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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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5)
2019년 11월 27일 15시 09분  조회:1521  추천:0  작성자: 륙도하

네가 오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감상노트

 

개인적으로 연시는 취향이 아니지만 감정의
배설이 절제된 시를 만나면  어느 시절의
언덕으로 양떼 구름을 몰고 사랑,  그 사그락
거리는 사랑의 추억으로 발을 더듬는 내가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어쩌면
가장 눈부시게 설레이는 기다림일지 모른다
그시간만큼은 시선이 머무는 어느 곳에도
꽃이 만발하게 핀다

그 사랑이란 이름 앞에 설레이지 않은 사람
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지독한 묘약이 두가지
있는데 눈을 멀게 하는 것과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는 것이다 류시화 시인의 시집
타이틀처럼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는 것이리라

별이 내려 오는 어느 저녁의 벤치에서 연인의
입술을 뜨겁게 훔쳐본 사람은 안다
그 설레임이 스미게 번지는 감전 같은
전율을ᆢᆢᆢ
사랑은 서로에게 천천히
스미는 의식이겠는데 사랑은 오래오래
서로에게  꽃을 피워대는 일이 겠는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시를 읽는
동안 사랑 그 몽의 틈에서
간신히 덜커덩거리며 빠져나온다
너는 여기서 우리가 또 간절히 바라는 이름일지도 [문정완]

동사목(凍死木) 


 

[2020 부산일보 신춘문예-시조] 진 헤어살롱/장남숙


스팸메일 지우듯 싹둑싹둑 잘라내도
낮 불 밝은 살롱은 루머(rumor)가 크는 온실
엉터리 가짜뉴스가 물들이며 치장이다

오랜 날 기다린 듯 끈 풀린 수다들이
해가 긴 오후만큼 끝없이 늘어지고
미용사 장갑 낀 손만 귀 닫고 한창이다

친친 감는 머리카락 뜬 소문 리플레이
들통 난 통화내용 진짜라도 어쩔 건지
까맣게 염색한 세상 알고 보면 새치다


 

아름다운 책 / 공광규

어느 해 나는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에서
책상이 아니라 식당에서 등산로에서 영화관에서 노래방에서 찻집에서
잡지 같은 사람을
소설 같은 사람을
시집 같은 사람을
한 장 한 장 맛있게 넘겼다
아름다운 표지와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체온이 묻어나는 책장을
눈으로 읽고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혀로 넘기고
두 발로 밑줄을 그었다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최고의 독서는 경전이나 명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참 아름다운 책 한 권


 

아름다운 사이

공광규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군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을 세워 할퀴는
일도 없겠어요
손목을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에요


되돌아보는 저녁/공광규

자동차에서 내려 걷는 시골길
그동안 너무 빨리 오느라 극락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디서 읽었던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
잠시 쉰다고

발등을 스치는 메뚜기와 개구리들
흔들리는 풀잎과 여린 꽃들
햇볕에 그을린 시골동창생의 사투리
푸짐한 당숙모의 시골밥상
어머니가 나물 뜯던 언덕에
누이가 좋아하던 나리꽃 군락


나비가 되어



   공광규


어젯밤에는
내가 나를
아주 깊이 안아주며 잤어

이렇게 팔을 엇갈려
네가 나를 안아주듯
내가 나를 안아주었어

그리운 너의 체온
감자알처럼
고구마 뿌리처럼 만져지는
내가 나를 만지는 슬픔

그러다 손목을 엇갈려
가슴에 얹고
뻗어가는 슬픔
꾹꾹 누르다 잠들었어

나비가 되어
펄럭펄럭
너에게 다녀오려고

―월간 《시인동네》 2019년 6월호

완행버스를 탔다 / 공광규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대도시에서 신도시로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 길 저 길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 집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 집도 지나고
스캔들양주 간판과
희망맥주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어느새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인데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오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욕심 / 공광규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셌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헛간을 짓다가 / 공광규

장마에 무너진 시골 헛간을 헐고 다시 짓는데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한다.
- 어라, 광규 이 사람, 주춧돌을 놓을 줄 모르는구먼.
- 어허, 그 나이 먹도록 기둥 한 번 안 세워봤구먼.
- 어이구, 지금 짓는 게 개집이여 뭐여.
동네사람들 말을 듣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한나절이면 될 것을 하루 종일 기둥도 못 세웠다.
저녁을 먹고 마루에 나와 별을 보는데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말만 듣고 살아서
평생 헛간 같은 집 한 채도 못 짓고 있는 것이다.



 

얼굴 반찬

공광규(1960~)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동사목

김광규(1941~)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
영하17도의 혹한을 비껴갈 수 없이
뒷동산 언덕배기에 뿌리박은 채
꼿꼿이 서서 얼어 죽은 나무들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소리
비명처럼 들린다
산 아래 첫 집 담 너머
우리 마당에도 누렇게 얼어 죽은
낙엽송과 단풍나무
한여름 녹음 속에 처연하게 숨 멎은
동사목 두 그루
살아 있는 나무들만 바람에 수런거리고
마른 잎을 떨어버릴 수 있다는
수목의 유언에 귀 기울이며
말 없는 미라를 보듯
두고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때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해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 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6)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동서문학≫ 등단
1987년 《실천문학》에 현장시들을 발표
2009년 제4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2010년 제1회 김만중문학상 시부문 금상
2011년 제16회 현대불교문학상 시부문 
시집 『대학 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말똥 한덩이』『담장을 허물다』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등


 

손가락 염주

공광규 (1960~)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주무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내던
관절염 걸린 손가락 마디

이제는 굵을 대로 굵어져
신혼의 금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도 맞지가 않네

아니, 이건 손가락 마디가 아니고 염주알이네
염주 뭉치 손이네하하허허 하하하호"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내는 손가락에 염주알을 키우고 있었네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러져 않은
빈소주병이었다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 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 준다.
 

 

오해(誤解)

박만엽


내가 
그대 가슴에 
돌을 던졌나요.

가슴으로 나눈 
대화이기에
증거를 댈 수 없을 뿐

난 그저
그대 가슴에 사랑이 담긴
꽃가루를 뿌렸을 뿐이라오.




11월  - 고은
 
낙옆을 연민하지 말아라
한자락 바람에
훨훨 날아가지 않느냐
그걸로 모자라거든
저쪽에서
새들도 날아가지 않느냐
보아라 그대 마음 저토록
눈부신 것을...


20년

박관서


기차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기차는 진입 전에 장내신호를
출발 전에는 출발신호를, 통과 후에는
개통취급을 제대로 해줘야 하는데

요즘엔 기차가, 아무런 신호도 받지 않고
아무런 취급도 해주지 않아도
내 안으로 진입해 들어와
출입문을 열어, 사람들을 내리고
짐보따리를 내리고 비척비척
눈 비비는 강아지까지 풀어놓곤 한다

더불어 노란 봄 햇살도 함께 따라와
개찰구 아래 손바닥만 한​ 뙈기 화단에
새아기 눈곱처럼 돋아 있는
채송화 개불알꽃 얼레지까지
함박웃음 짓게 하나니

아 아득한
무엇 하나 부럽지 않고 밉지 않고
무엇 하나 못나 보이지 않는
햇살 내리는 봄날의 간이역
생전 처음 보는 아늑한 풍경을
선물로 주고 가나니

내 안으로 들어온
기차가, 땀이었고 눈물이었고 한숨이었고
오기였고 버팀이었던
그 기차가, 이제야

-박관서 시집, 『기차 아래 사랑법』, 푸른사상(2014)

 

구두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사람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송찬호 시인, '10년 동안의 빈 의자' (문학과지성사, 1994)



 

놋쇠황소

   박지웅

놋그릇에 뼈다귀 하나 건져내
나 구석구석 빠는 놈, 나는 허둥지둥
빠는 놈, 나는 침을 묻히는 놈

밥뚜껑에 쌓이는 뼈들
한때 소의 한 축이었으나 그림자도 없다
세상에 무덤덤한 일이 어디 있나
이 놋그릇이 소에게는 생지옥이다

옛 팔라리스왕은 나를 놋쇠황소에 집어넣고
배 밑에 장작을 때어 내 몸에 있는 춤을 모두 꺼내었다
훗날 왕도 형틀에 들어가 춤을 추었다

국물을 들이키며, 뼈도 못 추린 이야기
국물도 없는 가난한 생을 떠올리다 문득
저세상의 바닥까지 깨끗이 비우는 게 산목숨이라니
그럴 줄 알았다 여기가 지옥이다

벽에 붙은 도가니탕 얼마 꼬리곰탕 얼마 수육 얼마
망자의 가격이 매겨진 비문을 훑으며
입을 벌린다, 아아 나는 나의 뱃속을 돌고 돌았구나
밥자리에 다소곳이 따라붙는 놋쇠 그림자

 

불타는 글자들

   박지웅

도서관에는 쓸데없이 많은 정숙이 근무하고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은 그들을 선량한 직원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들은 국가에서 심어놓은 비밀요원이다
바닥에 매설된 요원 사이를 통과하지 못한 자들
힘차게 걷던 한 시민의 발목은 화단에서 발견되었다
보라, 우리가 국가를 불렀을 때
국가는 우리에게 와 꽃이 되어 주었다

캄캄한 꽃, 침통한 꽃이 피어 있는 국가
국가의 지하에서 자란 꽃들이 낭자하게 피어 있는 사월
깨어진 글자들이 유리조각처럼 깔려 있는 사월

우리는 격실에 갇혀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호출하였으나
정숙에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사월에 국가는 묵음이었으니
사월에 국가는 침대에 누워 꽃이나 피웠으니
이제 누가 창을 깨고 들어가 침몰한 사월을 인양할 텐가
소곤거리는 사이에 정숙은 어김없이 나타나
엄숙하게 경고하고 바닥에 매복한다
경솔하게 움직이지 마라 제자리를 지키고 지시에 따르라
아, 살아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불타는 글자를 종이컵에 담고 우리는 행진한다
적막이 낭자한 이 사월에

—《시사사》 2015년 5-6월호

 

고향

 조말선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가자 그것은 공간이 되었다
후줄근한 중고품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

 

애인들 

김찬옥
 
누가 내 몸에 수없이 구멍을 뚫어 놓았다 
몸이 사막으로 변하면서 애인이 바뀌었다 
술친구도 적당히 멀리하고 지천명에 몸 붙이려는 순간 
숨 가쁘게 나를 호출하는 것들이 있다
 
내 전부를 탐하려는 듯 
화곡역에서 집까지 늘어서 있는 애인들 
걸핏하면 내 속을 들여다보는 이종현 내과 
눈을 까뒤집고 말라버린 눈물 줄기를 찾아내는 백상춘 안과 
엇나간 지층의 뼈대를 살살 구슬리는 선 정형외과 
선인장 가시로 사정없이 모래언덕을 찔러대는 김대근 한의원 
골짜기에서 시들어 버린 붉은 꽃송이를 똑똑 따 내는 황세영 산부인과
 
이들은 전생에 또 어떤 인연이었길래 
내 몸 속 오랜 지천명의 시간을 달려와 
서로 내 애인이 되겠다고 시샘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들이 한통속이 되어 머리 맞대고 궁리하는 일이라곤 
내 몸속에 숨어있는 바람과 모래를 거래하는 일이다
 
난 요즘 김대근 한의원과 눈이 맞았다 
대낮부터 하얀 시트 위에서 
바지를 벗어 내리고 맨살로 누워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맥을 꼭꼭 눌러가며 샘을 찾는다 
초음파, 고주파, 이 기구들은 단번에 내 성감대를 알아 버렸고 
막힌 수맥이 터졌는지 허리와 어깨가 짜릿짜릿하다
어제는 부항이 굶주린 짐승처럼 목 뒷덜미를 물어뜯어 
옷 밖으로 빨간 입술자국이 기어 나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이런 날이면 내 몸을 뜨겁게 열어주던 
소주 한 잔, 그 달던 밤은 사라지고 
낯선 침대위에 사막 한 채 시린 구멍을 웅크리고 있다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 박지웅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배짱 한 번 두둑하다
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말리지 마라
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김재진(1955~ )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드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나


 

황사 / 송찬호

요즘 이곳 시골에서
혼례를 올리기 위해서는
바다 건너
사막 너머
먼 데서 신부를 데려와야 한다

예식은 읍내 식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
창밖 지붕 너머 들판과 냇가 건너
멀리 앞산까지 온통 뿌연 예식장

드디어 신부가 온다
누우런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산 넘어 신부가 날아온다

신부의 가는 허리에서 방울 소리 울리고
속눈썹은 회초리처럼 길고
양털 가죽신을 신은 걸 보아
신부는 유목의 바람 세찬 곳에서 오나 보다

혼례는 하루 종일 계속된다
이 잔치를 거들고 즐기느라
목련과 산수유도 종일
눈이 따갑고 목이 아프다

그런데 혼수용으로 신부를 따라온
염소구름은 어떻게 한다지?
이 뿌우연 봄날, 고삐를 매지 않으면
금방 사라져 버릴 터인데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2009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의 풍경처럼 먼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의 들길 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천돌이라는 곳

   정끝별

목울대 밑 우묵한 곳에 손을 대면 그곳이 천돌

쇄골과 쇄골 사이 뼈의 지적도에도 없이
물집에 싸인 심장이 벌떡대는 곳
묶였던 목줄이 기억하는 고백의 낭떠러지

와요, 와서 긴 손가락으로 읽어주세요
아무나가 누구인지 무엇이 모든 것인지

묻어둔 술통이 따뜻해질 즈음이면
잉크빛 목소리들이 저녁 안개처럼 스며들고
혼잣말을 하며 헤매는 발자국이 하나둘 늘어나요
어떤 이름은 파고 또 파고 어떤 이름은 묻고 또 묻고 애초에 없었던 어떤 이름은 바람에 밟히기도 해요
심었다 쓰러지는 함몰된 희망에 호미 자루가 먼저 달아나기도 하는데요 그럴 때면
눈물의 밀사가 관장하는 물시계 홈통에 물 듣는 소리가 들려요

와요, 어서 와서 중지의 지문을 대주세요
지도에도 없는 천 개의 돌을 열어주세요

발소리도 없이 들었다 잠시의 별을 피워냈던 서리 입김
유리컵처럼 내던져진 너라는 텍스트의 파편과
인도코끼리만큼이나 무거운 오해의 구름들,
그리고 지리멸렬에 두 발이 묶인 지지리한 기다림이
기억의 물통에 채워질 때마다 망각의 타종 소리가 맥박처럼 요동치는 곳

뜻밖의 지금을 살게 한 천돌이라는 그곳
어떤 이름을 부르려 달싹이는 입술처럼
천 개의 숨이 가쁜 내 고통의 숨통

   —《현대문학》 2017년 9월호



 

섶섬이 보이는 방

나희덕(1966~)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던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사투리

  박목월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새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섞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런 것은
나무나 하늘이나 꽃이라기보다
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

참말로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냄새가 난다.
약간 이슬냄새가 난다.
그리고 입안에 마르는
황토(黃土)흙 타는 냄새가 난다.


*************


 

물음표(?)에 대하여 

복효근

오늘 아침 찌갯감
일본산 생명태 아가리 속에는
낚시바늘 하나 박혀있다

살기 위해 삼켰으나
결국은 거기에 매달려 죽었으리라
그래서 낚시바늘은 물음표를 닮았다

옷장 밖에선 
먹이를 찾아 
낚시바늘을 삼키고 있는 몸을 상징하듯

관을 닮은 옷장을 열면
몸이 빠져나간 옷들은
물음표 하나씩 달고 있다

살게 한 것도 물음표였으나
죽게 한 것도 물음표라는 듯 
물음표는 낚시바늘을 닮았다


 

능소화 / 전선경

가슴으로 피어올라
아픈 사랑이 되었구나
내가 죽고 네가 살 수 있다면
너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한 줌의 흙이 되어 필 수만 있다면
네 곁에서 향기 발할 수만 있다면
너의 웃음소리 들을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 주어도 아깝지 않기에
너의 소리 없는 눈물을 받아먹고
이리 애닯게 피었구나
널 향한 그리움
담장을 훌쩍 넘었구나
네 소리가 되고자
흐드러진 여러 귀가 되어 열렸구나

네 서러움 담아내고자
이리도 곱게 피었구나
너에게만은 참 미소 보여 주고자
저리 붉게 피었구나
너의 심장 가까이에서
끊임없이 속삭여 주는구나
널 사랑한다고


 

풀의 정신

김형로

한갓 발길이 두려워서야 풀이 아니리
밟혀도 풀, 커봤다 풀
헝거리 정신으로 바람결에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는 풀들

이름 모를 풀을 보면 당신은
잡초라고 퉁, 치지만 그것은 당신의 자유
그들에게도 철학이 있다

바랭이는 당신을 위해 방석을 깔고
어디 한 번 밟아보라며 펑퍼짐한 엉덩이를 내민다
밟을수록 좋다고 댓거리한다

질경이는 함부로
당신 발에 밟히는 순간
긴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오, 내가 지구를 짊어졌구나

당신은 풀 한둘 뽑을 수 있지만
저 무성한 풀의 정신은 죽일 수 없다
배짱 없이 풀일 수는 없다고
풀풀한 풀의 함수를 사람은 풀 수가 없다

겨울이면 사그라들 것들의 힘이란 어디서 오는 건지
밟혀도 풀, 커봤다 풀인 것들이
나무도 못 되는 것들이
거대한 생각의 씨를 심고 있다

풀의 가문엔 약골이 없다

  

섬걱선


        이성부
 

가까이에 있는 산은
항상 아내 같다
바라보기만 해도 내 것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재미있는 산
더 많이 변화를 감추고 있는 산
가까이에서 더 모르는 산
그래서 아내 같다
거기 언제 그대로 있으므로
마음이 놓인다

어떤 날에는 성깔이 보이고
어떤 날에는 너그러워 눈물 난다
칼바위 등걸이나 벽이거나
매달린 나를 떠밀다가도
마침내 마침내 포근히 받아들이는 산
서울 거리 어디에서도
바라보기만 하면 가슴이 뛰는 산
내 것이면서 내가 잘 모르는 산

이성부. ㅡ ㅡ 삼각산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감기/박후기

숙주를 파고드는 병과
함께 누워
약을 먹는 밤은
쓰다

목에 걸린 알약처럼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육신아
물 한 모금 겨우
눈물 한 모금 겨우 삼키며
너를 안고
너를 앓는다

누가
내 안에 들어와
기어이
사흘 밤낮을
울고 간다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박후기

싱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 이라고 씌어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볕이 잠시 문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
식탁 위 선인장이 우울하다

아내는 이곳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상자라고 부른다
내 몸은 지상의 모든 발 아래 놓여 있어
늦은 밤 사람들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내 깊은 잠 속까지 걸어 들어온다

내가 살고 있는 상자는
산 아래 큰 강가의 60층 빌딩보다 높은 곳이지만
주인집 은행나무 뿌리보다 낮은 곳이어서
외벽에 기댄 은행나무 뿌리가 내벽에
금을 만든다 땅 속 어디선가
은행나무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벽을 긁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배 위로 불거진 핏줄이
한 가닥 금을 긋는다
아내의 뱃속에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
쉬지 않고 내세는 두드리는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하나


1968년 경기도 평택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3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격렬비열도』『엄마라는 공장 아내라는 감옥』등



 

낙엽

  이생진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때가 좋은 때다
그때가 때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손님

백무산

 
내가 사는 산에 기댄 집, 눈 내린 아침
뒷마당엔 주먹만 한 발자국들
여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다
발자국은 산에서 내려왔다, 간혹
한밤중 산을 찢는 노루의 비명을
삼킨 짐승일까 

내가 잠든 방 봉창 아래에서 오래 서성이었다
밤새 내 숨소리 듣고 있었는가
내 꿈을 다 읽고 있었는가
어쩐지 그가 보고 싶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몸을 숨겨 찾아온 벗들의 피묻은 발자국인 양
국경을 넘어온 화약을 안은 사람들인 양
곧 교전이라도 벌어질 듯이
눈 덮인 산은 무섭도록 고요하다 

거세된 내 야성에 피를 끓이러 왔는가
세상의 저 비루먹은 대열에 끼지 못해 안달하다
더 이상 목숨의 경계에서 피 흘리지 않는
문드러진 발톱을 마저 으깨버리려고 왔는가
누가 날 데리러 저 머나먼 광야에서 왔는가

눈 덮인 산은 칼날처럼 고요하고날이 선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을뚝뚝 떨구며 그는 어디로 갔을까



커피를 내리며

 허영숙


커피를 내리는 일처럼
사는 일도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둥글지 못해 모난 귀퉁이로
다른 이의 가슴을 찌르고도
아직 상처를 처매주지 못했거나

우물 안의 잣대 품어
하늘의 높이를 재려한 얄팍한 깊이로
서로에게 우를 범한 일들

새벽 산책길
이제 막 눈을 뜬 들풀을
무심히 밟아댄 사소함까지도
질 좋은 여과지에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일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것처럼
마음과 마음의 온도 차이로 성에를 만들고

닦아내지 않으면
등을 보여야 하는 슬픈 배경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슴 밖 경계선을 넘어와서
눈물나게 하는 기억들

이 세상 어디선가
내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사연들이 있다면
걸러내서 좋은 향기로 마주하고 싶다

커피 여과지 위에
잊고 산 시간들이 따뜻하게 걸러지고 있다



 


할미꽃

  허영숙

그늘 드는 마음 눌러보자고 나갔다가
너를 보았다
봉긋하게 내린 그림자를
환하게 바라보는 햇솜 같은 얼굴
누가 이 꽃을
그늘진 마음으로 보겠는가
누가 함부로 이마를 치켜들고
이 꽃을 보겠는가

 

투명 / 하린

인공눈물을 화분 속에 떨어뜨리고
싹트길 기다려 볼까요
개밥바라기별을 처음 사랑한 사람이 나였으면 하고
서쪽 하늘이 무표정을 버릴 때까지 우는 시늉을 해볼까요
혼자 밥을 먹는데 익숙해지는 허무를 위해
D-day를 표시하며 하루에 세 번 웃어볼까요
바짝 마른 그리움을 풀어 국을 끓이고
숨이 적당히 죽은 외로움을 나물로 무쳐내고
꼬들꼬들한 고독을 적당히 볶아 식탁을 구성해 볼까요
빈 의자와 겸상해볼까요
자, 이제 주말연속극이 시작됩니다
고지식한 시어머니나 파렴치한 악처를 옹호해볼까요
두 사람이 짧은 식사를 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긴 식사를 하는 것이
더 낭만적이라고 다짐해볼까요
입맛을 다시거나 잃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독백을 방백처럼 늘어놓으며
접시를 지속적으로 더럽혀 볼까요
다리를 떨면서 신문을 봐도
먹기를 멈춘 채 눈물을 흘려도
잔소리할 사람 없습니다
시계를 보며 과장되게 늦은 척을 해 볼까요
예감이나 확신을 믿지 않게 해준 당신
공백은 있어도 여백을 찾을 수 없게 만든 당신
오늘 차려놓은 투명한 기척, 눈물 나게 웃으며 먹어볼까요



 

토란 잎 우산 / 이지엽


가을비 그제부터 시슴사슴 내리더니
오늘은 작정한 듯 나절가웃 내리신다
누에들 뽕잎 쓸듯이
속삭이듯 내리신다.
당숙모 어딜 가시나 토란 잎 우산 쓰고
또로롱 또르르 구르는 빗방울
봐라야 천연 방수다
더 좋은 거 너 봤냐
막내가 손바닥 들고 뛰어간 방둑길 건너
초록하늘 펼쳐들고 단풍물빛 차려입고
비 맞는 어깨와 큰 등짝
뒷모습 내내 애릿하다


 

나그네 / 이지엽


사람 사이의 길 끊어질 때 사람은 나그네 됩니다

돈 미움 시기 질투
마침내 길 끊어져 외로워집니다.
그가 걸어가는 길 늘 허공입니다
절벽입니다
많은 이 가운데 혼자이고 웃고 있지만 울고 있습니다
밥 먹을 때도 혼자이고 말을 할 때도 혼자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자기에게 혼자 말해 본 적 있으십니까
하루 온종일 말을 안해 본적 있으십니까

나그네 미워마세요.
사람 사이 길 끊길 때 우리 모두 나그네 입니다


-시집  <작은 詩앗· 채송화> 4집




 

하문(下問)  / 문성해

이 길고 멀고 오래된 것은 어디서 오나

이 차고 습습하고 묵은내 나는
내 철들자 맞기 시작한
어떤 상담교사보다도 더
귀에 쏙 맞는 말씀을 담아주는 이것은

내 어미가 싱싱한 허벅지를 걷고
한바탕 헌칫솔로 시멘트 마당을 벗기고 나면
꼭 들이닥치던 이것은
내 아비가 장롱 손잡이에 혁대를 걸고
면도칼을 갈며 바라보던 이것은

내 이마를 지나 코끝을 지나
장미 꽃잎을 지나
땅에서 난민처럼 버글거리는 이것은

먼산도 넓은 벌도 앞 도랑도
막 매달리기 시작한 포도도 착하게 맞고 있는 이것은
마침내 자두맛 참외맛 수작맛도 다 업어가는 이것은​ 

 


 

자기 시를 검토하는 열 가지 기준(10-10)

윤석산


마지막 열 번째로 내 작품이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물론 '나는 커다란 야심이 없이 쓰는 것이 즐거워 그냥 쓰여지는 대로 쓸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이 질문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품을 쓰고, 발표하는 행위는 <공적이며 사회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혼자 읽거나 같은 수준의 사람들끼리 동인회를 조직해서 돌려 읽을 게 아니라면 통시적(通時的)으로 그리고 공시적(共時的)으로 자기 작품이 어떤 변별성을 지녔는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 시인들 전체는 세계 문학 가운데 우리 시가 어떤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아마, 이 열 가지 문제를 검토해본 시인들은, 그렇다면 시란 시론을 공부한 사람만 쓰란 말이냐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네 시 수준은 어느 정도인데, 그렇게 건방을 떠느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첫 번째 이의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책에 대해서는 '죄송스럽습니다' 이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대와 동시대의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 보고, 그 작품이 좋다면 왜 좋은가를 생각해 보고, 받아들일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자기 작품에는 그런 것이 없나를 살펴보면서, 자기의 감수성과 문학관을 경신하라는 권유일 뿐이다.

문학 작품은 이론대로는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은 자기 작품 가운데에 어떤 요소가 모자라고 과잉되었는가를 분석하고 가다듬도록 안내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일정 기간 시를 쓴 사람들은 자기 작품을 재검토하고 또 새로운 시학의 수립에 전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못마땅하신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빈다.()



 

술보다 독한 눈물

박인환


눈물처럼 뚝뚝 낙엽지는 밤이면
당신의 그림자를 밟고 넘어진
외로운 내 마음을 잡아 보려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그렇게 이별을 견뎠습니다.

맺지 못할 이 이별 또한
운명이라며
다시는 울지 말자 다짐했지만
맨 정신으론 잊지 못해
술을 배웠습니다.

사랑을 버린 당신이 뭘 알아
밤마다 내가 마시는건
술이 아니라
술보다 더 독한 눈물이였다는
것과
결국 내가 취해 쓰러진건
죽음보다 더 깊은 그리움이였다는
것을



 

몸 관악기 ㅡ ㅡ 공광규

"당신, 창의력이 너무 늙었어!"
사장의 반말을 뒤로하고
뒷굽이 닳은 구두가 퇴근한다

살 부러진 우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굴욕의 나이를 참아야 한다고
처진 어깨를 적시며 다독거린다

낡은 넥타이를 끌어당기는 비바람이
술집에서 술집으로
걸레처럼 끌고 다니는 밤

빗물이 들이치는 포장마차 안에서
술에 젖은 몸이
악보도 연주자도 없이 운다.



 

서시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의 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폭설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섶섬이 보이는 방

나희덕(1966~)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던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사랑

정끝별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은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그림 일기

  진은영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
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
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
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그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양파 공동체 / 손미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 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서늘함 / 신달자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

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

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

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

쌀 한 톨 만한 하루가 지나간다


-시집 「북촌』, 민음사, 2016

 

국물


         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식당풍경/ 신달자


용산 기차역 식당에서 내 앞에 마주 앉아 국수를 먹고 있는
한 쌍의 남녀, 마흔이 갓 넘어 보이는 남자와 여자는 조금은
누추하고 겉늙어 보인다 일터에서 잠시 몸을 빼 기차 타는
여자를 보러 나온 남자는 여자의 입에 자꾸만 국수 가락을
넣어 주고 있다
답례인지 여자도 국수 한 가락을 남자의 입안에
아 하고 넣어주는데 킥킥 웃음도 함께 넣어 주는데
이마가 닿을 듯 말 듯 그사이 그들의 고된 생이 환하게
국물처럼 흘러내린다 여자의 국수 가락 끝으로 깊은
강 하나가 쑥 뽑혀 올라오다 김 속으로 사라진다
든든하다 포도나무 처럼 무릎을 서로 꿇은 채
사과처럼 익어 가는 저 풍경
무릎이 닳아 사막이 될 때 만난 사이인가 기운
인연이 다 터지고 엎지러진 물을 담듯 서로 만난
인연인가 눈을 마주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이마를 마주하고 운명을 마주하고 절대로
누가 먼저 돌아서지 않을 것 같은 저들
가난한 인연들에게 국수 한 가락 건져 올려
그들 목에 리본이라도 매어 주고 싶다

 

배추꽃 / 박성우

시골집 다녀오는 길에
텃밭에서 겨울을 난 배추를 캐왔다

겉절이를 하거나 쌈을 싸는
저녁은 생각만으로도 달았지만
노모가 챙겨준 반찬만 꺼내도
저녁 식탁은 어지간히 푸짐했다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봄동,
배추는 그새 꽃대를 내밀고는
겉절이도 쌈도 거부하고
지 맘대로 꽃으로 돌아갔다

꽃대 당당히 밀어올리고는
고추장이나 된장 따위 말고
화병과 물을 내놓으라 했다

꽃병이 어디 있더라,
하루 걸러 물 갈아주지 않으면
유리병 뿌옇게 까탈을 부렸다

배추를 캐온 게 아니라
까탈스러운 꽃을 모셔왔구나,
물이 탁해진다 싶으면 얼른
병 씻고 물 바꿔줘야 했다

배추꽃은 배추꽃답게 꽃대
겨드랑이 사이로 새 꽃대 내밀어댔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어주면
순식간에 몰려온 햇살이 앵앵
왱왱, 샛노란 배추꽃에 달라붙었다


햇살의 분별력 / 안도현

감나무 잎에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 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 하고요

장닭 볏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볏만큼 붉고요
염소 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 수염 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자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거름 더미에 뒹구는 햇살은 거름 냄새가 나고요
오줌통에 빠진 햇살은 오줌 냄새가 나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쌔빠지게 일하다 가고요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처음 시를 쓰던 날'/ 손홍규

“외로웠다. 돌아보건대, 생은 늘 외로웠다”로 시작하는 한 편의 글을 읽었다. 외롭다는 말에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첫 문장부터 돌부리에 걸린 듯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생을 돌아보아야 할 만큼 나이를 먹은 건 아니라고 여기지만 생을 돌아보기에 좋은 나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이런 문장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머물러도 괜찮을 듯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쓴 최초의 시도 외로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를 쓴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부임한 지 몇 해 안되었지만 인기가 많은 분이어서 다른 반 동급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첫인상은 좀 무시무시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분이어서 까다로운 성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으니까. 6학년이 되기 전부터 동네 형들과 누나들에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던 터라 잔뜩 긴장한 탓도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반 친구들은 다들 그런 듯했다. 그렇지만 며칠 안되어 왜 인기가 많은 선생님인지를 알게 되었다. 당신은 어린 학생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집이 가난하다고 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런 차별이 흔하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선생님은 수업 운영 방식에서도 남달랐다. 일주일에 세 시간인 작문 시간을 다른 반 선생님들은 보통 자습 시간 삼아 적당한 요일로 한 시간씩 떨어뜨려 놓았지만 우리 반은 달랐다. 오전 수업만 있던 토요일은 오롯이 작문 시간으로 채워졌다. 우리 반 친구들은 매주 토요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고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좋은 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일 년을 보냈다. 날이 갈수록 그 시간을 즐기게 됐고 돌아보니 아마도 그때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도 외로울 수 있는 법이다. 세 해 전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바로 전해에는 아버지가 탈곡기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나는 형제자매가 많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집에 돌아가면 아무도 없었다. 적막과 고요만이 나의 형제였다. 그 시간을 늦추기 위해 학교에 오래 머무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홀로 찾아들어 시간을 보내던 곳은 도서관이었다. 거기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을 만큼 쓸쓸한 곳이었다.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었다. 서가 사이 마룻바닥에 앉아 책장을 넘기면 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재단한 허공에서 속삭임처럼 책 먼지가 들끓었다. 외로움은 그처럼 숨죽인 채 내 곁에 머물렀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 거였다. 도서관에서만 위안을 찾을 수 있던 한 아이가 꾸미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른의 말투를 흉내 내지 않아도 좋다고 무엇을 느끼든 내가 느낀 걸 쓰면 그게 바로 시라는 선생님의 격려를 받으며 시를 끄적이게 된 거였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낸 우리는 각자 두 편의 시를 제출했고 선생님은 그 시들로 문집을 엮어 졸업하던 날에 한 권씩 나눠주었다. 나는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미리내’라는 제목의 이 문집을 가끔 들여다본다. 그 시절에 내가 느껴야 했던 외로움을, 사실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한 번도 발설하지 못했던 감정이 서투르지만 결백한 언어들로 행을 이루어 잠에서 깨어나는 걸 본다. 문집에 실린 다른 친구들의 시에서도 내가 느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감정들을 본다. 어쩌면 그 아이들의 가슴속에서 난생처음 이끌려 나와 부신 눈을 깜박이고 있을 그것들을. 그로부터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해 일 년 동안 우리에게 시를 가르쳐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문학을 알게 해준 당신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로워하던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외로웠다. 돌아보건대, 생은 늘 외로웠다”(최명표)로 시작하는 당신의 글을 읽었다. “그날 처음으로 눈곱이 산 자가 저승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몌별하느라 밤새 빚어낸 사리인 줄 깨달았다”라는 문장처럼 당신 역시 외롭고 높고 쓸쓸했음을 알았다.

(경향신문/ 손홍규 소설가)


꽃의 권력 / 고재종

     제15회 영랑시문학상 수상작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꽃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대붕(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시집『꽃의 권력』 (문학수첩, 2017)


 

개의 정치적 입장 / 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ㅡ《시사사》(2018년 9-10월호)

~~~~~~~~~
배한봉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현대시' 등단
시집 『흑조 』『우포늪의 왁새 』『악기점 』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주남지의 새들』  

[감상]
실존 철학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 문학은 자신과의 싸움을 기저로하는 자기투쟁의 문학이고 이 자기투쟁은 사회 부조리를 있는그대로 받아들이되 좀더 나은 인간 본연의 세계로 창조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태동한 문학이 앙가지망 문학이다.
앙가지망 문학을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참여 문학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참여란 사회부조리를 바라보는 눈이 좀더 나은 사회로 개선시키위해 역설적으로 반항하는 저항의식을 담아 일반인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이 시 개의 '정치적 입장'도 앙가지망의 성격을 지닌 시로
오늘날의 한국 정치사회를 일타하고 있다.

머지않아 총선이 다가 오고 벌써 부터 정치 입지자들의 사전 선거 운동이 전개되고 언론에서는 여기에 촛점을 맞춰 연일 뉴스의 대다수를 할애하고 있다.

역설로 개의 정치적 입장이 개판 정치의  입장으로 발상전환이 되어 개짖는 소리의 다양한 의미 전달을 통해 깊은 사유로 상상을 확장시키고 있다.
ㅡ ㅡ 펌

 

사랑 / 홍관희

우리가 사랑이란 이름 하나로 굳게 만나
말 못하는 내가 그대의 다리가 되어 주고
걷지 못하는 그대가 나의 입이 되어 준다면
지평선 너머까지라도 가고픈 길을
우리는 하고픈 말을 하면서 갈 수 있겠네

우리가 사랑이란 이름 하나로 만나
팔 못 쓰는 내가 그대의 길이 되어 주고
앞 못 보는 그대가 나의 팔이 되어 준다면
빛이 들끓는 그 곳까지 가고픈 길을
우리는 보고픈 것들을 보면서 갈 수 있겠네

그대의 어려움이 나의 사랑으로 풀리고
나의 어려움이 그대의 사랑으로 풀리며
우리가 굽힘없이 한 길 되어 꿋꿋이 나아간다면
척박한 이 세상도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겠네.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사랑

정끝별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은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그림 일기

  진은영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
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
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
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그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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