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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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누가 뭐래도 우리는 중국 조선족 댓글:  조회:2307  추천:0  2014-02-24
누가 뭐래도 우리는 중국 조선족 권혁수      일전에 한국 언론을 통해 모 국회의원이 중국 조선족을 “재중동포”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 이유인즉  “조선족은 중국이 국내 56개 민족 중 우리 민족을 구분할 때 쓰는 말이고” 또한 조선족으로 부를 때 “북한과 직결된 일족이라는 오해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인데 따라서  “우리 민족, 우리글과 말의 호칭”에 대해 “세계 공통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문제는 그 국회의원이 평소 중국조선족에 대하여 도대체 얼마나 공부하고 연구해 왔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데 무엇보다도 그가 제시한 이유가 너무 황당해 보였다.    먼저 “우리 민족, 우리글과 말의 호칭”을 세계 공통으로 통일하겠다는 발상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헷갈린다. 먼저 “우리글과 말의 호칭”에 관하여 일찍 1997년에 유네스코(UNESCO, 聯合國敎科文組織)에 의해《훈민정음》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한글(hangeul)이라는 호칭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국회의원은 도대체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우리글과 말의 호칭”을 새삼스럽게 “세계 공통으로 통일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그런 상식을 모르고 그냥 해보는 이야기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호칭과 관련하여 “세계 공통으로 통일하겠다”는 주장은 더욱 상식 밖의 이야기로 들린다. 일제의 36년 식민 지배를 벗어난 지 반세기를 넘어 69년째 들어서는 21세기 초의 오늘까지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에는 엄연히 유엔에 동시 가입되어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라는 두 나라가 공존하고 있는데 따라서 영어로는 하나의 코리아(Korea)로 “통일”될 수 있지만 “우리글과 말”로는 당연히 “조선”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 “민족” 그리고 “문화”의 호칭이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반도(또는 조선반도)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말하자면 같은 핏줄의 한 민족 내부에서 조차 버젓이 두 개의 “나라” 로 분단되어 이른바 “조선민족”과 “한민족”으로 각각 자칭 및 타칭되고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그 호칭을 “세계 공통으로 통일”할 수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조선족이라는 호칭이 “북한과 직결된 일족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야 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그 국회의원은 “북한”을 아예 한국과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긴가? 조선족의 호칭이 “북한과 직결된 일족”으로 비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서 분단된 한반도의 한쪽에 불과한 한국과 “직결된 일족”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발상은 결국 한반도의 통일을 그토록 갈망하는 중국 조선족을 비롯한 해외 한민족 동포들에게 남과 북 사이에 편 가르기를 강요하는 무단과 폭력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조선족이라는 호칭이 오로지 “중국이 국내 56개 민족을 구분”하기 위해 쓰는 용어라는 주장은 중국 조선족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엄청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19세기 말부터 전개되어 온 중국 이주 및 정착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두 세기를 넘겨 중국 국민 및 중국 내 새로운 소수민족 집단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중국 조선족은 나름대로 한반도(또는 조선반도)의 고국문화와 다를 뿐만 아니라 중국내 다른 민족 집단과도 엄연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력사적 그리고 문화적 전통을 구축해왔고 아울러 중국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를 형성해왔다.     요컨대 “조선족”은 단순하게 현재 거주국인 중국정부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타칭이 아니라 두 세기 가까운 중국 조선족의 력사와 문화 및 집단적 정체성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특유의 이름이었다. 실제로 재일동포, 고려인 또는 재미동포 등 다른 해외 한민족(또는 조선민족) 집단과 달리 민족적 특성을 제대로 살린 호칭으로 사용하면서 민족 집거지역에서 민족 자치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오로지 중국 조선족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족이라고 하면 바로 그리고 오로지 중국의 우리 민족 집단, 조선족은 결국 중국 국적을 갖고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줄임말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1952년 9월 3일에 당시 조선족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연변에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설립되었고(1955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 뒤이어 1958년 9월 15일에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설립되었으며 그 밖에도 료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 35개의 조선족 향(鄕) 또는 진(鎭)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5세기의 지리적 대발견과 더불어 비롯된 서구학계의 인류학과 민족지학적 연구는 유럽의 기독교적인 근대문명과 대조되는 소위 야만적, 원시적 지역과 민족 을 대상으로 하였고 그러한 지역과 민족에게 소위 근대적 학문적 논리에 따른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근대 인류학과 민족지학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처럼 자기집단의 소위 문명적 기준에 따라 이질적인 문화 및 인간집단을 제멋대로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새로운 이름까지 마음대로 지어주는 행태는 무엇보다도 자기집단의 문화에 대한 강렬한 배타적인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행태와 문화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유력한 비판이 바로 팔레스타인(Palestine, 巴勒斯坦) 출신의 미국학자 에드워드 싸이드(Edward Said, 愛德華·薩義德)가 설파(說破)한 오리엔탈이즘(Orientalism, 東方主義)이론이었다.     사실 2010년 1월에 한국정부기관에 해당하는 국립국어원에서 상대를 차별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 “조선족”이라는 용어를 “재중동포”로 표현하도록 이미 공식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 국회의원의 우와 같은 주장은 “조선족” 호칭 나아가서 중국조선족에 대한 한국사회의 잘못된 인식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화되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리 중국 조선족에게 있어 “조선족”이라는 호칭은 결코 차별 용어가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자부하고 있다. 즉 중국 조선족은 결코 어느 누구에 의해 새삼스럽게 이름이 지어줘야 하는 그런 야만적, 원시적 민족 집단이 아니라 해외 한민족(또는 조선민족) 가운데서 소수민족집단으로서의 자치적 권리를 가장 잘 누리고 있고 특히 현재 거주국인 중국에서도 가장 우수한 소수민족으로 자랑되고 있는 실정이다.   유교경전인《춘추곡량전》(春秋榖梁传)에 의하면 공자(孔子)는 이름 지음은 그 주인에 따라야 한다(“名从主人”)고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이 같은 민족이면서도 한반도의 안과 밖에서 서로 갈라져 있고 흩어져 있는 동포들을 무슨 용어로 호칭하거나 “통일”하는 것과 상관없이, 적어도 19세기 말부터 중국에서 살아오면서 당당하고 떳떳한 중국 국민으로 중국내 우수 소수민족집단으로 자리 잡고 있는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중국 조선족이다. (끝)  
4    为什么以及怎样建设朝鲜族学? 댓글:  조회:3076  추천:3  2013-12-14
 建设朝鲜族学笔谈三篇 为什么以及怎样建设朝鲜族学?    Why and How to Build the Chaoxianzu(朝鲜族) Studies?                                                                                                                                                                                                                                                           权赫秀     尽管自己的研究专长并非民族学也不是民族史乃至朝鲜族史,然而笔者早在1983年9月师从著名东北地方史专家常城教授攻读东北师范大学历史系中国近现代史专业硕士研究生时,就曾接触到有关20世纪30年代东北地区朝鲜族革命斗争史的一些内容,到1986年7月完成的硕士学位论文《张学良时期的反日运动初探(1928—1931)》中,还探讨了1930年延边地区红五月斗争的相关史实。  此后,尽管仍未从事有关朝鲜族史的专门研究,却一直没有放弃对朝鲜族历史及文化问题的关注乃至零星研究,如《关于1920—30年代东北地方朝鲜族农民的经济状况》、[1]《万宝山事件史实考订二则》、[2]《论中国朝鲜族在图们江地区开发中的地位和作用》、[3]《万宝山事件中的朝鲜族农民》[4]等。到2001年由韩国游学归来后,依旧没有放弃对朝鲜族历史文化的关注乃至研究,迄今为止不仅先后在国内外学界发表了有关朝鲜族历史研究的14篇学术论文,还在报刊上发表了有关朝鲜族文化及现实问题的12篇评论文章。 必须指出,笔者之所以能够不顾自己的专业范围局限而如此长期地关注朝鲜族历史文化问题并试图对其中的一些问题有所探究,除了作为朝鲜族知识分子而对本民族历史文化的先天性关心以外,已故延边大学副校长郑判龙先生的深刻影响应该说是一个重要的推动因素。记得是在1992年11月28日上午,笔者专程由长春赶赴延吉拜访郑判龙先生于其既不宽敞更不奢华的延边大学教师宿舍,请先生为我赴韩国学中央研究院留学而撰写推荐信。就在当天先生亲笔题赠给笔者的《郑判龙文集》一书的前言中,有这样一段感人至深的真诚表白: “1960年春天就在我结束国外的留学回到中国时,我的留学同学们都是竭力劝阻我重新回到延边,认为回到那里就会荒废学业,不如留在北京科学院一同从事学术研究。在环境优越的地方成长为一名学者固然是一件好事,而从我的处境来看,却是认为回到延边献身于我们民族的教育事业更为实际更有良心,因此还是毅然回到了延边。到三十多年后的今天,我的许多留学同学都已经成为大学者或在工作中取得了大成就。然而,我至今依然不后悔返回自己的家乡为繁荣本民族文化教育事业而献身的当初选择。”[5]  2004年10月7日由郑判龙先生的弟子们在延边大学校园内建立的郑判龙文学碑的碑文上,也是刻上了摘引自郑先生《风雨五十载》一书中的这样一段文字:  “我没有勇气拒绝同胞们的召唤而去追求个人的所谓前途。那时候我没有那个勇气,现在依然没有。1960年5月初,延边正是春花、梨花盛开的时节,我怀着要办好延边大学的雄心,离开北京,踏上了北归的列车。”[6]  在晚年被朝鲜王朝政府尊封为“国一都大禅师禅教都总摄扶宗树教普济登阶尊者”的佛教禅宗大师休静西山大师(1520—1604),在壬辰倭乱时期还曾是率领五千僧兵抵抗倭寇的抗倭义兵名将。当年西山大师留下的一首汉诗《踏雪诗》,也是后来大韩民国临时政府主席白凡金九先生极为喜爱并经常书写给友人的名作:      “踏雪野中去,不须胡乱行。今日我行迹,遂作后人程。”[7]  郑判龙先生当年的毅然决断以及数十年后的上述真情表白,无论是对于笔者个人还是我们中国朝鲜族的所有知识分子乃至所有成员,不仅是足以堪当“后人程”,更是高山仰止的伟大榜样。笔者一直认为,没有为郑判龙先生实现其献身于民族教育文化事业的伟大志向提供一个更好的环境与条件,可以说是当代中国朝鲜族文化史上最大的一个历史性遗憾。正是从这个意义上,如果我们都能够铭记郑判龙先生尽其一生的奋斗历程而留下的上述教诲,无疑应该大大有助于克服和解决近年来屡屡被提及的中国朝鲜族的各种“危机”。这一点也正是笔者不顾专业学识及研究范围的局限而发起此次有关建设朝鲜族学笔谈的初衷与理由所在。   至于为什么要在21世纪初全球化趋势风靡世界各国的今天提倡建设一个朝鲜族学,亦即建设朝鲜族学的必要性,至少可以指出如下的三点。        第一,基于中国朝鲜族发展历史尤其是自我认同意识的现实需要。根据2000年第五次全国人口普查统计资料,全国朝鲜族人口为1923842人,约占全国总人口129533万人的 0.00015%,约占全国少数民族总人口113792211人的 0.017%。[8]另据韩国政府最新统计,截至2010年末,韩民族海外同胞人口达到7268771人,其中居住在中国的海外同胞人口达到2704994人,占世界各国海外同胞人口之首。值得注意的是,此处所谓居住在中国的海外同胞人口2704994人并不仅仅指中国朝鲜族人口,还包括具有韩国海外投票权的在华投资者及留学生等。[9] 有关中国朝鲜族人口总规模的上述两组国内外官方统计数据,表明中国朝鲜族人口尽管在中国总人口以及少数民族总人口中所占比例少之又少,而在分布于世界各国之朝鲜半岛海外居民中却是最大的人口规模。近年来有关中国朝鲜族的研究在韩国及日本学界日益得到重视,应该是与上述的事实具有直接的关联。 另一方面,截至2010年3月底居住在韩国的中国朝鲜族人口被推算为423000人,实际上意味着中国朝鲜族经济活动人口(16—60岁)的约三分之一、中国朝鲜族总人口的20%以上经常乃至长期居住在韩国。[10] 正是经过建交二十一年来与韩国社会的密切交流之后,中国朝鲜族反而开始具有了更加清晰明确的集体自我认同意识(collective  identity)。从上个世纪90年代的纪实文学作品《한국은없다》[11],到最近以来朝鲜族网络媒体上屡屡发出的“우리는 누구인가?”、“우리는 우리다, 떳떳하고 당당하라”等强烈呼吁,[12]实际上都是意味着中国朝鲜族群体在经过与韩国社会长期、广泛、密切、深入的交流之后,开始出现了有别于韩国人、朝鲜人的“中国朝鲜族”自我认同意识。当代社会科学的研究认为,自我认同的形成首先是一种与他者(the other)的区别(distinction)以及差异化(differentiation)的过程,而中国朝鲜族将自己与韩国人、朝鲜人乃至其他韩民族海外群体相区别乃至差异化的上述自我认同过程,可以说是其中的一个典型事例。    简言之,中国朝鲜族至少两个世纪以上的形成与发展历史、人口规模尤其是自我认同的社会现实,已经在急切地呼唤着一个以中国朝鲜族为研究对象的朝鲜族学的产生。关于社会需要对科学发展的重要性,恩格斯曾经明确指出:“技术在很大程度上依赖于科学状况,那么科学状况却在更大的程度上依赖于技术的状况和需要。社会一旦有技术上的需要,则这种需要就会比十所大学更能把科学推向前进。”[13] 当代中国著名历史学家陈寅恪也曾对学术发展的时代性问题明确指出:“一时代之学术,必有其新材料与新问题。取用此材料,以研求问题,则为此时代学术之新潮流。治学之士,得预于此潮流者,谓之‘预流’(借用佛教初果之名)。”[14] 笔者认为,有关中国朝鲜族研究的朝鲜族学完全可以成为21世纪初中国乃至国际学界相关学术领域的一个“新潮流”。       第二,基于中国朝鲜族研究百年学术史符合逻辑的内在发展需求。如果说上述的社会需求是促使朝鲜族学产生的外在推动因素的话,至少两个世纪的中国朝鲜族研究的学术发展史则可以说是其符合逻辑的内在动因。仅据笔者之目力所见,1930年代初期李勋求博士著《满洲与朝鲜人》[15]一书,应是朝鲜人学者有关中国朝鲜族历史最早的专门学术研究成果,也可以看做是有关中国朝鲜族历史百年研究史的开端。[16]至于1930年由延边《民声报》社出版的沈茹秋遗著《延边调查实录》[17],尽管其学术性略逊于前者,却应是由居住在中国国内的朝鲜族学者在中国进行调查及出版的最早一份有关中国朝鲜族历史与现状的研究成果。到新中国成立以后1950年代末期由中国政府组织进行的中国朝鲜族历史调查以及相关研究工作,[18]则可以说是当代中国学界有关中国朝鲜族历史研究的正式开端。 到改革开放以后的1988年以来由中国朝鲜族学界为主导连续举办的东北朝鲜民族史学会学术年会[19]以及在此基础上发展起来的中国朝鲜民族史学会[20],更是表明以中国学界尤其是朝鲜族学界为主要力量的中国朝鲜族历史研究,已经形成了相当的发展规模。到21世纪初的今天,中国朝鲜族历史乃至现实研究已然成为超越国家、地区、民族、学科界限而方兴未艾的一个研究领域与主题,并积累了相当丰富的研究成果,[21]也出现了有关中国朝鲜族革命斗争史上的“双重使命说”等具有重要理论意义的研究结论。[22] 换言之,经过迄今两个世纪的发展,有关中国朝鲜族历史与现实的研究无论在个案研究还是在理论性探讨方面都已经相当成熟,从知识积累与学术史角度应该说具备了建设一个 朝鲜族学的基础条件。      第三,国外学术界研究的激荡与刺激。如前所述,至少从近代科学研究的角度来看,在日本殖民时期朝鲜人学者李勋求的相关研究是有关中国朝鲜族历史与现实研究百年史的开端,亦即有关中国朝鲜族历史与现实的研究在历史上就不是发端于中国朝鲜族学界。到21世纪初的今天,有关中国朝鲜族历史与现实的研究已然成为韩国、日本学界的一个重要研究领域与主题,如韩国学界有延世大学金度亨教授的研究团队编辑出版的《殖民地时期在满朝鲜人的生活与记忆》系列研究成果、[23]仁荷大学韩国学研究所编辑出版的“延边学”系列丛书、[24]韩国外国语大学林永尚教授的研究团队正在编纂朝鲜族电子文化大典等。日本学界不仅有一系列深入的研究成果,[25]更是  在1999年1月创立“中国朝鲜族研究会”的基础上于2007年12月正式成立了“朝鲜族研究学会”,并出版发行学会期刊《朝鲜族研究学会志》。仅从对中国朝鲜族历史与现状进行专门深入的调查研究以及成立专门学会发行专门学术期刊的角度来看,可以说韩国与日本学界已经走在了中国学界尤其是中国朝鲜族学界之前。如此研究现状,不禁使人联想到现代中国学术史上“敦煌在中国而敦煌学研究在日本”的前车之鉴。由包括笔者在内的中国朝鲜族学者来发起倡议建设朝鲜族学,与国外学界上述研究现状的激荡与刺激,无疑是具有重要的关联。         毋庸赘述,正如中国朝鲜族是由两百万朝鲜族人口组成的一个大家庭一样,“朝鲜族学”的建设当然也不可能是个别学者甚至个别国家、个别民族学界在短时间内能够“毕其功于一役”的简单之举,需要相关各国、各民族、各学科学界长期的共同努力。同此一理,怎样来建设一个朝鲜族学以及怎样来推动朝鲜族学的深入发展,当然也需要更加广泛、多元、深入的探讨与讨论。笔者只是出于一己之管窥蠡测,谨就朝鲜族学的建设问题提出如下三点思考,以就教于海内外学界及广大朝鲜族同胞。      首先,朝鲜族学的名称之前应是无须再添加“中国”二字,因为“朝鲜族”原本就是中国 朝鲜族所特有的称谓。可以说,“ 朝鲜族”这一称谓已经包含和浓缩了中国朝鲜族两个多世纪的全部历史与文化乃至自我认同。 [26]众所周知,在苏联及后来的俄罗斯及独联体国家的朝鲜民族,被称为只有朝鲜人之意的“Koreets(男)/Koreianka(女)”,[27] 即其中只有对个体种族性的承认而非对其种族群体的称谓乃至承认。在日本的朝鲜民族多被称为在(旅)日朝鲜/韩国人,至于旅居欧美等其他国家的朝鲜民族也大都是被称为旅某某国朝鲜/韩国人,翻译为英文大都是Korean ethnic or minority in 某某国家或地区, 都是强调朝鲜/韩国人移民 群体之来源国/祖籍国的称谓,而不是对其移民群体之集体性自我认同(collective identity)的承认乃至称谓,唯独中国径直称为“朝鲜族”。这样一种在全球范围内最具有现居住国家民族特性的称谓,反映了如下一个基本历史事实,即中国朝鲜族在历史上是通过东亚范围内的跨国离散(diaspora)过程,而由移居到中国境内的朝鲜人移民集团逐步形成为中国国民乃至中华民族大家庭中的一个少数民族,至于如今的两百万中国朝鲜族在任何意义上都已经不能说是一种离散族群。[28]  值得一提的是,有关中国朝鲜族的称谓至今仍没有一个权威的英文翻译。目前国内朝鲜族通用的“Chinese Korean”一词其实极容易与“韩国(朝鲜)华侨”的英译相混淆,[29]至于中国朝鲜民族史学会的英文名称“China Korean Minority History Association”显然也不是一个正确的英文翻译。笔者认为,日本的朝鲜族研究学会将中国朝鲜族英译为“Korean Chinese”,一些学者甚至直接取“朝鲜族”一词的朝鲜语发音而作“Joseonjok”[30],都是值得认真关注并加以进一步的讨论。         其次,朝鲜族学的研究对象当然是中国朝鲜族,因此朝鲜族学在其构筑伊始就应当确立以朝鲜族为本位(by Chaoxianzu〔朝鲜族〕standard)的学科定位。 具体说来,朝鲜族学在国内学界不应仅仅局限于中国少数民族视角乃至东北地方史视角的研究,在国外学界也不应仅仅局限于韩国或朝鲜海外同胞研究的范畴,包括近年来颇为盛行的朝鲜/韩国人离散(diaspora)研究。笔者认为,鉴于中国朝鲜族研究在国内外学界的不同视角乃至立场差异,明确这样一种中国朝鲜族本位的学科定位,对于此后朝鲜族学建设与研究的深入发展无疑具有格外重要的意义。         第三,鉴于中国朝鲜族的历史、现实诸特征,朝鲜族学的建设与研究在视野上应是超越国家与民族界限的全球化(globalization),在方法上应是综合采用多学科理论与方法的跨学科科际综合(interdisciplinary),在参考文献乃至研究过程中也应是积极提倡多国多语言文献(multi-national language archives)的综合利用与交叉分析。 唯有如此,才能更加全面、客观、深入地分析与阐述有关中国朝鲜族历史与现实的诸问题,才能使朝鲜族学的建设与发展真正能够符合21世纪世界学术发展大势,进而成为中国乃至世界学术园林之中的又一朵美丽新花。    还应指出,此次由 笔者发起的有关建设朝鲜族学笔谈,曾经获得 众多相关研究者的积极呼应以及国外学界的关注,却由于各自不同的原因,最终只有包括笔者在内的三位研究者提出了笔谈稿,似也不妨当做是引发有关朝鲜族学建设进一步广泛深入讨论的抛砖引玉之举。 其中,安成浩博士基于文化人类学角度关注稻作文化对朝鲜族农业移民社会乃至1949年后朝鲜族社会各个领域的综合影响,并呼吁应加强对朝鲜族社会文化现象的田野调查、口述史整理工作,从文化角度提出了建设朝鲜族学的有益思考。许寿童副教授强调延边史乃至朝鲜族史研究中应注重全局视野、比较视角及东北地方史视角,进而主张应充分挖掘朝鲜族史的固有特点,其实就是从历史学研究的角度来强调朝鲜族学建设的特性问题。 作为此次笔谈的发起者,笔者对于全部笔谈文稿进行了文字上的编辑与整理工作,却没有对笔谈内容进行任何的修改,包括各自叙述的方式及注释规范,以尊重并保存每一位作者的原意。所收录的三篇笔谈文稿依据提交先后顺序排列,不包含任何轩轾之意,而且每一位笔谈参加者的立场与观点仅代表其个人,并不代表其他参加者乃至中国朝鲜民族史学会。至于笔谈文稿中的一切内容,当然是由笔谈参加者个人自负其文责,亦不待言。 感谢中国朝鲜民族史学会前任会长黄有福教授及现任会长郑信哲研究员对此次笔谈的理解与支持,尤其要感谢响应笔者的倡议而积极参加此次笔谈的安成浩博士与许寿童副教授。值得一提的是,包括笔者在内参加此次笔谈的三位研究者,都是在中国改革开放以后的新时期成长起来的新生代朝鲜族学者,也都具有在韩国或日本的海外留学经历及国外博士学位。这些个人经历与学术背景实际上正是朝鲜族在20世纪与21世纪之交中国社会巨大变迁过程中具有 代表性意义的一个缩影,更是中国朝鲜族在东亚乃至全球范围内开始又一次大规模跨国移动[31]的历史见证。《荀子·大略》曰:“尽小者大,积微者著。”希望我们这些普通研究者的绵薄之力,能够有助于朝鲜族学的建设与发展,进而能够有助于开拓中国朝鲜族更加美好的未来,是所祷也。 作者简介:权赫秀,朝鲜族,韩国学中央研究院文学博士(Ph.D),历任韩国学中央研究院招聘研究员、东北师范大学历史文化学院教授、韩国高丽大学韩国史学科外国人教授,现任辽宁大学历史学院教授、博士生导师,兼任辽宁大学东亚关系史研究中心主任,研究领域为中国近现代对外关系史及东亚国际关系史,著有《19世纪末韩中关系史研究》、《近代韩中关系史的再照明》、《近代中韩关系史料选编》、《东亚世界的裂变与近代化》等。     [1]  韩国明知大学《明知史论》总5号(1993年2月)。 [2] 《博物馆研究》1993年2期。 [3] 《人文地理》1993年2期。 [4] 《中国朝鲜族足迹历史丛书》编委会编: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第二卷《火种》,北京:民族出版社1995 年版,第65—75页。 [5] 郑判龙:《郑判龙文集》(朝鲜文),延吉:延边人民出版社1992年版,“前言”第1—2页。由郑判龙先生亲 笔题赠的该书,一直被笔者放在书架的显著位置之上,不时引起对先生的无限追思,端的是:“泰山其颓乎, 梁木其坏乎,哲人其萎乎!”(《礼·檀弓上》) [6] 转引自王瑜:《从南到北70载》,北京:民族出版社2005年版,卷首第26幅照片。笔者尽管与延边大学没  有任何学缘关系,每次去延边大学之际,总是要抽空去瞻拜郑判龙文学碑。 [7] 宣德五、张明惠译《白凡逸志:金九自叙传》(北京:民主与建设出版社1994年版)封底内页称该诗为“金   九手录友人的诗,以表明他越过三八线时的心迹”,误。其实在这幅金九手迹的左下方,已经用小字自上而下   地明确标 注有“书休静大师踏雪诗一首为赠”字样。 [8] 参见国务院人口普查办公室、国家统计局人口和社会科技统计司编:《中国2000年人口普查统计资料》(上), 北京:中国统计出版社2002年版。 [9] 韩国外交通商部:《2011在外同胞现况》(2011年8月29日,首尔)。 [10] 参见在外同胞财团编:《韩国에살고있는中国同胞》,首尔,2010年1月;李振永:《중국조선족과한국의이민정책—미래동북아관점에서접근해야》,日本《朝鲜族研究学会志》创刊号(2011年12月),第16—29页。 [11] 金在国:《한국은없다》, 서울: 민예당, 1996년11월초판; 牡丹江: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98年版。 [12] 详见www.zoglo.net相关文章。 [13]  恩格斯:《恩格斯致符·博尔吉乌斯(1894年1月25日)》,载中共中央马恩列斯著作编译局编:《马克思恩 格斯选集》第四卷,北京:人民出版社1972年版,第505页。 [14] 陈寅恪:《陈垣敦煌劫余录序》,载陈寅恪:《金明馆丛稿二编》,北京:三联书店2001年版,第266页。 [15] 李勋求:《满洲와 朝鲜人》,平壤:崇实专门学校经济学研究室昭和七年(1932)版。 [16] 权赫秀:《中国朝鲜族历史的一项深入研究成果—读孙春日著〈“满洲国”时期朝鲜开拓民研究〉》,                                                        《北方民族》2005年第2期。 [17] 沈茹秋:《延边调查实录》,延吉:延边大学出版社,1987年。有关该书的研究,参见安华春:《关于沈茹秋    先生和他的﹙延边调查实录﹚》,载权立主编:《中国朝鲜族史研究》,延吉:延边大学出版社1996年版;郑   信哲:《民国初期一个朝鲜族知识分子的中国情怀—沈茹秋及其〈延边调查实录〉》,载黄有福主编:《中国朝   鲜族史研究2008》,北京:民族出版社2009年版,第37—45页。 [18] 参见中国科学院民族研究所吉林少数民族社会历史调查组编:《朝鲜族若干历史资料索目》,1959年5月6   日油印本,该资料承延边大学孙春日教授寄赠,谨此鸣谢;《朝鲜族简史》编写组编:《朝鲜族简史》,延吉: 延 边人民出版社1986年版,“后记”,第255—256页。 [19] 参见韩俊光主编:《中国朝鲜民族迁入史论文集》,牡丹江: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89年版。 [20] 参见中国朝鲜民族史学会网站(www.ckh21.org)相关内容。 [21] 国内外学界有关中国朝鲜族历史的研究成果,详见金泰国、禹景燮编:《中国朝鲜族历史研究文献目录》,首    尔:Unistory2013年版。 [22] 参见权赫秀:《‘双重使命’是中国朝鲜族革命史的根本特性》,《满族研究》2009年第4期;权赫秀:   《再论双重使命是中国朝鲜族革命斗争史的根本特性—兼评杨昭全等著〈中国朝鲜族革命斗争史〉》,    载黄有福主编《中国朝鲜族史研究2010—2011》,北京:民族出版社2013年版,第45—54页。 [23] 金度亨编:《殖民地时期在满朝鲜人的生活与记忆》Ⅰ、Ⅱ、Ⅲ、Ⅳ,首尔:先人2009年版;金度亨 等:《殖民地时期在满朝鲜人的生活与记忆》,首尔:先人2009年版。 [24] 仁荷大学韩国学研究所编:《延边朝鲜族的历史与现实》,首尔:昭明(音译)出版2013年版;仁荷大学 韩国学研究所编:《延边学的先驱者们》,首尔:昭明(音译)出版2013年版。上述资料由仁荷大学韩国学 研究所寄赠,谨此鸣谢。 [25] 参见权赫秀:《他山之石,可以攻玉—读金美花著﹙中国东北农村社会与朝鲜人的教育﹚》,中国朝鲜民     族史学会2013年年会(2013年7月6—7日,北京,中央民族大学)发表论文。 [26] 关于中国对朝鲜族民族政策以及由“朝鲜民族”之称谓转变为“朝鲜族”称谓的过程,参见郑信哲:《我国 的民族政策与朝鲜族社会发展》,中国朝鲜民族史学会2013年年会(2013年7月6—7日,北京,中央民族 大学)发表论文。 [27] 至于通常所说的 Koreiski,在俄语中其实是形容词而非名词。上述俄文词语问题承韩国学中央研究院权熙英 教授指教,谨此鸣谢。 [28] 参见权赫秀:《从离散(diaspora)视角来重新诠释中国朝鲜族历史》,日本朝鲜族研究学会2011年年会(2011年12月17日,京都,龙谷大学)发表论文。 [29] 如韩国学者朴银琼著《韩国华侨的种族性》一书(首尔:韩国研究院1986年版)的英文书名就是“The Ethnicity of the Chinese in Korea”,参见该书第299—301页。 [30] 日本早稻田大学亚洲研究机构研究员权香淑博士多次与笔者讨论有关朝鲜族称谓的英文翻译问题并有所指教, 谨此鸣谢。笔者认为,既然“朝鲜族”是居住在中国并具有中国国籍的朝鲜民族群体所特有的称谓,则有关 朝鲜族以及朝鲜族学的英文翻译,当然也应遵循中国通用汉语拼音的方式,如“朝鲜族”应作 “Chaoxianzu”、“朝鲜族学”应作“the Chaoxianzu Studies”。如此想法及译法是否妥当,谨请广大朝鲜族同 胞以及海内外相关学者不吝赐教为荷。 [31] 关于朝鲜族跨国移动情形的最近研究,参见朴光星:《세계화시대중국조선족의초국적이동과사회변화》,首 尔:韩国学术情报2008年版;关于朝鲜族在日本的跨国移动情形的研究,参见权香淑:《移动する朝鲜族—エスニック•マイノリティの自己统治》,东京:彩流社2011年版。权香淑博士寄赠自己的上述著作,谨此鸣谢。  
3    디아스포라적 시각으로 본 조선족 역사의 새로운 해석 댓글:  조회:2354  추천:4  2013-08-26
diaspora적 시각으로 본 중국조선족 역사의 새로운 해석 권혁수 1. 들어가는 말 주지하는 바와 같이 흔히 “離散”으로 불리는 “diaspora”는 그리스어의 “diasperie”에서 비롯되었는데 그중 “dia”는 (경계를)넘나 든다는 뜻이고 “sperien”는 종자를 뿌리는 뜻이며 히브리어의 “galut”에 해당한다고 한다. 요컨대 diaspora의 본뜻은 자연의 식물들이 바람을 이용해 종자와 꽃가루를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번식시키는 그야말로 평범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자연적 현상을 일컫는 것이었는데, 서기 70년 이래 유대왕국의 유민들이 로마제국에 의해 원 거주지역에서 쫓겨나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유대민족 특유의 비극적 운명을 일컫는 특정용어인 “Diaspora”로 “승격”되었으며 그 속에는 유대민족 특유의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나아가서 종말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diaspora는 이미 위와 같은 유대민족 특유의 역사 문화적 context를 벗어나 국외 또는 해외 이민 및 그 현상에 대한 泛稱的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diaspora의 주체와 그들의 모국(원 거주지역) 및 거주국(현 거주지역) 사이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심리적 관계로 말미암은 긴장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본고 역시 위와 같은 넓은 의미에서 diaspora를 사용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을 통해 지금까지 중국 소수민족 역사 및 중국 동북지역사 등 협소한 틀에서 전개되어온 중국 조선족 역사를 동아시아 나아가서 global history의 보다 넓은 차원에서 해석하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의 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 한민족의 diaspora는 동아시아 근대사의 중요한 구성부분 반만년을 넘는 한민족의 역사상 삼국시기 唐나라에 의한 高句麗, 百濟 遺民들의 대량 被拉사례, 壬辰倭亂 당시 일본에 의한 조선왕조 軍民들의 대량 被拉사례, 丁卯 및 丙子胡亂 당시 조선왕조 官民들의 대량 被拉사례 등이 적지 않았지만, 그 지속된 시기와 규모 및 영향에 있어서 모두 2000년 전 유대민족의 Diaspora와 비교가 되지 않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한민족의 diaspora적 현실은 대체로 근대적 역사시기에 들어서서 나타난 현상으로서 요컨대 동아시아 역사 특정단계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한민족의 diaspora와 관련된 동아시아 근대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본다. 표1. 한민족의 diaspora와 관련된 동아시아 근대역사 年表 1842년, 중국 淸政府 阿片戰爭에서 패한 뒤 영국과『南京條約』체결하고 개항. 1857년, 일본 德川幕府 미국과『下田條約』체결하고 개항. 1860~1863년, 조선 함경도지역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조선인의 중국 만주지역 및 러 시아 연해주 이주 시작. 1868년, 일본 明治維新. 1876년, 조선왕조 일본과『朝日修好條規』(『江華條約』) 체결하고 개항. 1882년, 조선 서울에 壬午軍亂 일어남, 淸軍 조선으로 출동한 뒤 서울 상주. 같은 해, 조선 청정부와『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체결. 1884년, 조선 러시아와『朝露修好通商條約』체결. 같은 해 12월, 조선 甲申政變 “三一天下”로 실패. 1885년, 청정부 일본과『天津條約』체결. 1888년, 조선 러시아와『天津會議專條』(『天津條約』)체결. 1894년3월, 조선 전라도에서 동학농민봉기. 6월, 청일전쟁 조선에서 勃發. 1895년 4월, 청정부 일본과『馬關條約』(『下關條約』)체결. 10월, 일본 조선 서울에서 乙未事變 일으켜 조선왕비 閔妃 살해. 1899년, 청정부 대한제국과『中韓通商條約』체결, 公使級 외교관계 수립. 1900년, 義和團사건으로 8개국 연합군 중국 침략. 1901년, 청정부 열강과『辛丑條約』체결. 1904년 2월, 러일전쟁 한국 인천에서 발발. 6월, 청정부 및 대한제국 지방관원『會議中韓邊界善後章程』체결. 1905년 9월, 러시아와 일본『포츠머스 평화조약』체결. 11월, 일본 대한제국과 제2차『日韓協約』(『乙巳保護條約』)체결.     1909년 9월, 청정부 일본과『圖們江中韓界務條款』(『間島條約』)체결. 1910년 8월, 일본 대한제국과『日韓合邦條約』체결, 대한제국 일본에 강제병합 됨. 1911년 10월, 중국 辛亥革命 일어남, 이듬해 청정부 멸망, 中華民國 수립.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일어남. 1917년 11월, 러시아 10월혁명 일어나 소비에트 정권 수립. 1919년 3월, 한국에 3.1운동 일어남.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수립. 5월, 중국에 5.4운동 일어남. 1920년 6~10월, 한국독립군 중국 延邊지역에서 鳳梧洞 및 靑山里 大捷. 1923년 9월, 일본 關東대지진, 6000명 넘는 在日 한국인 피살. 1931년 7월, 중국 吉林省 長春縣에서 萬寶山事件 일어남. 9월, 일본 관동군 9.18사변 일으킴. 1932년 3월, 만주국 “新京”(오늘의 長春)에서 수립. 1937년 7월, 일본군 盧溝橋事變 일으켜 中日 全面戰爭 발발. 9월, 소련정부 극동지역의 한국인 20여 만명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발발. 10월, 일본『國民徵用令』실시, 1945년까지 한국인 45만 여명 강제징용. 1943년 8월, 조선총독부『朝鮮徵兵制』실시. 1945년 8월, 미군 일본의 廣島 및 長崎에 원자폭탄 투하, 피해자 중 한국인 7만여 명 포함. 8월 15일, 일본 천황 항복 선언. 당시 일본에 200만 명 넘는 한국인 , 1946년 12월까지 140만 명 남짓한 한 국인 일본에서 남북한으로 귀환. 1948년 8~9월, 대한민국(ROK)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선후로 서울과 평 양서 수립.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PRC)북경서 수립. 1945년 8월 당시 중국 동북지역에 한국인 200만 명 거주, 1953년까지 100만 명 정도의 한국인 남북한으로 귀환. 위와 같은 간략한 연대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민족의 diaspora는 사실상 동아시아 역사의 특정시기 즉 근대시기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근의 한 연구에서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된 동아시아 역사를 근대화의 공통 基調 아래 분열과 와해 및 관계와 연동이라는 두 개의 變奏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요컨대 漢字, 儒敎 및 조공관계를 유대를 하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문화권 그리고 중국 중심의 閉鎖型 동아시아국제관계체제가 와해 및 분열되면서 한중일 세 나라가 심지어 상호 충돌과 적대관계로 발전하면서 드디어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되고 중국마저 침략하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날로 밀접하고 광범위한 관계와 연동(connection and interaction)을 경험하게 되면서 근대동아시아 세계를 낳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화는 대체로 세계적(global), 지역적(regional) 그리고 국가적(national) 세 가지 차원의 내용을 포함하게 되는데 한민족의 diaspora는 바로 위와 같은 3중 근대화 과정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적 역사시기에 있어서 한국은 동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국권을 잃어버렸는데 따라서 한민족 역시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diaspora적(?)인 모습을 지닌 국제적 또는 동아시아적(?)인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민족의 diaspora 과정 역시 동아시아 근대역사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 실례로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 된 뒤 일본 및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가로 이주한 한국인의 규모가 크게 증가하였고, 1931년 만주사변 후의 괴뢰 만주국 시절 한국인의 만주 이주가 종전의 두 배가 넘는 200만 명에 달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의 전면적으로 전개된 뒤 소련정부는 극동지역의 조선인 20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고,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뒤 각각 140만 및 100만 정도의 한국인들이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조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민족의 diaspora는 이미 민족역사의 차원을 떠나 동아시아적인 국제성격을 갖게 되면서 동아시아 근대역사의 중요한 내용으로 부각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민족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널리 흩어져 있으면서 가장 국제적인 모습을 갖게 된 것을 결국 근대 이래 한민족의 비극적인 운명이 남겨준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2010년 말까지 한민족의 해외동포는 총 7,268,771명에 달하는데 그중 중국에 2, 704, 994명, 미국에 2, 176, 998명, 일본에 904,806명, CIT국가에 535, 679명이 있으며 해외동포 인구의 61%가 해당국가 국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 시각으로 볼 때 위와 같은 해외동포 인구는 당연히 근대 이래 한민족 diaspora의 결과물이었다. 3. 한민족의 diaspora는 중국 조선족 형성의 역사적 원인일 뿐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기원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대체로 古朝鮮 및 高句麗遺民說, 遼金元 및 明初說, 明末淸初說, 19世紀後半說 등 다양한 견해가 說往說來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근대 이래 한민족 diaspora 과정으로 살펴 볼 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인식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하나의 민족집단(ethnic group)으로서의 중국 조선족은 결국 근대 이래 한민족 diaspora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일찍부터 역사적 기원의 논쟁과 관련 없이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는 무엇보다도 국제적 이민(international migr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국제이민의 정의와 관련하여 일찍 1922년의 제4회 국제노동자대회(The Fourth Session of the International Labour Conference)부터 그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위한 관한 노력이 끊임없이 전개되어왔는데. 1998년 유엔 경제사회사무통계국(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 Statistics Division, UN)에서 발표한 관련문서(Recommendation on Statistics of International Migration)에서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국제이민이란 상주 국가를 바꾼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데, 다만 레이저, 휴가, 비즈니스 및 의료 또는 종교적 원인으로 단기 출국한 사람은 제외한다.” 그리고 국제이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Migration, IOM)에서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국제이민이란 자신의 조국 또는 상주 국가를 떠나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정주목적으로 영구적 또는 상당한 기간 동안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위와 같은 현대적 국제이민의 개념에 비추어보더라도 근대 이래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가 국제이민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학계의 일부 연구에서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를 “遷入” 또는 “遷移”라고 지칭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위와 같은 국제이민의 성격을 간과 심지어 부정하고 있다는 면에서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조선족 이민역사의 시대적 구분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많은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일찍 1932년에 조선인학자로서 최초로 만주 조선이민을 연구한 李勳求는 이주의 目的國 및 受容國家인 중국 측의 수용정책 차원에서 鎖國時代, 黙許時代, 移民歡迎時代 및 彈壓時代로 조선인의 만주이주역사를 정리하였다. 사실 이민 수용국가인 중국 측의 역사적 시대구분에 따라 청왕조시기, 중화민국시기 및 만주국 시기로 구분할 수도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중국조선족 이주역사와 관련하여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시기구분에 관한 견해가 아직도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학자 朴昌昱은 중국 조선족의 역사가 1620년의 청왕조 초기에 시작한 것으로 주장하면서 1931년까지의 중국조선족 역사를 다음과 같은 4단계로 구분하였다. 그중 1620년부터 1670년의 청왕조 초기가 제1단계이고 1670년대부터 1880년대가 “冒禁潛耕”시기, 1885년부터 1910년대가 “移民實邊”시기, 1910년부터 1930년대까지가 “自由移民”시기였다. 그리고 중국학자 黃有福은 중국조선족 이민역사를 한민족의 미국이주역사와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4단계를 제시하였다. 17세기 후반의 “古代移民”을 “戰爭移民(war migration)”으로 간주하고, 19세기 후반의 이민은 “自由移民(free migration)”, 1910년대의 이민은 “亡命移民(exiled migration)” 그리고 1920~1945년의 이민을 “被植民移民(impelled migration)” 또는 “被管理移民(controlled migration)”으로 간주하였다. 한국학자 김기훈은 최근의 연구에서 1932년 만주국 수립 후 일본의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만주로 향한 조선이민은 그 성격상 일반적인 “국제이민(international migration)”과 다른 소위 “帝國內移民(intra-colonial migration)”으로서 그 역사적 과정을 구체적으로 방임정책시기(1932~1936)과 통제정책시기(1937~1945)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하튼 한국인의 중국이주 역사는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는 1945년의 8.15광복을 계기로 종결되었으며 따라서 적어도 100년이 넘는 한국인들의 중국(만주지방을 중심으로)을 목적지로 한 diaspora 역시 종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내외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1943년 당시 조선인은 만주국 총인구의 41%를 차지하였고 1945년 광복까지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인 총인구는 200만에 달하였다. 요컨대 중국 동북지역은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이주하는 주요 목적지이자 집결지로서 19세기 후반부터 중국동북지역 조선인 인구 총수의 변화와 관련하여 일본학계의 다음과 같은 집계결과를 참조할 수 있다. 표2: 중국 동북지역 조선인 인구의 변화(1881~1949) 연도 해당연도 인구총수 연도 해당연도 인구총수 1881 10,000 1925 513,973 1894 65,000 1930 607,119 1904 78,000 1935 826,570 1910 202,070 1940 1,450,384 1915 282,070 1944 1,658,572 1920 459,427 1945 1,110,657 한편 중국학자 金炳鎬의 연구에 의하면 1945년부터 1953년까지 100만 명 정도의 조선인들이 한반도의 남과 북으로 귀환하였고 그후 1953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차 인구조사결과 당시 조선족 인구총수는 1, 120, 405명에 달하였다. 요컨대 1953년 당시 112만 명 남짓한 조선족 인구는 바로 근대 이래 한민족의 diaspora가 중국대륙에 남긴 역사적 결과로서 바로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되어 온 조선인들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국에서 조선으로의 쌍방향적 유동(stream and counter-stream)과정의 최종 결과물로서 즉 오늘날 중국 조선족 인구의 직접적인 起源이 되었다. 둘째, 중국으로 이주 해온 조선인들이 중국 조선족으로 형성된 것은 나름대로 뚜렷한 중국적 특색을 갖춘 역사적 과정이었다, 국제이민에 관한 추진력과 흡인력 이론(push-pull theory)에 의하면 이주민의 생성과정에는 원 거주지의 추진력(push factors)과 더불어 이주 목적지의 흡인력(pull factors)도 있어야 한다. 조선인들의 중국이주 특히 만주국시기 조선“開拓民”들의 만주이주사례는 바로 위와 같은 이론을 입증할 수 있는 단적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후 국제적 이주민 집단으로서의 조선인들이 이주 목적국가인 중국에서 한 소수민족으로 형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역사적 변화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이민 수용국가인 중국정부의 경우 20세기 초의 청왕조 말기에 이미 국적가입의 방식으로 조선이주민들을 중국국민으로 편입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만주국 시기의 소위 “五族協和”를 거쳐 1949년에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시기에 들어서 드디어 중국 국민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면서 중국사회의 소수민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이주민들의 경우 동북지방의 개발 및 중국의 민족독립과 해방투쟁에 적극 가담하는 방식으로 중국정부 및 국민들의 인정과 존경을 취득하였고 아울러 중국 사회 새로운 구성원으로서의 자신과 자아정체성을 확보하면서 결국 이른바 中華民族 大家庭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었다. 요컨대 조선인 이주민들이 중국에서 중국사회의 새로운 소수민족 즉 중국조선족으로 형성되는 과정은 결국 외부의 타자(중국정부 및 국민)로부터 민족 집단 자체에서 정체성을 이중적으로 확보 및 형성하는 역사적 과정으로서 중국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의 형성과정은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지역 한민족 공동체의 형편과 분명 많은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953년 후 중국조선족 인구의 변화과정과 관련하여 중국정부 인구조사자료를 이용한 중국학자 김병호의 연구결과를 참조할 수 있다. 표3: 1953~2000년 중국조선족 인구의 변화 지역 연도 전국 吉林省 黑龍江省 遼寧省 內蒙古 기타 지역 1953 1,120,405 756,026 231,510 132,869     1964 1,339,569 866,627 307,591 146,513 18,838   1982 1,765,204 1,104,074 431,664 198,252 17,580 13,654 1990 1,923,361 1,181,964 452,398 230,378 22,641 33,216 2000 1,928,842 1,145,688 388,458 241,052 21,052 126,785 위 표3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조선족의 인구가 1953년의 112만 명에서 21세기 초의 192만까지 성장한 것은 조선족이 현대중국의 사회정치적 환경에서 자율적으로 발전해온 결과로서 앞서 살펴본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되어 온 한민족의 diaspora와 사실상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일찍 “조선반도의 남과 북 주민들을 포함한 조선민족 전체의 초국가(경/계)적 diaspora 현상은 오로지 중국조선족이 형성할 수 있는 역사적 원인으로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 사회가 여전히 갖고 있는 현실적 특징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해왔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학자 崔佑吉 역시 최근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중국 조선족이 동북의 다른 민족(특히 한족)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l‘우리 의식’을 가지고 살아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최근 한국과의 교류를 거치면서 한반도에 사는 한인들과는 구별되는 ‘우리의식’을 형성해 가고 있음이 관찰된다......이제 그들은 한민족의 혈통을 가진 중국 공민이라는 의미로 ‘중국의 조선족’임을 자각하면서, 조선족 농촌 공동체의 해체위기라는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중국학자 김병호의 주장은 한층 더 간결하고 명확하였다.“(중국의)조선족들은 반드시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조선족은 한민족에 속하지만 결국 중국의 조선족으로서 한국의 조선족도 아니며 조선의 조선족도 아니다.” 4. 나가는 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diaspora가 자연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에서 유대민족 특유의 비극적 역사운명을 가리키는 특정용어로 굳어지고 나아가서 국제적 이민현상을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로 통용되면서 무엇보다도 diaspora의 주체(개인 또는 집단)와 본 거주지 및 현재 거주지 사이의 지리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거리감과 긴장관계를 표출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diaspora적 시각으로 한국인들의 중국이주 역사를 조명하기에는 나름대로 합리성을 갖출 수 있겠지만 오늘날의 중국조선족 사회가 여전히 그러한 diaspora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조선족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diaspora적 시각을 원활하게 적용하기에는 아직도 실증적 차원과 이론적 차원에서 적지 않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해외 한민족연구의 권위자인 한국학자 李光奎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조선족은 혈연적으로 한민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은 법적으로 중국공민이고, 문화적으로 이미 많은 영역이 중국화 된 특수한 조건을 갖고 있는 한민족이다. 중국조선족은 음식, 주택 등 일상생활에서, 명절 등의 세시풍속에서, 결혼,장례 등의 의례문화에서, 그리고 의식구조와 가치관에서 이미 중국화 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은 중국인이 아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중국조선족 나름의 특이한 생활양식을 갖고 중국조선족 나름의 특이한 가치관을 형성해 왔다. 따라서 중국조선족은 중국에 거주하는 세계의 해외한민족이 되었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중국인도 아니지만 한국인도 아닌 중국조선족 독특한 지리적. 문화적 환경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한민족이면서, 한반도에 거주하지 않는 한민족이면서, 또한 미국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한민족이 아니라 중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으로서의 입장이라면, 그 환경과 조건에 합당한 중국조선족 나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나름의 삶의 지혜를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무엇보다도 의식개혁을 통해 중국조선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중국조선족과 같은 입장은 자기의 주관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 이중적 가치관에서 방황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민의식과 정착의식, 한국의 꿈과 중국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의 기원에 관한 논쟁과 상관없이 19세기 후반부터 중국조선족의 역사는 적어도 두 세기를 넘었고 중국조선족 역사에 관한 연구 역시 1930년대 초 李勳求의 연구 및 1950년대 중국조선족 역사에 관한 조사연구사업을 비롯해 적어도 반세기가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조선족 역사의 연구는 실증적 연구와 이론적 해석 등 모든 분야에서 아직도 많이 부족한 실정인데 중국 국내의 경우 만주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등 다른 소수민족의 역사연구업적에 비해 크게 못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일본, 미국 및 CIT국가 등 지역의 한민족 그룹의 연구에 비해 역시 많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도 있겠지만 연구이론과 연구방법의 빈곤 역시 위와 같은 현상의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21세기 초의 오늘날 학문적 연구 역시 세계화(globalization)되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역사 및 지방역사의 협소한 연구시야를 벗어나 보다 넓은 세계사(global history)차원에서 중국조선족역사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노력은 분명 향후 중국조선족 역사의 수준을 향상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마지 않는다.(끝)
2    권혁수 프로필 댓글:  조회:1707  추천:0  2013-08-22
2007년 여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캠퍼스에서 기념촬영 권혁수(權赫秀, Quan He-xiu) 한국학중앙연구원(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문학박사(Ph. D)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빙연구원 중국 東北師範大學歷史文化學院 교수 및 한국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외국인교수 역임 현재 중국 遼寧大學 歷史學院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및 東亞關係史硏究中心 주임 저서『世紀大審判』,『19世紀末 韓中關係史硏究―李鴻章의 朝鮮認識과 政策을 中心으로』,『근대한중관계사의 재조명』,『近代中韓關係史料選編』,『東亞世界的裂變與近代化』외 다수 전공 중국근대사 및 동아시사국제관계사  
1    《朝鲜停战协定》六十年祭 댓글:  조회:1343  추천:2  2013-08-22
《朝鲜停战协定》六十年祭               权赫秀 (辽宁大学历史学院教授、博士生导师、东亚关系史研究中心主任)          1.朝鲜宣布不承认停战协定属于无效宣言 今年3月5日,朝鲜人民军最高司令部发言人宣布鉴于美韩的军事挑衅和对停战协议的粗暴践踏,决定朝鲜人民军处于进入全面对抗战的准备状态,从3月11日开始《朝鲜停战协定》将沦为废纸一张,朝鲜人民军板门店代表部也将切断电话,并终止一切活动。朝鲜方面的上述宣言,不仅为日益紧张的朝鲜半岛局势增添了新的危险因素,也使迄今六十年的《朝鲜停战协定》再次受到国际社会的关注。其实,这已经不是朝鲜第一次宣布不承认《朝鲜停战协定》。早在1995年朝鲜战争爆发45周年之际,朝鲜就曾宣布废弃《朝鲜停战协定》,1996年4月还曾宣布不再履行维持和管理军事分界线及非军事区的任务。进入21世纪以来,2009年朝鲜因韩国加入美国主导的“防扩散安全倡议(PSI)”而宣布不再受停战协定的约束,到2010年朝鲜人民军板门店代表部针对美韩联合军演,又一次表示朝鲜将不再受停战协定约束。对此,今年3月11日联合国发言人指出,朝鲜或韩国都无法单方面停止经过联合国大会批准通过的《朝鲜停战协定》。换言之,朝鲜一而再再而三地宣布不承认《朝鲜停战协定》,在国际法上属于无效宣言,而这种单方面的无效宣言根本不能真正废弃具有多边国际条约性质的《朝鲜停战协定》。      2.朝鲜停战机制的两大部分在1990年代中期已经瘫痪 1950年6月爆发的朝鲜战争,从最初朝鲜半岛内部南北两个政权之间的内战,迅速扩大为当时世界上几乎所有主要国家都以直接或间接方式卷入其中的冷战时期最大规模的一场地区性“热战”。其结果,交战双方都没有能够最终贯彻自己一方当初的战争目标,实际上是以“有限战争(limited war)”的方式中止了这场战争,既没有绝对的胜者,也没有绝对的失败者,朝鲜半岛的南北分裂局面依然没有得到改变。就是说,1953年7月27日签订的《朝鲜停战协定》只是中止了交战双方的敌对行为,却迄今没有在朝鲜半岛落实和平状态,从而成为20世纪以来维持时间最长的全面停战协定。根据《朝鲜停战协定》的相关内容,朝鲜半岛停战机制主要由军事停战委员会(MAC)、中立国监察会(NNSC)、军事分界线及非军事区(DMZ)三大部分组成。 其中,军事停战委员会是管理朝鲜半岛停战机制的最高机构,中立国监察委员会作为与军事停战委员会平行的独立机构,负责监督和视察停战协定的实施情况。根据交战双方“实际接触线”而划定的军事分界线以及由此各自后退两公里而形成的带状非军事区(DMZ),长248公里,宽4公里,总面积约4000平方公里,至今仍在隔绝着朝鲜半岛南北两个国家以及相关军事力量,实际上是朝鲜半岛停战机制的核心主体部分。到1991年3月,由于联合国军方面未经朝、中方面同意,擅自将军事停战委员会联合国军方面首席代表职务移交给韩国军队,致使军事停战委员会的工作陷入了瘫痪。1994年5月,朝鲜召回军事停战委员会朝方代表团并改派出朝鲜人民军板门店代表团,同年12月中国政府也召回了军事停战委员会中的中国人民志愿军代表团。也是在1994年,朝鲜迫使当初由朝、中方面提名的捷克斯洛伐克和波兰委员退出中立国监察委员会,并关闭了由北方管理的中立国监察委员会办公室及相关设施。 于是,军事停战委员会与中立国监察委员会在1990年代中期就已经处于瘫痪状态,朝鲜半岛停战机制三大部分中唯一仍在有效运作的就只有军事分界线及非军事区。从1990年代中期以来,朝鲜半岛先是出现导弹危机继而出现核危机,与当时朝鲜半岛停战机制的两大组成部分处于瘫痪的上述局面,显然不是时间上的偶然巧合,而是具有内在的直接关联。           3.朝鲜半岛停战机制的正反两个方面作用 应该看到,迄今六十年的朝鲜半岛停战机制具有正反两方面的历史作用。一方面,《朝鲜停战协定》为管理战后朝鲜半岛紧张局势并防止其失控,起到了重要的作用。值得注意的是,尽管朝鲜方面多次宣布不承认《朝鲜停战协定》,朝鲜半岛停战机制的两大部分已经瘫痪近二十年,甚至在进入21世纪后朝鲜半岛南北双方多次爆发武装冲突,而朝鲜方面从来没有公开和直接地冲击和破坏作为朝鲜半岛停战机制核心主体部分的军事分界线及非军事区,六十年前划定的军事分界线及非军事区至今仍在有效地隔绝着朝鲜半岛南北双方的军事力量。另一方面,“不战不和”的停战局面成为朝鲜半岛南北两个国家分裂乃至对立半个多世纪的历史根源,六十年来集结于军事分界线及非军事区两侧的双方军事力量剑拔弩张,一直处于高度警戒状态,使朝鲜半岛在冷战早已结束的21世纪初依然笼罩在一触即发的冷战阴云之下。 其实,《朝鲜停战协定》是以媾和为目的的全面停战,因此签订和平条约以彻底结束朝鲜战争,原本就是交战双方早在1953年7月就已经达成的一个共同意愿。然而,《朝鲜停战协定》第60款有关“协商从朝鲜撤退一切外国军队及和平解决朝鲜问题等问题”的高级别政治会谈根本就没有举行,此后无论是1953年的日内瓦会议还是1990年代的有关朝鲜问题四方会谈,乃至2003年至2007年有关朝鲜核问题六方会谈,都没有就实现朝鲜半岛和平问题达成任何协议。至于朝鲜与韩国在1991年12月签订的《南北之间关于和解与互不侵犯及交流合作的协议书》(又称《南北关系基本协议书》)以及21世纪以来先后达成的多次共同宣言,无论在其适用范围还是约束力上都无法取代具有多边国际条约性质的《朝鲜停战协定》。     4.朝鲜半岛和平条约若能实现,将产生诺贝尔和平奖   值此《朝鲜停战协定》签订六十周年之际,有关各方有必要重新确认当初为彻底结束朝鲜战争而实现全面停战的共同意愿,首先要继续维护《朝鲜停战协定》的合法有效性,同时要努力促成朝鲜半岛由停战局面进一步转化为和平状态。中国作为《朝鲜停战协定》的签字当事国家,不仅有义务继续维护朝鲜半岛停战机制,同时更有权利参与朝鲜半岛和平状态的实现进程。朝鲜半岛停战机制的形成及其演变历史,在很大程度上决定了六十年来朝鲜半岛局势的走向,而朝鲜半岛由停战局面转向和平状态的方式与进程,无疑也将直接影响到此后朝鲜半岛乃至东北亚局势的发展。因为只有终结朝鲜半岛停战局面而最终实现和平状态,长期以来朝鲜方面有关安全保障的积极诉求乃至目前迫在眉睫的朝鲜核危机也才能得到根本的解决,朝鲜半岛才能由一触即发的东北亚“火药库”真正成为和平安宁的三千里锦绣江山。 就在21世纪开始的2000年,当时韩国总统金大中因推行南北和解政策而获得了诺贝尔和平奖。根据20世纪后半叶以来越南问题、巴勒斯坦问题等具有全球意义的地区性热点问题先后产生多位诺贝尔和平奖获得者的先例,朝鲜半岛结束迄今六十年的停战状态而最终实现和平局面的历史进程,也完全有可能产生相关国家多个领导人共同获得诺贝尔和平奖的结果。(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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