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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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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춘각:춘천 나들이(기행수필)
2019년 07월 08일 14시 25분  조회:397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춘천 나들이
 
살춘각
 
 
 
 
 
3박4일로 그녀가 나를 보러 왔다. 중국에서 비행기 타고 한국에 있는 나를 말이다. 주말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하루 정도는 청가를 맡아야 할 터이니 그녀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였을 것이다. 
 
“어디로 갈가?” 
 
한국이 처음인 나는 울산에 가본 게 다였고 서울에서는 길상사를 돌아본 게 전부였다. 반대로 그녀는 해마다 한번씩은 한국을 드나들었으니 거의 못 가본 데가 없었다. 
 
“춘천 못 가봤는데요.” 
 
“좋았어!” 
 
그렇게 려행지는 춘천으로 결정이 났고 이튿날, 백반집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 우리는 고속터미널에서 춘천으로 가는 일반뻐스에 올랐다. 
 
료금은 한화로 8,000원, 소요시간은 대략 세시간이다. 
 
 
 
소양강처녀
 
부산에 ‘부산갈매기’가 있다면 춘천에는 ‘소양강처녀’가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1호 려행지는 소양호일 수 밖에 없었다. 
 
남춘천역에서 대충 짜장면으로 떼우고 나오니 시간은 오후 한시가 훨 넘어있었다. 
 
남춘천역에서 소양강댐까지는 12번 뻐스가 배정돼있었다. ‘소양강처녀’를 보러 가는 사람이 많은 모양, 뻐스는 순식간에 다 차버렸다. 빠르면 40분, 늦어도 한시간이라 했으니 시간에 쫓길 것 같지는 않았다. 
 
한 20분 달렸을가. 왼쪽 옆구리 쪽으로 커다란 동상 하나가 파고들고 있었다. 얼핏 봐도 큰 강인데 강 우에 세워진 모습을 보니 쩍 말 없는 소녀상이였다. 하다면 이 강이 소양강이고 소녀상은 ‘소양강처녀’상이란 말인가? 
 
종착역에 이리 빨리 다달을 수는 없을 텐데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뻐스는 소녀상을 뒤로 내던지고 소양2교를 건너 강변도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뻐스 안이지만 소녀상을 찬히 보지 못한 게 아쉬웠고 돌아올 땐 잊지 말고 여기 꼭 들려야지 생각했다. 
 
노래 <소양강처녀>는 원 제목이 <춘천처녀>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감이 둔탁스럽다고 하여 어감이 괜찮은 <소양강처녀>로 고쳤다는 것이다. 반야월이 작사하고 리호가 작곡한 이 노래는 1970년, 가수 김태희가 부르면서 전국을 휩쓸었고 앨범은 10만장 넘게 팔리는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가히 한국인의 국민 대표곡 1호라 할 수 있었다. 
 
반야월은 본명이 박창오朴昌吾였는데 진방남秦芳男이란 이름으로 가수 데뷔를 했고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울고 넘는 박달재> 등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반야월半夜月은 작사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진 이름인데 군국가요 관련 활동도 해서 공식사과를 한 적도 있었다. 1990년대 이후 그는 한국 가요계의 대표적인 원로로 부각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인기가요들을 많이 발표했고 대중가요의 정체성 확립과 권익 다지기에 기여를 했다. 조선전쟁 이후 월북 작사가들의 작품이 금지대상으로 지목되자 그는 또 개사작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때 쓴 필명들이 추미림秋美林, 박남포朴南浦이다. 
 
노래 <소양강처녀>는 실제 모델이 있었다. 1953년생 가수지망생 윤기순尹基顺이 그녀다. 
 
1995년 춘천시에서는 소양강과 소양강댐에 더 많은 유람객을 유치하기 위해 <소양강처녀> 노래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 자리에 작사가 반야월을 모셨고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의 모델이 있으면 공개해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그렇게 되여 수면 우로 떠오른 윤기순은 파출소의 인터넷망을 통해 찾아냈는데 찾았을 당시 아직도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윤미라라는 무명가수로 광주의 어느 한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968년, 가수라는 화려한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한 윤기순은 가요작가 김종한의 무료 레슨을 받으며 명보극장과 가까운 ‘한국가요 반세기 가요작가 동지회’ 사무실에서 일했다. 6월에 윤기순은 사무실의 선생들을 소양강변의 갈대숲으로 초청했다. 아버지가 그 곳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동행했던 선생들로는 회장 반야월을 비롯해서 김종한, 월견초, 류농완, 고명기 등이였다. 
 
천렵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차례 소나기가 쏟아졌고 저녁 무렵 옅은 물안개가 피여올랐다고 한다. 그 때 그 풍경이 절경이여서 반선생이 가사를 쓴 것 같다고 후날 윤씨는 회억했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달 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그런데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내가 바로 노래 <소양강처녀>의 주인공이다.” 라고 밝히면서 2007년 국민일보에 반야월과의 사진 등을 증거자료로 내놓은 사람은 현재 충남 계룡시에 살고 있는 박경희라는 녀인이였다. 
 
박경희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는 윤기순보다도 일년 먼저인 67년도였고 반야월은 작사체험을 한답시고 그녀 아버지가 운영하던 소양1교 부근 ‘호수려관’에 한달간 체류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려관 외에도 선박업을 하고 있었는데 소양강댐 건설로 지금은 없어진 강 상류에 있는 고산이라는 작은 섬에로 반야월을 나루배로 데려다주라고 박경희에게 몇차례 일렀다는 것이다. 
 
춘천녀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박경희는 소양강에 산다는 리유로 사생들 사이에서 그 때 벌써 별명이 ‘소양강처녀’였다고 한다. 이른 련애를 했던 박경희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거제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반야월을 모시고 고산으로 관광을 가던 중 박경희는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동백꽃은 어떤 꽃이죠?” 
 
거제도로 일하러 간 남자친구의 편지내용 중에 “여긴 지금 동백꽃이 한창이다” 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이다. 
 
“동백나무에 피는 빨간 꽃이고 꽃은 가지 끝에 하나씩 피지.” 
 
반야월은 아는 만큼 동백꽃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주었다면서 박경희는 춘천에서는 볼 수 없는 동백꽃이 <소양강처녀> 노래 2절에 나오는 리유가 그것이라고 했다. 
 
한달간의 작사체험을 마치고 떠나면서 반야월은 “너의 사연을 노래말로 썼으니 나중에 레코드가 만들어지면 너한테 전해주마. 음반이 성공을 하면 꼭 찾으마.” 하고 약속을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뿐더러 박경희가 나타나자 오히려 <소양강처녀>는 주인공이 없다, 어쩌면 모든 녀성이 주인공일 수도 있다면서 강한 부정을 보였다. 
 
하지만 춘천시에서는 두 사람을 다 <소양강처녀>의 모델로 인정을 하였고 2005년도에는 소양2교 옆에 <소양강처녀> 노래비를 건립하였으며 2015년에는 최문순 춘천 시장의 주선으로 박경희, 윤기순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만남을 가졌다. 
 
여기서 나는 잠간 웃었다. 청마 유치환의 ‘련애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랬다. 
 
통영녀중 국어교사였던 38살 유부남 청마는 같은 학교 가사교사인 시조시인 정운丁芸, 리영도李永道를 만났던 것이다. 21살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 하나 키우면서 우체국 근처에서 수예점을 운영하고 있었던 정운은 청마보다 9살 아래였다. 청마는 수예점이 내려다보이는 우체국 창가에 기대서서 정운에게 20여년을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고 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하지만 이렇게 절절한 청마의 ‘그리움’ 앞에서도 정운은 어쩔 수 없었으니-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보다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정운 역시 청마를 사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청마의 편지는 편편마다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렇게 청마는 20여년에 걸쳐 정운에게 5,000여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마는 교통사고로 련애편지를 쓰던 펜을 영원히 놓게 된다. 
 
“근배, 니 부산 좀 내려오거래이.” 
 
뜻밖에도 정운이한테서 리근배에게 전화가 걸려왔단다. 문패의 먹도 채 안 마른 새로 생긴 중앙출판사 편집장으로 취직했던 리근배는 그 소리에 잡담 제하고 달려갔다. 
 
‘애일당爱日堂’이라 이름지은 리영도의 집은 동래 금정산 기슭 양지바른 터에 꾸며져있었는데 규방에는 청마가 준 사랑의 시를 손수 수놓은 열폭 병풍이 둘러져있었다고 리근배는 회억했다. 
 
그 날은 부산 문인들이 청마 추모 문학제를 지내는 날이였는데 정운 말고도 소복 입은 녀인들이 다섯이나 앞줄에 앉아있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정운은 련서 보따리를 선뜻 내주었고 아동문학가 최계락과 리근배는 그 편지들을 대충 추려갖고는 서울에 와서 서한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묶어냈다고 한다. 5,000통에서 200통을 골라냈다고 하니 상상도 아니 갈 노릇이였다. 덕분에 주문이 밀어닥치는 베스트 셀러가 됐고 중앙출판사는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되였다고 한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서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중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참으로 명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어떻게 저런 편지 속에 들어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정운이가 자다가도 놀라 벌떡 일어날 일이 생겼다. 
 
이 사랑의 서한집이 출판되자 청마의 편지를 갖고 있다는 녀인들이 여기저기서 자고 일어나면 한명씩 나타났던 것이다. 20여년간 자기 한사람만 꼬박 사랑해왔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게 아니였던 것이다. 뒤통수라도 이런 뒤통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이세요?” 
 
“아이러니지.” 
 
종착역에 내리니 꽤나 찬바람이 불어왔다. 여기서부터 댐까지는 반시간 푼히 올리걸어야 한다. 내려올 때는 십오분이면 족할 것이다. 
 
나와 그녀는 천천히 걸었다. 락엽들이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시월도 막 가는 때라 하늘은 건뜻 높이 들려있었다. 
 
“내 주변에도 그런 녀석이 있어.” 
 
“어떤 녀석요?” 
 
“사랑시 한수를 써서는 이 녀자 저 녀자한테 위챗으로 날리는.” 
 
“이 시 너를 위해 쓴 거다, 그래요?” 
 
“빙고~” 
 
“녀자들 그대로 믿겠네요.” 
 
“완전 감동이겠지? 이 세상에서 저 혼자만 녀자인듯. 저 혼자만 특별한듯.” 
 
“나쁘네요!” 
 
소양강댐은 높이가 123메터, 제방 길이는 530메터, 총 저수량은 29억톤으로 진흙과 돌로써 만들어진 사력 다목적 댐이다. 한국에서는 제일 큰 것이라지, 아마. 
 
양구군과 인제군의 3개 시, 군, 6개 면, 38개 리의 4,600세대가 이주하였으며 수몰된 논밭만 해도 약 2,700헥타르라고 한다. 
 
해발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풀이 잘 자라지 못하고 나무도 비뚜름히 성장한 것으로 보아 기온이 차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봄에 피여야 할 개나리가 철없이 몇송이 핀 걸 보고 그녀가 웃었다. 그녀의 손엔 올라올 때 내가 꺾어준 들꽃 한묶음이 그대로 들려져있었다. 
 
“이제 슬슬 내려갈가?” 
 
“그래요. 추워서 어디 유람선이나 타겠나요.” 
 
우리는 ‘소양강처녀’ 동상을 보는 것이 더 급했던 것이랄가. 
 
동상을 보려면 소양2교에 닿기 전인 근화동에서 내려야 했다. 
 
동상은 다리 중심가에 세워져있었는데 다리에서 내려 강쪽으로 백여보 걸어야 했다. 소양강이 조선의 강으로 합류하는 바로 그 합수목이다. 
 
한화로 5억 5,000만원을 들였다는 그 동상은 높이가 7메터로서 오고가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묶어두기에 손색이 없었다. 다리 중앙 동상 소개비 옆에는 스피카가 있었는데 <소양강처녀> 노래가 쉬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상을 올려다보며 나는 연신 찬탄을 금치 못했다. 동상이 웅장하기도 하려니와 그 때 마침 검은 구름이 몰려와 강물을 덮고 있어서 비바람 속에 서있는 처녀상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춘천까지 갔으면서 정작 윤기순씨를 못 만나고 왔다는 것이다. 광주의 밤무대 생활을 접고 일본에 갔던 윤기순은 2006년도에 춘천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받았다. 사북면 자암리 잡다리골의 ‘풍전가든’이라는 민박집이 그것이다. 봄엔 개나리 벚꽃이 있고 여름에는 느티나무 록음이 있으며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그 곳은 겨울에는 상고대가 있어 외롭지 않단다. 젊었을 때도 결혼 안한 내가 지금이라고 하겠는가고 말하는 윤기순이야말로 진정 ‘소양강처녀’가 아닐가 싶다. 다음에 춘천에 오면 내 꼭 ‘풍전가든’에 가보리라. 
 
“만약에, 내가 만약에 쌤하고 결혼을 하자고 한다면…” 
 
처녀상을 다 보고 소양2교를 벗어나 얼마간 걸었을 때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쌤은 할 생각이 있으세요?” 
 
그녀는 나를 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도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녀는 나의 두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다면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예까지 온 것이 결국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사실 이미 결혼에 실패했던 나는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결혼이라는 두 글자조차도 입에 올리기 싫었다. 그만큼 나는 혼인에 대해 철저히 실망하고 있었고 녀자에 대해 믿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가고 있었다. 정반대의 말을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너라면!” 
 
“알았어요.” 
 
그녀가 다가와 나의 팔을 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가. 단풍 든 락엽이 한벌 깔린 숲공원에 왔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또 물어왔다. 
 
“쌤은 지금까지 사귄 녀자가 몇명이나 되죠?” 
 
“한 삼십명 되나 모르겠어, 세여보지 않아서.” 
 
탁, 그녀가 잡았던 나의 팔을 탁 놓았다. 
 
어, 이건 뭥미? 하는 사이에 그녀는 어느새 공원 안으로 저만치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는 내가 꺾어준 꽃묶음을 숲 밖의 락엽더미에 활 내던지고 있었다. 
 
나는 숲 밖에 나가 떨어진 꽃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서있었다. 
 
 
 
 
 
굿바이, 유정!
 
춘천에 왔다가 ‘소양강처녀’만 보고 갈 순 없었다. 이왕에 왔으니 더 돌아볼 판이다. 춘천에 어디 명물이 ‘소양강처녀’ 뿐이겠는가. 
 
남춘천역 뻐스정류소에서 이 역 저 역 둘러보는데 ‘김유정문학촌’이라는 역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金裕貞. 
 
김유정이라면 <봄·봄>, <동백꽃>을 쓴 유명한 작가가 아닌가. 29살에 돌아간 비운의 천재. 2년 동안에 30여편의 소설을 답새겨낸 ‘구인회’ 멤버. 
 
그 곳이라면 안 갈 수가 없지. 흥분된 나는 동의를 구하는 눈치로 내 옆의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제스처를 해왔다. 
 
김유정은 1908년 2월에 강원도 춘천 실례마을에서 2남 6녀 중 일곱째로 허약하게 태여났다. 유아기에 서울로 이사했는데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9살에 아버지를 잃는 등 부성 모성 결핍으로 말더듬이로 되였다고 한다. 크면서 점차 나아졌는데 휘성고보를 졸업할 당시에는 덩치도 좋아졌고 말더듬증도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 때문에 후날 몹시 과묵했다고 한다. 
 
193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3년에는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 와 《신녀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 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소낙비>로 1등상을,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으로 입선함으로써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지하철을 리용하면 두정거장이면 된다는데 뻐스로 가려니까 여러 역을 거친다. 그리고 이리저리 에돌아가다 보니 25분이나 걸리는 것이였다. 문학촌에 도착했을 때는 열시가 넘어있었다. 구경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면 딱 안성맞춤이리라. 
 
문학촌 어구에 이르니 커다란 안내표시판이 나온다. 찬찬히 훑어보다가 우선 전시장부터 들려보기로 했다. 전시장과 생가만은 입장료를 받는다고 했다. 2, 000원. 
 
헌데 웬걸. 기념관 문이 꽁꽁 닫겨있는 게 아닌가. 옆에 있는 별채들도 닫겨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생가도 닫았을가. 멀리 생가 있는 쪽을 건너다 보니 미상불 거기도 닫혀있는 상 싶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별채와 별채 사이에는 너른 공터가 많았는데 운동장 서너개를 합친 것보다 더 커보였다. 공터에는 여러가지 조형물이 많았다. 아기 업은 아낙네에 지게를 멘 남정들, 할아버지와 손주… 그리고 특히 소흑판 같은 조형물이 많았는데 가서 들여다보면 김유정 작품 속 이야기 몇단락씩 씌여져있었다. <솟>이라거나 <소나기>, <동백꽃>이나 <봄·봄> 등등. 
 
 
 
점심을 먹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서려니까 등뒤에서 닭의 홰소리가 야단이다. 점순네 수탉이 우리 닭을 쪼아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나흘 전에 점순이는 울타리 엮는 내 등뒤로 와서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감자를 내밀었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일하던 손으로 그 감자를 도루 어깨 너머로 쑥 밀어버렸다. 쌔근쌔근 독이 오른 점순이가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다음날 점순이는 자기 집 봉당에 걸터앉아 우리 집 씨암탉을 붙들어놓고 때리고 있었다. 
 
하루는 나도 우리 집 수탉에게 고추장을 먹이고 점순네 닭과 싸움을 시켜놓고 천연스레 호드기를 불고 있었다. 지게 막대기로 점순네 수탉을 때려죽이고 멍하니 섰다가 점순이가 매섭게 눈을 흡뜨고 닥치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가만히 생각을 하니 점순네는 마름집이라 이제 땅이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이담부터 안 그럴 테냐는 점순에게 그래, 하고 대답을 했는데 점순이는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듯이 고만 아찔하였다. 
 
 
 
“여기서 말한 동백꽃이 저 꽃이야.” 
 
나는 조형물 속의 문장을 읽고 있는 그녀에게 노란 잎이 반짝거리고 있는 생강나무를 가리켰다. 
 
“여기 패말에 생강나무라고 써있는데요?”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고 불러. 저기 문장에도 노란 동백꽃 속이라고 표현을 했잖아. 봐, 생강나무가 노랗잖아.” 
 
“아, 네.” 
 
우리는 김유정 생가 쪽으로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나는 장인어른이 점순이가 키가 작아서 시집을 안 보낸다 해서 점순이가 키가 크기를 4년이나 기다렸다는 얘기랑 해주었다. 그녀는 옛날 사람들 글을 써도 참 능청스럽게 쓴다면서 깔깔거렸다. 
 
“뽀뽀라는 낱말 있잖아.” 
 
“네.” 
 
“뽀뽀가 처음으로 등장한 문학작품이 김유정의 작품이야.” 
 
“네에?” 
 
“<산골나그네>란 작품에 ‘입이나 좀 맞추고 뽀! 뽀! 뽀!’ 하는 장면이 있고 <애기>라는 작품에 ‘오, 우지 마, 우리 아가야, 하고 그를 얼싸안으며 뺨도 문대고 뽀뽀도 하고 할 수 있는, 그런 큰 행복과 아울러 우리는 흠씬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라는 구절이 있어.” 
 
“그럴 수가요?” 
 
“1961년에 편찬된 리희승의 《국어대사전》에 ‘뽀뽀’가 처음으로 올랐으니 그렇게 말할 수 밖에. 그 전의 사전들엔 다 없었으니까.” 
 
유정생가는 아니나 다를가 대문을 꾹 닫고 있었다. 
 
“이런, 장사나 해먹겠다.” 
 
내가 투덜거리는데 그녀가 담장 옆의 바위돌을 가리켰다. 
 
“저거라도 딛고 들여다보세요.” 
 
생가는 안방과 대청마루, 사랑방, 봉당, 부엌, 고간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자 형태였다. 조카 김영수와 한때 유정이 가르쳤던 금병의숙 제자들의 고증에 의해 복원된 것이란다. 
 
독특하게 ‘□’자 구조의 집을 짓고 기와집 골격에 초가를 얹었던 것은 당시 헐벗고 굶주렸던 사람들로부터 내부를 감추고 또 외부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유정이네는 경성에도 백여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천석지기 지주였다. 후날 집안을 도맡아 관리하던 유정의 형이 주색잡기로 다 말아먹기는 했지만. 
 
마당에는 《동백꽃》의 주인공들인 점순이와 내가 닭싸움을 시키는 조형물이 비치되여있었다. 남자는 청석돌 우에 앉아서 지켜만 보는 반면 녀자 점순이는 자기네 닭을 부둥켜안고 기어이 상대 닭을 이기려는 악착같은 모습을 보인다. 실소가 저절로 터지게 하는 조형물이였다. 
 
“김유정은 어떤 사람이였나요?” 
 
내가 담에서 내려오자 그녀가 물었다. 
 
“오면서 내내 궁금했어요. 장가는 갔는지… 자식은 있는지…” 
 
“작가로 말하면 천재, 사람으로 치면 스토커.” 
 
“스토커요?” 
 
“왜, 작가도 작가이기 앞서 사람이야. 동물적 본능을 가진 사람이라구. 작가로 성공해서 가려져서 그렇지 유정은 스토커라도 아주 악랄한 악질 스토커라 할 수 있지.” 
 
“헐~” 
 
유정이 21살 나던 무렵, 그러니까 1928년이 되겠다.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그가 어느 날 종로 어느 목욕탕 앞에서 목욕을 금방 마치고 문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닮은 어떤 녀자를 만났다. 유정보다 세살 더 많은 기생 박녹주였다. 
 
박녹주 하면 판소리계의 명창으로 김소희, 박송희, 조순애, 장영찬, 박초선, 성창순, 성우향, 한농선, 일일주, 조상헌, 일옥천 등 굵직굵직한 예능보유자 제자들을 길러낸 명창 중의 명창임은 다 알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큰 획을 그은, 그것도 당대 슈퍼스타인 박녹주를 김유정이 감히 첫눈에 반해버린 것이였다. 열혈 21살이라는 나이에. 
 
그 해 봄, 조선극장에서 8도 모창대회에 박녹주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정은 수소문 끝에 그녀의 대기실에 찾아갔다. 거기서 대화를 나눠본 유정은 더욱 깊이 빠지게 되고 이튿날부터 하루가 멀다 하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레코드판에서 박녹주의 사진을 뜯어내서는 그 밑에다 “당신을 련모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십시오.” 라는 편지까지 도착하자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박녹주는 드디여 행랑어멈을 시켜 유정을 데려오게 하였다. 앞에 앉혀놓고 “학생은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지 다른 생각을 하면 아니된다.” 하고 자신은 기생신분임을 내세워 타일러보았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먼 유정은 그냥 편지를 가져다 넣었다. 했으나 아무리 편지를 넣어도 답이 없자 유정은 박녹주의 집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기에 이른다. 이를 보다 못한 박녹주의 동생 박태술이 유정을 자기 방으로 데려갔고 둘은 그걸 계기로 친구로 되였다. 유정으로서는 태술을 핑게로 박녹주의 집에 드나들 수도 있고 편지도 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하는 거요. 보료 우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김유정이 박녹주를 죽이겠다고 협박편지를 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였다. 박녹주를 부르는 칭호도 급속히 달라져갔다. 처음에는 ‘선생’이라 하더니 ‘당신’이라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 불렀다. 
 
1929년 5월 2일자 《매일신보》에 박녹주가 아버지의 학대와 조선극장 지배인이였던 신모씨와의 애정문제로 자살소동을 벌였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였다. 신문을 읽은 김유정은 연희전문학교부터 자퇴하고 다짜고짜 박녹주가 입원중인 병실을 찾아가서 자신과 결혼하자고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러나 박녹주의 대답은 의외로 단단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남자를 믿을 수 없다. 그러니 기대 말고 돌아가라.” 다음날 박녹주의 집앞에서 방성통곡하는 김유정의 모습이 목격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남자에 대해 믿을 수가 없다던 박녹주가 원산의 부호 남백우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유정은 아,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였구나 하고 개탄하더니 본격적인 스토킹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를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섬뜩했다. 그 편지는 잉크가 아닌 피로 쓴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끝내 유정이가 박녹주가 타고 있던 인력거에 접근해 몽둥이로 기절시켜 랍치하려 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이에 식겁한 녹주가 다음날 직접 유정을 불러 “나는 나이도 돈도 따지지 않습니다. 단지 당신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내 잘못이란 말입니까?” 라고 한소리 하여 돌려보냈다. 그게 박녹주가 유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라고 한다. 
 
유정이는 그 때부터 술을 마셨다고 문우들이 회억했다. 그리고 터질듯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박녹주가 김유정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박녹주가 유정을 걷어차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작가 김유정이 있었을 건가. 
 
그런데 유정은 또 한사람의 녀자를 만난다. 박봉자라는 유정이보다 한살 어린 녀자다. 
 
1936년 봄, 유정은 《녀성》이라는 잡지사로부터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가> 라는 원고청탁을 받는다. 
 
 
 
“…나는 숙명적으로 사람을 싫어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 버릇이 결국에 말 없는 우울을 낳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페결핵입니다. 매일같이 피를 토합니다. 나와 똑같이 우울한 그리고 나와 똑같이 피를 토하는 그런 녀성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초가삼간 집을 짓고 한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단 사흘만 깨끗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라고 썼다. 그런데 그 옆에 나란히 실린 문장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어떠한 남편을 맞이할가> 란 박봉자의 글이였다. 
 
 
 
“…장래의 내 남편을 리해 많은 문학가라고 생각을 고쳤습니다. 문학가는 세상을 잘 알고 사람을 잘 압니다.” 
 
 
 
몸과 마음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유정은 그 글을 보자 대뜸 매료되였다. 낯도 코도 모르는 박봉자에게 유정은 우발적으로 련모한다는 편지를 쓰게 되였고 답장이 없자 박녹주에게 썼던 편지보다 더 절절한 고백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답장이 없자 유정은 서른통도 넘는 혈서까지 써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다음 달 6월 1일, 유정은 신문소식란에서 이화녀전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가 된 박봉자가 유정과도 친한 친구 문학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했다는 기사를 읽고 큰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박봉자는 또한 시인 박용철의 녀동생이기도 했다. 
 
결국 유정은 가족들의 권유로 고향 춘천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야학을 꾸리면서 들병이들과 어울리며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아니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에 의해 야학도 얼마 못 가 강제 해체되고 유정이는 륵막염에 페결핵, 치질까지 더 심해져 움직이기도 어렵게 된다. 
 
“그렇게 죽었나요? 김유정은?” 
 
“아니. 고향으로 돌아와서 미친듯이 창작하였는데 죽기 전까지 10개월 사이 무려 8편의 소설을 써내게 돼. 정말로 놀라운 열정이지.” 
 
“몸이 배겨내나요? 강철이라 해도 안되겠어요.” 
 
1937년 다섯째누이 김유흥의 과수원집 토방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유정은 휘문고보 동창이자 소설가인 절친 안회남에게 쓴 편지를 끝으로 3월 29일 새벽 달빛 속에 하얗게 핀 배꽃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한다. 
 
 
 
“필승아, 나는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를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译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의 몸이다. 돈이 생기면 우선 닭 30마리를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삶을 다할 때까지 박녹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는지 김유정의 방안에는 “녹주, 너를 련모한다”는 혈서가 붙어있었다. 
 
김유정의 장례식을 치른 날, 술에 만취한 안회남이 박녹주의 집에 쳐들어가서는 “당신이 박녹주요? 내 친구는 당신이 죽인 거요.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갔단 말이오!” 원망했고 박녹주 또한 김유정에게 신물이 날 대로 났음에도 불구하고 “김유정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하여 내가 슬하에 자식 없이 살았나 보다. 손이라도 한번 잡게 해줄 것을…” 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충격이예요.” 
 
“뭐가?” 
 
“김유정의 사랑이 너무 기구해서요.” 
 
“운명인 거지.” 
 
“임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가요?” 
 
“만나봤자 또 차이겠지.” 
 
“그러면 또 스토킹을 해야겠네요. 이번엔 손목을 그을가요?” 
 
“손목 가지고 되겠나. 목 정도는 내놓아야지.” 
 
“하필이면 무정한 두 박씨를 만나가지고. 쌤은 이후에라도 박씨들과 놀지 마요.” 
 
“하하하하.” 
 
그 바람에 나는 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김유정, 박무정.” 
 
“덕분에 한국은 천재소설가 한명을 얻었잖아.” 
 
“사랑이란 게 뭘가요? 뭔데 이렇게 고통스러울가요?” 
 
“사랑은, 음~ 사랑한다는 것은 다시 태여난다는 것이지. 김유정이처럼!” 
 
 
 
 
 
강덕수라는 사람
 
점심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였다. 그렇다고 문이 땅땅 잠겨있는 문학촌을 더 둘러볼 멋도 없는 일. 내다보니 뉘엿하게 휘여진 앞산 등허리로 구불떡하니 길이 나있다. 
 
“올라가볼가?” 
 
우리는 천천히 이 말 저 말 하면서 올라갔다. 
 
바람이 고왔다. 앞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잦나무에 걸터앉았다가는 살사리꽃을 흔들어놓고 우리의 발치 앞에서 살포시 잠들어버린다. 여기는 강원도라 내가 살던 연변과 기온이 거의 비슷하다. 
 
한참 올라가니 왼손편으로 무우밭이 나왔다. 무우 옆엔 배추도 심었는데 그 옆엔 연변에서는 못 보던 농작물도 있었다. 
 
스쳐지나려는데 그녀가 채소밭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는 것이였다. 
 
뭐가 있길래? 
 
나는 들어가지 않고 채소밭 어구에서 기다렸다. 
 
담배 한대 태우고 있자니까 그녀가 나를 보고 오라고 손짓한다. 그녀의 손에는 방울도마도 몇알 쥐여져있었다. 빨갛게 잘 익어있었다. 시월도 다 가는데 방울도마도라니. 그래서 보니 그녀의 뒤에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그녀는 하우스 안에 들어갔다 나왔던 것이다. 
 
“이거 드셔보세요. 맛 괜찮아요.” 
 
나는 잽싸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사람이 없어요.” 
 
없기는.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없다던 사람이 발에 군용 가죽구두를 신고 밭 아래쪽에서부터 우리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밭주인인 것 같았다. 나이는 어림잡아 고래희. 
 
“저게 어째 내 눈에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옷도 입고 구두도 신고.” 
 
“안경도 걸었는데요.” 
 
“모자도 비싼 거 썼구만, 전모자.” 
 
“아까는 없었어요.” 
 
“귀신은 아니겠지?” 
 
“귀신이 왜 낮에 나와요.”
 
“그럼 천사겠군.” 
 
“저렇게 못난 천사도 있어요?” 
 
“그렇다면 사람이 맞네.” 
 
“어디서 나타났을가요?” 
 
“뒤간에 숨어있었겠지.” 
 
“있네요, 사람이…” 
 
그 사람이 앞에 와 서자 나는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입안에 방울도마도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므로 인사말은 생략했다. 
 
“어디서 온 손님들이오? 난 이 밭 주인인데 강덕수라 한다오.” 
 
갱핏한 체구를 가진 그 사람은 선명한 얼굴에 꽤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다. 넉넉한 웃음을 짓는 표정이 인상에 좋았다. 
 
“서울에서 왔는데요, 지나가던 걸음에 무우밭을 보고 들어왔습니다. 주인장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저기 도마도도 있고 머루도 있으니 맘껏 드시오. 뭐 필요한 것 있으시면 말만 하시오. 얼마든지 드리리다.” 
 
“네. 말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점심식사들은 하셨소?”
 
“아직요. 방금 문학촌을 돌아보고 시간이 남았길래 여기로 올라왔습니다. 좀 이따 내려가서 점심 겸 저녁을 먹어야죠.” 
 
“그랬구만. 그래 무슨 좋은 구경들은 하셨소?" 
 
“어제는 ‘소양강처녀’를 보았구요, 오늘은 ‘김유정’을 만났었습니다. 그런데 김유정문학촌은 왜 개방을 안하는 겁니까?” 
 
“수지가 안 맞으니까. 찾아오는 손님도 없는데 인건비를 감당해낼 수 있겠소? 허허허.” 
 
“책이라도 한권 사들고 가려 했더니… 아쉽네요.” 
 
“오늘만 봐도 그렇잖은가. 손님이 달랑 두명.” 
 
그러더니 나한테 채소밭 가운데 있는 정자처럼 생긴 오두막을 가리킨다. 
 
“그런데 술은 좀 마실 줄 알란가? 저기 내가 담궈놓은 과실주랑 많은데이?” 
 
“많이는 못 마시는데 조금은 마실 줄 알아요.” 
 
내가 말하려는데 그녀가 앞질러 말해버렸다. 
 
“그럼 됐네. 젊은 처자는 거기서 안주감이나 좀 갖춰오게나.” 
 
그의 안내 대로 오두막정자로 들어가보니 취사하는 곳까지 다 마련돼있고 제법이다. 상도 장방형 탁자에 긴 의자 두개, 둘러앉으면 손님 열명이라도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른 안주 둬가지에 도마도, 오이. 술상은 간소하게 차려졌다. 오두막 옆으로는 채소를 심지 않은 빈 공터도 있었는데 달래도 보이고 냉이도 보였다. 벌통도 몇개 있었다. 
 
“저기 저 잦나무가 있는 곳까지 나의 밭인데 한헥타르는 족히 되지.” 
 
“많네요. 채소는 심어서 파는가요?” 
 
“더러는 재미로 심고 대부분은 다 나눠준다오. 친구들이 잘 놀러 오거든.” 
 
그의 집은 할아버지 적부터 이곳에 살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곳에 땅도 많고 정도 붙어 아버지가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와 신선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인가 저 길 건너편에 서울사람이 내려와서 10억 주고 땅을 사더니 철조망만 턱 쳐놓고 풀만 잔뜩 웃자래워놓았지 뭐요. 뭐 거기다 무슨 펜션을 짓는다나 뭐라나.” 
 
말할 때 그의 톤은 매우 낮았는데 귀를 거의 갖다대야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오면서 볼라니까 배추밭 옆에 포도넝쿨이 있던데요?”
 
“아, 그거, 그게 포도가 아니라 머루라오. 머루농사를 지어서는 다 와인을 담궈버리지. 내가 담근 와인을 한번 마셔볼라나?” 
 
그는 과실주도 내놓고 머루와인도 꺼내놓았다. 과실주는 35도짜리 담금주로 했고 와인은 순수한 머루로써 알콜을 한방울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과실주보다 머루와인이 더 맛있었다. 농도가 짙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신 뒤끝이 산뜻하니 가벼웠다. 생각 같아서는 실 것 같았는데 단맛이 훨씬 강했다. 
 
“오늘 그걸 다 마시고 가게.” 
 
그는 술을 못 마신다고 했다. 대신 담배는 즐겼다. 내가 피우는 담배를 건네주자 그는 신기한듯이 이리저리 비춰보는 것이였다. 
 
“중국담배인데 ‘로빠둬’라고 한답니다. 한국담배보다 좀 독할 겁니다.” 
 
“어? 그러면 교포인가?!” 
 
“네. 중국 연변에서 왔어요.” 
 
“아, 그러길래. 말투가 우리 강원도랑 많이 닮았소. 여기 춘천도 남춘천은 말투가 좀 달라. 북춘천이 이북과 비슷하지. 그런데 참으로 용하이. 연변사람이 김유정은 어찌 알고 찾아왔을가?” 
 
“제가 문학에 좀 관심이 있어서요. 이런 데를 잘 찾아다닙니다.” 
 
“오~” 
 
그제서야 그는 뭐가 리해가 되는지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로빠둬’를 피우면서 그는 연신 담배맛이 좋다고 극찬했다. 담배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향이 입안 전체에 퍼지고 있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런 담배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했다. 
 
술 마시는 사이 그녀는 방울도마도를 한번 더 뜯어왔다. 술이 한 반병 쯤 내려갔을가. 내가 물었다.
 
“혹시 김유정을 만나보신 적 있으신가요?” 
 
“내가 태여났을 땐 김유정이 이미 돌아간 뒤이니까 나야 못 보지. 우리 큰형은 봤다고 그러더군.”
 
“그렇겠군요. 김유정이 37년도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큰형 말로는 김유정이 체대도 좋고 날파람도 있었다오. 우리 큰형보다 썩 웃또래였는데 웬만한 사람하고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더군.” 
 
“36년도였겠군요. 박봉자와 헤여지고 나서요.” 
 
“박봉자인지 박녹주인지는 모르겠고 36년도는 맞는 것 같소. 서울에서 내려온 김유정이 금광사업에 손을 댔나 봐요. 김유정의 형은 부화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거의 탕진한 상태였다지. 그 때가.” 
 
“금광도 했었나요? 야학을 한 건 아는데…?” 
 
“한번은 김유정이 저 아래 주막에서 들병이와 술을 마시는데 이웃마을 쏠쏠이패들이 내려왔나 봐요. 그 주막을 접수하러. 그 주막 원래 다른 마을 건달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김유정이 오면서 자리를 내줬나 보더라구. 그래서 김유정이를 내쫓고 자기네가 차지하려는 거였지.” 
 
“싸움이 일어났습니까?” 
 
“일어나다마다. 김유정이가 2층에서 술을 마시는데 아래층에서 몹시 부산하게 왁자지껄 떠들더라요. 그래 도저히 술을 못 마시겠어서 좀 조용히 하라고 여기 니들만 있는 게 아니라고 달랬다는가. 그런데 이놈들이 와르르 마당에 몰려나가더니 김유정 보고 내려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러댔다겠지. 원래 사람 싫어하고 말하기 싫어하는 김유정은 싸우기 싫었지만 하도 고아대니 안 나올 수 없었다고. 보니까 이쪽은 김유정 혼잔데 저쪽은 저그만치 아홉명이였다나.” 
 
“1대 9요?” 
 
“김유정은 싸우기 싫었으니까 돌아가라고 달랬다오. 그런데 저쪽에선 수자를 믿고 그냥 막 밀고 들어왔다지 뭐요. 순간 화가 난 김유정이 펄쩍 뛰여올랐는데, 순식간에 여섯명을 밟으면서 걷어찼다는게 아니겠는가. 함께 온 동료 여섯명이 쓰러지는 것을 본 나머지 세명이 뒤돌아서 내빼려는 걸 김유정이 불러세웠다오. 너부러진 놈들을 데리고 빨리 꺼지라고. 다시는 남이 술 마시는데 와서 행패 부리지 말라고 점잖게 타일렀다지.” 
 
“김유정이 그렇게 잘 싸웠나요?” 
 
“나는 못 봐서 모르지만 우리 큰형이 본 바로는 그렇다고 했소. 그만큼 동네에선 김유정한테 대들 자가 없었다고 했소.” 
 
그럴 수도 있으리라. 박녹주한테 했던 행태만 보더라도 짐작은 가는 일이였다. 물론 과장된 전설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김유정은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였다. 
 
“만석부자집 아들이라 받들려 자란 것도 있겠지. 누가 감히 쳐다나 봤겠소.” 
 
“안하무인 격으로 자랐겠네요. 제 하고 싶은 걸 다하면서.” 
 
“옛날 잘사는 집 자제들은 버릇 없는 건 있었지. 지금도 그렇지만.” 
 
말하다 보니 머루와인 한통이 거의 굽나고 있었다. 그녀도 그의 이야기에 심취되여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술은 걱정 마시게. 여기 가득하니까. 갈 때 갖고 가도 돼요.” 
 
그러면서 또 한통 꺼내놓는다. 이러다가 오늘 서울로 돌아 못 갈지도 모르겠다. 취기가 서서히 피여오른다. 
 
“적게 마셔요.” 
 
그녀가 내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요, 춘천 하면 작가가 또 한사람 있지 않습니까. ‘춘천의 들개’요. 혹시 만나신 적은 있으십니까?” 
 
내가 술잔을 들다 말고 물었고 강덕수씨는 담배 피우던 손을 놓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외수도 아는가? 암, 만나보다마다. 외수하고는 너나들이 하는 친구지. 허허.” 
 
“그래요?!” 
 
나는 바짝 귀맛이 당겨 몸을 당겨 다가앉았다. 
 
“그러엄! 외수가 화천으로 간 다음부터 못 만났으니 못 본 지 꽤 됐구만. 그 녀석도 참 재미있는 친구지.” 
 
“부인 전영자씨도 글을 잘 쓰던데요?” 
 
“부인은 만나 못 봤고 그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였나 하는 경위는 알고 있지.” 
 
“얘기해주세요.” 
 
그녀가 흥미가 당겨했다. 녀자들이 남의 련애사에 관심이 많은 건 알아줘야 한다. 
 
“외수 원래 들개였어요. 너무 가난해서 들개처럼 쏘다녔다고 붙여진 별명이야. 외가에서 자랐다고 외수고. 들개는 아무거나 주어먹지. 언 똥도 가리지 않고 말이야. 진짜 외수는 밥을 얼려서 덩이로 만들어서 목숨을 연명했던 적도 있었다오.” 
 
“들었습니다.” 
 
“외수가 소설가로 뜨고 나서 잔뜩 기고만장해졌을 때였지. 어느 날 음악다방에서 잔뜩 폼을 잡고 앉아있는데 어떤 아가씨가 들어왔다는 거요.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라나 뭐라나. 외수는 아무 고려도 안하고 그 아가씨한테 다가갔다오. 가서는 ‘너 어차피 나를 좋아할 것 같은데 지금부터 좋아해주라’ 했다는 거지 뭐요. 아가씨가 놀라 자빠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거지라도 어디서 저런 상거지가… 목욕도 잘 안하지. 머리라는 게 텁숙하지. 그 아가씨가 전영자여.” 
 
“듣자니 집장촌에서 기생들과 살았다면서요. 거기서 터득한 기술이 거시기를 서라면 서고 가만히 얌전하게 있으라 하면 얌전하게 있는 거라면서요?” 
 
“그건 외수의 희떠운 소리고. 대마초도 피웠구 기생들한테 얹혀살았던 것도 사실인 건 맞는 것 같소.” 
 
“그래서 혼외자 풍파도 생긴 거군요.” 
 
“내가 외수를 만난 건 서울의 한 식당에서였지…” 
 
강덕수씨가 그들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히죽이 웃고 있는 모습이 사뭇 즐거운 표정이였다. 
 
하루는 강덕수씨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바로 옆좌석에서 어떤 꾀죄죄한 놈이 친구 한놈 앞에 앉혀놓고 하늘이 낮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듯, 래일이면 대통령이라도 될듯 그렇게 큰소리를 쳐대더라는 것이다. 그 소리가 어찌나 높은지 강덕수씨는 귀가 다 아플 정도였다고 했다. 
 
참다 못해 강덕수씨가 “야, 좀 살랑살랑 말하면 안되겠냐?” 했더니 그 꾀죄죄한 놈이 “이게 어디서 굴러온 개뼉다구가 남이 술 마시는데 이래라 저래라야!” 하면서 손에 들었던 숟가락을 탕 내던지더란 것이였다. 그 때까지만도 강덕수씨는 리외수가 술만 마시면 뭔가 내던지는 버릇이 있다는 걸 몰랐단다. 
 
“이 새끼가?!” 
 
강덕수의 주먹이 리외수의 얼굴 정면으로 날아갔다. 
 
리외수가 벌떡 일어섰다. 강덕수도 일어섰다. 다음 둘은 밖으로 나갔다. 
 
말도 없이 둘은 원투와 훅을 몇주먹씩 나눠가졌고 깨진 쪽은 리외수였다. 
 
얼굴의 피를 닦고 나서 리외수가 겸상을 요청했다. 
 
“너 주먹이 세다. 내 인정한다. 그런데 넌 누구냐? 난 리외수라고 한다. 우리 친구로 사귀자.” 
 
“수구동 강덕수다. 너 빼빼 마른 놈이 깡다구는 좀 있더구나.” 
 
“앞으로 대한민국 소설계를 평정할 대소설가님을 친구로 사귀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 함부로 주먹질할 생각은 하지 말고. 내가 지금 굶어서 몸이 안돼 그렇지…” 
 
“한주먹도 안되는 게 입은 살아가지고…” 
 
“너 우리 집 가서 살자. 우리 집에 쌀 많다!” 
 
알고 보니 리외수는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견습 어린이들>이 당선되였던 것이다. 그 상금으로 쌀 몇가마니 사놓고 너무 격동되여 친구와 축하파티를 즐기던 중이였던 것이다. 쌀가마니를 앞에 놓고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몰라하는 리외수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것만 같았다. 
 
“이 기쁜 날에 너한테 얻어터진 건 억울하다만 그래도 쓸 만한 친구를 만난 것 같아서 마음은 즐겁다. 너 앞으로 이 리외수가 있는 한 배를 곯을 걱정은 안해도 될 것이다. 나만 굳게 믿어라.” 
 
그 때가 지지리도 배고팠던 1972년 겨울이였단다. 
 
“재밌네요. 호호호.” 
 
그녀가 손벽을 짝 쳤다. 
 
나도 웃으며 마지막 잔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행주처럼 말라비틀어진 놈이 맥아리 하나도 없더군. 허깨비 같았소. 내가 사정을 많이 봐줬지라.” 
 
얘기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세시를 넘어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이젠 일어나 가봐야겠는데요.” 
 
“좋은 얘기도 듣고 맛있는 와인도 먹고 잘 놀았습니다.” 
 
강덕수씨가 따라나왔다. 
 
“무랑 배추랑 뽑아줄가? 들고 갈 텐가?” 
 
“못 들고 가요. 대접받은 것만도 황송한데. 래년에 다시 와서 그 때 많이 가져갈게요.” 
 
그녀가 손사래를 쳤고 나는 넌지시 강덕수씨를 향해 물었다. 
 
“혹시 여기 일군이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제가 농사일은 잘합니다.” 
 
“일군은 필요없고 나눠주는 재미로 사는 것이라오. 허허허.” 
 
강덕수씨와 나는 만난 기념으로 사진 한장을 남겼다.  
 
“들어가십시오.” 
 
“그래, 래년에 또 봄세.” 
 
가다가 돌아보니 강덕수씨는 인상 좋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싣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춘천닭갈비
 
춘천 하면 대표음식이 막국수와 닭갈비다. 연변랭면을 먹다가 한국에 오니 한국국수는 당최 밍밍해서 못 먹겠다. 그래서 대표음식이고 뭐고 막국수는 빼버렸다. 
 
닭갈비는 볶음료리로, 토막낸 닭을 포를 뜨듯이 도톰하게 펴서는 고추장, 간장, 마늘, 생강 등으로 양념을 재웠다가 고구마, 당근, 양파, 파, 떡, 양배추 등의 재료와 함께 철판에 볶아먹는 료리이다.
 
지금의 중앙로 2가 18번지에 판자로 지은 자그마한 장소에서 돼지고기로 영업을 하던 김영석씨가 1960년의 어느 날 돼지고기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대신 닭을 사용한 것이 원조였단다. 닭을 발려서 양념하여 12시간 재워 숙성시킨 다음 닭갈비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춘천에는 양계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서 닭고기 만큼 싼 것도 드물었다고. 1970년대 들어 번화가 명동의 뒤골목을 중심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여 휴가 나온 군인들과 대학생들로부터 값 싸고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각광을 받았다고. ‘군인갈비’, ‘대학생갈비’, ‘서민갈비’ 등 여러가지로 불리웠다고. 
 
춘천닭갈비는 과연 그 곳의 대표음식이라 불리울 만했다. 먹어보니 양배추와 배합이 그렇게 잘 맞을가 싶었다. 춘천에 왔다가 닭갈비를 안 먹고 가면 춘천에 안 와본 거나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에 이 글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됐다. 약속한 분량을 벌써 많이 넘어섰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이 부분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춘천에 와서 비록 살아있는 ‘소양강처녀’ 윤기순씨는 만나보지 못했지만 김유정과의 대화가 즐거웠고 강덕수씨를 알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거기다 ‘춘천닭갈비’를 ‘참이슬’에 적셔 배부르게 먹었으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없다. 

출처:<장백산>2019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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