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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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60 ]

140    우리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것 댓글:  조회:5761  추천:2  2012-09-19
인간은 가치론적인 존재. 그 어떤 사물이나 현상은 인간의 가치판단에 따라 중요하고 안 하고 혹은 얼마나 중요하고가 결정된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분명한것은 물질적인것보다 정신적인것, 사사로운것보다 거창한것이 더 중요함은 말할것도 없다. 어제는 “9.10 교사절”, 나는 사랑스러운 학생들로부터 축하의 메시지도 받고 선물도 받았다. 정말 훈장 노릇하는 자부감을 만끽했다. 그러면서 나는 환상의 나락에 빠졌다. 이제 밤이 되면 축하의 례포가 빵빵 울려 퍼지고 축하의 불꽃이 흩날릴것이라고. 그런데 밤이 되여 초저녁, 자정이 지나도 깜깜 무소식이다. 원래 오늘 밤은 여느 때와 같이 잠잠한것이였다. 례포는커녕 피리소리 하나 없다. 다음 순간, 나는 머리가 갸웃해졌다. 교사절 며칠전, 왜 례포가 하늘을 밝히며 올라가며 빵빵하고 요란스러웠지? 아, 원래 다름 아니라 그날이 재물신의 생일이였다네. 그럼 그렇겠지! 재물신이 누구냐? 귀신까지도 마음대로 부려먹는다는 재물신이 아니더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돈, 돈, 돈… “돈을 많이 버세요!”, “부자가 되세요!”이다. 그리고 곳곳에서 재물신을 모신다. 의리의 사나이 관우가 아이니켈하게도 어느새 재물신의 화신이 되여 사람들의 향불을 받는다. 어디 사람뿐이랴! 그 우둘투둘 징그러운 두꺼비도 돈을 물어온다니 어느새 재물신으로 둔갑하여 모심을 받는다. 나는 식당에 들어가 그  노란빛의 두꺼비를 볼 때마다 역겨워서 먹었던 음식물을 게워내고만다. 사실 재물신에 대한 숭배는 어제 오늘날의 얘기가 아니고 동서고금 예로부터 있은줄로 안다. 고금중외 문학사에 나오는 수전노들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오늘날 향전간(向前看)에 차노(车奴), 방도(房奴)도 이것을 잘 말해준다. 교사, 인민교사가 아무리 신성하고 어떻다하더라도 이 유구한 전통이 있고 고금중외로 확산되여 있는 재물신의 위력에는 비길 바가 못된다. 문화대혁명시기 우리는 “구린내 나는 아홉째”가 아니였던가.  우리 모두 교사절의 중요성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나는 매년 “8.15”가 되도 감회가 새롭다.“8.15”는 우리 중국의 항일전쟁승리의 날. 력사의 한획을 그은 뜻 깊은 날. 얼마나 많은 항일의 건아들이 이 날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가?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우만 놓고 볼 때 전반 항일열사 90% 이상이 우리 조선족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리야 한다. 천백번, 이 세상이 다 가도록 기리야 한다. 력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우리가 피 흘려 따낸 결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결실은 영원히 우리 삶의 감로수가 되거늘! 그런데,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너무도 “8.15”의 이런 뜻을 잊고있다. 우리는 “8.15”로인절에 겸해 항전승리의 날을 기려야 할것이다.  우리는 이런 항전의 승리가 오늘날 로인절도 있게 된줄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런 승리는  로인절의 뿌리로 볼수도 있다. 우물을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라고 우리는 항전의 의 영령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는 “8.15”항전승리를 축하해야 하고 로인절도 축하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올바른 가치관 정립이 필요하다.
139    소외콤플렉스 댓글:  조회:12826  추천:3  2012-09-05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동물이다. 혼자서는 못 산다. 항상 그 어떤 귀속감을 추구한다. 그래서 제3차 현대심리학 사조를 몰고온 마셀로는 귀속감에 대한 추구를 인간의 기본 욕구의 하나로 보았다. 이런 귀속감에 대한 추구를 바꾸어 이야기하면 바로 소외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외콤플렉스로 나타난다.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어머니품을 파고드는것은 바로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을가봐서이다. “어머니가 있는 아이는 보배덩어리(有妈的孩子象块宝)”라고 하지 않던가. 버림은 바로 소외콤플렉스를 유발한다. 고아, 어버이를 잃은 고아는 불쌍하다. 그는 항상 어버이가 없는, 어버이 있는 아이가 부러운 소외콤플렉스에 싸여있다. 우리는 그 누구 하나를 머저리 만들기 대단히 쉽다. 왕따시키면 된다. 한국과 일본의 중고등생들 사이에 문제가 되고있는 왕따현상이나 이지메현상이 바로 그런것이다. 이 왕따나 이지메 현상은 바로 소외현상에 다름 아니다.  죄인들이 감옥살이를 함에 가장 고통스러운것도 바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소외콤플렉스에 있다. 감옥에서 죄질이 심한자들은 독감방에 가둔다. 죄인들은 감옥이라는 부자유스러운 소외속에서 부러운 눈길로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사회에 귀속되기를 바란다.  사실 인간은 이래저래 외목에 나고 처절하게 혼자 남은 소외콤플렉스만 쌓일 때 정말 미쳐버리고만다. 그런데 인간세상은 유유상종이라 자연스럽게 소외의 골이 패인다. 우리 사회를 좀 보자.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이 계층 사이에 소외콤플렉스가 형성된다. 례컨대 서민층은 중산층에 대해, 중산층은 상류층에 대해서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상류층은 중산층을 따돌리고 중산층은 서민층을 따돌리면서 우월감을 느끼려 한다. 스포츠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서민층이 탁구를 하면 중산층은 테니스를 하고 중산층이 테니스를 하면 상류층은 골프를 한다. 이로부터 서민층은 중산층을 바라보면서, 중산층은 상류층을 바라보면서 소외콤플렉스를 느끼게 된다.  우리 사회가 잘되자면 이런 소외콤플렉스를 없애야 한다. 일찍 2000여년전 유교의 성인 맹자도 이 세상에 과부홀아비가 없고 외로운 로인이 없는 사회가 덕치의 사회라고 했다. 현단계 우리 사회에서 뭐니뭐니 해도 약소군체들이 소외콤플렉스를 가장 많이 느낀다. 례컨대 개혁개방 초기 좀 혜택을 입는가싶더니 개혁개방이 심입됨에 따라 변두리로 왕따당한 농민들 그리고 도시로 진출한 풀뿌리인생의 농민공들 그리고 도시빈민층은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현재 우리는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면서 농업세 전액면제 및 새농촌건설 추진은 농민들의 소외콤플렉스를 많이 해소해주었다. 그리고 농민공들의 보험 및 자녀들의 입학문제 등을 해결 그리고 도시빈민층에게 최저한의 생활보장비를 제공해줌으로써 이들의 소외콤플렉스도 많이 해소해주었다.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사회건설이라는것은 그 누구든지 외목나거나 왕따되지 않게 하는데 있다. 이로부터 결국 소외콤플렉스에서 자유롭게 하는데 있다. 이런 소외콤플렉스를 해소하는데는 물질적인 혜택도 혜택이겠지만 어디까지나 사랑이다. 그래 나는 한국의 “사랑으로”의 노래가 생각난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그렇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사랑의 손길로 어두운 곳을 밝히자. 그러면 약소군체들은 정녕 사랑받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감을 느끼며 소외콤플렉스—마음의 성에장도 녹아내리리라. 그럼 우리 사는 세상은 더 밝아지리라!
138    9.3 축제를 앞두고 댓글:  조회:14605  추천:14  2012-08-30
에루화 둥둥… 연변조선족자치주 세웠네! 올해는 자치주 창립 60돐!  9.3축제, 우리의 가슴은 진작 흥분으로 들떠있다. 사실 연변은 두만강축제, 진달래축제, 배꽃축제… 벌써 축제로 들끓고있다. 우리는 벌써부터 손님맞이 준비에 바쁘다. 길가의 건축물들은 의포단장을 하고 환한 웃음을 짓고있다. 가로수들은 푸르싱싱 여름의 열기를 몰아내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저장한다. 9.3, 이제 곧 천고마비의 계절이 아니더냐. 여기에 우리는 구라파거리, 한국거리, 현대프라자, 조선족민속촌… 우리는 고금중외를 아우른다. 볼거리, 들을거리, 먹을거리도 지천에 깔려있다. 우리 모두 조화로운 사회의 형제들이 아니냐. 오시라! 연변은 그대를 환영한다. 우리 연변은 이번 60돐 9.3축제를 계기로 정말 때벗이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한다. 형상공정이 은을 내는것이다. 낮의 깔끔하고 화려한 현대도시의 모습은 더 말할것도 없고 밤에도 오색령롱한 불야성으로 빛난다. 연길의 밤은 하늘의 별과 땅우의 네온싸인이 서로 맞웃음 짓는다. 연길의 강은 하늘의 별이 내려왔는가, 땅우의 네온싸인이 어렸는가 신비한 룡궁세계를 펼쳐보이고있다. 우리는 이제 더는 촌놈이 아니다. 하늘에는 국내선, 국제선이, 땅우에는 고속도로가 쭉쭉 뻗었다. 이제 고속전철도 곧 룡트림한다. 우리는 북경과 직통하는 일일생활권속에 살것이다. 여기에 인터넷고속망을 타고 우리는 세계 곳곳에 가닿고있다. 도시미학으로 볼 때 연길은 훌쩍 커있다. 선남선녀 단계를 넘어 바야흐로 성숙된 어른의 모습을 나타내고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겉의 형상미보다는 실속이 더 중요하거늘! 심령미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 연길, 연변은 아직 촌스러운데가 있다. 1전이라도 더 받아먹으려고 아득바득하는 택시기사들 그리고 신호등 무시하고 건널목 건너기 그리고 아직도 흥청망청하는 유흥문화… 우리에게 모자라는것은 시민의식, 문명한 시민의식이라는 말이다. 그럼 시민의식이란? 나는 우리 중국의 북경올림픽때 내건 한 모토 “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아야 한다”를 떠올려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고대 성인들이 얘기한 인류보편의 가치. 이것을 풀이하면 바로 남에 대한 배려심이 되겠다. 항상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한것이다. 사실 우리가 여직 말해온 “대공무사”,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와 같은 마음 보다 높은 경지에로의 승화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차원의 “대공무사”, “전심력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의 경지에는 못 도달할지라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소박한 마음을 갖도록 하자. 전화 한통 하더라도 남에게 소음이 되지 않도록 빵빵 클랙슨도 좀 적게 울리고 술 마셔도 큰길을 쓰느라 비틀거리지 말고. 연길, 연변은 아직 크고있다. 크고있어 흐뭇하다. 연룡도, 선도구,  두만강, 금삼각구! 우리의 마음은 열려있다. 가자, 모든것을 품어주는 저 바다로! 연변호는 세계로 나아간다. 우리의 뜻은 세계에 있거늘! 조선, 로씨야, 일본…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모두 잘사는 세상을 이루자! 60회갑 청춘이라, 우리네 자치주 청춘 만세! 60갑자 돌고 도나니 우리네 자치주 영원하라!
137    인터넷결혼 댓글:  조회:4750  추천:1  2012-07-31
요새 우리 고중생이나 대학생 사이 인터넷결혼이 류행한단다. 인터넷 가상세계에서 실제 결혼흉내를 내며 놀아난다는것이다. 결혼에 대한 몽롱한 신비감을 갖고있는 고중생이나 대학생들에게 있어서 인터넷결혼은 매력을 발산하기에 족하다. 그래서 한번쯤 “금과”를 따먹는것도 리해할만하다. 옛날 우리가 소꿉놀이를 하듯이. 그런데 인터넷결혼에는 분명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다. 인터넷결혼은 결혼과 리혼을 너무 밥 먹듯이 쉽게 한다. 신성한 결혼이나 신중해야 할 리혼을 클릭 한번으로 할수 있으니 결혼과 리혼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고만다. 현실세계에서의 결혼과 리혼에 있어서의 책임이나 의무 같은것은 찾아볼수 없다. 홀가분함 그 자체 그리고 인터넷결혼은 어디까지나 가상세계에서의 결혼인만큼 얼마든지 나의 화려한 집, 나의 멋진 차를 손쉽게 장만할수 있다. 현실세계에서는 한평생 노력해도 못 누릴 물질적부를 순식간에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백만장자가 된듯한 착각에 빠질수 있다. 물론 착각은 자유 그러나 그것이 신기루 같은 착각에 불과할 때 결국 남는것은 허전함과 허망함 그 자체 그리고 인터넷결혼 사이트에는 분명 상술이 깃들어있다. 결혼과 리혼을 마음대로 하고 착각은 자유이되 머니충전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집 한채 날릴만한 돈은 아니되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에게 있어서 만만치 않은 부담인줄로 안다. 인터넷결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에게 잘못된 결혼관을 심어주는데 있다. 사회인이 되기전에 결혼의 “금과”를 따 먹되 그것도 설익은 “금과”인만큼 현실세계에서의 결혼을 오도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인터넷결혼 차원에서 현실의 결혼을 대할수 있기때문이다. 내 멋대로 놀아나는 결혼(我行我素)—천치 아니면 오만의 극치, 랑만적인 핑크색으로만 보는 결혼—보기 좋은 비누방울… 현실에서의 결혼은 장난이 아니라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랑만도 랑만이겠지만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만큼 그것은 무거운것이다. 그런데 인터넷결혼은 이 모든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반대. 인터넷결혼은 가상의 화려한 결혼생활을 할수 있는만큼 쉽게 빠져들게 한다. 컴퓨터중독가운데 인터넷결혼중독이야말로 중증의 중증이 아니겠는가. 이 중증은 전적으로 현실감각을 상실하게 한다. 그래서 세월아, 네월아 내 사랑 인터넷 핑크색 사랑에 빠지다보면 현실적 결혼은 더 말할것도 없고 결국 정상적인 현실생활을 상실하게 된다. 특히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이성애의 순수한 첫 감정을 이런 인터넷결혼에 대상화하고 몰입할 때 결국 그 허무맹랑함에 상처를 입어 신성한 결혼에 원천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결혼, 무조건적인 닥달이나 금지는 금물하지 말라면 더 하는 법—청소년이나 대학생들의 역반심리. 그러니 일단 리성의 칼을 벼려주어야 한다. 인터넷결혼은 우리의 얄팍한 감성이나 감정에 자극하고 호소한다. 그래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헛갈리게 한다. 랭철한 리성으로 그것을 대할 때 그것은 한낱 신기루 같은 유토피아. 바로 신기루의 허상, 유토피아의 도피성을 알도록 하는것이다. 그리고 유도가 필요하다. 인터넷결혼, 하나의 소꿉놀이로 보면 안되겠는가? 컴퓨터세대들의 인터넷세계에서의 소꿉놀이 말이다. 소꿉놀이쯤이야 하나의 연극으로 볼수 있고 그 연극속에서 미래사회에서의 결혼생활을 체험하는 가운데 상상력을 키우고 어른의 “멋”을 피워 앞으로의 사회생활에 도움이 됨은 더 말할것도 없다.그러니 한번쯤 재미로 놀아보면 그만인걸 그리고 법적으로 인터넷결혼을 이런 소꿉놀이 차원으로 룰을 제정하면 좋겠다. 요새 인터넷결혼 사이트들에서 스스로 나름대로의 규정제도를 내온다 하던데 법적인 차원에서 이것을 잘 유도할 필요가 있다. (연변대학 교수)
136    슈퍼맨콤플렉스 댓글:  조회:5384  추천:0  2012-07-31
인간은 약하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만큼 인간은 슈퍼맨콤플렉스를 가지고있다. 강한 인간—초인은 인간의 꿈. 인간의 력사는 어쩌면 알게 모르게 이 슈퍼맨콤플렉스를 발산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유럽은 애초에 슈퍼맨콤플렉스가 강했던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전설만 놓고보더라도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주고 신의 왕 제우스에게 심장을 쪼아 먹히우는 끝없는 고통의 징벌을 받지만 굴복을 모르는 프로메디우스 그리고 끊임없이 굴러내리는 돌을 밀어올려야 하는 서지푸스, 운명의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안깐힘을 쓰는 오디푸스… 14세기—16세기 문예부흥시기 유럽의 인문주의자들은 아예 인간을 우주의 정화, 만물의 영장이라고 웨친다. 이로부터 신의 시녀에서 벗어나기를 선언한다. 문예부흥시기는 실제로 거인들이 많이 나타났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후 영국의 산업혁명과 더불어 과학문명의 창달은 인간의 슈퍼맨콤플렉스를 발산하는 하나의 확실한 경로가 되였다. 이로부터 과학만능사상이 싹트기도 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유럽 현대철학의 개척자 니체르는 아예 “하느님은 죽었다”를 선언한다. 그리고는 서로 잘났다고 하는 세상에서 “초인”철학을 주장한다. 이 “초인”철학은 곧바로 권력의지로 련결된다. “초인”이 장땅이고 권력의지만이 최고라는것이다. 이것이 히틀러에게 잘못 리용되여 게르만 우월주의로 나아갔고 세계를 재패하려는 야망으로 미쳐나게 했다. 제2차세계대전후 랭전구도하에 미국과 구쏘련은 초급대국이 되여 서로 니 잘났니, 내 잘났니 다투었다. 미국은 이민개척의 나라로서 슈퍼맨콤플렉스가 농후하다. 칼 한자루로 식민세력을 놀린 졸라전설이 유전될수 있은것도 이런 슈퍼맨콤플렉스에 기인하는것인줄로 안다. 서부대개발시기 카우보이 모자, 청바지에 달랑 권총 한자루를 차고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린 사나이들도 여기서 례외는 아니다. 헤밍웨이의 싼티야고를 비롯한 일련의 강자형상이 미국에서 그렇게 공명을 불러일으킨것도 이런 슈퍼맨콤플렉스의 기대시야에 들어맞았기때문이다. 미국의 이런 슈퍼맨콤플렉스는 대개 초급(超級)개인영웅주의로 나타난다. 현재도 슈퍼맨은 확대, 재생산된다. “초인(超人)”, “박쥐협객”(蝙蝠俠), “거미협객”(蜘蛛俠) 등 미국의 영상매체에는 일련의 초급개인영웅주의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문제해결의 키를 쥐고 신출귀몰하며 대개 단독으로 행동한다. “미국대장(美國隊長)”을 보면 신비한 호르몬을 주입받은 미국대장이 히틀러를 일거에 제거하는 쾌거를 보이고있다. 슈퍼맨콤플렉스는 우리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신선도사나 협객 이미지로 나타난줄로 안다. 일반무술은 더 말할것도 없고 일종 신비한 도술, 환술까지 구사하는 미국의 현대과학기술 및 미래 예측적인 과학환상소설속의 이미지와는 다른 이미지. 향항 김용의 무협소설이 우리 중국사람들속에서 그렇게 인기를 누린것도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것이다. 사실 중국에서 슈퍼맨콤플렉스가 신선도사나 협객 이미지로 나타나는데도 특색이 있겠지만 소프트적인 권력지상주의로 나타나는데 더 특성이 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유교를 배워서 출세한다는—출세주의를 지향해왔다. 이런 출세주의는 곧 권력지상주의에 다름 아니였다. 너도나도 한자리 하기, 쥐꼬리만한 장자라도 붙어야 콩고물이라도 얻어먹는단다. 이로부터 관리에 대한 숭배 그리고 어떻게 해서나 한자리 하기는 바로 우리의 슈퍼맨콤플렉스의 발산행태가 되겠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자기의식이나 주체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관리 및 권력에 기생하는 기생충이 되고말았다. 학문도 관리 및 권력의 시녀가 된 비극을 면할수 없었다. 현재 우리 대학가만 놓고보더라도 쥐꼬리만한 처장자리 하나 놓고도 교수라는분들이 서로 하겠다고 벌떼처럼 달라붙는다. 가련할시구! 우리의 슈퍼맨콤플렉스는 현대라는 이 시점에서도 “공부하여 출세한다”는 출세주의, 관리숭배 및 권력지상주의의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심각한 비극이 도사리고있는것이다. 슈퍼맨콤플렉스의 발산에 있어서 유럽이나 미국식의 초급개인영웅주의적 추구도 문제가 되겠지만 관리숭배 및 권력지상주의 행태도 문제가 된다. 슈퍼맨콤플렉스가 인간의 하나의 무의식적 콤플렉스라 할 때 이것을 잘 발산시키는것도 삶의 지혜.
135    삶의 질 댓글:  조회:5762  추천:2  2012-07-11
삶의 물량화가 확보되면서 삶의 질문제가 심심찮게 얘기되어온줄로 안다. 량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일으키는 법, 그럼 삶의 질이란 무엇인가? 갓 결혼한 젊은 인도부부와 미국부부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 골인, 그런데 그 양상은 전혀 달랐다. 인도부부는 아껴 먹고 아껴 쓰며 아글타글 돈을 모았다. 집을 사기 위해서이다. 미국부부는 은행대부금을 내여 애초에 마음에 드는 그럴듯한 집을 장만한다. 그런데 재미나는것은 인도부부가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하게 되자 그만 병에 걸려 죽게 되였다는것이다. 미국부부는 좋은 집에서 살면서 죽게 되자 은행대부금도 거의 다 갚았다는것이다. 이는 두 나라 사람의 다른 인생가치관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즉 각기 소유욕과 사용욕에 집착하는 부동한 인생살이, 이로부터 삶의 질문제가 제기된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너무 쉽게 소유욕에 놀아난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긁어모으기가 장땡, 내것이 되여야 직성이 풀리는 법, 바로 이 소유욕에 놀아나 수전노가 되고 고뿔도 남에게 주기 싫어한다(铁公鸡一毛不拔). 우의 인도부부도 바로 소유욕에 놀아나 인생을 즐기기는커녕 좋은 세월을 그만 아글타글하다가 볼일을 다 보고말았던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부부는 사용욕을 충족시키며 인생을 즐겼던것이다. 두말할것 없이 미국부부가 삶의 질이 높은 것이다. 나는 우리 배달민족들이 참 멋있다고 생각된다. 우리에게는 “하루를 살아도 좀 사람같게 살자!”,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수 있다면”의 의식이 강하다. 죽은 정승이 산 강아지보다 못하다(好死不如赖活). 무조건 살아남기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노예적근성이 적다. 우리는 일제식민지가 되자 독립군이 떨쳐 일어났고 의렬단이 활약했으며 의용군, 광복군이 총을 들었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기라성 같은 의사들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 우리 연변만 해도 항일렬사 90%  이상이 조선족이 아니더냐?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와가 되려 하지 않는다(不爲瓦全, 寧爲玉碎). 개, 돼지 같은 노예적인 삶보다는 독립자주의 자유로운 삶—사람 같은 삶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것이다. 삶의 질의 최고경지를 실현하는것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좀 사람 같게 살자!”,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수 있다면”의 삶의 질 의식이 너무 강해 문제가 되는듯도 하다. 한국 IMF때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되여 길가에 나앉게 되자 가족동반자살을 택한다든가 그리고 우리의 무계획적이고 무절제한 흔전만전의 소비풍조, 그리고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의 난립하는 유흥업소는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나는 우리 연변을 참 좋아한다. 일단 깨끗해서 좋다. 나는 지금도 1980년대까지도 심심찮게 볼수 있었던 버섯대가리 같은 초가지붕에 흰 회칠을 한 벽이 인상적인 초가집이 그리워날 때가 있다. 단지 노스텔지아적인 정서때문에 아니다. 물론 그 초가집에는 가난의 때국이 흘렀다. 그런데 그 초가집은 그렇게 아담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집안에 들어서면 선반에 반짝반짝 포개여놓은 꽃양푼들 그리고 기름기 흐르는 가마솥 그리고 사람의 그림자가 어리는 티끌 하나 없는 노란 장판…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포근하고… 정말 사람 사는 집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좀 달리 해보기도 한다. 이른바 삶의 질이란 굳이 물질적인 풍요속에서 웰빙이요, 다이어트요 하는데서만 생겨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사실 우리는 현재 물질적으로 살만하게 된줄로 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쩐지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물질적으로 어려웠던 못 살던 옛날을 생각하게 되고 그리워하게 된다. 왜? 그때 우리는 마음이 편했기때문이다. 누구나 다 고만고만 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현재는 욕망이 팽창할대로 팽창해 내가 잘 났나, 니가 잘 났나 서로 비기기, 이른바 경쟁의식에 멍들어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인간소외의 현대병이 곳곳에 만연하고있다. 물질과 정신의 괴리에서 삶의 질은 떨어졌다고 볼수 있다. 현대는 멋진 아빠트들이 쭉쭉 일어서고 승용차들이 쌩쌩 달린다. 그런데 그 아빠트에서는 맞은켠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그 승용차들이 인도를 마구잡이로 달릴 때 그것은 빛좋은 개살구의 이른바 현대의 물질문명에 다름 아니다. 정신문명이 서지 않은 현대의 삶은 삶의 질을 운운할 여지가 없다. 인간의 삶의 질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같이 갈 때만이 정녕 확보될줄로 안다.
134    연변 댓글:  조회:5736  추천:0  2012-06-29
우리 연변사람들은 연변밖의 쪽을 “안쪽”이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 스스로 “바깥쪽”이라는 말이 되겠다. 이렇게 놓고볼 때 우리에게는 변두리의식 내지는 소외의식이 앙금처럼 서려있음을 알수 있다. 이에 나는 우리 “연변”의 한자어새김을 음미해보며 이런 앙금을 녹여본다. 연변(延边)—변두리를 넓힌다, 어쩌면 우리는 확장주의. 사실 우리의 꿈은 저 푸른 하늘로 나래치거늘. 우리는 언녕부터 연변이 좁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개방의 봄바람과 더불어 잘도 나갔다. 김치—짠지장사, 연길냉면—불고기→관내진출, 조선족도 잘 모르는 관내에서 우리는 연길랭면브랜드를 심어놓았고 우리 맛을 전파했다. 그리고 우리 연변 “코신아줌마”들, 중국어도 잘 안 통하는 중국 대륙끝 도시인 광주까지 허휘허휘 달려가서 천이요, 전자시계 같은 물품을 구입해와서는 동북에서 제일 큰 연길서시장을 형성하지 않았던가. 농경문화에서 상업문화에로의 화려한 변신! 사실 우리는 중국이 좁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으로, 로씨야로 뻔질나게 다니지 않았던가. 조선명태는 연변의 맥주안주브랜드! 그러다가 세계랭전구도가 깨여지면서 우리는 한국으로, 일본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세계 곳곳으로 뻗어갔다. 이로부터 중국 심양의 서탑, 북경의 망경(望京), 상해의 룡백(龙伯)… 새로운 코리아타운의 주역을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는 연변거리까지 형성하고. 연변은 택시천지. 손만 들면 언제나 쉽게 택시를 탈수 있다. 개혁개방 교통첨병으로 나타난 택시—우리 “연변아가씨”들 손에서 먼저 쌩쌩 달렸다. “규방”이나 “안방”에 앉아있어야 할 우리 “연변아가씨”들의 당찬 택시기사모습들이 한동안 얼마나 인상적이였던가. 음유지미(阴柔之美)와 양강지미(阳刚之美)의 하모니. 연변은 노래방천지, 연변노래, 조선노래, 한국노래, 일본노래, 영어노래… 줄기차게 울려퍼진다. 국제적인 노래하모니, 여기서 피여난다. 연변은 술 한잔 들어가면 춤노래가 절로 나온다. 음유지미(阴柔之美)가 넘친다. 연변은 축구의 고향. 조선족으로 구성된 길림성축구팀, “연변오동팀”, 언젠가 전국을 석권하지 않았던가. 양강지미(阳刚之美)가 넘친다. 음유지미(阴柔之美)와 양강지미(阳刚之美)의 하모니. 연변은 지정학적으로 우리 중국과 조선반도, 로씨야 3국 접경의 바다를 낀 금삼각구에 위치해있다. 개혁개방 글로벌화시대에 그 어느곳보다도 돋보이는 존재. 연변은 조선사람, 한국사람, 로씨야사람, 일본사람…이 모여든다. 그리고 우리는 조선으로, 한국으로, 로씨야로, 일본…으로 나간다. 외국의 패션이 실시간대로 류행하는 곳이다. 여기에 정치든 무엇이든 우리는 시대와 함께 발전한다. 그래서 우리는 문맹도 가장 일찍 퇴치했고 교육보급률도 가장 높았으며 대학생비률도 가장 높았다, 연길역, 연길공항은 항상 만원, 바쁘다, 바빠! 연변은 글로벌, 적어도 동북아 물동량 및 금융 그리고 관광의 중심으로 부상하고있다. 현재 추진중인 연룡도, 선도구 내지 훈춘특구건설 등은 여기에 박차를 가할것이다. 연변은 말 그대로 다이내믹—력동적이 될수밖에 없다.  연변은 술문화가 발달했다. 전국 각 곳의 술이 연변에서 란무한다. 아직도 새벽에 “뚜—푸”할 때까지 마시는 족속들이 있다. 손님이 오면 권커니작커니는 기본. 여기에 2차, 3차… 전근대적인 시대락후자—“촌놈”들이 사는 곳 같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들이 잃어버린 정이 있다. 일종 “정 하나로 맺어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정이 있다. 그래서 연변을 떠나간이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지 않던가. 술문화는 일종 하나로 되는 디오니소스적인 감성의 세계. 쪼개고 나누는 아폴로적인 리성의 세계와는 정반대. 인간은 리성적인 존재. 우리는 이 점을 너무 많이 강조해온듯하다. 그래 오히려 많은 현대병이 생긴줄로 안다. 이로부터 결과적으로 인간은 리성만으로 못 산다는 결론이 자연적으로 도출되였다. 요새 IQ보다 EQ가 더 강조되는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현대화와 더불어 많이 잃어버린 우리 인간의 디오니소스적인 정과 감성, 바로 우리 연변사람에게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물론 그것은 과잉로출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이 디오니소스적인 정과 감성이 아폴로적인 리성과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인간은 전인(全人)이 되고 미래세계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우리 연변사람에게는 그 원동력의 기본바탕이 마련되여있다.  
133    뢰봉, 봉사형의 전형 댓글:  조회:6613  추천:1  2012-03-14
3월이면 우리는 지난 40여년간 줄곧 “뢰봉을 따라배우는 월간”활동을 전개하여왔다.  한것은 1963년 3월 5일 뢰봉이 타계하자 당시 모택동주석이 “뢰봉을 따라배우자”라는 제사를 쓰고 뢰봉을 따라배울것을 호소한것이다. 이로부터 전국적으로 뢰봉을 따라배우는 붐이 일어났다. 1970년대 초반 내가 소학교에 입학해서 제일 처음 배운 노래도 아마 “따라배우자 뢰봉”이다. 그리고 새 천년에 들어선 2000년에 단중앙에서는 3월 5일을 “중국청년 자원봉사날”로 정하였다. 보다싶이 3월 5일은 자원봉사와 련결이 된다. 뢰봉정신의 주요한 내용의 하나가 바로 자원봉사정신인줄로 안다.  뢰봉은 사회주의 새 중국이 키워낸 성심성의로 인민을 위해 봉사한 전형이다. 뢰봉은 사회주의가 얼마나 고상한 사람을 만들어낼수 있는가를 보여준 한 케이스가 되겠다. 뢰봉은 부자가 아니다. 매달 근근이 몇원의 생활비를 받는 군인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는 아껴 먹고 아껴 쓰며 일전, 이전 아글타글 모아 어려운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뢰봉은 신구사회의 대조속에서 사회주의사회의 우월성을 페부로 느꼈고 광범한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고 또한 인민대중을 위한다는 사회주의의 취지에 더없이 공감했다. 그래서 그의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데는 티끌만한 사심도 없고 생색도 없다. 그것은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것이였고 전력투입이였다.  현대 제3차 심리학사조를 몰고온 미국 마슬로의 인간 수요층차설에 의하면 인간의 수요는 저급수요로부터 고급수요로 나아가는데 가장 높은 경지의 수요가 바로 자기실현의 수요라고 한다. 이를테면 의, 식, 주 및 안전, 귀속, 존중 등의 수요가 만족되면 자기실현의 수요가 생겨난다는것이다. 그럼 자기실현의 수요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원봉사정신의 실현이 아니겠는가.  먼저 남을 생각하고 무조건 베풀고 남을 돕는데서 인생의 최대희열을 느낀다는것이다. 이 최대희열이 바로 고봉체험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저급수요를 쉽게 만족 받는 선진국에 이런 자기실현 및 고봉체험을 추구하면서 인생의 최대희열을 맛보는 사람들이 많다는것이다. 선진국에 자원봉사자가 많은것은 바로 이때문이라는것이다. 현재 우리 중국도 상당히 살만하게 되였다. 그래서 자원봉사자가 용솟음쳐나오는줄로 안다.  몇년전 문천대지진이 일어나자 누구의 호소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달려가고 기부를 하지 않았던가. 우리 중국도 자원봉사자, 기부문화의 형성에서 기꺼운 국면이 나타나고있음을 알수 있다. 마슬로의 인간 수요층차설은 일리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너무 배가 부르고난후 례의도덕을 알게 된다는 도리로만 흘러 문제점을 로정하고있는것도 사실이다. 사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것이 아니다. 인간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마음이 부자일수가 있다. 동물은 남아도는 먹을거리가 모자라지만 인간은 모자라는 먹을거리가 남는 법. 뢰봉은 바로 이런 마음의 부자인 사람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한평생 떡볶이나 오뎅 장사로 일푼이푼 모아 림종에 평생 모은 돈을 교육사업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쾌척하는 여느 할머니도 이런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다. 이런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은 물질적부의 여하를 떠나 항상 무조건 남을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가짐이 갖추어져있다. 물론 뢰봉이나 이런 할머니 같은 마음이 부자인분들의 자원봉사나 기부는 그 어떤 사적인 동기나 그 어떤 생색을 내는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대재벌이 생색을 내면서 몇천, 몇억을 낸것보다 이들의 순수한 마음에서 기부한 얼마 되지 않는 돈일지라도 훨씬 돋보인다.  나는 인간을 천사와 악마의 이중성으로 본다. 뢰봉이나 이런 할머니들이야말로 인간의 아름다운 천사들이다. 물론 인간의 이런 천사적 모습은 타고난 면도 있겠지만 후천적인 교육이나 훈련으로도 키울수 있다. 그래서 현재 많은 국내외 대학교들에서 자원봉사 학점을 수료해야만 졸업할 수 있도록 되여있다. 우리 중국 남방의 일부 대학교에서는 자원봉사 학점은행을 운행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학생자원봉사자란 말이 이미 낯설지 않은 친절한 말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여있다. 오늘 물욕이 넘쳐나고 물질적으로 풍부한 반면 마음이 가난한자들이 많은 이 시점, 뢰봉정신을 한번 더 되새겨보자. 뢰봉정신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영원히 되새기고 행동에 옮겨야 할 정신적좌표이기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좌표야말로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기본바탕이 되기때문이다. 
132    “먹는다”는데 대한 소론 댓글:  조회:5544  추천:1  2012-02-22
새해 들어 양력설부터 먹고 마시며 놀기 시작한것이 음력설, 보름이 지났다. 하지만 3.8녀성의 날을 계기로 “3.8절맞이, 3.8절경축, 3.8절 보내기”라고 하면서 3월달도 다 지나야 시름을 놓는다. 지난날에는 우리들이 워낙 어렵게 살았었다. 한끼 해결이 막막할 때가 많았었다. 물론 아직도 절대빈곤에 처해있는 곳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 자연스럽게 형성되는것은 “먹음”대한 집착—못 먹은 콤플렉스! 원래 재래로 “인간은 먹는것을 기본”으로 하였으니. 의, 식, 주 가운데 먹는것이 으뜸, 먹는것이 장땅이다. 어지간하면 “먹다 죽는것은 한이 없다”는 격언까지 등장하였겠는가.   먹는데 유난히 신경 쓰기. 인간도 동물인만큼 이 세상에 왕림하자마자 젖부터 먹어야 산다. 그래선지 커서도 이 세상에 먹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온것처럼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는 인간들이 적지 않다. 요새는 그래도 살만하게 되였다. 해서 어디 더 맛 좋은데 없는가 해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새로 나온 식당은 한번쯤 다 가보기. 끊임없이 새로운 먹을거리를 탐색. 새로운 먹을거리, 새로운 술... 그러니 무슨 단골손님하고는 인연이 멀다. 단골손님이 없는 연길 식당, 오래 가기 힘들다. 보기에 안스럽다.   못 먹는것이 없다. 하늘에 날아가는 비행기와 땅우의 책상다리 내놓고 모든 날아다니는것과 모든 네다리 가진것을 다 먹는다는 광동사람들. 광동사람들 웃을 일이 아니다. 참새, 비둘기, 개, 뱀... 먹는데 이골난 우리다. 광동사람과 우리 100보에 50보라 피장파장. 여하튼 중국사람들 먹는데 2등이라면 서럽다.  공짜 먹기. 이 세상 공짜 먹기만큼 맛좋은 음식은 없다. 누가 “손님접대”한다는 소리에 두귀가 벌쭉 열리고 군침이 스르르 돈다. “손님접대”는 항상 반가운것. 이 공짜 먹기가운데도 그래도 공금 먹기가 가장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은걸. 누이 좋고 매부 좋기 아닌가. 여하튼 공짜 먹기는 흥분의 극치. 냠냠∼, 공짜는 양재물도 마신단다.   많이 먹기. 배 터지도록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먹을 때는 혁띠 풀어놓고 먹기. 여기에 짝짝꿍으로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음식이 남아야 그럴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부페에 가서라도 “먹고 먹으면 못 먹을리 없거늘 사람들 제 아니 먹고 먹기만 싫다 하더라!”를 뒤집고 배 터지도록 먹기. 그리고 집에 와 또 소화제 먹기. 똥배가 밉지만은 않은 우리다.  똥배도 무슨 인격이라나.  똥배를 내밀고 끄르렁~끄르렁~룡트름하며 이 틈,  저 틈 이발을 쑤셔대야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래서 못 먹은 콤플렉스를 순 기능으로 승화하기도 한다.  “식약동원(食藥同源)”이라고 먹는것이 약 맞잡이란다. “병종구입(病從口入)” 다시 말하면 병은 입으로부터 침입한다, 그러니 먹을거리를 조심하란다. 그리고 “적게 먹고 소식하고 깨끗한걸 먹으라”라고 한다. 듣던중 반가운 소리. 먹기를 “도(道)”로까지 승화시키기도 한다. 먹기, “미기명왈식도(美其名曰食道)”가 아니더냐. 그래서 무슨 미식이요, 미식거리요에 미식가요, 식도락가요 하는 말이 생겨난줄로 안다. 그래 대식가보다는 미식가, 식도락가 소리가 듣기 좋지. 중국은 먹거리천국. 동서남북 8대 료리, 먹어내기에 바쁘다. 그래 먹어 조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년간 얼마, 얼마 먹어치운다는 우리가 아닌가. 우리는 먹는 맘모스. 그럴진대 아무리“식약동원”이요, “식도(食道)”라 하더라도 한번쯤 되돌아보는것이 필요하다.  먹는 문제 간단치가 않다. 물론 이젠“인간은 먹는것을 기본”으로 하는  저차원의 빈곤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답게 사는 고차원의 문제다. 그래서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 인간실존의 철학적명제가 제기된다. 동물은 분명 먹기 위해 산다. 먹는것이 동물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은 살기 위해 먹는것이 정식. 먹고선 일을 하고 가치창출을 한다. 그러니 좀 살기 위해 먹는 인간이 되자! 우리 좀 신사가 되여보자. 보다 높은 정신적차원의 경지를 추구하는 신사! 우리는 현재 배고파서 아무거나 집어먹는 그런 초라한 단계가 아니다. 그러니 보기에 좀 거북스러운 못 먹은 콤플렉스도 한방에 날릴수 있는 단계에 와있는줄로 안다.  
131    영생콤플렉스 댓글:  조회:5712  추천:0  2012-02-08
영생욕구와 아침이슬 같은 우리의 실존의 모순, “100세도 못사는 인생에 1000년을 우려한다‘人生不满百,常怀千年忧’”고, 중국 고대문학사의 고시 19수 첫 수의 시구, “인생은 아침이슬과 같다‘人生譬如朝露’”고 한다, 조조의 유명한 시구—백년도 못사는 인생, 아침 이슬 같은 인생… 결국 죽는다는 실존은 우리를 인생허무에 빠뜨리기에 족하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그래도 항상 영생, 영생에 가있다—인간의 비원. 그래서 생겨나는것이 영생콤플렉스. 우리는 평시에 죽음을 떠 올리기조차 싫고 주검을 보기조차 싫다. 죽음이나 주검을 떠올리거나 보게 되는 병원이나 화장터 가기도 꺼림직하다. 이것들은 우리의 영생콤플렉스만 자극하기때문이다. 우리는 제 명을 제대로 못살고 죽은 요절을 가장 불쌍히 여긴다. 그런데 인간은 리성적인 존재—똑똑하다. 그래서 안다—사실 영생하기 힘들다는것을. 그래서 차선책으로 불로장생을 추구한다. 불로초, 웅담—보신약 열심히 집어먹기다. 진시황이 서복더러 3000 선남선녀를 데리고 동해 삼선산에 가 불로초를 구해오게 한 이야기 아직 삼삼하다. 십장생이 부럽다. 우리는 십장생에 주술을 걸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한… 만세!’, ‘위대한… 영원하라!’”라고 주술을 외운다, 건다. 우리는 현실생명의 연장선상에서 실제로 미이라를 만들기도 한다. 고대 애급 왕들의 미이라, 현대 위대한분들의 미이라… 그런데 현실은 “십중팔구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十有八九不如意’”, 영생은 그림의 떡—쌓여가는것이 영생콤플렉스. 이로부터 종교의 존재리유가 생겨난다. 종교는 우리의 영생콤플렉스를 발산시켜준다. 우리의 삶은 현세로 끝나는것이 아니다. 이승과 저승, 영원한 불교의 극락과 기독교의 천당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던가. 그런데 저승—극락이요, 천당이요 하는 것들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도교에서는 아예 현세적인 영생을 만들어낸다. 신선이 바로 영생적인 존재. 신선은 현세에서 수양과 수련을 하거나령단묘약을 고아먹으면 된단다. 그래서 더 매달리고싶은것이 신선.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잘 살려는것도 영생콤플렉스를 달래는데 있다. 그래 영양가 있는 음식, 웰빙식단, 건강식품에 항상 신경이 쓰이지 않던가. 한국 KBS TV방송국의 “생로병사의 비밀”프로는 영원히 인기만점. 우리가 열심히 등산을 하고 헬스클럽에 다니며 건강을 챙기는것도 사실 영생콤플렉스를 기저에 깔고있다.  그럼 어떻게 이 영생콤플렉스를 발산하지? 우리의 선인들은 “공을 세워 나라와 가정의 태평을 도모한다‘立功—修 身齐家治国平天下’”적인 “풍공립업‘丰功伟业’”, “덕을 쌓고 의리를 취한다‘立德—舍生取义’”적인 “뭇사람들의 본보기가 되는 ‘为人师表,立言—著作等身’”적인 저서로 영생콤플렉스를 날린다. 바꾸어 말하면 “립공, 립덕, 립언 ‘立功, 立德, 立言’”적인 대상화로 영생을 추구한다. 미술, 조각, 사진… 등 문학예술도 결국 따져보면 내 삶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영생콤플렉스를 발산하는것에 다름 아니다.  몸과 육체는 가도 정신과 령혼은 영원히 남는 그런 경지를 창출해야 한다. 결국 정신적인 영생, 이른바 “구비‘口碑’” 즉 구구전승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초유록,  뢰봉, 장지신… 같이 되여보는거다! (연변대학 교수)
130    캉가루족 댓글:  조회:6915  추천:4  2011-12-14
현대사회는 직업난의 세상. 직업 하나 얻기가 점점 하늘의 별 따기 맞잡이다. 속되게 말하면 밥통 하나 얻기가 그렇게 어렵게 되였다는 말이 되겠다. 속담으로 말하면 “중은 많은데 죽은 적다(僧多粥少)”는것이라고 할가. 그래서 얼마전 한국에서 생겨난 신조어가 캉가루족. 여기에 중국도 뒤질세라 생겨난 신조어가 “늙은이를 갉아먹는다(啃老族)”는것이 나타났다. 캉가루족도 좋고 삽로족(啃老族)도 좋고 다 제에미, 제애비 등쳐먹는다는 말이 되겠다. 직업을 갖고 독립을 해서 자기절로 살아가거나 부모에게 경제적보탬이 되여야 하나 오히려 그 반대라는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직업은커녕 오히려 부모에게 얹혀살아가는, 지어는 호의호식한다는 말이 되겠다. 자식 덕에 살기는 다 긇은 사회, 한국의 이태백,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말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내가 너네만 할 때 범 때려잡고” 어쩌구, 우리 할아버지대 얘기는 헛된 호기이나마 어느새 다 구중천에 날아가버리고 들을수조차 없다. 한마디로 말하여 20~30대 젊은이들의 취업난, 현대사회의 고민.  현재 지구상 인간의 수는 벌써 70억을 넘었다고 한다. 여기에 무슨 컴퓨터화요, 자동화라인이요 하다보니 사람이 들어설 곳이 적어졌다. 그러니 캉가루족도 좋고 삽로족도 좋고 어쩌면 리해가 간다는 얘기다. 그렇다 하여 이런 사정으로만 눈 감아줄 일이 아니다. 캉가루족이나 이런자들가운데는 호기를 부리는자들이 많다. 나르시시즘적으로 자기 스스로는 대단하게 보는데 실제 그렇지 못하다는것이다. 뭐 일 하나 시켜보면 제대로 해내는것이 없으니 말이다. 결국 자기 스스로를 모르는 맹점에 놀아난다는 말이 되겠다. 그리고 캉가루족이나 삽로족들의 마음가짐도 문제인줄로 안다. 이들가운데는 일획천금 날아가는 큰돈을 잡으려거나 언제 하늘에서 큰 떡이 허망 떨어지겠는가고 기다리는 친구들이 많다. 그리고 이들중 직업의식도 문제가 되는 친구들이 상당히 있는줄로 안다. 어느새 직업의 귀천의식이 팽배해 3D업종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블루업종도 우습게 본다. 오직 화이트업종만이 장땅이란다. 그리고 돈 많이 주는 직업만이 좋은 직업이란다. 나의 개성, 흥취는 무시한채.  이런 세대의 출현에는 우리 기성세대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새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 응아~응아~  밥을 떠먹여주고 옷을 입혀주는 그런 공주, 왕자들 양상, 자연히 공주병, 왕자병 증후군이 만연되기마련. 그래 공주나 왕자들이 직업이 뭐 필요하냐 말이다. 이래저래 캉가루족이나 삽로족들은 직업하고는 인연이 멀어지기마련이다. 현대사회의 캉가루족이나 삽로족들의 직업적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우리 기성세대들이 자기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들을 위해 선뜻이 자리를 내주는 그런 정신 말이다. 늙은 령양들이 젊은 령양을 위해 희생하는 그런 정신 말이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은 스스로 창업정신도 있어야 한다. 뜻이 있으면 성사되는 단계가 아니더냐. 젊음은 아침 8~9시에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다. 젊은이들은 생각이 발랄하고 아이디어가 뛰여나고 힘이 넘치는만큼 창업정신과 가장 쉽게 매치되고 성공할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있다. 세계 성공적인 벤처기업은 거의다 젊음의 패기로 일궈낸것이다. 세계 갑부 퍼소널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시자 빌게이츠는 한 보기가 되겠다. 그리고 정부차원에서도 젊은이들에게 실제적인 정책이나 경제적혜택을 기울여야 한다. 례컨대 현재 문화대국을 건설하는 마당에 구체적인 문화산업정책을 립안하는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젊은이들이 활약할수 있는 문화콘텐츠면에서 적어도 방향성을 확보할수 있을줄로 안다. 그리고 벤처기업 창업시 저리자로 대금을 대출해준다든가, 세금을 면제해주든가 등 혜택을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정부차원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물론 젊은이들의 창업정신이나 정부차원의 지지 및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성공여부는 미래사회발전의 추향을 잘 읽는데 있다.    
129    공산당원의 본색 댓글:  조회:7465  추천:3  2011-11-25
나는 며칠전 혁명전쟁영화를 보면서 재미나는 장면을 하나 목격했다.  우리 공산당부대와 국민당부대가 돌격에 림하면 지휘관들의 행태가 정반대임을 알게 되였다. 우리 공산당부대의 지휘관은 "동지들, 나를 따라 앞으로 돌격!" 하는데 국민당부대의 지휘관은 "형제들,  나를 위해 돌격!" 한다. 공산당부대의 지휘관은 전사들의 앞장에 서서 달려가고 국민당부대의 지휘관은 병졸들 뒤에 서서 개 쫓듯한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 공산당부대가 보잘것없는 "좁쌀에 보총"(小米加步槍)으로 신식무기로 발끝까지 무장한 몇배나 되는 국민당군대를 전승할수 있는 비결을 알게 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생을 남 먼저 하는 희생정신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산당원의 본색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희생정신을 솔선수범으로 실천할 때 사실은 웅변보다 낫다는 설득력으로 무한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우리 조선족 문학대부 김학철이 쓴 《격정시대》도 보면 조선의용군의 돌격에 림해 "공산당원들,  한발 앞으로!"의 공산당원의 형상이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던가. 구중국을 뒤엎고 새 중국을 건립한 근간에는 바로 중국공산당원들의 이런 희생정신이 있었던것이다.  그럼 오늘날 평화시기에 고생은 남 먼저하는 그런 희생정신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전심전력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데서 나타난다. 초유록이나 뢰봉은 바로 이런 공산당원들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주변에는 이런 공산당원들이 좀 적은게 아쉽다. 나는 대학교에서 학생당원 발전사업을 좀 책임지고있다. 입당하겠다는 친구는 많고 조직에서 내려보낸 인원수는 적어 참 골치가 아프다. 그런대로 엄한 심사를 거쳐 당원으로 발전시킬 경우에도 솔직히 말해서 그 입당동기 자체가 심히 의심스럽다.  입당동기가 불순하다는 말이 되겠다. 이른바 대학교기간에 얼렁뚱땅하여 당적을 얻으면 사회에 나가 직장을 찾는데 플라스가 되게 한다는것이다. 사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공산당원의 신분을 하나의 우월감 또는 특권으로 보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특히 공산당간부들가운데도 수중의 권력을 사유화하여 자기 배를 채우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머리를 아래로 숙이고 저자세로 군중속으로 들어가 군중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의 대변인이 되는 경우가 적다. 반대로 머리를 우로 들고 줄서기에 바쁘며 웃사람의 눈치만 보고 새로운 출세가도의 길을 노린다. 현재 우리의 많은 부정부패도 사리사욕에 들떠 당의 근본취지를 망각하고 정도를 벗어났기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많은 간부들은 포화가 흩날리는 전쟁의 나날에는 공산당원의 본색을 잃지 않을수 있었다. 그것은 적아가 분명한속에서 정신을 차렸기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의 시기, 특히 오늘날 개혁개방의 시대에 쉽게 공산당원의 본색을 잃을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각종 욕망이 팽창하는 현대라는 시점에 와있으며 시장경제가 가동된 상황에서 돈이라는 사탕폭탄이 란무하기때문이다.  모택동의 "사탕폭탄"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한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욕망의 노예가 되고 사탕폭탄의 달콤한 공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닐 때가 많다. 공산당원들도 오장륙부를 가진 인간인이상 여기서 자유로울수 없다.   현시대 우리 공산당원들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는줄로 안다. 그럼 "여기서" 자유로움을 얻고 우리의 "고민"도 떨쳐버릴수 있는 경로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머리 숙여 유자의 소가 되고"(俯首甘爲孺子牛)" 천하 사람이 우려하기 먼저 우려하고 천하 사람이 즐긴후에 즐기는"(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데 있다. 바로 고생은 남 먼저하는 자기희생정신에 기반한 공산당원의 본색을 찾는데 있다. 이로부터 진정으로 대서특기할만한 공산당원의 숭고한 형상이 수립될수 있는것이다.
128    등산의 묘미 댓글:  조회:7053  추천:2  2011-11-09
등산붐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 사람들은 오늘도 이 산 저 산 오르느라고 야단법석이다. 등산의 리유는 야밤에 불보듯, 신체단련하기, 그럴듯하다. 등산의 건강효과 자타가 공인하니 말이다. 그리고 또 말한다. 의지력을 키우련다고. "오르고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거늘 사람들 제 아니 오르고 태산만 높다 하더라!" 그렇다. 오르고 오르면 산은 정복되는 법. 사람들 정상에 올라 나는 이 산을 정복했노라, 야호∼ 히말라야산정복은 영웅대우. 그래 나의 의지가 태산같이 높거늘 아니더냐! 물론 건강도 좋고 정복도 좋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이나 인간우월감의 맹점이 도사리고있다.  이런 맹점은 부메랑이 되여 우리에게 톡톡히 경종을 울려주었다. 생태고리파괴, 환경오염, 오존층빵구…결국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있다. 우리는 현대라는 이 시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반성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래서 우리 중국의 전통적인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고방식 및 가치관이 더없이 돋보이게 되였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사회건설도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현대적표출에 다름 아니다. 현단계에 있어서 인간과 자연은 상호보완하는 조화의 관계이지 그 누가 중심이고 우월감을 느끼는 관계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새삼 등산의 의미를 되묻는다. 등산, 우리는 등산을 하면서 자연에게서 먼저 한수 배워야 한다. 그래 우뚝 솟은 양강지미(陽剛之美)의 산을 닮아 굽실굽실하기에 바쁜 세속의 나의 허리를 한번 쭉 펴보는것이 어떤가. 그래서 TV드라마 “수호전” 주제곡에서 '영웅의 풍격 뭇산과 같어라' 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저 불평불만 없이 뚫리고 막히고 높고 낮고 넓고 좁은 대로 흘러가는 음약지미(陰柔之美)의 물을 닮아 아글타글하지 말고 우리네 인생도 둥둥 띄워보는것이 어떤가. 그래 우리의 성인들이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던가. 그렇다. 산수자연은 말없는 우리의 선생이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성인들이 산수자연에 노닐은줄로 안다. “인자약산, 지자약수”(仁者樂山, 智者樂水). 멋있다. 여기에 양강지미(陽剛之美)와 음약지미(陰柔之美)의 어울림에 기기괴괴-기암괴석, 기화이초는 보기만 해도 좋은 자연의 눈요기.  산은 말없이 거기에 서있고 물은 끝없이 흘러간다. 나는 산수의 근엄함과 영원성에 기가 죽고 만다. 그래서 아침 이슬 같은 인생 주제에 뭐 그리 촐랑대며 "정복" 운운할수 있느냐고 말이다. 산사태, 아니 산길을 갈 때 락석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우리가 아니냐! 그리고 니가 야후∼할 때 산은 항상 맞받아치지 않던가. 사실 우리는 산이 못되여 안달이 나하기도 한다. 갑순이, 갑돌이 다정히 손잡고 어느 명산에 올랐다. 그들은 금지사항을 무시한채 아스름한 벼랑턱에 "갑순이, 갑돌이 모년 모월 모일에 여기에 왔다 감" 따위를 새긴다. 그들은 산의 영원성에 부쳐 자기 사랑의 영원성을 기탁한다. 사실 어디 이들 민초들뿐이랴. 명산이면 명산일수록 명인이나 위인들이 더 극성을 부리며 자연훼손이구 뭐구를 떠나 자기의 어구를 새기거나 이름을 새기기에 바쁘다. 그들은 자기들의 존귀함이나 존함을 그 누구보다도 더 영원한 이 산에, 이 자연에 남기고싶었던것이다.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지 않던가? 가련할시구 인간이여! 그래 영원한 자연 앞에 "정복"이 가당할소냐! 그래 모시기에 벅차면 자연하고 친구나 되고말아라. 우리 조선 고대문학사의 윤선도의 "오우가"처럼. 그래 바위, 물, 솔, 대, 달-이래저래 친구가 될만하지 않던가. 사실 우리는 죽어서도 산에 묻히고싶어한다. 그래 죽어 북망산에 간다고 하지 않던가. 산은 우리의 죽음의식과도 련결된 우리와 친밀한 존재. 산만이 아니라 물도 마찬가지. 우리는 어머니 배속의 양수에서부터 물과 친해졌다. 산수, 아니 전반 자연은 우리의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원초적인 친밀한 고향이다.  산은 아버지고 물은 어머니다. 그럼 산수자연을 찾아가는 우리는 누구냐? 우리는 산과 물의 자식들. 그럴진대 산수자연은 우리의 영원한 따뜻한 품. 등산은 바로 그 품을 찾아가는 길.  
127    명정언순 댓글:  조회:6317  추천:2  2011-10-12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명분이다. 명분에 따라 움직이는것이 바로 인간이다. 지난세기 90년대 내가 한국에서 류학할 때다. 그때도 많은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돈벌이를 했다. 그런데 그들은 거개가 불법체류 신분이였다. 그래서 식당에서 조선족아줌마를 만나 반갑다고 반기면 그 반가운 마음은 순간뿐 안절부절못한다. 어떤 아줌마들은 조선족티가 물씬 나는데도 극력 조선족이라는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워낙 불법체류라는 신분이 반가운 존재가 아니였던것이다. 당시 나의 친구들중에 "노가다"를 뛰는 불법체류자들도 많았다. 어쩌다 만나 술 한잔을 나누어도 매우 조심스런 눈치다. 말을 해도 목소리를 낮추고 누가 들을세라 소곤소곤, 일을 해주고 돈을 못 받아도 벙어리 랭가슴앓기, 이것이 이른바 공자님이 말한 명불정언불순(名不正言不順) 꾀죄죄한 몰골이 3D업종에 종사하는 불법체류자임을 말해줌이라! 불법체류면 언제 잡혀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한 신분,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안스럽다. 그런데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노무현대통령시기 불법체류구제정책을 많이 펼쳤다. 많은 조선족불법체류자들이 합법적인 신분을 획득한다. 이젠 살았다고 허리를 쭉 편다. 할 소리도 한다. 돈 꽤나 번 사람들은 한국에서 식당, 려행사, 무역회사 등 사업을 벌리고 조선족상권도 이룬다. 그리고 떳떳이 구로, 가리봉 등에 조선족거리도 형성한다. 명분이 있으니까. 그래 “명정언순(名正言順)”이 좋다. 그런데 이것이 왜곡되고 외곬으로 흐를 때 많은 문제점을 야기함은 더 말할것도 없다. 나는 얼마전까지 한국에 있으면서 우리 조선족의 꼴불견에 얼굴이 붉어졌다. 신호등 무시하고 길건너기,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핸드폰주고받기, 식당에서 안하무인격으로 왁작 떠들며 먹고 마시기... 사실 이것은 약과고 녀자들이 유흥업소에 뛰여들고 남자들이 도박판을 벌리는 등 불법까지 스스럼없이 저지를 때 문제는 심각하다. 명분이 있다하여 중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제멋대로 놀아나서는 안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나는 한술 더 떠서 우리 조선족의 보다 본질적이고 거창한 정체성 관련 “명정언순”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중국조선족이다. 중국은 우리를 낳아 키운 요람. 그러나 우리는 과경민족으로서 한반도와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있다. 우리는 분명 이중정체성을 가지고있다. 이것이 우리의 올바른 정체성-명정(名正)이다. 그런데 이중성은 우리를 좀 헷갈리게 한다. 그래서 한국에 가서 한국인인양 행세를 한다든가, 중국에서 조선족의 자각을 상실한 행세를 하는것은 모두 명불정(名不正) 행태. 몇년전에 일부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국적소동을 벌린것은 이런 꼴불견의 전형적인 한치보기.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중정체성의 조화를 가져와야 한다. 례컨대 중국과 조선반도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민족적인 인연을 리용하여 중국의 조선반도 진출에 앞장설수 있으며 중국의 우세를 리용하여 조선반도의 중국 진출에 도움을 줄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중국과 조선반도 교류에 있어서 가교역할을 충분히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명정언순”. 조선과 한국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 사실 우리는 남북을 모두 체험했으며 남북을 아우를수 있는 리념적인 정체성바탕도 가지고있다. 그리고 남북을 정녕 상생의 윈윈관계로 바라볼수 있는 있는 립지를 가지고있는것도 바로 조선족. 이것이 바로 우리가 통일마당에 남북에 내세울수 있는 명분-명정(名正). 이런 명정을 가지고 우리가 실천에 림할 때 그것이 효과적임은 두말할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언순(言順). 이것은 결국 우리의 이중정체성의 “명정언순!” 이런 “명정언순”이야 말로 우리 삶의 옳바른 지표. 그러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잘못하면 이런 “명정언순”에서 빗나갈수 있기때문이다. 그만큼 실제생활에서 “명정언순”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되겠다. 연변대학 교수  
126    욕망의 시대 댓글:  조회:6636  추천:8  2011-06-24
                욕망의 시대                                      우상렬  현대는 소비시대란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사실 이 소비시대는 욕망시대의 부산물에 다름 아니다. 욕망,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욕망이 없을 때 인간은 죽은 인생. 그렇다하여 굳이 욕망시대라 할 정도로 인간이 맘모스적인 욕망을 부리거나 그 욕망의 적나라한 표현을 하는 것은 적어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소비시대가 문제되듯이 욕망시대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위가 제일 큰 동물하면 단연 인간. 인간은 못 먹는 것이 없다. 땅속에 나고 생기는 물건에서부터 땅위의 오곡백과, 기어 다니는 벌레, 뛰어다니는 동물, 그리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에까지 인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廣東식 먹기는 그 전형적인 한 보기. 식욕의 팽창은 먹이사슬결단, 생태환경파괴까지 불러온다.   지금 세월은 참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다. 표현자유, 드러내기 자유를 만끽하는 시대. 자기의 욕망에 솔직한 시대. 그래 억압적인 우울증이나 정신병자는 적은 편. 너무 자유롭고 솔직하다보니 좀 상스럽고 천박한 감을 주기도 한다.   상호(본고에서 말하는 상호는 특정 상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특히 밝히는 바이다)를 좀 보도록 하자.   ‘愛得’(백화점 이름), 서비스업체로 얻기 좋아한다는 상호를 가졌을 때 좀 어불성설이고 웃기는 얘기다. 물론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얻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겠지만. ‘놀부집’, 놀부, 누구냐? 놀고먹기 좋아하는 ‘흥부전’의 놀부가 아니냐? 그는 형제정의도 모르는 욕심쟁이 폐륜아. 상호가 그 폐륜아집이라 할 때 이미지가 너무 흐려진다. 놀고먹기 좋아하는 욕심쟁이 폐륜아집에 너무 성큼 발을 디뎌놓겠는가 말이다. 그런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내가 놀부가 될지도 모를 일.近墨者黑이 아니더냐. ‘玩吧,酒吧’, 술 마시면 자연적으로 놀고 싶어진다. 그럴진대 굳이 선정적으로 ‘玩吧’했을 때 주춤해지고 무엇해진다. 잘 하던 짓거리도 멍석 펴놓으며 놀아보라 하면 안 놀지 않은가. 그리고 술 마시고 노는 술집이라 할 때 어떤 야한 난잡한 감도 없지 않아 준다. 이런 천민자본주의의 천박한 냄새가 풍기는 상호에 비해 요새 TV에서 심심찮게 보게 되는 ‘舍得’상표 술 광고가 멋있다. ‘舍得’, 버려야 얻는다는 얘기 같은데 변증법적인 묘미와 깊이가 있다. 그래서 며칠 전 설이랍시고 비싸기는 하지만 ‘舍得’ 술 한 병을 사 마셔보았다.   이런 상호나 상표만의 얘기가 아니고 슬로건에도 욕망은 묻어난다. 작년 설날 저녁 동아시아 4강 축구경기에 2등자리를 두고 항상 ‘앙숙’인 한국과 일본이 붙으면서 고맙게도 명절의 좋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런데 운동장 주변의 한 프랑카트에 이런 슬로건이 내붙었다. ‘rush러시(중간에 축구공 차는 동작을 한 사람의 아이콘) cash캐시’, 뭐 밀치고 닥치며 공을 잘 차 이겨서 돈을 챙기라는 말 같다. 역시 좀 거칠고 천박하다. 그런데 이런 슬로건 때문인지 그날 한국이 이겼다. 돈욕망을 자극하는 슬로건은 주술적인 마력이 있는가보다. 그래 돈을 얼마나 챙겼는지...   지금은 경제시대라 돈이 하느님이다. 그래 사업을 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배 속의 아이도 손을 내밀고 돈~돈~ 한단다. 그러나 너무 돈, 돈 할 때는 어쩐지 밉다. 설날 아침, 손군들이 와서 절을 한다. 나도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었다~ 기분이 흐뭇해진다. 참 귀엽다, 기특하다. 그런데 절 한다 꿇어 엎드린 허리를 펴기도 전에 ‘할아버지, 돈, 세배 돈!’하며 손을 내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똑 바로 쳐다볼 때는 정말 구린내가 물씬 난다. 젖내가 날 네놈한데銅臭의 구린내가 나다니. 어허, 다음 순간 등골이 서늘해나기도 한다. 어린이는 돈을 몰라야 하는데... 노신선생의 ‘어린 아이를 구하라!’의 말이 가슴에 와 딱 맺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내 학생들도 이런銅臭의 구린내를 풍길 때는 머리가 아찔해나며 질색이다. 아르바이트랍시고 나는 학생들을 잘 부려먹는다. 그런데 그 아르바이트비용이 참 문제다. 물론 돈으로 계산해줄 때도 있지만 맛있는 술 한 잔, 밥 한 끼 사주는 것으로 떼우기도 한다. 스승과 제자 간에 옴니암니 1전2전 따지기보다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으로 아기자기하게 술 한 잔, 밥 한 끼 같이 하며 정담을 나누는 것이 더 좋지 않냐 말이다. 그런데 이 술 한 잔, 밥 한 끼보다는 고 1전2전으로 정확히 계산되는 돈을 좋아하는 학생이 있다. 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아르바이트비용을 청구할 때는 정말 정나미가 싹 떨어진다. 학생은 돈과 거리가 먼 것이 좋은데...   인간의 욕망을 논할 진대 돈도 돈이겠지만 성도 매우 강렬한 것이다. 우리 시대는 확실히 개방되었다.性感, 섹시, 섹스... 뒤안길에 숨겨져 있던 성적 담론들이 어느새 공중담론으로 부상하였다.性感, 섹시는 현대여성의 아름다움의 불가결의 요소로 되었고 섹스도 거추장스러운 아이낳이보다는 순수한 의미에서 암컷수컷의 니 좋고 내 좋은 성희가 되었다. 성적 욕망의 거침없는 분출, 시원해서 좋기는 좋겠다. 그런데 애짤잘하거나 애모쁨이 없어 좀 동식물적인 수준이다. 화사하게 핀 꽃이 자기 성기를 활짝 드러냄이나 발정기의 동물들이 흘레 하나만을 바라고 흑흑 거리듯이. 성적 개방에는 우리 대학생들이 뒤지지 않는 것 같다.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하면 둘둘, 끼리끼리 앉은 남녀 커풀들이 머리를 수굿하고 밀애를 속삭이기에 바쁘다. ‘오늘 강의 이상 끝!’하기 바쁘게 학생들이 교실문 좁다하게 비집고 나간다. 나가는 순간 둘이둘이 좋아하는 남녀 커풀들이 남에게 빼앗길새라 서로 손을 잡아 쥐거나 허리를 감아 안고 나란히 걸어 나간다. 이것이 우리 학교 여름 계절학기 강의 및 하학 모습. 이뿐이랴, 요새 대학생들은 그 좋은 기숙사조건도 마다하고 커플끼리 아예 나가 집을 잡고 새살림을 한다. 돈에 좀 쪼들리는 놈들은 한 아파트에 넷 대 쌍 한 칸씩 나누어 든다. 내 집 맞은 켠에 이런 몇 쌍이 들어 있다. 이들은 연애고 결혼이고 무어고 속도전에 짬뽕식 일사천리로 해제끼는 것 같다. 이들은 자기네 학교 선생인 나를 보아도 한 점 부끄럼없이 당당하고 떳떳하다. 이를 때면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나며 알은체 인사를 한다. 사실 당당하고 떳떳할밖에. 둘이 좋아서 하는 짓에, 국가 법적으로도 대학생혼인을 허용하는 바에야!   나는 요새 대학생애들이 은근히 부러워나기도 한다. 내 대학교 때 잘 난 계집애들 눈 한 번 똑 바로 뜨고 쳐다보지 못했고 손 한 번 쥐어보지 못한 신세를 생각하면 내가 가련해나기도 했다. 내가 요새 대학생들을 좀 피탈하며 까다롭게 구는 것은 나의 무언중 질투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桑田碧海,海枯石烂, 그렇게信誓旦旦이도령, 춘향 같이 놀던 요새 대학생들이 그렇게 쉽게 하루아침에 빠이빠이를 주어댈 때는 나는 그만 아연실색해지고 만다. 그들은 워낙 연애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결혼까지도 재미, 장난으로 하고反掌如云의 홀가분한 것으로 하는 듯하다. 아니, 속도전에 짬뽕식 일사천리는 쉽게 신물이 나고 빨리 끝나는 법. 그래 나는 그들이 부러워나다가도 그들이 불쌍해났다.   ‘육예’고 어쩌고 그것은 봉건냄새가 나니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쉽게 홀가분하게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버리’기 때문. 사랑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기에도 목청이 떨려나고 입안이 말라난다. 그 애짤잘함과 애모쁨이여! 어쩌다 손을 한 번 쥐게 되면 짜릿짜릿 온 몸은 감전된 듯. 키스는 어질어질 아찔해서 못하고. 그러나 달구며 달래며 기다린다-절대절명의 그 순간을. 결국洞房花燭夜까지 골인-아, 신비하고 황홀한 그 밤이여. 동굴은 오픈되어 있다. 꽃은 피어있다. 그런데 좀 어둡다. 손으로 더듬기. 오, 어딘가에서 꽃의 애모쁨 소리는 나는데. 그럼 그렇겠지. 그 애모쁨 소리에 맞춰 샘물은 찰찰 흐르고... 작대기로 찍어보니 그 맛 감미롭기 짝이 없으라! 사랑, 연애, 혼인, 우리는 한 수의 시고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런데 니들은 뭐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뽕에 조루, 음위라 욕망시대의 슬픔, 비극이여!   행복의 기본 원리의 하나는 욕망이 쉽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옛날 소차를 타고 세월아, 네월아 석 3년을 걸려 친구 집에 도착했다. 이 아니 반가울소냐, 온다, 온다하는 네가 이제야 오너냐? 한 3년 놀다 가라!孔子님이 말한 ‘有朋自遠來不亦樂乎!’란 바로 이런 경지다. 현시대, 비행기, 아니 우주비행선이 날아다니는 시대. 비행기를 타고 옛날 석 3년 걸리던 거리를 씨잉 날아 3시간 만에 친구를 만났다고 하자. 반갑기는 하겠지만 너무 쉽게 자주 만나는 친구, 그렇고 그렇지 뭐. 한 3시간 만 놀다 가라. 그리고 맥 빠진 소리로 다음에 또 와라. 그렇다고 다음에 또 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친구 속으로 조용히 되뇌이는 말이, 짜식, 진짜 또 올게 뭐라, 멍텅구리 같은 짜식, 그말 그대로 곧이 듣기는... 인간은 쉽게 이루어지는 욕망에知足者常樂할 줄 모르고 싸가지 없이 이 욕망, 저 욕망으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쉽게 욕망의 노예가 되는 법.
125    어두운 서사:“황해” 댓글:  조회:5030  추천:58  2011-05-19
                어두운 서사:“황해”                                                        우상렬 연변대학교수   영화 “황해”는 너무 어둡다. 마음 어딘가 찜찜하고 개운하지가 않다. 첫째, 우리 조선족의 삶이 너무 스산하게 그려졌다. 연길 시가지나 시교의 모습들은 삶에 찌들고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나고 지저분하다. 그리고 조선족은 무지막지하게 거칠고 용감하다. 마치 순화되지 않은 야성 그 대로다. 경찰의 층층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주인공 구남이,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며 종횡무진하는 면가, 그리고 거침없이 치정에 빠지는 구남이 아내... 이 모든 것은 돈, 돈, 돈 때문이다.   여기에는 분명 한국인의 시각이 녹아들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인의 ‘집단적 상상’에 의한 ‘타자’화된 우리 조선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가난한 조선족 대 잘 사는 한국인, 더러운 조선족 대 깨끗한 한국인, 거친 조선족 대 세련된 한국인... 이런 비교급부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각을 좀 달리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상업성이 강해 주로 흥행을 노린다. 시장경제의 관객소비에 기초한 이윤 추구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황해”에 나타난 초라한 조선족이미지 부각은 굳이 우리 조선족이 미워서가 아니라 한국 관객들의 우월의식이나 엽기심리, 노스텔지아를 자극하는 안티로 작용한다. 일종 한국의 대중심리에 영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황해”는 성공적인 관객몰이를 할 수 있었다고 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황해”는 대중문화의 흐름을 탄 통속영화일 다름이다.   우리는 문학예술작품을 보는 시각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 이때까지 우리는 문학예술작품에 대해 한국의 흥행이나 재미 위주보다는 너무 가치나 의의를 따져왔다. 우리는 꼭 전형성을 따지고 굳이 사상교육을 받으려 했다. 문학작품의 심미나 오락 작용보다는 교육작용에 집착해왔다고 할 수 있다. “황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볼 때 “황해”에서 조선족이미지는 전형성을 기하지 못했다. 연길에 사는 내가 볼 때도 영 말이 아닌 것 같다.       현재 연길은 작은 도시이나마 그만하면 깔끔하고 활력이 넘친다. 그 주변도 새 농촌건설로 면모를 일신했다. 그리고 청부살인에 건 6만원도 그리 큰 돈이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황해”는 어제의 연길 및 그 주변 이미지에는 맞을지 몰라도 오늘의 연길 및 그 주변 이미지하고는 너무도 다르다. “황해”는 연길 및 그 주변의 뒤안길이나 어두운 곳만을 찾아 짜깁기한 듯한 감을 준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조선족에 대한 막연한 ‘집단적 상상’을 연길 및 그 주변에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은 중국식 논의에 따른 사실주의의 본질적인 전형화반영보다는 자연주의의 지엽적인 반영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문학이 꼭 전형화반영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의 비주류나 비본질 및 개연성도 얼마든지 취급할 수 있다 할 때 “황해”는 진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는 분명 아직 살기 어렵고 거칠고 더러운 초라한 면이 있다.   문학예술은 자연주의적인 사진기식 반영이 아니다. 어쩌면 사실주의적인 있는 그대로의 본질적 진실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의 긴가민가의 묘한 줄다리기다. 이 점에서 “황해”는 그럴듯하다. 그러면서 “황해”는 거기에 알심을 넣어 현대인간들의 보편적인 욕망서사로 나아갔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좀 홀가분하게 문학예술을 접할 필요가 있다. 보다 많이 문학예술의 예술성에 치우쳐 감상하자는 것이다. 예술성은 심미나 재미를 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황해”를 보자. 캐릭터, 주인공의 성격부각이 상당히 성공적이라 본다. 아직 인간의 순진무구함을 잃지 않은 구남이, 그에게는 아직 사람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독하지도 못하다. 그리고 사랑에도 연연한다. 그러나 빚에 쫓기고 사랑의 끈에 의해 그는 한국행을 한다. 그리고 한국에 가서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긴다. 그는 우리의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면가와 김태원, 그들은 사회독버섯-악마의 화신. 그들은 철저히 돈, 치정에 놀아난다. 최저한의 인간의 의리나 정도 없다. 그래서 사람도 서슴없이 죽인다. 그런데 그들의 표현형태는 정반대다. 면가가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나아간다면, 김태원은 하느님의 간판을 건 허위적인 모습을 보인다. “황해”는 일단 이 세 주인공의 캐릭터로 성공한다. 그리고 “황해”는 이런 주인공들 사이 얽히고 설킨 관계로부터 전개되는 얽음새가 미궁 그 자체다. 금욕에 치정에, 중첩되는 청부살인… “황해”의 얽음새 전개는 추리소설의 묘미가 있다. 한참 미궁을 헤매다가 끝에 가서水露石出,柳暗花明. 그리고 “황해”는 액션스릴리러 장르답게 말보다는 행동이 넘쳐난다.   한마디로 “황해”는 우리에게 볼거리-눈요기를 만끽하도록 한다. “황해”는 적어도 예술성이 뛰어난다. 문학예술은 예술성으로 승부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한 편의 영화를 이런 예술성에 치우쳐 감성하는 것도 진정 문학예술의 본령에 가닿는 것임에 틀림없다.   둘째, “황해”는 욕망서사. 등장인물들이 모두 욕망에 놀아난다. 돈에, 치정에… 끝없는 욕망에 놀아나는 주인공들, 결국 욕망의 팽창에 서로 부딪치고 죽이고, 이것은 조선족이나 한국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어쩌면 우리 현대인간들의 전반 자화상. 그래서 “황해”의 욕망서사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와 닿는 욕망의 현대서사가 된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 ‘황해’는 상징성을 띤다. ‘황해’는 욕망의 바다. 돈에, 치정에 놀아나는 인간 욕망의 바다이다. 인간은 결국 이 욕망의 바다에 빠져 죽는다. “황해”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지 않던가. 구남이도 죽고 면가도 죽고 김태원도 죽고… 구남이는 결국 황해의 고기배 위에서 죽게 되고 그 아내의 골회함과 더불어 황해에 내쳐진다. 황해는 더럽다. 생이 넘치는 푸른 바다가 아니라 오염된 죽음의 누른 바다다. 사실 “황해”는 바로 죽음의 욕망에 의한 우리 인간들의 오염을 귀뜸하고 있어 좋다. 그래서 “황해”를 단지 자극이 넘치는 액션스릴리러로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묵직함이 깃들어 있다.
124    身因性과心因性 (우상렬) 댓글:  조회:4709  추천:60  2011-04-15
 身因性과心因性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   우리 인간은 잘난체 하지만 이래저래 참 살기가 힘든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렸다. 나는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내 어릴적 가난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기억을. 육형제, 걸신에 걸린듯한 우리 형제들을 어머니, 아버지는 먹여주기에 대단히 힘들어하신 것 같았다. 항상 두 콧구멍으로 시누런 콧물줄기를 들이마시기에 바쁜 우리. 들에서 일하고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어머니는 우리의 콧물 닦아주기에 바쁘시다. 이것이 우리 어머니 일과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 어머니 치맛자락은 항상 우리의 콧물로 얼룩져있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콧물은 시도 때도 없이 더 열심히 흘러내린다. 그러면 우리는 집안에 죽 들어앉아 경쟁이라도 하듯이 후르륵 쩍-쩍. 여하튼 그때 그 시절 콧물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후에 안 일이지만 못 먹어서 그렇단다. 코흘리기도 하나의 병이란다. 몸에 영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 그렇단다. 그런 거 같다. 그래 요새 아이들 시누런 콧물 훌쩍이는 거 보았더냐. 그렇다. 절대적 빈곤시대 절대적 영양부족으로 인간은 많은 병이 생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무슨 영양부족으로 간염에 결렸소, 폐렴이 왔소, 시력장애요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래 당시 누가 간염에 걸렸소하면 잘 먹게 되었군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간염은 잘 먹으면 낫는 줄로 알았다. 그래 간염을 부귀병이라고까지 했다. 이른바身因性병이 난무했다.   인간은 워낙 정교하고 맘모스 같은 존재라 많은 것을 먹으며 이런저런 많은 영양분을 흡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육체적 생명 유기체가 잘 돌아간다. 그런데 절대적 빈곤의 시대 이것이 어려웠다. 입고 먹고 자는 문제, 좀 세련된 말로 하면 의, 식, 주문제가 우리를 괴롭혀 왔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배 부르고 등 따뜻하기를 바랐던가. 혁명의 수령들도 그 무슨 이밥에 쇠고기국에 기와집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이 외우던小康사회건설이라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의, 식, 주의溫飽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간단한듯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생산력만 발전하면 되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달과 발전에 힘 입어 의, 식, 주의 절대적 빈곤문제를 많이 해결하기도 했다.   그래서身因性병도 많이 근절시켰다. 간염과 같은 부귀병이 많이 사라졌지 않은가. 그래 요새 간염이라는 것이 못 먹어서 생겼다는 소리 들어보았는가. 술 많이 처먹어 그렇지. 이래저래 우리는 그만하면 잘 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발생. 우리가 배가 불러 태평세월이다고 쾌지나 칭칭 나네,하기도 전에 말이다. 새로운身因性병이 우리를 괴롭힌다.   배가 부르면 만사대길인줄 알았는데 바로 배가 불러 생기는 병 말이다. 인간은 배가 불러 죽을 수 있다. 배불러 죽겠다는 말이 허망 나온 말이 아니다. 우리 조선족 작가 박선석이 쓴 장편소설 “재해”를 좀 보라. 그 속에 어떤 인물이 그 어려웠던 세월 어쩌다 먹자판이 터져 너무 많이 먹어 정말 창자가 터지고 배가 아파 죽는 해프닝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공것이 사람 죽인다는 말도 틀린 것 같지 않다. 뷔폐, 촌놈이 어쩌다 온통 먹을천지 뷔폐에 갔다. 돈은 좀 내기는 냈으나 거저 공거로 먹는 것 같다.   그래 열심히 먹는다. 정말 먹거리산 정복하기다. 그래 눈이 뒤번져지도록 먹고나니깐 문제다. 배가 아프다. 배가 터지도록 아프다. 소화불량. 그래 다시 열심히 소화제먹기. 그래도 배는 잘 꺼지지 않는다. 그래 온 밤을 끙끙 거리며 엎치락뒤치락하기. 정말 요새는 좀 살만하기 되어 너무 많이 먹어 문제다. 새로운身因性병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똥배가 나오고 체형이 기울어지는 것은 약과. 비만으로 인한 심장병, 고혈압, 고혈지... 말 그대로 비만은 만병의 근원.過猶不及이란 말이 이때도 통하는 줄로 안다. 그래 다이어트란 말이 나오고 비만과의 전쟁이 시작된 줄로 안다.   사실 요새는身因性병보다도心因性병이 더 기승을 부리는 줄로 안다.身因性병은 신, 육체의 병이니 눈에 유표하게 잘 보인다. 그래서 어쩌면 치료하기도 좋다. 그런데心因性병은 심, 마음의 병이니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 현대인간들이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스트레스. 현대라는 개방된 사회, 그리고 물욕이 넘치는 사회,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욕망은 팽창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산수를 낀 전원 가든식 아름다운 별장, 그리고 길거리를 질주하는 벤츠, 오디, 보마... 그리고 밤에 도처에 번쩍이는 네온사인... 우리의 잠재된 원초적 욕망까지도 자극한다. 여기에人不爲己,天誅地滅가 작동하면서 우리는 뛸 데 없는房奴,車奴가 되고 네온사인을 좇아 다니기에 바쁘다.   그런데 이런 욕망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쌓이는 것이 스트레스. 우리 현대인간들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것이 모든 것이 귀찮고 거저 그렇고 그렇다는 식의 인상쓰기. 여기에 먹고 살만 한데도官大一級壓死人에 학벌을 비기고 니가 돈 많냐, 내가 돈 많냐를 비기고 니 집이 크냐, 내 집이 크냐를 비기고 니 차가 좋냐, 내 차가 좋냐를 비기고 또 무슨 무슨을 비기는 온통攀比로 가득 찬 현대라는 세상에서 우리는 영원히 상대적 빈곤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이 산에서 저 산보면 저 산이 높고... 우리는 영원히 헐떡이며 살수밖에. 가련한 현대의 우리의 자화상.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心因性병에 노출되어 있다. 노이르제, 신경쇠약, 정신병... 현대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들. 그래서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학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병원에도 무슨 심리자문실이요, 뇌신경과요하는 새로운 치료분야가 생겨났다. 실로心因性, 마음이 문제다. 자연적으로 불교의一切唯心造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현대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급선무. 그래서 우리는 도교의適可而止,知足者常樂의 경지도 떠올려본다.   사실 인간의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은 따로따로 놀아나는 것이 아니고息息相通. 서로 긴밀하게 통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은 어쩌면唯物과唯心의 논리와도 통한다. 몸이 아픈身因性때문에 마음이 아파나고 마음이 아픈心因性때문에 몸이 아파나지 않던가. 이것이 우리 인간의 얽히고 설힌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의 유기적 섭리. 그럴진대 우리는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을 같이 다스려야 한다.身因性의唯物과心因性의唯心그 어느 한 쪽에 치우쳐 극단으로 달려서는 안 된다.唯物에만 치우치면 기계적이 되고唯心에만 치우치면 고무풍선이 되고 마는 법.   요새 우리는 조화로운 사회건설에 주력하고 있다. 조화로운 사회는 뭐니뭐니 해도 일단은 내 일신의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의 조화를 가져와야 하느니. 내 몸이 편안할 때 다른 사람도 생각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법.  
123    경계 허물기 (우상렬) 댓글:  조회:4914  추천:49  2010-11-24
경계 허물기우상렬 연변대학 교수경계는 일종 질서. 그렇다하여 경계를 맹신하거나 그것에 매이면 그 삶은 답답해나고 가련해보인다. 1980년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올림픽 개최, 그런데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진영 불참. 1984년 미국 로스안젤스에서 올림픽 개최, 그런데 구소련을 위시한 절대다수의 사회주의진영 불참. 이른바 동서랭전시기 경계는 이렇게 분명하다. 정치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것 같은 스포츠에서조차 그 경계는 이렇게 침투되였다. 그런데 1988년 서울올림픽, “손에 손 잡고 벽을 허물고” 용하게 동서화합을 이끌어냈다. 동서의 경계를 허물고 랭전을 종식했다. 어쩌면 코리아의 다이내믹한 력동성이 한몫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곧바로 본격적인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글로벌화로 나아갔다. 이른바 각국의 정치, 경제가 함께 가는듯 했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일종 해체주의를 표방하는 철학사조가 전세계를 휩쓸면서 많은 경계들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소통의 길이 트였다. 그래서 현재 우리의 숨통도 많이 트이고 삶도 훨씬 좋아진것은 아닐가. 나는 1980년대 초반 대학교에 붙어 열심히 연변으로 달려 왔다. 당시 연변은 분명 촌구석이지만 나에게 매력 만점. 연변에 오면 다른 나라, 다른 세상을 마음대로 볼수 있을것 같았기때문. 그런데 나는 연변에 와서 정말 답답해났고 서글퍼났다. 두만강이라는 국경이 나를 쩍 막아나섰다. 오히려 더 답답해났다. 나는 그때 인간을 저주했다. 지구는 너나 없이 둥글둥글 어울려 살라고 둥글둥굴하게 만들어진것 같은데 인간은 왜 이렇게 옹졸하게 니것 내것 따지며 “땅 긋어 자기 울안 만드는”거지? 내가 대학교 4년 기간에 머리를 갸웃하고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문제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였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아침에 마음만 먹으면 국경도 마음대로 넘나들수 있다는 그 말에 나는 그만 환심장을 했다. 그래서 결국 옹졸하고 알량한 내 마음도 풀렸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국제적인 문제, 자잘한 내 문제는 좀 그러니까 코앞에 빤히 보이는 우리 연길을 좀 보도록 하자.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그러니 분명 중국땅. 그래서 우리도 “담장쌓기”문화가 자연적으로 몸에 배인것일가, 조그마한 연길시 도처에 담장이 세워졌었다. 나와 너의 경계를 분명히 가르는 담장, 참 답답할시구!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담장허물기운동”이 시작되였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일이였지만 그러나 이 일은 정말 잘 보아줄만 일이였다. 담장을 허무니 우리 모두들의 거리가 가까와졌고 연길시내는 그만큼 넓어졌고 밝아보인다. 실은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넓어지고 밝아졌다. 경계 허물기,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분명 보이거나 또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경계들이 허물어지고있다. 그래서 미국의 어느 저명한 문화학자는 현재 “세계는 평평한것이다”고 했던가. 우리 문학에서도 경계는 허물어지고있다. 쟝르 하나만 놓고봐도 그렇다. 무슨 시요, 소설이요, 산문(주로 수필)이요 하지만 실제 창작을 보면 이들 사이 막 넘나드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시―서정”, “소설―서사”하지만 서정과 서사는 워낙 쌍둥이자매. 그런만큼 서로 의지해 자기를 나타내는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 그럼 다시 “소설―픽션”, “산문―논픽션”을 보도록 하자. “픽션―허구”, 꾸미기란다. 그렇다하여 “천방야담(天方夜谈)”같은 기상천외의 이야기만 늘여놓아보라. 그것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게 리해가 차단되며 허황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니 이 허황함을 갈무리할 진실감을 주는 논픽션을 곁들여야 한다. 이것을 본질의 진실이다 해도 좋고 세부적진실이다 해도 좋다. 소설은 바로 픽션과 논픽션의 “새끼꼬기”―허허실실인것이다. 문학쟝르의 경계 허물기―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오면 올수록 그것은 도를 더 높여간다. 모더니즘소설, 그것은 픽션적인 슈제트조차도 없다. 애초에 심리, 그것도 무의식을 짓궂게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모더니즘소설은 모두 모아 심리소설이라 해도 무방하다. 무슨 표현주의니, “블랙유머”니, 마환(魔幻)사실주의니 하는것도 그렇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거기에 한술 더 뜬다. 비탈린 패러디로 마음껏 해학, 풍자의 꽃을 피우고 퓨전적인 기기괴괴―크로테스크한 미를 창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호텍스트성”으로 여러 쟝르의 글들도 마음대로 가져온다. 한마디로 여기서는 어떤 특정적인 쟝르개념이 없다. 지난해 《연변문학》(2009. 4)에 발표된 한영남의 “웬만하면 발을 사랑하시지”라는 “단편소설”을 좀 보도록 하자. 머리와 발이 뒤바뀐 현대―가치가 전도되고 광고가 란발하는 세상에서 진실과 가상은 뒤죽박죽이 된다. 그래서 작자는 나름대로 소시민적이게 별 볼일 없이 발이나마 가지고 이죽거려본다. 그러니 이 소설은 현대인의 뒤틀린 심리를 보여준 전형적인 모더니즘 심리소설이고 또 광고를 패러디하고 모나리자를 끌어들이는 “상호텍스트성”도 보이고 자조적인 내포화된 자기반영성도 얼마간 보이고있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특색도 다분히 나타내고있다 하겠다. 현재를 사는, 톡톡 튀는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방식―또 대담한 경계 허물기라면 경계 허물기라 하겠다. 그러니 세상보기, 세상일하기, 문단에서 지내기, 문학을 하기가 모두 그런것이 아닐가. 기본에 충실하고 질서를 지키는것이 존재의 사실이라면 경계를 허물고 넓게 시야를 가지는것은 또 발전의 도리가 아닐가. 연길시에서 담장을 허물어 좋은 일이 되였는데 우리도 담장을 허물면 어떨가. 조금은 아쉽더라도, 조금은 거칠더라도, 조금은 미숙하더라도 담장을 허물고 또 새로운 세계 대하는것이 어떨가, 좋은 마음으로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권장하는 내용이다. 2010.11.24
122    가난콤플렉스 댓글:  조회:4962  추천:66  2009-02-24
인간은 이 지구에 갓 왔을 때 지지리도 못 났다. 한 없이 가난했다. 전 인류적인 가난콤플렉스는 이로부터 쌓였다. 가난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채집문화, 수렵문화, 유목문화, 농업문화, 공업문화... 인간은 줄기차게 가난정복의 문화를 개발해왔다. 사실 종교라는 것도, 욕망을 죽이는 문화로서 이 가난콤플렉스를 떨쳐버리는 다른 한 방편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콤플렉스를 상당히 떨쳐버린 듯하다. 그러나 사실 가난의 문제, 가난콤플렉스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문제로 남아있다. 흉년 세월에 공것 먹다가 배 터져 죽었다는 이야기, 지금 먹을 것이 흔한 세월이건만 공것을 먹을 때면 나도 모르게 많이 먹게 되는 것, 못 다 먹으면서도 버젖하게 차려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것, 뷔페에 가면 모조건 많이 먹기... 이것이 우리 가난콤플렉스의 거지근성 자화상 百態.가난콤플렉스는 인간의 허욕을 기껏 자극하고 인간을 아이러니에 빠뜨린다. 모택동은 일거에 사회주의혁명을 하여 가난문제를 해결한듯하다. 모택동시대 사회주의는 너나나나 피장파장 엇비슷하게 고만고만 살았었다. 餓不死, 撑不死의 평균주의, 가난콤플렉스가 그리 싹트지 않는다. 그러나 개혁개방 후 ‘讓一部分人先富起來’의 등소평시대 사회주의, 가난콤플랙스가 살아난다. ‘先富起來’한 ‘一部分人’, 우리의 가난콤플렉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선망 내지는 질투의 눈길로 그 ‘一部分人’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一部分人’을 따라 잡기에 아글타글하였다. 요행 따라잡았다싶은데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우리보다 잘 사는 또 다른 ‘一部分人’이 눈에 띈다. 그래서 또 아글타글. 요행 따라잡았다싶은데 또 다른 ‘一部分人’...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삶의 질보다는 양에 엎어져 저 사람 수입이 얼마요, 저 나라 GNP, GDP 얼마요 하며 수자만 따지는 무깍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현재 바로 이 상대적 가난콤플렉스라는 현대적 질병에 빠져 다람쥐 채바퀴 돌듯 돈을 좇아 돌고 돈다. 그래서 먹고 살만 하건만 우리는 너무 피곤하다.가난콤플렉스는 과대망상증의 과시욕에 놀아나게 한다. 한국은 지난세기 중반까지도 눈물젖은 보릿고개에 잠겨 있었다. 보편적인 가난콤플렉스가 팽배했다. 그러다가 ‘우리도 하면 된다’는 민족적 결집점에 신바람을 피워 유럽인들이 몇 백 년 간 한 근대화를 30여년 만에 해제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가난콤플렉스를 떨쳐버린다. 이로부터 한국사람들에게 한국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듯도 하다. 그래서 이런 해프닝도 벌어지는 줄로 안다. 필자가 1993년 한국에 유학갔을 때다. 하루는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한국 국내생 하나가 나보고 한다는 소리가 중국에도 겨울에 오이를 먹을 수 있어요였다. 마침 그날 식사메뉴에 오이채가 나와 있는지라 順手牽羊식으로 물어온다. 이런 겨울철에 중국에서는 오이를 먹을 수 없겠지하는 소리다. 박사생 꼬라지치고는 너무 수준이하의 물음이다. 사실 그때 중국에서도 오이쯤은 겨울 음식메뉴로 얼마든지 나왔으니깐. 그래서 내가 대답한다는 소리가 역시 박사생치고는 너무 수준이하의 소리-중국에서는 오이가 썩어나 돼지들이 먹고 있다고. 한국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 더-강남 졸부이야기. 서울의 강남은 원래 촌구석이란다. 그런데 개발붐으로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며 가난콤플렉스에 쌓여있던 ‘촌놈’들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단다. 그래서 이른바 졸부양산. 하이칼라 양복에 삐까삐까 구두에 빈둥빈둥 무조건 거들먹거리기...사실 졸부는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고 중국에도 수두룩했었다. 어쩌면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양산되고 있다. 개혁개방 초기 가난콤플렉스에 풀 죽어 있던 ‘촌놈’이 어쩌다가 하루아침에 ‘萬元戶’가 되면서 머리가 휙 돈다. 제정신이 아니다. 돈 많음을 자랑하고 싶다. 그래서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서 돈을 뿌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누가 돈 많은가하는 시합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니가 한 장 찢으면 나도 한 장 찢고... 꼴볼견! 사실 나도 이 가난콤플렉스의 과시욕에 놀아난 적이 있다. 우리가 대학교에 다닐 때에는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절대적인 물질적 빈곤에 가난콤플렉스는 우리를 감싸고 돌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국방색 군복옷을 많이 입었다. 대학교 3-4학년 졸업 학년이 가까이 오면서 우리 반에는 가물에 콩나듯 양복쟁이들이 한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그 양복이 얼마나 입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래 내가 대학교를 졸업해서였다.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월급을 받는대로 눈을 찔끔 감고 고급양복 한 벌을 샀다. 그때 별로 브랜드의식도 없건만 브랜드의식도 살려 브랜드로 골라 잡았다. 그 브랜드라는 것이 알고도 모를 영어문자 몇 개를 박은 네모난 천쪼각으로 초라하게 오른쪽 소매 끝부분에 붙어있었다. 나는 양복을 입을 때는 항상 이 브랜드를 유표하게 보이느라고 오른팔에 신경을 많이 썼다. 사람들 눈에 잘 띠이도록 나도 모르게 항상 오른 팔을 앞으로 가져오곤 했다. 사실 그때 진짜 신사들은 이런 브랜드를 떼고 입는다던데... 개혁개방 초기 우리 조선족은 요란스럽게 설친 것 같은데 별로 잘 산 것 같지 않다. 개혁개방의 막차를 탄 듯한 아이러니. 漢族들은 잘 사는데, 우리는... 가난콤플렉스가 엄습한다. 그러다가 한국의 문이 열리면서 노다지판을 만난 듯 너도나도 한국행. 돈을 많이 번 것 같다. 가난콤플렉스를 날릴 것 같다. 그래서 모두들 ‘금의환향’에 흔전만전 돈 뿌리기. 현재 진행형이라니 더 없이 서글퍼난다. 가난콤플렉스는 변태의 온상이기도 하다.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가난 속에서 살아오신 분이다. 그 어려운 세월에 6형제를 키우자니 잘 살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잘 살기 위해 노력해온 분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가난콤플렉스가 몸에 배인 분이다. 우리 6형제는 그래도 껄껄하게 잘 자라 현재 살만하다. 그런 만큼 우리 아버지도 잘 모신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께 소비돈도 잘 드리고 먹을 것, 입을 것도 잘 해드린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잘 챙겨만 둔다. 소비할 줄 모른다. 소비가 일종 사치 같고 죄악 같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어린 손자손녀들이 흘린 밥알들을 밥그릇의 밥알보다 더 맛있게 드신다. 가난콤플렉스가 우리 아버지를 ‘자린고비’로 만든 줄로 안다. 사실 우리 아버지만의 얘기가 아니고 어렵게 자란 사람이 성공하여 경제적 부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태적인 수전노가 되는 것도 대개 무의식적으로 굳어진 이 가난콤플렉스의 작간인 줄로 안다.과대망상증의 과시욕과 변태적인 ‘자린고비’ 내지 수전노, 가난콤플렉스의 아이러니한 두 양상-우리에게 무의식화되어 있다. 자기도 모르게 발동된다. 여기에 절대적 빈곤이나 상대적 빈곤이 아직도 우리의 가난콤플렉스를 안받침해주고 있다. 그만큼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가난콤플렉스는 떨쳐버려야 한다. 그래야 정녕 ‘촌놈’티를 벗고 멋진 신사가 될 수 있다. 삶의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고, 허욕에 들뜨기보다는 내실을 기하고, 적재적소의 소비를 할 줄 아는 삶의 자세를 굳혀야 한다. 그리고 適可而止, 知足者常樂의 道적인 경지도 추구해봄직하다.  2009. 설날
121    발표콤플렉스 댓글:  조회:4594  추천:57  2009-02-24
그래 이 세상에 발표하지 않기 위해 창작하는 글쓰기가 있단 말인가? 없다. 인간은 대개 발표콤플렉스에 놀아나기 때문이다. 쓰지 않고는 손이 건질건질해서 못 견디는, 발표하지 않고는 막달이 다 찬 애기를 낳지 않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이상한 것, 이런 것들이 심층적인 무의식속의 발표콤플렉스의 증후군.   인간에게는 분명 발표욕이 있다. 발표욕은 일반적인 표현욕하고는 좀 다르다. 일반 표현욕이 자연상태의 제멋대로의 것이다면 발표욕은 좀 세련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된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아줌마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것도 하나의 표현욕의 발산으로 볼 수 있다면 발표욕은 이런 제멋대로의 수다를 정제하고 적어도 진, 선, 미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표욕이 분명 웃음은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드는 무의식적 표현욕을 기저에 깔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발표욕을 충분히 긍정받을 때 인간의 심신은 건강해진다. 나는 소학교 때 선생님께서 전반 학생들 앞에서 나의 작문을 읽어줄 때 기분이 얼마나 붕 뜻는지 몰랐다. 온 하루가 내 세상 같았다. 그래서 세계 개명된 나라는 모두 언론자유, 출판자유를 보장하고 있는가보다. 인간은 이런 발표욕이 억압당할 때 이른바 발표콤플렉스가 생긴다. 이런 발표콤플렉스는 이제 갓 문학을 시작한 문학지망생들에게서 많이 보게 된다. 발표를 못 해서 안달을 하는 그런 콤플렉스말이다. 지난 ‘80년대 초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우리 반의 많은 친구들은 문학에 열광했다. 그때 우리 학부에서 학생들 스스로 꾸리는 ‘종소리’라는 팜플렛잡지에 짧막한 시 한편 발표했을 때도 우리는 좋아서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위로 들뛰고 땅이 넓은 줄 모르고 가로 휘저으며 지랄발광을 했다. 어쩌다가 정식잡지에 게딱지만한 작품 하나 발표하면 전반이 떠들썩해난다. 야, 누구 어디에 뭐 발표했단다, 부러워 침이 질질 흘릴 정도다. 여기에 보너스로 원고료라도 받아 술 한 잔 내면 그것은 온통 잔치 기분이다. 처녀동지들은 작품 발표한 남성 총각동지들을 잘 나고 못 나고를 떠나 은근히 점찍어 두기도 한다. 전도유망한 젊은이니깐. 그때 정말 우리 반에 별 볼 일 없는 한 친구가 우연히 단편소설 한 편 발표한 덕에 아래 반 멋진 처녀동지의 프로포즈를 받아 입이 한발만 해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그 친구가 얼마나 미워났는지 몰랐다. 아니, 쥐꼬리만한 작품 하나 발표 못하는 내 주제가 미워났다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필만 쥐면 일필휘지식으로 내리엮는 족족 인쇄화되어 발표를 식은 죽 먹기로 하는 문학천재들을 은근히 질투의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아직 발표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봐.이런 발표콤플렉스는 상당히 큰 에너지를 발산하기도 한다. 삼엄한 문학대혁명시기 八大樣板戱만 횡행. 작가들의 발표욕을 일거에 묵살. 발표콤플렉스가 그 어느 때보다도 쌓이고 쌓였던 시기. 그것은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 아니, 압박이 있으면 반항이 있는 법으로 수시로 폭발할 수 있는 하나의 활화산이기도 했다. 그래서 잠재창작이란 문학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이 잠재창작이란 바로 심층적인 무의식적 동기에서는 발표콤플렉스가 분출된 것임에 틀림없다. 보다시피 발표콤플렉스는 일종 목숨을 건 창작으로 내몰기도 한다. 김학철의 <20세기 신화>를 좀 보자. 당시 김학철은 억울하게 ‘우파’분자로 인생을 다 ‘조졌다.’ 창작자유를 박탈당했다. 마음속에 만강의 분노가 태동친다. 발표콤플렉스도 용솟음친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술에 걸린 듯 미친듯이 놀아난다. 이에 김학철은 <20세기 신화>를 쓴다. 그 미몽을 깨치고 신화를 부시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20세기 신화>는 발표할 수 없었다. 김학철은 자기 스스로에게만 ‘발표’하고만 셈이 되었다. 속이 얼마간 후련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성차지 않았다. 체증에 걸린 것 같다. 만 천하에 발표하는 것만이 그 체증이 풀릴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일본말로 창작을 시작. 일본으로 반출해 발표할 타산. 그러다가 이것도 무산되고 작가는 심한 고역을 겪게 되며 결국 작품을 창작해서 30여년이 지나 한국에서 빛을 보게 된다. 이 발표도 작가의 비상한 각오를 전제로 한 것이였다. 보다시피 한 작가에게 있어서 발표는 이렇게 중요하고 집요한 것이다.그럼 왜서 인간은 발표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가? 사실 글은 의식적인 현실차원에서 무슨 經國의 大事요, 立身揚名의 방편이 되기도 하겠지만 무의식적인 심층차원에서는 글쓴이 그 자신의 대상화, 제2의 나를 만드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이로써 ‘나’는 갈지라도 글은 ‘나’ 대신 이 세상에 영원히 남아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文章之不朽之盛事라는 것이 되겠다. 그런데 그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듯한 아픔 그 자체다. 어머니들이 자식 낳이를 하는 것과 꼭 같다. 그래서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미운 자식 하나 없듯이 작가에게 있어서 자기 작품 우습게 보는 사람 없다. 다들 자기 작품을 갓난아기처럼 애지중지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단 발표되면 내 스스로가 사회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긍정을 받는 희열을 맛보게 된다. 여기에 긍정적인 여론이나 평론이 가미될 때 그 희열이 걷잡을 수 없이 배가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발표는 바로 이런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발표콤플렉스에 놀아날 때 발표만 하면 되는 식으로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코 꿰인 송아지처럼 전적으로 편집의사에 끌려 다니는 경우가 많다. 대개 문학지망생과 같은 햇내기들이 이렇다. 나도 아직 여기에서 못벗어났다. 발표콤플렉스에 놀아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대가들, 김학철과 같은 대가들은 이렇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이 쓴 글의 토씨 하나 다칠세라 온전한 면모로 발표되기를 주장한다. 워낙 그들은 발표콤플렉스에서 벗어났고 일반편집들보다 레벨이 높음에라! 진정한 발표는 바로 이런 대가들처럼 발표콤플렉스를 벗어난 발표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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