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spora적 시각으로 본 중국조선족 역사의 새로운 해석
권혁수
1. 들어가는 말
주지하는 바와 같이 흔히 “離散”으로 불리는 “diaspora”는 그리스어의 “diasperie”에서 비롯되었는데 그중 “dia”는 (경계를)넘나 든다는 뜻이고 “sperien”는 종자를 뿌리는 뜻이며 히브리어의 “galut”에 해당한다고 한다. 요컨대 diaspora의 본뜻은 자연의 식물들이 바람을 이용해 종자와 꽃가루를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번식시키는 그야말로 평범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자연적 현상을 일컫는 것이었는데, 서기 70년 이래 유대왕국의 유민들이 로마제국에 의해 원 거주지역에서 쫓겨나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유대민족 특유의 비극적 운명을 일컫는 특정용어인 “Diaspora”로 “승격”되었으며 그 속에는 유대민족 특유의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나아가서 종말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diaspora는 이미 위와 같은 유대민족 특유의 역사 문화적 context를 벗어나 국외 또는 해외 이민 및 그 현상에 대한 泛稱的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diaspora의 주체와 그들의 모국(원 거주지역) 및 거주국(현 거주지역) 사이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심리적 관계로 말미암은 긴장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본고 역시 위와 같은 넓은 의미에서 diaspora를 사용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을 통해 지금까지 중국 소수민족 역사 및 중국 동북지역사 등 협소한 틀에서 전개되어온 중국 조선족 역사를 동아시아 나아가서 global history의 보다 넓은 차원에서 해석하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의 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 한민족의 diaspora는 동아시아 근대사의 중요한 구성부분
반만년을 넘는 한민족의 역사상 삼국시기 唐나라에 의한 高句麗, 百濟 遺民들의 대량 被拉사례, 壬辰倭亂 당시 일본에 의한 조선왕조 軍民들의 대량 被拉사례, 丁卯 및 丙子胡亂 당시 조선왕조 官民들의 대량 被拉사례 등이 적지 않았지만, 그 지속된 시기와 규모 및 영향에 있어서 모두 2000년 전 유대민족의 Diaspora와 비교가 되지 않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한민족의 diaspora적 현실은 대체로 근대적 역사시기에 들어서서 나타난 현상으로서 요컨대 동아시아 역사 특정단계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한민족의 diaspora와 관련된 동아시아 근대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본다.
표1. 한민족의 diaspora와 관련된 동아시아 근대역사 年表
1842년, 중국 淸政府 阿片戰爭에서 패한 뒤 영국과『南京條約』체결하고 개항.
1857년, 일본 德川幕府 미국과『下田條約』체결하고 개항.
1860~1863년, 조선 함경도지역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조선인의 중국 만주지역 및 러
시아 연해주 이주 시작.
1868년, 일본 明治維新.
1876년, 조선왕조 일본과『朝日修好條規』(『江華條約』) 체결하고 개항.
1882년, 조선 서울에 壬午軍亂 일어남, 淸軍 조선으로 출동한 뒤 서울 상주.
같은 해, 조선 청정부와『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체결.
1884년, 조선 러시아와『朝露修好通商條約』체결.
같은 해 12월, 조선 甲申政變 “三一天下”로 실패.
1885년, 청정부 일본과『天津條約』체결.
1888년, 조선 러시아와『天津會議專條』(『天津條約』)체결.
1894년3월, 조선 전라도에서 동학농민봉기.
6월, 청일전쟁 조선에서 勃發.
1895년 4월, 청정부 일본과『馬關條約』(『下關條約』)체결.
10월, 일본 조선 서울에서 乙未事變 일으켜 조선왕비 閔妃 살해.
1899년, 청정부 대한제국과『中韓通商條約』체결, 公使級 외교관계 수립.
1900년, 義和團사건으로 8개국 연합군 중국 침략.
1901년, 청정부 열강과『辛丑條約』체결.
1904년 2월, 러일전쟁 한국 인천에서 발발.
6월, 청정부 및 대한제국 지방관원『會議中韓邊界善後章程』체결.
1905년 9월, 러시아와 일본『포츠머스 평화조약』체결.
11월, 일본 대한제국과 제2차『日韓協約』(『乙巳保護條約』)체결.
1909년 9월, 청정부 일본과『圖們江中韓界務條款』(『間島條約』)체결.
1910년 8월, 일본 대한제국과『日韓合邦條約』체결, 대한제국 일본에 강제병합 됨.
1911년 10월, 중국 辛亥革命 일어남, 이듬해 청정부 멸망, 中華民國 수립.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일어남.
1917년 11월, 러시아 10월혁명 일어나 소비에트 정권 수립.
1919년 3월, 한국에 3.1운동 일어남.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수립.
5월, 중국에 5.4운동 일어남.
1920년 6~10월, 한국독립군 중국 延邊지역에서 鳳梧洞 및 靑山里 大捷.
1923년 9월, 일본 關東대지진, 6000명 넘는 在日 한국인 피살.
1931년 7월, 중국 吉林省 長春縣에서 萬寶山事件 일어남.
9월, 일본 관동군 9.18사변 일으킴.
1932년 3월, 만주국 “新京”(오늘의 長春)에서 수립.
1937년 7월, 일본군 盧溝橋事變 일으켜 中日 全面戰爭 발발.
9월, 소련정부 극동지역의 한국인 20여 만명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발발.
10월, 일본『國民徵用令』실시, 1945년까지 한국인 45만 여명 강제징용.
1943년 8월, 조선총독부『朝鮮徵兵制』실시.
1945년 8월, 미군 일본의 廣島 및 長崎에 원자폭탄 투하, 피해자 중 한국인 7만여 명
포함.
8월 15일, 일본 천황 항복 선언.
당시 일본에 200만 명 넘는 한국인 , 1946년 12월까지 140만 명 남짓한 한
국인 일본에서 남북한으로 귀환.
1948년 8~9월, 대한민국(ROK)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선후로 서울과 평
양서 수립.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PRC)북경서 수립.
1945년 8월 당시 중국 동북지역에 한국인 200만 명 거주, 1953년까지
100만 명 정도의 한국인 남북한으로 귀환.
위와 같은 간략한 연대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민족의 diaspora는 사실상 동아시아 역사의 특정시기 즉 근대시기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근의 한 연구에서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된 동아시아 역사를 근대화의 공통 基調 아래 분열과 와해 및 관계와 연동이라는 두 개의 變奏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요컨대 漢字, 儒敎 및 조공관계를 유대를 하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문화권 그리고 중국 중심의 閉鎖型 동아시아국제관계체제가 와해 및 분열되면서 한중일 세 나라가 심지어 상호 충돌과 적대관계로 발전하면서 드디어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되고 중국마저 침략하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날로 밀접하고 광범위한 관계와 연동(connection and interaction)을 경험하게 되면서 근대동아시아 세계를 낳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화는 대체로 세계적(global), 지역적(regional) 그리고 국가적(national) 세 가지 차원의 내용을 포함하게 되는데 한민족의 diaspora는 바로 위와 같은 3중 근대화 과정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적 역사시기에 있어서 한국은 동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국권을 잃어버렸는데 따라서 한민족 역시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diaspora적(?)인 모습을 지닌 국제적 또는 동아시아적(?)인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민족의 diaspora 과정 역시 동아시아 근대역사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 실례로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 된 뒤 일본 및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가로 이주한 한국인의 규모가 크게 증가하였고, 1931년 만주사변 후의 괴뢰 만주국 시절 한국인의 만주 이주가 종전의 두 배가 넘는 200만 명에 달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의 전면적으로 전개된 뒤 소련정부는 극동지역의 조선인 20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고,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뒤 각각 140만 및 100만 정도의 한국인들이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조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민족의 diaspora는 이미 민족역사의 차원을 떠나 동아시아적인 국제성격을 갖게 되면서 동아시아 근대역사의 중요한 내용으로 부각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민족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널리 흩어져 있으면서 가장 국제적인 모습을 갖게 된 것을 결국 근대 이래 한민족의 비극적인 운명이 남겨준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2010년 말까지 한민족의 해외동포는 총 7,268,771명에 달하는데 그중 중국에 2, 704, 994명, 미국에 2, 176, 998명, 일본에 904,806명, CIT국가에 535, 679명이 있으며 해외동포 인구의 61%가 해당국가 국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 시각으로 볼 때 위와 같은 해외동포 인구는 당연히 근대 이래 한민족 diaspora의 결과물이었다.
3. 한민족의 diaspora는 중국 조선족 형성의 역사적 원인일 뿐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기원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대체로 古朝鮮 및 高句麗遺民說, 遼金元 및 明初說, 明末淸初說, 19世紀後半說 등 다양한 견해가 說往說來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근대 이래 한민족 diaspora 과정으로 살펴 볼 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인식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하나의 민족집단(ethnic group)으로서의 중국 조선족은 결국 근대 이래 한민족 diaspora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일찍부터 역사적 기원의 논쟁과 관련 없이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는 무엇보다도 국제적 이민(international migr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국제이민의 정의와 관련하여 일찍 1922년의 제4회 국제노동자대회(The Fourth Session of the International Labour Conference)부터 그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위한 관한 노력이 끊임없이 전개되어왔는데. 1998년 유엔 경제사회사무통계국(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 Statistics Division, UN)에서 발표한 관련문서(Recommendation on Statistics of International Migration)에서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국제이민이란 상주 국가를 바꾼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데, 다만 레이저, 휴가, 비즈니스 및 의료 또는 종교적 원인으로 단기 출국한 사람은 제외한다.”
그리고 국제이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Migration, IOM)에서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국제이민이란 자신의 조국 또는 상주 국가를 떠나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정주목적으로 영구적 또는 상당한 기간 동안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위와 같은 현대적 국제이민의 개념에 비추어보더라도 근대 이래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가 국제이민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학계의 일부 연구에서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를 “遷入” 또는 “遷移”라고 지칭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위와 같은 국제이민의 성격을 간과 심지어 부정하고 있다는 면에서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조선족 이민역사의 시대적 구분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많은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일찍 1932년에 조선인학자로서 최초로 만주 조선이민을 연구한 李勳求는 이주의 目的國 및 受容國家인 중국 측의 수용정책 차원에서 鎖國時代, 黙許時代, 移民歡迎時代 및 彈壓時代로 조선인의 만주이주역사를 정리하였다. 사실 이민 수용국가인 중국 측의 역사적 시대구분에 따라 청왕조시기, 중화민국시기 및 만주국 시기로 구분할 수도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중국조선족 이주역사와 관련하여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시기구분에 관한 견해가 아직도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학자 朴昌昱은 중국 조선족의 역사가 1620년의 청왕조 초기에 시작한 것으로 주장하면서 1931년까지의 중국조선족 역사를 다음과 같은 4단계로 구분하였다. 그중 1620년부터 1670년의 청왕조 초기가 제1단계이고 1670년대부터 1880년대가 “冒禁潛耕”시기, 1885년부터 1910년대가 “移民實邊”시기, 1910년부터 1930년대까지가 “自由移民”시기였다. 그리고 중국학자 黃有福은 중국조선족 이민역사를 한민족의 미국이주역사와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4단계를 제시하였다. 17세기 후반의 “古代移民”을 “戰爭移民(war migration)”으로 간주하고, 19세기 후반의 이민은 “自由移民(free migration)”, 1910년대의 이민은 “亡命移民(exiled migration)” 그리고 1920~1945년의 이민을 “被植民移民(impelled migration)” 또는 “被管理移民(controlled migration)”으로 간주하였다.
한국학자 김기훈은 최근의 연구에서 1932년 만주국 수립 후 일본의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만주로 향한 조선이민은 그 성격상 일반적인 “국제이민(international migration)”과 다른 소위 “帝國內移民(intra-colonial migration)”으로서 그 역사적 과정을 구체적으로 방임정책시기(1932~1936)과 통제정책시기(1937~1945)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하튼 한국인의 중국이주 역사는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는 1945년의 8.15광복을 계기로 종결되었으며 따라서 적어도 100년이 넘는 한국인들의 중국(만주지방을 중심으로)을 목적지로 한 diaspora 역시 종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내외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1943년 당시 조선인은 만주국 총인구의 41%를 차지하였고 1945년 광복까지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인 총인구는 200만에 달하였다. 요컨대 중국 동북지역은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이주하는 주요 목적지이자 집결지로서 19세기 후반부터 중국동북지역 조선인 인구 총수의 변화와 관련하여 일본학계의 다음과 같은 집계결과를 참조할 수 있다.
표2: 중국 동북지역 조선인 인구의 변화(1881~1949)
연도
해당연도 인구총수
연도
해당연도 인구총수
1881
10,000
1925
513,973
1894
65,000
1930
607,119
1904
78,000
1935
826,570
1910
202,070
1940
1,450,384
1915
282,070
1944
1,658,572
1920
459,427
1945
1,110,657
한편 중국학자 金炳鎬의 연구에 의하면 1945년부터 1953년까지 100만 명 정도의 조선인들이 한반도의 남과 북으로 귀환하였고 그후 1953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차 인구조사결과 당시 조선족 인구총수는 1, 120, 405명에 달하였다. 요컨대 1953년 당시 112만 명 남짓한 조선족 인구는 바로 근대 이래 한민족의 diaspora가 중국대륙에 남긴 역사적 결과로서 바로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되어 온 조선인들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국에서 조선으로의 쌍방향적 유동(stream and counter-stream)과정의 최종 결과물로서 즉 오늘날 중국 조선족 인구의 직접적인 起源이 되었다.
둘째, 중국으로 이주 해온 조선인들이 중국 조선족으로 형성된 것은 나름대로 뚜렷한 중국적 특색을 갖춘 역사적 과정이었다, 국제이민에 관한 추진력과 흡인력 이론(push-pull theory)에 의하면 이주민의 생성과정에는 원 거주지의 추진력(push factors)과 더불어 이주 목적지의 흡인력(pull factors)도 있어야 한다. 조선인들의 중국이주 특히 만주국시기 조선“開拓民”들의 만주이주사례는 바로 위와 같은 이론을 입증할 수 있는 단적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후 국제적 이주민 집단으로서의 조선인들이 이주 목적국가인 중국에서 한 소수민족으로 형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역사적 변화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이민 수용국가인 중국정부의 경우 20세기 초의 청왕조 말기에 이미 국적가입의 방식으로 조선이주민들을 중국국민으로 편입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만주국 시기의 소위 “五族協和”를 거쳐 1949년에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시기에 들어서 드디어 중국 국민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면서 중국사회의 소수민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이주민들의 경우 동북지방의 개발 및 중국의 민족독립과 해방투쟁에 적극 가담하는 방식으로 중국정부 및 국민들의 인정과 존경을 취득하였고 아울러 중국 사회 새로운 구성원으로서의 자신과 자아정체성을 확보하면서 결국 이른바 中華民族 大家庭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었다.
요컨대 조선인 이주민들이 중국에서 중국사회의 새로운 소수민족 즉 중국조선족으로 형성되는 과정은 결국 외부의 타자(중국정부 및 국민)로부터 민족 집단 자체에서 정체성을 이중적으로 확보 및 형성하는 역사적 과정으로서 중국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의 형성과정은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지역 한민족 공동체의 형편과 분명 많은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953년 후 중국조선족 인구의 변화과정과 관련하여 중국정부 인구조사자료를 이용한 중국학자 김병호의 연구결과를 참조할 수 있다.
표3: 1953~2000년 중국조선족 인구의 변화
지역
연도
전국
吉林省
黑龍江省
遼寧省
內蒙古
기타 지역
1953
1,120,405
756,026
231,510
132,869
1964
1,339,569
866,627
307,591
146,513
18,838
1982
1,765,204
1,104,074
431,664
198,252
17,580
13,654
1990
1,923,361
1,181,964
452,398
230,378
22,641
33,216
2000
1,928,842
1,145,688
388,458
241,052
21,052
126,785
위 표3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조선족의 인구가 1953년의 112만 명에서 21세기 초의 192만까지 성장한 것은 조선족이 현대중국의 사회정치적 환경에서 자율적으로 발전해온 결과로서 앞서 살펴본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되어 온 한민족의 diaspora와 사실상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일찍 “조선반도의 남과 북 주민들을 포함한 조선민족 전체의 초국가(경/계)적 diaspora 현상은 오로지 중국조선족이 형성할 수 있는 역사적 원인으로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 사회가 여전히 갖고 있는 현실적 특징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해왔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학자 崔佑吉 역시 최근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중국 조선족이 동북의 다른 민족(특히 한족)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l‘우리 의식’을 가지고 살아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최근 한국과의 교류를 거치면서 한반도에 사는 한인들과는 구별되는 ‘우리의식’을 형성해 가고 있음이 관찰된다......이제 그들은 한민족의 혈통을 가진 중국 공민이라는 의미로 ‘중국의 조선족’임을 자각하면서, 조선족 농촌 공동체의 해체위기라는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중국학자 김병호의 주장은 한층 더 간결하고 명확하였다.“(중국의)조선족들은 반드시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조선족은 한민족에 속하지만 결국 중국의 조선족으로서 한국의 조선족도 아니며 조선의 조선족도 아니다.”
4. 나가는 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diaspora가 자연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에서 유대민족 특유의 비극적 역사운명을 가리키는 특정용어로 굳어지고 나아가서 국제적 이민현상을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로 통용되면서 무엇보다도 diaspora의 주체(개인 또는 집단)와 본 거주지 및 현재 거주지 사이의 지리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거리감과 긴장관계를 표출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diaspora적 시각으로 한국인들의 중국이주 역사를 조명하기에는 나름대로 합리성을 갖출 수 있겠지만 오늘날의 중국조선족 사회가 여전히 그러한 diaspora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조선족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diaspora적 시각을 원활하게 적용하기에는 아직도 실증적 차원과 이론적 차원에서 적지 않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해외 한민족연구의 권위자인 한국학자 李光奎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조선족은 혈연적으로 한민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은 법적으로 중국공민이고, 문화적으로 이미 많은 영역이 중국화 된 특수한 조건을 갖고 있는 한민족이다. 중국조선족은 음식, 주택 등 일상생활에서, 명절 등의 세시풍속에서, 결혼,장례 등의 의례문화에서, 그리고 의식구조와 가치관에서 이미 중국화 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은 중국인이 아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중국조선족 나름의 특이한 생활양식을 갖고 중국조선족 나름의 특이한 가치관을 형성해 왔다. 따라서 중국조선족은 중국에 거주하는 세계의 해외한민족이 되었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중국인도 아니지만 한국인도 아닌 중국조선족 독특한 지리적. 문화적 환경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한민족이면서, 한반도에 거주하지 않는 한민족이면서, 또한 미국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한민족이 아니라 중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으로서의 입장이라면, 그 환경과 조건에 합당한 중국조선족 나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나름의 삶의 지혜를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무엇보다도 의식개혁을 통해 중국조선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중국조선족과 같은 입장은 자기의 주관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 이중적 가치관에서 방황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민의식과 정착의식, 한국의 꿈과 중국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의 기원에 관한 논쟁과 상관없이 19세기 후반부터 중국조선족의 역사는 적어도 두 세기를 넘었고 중국조선족 역사에 관한 연구 역시 1930년대 초 李勳求의 연구 및 1950년대 중국조선족 역사에 관한 조사연구사업을 비롯해 적어도 반세기가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조선족 역사의 연구는 실증적 연구와 이론적 해석 등 모든 분야에서 아직도 많이 부족한 실정인데 중국 국내의 경우 만주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등 다른 소수민족의 역사연구업적에 비해 크게 못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일본, 미국 및 CIT국가 등 지역의 한민족 그룹의 연구에 비해 역시 많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도 있겠지만 연구이론과 연구방법의 빈곤 역시 위와 같은 현상의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21세기 초의 오늘날 학문적 연구 역시 세계화(globalization)되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역사 및 지방역사의 협소한 연구시야를 벗어나 보다 넓은 세계사(global history)차원에서 중국조선족역사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노력은 분명 향후 중국조선족 역사의 수준을 향상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마지 않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