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netizin-1 블로그홈 | 로그인
netizin-1
<< 2월 2025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 

방문자

홈 > 칼럼

전체 [ 161 ]

21    연집강과 연길(허성운) 댓글:  조회:3967  추천:2  2017-11-16
지금까지 연길지명을 두고 많은 국내외 학자들은 나름대로 의미를 풀어내고 그 안에 담긴 뒷이야기를 적어왔었다. 하지만 연길지명에는 사람을 경악케 하는 섬뜩한 이미지가 음밀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어로 연길을 음역하면 엔기쯔로 발음되나 훈독하면 노부요시로 발음된다. 여기서 말하는 노부요시라는 단어는 옛날에 보검을 만드는 일본장인 이름으로서 그가 만든 류몬노부요시라는 보검은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노부요시라는 언어에는 무사가 기를 칼끝에 응집시켜 그 기가 검을 타고 밖으로 뻗어 나오게 되여 예리한 칼날이라는 숨은 뜻이 배여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광복 전에 룡정에 별명이 노부요시라는 한 일본 경찰서 서장이 있었는데 늘 자신의 군도가 노부요시 보검처럼 단단하고 예리하여 대적할 적수가 없다고 자랑하며 다녔기에 그 별명이 붙여졌다. 1945년 가을 쏘련군에게 잡혔다가 구치소에서 남모래 뛰쳐나온 경찰서장은 집으로 돌아와 어린 딸을 총으로 쏴 죽인 후 주택에다가 불을 지른 후 군도로 할복하여 자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가 놓은 불은 이튼 날에 가서야 겨우 진화되었다.   그럼 이런 일본 검의 섬뜩한 그림자는 어떻게 되여 연길지명에 비껴졌을까. 역사를 거슬러 연길지명을 꼼꼼히 캐고 보면 1900년 로씨아가 만주에 침입하여 중국동북지구를 짓밟고 1901년 일본을 비롯한 열강 세력이 청 정부를 압박하여 신축조약을 체결한 뒤 이듬해 10월 26일 청 정부가 연집강(煙集崗)에 연길청(延吉廳)을 세우면서 연길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연집(煙集)이라는 한자음의 소리를 바탕으로 연길(延吉)이라는 문자로 고치여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연길이라는 지명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9년 연길청을 연길부로 고치고 1912년 연길현으로 개명한 후에 여러 력사 기록에 대량으로 나타난다. 연자(延字)가 ,길자(吉字)가 ,연희(延喜)정, 연평(延平)교 등 연길의 주요 거리 다리 건축물 이름도 일본인들의 속셈에 따라 연길지명에 초점을 맞추어 표기되어 있다.   사실 연길의 최초의 지명을 따지고 보면 개척초기에 화전민들이 화전 밭을 일구면서 연기와 안개가 자오록이 덮여 있었다는 의미로 연집강(煙集崗)이란 땅 이름이 기원되어 있는데 그 후 사용한 연길지명과 뒤섞이면서 화전민의 력사는 운무 속에 가리어 오늘날까지도 이렇다 할 력사기록 한줄 남기지 못한 채로 세월의 비바람 속에 씻기여 사라지어 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예로부터 연집강 구역은 뒤로 깃대봉을 사이에 두고 두 평풍(병풍의 방언)산이 둘레를 감싸고 바람을 막아주는데다가 그 안에 경사도가 완만한 구릉지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야말로 천혜의 화전적지로 손꼽힌다. 완만한 경사지를 따라 개척초기에는 땅막집들이 감자처럼 여기저기에 박혀있고 그 사이로 석인골 태암 등지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남계마을 부근에서 연집강을 이루며 굽이굽이 휘돌아 남으로 부르하퉁하에 흘러든다. 경사진 화전 밭은 한쪽 발을 아래로 펴 딛고 한쪽 발은 구부려 허리를 펴고 일하는 모양이 되어 일 하는데 덜 피로 할뿐만 아니라 땅의 경사도에 따라 화전 불길이 세어지거나 약하게 조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말 뾰죽산아래 안방마을이라는 옛 동네에는 불붙이고래 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이 화전을 하다가 산불을 내여 그 불이 평풍산을 타고 타올라 몇 십리까지 불길이 번진 적이 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화전을 할 때 습기가 있는 눅눅한 날 밤을 골라 불꾸러미를 만들어 불을 지른다. 밤바람이 산 정상에서 아래로 불기 때문에 그리고 날이 어두워야 날아오르는 불티가 보이여 불길을 공제하기가 쉽다고 한다. 불을 생솔가지로 두드려서 막는데 밭 절반 넘어 불이 내려가면 밑에서 위로 맞불을 놓아 불이 잘 타오르게 하고 두 불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저절로 불이 꺼지게 하였다.   연집강 구역은 화전민의 삶의 문화가 무르녹아 흐르던 곳이다. 이 지역의 숫둘고래 부싯돌밭 삼밭고래와 같은 명칭들은 지난세기까지 해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리어졌던 땅 이름들이다.   그 옛날 화전민은 떠돌이 삶을 살면서 약초도 캐고 짐승도 잡았다. 이 지역 황초고래 방초고래 같은 지명은 오래전부터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겨난 명칭들이다. 연집강 구역은 두만강 강변과는 달리 생산된 작물을 회령 종성 온성으로 옮기는데 시간과 비용 그리고 위험이 따르기에 아예 산 여불때기(함경도 방언 비탈진 산기슭)밭 가장자리에 감자 움 같은 굴을 깊이 파서 저장하였고 겨울철에는 잡은 곰 가족을 벗겨 옷을 해 입고 곰처럼 구새 먹은 통나무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연무가 자오록이 뒤덮여 있는 연집강 지명에는 혹독한 세상과 맞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옛 선인들의 꺼지지 않는 삶의 불씨가 깜빡이고 빨갛게 연분홍 천지꽃이 물드는 산언저리에 안녕을 기원하던 화전민의 그 순박한 눈동자가 어리여 있다.   만일 석인골에 묻혀있던 돌사람이 입이 달려서 엉키고 설키여 있는 연길지명을 묻는다면 과연 어떤 답이 나올까. 하지만 석인골 있던 그 돌사람도 반세기 전에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지어 행적조차 묘연하니 연길지명 속에 감추어진 그 정체는 언제가야 사람들 앞에 드러날까.   화전민들의 파란만장한 력사가 아로새겨진 연집지명이 일제 침략자의 칼자루에 휘둘리어 연길지명으로 뜯어 고쳐지는 과정은 서글픈 우리 과거사가 숨겨져 있는것이다. 연변일보 2017.11.8
20    중국식 침 뱉기(유대식) 댓글:  조회:1881  추천:0  2017-11-07
   '아무 곳에나 가래침 뱉지 말고 담배꽁초를 마구 던지지 맙시다(不要随地吐痰,乱扔烟头)'. 중국의 공공장소마다 눈길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는 이런 내용을 담은 작은 팻말이 거의 걸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만큼 가래침을 함부로 뱉고 담배꽁초를 마구 던지는 것이 사회보편현상임을 말해주고 있다.   침을 휴지에 뱉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은 아직까지 극히 드문 것이 중국의 상황이다.   옛날에 침 뱉는 상황을 기재한 것을 아직 못 보아서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현대식으로 많이 깔끔해진 지금 환경에서 이런 상황이니 옛날은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말 대신 리홍장의 에피소드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리홍장이 흠차대신으로 파견되어 제정 러시아로 갔을 때이다. 차르 황제가 문무대신들을 거느리고 리홍장 일행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담화 중 리홍장이 '카악-' 하더니 걸죽한 가래침을 '퉤!' 하고 고귀한 손님을 모신다고 깔아놓은 붉은 주단 위에 뱉고는 발로 '쓰윽-' 문지른 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얘기를 계속해 차르 황제 및 대신들이 너무나도 당황한 기색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중국의 최고 엘리트가 이런 상황이었으니 보통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중국 사람들이 침을 마구 뱉는 것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은 듯 싶다.   또 한 가지 에피소드도 이걸 말해주고 있다. 지난 세기 초 한 중국인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갑판에서 한 일본 사람이 가래침을 '카악-'하더니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거기에다 뱉어서 다시 호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놀랐다는 얘기다.   중국인이 가래침을 뱉는 것을 포함해 위생에서 많이 텁텁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는 오랜 역사시기를 거친 사상관념, 자연환경 등 제면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 주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철학적으로 볼 때 중화민족의 근원적 철학은 도(道)가이다. 도가의 기본 사상은 '천지인합일(天地人和一)' 즉 인간이 자연의 한부분이라는 친자연, 자연복귀 사상이라 하겠다. 이런 사상이 일상 생활에서 구체적 현상으로 나타날 때는 흙과 먼지와 같은 자연 산물들을 배타하지 않고 그것에 융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또 자연환경적으로 볼 때 중국은 대부분 지역이 물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내륙지역이고 절반 이상의 지역이 겨울이면 물이 얼어버리는 지역이다. 그러니 위생을 지키는 관건 물질-물 사용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하여튼 역사적, 종합적, 원인으로 현대과학기술이 많은 편리를 가져다주고 문제 해결의 키를 쥐어주는 지금에도 중국인들의 위생 습관은 보편적으로 많이 텁텁한 상황이다.   중국 궐기의 열차는 분명히 시동을 걸었고 속도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거시적이고 실리적인 발전에 비해 형식적인 것, 감성적인 것, 표면적인 것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고 따라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중국의 실정이다. 아무리 진리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라도 합리적이고 적당한 형식과 어우러져야 기대 효과에 다달을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는 현재 자신의 형상에 큰 플러스 점수가 가해지는 형식적인 것, 감성적인 것, 표면적인 것에 보다 중시를 돌려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보편적으로 공인하는 보편국가, 모범국가가 되려면 바로 '중국식 침 뱉기', '중국식 길 건너기', '중국식 떠들기'… 등등 큰 문제 같지 않지만 실은 큰 문제인 이런 표면적인 결점들을 하나하나 개변하여야 명실상부한 선진성의 차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흑룡강신문
19    농산물 안정성과 소비자 인식(김준환) 댓글:  조회:1641  추천:1  2017-11-02
                      김준환 요즘 유기식품에 대한 관심이 류행처럼 번지고 있다. 친환경농법으로 생산하는 유기식품이 건강우려증으로 고민하는 소비자들의 건강수요와 맞물려 대접받고 있기 때문이다. 유기식품은 소비자 농산물 선호도조사에서도 일반 농산물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기식품을 리해하는 소비자들은 친환경인증 표시부터 확인하면서 질을 보장하는 유기식품을 가려서 구입한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건강한 삶을 위해 좋은 먹거리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전 전주 유기제품인증양성반이 연길시에서 소집됐다. 각지 유기제품인증기업의 대표들은 록색,건강 농산품과 식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바람에서 유기식품은 엄격한 인증표준을 지켜야 한다는 데 다시 한번 공감했다. 그들은 국제 유기식품의 발전수준에서 우리 주 유기식품 사업의 보완점을 찾고 일련의 발전과제로부터 우리 주 유기농업이 풀어야 할 문제점과 그 해답을 구했다.   80.8%의 삼림피복률 자랑하고 있는 우리 주는 지금 5개의 국가급 자연보호구와 8개의 성급자연보호구를 가지고 있으며 천혜의 기후적 조건으로 전국에서도 공인받는 "천연산소방, 생태정원 " 으로 불리우고 있다. 량호한 환경은 우리 주의 유기제품의 질량향상에 량질의 보장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간 우리 주에서는 농업구조의 전략적 조절을 중점으로 유기식품인증사업을 진행한데서 유기식품산업이 성장하였으며 건전한 농산물질량안전인증체계를 건립하였다. 무공해,록색식품,유기식품산업 발전에서 성과를 보고 있다. 인삼,식용균,농특산물, 연변황소 등 특색있는 우수제품의 재배, 양식, 가공업에서 표준 제정과 수정사업을 벌리였으며 국가급,성급 농업표준시범구의 건설을 다그쳐 보다 많은 농촌합작조직과 개인들의 표준화 발전수준을 높이여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올리고 있다. 지금 우리 주 유기식품 상황을 보면 유기제품인증증을 가진 조직이 75개 이며 106개의 증서를 따낸 상황에 그치고 있다. 우리 주 유기식품산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비자와 기업 자체가 유기제품인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따라서지 못하며 유기식품에 대한 인지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래농업의 성장동력은 유기농업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글로벌시대에 농업시장이 개방되고 치렬한 경쟁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우리 주 농촌도 과감히 환경친화형 농업으로 전환해 가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우리 주변에서 농업도 변해야 산다는 전략으로 친환경농업을 실천해 가는 젊은들이 늘고 있다. 연변삼보천연식품개발유한회사 리희연 리사장( "자연에 순응하는 아름다움...그 매력에 흠뻑 빠졋죠" 2017년 10월 12일 5면 게재)이 그중 한사람이다. 리희연씨는 "참농민" 이란 이름으로 유기식품농업을 실천하여 친환경농산물로 자신의 브랜드 립지를 확고히 하고 과감히 국내시장을 노크하고 있다.   친환경농식품의 미래를 밝다. 앞으로 친환경식품은 갈수록 시장규모가 커지고 전체 농식품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질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친환경농업은 더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연변일보 2017.11.1
18    휘청거리는 우리 말 우리 글 (이명수) 댓글:  조회:1868  추천:0  2017-10-23
       휘청거리는 우리 말 우리 글, 한글날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자          (흑룡강신문=하얼빈)추석 연휴를 앞두고 퇴근하면서 한 직원이 "즐거운 연휴 되세요"라고 말했다. 어법에 맞지 않은 말이지만 흔히 들어서 그런지 그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즐거운 연휴를 지내라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좋은 하루 되세요.",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행복한 명절 되세요."   귀에 익은 말이지만 비문(非文)이다. 이 말을 단순히 풀이하면 화자가 청자에게 '하루', '한가위', '명절'이 되라는 뜻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루가 되고 명절이 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뜻만 통하면 되지 뭘 그런 것을 따져?'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의미가 통한다는 이유로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의 말글살이가 한없이 어지럽혀지고 망가질 것이다.   어법도 법이고 문법도 법이다. 법은 공동체가 지키자고 정해진 것이다. 어법상, 문법상 맞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쓰는 것은 위법인지 뻔히 알면서도 교통법규를 어기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져서 사고를 유발한다. 어법 역시 문란해지면 이런저런 사고를 부를 수 있다. 거친 말과 무신경한 말이 씨가 되어 일어난 사고가 그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습관적으로 굳어져 버린 잘못된 표현들도 있고, 혹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쓰고 있으므로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표현들도 있다. 맞춤법, 어휘, 발음, 높임법, 외래어 표기 등에서 잘못 쓰이고 있는 표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0년 동안 글쟁이 겸 편집쟁이로 살아온 나도 모르는 것 투성이고, 헷갈리는 문법이 적지 않다. 저명한 국어학자라 할지라도 국어사전을 꿰듯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수고하세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인사말   "수고하세요"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고 자주 듣는 말이다. 특히 헤어질 때 인사말로 많이 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남발해서는 결례가 되는 말이다. '수고하다'는 '일을 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어렵고 고된 일, 즉 고생을 상대방에게 하라고 권할 수 없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와 실생활에서 쓰는 것이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단어를 많은 사람이 관용적으로 많이 써서 사전적 의미와 다르게 쓰일 수 있지만, 잘못된 표현을 사람들이 많이 쓴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표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좋고 친근한 인사말도 많은데 하필이면 '고생'하라는 악담을 한단 말인가.   직장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 열심히 하라고 독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권장할 인사말은 아니다. 그 상황에 맞는 느낌이 좋고 어감도 좋은 작별인사 말을 생각하여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최악의 용법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수고하세요" 하는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직급도 낮은 사람이 윗사람에게 '일 열심히 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상당히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다. 하지만 과거형인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괜찮다. '고생 많으셨지요?'라는 위로의 뜻으로 해석된다. 일을 하고 들어오실 때 쓰면 적절하다.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도 어법에 맞지 않은 대표적인 표현이다. '건강하다, 행복하다'는 형용사이다. 형용사는 청유형이나 명령형으로 활용할 수 없다. 명령형으로 쓸 수 있는 말은 '가다, 먹다, 일어나다' 따위의 동사이거나, '공부, 일, 운동' 따위처럼 '-하다'가 붙어서 동사형으로 쓰이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행복하게 지내세요" 하든지, "건강하게 계십시오"처럼 말해야 한다. 다만, "행복하세요?" 또는 "건강하십니까?"라고 물어보는 말, 곧 의문형으로 쓰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다.   또한, "행복하소서!"는 어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소서'는 간절한 기원을 나타내는 어말어미이다. '-하시기를(-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의 종결어미가 '-소서'이다. '-소서'는 명령형 어미가 아니므로 형용사에도 붙을 수 있다.   남편을 '오빠' 또는 '아빠'라고 부른다   남편을 '오빠' 또는 '아빠'라고 부르는 여자를 가끔 본다. 대단히 잘못된 호칭이다. 남편에 대한 호칭어, 지칭어에 어려움을 느끼는 아내들이 많은 것 같다. 결혼 전의 호칭을 결혼 후에도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는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듣기에도 거북스럽고, '윤리 도덕을 모르는 사람' 또는 '무식한 사람'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다.   '아빠'는 유아어이고,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를 직접 부르거나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아버님'은 남의 아버지를 직접 부르거나 지칭할 때,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부르거나 가리킬 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호칭, 지칭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다.   성인이 되어 시집가고 장가간 사람도 '아빠'라는 유아어를 서슴없이 쓴다. 심지어는 며느리가 깍듯이 모셔야 할 시아버지를 '(시)아빠'라고 부르기도 한다. 철들 나이가 되면 자기 아버지는 '아빠'도 '아버님'도 아닌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 이런 구별도 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철부지다. 성인이 되면 의젓하게 어른 말을 써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유아어를 쓰면 생각이나 행동에서 어린이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제대로 된 호칭은 예절의 기본 요소이다. 자신과 상대편의 나이, 위상, 대화 상황에 걸맞은 호칭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손윗사람에게 반말투로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버릇없고 예절을 모르는 것은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다. 모든 교육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 비롯된다. 문제가 있는 아이 뒤에는 문제를 가진 부모가 있다.   요즘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경어법의 관습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상도 심각하지만, 그나마 사용하고 있는 존댓말도 그 원칙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존대를 하지 않아도 될 경우에 높임말을 쓰고, 높임말을 안 써야 할 대목에서 필요 이상의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뜨거우시니 조심하십시오." 커피숍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극존칭 어법이다. 듣기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어서 더 문제다. '커피'가 주어인 문장에 '나오시다'나 '뜨거우시다'라는 극존칭을 쓰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말끝에 무조건 '-세요'나 '-시'를 붙이면 다 존칭이 되는 줄 아는 사람이 뜻밖에 많지만, 상품을 높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자고로 과공은 비례라 했다. 지나친 높임말 사용은 오히려 역효과를 줄 때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일본어 번역투와 영어 직역투 문장 수두룩   우리 사회에서는 일본식 용어나 구문, 일본식 조어,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직역해 놓은 듯한 일어 번역투와 영어 직역투 문장이 수두룩하다. 번역문의 영향은 우리 사회 지식인들이 쓰는 말과 글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사례는 워낙 많으므로 일일이 바로잡을 수도 없는 지경이다.   없어도 그만인 일본식 조어 '-적(的)', 일본어 주격조사 'の'의 남용 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조사 '-의'를 쓰면 문장이 짧아지고 간결해지는 효과가 있다. 이미 '-의'를 널리 쓰고 있으므로 남발하지 말고 꼭 쓸 곳에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포용할 것은 포용하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는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을 영어 직역투로 쓰는 대표적인 기형 서술어가 '-을 갖는다'는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잘 어울리는 서술어가 있음에도 '가지다', '갖다'를 남용하는 것은 영어의 'have+명사'를 '가지다' 또는 준말인 '갖다'로 단순 번역하는 데 익숙한 탓이다. 가지다는 소유의 개념 외에도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어 두루 쓸 수 있는 단어이긴 하지만, 잘 분별해서 써야 한다. 전시회나 전람회, 박람회, 품평회, 공청회 등은 '한다', '연다', '개회한다'고 하는 것이 옳다. 워낙 난무하는 영어 번역체에 익숙하다 보니 오히려 우리말이 어색해졌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며 전부라고 판단하는 오류도 적지 않다. 이 글에서도 몇 번 사용한 '경어(敬語)'라는 단어도 일본어에서 온 말이니 '높임말' 또는 '존댓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보았다. 너무 지나친 감도 있지만 우리말을 찾고 지키려는 그런 노력은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의도에서 국어사전이나 간행물의 잘못된 부분을 자주 지적하는 그런 분들 덕분에 바로잡힌 부분이 적지 않다. '벤토'가 '도시락'으로, '와루바시'가 '나무젓가락'으로 바뀌었듯이 우리가 쓰고 있는 일본말을 제대로 알려주기만 해도 한글 순화에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신문과 방송이 퍼뜨린 잘못된 말   현대는 세계화 시대이다. 도도한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지구촌 모든 나라가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세계를 무대로 하는 현실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영어 등의 외국어 교육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학업이나 일에 필요하다면 영어, 중국어, 일어 등을 배워야 경쟁력이 있다. 하지만 근본은 우리말이다. 근본인 한국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외국어도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 그런데 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조기 외국어부터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싼 돈 들여 얼치기를 만드는 교육이다.   그래서인지 날이 갈수록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치기 인간들이 넘쳐난다. 요즘 잘못 쓰는 높임말부터 정체불명의 외계어까지 일상에서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다. 엉터리로 표기된 낱말이 너무 많다. 일상에서 외국어를 생각 없이 쓴다. 노래 가사는 태반이 영어투성이다. 그것도 우스꽝스러운 K팝 콩글리시 가사라서 국제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영어 발음과 철자를 틀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면서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것에 창피한 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SNS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심각성이 더하다. 비속어와 은어가 난무하다. 절친, 즐감, 열공, 훈남, 완소, 솔까말 등의 줄임말 표현은 빠르게 전달할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또래끼리 어울리면서 쓰는 그들만의 은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그것도 한때이고 지나고 보면 추억으로 남는다. 성장기 때 사용하는 은어는 어느 시대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심한 비속어도 많은 듯하다. 존나, 똘추, 열폭, 담탱이, 개, 처, 레알, 찐찌버거 등 알아듣기 어려운 은어와 욕설이 뒤섞여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외계어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비속어를 습관적으로 쓰면 상스럽고 천박한 사람이 된다.   우리네 말글살이가 날로 거칠어지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교육과 방송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영어 지상주의 교육에 국어가 너무 홀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영어 철자법에는 자신이 있는데 한글 맞춤법은 어렵다고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하는 지식인을 본 적도 있다. 그것을 결국 우리말을 소홀하게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영어 공부하는데 썼던 노력과 정성을 10분의 1만 썼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   세계 공용어로 간주하는 영어 교육의 중요성은 공감하지만, 모국어보다 우선시되는 영어 교육은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다. 아무리 세계화가 시대적 요청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생활 기반과 터전의 언어 체계는 한국어이다.   인터넷과 방송이 언어 파괴의 주범이라는 말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주요 언론이 앞장서서 우리말을 파괴하고 있다. 방송 프로 제목과 신문 제목부터 영어투성이고, 그 내용 속에는 온갖 것들이 잡탕이 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 특히 방송이 갖는 영향력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정확한 표준어가 사용되는 뉴스 프로그램에서 외래어, 외국어가 불필요하게 많이 사용되는가 하면 어법이 틀린 말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오용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말과 글의 전문가 집단에 있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언어 질서를 파괴해 버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와 시청자에게 돌아간다. 방송에서 잘못된 우리말을 지적하지 않고 사용하다 보니 분별없는 국민이나 학생들은 잘못된 말인 줄 모르고 공공연히 사용하는 것이다. 방송 말은 당연히 표준어를 구사하고 한글 맞춤법에 맞아야 한다.   틀린 말도 귀에 익으면 자연스럽게 들린다   어법에 틀린 말도 자주 들으면 자연스럽게 들린다.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들린다고 해서 바른말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연스러운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 표현이 우리말 어법에 맞느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쓰더라도 틀린 것을 바로잡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하고 자주 쓰면 표준어나 관용구로 자리 잡을 날이 올 것이다.   예컨대 '자장면'이 표준어임에도 한국어 사용자가 주로 '짜장면'으로 쓰기 때문에 언중의 입말을 존중하여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어법이 언어 대중보다 우선하지는 않는다. 표준어는 중요하지만 생활 속에서 쓰는 말도 중요하다. 표준어에 지나치게 매달려서 표준어와 다르다는 이유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도 좋은 자세는 아니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거나 교정을 볼 때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한 나라의 정신은 말과 글에 있다"라고 했다. 문화의 으뜸이 말과 글이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멜 선생님이 우리에게 프랑스어에 대해서 차례차례로 말씀해 주셨다.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분명하고, 가장 완벽한 언어라고. 이를테면 어떤 백성들이 노예의 신분이 되더라도 자기 나라의 국어를 견실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가 갇힌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프랑스어를 우리들은 소중하게 지키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프랑스가 패하게 되는 바람에 소설 속 주인공이 살던 알자스 로렌 지역에서 프랑스어 사용이 금지되는데, 그 금지되는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을 어린 학생의 눈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아멜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을 마치며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적어 놓는다. 이 결말 부분에서 가슴이 찡해 오는 비장한 감동을 받는다.   문화 선진국 프랑스는 '국어 보호법'을 제정하여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국어를 보호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거실에 사전을 두고 들춰본다고 한다. 주체성이 있는 민족은 자기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잘 지킨다. 일찍이 주시경 선생은, 말과 글을 정리하는 일은 집 안을 청소하는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집 안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정신마저 혼몽해지는 일이 있듯이, 우리말을 갈고 닦지 않으면 국민정신이 해이해지고 나라의 힘이 약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강점기 때 조선어학회 사건과 같은 한글 탄압 정책에도 꿋꿋하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켜 온 것이다.   자연 생태계가 외래종에 의해 무너지듯이 문화 생태계는 무분별하게 쓰는 말과 글로 말미암아 무너지게 된다. 조야한 언어의 남용은 우리의 정서를 거칠게 하고 사회적 혼돈을 부추긴다. 신문 방송뿐만 아니라 거리의 간판과 상품 이름, 인터넷 포털 사이트도 외국어와 외래어가 넘쳐난다. 교육과 언론이 앞장서서 말글을 오염시키고 있는 관계로 출판도 시나브로 오염되었다. 하물며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겠다는 저자들조차 외국어와 외래어를 마구 쓰고 문법이 무시된 글을 쓰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네 말글살이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작가와 언론 방송인들은 우리말을 쉽고, 편하고, 아름답고, 세련되게 다듬어야 한다. 그것은 글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책무다. 정지용, 백석 등의 시가 우수한 것은 시 속에서 우리말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말은 그 사람 영혼의 표출이다. 품격 있는 사람은 말도 품격 있게 한다. 하나씩 맞는 표현을 익히고 생활에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노력할 필요는 있다.
17    긍정에너지의 실천론적 루적(리성수) 댓글:  조회:1577  추천:0  2017-09-28
‘긍정에너지의 원론적인 의미’(본지 9월 12일 2면)에서 우리는 개념과 특성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긍정에너지를 갈구하지만 대부분 경우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을 짚어보고 대안을 찾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곰곰히 따져보면 긍정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는 맹신부터가, 전기에너지를 충전하듯 입력식으로 하는 방법부터가 잘못됐다. 그런 방식 대로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긍정에너지는 실천 가운데서 조금씩 루적(沉淀)되는 것이다. 실천을 거쳐야 나만의 긍정에너지로 가라앉는다. 구체적인 일에 얽혀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달픔과 부딪쳐서 생긴다는 뜻이다. 고민과 부대낌 속에서 생성된 긍정에너지라면 믿음직하다. 그 밖의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되는 정보에 그쳐버린다. 그래서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는 것보다 하나라도 행동에 옮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사람일수록 생각이 깊고 행동에 빈틈이 적기 마련이다. 현장에서는 긍정에너지가 실천력을 팽배시킨다. 우리가 현장을 강조하는, 실행을 중시하는 리유는 따로 있다. 동질성을 띤 많은 힘들(노력, 주력, 진력, 압력, 의지력, 응집력, 집행력, 추진력, 상승력…)을 집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력(힘차게 밀고나가는 강한 힘)이 넘치는 실천은 거세차다. 박력을 충만시키는 저력(속에 간직한 든든한 힘)은 단단하다. 지와 행의 점진적 결합, 유기적 통일이 그 견고함이다. 그 결정(结晶)체에는 향심성이 작동하고 있다. 옳고 바른 것을 지향하는 구심점은 여러 힘들을 규칙적으로 뭉쳐 출력을 최대화한다. 많은 힘들의 복합반응은 긍정에너지가 폭발적인 위력을 갖게 한다. 갑자기 엄청난 기세로 터지는 막강한 력량인듯 싶지만 실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이다. 돌파구를 여는 것은 용맹함이지만 그 힘은 충동에서보다도 루적에서 형성된다. 우리 몸과 마음에는 무궁무진한 힘과 지혜가 비축돼있지만 우리는 제대로 발굴하지 못한다. 그 힘을 끌어내는 것이 실천 현장임은 알지만 나서는 데는 린색하다. 시련을 거친 긍정에너지는 기능으로 장착된다. 이런 선순환의 물고를 튼 것은 턴넬 같은 시간을 현장에서 견뎌낸 장인들이다. ‘불평, 불만, 부정, 부실, 불신, 불복, 불손, 불순, 불친절, 불통, 불용(不容)…’ 등 요소들도 우리의 모습이다. 특히 ‘불평 불만’은 리성을 잃고 조화로움을 깨뜨리며 자타를 해친다. 긍정에너지는 이런 요소들을 가차없이 반대하고 부정한다. 그런데 그 부정은 긍정을 위한 부정이다. 그리고 그 반대는 일이 되게끔 하기 위한 반대이다. 자기의 잘못된 점들, 다른 사람의 모자람을 돌이켜보고 보듬어야 한다. 긍정에너지로 일깨운다면 충동을 바로잡을 수 있고 소극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인 요소로, 실패의 과정을 교훈적 의미로 전환시킬 수 있다. 꾸준히 탐구하고 드팀없이 실행하는 것이 긍정에너지를 쌓는 항시적인 행동원리이다. 살아 움직이는 힘, 생동성에는 활성화가 내포된다. 생동하는 힘은 어려움에 눌리지 않으면서 초극성을 띤다. 긍정에너지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고 약동한다. 우리가 행해야 하고 지켜야 하며 키워야 할 긍정에너지는 다름아닌 앎의 실천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행하며 행하는 만큼 알게 되는 오래된 미래이다. 2017-9-28
16    인터넷 캠퍼스 대출에 요주의!(최미란) 댓글:  조회:1473  추천:0  2017-09-20
9월 6일, 국가교육부는 금후 그 어떤 인터넷 대출기구도 대학교 재교생들을 상대로 대출업무를 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강조했다. 또 정규적인 은행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맞춤형 소액 신용 대부금 업무를 취급하는 것을 격려한다고 밝혔다. 이는 일부 대학생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캠퍼스 대출금을 갚지 못해 학업중지 또는 자살하는 등 렬악화되고 있는 상황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적시적인 조치이다. 또 정규적인 은행을 통한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대출을 보장하겠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캠퍼스 대출’이란 쉽게 말하면 인터넷 금융기구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발급하는 소액대출이다. 학업과 학교생활에 돈이 부족할 때 소액의 대출은 대학생들에게 가물에 단비 격이다. 문제는 이런 점을 노려 많은 인터넷 대출기구들에서 쉽고 싸게 대출받을 수 있다는 허위광고로 대학생들을 유혹해온 점이다. 이런 유혹에 말려들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대학생들의 몫으로 전락된다. 올 3월, 복건성의 한 대학생은 캠퍼스 대출로 800원을 빌렸는데 복변리로 인해 상환해야 할 빚이 20만원에 육박했다. 월 리자가 ‘0.99%’, ‘낮은 리식’이라는 가상을 안겨주지만 플랫폼 봉사비에 체납금까지 합치면 년리자가 36%를 초과했던 것이다. 안휘성의 한 대학생은 지난해 캠퍼스대출로 2000원을 받았는데 나중엔 돌려막기 식으로 59개 대출업체에 엮이다보니 불어난 돈이 50만원에 치달았다. 그의 아버지는 빚을 갚기 위해 결국 집을 팔아야 했다. 9월 4일, 금방 개학한 섬서항공직업기술학원의 한 학생이 캠퍼스 대출금 상환 압력을 못이겨 자살했다… 년령구조상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성인이라지만 아직 부모의 도움으로 생활, 학습하고 있으며 생활재테크의 경력이 거의 없다보니 대출이 파생하는 리스크에 대해 심각한 인식이 없을 정도로 ‘백지장’이다. 하지만 이들의 소비수요는 상대적으로 왕성한편이다. 조사에 따르면 많은 대학생들의 캠퍼스 대출 주목적은 사치형 소비를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소득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과소비에 젖어서 남들과 똑같이 생활을 영위하려는 대학생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 캠퍼스 대출이 몇년 사이에 성행하는 리유라면 리유이다. 대학생활에서 공부에 몰두할 대신 과소비를 따라가는 대학생들이 인터넷 캠퍼스 대출업체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 시류를 급급히 따라가기보다는 랭철한 사고와 판단이 요청되고 있으며 자기의 통제력이 자못 필요하다. 자칫 자기관리를 늦추면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때문에 학교나 가정 또는 사회적으로 이런 문제에 대비한 적절한 대책이 필요하다. 이런 시점에서 국가교육부에서 불법 캠퍼스 대출을 전면 금지한 것은 현실에 적합한 시의적절한 조치이며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이다. 한편 대학생측에서도 더는 과소비로 인한 대출 등 비리성적인 행위를 자제해야 할 것이다. 학교와 가정에서도 대학생들에게 필요한 금융상식을 익히도록 도와주고 리성적인 소비를 하도록 권장하고 이들이 자기계획, 자기관리를 더욱 잘하도록 적극 유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대학생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각계에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변일보 2017-9-20
15    우리 전통음악의 봄날은 다시 오는가(박영일) 댓글:  조회:1308  추천:0  2017-09-14
                    박영일 신생 단체인 연변조선족전통음악연구회는 작년 말에 설립되어 연변의 전통음악을 부흥시키겠다는 일념 아래 한달에 한번씩 전통음악을 대중에게 공연하여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겠다는 약속과 다짐을 선언하였다.며칠전인 9월 10일부로 제9회 메아리 악단과 함께 하는 우리음악 콘서트를 마침으로 아직 1년이 채 되진 않았지만 그 약속을 지켜내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각 개인들의 일정으로 단체공연을 어김없이 지키고 있는 모습은 같은 예술가로서 자긍심과 그들의 의지와 노고에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여러 번의 공연 속에서 여러가지 공연수단들이 동원되었는데 단순히 현장공연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파를 동원하고 활동 범위가 넓은 젊은층을 공략하기 위해 아리랑 방송 모바일을 겸하여 생방송으로 동시진행하기도 했다. 매회 실수한 부분 그리고 아쉬운 점들을 서로 공유하면서 고쳐나아가다 보니 대중의 관심도 또한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제3회 공연은 정식 공연장이 아닌 라이브바 연주홀에서 현대적 감각을 더하여 방송을 만들었다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고, 제 4회 공연은 우리 전통 악기로 우리 연변가곡, 즉 대중가곡 위주로 편곡하여 보다 전통의 음률을 거리감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시도되었고 비교적 높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아이디어가 점철된 우리 전통음악방송을 선보였다는 점은 중국 방송계 뿐만 아니라 연변의 예술문화적 위상을 한층 제고시키는 전변을 가져왔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우리 전통민족음악이 일반대중들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가고 보다 손쉽게 그리고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연구회의 노력은 단순히 민족음악의 부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중들에게 다양한 음악의 체험과 삶을 풍성하게 하게 해주려는 예술인들의 직업정신이 녹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호를 보다 증폭시켜 전반사회에 실어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증폭신호를 보다 메아리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전통음악도 대중화(시장화) 및 현대화, 세계화의 흐름에 발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전통을 단지 만들어진 허구로 보는 시각일 수도 있고, 우리 정신의 원형을 담은 문화로 보는 시각일 수도 있다. 이러한 극과 극의 시각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측면에서 전통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때론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 전통예술, 전통음악을 과거의 유물로만 파악하여 우리의 문화를 스스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유산인 전통을 다양한 예술과 문화라는 그릇 속에 입맛다시는 숙성된 재료를 기본으로 재탄생시켜 또다른 하나의 장르 예술로 봐줄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좀더 솔직히 보자면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미디어와 대중음악의 발전 속에서 우리의 전통음악은 그 력사의 발자취보다도 그 존재감이 없다. 현재 세계 여러 나라의 전통음악은 세계화에 발맞추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리 나라 한족의 전통음악도 자기만의 특색을 살려 세계화로 나가고 있다.   우리 나라‘녀자 12악방(女子12乐坊)’이라는 13인조 녀성그룹의 사례를 전형으로 들 수 있다. 이들은 중국의 대표민족악기들인 쟁, 양금, 비파, 얼후, 대나무피리(竹笛), 퉁소,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그룹으로서  2001년도에 데뷔했다. 이들은 전통음악에 팝, 클래식 그리고 재즈와 같은 서양음악의 다양한 장점을 접목시켜  중국전통음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2003년부터는 일본 및 유럽 지구로 진출하면서 세계음악계에 이름을 알렸으며  2003년에는 일본 음반매출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지역에도 진출하여 제47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신인상과 최우수 월드뮤직앨범 부문 후보명단에 들기도 했다. 이들은 중국민족음악의 팬층을 세계로 확장시켰고 중국민족음악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중국전통악기와 현대적인 류행음악의 표현형식의 유기적인 결합을 절묘하게 이룬 것이 이들의 성공비법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자기만의 전통적인 DNA적인 요소를 발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도 그러한 DNA적인 요소를 발현할 준비를 착실히 해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 음악의 정체성 및 음악적 재창조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 전통음악은 한국도 아니고 조선도 아닌 우리만의 전통 음악인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기관이나 전문가들의 집중연구로 인한 정체성의 재확립이 필요하며 이러한 정체성 즉 우리 역사적 DNA의 기초하에 재창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냥 우리음악을 서양음악의 형식으로 작곡한다거나 유명 고전음악이나 대중음악을 우리 악기로 연주하는 것은 재창조가 아닌 새로운 모방정도의 음악에 흡사할 뿐이지 엄격한 의미에서의 재창조가 아닌 것이다.   또한 교육현장에서부터 전반 사회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이 전통음악과 친밀해질 수 있는 환경조성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경험한 지하철 환승역에서의 국악기음악으로의 환승역 알림이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극의 개편작품 국악뮤직컬로 애들과 학부모들한테로 국악이 다가가기도 한다. 우리도 중소학교 교가의 전통 악기로의 편성, 우리들이 익숙한 타령과 같은 전통음악을 기초로 한 핸드폰 배경음악이나 다른 음악효과로 쓰는 방안들을 만들어 우리 모두의 생활음악 속에 침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음악 작곡가들의 양성이 필요하다. 례를 들면 우리 민족 전통의 요소에 근현대에 와서 이루어진 음악요소들을 다양화시켜 적절히 융합시킬 수 있는 우리 작곡가 육성이 시급하다.    이러한 방안들은 전통음악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연변 음악계 및 생활음악을 활성화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전통음악의 대중화와 현대화가 더욱 절실한 것이다. 전통과 현대라는 시간의 두축은 결국 미래를 연결하는 매개의 역할이지만 음악과 예술은 시대를 넘어서 공감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우리는 그러한 새로운 음악사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연변일보 2017-9-14
14    긍정에너지의 원론적인 의미(리성수) 댓글:  조회:1513  추천:0  2017-09-12
                         리성수 최근년간 긍정에너지(正能量)라는 말이 꾸준히 회자되여 왔다. 한 단어나 개념이 일상에서 자주 거론된다는 것은 그만큼 삶과 일의 현실적, 구체적 상황에 련관되고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역경에 부딪치는 빈도가 높아질수록, 상황 파악이나 문제 해결에서 정확한 방법론의 도입이 절박할수록 긍정에너지의 효용성이 높아진다. 긍정에너지는 대부분의 경우 충전, 갈망, 결집 등 표현과 어울려 변화를 꾀하고 개선책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놀고 있다. 긍정에너지는 마음의 힘을 북돋우고 정신의 힘을 키우는 촉매제이다. 긍정에너지는 건강, 락관, 적극, 향상을 지향하는 원동력과 정감력이다. 력동력이 활동을 일으키고 혁신을 추동한다면 정감력은 흡인, 친화, 소통, 포용, 설득, 호소의 역할을 감당한다. 우리에게 내재하는 력동성의 발굴로서의 원동력과 외적인 관계를 융합시키고 극대화하는 정감력이 통일된 것이 긍정에너지의 특성이다. 긍정에너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는 심리현상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정신력량이 되고 있음은 불가피하다. 이런 리유는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가꾸는 데서 마음의 기둥과 생각의 들보를 튼실히 하려는 수요가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학습과 사업에서 부딪친 문제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흔히 밖으로부터 대안을 얻는다. 이는 쉬운 방법인 대신 한계가 따르게 된다. 잠시적이라는 일회적이라는 표층적이라는 한계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통찰하려는 사람은 힘들더라도 참된 것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 자기 안에 보물을 깨달으려는 사람은 역경에 부딪쳐도 허둥대지 않고 장애를 뛰여넘으며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차분함을 지닌다. 참되고 차분한 기질은 물질화, 구조화, 평준화, 파편화의 틀을 깨는 데서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긍정에너지를 바탕으로 한 지성, 감정, 의지를 두루 갖추는 과정에 탄탄한 심적 구조가 완성되고 원만한 인격체로 거듭나며 전면적 인간으로 발돋음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리치이다. 긍정에너지는 ‘긍정적’이라는 성향과 ‘에너지’로서의 역할을 전제로 한다. ‘긍정적’이라는 말에는 넓은 함의가 응축되여있다. 적극적, 주동적, 창의적, 협력적, 건설적, 통합적…등 표현들은 인류의 문명과 진보를 촉진시킨 성질, 성향 그 자체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소극적, 파괴적, 멸시적,리기적, 분렬적… 등 표현들이다. 관건은 긍정에너지가 부정적인 요소들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되려 부정적인 것들을 긍적적인 것으로 탈바꿈시키고 력량을 풍부히 한다. 한결같은 태도나 일관적인 진행을 보장하는 힘, 긍정에너지는 변화 속에서 존재를 정립시키고 고난 속에서 가치를 창조한다. 그 힘은 어둠을 밝히는 불처럼, 생명을 약동시키는 혈액처럼 진지하고 확실하며 무한한 성질을 띤다. 요컨대 긍정에너지는 강력한 향상심이다. 단점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현명한 사람은 자기의 실제 상황을 잘 알고 끊임없는 분석과 정화를 통하여 부정적인 것을 조절 통제한다. 미흡한 점을 보완해 자기와 집단을 최적화하는 품격과 능력을 구유하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는 통합성을 띤다. 분발하고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이 끊기지 않는 한 긍정에너지는 더욱 많아지게 되고 주변에 방출돼 영향면을 넓히는 효과도 더욱 커지게 된다. 옳바른 인생관, 가치관의 수립과 확장, 자기의 전 존재를 건 정진과 비전, 긍정에너지 생성과 발효 이 삼자는 상부상조의 관계이다. 연변일보 2017-9-12
13    조선족 왜곡하는 영화들(조영관) 댓글:  조회:1656  추천:0  2017-08-31
 조영관(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흑룡강신문=하얼빈)김주환 감독의 영화 은 외출 중 우연히 범죄를 목격한 두 명의 젊은 경찰대생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그린 영화다. 최근 의 스크린 독주 속에서도 누적관람객 300만명을 넘기는 알토란 같은 흥행을 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이번 영화 은 지금까지 제작된 한국 영화 중에서도 ‘조선족’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악의적인 혐오가 가장 짙게 그려진 영화다. 영화의 대부분은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일터이자, 수만명의 거주민이 생활하고 있는 대림동은 아무런 개연성 없이 범죄의 소굴로 묘사된다. ‘여권 없는 중국인이 많아서 밤에 칼부림이 자주 나는 곳’이라거나, ‘경찰도 손을 못 대는 곳’이라는 대사가 이어진다.   여성을 납치하여 불법적으로 난자를 채취하는 인신매매 범죄조직원의 대부분은 어눌한 ‘옌볜 사투리’를 구사하는 조선족이다. 선과 악, 젊고 정의로운 영웅과 무자비한 악당의 대결에서 조선족 동포는 늘 악역으로 소비되고 있다.   한국 영화에서 최근 10년 사이 ‘조선족’을 폭력적인 범죄 집단으로 손쉽게 소비하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는 점도 우려스러운 점이다. 영화 (2010)에서 조선족은 돈을 위해서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폭력적 존재로, 산발한 머리에 짐승뼈다귀를 메고 다니는 모습으로 소개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2013)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청부업자로, (2014)에서는 채무자들로부터 신체포기각서를 받고 장기매매를 하는 폭력조직으로 그려졌다. 최근에는 스크린을 넘어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늘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폭압을 피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이주했던 역사를 가진 동포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오로지 폭력조직과 범죄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실제 조선족의 범죄율이나 폭력범죄 발생률이 내국인에 비하여 높은 수준일까? 객관적인 연구자료를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로 조사된다. 형사정책연구원에서 최근 발행한 에 따르면 체류 외국인의 범죄율은 내국인의 절반수준에 불과했다. 외국인 범죄자가 가장 많이 증가했던 2011년에도 내국인의 범죄율이 외국인에 비해 2.5배 이상 높았다.   문화적인 이유로 조선족이 칼이나 무기를 소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이 있는데, 조사결과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치안이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총·칼과 같은 무기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응답이 많았다. 법제도와 공권력의 신뢰도에 대한 인식조사에서도 조선족의 경우에 ‘한국의 폭력 관련 법지식’이 오히려 내국인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물론 과거 조선족의 잔인한 강력범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의 흉악 범죄가 조선족 전체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외국인의 범죄가 내국인에 비해 사회적으로 더 주목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질적인 타자로 인식되고, 개별 피해자를 넘어 우리 공동체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인의 경우 낮은 범죄율을 보이면서도 더 큰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 조선족을 범죄자로 묘사하는 영화적 소비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을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보는 다수의 시선은 부당한 차별을 만들고 사회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혐오범죄 등 또 다른 사회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근거 없는 혐오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편견을 지우고 바라보는 대림동 거리는 어느 곳보다 평화롭고 활기차다.
12    연길 빈하공원 ‘감옥장벽’ 철거못할가(리진욱) 댓글:  조회:1644  추천:0  2017-08-21
연길시 연길대교로부터 천지대교에 이르는 근 2,000메터 잘 되는 아름다운 강변 유보도에는 수십종의 수목과 꽃밭 그리고 갖가지 운동기자재와 고정벤치, 널장판이 있어 이곳을 찾는 시민들과 유람객들이 많다. 이곳은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에 좋은 유람지이다. 천지대교와 보행교 사이에는 연길시테니스운동장이 있다. 원래 수렁땅이였던 여기에는 25년 전 국가에서 30여만원을 들여 불로젤로 땅을 고루고 800여립방메터의 흙을 실어들여 만든 4,000평방메터 되는 테니스장이 5개 있다. 그런데 서북쪽에 길이 85메터, 높이 4메터 되는 장벽과 서쪽부터 동쪽까지 길이 90메터, 높이 2메터 되는 장벽으로 인해 강변 유보도를 산보하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테니스장을 볼래야 볼 수 없다. 물론 서북풍의 영향으로 뽈이 강에 날려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한 것임에는 어느 정도 리해가 가지만 보지 못해 안타깝다. 이같이 테니스장은 거의 봉페된 테니스경기장으로 25년이나 지속되여 왔다. 테니스운동은 올림픽경기종목으로서 전 세계가 열광하는 스포츠 종목의 하나로서 세계에서 두번째로 가는 구기운동이다. 과거에는 귀족운동, 신사운동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테니스를 즐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런 정채로운 경기장면과 운동원들을 직접 보지 못하니 적지 않은 시민들과 유람객들은 테니스장 장벽을 같다고들 말하고 있다. 연길시테니스장은 아름다운‘빈하공원’이란 명칭에 걸맞지 않을 뿐더러 정채로운 테니스경기를 관람하지 못하다 나니 테니스운동의 보급에도 지장이 된다. 연길시테니스협회는 설립 30여년래 길림성과 자치주 테니스경기에서 수십매의 메달과 컵을 안아오고 2014년에는‘중국 AAA급사회조직’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회원들의 기부로 5개 경기장을 표준화로 만들고 주석단과 140평방메터 되는 아담한 휴식실도 마련했다. 180여명 회원들이 저마끔 보관할 수 있는 기자재와 의류상자, 숙직실과 두개 창고까지 구전하게 갖춘데서 국내 권위 간행물 《테니스천지》잡지에 큰 편폭으로 보도된적도 있다. 연길시테니스협회 회원들도 그‘감옥장벽’때문에 유감을 느끼면서도 적당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좀 더 보기좋은, 테니스장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장벽으로 탈바꿈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길림신문 2017-8-18
11    남한테 불편 주는 운동 삼가해야(김명성) 댓글:  조회:1412  추천:0  2017-08-18
며칠전 연길시 남산에 산책을 나갔다가 아이러니한 사건을 목격하게 되였다. 30대의 청년이 20대의 청년한테 채찍을 가르쳐주는 모양이였는데 20대 청년이 채찍을 휘두르고나면 뭐라고 한참 얘기하고 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나같이 채찍에 대해 전혀 문외한의 눈에는 20대 청년이나 30대 청년 모두 흠잡을데 없이 채찍을 제법 류창하게 휘두르고 쩡-쩡- 소리도 멋져보였다. 그런데 이때 한 중년의 사나이가 이들한테 다가가더니 채찍을 빌리라고 하자 30대 젊은이는 될수 있겠냐는 얼굴표정이였지만 그래도 채찍을 넘겨주었다. 중년의 사나이는 잠간 채찍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잠간 몸을 풀고 휘둘르기 시작했다. 그 류창한 동작은 멋진 차원을 넘어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고 쩡-쩡- 소리도 더욱 우렁찼다. 두 청년은 인츰 공손한 모습으로 표정이 바뀌였다. 중국 전통무술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채찍은 무협소설이나 협객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십팔반무예의 일종이다. 하여 중국 전통무술을 숭상하는 젊은이들이 채찍무예를 선호하고 또 채찍무예를 잘 하는 선배를 공경하는것은 아마 당연지사이리라. 어느 곳에서 무예를 익혔는가 하는 청년들의 공손한 물음에 중년의 사나이는 “한동안 양치기를 하면서 생활의 필수로 익힌 기술”이라며 허거픈 웃음을 짓는다. 그러면서 청년들에게 산에서는 채찍소리가 동물들에게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라면서 될수록이면 동물들이 있음직한 산에서는 채찍훈련을 하지 않는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이후 연길시의 남산에서 채찍소리를 다시 들을 수가 없었다. 몇번인가 부르하통하 북쪽 강반에서 이들이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그나마 또 사라져버렸다. 아마 청년들은 쩡-쩡- 울러퍼지는 채찍소리가 자연에서 생활하는 동물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생활하는 주민들과 조깅하러 나온 시민들에게 영향을 준다고 여겨 조용한 곳으로 옮겼는지도 모른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타인에게 어떤 영향이 미치건 관계없이 자기만의 애호만을 고집하는 사람들과 달리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청년들의 행태가 돋보인다. 아침, 저녁으로 연길시 부르하통하 남쪽 강변에서 수십명이 모여 광장무를 추는 한 팀의 사람들이 있다. 5~6개 종대로 된 광장무 팀원들은 길을 모두 차지하고 있어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부득이 이들은 피해 뒤쪽으로 돌아다녀야 한다. 분명히 뒤에 공간이 있어 한두발만 뒤로 물러서도 길을 행인들에게 양보할수 있으련만 이들은 그러지 않는다. 왜서일가? 아무리 생각해도 리해가 가지 않는다. 부르하통하 강반에서 광장무를 추는 사람들이 다 길을 차지하고 운동하는것은 아니다. 이들을 죄외한 거의 전부 광장무팀들은 길을 행인이거나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양보한다. 건강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시되는 오늘날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레포츠로 건강을 챙긴다. 그런데 운동을 한다고 해도 내 몸이 좋자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불편을 주는 행태는 삼가해야 할것이다. 채찍을 휘두르는 청년들이 렴치를 안다면 길을 차지한 광장무팀은 렴치란 무엇인지 알기나 할가?! 연변일보 2017-8-17
10    석전경우의 기념비( 장정일) 댓글:  조회:1597  추천:2  2017-08-11
종래로 본 적 없는 희귀한 평론집 한 권이 나왔다. 소설가 정세봉이 편찬한 그의 작품 관련 평론 모음집 《문학, 그 숙명의 길에서》(부제는 “정세봉과 그의 문학”)가 그 것이다.   작가의 행운이라 할가, 평론집을 보면 정세봉의 중단편소설은 무려 31명이나 되는 우리 문단의 작가, 평론가(약간의 기자, 연구생 망라) 그리고 한국의 평론가, 교수들의 집중조명을 받고 있다. 누가 동원한 것도 아니련만 두세편 인터뷰, 창작담까지 합치면 평론은 저그만치 44편으로 분량이 가관이라 문단사적으로 봐도 류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현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개혁개방 후 중국력사의 거대한 전환기, 변혁기에 의욕적으로 분출된 정세봉소설의 그 시의적절한 주제, 생동한 인물, 신선한 기법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과 더불어 평론집은 감동과 론란의 중심에 자리했던 이들 작품에 대한 격찬의 목소리가 단연 지배적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개척적인 의미를 가진 초기작 단편소설 에서부터 대표적인 중편력작 에 이르기까지를 아우르며 ‘우리 시대의 뽀에마’. ‘놀라운 걸작’, ‘잔혹하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의 그런 사실주의’, ‘인간성의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라는 평가들이 줄을 잇는 가운데 예술특점상 ‘갈등구조의 첨예성’, ‘극적인 서사방식’, ‘비극적색채의 활용’, ‘상징과 산문수필식의 기법’을 비롯한 다양한 측면들도 다각도로 투시되고 있으며 신선하고 완숙한 필치로 ‘한 개인의 깊이 속에 내려간’(프루스트) 작가의 근작 단편소설 에 대한 평글도 망라되여 평론집에 력사감, 현실감,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   약간한 쟁명의 글들도 있고 넓은 시각으로 부족점을 지적한 부분도 진일보한 사고와 상론의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해 보인다.   례컨대 농촌을 비롯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 형상화’에 대한 요청, 인물의 문제해결 방식으로서의 행동양식에서 ‘적극적인 방식보다는 소극적인 방식을 즐겨 선택’한 문제, ‘작품의 주제나 소재 면에서 아직 미분화된 상태에 머물고’ 작중인물들의 행동양식이 ‘몇가지 류형으로 구분될 만큼 단순감이 없지 않다’는 점, 특히 ‘문화와 관습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어필할 수 있는 감동원을 창출해 낼’ 필요성 등 지적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소설가 정세봉의 이미지를 아주 형상적으로 비유한 낱말이 하나 있다. 자갈밭을 가는 소, 즉 석전경우(石田耕牛)가 그 것이다.   석전경우는 워낙 농민, 무직업자였던 소설가의 한단계 인생의 어려운 처지를 지칭하면서 널리 회자된 비유어였는데 사회 말단세포에서 살며 집필활동을 했던 그런 고된 삶의 체험이 역설적으로 그에게 사회와 인간을 읽어내는 동심같은 맑은 눈을 가지게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던 걸가, 고리끼를 방불케 하는 억척스런 독학으로 문학의 넋을 지닌 정세봉의 작품은 독자들의 상상 밖의 열렬한 사랑과 평단의 남다른 주목을 받으면서 높은 찬사와 필화직전까지의 론란을 한몸에 안았었다. 그러한 진동효과의 자초지종이 고스란히 정세봉 작품 평론집으로 탄생을 고하였으니 작가는 결과적으로 이 책 한권으로 후세에 전해질 나름의 빛나는 문학기념비를 세운 셈이다. 이름하여 석전경우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념비는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쳐버리는 빛바랜 돌비석이 아니라 사회의 동란기, 격동기 인간의 처절한 애환을 증언하는, 령혼 세례의 무형의 기념비요, 오늘의 무수한 행인들과는 물론이거니와 해당 연구자나 후세들과도 지속적인 대화가 가능한 정신의 기념비일 것이다.   여기서 석전경우는 기실 정세봉 일개인에 한정된 비유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정직한 작가시인과 예술가들의 공통의 이미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작가예술인이라면 중복이나 안주는 운명적으로 거부된다. 다사다난한 현실의 고난을 탐스러운 예술로 꽃 피우는 작가는 언제나 거칠고 낯설면서도 가슴 설레이는 새 길을 걸어가야 하는 고행승이자 행운아다.   자갈밭을 갈아 오아시스로 만드는 숙명 앞에서 희세의 시인 괴테는 한평생 하루도 편하게 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천재작곡가 모짜르트도 이실직고한다. “사람들은 나의 예술창작이 식은 죽 먹기로 이뤄진다고 보는데 이는 틀린 생각이다. 작곡을 하면서 나처럼 대량의 시간과 심혈을 바친 사람은 없다. 내가 재삼 연구해 보지 않은 대가의 작품은 없다.”   여기서 나는 물러설 수 없는 벼랑끝 선택으로 석전경우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정세봉의 자세에 공감한다. 그 선택과 자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남다른 용기와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반석 같은 의지로 개괄된다. 만년에 발표작이 희소한 상황을 그의 충전기 또는 탐색기라 해도 좋고 아니면 아예 침묵기라 해도 무방하다. 휴지부가 없는 전진은 불가능하고 침묵이 없는 발언은 가볍다는 점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을 비운 채 만학의 열의을 불태우며 정신의 서식지를 찾아 동구권, 중남미와 유럽 문학명작의 바다를 항해하는 그의 항온(恒温)의 침묵은 값진 것이다. 설익은 가시적인 성과나 일시적인 허명보다는 풍부한 학식, 형이상(形而上)의 감화력을 가진 진정 문학다운 문학을 갈구하는 그의 태연자약한 침묵은 차라리 봉황열반과도 같은 변신의 몸짓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이야 리해해 주든 말든 정신의 풍요와 중후함을 위한 그의 침묵은 또한 문단과 독자들과의 긴밀한 호흡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다년간 소설가학회 활동을 통해 문학적인 애정을 쏟으며 국내외 유능한 동포작가들을 발굴장려하고 있으며 인터넷카페 와 개인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우리 문학과 세계문학 작품들을 독자들과 폭넓게 공유한다. 문학 교류와 소통을 위해 현대기기를 다루는 칠순 작가의 기량과 집념이 경이로움과 탄복을 자아낸다. 그리고 근래의 수필집필과 단편신작은 그의 창작 사상과 기법의 변화를 예고한다고 할가.   진정으로 저력있는 문학을 위해서는 작가의 혈관에서 흐르는 학식과 창작적 감성의 결합이 요청된다. 정세봉이 편찬한 평론집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는 이렇게 긴 호흡으로 문학을 응시하면서 속도숭상의 부박한 세월에 대처하는 하나의 계기로 돼보여 한결 유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축적보다는 지출이 잦아 재고가 빈약한 나 역시 새삼스레 침묵의 미학에 경도되는 느낌이다. 정세봉의 침묵이 더 큰 말, 더 많은 말을 하기 위한 침묵이기를 바란다. 연변일보 2017-8-10  
      (흑룡강신문=하얼빈)한자로 된 지명, 인명에 대하여 '한국어'로 표기할 것이냐, 아니면 중국어 '현지 원어'로 표기할 것이냐를 놓고 우리는 최근 1년이 넘도록 옥신각신하였으나 지금껏 시원한 답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전문번역인들이 한국 모 출판사의 청탁으로 총 15권이나 되는 총서(시리즈)를 번역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중국의 상고시대 신화로부터 신해혁명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분량으로서 거기에 나오는 고대, 현대 지명과 인명이 아마 수천 개는 넘는다는 데서였다.   우리는 재래의 한글로 새겨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그대로 번역하였더니 한국 측에서 신해혁명 후의 현대, 당대의 것은 '중국말 원음'대로 새기라고 원고를 되돌려 보낸 것이었다. 한국 '국립국어원'의 '성지'가 없는데다 설사 있다 해도 그 많은 인명, 지명을 우리로선 '현지 원음으로 창작'해낼 '수준'이 없었다.   그리하여 항변하였더니 한국 출판사 측에서는 '원칙'이니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현지 원음'을 '창작'해내기는 하였지만 '현지 원음'에 비교적 숙달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로선 흡사 개구리를 삼킨 듯 꺼림직함을 금할 수 없었다.   첫 번째는 방대한 역사책이다 보니 5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인명, 지명이 혼잡해 있다는 것이었다. 한 페이지 안에도 고대와 현대가 뒤섞여 있었다.예를 들면 같은 지명 '南京'을 한 페이지에서 '남경'과 '난징' 두 가지로 표기해야 하니 전문번역인이 진땀을 빼는 것은 물론 독자들도 오리무중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는'원칙'대로라면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전과 후로 나누어 각기 다른 표기 기준을 적용하라는 것. 그런데 난감한 것은 많은 등장인물이 신해혁명 전과 후에 거쳐 생존했다는 점이다.예를 들어 신해혁명을 직접 이끈 손무(孫武)는 무창봉기(武昌起義: 신해혁명)를 직접 지도하고 그 후에도 생존하였는데 그렇다고 같은 사람인데 그 이름을 봉기 전에는 '손무'라 하고 봉기 승리 후에는 '쑨우'라 해야 한단 말인가? 또 예를 들어'毛澤東(모택동)'은 1893년에 태어났으니 1911년까지는 '모택동'으로 표기하고 그 후부터는 '마오쩌둥'으로 표기해야 하는가? 난감한 일이다.   세 번째는 중국어 병음 'R, F, SH...' 등 발음이 들어가는 글자 '融,飛,上'의 표기이다. 이런 글자의 발음에 꼭 들어맞는 '현지 원음'표기를 찾을 수 없어 우리는 쩔쩔매야 했다. '국립국어원'의 '박사' 들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건 우리 한글 발음에 이런 음이 존재하지 않으니깐. 이런 음과 비슷한 음에다 어떤 기호를 붙이고 유치원 시기부터 익히게 하든지 아니면 문장 한가운데에 '국제음성기호'를 박아 넣든지 등의 방법을 쓰는 것 외에는…   또 예를 들어 '원칙'대로라면 '北京BEIJING'을 '베이징'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는데 기실 한어에서의 'B'는 영어에서와 달리 'ㅃ'에 해당함으로 '현지 원음'으로 하면 '뻬이징'이 더 가깝다.   번역 과정에서 우리는 어디서 이런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한 '현지 원음' 원칙이 나타나 사람을 괴롭히는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 권위 '국립국어원'에서 제정한 것이라고 하니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어찌하여 한자를 이용하기 시작하여서부터 2, 3천년 이상은 실히 되고 이 1453년에 출범되어서도 600년에 가깝게 고정된 한자 '한글법'을 헌신짝 버리듯 던지고 이런 '사불상(四不象)'의 '원칙'을 재창조하였는지? 그 '한글법'이 중국과의 교류에 무슨 지장을 끼치는지? 중국어를 배우는데 유리한지 불리한지? 정말 모를 일이다.   남과 북을 망라한 조선반도는 우리 한글(중국에서는 조선글이라 함)의 모체로서 거기에서 우리말에 맞는 새로운 단어들이 창출되지 않고 '사용원칙'이 확고하지 못해 이리저리 뒤흔들리면 아름답고 과학적인 우리말이 정체되고 갈팡질팡하고 말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 언어 상황을 놓고 보더라도 한자 '현지 원음'의 영향으로 심지어 신문지상과 출판물에서까지 이런 거북한 '현지 원음 단어'들이 심심찮게 나타나 '현지 원음'에 익숙한 '현지 사람'마저 곤혹에 빠뜨린다. 중국어에 능숙지 못한 농촌에 가면 신문을 들고 '칭다오, 다롄, 원자바오…' 처럼 익숙한 지명이나 인명도 알아볼 수 없다고 물어보는 이가 많다.   개탄할 일이 아닌가! 거기에 한자어의 '사성(四聲)' 마저 어수룩하면 당신이 아무리 진땀을 빼며 '현지어'를 구사해도 '현지 원어'에 능숙한 한족은 물론 웬만한 '현지어'와 '한글어'를 장악한 우리 조선족일지라도 멍청해지고 말 것이다. 지금은 외래어표기법을 수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따위를 쟁론할 것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이런 법을 과감히 팽개쳐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천박한 소견으로도 모아 보면 한자 '현지원음원칙'은 아래와 같은 치명적인 폐단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수천 년 생산과 생활 가운데서 우리 민족이 한자를 자기의 언어습관에 알맞도록 받아들이기 위해 고명하게 창조하고 고정시킨 우리말 한자 '한글법'을 송두리채 뽑아 버렸다. 우리 민족은 우리글인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썩 전부터 '이두', '향찰' 등 형식으로 한자를 우리 언어습관에 맞게 이용하여 왔다. 그때도 비록 우리 문자는 없었지만 읽을 때 "孔子曰,孟子曰…"을 결코 '쿵즈웨, 멍즈웨…'가 아닌 '공자 왈, 맹자 왈…'로 읽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오늘날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를 명백히 지적한 이 창제된 지도 약 600년 되고 '하늘 천, 따 지'를 가르친 '천자문'도 일찍 그 새김을 우리말로 고정시켜 거침없이 쓰이고 있은지도 오랜데 어찌하여 새삼스레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 하는지 그 심사를 알 바 없다.   두 번째는 조상님께서 만드신 '옥편(玉篇)'을 들춰보시라. 우리 현명한 조상들은 수천수만 개에 달하는, 그처럼 어렵고 낙후한 한자를 우리말에 맞도록 한 글자도 빠짐없이 새겨 후손들에게 넘겨준 데서 한자를 우리말로 들여오는데 지름길을 개척하여 주었다. 그 '옥편' 대로 한자를 우리말로 옮긴 '한자어'는 떳떳한 우리말이지만 '현지원음법'에서의 새김은 우리말을 되돌려 '외국어'로 퇴화시키는 반역이다.   조사에 의하면 우리말에 한자어가 70% 이상을 점한다고 하는데 '현지원음원칙'이라면 그것들도 한어원음대로 새겨야 하지 않겠는가? 지명, 인명만, 그것도 '신해혁명' 이후의 것만 그렇게 새긴다고 하는데 이건 무슨 '원칙'을 근거로 한 '원칙'인가? 다른 지명들은 '현지원어'로 새겨야 한다면서 유독 가장 돌출한 지명인 국명 '중국'만은 또 외따로 빼놓고 '현지원음'으로 표기하지 않는 '원칙'은 또 무엇인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원칙'이다.   세 번째는 간단한 지명 따위를 '현지원어'로 몇 개 외워도 별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옛적의 지명은 그래도 둬 글자씩 간단하였지만, 지금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지역이 넓어지고 사회가 세분화되고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일떠서면서 상세한 지명은 너무 길어졌다.   원음대로의 '베이징, 샹하이'와 같은 지명은 얼버무려도 그런대로 비행기 등 교통수단이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릴 것이다. 문제는 도착한 후 어떻게 지점을 찾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경에 내려서 한 고장을 찾는데 **구, 구역, 청사, 번지 등 상세한 것을 '원칙'에 따라 '현지 원음'으로 구사하면 듣는 사람은 중이 염불하냐고 할 것이다.   '원칙'에 따라 배운 대로 구사하느라 애를 먹지 말고 종이조각에 주소를 적어가지고 다니다 보여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편의 지명을 책에 싣는다면 보는 사람은 '천서'를 읽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네 번째는 중국도 외국인데 지명이나 성명을 '현지 원음'으로 부르는 것이 원칙이 아닌가 하고 반론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미국의 '워싱턴'이나 영국의 '런던'을 '현지 원음'에 가깝도록 표기해야 함은 에누리없는 '원칙'이다. 다른 방법으로 표기할 수 없으니깐.   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 중국에서 통용하는 한자와 우리 민족의 고유 언어인 한글 사이에는 다른 언어와는 있을 수 없는 '혈연' 관계가 있어 한글의 한자어로 중국 지명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표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태여 이미 기성된 우리말 한자어를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격'으로 퇴화시킬 하등의 필요성도 없다. 그리고 중국 역시 반대할 이유가 없다. '중국'을 '쭝궈'라고 부르지 않아도 전혀 문제 될 것 없지 않은가!   다섯 번째는 현대적 수단인 컴퓨터 사용에 막대한 어려움을 안겨준다. 예를 들어 '북경'을 베이징'으로 표기고 한자 '北京'을 찾을 수가 없다. 반대로 북경을 한자로 써놓고 음독을 찾으려면 베이징이 나올 리 만무하지 않은가? '컴퓨터를 통틀어 다시 새기면 되지 그것이 무슨 대수냐' 하고 반문할 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처럼 '기어코 호박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겠다'는 그 발상부터가 안쓰럽다. 또한 범민족의 견지에서 보면 남한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원칙'을 쓰지 않으니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민족언어의 통일에 해가 되지 않겠는가?   한자 한글새김은 예로부터 써온 완벽한 '법칙'으로 이미 우리 민족의 언어습관에 깊이 파고들었기에 생뚱 같은 한자 '현지 원어' 법을 철폐하여도 혼란이 생길 걱정이 없으며 설사 얼마간 생기더라도 장래의 '혼전'에 비하면 치러야할 대가가 훨씬 적을 것이다.   많은 견해를 종합하여 시비를 가림으로써 한자 현지원어법이 하루속히 종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8    우리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모동필) 댓글:  조회:1586  추천:0  2017-08-04
보물처럼 깊숙이 숨겨두었던 꼬깃꼬깃 구겨진 돈을 꺼내면서 숫접게 말을 건넨다.   “우리 손주를 잘 부탁드립니다.”   할머니의 거친 손에서 건네받은 건 백원짜리 두 장, 200원이다. 기어코 받지 않겠다고 되돌려드렸지만 기어이 쥐여 주신다. 그리고 할머님의 떨리듯 서운함이 담긴 음성은 귀를 아프게 때렸다.   “적어서 안 받슴까?”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과 우리 교육 현장이 왜 이 모양새로 전락됐는지 마음만 서글퍼 난다.   할머니를 잘 설득하여 돌려보내셨지만 마음은 우중충하기만 하다.   여러 모로 보아 부유한 집안은 아닌데, 할머니가 촌지를 건넨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도 사교육 현장에서… 그렇다면 공교육 현장의 “거래”도 류추하여 짐작이 가능하지 않을 가?   안 그래도 기울어져 가고 있는 민족교육현장에서 근절돼야 할 페습들이 응당한 관례로 여겨지는 원인은 무엇일가?   학부모로부터 은밀하게 받은 액수가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환산되는 “경영철학”이 우리 교육현장에서 일반화 되였다고들 한다.   주는 부모님과 받는 선생님,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동시에 모두의 잘못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만연돼 보편현상이 되여 버렸는데, 안 주기도 안 받기도 서로에게 례의는 아니다.단지 “대세”와 “사조”에 편승하여 이를 거역하지 않았을 뿐이므로 “죄”는 아니다. 그러나 교육환경을 병들게 하는 옴같은 존재로서 주는 이와 받는 자, 모두가 대역죄를 짓는 일이다.   모든 선생님과 학부모가 일괄적으로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미꾸라지 한 마리 온 웅덩이를 흐려놓는” 것은 분명하다.   할머니의 시름에 찬 눈동자와 걱정으로 휘여진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승의 참된 덕목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꺼림직함으로 흐려진 마음은 설음이 차올라 울컥했다.   “우리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빈손으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부당한 거래”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상품”으로 전락 돼버린다면 장성한 아이들은 어떤 인격체가 되여 있을가?   명절을 앞둔 어느 날, 유치원으로 가는 딸애의 가방 속 책 사이사이에 돈을 끼워 넣어 보냈더니 돈은 무사히 “증발”되고 아이는 가방이 열린 채로 유치원을 나서더라는 친구의 사연, 그리고 친구가 건넨 한마디.   “받더라도, 받은 돈 액수로 아이의 가치를 가늠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줬으면 좋겠더라.” 그리고 지인 한분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다사스러운 소학교 선생님으로 취직했다. 그가 넌지시 건넨 한마디.   “그래도 소학교가 먹을 떡이 크답니다. 물론 학교마다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아이들이 힘차게 걸어가면 모든 것들이 한마음 되여 길을 열어”(윤동재 시, )주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이 추락해도 교육과 스승의 품위는 절대 실추되지 말아야 한다.   “촌지현상”은 주는 이와 받는 자, 량자가 자신의 “리익”을 보장받기 위한 행위이다. 때문에 페풍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리익을 동시에 만족 시킬 수 있는 구조적 혁신과 제도적 변화가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식 전환도 가져와야 만 한다. 동시에 당국에서 엄한 처벌 제도 등 여러 조치를 취하고 엄격하게 집행해야 한다.   사회 일반에서도 교육현장의 병페를 적극 고발하고 해결책을 활발하게 공론화하여 논의하면서 개선을 가져와야 한다.   “…진실로 교원의 얼굴과 자세를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학교가 된다.”(김호웅 칼럼,)   이링공뎌링공하야 참된 덕목과 교양을 갖춘 “큰 스승”님들의 량지(良知)와 사명감으로 충만 된 교정에서만이 우리의 빛나는 미래를 노래하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우리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미래를 잘 부탁드립니다!” 연변일보 
7    놀줄 아는 사람이 일할줄도 안다(지행) 댓글:  조회:1516  추천:0  2017-08-02
우리는 바쁜 일상에 시달리며 항상 잠이 부족하고 휴일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휴일은 많기보다는 어떻게 보내냐가 중요하다. 휴일은 퇴직하면 아주 많다. 매일 휴일이다. 그때 가서 과연 직장생활에서 어렵게 맡은 휴가와 똑 같은 휴일의 가치를 찾을수 있을가? 한 나라 대통령도 휴가를 하는데 바빠서 휴가할 시간도 없다는것은 스스로 올가미를 만드는 일이라고 본다   미국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은 소문난 골프광이였다. 2차 세계대전 때 련합군 사령관으로 영국에 주둔하면서도 골프장을 만들어 매일 서너 홀씩 돌았다고 한다. 노르만디 상륙작전 성공후엔 프랑스 골프장 클럽하우스를 사택으로 썼다. 대통령이 되여서도 휴가와 주말을 리용해 골프를 즐긴것이 800번이 넘는다.   역지사지, 다른 사람의 립장에서 서서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걸 실천에 옮기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다.   2001년 일본에서 대지진 참사가 발생했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주말 골프를 즐겼다. 당시 공화당 차기 대통령 후보로 유력했던 트럼프가 방송에 나와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이 아이언 샷이나 날리고 다녀서야 되겠느냐"고 맹비난했다. 그랬던 트럼프가 대통령이 돼 취임후 한달동안 여섯차례 골프를 치다 "그때 했던 비난을 잊었느냐"는 말을 들었다.   물론 일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다른 직원들 다 바쁜 때에 만사 제쳐놓고 휴가를 떠나면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정서에서 이신작칙 다시말해서 “당신부터 잘하고 남을 타이르라”는 고정관념이 많이 작용한다. 따라서 이것저것 고려하다가 일년 휴가를 놓치고 이를 반복하며 직장생활을 마치는 경우도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열명이면 열명이 다 좋다고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적당히 탕개를 늦추고 세명 정도는 반감을 가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괜찮은 인생이라고 본다. 주변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하면서 성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적어도 후회는 줄어들것이다.   링컨 전 대통령은 남북전쟁 때 휴가 갔다가 부상 군인들의 원성을 샀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 중에 휴가를 떠났다가 구설에 올랐다. 오바마 대통령도 2016년 루이지에나 홍수 피해때 골프를 즐기다 "당장 골프장에서 나오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서구 선진국 대통령들은 웬만해선 휴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누구인가? 대통령보다 큰 인물도 아니고 대통령보다 업무가 많은 사람도 아니다. 올 여름엔 만사 제쳐놓고 시원히 계곡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놀줄 알아야 일할줄도 안다.   중앙인민방송국
6    지킬 것과 바꿀 것(리영수) 댓글:  조회:1363  추천:0  2017-08-01
‘동네북’으로 전락한 연변팀은 지금 산소호흡기를 단 채 강등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시즌 결속까지 11껨의 경기를 남겨두고 있어 최종 14위에 올라 설 ‘산술적인 희망’은 남았지만 그것은 락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확률과도 같다. 연변팀의 성적이 시즌 내내 순위표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연스레 박태하 감독의 거취문제도 거론되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박감독에게 기회를 더 줘야 한다. 박감독은 연변에 축구의 희열을 다시 찾아준 장본인이며 또한 연변축구의 발전을 진심으로 고민하는 감독이라는 데는 팬들 다수가 동의할 것으로 생각된다. 박감독은 시즌이 중반으로 치달으며 팀이 위기에 봉착하자 여름 이적시장에서 선수단을 개편하는 등 팀 색갈을 바꾸기 위해 애썼다. 물론 그의 노력은 현재까지 실패에 가깝지만 분명 연변축구는 달라지고 있으며 박감독의 말처럼 그에게는 ‘시간과 선수층’이 더 필요하다. 연변팀과 같은 재정상황이 렬악하고 구단운영이 프로축구와 접궤되지 못한 시스템에서 강등은 어찌 보면 우리가 수시로 맞닥뜨려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프로축구에 대한 본질을 우선 깊이 터득하고 우리 연변에서 실현 가능한 축구발전 프로젝트를 내놓고 꾸준히 추진해야지 단기 성적에만 치우쳐서는 결국 계속해서 ‘동네북’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깊게 갈마든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연변축구를 결책하는 지도층에서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래년에도, 래후년에도 연변프로축구는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을 것이다. 연변팀의 2017 시즌이 서글프게 저물고 있지만 아직 그들의 뒤에는 200여만명의 연변인민들이 버티고 있다. 연변일보 2017-7-31  
국가기관끼리 소통이 되자 않아 발생한 문제를 개인이 책임져야 하나? “영주권을 신청 중인 사람은 체류기간 연장을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연장되어 불법체류가 아니고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면서 “심사결정이 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는 한국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안내에 따라 외국인 등록증 갱신을 하지 않은 동포들에게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체류기간이 종료되어 건강보험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진료비를 환수하라”는 고지서를 발부한 사례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영주권 배우자(F-2) 자격으로 체류하던 A씨는 2015년 12월 영주권을 신청했다. A씨의 외국인등록증상 체류기간은 2016년 6월 28일까지였다.   A씨는 서울남부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체류기간 연장을 신청하고자 했으나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하지 않아도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안내를 받아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는 A씨가 6월 28일 이후는 건강보험 자격이 없다면서 2016년 6월 29일부터 2017년 4월 9일까지 부당하게 사용한 공단부담 진료비 500여만 원을 환수하라는 ‘기타징수금납부고지서’를 발부했다. A씨는 너무 억울한 일이라 생각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국민보험공단에서는 A씨에게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2016년 6월 29일부터 2017년 4월 9일까지 합법체류 중이었다는 확인서를 발급받아 오라고 했다.   A씨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상담을 하자 출입국사무소 담당자가 “국민보험공단에서 출입국으로 필요서류를 직접 팩스로 보내라”고 하여 두 기관이 서로 서류를 주고받았다.   그 후에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출입국관리사무소가 “(A씨가) 2016년 6월 28일부터 2017년 4월 10일까지 기간 동안은 영주 신청 상태로 합법적인 체류이나 2006년 6월 28일 이후 본인이 연장 신청을 하여 허가를 받지 않으면 F2-3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할 수 없음”이라고 답변하여 A씨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A씨는 법무부에 이 문제로 탄원서를 제출한 상태다.   그런데 이 문제는 A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주신청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안내에 따라 체류기간연장을 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1,600여만 원에 이르는 거액의 진료비 환수 고지서를 받은 중국동포도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공단은 최근 체류기간 만류 외국인에 대해 일괄적으로 자격심사를 하고 A씨처럼 영주권 심사 중이어서 체류기간 연장을 하지 않은 외국인에게 진료비 환수 고지서를 발부했다.   공단의 담당자는 “법무부는 영주권을 신청 중인 사람의 서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체류에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이 사실이 전산 상으로 타 기관과 공유되지 않으므로 공단은 전산상의 자료에 근거해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며 “영주권 신청처럼 새로운 체류자격을 신청한 사람의 경우 새로운 체류자격 인정 여부가 결정될 때까지 기존자격을 연장 인정하고, 기존 자격의 서류를 공단이나 은행에 제출해 활용하도록 법무부와 유선 상으로 협의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이 문제의 본질은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이라는 두 국가기관 사이의 소통의 부재에서 발생한 문제이고 국가가 책임져야 할 것을 개인에게 책임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영주권 신청자에게 반드시 “영주권 신청 중이면 체류에는 문제가 없지만 체류기간이 만기가 되면 은행 이용 시 또는 병원 진료시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당할 수 있으므로 체류기간 연장을 해야 한다”고 안내를 하고 체류기간을 연장해줘야 한다.   또한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두 국가기관의 소통부재로 발부된 모든 동포들, 나아가서 모든 외국인의 진료비 환수를 위한 ‘기타징수금납부고지서’를 반드시 철회해야 한다. 동북아신문
4    방학기간 다이어트 적당량 필요(심연) 댓글:  조회:1251  추천:0  2017-07-03
대학입시 시험이 끝나자 많은 수험생들은 pc방을 찾아 게임을 마음껏 즐긴다거나 려행을 한다든가 하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대학입시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다. 그중 대학입시준비로 운동이 결핍해 오른 몸의 살을 확 까고 날씬한 몸매로 새로운 배움의 전당에 들어서려고 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다이어트가 도를 넘어 도리여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무한시 17살 소녀 장란(가명)은 올해에 대학입시 시험을 마쳤다 한다. 163센치메터의 키에 체중이 75킬로그람에 달하는 그녀는 대학입시가 끝나자 살을 빼려고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단다. 그는 헬스장에서 살까기에 적격이라는 동감자전거를 선택하여 한시간 내내 절주에 맞춰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고 한다. 그날 밤 그녀는 하체 근육 통증으로 잠을 이룰수 없었단다. 그냥 오래만에 운동하여 그런줄 알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의 근육통증은 중해만 갔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장란은 소변색이 간장색으로 변하개 시작했고 배뇨가 어려워 병원으로 갔는데 혈액중 크레아틴 키나아제(肌酸激酶) 수치가 정상치의 117배에 달했고 횡문근융해증(横纹肌溶解症)으로 진단까지 받았단다. 장란은 ICU 중증간호실에서 열흘 동안의 치료끝에 겨우나 건강을 되찾을수 있었다고 한다.    의학전문가들의 소견에 의하면 횡문근융해증이라는 병은 보통 근육이 엄중하게 다치고 골격근이 파손되여 근육속의 촉매가 혈액속에 방출되여 신장소관(肾小管)을 막아 급성신장파괴로 신장쇠약이 오는 종합증이 오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이 병은 운동 강도가 너무 높아 자신이 받아들일수 있는 범위를 초과했을 때 오는 경우가 많고 근육 통증에 소변색이 간장색으로 변하는 등 증상이 있다고 한다.    의학전문가들은 이 병은 녀성들이 다이어트로 인해 밥을 적게 먹어 신체가 허약해졌거나 여름에 기온이 높을 때 운동을 무리하게 할 때 쉽게 걸린다고 한다. 장란의 경우도 학교를 다니는 동안 거의 운동을 하지 않던 상태로부터 갑자기 절식을 하면서 자신이 접수할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여 운동을 무리하게 하여 이 병을 초래하게 되였다는것이 의학전문가의 진단이다.    의학전문가들은 수험생들은 장기간 단련이 결핍했었기에 다이어트를 시작할 때 절대 무리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장하고 있다. 운동 중간 중간 수분과 휴식을 취하고 근육에 통증이 오면 바로 휴식을 취하여야 한다고 일깨워주기도 한다. 또한 인터넷을 통한 다이어트제품을 사용하는것은 절대 피하고 운동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정확한 다이어트와 음식조절을 하여야 건강하고도 날씬한 몸매를 가꿀수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수험생들이 한두달 기간으로 대변신하려는 마음은 어느 정도 리해되지만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매도 건강한 체질의 기초상에서 가꿔야 탈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연변일보 2017-7-3
3    ‘나만이라도 제대로…’(리성수) 댓글:  조회:1165  추천:0  2017-06-28
                        리성수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하겠지.’ 대신 ‘나만이라도 제대로 한다.’는 의지와 실천이 요청되는 시점이다.본분을 망각하면 자각은 무뎌지고 저력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본업에 몰입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완성도 높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건 불보듯 뻔하다.   ‘내가 안한다고 큰 일 나겠냐’에서는 책임 주체가 여럿일 때 서로 미루는 태도가 드러난다. 꼭 감당해야 하는 일인 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현상에는 허들을 뛰여넘 듯 급히 대충 해치우거나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일을 피해 가는 경우가 포함된다. 실로 주변을 오염시키는 공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현상’에 둘러대는 말 ‘시간이 없어서’는 인과관계인 듯싶으나 실은 거짓말이다. 해보지도 않고 시간부터 없다고 하니 때아닌 핑게요, 주업을 도외시하고 사사로운 일이나 유희, 오락 등 딴짓에 정신줄을 놓으니 직무유기가 아닐수 없다.‘꼭 해야 할 일’이 미뤄져 허드레일로 되고 나중에는 ‘계획에도 없던 일’처럼 돼버린다.   ‘일과 동떨어져있는 데도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해이한 정신이나 무기력한 행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회적 규범, 직장인의 성실성, 륜리적 규범이나 가치 등에 어긋나는 개인적 행위라면 집단 구성원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니 말이다. 일상사 같은 ‘현상’이 소리없이 파고들어 한 집단의 집행력, 응집력, 융합력, 창조력, 생명력을 송두리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일해봤자 소용없다.’는 무용론은 더더욱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개인적 차원에서는 분발하는 자세가, 집단적 차원에서는 정도를 걷도록 이끄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상만을 바라는 열정은 오래가지 못하기에 일을 사랑하고 일에서 행복감을 증진하는 선순환을 이뤄야 한다. 개개인이 한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면 집단 지성은 강력해질 것이다. 이방인처럼 강건너 불보듯 하는 심리나 행동은 위태롭다.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도 한두번 거치노라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감시와 독촉에만 매인다면 노예적 근성에 갇히게 된다. 자발과 정진을 원동력으로 하는 사람, 주인공다운 삶을 살고저 하는 사람이라면 부정적인 현상과 그 영향을 정화해야 한다.   일에 대한 회피와 포기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존엄의 상실이나 다름없다. ‘나는 일과’ 밀착됐는지 소원한지 자주 헤아려봐야 하는데 그것은 일에서 멀어지는 것 자체가 진정한 자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적신호이기 때문이다. 일과 어울려질수록, 심혈을 기울일수록 화산처럼 분출하는 적극성, 자기만의 창발성을 더 많이 깨닫고 획득할 수 있음은 자연스런 리치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할것이다.’ 이는 암담한 결과만을 초래한다. 누구나가 ‘내가 아니더라도 집식구가, 동료가, 다른 단위(회사)가… 대신하고 책임지며 역할할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개인, 가정, 집단, 사회, 국가의 모든 구성원은 얼마 못 가서 게으른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야말로‘중이 셋이면 마실 물이 없게 된다.’는 옛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나 한사람이라도 제대로 한다.’는 생각과 실천은 깨여있음의 표징이다. 우리를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하는, 맹목적으로 굴러가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라태와 관습에 항거해야 한다. 그런 힘은 다름아닌 깨여있는 의식에서 온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자기 앞의 길을 개척한다는 정신력, 개인과 가정을 위해 태여난 것만이 아니라 집단, 사회에 빛과 열을 이바지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주인공적 의식은 일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단 한 시각도 잊지 않게 해주고 있다. 연변일보 2017-6-28
2    ‘손님은 신・황제・왕이다’ 에서 느끼는 포용력[리홍매] 댓글:  조회:1210  추천:0  2017-06-27
‘손님은 신・황제・왕이다’ 에서 느끼는 포용력    다른 사람을 아량 있고 너그럽게 감싸주고 받아들이는 힘, 때론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정도로 위대한 그 힘을 포용력이라 한다. 20여년을 일본에서 살면서 써비스업에서 존재하는 이곳 사람들의 ‘절대적인 포용’, ‘상호간의 포용’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보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국에서는 ‘손님은 곧 황제이다’가, 한국에서는 ‘손님은 왕이다’ 가 써비스업계의 대표적인 슬로건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이 표현은 세계적으로 경앙받는 써비스문화의 발원지인 일본의 산물(Made in Japan)이다.   일본에서는 보통 ‘손님은 신이다’(お客様は神様です)라고 한다. 이 말은 일본의 쇼와 (昭和) 시대(1926년12월 25일〜1989년 1월 7일)를 대표하는 엔카(演歌) 가수 미나미 하루오 (三波春夫)씨가 한 말이다. 무대에서의 잡념을 버리고 티없이 맑은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청중이나 관중을 항상 신으로 생각하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그다.   “경건한 마음으로 극장을 찾아주는 객석의 관중은 연기자에게 있어서 무조건적인 존재, 즉 신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이 말이 후날 어느 개그맨들에 의해 널리 일본에 전파되였고 점차 봉사업종의 써비스 원칙으로까지 되여버렸다. 물론 미나미씨 본인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손님은 신이다’, 이 캐치 프레이즈가 일본의 써비스업종에 하루 빨리 침투된 원인은 오랜 력사를 두고 내려온 일본의 상업문화를 총괄한 가장 적합한 뜻이 포함되여 있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현재의 일본 써비스문화의 발상지는 백화점이라고 한다. 일본의 유명한 백화점인 미츠코시(三越)의 전신인 에도(江戸)시대의 에츠고야(越後屋)가 그 원점으로 된다.   일본 전통복장용 직물인 고후쿠(呉服)가게의 주인인 미츠이 다카토시(三井高利)씨가 17세기 중반쯤에 이미 고객을 높이 모시는 것을 상업에서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내놓은 사람이다.   당시 미츠이씨는 천을 필의 단위로 팔았던 재래의 장사 수법이 소비자들에게 불편을 끼침을 발견했다. ‘고객의 립장에서 생각’하고 ‘고객의 불편을 덜어 드리려’ 고심한 끝에 그는 선조들이 물려준 방식에서 벗어나 천을 손님이 요구하는 만큼 끊어서 파는 방식을 택했다. 다시 말하면 가게가 아닌 손님에게 선택의 권리를 주는 새로운 상법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손님이 값을 깎아야 하는 불투명한 가격 협상절차를 없애고 적당한 가격을 정하는 새로운 방식의 비지니스를 시작했다.   몇백년의 세월과 더불어 다듬어지고 세련된 일본의 써비스문화이다.   요즘 일본에 오는 외국관광객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는 빈틈없는 일본의 상업문화, 무릇 한푼이라도 소비하는 손님에게 무조건적으로 만족을 주어야 한다는 그런 절대적인 써비스문화가 오래동안 변함없이 지켜지고 전수되여온데는 업주와 고객, 직원과 고객간의 상호포용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음식점에서 무릎을 꿇은 채 주문을 받는 직원, 슈퍼에서 손님 자신의 차실로 닭알을 깨버렸을 경우에도 무조건 새 것으로 바꾸어주는 경우, 아무리 과분한 요구일지라도 상대가 손님이라면 “안됩니다”, “모릅니다”라는 직설적인 대화를 피해 최대한의 노력으로 손님의 기분을 안정시키는 경우, 손님을 문밖까지 바래다 주고 뒤모습에 머리숙여 인사하는 업주들의 공손함 등등 20여년을 일본에서 생활하다 보면 ‘왕’대접을 받는 것 같은 이런 것들이 어느새 당연한 일로 습관이 되여 버리고 만다.   물론 무릎을 꿇은 직원을 비하하는 손님은 거의 없으며 손님과의 눈높이가 같아서 편하다고 여기는 직원들의 자발적인 경우가 많다. 아무리 최선을 다 했다 해도 고객의 심경에 불편함을 끼쳤다면 머리숙여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리유와 경과를 입밖에 내지 않는 이들의 원칙을 때때로 느낀다.   봉사를 받는 고객들 역시 감사의 마음을 표달하기에 여념이 없다. 돈을 소비하면서 “감사합니다”를 잊지 않을 정도로 손님과 주인은 평등한 관계인 것이다.   공항 세관수속중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정되여 리유 불문하고 가방을 열어야 하는 경우 “이들도 일을 해야 잖아요” 하면서 리해와 협조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저도 몰래 탄복이 된다.   서투른 점원 때문에 뜨거운 국물의 세례를 받고서도 어깨를 다독여주며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라고 내심상의 짜증을 표현하지 않는 이들도 수없이 보아왔다.   “돈을 쓰는 사람”과 “돈을 버는 사람” 간의 평등한 위치와 동등한 권리하에서 오고 가는 포용의 따스함에 부족했던 인간이 한보한보 성장을 보이게 되는게 아닐가.   인간본성의 작은 구석에는 ‘리기’(利己)가 숨 쉰다. 신선했던 친절함이 오래되면 당연한 일로 돼 버리고 더 높은 욕구에 렴치를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인 역시 례외가 아니다.   가끔 억지 쓰는 ‘神’도 있다. 작은 꼬투리를 잡고 “무릎 꿇고 빌어라”, “고발하겠다”, “전액을 돌려달라” 등등 소동을 부리는 경우, 저도 몰래 못된 황제와 힘없는 백성의 관계를 상상하게 된다. ‘손님은 신이다’에 대한 의존의식 때문에 착각을 하는 일부 사람들, ‘무조건’을 조건으로 들이대는 ‘억지’를 두고 아픔을 겪어야 하는 써비스업종이기도 하다.   하여 최근에는 “잘 못 전달된 ‘손님은 신이다’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도를 넘는 지나친 ‘무료써비스’, 다시 말하면 싼 돈을 주고 비싼 써비스를 요구하는 과도한 요구에 대한 여론도 끊기지 않고 있다. 심지어 ‘손님은 신이다’의 주객관계는 손님자체가 높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다는 견해마저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오래동안 침투된 이런 착각 역시 포용을 해야 하는 일본의 써비스문화는 통증을 겪으면서도 전통을 버리지 못한다. 하다면 업종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그들은 어떻게 푸는 것일가.   한마디로 ‘세상이 돌고 도는 것이기에 다행’이라고 개괄하고 싶다.   오늘은 내가 봉사를 하는 사람이지만 래일에는 내가 ‘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받은 만큼 돌려 주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손님일 경우 나도 최상의 써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론리이다. 같은 업종, 같은 경우에 대해 더더욱 엄격한 봉사업종 종사자들,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끼리 리해와 동정심 외에도 기대와 감독, 편달이 필요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다.   갑자기 몇해전에 중국에 관광하러 갔던 일본인 친구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환전하러 은행에 갔었는데 려권을 던져서 돌려주는 바람에 당황했었단다. 호텔을 찾아서 들어갔더니 직원이 핸드폰을 들여다 보면서 눈도 마주치지 않은채 “没有”라고 짜증스레 대답하더라 했다.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친구는 그런 대접을 받고도 성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에 더욱 놀랐다고 했다. 개성이 뚜렷하고 자아표달에 능한 중국사람을 내심 부러워 했었는데 좀 실망했다는 뉴앙스였다.   “요즘에는 옛날보다 많이 나아졌어요.” 흔히 듣는 고향 사람들의 말이 늘 마음에 걸린다. 역시 포용력이 아닐가.   현명한 황제는 백성을 길 들인다 한다. 지혜로운 백성을 키워야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게 아닌가 싶다. ‘황제’대접을 받지 못하는 원인중의 하나가 잘못된 포용의 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길림신문/ 리홍매 일본 특파원
‹처음  이전 3 4 5 6 7 8 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