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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정직한 사람 댓글:  조회:1473  추천:0  2010-04-23
19    사랑-인간- 천사 댓글:  조회:1589  추천:0  2010-04-21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사랑하는것은 인간이지만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는것은 천사이다.     -A.d.라마르단-                          
18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댓글:  조회:1410  추천:1  2010-04-20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이다.   --B. 리튼--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가 자기를 알아주기 전에 먼저 상대를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가 자신의 정당한 청을 거절할 때도 자신은 상대의 정당한 청이라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가 자기를 미워하여도 상대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가 자기를 악하게 대하여 생명의 위험을 느껴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가 자기 뜻에 지배되듯 따르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자신이 지배받듯 따르려 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이기고 상대의 마음을 생각하며 상대를 고이 보내 주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뜻에 따라 순종하고 정복당해 주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에게 무엇이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모두 주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입는 것을 마음 편하게 생각하는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를 배신하여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상대에게 배신당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상대를 위해 즈린 가슴 부여잡고 눈물로 축복해 주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버린 상대를 못 잊어 홀로 우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떠났던 상대가 다시 자기를 찾아 돌아와 줄 땐 지난날의 잘못을 다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며 반가워 뛰어나가 영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언제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더 생각하고 살려는 마음이며 상대를 위해 모든 것들 희생과 봉사로...심지어는 자신이 생명의 위험에 처해도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17    배우려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댓글:  조회:1596  추천:0  2010-04-19
    배움~~~                                                      배우다는 남의 가르침을 받다, 학문을 연마하다, "남의 하는 일 보고 그와 같이 하다"라는 뜻이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지각하고 변화 성장하게 되고 위험한 일을 제거 시키게 된다.    배우라 ! 그러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에게서 마음의 쉼을 얻게 되어 평안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배움의 대상은 남녀노소 뿐 아니라 타국인 까지이며 인생이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 창조주의 근본 사용 설명서를 배워야 한다.   배우는 때는 평상시에 평안할 때이며 공자는 "태평할 때  군인이 칼을 가는 것과 같다" 태평할 때  칼을 갈아 두면 비상 상태시에 견고하게 서게 된다.   인생에 기초요, 공동체에 기초가 되는 것은 그 분을 경외 하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에 따라 진리가 바꾸지 않는다.   배움터를 만들어 놓고 학습해야 하고 배움이 없으면  물을 떠난 고기와 같다.    배움은 사람이  동물과 다르게 멸종 하지 않고 발전할 수있는  가장 큰 원인이다.   오늘도 작은 것 하나를 통해 겸손하게 배우자 !!!!! 풀 한 포기... 나무 하나...돌부리를 통해 배우자...            
16    시간의 걸음걸이 댓글:  조회:1683  추천:0  2010-04-16
   
15    가장 아름다운 시간 댓글:  조회:1620  추천:0  2010-04-15
    어느날 우리가 마주칠 재난은 우리가 소홀히 보낸 어느 시간에 대한 보복이다.   ---나폴레옹---                        
14    가치있는 삶은 살아라 댓글:  조회:1597  추천:0  2010-04-14
               
13    사람의 일생에 여유란 없다 댓글:  조회:1718  추천:0  2010-04-13
  『 사람의 일생은 한 순간의 여유마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한순간 한순간을 소홀히 여긴다.   -셰익스피어- 』       셰익스피어가 가르쳐준 지혜     첫째.. 학생으로 계속 남아 있어라..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폭삭 늙기 시작한다..     둘째.. 과거를 자랑하지 마라..옛날 이야기밖에 가진 것이 없을 때 당신은 처량해진다..삶을 사는 지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셋째.. 젊은 사람과 경쟁하지 마라..대신 그들의 성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용기를 주고 그들과 함께 즐겨라..넷째.. 부탁받지 않은 충고는 굳이 하려고 마라..늙은이의 기우와 잔소리로 오해받는다..다섯째.. 삶을 철학으로 대체하지 마라..로미오가 한 말을 기억하라.."철학이 줄리엣을 만들수 없다면 그런 철학은 꺼져버려라."여섯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겨라..약간의 심미적 추구를 게을리 하지 마라..그림과 음악을 사랑하고 책을 즐기고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이 좋다..일곱째.. 늙어가는 것을 불평하지 마라..가엾어 보인다..몇 번 들어주다 당신을 피하기 시작할 것이다..여덟째.. 젊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다 넘겨주지 마라..그들에게 다 주는 순간.. 천덕꾸러기가 될 것이다..두 딸에게 배신당한 리어 왕처럼춥고 배고픈 노년을 보내다가 분노 속에서 죽게 될 것이다..아홉째.. 죽음에 대해 자주 말하지 마라..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인류의 역사상 어떤 예외도 없었다..확실히 오는것을 일부러 맞으러 갈 필요는 없다..그때까지는 삶을 탐닉하라..우리는 살기 위해 여기에 왔다..   세익스피어      
12    생활은... 댓글:  조회:1533  추천:0  2010-04-12
  생활은 모두 두가지로 성립되고있다. 하고싶지만 할수 없는것과 할수 있지만 하고싶지 않는것.   ---괴테---              
11    돈의 가치를 알려면 돈꾸러 가라 댓글:  조회:1652  추천:0  2010-04-09
        돈을 가치를 알려면 돈꾸러 가보라.   ---프랭클린---     플랭클린의 13진법        피뢰침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은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저명한 정치가와 문필가였다. 그는 자신이 읽은 수천 권의 책을 간략하게 간추려 황금률 13가지를 만들었다. 1. 절제- 배부르게 먹지 말라. 2. 침묵- 정말필요하지 않은 말은 하지 말라. 3. 규율-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있어야 옳은 법이다. 4. 결단 - 결심한 일은 반드시 실행하라. 5. 절약- 이익이 없는 일에는 절대로 돈을 쓰지 말라. 6. 근면- 언제나 유익한 일을 하라. 7. 성실- 깨끗한 것만 생각하고 속임수로 남을 해치지 말라. 8. 정의- 타인의 이익을 빼앗지 말라. 9. 중용- 극단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10. 청결- 주변에 불결한 흔적을 남기지 말라. 11. 평정- 사소한 일에 평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12. 순결- 건강과 출산을 위해서만 사랑을 나눠라. 13. 겸손-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으라. 그는 이와 같은 인생 교훈을 완성하긴 했지만 그 덕목들을 고르게 갖춘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13가지 덕목들을 일정한 기간을 정해두고 한 가지씩 순서대로 완성해 가기로 했다. 먼저 그는 ‘절제’의 미덕으로부터 완성한 다음 ‘침묵’의 미덕으로 옮겨 가며 그날그날의 훈련 성취도를 수첩에 기록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그 주간이 넘어가기 전에 보충해갔다. 바로 그것이 17세 가출 청소년이 미국 헌법 제정위원과 펜실베니아 총독, 펜실베니아 대학 설립자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10    그 천사의 이름은... 댓글:  조회:1661  추천:0  2010-04-08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사랑하는것은 인간이지만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는것은 천사이다.   ---A.d.라마르단---         옛날 천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곧 아기로 태어날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여쭙니다. -하느님 내일 아침에 저를 지상으로 보내실거죠? 하지만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난 아주 조그맣고 아무 힘도 없잖아요? -여러 천사들 중에서 선택된 하나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거란다. 하느님이 답하셨읍니다. -하지만 여기 하늘나라에선 노래하고 웃는 일 말고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잖아요. 그것만으로도 난 아주 행복하답니다. 하느님, 그곳에서는 무엇을 하나요? 그리고 인간들이 하는 언어를 나에게 말을 하면 나는 어떻게 이해를 하나요? -그 천사가 인간들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상냥하고 달콤한 말로 네게 말을 할 것이고 네게 가르칠 것이란다. -그러면 하느님과 말을 하고 싶을 땐 어떻게 하나요? -그 천사가 너의 조그마한 손을 모으고 네게 어떻게 기도하는지 가르칠 것이란다. -지상의 인간들 중에는 나쁜 인간도 있다고 들었는데 누가 저를 보호해 주나요? -그 천사가 너를 보호하는 삶의 언덕이 될 것이란다. -하지만 난 언제나 슬플 거예요. 왜냐면 하느님을 더 이상 뵐 수 없을테니까... 하느님을 못 보게되면 난 언제나 외로울 거예요. -그 천사가 네게 나에 대해서 말을 할 것이고 네게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보여 줄 것이란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하십니다. 곧 평화가 하늘 가득히 채워졌습니다. 아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습니다. -그 천사의 이름을 말해주세요. 하느님 그 천사의 이름은... . . . . 엄마란다.      
9    술잔과 입술사이에는 많은 실수가 있다 댓글:  조회:1849  추천:1  2010-04-07
      술잔과 입술사이에는 많은 실수가 있다.   ---팔라다스---              
8    경험-헤아릴수 없는 값을 지불한 보물 댓글:  조회:1755  추천:0  2010-04-06
               
7    현명한 사람은 적으로부터 많은것을 배운다 댓글:  조회:1309  추천:0  2010-04-02
                 
6    숭고한 인간과 어리석은 인간의 차이 댓글:  조회:1417  추천:0  2010-04-01
    숭고한 인간과 어리석은 인간의 차이는 불과 한 걸음밖에 되지 않는다.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라는 섬에서 1769년에 태어났다.이름은 나폴레옹(이탈리아 어로 황야의 사자라는 뜻) 보나파르트. 가난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코르시카섬은 14세기 이래 이탈리아의 제노바령이었는데 18세기 초기부터 주민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고, 18세기중엽부터는 P.파올리가 주도하였다. 보나파르트가(家)는 16세기에 코르시카로 이주하여 서부의 아야초의 소(小)귀족 지주가 된 뒤, 나폴레옹의 아버지인 샤를 보나파르트는 레티치아 라모리노와 결혼하여 파올리의 민족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그러나 제노바가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양도하였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프랑스군에게 저항하다가 1768년에 패배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프랑스에 귀순했으므로 1779년 국왕의 급비(給費)를 받아 나폴레옹을 본토의 브리엔 군사학교에 보냈고, 84년에는 파리사관학교로 진학시켰다. 〔프랑스 혁명〕 (업적에서 심충적으로)1789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코르시카에서 국민병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파인 파올리와 대립하게 되자, 93년 마르세유로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편협한 애향심을 버리고 <혁명프랑스>에다가 운명을 맡겼다. 열강이 혁명에 대하여 공세를 취하자, 영국·에스파냐 함대가 폐쇄중인 툴롱항을 포격하여 해방시켰고, 그 후 여단장이 되었으며, 다시 왕당파의 방데미에르의 반란을 진압·진정시켰다. 96년 3월 조세핀과 결혼하고, 27세인 그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 군대는 원래 이탈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군 견제를 목적으로 편성된 것으로, 장비와 규율이 엉망이었으나, 1년간 연속된 전투 끝에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97년 캄포포르미오조약을 맺고 치잘피나공화국을 창설함으로써, 프랑스 국경 밖의 프랑스땅을 확보하였다.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인하여 그 때까지 방어적이었던 혁명전쟁은 침략전쟁으로 변질되었다. 총재정부(總裁政府) 부내(部內)에서도 대영(對英)전략으로 인도항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이집트원정이 고려되고 있었고, 이 작전도 나폴레옹에게 맡겨졌다. 그는 98년 5월에 툴롱을 출발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고 <피라미드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프랑스 함대는 아부키르만에서 영국 함대에 의하여 괴멸되었다. 유럽에서 제2대 프랑스대동맹이 결성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군대를 남기고 99년 10월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총재정부는 부르주아 세력과 보수세력에게 협공을 당했기 때문에 정치적 안정성이 흔들렸고, 총재 시에예스 등은 정체(政體)변혁을 위하여 군사력을 필요로 하여 동년 11월 나폴레옹과 결탁하여 의회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프랑스혁명기(期)는 끝이 나게 되었다.〔제1집정(執政)에서 황제로〕 1799년의 헌법 제정 단계 때부터 그는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혁명의 사회적 성과를 보증하는 부르주아적 사회 안정을 지키기 위하여 강력한 정부를 염원하였다. 입법기관은 4원(四院)으로 분할되었고, 제1집정의 행정권이 강하여 그는 그 전제적 권력으로써 재정(財政) 확립을 위하여 프랑스은행을 설립하고 행정·사법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경찰력을 강화하였고, 1804년에는 민법전(民法典), 즉 나폴레옹법전 편찬을 끝내었다. 그는 또 곧 오스트리아군에 대해서 제2이탈리아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로마교황과의 종교협약을 성립시켰고, 이어서 영국과 아미앵조약을 맺음으로써 종신집정이 되었고, 스위스 및 독일 제후(諸侯)에게까지 지배의 손을 뻗치고, 국내에서는 왕당파를 탄압하더니 1804년 5월 황제로 추대된 뒤 이탈리아 왕을 겸했으며, 그 해 12월 2일 노트르담에서 대관식(그림)을 거행하였다. 이것이 제1제정(帝政)의 시작이다. 〔유럽정복〕 대륙의 여러 나라는 혁명의 영향, 프랑스의 경제 진출을 막기 위하여 나폴레옹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군대는 아직 봉건적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혁명이 창출한 근대적인 대국민군(大國民軍)에게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영국은 대륙시장을 자국의 국민산업을 위하여 확보하는 점에서 유럽 여러 나라와 대프랑스동맹을 맺어야만 할 위치에 있었다. 아미앵조약이 영국에 의하여 파기되고 1805년 제3 대프랑스대동맹이 성립되자, 그는 대영전략으로서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 불로뉴를 중심으로 <대륙군(大陸軍)>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출동했으므로, 울름회전(會戰)에서 이를 격파하기는 했으나 트라팔가해전에서 프랑스함대는 영국의 넬슨에게 격파되어, 결국 그 상륙작전은 좌절되었다. 한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황제의 양군은 합류하려고 서둘렀으므로 나폴레옹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빈을 점령하고, 곧 아우스테를리츠의 <삼제회전(三帝會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또, 독일에 대해서도 1806년에 16개의 영방(領邦)을 라인동맹으로 결성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켰다. 이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대하여 공격적으로 되어버려 제4 대프랑스대동맹의 계기를 만들었다. 나폴레옹군은 동맹군을 여러 차례 격파한뒤,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러시아군을 추격해서 폴란드로 침입, 바르샤바대공국을 설립시키고 나서 1807년 러시아와 틸지트조약을 맺었다. 그 전에 그는 대륙봉쇄를 호령하는 베를린칙령을 발포하였다. 그것은 영국의 산업제품 및 식민지 물산(物産)을 수입하는 대륙시장을 폐쇄할 목적으로 발포된 것으로, 대영 전략의 최후수단이었다. 그 뒤 그의 군사적·정치적 과제는 이 대륙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는데, 대륙봉쇄는 본래 영국을 기점(起點)으로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경제유통을 프랑스제국(帝國)으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흐름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봉쇄정책을 저버린 포르투갈에 대한 원정은 우선 에스파냐 점령, 그 뒤로는 에스파냐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고, 1809년 제5 대프랑스대동맹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로 원정을 하였고, 몇 차례의 큰 전쟁을 한 뒤 강화(講和)를 하였다.〔몰락〕 (백일천하)1806년에서 10년까지 프랑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아, 국내외적으로 경제성장과 판도(版圖) 확장이 이어졌다. 나폴레옹도 40세 전후가 되면서 몸이 비대해지고 청년기의 예리함을 상실하였다. 궁정은 옛제도의 화려함을 띠게 되었고, 귀족 제도가 되살아났으며, 추종자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는 정복지에다가 가족이나 혈연관계가 있는 부장(部將)을 원수(元首)로 파견해 놓았으니, 이른바 가족체제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되지 않은 나라는 프랑스와 동맹국관계에 있는 나라였는데, 그 중에서도 러시아는 10년 말부터 반프랑스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국내 경제의 불황을 이유로 출병을 연기하고 있었으나, 결국 12년 6월 러시아원정길을 떠났다. 동맹국군을 합친 50만 병력으로 그 해 9월 모스크바에 도달했으나 러시아의 초토작전(焦土作戰)에 대응하지도 못한 채, 10월 무렵 퇴각을 시작하여 원정은 참담한 결과로 끝이 났다. 13년 에스파냐,러시아, 특히 프로이센에서는 나폴레옹 독재에 대한 민족의식에 눈을 떠, 국내개혁에 몰두하게 되었고, 제6 대프랑스대동맹이 민족해방을 위해서 결성되었다. 독일은 라이프치히에서의 해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4년 1월 동맹군은 프랑스로 침입하여 파리를 함락시키고 그 해 4월에 나폴레옹을 퇴위시켜 엘바섬으로 유배하였다. 그 후 부르봉 왕조 루이 18세의 왕정복고(王政復古)가 이루어졌고, 혁명에 의해서 획득한 것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한 부르주아와 농민들은 15년 3월 엘바섬에서 탈출·귀국한 나폴레옹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빈회의에 참가 중이던 여러 나라는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하여 군대를 출동시켰고, 같은 해 6월 워털루전투에서 참패한 나폴례옹은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다〔나폴레옹 유해〕앙발리드  (그림 자료)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된 앙발리드는 원래 루이 14세가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폐인이 된 수 천명의 병사들을 위하여 세운 요양소였다. 앙발리드는 1671∼1676년에 세워졌는데, 엄격하리만큼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장식이 없다. 이곳의 요양소로서의 기능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그가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둔지 19년 후인 1841년에 이곳, 앙발리드 중앙에 있는 돔 교회당으로 이장되었다. 지금은 군사 박물관, 생루이 데 쟁발리드 교회당, 그리고 돔 교회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사 박 물관에는 전쟁기념품, 그림, 벽화등이 전시되어 있고, 생루이 데 쟁발리드 교회당에는 나폴레옹이 정복한 나라들의 국기들이 깃발로 장식되어 있다.  나폴레옹의 대리석관   (그림 자료) 나폴레옹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천재이며, 책략에 뛰어난 영웅이었다. 잇따른 전쟁을 통해 전세계에 용맹을 떨쳤으나 워털루 싸움에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 후 대서양의 세인 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가 1821년 5월 5일 숨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이 죽은지 19년 후인 1840년 12월 15일 루이 필립왕은 나폴레옹의 유해를 파리로 송환 시킨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일곱겹의 관속에 넣어졌는데 첫 번째 관은 주석, 두번째는 마호가니, 세번째와 네번째는 납, 다섯번째는 흑단, 여섯번째는 떡갈나무로 만들어졌다. 러시아에서 운반되 어 만들어진 일곱번째 관은 대리석 관이며 녹색의 화강암 위에 얹혀있다. 이 대좌 밑 포석에는 그가 이끈 싸움터의 이름과 행적등이 돌아가면서 새겨져 있고, 유해 주위 에는 그의 형제들과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장군들의 묘가 둘러싸고 있다.  
5    부모님이 주신 귀한 선물 댓글:  조회:2014  추천:0  2010-03-31
    천하의 모든 물건중에는 내 몸보다 더 소중한것이 없다.           그런데 이 몸은 부모가 주신것이다.          ---이이---         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관에 걸린 명화이다.   늙은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모습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데... 처음 이 작품을 접한 사람이라도 정말 뛰어난 솜씨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런 모습을 그렸는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당신은 어떤 느낌을 가졌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가슴을 드러낸 여자와 노인의 모습을 보고 단순히 에로틱하다거나 색슈얼한 생각만을 떠올렸는가? 빼빼 마른 노인의 모습에서 19C 팜므파탈이 그림 속의 주재료로 떠오르던 시기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요부와 그에 유혹당한 남자를 떠올려 보진 않았을까?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인의 아버지다. 커다란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음식물 투입 금지'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다. 딸은 해산한 지 며칠 지나서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노인과 여인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동일한 그림을 놓고 사람들은 '저질 이라고 비하도 하고 '성화'라고 격찬도 한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한다. 사람들은 가끔 본질을 파악하지도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우를 범한다.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진다.   교만과 아집 그리고 편견을 버려야만 세상이 보인다.          
4    부모를 공경하는 자와 친구하라 댓글:  조회:1776  추천:0  2010-03-30
  자기의 부모를 공경할줄 모르는 자와는 친구로 사귀지 말라.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Socrates, BC 469~BC 399]   아테네 출생. 자기 자신의 ‘혼(魂:psychē)’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결국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티프론(Euthyphron)》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平靜淸朗)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우리들은 그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철학사상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像)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無知)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愛知:철학)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照明)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짜부러진 사자코로 그 용모는 추하였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그의 말에 매료되고 그의 내면에 사로잡혔다. 이렇듯 외면과 내면의 이율배반에 그의 존재의 본질이 있다. 그 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하였는데,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물음은 자기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초월)에 대한 물음이라는 의미에서 그는 형이상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내면은 근거에 의해 질문당하는 데서 생기는 막다른 벽 안에 끝까지 머무는 애지의 동반자로서만 제시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외부와 내면의 틈을 통해 개시(開示)되는 근원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을 중심으로 그 생(生)과 사(死)의 증거를 가지고 정착시킴으로써 서양철학의 무게를 한몸에 짊어지는 사람이 되었다.    두산백과사전    
3    안중근 의사의 유언 댓글:  조회:1663  추천:0  2010-03-28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부친의 개화사상으로 근대적 사고 키우며 성장  안중근(安重根, 1879. 9. 2~1910. 3. 26)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고려 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 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의사는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趙)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의사의 부친은 진사였으나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4년 박영효등 개화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그에 뽑히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의사의 집안은 갑신정변 직후 해주를 떠나 신천군의 청계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친이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던 관계로 수구파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따라서 의사는 청계동에서 성장하면서 8세 때부터 조부의 훈도로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의사는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여순감옥 수감 중 면회 사진.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명 ‘토마스(도마)’ 부여 받아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의사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개화파와 연계를 맺고 있던 의사의 부친이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의사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의사의 부친은 동학군이 해주감영에서 빼앗은 5백석 가량의 양곡을 회수하여 군량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후일 문제가 되어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정부가 전복되고 친미, 친러 연립내각이 성립되자 척족 세도가인 민영준이 다시 강력하게 양곡 반환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의사의 부친은 인근 천주교당으로 수개월 동안 피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의사의 부친은 프랑스인 빌렘(J. Wilhelem)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신부들의 도움으로 양곡 반환 문제가 해결되어 청계동으로 귀가한 부친은 1897년 의사를 비롯한 일가족 3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이에 따라 의사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부여 받았다. 학교 설립하며 교육계몽운동 전개  의거 직후 찍은 의사의 전신 사진. 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의사는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통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해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이후 의사는 그 해 3월 청계동을 떠나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부인의 금반지와 은반지, 비녀 등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해져 갔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 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던 것이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되자 의사는 상경하여 이동휘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의병부대를 이끌며 일군과 전투, 박애주의 근거해 포로 전원 석방해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흔히 이범윤의병부대로 알려진 것이 바로 의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 의병부대였다. 김두성이 총독, 간도관리사를 역임한 이범윤이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참모중장이었던 의사가 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백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을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수감 감방문 사진. 드디어 1908년 6월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한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제2차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제1차 진공작전과 마찬가지로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아울러 전투 중에 10여명의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의사는 이들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의사가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사는 의병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사고, 또 포로의 석방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온갖 고초 끝에 의사는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본거지로 귀환하여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없었고, 그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들도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그리하여 의사는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의 기자, 대동학교의 학감, 한인민회의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의사가 독립전쟁전략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1909년 1월 의병 재기를 도모하면서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총과, 이토 히로부미의 총상을 그린 인체 도해도. 그러던 중 1909년 9월 의사는 사에 들렀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의병참모중장으로 자신의 활동지역에 겁 없이 쳐들어온 적장 이토를 온전하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큰 도움을 준 것이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는데, 사장인 유진율은 자금과 권총 3정을 내주었고,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의사는 이토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이후 의사 일행은 유동하, 조도선등을 거사 준비에 합류시키고 만주 철도의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 두 곳에서 거사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열차가 정차하는 전략적 요지인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는 자신이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거사 지역 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 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의사는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를 기다렸다. 그런데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를 포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이들이 투숙한 역 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의사의 거사 계획뿐이었다.   순국 5분전에 어머니가 지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의사.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30분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쓰러졌다. 이어서 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사형을 선고 받고, 거사 이유를 밝히는 저술에 심혈을 기울여 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의사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라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 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07 사립학교를 건립, 민족교육 실시 1908 연해주에서 의진 결성, 의군중장으로 국내 진공 1909 단지 동맹 결성, 의열 투쟁    이토 히로부미 처단 1910 옥중에서 동양평화론 저술 중 사형 순국
2    이순신장군의 유언 댓글:  조회:1698  추천:0  2010-03-28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     이순신 [李舜臣, 1545~1598]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1586년(선조 19)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밑에서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였다.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유품 가운데 《난중일기(亂中日記)》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 충렬사 팔사품(통영 충렬사 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1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다 댓글:  조회:1732  추천:0  2010-03-28
  사랑할 때는 사상 따위가 문제가 안 된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음악을 좋아 하는가 어떤가는 문제가 안 된다. 결국 어떤 사상에도 우열을 결정하기란 힘들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로망 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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