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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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    들깨잎 례찬 댓글:  조회:389  추천:0  2023-12-04
인간은 수천만년 동안 한 지역에서 살면서 어느 특정한 꽃이나 잎애 변질이 있을 때마다 같은 종의 재변들이 일어나서 그 어떤 재난을 예감하는 지헤가 형성되였다.  특정한 어떤 식물의 식생(植生)은 그 지역에서 사는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식생으로 소중한 식생이 아닐 수 없다. 례하면 고개를 늘 숙이는 것이 마련인 할미꽃이 고개를 쳐들면 그 지역에 가뭄이 든다고 했고 맨드래미(닭볓풀)붉은 잎에 노란빛이 진하면 홍수가 든다고 했고 뽕잎에 하얀 반점이 생기면 전염병이 돈다고 했다. 현대사회에서 가뭄, 홍수, 전염병등의 재난을 어느만큼 예감할 수 없는 가장 큰 위난은 일산하탄소 등 공기 오염이다. 이 위난을 미리 예고해 주는 특유의 식생으로 미국은 알팔파라는 꽃이 대기오염의 위험도를 예고하는 지표식물이고 일본은 나팔꽃, 한국은 들깨잎이라고 한다.  어찌보면 들깨는 우리에게 가장 고마운 식생이 아닐 수 없다. 들기름은 전통적인 살균제로 우리 민족은  어린애가 태여나면 먼저 잔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들기름을 흠뻑 묻힌 솜으로 어린애의 입안을 닦아낸다. 에 뜰깨잎이 물고기독성을 죽인다고 했다. 이로 보아 우리가 고기를 구워 먹을 때 들깨잎에 싸서 먹는 것이나 생선찌개에 깨잎을 넣는것은 단 들깨의 향기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국제 영양학술회의에서 10대 자연식품열 개를 선정했는데 그중 한국의 식품으로 꿀, 마늘, 들깨가 들어 있다. 들깨잎은 인류에게 대기오염까지 고발해 준다니 감사하기로 뜰깨는 우리 민족의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있는 식생이라 하겠다. 오기활
458    김은철 그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495  추천:0  2023-12-01
                             84세 고령에 첫 한문소설 《醉中无天子》을 출간 11월 25일, 연변단풍수필회는 연길 황관호텔에서 창회25돐기념의 일환으로 김은철(84)의 《醉中无天子》(취중무천자)출판식을 거행하였다. 출판식에 김문원(金文元)대좌(연변군분구 선임 참모장, 부사령원), 소설가 허련순, 김은철선생님 제자와 동료 약간명이 특별 래빈으로 초대되였다. 본서의 서문을 한족작가 于雷가 썼다.                          김은철 그는 누구인가?  이날 주류문단이 작가들과 김은철 옹의 친지들이 에 답하고 김은철이 부언했다.   김은철은 1940년 5월 6일, 흑룡강성 화남현 다발령향 부흥촌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회원으로 소설, 수필, 평론, 노래, 가사 등 다산작가로 《고향의 느릎나무》( 1996년), 《민들레꽃무덤》(2015년), 첫 중문작품집《醉中无天子》(2023년) 를 출판했다.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농사꾼의 자식 김은철은 독학으로 북방의 한산한 시골학교 음악민영교사로부터 시작하여  초급중학교 조선어문교원, 고급중학교 대학입시생 조선어문교원, 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로 멋진 삶을 살던 와중에 업여로 소설창작을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발행식에서 수필작가 김광현이 선참으로 란 독후감을 발표하였다. ㅡ 김은철은 독학으로 성공한 문학계의 거물이다. 그는 민반교원으로 3년만에 조선문법을 숙달한데서 전현 교원들 중에서 문법을 전공한 전형으로 부상되였다. ㅡ 그는 57세에 한어공부를 시작하여 3년 사이에 과 씽갱이질한데서 2권을 “파지”로 만들어 세번째로 새 사전을 샀다. ㅡ 김은철은 중편소설을 쓸수있는 수준을 가추었다.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들은 생활속의 전형으로 잊혀지지 않는다. 모두어 말하면 그의 소설은 력사의 현장이며 그가 쓴 한어소설은 한어수준이 높다고는 말할수는 없지만 오늘의 현실에서 조선족작가들의 “한어작품문체”로 될수 있다고 본다. 김문원, 김정일, 태산의 평가발언을 이어 김은철저자가 에 부언 하였다. ㅡ 나는 열혈청년때 음악을 기대하고 성공하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한일 농촌서 어떻게 살겠는가를 우려하다가 두번째로 문학으로 성공하려고 시도하면서 60ㅡ80년대 까지 무엇이 생각나면 무엇을 쓰다가 80년대 말기부터 무엇을, 어떻게 쓰겠는가에 어느 정도 머리가 트게 되였다. ㅡ 나는 로신을 모델로 하다가 살펴보니 로신이 쓴  작품의 주인공(아큐, 공을기, 샹린아주머니 등)들이 당대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아니였다. 그래서 나는 현실을 쓰려면 정면 주인공들의 아름다움, 믿음, 인성을 쓰고 창조해야 함을 체득했다. ㅡ 나는 1994년부터 2010년 상반기까지 문학창작에서 손을 뗐다. 원인은 1980년중기부터 한국의 현대파문학창작의 수법이 조선족문단에 범란되여 현실주의를 쓰는 나의 작품이 발표가 힘들어 창작적극성이 저락된 때문이다. ㅡ 2010년에  70에 연변에 와서 서점에 다녀 보니 많은 현실주의 작품이 발표된것을 보고 창작의 욕구가 다시 불타 2014년부터 한어작품을 쓰기에 필을 들었다.  《醉中无天子》에 실은29편은 2010년 후의 소설이 다수로 차원이 그리 높지않다.  나는 1981년도에 수상한 “헛소리”작품을 이 책에 실지 않았다. ㅡ 나는 나의 글을 아들처럼 생각한다. 돌아 보니 나의 인생은 눈물의 삶이고 애를 쓴 삶으로   “애쓴 것이 혼”이다. 오기활                              흑룡강신문 2023년 11월 29일  
457    [수기] 그날 나는 깜짝 놀랐다 댓글:  조회:436  추천:0  2023-11-16
필자는 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님의 1970년대의 제자로서 필자로 말하면 김수철(99)교수님의 가슴 뛰는 사업과 값진 삶은 필자의 모델로 거룩한 우상이시다. 2020년 12월 29일, 우리 일행이 연길시 조양천진 삼성촌 5소조에 삶터를 잡고 홀로 자취하면서 《길림성 식물지》(총4권)의 출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수철교수(95세)을 방문 갔을 때이다.   서로 간의 수인사를 나눈 후 필자가 “지금 연변미술관에서 연변 제1회 예술작품박람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고 말했더니 김교수님이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묵직한 사진기를 챙겨 들고 “우리 지금 당장 가서 보고 옵시다”며 우리를 재촉했다. 연길로 가는 길에서 김교수가 하는 말씀이다. ㅡ 그림은 번역이 필요 없는 세계 공통어입니다, 화가는 독자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서 옛날을 재생기키고 래일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나는 좋은 그림을 볼때마다 행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내다 봅니다... 전시장에 도착하자 김교수님은 전시장을 돌아보고나서 1, 2번 전시장의 작품 거의 모두를 렌즈에 담았다. 돌아오는 길에서 교수님이 하는 말씀이다. ㅡ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의 말씀인데 스승님은 우리 더러 평범한 생활속에서 기적을 발견하면서 매일매일 놀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ㅡ나는 오늘 석희만화백의 명작을 보면서 행복했고 놀랐습니다. 우리가 오늘 끝도 시작도 없는 대우주의 수십억의 인구들 속에서 우리 넷이 한자리에 앉았으니 얼마나 기적입니까! 나는 오늘 놀랐습니다!” 필자는 그 후부터 평범한 매일에서 놀람을 만들고 놀람을 찾기에 노력하였다. 일은 생각한 대로 된다더니 최근에 나는 두 번 크게 놀랐다. 한번은 도문시 석현진 송림촌에서 사는 소학교 친구 리봉근이 몇년전에 부인을 하늘나라에 보내고 혼자서 지낸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바로 이틑날에 위문차로 봉근네집에 갔다 십 여년 만에 만난 우리는 기쁨의 술잔을 부딪치고 또 부딪치면서 60년전 옛일을 회포 하면서 서로가 권커니 작커니 하는데 봉근씨가 나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한 것 처럼 정서를 살려가며 “정삼이 동생 멋있다…”를 읊고나서 “이는 소학교 2,3학년때 네가 지은 시다. 네가 지금도 이 시를 기억하나?”고 니에게 물었다. 이에 나는 한참이나 놀라 했다. 이는 내가 소학교때 지은 것인데 그네들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수남소학교 학생들이 교가인냥 “정삼이 동생 멋있다” 를 읖조리며 다녔다... 나는 또 지난 7월에 한번 놀랐다.. 어느 날, 왕청현 석현진 수남소학교 동창인 최금선씨가 내가 뇌출혈을 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며 병문안을 하려고 우리 집에 왔다. 역시 십 여년 만의 만남이라 늘 웃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반나절이나 동년의 옛말들로 웃음꽃을 피우는데 금선씨가 불시에 “이돌이 죽었다…”를 읊더니 “이는 오동무가 소학교때 지은 시인데 지금 기억하고 있소?”, “그때 수남학교에서 기활이를 옛말쟁이라고 불렀지무”하면서 나를 잔뜩 춰올렸다.   나는 이렇게 두 소학생 친구의 기억력에 실로 놀랐다. 필자는 그후부터 “정삼이 동생 멋있다”와 “이돌이 죽었다”에 슴배여 있는 눈물겨운 력사를 회포하게 되였다.   그때 왕청현 석현진 수남소학교의 학구는 7개 자연툰(수남, 송림, 토성, 고려, 남양, 달라자, 하가툰)으로   인구가 많고 학생수도 많았다. 그때 우리 반의 학생은 52명으로   송림마을의 남자들만해도 8명이였다. 그때는 생활이 매우 가난하였는데 나는 소학교에 다닐 때 속옷은 물론 팬티마저 입어본적이 없다.  어느 한번 여름철 체육시간에 두 팔을 펴고 높이 쳐들었다가 다시 두 팔을 편 대로 허리를 굽히는 체조를 하는데 그만 내가 입은 검은색 낡은 바지의 엉덩이 천이 째져 엉덩이가 그대로 로출되였다. 나는 너무나도 황당해 별수 없이 슬그머니 힉생줄에서 나와 학교 주변의 산기슭에 있는 비술나무를 찾아가 나뭇가지를 꺽어 껍질을 버껴서 째진 바지를 졸라매고 돌아와서 계속하여 체육시간을 보는데 그만 나의 뒤줄에 선 리춘애가 이를 발견하고 “기활이 바지엉치를 나무껍질로 동여맸다.”고 소리를 질러  많은 애들이 나의 뒤를 따라다니며 골려주기에 나는 리춘희가 얼마나 밉었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화가난다. 또 한 번은 학교에서 집체로 도문영화관의 영화구경을 조직했는데 나는 영화표 값을 낼 돈이 없어서 반주임선생(허은금)님에게 생닭알 한개를 바치고 영화구경을 따라 갔다. 그때는 모든 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책보는 스산하기로 말이 아니였다. 거의 모든 책보가 여러가지 낡은 천쪼각을 무어서 만들었는데 송림마을의 한정삼은 천쪼각끈으로 책을 묶어서 들고 다녔고 나는 마르지도 않은 젖은 세수수건에 책을 싸서 들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날에 송림서 가난하기로 몇 손가락 안에 든 한정삼의 녀동생이 검은색 새책보를 허리에 띠고 학교에 와 닭무리 속의 공작새마냥 돋보였다. 그래서  나는 한정삼의 동생이 너무나도 멋스러워  를 지은 것 같다.   지난 50년대는 “배고픈’년대”였다. 3학년때 늦의 봄의 어느날 오후에 우리반에서 집체로 산나물을 캐려 송림마을 뒤산에 갔는데 고려툰(지금의 흥진툰)의 박영일이 배고픈김에 우둥치뿌리라고 파서 먹은 것이 우둥치가 아닌 독활(毒活)뿌리여서 영일이가 배가 아파서 끌어안고 죽는다며 나뒹굴었다. 하여 급해 난 허은금선생은 남자애들을 조직하여 서로 업어서 마을의 중심에 있는 촌위생소에 가서 제때에 구급치료를 받고  구급하였다. 또 어느 날 오후에 수남마을에서 “이돌이네 형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썽했다. 우리 아래 학년을 다니던 수남마을의 박이돌이 남동생과 함께 집에서 불시에 죽었다는 것이다. 박이돌네 가정은 수남에서 특별히 가난하기로 우리들의 기억에 이돌이네 4형제(2넘2녀)가 여름에 신을 신고 학교에 다니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학교측의 조사에 따르면 그날 오전에 박이돌과 그의 남동생이  수남농업중학교를 다니는 학생을 따라 산에 가서 개살구씨를 주어서 먹었는데 이돌네 형제는 집에 돌아와서 또 생파를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살꾸씨를 함께 먹은 농중학생은 별탈이 없었는데 식욕이 좋은 이돌네 형제만 죽었으니 그들이 죽은 원인이 개살구씨를 먹고 또 생파를 먹은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죽음을 사람들게 교훈으로 남기고저 “이돌이 죽었다”를 지어서 거기에 강약을 달아서 외우며 다닌 것이 전교 학생들의 구전으로 전 학구에 보급 되였던 것이다. 그때 내가 이런 문답형식으로 구전말을 만든 것은 조선어문 과문에서 배운 이라는 제목의 시를 본땃기 때문이다.  “종달이” 전문이다    종달이 종달아 종달아 어디에 갔더랬니 수풀에 갔더랬다 뭘하려 갔더랬니 새끼치려 갔더랬다 몇마리 쳤니 다섯마리 쳤다 나 하나 주렴 널 왜 주겠니 고운 것도 내 새끼 미운 것도 내 새끼 쫑 쫑 쪼로롱 그때 나는 이 과문에 마음이 빠졌다. 왜냐면 엄마종달이는 다섯마리 새끼를 까고 남들이 한마리릘 달라는 것도 “고운것도 내새끼 미운것도 내새끼”라며 주지 않았는데 우리의 부모들은 왜서 자식 5형제를 낳아놓고 자기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갔는가 며 원망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때가 너무나 천진해서 랭웃음이 따른다. 나는 누님들 앞에서 “종달이”를 시도 때도 없이 외우고 또 외웠다. 그때 나는 구전말을 “종달이”를 본 따서 문답형식으로 지은 것 같다. 나는 60년 전의 나의 “작품”이 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정말 기쁘고 다행스럽다. 왜냐면 두 친구들의 기억력 때문에 오늘에 이렇게 글을 쓰고 또 이 글이  말로만 구전되던 구설사가 문자기록으로 력사에 남겠으니 말이다. 이밖에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시에는 령점이다. 단 몇년전에 는 공자의 글을 읽고 “말(言)이 시(詩) 가 되고 시가 노래로 되고 노래가 춤으로 되였다. 사람은 시, 노래, 춤이라는 흥으로 살아야 한다”는 공자의 말을 기억에 남겼을 뿐이다. 공자는 “시(詩)는 절 사(寺)와 말씀 언(言)의 합자(合字)로서 절(寺)에서 들리는 스님들의 말(言)이 곧 시(詩)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김학송선생은 최근의 글에서 박하 시인의 이라는 한줄 시(아차하면 깨여지는 비여있는 유리잔!)를 곁들면서 “이 주지시는 감각적인 언어로, 단 한마디의 말로 행복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녹여낸 재밋는 시다.”고 평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내가  만든 구전말을 시로 지어도 되겠다는 신심을 얻게 되였다. 하여 60여년을 구전해온 무제(無題)”시”를 유제(有題)시로 제목을 달아서 력사에 남긴다. 검은 책보 정삼이 동생 멋있다 어째서 멋있나 검은 책보 띠고서 멋있다 멋있다  어째서 죽었나 이돌형제 죽었다 어째서 죽었나 살구씨 먹고 생파를 먹고 죽었다 죽었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3-11-14
456    편하게 사는 법 댓글:  조회:1267  추천:0  2023-11-01
일전에 한국 KBS아침마당 “부부탐구”프로에 14년간 출연했던 정신과 전문의사 송수식박사는 한평생을 “편안하게 사는 법”을 “거짓말을 안하기”로 정리했다. 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처럼 꾸며 하는 말이다. 거짓말밖에 모르는 자를 허줄한 사기꾼이라 하고 거짓절반, 진담절반으로 그 참과 거짓을 가릴수 없게 하는 자를 한수 높은 사기꾼이라 한다. 그리고 평소에는 대부분을 진담하다가 관건적인 시각에 거짓말을 하는데 평소의 진담으로 그 거짓말에 신뢰성을 담보받는자를 모략가라 한다. 사기꾼은 상습적으로 남을 속여 리득을 꾀하는 자를 말하고 모략가는 사실을 외곡하고 속임수를 써 남을 해롭게 하는 자를 말한다. 사기에는 정치사기, 금전사기, 사랑사기 등등이 있는데 사람이 사람을 못 믿게 만드는, 사회를 불신으로 만드는 사기가 금전사기피해보다 더 큰 범죄라고 한다. 거짓의 반의어는 실사구시, 성실이다. 실사구시는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추호의 확대도 축소도 없이 문제를 정확히 바르게 처리한다. 성실은 사실을 존중하고 솔직하며 언행이 일치하고 안팎이 똑 같다. 실사구시는 인격의 근본수양이고 성실성은 아름다운 마음의 핵심이다. 미국 제 1임 대통령 워싱톤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흠모하는 사람은 바로 성실한 사람이다”고 했다. 진소민은 대가 바르고 실사구시한 로혁명가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인 당중앙위원회 제8기 제12차 전원회의(1968년)에서 류소기동지의 당적을 영원히 제명할데 관한 결의안을 통과할 때 진소민은 손을 들지 않았다. 모략가 강생이 그를 찾아 왜 손을 들지 않았는가는 물음에 진소민은 “이는 내 권리다”는 떳떳한 대답에 강생은 말문이 막혔다. 이로 하여 진소민은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연골병에 걸려서는 안된다. 진리를 견지하고 실사구시하며 인민과 나라와 당에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견정히 말했다. 1980년에 당중앙에서 류소기동지에 대한 억울한 루명을 벗기고 그의 모든 명예를 회복한다는 결의를 통과하던 그 시각에 아마도 진소민의 마음이 누구보다도 편안했을것이다. 진소민의 인생이 “거짓없는 인생”, 해살처럼 구김없는 “솔직한 인생”, “편안한 인생”이다. 오기활                                                         《길림신문》2009.5.26.    
455    [수기]“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댓글:  조회:612  추천:0  2023-10-13
2007년 5월 9일(음력), 나의 환갑수연례 때 아들이 하객들 앞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아버지는 오호준의 아들이고 나는 오기활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같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나의 가장 구별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돌연적인 아들의 물음에 당황해난 나는 평상시의 말대로 “나는 ‘아들을 못 지낸 아들’이고 너는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이다.”고 했더니 아들이 “정답입니다”고 했다.   아버지 오호준(40)은 내가 10살이 되던 해에 돌아갔다.(아버지가 입음 외투는 어느 친적의 결혼때 대반으로 가면서 이 외투를 빌어 입었다고 한다.)   나는 2살에 어머니를, 열살에 아버지를 잃은 조실부모한 고아로 부모들의 사랑을 못 받고 부모들의 교육이 없이 자랐다. 나는 엄마의 얼굴조차 기억에 없고 아버지는 돌아가던 날에 나에게 공책과 싸리연필을 사주던 기억밖에 없다. 부모들이 돌아간 후 우리는 5남매(2남3녀)가 살다가 이상 누님들이 결혼하자 나와 동생이 15년간이나 큰집에 얹혀살면서 뼈를 굳혔다. 내가 날이 갈수록 부모의 필요성을 갈망하게 된 것은 결혼 후부터였다. 말하자면 내가 세대주로서 가정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고 자식들에게 어떤 ‘부친상'(父亲像)을 남겨야 하는 것이 늘 앞서는 고민이였다. 결혼 후 나의 앞에 놓인 첫 과제로 아들을 본후 아들 이름을 어떻게 짓겠는가 하는 것이였다. ‘무지하면 대담하다'고 한다. 나는 1975년에 결혼하고 1976년에 아들을 본 후 며칠간 밤낮이 따로 없이 아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가를 고민하던 끝에 “내가 낳은 아들 이름을 내가 짓는다.”며 아들의 이름으로 친척이나 동네 로인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거나 ‘작명전문가'를 찾지 않았다. 나는 아들을 늘 푸른 소나무처럼 키우리라는 욕심으로 이름을 오무송(吴茂松)이라고 짓고 계속하여 동생네 두 아들을 오무성(吴茂成), 오무림(吴茂林)이라고 지어 3형제의 이름 막자로 “松成林”,  후대들이 ‘소나무가 자라서 수림을 이루듯' 되기를 이름에 담아서 기대했다. 다음은 평생과제로 ‘아들을 못 지낸 아버지'가 어떻게 자녀교육을 잘 할 것인가였다. 나는 반복적인 추고 끝에 ‘책속에 길이 있다'고 책에서 아버지 모델을 찾아서 내가 ‘책아버지'로 되는 것이였다. 그래서 서점에 다니며 아무튼 책표지에 ‘아버지' 석자가 담긴 책이면 거의 다 사서 열독하였다. 지금 나의 책장에는 《아버지》,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와 아들》 《아들에게 가르켜 주고 싶은 모든 것》, 《아들아, 그것 말이야》, 《아들을 성공시킨 아버지 편지》, 《내 딸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그리운 아버지의 술 냄새》, 《미래에 대응하는 자녀교육》 등 많은 책들이 소장되여 있다.   궁핍한 년대에 아버지는 나의 왼손에 만년필을 쥐여주고 돌사진(?)을 찍어주었다 . 십수년간의 독서에서 나는 한국 신재용선생의 를 읽고 이를 나의 평생지도 교재로 정하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부지런히 ‘늘 해야 할 일'을 하려고 작심했다. 이하는 는 글의 일부이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마음을 큰 바다처럼, 몸은 큰 산처럼 하라셨건만 내 마음은 내 스스로 갉아먹어 좁쌀만 해졌습니다. 내 몸은 즐거움을 쫓느라 허물어져만 갑니다. 바다는 커녕, 산은 커녕, 거품처럼, 티끌처럼 살아갑니다.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가진 것에 집착하지 말며, 가져서는 안될 것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셨건만 갖고 싶은 것은 갖고 싶고 가지면 더 갖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지면 더 갖고 싶어 안달아합니다. 안달로, 들뜸으로, 미련으로 거짓의 옷을 벗지 못합니다.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난 이'를 축복하고 ‘늙은이'를 돌보고 ‘아픈 이'를 위로하고 ‘죽은 이'를 잊지 말라고 했지만 ‘난 이'을 위한 빎도, ‘늙은이'를 위한 보살핌도 ‘아픈 이'를 고치려는 의술도 턱없이 부족해 좌절합니다...” 그리고 또 어느 책에서 읽은 아들의 글이다. “7살인 어린 시절에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17살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알고 계시지 않는다. 21살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모른다. 35살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생각보다는 많이 알고 계셨다. 50살 된 지금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항상 옳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글 속의 아들이 100세 시대의 아버지를 쓴다면 70살 때 생각, 90살 때 생각을 어떻게 썼을 가가 궁금하다. 필자는 나의 아버지, 나, 그리고 나의 아들을 곁들며 이 글을 맺는다. 아버지(오호준) ㅡ내가 10살을 먹어 15일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다 보니 먼저 글 속의 아들이 7살에 “나는 생각했습니다.”로 나를 대신한다.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다음은 아버지의 선경지명 두가지에 감사를 올린다. 하나는 나의 이름을 잘 지은 것에 감사하다. 나의 이름을 풀이하면 ‘나라 오(吴), 터 기 (基), 살 활(活)'이다. 나는 내 이름의 뜻을 ‘오나라에서 기본상 살아간다'로 풀이한다. 나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덕으로 고아신세에 오늘까지 무탈하게 지내왔다고 생각한다. 특히 금년 4월에 뇌출혈로 시술까지 하였지만 지금은 큰 후유증이 없이 기본상 종전의 건강상태로 회복하였다. 다음은 그렇게 궁핍한 년대에 나의 왼손에 만년필을 쥐여주고 돌사진(?)을 찍어 준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이러한 ‘선견지명'으로 기자, 작가로 되였으니 말이다. 나(오기활) 아들이 소학교부터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아들과 함께 반급의 흑판보를 전담하여 꾸렸다. 아들에게 서예공부를 시켰다. 하여 아들의 만년필 글쓰기 작품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서예》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글쓰기를 지도하였다. 하여 중학생 때 《연변일보》에서 조직한 응모 작품에 아들의 작품 가 입선되였다. 아들에게 가문의 계주봉을 넘겨 주었다. 아들이 동북사범대학에 입학한 축하연에서 내가 5년간 돼지사양원을 하면서 쓰던 ‘멜대'를 가문의 대물림 계주봉으로 아들에게 넘겨주며 가문의 본분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아들이 일본류학을 갈 때는 오성붉은기와 나폴레온 힐이 쓴 책 《성공의 13단계ㅡ어디서나 할 수 있다》를 주면서 애국심을 간직한 성공자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아들(오무송) 아들은 일본 케이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교의 평생교수로 취직하였고 학교의 파견으로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2년동안 연수를 하였다. 아들은 우리 가문의 장손으로 ‘정, 지, 검, 관, 강'(正智俭宽康)이라는 가훈을 기초하였다. 나에게 재일본 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을 쓰도록 건의하고 내가 쓴 《왜 갔느냐면 일본에, 왜 사느냐면 일본서》책에 서언과 후기를 썼다. 아들은 미국에서 이라는 시를 지어 자기의 앞길을 확고히 하였다. 민들레홀씨가 태평양을 날아넘어 책갈피에 묻힌 채 고금을 잇는데 창밖의 풍경도 춘하추동 비껴간다 창문에 비친 제 모습 용기 내여 직시하며 다원속의 그 진리에 눈 떠보련다 향수의 숙명을 이 몸에 지니고 방종이 아닌 자유를 사랑하노라 봄을 품은 씨앗 하나 허영을 등지고 풍설에 버티며 땅에 내린다 깊숙히 뿌리 박고 고혼의 열매 맺어 산벼랑 광야에서 새 생명 키우리라 오늘도 무지 벅차다. 나의 딸 오염희는 현재 한국에서 산모건강관리사업을 하면서 나름대로 보람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책속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했기에” 훌륭한 아들로, 훌륭한 아버지로 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된 사람’이 되려는 노력으로 사회와 자식들에게 부끄럽게는 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자신한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3-10-12  
454    잘 물든 단풍잎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댓글:  조회:1024  추천:0  2023-10-02
인생 닐리리 □ 해마다 봄이면 산과 들에 철꽃이 피고 새싹들이 움튼다. 봄철이 가고 여름철이 다가오면 아름다운 철꽃들은 땅에 떨어지면서 아름답던 화기를 마감하지만 봄에 움튼 새싹들은 여름철에 한껏 푸르싱싱하다가 가을철이 익어가면 잘 물든 단풍잎으로 땅에 떨어진다. 이런 자연 모습에 혹자들은 “떨어지는 가랑잎이 쓸쓸하구나.” 하고 말한다. 떨어지는 단풍잎이 과연 쓸쓸한걸가? 결코 쓸쓸하지 않다. 쓸쓸한 것은 떨어지는 가랑잎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찬란했던 나의 젊음이 저 가랑잎처럼 쓰러지는구나.” 하며 쓸쓸한 것이다. 잘 물든 단풍잎은 정말 아름답고 자랑스럽다.  우리는 아름다운 봄꽃놀이만 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단풍놀이도 가지 않는가.   꽃은 아무리 예뻐도 떨어지면 줏지 않지만 잘 물든 단풍잎은 소중히 주어서 책장 속에 끼워놓고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또 해빛 좋은 가을에 새로 바르는 창호지에 아름다운 단풍잎을 붙혀놓고 단풍잎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마음을 즐기지 않는가. 우리는 세상에 태여나 나이를 먹으면서 잘 물든 단풍잎처럼 늙으면결코 서글프지 않다. 주름살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머리가 희여지면 희여지는 대로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한다. 주어진 현실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의 얼굴은 무척 편안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분은 나이 들어도 참 밝고 당당하게 사는구나!” 하며 부러워한다. 바로 그 모습이 늙음에 비참하지 않고 초라하지 않는, 잘 물든 단풍잎 인생이다. 잘 물든 단풍잎 인생을 살려면 지나침을 경계하고 과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나이 들어 지나친 과욕을 부리면 부작용이 따른다. 인간은 일생 동안 먹을 음식이 한정량으로 정해져 있다고 하니 아무리 맛이 있어도 적당히 먹어야 한다. 많이 먹으면 굵고 짧게 살고 소식하면 가늘고 길게 산다. 과음도 안된다. 과음하면 가을비가 온 뒤에 기온이 떨어지듯 늙은 몸에 과음하면 기온이 떨어져 몸이 망가진다. 나이 들어 뭐든지 지나치면 안된다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열매를 맺는 과정이므로 잔가지들을 치면서 인생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100세로 보면서 50세까지는 전반생, 50세후는 후반생, 60세를 후반생시작이라고 한다. 전반생이 가정, 사업을 위해 분투한 올리막길이였다면 후반생은 페달을 별로 밟지 않아도 되는 내리막길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반생은 전반생 저축을 토대로 사회적인 직위나 재산을 모으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기력, 체력이 충분한 인생이다. 승부는 후반전에 있고 멋진 꼴은 거의가 후반전에서 나온다. 85세에 28번째의 책 《락엽으로 가는 길》을 출간한 김영금 작가는 출간식에서 “다른 건 다 버리면서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는 것이 글이고 책이였다.”고 하면서 “그래도 지나온 인생길에서 느낀 깨달음을 자식들과 후배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어서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힘들게 이 책을 썼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연변농학원의 김수철교수는 식물학자의 량심과 사명감으로 길림성의 공백인 《길림성식물지》를 보수도 없이 출판하겠다고 하면서 본인이 채집한 수만종의 식물표본을 93세인 2013년부터 정리, 집필하여 2022년까지 영어, 한어, 조선어, 라틴어 등 4종 문자로 된 《길림성식물지(1, 2집)》을 출판하였고 지금은 98세 고령에 제3집과 제4집을 편집하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런 분들이야말로 참 잘 물든 아름다운 단풍잎의 엘리트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후반생을 잘 물들게 하는 무지개 단풍론으로 이 글을 맺는다. 1. 신념을 갖자. 그러면 큰 힘이 생긴다.  2. 책을 읽자. 그러면 지혜의 샘물이 솟는다. 3. 나누며 살자. 그러면 삶이 풍요롭다.  4. 웃음을 갖자. 그러면 령혼의 음악이 들린다. 5. 친구를 갖자. 그러면 행복한 시간이 마련된다.  6. 좋아하는 일에 미치자. 그러면 늙지 않는다. 7. 사랑을 갖자. 그러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보인다. 오기활                               2023년 제 9 기
453    조상님게 감사를 댓글:  조회:886  추천:0  2023-09-15
설 명절을 앞두고 술상에서 차례를 론하니 “지금은 골회도 날라 버리는데 차례라니?”라며 말 빠른 리씨가 초풍할 지경이다. 그럴만도 하다. 부모가 사망하자바람으로 화장터에 모셔 연기와 함께 유골을 날려 보내고는 “시름을 놓았다”는 상주들이 한둘만이 아니니 말이다. 기제사는 물론 3년 제도 지내지 안는다는 자랑까지 하니 말이다. 이들에게 지난 12월 14일에 주문화국, 주무형문화재보호중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 련합으로 “조선족장례풍속보호연구토론회”를 했고 토론쩨마가 조선족장례문화를 어떻게 보호할가였다면 진정 초풍기절할것이다. 물론 생활절주가 빠르고 일에 쫓기는 현대인들의 실정을 모르거나 리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예 살아계시는 부모도 일년에 한두 번을 겨우 찾는다는 정도니 사망자의 유골을 버리고 제를 안 지내는것이 더는 이상할것이 없다. “선배은공을 안 잊으면 자손이 빛난다(不忘先辈恩 子孙齐光辉)”는 비문이 인상깊다. “나를 이세상에 태여 나게 한것만으로도 부모들에게 감사하다.” 이는 눈먼 량부모를 효성스레 모시는 훈춘시 양포향동아리촌 주우(훈춘시 제5기10대걸출청년)의 말이다. 27살 농촌청년의 말이라고 믿기 어렵다. 우리의 몸은 나 한 사람의 외딴 개체가 아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지엽이고 련결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유훈을 받들어 근간(根干)을 깊이박고 지엽을 바로 키워 보람있는 결실을 맺어야 한다. 조상들에게 제례를 올림은 돌아가신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고 몸과 마음을 바로잡고 정성이 담긴 의식으로 자자손손 효심을 이으려는데 있다. 묘지나 골회함은 주택의 연장이다. 제례의 마음자세는 돌아가신 분을 살아계실 때 모시듯 하는것, 검소하지만 정성을 들여야 한다. 이것은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민족의 참된 모습이다. 솔직히 말하면 제례를 기피하고 조상묘를 버림은 단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례를 멀리한다고 해서 사업에 더 열정하고 마음이 편해지고 유골을 날려보낸다고 해서 조상에 대한 마음까지 날려보내는것이 아니다. 아무튼 인간이기 때문에 어째든 그로인해 마음속에 항상 죄책감이 자리 잡기 마련이다. 필자는 오는 음력설을 시작으로 그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조상생각을 해보라고 권고한다. 차례를 기회로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께 작은 정성이나마 올려 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죄책감을 버렸으니 새해의 일도 잘 풀릴것 같다. 일전에 회혼례를 지낸 박룡수, 전보옥 로부가 자식들의 “효심은?” 물음에 “늘 곁에 와준다”는 단마디 대답에서 부모들이 자식에 대한 바람과 효심욕을 터득하였다    . 오기활                                《길림신문》2010.12.31.        
452    정인갑교수와 인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 댓글:  조회:770  추천:0  2023-09-01
지난 2월 21일 필자는  연변일보 사우인 장경률씨가 한국에서 보내온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번영에서 조선족의 역할”이란 주제의 “삼강포럼” 세미나소식을 받고 경룰씨더러 나와 정인갑교수의 위챗련계를 부탁하여 정교수와 위챗을 련계하였다. 나와 정교수와의 인연은 아마도 우연이 아닌 필연이였다. 필자가 정인갑을 만남은 조글로사이트였다. 정교수님의 글을 읽어보면 그의 기질이 거의 나와 같았다. 우리는 김학철선생님의“ 인간답게 살려면 불의와 도전하고 편안하게 살려면 불의를 외면하라”를 좌우명, 삶의 가치관으로 하고 언론인은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로천로 우리가 진찰한 사회의“병”이 거의 같았고 그 “병”에 대한 치료처방도 거의 같았다. 뿐만이 아니였다. 우연하게도 나와 정교수의 출생은 동년 띠동갑이고(나는 1947년 음력 5월 출생, 정교수는 1947년 8월 출생) 결혼한 해도 같았고(1975년)였고 심지어 결혼식날에 부른 노래마저 같았다.(소근장대대를 따라 배우자) “옛 조상의 삶풀이”(흑룡강 초선민족 출판사,2003년 출판)에 따르면 돼지띠생은 성격이 “천성적인 유물론 자로서 정직하고 단순하며 아주 강인하다. 그들의 최고의 재산은 신뢰성, 성실성, 견강성이며 주어진 임무에 온갖 힘을 이울려 몰두하는 열정가이다”고 하였다. 이에 비춰보면 우리는 명실공한 돼지띠생으로 책임감이 강하고 속심이 자상하였다. 이밖에도 우연하게 정교수가 나보다 하루 먼저 “연변단풍수필협회”에 입회하였다. 정교수의 책임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2011년에 동북3성 4개 조선문언론사에서 벌린 “원사보”컵 (건강한 술문화만들기)응모활동 때 내가 “50년 주사(酒史)와 나만의 주도酒道)”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나는 이 글에서 애주가의 괴변인 술의 주정을 바를 正으로 풀이하며 “酒正”이라고 썼더니 정교수가 댓글로 “주정의 한자는 酒酲”입니다”로 바로잡아 주었다. 또 지난 70년대에 필자가 대채참관단으로 대채를 다녀올 때 애주가인 필자가 국가명주로 “분주”를 마시려니 돈지갑이 엷어서 술을 병채로는  사지는 못하고 생떼를 써서 잔으로 (한잔에 70전) 한 잔을 사서 마셨다는 글에 정교수가 댓글로 “'분주(汾酒)'를 분주(芬酒)'로  잘못 썼습니다”고  바로 잡아 주었다.  이렇게 지나온 와중에 필자는 2014년 1월 6일 서울에서 치른 우리 손녀의 돌 생일잔치 때  정교수를 처음 만났다. 그 때 나의 아들의 지인들로 한국에 있는 조선족명교수(박사)들로 예동근씨, 정인갑씨,강광문씨가 참석하여 하였다. 그 며칠후 때 필자가 정교수를 인터뷰를 했는데 그번 인터뷰에서 정교수가 “연변에서 조선족의 발전을 위해 한족들을 동원 해야 한다”는 견해가 인상이 깊었다.  필자가 듣기로는 연변의 지도자들이 “연변발전의 도움을 위하여 조남기, 문정일, 리덕수 등 동족의 ‘령수’들을 찾는다는데 정교수에 따르면 연변에서 될수록 한족 간부들을 내세워 연변의 한족지도자들이 국가급 한족어른들을 찾아 다니며 “조선족을 도웁시다”고 한다면 효과가 빠르고도 계속될 것임을 심심히 느끼였다. 인터뷰를 끝내고 필자가 정교수에게 나의 저서(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를 증송하였더니 며칠후에 “요사이 우리 집(부인)에서 오선생님의 책을 열심히 읽으며 감동을 먹습니다”는 감사의 전화를 보내왔다..   아래는 그때 필자가 발표한 기사이다.   《괴짜학자》가 보는 조선족발전의 몇가지 해법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2-12 15:11:36 ]   -조선족을 위한 정인갑교수의 일가견                  열변을 토하는 정인갑교수   지난 1월 24일 오후 기자는 서울의 모 커피점에서 정인갑교수를 인터뷰를 했다. 정교수는 1982년에 북경대학중문학부를 졸업하고 중화서국에서 편집부 주임을 사업하다가 퇴직후 현재 청화대학 중문학부 객좌교수, 한국 황하문화원 원장, 한국 한중미래재단 리사장, 중국음운학연구회 리사, 중국사서(辭書)학회 회원 등 많은 직무를 맡고있었다. 정인갑교수는 학식은 물론 활동범위가 넓고 국경이 따로 없는 마당발이였다. 정교수는 특히 조선족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발벗고 나선다고 하는데 그는 연변의 문화사업은 물론 경제발전을 위하여 많은 조언을 해왔다. 례하면 우리 민족의 후대양성을 위하여 북경시삼강(두만강, 압록강, 송화강을 뜻함)소학교를 설립하고 10년간 운영하면서 북경에 진출한 중국조선족과 한국인, 조선인 자녀들을 받아들였다. 우리 민족의 민족사와 세계사를 곁들며 연변과 조선족의 오늘과 래일을 담론하는 정교수의 주장은 긍정적이고 랑만적이였다. 《로총각공정》을 벌리자 《현재 조선족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중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가 조선족농촌의 많은 로총각과 〈외톨이>들이 많은것이다.》  이렇게 화두를 떼는 정교수는 몇년전부터《로총각공정》을 구상하여왔다. 조선족녀성들의 출국과 내지 진출로 농촌 총각(외톨이)들이 결혼을 못하는 현상을 초래하였고 조선족인구의 마이나스성장 위기를 조성했다. 당년에는 재해가 들면 정부나 해당 부문에서 외지의 쌀을 사들이고 심지어 고추흉년이 들어도 타지방의 고추를 사들이느라 야단법석이였다. 그런데 지금 숱한 조선족총각들이 결혼을 못해도 정부측에서 나서지 않는다. 하여 정교수는 중국 극빈지역의 타민족녀성을 영입하는《로총각공정》을 구상했던것이다. 《로총각공정》은 정교수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어느 간부한테서 계발을 받았단다. 그에 따르면 중국 강절(강소성, 절강성) 등 지역의 농촌에도 로총각문제가 존재하였는데 그들은 중국 극빈지역 처녀들을 대량 영입하였다고 한다. 정교수는 연변의 모모한 조선족간부를 만나 이 방법을 제의하며 인식을 통일하고 정부와 민간을 동원할것을 제의했고 달마다 사업추진여하를 차문하였다. 심지어 국영기업과 사영기업가들을 찾아서 변통적으로 이 일을 추진해볼것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주선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첫발만 떼면 극빈지역에 소문이 퍼지면서 서로 소개를 할것이며 잇달아 효과가 나타날것이다. 《〈로총각공정〉에 사업자금이 필요하면 내가 첫사람으로 몇천원을 후원하겠습니다.》 정교수는 하면 되는 일에 나서는 사람이 없다며 퍽 안타까워하였다. 조선족명절을 만들자 명절이란 국가나 사회적으로 정하여 경축하는 기념일이다. 대학생시절에 정인갑은 북경시조선족대학생활동을 조직하느라 중앙민족대학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 다른 민족학생들은 국가에서 민족명절을 쇠주었는데 조선족들은 민족명절이 따로 없다보니 국가의 대접을 받지 못하여 서운해하였단다. 이에 정교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편지를 써 북경시에서《9•3》명절을 쇨것과 에 북경시조선족운동회를 조직해 줄것을 간곡히 제기했다. 1981년 5월 스웨덴의 한국인교수(조승복)가 북경대학을 방문할 때 많은 조선족유지인사들이 모였다. 그 모임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萨空廖)이《좋은 소식을 알린다.》며 올《9•3》에 북경시조선족운동회를 거행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해당부문의 어느 조선족분이  다른 관점을 주장하는 것으로  여러번의 조률끝에 끝내 9월 14일에 북경시조선족운동회가 아닌《북경시민족운동회》로 거행하였다고 한다. 명절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성탄절, 구얼방절(古尔邦节)은 종교적 명절이고 물뿌리절(泼水节)과 나달묵(那达慕)절은 타이족과 몽고족의 명절이며 8.15는 연변의 로인절이고 9.3은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절이다. 물뿌리기절(泼水节)과 나달묵절은 시쐉반나와 내몽고는 물론 기타 지역의 타이족과 몽고족도 함께 쇤다. 하지만 9.3은 지역명절이므로 연변의 기타 민족들은 함께 쇨수 있지만 타지역의 조선족들은 함께 쇨수 없다. 정교수는 하루속히 연변조선족명절만이 아닌 200만 조선족의 명절을 내와 전 중국의 조선족들이 해마다 유쾌히 조선족명절을 함께 쇨수 있기를 기대했다. 조선족을 위해 주류민족들이 나서게 하라 필자가 최근 연길에서 진행한《감동중국걸출조선족》시상식을 곁들이니 정교수는 참 좋은 일을 했다고 치하를 하였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조선족을 위한 행사에 주류민족들을 동참시켜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실례를 들었다. 정교수는 총 15권에 달하는《중화민족백과전서(中華民族百科全書》출판 최종심열을 맡고 몇년전부터 전국적인 사회조사를 하였다. 2008년 8월, 흑룡강성 동강시(同江市) 허저족(赫哲族)자치향인 가진구향(街津口乡)에 가니 가진구향을 위해 시와 향의 한족간부들이 허저족보다 더 열심히 뛰여다녔다고 한다. 필자가 민족자치지역에서 한족들이 더 열심히 뛰여다닌다는것에 리해가 안 되여하자 정교수는《소수민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것은 한족들의 당연한 의무다. 사(私)적으로 봐도 한족들도 소수민족들에게 차례지는 덕을 함께 향수한다. 동강시는 성이나 중앙에 가서 손을 내밀만한 여건이 전혀 없다. 그러나 허저족자치향이라는 이름을 내걸면 달라진다. 동강시가 발전할수 있은것은 많이는 허저족자치향이라는 카드를 활용한데 있다.》고 설명했다. 정교수는 내몽골, 신강, 운남 등 소수민족 지구에서도 소수민족의 일을 위하여 한족간부들이 북경나들이를 많이 한다고 한다. 력사적으로 보면 장춘은 오랜 수부도시이고 연길(연변)은 문화도시이다. 북경에는 장춘, 연변에서 진출한 훌륭한 한족인재들이 많다. 한때는 돈화시 출신의 한족이 중앙텔레비죤방송국 국장을 담임했고 연길시북산가 출신의 한족이 중앙선전부 부장을 담임했다. 만약 연변에서 언녕부터 한족들이 그들을 찾아가서 연변을 도와달라고 했더라면 모르는척은 안했을것이란다. 기자는 정교수의 엉뚱한(독특한) 사로(思路)에 완전히 매료되였다. 정교수를《괴짜학자》라고나 할가? 그의 주장과 관점은 조선족들의 앞길에 너무나 훌륭한 조언을 남겨주고있었다. / 오기활기자   한마디로 나와 정교수와의 인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이라고 하겠다. 나와 정교수는 “연변단풍수필협회”창회 25주년을 맞으며 함께 입회한 회원로서 서로가 제자리를 참담게 지키며“연변단풍수필협회”성립 25주년을 맞이하여 황유복고문님이 올린 글(수필문학의 더나은 내일을 그리며)을 명기하고  황교수님이“중국조선족문단에는 해마다 회원문집을 출판해내고 달마다 문필활동을 진행해 온 ‘연변단풍잎수필회’가 명실공히 중국조선족문학인단체들의 맏형벌이 되라”는 기대에 따라 정교수더러 ‘연변단풍수필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갖고 있는 자본을 무헌이 활용하십소”를 부탁하고 큰 기대를 한다. 그리고 우리 협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정교수의 언론집“정인갑의 횡설수설”(민족출판사. 2013년)을 읽어 볼것을 건의한다.  오기활 (2023년 3월 3일 도문서)
451    국문관리는 엄숙해야 댓글:  조회:835  추천:0  2023-08-17
최근 도문시는 “두만강반의 제1도시”라는 슬로건으로 “두만강문화”를 주제로 한 여러가지 홍보전을 대폭 벌리고있다. 그에 따라 많은 국내외관광객들이 도문의 두만강, 두만강광장을 찾아 휴식과 즐거움의 한때를 보낸다. 그런데 그에 따라야 할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또 엄격해야 할 여러가지 관리사업이 구석구석 느슨한것이 가슴이 아프다. 례하면 탑이란 종교, 기념, 군사, 전망, 관광, 관측, 방송통신 등의 목적으로 건조된 건축물인데 중국 도문통상구(국문)남쪽 두만강유보도에는 사진업자들이 헌 널판자와 엷은 철판으로 만든 “중조우의 탑”이 두개나 번듯이 서있다. 그것도 조선 평양의 “중조우의탑”을 본따 만든 “중조우의탑”이 아닌 평양의 “천리마탑”을 본따 만든 “중조우의탑”이다. 국내외 관광객이나 외빈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이렇게 엄숙하지 못한 황당한 “탑”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는 해당 부문의 책임자들은 추궁을 받아야 할것이다. 또 문이란 부지내의 시설을 보호하는 방어적 목적과 시설을 표현하는 의장적(意匠的)목적, 때로는 기념적목적(례하면 독립문)을 가진다. 국문은 나라를 지키고 국가의 존엄을 상징하는 문이다. 그런데 조국의 동대문인 중국 은 돈별이를 목적으로 나라의 존엄도 없이 국문을 관광명소로 만든데서 많은 관광객들이 국문에 올라 국문을 마구 짓밟는것이 필자로서는 가슴아픈 국치로 느껴진다. 외국의 한 인터넷매체는 도문의 국문을 글에 올리고 “국문이냐? 전망대냐?”며 풍자하였다.  오기활                                                              2011.10.3.
450    올바른 부조문화 기대된다 댓글:  조회:698  추천:0  2023-08-01
해마다 이쯤이면 성행하는 를 두고 후론이 많다. 지난 세기 90년대까지만도 대학문턱이 높아서 자식이 대학에 입학하면 부모들이 >며 자녀대학입학잔치를 차렸다. 그리고 누구나 대학입학잔치에 초대되면 신나서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런데 는 지금은 는 불만들이 뒤따른다. 이런 대학입학잔치현실에 비춰 도문교원연수학교 오해선(정년퇴직교원), 리문준부부가 딸애의 대학입학를 잔치대신 딸애를 관광을 보내여 돋보인다. 기실은 딸(리채유)이 리과생 중 길림성에서 단 1명을 모집하는 연변대학미술학원에 제 1 지망대로 입학했으니 축하잔치를 베풀만도 했다. 지금 보면 사회적으로 백일잔치, 생일잔치, 대학입학잔치, 집들이잔치, 출국잔치… 등등의 잔치가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잔치를 화제로 시야비야 한다. 잔치화제의 대개는 삐뚤어진 잔치에 따르는 부조때문이다. 지금 시세에 부르는 잔치에 가려면 최저로 가 100원이 돼야 하니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며 난감해 한다. 살펴보면 적지 않는 잔치들의 목적은 돈벌이였다. 60대의 모모는 3번째나 되는 재혼에 번마다 많은 손님을 청해 말밥에 올랐고 누구는 이미 손녀애까지 본 아들의 결혼잔치 끝에 현수막까지 바꿔 걸고 손녀생일잔치를 차리다 보니 하객들이 며 두덜대더란다. 이런 반면에 도문의 김영덕옹이 회혼례에 며 손님을 청하지 않았고 흑룡강성 정금화의 진갑잔치는 손님들의 축의금을 받지 않았단다. 어느 중학생동창회는 서로간의 군일에 부조를 20원을 초과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제정했고 룡정시 개산툰진의 한화석네 자식 4 남매는 아버지의 7순 수연을 잔치대신 량친부모를 한국에 1개월간의 배낭려행을 보냈고 아버지(농민작가)의 저서(못 말리는 개산툰)를 출간하게 하였다. 상기의 이 실례는 삐뚤어진 잔치문화의 개혁으로 크게 제창할바다. 우리가 무엇을 개혁하려면 필경은 앞장서는 선각자가 있어야 한다. 누구보다 앞장서나가는 소수의 선각(선구)자들은 언제나 처음은 외롭다지만 선각하고 남먼저 행하는 그 일이 의미가 깊고 가치가 크다면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야만 사회가 변화되고 발전된다. 아니면 모두가 며 자기가 따르려는 일의 의미나 가치를 가늠하지 않고 늘, 그저 그대로 남들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사회는 아무런 변화와 발전이 있을수 없다. 필자는 오늘의 삐뚤어가는 잔치현실과 그에 따르는 부조문화현실에 비춰 김영덕, 정금화,오해선, 한화석 자녀들 등 앞장선 사람들의 선동으로 살맛나는 훈훈한 잔치부조문화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한다.   오기활                      2011,7,29    
449    아버지의 특제 선물 댓글:  조회:945  추천:0  2023-07-31
평생 최고의 시계만을 만드신 아버지가 아들의 성인식(成人式)에 특제시계를 선물했다. 시침은 동으로, 분침은 은으로, 초침은 금으로 만들었다. 아버지한테서 처음 특제선물을 받은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 왜서 가장 중요한 시침을 동으로 하고 없어도 될 초침은 금으로 했습니까?”  “아니다. 초침이야말로 제일 중요하다. 누구나 초를 잃으면 세상의 모든 시간을 잃게 된단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시계를 채워주며 당부하였다. “초는 시간의 기초다. 초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분과 시간을 아낄수 없다,시간의 흐름은 초에 의해 결정된다는것을 꼭 명심하고 단 1초의 시간도 책임지는 사람이 되여라.” 지난해 일이다. 북경 모 병원의 의술이 높은 외과의사가 북경황강국제골프구락부에서 골프를 쳤는데 캐디의 탓으로 의사의 손시계를 땅에 떨궜다. 며칠이 지난 후 회사에 그 의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 손시계는 20일에 1 초씩 오차납니다. 그런데 당신네 캐디가 땅에 떨군 후부터는 일주일에 1초씩 늦어집니다…” 의사는 초를 단위로 일을 한다며 회사측의 책임을 추구하였다. 인생은 시간과 함께하는 선택의 연장이다. 누구나 날마다 공적인 시간과 사적인 시간의 흐름속에서 자기의 가치관,생활방식에 맞는 “시간관리”로 보다 질적인 삶을 시도한다. 미국의 저명한 교육가이며 경영자문가인 드러커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독특하고 가장 가난한 자원이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그 어느것도 관리할수 없다”고 했다. “시간관리”란 “우선”과 “중점”을 잘 나누는것이다. 오늘은 무엇을 최우선으로 하고 어느 일에 중점을 두며 시간을 어떻게 배치해서 집중적으로 움직일것인가를 잘 판단하여 제한된 시간을 공무와 자신에게 한것 기여하게 해야 한다.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매초를 헛되게 흘려 보내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아끼며 관리한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은 미련과 후회만 남게 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간다. 그래서 어느 사상가는 시계의 “똑딱똑딱”하는 소리를 죽음이 다가오는 신호라고 비유했다. “짧은 인생은 시간랑비로 인해 더욱 짧아진다.” 후회없는 충실한 삶을 살려면 시간의 주인이 되라       오기활                                    《길림신문》2009.7.14.    
448    백성의 지도자들 댓글:  조회:859  추천:0  2023-07-01
나는 남들로부터 이런 부탁을 곧잘 받는다. “나(그)를 위해 좋은 말을 해달(주)라” “우리를 위해 할 말을 콱 해달라” “좋은 말을 해달라”는 나더러 누구를 위해 “찬송가”를 불러달라는것이고 “할말을 콱 해달라”는것은 백성을 위해 할말을 꼭 해달라는것이다. 나를 놓고 말하면 이런 부탁은 “위공대변(为公代辩)”하느냐 “위사대변(为私代辩)”하느냐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라 하겠다. 흔히 상급에서 시찰이나 검사를 온다고 하면 당지의 어른들이 사전에 시찰대상에게 “보희불보우(报喜不报忧)”를 지시 혹은 암시를 한다. 즉 좋은 말만 하고 나뿐(?) 말은 말라는 눈치다.그래서 당사자는 없는것도 있다고 적은것도 많다고 안 한것도 했다며 입발린 말만 한다. 그 결과 현지어른들은 상급에서 치적을 얻고 백성의 불신을 얻게 된다. 연변의 초대주장 주덕해동지는 당과 정부앞에서 “찬송가”만이 아닌 “고충가”도 불러 당과 정부의 집정에 도움을 주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었다. 1962년 주은래총리가 연변을 시찰할 때 주덕해동지는 “희”와 함께 “우”를 실사구시적으로 회보한데서 우리 조선족이 한족보다 입쌀공급을 더 받고 고추가루보조금을 따로 받는 등 소수민족우대정책을 향수하였다. 도문시초대시장(1965년) 김하권은 “문화혁명”때 쓴 자본주의길로 나가는 집권파란 모자를 방금 벗고 1975년에 도문시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임직된지 얼마 안되는데도 곁군들의 눈총을 피해가며 성에서 온 시찰단의 숙소에 찾아가서 도문시민들이 오염된 두만강물을 먹는 “우”를 통사정을 하면서 회보한데서 도문시민들의 식수(食水)문제를 해결하였다. 2005년 연변대학 김병민총장이 국무위원 진지립(陈至立)이 시찰을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연변대학캠퍼스통합확장공사가 부딪친 고충을 회보하고저 하니 해당책임자가 사전에 “우”는 말하지 말것을 암시했다. 이에 진퇴량난에 처한 김총장이 성당위부서기 전철수한테 속심을 터놓았더니 전서기가 “국무위원을 모셔오는 목적이 바로 도움을 받자는것인데 왜 곤난을 반영하지 않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꼭 제기하라”고, 그리고 실사구시적으로 수요되는 자금을 말하라고 하였다. 하여 국가의 상당한 자금을 쟁취하였다. 도문시 홍광향 달라자촌은 지난 90년대 연변의 첫 “텔레비죤마을”로 교석, 진모화, 류화청 등 국가급지도자들이 여러 차례나 시찰하였다. 언제 들었던 리춘실(서기)의 말을 적어본다. “번마다 시에서 배워주는 말만 하다보니 교석이 ‘무슨 곤난이 있는가?’ 는 물음에도 양어장을 확대개조할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말을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아쉽다” “보희”는 간부들이 치적을 얻고 “불보우”는 백성들이 불익을 당한다. 필자는 주덕해, 전철수, 김하권 등 지도자들의 “보희보후”가 백성의 지도자 계주봉으로 되기를 기대한다. 오기활                                              《길림신문》2011.4.1.          
447    대통령의 쓰레기 줏기 댓글:  조회:1228  추천:0  2023-06-28
몇해전 심수에서 온 처녀가 “쓰레기는 사람따라 올라가고 사람따라 내려와야 한다”며 등산하고 돌아올 때 산에 널린 쓰레기를 주어다가 거리의 스레기상자에 버리던 일이 지금도 인상이 깊다. 일본동경거리에는 흡연 장소마저 따로 지정되여 발달국의 앞선 환경보호의식을 읽을수 있었다. 이에 비춰 도문기상국 산등성에 쌓여있는 쓰레기무지를 볼 때마다 쓰레기를 실어 산에다 버리는 몽매한 인간들이 저주스럽다. 자연보호는 인류가 생명을 유지하고 질적 삶을 보존하기 위한 생존수단이다. 1977년 9월 5일, 한국 박정희대통령이 경북 금오산도립공원을 찾았을 때 케이불카를 타고 폭포까지 올라 갔다. 그런데 산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산수경치는 일품인데 연못가 주변에 마구 버려진 생활쓰레기들이 지저분하기로 말이 아니였다. 이에 박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모두들 여기를 청리하고 갑시다.” 박대통령의 솔선수범으로 수행인원들은 40분간 연못가주변을 청소하였다. 박대통령은 바위틈에 박힌 유리쪼각마저 하나하나 뽑아냈다. 청소를 끝내고 걸어서 하산하며 살펴보니 등산로 주변도 쓰레기와 페기물로 어지러웠다. 박대통령은 다른 여러 곳들도 같은 실정이라고 판단하고 며칠 후인 9월 10 일에 경제동향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자연보호운동을 범국민적운동으로 전개합시다”고 제기하고는 즉시 그에 따르는 자연보호기구를 정부에 설치했다. 그로부터 한국의 범국민적인 자연보호운동이 시작되였다. 지구는 하나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의 생존은 우리의 생명이다. 전문가들은 21세기는 “개발이냐 환경보전이냐?”는 선택문제가 아닌”생존이냐 멸망이냐?”는 문제라 한다. 인간은 자연과 공생하는 존재다. 지난 12월 7일 세계 190개국 1.5 만명 대표들이 코펜하겐(단마르크)에 모여 “온실 가스방출감소”를 토의함도 인간이 자연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서다. 오늘 우리가 향유하는 자연환경은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한 후 후손에게 물려 주는것이 아닌, 우리가 후손들로부터 빌려서 사용하는것으로서 보다 잘 사용하고 잘 보존해서 원형 그대로 후대들에게 돌려 준다는 마음자세를 갖자. 환경개선을 내가 먼저, “줏는 손은 예쁜 손” “버리는 손은 미운 손”이다. 오기활                                                         《길림신문》2010.2.23    
446    귀중한 생일선물 댓글:  조회:1228  추천:0  2023-06-22
작년 6월 16일 필자는 “조선족! 생일을 꼭 쇠야 하는가?”는 오기철의 래신에 “생일 그리고 부조”라는 글을 배합하여 독자들의 큰 반향을 이르켰다. 오기철의 1,000명 조사에 따르면 생일을 쇠니 “좋더라”는 거의 없고 “남이 쇠니 방법이 없다”가 보편적이였다. 이 글이 발표된후 600명의 인터넷 댓글이 올랐는데 주되는 내용이 “전화벨소리가 겁나다! 오늘 또 누구 생일인가?!”다. 자신의 경제실력에 따라 축의금이 없이 어느 정도의 친척, 친구들을 청해 종종 쇠는 생일은 좋다. 그런데 해마다 부조가 오가며 쇠는 생일은 삭감하자는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필자는 언제부터 “의미 있는 생일”을 구상하던중 나까다니 아끼히로(일본)가 쓴 “가장 소중한 생일선물”을 읽고 필을 들었다. 글은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은 사랑입니다”로 시작해 이렇게 쓰고있다. —나는 다가오는 생일무렵에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당시 나는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를 겪고 난 후라 살아 있는것만해도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물질보다는 사랑과 안정을 느끼는 마음의 선물을 받고 싶었다. 나는 생일파티에 나를 아끼는 사람들을 초대한 후 여러분들에게 ‘나와 함께 있던중 기억에 내가 가장 남던 순간을 지금부터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목숨을 잃을 번한 사고를 겪고 나니 나의 장례식에서 여러분들이 어떤 말을 할지 미리 알고 싶다면서. —장례식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숨을 거둔 나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대신 지금 미리 들려주면 록음을 했다가 내가 용기를 얻고 싶을 때마다 다시 들으면 얼마나 기쁜가. —나는 친구들이 나를 높이 평가하며 얼마나 사랑한다는것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 사람마다 간직한 나에 대한 소중한 기억과 평가를 들으면서 나는 할 말까지 잊었다. 맘속으로 이제는 내 삶의 방식에 안심해도 될것 같은 기분과 내가 그들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깊이 느꼈다. 그로부터 나는 우울할 때나 사랑과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이 테프를 들으면서 그들의 사랑과 자신의 존재가치를 가슴 가득히 느낀다. —당신들이 보다 질적인 삶과 보다 강한 당신으로 되기 위해 나는 당신들에게 이 방법을 권하고 싶다. 그러나 나처럼 사람들을 꼭 한 자리에 청할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서 소중한 선물을 받고 싶다는 편지를 쓰면 된다. 그들의 선물을 받고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내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깊이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도 사랑하는 그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베풀련다. 살아 있을때 서로 고백하고 나눠야지 작별의 순간까지 감출 필요가 없으니깐 말이다. 필자는 올해의 생일에 이 글을 올리면서 친척, 친구들의 소중한 선물(편지, 댓글, 전화)을 기대해 본다. 단 부탁이라면 나에 대한 찬송가만이 아닌 당신들의 기억에 남는 내가 그대들에게 남긴 서운했던 일도 함께. (《길림신문》2010.6.8.)      
445    “이 팔팔한 나이에” 댓글:  조회:1242  추천:0  2023-06-01
일전에 몇년간 소식이 없던 동생벌 친구 백운산(白云山)씨가 우리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와 나누던 말에서 큰 계발을 받았다. “나는 매일 마작판에 붙어있는 사람들을 보면 눈이 감긴다.” “젊어서는 할 일들이 찾아오는데 늙으면 내가 할 일을 만들어야 한다. 75살까지 분투하겠는데 이 팔팔한 나이(57세)에 지금부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한다.” “전국을 대상한 일을 만들겠다. 마당이 넓어야 거래처가 많다. 전국의 몇퍼센트만 점한다 해도 이 지역의 수십퍼센트를 점하는것보다 수익성이 높았다.” 57세를 “팔팔한 나이”로, 75세를 정년으로 목표하고 전국을 대상한 일을 창업하는 그의 분투정신에 머리숙여진다. “33세에 ‘하해’를 하였으니 말이지 그냥 시당위판공실에 묻혀있었다면 나도 언녕 잘리였을것이다. 그래도 일찍 ‘하해’한것이 천만다행이다.” 이렇게 말하는 백운산은 간고했던 창업사에 아무런 후회없이 만족을 느꼈다. 백운산은 1987년에 “하해”하여 한국나들이를 하면서 한국의 인기생활용품을 인입하여 도문, 심양, 상해에 공장을 꾸리고 열심히 일해 성공하였다. 지금도 종종 한국에 다니며 사업충전을 위한 “따궁(打工)”을 하는것을 보고 친구들이 “그만하면 되는데 왜 수모를 당하면서 일을 하는가?!”며 리해를 못한단다. “기실은 돈을 받으면서 기술을 배우는데 말이다.” 백운산의 인생은 개척, 분투, 배움의 인생이다. 하기에 남들은 “축성여석(筑城余石)”이라는 50대를 “팔팔한 나이”라며 75세 정년을 위한 일터를 한창 닦는단다. 일본서 7세대째 100여년을 이어가며 일본부채문화를 지키는 “부채왕” 미야와끼 바이센죠는 접부채문화를 “인풍재악(人风在握)”이라며 설명했다. “인풍재악”이란 “삶의 바람은 자기 손에 쥐여 있다”는 말이다. 사람마다 자기 손에 쥐여있는 바람을 어떻게 일으키냐는 각자의 나름이다. 백운산은 30대에 모험을 무릅쓰고 삶의 바람을 세차게 일으켜 오늘의 성공을 이뤘고 계속하여 재악의 광풍으로 래일에 도전한다. “백운산”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춘풍을 기대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당위판공실에 출근하다가 1987년 33세에 “하해”하여 남들로부터 성공하였다고 평가를 받는 백운산씨는 “젊어서는 일이 생기고 찾아오지만 늙어서는 일을 찾아 해야 한다.”며 “내가 지금 팔팔한나이(57세)에 75세까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며 전국시장을 대상한 사업을 만들고있다고 한다. 57세를 팔팔한 나이라며 75세를 겨냥하는 그의 삶의 태도에 탄복된다.   오기활                                                            《길림신문》2011.12.14.  
444    좋은 습관 성공 부른다 댓글:  조회:919  추천:0  2023-05-23
한국 부산해운대에서 “부자”로 불리는 김우진사장한테서 들은 얘기다. 누구나 부자가 되려면 이런 세가지 습관을 양성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돈을 잘 모셔야 한다. 김사장은 우리 앞에서 만원짜리 지페뭉치를 탈곡장에서 곡식양창질을 하듯이 공중에 뿌리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 돈을 한장한장씩 정연하게 손에 쥐며 돈에도 눈이 있으니 돈을 정연하고 깔끔하게 잘 건사해야 한다고 했다. 뜻인즉 알심을 들여 번 돈의 로력의 가치를 소중히 하라는 말이다. 둘째는 신발을 정연하게 건사해야 한다. 김회장은 도둑놈도 빈집에 들어와서 정연하게 정리된 신을 보면 그냥 돌아간다며 언제나 신을 벗어서는 정연하게 건사하란다. 뜻인 즉 크고작은 자산관리를 잘하라는 말이다. 셋째는 휴지를 아껴야 한다. 김회장은 우리 앞에서 뒤를 본후 휴지를 사용하는 동작을 진짜 하면서 휴지를 이렇게 이렇게 아끼란다. 뜻인 즉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는 말이다.  김회장은 일상 생활에서 이 세가지가 습관으로 되여야만 부자로 된다고 부언했다. 물론 누구든 자기가 피땀으로 번 돈을 소중히 여기고 크고작은 자산관리를 참답게 잘하며 일상생활에서 근검절약을 한다면 부가가 될것임이 불보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가지를 경상화, 습관화로 견지하는가에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습관이 있다.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습관이란 무엇입니까?”고 물었다. 이에 스승은 제자를 데리고 동산에 올라가 방금 돋아난 어린 풀, 조금 자랐으나 뿌리가 내린 풀, 키 작은 어린 나무, 다 자란 키 큰 나무를 각각 가리키면서 제자더러 방금 돋아난 어린 풀과 조금 자라 뿌리를 내린 풀을 뽑아보라고 하였다. 제자는 풀을 뽑고는 “쉽게 뽑히는데요”라고 하였다. 계속해서 스승은 작은 나무를 뽑아보라고 했다. 제자는 그 역시 쉽게 뽑힌다고 하였다. 스승은 또 다 자란, 키 큰 나무를 뽑아보라고 하니 제자는 힘을 다했으나 뽑을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스승은 “그것이 바로 습관의 모습이다. 습관이란 처음에는 마음에 따라 조절할수 있다. 그러나 뿌리를 깊이 내리고 크게 자라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쁜 습관은 아예 처음부터 뿌리를 뽑고 좋은 습관은 큰 나무로 자랄수 있도록 키워라”고 습관을 설명했다.  영국의 벤담(철학가, 경제학자)은 “습관이란 내리는 눈과 같아서 처음에는 소리 없이 하나씩 떨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북히 쌓인다. 습관도 처음에는 순간적인 하나의 행동에 불과하지만 반복적으로 쌓이면 거기에서 도망갈수 없게 된다. 그리고 바람이 불고 눈사태가 일어나 산기슭의 집이나 주민을 위협하듯 나쁜 습관이 모이면 그 하나하나가 그 사람의 성실성이나 인격을 파괴해버린다”고 했다. 습관은 분명히 후천적인것이지만 그것이 계속되면 천성이 되고만다. 그래서 “세살때 버릇이 여든살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습관이란 쇠사슬은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가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끊을수 없을 정도로 굳고 단단하다.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습관이 있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길림신문》2011.7.8.      
443    비우는 지혜 댓글:  조회:1450  추천:0  2023-05-09
“담을 줄 알기에 비울 줄 압니다. 비울 줄 알기에 담을 줄도 압니다. 비우는 지혜를 익혔으니 내 생명 담고 담으리다.” 이는 “바가지” 졸시의 전문이다. 인간이 놓을 줄 알고 비울 줄 아는것은 도덕적인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지혜이다. 놓거나 비우면 더 새롭고 좋은것을 담을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놓지 못하고 제 무게에 눌리워 휘청거리며 힘겹게 사는것이 흔한 현실이다. “원숭이 교훈”을 보기로 하자. 알제리의 카베르지역농부들은 원숭이 잡이의 “낚시”로 곡식을 넣은 조롱박을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 조롱박에는 원숭이의 손이 간신히 드나들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밤이 되면 원숭이들이 나무에 올라가 조롱박안에 손을 넣고 곡식을 잔뜩 움켜쥐고는 그 손을 빼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그 손은 힘을 쓸수록 아프기만 하고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움켜진 곡식을 버리고 손을 빼면 될것인데 원숭이에게는 그만한 지혜가 없다. 단 곡식을 가지려는 단순한 욕심이 운명을 빼앗기는것을 모르니 말이다. 이렇게 농부들은 “조롱박낚시”에 걸린 원숭이를 쉽게 생포한다. 비우고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연길시새싹유치원 김송화교원은 “비워야 채워지는 삶”이라는 한문의 시를 읽고 “내 안의 가득 찬 욕심을 버리니 세상이 넓어 보이고 내가 쥔게 없으니 지킬 걱정도 없어 행복합니다.”는 시구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욕심을 버리고 여유 있는 삶”이란 심득을 잡지에 발표, “욕심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지난날에 나는 남보다 더 좋은 직업을, 남보다 더 멋진 집에서, 남보다 더 좋은 옷을... 무엇이나 다 남보다 더 훌륭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웨쳤지만 인생은 듯대로 소원대로 이루어 지는것이 아니였다. 가식과 허영을 버리고 자신의 실제 모습 그대로 현실에 만족하면서 열심히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행복이 다가온다.”고 감명 깊게 말하였다. 무엇이든 “넘쳐남이 부족함만 못하다.” 하나를 가지면 열을 갖고 싶은것이 인간의 욕심이다. 마음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면 화를 불러오는것이 하늘의 리치다. 물이 흐르지 못하고 제자리에 고여 있으면 썩는것처럼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차있으면 새것을 받아 드릴수 없고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들 서로가 바가지의 비우는 지혜를 배워 물처럼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지 아니하며 오욕칠정을 경계함이 어떨까. 오기활                          《길림신문》2009.12.8.    
442    “국가돈은 썩은 돈이냐” 댓글:  조회:668  추천:0  2023-04-21
일전에 왕청현 배초구진 봉림촌에서 목격한 일이다. 170여세대에 근 500명이 살고있는 봉림촌은 배초구벌 “논농사 셋째”란다. 그런데 큰길과 강을 사이두고 마땅한 다리가 없어 정상적인 생활과 생산에 애로가 많았다. 해마다 량식을 손잡이뜨락또르에 싣고 강을 건넌 다음 다시 큰 차에 실어 운송하다보니 량식생산비용이 남들보다 한근에 3,4전이 더 든단다. 실은 봉림촌에 멋이 좋은 다리가 있다. 문제는 2008년에 200만원을 투자했다는 새 다리가 제구실을 못하는 “허망다리”로 백성들이 관원들을 욕하는 “욕다리”로 되고있다. 하여 지난 8월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덕수일행이 봉림촌을 시찰하고 봉림촌에 새 다리를 놓기로 하였다. 200만원이란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지만 이 돈이 “국가돈”이라는데서 백성들이 “국가돈은 썩은 돈이냐?”며 가슴이 아파할뿐 다리건축“유공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고 씁쓸하단다. 국가돈도 국민들의 납세돈이다. 그런데 국가돈을 공짜돈으로 랑비하고 탕진하는 관원들이 많다. 항간에는 “시장이 바뀌면 가로수가 바뀌고 국장이 바뀌면 승용차가 바뀐다”는 설이 있다. 김학철선생은 파고 묻고 다시 파헤치는 도시 도로공사비 랑비현상을 보다못해 “길옆에 쪼르래기를 달라”고 충언하였다. “랑비는 최대의 범죄다.”(모택동) 지난 세기 90년대 국가돈을 “쟁취”해 지었다고 자랑하던 도문 “천지호텔”이 지금 문틀마저 없이 페허로 된 꼴불견을 두고 시민들은 너무나 한심하다며 혀를 차고있다. 전국기관사무사업협회 부회장 왕원신에 따르면 “전국 지방정부에서 공무용차를 구매하는 수량이 매년 20%이상 증가된다.”, “백성들은 공무용차를 타고 다니는 관원들을 ‘엉덩이 밑에 집 한채를 깔고 다닌다’고 한다”며 공무용차개혁의 절박성을 강조했다.    지난 3월 5일 온가보총리는 전국인대정부보고에서 “공무용차의 배비와 관리를 규범화하며 공무용차사용개혁을 적극 다그쳐야 한다”며 “재정예산공개를 다그쳐 인민들로 하여금 정부에서 얼마만한 자금을 쓰고 얼마만한 일을 했는지를 알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승용차개혁도 “12.5”계획에 들었음을 말한다. 국제학술회의에 다녀왔던 중국학자의 글이다. —카나다국제학술회는 회장에 프랑카드가 없이 회의제목을 투영기로 투영했다. 회의가 끝나면 이름카드를 회수했는데 카드안에 있는 종이를 바꾸어 다음에 계속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200여명이 참석한 일본국제학술회는 자료봉투가 없고 선물도 없었다. 식사는 사람마다 도시락 하나다. 만약 부족하면 옆에 있는 식품가공부에 가서 라면이나 볶음밥을 청해 먹는다. 송별회식은 단 네가지 채뿐이였다. 만약 다른 요구가 있으면 복무원한테 요구되는것을 직접 청할수 있다. 필자는 최대의 범죄에 대한 상응한 추궁이 없는것에 리해가 안간다. 오기활                                          (《길림신문》2011.11.14.)                  
441    옷도 말을 한다 댓글:  조회:1289  추천:0  2023-04-08
옷은 문화의 상징이이다. 옷은 주인의 소질, 성격과 취향을 말해준다. 한 사람의 옷차림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수 있다. 좋은 옷을 입는다는것과 옷을 제대로 차려입는다는것은 다른 의미다. 말하자면 옷은 때와 장소에 따라 례복, 평상복, 로동복, 운동복, 상복을 맞춰 입는다. 옷 차림은 자신을 상품화 하는 중요한 표현이다. 미국 부시대통령은 가장 공식적인 모임때면 갈색정장, 흰셔츠에 붉은색 넥타이를 맞춰 맨다. 사람들로 하여금 대통령의 옷 차림으로 미국의 성조기를 련상게 하기 위해서다. 언젠가 필자는 미국국회 멀빈 다이멀리의원을 취재하였다. 필자가 신문기자라는 소개를 받은 그는 실례를 구하고 다시 침실에 가서 평복을 벗고 넥타이차림을 하고 나와 기자를 접대했다. 한국언론인 대표 홍종인은 모 장례식에 취재를 간 기자가 상복차림을 안 했다고 큰 야단을 쳤다. 저명한 육종가 김윤식교수(연변농학원)님은 평생 “농군”이라 자처하면서 70년대 중산복을 고집, 그러나 출국할 때만은 나라의 위신이 깍인다며 신사답게 양복차림을 했다는 미담이 있다. 얼마전, 모 단위창사 60돐 경축행사 때 남긴 후론이다. 더운면 다 같이 더웠으련만 주석대에 앉은 어른들의 옷차림은 정장, 평복, 캐쥬얼 등 제나름이였다. 그런데 아무리 덥다고 해도 본 사의 “환갑잔치”에 최저한 반팔셔츠에 넥타이를 매야할 사장님이 평복을 입고 나서 발언한데서 “우리 사장님이 너무나도 성의 없다”고 원망, 성에서 온 하객 어른 두 분은 캐쥬얼차림으로 축하연설을 해 “아래사람들을 너무나 기시 한다”는 원성을 남겼다. 옷차림은 단지 자기를 나타내기 위함만이 아닌 대방에 대한 존중이고 배려다. 평생 입어야 할 옷을 때와 장소에 따라 깨끗하고 품위있고 조화롭게 입는다는것은 결코 쉽지는 않다. 그러기에 선인들은 “옷을 잘 입기는 반 바느질인양 어렵다”고 했다. 그러니까 누구나 한번쯤은 옷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옷도 말하니깐 오기활 (《길림신문》2008.11.18.)    
440    가장 위대하고 힘있는 사랑 댓글:  조회:638  추천:0  2023-04-01
일전에 한국KBS 아침마당프로에서 천호식품 김영식회장이 자신의 성공사례로 “가족사랑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고 힘있다.”고 한 말에 주목된다. 한국의 성공전도사로 대한민국 전 국민을 부자로 만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부자만들기운동”에 한창인 김회장은 1994년 부산에서 현금보유량이 가장 많은 100등안에 들었다. 그런데 1997년에 IMF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기업들이 파산되여 3년만에는 또 부산에서 빚이 많기로100등안에 들었다. 온갖 노력으로 10년만에 다시 년매출 500억원 대회사로 재생시킨 김회장을 지켜준 사람들은 가족이였다. 1998년 설날에 아버지는 “오뚜기”선물로 넘어질줄 모르는 오뚜기정신으로 아들의 재생을 확신했고 안해는 “당신은 할수 있다. 분명히 해낼것이다. 해야 한다.”며 남편에게 늘 화이팅만을 불러줬다. “어려울 때는 피로회복제보다 가슴에서 울어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서로에게 힘이 된다. 어려울수록 가족끼리 화이팅해야 한다. 그리고 똘똘 뭉쳐야 한다. 가족사랑의 힘으로 무슨 일이든 할수 있다.” “이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힘있는것이 가족사랑이다.” 이는 그가 역경에서 성공을 이뤄내고 절감한 느낌이다. 김회장은 회사도 대가족이란다. 직원이 잘 돼야 회사가 잘 된다는 그는 천호식품을 세계제일의 회사로 세계 최고의 복지회사로 만드는것이 목표란다. “성공한 기업인이 되려면 한국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 복지가 누구나 다 입사하고픈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는 회사의 녀직원들이 근무를 마치면 전문마사지사에게서 마사지를 받고 마일리지제도와 성과급제도로 년말이면 1명에게 1,000만원, 2명에게 5백만원, 24명에게 100만원씩 성과급을 지급한다. “회사를 즐겁게 만들고 직원들에게 잘 해주면 그만큼 돌아온다.”는것이 그의 다른 하나의 경영노하우다. 가정은 집이 아니다. 집이 있어도 가정이 없는 사람이 있고 집이 없어도 가정이 있는 사람이 있다. 가정은 생활의 터전이요, 행복의 보금자리다. 가정이 없는 사람은 생활의 뿌리가 없는 사람이다. 뿌리가 없는 식물은 의지할데가 없다. 그래서 늘 방황하기 쉽다. 행복한 가정의 조건은 든든한 기초다. 모래우엔 화려한 집을 지어도 소용이 없다. 든든한 반석우에 세운 집은 태풍에 담과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기초까지는 뽑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 기초에 다시 집을 지을수 있다. 가정경영의 기초는 믿음이다. 자녀가 부모를 믿고 부모가 자녀를 믿어야 한다. 가족끼리, 형제와 자매끼리 서로 믿어야 한다. 가족만큼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없다. 가족들이 서로 속이고 감춘다면 그 가정은 오래갈수 없다. 믿음의 조건은 사랑이다. 상처와 아픔은 가정에서 싸매진다. 가정이란 사랑의 기업이다. 사랑의 기업인 가정이 생산하는것은 행복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세상에 수출한다. 일류 안해가 일류 남편을 만들고 일류 남편이 일류 가정을 만들며 일류 가정이 일류 국가를 만든다.    오기활                                                                                                      (《길림신문》20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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