쑤훈하(乌斯浑河)에 뛰여들어 놈들의 기관총과 박격포의 사격으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중 안순복과 리봉선은 조선족이다. 8명중에 2명이면 비례로 25%를 점한다. 연변지역에서는 항일전쟁시기 3301명(그중 조선족 3204명, 97%), 해방전쟁시기 4313명(그중 조선족 3713명, 86%), 항미원조전쟁시기 6981명(그중 98%는 조선족)의 혁명렬사가 배출되였다. 그 가운데서 조선족 항일 녀렬사가 366명이다.(《북방민족》 2017년 제7기) 하경지의 “산마다 진달래, 촌마다 렬사비”라는 시구는 조선족혁명력사의 축도이다. 나의 말에 일행은 조선족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료해하게 되였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각설하고 새 중국의 창립을 위하여 안순복, 리봉선을 비롯한 조선족의 수많은 우수한 열혈청년들은 자기의 귀중한 청춘과 생명을 다 바쳐 중국혁명력사에 길이 아로새길 빛나는 서사시를 엮었다. 선렬들의 초심은 중국공산당의 령도 아래 나라의 해방과 민족의 독립을 이룩하는 것이였다면 새로운 시대 우리 민족의 초심은 인민의 행복을 마련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공헌하고 우수하고 지혜로운 민족으로 영원히 남는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상하가 협심하여 우리 민족의 우수한 고급인재들을 많이 육성해내고 우량한 민족전통과 언어, 문자를 굳건히 지켜나가야 한다. 더우기는 새 중국의 창립을 위해 쌓아올린 우리 민족 선인들의 혁명정신과 불후의 업적을 교과서화(教科书化)하여 세세대대 물려주고 중화대지에 널리 알리고 고양하여야 한다고 나름 대로 생각한다. “효력은 당대에 있고 리익은 천추에 있다”(功在当代,利在千秋). 길림신문
59    ‘쓰러’지는 모교를 보면서 댓글:  조회:1971  추천:0  2019-10-22
모동필 요즘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교가 ‘건재’해있다는 것이 커다란 자랑거리나 위안이 되는 세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얼마전에 위챗으로 전송된 모교청사 철거 영상을 보았다. 학생수가 줄어든 관계로 D시의 초중을 고중과 합병하였기에 초중건물이 옛터에서 속절없이 ‘쓰러’지는 영상이였다.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글소리 대신 중장비의 거친 잡음이 교정을 때리는 광경을 보면서 수많은 감회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올랐다. 오늘에는 무너지는 모교를 뜬눈으로 바라보면서 무가내한 마음을 달래고 있다면 래일에는 또 어떤 력사적 실존들이 소실되고 무너지고 파괴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스러운 마음을 집어뜯어야 할지 걱정이 퍼그나 크다. 많은 조선족들의 ‘모교’가 ‘페허’로 남거나 ‘페교’돼버리는 비감스러운 일은 꽤 이미전부터 시작됐다. 상대적으로 편벽한 지역으로부터 시작된 페교나 합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선족 집거지역에서까지 차차 ‘류행’처럼 퍼지고 있다. 그나마 ‘모교’가 페허로 남아서라도 물리적 실체를 ‘뽐내’는 것이 어쩌면 불행중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한 것 같다. 나의 모교처럼 실체가 사라져버린다면 그 상실감은 형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요즘은 ‘모교’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것들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일들이 다발적으로 감지되고 있어 이마살이 찌프러질 때가 많다. 그 어려운 이민과 개척의 력사에서도 교육을 틀어쥐고 ‘서전서숙’이나 ‘명동학교’같은 교육시설을 설립했던 이주민의 후예들은 현재 해내외로 랭면발처럼 쭉쭉 뻗어 대륙 곳곳에, 지구촌 방방곡곡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국내의 여러 대도시에서 ‘주말학교’같은 민족교육시스템이 가동된 것은 다소 위안을 얻는 일이긴 하지만 새로운 정착지에서 전일제 조선족학교와 같은 관립교육기구를 설립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상대적으로 편벽한 지역의 기초교육에서부터 시작된 조선족교육체계의 점층적인 붕괴 위기는 조선족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국내 여러 지역의 농촌공동화 현상을 상기해볼 때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엇비슷한 것 아닌가 싶다. “고된 농사일을 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하였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꽤 많이 들은 적 있다. 어느 시기,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나’의 삶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수많은 청년들과 로동력이 ‘고향’을 등지고 떠난 궁극적인 책임도 ‘이민자’의 몫일 수 밖에 없다.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킨다”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수많은 ‘자식’들이 ‘고향’을 떠나간 것은 보다 큰 세상에서 자아가치 실현을 위한 ‘개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내 대도시에 정착한 분들의 아이들은 부득불 한어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이들이 우리 민족의 언어문자를 비롯하여 민족 정서나 전통, 문화 등에서 선대들과 일치된 기억의 텍스트를 가질 것을 요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한어권에서 생활해온 조선족 아이들은 중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함에 있어서 여러 방면에서 부모세대보다 우세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타민족과 통혼하는 것도 상례적인 현실일 수 밖에 없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한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처한 위기의 본질과 원인을 숙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규명하지 못한다고 할 때 우리는 더욱 깊은 위기 속으로 스며들면서 결국 소멸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을 외면한 론의는 공허한 소모에 불과하다. 우리의 두 손으로 가꾸어놓은 현재의 삶과 우리의 두 발로 걸어온 발자취들을 면밀하게 되새겨보는 것이 ‘처방’을 기다리는 ‘환자’의 참된 자세나 마음가짐이 아닐가 싶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병’들을 숨김없이 진단해보아야 하는 것은 순리이다. 불편한 진실이라도 똑바로 정시하면서 공론화할 수 있는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언어문자를 비롯한 문화적 ‘동일성’은 ‘하나’로 무어지는 근간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노력을 몰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선족들은 점차 우리 언어문자나 문화생활과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쓰러’지는 ‘모교’를 직시해서 바라봐야 한다. 비록 음산하고 허탈하고 쓸쓸하지만 굳은 마음으로… 길림신문
58    국가급 풍경구와 ‘옥에 티’(황동수) 댓글:  조회:1623  추천:0  2019-10-11
연길 사람이라면 ‘모아산에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아산은 그 산세가 완만하고 험준한 구간이 별로 없어 로인들에게 더없이 안성맞춤한 등산루트이자 유산소운동의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모아산이야말로 연길의 ‘금산이고 은산’인 것 같다. 모아산 삼림공원은 30여년간 수많은 연길사람들이 대를 이어 견지한 식수조림과 지방정부의 드팀없는 ‘봉산육림’ 방침정책의 결실로 1992년 11월에 드디여 국가급 삼림공원으로 전면 승격되였으며 그 후 지속적인 투자건설을 거쳐 ‘국가4A관광풍경구’란 황금빠찌를 달게 되였다. 모아산의 자랑을 한입으로 다 말한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헌데 ‘옥에 티’ 라고 해야 할지 모아산 삼림공원에도 국가급이란 그 명찰을 무색하게 하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한마디로 ‘중점구역’과 ‘일반구역’간의 불균형 현상이 너무 심각하다는 점이다. 모아산 삼림공원 입구 쪽 즉 주봉 입구 주변의 인프라는 국가급에 전혀 손색이 없다. 헌데 공원의 총 부지면적이 1100헥타르라고 할 때 이 ‘중점구역’은 엄연히 모아산 삼림공원의 얼굴이긴 하지만 그 면적은 전체 부지의 10퍼센트에도 못미칠 것이다. 문제는 천여헥타르에 달하는 ‘일반구역’의 인프라가 너무 뒤진다는 점이다. 첫째, ‘일반구역’에는 수년간 괄목할 만한 건설대상이 고작 하나에 그친 것으로 알고 있다. 즉 2008년에 총길이가 7키로메터이고 폭이 2메터인 콘크리트 로반(路基)에 대리석 등 자연석을 깐 등산길 즉 성신로(诚信路)를 닦은 것이 전부일 것이다. 이 구간에 배치된 15개 벤취마저도 거의 전부가 연길시 북산가두 뢰봉반에서 2014년 7월 1일에 기증한 것으로 표기되여있다. 경제래원이 전무한 비영리 사회봉사단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메시지는 참으로 신선하고 경이롭다. 둘째, 나름 대로 적당한 리유는 있었겠지만 기존에 있던 시설마저 철거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연변호텔 쪽에서 시작하는 등산길 성신로를 따라 약 30분 정도 산행을 즐기다 보면 첫번째 샘물터를 만나게 되는데 그 곳엔 워낙 정자 한채가 있어 여러모로 등산객들에게 많은 편리를 주었다. 헌데 언제 사라졌는지 정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4개의 주추돌만 덩그러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새로운 시설은 건축 못할망정 기존의 멀쩡한 정자마저 철거한 그 저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여헥타르에 달하는 ‘일반구역’에 정자의 씨가 말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가급이 아닌 일반적 아빠트 구역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정자를 말이다 . 셋째, ‘일반구역’에는 애초부터 공중화장실이 없었다. 인류문명과 더불어 아프리카 원시림 원주민들도 차츰 화장실 문화를 접수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오늘날에 1100헥타르에 달하는 국가급 풍경구에 화장실이 달랑 한채 밖에 없다 보니 유독 모아산에서만 본의 아니게 목격할 수 있는 난처하고도 민망한 광경이 자주 발생하는 현실을 지적하는 바이다. 상술한 상황에서 만약 환경오염을 고려하여 화장실 건축을 보류했다면 설득력이 전혀 없다고 본다. 모아산 삼림공원 프로필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차장 동쪽에 유일하게 건축한 ‘미생물순환 화장실’ 그 핵심기술은 국내선진 기술인 미생물처리 공법이여서 악취는 물론 환경오염도 전혀 없다고 소개되여있다. 만약 재력부족이 그 리유라면 얼마간 리해가 될 법도 하겠지만 이 역시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우리가 알고 있다 싶이 연길시는 다년간 치렬한 경쟁 속에서도 ‘전국 백강 현시’란 보좌를 굳건히 지켜왔다. 재력 및 종합실력이 그만큼 막강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당시 총체적인 설계도를 검토할 때 면밀하지 못하여 인기된 시행착오가 아니겠는가 하고 감히 짐작해본다. 만약 상술한 관점이 설득력이 있다면 아래와 같은 몇가지 건의를 제기한다. 첫째, ‘전국문명도시 쟁취활동’ 큰 틀내에서 ‘모아산 삼림공원실태 및 금후투자방향’을 전방위적으로 재검토하여 실효성를 전제로 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둘째, ‘국가급’ 문명도시 건설과 ‘국가급’ 풍경구 건설은 배척관계가 아니라 호상 보충하고 호상 추진하는 공동체라는 리념을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삼림공원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길빈하공원’ 건설 노하우에서 해답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넷째, 공원이든 풍경구이든 사람이 우선이란 원칙을 견지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지혜를 모아 인위적으로 조성된 ‘옥에 티’를 조속히 제거하여 모아산 삼림공원으로 하여금 국가급이란 ‘골든 타이틀’에 걸맞는 명실공히 4A관광풍경구로 연길시는 물론 더 나아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금산 은산’으로 자리매김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야 할 것이다. 길림신문/황동수(공무원)
57    우리는 무엇에 가치를 부여하는가(정련) 댓글:  조회:1484  추천:0  2019-10-08
갤럭시 노트10이 나오면 폰을 바꾸겠다고 버티던 지인이 있다. 폰은 바꾸었는지 모르겠으나 갤럭시가 나의 관심사였던 적은 한번도 없다. 150만원의 아이폰을 주저 없이 사대고, 맥북에 애플 전 라인을 시도해본 나에게 있어서 "나오면 바꿀꺼야"는 상당히 납득이 되는 얘기다. 돈이 많아 넘쳐서도 아니고 신상에 환장해서도 아니다. 그냥 내가 "돈"을 써서라도 얻고 싶은 하나의 확실한 가치를 "애플"은 나에게 주고 있다.   우리는 무엇에 가치를 부여하는가.   인생관, 가치관이라는 고리타분하고 애매한 이야기보다 나는 내 기준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현실적인 카테고리를 이야기 해보고 싶다.       1. 시간을 어디에 쓰는가   내가 가장 쓸데 없이 시간을 썼다고 느꼈던 것은 단순한 "폰게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쓸데 없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정확히 한계적이고 그래서 더 아껴써야 하는 것이 시간이다.   어제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 왔는데 딸들이 늦게까지 안자고 있다고 남편한데 혼나고 있던 터였다. 려행 후 정리 안된 짐과 많은 것들이 나의 신경을 긁었지만 나는 그들을 제쳐 놓고 두가지 일을 했다. 두 아이에게 "갯벌에서 사는 생명체"와 관련된 만화책을 읽어 주었고 남편과 기대어 오붓하게 TV를 한참 봤다.   내가 운전 출퇴근을 선호하는 리유는 집과 직장 사이의 "길"에 가장 짧은 시간을 쓸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막상 지하철에서 책 읽고 게임포인트를 쌓지 못하면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 너무 아쉬운 "강박적" 성향의 나다. 시간이란, 나의 생명 세포세포이고 내가 물리적으로 소유한 것의 전부다.   내가 시간을 내여 만나는 사람, 시간을 내어 걷는 길, 시간을 내여 하고 있는 사랑, 내가 나 그리고 내 인생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들만 골라서 한 것이고 또 그렇게 해 나갈 것이다. 나에게 희열과, 행복과, 인내와, 편안함을 주었던 나의 "시간"에 대하여 뿌듯하게 생각한다.   돌아와서 다시 나의 소소한 폰게임을 이야기 하자면 내가 정말 좋아하고 TV를 볼 때, 화장실에 갈 때, 지하철에서 앉지 못할 때 나에게 엄청난 만족을 준다. 애니팡 포코팡 지인 1위는 물론, Player 상위 0.15%, 다른 그림 찾기 코인 모으기(사실 힌트를 얻기 위한 코인이지만 이게 쌓이는 것이 이렇게 좋다), 캔디크러쉬는 항상 개발자의 새 게임을 기다리는 등이다. 머리 속에서 뭔가 내려놓는 것이 좋아서 인지, 아니면 정말 딱 뭐 하나만의 생각에 집중하기 위한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냥, 나는 이 아무 의미 없는 게임의 결과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나를 리해하거나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인간은 원래 미스터리하고 나처럼 생각이 많은 인간은 더더욱 미스터리 할 테니까. 머리 아팠던 시간은 내가 선택하지는 않았으나 선택한 것들 때문에 따라오는 후유증이라면 풀려고 영화 보고 공부 하고 소설 읽고 그냥 묻어 둔다. 저질러 놓은 무언가를 해결할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2. 돈은 어디에 쓰는가   나나 남편이 "돈"에 조금 더 영민하고 연연했다면 지금쯤 우리 집의 두배가 되는 집에서 살고 있겠지만, 우리는 돈을 그렇게 쓰지 않는다.   친구가 SNS에 "이거 가지고 싶다"라고 사진을 올렸는데 가볍게 "그럼 빨리 가져"라고 댓글을 달았다.   신혼 초기에 새댁의 살림마인드로 가계부를 쓴 적이 있다. 일주일 뒤 나는 가계부란 다이어트할 때의 식사 메모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식사 메모란 내가 정말 많은 것을 먹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가계부란 내가 정말 많은 돈을 썼구나를 알려줬다. 그 다음, 가계부를 쓴 적이 없었다.   양념이 들어가지 않은 아주 순수한 말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머니께서 "애키우고, 집도 사고, 돈 쓸 일이 많은데, 먼 용돈을 이렇게 줘…"라고 하시면 나는 "어머니, 돈은 이렇게 쓰려고 버는거죠"라고 한다. 나는 우리 집의 엥겔지수가 높다고 늘 롱담처럼 이야기 하지만 가계부를 써보면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먹고 싶은 것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어디든지 바로 먹는다.   서점 냄새 속에서 바로 Get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10% 더 비싸게 항상 산다. 호구 소리 늘 듣지만 나는 그냥 호구 이고 나는 꼰대이고 나는 머리 긁적이며 내가 그렇지, 라고 하는 그냥 그런 사람이다.   얻어 먹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련애하는 남녀 중에 남자가 돈을 써서 뭔가를 사준다는 것은 단순하고 간편한 그 생물 종의 직관적인 애정표현이라고 한다. 나를 위해 돈을 안 쓰는 남자는 마음도 안 쓰고 있을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물론 사랑을 위한 만남만 전제로 하는 이야기이니 확대해석은 하지 않기 바란다.       3. 마음은 어디에 쓰는가   최근 네이버 과학에서 이별의 아픔에도 타이레놀을 먹으라는 글을 봤다. 우리 몸이 느끼는 아픔은 사고가 났을 때 느끼는 통증과 같다고 한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유물론적 세뇌교육을 받은 나지만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 미세신경반응의 개똥과학에 걸어보고 싶다.   사윤이(10살, 3학년, 개인정보 로출을 꺼려하지만 실명 거론함)가 2학년 때 힘들만한 일이 있어 단둘이 손 잡고 산책을 나간 적이 있다.   "엄마는 사윤이가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게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고마워. 하지만 사윤이가 슬프고 화나고 속상한 일도 엄마한데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어. "   "엄마, 나는 속상한 일은 잊어버리는게 좋던데."   "사윤아, 엄마가 해봐서 아는데 속상한 일은 잊어버린 것 같아도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서 사람을 아프게 해. 화를 내고 울고 이야기하면서 풀어야 되더라고. "   "그렇구나. "   "그럴 일이 있으면 엄마랑 같이 소리지르고 화내고 해볼까? 우리 같이 하자."   "그래."   웃었던 순간은 잊혀지고 울었던 순간의 기억은 오래 간다는 연구보고와 책이 상당히 많다. 웃고 우는 것, 또한 그 시간 그 상황에 대한 내 몸의 대처에 지나지 않겠지만 누구에게는 상처 받고 누구에게는 괜찮은지는 분명 많이 다르다.   우리는 누구에게 기대를 하고 누구에게 상처를 받는가.   그 사람은 싫든 좋든 내가 "가치"를 부여한 사람일 것이다.   4.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가치   나는 목표 지향적이고 저돌적이고 심지어 가끔 공격적이고 무모하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많이 해내고 살았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지 않았던 많은 것에 눈을 감고 마음을 닫고 살았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물론 뭔가를 얻는 것보다 내려놓는 것이 어려운 법이기에 내가 지금 느끼는 "가치"를 소홀히 할 생각은 없다. 다만 가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닿지 않는 리념, 희망 같은 것도 조금 그려볼까 한다.   한때 정체성 이야기의 좁은 골로 빠져서 살던 시기가 있어서 정체성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마냥 거슬렸었다.   지금 많이 론의되는 현실의 모양과 먹고 살기 위한 길이 아니라 단순하고 무모하더라도 누군가 따라가고 싶은 길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을 요즘은 좀 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에 가치를 부여하는가   우주의 어느 새 별을 발견하여 나의 이름표를 붙이는 일이 세대에 세대를 이어 바다를 메워 베네치아를 만들어낼 정도의 유전자적 공포("감동, 너무 주관적인 이태리 기행" 참조)만큼의 크나큰 꿈이 된다면 나는 나의 아이들은 우리는 100년 뒤 어디쯤에서 뭘 하고 있을까. 술집에서 떠들지 않는 교양 같은 것으로 삿대질 하면서 싸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정련 약력: 흑룡강성 상지시 조선족중학교. 2002년 흑룡강성 문과 수석. 북경대학 경제학원 국제경제무역학과 02학번, 학부 졸업. 동북아신문 칼럼니스트. [업무경력] 2006년 9월~2010년 9월 우리에프앤아이(우리금융그룹 자회사, 현재 대신에프앤아이), 투자팀. 2010년 10월 ~ 2014년 6월 동양증권(현재 유안타증권) IB부문 기업금융업무. 2014년 6월 ~ 현재 유안타증권 기획팀, 비서팀 팀장. 동북아신문
56    브랜드와 기업의 가치□ 김준환 댓글:  조회:1623  추천:0  2019-09-27
  요즘 브랜드가 뜨고 있다. 명표브랜드 이름만 달려도 술술 팔리는 세상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명품브랜드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질이 담겨있다. 명품브랜드가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소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브랜드 전략으로 성공한 기업들이 수두룩하다. 2015년에 우리 주는 질량강주 및 브랜드 전략을 전면 실시하여 전 주 제품 질의 총체적 수준을 힘껏 끌어올렸다. 2015년 12월부터 시작하여 2018년 12월까지 유효기간인 길림성 브랜드 기업과 제품은 각각 11개와  11가지이며 연변 브랜드 기업과 제품은 각각 7개와 7가지에 이른다. 연변은 입쌀, 소고기 시장에서 국내 5위의 큰 시장으로 불리우고 있다. 연변소는 연변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굳건히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하지만 한때 연변소가 좋다는 건 널리 알려졌지만 브랜드가 없어 소산업 발전의 발목을 잡았다.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았지만 구심점을 찾지 못해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을 때에 룡정장백산분복청진육업유한회사가 브랜드 전략으로 연변소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룡정장백산분복청진육업유한회사는 우선 사육기지,도축장과 선별장, 저장실 등을 갖춘 현대가공사업장을 설립해 제품개발에 주력했다. 또 이곳저곳에 흩어진 브랜드를 통합해 ‘분복’이란 이름을 달고 품질관리에 나섰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지난 2006년 4월부터 국내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갔다. 품질이 좋은 소고기를 엄선해 발효, 숙성시킨 소고기를 개발하는 등 명품 소고기를 내놓은 데서 매출이 빠르게 성장했다.   2006년 설립 첫해에 80만원의 매출에 이어 2014년에 6000만원의 매출을, 2015년에는 7000만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으며 지금은 매출 1억원을 훌쩍 넘기면서 짧은 시간 안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회사는 지금까지 제품을 조직화하고 제품을 개발하는 데 힘을 쏟았다면 이제부터는 제품의 우수성을 알리고 마케팅 능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며 명품브랜드가 붙은 상품이 얼마나 우수하게 만들어지는지를 나타내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중에는 가공공장 안에 판매장은 물론 견학시설 등으로 고객들을 맞아 앞장서 ‘분복’의 명성을 이어가겠다는 결의도 들어있다. 기업의 브랜드 전략은 이젠 필수다. 브랜드는 기업이 성장하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인 조건으로 되고 있다. 단순히 제품만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브랜드로 기업 이미지를 구축해야만 기업이 성장할 수 있으며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브랜드 전략을 도입해야 한다. 연변일보 
55    그 곳이 차마 꿈엔들…(리은실) 댓글:  조회:1648  추천:0  2019-09-16
리은실/민족출판사 조문편집실 편집 이태전에 중국당대문학작품선집에 수록된 산문 몇편을 번역한 적이 있다. 그중 라는 제목의 산문 한편이 기억난다. 훌룬부이르초원을 찾은 한 년로한 작가의 애수와 탄식이였다.  그 아름답고 넓디넓은 훌룬부이르초원의 목초지들이 당지 목민이 아닌 타고장 상인들의 차지가 되여가는 것을 작가는 안타까와하고 있었다. 그 곳 목민들의 젊은 자식들은 모두 그 아름다운 초원을 떠나 가까운 도시에 진출했던 것이다.  “그들은 말 타는 것을 좋아했지만 외로운 방목생활을 즐기는 것은 아니였다. 그들은 ‘몽골포’와 ‘젖차’를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노랗게 머리를 염색하고 청바지를 입고 ‘마라탕’을 먹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들은 천편일률적인 도시의 월급쟁이로 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다시 예전처럼 아버지에게서 ‘투마간’을 물려받아 선대와 같은 생활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타인의 손에 넘겨주는 순간 바로 전통과는 멀어지게 된다.” 저자는 그 젊은이들의 도시진출을 이렇게 안타까와하면서 개탄했다.  읽다 보니 이런 한탄이 퍽 낯설지는 않았다. 우리말 신문에서, 잡지에서 이런 개탄의 목소리를 많이 들어온 것 같다.  “해외, 내지 대도시에로의 진출로 인해 우리의 조선족 농촌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땅을 지켜야 합니다. 한치 보기로 당장 눈앞의 리익만을 쫓으면 안됩니다.” 한동안 여러 매체들에서 이런 구호들을 많이 웨쳤다. 마을이 비고 우리 민족의 공동체가 해체될가봐 너무 안타까와서 웨친 줄로 알고 있다. 물론 필자도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러나 오늘 필자가 말하고저 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들이 왜서 정든 고향을 등지고 해외로, 도시로 갔느냐는 문제이다. 내 부모님은 작은 진 마을의 국영공장에 근무했다. 지난 세기 1990년초 쯤, 국영공장은 파산되였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리실업 비슷하게 퇴직을 하고 말았다. 그 때 이미 년세가 많으셨던 부모님들이라 해외행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아니 못했지만, 그 때 다 성장한 두 오빠가 일본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학업을 완수할 수 있었을가 하는 의혹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옆마을에 사는 이모네는 딸 둘을 키우면서 마을에서 땅을 부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론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집안형편을 속속 헤아린 언니는 고중을 졸업하자 마자 스스로 일본류학을 택했다.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싶어 택한 류학행은 아니였다. 혼자서 학비도 벌 수 있고 가정에 보탬도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선택한 것이다.  노래를 잘하고 풍금도 제법 잘 쳤던 동생은 유아사범전문학교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 사정을 생각하고는 전문학교 입학을 포기하였다.  만약 두 딸이 모두 국내에서 대학을 다녔더라면, 이모네가 농사만 지었더라면 과연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할 수 있었을가?  해외행과 도시행은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 땅을 파다가 실망한 농민들이 할 수 없이 선택한 길이였을 것이다.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개인의 삶이 공동체를 위해 영위되진 않는다. 또 그러해서도 안된다. 인간에게는 공동체의 발전보다 당장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의 세끼 밥이 더 절박하다. 그런 걱정을 안해본 사람의 이러쿵저러쿵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인류력사상 세계 그 어느 나라, 민족이든 근대화에 들어서면서 경제발전의 흐름에 따라 공동체사회 구조에서 리익사회 구조로 전환된 것은 모두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고향을 떠나 외국이나 대도시의 삶을 선택한 이들중에는 물론 어떤 환상이나 꿈에 부풀어 무작정 고향을 떠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바로 서두에서 인용했던 글 속의 젊은 목민들처럼 말이다. 더 좋은 삶을 향한 그 소박한 욕구를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도시의 유혹은 강렬하다. 초원을 사랑하고 말을 사랑하지만 그들에게 도시의 번화함은 강렬한 유혹일 것이다. 그 유혹에 꿈틀대는 젊은이의 욕망이 왜 문제시되여야 하는가? 누가? 무엇 때문에? 무슨 자대로? 이모들중에서 넷째 이모가 제일 처음으로 도시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이의 공부를 위해서 분연히 시골을 떠나 연길에 간 것이다. 그러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연길에서 넷째 이모네는 발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연길 호적이 없는 아이들에게서 돈을 많이 거뒀는데 그 호적을 해결하느라 또 없는 돈을 써야 했으니 이모네는 꽤 오래동안 자기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세집살이를 해야 했다.  코구멍만한 세방 귀퉁이에 설치된 수도가에서 세수하고 물을 버리면 하수도로 물이 꿀렁꿀렁 흘러들어가는 소리가 잠시 후에 주인집 쪽에서 들리군 했다.  조선족사회의 해체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역시 발전의 과정이지 않을가 싶다. 그들은 땅을 떠났어도 마음만은 여전히 고향에 두고 있다. 가끔 고향의 희소식이 날아들 때면 그들은 기쁨에 겨워 눈굽까지 적시며 정든 고향의 이야기로 날이 새는 줄 모른다. 그들은 글로, 축구로 고향을 소환하고 서로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고 있다. 또 한국에서, 일본에서, 북경에서, 상해에서… 겨레의 단체들이 일떠서고 있다. 몸은 고향을 떠났어도 마음만은 흩어지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요즘 산업으로 도시와 농촌이 융합을 이루면서 해외에서, 내지 도시에서 돈깨나 좀 번 일부 조선족기업가들이 고향에 돌아와 창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고향의 아름다운 미래가 각일각 눈앞에 펼쳐질듯 싶다. 때문에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날 것이요”, “그렇게 떠나면 이 땅은 어찌하란 말이요?” 하는 텅 빈 감정적 호소보다는 그들의 떠날 수 밖에 없는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가. 그 고민 우에서 다시 해결책에 대한 론의가 나오는 게 순서일 것이다.  보다 발전하고 부강해진 고향에서 우리가 다시 모여 공동체를 꾸려가고 오손도손 살아갈 날을 꿈꿔보기도 한다. 비록 갈길은 멀고도 멀지만 모두가 신심만 가진다면 뭐나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바야흐로 5G시대이다. 초고속, 초저지연, 초련결이라는 특징으로 대표되는 5G세상! 땅 하나에 매달리지 않아도 우리의 련결망은 촘촘하다. 가상의 공간에라도 우리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공동체를 재구축한다면? 다시 그 속에서 우리가 나갈 길을 고민해본다면 어떨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길림신문
54    ‘조선말 새 규범’을 두고(김미월) 댓글:  조회:2364  추천:1  2019-09-09
일전 모 대학에서 ‘조선말 새 규범’에 관한 무료강연을 조직하였다. 세차례에 걸쳐 한주 동안 진행된 강연이였는데 조선어로 먹고 사는 한 사람으로서 강연 내용에 눈독 들여야 마땅하지만 필자의 주의를 끈 것은 오히려 홍보포스터였다. 새 규범의 문장부호법 대로 쓰지 않은 문장부호 두개가 버젓이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연이 끝나는 날까지도 오점을 그대로 달고 활보했다는 것은 마음 아픈 사실이요,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다. ‘ 해설’이라는 내용으로 하는 강연의 홍보포스터에서 거듭서명표를 써야 할 곳에 서명표가 씌여져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홍보포스터가 강연자와는 무관한 일일 수도 있고 조선말 새 규범을 접촉하지 못했던 누군가가 만들었을 수도 있다. 또 아무리 새 규범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사람이라도 실수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포스터가 한주 동안 위챗모멘트를 도배했고 여러 조선족 공식계정에도 ‘당당히’ 올라있었다는 것이다. 우의 사실은 두가지를 설명해준다. 하나는 습관이고 다른 하나는 관심이다. 어느 개인이나 집단을 물론하고 모두 기존의 습관을 유지하려는 힘 즉 새로운 변화와 발전에 저항하는 힘이 있다. 하기에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고 습관으로 자리잡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조선말 새 규범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언어실태에 비추어 조선반도와의 공동성분을 늘이고 과학성, 련속성, 점진성, 대중성을 골고루 구현하였으며 실제 언어생활에서 많은 편이를 가져다줬음에도 불구하고 규범이 바뀌는 주기가 짧은 것을 비롯한 여러 원인으로 변화에 저항하는 힘이 꽤 오래갈 것으로 예상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1988년 《표준어사정원칙》을 반포한 이후 큰 틀에서의 변화가 없이 30여년간 하나의 규범으로 서사생활을 해왔다. 따라서 일반 사람들이 한국어맞춤법 때문에 혼란을 겪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은 거의 십년에 한번씩 규범이 변해왔다. 물론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변화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수도 있지만 변화를 통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그대로 두거나 변화를 가져오더라도 대부분의 언어사용자들이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쪽으로 규칙이 정해졌으면 한다. 2016년에 새로 나온 《조선말규범집》과 《 해설》(2019.2)을 보면 확연한 변화를 가져온 몇개 부분은 리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울 법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변화된 부분이 자지레하게 많다. 하여 새 규범이 반포된 지 3년이 돼가는 지금도 가끔은 무진기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일례로 《 해설》의 띄여쓰기부분에서 보면 “수사가 인체기관 이름과 결합될 경우에는 띄여쓴다.”고 함으로써 종전과는 달리 규정하였다. 그러나 “단 사전에 오른 ‘한손, 한발, 한눈, 한입, 두어깨, 한몸, 한가슴, 한다리…’는 붙여쓴다.”고 례외의 경우도 설정해놓았다. 이것은 말 그대로 수사와 인체기관 이름이 결합될 때는 무조건 사전을 찾아서 올림말로 올랐으면 붙이고 오르지 않았으면 띄여써야 한다는 말인데 편집이나 교육 과정의 번거로움은 둘째치고 참고해야 할 사전의 범위도 모호하다. 또 사전에 오른 단어라 할지라도 본의로 쓰이는 경우도 있고 전의로 쓰이는 경우도 있는데 차라리 “수사와 인체기관 이름이 결합될 때 띄여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전의로 쓰일 경우에는 붙여써도 된다.”고 한다면 구분도 명확하고 사용에 있어서도 더 편리하지 않았을가? 그러면 사용해오던 언어습관을 고치는 데도 무리가 가지 않고 좀더 쉽게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기왕 반포된 규범,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정확히 사용하도록 노력하여 한국어와의 혼용, 예전 규범과의 혼용이 적어졌으면 좋겠다. “살아남는 것은 가장 강한 종이나 가장 똑똑한 종들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들이다.”는 다윈의 교시대로 새 규범이 교육이나 출판 관련 일군들만의 일이 아닌 우리 조선족 모두의 공동의 관심사로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하여 세종대왕이 내린 뿌리에서 조선말이 튼실한 가지로 자라 오래오래 자기만의 색갈을 뽐냈으면 좋겠다. 흑룡강신문
53    [대림칼럼] 언행의 품격을 갖추자(곽미란) 댓글:  조회:1710  추천:10  2019-08-19
5월 21일은 한국에서 법정 기념일로 제정된 “부부의날”이다. 이날, 랭면생각이 간절하여 대림역 11번 출구에 위치해 있는 화룡랭면식당으로 가면서 보니 거리 풍경이 색달랐다. 영등포경찰서의 순경 십여명이 조를 지어 거리를 순라하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왜 이렇게 많은 순경들이?…나는 대뜸 며칠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동영상을 떠올렸다. 술 취한 조선족 남성이 경찰에게 욕을 하고 뺨까지 때린 사건이였다. 두마디 안짝에 욕을 퍼부으며 손찌검까지 하는 모습은 존대말을 꼬박꼬박 쓰는 한국 경찰의 언행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하긴 대림동 하면 나는 정겨운 고향 분위기나 입에 맞는 음식보다는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거북한 욕지거리부터 떠올리게 된다.   왜 그럴가? 같은 동포 출신이지만 솔직히 나는 대림동중앙시장이 있는 대림역 11번, 12번 출구에 도착하면 대번에 불온한 기온을 느끼게 된다. 지하철 출입구 계단에서부터 눈과 귀에 들어오는 화면을 보자. 술에 취해 핸드폰을 들고 어느 녀인에게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전화를 하는 아저씨의 모습, 삼삼오오 떼를 지어 노래방 앞에서 혹은 식당 앞에서 남정네들이 말끝마다 쌍소리를 섞어가며 목에 피대를 세우는 모습, 대낮에 이미 얼근히 취해서 량 겨드랑이에 녀자 한명씩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등 불미스러운 모습들에 눈살이 찌프려진다. 솔직한 심정이지만, 나는 내 딸애를 대림역 근처에 데려가는 것도 저어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다. 한국에 온지 10년 됐소, 20년 됐소, 하는 일부 조선족들은 한국의 상냥한 서비스문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욕설만 일취월장한 것 같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에 천냥빚 갚는다”, “말이 씨가 된다” 등 고운말, 바른말에 대한 속담들이 참 많다. 그런데 하필이면 욕설이 마치 한국말의 정수라도 되는 듯 입만 열면 육두문자를 쏟아내고 있으니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왔다고 우리가 고향에서 쓰던 말을 다 버리고 어설픈 서울말을 흉내내자는 게 아니다. 연변에서, 료녕에서, 흑룡강에서 우리가 어릴 적 배운 말을 악센트들을 고치지 않더라도 좀 더 교양있게 대화하는 법을 배우자는 것이다. 나는 서툰 서울말보다 투박한 내고향 흑룡강 말이 훨씬 듣기 좋다. 말은 곧 그 사람이다. 언행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한 사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나, 조선족이요"하고 당당하게 밝히며 사는 건 참 보기 좋지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조선족들 참 례의바르고 존경스럽다"는 느낌이 들게 행동을 하면 좋지 않을가. 듣기 거북한 말 한마디, 잘못된 행동 하나로 조선족의 위상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걸 나는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한국에서 발발했던 미투운동을 보자. 문학계, 예술계, 정계가 한동안 떠들썩했다. 피를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 남성들은 술좌석이나 모임장소에서 저급한 롱담과 음담패설을 수시로 툭툭 뱉어낸다. 본인은 그것이 술상 분위기를 돋구는 위트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엄연히 언어성폭력이다.   문인들도 례외가 아니다. 어느 한번 나는 문단에서 꽤 알려진 한 조선족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였다. 그자리에는 그분이 모셔온 한국 문인 몇분도 함께 했는데 그 조선족시인은 식사를 시작해서부터 끝날 때까지 "X새끼, XX년"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거기다가 오랜 세월 현장 생활에서 몸에 밴 높은 목청으로 식당이 떠나갈 듯 고아대니 일행인 나는 너무 듣기 거북하여 몇번이고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물론 그후엔 두번다시 그 시인을 만나지 않기로 했다. 3D업종에 종사하다보니 거친 말투가 몸에 뱄고 현장에서는 걸쭉한 롱담이나 거친 육두문자들이 귀맛좋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발 누울자리 앉을자리 봐가며 발을 뻗자. 어디까지나 글을 쓰는 문인답게 자신의 언행에 대해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한국에서 글을 쓰는 개별적인 조선족문인들이 언행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전반 조선족 문인들을 욕보이게 된다.   화룡랭면집에서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서 나는 문이 활짝 열려진 어느 식당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다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60세좌우로 돼보이는 한 조선족남성이 서빙을 하는 20대중반의 아가씨에게 “미금아, 노래방 가자”하고 막말을 내뱉는 걸 들었던 것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물 흐린다”   제발 언행에 신경쓰자. 한 사람의 언행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민족이며 나라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림동 조선족 경찰 폭행사건 같은 경우엔 공무집행방해죄로 추방당한 후 비자신청을 아예 할 수가 없어 두번다시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술먹고 사소한 실수가 일으킨, 돌이킬 수 없는 후과이다.        곽미란 략력 (필명: 백한) 흑룡강성 탕원 출생, 숭실사이버대 방송문예창작학과 졸업. 에세이집 "서른아홉 다시 봄"출간. 소설 "로마로 가는 길", "이 밤은 아름다워", "먹골에는 겨울에도 비가 내린다" 발표. 재한동포문인협회 소설분과 부분과장. 동북아신문
52    [두만강칼럼]방관자의 리기주의(윤윤진) 댓글:  조회:1673  추천:0  2019-08-13
길림신문/윤윤진(길림대학 교수) 얼마전에 한 로작가를 만나 우리 문단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목하 우리 문단의 병페를 진맥하면서 최대 문제는 ‘인성 또는 인간성의 부재’라고 일갈하였다. 평생을 문학에 바쳐온 한 로작가의 일장 열변을 들으면서 나는 다소 노기 어린 로작가의 대성질호에 지금 확실히 그런 현상이 가끔씩 존재하고 있다고 동조하면서 그의 일갈에 일리가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전 모 신문에 게재된 내용이다. 한 녀성이 자결하려고 높은 층집 우에 올라가 서있는데 소문이 퍼지자 그 광경을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더 한심한 것은 누구 하나 그 녀성을 제지하지 않았고 지어 어떤 사람은 핸드폰으로 그 천하없는 명장면을 찍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어떤 이는 한식경이 지나도 뛰여내리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기다리기에 지쳤다면서 “어서 빨리 뛰여내리라”고 손짓에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 녀성이 왜 그런 ‘비장한 선택’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필경 한 생명의 종말은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야 할 일이며 적어도 인간으로서는 그러한 행위를 제지해야 한다. 한사람의 죽음 앞에서 방관자 즉 다른 한 생명들이 나타낸 인간성의 ‘민낯’이다. 수많은 방관자들의 인간성이 이 정도이니 인간의 정신문명 건설은 홀시할 수 없는 과제로 나서고 있다. 불현듯 근대 일본의 저명한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龙之介)가 떠오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소설에서 언제나 사회와는 일정한 간격을 두면서 추악한 인간사회의 희로애락을 들여다보았다. 인간 사이의 랭혹한 관계와 그러한 랭혹한 관계 때문에 나타나는 인간사회의 비극을 바라보는 방관자의 극단적인 리기주의에 대해 랭철하게 꼬집고 있다. 이는 근대 물질문명에서의 인간과 인간비극을 바라보는, 자신의 리익만 생각하는 방관자의 랭혹한 인간성을 가장 철저하게 파헤쳤다고 할 수 있다. 자기와 상관이 없다면 옆에서 누가 죽어간다고 해도 시종 방관자로 눈 한번 깜짝하지 않는 사회도덕의 병페, 그리고 방과 후 아이가 잃어졌다는 소식, 어디서는 아이가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다는 소문이 전파를 타는 요즘이다. 사회의 발전은 물질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전례없던 부를 창조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생활을 하지만 진정한 사회의 진보는 그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원래 가난하던 사람들이 여유가 생기니 더 무섭다. 세상이 손바닥 만큼 보이는 모양이다. 일궁이백(一穷二白)의 중국은 개혁과 개방을 통해 거대한 부를 창조하면서 G2의 반렬에 들어섰다. 경제 총액이 벌써 일본을 저만큼 따돌리고 미국 버금으로 간다. 이제 10년, 20년만 지나면 미국도 추월하고 ‘넘버원’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성은 그러한 급성장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성이 날로 엷어지고 인성이 소실되고 있는 시장경제시대이다. 시장경제는 언제나 자기 론리로 사회질서를 잡아간다. 이른바 시장 론리란 바로 금전, 돈, 가격과 가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론리이다. 금전은 모든 대상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로 시장과 사회를 지배한다. 따라서 인간의 가치도 그것에 의해 좌우되니 안타깝기만 하다. 시장경제, 오늘의 안목으로 보아 이것은 우리 인류사회가 반드시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한 단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시장경제는 인류에게 거대한 부를 가져다주었으며 최상의 써비스를 비롯한 여러가지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오늘날 우리 어느 누가 시장을 떠나 살 수가 있으며 경제를 떠나 생존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변증법적으로 보면 세상 모든 사물은 동전의 량면이며 량면의 칼이다. 말하자면 모든 사물은 좋은 점을 가지고 있으면 나쁜 점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말이다. 빅도르 유고는 미는 추의 옆에 있고 악은 선의 옆에 있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옆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와 추는 영원히 공존하는 것이고 선과 악도 여전히 공존하는 것으로 미가 있으면 영원히 추가 있을 것이며 선이 있으면 악도 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미가 추로, 추가 미로,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전환할 수 있다. 같은 시공간에서도 어떤 사람에게는 미로, 어떤 사람에게는 추로, 어떤 사람에게는 선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악으로 될 것이다. 이것을 굳이 말하자면 미추의 상대성, 선악의 상대성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장경제시대라 하더라도 인간은 인간이기에 인간성이 구비돼야 한다. 이것은 인간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성을 뒤로 한 리기주의 성행에 대비해 효과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중국인민들의 행복과 중화민족의 부흥을 도모하는 것을 새시대 인간들의 초심과 사명으로 삼고 효과적인 대책을 대여 리기주의자들이 하루속히 ‘금전만능’에서 헤여나와 남을 돕는 것을 락으로 여기게끔 이끌어줌이 절실히 필요하다. 여기에서의 관건은 사회주의핵심가치관을 인간학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다. 끝으로 인성교양은 어릴 때부터 틀어쥐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 특히 부언하고 싶다. 길림신문
51    [대림칼럼]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에 대해서(엄정자) 댓글:  조회:1587  추천:0  2019-08-12
오늘 아침 『텔레비 아사히』(テレビ朝日)의 “하토리 신이치의 모닝쇼”에서 개시 3일 만에『아이치 트리엔 날레』의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 코너가 중지당한 일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아이치 트리엔 날레』는 2010년부터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제 예술제이다. 이 예술제의 한 코너로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에서 위안부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하였다. “표현의 부자유전”은 2015년에 개인 전시회로 열린 적이 있는데 이번에 다시 『아이치 트리엔 날레』에 전시하게 되였다.     15년 전의 “표현의 부자유전”   예술감독을 맡은 스다 다이스케(津田大介)는 이 코너의 취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공립미술관에서 전시 후에 철거당하거나 거부당한 작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용납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실행위원회 회장 대리인 나고야시 카와무라(川村) 시장이 “상당히 많은 거의 전부에 가까운 일본국민이 반일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발언하며 회장인 오무라(大村秀章) 현지사에게 즉각 중지할 것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뒤이어 스가(菅義偉) 관방장관은 “보조금 교부 결정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쳐 적절하게 대응할 것이다.”라고 발표하였다. 이때문에 대소동이 일어났다.   많은 메일 전화가 쇄도하였는데 그중에는 테로 예고 협박 내용도 있었다. 결국, 안전상의 문제를 고려한다는 명의하에 3일 만에 전시회가 중지되였다.   8월 5일 오무라 현지사는 카와무라 시장의 발언은 “헌법 21조의 금지된 “검열”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문제없다”라고 하면서 “행정이나 관청 같은 섹터이기에 표현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 자기 마음에 안드는 표현이라고 해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의견을 말했다.     항의성명을 제출하는 아티스트들.   예술제에 참가한 72명의 아티스트들도 이 결정에 대하여 “일부 정치가들에 의한 폭력적인 개입과 페쇄로 몰아넣는 협박과 공갈에 강력하게 항의한다.”라고 련명으로 항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는 구체적인 리유도 없이 누가 어떻게 판단해서 중지결정을 했는지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는 등 7가지 항목을 제기하였는데 10일까지 답변을 요구하였다.     헌법 위반에 대해 해설하는 법학 교수 무라키 소타.   해설자로 나온 무라키 소타 법학 교수는 “이번에 카와무라 씨의 일련의 발언은 헌법위반의 혐의가 극히 농후하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면서 “세금을 쓰고 공권력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코멘테이터 다마카와 아키라.   코멘테이터인 다마카와 아키라(玉川徹)는 “선진국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카와무라 시장은 헌법공부부터 해야 하겠다. 테로에 굴복해서는 안된다.”라고 비판했다.   도쿄예술대학의 모리(毛利嘉孝) 교수는 “‘국제전’인 만큼 각국의 사람들이 온다. 그들은 자기 나리의 의견을 대표한다. 일본의 나라를 대표하는 작품만 전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이후에도 공적자금이 투입된 전시회에서 과격한 발언을 하면 중지시킨다고 생각하는 류사범이 계속 나올 우려가 있다”라고 하면서 전시회의 중지를 반대했다.   이번 소동에서 전시회에 대해 가보지도 않고 여론의 흐름에 따라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고 공갈 협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특히 포퓰리즘 정치가들의 발언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웠으나 언론과 학자들은 카와무라 시장의 언행은 헌법에 위반되는 행위라는 데 의견이 모여지고 있다.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에 전시된 작품들은 정치적인 리유로 전시되지 못했거나 전시를 중지당한 작품들이다. “평화의 소녀상”도 마찬가지이다. 언론자유를 부르짖는 민주국가에서 이번 일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짓밟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자키 데츠야(小崎哲哉)는 『뉴스위크』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이 일을 통해서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얼마나 어이없는 반민주주의자들인가 하는 것이 다 알려졌다. 그렇다고 해서 ‘검열의 가시화(可視化)에 성공하였다.’ 고 들떠서는 안된다. … 그래서 분별이 있는 사람은 계속 싸워야 한다. ‘정의는 꼭 이기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픽션(허구) 안에서만이다. 현실사회에서 ‘바른 것’은 계속 싸워서 이길 수밖에 없다.”   한일관계가 악화되여가는 현실 속에서 이번 소동은 지금의 현실을 다시 돌이켜 보게 하는 계기가 되였다. 특히 한국 비판 일색이던 언론도 이번 일에서는 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이번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 들여다보려고 하였다.     신오쿠보 코리안타운. 사진출처 aumo.   오늘 아침 뉴스에서 보니 도쿄 신오쿠보 코리안타운에는 아직도 쇼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 가게 사장들이 앞으로의 정세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나 한국문화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번 소동처럼 정부와 공권에 의해서 강제적인 조치로 두 나라의 문화교류까지 억제하고 금지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문화예술이 정치적인 리유로 배제당하는 현상만은 회피하고 싶다.        엄정자 략력 1982년 1월,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1982년 연길시 10중 국어교사, 1983년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국어교사. 1994년 길림신문사 기자, 1997년부터 일본에 거주.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 한국어강사. 연변작가협회회원, 일본조선학회회원, 일본조선족연구학회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해외이사. 수상경력: 수필 “화산 우에서 사는 사람들” 제9회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필 『감나무에 담긴 정』 제1회同胞文學安民賞. 수필부문 우수상 수상.
50    [대림칼럼] 글쓰기에 대한 단상(류경자) 댓글:  조회:1897  추천:0  2019-08-01
     나는 글쓰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지 않는 나를 혐오한다. 글쓰기의 형태란 흔히 창작으로 여겨지는 시, 소설 쓰기와 창작에 대한 비평으로 여겨지는 평론, 논문 쓰기 등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번역 또한 다른 측면에서의 창작적 글쓰기로 여겨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야 하는 나에게 글쓰기란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싫지만 어느 순간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는 것.       내가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았던 대학교수, 심지어 그 유명한 작가마저 표절 논란에 휩싸였을 때 글쓰기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논문은 유일하게 대놓고 표절을 ‘허용’하는 글쓰기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썼던 글귀를 베껴도 성실하게 각주만 달면 표절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논문이 인용된 저자는 이러한 ‘표절’에 고마워할 수도 있다. 두말할 것 없이 대학교수의 논문이 표절 논란에 휩싸인 것은 성실하게 각주를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은 독자의 독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각주를 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각주를 찾아 읽다보면 이야기의 흐름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작가들은 각주를 달지 않는 소설 쓰기를 선호한다. 그 유명한 작가의 표절 논란에 휩싸인 글귀를 비교한 문장을 읽다보면 우연이라고 해도 그런 우연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똑같은 문장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무에서 창조란 가능할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모든 작품의 탄생에는 언어의 구축이라는 기본적인 토대가 필요하다. 알다시피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은 거의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다. 남의 글을 읽지 않고 순전히 내가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글쓰기의 역사에서 이름 모를 사람들이 조금씩 쌓아놓은 언어의 토대 위에서 작가들의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의 글을 읽고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통째로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체화시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만의 새로운 세상을 구축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은 파괴 위에 다시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역사의 천사’는 폐허 위에서 역사의 파편들을 끌어 모아 다시 구축한다. 벤야민은 역사를 잔존해 있는 폐허로부터 거꾸로 읽을 것을 제안하며, 그의 이러한 작업에는 역사를 파괴하는 동시에 복구하는 기획을 담고 있었다. 글쓰기란 그러한 파편들을 끌어 모아 다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루쉰은 '무덤'이라는 작품집을 내면서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정신은 되밟을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모질게 끊어 버리지 못하고 찌꺼기들을 주워 모아 자그마한 새 무덤을 하나 만들어 한편으로 묻어 두고 한편으로 아쉬워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과거를 주워 모아 재구성하는 루쉰의 ‘새 무덤 만들기’ 작업은 역사의 파편을 모아 재구성하는 벤야민의 방식과 닮아있다. 루쉰이 ‘찌꺼기’로 표현한 과거와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의 파편’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루쉰의 '고사신편'에 수록된 소설들을 보면 루쉰이 어떠한 작업을 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루쉰은 누구나 아는 옛이야기를 끌어 모아 전혀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며 자기만의 소설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렇다고 루쉰의 소설이 표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루쉰은 신화와 전설을 높이 평가하면서 신화와 전설이 모든 종교, 예술, 문학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루쉰은 중국 상상력의 진정한 기원을 보았던 것이다. 루쉰에게 글쓰기란 과거를 파괴한 폐허 위에서 새롭게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인공지능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창작을 학습하고 분석한 딥러닝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인공지능의 예술 창작에 대해 어떤 이는 두려워했고 어떤 이는 경이로움을 표했다. 예술가의 존재가 위협 받는다는 목소리와 기계는 기계일 뿐 인공지능이 인간을 초월할 수는 없다는 목소리가 동시에 존재한다. 진정한 작가라면 나는 이를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훌륭한 작품을 써내는 사람들이 많다. 널리 알려진 사람도 있고 무명작가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어떤 작가는 엄청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발굴되기도 한다. 이런 작가에 대해서는 시대를 초월한 글쓰기를 한 작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인공지능이든 널리 알려진 작가이든 나만의 문학세계를 구축할 수 있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훌륭한 작품의 평가에는 기준이 없다. 흔히 입상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데 훌륭한 작가들은 글을 쓸 때 입상 따위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는다. 또 그렇게 해야만 훌륭한 글이 나올 수 있다. 매번 노벨문학상 시즌이 오면 문학계는 이 문학상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그 전에 제도권에 의해 규정되기를 거부한다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사르트르와 같은 작가도 있다. 그것 또한 그 작가의 소신이자 그의 작품에 반영된 그의 사유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나올 수 있는 것만이 작품이 될 수 있다.   류경자 약력:   동서대학교 조교수, 한국체육대학교 강사   연변대학교 중문과 학사∙석사, 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   역서 『디지털기술과 신사회질서의 형성』   논문 “루쉰의 탈경계적 상상력과 치유의 글쓰기”, “장용학 소설의 역사인식 연구”외 다수. 동북아신문
49    [대림칼럼] 디아스포라의 명상학 개론(최수석) 댓글:  조회:1524  추천:0  2019-07-10
      나 자신을 찾아간다는건 참 고요함과의 동행을 자처한 의미있는 일이다. 채바퀴 돌듯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있는 현대인들에게 '나 찾아 떠나는 려행'이라는 타이틀이 참 이율배반적인 단어이기는 하지만 내외면의 에너지를 척결해가며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목마름과 갈증으로 다가오는게 바로 '마음챙김'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길'에 있는 당신이라면, 꼭 추천해주고 싶은게 있다. 바로 명상이다. 내가 명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현대인들이 한번씩 경험해보지 않고는 섭섭하다고 생각될만치 귀족병으로 자리매김한 우울증을 경험하고 나서서부터이다. 우울감을 느끼고 그 출구없는 메마른 감정의 벽을 허물고 에고와 참나와의 거리를 좁혀가고있는 힐러로서 무너짐이야말로 더 큰 열림이라는것을 경험해봤다. 주인도 없이 해가 슬어놓은 고요를 나른한 오후가 갉아먹는것 같은 느낌이지만 랴명전의 암흑은 분명히 내삶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준 종합비타민과도 같았다. 한번 경험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울증을 경험하게 되는데는 에고와 참나와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 가장 크다. 어찌보면 애써 찾을 필요도 없이 늘 그곳에 있던 존재인데 다만 알아차림이 부족했던건 아닐까? 기본적으로 철학의 기본질문인 '나는 누구인가'가 '나를 찾아 떠나는 려행'의 기본테마가 되여야 하는데 '나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패러다임이 그 려행을 막아나서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누구인가'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 문제이다. 개인적인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 등 여러가지를 포괄시킬수 있겠지만 특히 디아스포라들은 정체성에 대한 치렬한 고민을 하고 살아왔고 어찌보면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요아닌 강요를 스스로에게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싶다. 특히 스스로 의식있는 디아스포라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더 큰 멍에를 짊어지고있는게 아닐까. 하지만 그 멍에가 과연 자동화된 무의식적인 반응이 아닐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우울증을 경험하고 참나와 만나는 작업을 하면서 든 생각이다.   사람으로 태여나 짊어지게 되는 가장 큰 책임은 바로 매 순간 내가 어떤 반응을 했는지에 대한것에 대한 책임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을 가리켜 "B와 D사이의 C"라고 말했다. 결국 인생은 BIRTH(탄생)과 Death(죽음) 사이의 Choice(선택)이라는 것이다. 선택 역시 또 하나의 반응인 셈이라고 볼 때, 결국 인생은 곧 반응이다.       내가 보이지 않는 마음이란 령역을 공부하고 탐험하면서 경험한 모든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이라고 할수 있을가? 바로 삶의 여러가지 자극속에서 반응하는 태도와 힘이 달라진것이라 할수 잇을것 같다.   반응과 무반응. 무반응도 반응하지 않음을 선택한 반응이다. 반응에는 다양한 각도의 반응이 있다. 나의 건강, 행복, 평화, 성공에 도움이 되는 반응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지구의 건강, 행복, 평화에 도움이 되는 반응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반응을 선택할수 있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동화된 무의식적 반응을 하며 살아간다.   최소 95%이상의 무의식적 반응으로 살아간다고 보통 이야기한다.       연변대학에서 공부할 때 나는 석사론문 테마로 "한중 영상물에 나타난 조선족 녀성의 형상'에 대한 론문을 썼다. 그리고 한국류학에서 선택한 나의 박사론문 주제 역시도 "조선족 자생설화에 나타난 디아스포라 연구"이다. 어찌보면 디아스포라에 대한 주제는 내 백그라운드를 봐서도 그렇게 가장 흥미가 있고 잘할수 있는 분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B와 D사이에 선물과도 같은 C가 있었듯, 석박사 과정을 완성하는 중간에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우울증이라는 선물이 찾아왔고 그것이 디아스포라에 대한 내 사고의 틀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였다.   학문분야에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연구라 하면 자연스럽게 련결된 키워드가 있다. 바로 정체성 연구, 소외의식, 주체와 주변부, 망향의식, 정착의식 등 모름지기 중심부에 편입하지 못하고 주변부에서 맴도는 주변부 의식에 대한 연구와 직결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문연구에서는 이런 연구방법론이 아직까지 잘 적용이 될수밖에 없다는건 당연한것이고 나 역시도 이런 키워드를 중심으로 연구방법을 도입할것이다. 워낙 소설이나 시창작 등 텍스트자체가 갖고있는 완결성 구조가 어느 정도의 주제의식을 내포하고있기 때문에 기존의 디아스포라 틀연구로도 론문을 완성하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일상에서 겪는 디아스포라적인 경험에 대한 성찰과 분석을 할 때도 우리는 이런 패러다임에서 풀기가 십상이다. 가장 익숙하고 가장 론리에 맞는 패러다임이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무언가 경직된 틀에 자신을 옭아매는게 아닐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내가 석사론문 주제로 "한중 미디어에 등장한 조선족의 형상 연구"를 택했던 것도 사실은 "우리 조선족은 이런데 잘 알지도 못하고 곡하고있다"는 약간의 분심을 표출하기 위한 발로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족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있는 예민함임에는 분명하다. 한국진출 조선족 80만명시대, 무엇보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확대된 한국사회에서 내 이야기(조선족의 이야기)가 어떻게 영상물로 제작이 되였을가가 일차적인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 이야기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 부모님, 친척, 친구들의 이야기로 비춰질수도 있고 미디어의 파급력과 더불어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줄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족들 역시 이제는 코미디는 코미디로, 예술은 예술로 봐줄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지긋이 지켜볼 여유가 있지 않는가?   우연한 기회에 몇년전까지만 해도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인 "황해"에 나왔던 개그우먼 이수지씨를 만나게 되였다. 커피 한잔 하면서 "황해"라는 코너 때문에 조선족들이 한국 사회에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대명사가 되였고 그것때문에 씁쓸한 기분이 든다고 솔직히 얘기했었다. 이수지씨는 거듭 죄송하다고 하며 사실 재미있는 코너들이 너무 많은지라 남들보다 더 튀고 재미있는 코너를 만들지 않으면 개그계에서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재미 하나만 바라보고 매주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고 얘기해줬다. 사실 한국의 미디어시장은 철저히 상업위주로 돌아가는 경쟁시대이다. 영화를 만들고 코미디를 만드는 피디나 작가들이 조선족에 대한 어떤 폄하의 의도를 갖고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미디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한 한국사회에서 잘못된 이미지의 고착화는 오래동안 왜곡된 패러다임을 형성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겠지만, 이곳은 대통령도 코미디 소재로 등장할수 있는 곳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부단히 할수밖에 없는 디아스포라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약간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긴장돼있던 '디아스포라 정체성 감성근육'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줄 필요가 있지 않을가?   원하는 방향으로 반응하기 위해 필요한것, 내 삶을 온전히 책임지기 위한 힘인 반응력, 탄생과 죽음사이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인생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것이 바로 마음챙김이다. 그 마음챙김과 여유를 갖고 자기 정체성, 사회적인 자아로서의 정체성까지 생각을 한다면 좀 더 느슨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세상과의 소통을 할수 있지 않을가 싶다.   마음을 놓친다는것은 무엇이고 마음을 챙긴다는것은 무엇일가.그러면 마음은 무엇일가?정체성이 없다는것은 무엇이고 정체성이 바로 잡혔다는것은 무엇일가.그렇다면 정체성은 무엇일가?   조선족이기 때문에, 한국인이기 때문에, 중국인이기 때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정체성이 과연 원자 5,000억개로 구성된 우리의 몸 구석구석에서 보내는 객관적인 정보의 집합체라고 할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정체성이 있지만 또 정체성이 없는 존재들이다.     최수석 략력    본명 최옥란, 전 '동북저널' 신문사 기자.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문학 박사 수료. 동북아신문
48    집 탓에 집 덕에□ 김준환 댓글:  조회:1663  추천:0  2019-06-13
주택구매자들이 현명해졌다. 저성장과 저물가가 특징인 새로운 정상상태에서 부동산 가격만 홀로 급등할 수 는 없다는 믿음이 서게 됐다. 이젠 집만큼 안전한 투자 대상은 없다는 믿음이 멀어지면서 부동산 시장에 기름을 부어도 불이 붙지 않는다. 소비자들은 인구 구조, 소득 수준, 주택 수급 상황 등을 따져보면 향후 부동산 가격은 인기 있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안정적인 흐름을 보일 것이라는 분명한 판단을 가졌다. 하여 집 투자에 욕심 내기보다는 내집마련을 더 중요시하며 온전히 나만의 집을 가지려는 성향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한마디로 집에 대한 가치가 바뀌면서 펄펄 끓던 부동산 투자 열풍속에서 은행 대출을 끼고 투자대렬에 뛰어들었던 그런 모습에서 주택 시장의 알짜 정보에만 눈길을 돌리며 맹목적인 구매를 피하고 싶어하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주택구매자들에게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의 대답은 일치할만치 '보기 좋은 집, 살기 좋은 집'이란 대답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에서 나만을 위한 실용적인 주택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을 다분히 의식한 집에서 살기를 희망한다. 새집들이 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평생에 한번 장만하는 집이니깐', '자식들 생각해서', '이왕 하는바에 멋지게 고급스럽게 하겠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집장식을 할라 치면 예상을 훌쩍 뛰어넘기가 일수 이다. 집꾸미기에서 어떤 내장재를 선택하고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는 완전히 내 몫이다. 집장식에 들어서는 소비자들에게 '보기 좋은 집으로 꾸미겠습니까? 살기 좋은 집을 꾸미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백이면 백이 다 '살기 좋은 집에서 살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막상 집장식에 들어서면 보기 좋은 집으로 무게중심이 옯겨간다. 자신이 꿈꾸던 집을 꾸미는데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 너무 막연해 한다. 집을 꾸미기 전에 그 집에서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 먼저 생각해보라. 그래도 보기 좋은 집을 꾸밀것인지? 무턱대고 '보기에 좋은 집'만을 고집하는 것은 집꾸미기에서 가장 기피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보기 좋은 외관만을 따지다 보면 집을 지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집을 모시고 사는 꼴이 된다. 집이란 모름지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집보다는 완벽히 나를 위한 공간으로 되어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대답이다. 집은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를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내 행복이 먼저라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집을 장식해야 하고 그런 집에서 살아야 즐겁고 행복해 진다. 집은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야 한다. 연변일보
47    반려견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생 -영화 《베일리 어게인2》 댓글:  조회:2079  추천:0  2019-05-28
본사소식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삶은 대체로 기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예정되어있는 리별을 감내해야 하는 슬픔의 감정 역시 함께 가지고 있다.   뻔한 만큼 확실한 재미와 감동이 있고, 유치한 만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 《베일리 어게인2((一条狗的使命2)》가 5월 17일 개봉과 동시에 시즌1 못지않은 흥행세를 달리고 있다.   《베일리 어게인2》는 52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소설에 오른 《내 삶의 목적》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내 삶의 목적》은 미국에서만 100만부 이상 판매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프랑스, 터키 등 29개 국에서 번역, 발간되여 각국의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영화는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시간을 현실적으로 담아내면서 예정된 리별에 반려인들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지를 ‘환생’이라는 설정을 통해 따뜻한 위안을 전한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베일리’는 그간 함께 해왔던 주인 이슨과 리별을 맞이하게 된다. 전생의 기억을 유지하면서 다시 환생하게 된 베일리는 주인 이슨의 당부대로 그의 손녀 ‘CJ’ 곁을 지킨다. 베일리는 자신이 왜 태여났는지 궁금해하면서도 지금 현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충실할 줄 안다. 동물영화의 묘미는 그러한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제3의 눈으로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CJ가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고, 가족에 변화가 생기는 등 주인공들에게 닥치는 사건 사고마다 베일리가 함께 하면서 자신의 ‘견생’ 경험치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인생 경험치가 어떻게 쌓여나가는 지를 목격하고 들려준다.   매일을 행복하게 사는 것, 함께 하는 것, 이 영화를 보면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게 느낀 것이 함께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홀로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하지 않다. 사람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일 때 비로소 행복한 것이다. 행복하게, 함께,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인간들에게 전달하고저 하는 가장 절실한 목적이 아닌가 싶다.   료녕신문 김연혜 기자     종 합료 녕사 회경 제> [료녕뉴스]심양시조선족배구협회 성립 [동포뉴스]심양시조선족배구협회 성립 [료녕뉴스]무순시심무신성조선족소학교 조선어 과문극 표현활동 가져 [교육]무순시심무신성조선족소학교 조선어 과문극 표현활동 가져 [료녕뉴스]북경대학 조선족재학생 인재양성포럼 및 제1회 중한경제발전협력 교류포럼 북경서 [료녕뉴스]하로하조선족향 ''''제2회 진달래가요회'''' 개최 조선족특색향진건설에 박차 [료녕뉴스]시와 시인의 만남 오이오시합평회 심양서 [문화]시와 시인의 만남 오이오시합평회 심양서 [료녕뉴스]항일유적지 답사 실기(2) 그 산 그 강은 기억하네 [문화]항일유적지 답사 실기(2) 그 산 그 강은 기억하네
46    네모의 힘(심명주) 댓글:  조회:1683  추천:1  2019-05-07
[두만강칼럼] 요즘 좋은 공지 하나를 접했다. 서법이 공식적으로 중학교 과외 학과로 지정되였다는 것이다. 온라인과 더불어 산잡한 말과 글들이 람발하는 이 시점에 문자에 대한 정확하고 경외스러운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겨보게 되는 시점이다. 《말모이》(국어사전)라는 영화도 보았다. 언어말살정책으로 창궐하던 일제강점시기 우리말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사전으로 편찬한 4인의 력사실화를 모티프로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그러면 평화시대의 지금, 우리는 어떻게 우리글을 전승해가고 있는가? 한마디로 잘 지키지 못한다. 요즘 같으면 우리말의 네모가 다슬어버린 느낌이다. 그런 표현에 적절한 곳이 온라인이다. 우선 위챗대화에서 표준어와 띄여쓰기 같은 개념을 무시해버린 경향이다. 게다가 우리말에 한어, 영어, 일어가 뒤섞여 표현되는 것도 다반사이고 외래어도 사투리도 아닌 언어들도 람발한다. 종이로 된 글을 읽던 지난날에는 비록 새로운 글과 소식을 접하는 시간이 느리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인내와 끈기로 배웠고 더우기 표준언어거나 문자의 정확한 사용을 철칙처럼 고수하고 지켜나갔다. 지금은 그런 것이 삭제된 채 고증이 없는 언어들이 만연돼간다. 아무리 글로벌이라지만 우리만의 독특함이 바탕이 되여야 변형이 가능하다. 더우기 심장박동수보다 더 빠른 터치로 순식간에 세계 수많은 소식을 접하는 시대, 개인의 사생활이든 타인에 대한 뒤담화든 손가락 하나로 찰나에 퍼뜨리고, 대화글도 정제할 사이가 없이 즉석 스피드로 의사전달만 하면 그만이다. 발 빠르게 달리는 온라인으로 사고할 뇌를 잃어가는 시대이다. 위챗대화중에 요즘은 표준어를 구사하기가 난감할 정도이다. 개념 있는 누가 한소리라도 하면 당장 ‘꼰대취급’을 받는다. 언어가 정체성을 잃어가니 세대가 막돼먹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어디서부터 이런 혼란을 가져왔는가. 온라인만 탓할 일이 아니다. 우선 이미 부모세대에서부터 자신들의 근거지를 협소한 울타리로 오식하고 자녀를 위해 뿌리와 문화터밭인 자기말 자기글의 학교 교육을 거부하였다. 어릴 때부터 받은 옳바른 문화교육은 손오공의 ‘여의봉’과 같다. 압축되여 귀속에 감춘 듯하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무한대 작용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사람의 ‘대’고 한 군체의 자부심이다. 그리고 갑자기 불거진 경제붐으로 많은 부모들이 한창 부모 사랑과 부모 교육이 절실한 자녀들을 뒤로 하고 외국, 타향으로 떠났다. 우리 사회에는 이 때문에 한동안 조손가족이 성행하여 그에 유발되는 문제까지 다루던 상황이다. 그런 부모세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자녀들은 이미 장성하였다. 되려 분투와 자립이 필요한 시점에 부모들은 자식에게 그동안의 보상으로 집과 차, 결혼비용까지 도맡아 해결해주었다. 이들은 자수성가하면서도 끄떡없이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던 우리 세대와 다르다. 흔들리는 뿌리는 깊은 그늘의 가지를 키우지 못하며 나무잎도 쉽게 떨어진다. 쉽게 얻고 보상심리가 다분한 이 세대가 기성세대요 ‘나무잎세대’이다. 이 와중에 온라인이 만연되였다. 위챗, 틱톡… 얼굴을 맞대고 눈길을 마주치면서 나누는 얘기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공손하고 례절스러워지지만, 온라인은 얼굴까지 가리울 수 있는 곳이 아닌가. 근본이 약소하면 이런 곳일수록 언어구사가 란잡하다. 그것은 늘어나는 요즘의 언어장난과 ‘댓글부대’와도 직결된다. 결론적으로 제대로 된 우리 언어가 힘을 발휘할 곳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 지구에 사는 2천여개의 민족중에 언어와 문자를 겸비하고 백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글은 140개 밖에 안된다는 통계이다. 중국이라는 대국에서 180만명을 웃도는 우리가 사용하는 조선족언어는 그중의 하나이다. 틈없이 네모난 우리 문자처럼 합심되여 바르게 지켜가야 되는 때가 지금이다. 그런 의미로 십세되는 아들에게 서법을 시켰다. 검은 먹을 찍어 한획한획 힘 있게 새겨지는 문자를 볼 때마다 그 속에서 미약하나 강한 힘을 확인하고 더불어 희망을 바라보다가 나도 어느덧 동참하게 되였다. 더우기 요즘 부쩍 많아진 문화행사에 그래서 ‘훈민정음’이 새겨진 한복을 일부러 착복하고 나선다. 길림신문  
45    안타이오스와 조선족(최학송) 댓글:  조회:1643  추천:1  2019-04-19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안타이오스라는 거인이 등장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땅의 녀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여난 안타이오스는 리비아 땅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레슬링시합했는데 힘이 워낙 장사여서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어느 날 안타이오스는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와 힘 겨루기를 하게 되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최고의 영웅이며 그리스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헤라클레스조차 안타이오스를 맞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싸움 끝에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가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무궁무진한 힘을 발산함을 알게 되며 안타이오스를 높이 들어올려 허공에서 목을 졸라 죽인다. 땅의 녀신 가이아의 아들인 안타이오스의 힘의 비결은 땅에 있었다. 땅은 안타이오스의 태줄이 발원한 곳으로서 그의 힘의 원천이였다. 땅과 함께 할 때 그는 초인적 힘을 가졌지만 땅을 떠나는 순간 자신의 목숨마저 잃었다.   순경(順境)과 역경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인생이다.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힘들고 외로운 순간이면 생각 나는 단어들이 있다. ‘집’, ‘부모님’, ‘고향’ 등 현재의 ‘나’의 뿌리, 즉 출발의 원점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 이런 뿌리, 출발점과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족보’이다. 족보는 가문의 력사책으로 불린다. 하지만 단순히 가문의 력사를 기록하는 것만은 아니다. 족보는 후손들에게 하나의 전통을 만들어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긍지감을 갖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것을 이겨나가는 무언의 힘과 동력의 원천이 된다. “조상님들에게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혹은 “이 정도의 난관은 언제나 있었으며 나의 조상님들도 잘 이겨나갔다”는 자신감을 갖고 다시 한번 역경에 도전하는 받침목이 되는 것이다.   족보가 한 집안의 뿌리로서 그 후손들에게 힘과 용기를 가져다주는 ‘안타이오스의 땅’과 같은 존재라면 한 민족에게 있어 이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 문화와 력사가 되겠다. 개혁개방 이전, 조선족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주로 동북삼성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집거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특히는 1992년의 중한수교 이후 조선족의 이런 거주환경과 종사업종은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족들도 차츰 동북을 떠나 북경, 상해, 청도, 광주 등 연해 대도시나 한국, 일본과 같은 해외에서 새로운 삶의 공간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가령 동북에 남아있어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할빈, 장춘, 심양, 연길 등 도시에 이주하여 도시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조선족은 더는 주로 동북에 거주하는 농경민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게 되였다. 또한 이렇게 여러 도시들에서 소수자로서의 삶을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잃고 삶의 기억으로서의 ‘력사’도 망각해가고 있다. 언어, 문화, 력사와 같은 이런 민족의 ‘뿌리’를 익혀두는 것이 급속한 변화를 거듭하는 도시에서 물질적 부의 창조라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비효률적일지 몰라도 드바쁜 일상이 가져다주는 고민과 방황, 그리고 내면의 공허를 치유하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출신과 신분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도시 공간에서 타자 앞에 떳떳이 자신을 소개하고 생활해가는 사회적인 면에서도 필요한 존재이다.   조선족의 삶의 공간과 방식이 농촌에서의 집거생활로부터 도시에서의 분산생활로 변화되여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시대적 추세이다. 우리의 언어, 문화, 력사를 지탱해주던 우리만의 공동체로서의 현실적 삶의 공간이 갈수록 위축되는 현실에서 그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가상의 인터넷 공간이다.   만물을 이어놓는 것이 인터넷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연해도시나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로 삶의 공간을 넓혀나간 조선족들은 하나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요즘은 스마트폰과 무선인터넷이 결합되면서 수시로 원하는 사람과 교류하고 필요한 정보를 검색해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정보의 교류와 전달이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고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또 현실적 삶의 공간에서 약화된 조선족 공동체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재현하고 강화할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우리의 문화와 력사 그리고 삶의 희로애락을 가능한 많이 콘텐츠화하여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민족적인 콘텐츠에 대한 상호 선전과 관심도 필수적이다.   직장 동료나 우연히 만난 누군가가 “아, 조선족이세요. 조선족에 대해 조금만 소개해줄 수 있어요.” 라고 할 때 “미안하지만 솔직히 민족만 조선족이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답하는 것은 “할아버지 성함은 무언지, 무얼하셨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근대 이전에는 족보의 유무를 두고 ‘뼈대 있는 가문’과 ‘근본이 없는 집안’을 갈라보기도 했다. 잊혀져가는 민족의 ‘뼈’와 ‘근본’을 되살려 후대들에게 힘들 때 기대이고 용기를 되살리게 하며 나아가 남 앞에 당당해질 수 있는 ‘안타이오스의 땅’을 만들어주는 작업이 필요한 리유이다. 이 ‘안타이오스의 땅’은 급변하는 현실을 살아가는 조선족들에게 있어 ‘정해신침(定海神針)’의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안타이오스의 땅’을 잃었을 때 조선족도 도시라는 ‘헤라클레스’에 들려 사라지고 말 것이다. 흑룡강신문
44    지방(地方)과 지방(脂肪)--예동근 댓글:  조회:1505  추천:0  2019-04-16
요즘 내가 관심하는 것은 다이어트이다. 최근의 다큐멘터리에서 소개한 “일일일식”(一日一食), 수많은 체널에서 다이어트를 소개하며, 다이어트 실패로 겪은 “요요현상”의 고통을 얘기할 때, 나도 빨리 몸의 “비게 덩어리”를 처리해야지, 단단한 근육질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지 하면서 다이어트에 집중하고 운동에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지방”하면, 나의 뱃살(脂肪)이 떠오르지, 내가 먹고, 자고, 일하는 공간과 장소로서 지방(地方)은 점차 잊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하여 보면, 먹고, 자고, 일하는 작업장과 쉼터로서 지방, 그리고 노동의 안락성과 만족도가 높은 지방(地方)이 내 뱃살을 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확 떠올랐다.   얼마 전 중국의 장수마을(長壽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이미 “100세시대”를 앞당겨 실현했는 것이다. 산 좋고, 물 맑은 호수, 세상과 격리된 공간에서 조용하게 전통문화를 유지하면서, 규칙적인 생활, 오염되지 않은 식수와 하늘이 내려준 유기농 건강식품은 이들의 장수할 수 있으며, 날씬한 몸매를 가진 비결인 것 같다. 조금 더 한국, 일본 등 장수지역을 보면, 풍토인정이 장수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오늘날 지방의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베이징, 서울, 동경의 수도권보다 높거나, 비만도는 떨어지고 있다는 유의미한 통계자료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수도권의 수명이 좀 더 길게 나올 수 있으며, 날씬한 사람도 수도권이 좀 더 많을 수 있다. 즉 개인의 건강은 이미 정치경제적 공간으로 더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설사 베이징에 황사와 스모거가 엄중하여 자연환경은 열악할 수 있지만, 중국의 빈곤한 농촌지역보다 훨씬 수명이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다이어트의 실패를 지극히 개인적 문제로 보고 있으며, 비만은 개인의 “탐욕”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조금 더 사회적으로 보는 것이 “도시병”으로 귀결시키지만, 비만자가 사적영역에서 이야기할 때, 개인의 비만을 사회적 요인으로 귀결시키면, 주변사람들의 놀림을 받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비만자에 대하여 동정보다 멸시가 앞서며, 집단의 문제보다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사실,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지방(地方)의 문제도 중앙-지방의 관계에서 볼 때, “비게덩이리”인가? “탄탄한 근육질”인가의 논쟁의 지속이다. 고속산업화, 도시화, 성장시대에 지방은 말라꽹이로 변하고 수도권은 뚱보로 변하면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이유는 “그래도 싸움에서 덩체가 큰 놈이 이긴다”는 슬로건이었다. 그래서 거대한 동경, 서울, 베이징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동경은 벌써 다이어트의 시대를 감지하면서,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지방분권화를 실시하였고, “착한 성장, 똑똑한 복지”로 전환에서 베이징, 서울보다 앞서고 있다. 그러나 동경은 주택가격 폭락의 뼈아픈 대가를 치르면서 다이어트비용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베이징과 서울의 탐욕은 끝이 없다. 황사, 스모그가 가중되지만, 베이징에 인구와 주택은 오히려 과밀화되고, 농촌지방의 공동화는 더욱 심각하여 지면서, 대도시의 다이어트 실패와 그로 인한 “요요현상”이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수십년간 지방은 수도권을 위해 20대 청춘의 탄탄한 근육질을 소모하면서 헌신하였지만, 50대에 들어서 얻은 걷은 수도권이 다이어트를 위해 던진 “비게 덩어리”이다. 이것조차 각 지자체를 중심으로 대형국책사업을 기획하여 정신없이 받어 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중국의 지방도시들은 정신없이 번쩍번쩍 빛나는 정부청사를 짓고, 땅을 팔아 부동산을 개발하면서 수도권이 예전에 하는 방식대로 “큰 수도, 강한 수도”를 벤츠마킹하여 “크고 강한 지방”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있으며, 그 간판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지방이여, 이제는 20대 청춘의 지방이 아니다. 우리 몸 전체의 고속성장은 지나갔고, 장기는 50대에서 100세까지 노후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고령화시대에 처해있다. 중앙이 던져 준 “비게 덩어리” 얻어 먹어면서 눈치 보아야 하고, 정신없이 먹어치워 뚱뚱한 몸매에 입술에 기름이 번지러 발리면, 촌스럽고 아둔하다고 비웃음을 받고 있는 것이 지방이다.   중국과 한국의 지방들은 이제는 번쩍 정신 차려야 한다. 내 몸을 수도권에 맡겨서 절대 “근육질”이 좋은 몸매로 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지방의식을 갖고, 지방분권화를 해서 내 몸은 내가 알아서 관리해야 조금이라도 오래살 수 있고, 날씬한 몸매를 가질 수 있다. 흑룡강신문
43    [대림 칼럼] ‘차별’에 대하는 자세(전은주) 댓글:  조회:1720  추천:1  2019-04-10
       한국 개그 프로에는 심심찮게 조선족 캐릭터가 등장한다. 십 년 전쯤에 강성범의 과장된 몸짓과 우스꽝스러운 ‘연변말’로 “우리 연변에서는”으로 시작하는 ‘연변총각’이나, 이수지의 “당황하셨어요, 고객님?”으로 시작되는 ‘보이스 피싱’ 전화나, 김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고 떼어먹는 개그맨의 형상 등으로 조선족을 희화화한다.   한국의 많은 시청자들은 재미있는 개그로 받아들여 인기 코너가 되었지만, 당사자인 조선족들은 그것을 조롱과 혐오로 받아들여 분노했다.   “우리를 우스개거리로 삼다니! 동포를 이 따위로 박대하다니!”   거개의 조선족들은 화면에 비치는, 깔깔거리며 웃는 그 관객조차 다 없애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화가 났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들의 그런 행동에 대해 의문이 풀리기 시작한 계기는 경상도 출신 어떤 교수님의 일화를 들은 뒤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경상도에서 자란 ‘촌놈’이었다. 60년대 중반에 진학을 위해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 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와서 그에게 말을 붙이고는, 그가 하는 경상도 사투리에 박장대소를 했다. 그가 밖에 나올 때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를 보고 멀리서 소리쳤다.   “머라카노! 와 그람니꺼! 개안슴니더!”   그 시절에는, 그가 버스를 타거나, 가게에 가서 사투리를 쓰면 사람들이 신기한 듯 구경을 했고, 또 누군가는 흉내를 내며 깔깔거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말이 웃음거리가 될까봐, 말도 잘 못하다가 급기야는 말을 더듬거리게 되었고 대인기피증도 생겼단다.   KBS2TV 개그콘서트 '황해' 의 한 장면   70,80년대까지도 한국의 TV 드라마에 나오는 가정부나 노동자 역할들은 모두 경상도나 전라도 말을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울말이 아닌 기타 말투를 쓰는 사람은 모두 ‘촌놈’으로 취급하여 조롱거리로 삼은 것이었다. 악의가 없이 사투리가 신기하고 재밌게 들려서 그랬을 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촌놈’은 이미 ‘문화적 불평등’이란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다가 한국 사회는 박정희를 시작으로 줄줄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까지 경상도 사람이 대통령을 지내게 되었고, 웃음거리로 삼았던 경상도 말이 판을 쳤다. 어느 대통령은,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강간(관광) 도로를 내겠슴니다, 여러분!”이라고 당당히(?) 말했을 지경이었다.   “이솦우화”에 연못가에서 재미로 돌팔매질을 하는 소년과 개구리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소년들은 개구리들의 목숨이 걸린 줄 모르고 재미로 연못에다 돌멩이를 던졌다. 개그거리로 삼는 그들의 행동은 자칫 그 소년들과 다름없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조선족을 비롯한 해외동포 및 동남아 등지에서 오는 외국인 노동자 등으로 다문화적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촌놈’들이 대폭 늘어났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만’ 그들의 조롱 대상이 아니라, ‘조선족도’ 그 범주에 속했다는 의미이다.   한국인들만 그런가? 최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Green Book, 2018) 에는 미국의 천재 흑인 피아니스트가 등장한다. 백인들로 구성된 상류사회는 그를 초청해 그의 천재적인 연주를 감상하고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하지만, 정작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연장 화장실을 못 쓰게 하고, 공연하는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60년대 미국 남부의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오늘날까지 미국사회는 흑인이나 동양인에 대한 차별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한국에서 인종차별을 가하던 사람도 해외에 나가면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실제 '그린북'표지, 그린북은 60년대 미국 남부유색인종이 숙박할 수 있는 전용호텔 안내서이다.   결국 ‘구별 짓기’와 ‘차별’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문제이다. 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불완전성’의 속성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것에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느끼고 차별화 하고, 그 대상이 자신보다 강한 존재가 아니라 약한 존재라면 거침없이 ‘갑질’을 하는 것이 사람의 ‘원초적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촌놈’들은 그냥 당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그들이‘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분개할 수 있다. 그러나 배려가 부족한 것은 ‘상대의 몫’이고, 우리는 상대보다 더 나은 행동을 찾아내어 품격을 지키면 그게 ‘우리의 몫’이 될 수 있다.   한국의 개그프로에 ‘촌놈’만큼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는 대통령이나(SNL “여의도 텔레토비”), 회장님(개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또는 정치인(개콘 “민상토론”) 등이 있다. 정권의 성격에 따라 자신의 권력으로 코너를 폐지시키는 사례도 있지만, 반면에 ‘개그’를 통해 국민들과의 소통을 도모하면서 너그러움의 증표로 삼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쉽게 분노하거나 자기혐오에 빠질까? 개인이나 집단은 어떤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할 경우에 그 충격으로 ‘정신적 외상’을 입게 된다. 그 외상이 역사적 사건에 기인했을 경우 ‘역사적 트라우마’로 명명한다.(Dominick LaCapra, 육영수 편역,
42    창업정보의 허와 실□ 최복 댓글:  조회:1625  추천:0  2019-03-12
하루에도 수십개 지어 수백개씩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창업정보,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가. 인터넷에서 ‘창업’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실제 필요한 창업에 관한 ‘진짜’ 정보는 찾기가 쉽지 않다. ‘창업’키워드의 검색결과는 사실 검색란에 클릭하는 순간부터 프랜차이즈 가맹 본사들의 가맹모집 광고 그리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언론의 수많은 창업홍보 기사 등이 거의 광고성을 띠는 정보들로 넘쳐난다. 또 점포매물의 허위 과장광고는 앞다투어 경쟁하듯 자극적으로 묘사하거나 과도하게 부풀려져 그럴싸하게 포장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다. 일부 광고나 정보는 심지어 ‘100% 보장’, ‘실패률 0%’라는 문구를 내걸면서 자신들의 브랜드를 선택하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하다.  그 뿐만 아니다. 검증이 안된 홍보성 기사들은 예비창업자, 초보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요즘은 특히 위챗, SNS, QQ 등 다양한 앱들이 생활화 되여있어 별의별 희한한 창업정보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정보들이 ‘알짜배기’는 아닐 것이고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가 진짜일지 궁금하고 또 실체에 대해 알아야 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 물론 성공적인 사업을 위해선 적절한 광고와 마케팅이 필요하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많게는 전 재산을 투입하는 창업자들에게 허위와 과장 광고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할 일이다. 있지도 않는 것을 있다고 하고 되지도 않는 것을 된다고 하는 것은 창업에서 첫 걸음마를 떼려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배신이자 심지어 평생 그 누구한테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다. 그만큼 처음 창업을 시도하는 ‘초보 창업자’들에게 정보의 허와 실을 구분하기란 매우 힘들다. 우선 프랜차이즈 가맹점 모집 광고 또는 모 상품의 대리상모집 등은 100% 그대로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매출 대비 수익률에서도 가맹비, 집세, 보증금, 종합소득세, 부가가치세, 인건비 등 다양한 투자비용으로 계산한 후 실질적인 수익을 따져보아야 하는 판매구도를 이루고 있기에 ‘빚 좋은 개살구’식의 창업은 결코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 프랜차이즈 브랜드 또는 점포 자체가 세워진지 1~2년 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검증이 안된 가맹점 또는 브랜드 홍보에 대해선 무조건 신임하면 안되며 최소한 3년 또는 그 이상 운영한 가맹점의 비중을 참고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프랜차이즈 브랜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관리나 제재의 상급 전문기관을 직접 찾아가 상세한 내용을 사전에 료해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창업과 프랜차이즈 업계는 사실 아직도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부분이 많은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광고나 정보는 어디까지나 부풀려지는 부분이 없잖아 있다.  정말 믿을 만큼 든든하고 확실한 정보가 아닌 이상, 직접 발품을 팔아 되도록 많은 상가, 점포, 전문가, 전문기관 등을 둘러보고 관심있는 해당 아이템과 브랜드를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후 꼼꼼히 분석하는 일만이 초기 창업 실패률을 줄일 수 있다고 사료된다. 정보는 내가 가질 때만이 진실이 되지 않을가.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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