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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음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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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생(生)과 사(死) 그리고 우리네 삶(리화) 댓글:  조회:1953  추천:10  2017-03-23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여나 살다가 죽어가는 생(生)과 사(死)의 자연섭리를 따르기 마련이다. 다시말해서 신생아로부터 부단히 성장해가고 늙어가는 우리네 삶의 끝에는 항상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있는것이다. 아이러니한것은 오늘날 우리네 삶속에서 생(生)은 과분하다 할 정도로 반기고 또 그 반가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비해 사(死)는 애써 외면하고 두려워하며 터부시하는 대상으로 락인되여있다는 점이다. 마치 모두들 죽지 않고 천년만년 살것처럼, 죽음이 자신들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딴 세상 얘기처럼 착각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까지 빌어가면서 죽음에 관한 화제를 극력 피해가려고만 한다. 가령 친부모님에게라도 죽음을 대비해 저금통장이나 재산 정리, 유품 정리와 유언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드렸다고 하자. 우리의 정서상 천하의 불효자식으로 세간의 손가락질과 질타를 받을게 분명하지 않을가. 따라서 새 생명의 탄생에 대비해서는 불과 몇주밖에 안되는 태아의 초음파사진으로부터 무려 열달이나 이어지는 임신일기, 태교, 만삭사진, 출산과정 동영상기록, 태줄도장, 태모필 그리고 떠들썩한 백일, 돌 잔치까지 이루 다 헤아릴수도 없을 정도로 그 이름마저 생소한 이벤트들에 모든 정성과 열정을 쏟아붓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영원한 안녕을 고해야 하는 죽음의 장에 있어서는 놀랄만큼 담백함과 랭정함을 보여준다. 그 일례로 뽀얀 담배연기로 가득 차고 슬픔과 경건함이란 도무지 찾아볼수 없이 장마당을 방불케 하는 고성의 대화가 오가는 화장터에서 무엇이 그리 급한지 허둥지둥, 쫓기듯이, 건성건성 마무리해버리는 오늘날 우리의 상례 모습은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으며 때로는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기도 하여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내 사람들을 죽음으로 떠나보내고 나 자신 역시 누군가에 의해 보내져야 할것이다. 필자 역시 인생의 중간고개에 접어들고보니 매번 장례식장에 다녀올 때마다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차분히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닥쳐올 내 부모님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고 그로 하여 이루 말할수 없는 슬픔에 빠짐과 동시에 이제부터는 정말 잘해드려야겠다는 철 늦은 다짐을 하게 된다. 설령 그 다짐이 또 일이 바쁘다는 구실로 얼마 동안이나 유효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반 게넵(1909)은 인간이 출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겪는 신체나 지위 변화의 중요한 시점마다 특정민족과 문화의 규정에 따라 치러야 되는 의식을 일생의례라 정의한다. 한편 우리 민족의 의례문화를 정의하고 연구함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일생”을 확대 해석하여 세상에 태여나기전 부모의 기자(祈子)로부터 출생•육아•성년•혼인•환갑•죽음과 제사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의례를 모두 일생의례의 범주에 귀속시켜 왔다(김만태 2009). 이렇게 볼 때 일생의례의 중요한 축으로서의 죽음은 단지 한 개인의 육체적생명의 종결을 의미하는데 그치지 않으며 한 사회 혹은 공동체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와 처리방식은 해당 사회나 공동체의 문화적표상으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볼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역시 상례와 제례가 관혼상제의 절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의례로 간주해왔으며 “효”를 근간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기원한 상례는 그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러한 우리의 상례문화는 지금 전통의 계승은 제쳐놓고라도 죽은자에 대한 기본적인 례의와 애도의 분위기조차 느껴볼수 없을 정도로 피페해졌다. 사람이 죽으면 황급히 수의전문점에 가서 수의를 사다가 병원에서 소개해주는 장의사에게 초혼, 습, 소렴, 명정 등 시체처리의 기본 절차를 맡기며 게다가 그 장의사가 한족일 경우가 다반사다. 장례식장에서의 고별식 심지어 안신제마저도 한족집사를 고용하여 쫓기듯이 진행하고 상주를 비롯한 유가족의 옷차림 또한 각양각색이여서 조문객과 도무지 구분하기 어려우며 다만 일부 가정에서 녀성들의 머리에 꽂은 흰 광목끈이 가끔 눈에 들어올뿐이다. 조문객들 역시 형식적으로 고인에게 경례를 하고 공기 나쁜 장례식장을 떠나기에 급급하다. 유골을 화장한 즉시로 아예 날려 보내고 안신제마저 생략하는 집들 또한 적지 않다. 이러면 혹자는 "있을 때 잘해야지, 죽은 다음에 무슨 소용 있어"라는 말로 자아위안 겸 변명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살아계실 때 얼마나 잘해드렸을가. 우리 민족은 1950년대 초기부터 중국에서 유일했던 “로인독보조”의 활약과 198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 퍼진 2,000여개의 크고 작은 규모의 “로인협회”, 그리고 1989년 국가가 지정한 “9•9 로인절”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선 전국 최초의 “8•15 로인절”, 각 가정에서의 모범적인 로부모부양 등 공적•사적 령역에서의 실천을 통하여 국내의 기타 여느 민족에게도 공유함직한 “효”의 문화를 우리의 중요한 표상으로 운용하고 그 정통성과 “다름”을 강조해왔었다. 그러나 2017년 현재 연변의 어느 조선족양로원 80명 로인 중 5명만 자녀가 모셔가서 설을 쇴다는 서글픈 신문기사를 접했을 때 소위 “효”의 민족이라 자부하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느낄수 있으며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개개인 또한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효”점수를 매길수 있을가. 최근 몇년래 초고령화사회에 들어선 일본에서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종활(终活)”이라는 단어가 대류행이다. 로인들이 자신들이 생을 마감했을 때 자녀가 곤난을 겪지 않도록 미리 유언작성, 년금보험의 재검토, 장례식, 묘지 결정, 엔딩노트 작성 등을 하는 활동을 한다. 그런가 하면 자녀가 부모와 함께 종활을 하는 사례도 많은바 몇년전 필자가 봤던 다큐멘터리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고령의 부모님과 함께 즐겁게 엔딩노트를 쓰고 사진과 옷가지 등 유품들을 정리하는 자녀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위하여 직장에 사표까지 내고 무료도우미가 오는 시간을 리용하여 파트타임으로 알바를 하면서 어린아이로 돌아간 어머니를 애기처럼 돌보는 딸, 시한부선고를 받은 어머니를 온 식구가 돌아가면서 간병을 하고 그 어머니의 림종을 모두가 손잡고 웃으며 지켜보고 잘 가시라는 인사의 말을 건네는 자녀들… 부모가 자녀의 생(生)을 맞이하면서 그래왔듯이 자녀도 부모의 사(死)를 앞두고 온 마음을 다해 그 곁을 든든히 지켜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마냥 어둡고 아프고 슬프기만 한것이 아닌 따뜻하고 경건하고 아늑한것이기도 했다. 생명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거스를수 없는 숭고한 자연의 섭리이며 죽음을 어떻게 대하고 다루느냐 하는것은 한 사회나 공동체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인연들을 뒤로 하고 온전히 홀로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게, 두렵지 않도록 부모님과 함께 죽음을 준비하고 함께 기다리다가 편안히 보내드리는 그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효”실천의 장이자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생(生)과 사(死)의 동반관계를 피부로 느낄수 있는 장임이 틀림없다. 흔히들 21세기는 의식형태가 아닌 문화적힘의 경쟁시대라 일컫는다. 조선족상례는 이미 2009년에 벌써 길림성비물질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이른바 전통의 지속은 변용을 동반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인위적으로 재구축될수도 있는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전통문화에 대한 적절한 취사선택과 재구축을 통해 보다 성숙된 우리만의 “죽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족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절실한 과제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리화 략력】 성명: 리화 (李华) 소속: 연변대학교 사회학과 전공: 문화인류학, 초국가적 이동과 가족, 조선족 생활문화 학력: 일본 동북대학교 학술박사 연변대학교 정치학 학사 주요 론저: 저서 《조선족사회의 변동과 가족생활》 (2015, 한국학술정보) 외 다수 론문을 국내외학술지에 발표
47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를 통해 본 평생학습도시의 구축 댓글:  조회:1689  추천:1  2017-03-14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를 통해 본 평생학습도시의 구축   김화선   평생교육이란 “개인의 출생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전 생애에 걸친 교육(수직적차원)과 학교 및 사회 전체 교육(수평적차원)의 통합”을 의미하는것으로, 년령과 사회의 한계를 벗어난 일생에 걸친 교육을 의미한다. 이것은 '평생학습의 실현'이라는 의미에서 기존에 있었던 '학교중심의 교육'이라는 교육의 관념적한계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생각의 일환으로 파악될수 있다.   20세기 60년대부터 유네스코에서는 평생교육을 중요한 교육사조로 전세계에 보급하는 노력을 해왔다. 중국은 1993년에야 정부의 문건인 “중국 개혁과 발전 강요”에 처음으로 “평생교육”을 써 넣었다. 2010년 7월, 당중앙과 국무원에서 공동으로 제정한 “국가중장기교육개혁과 발전기획강요(2010-2020년)”에 평생교육체계를 건립하고 완비시켜야 할 중요성에 대해 비교적 큰 편폭을 할애하여 다루었다. 따라서 국가차원의 평생교육체계를 설립하는것은 하나의 리상이고 목표라고 할수 있다.   평생교육체계의 설립은 학습형사회를 구축해가는데 중요한 조건이라고 할수 있다. 현재 중국의 많은 대학교에 평생교육원이 설치되여있고 대도시의 사회구역에서도 사회구역대학을 설립하여 평생교육기관으로 응용하고있는 추세를 보인다.    2016년 12월 말, 연길시에“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가 설립되였다.“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는 연변주민정국에 등록을 하고 연변주부녀련합회를 업무주관 단위로 하는 사회단체로서 연변 조선족녀성들이 주요 회원으로 활약하고있다. 법인 사회단체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의 설립은 기존의 민족 교육에 대한 인식과 담론을 확장시키는데 의미가 있다고 할수 있다.    지난 2017년 1월 21일, 연변대학 예술극장에서는 연변대학녀성연구중심과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에서 공동주최한 대형화책 《장백산의 진달래꽃-연변대학녀성평생교육총동문회성장발자취1999-2016》출판발행의식을 가졌다.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초대 회장 김영순이 주필을 담당한 화책 《장백산의 진달래꽃》은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중국어로 출판되였다. 화책은 연변대학에서 추진한 녀성평생교육프람과 회원들의 열정과 현실적수요, 그녀들의 문화적자각에 의해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가 설립되기에 이르기까지 17년간의 력사적 발자취를 기록하고있다. 녀성평생교육을 핵심리념으로 17년간의 력사적 실천경험을 생동하게 기록한 이 화책은 앞으로 연길시를 평생학습도시로 구축해나가는데 좋은 지침서가 될것이다.    이 화책의 주인공들인 연변 조선족녀성들은 주로 경영직과 전문직에 종사하고있는 고졸학력의 재직일군으로서 분망한 직업생활속에서도 평생교육프로그람을 선택하여 자신의 문화소양을 쌓고 문화안목을 갖추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들의 다년간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사업상의 진보는 이들을 가르치는 대학교 선생님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으며 지역사회의 존경과 인정을 받도록 했다. 연변녀성들이 17년간 평생교육을 매개로 직업녀성으로서 경제력 상승과 그에 상응한 문화적소질, 문화적안목을 갖추려는 노력은 격조높은 화책을 통해 집중적으로 보여지고있다.   현재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의 회원들을 대표적인 사례로 연변 조선족녀성들 사이에서 문화적인 여가생활수요와 실천활동은 폭발적으로 표현되고있다고 할수 있다. “연변시랑송협회”, “코끼리엄마클럽”, “명동서예교실” 등등 조선족녀성들의 학습공동체에서는 정기적으로 학습과 작품발표 등 모임을 조직하여 녀성들의 수요를 만족시켜주고있다.    연변 조선족녀성공동체의 문화적인 안목으로 실천되고있는 각종 학습프로그람들이 연길시를 평생학습도시로 구축해가는데 주요한 밑거름으로 역할하게 될것이라는것을 저자는 확신하고있다.   [김화선 략력]   김화선, 녀, 1969년 출생, 소속: 현재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주임, 연변대학 사회학과 부교수   학력: 리화녀자대학교 녀성학과 박사, 연변대학 정치학부 학사   저서: 《조선족마을의 변천연구》(2012년), 연변대학출판사. 출처: 인민넷 
46    신집거지에서의 민족학교 교육에 대한 사색 댓글:  조회:1912  추천:1  2017-03-13
신집거지에서의 민족학교 교육에 대한 사색 리상우 조선족 지성인들은 오래전부터 차세대 민족교육과 민족교육의 혁신과 관련해 고민과 실천을 이어왔고, 최근 정음문화칼럼 등 온라인에서의 열띤 론의도 이러한 연장선에 있다고 볼수 있다. 필자는 수년전부터 “신집거지에서의 민족교육”이라는 테마로 청도에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해오고있다. 조사와 연구를 하면서 필자가 지속적으로 던졌던 질문은 “청도(또는 조선족 신집거지)에 거주하는 조선족 학부모들의 학교교육 선택의 동기는 무엇일가?”였다. 조사와 연구는 비록 조선족 사립학교(정양학교와 서원장학교) 두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공립학교가 없는 현에서 사립학교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앞으로 청도(또는 조선족 신집거지)에서의 조선족 공립학교 설립 및 그 향방과 관련해 어느 정도의 해답을 줄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조사결과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민족정체성 유지”보다는 “민족정체성 유지+실리 추구”를 위해 조선족학교를 선택한 학부모들이 많았다. 즉 존대말를 포함한 언어, 본 민족의 례의범절이나 문화를 습득하기 위한것과 더불어, 한국이라는 자원의 활용(또는 장래 목표는 한국류학), 조선족 학부모들간 비지니스 인맥 형성, (학부모가 맞벌이일 경우) 기숙학교의 장점 등 실리적요인도 무시할수 없는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미래지향적이고 선진적인 교육리념과 방식, 교육콘텐츠 등은 학부모들의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 조선족의 전통집거지인 연변의 “소인수 학급교육”(연길시 연신소학교)이 민족교육의 문제점들인 민족학교의 통페합, 학생수의 감소, 언어교육의 어려움, 능력있는 교원의 감소, 교원 수급의 어려움, 학교 재정의 곤난, 가정교육의 붕괴 등을 해결하는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아, 매달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역의 교사들이 연신소학교에 모여 모델에 대한 교육을 받고, 수업을 참관할 정도라고 한다. “소인수 학급교육”은 일종의 “열린 교육”으로 서로 돕고, 서로 배우는, 토론하고 합의해나가는 과정으로서 수업을 진행하는것을 핵심으로, 학급당 학생수를 20-30명 이하로 편성, 교장실, 교무실을 없애고 교무행정을 철저히 민주적으로 시행하면서 학생과 교사와의 관계를 수직적관계에서 수평적관계로 재정립, 수업시간을 40분으로 줄이는 등 내용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청도 조선족 사립학교의 경우, 교육리념과 방식, 교육콘텐츠 면에서 어떠한 칭찬할만한 또는 특이한것들이 있는가? 정양학교는 “바른 교육, 밝은 교육”을 교육리념으로 내세우고있는데, 특히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것은 다른 학생식당에서는 볼수 없는 “맛있게, 즐겁게, 깨끗하게, 감사히 먹겠습니다”라는 패말이었다. 또한 서원장학교의 경우는 “인성교육”을 교육리념으로 내세우면서, “10가지 상”을 만들어 10가지 상중 7가지 이상에서 “상”을 받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3호(품행, 공부, 신체건강)학생”의 경우, 선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학업성적이라면, “10가지 상”에서는 그 1순위가 “효도상”, “학습상”은 9순위에 머문다. 더욱 놀라운것은 어느 한족학생 학부모와의 인터뷰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본인이 조선족학교를 선택한 가장 중요한 리유가 례의범절에 대한 교육때문이라는 점이다. 한편, 정양학교는 자매결연과 협약 등의 형식으로 연변대학과 한국 유수대학의 교육자원을 활용해 교육리념과 방식의 지속적인 혁신을 도모하고있다. 더불어 정양학교는 청도의 조선족대학생련합회와 지속적인 협력을 도모하고있는데, 같은 민족간의 교류가 민족정체성, 정서적뉴대감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볼 때, 이른바 “조선족공동체의 해체”를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조선족대학생들에게는 재능기부의 기회를, 그리고 후배들인 중소학교 학생들에게는 민족정체성 강화의 기회를 부여하고있는것이다. 아울러 정양학교와 서원장학교가 내세우는 “1인 1특기”의 장기(特长)교육, 매학기 1회 이상의 학교 지도자와 학부모의 1대 1 면담, 그리고 최근 들어 한국 대원외국어고등학교(한국 최고의 외국어고등학교)와의 협력을 통해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부 학생들을 상대로 영미권대학반, 중국대학반, 한국대학반을 별도로 운영하고있어 많은 학부모들의 관심을 받고있다. 신집거지에서의 민족학교 교육에 대한 기존의 론의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체로 교육환경이라는 구조적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공립 민족학교 설립의 당위성만을 강조하는것이 아닐가싶다. 물론 필자는 교육환경이라는 구조적요인이 신집거지에서의 조선족 민족교육의 발전을 저애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임에 공감하고있고, 더불어 신집거지에서의 공립학교 설립을 위한 노력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그럼에도 필자는 행위자인 학부모들의 선택 동기, 즉 학교나 교육 프로그람의 다양성은 역으로 학부모들에게 선택의 딜레마를 야기시키며, 학교(민족학교)의 선택은 결국 비용, 교육리념과 방식, 교육의 질과 효률성 등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한 학부모들의 전략적결정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민족교육이 서비스에서 경쟁력을 갖출 때 조선족학생은 믈론 한족학생 학부모들에게 조선족학교 선택의 동기부여를 할수 있고, 또한 그러한 리유에서 례의범절 교육때문에 조선족학교를 선택했다는 그 한족학생 학부모의 말씀을 되새겨봐야 하는것이 아닐가. 【리상우 략력】 성명: 리상우(李翔宇) 소속: 중국해양대학 조선어학부 전공: 조선반도문제, 동북아국제관계사 학력: 한국 서강대학 정치학 박사 연변대학 법학 석사 동북사범대학 법학 학사 경력: 한국 서강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연변대학 사회과학부 강사를 거쳐 현재 중국해양대학 한국연구센터 전임연구원, 중국해양대학 조선어학부 강사. 주요 론저: 《초국적 이주, 중국조선족과 경계설정》(《한국과 국제정치》, 2015) 、《신집거지와 중국조선족의 민족교육 실태 분석: 칭다오 정양학교 사례를 중심으로》(《동아연구》, 2014) 、《개혁기 중국조선족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 구심력과 원심력을 중심으로》(《동아연구》, 2007) 등 다수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인민넷
45    중국조선족의 '근대성'을 상상한다 댓글:  조회:1737  추천:0  2017-02-28
중국조선족의 "근대성"을 상상한다 박우 얼마전 정음문화칼럼을 비롯해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조선족 차세대(혹은 청소년) 교육과 관련된 작지 않은 토론이 진행되였습니다. 선배 교육자들의 조선족교육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지극한 고민을 보면서 한편으로 이분들이 존경스럽고 다른 한편으로 이런 문제가 조선족사회의 핵심문제중 하나이지만 다른 관심사들때문에 조금 등한시한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더군요. “교육지백년대계”라고 한 민족과 공동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제도인 교육문제가 오늘날 조선족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로심초사하시는분들의 공통의 관심사가 되였고, 저도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옅은 고민을 공유해보고싶었습니다.    조선족민족교육의 “시초”라고 할수 있는 서전서숙과 함께 연변지역에 다양한 교육주체들이 등장했다는것은 익히 알려진 력사입니다. 일제에 의해 서전서숙이 해체된후 “(위)간도보통학교”가 들어서면서 민족교육이 왜곡되기 시작한 깊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일명 보통교육의 등장이라는것은 보편적 행위와 사유의 주체를 양성하는 기관이 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누구의 시각에서 “보편적”인가의 문제는 별도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서양 선교단체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들이 연변지역에서 근대적 계몽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요. 어찌 되였든 연변은 근대교육(또는 근대민족교육)의 요람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 이러한 교육기관들은 일제히 중화인민공화국의 “보통”교육기관으로 재설정 되였고 조선족의 중국에서의 공화국창립 공헌에 힘입어 이 보통교육기관들은 아주 당당하게 중국의 공식적 교육기관이 되였지요. 심지어 상당한 수준의 학교시설들이 한족학교로 활용되면서 연변의 조선족교육(시설)이 연변의 한족교육을 도와주는 민족 대단결의 우수성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조선족학교들은 사회주의적 행위와 사유의 주체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될수 있었습니다. 참 흥미로운것은 사회주의건설시기 조선족학교의 약진이 매우 두드러졌다는것입니다. “소를 팔아 자식을 교육시킨다”는 조선족의 교육열은 사회동란의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현실 반영되였고, 그 성과로 1950~1970년대에 보통교육을 받은 조선족선배들이 1980년대의 개혁개방시기 중국의 주류사회에 당당하게 진입할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사회주의건설시기는 동북지역이 ‘공화국의 맏아들’로 불렸던 시기이고 동북적 문화가 관내로 확장 및 전파되는 호황기였기에 선진적인 교육시설에서 교육받은 조선족선배들의 당당함과 자신감은 굉장했을것입니다.    조선족교육의 이러한 제도적, 문화적 선진성의 관성은 개혁개방시기에도 이어져왔습니다. 단순히 고중 및 그 이상 학력 비률의 정량지표를 보면 1990년 조선족은 30.5%, 중국 평균은 13.4%, 2000년 조선족은 33.4%, 중국 평균은 15.8%, 2010년 조선족은 41.9%, 중국 평균은 24.5%입니다. 상당히 성공적이였습니다. 성공적 교육제도는 조선족의 중국 내의 사회경제적 활동에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조선족의 국가기관, 사회조직, 사업단위 관리자나 기업 책임자의 비률은 3.7~4.1%였습니다. 이 비률은 같은 시기 중국 평균의 2~2.5배 수준이였습니다. 전문기술자의 비률은 12.0~13.5%였는데 이 역시 중국 평균의 2~2.5배 수준이였습니다. 사무직(화이트칼라)의 비률은 3.1~6.5%였는데 중국 평균보다 높았습니다. 이렇게 중국조선족은 아주 당당한, 교육받은 중국의 구성원으로서 역할하고있습니다.    앞에서 제기했던 문제로 다시 돌아와보겠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조선족민족교육의 방향이 정확하게 정해져있지 않고, 입시위주의 교육을 하다보니 소질(또는 소양)교육이 뒤쳐졌고, 학생들의 독서량이 부족하니 대학교 및 그 이후 단계의 경쟁에서 다른 민족 학생들과의 비교우위는커녕 오히려 렬세에 처해있다는 등의 우려를 제기하셨습니다. 솔직히 저도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저도 나름 “(민족)교육의 방향이 정확하게 정해져있는” 환경에서 교육받은 세대였습니다. 공부외에도 렬군속, 오보호 가족을 방문하고 방학에는 소조공부를 하면서 사회봉사와 공동체적 정신을 제도적으로 수립할수 있었습니다. 교과서외에 나누어주는 《과외독서선문집》 등 도서는 국내외 훌륭한 사람들을 공부하고 지식의 량을 확대하는 수단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공업화의 엔진이였던 동북에서 생활했고 개혁개방 이후 전반적인 경제적 규모가 커지는 과정에 교육을 이수한 세대가 현재 조선족의 30대 중후반~50대 중후반의 중견세대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공업발전의 위용을 뽐내던 동북3성은 현재 중국 경제발전의 꼴찌 1~3위 지역으로, 그리고 전국 경제성장률도 예년같지 않은 변화된 구조적 환경하에서 어떤 시각과 마음가짐으로 조선족 차세대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그리고 주제넘게라도 “걱정” 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한것 같습니다. 현재 자라나는 이 친구들의 사유는 지엽적이지 않고 굉장히 글로벌화되였습니다. 한국, 일본에 대한 익숙함은 물론 영미권에 대한 관심도 굉장합니다. 이 친구들은 소비지향적입니다. 산업(공업)도시의 매캐한 매연보다 소비도시의 백화점과 스마트기기가 더 익숙한 세대입니다. 이 친구들은 도시적입니다. 촌스러움을 너무 싫어하고 옥수수잎과 담배를 구분하기 어려워할수 있는 세대입니다. 이 친구들은 보다 개인주의적입니다. 불리익을 당하면 바로 화를 낼줄 압니다. 이 친구들은 은근히 가족주의적일수 있습니다. 조선족사회의 본격적인 핵가족화가 이 친구들 세대부터 시작되였으니 말입니다. 이 친구들은 자기애가 강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자신이 잘하는것은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개성이 강합니다. 이 친구들은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성공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때문입니다. 이 친구들은 우발적이기도 합니다. 먼저 저지르고 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 친구들은 승부욕이 강합니다. 이 친구들은 어쩌면 말주변이 부족할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 친구들이 생각이 없는게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들이 이 친구의 언어로 질문하지 않았기때문일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재 조선족청소년들은 다양한 주체들로 구성되였습니다. 한 개인일지라도 다양한 주(정)체성으로 구성된 “상황적” 자아의 소유자였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전통농경문화적이고 단위제도적인 발상으로 생각하면 상당히 문제있는 친구들이지만 세계가 변화한것에 비춰보면 너무 잘 적응한 친구들이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친구들이 사회의 일원이 됨에 있어서 기능적 또는 자격적으로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한 얘기는 이들에게 미래의 사회상을 보여주고 그러한 사회에 적응함에 있어서 장점이 무엇이라는 자신감을 심어주는것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아주 작은 한 사례로 요즘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얘기가 흔하게 나옵니다. 거기에 더해 “로보트밀도(Robot Density)”라는 용어도 나왔습니다. 로동자 1만명 당 로보트 보급대수를 말합니다. 일본이 314대로 세계 2위, 독일이 292대로 세계 3위, 1위는 한국으로 로보트밀도가 478대입니다. 현재 중국은 36대에 불과한데 2020년까지 150대로 증가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우리가 위치한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이 지리적 령역의 로보트밀도를 보면, 어쩌면 현재 자라나는 조선족청소년들이 본격적으로 로동시장에 진입했을 때 경쟁대상은 인간이 아닌 로보트가 될수 있거나, 로보트한테 도태된 인간이 될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저의 년령대 사람들조차도 “안정”적으로 직장을 퇴직할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인공지능으로 2억 4천만자의 한문 고전 “승정원일기”를 번역한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인구절벽으로 인한 인력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산업계는 로보트의 도입을 대량화한다고 하지만 이는 동시에 직접적으로 고용유연화, 대량실업, 로사분쟁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갈등 등 일상생활의 일련의 문제를 야기할수도 있습니다. 이런 구체적인 미래, 또는 이미 다가온 현실적 미래 앞에서 현재 자라는 조선족청소년들은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해야 할가요?   년륜과 경륜의 풍부함은 미래에 대한 예측과 인지를 동반합니다. 자라나는 조선족청소년들이 어떠한 인재가 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너는 어느 민족이고, 어느 나라 사람이기때문에 이런걸 해야 한다”는 식의 이들 “객체의 귀속성”과 그에 기초한 기능적 제고에 대한 조언도 중요하지만 우에서 언급한 “주체의 구성”, 즉 정체성에도 각별히 주목해야 하는게 아닌가싶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미래의 먹고사는 문제에 천착해서 이들이 잘 하는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온라인 상에서의 토의를 넘어 정기적이고 정식적인 론의와 고민들이 집대성되고 이 집단지성이 더욱 훌륭한 조선족청소년들이 글로벌시대의 주류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박우 략력】   성명: 박우(朴佑)  소속: 한국 한성대학 교양교직학부 전공: 이민사회학, 정치사회학, 동아시아 이주와 시민권 문제, 한국의 조선족 사회   학력: 한국 서울대학 박사과정 수료 한국 서울대학 사회학 석사 연변대학 식품공학 학사   경력: 한국 한성대학 교양교직학부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조교수.  주요 론저:  편저로는《우리가 만난 한국(2012, 한국, 북코리아)、역서로는 《한국과 중국의 사회변동 비교연구》(2013, 한국, 나남), 《중국 동북지역 도시사 연구》(2016, 한국, 진인진)등. 출처: 인민넷 2017-2-27
44    도시화, 국제화 시대의 조선족과 그 대응 댓글:  조회:1769  추천:1  2017-02-24
도시화, 국제화 시대의 조선족과 그 대응 최학송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온 과경민족이다. 19세기후반으로부터 시작된 조선인의 중국 이주는 1945년 일제 패망 당시 근 200만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패망을 계기로 이중의 절반 정도가 조선반도로 돌아갔으며 나머지 절반인 근 백만명은 계속 중국에 남아 생활해왔다. 이렇게 중국에 남은 조선인과 그 후손들이 우리가 오늘 말하는 조선족인것이다.    오늘날 조선족 인구는 근 200만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중의 절반 정도가 또다시 동북을 떠나고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조선족은 이주 초기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동북삼성에 모여 벼농사를 위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면서 생활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이후, 특히는 1992년의 중한수교를 계기로 조선족은 장기간 생활해오던 삶의 터전을 떠나 해외로 관내로 이주하여 도시적삶을 살아가고있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족이 7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이나 미국 나아가서는 유럽에도 적지 않은 조선족이 생활하고있다고 한다. 통계마다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일본에만도 적어도 몇만명은 있는것으로 추정된다. 이외 북경, 상해, 광주, 청도, 위해 등 중국 연해지역에 진출한 조선족도 적어도 20, 30만명은 될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조선족 인구의 절반이상이 동북삼성을 떠나 연해도시나 해외에서 도시적삶을 살아가고있다. 이제 조선족은 더는 농경민족이라고 할수 없을것같다.   “세계”라는 말은 불교에서 나왔다고 한다. “세”는 시간을 가리키고 “계”는 공간을 가리킨다. 시간과 공간은 만물이 존재하는 기본형식으로서 사람들의 인식, 즉 세계관도 특정한 시간과 공간속에서 형성되는것이다. 조선족이라는 군체는 20세기 동북이라는 시공간속에서 형성된것이다. 때문에 오늘날 “조선족”이라는 단어가 갖고있는 내포, 다시말하면 “조선족”하면 떠오르는 이주, 개척, 투쟁, 벼농사, 사과배, 주덕해 등 사건이나 인물들도 대부분 20세기 동북이라는 시공간과 밀접한 련관을 갖고있다.   20세기라는 시간은 이미 과거가 되버렸다. 그리고 동북이라는 공간도 지금 바야흐로 과거형이 되고있는 실정이다. 북경, 상해 등 연해지역이나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해외에서 새롭게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여 살아가는 조선족들에게 동북은 차츰 과거형으로 돼버리고있으며 이들의 자식세대에 이르러서는 동북은 선조들이 한동안 살았던 곳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과거가 되여버린 시간은 력사를 통하여 되돌릴수 있으며 공간은 려행을 통하여 체험할수 있다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조선족이라는 군체의 지속적인 발전을 담보할수 없다.    “조선족”이라는 이 이름속에 부단히 새로운 공통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내용물을 보충해넣지 않는한 언어와 문화, 력사를 배우는것을 통한 정체성 보존은 한계가 있을것이다.    20세기 조선민족이 살길을 찾아 해외를 떠돌면서 중국조선족, 고려인, 재일조선인, 재미조선인 등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하위 분류를 만들어낸것처럼 21세기 조선족도 그 나름의 하위분류가 생기지 말란 법이 없다. 그리고 그런 하위분류가 외부의 충격과 흡인력에 어느 정도의 저항력을 갖고있을지도 궁금하다.   때문에 조선족 지성인과 매체는 그 힘을 모아 각지에 분산되여 살아가는 조선족들에게 력사를 통한 과거를 배워주는 동시에 조선족이기에 가질수 있는 기회와 우점들을 공유시키는것을 통하여 세계를 무대로 하는 21세기 조선족의 새로운 력사를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 “조선족”이라는 이름의 내포를 부단히 보충하고 갱신하여 조선족이라는 군체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죤 등 전통매체의 전파범위가 오늘날 조선족의 거주공간을 아우르지 못한다면 인터넷홈페이지나 스마트폰을 활용한 위챗공공계정(微信公众号)과 같은 신흥매체를 통하여 조선족을 하나로 묶을 가능성은 있다.   문제는 조선족을 하나로 묶는 매체를 채울 내용물이다. 조선족이기에 가질수 있는 기호와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콘텐츠의 발굴이 시급하다. 물론 이런 내용물은 조선족이라는 신분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당지 사회와의 거리감과 반감을 조성해서는 안될것이다. 이는 조선족후속세대들에게 정체성 혼란만 가중시킬것이다.    【최학송 략력】   성명: 최학송(崔鶴松)  소속: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전공: 조선족문학, 재중조선인문학 학력: 한국 인하대학 문학 박사 연변대학 조문학부 문학 학사 경력: 현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부교수   주요 론저:  저서로는《재중 조선인 문학 연구》(2013)、《주요섭 연구》(2014), 역서로《1946년 북조선의 가을》(2006)이 있으며, 이 외에 《‘만주’체험과 강경애문학》(2007) 등 론문 20여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43    조선족 차세대 언어교육에 대한 사색 댓글:  조회:1811  추천:1  2017-01-24
조선족 차세대 언어교육에 대한 사색 안성호 요즘 정음문화칼럼에서 민족교육이 주된 테마로 론의되고있다. 민족교육 패러다임, 차세대 가정교육, 주말언어학교, 조선족 교육질, 독서 등 여러 분야에서 열띤 의론들이 진행되고있다.   과거의 민족교육은 주로 민족집거지의 조선족학교가 주축이 되여 이루어졌으며 민족문화의 전승과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조선족학교 졸업 학생들이 우리 민족 문화 전승과 발전의 주축이 되고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듯 하다. 하지만 조선족집거지의 위축과 더불어 조선족 민족학교들이 지속적으로 위축되고있고 민족학교에 다니고있는 학생수도 점차 줄어들고있다. 마을마다 소학교, 향, 진마다 중학교 현성에는 완전중학교라는 기초민족교육체계는 빠른 속도로 위축되고있다. 최근 보도에서 본 화룡 평강벌의 신흥소학교는 90년대까지만 하여도 100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고있었지만 현재는 합병된 광흥중학까지 합하여 100명 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그나마 연변지역의 민족교육은 잘 유지되고있는편인것 같다. 흑룡강성의 경우 현재 농촌지역 조선족학교는 거의 전무한 상태로서 현성이나 시에 한개의 소학교와 완전중학교가 민족교육의 명맥을 이어가고있다. 학생수 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조선족고중들은 한족반, 류학생반 등 여러모로 학생규모를 확대하여 학교를 운영하고있다.   위축된것은 학생수뿐만 아니다. 필자가 고중을 다닐 때까지만 하여도 완전히 우리말로 교류를 진행하였고 한어는 대학교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였다. 할빈 같은 대도시의 조선족학교들에서도 2000년대 초엽까지만 하여도 일부 학생들이 우리말을 잘 못하는 외에 대다수 학생들의 일상적인 교류용어는 우리말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동북 산재지역에서 대도시뿐만아니라 현성의 조선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마저 일상용어가 한어이다. 조선어는 다만 부모, 조부모한테서 듣고 조선어수업에서만 듣고 배우는 제2언어로 전락되고있다. 이로 인하여 조선족학교들에서 한어를 병행하여가면서 조선어를 가르칠수 밖에 없는 현상들이 점차 많아지고있다. 일부 학부모들은 우리말 배우라고 조선족학교에 보냈는데 왜 이리도 못하냐 라고 한탄하고있다고 한다. 이는 어느 개개인이나 학교 혹은 학부모의 책임이 아니다. 성장하고있는 전반적인 언어사용환경이 크게 변하였고 편부모 등 가정, 사회 교육 환경의 변화가 민족교육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있는것이다.   일상용어가 한어로 되였다고 하여 한어수준이 높아진것도 아닌것 같다. 근년에 한어교과서가 많은 질적향상을 이루었고 일부 조선족학교들에서 직접 한족학교 한어교과서를 사용하고있다. 하지만 과외독서에 의한 지적축적 등이 따라가지 못함으로 하여 한어수준에서 한족학교 졸업생들과 일정한 거리가 있다. 상세한 현장조사가 필요하지만 소학교시절에 진행되는 당시(唐诗)암송, 초중부터 이루어지는 문언문(文言文)교육 등에 대한 기초적축적이 많이 결여되여있는것 같다.    동북 이외 지역의 경우, 우리말 교육은 보다 심각한 상황에 처하여있다. 민족학교가 없는 상황에서 현지어가 주요 사용언어가 되면서 글로벌확산과 더불어 조선족 차세대들의 제1언어도 다양화되고있다. 필자의 조카들의 제1 사용언어만 살펴보더라도 이미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완전히 분화되여있다. 우리말 교육 혹은 중국어 교육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조카들사이의 언어적교류는 점차 단절되여가고있다. 이는 아마 필자만이 느끼고있는 상황만은 아닌것 같다. 조선족의 우세였던 이중언어전승이 어려워져 한국과 중국에서 사는 사촌형제간에 만나서도 언어교류가 아닌 신체적교류로 함께 놀고있는 현상들은 아마 개별적인 현상은 아닌것 같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부모세대의 친척들과 함께 모여도 사촌, 륙촌 되는 형제들이 언어가 통하지 않아 영어로만 교류가 가능해지지 않을가 하는 우려가 없지는 않다.    상해지역 조선족에 대한 설문조사결과를 보면 조선족자녀들이 한어를 매우 잘 한다 와 잘 한다를 선택한 수가 262명으로서 전체 응답수의 67.2%를 차지하고있지만 영어와 조선어에 대하여서는 133명, 111명으로서 34.1%, 28.5%를 차지하였다. 반면 한어, 영어, 조선어 구사능력이 비교적 모자라다, 모자라다를 택한 수는 각기 53명, 129명, 164명으로서 전체 응답수의 13.6%, 33.1%, 42.1% 를 차지하고있다. 즉 조사를 받은 상해지역 조선족자녀들의 우리말 수준이 외국어인 영어에도 미치지 못하는 제3언어로 자리매김되고있는것이다. 일본이나 미국 등 지역의 경우, 가정 외에 거의 우리말을 접촉할 기회가 없음으로 하여 현지 언어화가 가속화되고있다.   글로벌시대에 영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지만 결코 영어만 잘하여서 되는것도 아니다. 다양한 정보, 자본, 민족, 문화가 다양하게 교류되고있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정보에 대한 리해와 포착 능력이 필요하다. 이중, 삼중 언어의 구사와 언어를 통한 문화리해능력은 글로벌시대의 흐름에 대한 리해에 많은 도움이 되고있다.   조선족사회는 개혁개방이후 한중일 언어우세를 리용하여 타민족들보다 쉽게 글로벌변화를 파악하고 글로벌흐름을 따라 세계 각지로 확산되면서 삶의 질적향상을 이룩할수 있었다. 하지만 글로벌시대 조선족 차세대들의 다원문화우세는 지속적으로 상실되고있다. 세계각지로 확산되고 현지어가 제1언어로 되는 현황하에서 앞으로 조선족들을 이어놓을수 있는 고리는 무엇일가 하는 의문마저 들게 된다.    다행히 각지에서 조선족지성인들이 주말우리말학교 등을 통하여 차세대들에게 우리말 교육을 진행하고있다. 한국이나 일본의 우리말학교들에서는 중국어, 한국어, 영어 등 다중언어교육을 진행함으로써 조선족 차세대들의 최대한 다중언어우세를 살리려고 노력하고있으며 커다란 성과들을 이룩하고있다. 주말우리말학교는 이미 동북 이외 지역 조선족들이 우리말과 민족문화를 배울수 있는 중요한 거점과 구심점으로 되고있다. 상해지역 조선족들에 대한 조사만 보더라도 차세대들이 우리말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가정(80.5%)과 주말우리말학교(33.8%)였다.    시대적상황이 많이 바뀌여진 상황에서 동북지역 조선족학교들은 이중언어교육을 보다 강화하고 동북 이외 지역은 주말학교, 민족학급, 외국어학원, 가정교육 등 현실조건에 알맞은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고 서로 결합하는것이 앞으로 조선족 차세대들의 언어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가 생각한다. 이는 지성인, 지역조선족사회네트워크, 학부모가 유기적으로 협조하고 연대를 꾸며나가야만 가능하다.   글로벌시대는 다원문화시대이고 다중언어시대이다. 이는 조선족사회의 현재까지의 우세였고 글로벌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할수 있는 자원이였다. 차세대들에게 다원문화에 대한 리해력과 다중언어능력을 키워주는것은 조선족 지성인과 부모들의 책임과 의무이며 글로벌 조선족을 이어놓을수 있는 중요한 련결고리이기도 하다.   [안성호 략력]   성명: 안성호(安成浩)    성별: 남   출생년월: 1976   소속: 절강대학 한국연구소   전공: 력사학, 문화인류학, 지역문화연구, 조선족사회   학력: 일본 고베대학 학술 석사, 박사 할빈사범대학 력사학 학사   경력: 일본국립민족학박물관 외래연구원 등을 거쳐 현재 절강대학 한국연구소 부교수   겸직: 절강성중한경제문화교류연구회 비서장  중국사회학회 중일전업위원회 리사 겸 부비서장   주요 론저:  저서로는 《族群社会发展与变迁: 朝鲜族社会调查研究》(浙江大学出版社), 편저로는 《韩国研究》12辑, 13辑 등이 있으며, 주요론문으로는 《中日韩海洋文化研究动向与展望》, 《문화적 자각을 통한 조선족문화의 변화양상》, 《문화적 시각으로 보는 조선족과 축구》, 《在日中国朝鲜族社会网络与文化适应》 등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인민넷/2017-1-23
42    조선족로동력 해외수출과 그 사회적영향 댓글:  조회:1938  추천:1  2017-01-24
조선족로동력 해외수출과 그 사회적영향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및글로벌전략연구원 리천국 글로벌경제시대, 경제적요인은 인구류동을 야기시키는 가장 주요한 추동력이라고 볼수 있다. 중국조선족사회에서 로동력수출붐이 일게 된것도 국내 경제개혁의 진척과 해외 국가의 인구구조와 산업 로동력수요에 기인한것으로 귀결된다. 1979년부터 우리 나라 정부는 국유기업의 자주권을 확대하는 조치를 시범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하였고 1993년부터는 본격적인 현대기업제도의 건립을 목표로, 국유기업의 경영메커니즘을 전환하고 정부와 기업의 경영을 분리하는 국유기업개혁을 진행하였다.    국가의 이런 국유기업 개혁조치에 따라 정부는 수많은 경영상황이 악화되였거나 효률성이 낮은 국유기업을 규정된 법적절차에 따라 재조합하거나 파산시켰는데 이는 대량의 실업인원을 사회에 배출하였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에 많은 국유기업이 문을 닫게 되였고 사회에 갑자기 나타난 대량의 정리해고인원들의 재취업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였다. 특히 우리 나라 동북지역은 수십년간 전국의 전통적인 공업기지로 불리우면서 자동차, 강철, 기계, 화학, 석유 등 제반 제조업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었지만 경제개혁이 심화됨에 따라 경영효률면이나 생산기술과 전략 등 면에서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이로 하여 많은 중소형 국유기업이 파산위기에 빠지게 되였고 우리 나라의 실업률은 사상 최대치에 달하게 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국가는 1960년대로부터 경제고속성장을 이룩하여왔고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확대와 더불어 빠르게 확대되는 생산에 투입될 대량의 로동력이 필요하였다. 커다란 경제소득과 임금의 격차는 초국경의 인구류동을 추진하였고 또 이러한 인구류동은 실제적으로 우리 나라 실업률 해소와 지역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조선족지역을 례로 들면 로동력수출을 통하여 연변지역의 인구당 저축액은 이미 길림성과 전국 평균 인구당 저축액을 훨씬 제쳤고 소비와 문화 등면에서도 빠른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20여년간 로동력수출규모의 확대에 따라 이에 대응된 과학적인 관리와 제도적설계가 부족하였고 사회적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로동인구의 해외진출은 지역의 균형적인 인구구조를 파괴하였고 로동가능인구의 비례를 대폭 감소시켰다. 연변지역을 봐도 조선족인구비중이 련속 10여년간 하락하고있으며 특히는 전사회적으로 청년의 인구비중이 줄어들고있다. 도시보다도 농촌의 경우 이런 인구구조특징은 더욱 선명한바 이러한 인구감소로 인하여 조선족농촌마을은 점차 축소되고있으며 빈 마을과 빈 집들이 허다하다. 농촌마을은 인력의 부족으로 하여 생기가 부족하고 농촌사회경제가 점차 위축되고있다. 청장년로동력의 결핍은 농업기술의 보급과 응용에 불리할뿐만아니라 농촌경제를 부흥시키고 현대화적인 농촌을 건설하는데에도 불리하다.    로동력수출의 사회적인 문제는 농촌지역뿐만아니라 도시에서도 나타나고있다. 청장년로동력의 수출로 하여 가정의 자녀교육이 소홀히 되고있는데 이는 민족사회의 교육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고있다. 특히 기초교육은 전체 교육구조에서의 기본으로서, 기타 단계의 어떠한 교육이 대체하거나 릉가할수 없는, 심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단계로 볼수 있다. 기초교육을 통하여 기본적인 문화, 력사와 민족에 대하여 배울수 있을뿐만아니라 종합적인 소질을 키우고 량호한 습관과 품질을 형성할수 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불리울 정도로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고있지만 이를 소홀히 한채 해외 로동력 수출때문에 자녀에 대한 기초교육이 결여되고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온다면 이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해외 로동력 수출의 궁극적인 목적이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한것이라면 자녀의 교육을 대가로 치르는것이 구경 목적을 달성하고있는것일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리천국 략력]   성명: 리천국(李天國)    성별: 남   출생년월: 1979.7   소속: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전공: 신흥국경제, 한국과 조선 경제, 중국거시경제 등   학력: 한국 서울대학 경제학 박사   연변대학 경제학 석사   연변대학 경제학 학사   경력: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조리연구원.    주요 론저:    2008 년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한국경제의 미래설계》 (정덕구 저, 21세기북스, 2006년)를 공동 번역, 2005년 《대두만강지역개발》 부주필, 《新兴经济体蓝皮书: 金砖国家发展报告2014》,《印度洋地区蓝皮书: 印度洋地区发展报告2014》 등 집필에 참여.    《经济管理》,《经济地理》,《人口学刊》 등 국내외 학술지에 30여 편의 경제학 논문을 발표. 이 외에 《경제일보》(经济日报), 《상해증권보》(上海证券报) 등 신문에 경제학 관련 문장을 다수 발표. 인민넷/ 2016-1-17
41    독서를 즐기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한다 댓글:  조회:1833  추천:1  2017-01-11
독서를 즐기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한다 손경란 “정음문화칼럼 48”에 실린 “조선족교육질 저하에 경종을 울릴 때다”라는 글을 읽고 교육현장에 몸담고있는 교원으로서 또 9살 남자아이를 둔 가장으로서 똑같은 고민을 한적이 있고 생각되는바가 있어 글로 적어본다. 실제로 조선족교육현황을 살펴보면 대학입시률은 타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지만 대학에 입학한후의 실제 능력발휘는 저하되여있는것이다. 다시말하면 입시시험에서의 높은 성적과 실제 소질능력은 비대칭관계에 놓여있다고 말할수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가? 물론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필자는 독서부족에 따른 사고력의 저하가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저명한 교육학자 주영신(朱永新)교수님은 독서와 관련하여 아이들을 네 부류로 분류하였다. 첫째 부류는 교과서 공부를 하기 싫어할뿐만아니라 과외독서도 싫어하는 아이들인데 이런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무지몽매하다. 둘째 부류는 교과서 공부를 잘 할뿐만아니라 과외독서를 즐기는 아이들인데 이런 아이들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셋째 부류는 교과서 공부만 잘하고 과외독서를 하지 않는 아이들인데 이런 아이들은 일정한 단계까지 발전하면 자신의 능력에 한계성을 느끼며 결함이 속출한다. 넷째 부류는 교과서 공부를 싫어하고 과외독서만 즐기는 아이들인데 이런 아이들은 시험성적이 리상적이지 못한탓으로 진학, 취업면에서 장벽에 부딪칠수 있으나 농후한 독학흥취에 힘입어 얼마든지 자신의 일자리를 찾거나 창출한다. 깊은 사색을 이끌어내는 글귀라 아직도 머리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필자는 우리민족의 대부분 대학생들은 셋째 부류에 해당한다고 본다. 전면적인 사전조사가 없이 단지 대학교 교육현장에서 느낀 소감에 따른 판단임을 말해둔다. 이들은 분명 학교교육을 통한 교과서 공부에 성공한자들이다. 진학을 겨냥한 교과서 지식에 대한 열공과 대학입시에서의 소수민족 특수혜택을 통해 높은 성적으로 명문대학 혹은 중점대학에 진학할수 있는 기회를 얻을수 있게 된다. 하지만 대학교 공부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똑같은 교과서 공부방식으로 지정된 한두권의 교과서나 해당 참고서에 대한 공부를 통해 학기말 성적에서 좋은 성적을 따내여 국가장학금생, 학교 1, 2등 장학금생 명예를 획득할수 있다. 하지만 종합적인 소질능력을 필요로 하는 론문작성, 사회실천프로젝트, 학술활동 등 분야에서 좋은 성과물을 내놓지 못하고있거나 혹은 참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는 과외독서 부족에 따른 사고력 혹은 창의력의 결여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고력은 다양한 분야의 독서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만큼 우리민족 학생들의 과외독서량이 엄청 부족한 상황이라는것을 말해준다. 과외독서량이 부족하면 사고능력이 저하되고 사고능력이 저하되면 말하기능력이나 문장능력은 떨어질수 밖에 없다. 필자의 유년기에서 대학시절까지를 돌이켜보면 역시 셋째 부류에 속한다고 말할수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소학교부터 시작해서 참 공부를 좋아했던것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교과서 공부에만 한정되여있었다. 과외서적이라고는 학교에서 통일적으로 주문하는 “꽃동산”, “소년아동”, “소년보” 등 서너가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끈질긴 교과서 공부 덕분에 대학교에 순리롭게 입학할수 있었고 또 운좋게 대학 강단에 설수 있게 되였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보니 뒤늦게야 과외독서의 재미와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후 한동안은 도서선택의 방황기를 겪으면서 홀로 좋은 책을 선택해서 구입하고 또 몰입하여 독서할수 있는 경지에 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지금도 가끔은 “좀 더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섭렵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독서능력은 절대로 일조일석에 구축되는것이 아니다.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를 거치면서 그 년령단계에 걸맞는 다양한 분야와 다단계 독서과정을 통해야만 탄탄한 독서습관과 독서능력을 키울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교과서 공부는 주로 학교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과외독서 공부는 주로 가정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민족의 가정교육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가정교육의 중요한 책임자는 가장으로서의 부모님들이다. 헌데 그 자리는 대부분 “빈자리”상태이다. 많은 부모님들은 코리안드림을 안고 한국에 가계신다.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는 가정교육,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몰려온다. 물론 경제적으로 부유해져 더 많은 책을 구입해서 볼수 있는 경제적여유가 생길수 있다. 하지만 독서습관은 절대로 많은 돈을 들여 다량의 책을 사주면서 “책보라, 책보라”라고 하는 “잔소리”에 의해 길들여지는것은 아니다. 특히 어릴적부터 독서습관과 독서능력을 키우는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그 시절 아이들의 취미에 맞는 서적선택과 독서안내가 중요할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가장들의 독서참여이다. 반드시 가장들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과외독서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한마디로 독서는 지식을 얻는 중요한 방식이며 우리의 심적능력과 사고능력을 키울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로이다. 어떤 학자가 말한바와 같이 “한 사람의 정신력의 발전사는 그 사람의 열독사이다.” 그럼 같은 의미에서 한 민족의 정신적경지는 그 민족의 독서수준에 달려있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우리민족은 반드시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를 막론하고 독서를 즐기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학교교육을 통한 교과서 공부와 가정교육을 통한 과외서적 열독이 온전한 통합을 이끌어낼 때, 오늘날 상연되고있는 “좋은 학벌”을 손에 쥐고도 좋은 직장과 생업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표류하는 조선족교육의 “맹랑한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될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손경란 략력] 성명: 손경란(孙庆兰) 성별: 녀 출생년월:1979년 4월 소속: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전공: 조선-한국고전문학 강의: 조선-한국고전문학사, 고전과 재창작, 문학비평리론 등 과목 학력:중앙민족대학교 소수민족언어학원 박사 중앙민족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석사 중앙민족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학사 경력:중앙민족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강사(2013.11~현재) 중앙민족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행정비서(2006.7~2013.10) 주요론저: 저서로는 《조선조 후기 가정소설 속의 여성군상 연구》(2013,료녕민족출판사), 역서(공역)로는 《日语日语我爱你,就像老鼠爱大米》(2011,세계도서출판사)가 있으며 “문학작품의 전파 및 영향관계로부터 본 민족문예특색등 여러 편의 론문이 있음. 인민넷 2017-1-8-9
40    조선족교육질 저하에 경종을 울릴 때다(박광성) 댓글:  조회:1903  추천:2  2017-01-04
박광성 교육의 질은 결국 교육을 통하여 “힘”이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반듯한 직장과 든든한 생업을 갖는것으로 평가되여야 한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오고 아무리 고상한 품격을 가졌다 한들 좋은 직장과 생업을 찾지 못해 자기의 생활을 꽃피우지 못하고 사회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맹랑한것이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조선족 교육의 현황을 “맹랑한 상황”으로 진단하고싶다.    대학입시률만 본다면 조선족교육은 현재 호황기를 맞고있다. 학교마다 거의 대부분 졸업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며, 일부 학교들의 승학률은 90%를 넘어서고, 그중 적지 않은 학생들이 중점대학으로 진학하고, 성과 지역의 입시장원들도 속출하고있다. 본인이 근무하고있는 중앙민족대학만 보아도 조선족학생수가 지난 몇년간 줄곧 늘어나 현재 재학생수가 450명을 넘어서고있다. 지난해 9월 상해시 조선족대학생 신입생환영모임에 참석한적이 있는데, 그때 활동에 참가한 학생만 해도 200명이 족히 되는것 같았다. 이는 갈수록 많은 조선족학생들이 대도시의 대학들도 진학하고있음을 설명하는것으로 고무적인 측면이다.   허나 실상 대학에 와서 이들의 표현을 보면 실로 우려할만한 상황이다. 지난 몇년간 필자는 학교 학생처에서 근무하면서 각종 평의, 시합, 사회실천, 학술활동, 연구생추천 등 활동에 수없이 참가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많은 경합에서 조선족학생들이 결승에 참가하는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사회조사활동만 보더라도 많은 학생들이 조를 묶어 테마를 확정하고 연구계획서를 작성하여 학교의 경비지원을 받아 방학에 사회조사도 하고 연구보고서도 작성하여 장려를 받기도 하는데, 조선족학생들이 연구지원을 받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소수민족학생들을 우대하는 민족대학에서 이 상황이니 다른 학교에서는 더 말할나위 없을것이다. 연변대학도 상황은 마찬가지인것 같다. 이 몇년간 연변대학에서 추천하여 우리 대학 연구생으로 진학하는 학생 대부분이 한족학생들이며, 심지어 연구생학술대회에 참가하러 오는 학생들조차도 조선족을 보기 어렵다. 그 영문을 물으니 조선족학생들이 학습에서 한족학생들과 비길 바가 못된다는것이다.    혹자는 이 원인을 또 언어에서 찾을것이다. 한어에서 딸리기때문이라는것이다. 그러나 교육일선에서 본바로는 한어만 딸리는 문제가 아니라, 요즘 조선족대학생들중 조선어로 자기소개서를 그럴듯하게 쓸수 있는 학생도 몇몇 안되며, 조선어로 론리정연하고 설득력 있는 발언을 할수 있는 학생도 얼마 안된다. 소위 조선문학을 전공한다는 학부신입생들중 당시(唐詩) 다섯수도 제대로 외워두지 못한 학생이 대부분이란다. 조선어로도 제대로 쓰지 못하니 다른 언어로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부모들이 번 돈으로 겉모습은 날로 화려해지지만 속은 텅텅 비여가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조선족대학생중 국내에서 이름깨나 하는 대학의 연구생에 입학할수 있는 학생이 가물에 콩나물 나듯 하다. 다른 민족들의 경우 필자가 교편을 잡고있는 민족대학 사회학과만 보더라도 본과 졸업생중 70% 정도의 학생들이 명문대 혹은 중점대학 연구생시험에 합격되어 진학하는 상황이다. 대도시 정부기관의 공무원시험이나 사업단위시험에 합격되는 조선족학생은 10년동안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으면서 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다. 조선족사회는 판이 좁아서 좋은 소식은 금방 알려진다. 이렇고 보면 아마 거의 없는것 같다. 다른 민족학생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가 하는 질문을 할수 있지만, 필자가 지도한 연구생들만 보아도 최근 몇년간 광명일보, 국가자연과학기금회, 대외경제무역대학, 북경시사법국, 북경시민정국, 운남성건축관리위원회, 회사의 경우 텐센트, 지프자동차 등에 취직하였다. 북경 본 지역 학생들은 없고 거의가 서부, 서남부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다. 그러나 조선족학생들은 거의가 표류하고있다.    국내에서 연구생시험이나 공무원시험, 번듯한 회사들의 입사시험에 합격될수 없으니, 조선족학생들이 많이 기웃거리는 곳이 한국류학이나 한국기업들이다. 그리나 실제 상황으로 볼 때, 소수 업종을 제외하고, 조선족이 한국에서 류학하고 국내로 돌아와서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는것은 이미 과거로 되였다. 공무원이나 사업단위의 경우 시험을 치러야 하기때문에 류학생들에게는 더욱 불리할수 있다. 한국기업 취직은 더욱 나쁜 선택이다. 중국에 와서 경영하고있는 한국기업들의 경우 직장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회사가 거의 없다. 흔히 젊었을 때 단물을 빼먹고, 젊은 기가 빠지면 눈치를 주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든다. 따라서 요즘 90후 조선족청년들중 자리를 못잡고 중국과 한국 사이를 표류하다가 림시벌이로 전락되여가는 경향이 날로 뚜렷해지고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지금 어느 시대인데 직장소리나 하고 앉아있냐 하는 질문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창업도 하고 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수 있다. 그러나 창업도 사업도 능력이 돼야 한다. 조선족이 요즘 세상을 헤집고 다니면서 쌈지돈 정도 벌었는지 모르겠지만, 미래세대를 볼 때 정말로 본인 스스로나 가족, 그리고 전 사회적으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러다가 정말로 떠돌이집단으로 전락될수 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가? 사실 필자도 잘 모른다. 그저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보이는것들이 이렇다. 혹 이 문장을 보고 반론 문장을 써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고, 대학생들이 나와서 반박해줬으면 더욱 좋겠다. 필자는 본인이 잘못 본것으로 결론 나기 바란다. 그러나 교육현장에 있는 분들이 공동히 느끼고있는 문제라면 본인, 가정,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돌려 원인을 찾고 하루속히 조치를 취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2000여년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최강 종족집단으로 거듭나있는 유태인의 경우 가장 큰 신조가 자신을 영원히 지켜줄수 있는것이 머리에 든 지식과 손에 익힌 기술이라는것이다. 조선족도 믿을것이 후대에 대한 교육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허물어지고있다.   [박광성 략력]   성명: 박광성(朴光星)  소속: 중앙민족대학 민족학&사회학학원  전공: 사회학리론, 인구이동과 도시화, 경제글로벌화와 초국경 인구이동, 조선족문제. 강의: 서방사회학리론, 서방사회사상사, 사회학개론 등 과목   학력: 한국 서울대학 사회학과 박사 한국 서울대학 사회학과 석사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석사 연변대학 력사학 학사   경력: 중앙민족대학 민족학&사회학학원 강사를 거쳐 현재 부교수, 석사생 지도교수.  2012년 "교육부 신세기 우수인재"지원항목 획득자   겸직: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상무리사 겸 부비서장 중국사회학회 환경사회학분회 리사 북경시사화학회 리사 한국 "해외한인연구"국외편집위원   주요 론저:  저서로는《全球化时代中国朝鲜族的劳动力流动及其社会变迁》(2008, 한국, 학술정보출판사), 공저로는《1990年代中国朝鲜族社会的变迁》(2006, 한국, 서울대학출판사) 등. 이외에 국내외 학술지에 30여편 이상의 론문을 발표.  
39    정음우리말학교와 “우리” 댓글:  조회:1801  추천:1  2016-12-29
정음우리말학교에서는 매 학기마다 수료식을 진행한다. 이번 학기도 이제 곧 수료식 및 졸업식을 진행하게 된다. 년말이라 그런지 기말시험, 수료식 및 졸업식을 준비하는데 유난히 분주하다. 그럴수록 문득문득 지난 정음일들이 더더욱 새록새록 떠오른다. 북경정음우리말학교에 발을 들여놓은지도 어언 2년이 훌쩍 넘어간다. 2014년 9월 쯤인것 같다. 교장선생님 정신철교수님께서 정음학교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어보고 어떡하면 더 잘할수 있을지 방법을 강구해보라고 하셨다. 아마도 내가 한국어교육을 좀 해보았고 지금도 하고있는 중이라는 리유에서였을것이다. 무작정 선생님들의 강의를 듣는다는것이 가르치는분들한테는 죄송스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임무”를 완성해야 했기에 3주간 토요일마다 오전, 오후로 나누어 반마다 한번씩 다 들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보니 그때 사용하던 교과서가 내용이 너무 간단해서 여러 학기를 공부해도 정작 아이들이 배울수 있는 내용은 너무나도 적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과 함께 여러 교재들을 가져다 살펴보고 비교해보고 함께 상의해서 지금의 교재를 선정하게 되였다. 비록 한국어교육을 몇년 하긴 했지만 대학생들 상대로만 강의를 했을뿐 아이들 더우기 조선족아이들을 상대로는 강의를 해본 경험이 없었다. 정음우리말학교는 우리모두에게 경험해본적이 없는 새로운 과정이고 도전이였다. 그래서 나는 직접 강의를 해보기로 했다. 경험에 비추어 주먹구구로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실전을 거쳐보는것이 교수실제를 파악하고 애로사항들을 해결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리라는것이 나의 판단이였다. 이렇게 2015년 3월부터 우리는 새로운 교과서로 새 출발을 하게 되였고 나의 진정한 정음생활도 시작되였다. 개구장이 15명에게 “ㄱ,ㄴ,ㄷ,ㄹ...”, “ㅏ,ㅑ,ㅓ,ㅕ...”는 너무도 생소한 문자였다. 거기에 받침까지... 간단한 말들을 알아듣는 학생이 간혹 있긴 했지만 문자들은 분명 너무나도 낯선 그림들이였다. 집에서 부모들과도 우리말을 거의 쓰지 않는 아이들은 더 두눈만 말똥말똥하였다. 아이들은 우리말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책임감도 흥취도 없었다. 부모들이 등 떠밀어 어쩔수 없이 교실에 와 앉아있긴 하지만 엉덩이는 분명 좀이 쑤시는듯 했다. 수업시간은 매번마다 아이들과의 전쟁이고 밀당이였다. 남자아이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한데 뭉쳐서 씨름을 한다. 그러다가 좀 더 익숙해지니까 수업시간에도 장난이 계속된다. 언어공부에 관심도 없는데다가 아직 자아통제가 잘 되지 않는 년령이라 얼리고 닥치고 꾸지람을 해도 잘 통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문자외에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해주고싶은 욕심에 가끔 단군이야기, 주몽이야기,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이야기도 들려준다. 귀담아 듣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바로 흘려버리는 아이도 있고 아예 귀에 들어가지 않는 아이들도 많다. 한놈이라도 열심히 들으면 그것이 보람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이야기를 해준다. 이렇게 씨름씨름하면서 한 학기를 강의하였건만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한학기동안 자음, 모음, 받침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는데 간단한 단어, 말 한마디를 잘 적어낼수 있는 학생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실망하고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잘해보려고 했고 잘하느라 했는데 눈앞의 결과는 열정과 자신감을 사정없이 무너뜨렸다. 그러던 어느날 나로 하여금 새로운것을 깨닫게 한 일이 있었다. 반 학생중에 인사성 밝고 가르친 내용을 착실하게 잘 따라오지만 성격이 조용하여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일부러 그 학생이랑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칭찬도 더 해주고 했었는데 한 학기 공부마치고 그 다음학기 재등록을 할 때 이 학생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우리말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그러다 반전이 생겼는데 수료식날 분위기에 아이가 다시 생각이 바뀌여서 재등록을 한다는것이였다. 그리고 얼마후 그 학생 엄마 말씀이 평소 학교에서나 정음학교에서나 말을 잘하지 않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건 비슷하지만 정음학교 학생들이랑 있으면 마음이 더 편하다고 했다고 한다. 매 학기 수료식은 우리 정음학교의 축제나 다름없다. 아이가 그 축제분위기속에서 그리고 매번 수업 때마다의 반 분위기에 마음이 바뀌여지고 편안해진다는것이 나의 머리를 탁 쳐줬다. 우리는 오직 말과 글을 가르쳐야겠다는 념원으로 시작하였지만 아이들이 정작 얻는것은 문자와 말만이 그 전부가 아니였던것이다. 그속에는 말로는 표현이 안되는, 오직 정감으로 느낄수만 있는 정서라는것이 짧은 만남의 장에서 이어지고있었던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어딘가는 친숙하면서도 낯선것이였을것이다. 우리가 심어주고싶지만 시간적여유가 없음을 안타까워하고있을 때 아이들은 분명 주말의 작은 단체속에서 이러한 분위기, 정서를 느끼고있는것이다. 지난 학기말에는 두 학부모가 이젠 다른 공부를 시켜야겠다면서 정음에 못 나올것 같다고 했었는데 개학 때 이 두 학생은 여전히 등록을 했다. 아이들 자신이 기어코 정음학교에 다니겠다고 우겨서 어쩔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말 공부에 관심이 생긴것인지 아니면 친구들이 그리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같이 더 있고싶어하는 이 아이들이 대견스럽고 기특하다. 아이들과 함께 네 학기를 한 교실에서 부대끼며 지내오면서 아이들의 변화를 많이 느낄수 있었다. 우선 먼저 아이들이 우리말 공부를 배척하거나 무관심이던데로부터 차츰 재미와 관심이 생겼음을 느낄수 있었다. 지난 학기까지만 해도 몇몇 학생은 애물단지 같았다. 수업 때마다 장난을 하지 않으면 멍을 때린다. 세 학기나 공부했음에도 자모를 잘 익히지 못해 읽어내려가지 못했다. 때론 다시 차근차근 가르치다가도 때론 한숨이 나오고 또 때론 실망, 아니 좌절감이 들기도 했었다. 한급 또는 두급 아래 반으로 내려보내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때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니 차마 그럴수도 없었고 또 내가 다른 반 학생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보면 더더구나 다른 반으로 밀어낼수가 없었다. 다른 반에서 류급된 학생들은 류급된다고 잘하는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다시 새로운 반에 적응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있고, 류급되였다는 자비감으로 한동안 풀이 죽어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도 처음 한 두시간은 이 아이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데 따로 신경을 더 써야 했다. 이런것을 생각하면 다시 내 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할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그렇게 힘들게 감싸서 걸어왔더니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네번째 학기인 이번 학기에는 아이들의 언어실력이 좀 많이 늘어있었다. 읽을 줄 몰라서 꺽꺽거릴거라고 생각했던 학생이 또박또박 읽어내려가고 전에는 과문랑독을 어려워하며 줄줄 읽어내려가지 못하던 학생들도 이젠 제법 잘 읽었다. 의외의 성적에 너무 기뻤고 잘 따라와준 아이들도 고마웠고 또 집에서 조금이라도 더 복습시키고 독촉시켜주신 학부모들도 진심 고마웠다. 역시 노력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의 견지도 헛되지 않는다. 인내와 기다림의 보답인것 같다.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눔의 즐거움을 배워가고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인지 누구나를 막론하고 항상 먹거리를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수업중에도 눈속임하면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는데 아무리 제지를 시켜도 잘 고쳐지지 않았다. 또 아직 어린 아이들인지라 누군가가 좀 더 색다른 먹거리를 가져와서 먹고있으면 앗아서라도 한입 먹고싶어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난 학기부터는 학부모들과 상의를 해서 번마다 한 학생이 간식을 준비하고 다른 학생들은 따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기로 약속했다. 아이들이 자기것을 내놓는것에 린색하지나 않을가, 매주마다 당번을 짜줘야 하는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니나다를가 첫 2-3주간은 성격이 좀 더 활발하고 명랑한 두어명만 적극적으로 간식을 준비해오겠다고 자청했다. 간식을 가져온 학생이 쉬는 시간에 아이들에게 나눠주면 다른 학생들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도록 하고 다 같이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간식을 가져온 학생은 그날 직일까지 담당한다. 처음엔 나눠주는 학생도 받는 학생도 어딘가 쑥스러운지 좀 어색해하면서도 다들 즐거워한다. 이렇게 몇주간을 지나니 그다음부터는 아이들이 앞다투어 간식을 준비하겠다며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새로이 반에 합류한 아이들도 처음엔 여러 학생의 간식을 준비해오는것이 아까운듯 핑계를 대다가 2-3주 지나니 반 분위기에 젖어 한번 하고도 또 준비하겠다고 나선다. 가끔 차례진것외에 더 먹고싶어하는 아이가 있으면 서로 나눠주기도 했다. 이러한 장면들은 늘 나를 흐뭇하게 해준다. 생색을 내고싶어하는 철없는 면이 없는건 아니지만 분명 아이들은 함께 나누어 먹는것의 즐거움을 감지하고있다. 아이들이 금방 정음에 들어와서 첫 수료식을 맞이할 때 반에서 어떤 공연을 준비할가 아이들과 상의를 했더니 서로 잘하는걸 하겠다고 나서는가 하면 쑥스러움이 많은 아이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우리말을 공부하는만큼 우리민족 특색이 있는것으로 준비하고 더 중요한건 우리는 한 단체인만큼 혼자 잘하는것보다는 좀 미숙하더라도 여러 학생이 함께 참여할수 있는것이여야만 무대에 올라갈수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매번 수료식 때면 우리 반장은 여럿이서 같이 할수 있는 춤을 만들어서 가르치군 했다. 이번에도 아이들은 다 같이 삐거덕삐거덕하면서도 힘을 합쳐 준비하고있다. 틈틈이 연습할 때마다 서로 집적집적하고 몸씨름하면서 즐겁게 떠들어대는 모습이 아름답다. 여러 학기를 한반에서 딩굴다보니 이젠 제법 서로를 꽤 아는것 같다. 학기마다 가장 진보가 큰 학생, 가장 례절이 바른 학생을 뽑아보라고 하면 제법 비슷하게 뽑는다. 네명씩 팀을 나누어 경쟁을 시키면 팀원들을 서로 도와주면서 경쟁도 한다. 학기마다 정음우리말학교에서는 산보놀이도 한번씩 한다. 주변 공원에 가서 평소에는 입을 기회가 없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같이 사진도 찍고 여러가지 유희도 논다. 우리가 어릴 때 놀던 유희들도 가르쳐주면서 같이 놀기도 하고 새로이 생긴 지금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도 하며 때론 우리가 배운 우리문자놀이도 한다. 그리고 또 공놀이도 하고 줄당기기도 한다. 이렇게 학기마다 한나절씩 야외에서 굴레벗은 말들처럼 뛰여다닌다. 유희에 정신이 팔려있는 아이들도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도 마냥 즐겁기만 하다. 우리말 공부도 중요하지만 언어외의 민족특유의 감성을 전수하는것 역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어울림과 부대낌 속에서 조금씩 이어지고있는것 같아서 늘 기분이 좋다. 정음우리말학교가 고고성을 울려서부터 오늘까지 우리는 즐거운 날도 어려운 일도 많이 겪으면서 한발자욱한발자욱씩 걸어가고있다. 어려운 일들을 말하라고 하면 수도 없이 렬거할수 있을것이다. 수업 장소, 시간, 교원, 그리고 또… 하지만 이젠 어려운 일들보다 좋은 일들만 얘기하고싶고 기억하고싶다. 세상에 완벽이란 있을수 없다. 모자람이 있어서 더 아름답다. 정음우리말학교도 어려움이 있기에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강의하시는 선생님들도, 학부모들도 이젠 일부 학생들까지도 알고 있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고마움이 크다. 토요일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일찌감치 학교에 나오셔서 복도에서 학생들을 기다리신다. 학생, 학부모와 서로 깎듯한 인사로 짧은 만남을 시작한다. 어느 한 학부모가 한 말이 생각난다. 하버드대학과 정음우리말학교에서는 교장선생님이 친히 학생들을 맞이하신다고. 학교 운영의 어려움을 리해하면서 도움을 청할 때마다 선뜻 나서주시는 선생님들, 많이 귀찮을수 있음에도 교실청소까지 맡아주시는 선생님들, 학부모들의 자그마한 협조에도 무한한 행복을 느끼는 선생님들이 계신다. 학교 운영의 어려움을 잘 읽으시는 학부모들 역시 우리가 손을 내밀 때마다 따뜻하게 잡아주시고 마음으로 경제적으로 힘을 주신다. 치렬한 경쟁, 살벌한 세상이라 하지만 정음우리말학교에서만큼은 서로 기대와 고마움에 찬 눈길을 주고받으며 진정 편안하고 따뜻해진다. 정음학교는 말과 글을 가르치려는 취지로 세워졌지만 우리를 진정한 “우리”로 만들어주는 말, 글 이외의 그 이상의 뉴대작용을 하고있다. 【권진홍 략력】 이름: 권진홍(权震红) 소속: 북경련합대학교 전공: 언어학, 조선 학력: 연변대학 문학 박사 연변대학 문학 석사 연변대학 조문학과 학사 주요론저: 저서: 《한국어 비서술성 명사의 논항연구》(역락출판사, 2010) 편저: 《관광한국어》(知识产权出版社,2011) 론문: “윤동주 ‘서시’에 대한 기호론적 분석”, “보조동사 ‘-말다’와 ‘버리다’의 의미차이 분석’ 등 10여편 론문 국내외 학술지 발표. 출처 인민넷(조문판)
38    코리안드림, 차이나드림 그리고 조선족차세대 가정교육 댓글:  조회:902  추천:1  2016-12-29
코리안드림, 차이나드림 그리고 조선족차세대 가정교육 김철룡 조선족의 코리안드림은 중한수교이후 90년대 중반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코리안드림으로 인해 초반에는 큰 재부를 이룬 가정들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쉽지 않았던 한국행을 위해 편법수속을 하다 사기를 당해 파산의 궁지에 몰리고 자식공부를 그르친 가정들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돈을 모은 집안들도 고향에 두고간 자식교육에 소홀히 하여 자식공부를 망친 일이 비일비재이다. 필자의 부모님도 90년대 후반에 돈 벌어 자식 공부시킨다고 한국 출국수속에 나섰다가 사기를 당하여 하루아침에 집안이 망하는 봉변을 당했다. 대학 갈 희망을 잃고 필자도 한때는 방황도 했지만 나중에 등록금이 없는 대학, 전공을 찾다보니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로 입학하게 되였다. 대학 졸업후 아이러니하게 하마트면 내 인생을 망칠번했던 한국이 석박사 장학금을 지원해주어 한국류학을 마치고 우리말 연구자가 되는 인생 탈변을 가져오게 되였다. 초반의 코리안드림은 조선족들에게 경제적으로 희망을 가져다줬지만 당시의 자식세대인 70후, 80후의 학업에는 큰 피해를 끼쳤다. 2000년대 이후로 한국문이 대폭 열리면서 더많은 조선족들이 한국행을 택하였다. 현재 재한조선족 인구가 70만이라는 통계도 나오고있다. 예전보다 수월해진 한국진출은 조선족가정에 여유로운 경제조건을 마련해주었지만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손에서 자라거나 친척집에 얹혀사는 아이들도 대폭 늘어났다. 오늘의 조선족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들을 보면 지식보다 상식이 결핍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즉 다시말하면 눈치가 없다는것이다. 지식교육은 학교교육에 의거하지만 상식교육은 주로 가정교육에 의거하는것이다. 일례로 우리는 정월대보름에 온가족이 오손도손 모여앉아 아침부터 명절을 즐기면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귀밝이술을 한잔씩 돌린다. 오늘의 과학지식으로 그 술 한잔이 진정 귀를 밝게 한다고 믿을 사람은 없지만 그것이 바로 가정에서의 전통문화,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교육현장이였던것이다. 옛말에 술은 어른한테서 배우라고 하였다. 명절분위기를 빌어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술 따르는법, 술 마시는법, 술 마신후의 옳바른 행동거지, 그리고 인사법 등 상식교육을 진행하였던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곁에 없이 혼자 커온 우리의 90후, 00후 세대들은 코리안드림에 의한 가정교육이 결핍했던 피해를 받아왔다. 재한조선족중 30대, 40대 초반인 부모들은 아이를 한국에서 낳고 본인들이 직접 키워온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국경제의 부상과 차이나드림의 부활로 아이가 교육 받을 나이가 되면 중국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사례가 점점 많아진다. 올해 할빈시조선족소학교 1학년 신입생이 40여명으로서 요몇년사이 인원수가 가장 많은 해로 되였는데 이는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그중 9명이 한국에서 태여나 부모님이 중국으로 다시 돌려보내 교육받도록 하는 아이라고 한다. 목단강시조선족중학교 고중부에는 류학생부가 따로 설치되여있는데 그 학생들은 모두가 조선족 결혼이민자들의 자녀로서 한국류학생 신분으로 부모님 고향에 돌아와 공부하고있다. 역시 차이나드림에 대한 동경으로 부모를 떠나 중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 보살핌을 못받고 혼자 떨어져 살면 아이의 심리 및 인격 성장에 부정적 영향이 미칠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재한조선족 10후 세대들의 가정교육 역시 차이나드림에 의해 큰 피해를 받을것으로 예상된다. 코리안드림, 차이나드림도 좋지만 조선족의 진정한 꿈은 차세대교육에 있다. [김청룡 략력] 소속: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전공: 언어학, 조선어 학력: 한국 경희대학 국어국문과 언어학 박사 한국 서울대학 국문학과 언어학 석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언어학 석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언어학 학사 경력: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부교수(2012.9 – 현재) 한국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2011.8 - 2012.8) 한국 대진대학 교양학부 외국인 전임교수(2011.3 – 2012.8) 한국 호원대학 국제교육원 강사(2010.3 – 2010.7) 중앙민족어문번역국 조리번역(2002.8 – 2005.3) 주요 론저: 저서로는《韩中待遇词汇对比研究》(2014, 한국, 박문사)、역저로는 《韩国风俗画》(2015, 商务印书馆)등. 《浅析韩餐菜名的结构类型-以显性要素与隐性要素为例》(2015)、《韩中待遇词汇语域关系对比分析》(2014)、《基于语料库翻译学的韩汉有标识被动句的翻译研究小议》(2014)、《韩国语自我待遇词汇语义类型分析》(2014)、《韩国语汉字词与汉语的人称词缀对比分析》(2012)、《刍议中国国内韩国语教育改善方案》(2010)등 10 여편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출처 인민넷(조문판)
37    민족문화와 력사에 대한 기록 시급히 추진해야 댓글:  조회:891  추천:6  2016-12-13
일전에 모교인 북경대학조선족동문회가 주최하는 북경대학 사생 및 학우 교류좌담회에 참가한적이 있다. 그 자리에는 80세 이상 고령의 교수님들이 세분이나 참석하시여 후학들을 격려하고 모임의 자리를 빛내여주셨을뿐만아니라 또한 그분들을 통하여 이미 아홉분이나 되는 조선족 교수님이 작고하셨다는 소식도 전해들었다. 그분들은 대개 1949년 새중국 창건 이후 50년대에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에 남아서 줄곧 교편을 잡으셨던 분들로서, 북경대학 조선족력사를 개척해온 증인들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이분들의 이야기를 기록해놓지 못했다는것은 참으로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일개 후학으로서 그러한 기록을 보다 일찍 만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자책감을 깊이 느끼게 된다. 나아가 우리 민족사회를 보더라도 많은 활동과 행사들이 단순한 친목모임으로 끝나고 우리들의 후대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가치있는 력사기록으로 남지 못한다는것도 오늘날의 현실임을 부인할수도 없다. 력사를 모르는 민족은 뿌리가 없고 희망이 없다고 하지만, 후대들에게 력사기록을 남기지 못하는 민족의 미래는 더욱 참담하다고 할수 있다.   개혁개방 35년이 넘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조선족들의 생활거주지도 과거 전통근거지였던 동북3성 뿐만아니라 또한 중국의 연해, 대도시 등 관내지역, 나아가 한국을 대표로 하는 해외 거주지 등 이른바 “3각 구도”를 형성하고있다. 따라서 우리의 력사, 문화 기록도 동북 3성뿐만아니라 북경, 상해, 광동, 청도 등 대도시와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등 나라와 지역의 조선족들의 생활과 문화도 포함시켜야 할것이다. 비록 거주지와 활동범위는 확산되였지만, 이들 또한 모두 우리 조선족들이고 우리들의 생활이고 문화이며, 나아가 력사이기때문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북경조선족청년학회를 중심으로 북경의 조선족 젊은 학자와 대학생들이 1989년 겨울 방학을 리용하여 흑룡강, 길림, 료녕 등 지역의 이민 1세대들을 직접 방문하고 그 취재 구술을 기록하여 만든 《중국조선족이민실록》(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출판)을 접하게 되였는데, 그 충격이 매우 컸었다. 우리 선조들이 무엇때문에 조선반도에서 중국 땅으로 이주하게 되였고 어떻게 되여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되였는가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였다. 그 책은 지금 구하기가 어렵게 되였지만, 당시 연변대학 부총장으로 계셨던 정판룡교수님이 머리말을 쓰시고,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문정일 부주임이 1면에 “우리 민족의 수난의 력사를 잊지 말고 자랑찬 우리 문화를 꽃피워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라는 친필의 격려사를 직접 써주시였다. 물론 그 당시 취재를 받았던 이민 1세대들이나 격려사를 써주셨던 문정일 부주임, 정판룡교수님 등 원로분들도 모두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이제 가령 동원할수 있는 인원과 넉넉한 경비가 있다고 해도 다시는 이러한 작업과 력사적인 기록을 남길수가 없게 되였다.    물론 많은 조선족 학자들과 젊은이들이 해외로 류학함에 따라 적지 않은 연구성과들이 중국, 한국, 일본에서 출판되였다. 또한 조선족사회 자체뿐만아니라, 한국, 일본에 대한 인식도 많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되였다. 연변대학 김성호교수님이 편집한 《서울에서 못다한 이야기》(도서출판 말과 창조사, 1997년 출판)는 중한 수교 직후 조선족들의 한국사회에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것으로 그때를 돌이켜보고, 오늘날과 비교해본다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이라고 할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박우, 김용선 등이 편저로 된 《우리가 만난 한국–재한 조선족의 구술생애사》(북코리아, 2012년 출판)는 사회학연구방법을 바탕으로 친척초청, 산업연수와 기술연수, 위명려권, 방문취업, 단기상무와 단기종합, 결혼 등 나누어 취재한 생생한 기록으로서 하나의 력사적 문화가치가 있는 획기적인 작업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한국을 제외한다면, 학술적인 연구성과가 많이 나오고 사회적인 교류는 진행되지만 타지역에서의 력사기록작업은 대부분이 아직 출발하지 못한 상태이다. 중국의 대도시와 연해지역의 조선족사회의 새로운 집거지역에는 이러한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수년전에 《광동성 조선족사회》(민족출판사)라는 도서가 출판되였지만, 하나의 단순한 활동기록에만 불과하고 주로 기업가나 학자들의 업적을 중심으로 했으며, 1949년 이전, 특히 1927년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족들의 혁명업적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어 하나의 완정한 력사기록이라고 할수 없다. 이제 시간이 10년만 흘러가면, 중국의 새로운 집거지의 1세대들도 취재하기가 거의 어렵게 될것이다. 따라서 시급한 시간적요인을 고려할 때, 각 지역의 체육, 문화, 친목활동도 매우 중요하지만, 보다 가치가 있고, 우리들의 력사와 문화를 기록하기 위한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이제 2019년이면 중화인민화공화국 성립 70주년, 2021년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된다. 과거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민이였지만, 지금은 떳떳한 공민이고 이 사회의 주요한 성원이다. 이제는 이민이라는 사유를 벗어나 중국내에서의 우리들의 당당한 력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그것을 출판물로 만들어 사회와 후대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어야 할것이다.    시간은 항상 우리들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직도 아무런 력사기록도 남기지 않고 화려한 활동이나 형식적인 친목이벤트에만 집착할것이 아니라, 정말 무게가 있고 력사가 있는 문화민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이 바로 기업가나 학자나 관료, 대학생들을 포함하여, 전민족 차원에서 우리 자체의 력사, 문화 기록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해야 할 시기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금 북경대학조선족동문회가 2018년 모교 120주년을 계기로 《북경대학 조선족들의 이야기》(가제) 출판을 기획하는것은 하나의 거창한 시도이며, 나아가 우리 민족사회의 력사기록의 새로운 시점으로도 되기를 기대해보게 된다.    2016년 12월 12일   리성일 략력 소속: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전공: 동북아국제관계   학력: 일본 게이오대학 법학박사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 법학석사 북경대학 정치학&행정관리학부(현 정부관리학원) 법학학사   경력: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조리연구원(2013.1 – 현재) 한국 동서대학교 국제학부 조교수(2008.9-2012.9) 일본 게이오대학 법학부 방문연구원(2008.3-2008.9)   주요 론저:  저서로는 《중국의 조선반도정책》(2010, 일본, 게이오대학출판사), 공저로는 《조선반도의 질서 변혁》(2013, 일본, 게이오대학출판사), 《조선반도와 국제정치》(2005, 일본, 게이오대학출판사), 《조선족 3세들의 서울이야기》(2011, 서울, 백산서당), 역서로는 《일본의 미들파워외교》(2015, 사회과학문헌출판사) 등.   “中日关系:转型中的博弈与磨合”(2015), "中韩建交与中国—朝鲜半岛关系的结构变革”(2014), "日本解禁集体自卫权的举措与影响”(2014), "朝鲜族研究的现状及课题-中日韩三国为中心”(2014), “东亚地区合作:中国的视角”(2014), “中国朝鲜族在中韩关系发展过程中的作用”(2013) 등 20 여편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출처 인민넷 위챗 2016-12-12
36    민족교육패러다임 구축을 다그쳐야 댓글:  조회:1613  추천:3  2016-12-09
민족교육패러다임 구축을 다그쳐야 허명철 조선족의 상징세계에서 가장 쉽게 떠올릴수 있는 기호중의 하나가 민족교육이 아닌가싶다. 민족교육하면 또 쉽게 련상되는것이 1906년 룡정에 세워진 서전서숙이다. 조선족근대교육의 효시로 자리매김하고있는 서전서숙은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전서숙의 민족사에서의 위치와 역할을 차치(且置)하고 필자가 던져보고자 하는 질문은 서전서숙이 효시하는 교육차원에서의 "근대성"이란 과연 무엇이냐 하는것이다. 단순 20세기초반에 세워졌다는 "시간적"의미에서 접근하는 근대인가, 아니면 서전서숙에서 개설한 학과목에 근대과학지식이 포함되였다는 "지식적"의미에서 풀이되는 근대인가, 혹은 서전서숙 설립취지나 학교운영에서 이른바 근대교육정신이 반영되었다는 "사상적"의미에서 해석되는 근대인가. 이러한 질문은 초기조선족교육의 패러다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도 하는데 어찌보면 서전서숙의 근대성은 그 자체가 실천해왔던 패러다임에 내재되여있지 않는가싶다. 서전서숙의 설립취지와 교육리념을 놓고 보면 순수 지식전수나 인류보편가치를 추구했다기보다 학교라는 교육의 장을 통해 민족을 계몽시키고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첫 시도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학교설립취지, 학과목개설, 교원선정에 이르기까지 제반 학교 구도나 운영방식 그 핵심부에는 항상 민족적원소가 자리잡고있었다. 근대과학지식을 전수한것도, 민족의식이 투철한 교원을 강단에 내세운것도, 조선족력사과목을 개설한것도 모두 민족부흥과 국권회복이라는 목표지향성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요약해 말한다면 서전서숙에서 추구해왔던 근대교육은 민족계몽, 시대과업, 지식전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패러다임구축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러한 패러다임구축에서 서전서숙의 근대성이 돋보인다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조선족학교교육에서 실천되고있는 민족교육의 패러다임은 무엇일가? 새중국창건후 조선족학교교육은 국가의 전일제교육체제에 편입되였고 국가에서 제정한 교육방침에 따라 통일적인 교과서를 사용하면서 학교교육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였다. 오늘날 일부 지역에서 조선족학교교육은 내용면에서 민족적원소가 점차 사라지고 언어와 문자라는 민족형식만 남게 되였다. 따라서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리해하는 조선족교육은 민족언어로 강의하고 민족문자로 된 교과서를 사용한다는데 그치였으며 이 또한 우리들의 교육실천속에서 침전을 거듭하면서 민족교육이 언어문자교육으로 대변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학교에서 실시되는 민족교육패러다임으로 되기도 했다. 현재 우리는 중국사회의 대전환과 세계화의 충격으로 민족교육의 일대 격변기를 맞이하게 되였고 나름대로 대응하는 자세도 보여주었다. 이중언어교육, 소인수반급교수, 농촌학교통합 및 기숙제실시, 도시에서 조선어학교개설 등이 그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같은 대응책은 단순 학교교육을 념두에 두고 실시된것일뿐 민족교육차원에서 시도되였던것은 아니라고 보아진다. 특히 이중언어교육(엄격히 말하면 교수용 언어를 두가지 언어로 사용한다는것임)의 전면 도입으로 하여 이제 조선족학교들에서는 원유의 "민족형식"이 사라질 상황에 직면하게 되였다. 필자가 보건대 전환기에 우리가 모색했던 대응책은 대부분 문제의식에서 출발한것으로서 일정한 실효성을 거둘수는 있겠지만 장구적인 안목으로 민족교육을 성찰해볼 때 조선족학교교육과 조선족민족교육의 차이성을 인식하고 시대적도전에 대응할수 있는 민족교육의 패러다임을 구축하는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우리는 가정, 학교, 사회라는 상이한 교육의 장에서 나름대로 실천가능한 민족교육패러다임을 구축할수 있다. 현실적으로도 우리는 자주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할수 있는 여건들을 그 어느때보다도 비교적 완벽하게 구비하고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급격히 성장하고있는 조선족시민의식과 활기 띤 모습을 보여주고있는 조선족단체들을 활용하여 민속생활체험, 력사탐방, 민족독서교실 등 형식의 민족교육패러다임을 구축할수 있으며 현대 통신시설과 인터넷을 활용할수 있는 민족교육프로그람을 개발하여 사이버공간에서 취미성과 지식성을 접목한 민족교육을 실시할수 있으며 학교교육에서 조선어문교재편찬을 통해 조선어문과를 단순 언어, 문법, 습작만이 아닌 민족 력사와 문화를 익힐수 있는 과목으로 활용하거나 한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상대로 한족학교에서 월 1차정도의 민족문화교양강좌개설 등등을 시도해볼수도 있다. 민족을 운운할 때 우리는 흔히 혈통을 언급하는데 이는 단순 개체의 몸에 흐르는 생물학적유전자뿐만아니라 공동체라는 문화적혈통, 즉 문화적유전자도 의미한다. 즉 "나"라는 개체가 한개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거듭날수 있고 "나는 누구냐"하는 정체성에 대한 확답 역시 1차적으로 생물학적유전자가 전제되여야 하겠지만 민족공동체가 상징되는 문화적유전자도 간과할수 없다. 개개 민족공동체구성원들이 소유해야 할 문화적유전자는 민족교육을 통해 수혈되고있는만큼 우리들에게 있어서 민족교육은 조선족학교교육 이상으로 중요한것이며 향후 가정, 학교, 사회에서 어떠한 민족교육패러다임을 구축하는가 하는것도 시급한 과제로 제기될수 밖에 없다. 【허명철 략력】 연변대학 사회학과 교수, 문학박사 주요연구 령역: 지역사회와 문화, 조선족연구 주요저서: 《전환기의 연변조선족》, 《연변조선족교육실태조사연구》 외 다수 론문들로는 "중국조선족가치의식변천연구" 외 다수 출처: 인민넷
35    초국적 지역•공간으로서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댓글:  조회:1789  추천:1  2016-11-30
초국적 지역•공간으로서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방미화 초국적 지역•공간으로서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귀환이주자들의 창업활동과 초국적련결망을 중심으로 중국조선족의 해내외 이주 25여년간 력사가 지난 현재, 자신의 고향으로 귀환하여 정착하려고 하는 조선족들이 늘어나고있다. 특히 2008년에 폭발한 금융위기는 한국으로 이주한 조선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추동한 국제적인 배경으로 작동했으며, 대도시나 연해도시로 이주했던 조선족들도 경제적, 사회적, 정서적 안정을 도모함에 있어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유관 통계에 의하면, 2015년10월13일까지 연변주에 국외 혹은 타도시에서 귀환한 이주자들이 10,082명 달하며, 그중 이미 창업한 사람이 4,046명에 달한다(길림성현성망, 2015.10.14일자). 따라서 그들의 창업 및 재정착 문제가 연변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하나의 문제로 대두되고있다. 현재 동북3성의 각 정부에서는 조선족 이주노동자들의 “귀국귀향 정착사업”에 각별한 중시를 돌리고있으며, 류입정책, 산업정책, 토지정책, 양성정책, 로동력사용정책, 금융정책, 보조정책, 세무정책, 격려정책 등 9개 정책을 규정하여 정부차원에서 조선족 귀환이주자들의 창업활동을 지지하고있다. 연변지역 귀환이주자들의 재정착을 둘러싼 정부차원의 행위와 맥락을 같이하여, 필자는 일전에 연변으로 돌아온 조선족들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창업 및 운영하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지, 또한 그러한 어려움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하고있는지, 그들의 창업활동이 지니는 리론적, 정책적 함의는 무엇인지 등 문제를 둘러싸고 연길시와 룡정시 귀환 조선족들의 창업 및 운영 과정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였다. 우선, 그들의 창업과정에서의 항목선택, 자금조달, 개업도시 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조사에 의하면 귀환이주자들의 항목선택은 그들의 기존의 경제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즉 한국에서 돌아온 이주자들은 귀환하여 창업할것을 미리 대비하여 일했던 가게에서 기술을 배운 뒤, 그 기술을 바탕으로 불고기, 피자 등 가게를 개업한다. 해외 이주경험이 없이 국내 도시에서 돌아온 조선족들가운데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특별히 비용을 들여 배운것이아니라, 한국에 있는 가족, 친지로부터 손쉽게 기술을 전수받아 음식점을 꾸린 사례도 있다. 이와 같이 창업을 위한 기술을 바탕으로 항목을 선택하는 사례들도 있지만, 자신의 경험, 기술 등과는 관계없이 연변지역에서 잘 되고있는 항목을 선택하여 자금을 투자하는 조선족들도 많다. 자금조달상황을 살펴본다면, 연변지역의 귀환이주자들은 보통 30만원 내지 100만원의 자금을 축적하고 돌아오는데, 자신이 벌어온 자금을 리용하여 제한적으로 창업을 시작할 때는 자금조달의 필요가 없으나, 일정한 규모와 인테리어, 품위를 갖추고자 하는 경우라면, 투자액이 부족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금조달의 가장 중요한 경로가 바로 친인, 친지, 친구 등 가족 네트워크, 사회적네트워크이다. 면담대상자들중 태진수는 2014년에 친구와 함께 100만위안의 자금을 투자하여 불고기가든을 오픈하게 되였는데, 투자액 중 50만원은 미국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꿔준것이다. 물론 자신이 쌓아온 사회적자본을 활용하여 기타 경로 례하면 은행 등 기관으로부터 규정이상의 현금을 대출하여 투자한 경우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 연변주 정부측에서 “귀환창업”을 크게 지지하면서 관련 정책들을 실시하고있으나, 면담대상자들중 본 정책의 혜택을 받은자는 한명도 없었다. 그것은 정책홍보효과가 낮기때문이며 더욱 중요한것은 유관 정책이 창업자들의 현실적요구를 잘 반영하지 못했기때문이다. 례하면, 창업을 할 경우 대부분 창업을 시작하기전에 자본조달에서의 어려움을 겪으며, 일단 개업한 다음에는 재투자, 규모확대 등 경우가 적기에 개업해서 3개월 운영한 업체에 일련의 수속을 거쳐 10만원을 무리자 대출받을수 있게 하는 소액담보대출정책은 정책유효성이 떨어지는것이다. 그리고 연변지역으로 돌아온 조선족들은 대부분 연길시 혹은 위성도시 룡정에서 창업을 시작한다. 물론 기타 도시에서 창업한 조선족들도 있지만, 경제발전, 인구규모, 류동인구, 소비수준 등 여러가지 요소를 고려했을 때 연길시에서 창업하는것이 리윤창출에 유리하기에 기타 도시 출신 조선족들도 귀환하여 연길에서 창업을 시작한다. 다음으로, 운영과정에서의 고객원천 확보, 경영방식, 기술습득 등에 대해 살펴보면,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 업주들은 가족, 친척, 친구, 지인 등 가족,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가게를 홍보한다. 업주의 친구가 사회적련결망이 넓은 공무원이거나 사업가일 경우 가게를 리용하는 회수가 많으며, 업주 자신을 포함한 친척, 친구의 사회적련결망이 넓을수록 고객원천을 더욱 많이 확보할수 있다. 경영방식에 있어서 한국에서 돌아온 귀환이주자들이 자영업을 운영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한국에서의 경영모식을 적용한다. 2013년에 피자가게를 오픈한 김지은씨는 한국의 맛집 성공비결을 통해 경영방식을 습득했다. 뿐만아니라 위챗을 통해 이벤트를 진행함으로써 더욱 많은 고객을 확보하는 방식도 중요한 경영방식의 하나이다. 국내 도시에서 돌아온 조선족들도 경영방식을 배움에 있어 가까운 나라인 한국으로 입국하여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필요한 경영방식을 배워온다. 그리고 운영과정중 기술을 습득함에 있어서는, 연변지역 귀환이주자들은 창업하기이전 한국 혹은 기타 국가에 거주하고있는 가족, 친구, 지인 등과의 초국적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기술을 배운 뒤 창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며, 운영과정에서도 필요한 기술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오던 초국적네트워크를 통해 습득한다. 마지막으로, 창업, 운영과정에서 직면한 어려움 및 해결방식에 대해 조사한 결과, 장기 로동력의 부족, 연변지역 문화와 업체의 기술 및 경영방식의 불일치, 행정수속의 번잡함 및 행정인원의 비우호적태도 등 요소들이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으로 요약된다. 귀환창업자들은 한결같이 운영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장기적인력의 부족이다.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업주들은 되도록 한족인원을 채용하되 가능한 한에서 채용인원에게 높은 보수를 준다거나 명절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보너스를 주는 등 방식으로 채용된 인력의 장기적인 로동을 기대한다. 그리고 귀환이주자들은 선진적인 기술을 습득하고 경영모식도 새로우나 연변지역 문화와 자신의 기술, 경영방식을 접목시키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만약 지역적특성을 잘 파악하고 적시적으로 해결해나간다면 위기를 피할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 대개는 운영을 유지하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된다. 귀환창업자들이 직면한 또 다른 하나의 어려움은 행정수속의 번잡함과 행정인원의 비우호적태도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그러한 대우가 연변에서의 인맥이 끊기고 정부 혹은 사업단위에 아는 사람이 없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우에 그들은 동원할수 있는 인맥을 모두 동원하여 행정기관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소개 받은 뒤, 수속을 손쉽게 끝내는 등의 해결방식의 취한다. 끝으로 연변지역 귀환이주자들에 조사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리론적, 정책적 함의를 이끌어낼수 있다. 우선, 연변지역에서 창업한 귀환조선족들은 연변지역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국 혹은 기타 도시의 가족, 친지, 친구들과 지속적인 련결을 가지면서 자신의 창업에 필요한 자본, 기술을 축적, 습득 및 확대해가고있다. 따라서 그들의 초국적련결망은 여전히 혈연, 지연을 기초로 한 련결망이라는 특징을 띠며, 초국적사회자본의 확립 및 지속이라는 특징도 보이고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연변지역은 인구이동으로 인해 공동화되고있는것이 아니라 귀환이주자들의 경제활동 및 그 과정에서의 초국적사회자본의 축적, 확대를 통해 새로운 초국적공간으로 변화되고있음을 시사한다. 다음으로, 정책적측면에서 정부는 투자자금이 많이 항목, 큰 사업에만 중시를 돌릴것이 아니라, 령세자영업자들의 창업상황도 잘 파악하여야 하며, 그들의 실정에 맞게 정책을 제정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차원에서 창업자들에게 경제적안목, 경영지식, 경영철학 등을 배워주는 전문 기구를 설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절주가 빠른 시장형세에 직면하여 어떻게 다양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성공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것을 적시적으로 터득할수 있도록 하는것이 중요하다. 뿐만아니라 장기적인력의 부족을 해결하는 방법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 현재 연변지역에서 취직하고자 하는 로동력을 대상으로 어떠한 우대정책이나 경제적기회, 사회적보장 등 정책을 제정하여 일정한 혜택을 제공하는 하는 방법도 고려해볼만하다고 본다. 【방미화 약력】 소속: 연변대학교 사회학과 전공: 이주사회학, 초국적 이동과 정체성, 초국적 네트워크 학력: 한국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학 박사 연변대학 력사학부 학사, 석사, 주요론저: 《이동과 정착의 경계에서: 재한 조선족의 실천전략과 정체성》(2013, 이담북스) 인민넷 2018-11-28
34    우리는 옛날보다 풍요로워졌는가? 댓글:  조회:1555  추천:2  2016-11-23
우리는 옛날보다 풍요로워졌는가? 허연화 10년전에 내가 일본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중국류학생은 빈곤류학생의 대명사로서 일본어한자로서도 苦学生(고학생)이라고 많이 불리웠다. 헌데 요즘 일본에 오는 중국류학생들을 보면 올 때부터 손에는 아이폰, 공부할 때에는 아이맥을 들고있는 학생도 적지 않다. 조선족의 경우를 봐도 더이상 아르바이트는 생계를 위한 일본에서의 필수 코스가 아니다. 생활비의 해결경로를 물어보면 중국에서 사업하거나 든든한 직업이 있는 부모님, 한국에서 돈벌이하고있는 부모님으로부터 류학비용과 생활비를 받아쓰고있다는 대답을 많이 듣게 된다. 물론 모든 유학생들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일본에서의 중국류학생은 빈곤류학생의 대명사는 아니다. 조선족 또한 10여년전처럼 하루에 3시간만 자면서 고향에 류학수속비빚을 보내주고 집살돈 보내느라 개미처럼 살던 생활이 더는 주류가 아니다.    우리 조선족은 흔히 개혁개방이래 격렬한 인구이동에 의해서 우리가 잃은 많은것을 말하고있다. 우리 조선족마을학교들이 하나하나 없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사는 세상을 한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이동을 통해서 중국의 어느 소수민족보다도 더 빠르게 소득성장을 달성했다는것 또한 사실이다. 20세기 90년대부터 시작된 중국연해지역의 한국기업, 일본기업에로의 조선족의 취업과, 한국에서의 돈벌이, 현재의 일본, 북미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의 조선족의 활약은 우리의 삶의 수준을 많이 향상시켰다. 이제는 고향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택, 자가용을 소유하고있으며 도시뿐만아니라 농촌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텔레비죤, 세탁기, 전화기(핸드폰), 랭장고를 소유하게 되였다.    맑스는 로동계급이 자본가의 착취로부터 자체를 해방시키는 혁명적인 사회변화의 추진력을 만들어낼것이라는 견해의 기초하에 로동계급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점차 늘어날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재 세계상의 로동계급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있고 육체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우에서 언급한것처럼 우리 조선족도 90년대전에는 생각지도 못하던 생활소비재를 소유하게 되였듯이 생활수준의 상승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현재 리용할수 있는 소비재가 증가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수 있다.    로동계급의 풍요는 “중간계급사회”로 갈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시사하고있다. 한국에 있는 조선족에 대해서도 요즘은 이주초기의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3D(Dirty, Difficult, Dangerous)업종에서 일하는 육체로동자들이 아닌 학계, 무역업계, 공직자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조선족상의 대두를 론하고있다. 중국국내에서도 한국기업에 취직된 조선족이 아닌 기업가, 학자, 예술인 등 다방면의 조선족인물상이 부각되고있다. 즉 우리 조선족사회는 중국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점점 “중간계급화”하고있다는것이다.   실제로 우리 조선족사회가 “중간계급화”하고있는가는 아직 많은 론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로동계급이 점점 풍요로워짐에 따라 사회에 “중간계급”의 층이 두터워진다는것은 사회가 성숙되여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은 그런면에서 “중간계급”의 층이 두터운것이 특징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도시든 농촌이든 상하수도가 잘 되여있고 거의 집집마다 자가용, 일상 전기용품을 소유하고있다. 일본에서는 고중을 졸업하고 전문학교를 가거나 부모님이 하던 사업을 이어받는 사람도 많다. 그것이 작은 음식점이든 중소기업이든 말이다. 처음에는 일본젊은이들은 리상이 없나보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후에 알고보니 작은 가게에서도 샐러리맨정도의 수입을 얻을수 있다는것이다. 물론 사회복리방면에서는 개인부담이 커지지만 전체적으로 먹고 사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는것이였다. 더욱 놀라운건 육체로동중에서도 빡세다고 할수 있는 이사짐센터와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특히 높은 곳에서 작업하는 건설현장의 돈비직(鳶職)의 수입이 일반 샐러리맨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이다. 특히 건설현장의 돈비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부심이 넘쳐있고 건설현장의 작업복은 젊은 남자들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물론 일본사회에 직업차별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고중졸업한 사람도 수용할 곳이 많다는것, 육체로동이 동경의 대상이 될수 있는것은 사회 자체가 비교적 성숙되였다는 표징이라고 볼수 있다.    일전에 위챗에 우리말로 된 “어딜가나 대우 못받는 직업”이라는 주제로 만화스토리가 돌았다. 주요한 내용은 음식점배달이라는 “어딜 가나 대우 못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한국의 한 배달부아저씨의 어떤 특별한 하루에 대한것이였다. 깨끗이 씻어서 문앞에 놓여있는 짜장면그릇, 또 그릇밑에 남겨진 “저희가 밥을 따뜻하고 맛있게 먹을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쪽지 하나에 눈물을 흘리는 배달부아저씨의 모습이 그려진 인간애를 담은 이야기였다.    위챗에서 이야기가 돌기 사작하자 연길에 사는 한 친구가 자기눈앞에서 지금 녀대학생이 택배아저씨한테 전화로 소리소리지르고있고 물건이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도 친구들과 수다떨며 늘늘이 움직이고있는 모습과 우의 따뜻한 이야기를 대조하면서 한탄의 메시지를 남겼다.    “못 배우고 무식해서 육체로동하고 산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육체로동하는 사람들을 깔보고 하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중국사회에, 우리 조선족사회에 늘어나고있다는것인가?    농경민족으로서 조선반도에서 중국 동북지역에 넘어온 우리 조선족, 다 같이 없이 살았을 때는 없는게 수치스럽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살았어도 우리말 쓰고 말하며 당당히 살았던 우리가, “같은 피”가 흐르는 한국과의 만남에서 계급적으로 부딪치고나서 형언할수 없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던가?! 너무나도 다른 사회에서 살아왔기에 너무나도 달랐던 상식. 중국사회의 “못사는게 수치스러운것이 아니”라는 가치관이, 한국사회의 “못사는건 게으른것이고 못배우고 무식해서이다” 라는 가치관과 부딪치는 순간이였다 할수 있다.    그런데 20년 넘은 세월이 흘러 조선족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해온 반면 우리 조선족들한테도 차별의식 특히 직업차별의식이 형성되였단 말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있었던것이 현저해진것인가?   “갑질을 한다”는 말이 한국에서 많이 쓰여지면서 우리는 갑질을 하는 부유층사람들을 비난할 때가 많다. 한편 부유층이 아닌 우리 또한 일상생활에서 “갑질”을 하고있지 않는가 생각해볼바가 있다. 자기가 약자라고 판단한 상대방에게 부당한 행동을 한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갑질”인것이다.    흔히 “갑질”을 하는 사람들, 혹은 권위를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권위주의적”이라고 한다. 가부장적제도처럼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 상하관계가 형성되고 장기적으로 사람을 지배하고 복종시키는 힘이 존재하는 집단이라면 권위주의가치관을 소유하게 된다고 한다. 코리안은 그런면에서 “권위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기 쉬운 집단이라고 볼수 있다.  하지만 우리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하여온후 사회주의 남녀평등, 무산계급 이데올로기영향을 받아왔다는 특수한 사회환경이 있었기에 조선반도의 그것과 많이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수 있다. 현재사회에서 직업이 개인의 사회적지위와 생애 기회, 물질적복지 수준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이니 직업차별의식이 생기는건 자연적인것이 아닌가고. 하지만 직업구별과 직업차별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다양하게 살수 있는 사회여야 하지 않을가.   단순한 물질적평등화와는 다른, 인간으로서의 평등이야말로 진정한 풍요로운 세상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해본다.     【허연화 략력】   소속: 교토대학 문학부 행동문화학과 사회학   전공: 사회학, 지역연구, 이민연구.   학력: 일본 교토대학 석박사   주요 론저:    론문    《이민송출후의 농촌의 사회변화과정》 (2015, 소시오로지) 외 다수 론문을 국외학술지에 발표. 출처 인민넷 11월 22일자 위챗
33    주고받음, 호혜성과 우리네 삶 댓글:  조회:1755  추천:3  2016-11-15
주고받음, 호혜성과 우리네 삶 리화   생각해보면 태여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네 삶은 그야말로 주고받음의 련속이라 할수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생명을 주고 성장을 지켜주며 자녀는 부모의 로후를 돌봐드리고 생을 마감해드리며 사후의 령혼을 기리는 제사를 봉양한다. 형제자매 사이에는 혈육의 정을 나누고 타인에게서 받은 물질적, 로동적, 정신적 지지에 대해서는 그와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보답을 한다. 주고받음이 없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늘 주고받음속에서 살아간다고 할수 있다. 지난 금요일만 봐도 그렇다. 근 천억원을 훌쩍 넘긴 매출액, 안해의 23만원 거액쇼핑으로 인한 어느 젊은 남편의 기막힌 쇼크사 등등 엄청난 수치들과 자극적인 사연들로 온 중국이 떠들썩했던 “솔로의 날(光棍节)”온라인쇼핑데이. 화페와 물질의 랭정한 교환이 열광적으로 이루어지는 매년 11월 11일이지만 어린 친구들한테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 하나의 기념일이기도 하다. 근래에 와서 한국의 영향을 받아 조선족 특히 중소학생, 대학생들이 친구나 련인 사이에서 “빼빼로”과자를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친밀성을 표현하고 재확인하는 날자로 자리매김한 이날은 사실상 기업이 만들어낸 또 다른 “데이마케팅”이라는 본질은 희석된채 인간관계의 따뜻함만이 부각되고있다. 이렇듯 상부상조와 같은 고유의 주고받음 외에도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와 같이 서양이나 종교적명절 그리고 기업들의 교묘한 상술에 의한 각양각색의 기념일, 심지어 위챗에서의 댓글 달기에 숨겨진 교환의 심리전까지 우리 삶속의 류형, 무형의 주고받음은 날이 갈수록 그 명목이 번다해진다.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auss)는 이미 오래 전에 “증여론”(1925)을 통해 선물을 주고받는 교환체계가 인간관계의 중요한 기초로 작용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즉 인간은 “주고”, “받고”, “갚는” 련쇄속에서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가며 호혜성은 그러한 교환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해석한다. 한편 마샬 살린즈(Sahlins, 1972)는 사회적 뉴대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호혜성을 일반적호혜성과 균형적호혜성, 부정적호혜성의 세가지 형태로 구분하였다. 그중 부정적호혜성은 상대방의 리익을 해치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비인간적인 교환방식이므로 엄격한 의미에서의 호혜성이라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성을 규범화 할수 있는 호혜성은 일반적호혜성과 균형적호혜성에 한하며 어떤 형태의 호혜성을 활용하는가는 결과적으로 인간관계의 여하에 달려있다. 즉 다시말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여나면 필연적으로 부모형제를 비롯한 가족에서부터 이웃, 동료, 친구, 지인 심지어 생면부지의 타인에 이르기까지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속에서 살아가게 되여있으며 그러한 인간관계는 당사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차별화한 주고받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구분되는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석할 때 일반적호혜성은 등가교환을 념두에 두지 않고 상대방에게 물질적, 로동적 그리고 정신적 지원을 아낌없이 주는 호혜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또한 즉시적인 보답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받은 혜택을 되돌려 갚는것이 원칙이다. 례하면 우리의 관념속에 친밀도가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부모자식, 형제자매, 부부 등 가족 사이의 주고받음이 바로 이러한 호혜성에 기초한것이다. 다 알다싶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미풍량속을 자랑하여왔다. 특히 “효”는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근본적도리로서 중시를 받았으며 그러한 “효”의 핵심은 다름아닌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있다고 인식되여왔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족 부모자식 사이의 주고받음을 살펴볼 때 일반적호혜성의 균형이 무너지고있음을 쉽게 느낄수 있다. 즉 부모의 일방적인 “주기”가 강조되고 자식의 “갚음”의식이 크게 약화되고있으며 그 “갚음”마저도 부가적조건이 따르는것으로 변질하고있는 현실이다. 자식의 교육과 성장에 대한 책임뿐만아니라 결혼, 출산, 손자녀의 돌잔치와 교육 자금 등에 대한 경제적지원과 돌봄로동까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가늠하는 척도로 변해가고있다. 아울러 이는 부모에 대한 보답이 더는 절대적인 “효”의 규범에만 따르는것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과 물질, 로동의 지원여하에 의해 철저하게 계산되고 결정됨을 의미하는것이다. 한편 균형적호혜성은 당사자들이 처해있는 사회의 도덕적척도에 걸맞게 상대방에게서 받은것만큼 돌려줘야 하는 등가교환의 원칙을 가리킨다. 례를 들어 친구, 동료, 지인, 이웃, 친인척 사이에 행해지는 돌잔치, 혼례, 수연례, 상례에서의 부조, 로동과 봉사 및 정신적 지지의 주고받음이 그러하다고 볼수 있다. 우리 민족은 두레, 품앗이, 계 그리고 경조사 부조와 같이 더불어 사는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내려왔다. 하여 류달리 “정 많은” 민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체면을 중시하고 “통이 큰” 약점도 지니고있다. 특히 같은 민족인 한국인들마저도 혀를 차게 만드는 조선족의 부조문화는 우리만의 독특한 사회적배경 하에서 형성된것으로 돈액수의 크기와 한 사람의 인격 내지는 도덕성을 정비례시키는 척도의 역할까지 하는 탓에 좀처럼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또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납득하고 수긍하는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왕왕 부조때문에 골치 아파하고 욕을 하면서도 정작 체면때문에 도를 넘는 부조행위를 거듭하게 되는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친척관계의 지나친 친밀감으로 오는 갈등을 들수 있다. 우리 민족의 친족명칭은 상당히 세밀하다고 볼수 있다. 례를 들어 가까운 한족, 일본인과 비교해봐도 한족들은 “堂•表”라는 글귀로 친가, 외가의 친척을 구분하기는 하지만 사촌 이상의 친족을 정확히 나타내는 용어가 없으며 일본사람들은 아예 친가, 외가의 사촌마저도 직접 구분할수 있는 명칭이 없다. 그에 비해 우리는 친족관계의 멀고 가까움을 “친가, 외가”, “촌수”로 세부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친족간의 친밀도를 아주 선명하게 나타낸다. “팔촌이 한 구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관계의 명확성은 “우리”와 “남”이라는 경계를 철저히 긋고 “우리”의 울타리안에서 끈끈한 혈육의 정을 나누는데 중요한 기제로 작용해왔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바로 우리의 관념속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혈연관계에 대한 강박의식이 때로는 심리적인 압박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가장 흔한 례로 해외 이주로동자들이 귀국시에 보통 겪게 되는 인사치레의 고민을 들수 있다. 친척중의 누구한테 얼마를 줘야 만족할지, 출국시에는 얼마를 받았는데 돌려줄 때는 적어도 받은 금액 이상으로 갚아야 되지 않나 등 생각으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고 그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시 귀국을 망설이게 되며 실제로 이러한 금전교환의 불균형으로 인해 부모, 형제, 친척 사이에 갈등을 겪는 사례들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이 경제적인 주고받음이 가족의 유대를 강화하는 보완작용을 하는 반면 관계의 긴장감을 초래하는 경우도 많다. 주고받음은 인간의 모든 공동체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양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집단의 관습 및 도덕적기준 여하에 따라 그 특성을 달리하기도 한다. 우리 조선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여러 류형의 증여교환 역시 앞에서 언급한 일반적 및 균형적 호혜성에 귀속되는것들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생활에서 사람들이 그로 인해 갈등을 겪고 고민하는 리유는 바로 그러한 호혜성과 우리의 가족관념, 도덕관념의 괴리에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틀린것은 과감히 바로잡고 대다수가 편하고 합리하다고 인지하는 주고받음의 도덕성을 만들어가야만 우리는 그안에서 인간관계의 따뜻함을 온전히 느끼고 인생의 참뜻을 터득해나갈수 있는것이다. 【리화 략력】 소속: 연변대학교 사회학과 전공: 문화인류학, 초국가적 이동과 가족, 조선족 생활문화 학력: 일본 동북대학교 학술박사 연변대학교 정치학 학사 주요 론저: 저서 《조선족사회의 변동과 가족생활》 (2015, 한국학술정보) 외 다수 론문을 국내외학술지에 발표
32    조선족 녀성사회조직의 현황과 발전방향 댓글:  조회:1584  추천:1  2016-11-09
조선족 녀성사회조직의 현황과 발전방향 김화선 녀성사회조직이란 녀성리더가 이끌어가는 사회조직과 녀성, 아동, 가정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조직을 가리킨다. 중국사회의 전환기에 여러가지 리익관계가 끊임없이 조절되면서 각종 녀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녀성사회조직을 건설해야 할 현실적인 요구가 제기되였다. 또한 사회개혁이 심화됨에 따라 녀성집단의 이동이 더 빨라지고 그들의 사상관념, 생활방식, 발전수요가 나날이 다원화되여가고있는 추세속에서 녀성들의 다양한 수요를 만족시키려는 녀성사회조직들이 우후죽순마냥 증가하고있는 현상을 보인다.    조선족 녀성사회조직은 조선족기업가협회, 조선족로인협회와 더불어 목전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있는 사회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족 녀성인구가 가장 많이 있는 연변의 경우, 연변조선족자치주민정국에 등록한 주급 녀성사회단체로는 주로 연변주녀기업가협회, 연변농촌녀능인협회, 연변녀의사협회, 연변가정복무항업협회, 연변주부유보건협회, 연변주녀지식인련합회, 연변조선족중년녀성발전촉진회, 연변녀문인협회, 연변애심어머니협회, 연변주녀지도간부협회,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 연변사회교육연구회 등 10여개 있다. 이들 녀성사회조직의 업무지도단위로는 연변주부련회 혹은 연변주사회과학련합회이다. 연길시급 녀성사회단체로는 주로 연길시유치원원장협회, 연길시녀테니스애심협회, 연길시행복가정협회, 연길시녀성문화예술협회, 연길시공원가두원회사회구역보호아동애심협회 등이 있다. 이들 조직의 녀성리더들은 대부분 조선족녀성들이다.    연변이외의 도시지역에서 활동하고있는 주요한 조선족 녀성사회단체들로는 11개로 집계되고있다. 그중 1987년에 설립된 장춘시조선족녀성협회(회원 352명)와 1988년에 설립된 심양시조선족녀성협회(회원 150명)는 조선족의 전통 집거지역의 대도시에서 비교적 일찍 설립된 녀성단체로서 근 30년의 력사를 갖고있다. 그리고 2002년에 설립된 청도조선족녀성협회(회원 258명), 2006년에 설립된 상해조선족녀성협회(회원 58명), 2007년에 설립된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회원 107명), 2010년에 설립된 연태시조선족녀성협회(회원 85명)와 심천시조선족녀성협회(회원 75명), 2014년에 설립된 동관조선족녀성협회(회원 51명), 2015년에 설립된 광주시조선족녀성협회(회원 70명)와 위해시조선족녀성협회(회원 66명), 2016년에 설립된 천진조선족녀성협회(회원 81명) 등은 조선족 녀성의 국내 이동과 더불어 2000년 이후에 대도시에서 설립된 대표적인 조선족 녀성단체들이다.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에서는 2008년에 전국적인 “전국애심녀성포럼제1차워크숍”을 발기하여 진행했는데 그후부터 해마다 지속적으로 주도하여 2016년9월에는 산동성연태시에서 전국 12개 도시나 지역의 대표적인 조선족 녀성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전국애심녀성포럼 제8회워크숍 및 제7회 차세대 리더양성 프로그람”을 진행했다. 2009년 12월에 북경에서 성립된 “전국애심녀성포럼”(제1대 의장 리란, 제2대 의장 류필란)은 몇차례의 워크숍을 거치면서 조직기구를 확대, 정리했는바 산하에는 자선공익위원회, 문교위원회, 행정위원회, 차세대위원회 등 조직기구가 갖추어져있다. 2015년에는 《연변녀성》잡지사와 전략적제휴관계를 맺었으며 9월 2일을 “전국애심녀성의 우리말과 글 사랑의 날”로 정했다. “전국애심녀성포럼”의 개최는 각 도시나 지역의 조선족 녀성단체의 리더들이 서로 만나 경험을 나누고 공유하면서 동반성장하도록 격려하고 또 지역 녀성단체를 활성화 시키는데 긍정적인 촉진역할을 하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족 녀성사회조직은 업종별로 성립되었거나 여가취미생활을 위해, 혹은 녀성, 아동, 가정 교육을 주목적으로 설립된 경우가 대부분인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리유에서 설립되엿든간에 다수의 조선족 녀성사회조직의 활동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 말, 우리 글 잡지, 우리 노래, 우리 복장, 우리 음식 등 조선민족문화를 사랑하고 계승, 발전시키려는 사명감과 열정이 있으며 재해지구돕기, 빈곤어린이돕기, 장애인돕기, 학생심리장애극복하기 등 지역의 사회공익사업에 발벗고 나서는 모성리더쉽을 발휘하는 공동점이 보인다. 따라서 조선족 녀성사회조직의 녀성리더들은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우리 민족문화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고도의 책임감과 문화적자각을 내재하고있는것으로 보여진다.    이미 시작된 정부의 부련회사업의 개혁조치로 앞으로 녀성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함에 있어서 녀성사회조직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더 두드러지게 부각될것이다.그러나 조선족녀성의 인구에 비해 조선족 녀성사회조직의 수는 매우 적은 편이며 자주성도 부족한 편이다. 또한 녀성사회조직은 기존의 취미생활이나 애심활동에 만족하지 말고 부련회 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부에서 양도하는 직능을 이어받아 대체할 수 있는 강한 비판능력과 사업능력을 키우는데 사업중심을 옮겨와야 할것이다. 그리하여 녀성사회조직의 활동경비가 단지 회원들의 회비로 해결되는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정부의 여러가지 연구, 활동프로젝트를 신청하여 받아 녀성사회조직의 지속적인 생존과 발전이 가능하도록 전략을 세워야 할것이다.   [김화선 략력]   소속: 현재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주임, 연변대학 사회학과 부교수   학력: 리화녀자대학교 녀성학과 박사, 연변대학 정치학부 학사   저서: 《조선족마을의 변천연구》(2012년), 연변대학출판사. 인민넷 위챗 11월 7일자   
31    중국조선족의 “근대성”을 상상한다(3) 댓글:  조회:1778  추천:1  2016-10-30
중국조선족의 “근대성”을 상상한다(3) 박우   국경절 년휴의 여운이 아직도 상당한가 봅니다. SNS는 지인들의 려행사진을 게재하는것으로 기능을 뽐내고있습니다. 려행의 행적을 기록한 많은 사진들중 단연 저의 눈에 가장 예쁘게 보이는것은 저의 고향을 다녀간분들의 사진이였습니다.    저에게 사진을 보내주면서 이 깨끗한 공기와 환경을 갖게 된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례의상” 묻는 지인이 있습니다. 저는 깨끗한 자연을 태생적으로 경험한 가진자의 여유를 부리면서 “공장이 없어서 공기가 좋을수 밖에 없다.”는 연변식의 롱담을 던졌습니다.   이 사람들은 연변에 가서 공기만 마신게 아니였습니다. 아시아의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만무과원에도 들렀나 봅니다. 사과배를 들고, 안고, 만지며 사진 찍었습니다. “왜 사과배인지, 왜 룡정배, 연변배가 아닌지?”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높은 위도의 건조한 조건에서도 과일이 자랄수 있다는것이 궁금한가 봅니다. “너무 많이 알면 다친다”고 말해주면서 저의 무지함을 덮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과배만 먹었던게 아니였습니다. 만무과원 바로 맞은편, 해란강을 사이에 둔 드넓은 벌판의 벼를 보고 흥분한듯 합니다. 우리가 중학교때 력사나 지리 수업에 중국의 벼농사는 황하, 장강, 주강 류역에서 이루어지고있고 1년 2모작, 2년 3모작을 통해 생산량이 상당하다고 배웠습니다. 이 지인들은 “이렇게 높은 위도에서도 벼가 잘 자라네?”라고 합니다. “그 원리는 무엇인가?”라고 또 묻습니다. 어디서 이런 먹물을 들이켰는지 연변말로 “와늘 심도 있는” 질문만 해댑니다.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높인 과학적원리는 무엇인가?”라고 되물으면서 저는 뜸들였습니다. 딱히 답할수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제가 모르고있다고 말하는게 더 솔직하겠네요.        이 사람들은 벼밭만 본게 아니였습니다. 신나게 연길 시내를 보행했나 봅니다. 원체 자가용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이들은 연길사람과 어깨를 스치면서 구경하였답니다. 그 중 동행했던 외국인 친구가 자신의 인상속의 빨간색으로 표상되는 중국의 도시와 너무 다르다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또 질문을 던지더군요. “연길의 도시건설리념은 무엇인가?” 아… 이건 이 분야 전문가만 알진대. 그리고 참 궁금한게 많은 이 친구는 “시내 건축들도 참 특색이 있는데 설계리념은 무엇인가?”라는 애정 어린 질문공세를 이어댔습니다. 머리속에 아는 단어를 총 동원하여 서양고전, 문예부흥, 사회주의 고딕, 바로크, 비잔틴 등등 나름 둘러대려고 했으나 막상 고향의 건축은 무슨 철학인지 생각조차 해본적 없었던것 같습니다.    이쯤 되니 제가 과연 연변에 대해서, 나아가 조선족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있을가 라는 자문을 하게 되더군요.    우리는 중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청정 자연에 살고있지만 이 자연은 어떻게 유지되고 구성되였는지 진지하게 생각을 안했던것 같습니다. 고위도지대에서 개척한 1차산업은 농업사, 원예사에 기재될만한 과학적혁신이였습니다. 빨간색이 아니여도 충분히 내용을 소화할수 있는 철학과 기술이 있었기때문에 오늘날의 도시가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과학의 보고(寶庫)에 살고있었지만 보고의 과학적요소는 너무 당연시되고 일상화되다 보니 느낄수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이 지인이 저에게 한 질문들은 근대적지식이 어떻게 연변사람 또는 조선족에게 내면화되였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영농과학기술을 조선족농민들은 어떻게 습득했고, 이 기술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전파되였는가에 대한 질문이였습니다. 도시경관을 결정하는 근대적철학은 무엇이며 이 철학은 어떻게 연변 사람 또는 조선족의 일상과 융합하게 되였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족은 아주 확고한 “과학주의” 신념을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중국내에서 다른 집단에 비해 월등한 교육수준을 자랑하는것도 이 신념의 현실적반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과학, 사회과학의 전문화는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을 그 누구보다 먼저 “리성”의 령역으로 인도했던것 같습니다.    이 과학의 전문화는 당연히 풍부한 전문적인 교육기관과 교육자들에 의해 재생산되였겠지요.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의학 등 학문은 중국 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일찌기 조선족의 뇌리에 장착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사회과학의 령역은 여러가지 굴곡이 있었지만 그래도 조선족사회에 연착륙합니다. 그렇다면 중국조선족의 근대적지식의 내면화를 전통과의 부분적  “단절”을 고한 중요한 사례중 하나로 볼수 있지 않을가요?     너무 자연스럽게 그 문화의 내부에 있다보니 이러한 근대적인식은 “정체성화”되기 어려웠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연변, 조선족, 또는 제 개인이 본격적이고 다차원적으로 외부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 이 “과학주의”적인식이 정체성의 한 측면으로 인지되기 시작한것 같습니다. 일명 만들어진 문화로서 “과학주의”적정체성이 구성되기 시작하는것 같습니다.   기실 이런 현상은 력사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과학과 리성은 력사발전의 매 순간을 이어놓았고 근대적인간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문명의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요소들에 대해 외국은 이미 구체적인 실체를 통해 “문화화”하고 대대손손 재생산하고있었습니다. 중국의 일부 대도시들도 이 작업에 엄청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실체중 하나가 다름아닌 박물관입니다.   외국의 도시들을 거닐다보면 가장 부러운것이 크고 작은 테마(주제)박물관이 많다는것이였습니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사소한것들이 어떤 원리에 의해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알려주고있었습니다. 이 물질적발전의 과학적근거, 또는 이 과학적근거의 근거로서 철학의 론리를 알려주고있었습니다.  도시공간에 꽉 들어찬 “실체화”되고 문화화된 삶의 양상에 대해 이 지역 사람들은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지역을 설명해줄수 있는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박물관이 전문화된 과학을 대중화된 과학으로 이끄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있었던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자랑스러운 과학적문화유산을 원초적(자연적) 형태 그대로 두기만 할가요? 이 원초적형태의것을 문화화함으로써 우리를 구성하는 요소를 더욱 풍부하고 밀도있게 하면 좋지 않을가요? 도시에 사과배박물관, 벼박물관, 음식(발효)박물관, 건축박물관, 철도박물관, 환경박물관, 황소박물관, 송이박물관, 하천박물관, 어류박물관, 지질박물관 등과 류사한 시설들로 꽉 채워 문화유산의 과학적요소를 대중화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지역 전문가가 될수 있게 할수는 없을가요? 나아가 이 지역을 찾은 외부인들에게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중 하나로서 “과학주의”적인식을 소개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욱 풍부한 문화를 느끼게 하면 좋지 않을가요?   산업(공업)도시의 부분적 기능은 소비사회의 도래로 퇴조하거나 소실됩니다. 대신 이 부분은 소비도시의 새로운 요소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 요소들중 하나가 바로 지역 거주자들의 문화적성격을 해석해주는 콘텐츠입니다. 산업도시에서는 공장(중국으로 치면 單位)을 중심으로 한 제도들이 공동체의 유지에 중요한 기능을 했지만 소비도시에서는 이 공동체가 파편화되는 개인들에 의해 위태롭게 됩니다. 공동체안에서 개인들은 귀속의식으로서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는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 이 사유에 근거한 “정답”의 출현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동체존페의 위기는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곳은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어떤 곳은 근(현)대적성격을 만들어 내고있었습니다. 연변은, 조선족은 전자의 창출은 성공적으로 한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것은 후자에 대한 관심이라고 보여집니다. 인민넷 10월 24일자   【박우 략력】 소속: 한국 한성대학 교양교직학부 전공: 이민사회학, 정치사회학, 동아시아 이주와 시민권 문제, 한국의 조선족 사회 학력: 한국 서울대학 박사과정 수료 한국 서울대학 사회학 석사 연변대학 식품공학 학사 경력: 한국 한성대학 교양교직학부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조교수.  주요 론저:  편저로는《우리가 만난 한국(2012, 한국, 북코리아)、역서로는 《한국과 중국의 사회변동 비교연구》(2013, 한국, 나남), 《중국 동북지역 도시사 연구》(2016, 한국, 진인진)등.
30    조선족의 이중언어교육과 이중언어문화교육 댓글:  조회:1451  추천:1  2016-10-30
조선족의 이중언어교육과 이중언어문화교육 최학송(중앙민족대학교) 1. 왜 “족보”가 필요한가  족보(族譜)”란 흔히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부계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적어낸 책을 말한다. 한 가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적어냈기에 족보는 가문의 력사책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족보는 단순히 가문의 력사를 기록하는 역할에 멈추지 않는다. 족보는 후손들에게 하나의 전통을 만들어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긍지감을 갖고 오늘을 살아가게 한다. 특히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것을 이겨나가는 무언의 힘과 동력의 원천이 된다. “조상들에게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라도 다시 한번 역경에 도전하는 받침목이 되는것이다. 때문에 족보는 “뼈대있는 가문의 후손”과 “근본이 없는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한중수교이후 한국을 다녀온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의 종친회를 찾아가 중국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을 족보에 올리고 또 그 족보를 받아온것도 이런 맥락에서 리해할수 있겠다.  민족으로 말하면 민족의 력사가 곧 그 민족의 족보라고 할수 있다. 유감스러운것은 오늘날 우리 조선족들은 민족의 족보인 민족력사를 잊어가고있는것이다. 조선민족으로서 단군신화를 모르고, 조선족으로서 이주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있다. 선족은 또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신분을 갖고있다. 그러면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중국의 력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가? 솔직히 이 글을 쓰고있는 나 자신도 “중원(中原)”이란 오늘날의 하남(河南)성 일대를 가리킴을 안것이 불과 몇달전이다. 우리 조선족들은 중국의 력사도 잘 모르고있다.  족의 력사를 모르는 사람이 민족의 문화를 안다면 또 얼마나 잘 알가? 력사와 문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이런 상식들로부터 우리는 멀어지고있다. 우리의 력사와 문화를 모르고 단순히 언어만을 배웠다고 할 때 이는 하나의 외국어를 배운것과 큰 차이가 없을것이다. 민족적 정체성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어쩌면 언어보다도 력사와 문화를 장악하는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2.교육체계에서 사라진 력사와 문화 일전에 올해 대학에 진학한 조선족 신입생들에게 “단군신화”를 아는가고 물어본적이 있다. 대부분이 처음 들어보는 말이란다. 극소수만이 중학교시절 조선어문 선생님으로부터 단군신화를 들어본적이 있다고 했다. 조선족대학생들과 교류하다보면 이들이 알고있는 우리 민족의 력사나 문화 관련 지식이 너무나 빈약함을 실감하게 된다. 이럴수 밖에 없는것이 이들이 받은 교육체계에는 우리 민족의 력사, 문화 관련 지식이 거의 없었다. 단군을 모르는 단군의 후손이 나타난것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내용을 배워주지 않은 학교 나아가서는 조선족사회의 문제이다. 연변대학 김해영선생의 론문 “중국 조선족학교 민족문화 교육과정 개발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보면 중국은 2001년부터 새로운 교육과정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번 교육과정개혁은 국가교육과정, 지방교육과정, 학교교육과정 3급 관리체계를 갖춤으로써 각 지방에서는 지방교육과정을, 각 학교에서는 학교교육과정을, 그리고 각 민족은 민족특색의 교육과정을 개발 및 실행할수 있는 정책적조치와 시공간이 마련되였다. 이와 동시에 연변조선족자치주교육국에서는 2007년 10월에 “전주조선족중소학교에서 조선족민족문화교육을 실행할데 관한 지도의견”을 제시하였으며 조선족 산재 지역들에서도 관련 정책에 근거하여 정도부동하게 소수민족학교에서 소수민족문화교육을 진행할수 있도록 정책적지원을 마련하였다. 이런 형세에 발맞추어 전국 조선족 중소학교들에서는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다루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실시되고 교재가 개발되였다. 하지만 대부분 학교들에서 민족의 력사, 문화 관련 교육과정은 실행되지 않고 형식에 머물러있다고 한다. 필자가 조선족대학생들과 교류하고 또 최근에 이 글 집필을 위하여 개별적으로 알아본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가르쳐라는 정책까지 마련되여있고 또 그것을 독려하지만 교육 현실은 대학입시 평가체계에서 배제되여있다는 리유로 이것을 외면하고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학교밖에서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배울수 있는 기회와 도경은 얼마나 되는가? 한족학생들이나 한국의 학생들은 어릴적부터 각 년령단계별로 설계된 도서나 영상물을 통하여 력사와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으며 또 현실적으로 그런 도경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익혀가고있지만 우리 조선족학생들에게는 이런 도서나 영상물이 아주 적음은 자명하다. 실제로 우리 학생들은 일단 교정을 벗어나면 중국의 주류문화와 각종 도서와 영상물을 통하여 들어온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한국문화에 무작위로 로출된다. 한족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계된 중국 주류문화체계나 한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계된 한국문화체계는 우리 조선족학생들로 보면 배워야 하는 대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현실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조선족학생들에게는 옳바른 정체성 확립에 필수적인 력사와 문화 습득 시스템이 결여되여있다고도 할수 있다.  3.언어교육과 문화교육을 결합시켜야  오늘날 조선족은 비록 세계화시대를 살아간다고 하지만 주요한 삶의 무대는 여전히 중국과 한국이다. 그리고 조선족의 최대경쟁력은 조선어와 한어라는 이중언어를 장악한것이다. 이때 말하는 “언어”는 단순한 “말”에 멈추는것이 아니라 “문화”도 포함되는것이여야 한다. 조선족(조선민족)의 문화와 중국의 주류문화를 모두 잘 알고있음으로써 단순히 “말”이 통하는것이 아니라 “생각”마저 통할 때 우리는 진정한 경쟁력을 갖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력사와 문화를 잘 모를뿐만아니라 언어마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요즈음의 조선족대학생들을 보면 우리말 실력이 갈수록 저하되고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구두어도 문제이지만 서면어는 더욱 심각하다. 맞춤법이나 문법적인 문제가 적지 않을뿐만아니라 글의 론리성에도 문제가 많다. 그러면 한어는 잘 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것 같다. 조선족학생들의 한어수준이 전에 비하면 현저히 제고된것은 사실이지만 한족학생들과 비하면 아직도 차이가 존재한다. 한어실력이 제고된 동시에 조선어실력이 저하된것이 조선족중소학교 이중언어교육의 현실이다. 연변지역은 아직까지 괜찮다고 할수 있지만 산재지역은 많은 학생들이 한어를 일상용어로 사용하다보니 조선어가 거의 외국어처럼 사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어는 한족들보다 못하고 조선어는 한국인들보다 못한것이 오늘날 조선족의 현실이다. 현재 중국의 200여개 대학교에서 한국어학과를 개설하였으며 갈수록 많은 한국 학생들이 한어를 배우고 중국에 류학오고있다. 한중수교 초기 두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거의 조선족밖에 없었을 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두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고있다. 더욱 큰 문제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중국의 주류문화에 대한 리해에서는 한족들보다 못하고 한국문화에 대한 리해는 한국인들보다 적다. 본격적인 교류에 들어가면 언어보다 중요한것이 어쩌면 문화일수도 있음을 감안할 때 조선족의 미래 경쟁력이 걱정되지 않을수 없다.  현재 이중언어교육 실시만으로도 학업부담이 적지 않지만 언어교육을 문화교육과 결합시켜 이중언어문화교육을 실시하는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조선족에게 있어 조선어와 한어는 영어나 일어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언어이다. 조선어는 민족의 언어로서 우리의 민족적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며 한어는 국가의 통용어로서 중국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반드시 필요되는 존재이다. 때문에 조선어와 한어는 단순한 언어공부가 아니라 그 언어를 지탱해주고있는 력사와 문화를 배움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조선족(조선민족)으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력사와 문화는 결코 한권의 교과서로 배울수 있는것이 아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기초적인 력사, 문화 지식을 전수하는 동시에 학생들을 인도하여 다양한 관련 서적을 읽게 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지식면을 넓혀나가게 해야 한다. 이런 독서과정은 다시 학생들의 언어수준의 제고과 론리성의 강화에 도움이 될것이다. 인민넷 10월 10일자
29    부모님곁을 지키자, 그게 효도다 댓글:  조회:892  추천:0  2016-10-19
부모님곁을 지키자, 그게 효도다 최유학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에 조선족의 도시인구 비률은 34.59%에서 65%로 상승하였고 도시화률은 50.2%에서 80%로 상승하였다고 한다. 혹자는 발달국수준이라고 할수 있는 높은 도시화률만을 보고 우리 민족이 경제적인 부를 이룩하고 삶의 질이 향상되였다고 기뻐할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조건 락관할 일만은 아니다. 시장화, 글로벌화와 이민화에 떠밀려 이룩한 이러한 압축식 도시화는 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 인구의 산거(散居)화, 농촌 공동(空洞)화 등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안겨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것은 로인들의 복지문제이다. 다시말하면 현재 인구고령화와 인구이동으로 인해 많은 60세 이상의 1-2세대 조선족의 부모님들이 외롭고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텅빈 농촌에 남아있거나 동북의 도시들에 거주하거나 아니면 동북의 거주지를 떠나 중국내 도시 또는 한국으로 이주해 살거나를 막론하고 그중 상당수 로인들이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생활하고있는것으로 나타났다.   그럼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너와 나, 우리들의 고생많으신 부모님들이다. 현재 60세 이상인 로인들의 경우 시대적인 원인으로 일반적으로 자식이 여러명이다. 개혁개방을 맞아 자식교육에도 돈이 만만치 않게 들기때문에 그 자식들 뒤바라지를 위해 개혁개방초기 너도나도 김치장사를 떠난 부모님들이며 언 겨울에도 자식손에 쥐여줄 꽈배기나 과자 등을 살 욕심으로 끼니를 거르거나 언 찐빵을 씹으며 타향의 겨울 시가지의 골목길에서 떨고 섰었던 부모님들이다. 농사로만은 자식들의 공부를 뒤바라지 할 수 없고 자식을 장가 또는 시집 보내기 어렵기때문에 농사일이 없는 시간을 리용해 너도나도 김치장사를 떠나는것이 한동안은 어느 조선족마을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풍경이였다. 필자도 기억이 난다. 고추가루를 가득 묻혀 김치를 버무리는 발갛게 언 어머니의 손이 눈앞에 선하며 크고 작은 소래기들을 싼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손에다 들고 김치장사를 떠나는 어머니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울컥 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럴 때면 아무리 불효인 자식이라도 앞으로 커서 꼭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라고 누구나 한번쯤은 굳은 결심을 했을것이다.   그러나 김치장사도 한동안이였고 곧 한국길이 트이여서는 몸에 병이 들거나 늙어 일을 하지 못하는 분들을 빼고는 거의다 한국에 가서 건축현장에서,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다. 60세 이상의 부모님들의 경우, 지금도 한국에서 건축현장 또는 식당에서 일하고있는 경우가 많다. 지어 나이가 70세 가까이 되여서도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 부모님들도 심심찮게 볼수 있다. 그들중에 몸에 병이 있어 일을 못하는 부모들의 경우에는 손자, 손녀를 보느라고 정신없이 바삐 보내기도 한다. 손자손녀 보는 재미에 외로움을 별로 못 느끼다가 손자손녀까지 다 키워서 내보내고나니 외로움이 찾아들게 되며 자식들도 치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나가느라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된다. 지금은 멀리 떨어진 그 자식들에게 아글타글 모은 돈으로 된장, 고추장, 고향의 무말랭이, 시래기, 산나물을 해서 보내는것이 늙으신 부모님들이 외로움을 달래는 일상이며 그들이 느끼는 유일한 락이 되였다.   정말로 헌신적으로 자식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친 존경스러운 우리 민족 부모님들이시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그들에게 일을 못하게 될 때가 서서히 다가온다. 더는 일할 기력이 없을 때가 되면 당연히 집에서 로년생활을 즐겨야 하겠지만 번 돈은 자식들 집사는데 다 보태버렸고 로후를 대비한 경제력이 부족한데다가 얼마 안 가서 혼자 밥 지어먹고 옷 씻어 입는 등 가사일에도 몸이 따라주지 않게 된다. 정말 큰일이다. 이쯤 되면 자식들이 옆에서 효도를 할법 한데 고개를 들어 몇번이나 보고 또 보아도 곁에는 시중들어줄 자식 한명 없다. 시중이 아니라 어떤 부모들에게는 옆에서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해줄 자식이 없다.   우로는 부모님을 정성껏 모시고, 아래로는 한명도 아닌 여러명의 자식들을 키우면서 한평생 뼈빠지게 일했건만 늙어서 돌아온건 자식들의 효도가 아닌 병든 몸과 외로운 로년생활뿐이다. 자식들은 저마다 이미 결혼을 하여서 자기 새끼를 기른다고 정신이 팔려 늙은 부모는 돌봐드릴 사이도 없는것 같다.    동북의 농촌에 남아있는 로인들의 경우 공동화된 농촌사회에서 홀로 버려진 외로움과 쓰라림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국내나 한국의 도시에 살고있는 부모님들의 경우도 별로 더 나은것이 없다. 어떤 부모들은 하는수 없이 자원적으로 또는 자식들의 강박에 의하여 양로원에 가서 로년생활을 쓸쓸히 보내고있다. 여러가지로 조건이 좋은 양로원들이 많이 운영되고있다고는 하나 양로원으로 떠나는 부모님들의 발길은 좀체로 떨어지지 않고있으며 그 심경은 쓸쓸하고 외롭기 짝이 없다. 그들로서는 자신이 늙어 양로원에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였고 자신을 양로원에 보낸 자식들이 그렇게 서운할수가 없고 자신의 신세가 그렇게 한스러울수가 없다.   옛날에는 농촌거주지에서 소대, 대대 단위로 나름대로의 로인협회 등이 있고 친척과 친구, 이웃들이 많아 외로움을 그렇게 느끼지 못했는데 자식 따라 타향의 도시에 나왔다가 여러가지 원인으로 또 자식들과 떨어져 따로 생활하게 된 로인들에게 갑작스럽게 찾아든 외로움이 산처럼 그들을 누르고있다. 안그래도 이웃사이에 벽을 쌓고 사는 도시생활이라 잔뜩 적응하기에 힘들었던 부모님들은 이제는 언어적인 장벽 또는 문화적인 장벽으로 인해 도시에서 친구 한명 없이 외로운 인생을 보내야 한다.   이런 외로움이 경제적으로 찾아오는 궁핌함과 함께 찾아올 때는 더욱더 치명적이다. 혹 자식들이 경제적으로 부모님께 효도를 제대로 하는 경우에는 자식들이 옆에 없어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는데 경제적으로 자식들이 돕지도 못할 경우 부모님의 생활은 그야말로 벼랑끝이라고 할수 있다.    농촌공동체사회시대와 개혁개방시대를 모두 살아오신 우리들의 부모님은 실로 자식들을 위해 한평생을 다바쳤다고 할수 있다. 그런 부모님을 늙으막에 외롭게 그대로 둘 수 없다. 자주 집에 가서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현재 40대, 50대가 된 세대들이 잘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외로움에 떨고있는 부모님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것인가? 부모님을 곁에 모시고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를수 있다. 집이 작아서 부모님과 함께 있지 못할테고, 경제력이 안되여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할테고, 배우자가 눈치 보여서 가정불화를 막기 위해 부모님을 모시지 못할테고, 부모님이 가정보모와 함께 살겠다고 해서 모시지 못할테고, 부모님이 양로원에 가겠다고 해서 모시지 못할테고, 부모님이 따로 사는게 더 편하다고 해서 모시지 못할테고, 또는 형제가 여럿이어서 누가 모셔야 할지를 쉽게 결정하기 어려워 모시지 못할테고, 생계를 위해 한국에서 또는 외지에서 일을 해야 하므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할것이다…. 리유를 찾자면 얼마든지 찾을수 있다. 또 그 리유나 상황들이 개개의 당사자들에게는 얼마나 절박한지도 리해가 간다. 그러나 효도는 이런 리유들로 외면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건 리유가 아니라 구실이다. 효도할 마음이 있다면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홀로 된 부모님이 계신다면 더구나 시급한 문제이다. 농촌에 계시든 도시에 계시든 아니면 한국에 계시든 70, 80이 넘으신 부모님이 따로 살고 계신다면 무조건 집에 모셔와야 한다. “무조건”이란 노래를 부를 때 가사중의 “당신”을 “부모”라고 한번쯤은 바꾸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시대탓을 한다고 하더라도 70, 80이 다된 부모님을 따로 생활하게 그대로 둔다는것은 이미 상식을 벗어난 얘기이며 불효다. 오늘이라도 당장 그대 형제자매들과 머리를 맞대고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해야 하는지를 의논해야 한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부모님을 모시며 함께 살아야 마땅하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나무는 고요하게 있고싶어 하나 바람은 그치지 않아 움직이게 하고),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 자식이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이미 돌아가 이 세상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후회없는 인생을 위하여 부모님곁을 지키자. 그게 효도이다. 인민넷 2016-10-17 위챗 [최유학 략력] 성명: 최유학(崔有学)  소속: 중앙민족대학교 한국어학과 전공: 한국현대문학 경력:  중앙민족대학교 한국어학과(2007-현재) 중앙민족번역국 조선문번역실(1996-2006) 주요 론저: 저서 《박태원의 문학과 번역》과 역서 《내 여자의 열매(我的植物妻子 )》 등 출간, 국내외학술지에 론문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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