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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1859~1916년)는 북양군벌사령관으로부터 중화민국 대통령직을 력임하였다. 자는 위정(慰庭)이고 호는 용암(容庵)이며 하남성 항성 출신이다. 젊은 시절에 두번이나 향시에 응시했으나 합격되지 못하자 결국 문(文)을 포기하고 무(武)를 택하여 리홍장의 막료인 오장경의 휘하로 들어갔다.
1882년(광서 8년) 8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당시 청나라정부는 조선(명성황후)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오장경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원세개는 리홍장의 천거로 한성에 주둔하면서 조선방어임무를 맡았다.
1894년 7월, 중일갑오전쟁(즉 청일전쟁)이 터지기전날 밤에 원세개는 변장을 하고 한성에서 탈출한후 천진으로 돌아왔다.
1895년 12월, 원세개는 영록, 리홍장 등의 추천으로 천진소참(天津小站)에 주둔하고있는 정무군에 파견되였다. 그는 정무군의 이름을 “신건륙군”으로 바꾸고 많은 심복들을 끌어들이거나 양성하여 전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후 이들은 대부분 청나라말기 중화민국초기의 군정요인으로 되였다. 서세창(徐世昌), 단기서(段祺瑞), 풍국장, 왕사진, 조곤, 장훈 등이 바로 그들이다. 천진소참의 군사훈련은 청나라말기 신식군대발전의 전환점으로 되였으며 또한 원세개의 야망을 다지는 기초로 되였다. 당시 유신변법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자 원세개는 강연학회에 기부금을 내고 유신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898년, 무술변법기간에 원세개는 유신파앞에서는 “보수파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내오자”는 제안을 수락하였지만 돌아서자마자 이 사실을 서태후에게 밀고했다.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구금하고 다시 섭정을 맡는다고 선포했다.
1899년 6월, 원세개는 공부우시랑, 산동순무 서리로 승진하여 신군(新 : 당시에는 ‘무위군’이라 하였음) 전병력을 동원하여 의화단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로써 그는 단번에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901년이후 원세개는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임명되였다. 1902년 원세개는 보정(保定)에서 북양상비군(략칭 북양군)을 편성하였다. 1905년에 북양군을 북양6진으로 편성하였는데 제1진은 만족귀족 철량이 통솔하는 기병(旗兵)이고 나머지 5진은 모두 원세개의 통제하에 있었다.
주요 장령들은 거의 대부분 천진소참시절의 심복들이였다. 이 시기에 원세개는 북양공장광산기업 발전,철도건설, 순경창설, 지방정권정돈,신식학당설립 등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신정(新政)을 실행하면서 원세개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방대한 북양군사정치집단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이들 북양집단이 세력확장을 통하여 만족황제측근집단의 세습적지위를 강력하게 위협했으며 량측의 권력다툼도 날로 심화되였다.
1906년, 원세개는 강요에 의해 겸임하고있던 직무를 모두 사임하고 북양군 제1진, 제2진, 제3진, 제6진을 륙군부 직할로 넘겨주었다. 그 이듬해에는 다시 북양을 떠나 북경으로 가서 군기대신 겸 외무부 상서직을 력임하였다.
1909년초, 원세개는 섭정왕 재풍에 의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료양하였다. 그러나 그의 많은 부하들은 여전히 요직에 있으면서 실권을 장악하고있었으며 원세개는 항상 재기를 준비하고있었다.
1911년 10월에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원세개는 10월 27일에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여 호북전선의 륙해군을 통솔하였다. 계속하여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여 북양군을 이끌고 한구를 점령한후 즉시 북경으로 진입하여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정부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였다. 12월에 당소의를 파견하여 혁명당과 협상하였다. 손중산이 이끄는 혁명당은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共和)체제를 약속한다면 원세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원세개는 혁명당의 기세를 빌어 선통황제 부의를 퇴위시켰다.
1912년 2월, 손중산이 중화민국 림시대통령직에서 사임한후 참의원에서는 만장일치로 원세개를 후임자로 선출하였다. 원세개는 북경의 군사반란을 빌미로 북경에서 대통령에 취임할것을 요구하였고 참의원에서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수 없었다. 원세개는 취임초기부터 전제독재정치를 도모하였다. 그는 국민당을 집권실행의 최대 걸림돌로 판단, 북양군경(北洋 警)을 책동하여 정치를 간섭하고 국민당원들을 내각에서 쫓아내고 남방 각 성의 혁명군대를 감축하고 국민당지도자 송교인을 암살하였다. 이와 동시에 량계초를 중심으로 하는 청나라말기 립헌파를 끌어들여 그들에게 진보당결성자금을 지원하고 국민당과 대항하였다.
외교방면에서도 원세개는 영국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5개국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파운드를 차관으로 확보했다. 원세개는 1913년 7월에 2차혁명을 진압하고 북양세력을 장강류역의 각 성으로 확장했다.
1913년 10월, 원세개는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를 협박하고 정식으로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렬강들의 공식적인 승인도 얻어냈다. 이어서 국민당과 국회를 해산하고 별도로 정치회의와 약법회의를 소집하여 독재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1914년 5월, 민주주의정신이 깃들어있는 “림시약법”과 국무원을 페지하고 정사당과 륙해군대원수판사처의 설립을 선포하였다. 이 개편을 통하여 그를 지지하였던 진보당을 몰아내고 단기서 등의 군권을 박탈함으로써 군정대권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1914년말부터 군주제 복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1915년 5월에 일본이 제안한 21개조 요구조항중의 대부분을 받아들이고 일본정부로부터 군주제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얼마후 다시 북양관료들을 교사하여 주안회와 청원단을 조직하도록 하고 군주제 복원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12월 11일, 참정원에서 원세개를 “중화제국 대황제”로 추대했다. 그 다음날 원세개는 제위를 받아들인다는 명령을 반포하고 민국 5년(1916)을 “홍헌원년”으로, 대통령부를 신화궁으로 고쳐 1916년 원단(元旦)에 있을 황제등극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원세개의 이러한 행위는 전국적으로 각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2월 25일, 채악과 당계요 등이 운남에서 봉기를 선포하고 원세개를 토벌하기 위한 호국전쟁을 일으켰으며 귀주와 광서에서도 잇달아 호응하였다. 북양파내부에도 위기가 도처에 도사리고있었다. 결국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에 군주제 취소와 “중화민국”년호의 회복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다시 단기서를 국무경 겸 륙군총장으로 기용하고 북양세력에 의존하여 대통령직을 계속 맡고자하였다. 그러나 봉기를 일으킨 각 성에서는 그가 다시 대통령으로 되는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기서도 그에게 군정실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며 광동, 절강, 섬서, 호남, 사천 등지에서도 독립 혹은 그와의 관계단절을 선포함으로써 그는 결국 대중과 측근들 모두에게서 고립되였다. 원세개는 5월하순에 울분에 싸인 나머지 병이 나고말았으며 6월 6일에는 거국적인 성토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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