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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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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해연: 꿈꿀 권리(시평)
2019년 07월 08일 14시 27분  조회:370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꿈꿀 권리
 
리해연
 
 
 
도시도 농촌도 피기를 잃은 사람처럼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채 희부옇게 변해버린 계절, 무질서하게 피여오르는 매연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운 난방의 계절이다. 뜨거운 커피의 온기마저 순식간에 빼앗아버리는 이 랭혹한 계절, 동면에 가까운 일과를 보내던 어느 날 나는 김동진 시인의 시를 읽고난 뒤 내 육신에 다시 활기가 차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굳어버렸던 뇌가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고 주체할 수 없는 힘에 끌려 저도 모르게 컴퓨터를 마주앉아 자판을 두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세영 시인에게 락엽은 생의 끝자락이였고 리오덕 시인에게 락엽은 죽음이였다면 김동진 시인에게 락엽은 재생 그 자체였다. 2인칭 시점의 이야기 형식으로 된 <락엽의 길에는 부서진 꿈이 없더라>는 독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화자는 독자에게 독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화자는 독자로서의 ‘너’-‘락엽’이 가는 ‘길’을 ‘묻지 않으련다’라고 반복하면서 그 ‘길’이 도대체 어떤 ‘길’이기에 이토록 완강히 거부하는지 의문을 자아냈다. 그리고는 바로 ‘길’이라는 명사의 반복으로 ‘길’의 정체를 밝혔다. 그 ‘길’은 “우수수 떨어지며 날”렸다가 바람에 치여 “마구 뒹굴며 밟”혔다가 “후미진 곳에 두툼히 쌓”였다가 “천천히 부서지고 썩”어가는 말 그대로 ‘락엽’의 ‘일생’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면 화자는 왜 이토록 ‘락엽’이 가는 ‘길’을 ‘묻지 않’겠다고 했는가? 그것은 “락엽의 길”은 “억겁의 흙에로 다가서고 / 만년의 뿌리를 찾아가는” 로정이였고 이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재생으로 향해 가는, ‘꿈’이 있는 ‘길’이였기 때문이다. ‘락엽’은 그토록 힘든 세월의 모대김 속에서도 ‘꿈’을 잃고 “슬퍼한 적 없”이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하여 화자는 “순리를 따르”려는 ‘락엽’의 삶에 대한 강직한 태도를 긍정하고 그 뜻 역시 바람직하다고 여기기에 아무 것도 “묻지 않으련다”고 반복하면서 자신도 “락엽의 길”을 따라 걸어가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독자와 화자는 완전한 하나가 되고 시인은 독자로서, 또 화자로서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와 자신이 지향하는 인생의 로정을 시 속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억새도 찬란한 꿈이 있다>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억새’는 돈과 명예를 쫓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좀비같은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속세를 벗어나 “청빈으로 살아온 올곧은 마음자락 / 저 푸른 하늘벽에 기대고 싶어 / 스스로 아픈 뼈마디 뽑아올리고 / 가까스로 기인 목 추켜”들며 “고요가 락엽처럼 깔린 골안”-“후미진 곳”에 터를 잡고 “누렇게 퇴색한 잡초와 이웃하여”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억새’는 절대로 현실을 도피하거나 자아를 버린 적이 없다. 오히려 “해달을 그리는 붓이 되”고 “흰갈기 날리는 백마가 되”며 “생명을 노래하는 기발이 되”리라는 “찬란한 꿈”을 갖고 있다. 부귀공명을 탐하는 현실의 속인들과 달리 처사处士의 풍모를 억새라는 이미지를 빌어 표현한 이 시는 부동한 침묵의 미학에 람루와 기아를 초탈하는 안빈락도安贫乐道의 청빈사상으로 도고한 삶을 살면서 동시에 자아완성을 실현하려는 시인의 삶의 태도가 보여지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시인이란 무엇이고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하는 물음에 던지는 대답이기도 하다.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이고 시인마다 시를 쓰는 리유가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시인은 현실이 싫어서, 못마땅해서,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시를 쓰고 이 결핍이, 이 고독이, 이 욕망이 시 쓰기의 동기로 된다. 물론 현실을 수용하면서 돌아가는 세상에 비위를 맞춰가며 살아가는 시인들도 많다. 그러나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훌륭한 시인들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살하거나 현실에서 도망가는 길을 택했고 이 도망의 리면에는 현실에 대한 부정과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다. 
 
<하얀 천사를 기다리는 겨울나무> 역시 꿈을 꾸는 어떠한 대상을 그린 작품이다. 시의 시작부분에서 시인은 중국의 광활한 령토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서장사람들’을 통해 ‘겨울나무’를 련상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겨울나무’는 절대로 서장사람들의 상징이 아니다. “살을 에이는 칼바람의 숲을 헤치고” 꼿꼿이 서서 “멋스러운 동작”으로 “땅보다 먼저” 하늘에서 날아내리는 “하얀 천사”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겨울나무’, 그것은 바로 ‘백모시’를 입은 우리 민족의 상징이였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멋스럽다’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것이기도 하고 우리 민족의 리념과 정서가 배양한 그 어떤 미적 요소가 아닌가. 시인이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우리 민족의 숨결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작품임이 확실하다. “얼어붙은 겨울하늘과 / 무성의 대화를 나누면서 /  정감소통의 꿈길을 걸어가는” ‘겨울나무’-우리 민족은 “밤이나 낮이나 오직 한 생각”- “이 겨울을 함께 지낼 / 하얀 천사를 기다리는 것”만 할 뿐이다. 여기서 “얼어붙은 겨울하늘”, “무성의 대화”,“정감소통의 꿈길”, 이것들의 내면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가? 수많은 상상을 던져주고 있다. “백명의 독자에게는 백명의 햄리트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머지는 독자들의 해석에 맡기도록 하겠다. 
 
우의 시가 우리 민족의 삶의 태도와 미래에 대한 지향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였다면 <춤추는 칼의 노래-우리 민족의 <칼춤>을 보고>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무용인 칼춤을 눈앞에서 보는듯 생동하게 묘사하면서 그 속에 민족적 절개를 담아내고 있다. 과거의 정형시나 현대의 자유시에서 행과 련은 기본적인 리듬을 표출하는 방식이다. 과거의 정형시는 외형적으로 행과 련을 통해 리듬감을 조성하였다면 현대의 자유시는 비록 과거의 행과 련의 정형적인 외형적 형식을 타파하였지만 그 대신 내적 형식 즉 내재률로 리듬감을 조성하고 있다. 음악성을 추구하는 시는 소설이나 산문처럼 서두와 결말이 하나로 이어진 완결된 형태의 이야기 문장이 아니라 마디마디로 느낌을 토해내는 감정적인 문장이기 때문에 행과 련마다 독립적인 형태를 취하며 그 속에는 리듬이 있고 호흡이 있다. 이 시는 정형시의 요구에 따라 행과 련을 나누고 있고  3.4 , 4.4조의 음수률을 기본형식으로 하고 있다. 즉 형식상으로 볼 때 정형시의 형식과 조선민족의 전통시가의 기본 형식을 따르고 있고 내용상으로 볼 때 민족적 정서가 다분한 작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시는 현대시의 향보다는 민족전통시가의 향이 짙은 작품으로 시인이 짙은 민족적 정서를 기본 바탕으로 하여 음악성, 표현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노력이 충분히 엿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돌아와 시인은 <결코 절망은 없다>를 통해 또다시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에서 태여나 자연을 모방하면서 진화하고 발전한 인간이지만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망으로 오래동안 자연을 파괴하여왔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정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고 이로써 자연과 인간의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인은 “겨울의 대문이 열렸으니 / 이제부터 낮이 짧아지고 / 밤이 길어지”는 것은 자연법칙이니 당연한 일이고 “한동안 밤이 길다고 하여 / 괜히 슬퍼할 것도 없고 /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이 밤도 꿈길 가듯이 / 희망의 푸른 손가락은 / 달빛 드리운 창가에서 / 밤하늘에 초롱초롱한 / 별을 헤”다 보면 긴 밤이 지나고 낮이 길어지는 때가 오니 “결코 절망은 없다”고 하였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화가 있으면 복이 따르는 법이고 복이 오면 화도 따라오는 게 아니겠는가. 겨울의 긴 밤이 지나면 새벽이 찾아오고 낮이 길어지는 여름도 오기 마련이니 꿈을 가진 자라면 그 꿈을 위해서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시인의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다.  
 
이상으로 김동진 시인의 시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의 시들은 어느 하나도 복잡한 창작기법이나 화려한 어휘로 독자들을 현혹시키려 하지 않았고 소박한 언어로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표현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동시에 시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꿈을 가질 것을, 그 꿈을 위해서 강인하게 살아갈 것을 호소하고 있다. 바슐라르가 “물질적 상상력을 통한 언어의 마술이 그림과 조각과 판화에 또 다른 창조의 빛갈을 입히고 시와 소설의 새로운 초월적 깊이로 독자들을 초대하여 몽상 속에 존재의 모순과 통일성을 변증법적으로 드러내며 미술, 문학, 몽상에 대해 펼쳐내는 단상들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저 했”듯이 시인은 시를 통해 꿈꿀 권리가 있고 독자 역시 시인을 통해, 그의 시를 통해 꿈꿀 권리를 갖는 것이다.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시인도, 따라서 독자도 자아를 위한, 나아가 타자를 위한 오색찬란한 꿈을 꿀 권리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출처:<장백산>2019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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