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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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7 ]

17    장재촌 답사 댓글:  조회:2241  추천:0  2010-10-13
                         장  재  촌     답  사                                                     글/ 사진 김창희       지난 10일, 중국조선족력사문화 답사팀은 오랜 련휴끝에 재차 답사 길에 올랐다. 답사지는 장재촌이였다. 우선 조선족문학의 정초자의 한분인 김창걸선생의 문학비(장재촌 강건너 소재)를 돌아본 다음 장재촌 서쪽 산비탈에 자리잡고있는 김약연선생의 묘소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장재촌에 들려 김약연선생의 후손벌이 되는 김범춘씨의 안내하에 김약연선생의 고택을 돌아보았다.   선바위에 올라 선인들의 호기를 만끽하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김창걸문학비 앞에서 좌로 중국조선족력사문화답팀 회장주성화 박룡길 김약연묘비 앞에서 선반위 배경으로 선반위 정상에서 선바위정상에서 2 선바위정상에서 3 김약연 고택앞에서
16    사진으로 보는 연변지역조선족문인들의 문학비 댓글:  조회:1343  추천:0  2010-08-15
                    사진으로 보는 연변지역 조선족문인들의 문학비      다년간 학교의 교내지 "별천지"잡지를 주관해오고 학교 글짓기 써클조를 이끌어가면서 학생들과 함께 우리 말 우리 글 사랑에 푹빠져 연변조선족문인들의 문학비, 시비 답사에서 기념으로 남겼던 사진을 공개하면서 순간이나마 문학의 향기에 젖어본다.                                화룡시로과 호곡령에 모셔진 리욱시비                        연길시인민공원 동시동네에 모셔진 채택룡시비               도문시 장안진룡가미원에 모셔진 김학철문학비                        룡정시 고급중학교 정원에 모셔진 김성휘시비                            도문시도문강공원에 모셔진 정몽호시비                         연길시인민공원 동시동네에 모셔진 김례삼시비                        연길시인민공원 동시동네에 모셔진 윤동주시비                       연길시인민공원 동시동네에 모셔진 윤정석시비                     룡정시 일송정에 모셔진 강경애 문학비                     연변대학 캠퍼스안에 세워진 정판룡의 문학비                 룡정시 지신진 장재촌 김창걸생가에 모셔진 김창걸문학비
15    선구촌을 찾아서 댓글:  조회:1099  추천:0  2010-08-08
편자의 말: 몇일전에 후배 김선생이 보내온 글이 하도 마음에 들어 인터넷길림신문 추천했고 저의 불로그에 선을 보입니다.   선구촌을 찾아서 글/ 김군욱 삼복철더위에 집에서 방학휴식일을 보내고 있던차 선구촌에서 살고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선구촌마을을 다녀오게 되었다. 중조변경에 자리잡고 있는 개산툰진 선구촌은 동으로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의 종성읍과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 내가 태여나서 즐거운 동년시절을 보냈던 마을이다. 력사도 유구하고 전설도  많은 산좋고 물맑은 고장이다. 선구산성비앞에서 친구와 함께 (오른쪽사람이 저자임) 29일 오전, 콩크리트포장도로를 달려 한시간만에 마을에 도착하고보니 이른 점심시간이다. 차에서 내려 친구에게 마을을 좀 돌아보고 곧장 들어갈테니 그리알라는 기별을 하고 마을밖의 길을 따라 거닐면서 동년의 꿈이 묻혀있는 고향의 산천을 돌아보았다. 고향마을의 본명은 광개향 선구촌 제6소조인데 그 이름부터 유래가 깊다. 광개라는 명칭은 고려시기 광개토왕이 북벌하여 령토를 점차 확장하면서 개간한 땅이라 하여 지어진것이며 선구라는 지명은 고향마을 동쪽에 두만강을 사이두고 부두가 있어서 선구(船口)라고 지어진것이다. 마을을 또 산성촌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마을의 서북쪽산정상에 선구산성이 있어서 지어진것이다. 산성비문에 따르면 이 산성은 금나라때 (기원1115년~ 기원1234년)에 축조된것으로 동남성과 서북성으로 이루어졌고 평면은 릉형에 가까우며 방향은 140도이다. 동남성의 둘레는 1960메터, 서쪽모서리근처에는 대형건축물자리 한곳이 있고 동남과 동북모서리에는 사람이 거주했던 터가 있으며 서남과 서북에는 문자리 하나씩 있다. 서북성의 둘레는 1814메터, 이 성은 동남성이 축조된후에 쌓은 부속성이다. 성안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괴면기와막새 처마기와, 손가락누름무늬기와, 륜제니질회색토기그릇밑굽 등이 있다. 언젠가 정동중학에서 사업할 때 한국에 류학간 고향친구가 한국인 선배로부터 연변의 유적을 답사하는 걸음에 선구산성도 답사하려는데 길안내를 서달라는 제의를 받고 흔쾌히 따라나선적이 있다. 그때 산성촌마을의 정황을 잘 알고있고 정부로부터 산성관리를 책임졌다는 윤씨할아버지를 청하여 선구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산성에 대하여 더 많은것을 알게 되였는데 산성의 남쪽산(뱀이 따발을 틀고 앉은것 같다하여 일명 따발산이라 부름)정상에는 봉화대와 야장간도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길 없다. 그리고 산성을 축조할 때 서남대문자리 기초로 사용되였던 아주 큰 돌은 본고장의 돌이 아닌것으로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아 성새의 존재에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성새에 올라서 굽어보면 천년전 고려군사와 성새의 금나라군사들이 두만강을 사이두고 치렬한 쟁탈전을 벌렸을 전투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선구산성 동남성벽에서 바라본 두만강과 두만강을 사이두고 있는 조선의 종성읍 선구산성 동남성의 동남거주자리에서 출토된 기초돌    선구산성입구에서 바라본 따발산 정상 산성촌마을로부터 편서남쪽으로 약 600여메터 떨어진곳에 새마을이라고 부르는 초기의 부락이 있었다. 그때는 70여호가 넘는 큰 마을이였는데 후에 지금의 산성촌마을과 새마을 서쪽켠의 마을로 한두호씩 이사하면서 차츰 새마을이 없어졌다고 한다. 산성촌마을의 북쪽켠에는 실개천을 사이두고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는데 일명 꼬리섬(미도尾岛—사이섬의 끝부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부두는 지금의 산성촌마을 동쪽 밭끝자락 이왕의 사이섬의 동북쪽켠에 있었다. 조선조말기 일제의 침략과 략탈에 배달민족이 살길을 찾아 일제놈들의 감시를 피해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 사이섬과 그 부근의 땅을 개척하면서부터 점차 새마을과 부두가 생기기 시작하였었다. 부두가 생겨서 부두로부터 새마을로 통하는 구간에는 당시에도 규모가 퍼그나 큰 집시무역시장이 형성되였다고 한다. 부두가 생긴후 일제는 부두에다 세관을 설치하고 부두를 오가는 행상들에게서 관세를 징수하였을 뿐만아니라 경찰서까지 설치하고 오가는 행인과 마을의 이민들을 감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차례의 큰물이 졌는데 무역시장과 세관은 홍수에 밀려 사라지고 사이섬도 홍수에 의해 그 형태가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사이섬은 두만강물줄기가 두갈래로 흐르면서 강바닥의 침점과 홍수의 범람으로 점차 생겨난 섬인데 물학성(지금의 개성촌)으로부터 산성촌 북쪽마을의 꼬리섬까지 사이에 있었었다. 그러다가 두만강물의 류량이 많이 줄면서 서쪽의 물줄기가 점차적어지고 또 홍수에 의해 뭍히면서 사이섬은 점차 천평벌과 이어지게 되였다. 해방이후(지난세기 60년대-뚝을 쌓기전까지도 나루터앞에는 두만강의 큰 줄기와 작은 줄기의 물이 흘렀었는데 그때의 민공들이 나루터 앞의 작은 물줄기를 건너가서 뚝을 쌓았다고 함) 물학성으로부터 산성촌마을북쪽끝까지 홍수방지로 뚝을 쌓으면서 부두와 사이섬은 두만강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여 그 형태를 감추게 되였다. 그무렵 촌민들이 농지개간으로 물도랑을 파면서 시장이 있던 자리에서 많은 도기그릇과 술병들이 출토되였는데 번성했던 당시의 나루터의 존재와 집시무역시장의 존재를 가히 알수있다. 여기에는 또 이런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대홍수가 지기전에 농부들이 일군 밭이 아주 비옥하였는데 그때 많은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있던 대지주가 홍수와 곬물에 많은 땅이 묻힌것이 너무 아까워 그 땅을 다시 개간하려고 몇날몇밤을 패가면서 주산알을 튕겼으나 인건비가 너무 아름차 포기, 눈물만 글썽이다가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간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것. 뚝에서 바라본 나루터 옛자리와 산성촌(오토바이를 타는 촌민의 오른편 앞방향의 옥수수밭자리가 홍수에 의해 점차 메워진 옛나루터, 산성촌 뒤로 보이는 따발산자락) 동북이 광복되기전까지도 마을의 젊은 남성들과 아주머니들은 생계를 위하여 지게를 지고 물함지를 메고 두만강을 건너 종성읍에 나들며 보따리장사로 생활보탬을 하였다고 한다. 어린 동년시절 동년배들과 즐겁게 물장구도 치고 수영도 하였던 강변의 모래밭, 산딸기랑 살구랑 산열매를 따먹으면서 숨박꼭질도 하였던 따발산, 물고기를 잡아 여름더위를 피하여 물고기탕을 끓여먹고 옥수수도 구워먹었던 돌다리, 그리고 마을 북쪽산에도 몇채의 인가가 들어섰던 명당마을, 그곳에서 돌배도 따먹던 즐거운 추억들, 이 모든것이 내가 알고있는 고향의 력사와 전설과 함께 어우러져 즐거운 환영에 빠지다나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깜빡 잃었다. 문뜩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받고보니 친구로부터 금방 집으로 올것이지 어디에 정신이 팔려 점심시간이 다 지나가는것도 모르느냐는 푸념소리다. 반죽좋게 웃어넘기고 금방 간다고 대답했다. 친구의 집에 들어서니 친구외에도 너무나 낯익은 고향의 어른들도 계셔 서로 정답게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한상에 앉았다. 비록 차린것은 진수성찬이 아니였지만 허물없이 지내던 동년의 고향친구와 고향의 어른들을 만난 기쁨과 고향에 왔다는 즐거움에 음식도 별미였고 기분도 한결 상쾌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한담을 나누는 가운데 당의 새농촌건설과 흥변부민 등 일련의 정책속에 산성촌 마을이 모두 벽돌기와집으로 변신하였고 농민들의 수입도 많이 늘어나 생활형편이 많이 개선되였다는 좋은 소식들에 귀가 즐거웠다. 글/사진 김군욱
14    리욱시비를 찾아서 댓글:  조회:1246  추천:0  2010-07-19
리욱시비를 찾아서 기자: [김정섭 특약기자] 올해 여름방학에는 유람삼아 연변의 몇개 현시 관광명소들을 돌아볼 타산이였다. 얼마전에 도문의 일광산 화엄사, 도문강공원의 정몽호문학비, 량수진의 온성단교를 돌아보고 집에서 휴식하는데 장춘사범대학을 다니는 련옥학생으로부터 두만강문학답사에 동행해줄것을 요청해왔다. 련옥학생은 고중시절부터 글짓기에 남다른 흥취를 가지고 열심히 글을 써왔고 여러차례 상을 받은 문학지망생이였다. 나는 흔쾌히 제자의 요청을 수락하고 어디로 갈것인가를 생각던 끝에 오래전부터 한번 찾아보고 싶었던 중국조선족 시문학의 선구자의 한분인 리욱선생님의 시비가 모셔져 있다는 화룡시 로과촌 호곡령을 찾아 문화산책을 하기로 하고 다음날 떠나기로 약속했다. 다음날(7월17일) 한 아빠트단지에 있는 후배 김선생과 함께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여 정각 8시에 우리 일행 3명을 싫은 택시는 화룡시 로과촌 리욱시비를 찾아 떠났다. 룡정과 화룡구간을 40십여분정도 달리면서 차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농촌마을들은 그처럼 정다웠다. 화룡에서 우심산을 지나 소골령밑에 이르면 도로는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좌측도로는 남평방향이고 우측도로는 숭선방향이였다. 택시는 우측 숭선방향 소골령 굽이굽이를 힘겹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소골령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우리들은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신기한 풍경에 취해버렸다. 공기가 맑고 신선할뿐만아니라 울울창창 나무숲이 우거지고 우불구불 아슬아슬하게 한굽이 한굽이를 톺아 오르는데 마치 자연의 원시림을 달리는 상쾌하고 긴장되고 이상한 기분이였다. 문뜩 머리속에 옛시구가 떠오르면서 입속으로 읊어보았다. 《산이 첩첩하고 물이 겹겹하여 길이 없나했더니 굽이를 돌아서니 새 마을이 나타나네.》 과연 선인들이 과찬하던 명시구였다. 가까스로 소골령을 내려서면서 눈앞이 확 트이고 두만강이 가로 막아서고 조선의 산천경개가 한 눈에 안겨왔다. 두만강기슭에 자리잡은 로과촌에 도착한것이다. 그런데 차는 변방부대훈련기지라고 간판이 보이는 건물앞에서 멈추어서야 했다. 한창 도로건설중이라 사처에 흙을 파헤쳐놓았고 차량들이 앞을 막고 있어 건어갈수 없었다. 그참에 슬적 차에서 내려 길옆집에 찾아 들어가서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리욱시비를 찾아가자면 어떻게 가야하는가고 물었더니 집주인은 아주 따뜻하게 대해주면서 상세하게 알려주는것이였다. 남평방향으로 6리쯤 가면 령이 있는데 그 령에서 오른쪽 오솔길로 50-60메터쯤 올라가면 있다는것이다. 너무 감사했다. 길옆집에서 돌아서 나오니 길이 열리였다. 그곳을 재빨리 빠져나와 남평방향으로 달리였다. 울퉁불퉁하고 산처럼 파헤친 흙무지를 에돌아가면서 천천히 가파롭고 위험한 산고개를 향해 달렸다. 도로건설로동자들의 곳곳에 표시해놓은 안내패쪽에 따라 산마루에 도착하니 차는 더는 나갈수 없었다. 차에서 내려 오른쪽을 보니 과연 오솔길이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씨에 땀을 흘리면서 나무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리욱시비가 눈앞에 나타났다. 시비로 올라가는 층계는 풀이 많이 자랐고 참나무가지가 우거져 층계를 가리고 있어 멀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드디여 리욱시비를 마주하고 묵묵히 인사를 드리면서 시비를 살펴보니 보수가 잘 되지 않아 시비곳곳에 금이가고 기초부분의 벽체가 떨어져있어 마음한구석은 어쩐지 아쉽고 섭섭하였다. 우리는 파손된 콩크리트쪼각들을 바로잡아놓고 시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리욱시비는 1988년 9월 5일에 정부와 문화지성인들에 의하여 세워졌고 시비정면에 리욱선생님의 시 《할아버지의 마음》 전문을 새겨넣었다. 우리들은 함께 시비에 새겨진 시를 읊어 내려갔다. 할아버지의 마음에 담긴 깊은 뜻을 음미하면서 자리를 찾아 앉아 땀을 들이면서 조선무산시의 전경을 굽어보고 있는데 련옥학생이 선생의 생애와 문학활동을 알고싶다고 물어왔다. 그래서 얼마전에 찾아본 재료를 더듬으면서 강의를 하게 되였다. 리욱(1907.7.25.-1984.2.6) 저명한 조선족시인, 로씨야 연해주 신한촌에서 출생. 1910년 봄 화룡현 로과향 강장동에 이주. 1923년에 룡정 동흥중학교에 입학. 1924년에 《생명의 례물》, 《봄비》를 각기 《간도일보》와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시적재능을 과시하였다. 30년대말부터 1945년 《8.15》광복까지의 민족문화사의 암흑기에 《척촉화》, 《바위》, 《금붕어》, 《석양》, 《봄꿈》, 《혈흔에 핀 꽃》, 《나의 노래》, 《락엽》, 《5월》, 《별》, 《모아산》 등 대표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시작들은 모두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빚어진 참담한 현실을 고발하면서 그 험난한 환경에서도 민족의 얼을 간직하고 자유로운 미래에로 나아가려는 민족에 대한 충정과 념원과 신념을 노래한 작품들이였다. 본문 저자와 련옥학생 이렇게 질서없이 시인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련옥학생과 김선생은 이번 걸음에 한차례 문학공부를 하게 되여 기쁘고 조선족 시문학의 개척자이신 리욱선생을 알게 되여 많은것을 배웠다고 거듭 치하, 그러면서도 보수가 잘 되지 않아 볼품없이 된 시비에 대해서는 아쉽고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에 후배로서 이렇게 늦게 찾아온 부끄러운 마음이 내내 우리의 발목을 잡아 죄스러운 생각까지 갈마들어 귀로에 오르는 우리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보기에도 민망스러운 리욱시비 우리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13    일광산을 찾아서 댓글:  조회:1281  추천:0  2010-07-06
일광산을 찾아서 기자: [김정섭 특약기자]  얼마전에 대학입시를 끝마치고 학생들과 함께 장춘, 북경 등지의 직업교육에 대한 문화려행과 고찰을 다녀온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7월 4일 도문에 있는 동서의 전화를 받고 우리 부부는 도문으로 가게 되였고 우연한 기회에  일광산 화엄사로 찾아가기로 약속하고 재료를 찾아보게 되였다. 도문시는 산과 물을 끼고 있는 경치도 좋고 교통도 편리한 변경통상구도시로서 자고로 《도문강반 첫도시》라는 미칭을 갖고 있으며 도문시 구역면적은 1142.3평방킬로메터, 인구는 12.99만명, 그중 조선족이 7.02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54.04%를 점한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도문시에는 매우 풍부한 관광자원이 있다. 독특한 매력을 갖춘 두만강공원, 웅위롭고 장엄한 국문, 경치가 수려한 일광산, 불교성지 화엄사, 민족풍정이 다분한 월청조선족 《농가락》, 풍경이 아름다운 《룡가미원》과 전원생활을 체험할수 있는 량수유가농업관광원 등 관광구와 관광명소가 있다. 그밖에 동하국 도읍-성자산장, 발해국시기의 24개 돌 등 많은 문화재와 력사유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일광산화엄사에 호기심이 동했고 한번 가보기로 작심하였다. 이틀날 오전 9시경에 도문시에서 5키로메터  상거해있는 일광산 화엄사를 찾아 떴났다. 일광산 화엄사는  한창 건설중이였고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해 진흙길은 물이 고여있고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마른땅을 골라 걸으면서 화엄사의 첫 관문인 산문에 이르렀다. 산문앞에서 굽어보니 도문시의 전경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남양시의 아름다운 경치가 매력적으로 눈앞에 안겨들면서 저도몰래 무한한 격정이 감돌아쳤다. 앞을 바라보니 화엄사주위는 푸른 수림이 우거지고 무성하며 삼면에 기암괴석이 우중충한 산을 등지고 물을 끼고 있어 가관이였는데 마치 하나의 조각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화엄사의 전반 건축은 중국과 조선의 고대건축예술을 융합하여 독특한 풍격을 갖추었는데 동북에서 제일 큰 사찰중의 하나이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조선풍격과 당나라풍격을 모방한 사찰이라고 한다. 화엄사가 중생들로 하여금 선량한 심지와 복스러운 덕을 키우게 하고 곤혹을 풀고 도리를 깨우치며 고난을 멀리하고 락을 보게 하며 나아가서 성불하는 보기드문 훌륭한 인연이라니 더욱 매력적이고 감동의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와중에 우리 부부는 일광산 화엄사의 첫 문인 산문을 지나 천왕전에 이르렀고 천왕전 돌기둥과 벽면에 교묘하게 조화롭게 조각된 룡과 학을 감상하면서 드디여 대웅전 전당에 들어섰다. 대웅전 정면에 웅장하고 위엄스러운 5개의 불상이 정중히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전당에는 공작일군인듯한 5-6명 녀성들이 오갔고 그중에 한명의 조선족 아가씨가 다가오면서 반갑게 맞아주면서 어찌나 살갑고 정답게 헌금으로부터 소망을 기탁하며 기도를 드리는 방법까지 해설해주는지 선뜻이  단돈 5원을 험금하고 정성껏 기도를 드리였다. 돈 10원을 더 내고 건축에 사용하는 기와장에 소망을 서명하고 기념으로 남기기도 하면서 신비스러운 마음으로 대웅전 이모저모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우리부부의 눈길은 고집스레 불상좌측에 모셔진 서월선사의 안내글에 쏠리게 되였고 처음부터 자세하게 훑어보게 되였다. 1912년 조선의 대덕고승 수월선사는 두만강을 건너 일광산에 터를 잡고 《수월정사》를 지었다. 정사에서 들려오는 경읽는 소리와 청정한 범어는 그 당시 주변의 중생들에게 길상과 복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수월선사는 일광산과 그 주변지역에 불법의 도리를 고양하여 중생을 구제하며 선행과 희사를 즐겨 병을 봐주고 죽는 삶을 구하고 부상입은 사람을 치료하며 리재민을 구제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해줌으로써 부근 백성들의 마음을 덥혀준데서 성승으로 불리웠다. 그 당시 일본중들도 일광산의 풍경을 매우 선호하여 사찰을 지었고 일광산이라 이름하였는데 지난세기 3,40년대에 일광산에는 여러개의 사찰이 있었고 출가한 중과 집에서 수련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고 한다. 일광산 화엄사에는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옛날부터 태고의 신비한 거룡 한마리가 장백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수려한 두만강에 매혹되여 몸놀림을 멈추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두만강을 넋없이 바라보다가 웅장하고 우미하며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불교성지 일광산으로 변했다고 하는가하면 근대조선시대의 리성계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활을 쏘아 가파로운 절벽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외에도 많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는 불손산, 사자봉, 범바위, 와불 등 모습은 너무나도 신비하고 우미하여 려행객들의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우리는 일광산 화엄사 중심선 건축물을 돌아보면서 하냥 즐거웠고 리평림거사가 정부와 종교부문의 대폭적인 지지하에서 가산을 팔아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화엄사를 재건한데 감탄을 금할길 없었다. 
12    생 일 단 설 기 댓글:  조회:1820  추천:0  2009-12-24
생 일  단 설 기    오늘은 나의 생일날이였다. 나는 종전과 다름없이 출근하여 하루의 수업을 끝마치고 퇴근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생일날이라 몇몇 절친한 친구들과 친척들을 "박씨술집"에 모시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학급장이 방공실에 찾아왔다.  나는 학급장의 뒤를 따라 급급히 교실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학급학생들이 전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것이 아닌가? 나는 얼떨결에 교탁에 올라섰다.  교탁우엔 어느새 준비하였는지 생일단설기가  놓여있고 초불이 눈부시게 활량거리고 있었다. 흑판은 고무풍선으로 곱게 단장되였고 그 가운데 " 쌤 ! 생일을 축하합니다."란 글발이 한눈에 안겨왔다. 어망결에 생일축하 노래선률에 맞추어 손벽을 치면서 교탁에 올라 학생들을 마주한 나는 학생들의 소행이 너무 기특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소원을 기탁하여 초불을 끄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학급 전체학생들의 소원을 고이고이 담아 초불을 힘껏 불어서 껐다. 학생들의 박수갈채속에서 단설기를  나누어 한학생, 한학생 맛을 보게 하면서 학생들과 즐기였다. 비록 자그마한 생일단설기였지만 우리 학급전체 학생들이 모두 맛을 보게하였다. 학생들이 떠들석하며 즐겁게 한입씩 단설기맛을 보는 모습을 이윽히 지켜보는 나의  격동된 마음은 진정할수 없었다. 서로 믿고 서로 관심하고 서로 도와주는  학생자체 학급관리 리념을 잘 따라주는 학급학생들이 고마웠고 나같은 담임을 믿고 따라주는 우리 학급학생들이 너무 기특했다.     우리 학급학생들의 이런 믿음이 있어서 9월에 세상을 돌아가신 어머님한테도 아들로서의 효도를 제대로 못함에 자책하면서 삶을 반성도 많이 하였다.  모든 잡념을 집어치우고 "칼럼의 꽃향기"집필에 열중하였고 학급관리에 더욱 신경을 도사려 오고있었다. 짬짬이 시간을 리용하여 묵묵히 일하는 우수한 교원들의 사적과 학교의 각종활동을 길림신문, 연변일보, 중학생신문 등에 보도를 20여편을 발표하였고 학생글짓기 지도에 힘을 들여 30여편의 학생글을 중학생 유관간행물에 발표하였고 세계조선족사이버문화대광장에 우리 학생들을 회원으로 추천하고 그들의 작품 30여편을 선을 보였으며 그중 안련옥학생이 은상을 획득하여 상패와 상금을 타왔고 훈민정음 기념 백명백일장에서 허춘길학생이 대상을 안아왔고 전옥명학생이 과학기술대학에서 조직한 한글 한족학생 글짓기에서 금상을 않아왔는가하면 전 대회에서 유일한 지도교원상도 가져오게되였다. 이렇게 하고싶은 일에 집념해오니 다소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였다.   오늘 우리 학급학생들이 소망이 담긴 생일축하 단설기를 과분하게 받고보니 우리 학생들의 소망을 실현하는데 담임으로서 최선을 해야 함을 감안하게 되고 그애들한테 진정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교량작용, 디딤돌이 되여야 겠다는 결의를 한층 더 다지게 된다.(되는대로 학급일지를 적어둔다.)      
11    청화대학 전종현학생이 보내온 글 댓글:  조회:1245  추천:0  2009-12-17
편자의 말: 일전에 룡정중학 자체로 꾸리는 "별천지"제2기에 선배학생들의 경험담을 올리기 위하여 어렵게 북경대학, 청화대학 학생들과 련계를 가지고 어려운 부탁을 했었다. 북경대학 엄소천, 김준학생이 먼저 보귀한 경험담을 보내왔고 오늘 청화대학 전종현학생이 사진과 아주 훌륭한 경험담을 보내왔다. 너무 감사하다. 룡정중학 후배학생들에게 아주 좋은 귀담으로 길이 남을것이다.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룡정중학의 활기넘치는 후배들,안녕하십니까? 청화대학 수리수력공정계 2학년 전종현입니다. 후배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꿈을 향해 열심히 뛰는 후배들의 멋진모습을 그려보니 가슴벅차고 떨리네요. 선생님들 그리고 선배들한테서 이런말 많이들으실거예요 <<중학교시절은 인생의 황금기이다.>> 그땐 저도 그말 뜻은 몰랐지만 이렇게 다시 회억해보면 그말이 공감되고 잔소리처럼 후배들에게 또 하고싶네요. 초중시절은 정말로 언제 회억해보아도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머리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으니까 후배들께서도 남은 시간만큼은 소중히 여기시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기를 기원합니다. (그런가? 근데 난 왜 학교다니면서 힘든 일밖에 없나?) 이런 생각하시는분들 적지않을거라 짐작됩니다. 학교 다니면서 많은 고민들 많으시죠? 그리고 거의 전부의 고민들이  <<공부>> 이 단어를 빼놓을순 없구요. 그러나 힘들더라도 적극적인 태도로 이런 고민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간다면 당신은 필연코 승자의 미소를 지을수 있을겁니다. 이번 기회에 저의 초중시절을 회억하며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고 고민해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가장 고민거리인 공부부터 시작합시다. 모든일에 해결방법이 있듯이 학습도 자신에게 맞는 학습방법을 정하는것이 급선무라고 봅니다. 그중에서도 아래의 3가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느껴집니다. 1.  목표 세우기. 공부하면서 자신을 격려하는 동력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신이 하고있는 공부가 무엇을 위해서인지 누구를 위해서인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한다면 당연히 인츰 싫증나기 마련입니다. 자신에게 목적지를 정해주는것입니다. 얼마나 웅장하고 큰 목표가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예전의 자신을 이겨낼수있고 노력한다면 한층 뛰여넘을수있는 현실적이고 소박한 그런 목표를 정하는것입니다. 이렇게 목표가 공부하면서 동력이 되고 힘들때면 자신을 고무격려할수있게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것도 좋겠지만 자신의 정황에 맞게 진정으로 자신이 한단계 진보할수있는 실속있는 목표를 세우는것이 보람직하다고 봅니다. 2.  계획 세우기. 목표를 세우고 동력이 생겼으면 달리기 시작해야 되겠죠? 그러나 눈감고 마구 뛰여서야 되겠습니까? 목표까지 갈수있는 계획을 세우고 한계단 한계단 착실히 밟아가는겁니다. 계획을 세움에 있어서 체계적으로 우로부터 아래로 계단식으로 차츰 세밀하게 세우는것을 편애했는데요 큰 케익을 쪼각으로 나누어 먹듯이 목표달성을 위해서 매달 해야할 임무 정하고 이달 임무를 또 주일에 따라 나누는것입니다. 계획은 이렇게 세웠다하여 완전히 하루차이도 없이 이대로 한다는것은 당연히 불가능이겠죠. 구체상황에 따라 수정하고 조절하게되는것은 당연한것입니다. 계획은 자신에게 목표를 향해 달리는 매단계 과정에 큰 범위를 제공해주는것입니다. 공부를 재미로 하는 사람 있을가요? 답은 <<yes!>>라고 하고십네요. 공부하면서 유일한 재미라면 성취감이라고 봅니다. 이런 느낌 알고있는지요: 고된 련습으로 운동회에서 상타고 축구나 배구에서 1등하고 게임에서 you win이 나올때, 하루숙제를 완벽히 끝냈을때, 온갖 뇌세포를 동원하여 끝내 답을 구해냈을때 느끼는 그런 감각이 바로 성취감이 아니겠습니까? 이렇듯 성취감은 한개 목표를 이루어냈을때 느끼는 짜릿한 희열인것입니다. 매일 세운 학습계획, 매주일 매달의 계획을 착실이 완수해보세요, 매일 집으로가는길 더 가벼울것이고 다가오는 기중기말시험 자신심이 생길것이고 성적표를 보는순간 어느때보다 큰 성취감을 얻을수있을겁니다. 이런 성취감으로하여 공부하면서 따분함을 피면할수있고 무한한 동력을 얻는것입니다. 3.  포기하지 않기. 공부하면서 반드시 갖추어야할것이라면 포기없는 학습태도! 후배들 학습하면서 힘든 사정 저도 다 겪어지나왔으니까 충분히 리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다해도 포기만은 안됩니다. 조금 쉬었다 가도 좋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라도 되구요. 근데 포기만 하지 맙시다. 그리고 이것만은 기억하길바랍니다. <<자신이 노력한것만큼은 언젠가는 돌아온다!>> 한동안 마음 다잡고 열심히 뛰여보았는데 결과는 리상적이지 않을때도 있을거여요. 실망하지말고 또다시 동력을 가지고 뛰여보는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신도 놀랄만한 진보, 여태것 느끼보지 못했던 짜릿한 성취감을 만긱할수 있습니다. 이상 3가지방면으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점을 적었지만 사람마다 다 부동한 학습방법이 적응되기에 복제가 아닌 참고로 접수하길 바랍니다. 초중공부가 등산이라면 학습방법은 정상에 오르는 산길과도 같습니다. 사람마다 부동한 길을 선택할것이고 포기없이 꾸준히 오른다면 누구가 정상에 도달할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정상에 오르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부동한 길을 걷지만 얼마만큼의 높이에 오르자면 모두 다 똑같은 거리를 올라야되고 그만큼의 땀을 흘려야되는것입니다. 그러니 꾸준히 오르는 사람만이 더 많이 더 높이 오를수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바라는점이라면 초중시절을 소중히 여기고 매하루를 의의있게 보낼것을 희망하는바입니다. 학업이 힘들더라도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 매일 조금씩 향상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것입니다.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진정한 목적은 성적만,점수만 추구하는것이 아니니까요. 이후의 자신이 하게되는 일을 위해서 기본지식을 갖추고 우리의 대뇌를 개발시키는 기초를 닦는 과정인것입니다. 악기를 배우나 운동을 배워도 제일 따분하고 힘든과정이 기초훈련할때가 아닙니까? 그러니 매일 성적과 씨름하지 마시고 공부의 진정한 목적를 잘 깨닫고 자신을 더 완벽하게 부각하기 위하여 매시간을 아껴 자신을 향상시킵시다.    그리고 곧 고중입학시험을 맞이하게될 초중3학년 후배들, 마지막 몇개월 많이 힘들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선생님들의 진도에 떨어지지 마시고 힘차게 달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 새로운 고중생활을 맞게 될것인데 고중이라면 지식을 더 구체적으로 더 깊게 배우는 과정이기때문에 새로운 학습환경에서 하루빨리 적응하여 학습방법을 세우는것이 급선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고중학습에서 필요한것이라면 공부효률 특히 자습효률을 높이기게 노력하세요. 그리고 교과서뿐만아니라 사회실천에도 적극적이고 과외지식도 많이 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중국조선족의 빛나는 미래를 이끌고 나갈 룡정중학 후배들, 매일 활력넘치는 모습으로 인생의 황금기—초중시절을 소중히 보내기를 바랍니다. 하루하루 더 훌륭하게 성장하는 후배들의 든든한 모습, 제가 먼저 그려봅니다. 룡정중학 후배들 힘내세요! —청화대학 수리수력공정계 2학년 전종현    
10    북경대학에서 모교후배들한테 날아온 메세지 댓글:  조회:1344  추천:0  2009-11-22
                            북경대학에서 모교후배들한테  전해온 엄소천 학생의 글   안녕하십니까? 현재 북경대학에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있는 엄 소 천 입니다. 우선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우리 룡정중학 후배들과 교류할수 있어서 넘 기쁘네요. 중학교 시절이 어제같은데 벌써 대학에 온지도 일년반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매번 중학교시절을 돌이켜볼때마다 <<언제면 대학시험을 다 치르겠나…>>하고 한탄하던 일들, 대학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선배들을 볼때마다 <<어떻게 해야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따낼수 있을가…>>하고 궁금해하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리하여 저의 이 경험에 비추어 혹시 우리 후배들도  그때당시 저처럼 이러한 문제를 가장 관심하지 않나 하여 중학교 학습에 대하여 저의 경험과 조그마한 건의를 해주려고 합니다. 비록 저 한사람의 경험이 모든 학생들한테 다 어울릴리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의 이 경험과 건의가 우리 후배들의 학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말이지만, 선생님의 강의를 주의해 듣는것이 가장 시간을 적게 들이고 품을 적게 들이는 학습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응당 수업할때 선생님의 일거일동을 눈여겨 보며 선생님이 강의하는 몇개 특수고리 이를테면 첫시작의 개괄적인 서술과 요점, 중간의 강조과 의문풀이, 결말의 귀납과 총화 등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필기를 착실하게 하는것입니다. 저를 례로 든다면 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필기를 가장 착실하게 한것은 수학이였습니다. 저는 우선, 교과서의 모든 공식, 정리, 계 등을 한곳에 정리한후 짬짬이 틈을 내서 자주 훑어보았으며 련습책에도 선생님과 함께 한 문제들을 분류를 나누어 표기를 해두었습니다. 공식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여 틀린 문제는 파란색 연필로 옆에 <<공식>>하고 쓰고 정리책에 공식을 적어넣습니다. 이런 공식들은 이후에도 잊어버리거나 틀리게 사용할 가능성이 많은 공식들이므로 꼭 자주 훑어보고 단단히 기억해두었습니다. 그리고 완전 어떻게 풀지 몰라 손도 못댄 문제는 참 엄중한 문제라는 뜻에서 빨간색으로 큼직히 <<사고방법>>하고 써넣음으로서 이후 책 펼칠때마다 정신을 자극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정리책에  문제를 익숙히 하려는 뜻에서 문제한번 베끼고, 사로방법 상세하게 서술하고 어느 사로과정을 생각못했었다는것과 문제를 풂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잘 적어두고 밑에 풀이과정을 상세히 적어넣었습니다. 시험에 자주 나는 류형의 문제들인데 내가 이 문제풀이에 익숙하지 않음으로써  한참 머리를 써야 풀어낼수 있는 문제들 역시 정리책에 적어넣었습니다. 사실, 처음에 이 정리책을 갖출때는 <<틀린 문제 필기장>>으로 만들려고 모든 숙제,시험에서 틀렸던 문제들을 모두 써넣었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바람에 모든 틀린 문제가 아닌 이렇게 골라서 적어넣는 방법을 취했었고 시험치기전에는 우선, 사로부터 틀린 문제 보고, 다음 공식 보고, 시간 되면 익숙하지 못한 류형 문제풀이 보고… 이런 순서로 복습을 했습니다. 복습할때 빠뜨린것이 없고 맘속에 승산이 있었기에 시험에서 긴장한 심리는 산생되지 않았고 시험도 잘 추릴수가 있었습니다.  수학뿐이 아니라 다른 과목도, 례를 들면 지리라든가, 력사, 정치도 필기를 상세히 잘 해두어야 합니다. 교과서에 없는것과 선생님이 아주 정채롭게 분석한 지식중점,그리고 선생님이 강의할때 주의하라고 귀띔한 문제들을 능란하게 포착하며 어떤 내용은 학습중점이 아니고 또 선생님이 강의할때 슬쩍 소개한것이지만 그런것들을 필기장에 적어넣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것들은 일부 생소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수 있기때문이며 또 필기할때 일부 관건적인 대목에는 특수한 부호를 달아놓는다면 하학한후 리해를 깊이하는데 편리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습을 중시하라는것입니다. 중학교시절 학습에서 가장 쉽게 홀시하는것이 예습인데 이는 학습효률에 큰 영향을 줍니다. 매일매일 짬짬이 시간을 짜내여 다음 날 배울 내용을 한번 훓어보는외에 방학과 같은 옹근 시간을 리용하여 다음 한학기 배울 내용을 한번 다 예습할 계획을 세워보는건 어떨가요? 례를 들면 다음학기 배울 수학교과서를 먼저 다 예습한다든지, 다음학기 배울 영어교과서의 새로운  단어를 모두 다 외운다든지… 견지만 한다면 큰 효과를 거둘거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짬짬이 시간을 잘 리용하는것이 중요한데, 매일 등교길, 귀가길에서 MP3 을 들으며 영어듣기능력을 제고한다든지, 영어단어, 수학공식 등을 작은 쪽지에 적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본다든지, 정력을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에는 영어록음을 들으며 언어감각을 키운다든지, 저녘에 더운물에 발을 담구는 시간을 리용하여 다음날 배울 내용을 예습한다든지… 모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후배들한테 꼭 해주고 싶은 건의는 중학교시절을 리용하여 과외독서를 많이 하고 텔레비죤을 본다하더라도 오락프로는 적게 보고 사회문제분석을 위주로 하는 프로그램과 정치, 력사, 지리 지식장악에 유리한 프로그램을 자주 보기 바란다는것입니다. 이러한것들은 단시기내에는 큰 도움을 가져다줄수 없지만 종합능력제고에 유리하며 이후 그 언젠가는 큰 역할을 발휘할수 있는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는데 후배들한테 도움이 될련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우리 후배들이 이제 남은 시간이 결코 한가한 시간은 아닐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보내기 바랍니다. 희망이 있는 자에게는 신념이 있고 신념이 있는 자에게는 목표가 있고 목표가 있는 자에게는 계획이 있고 계획이 있는 자에게는 노력이 있고 노력이 있는 자에게는 성공이 있습니다. 우리 후배들 모두다 <<하면 된다>>, <<할수 있다>>는 마음으로 힘차게 전진해 나가기 바랍니다. 후배들 힘내세요
9    참된 엄마 모범 엄마 댓글:  조회:1280  추천:0  2009-10-15
    참된 엄마 모범 엄마          ---- 룡정시 룡정중학교 리경애 선생님과의 한담   “3.8”국제부녀절99돐을 맞이하면서 길림성 룡정중학교에서는 “모범며느리”,  “모범안해”,  “모범엄마” 를 평의하고 전교성적으로 성대한 표창모임을 가졌다. 참으로 뜻이 깊고 의의가 있는 창의적인 기념활동으로 인심을 격동시키였다. 우연한 기회에 “모범엄마”로 평선된 지리교연조 리경애선생가 한담할 기회가 생기였다.  한담과정에서 필자는 모름지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리선생님의 사적은 평범하면서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었다. 리경애선생은 금년에 51세로서 어려서 곱게 7남매막둥이로 자랐고 성장하여 학교를 졸업한후 아무런 경제기초도 없는 4부자 맏아들한테 시집을 왔는데 그것은 곱게 자란 리경애 선생이 새로운 인생길을 터득하는 로정이였다. 파란 많은 인생아리랑을 이겨내면서 용케도 가정  화목과 자식에 대한 훌륭한 교양으로 인젠 떳떳하게 평판에 올라 모범엄마의 행렬에 들어서게 된것이다. 인성교육으로 딸애들의 성장을 인도 엄마라는 이름은 쉽게 부를수있으나 참된”엄마”로 되기는 쉽지않다. 두 딸애 엄마로서 리경애선생은 자식교양에서 부부가 모범이 되고 본보기가 되여야 한다는 신조를 명기하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자식앞에서 부부간의 모순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딸애의 심리변화에 큰 중시를 돌리고 사춘기심리변화를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 타당하게 처리하고 해결하였고 협애한 리상으로부터 원대한 리상교육을 홀시하지 않았으며 졻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에로 점차적으로 자신심을 키우게 하고 의력은 성공의 밑바탕이며 성공의 기초라는 도리를 터득하게 하였다. 두 딸애가 고중에 진학한후 참다운 인성교육을 홀시하지 않았다. 그는 늘 두 딸애한테 “인간의 근본은 덕이고 덕의 근본은 례의이며 례의 근본은 선이고 선의 근본은 미라”고 일깨워주곤 하였다. 세월과 더불어 큰딸은 지난해  대학에서 입당하고 졸업한후 사회의 사업가로 뛰고 있으며 둘째딸은 큰딸 못지 않게 지난해 내지의 이름 있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자식들의 이러한 성장은 엄마로서의 참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로서의 자기에게 요구가 엄격했고 자식에게 부여할 사랑의 의무를 리행함에 있어서는 조금도 드팀이 없었다. 아무리 사업과 가무가 바쁜와중에도 두딸애의 구석구석을 살피는데는 빈틈이 없었고   교사의 본능뿐이 아닌 자기의 착한 심성으로 아이들에게 품덕교양에 많이 품들여 왔다.                      옳바른 인간성교육으로 딸애들의 성장을 인도                        공부를 잘하는것은 나라에 시름거리가 되지않고 자립자강 의식과 꿈- 비전이 있는 사람이 되여야 할뿐더러 그 꿈을 이룩하기 위해 나라에 기여가 있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고 하면서 앞으로 다가 오는 경쟁을 의식적으로 맞을 준비가 있어야 하며 경쟁의 스트레스를 적게 받자면 지금부터 머리에 지식을 많이 저장해야할뿐만 아니라심리자질을 높여야 한다는 도리까지 사근사근 일러주었고 이 모든것은 유능한 인재가 되기 위한 기초라는것을 터득게 하였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사랑은 나누면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그 슬픔이 배가 줄어드는 법이고 주위사람들게 베푸는것을 잊지말라고 하면서 이모든 과정은  가야할 인생길에 걸림돌을 제거하면서 돌담길을 쌓는것과 같다고 하였다. 총명한 두 딸들은 엄마의 말뜻을 너무도 무겁게 느끼고 또 자기들을 딸로만 아니라 고중생답게 대학생답게 차원을 높여 의사 소통하니 고맙게 생각 되였고 이런 훌륭한 엄마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름다운 대학꿈이 실현 되였다고 자랑차게 말하고 있다.   오늘도 리경애 선생은 후대양성 사업에 고심참담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자식들의 아름다운 앞날을 그려보면서 열심히 초불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8    가을이 왔네요. 댓글:  조회:1320  추천:0  2009-10-08
가을이 왔네요     가을이 왔네. 일년사계절을 빼놓지않고 오르는 모아산이지만 이 가을에 땀으로 잔등을 적시면서 힘들게오르는 심정은 너무나도 시원하고 향기롭다. 관망대에서 세전번을 내려다보는 풍요로운 가을풍경은 역시 가관이였다. 등산로를 따라 산을 내리면서 숲속에 눈길을 주며 감수해보는 계절의 향기는 자못 구수하였다. 완연한 가을풍경이 였다. 그보다도 북산가도 뢰봉반의 로인님들의 갸릇하고 진정어린 마음이 담긴 곳곳에 쉼터로 만들어놓은 나무의자는 정답고 뜨겁게 마음을 덥혀주면서 그동안 쌓여던 스트레스를 확 풀어주고  있었다.  그 의자에 앉아 로인님들의 배려가 슴배인 정성에 젖어보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는 향연을 만낏할수 있어서 즐거웠다. 사계절중에서 가을의 모아산소풍은 한결 아름답다. 가을이 왔다. 풍요로운 완연한 가을이 왔다.            
7    단풍내음에 취하며 댓글:  조회:1257  추천:0  2009-10-05
                                    단풍내음에 취하며                                                    모아산에서 송아지 친구 위정량이를 만나다.                                                           북산가도뢰봉반의 고운 마음에 젖어본다.                                                        세전벌을 배경으로 우리 가족의 즐거움                                                            우리가족의 하루의 즐거운 가을 소풍
6    믿음의 메아리 댓글:  조회:1225  추천:0  2009-07-14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서                      ---길림성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당창건88돐 기념행사 및 입당의식 거행   지난 6월 27일 길림성 룡정중학교 당위에서는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 교원들을 조직하여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 중국공산당 창건 88돐 경축행사 및 신입 당원입당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중국공산당 88년의 찬란한 력사를 돌이켜보고 연변주 제1임 주장 주덕해 동지의 업적을 되새기면서 교육전선에서 당원의 작용을 충분히 발양하며 당원의 질량을 향상하며 영예와 리익을 타인에게 돌리며 당원으로서 선두적 작용을 발양할것을 다짐하였다.   중국공산당 창건 88돐기념행사를 통하여 룡정중학교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한차례 생동한 당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안건룡, 윤방현, 지학룡 교원은 시급 우수당원으로, 김송림, 김진선, 김미옥, 신홍화교원이 교급우수당원으로 표창받았다.  룡정중학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실제행동으로 주덕해동지 옛집터 주위의 잡풀을 뽑고 환경미화에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5    경박호를 찾아서 댓글:  조회:1292  추천:0  2009-07-12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서                      ---길림성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당창건88돐 기념행사 및 입당의식 거행   지난 6월 27일 길림성 룡정중학교 당위에서는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 교원들을 조직하여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 중국공산당 창건 88돐 경축행사 및 신입 당원입당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중국공산당 88년의 찬란한 력사를 돌이켜보고 연변주 제1임 주장 주덕해 동지의 업적을 되새기면서 교육전선에서 당원의 작용을 충분히 발양하며 당원의 질량을 향상하며 영예와 리익을 타인에게 돌리며 당원으로서 선두적 작용을 발양할것을 다짐하였다.   중국공산당 창건 88돐기념행사를 통하여 룡정중학교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한차례 생동한 당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안건룡, 윤방현, 지학룡 교원은 시급 우수당원으로, 김송림, 김진선, 김미옥, 신홍화교원이 교급우수당원으로 표창받았다.  룡정중학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실제행동으로 주덕해동지 옛집터 주위의 잡풀을 뽑고 환경미화에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4    최선의 방법이 최고의 결과를 낳는다 댓글:  조회:1363  추천:0  2009-06-07
  모택동의 둘째아들 모안청은 2007년 3월 23일 오전 4시 18분에 84세를 일기로 북경301병원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모안영이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된후 모택동의 유일한 아들인 모안청은 각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왔다. 등영초, 강극청, 왕진 등 로동지들이 생전에 그와 그의 가족을 아주 관심하였고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도 여러번 그와 그의 가족을 찾아주었다.   동 년   모안청은 1922년 11월 13일에 호남성 장사시 동향 판창에서 모택동과 모택동의 첫번째 부인인 양개혜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모안청이 4살되던해 가을에 모택동은 중공중앙이 한구에서 소집한 긴급회의에 참가한후 부인 양개혜, 보모 진옥영과 모안영, 모안청, 모안룡 삼형제를 비밀리에 장인네 집인 장사 판창의 양가댁으로 보내고나서 명령을 받들고 추수봉기를 일으키러 떠났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나서야 모택동, 모안청부자가 다시 상봉할수 있었다.   모택동이 떠난후 3년동안 모안청은 장사 판창에서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다. 1930년 11월 14일, 양개혜가 호남군벌 하건에게 살해되자 모씨3형제는 외할머니 향진희와 함께 살았다. 얼마후 상해로부터 향진희더러 아이들을 상해로 보내라는 모택민의 편지가 왔다. 주밀한 배치끝에 60여세의 향진희할머니와 20여살의 며느리 리숭덕이 친척방문가는 사람으로 분장하고 삼형제를 데리고 기차에 앉아 무한으로 갔으며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서 모씨3형제는 지하공산당이 꾸리는 상해대동유치원에서 공부하게 되였는데 후에 상해지하당이 엄중하게 파괴를 당하면서 대동유치원도 해산되여 모안영, 모안청형제는 동건오의 집에 맡기여졌고 그후부터 두 사람은 끝없는 생활의 어려움을 맛보게 되였다.   모안영이 후에 그때의 처참한 생활을 회억하며 한 말이 있다. “나는 그때 도적질하지 않고 부자밑에서 일하지 않은외에는 모든 생활이 《삼모류랑기》의 삼모와 다를바 없었다. 거리바닥에서 자고 남의 마루바닥을 닦아주었으며 쓰레기통에서 누데기를 줏는 등 무슨 일이나 다 하였다. 상해에는 외백도교라는 곳이 있는데 인력거가 올라가기 힘드므로 나와 동생 안청이 뒤에서 떠밀어주고는 돈을 좀씩 얻어가지군 하였다…”   아 픔   더욱 불행한것은 이 시기에 모안청이 구타당하여 머리에 상처입고 뇌진탕이란 병을 얻어 일생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된것이다.   1936년, 동건오를 위수로 한 상해지하당원들의 도움으로 모안영과 모안청 두 형제는 동북의용군사령 리두장군이 서유럽으로 고찰가는 기회를 타서 프랑스를 거쳐 쏘련에 도착하였다.   1937년초, 모스크바에 이른 두 형제는 선후로 모스크바교외의 모니노국제 제2아동병원과 이완노브성의 국제 제1아동병원 등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때 모택동은 이미 홍군을 거느리고 섬북에 이르렀고 거기서 연안을 중심으로 한 항일근거지를 세웠다.   1938년, 누가 쏘련으로부터 안영과 안청의 사진을 가져왔었는데 모택동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얼마후 모택동은 편지를 써서 쏘련으로 가는 사람한테 부탁했다. “사랑하는 안영, 안청아! 늘 너희들을 생각한다. 너희들의 형편이 좋고 진보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또 너희들의 사진까지 받아보았기에 아주 기쁘다. 지금 인편으로 이 편지를 보내니 너희들도 나한테 편지를 보내오기 바란다. 나는 너희들의 편지를 기다린다! 나의 형편은 좋은편이니 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편지를 쓰겠다…”   바로 그해에 쏘련에 있는 모택동의 두번째 부인 하자진이 모안청형제와 련계를 갖고 늘 두 사람을 보살펴주었다.   1947년, 모안청은 귀국후 리부춘, 채창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후에 흑룡강 극산현의 토지개혁시점에 참가했다.   1949년 7월, 모안청은 북경에 돌아와 중공중앙 선전부 맑스-레닌저작편역실에서 로어번역을 맡았다. 그는 10여부의 맑스-레닌경전저작과 정치리론서적을 번역출판하였고 10여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상해에서 상처받은 머리는 나을리 없었다.   모택동의 보건의사 왕학빈의 회억에 의하면 한번은 모택동이 편지 한통을 왕학빈에게 보여주었는데 모안청이 모택동한테 쓴것이였다. 편지내용은 모안청이 자기 머리속에 한 “녀석”이 들어있는데 자기는 그 “녀석”과 끝없이 싱갱이질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후 모택동은 하는수 없이 모안청을 쏘련에 보내 병치료를 받게 했다.   혼 인   1959년, 쏘련에서 치료를 받고 귀국한후 모안청은 대련 남산호텔에서 휴양하고있었다. 그때 모안영이 이미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되였다. 대련시공안국 경위처 원 처장 장세보의 회억에 의하면 모택동의 사돈 장문추가 모택동과 계속 인연을 맺겠다고 원하면서 모안영의 안해인 류송림의 녀동생 소화를 데리고 대련에 와 휴양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 휴양은 “맞선을 보는 색채가 얼마간 있었다.”   뜻밖에도 모안청과 소화는 보자마자 익숙한 사이처럼 이야기를 잘하였다. 그후 두 사람은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이 일을 안 모택동은 특별히 모안청에게 편지를 썼다. “네 병이 많이 나았다니 아주 기쁘다. 의사동지들과 너를 도와주고있는 다른 동지들의 의견을 잘 듣고 잘 휴양하면서 치료를 잘해야 한다. 절대 성급해서는 안된다. 너의 형수 사제와 그 녀동생 소화가 너를 보러 왔고 또 너의 병상황을 아주 관심하고있으니 너는 그녀들을 잘 대해주어야 한다. 네가 소화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던데 너희들은 친구로 사귈 의향이 있니? 소화는 좋은 아이이다. 잘 이야기해보아라…”   1960년의 5.1절전야에 모안청과 소화는 대련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1970년에 아들을 보았는데 모택동은 “신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 향   1931년에 장사 판창을 떠난후 모안청은 여러해동안 고향으로 가보지 못했다.   1952년에 그는 처음으로 소산으로 갔었다. 모안청의 사촌동생 모안평의 회억에 의하면 모안청은 그때 모택동의 고향집을 참관하고 촌에서 일부 로인들을 만났는데 그속에는 그의 할머니도 들어있었다. 떠날 때 모안청은 특별히 200원을 꺼내 로인한테 드리면서 “이것은 아버지가 주는것이 아니라 내돈”이라고 말했다 한다.   모택동이 서거한후 모안청부부는 여러번 소산으로 가보았는데 갈적마다 소산호텔에 들었고 또 모택동의 고향집과 적수동으로 가보았으며 소산에다 중로 두 나라 문자로 “나는 소산을 몹시 사랑한다”는 제사를 썼다.   “이 말은 우리가 그한테 아무런 제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생각해낸것이다.” 모안평은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의 출생지인 판창에 대해 모안청은 더욱 깊은 감정을 품고있었다. 어릴적 그는 줄곧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고 “양영수”라는 이름도 가지고있었다.   몇십년후 그는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묘에 와 성묘한 다음 서명책에다 “양안청”이라고 썼다. 모두들 그가 잘못 쓰지 않았는가고 여겼지만 그의 유년시절 감정의 문이 그때까지 열려있었는지도 모른다.   만 년   쏘련에서 11년간 사업하고 학습하였기에 모안청은 로어로 사고하는 습관이 양성되였고 일상생활양식도 유럽식의 풍격을 확보했다.   음악을 좋아하는것은 모안청의 큰 애호이다. 젊었을 때 그는 피아노 등 악기를 다룰줄 알았고 작곡도 할줄 알았다. 모안청의 생활은 주로 텔레비죤을 보고 책을 읽고 신문을 보는것인데 로어를 한어보다 더 잘 알기에 특히 로씨야문학을 즐겼다.   모안청의 집에서 비서장으로 4년간 있은 장정걸은 “모안청은 성격이 아주 좋다. 정말 좋다!”고 말했다.   장정걸의 회억에 따르면 모택동이 혁명하러 떠나고 양개혜가 일찍 희생되여 모안영, 모안청 형제는 오래동안 서로 의지해 살아온 까닭에 그들 “형제의 감정은 특별히 깊다.”   “안영의 희생은 그한테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장정걸은 모안청이 여러번 “나는 형을 보았다. 나는 그와 산보하러 갔다”고 말하는것을 들었다고 했다.   《환구시보》  
3    전인교육(素質敎育)은 부모의 몫 댓글:  조회:1361  추천:0  2009-05-23
전인교육(素質敎育)은 부모의 몫 기자: [김정함]   《선생님, 우리 애는 선생님께 맡깁니다…》 학부모들이 학교에 와서 늘 하는 말이다. 물론 인사치레로 하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많이는 정말로 아이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모든 희망을 학교에, 선생님께 걸고 하는 말이다. 지금 자녀교양은 참으로 어렵다. 친구같은 부모가 되라고 하여 허물없이 굴면 꼭뒤에 올라앉으려 하고 규칙을 운운하면 시대를 못 따른다고 야단이다. 특히 청춘기 아이들은 반역심리가 크기에 부모들을 화가 나서 펄펄 뛰게 하지 않으면 아이 신체가 견뎌내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아이의 품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애의 신체발육으로 인한 초조함때문이라고 한다. 언제 들었던 얘기― 필자의 친구인 한 대학교수엄마가 아들애가 초중 2학년때 다투다가 화가 난 나머지 쇼크한적까지 있었다던 말에 리해가 가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을 학교에만 맡기고 부모는 손을 씻고 나앉아도 될가? 또 부모가 책임을 다하려면 자녀교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가? 근간에 장춘시 여러 학교들에서 앞다투어 청해다 강좌를 조직하고있는 《교육광인》 진충련교수의 교육리념으로 이를 풀이해보고저 한다. 우리의 가정교육 왜 전보다 힘들어졌을가?  우선 지금아이들은 독신자녀 세대이고 텔레비죤과 컴퓨터앞에서 성장한 세대이며 시장경제속에서 자라난 세대이다. 다음, 우리 나라의 교육모식은 아직도 계획경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교육제도 또한 너무 뒤처져있다. 그다음, 우리 부모들은 이 세대 아이들의 성장경력이 없기에 기성가정교육 경험이 없으며 또 가정교육을 전문 연구하지도 않는다. 이상 세가지 특수원인으로 부모는 자연히 아이의 성장을 따를수 없게 되고 아이교육이 힘들어지게 될수밖에 없다. 분공―학교는 학업 위주, 부모는 전인교육 위주 지금은 과거 계획경제시대처럼 아이를 학교에만 보내면 저절로 크는 때가 아니다. 사회는 창조력있고 개성있는 사람을 수요한다. 그러나 학급담임 혼자서는 학급의 6, 70명 학생의 개성발전을 다 살필수가 없고 또 여러 가지 사회상의 불량한 유혹도 다 막아낼수 없다. 내 아이 개성특점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부모이다. 따라서 부모들은 학교만 지나치게 기대하면서 아이의 모든 교육을 교원에게 기탁할것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교육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또 현재 우리 학생들은 한면으로 시장경제속에서 전인교육(素醴싱育)의 요구에 만족을 줘야 할뿐만 아니라 아직도 계획경제인 응시교육에도 만족을 주어야 한다. 이런 막중한 교육부담앞에서 학교는 학업을 위주로 하고 부모는 자질교육, 개성교육을 위주로 하는것으로 분공하는것이 명지하지 않을가. 쩍하면 남을 탓하는 사유습관 일단 일이 생기면 남을 탓하는 버릇이 있는 아이가 많다. 이는 우리 가정교육의 페단이다. 애가 어릴 때 돌에 걸려 넘어지면 그 돌이 나쁘다며 원망한 부모들이였으니깐.  성공이란 무엇인가? 한사람이 자기의 잠재력을 전부 발휘해 사회에 기여할수 있다면 이는 성공이다. 일에 맞띄울적마다 남을 탓하는 아이는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은 성공은 《주동》인가 《피동》인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무릇 남을 탓하는 사람은 피동이다. 남이 나한테 좋으면 나도 따라 좋고 남이 나한테 나쁘면 나도 따라 나쁘다. 이런 사람은 실패밖에 없다. 무릇 주동적인 사람은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고 자기를 파악할수 있다. 성공의 최대의 적은 《남을 탓하는것》이다. 아이에게 있는 모든 문제점들을 바로잡으려면 우선 남을 탓하는 사유습관부터 해결해야 한다. 어느 부모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했다면 아이는 장래에 꼭 유망할것이다. 량호한 사유방식을 양성하는것은 전인교육의 핵심이다. 《한사람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능력과 경험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방식에 있다.》 이는 하버드대학의 경전명언이다. 《토끼와 거부기》 이야기의 새 판본 토끼와 거부기는 달리기를 했는데 첫시합에서는 토끼가 교오자만하며 잤기에 거부기가 이겼고 두번째는 토끼자 자지 않고 이겼으며 세번째는 토끼자 자지 않았는데도 거부기가 이겼다. 왜? 종점이 강건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 륙지에서는 토끼가 거부기를 업고 뛰고 물에서는 거부기가 토끼를 업고 건넜더니 둘 다 빨랐다. 이 우화는 두가지 도리를 알려준다. 하나는 토끼에게는 토끼의 우점이, 거부기에게는 거부기의 우점이 있는것처럼 사람에게도 누구나 다 우점이 있다는것. 두번째는 합작을 해야 한다는것 즉 이른바 자원통합을 해야 한다는것이다. 지금 외동이들은 다 너무 자기적이고 남의 우점을 볼줄 모른다. 남의 우점을 볼줄 모르면  합작을 모르게 되고 시장경제환경에서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분투할수 없게 되며 따라서 성공이 어렵게 된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아이가 다른 사람의 우점을 찾아볼줄 알도록 하는게 너무 중요하다. 《성공지력》이란? 미국 심리학가에 의하면 학습중에 나타나는 학업지력은 《타성화지력》으로서 현실생활과 련계가 아주 적다. 이 지력은 다만 학생의 성적과 점수만을 예측한다. 성공지력이야말로 사람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에 도달시킨다. 성공지력은 분석성지력, 창조성지력, 실천성지력을 포함하는데 실천성지력은  목전 늘 거론하는 집행력이다. 이 세개면은 하나의 유기적인  정체로서 이들이 서로 협조하고 평형될 때면 지력은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때문에 우리는 성공지력  양성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성공지력은 이렇게 양성할수 있다. 부모를 사랑할줄 알도록 하고 너그러울줄 알도록 하고 무슨 일이나 자기자신에 의거해야 함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런 아이는 꼭 성공한다. 《나는 국화예요. 나보고 여름에 꽃피라고 하지 마세요. 나는 백양이예요. 내 몸에서 잣을 따내려고 하지 마세요.》 이는 초중1학년 녀학생이 부모에게 쓴 건의이다. 보다싶이 부모들은 현실을 떠난 욕심보다는 내 아이를 옳바로 인식하고 장점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파내면서 사물의 발전추세에 따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야만 아이가 건강하게 발전할수 있는것이다.
2    20여년 후진생 사랑에 기여 댓글:  조회:1231  추천:0  2009-05-15
20여년 후진생 사랑에 기여 룡정시룡정중학교 일어교원 문경애교원의 사업담 교육사업에 종사해온 20여년간 《사랑과 기여》를 자신의 신조로 삼으면서 학생사랑을 첫자리에 놓고 열심히 사업하여 학부모와 학생들의 존중과 동료들의 찬양을 받는 교원이 있는데 그가 바로 룡정시룡정중학교 일어교원 문경애교원(49세)이다. 《학생의 진보가 곧 보수예요》 문경애교원은 1981년에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91년에 연변대학통신학부 일어전업을 졸업했다. 문경애교원은 학교의 배치에 따라 일어과 교수와 학교서류까지 맡아 관리하게 되였으며 어떤 해에는 교원의 부족으로 두개 학년의 일어교수까지 맡아하였다. 사업량이 많고 교수임무가 과중하였지만 그는 후진생들에 대한 보도를 잊지 않았다. 한번은 갓 전학해온 학생이 가장 기초적인것도 장악하지 못한것을 발견하고 과외지도를 해주었더니 다른 학생들까지 더 참가하는 바람에 퍼그나 고생스러웠지만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짬짬의 사간을 타내 참답게 지도해준 보람으로 학생들의 성적은 쑥쑥 제고를 가져왔다. 그는 또 《학생들의 진보가 바로 내가 받는 보수》라며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돌아오면 일어공부에 힘겨워하는 학생들에게 10여일간 무료로 보도해주군 하여 새 학기 새 지식학습에 도움을 주었다. 《후진생일수록 한품에 안아야 해요》 문선생은 학습에 흥취를 잃고 제멋대로 하는 후진생들에게 더욱 눈길을 돌렸다. 후진생들도 지력상수가 차한 학생, 가정의 압력으로 탈선하는 학생, 동학들의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 결손가정 자녀와 방치자녀 등 여러 가지 류형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문선생은 그들의 원인을 《진단》한 후에는 그들의 실제정황과 특점에 따라 일본의 풍속습관과 생활방식을 소개, 소설의 정절을 소개, 재미나는 노래를 가르치는 등 형식으로 학습흥취를 불러일으켰으며 그들의 학습수준차이에 따라 숙제, 시험문제도 정도부동하게 내여 후진생들의 학습적극성을 불러일으켰고 신심도 북돋우어주었다.  중학교 1학년때 매일 술로만 세월을 보내는 아버지(리혼)와 함께 생활하는 한 학생이 있었는데 이 학생은 공부에 열중하지 않을뿐만아니라 수업시간에 말썽만 일으켜 다른 학생들의 학습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여 모두들 아니꼽게 여겼지만 문선생은 자신의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이런 학생일수록 한품에 껴안아줘야 한다》며 틈만 있으면 찾아 담화를 하고 내심히 교육하였다. 그러는 과정 그림그리기에 흥취가 있음을 발견한 문선생은 그의 특장을 발휘시키도록 이끌었으며 후에는 점차 공부에도 흥취를 갖게 함으로써 전례없는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수확의 열매 주렁주렁 이와 같이 문선생은 평소 교수효과를 높이느라 최선을 다하여왔고 과외시간에는 보수 한푼 받지 않고 학생들을 지도해주고 후진생들에게 친엄마의 사랑을 주어 학생들은 문선생을 더욱 잘 따랐다. 문경애선생은 다년간 교육사업에서 도출해낸 경험과 탐구로 론문도 많이 써냈는바 《사랑은 곧 사덕》, 《후진학생을 더 사랑하라》 등 26편의 론문은 룡정시, 연변주, 성급에 발표되였다. 그는 여러 차례 학교와 룡정시의 우수교원으로 표창받았으며 연변주 학과선줄군, 골간교원, 초중일어 교수능수로 평의받았으며 연변주 교육과학중점과 우수과학연구성과상을 받아안기도 했다.               / 손화섭
1    시골학교에 정성을 쏟는 리정남교원 댓글:  조회:1443  추천:0  2009-05-15
시골학교에 정성을 쏟는 리정남교원 기자: [손화섭 김정섭 특약기자] 《인류령혼의 공정사》로서 교원의 넋은 언제나 학생들을 위한  한길로 향하고있다.  길림성 룡정시룡정중학교의 리정남교원은 농촌교육봉사 지원의 일환으로 지난학기부터 지신진 명동련합학교에 파견되여 1년간 산골학교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명동련합학교에 몸을 담은지 얼마 안되여 그는 교수설비가 비교적 락후한것을 료해하고 주동적으로 모교 지도부와 련계하여 급히 필요한 전자풍금 부터 1대를 들여왔다. 그리고 평소에 짬이 날 때마다 모교에 들러 초중의 월고 고시시험지와 각 과목의 련습문제, 복습문제들을 제공받아 명동련합학교에 전해주군 하였다. 지간 겨울, 그는 신체가 허약한 몸이지만  매일 차로 통근하면서 제일 먼저 학교에 도착하여 사무실과 자기가 맡은 3학년급의 학생들을 위해 난로를 미리 피워놓군 하였다. 안해가 한국에 가있고 자식들도 외지에 있다보니 집에 혼자 있는 원인으로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는 그는 살골아이들에게 정을 몰부어 학교를 자기 집처럼, 학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고있다. 그는 교수중에서 룡정중학교의 선진적 교수방법과 명동련합학교의 실제정황을 결합시키는데 중시를 돌리고 수업에서 세심하게 강의하고 련습에 많은 비중을 두면서 학습방법을 개선해나갔다. 과외시간에는 교수준비에 많은 정력을 쏟았다. 과당효과를 높이는것과 자습시간보도에서 효률을 높이는데 중시를 돌렸으며 평소 훈련에서 성적을 공고히하였다. 그는 명동련합학교의 교수질 제고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있다. 매일 2학년과 3학년의 수학과 정기교수외에도 수학공부에 어려움을 느끼고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2시간의 과외보도를 진행하고있다.그는 《농촌교육발전을 위한다》는 취지에 걸맞게 열심히 사업하여 명동련합학교 사생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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