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마시는 녀자
연서
1
녀자는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와인을 마실 때면 녀자는 항상 미끈한 다리를 테이블 우에 제멋대로 올려놓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곤 했다. 그게 가장 부드럽고 편하게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자세다. 하지만 지금 와인바에서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고 있는 녀자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다소 진지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한잔 한잔 천천히 넘기고 있는 모습이 기품 있으면서도 근사했다.
사실 녀자는 와인을 마시는 것보다는 향과 여운을 맡는 데 큰 의미를 두곤 했는데 마치 새로운 자신의 령역을 만나보는 필사적인 탐구 같아보였다. 그러니까 사실 녀자는 와인을 마신다기보다는 향기에 흠뻑 취해 또 다른 경지로 향하고 싶었던 것이다. 넉넉한 외인잔 어구에 코끝을 대고 빙글빙글 잔을 움직이면서 와인의 고유한 향기가 녀자 후각을 파고드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유독 맛과 향이 깊은 레드와인을 고집했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르크마개를 따면 어김없이 뿜어져나오는 와인의 향기, 후각 만큼이나 원초적 욕구를 자극하는 그 특유의 마성적 향기가 참 좋았나 보다. 마치 아구리에서 뿜어져나오는 향긋한 향기가 요정들로 둔갑하여 너울너울 춤추면서 절도 있게 그녀의 후각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와인에 푹 빠진 녀자는 마트에서 새로운 레드와인을 발견하기만 하면 신대륙을 발견한듯 경이로운 눈빛으로, 타인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비밀스레, 다치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꽃망울을 대하듯 정성스레 맞이했다.
그녀를 사모하는 한 남자가 미리 그녀가 술을 즐긴다는 정보를 얻어내고 일부러 데이트 장소를 고급진 일식집으로 잡았다. 주된 술이 청주였으니 당연히 녀자는 구미가 동하지 않았다. 청주 같은 흰술에 매력을 느낄 리 없었다. 녀자는 오로지 붉은색 와인을 좋아했고 이제 막 숙성되여 화려하게 퍼져나가는 향을 좋아했으니 말이다. 가능한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사색하며 온전히 감미로운 조화를 즐기고 싶었던 게다. 흰술은 어딘가 신명나는 맛이 없었다. 독하고 탁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 뜨겁기만 하고 위를 자극하여 속이 쓰리기만 했다. 가끔 어쩔 수 없이 선물로 받아온 그런 주류의 술은 구석에서 방치되여 꿔다 놓은 보리자루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실제로 녀자는 한가롭기만 하면 가지런히 진렬된 와인수납장 앞에 서서는 사랑하는 련인을 바라보듯 그윽한 눈빛으로 “자, 오늘은 누구를 마음껏 마셔볼가?” 하면서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한껏 설레임으로 가득차올라 불그레 볼까지 빨개졌다. 와인은 녀자를 파라다이스에 실어다주고 오아시스를 만나게 하는 신비로운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날씨가 꾸질꾸질한 날이면 잠시 모든 일상을 접고 녀자는 빨간색 실크잠옷을 걸치고 쏘파에 기대여 와인을 벌컥벌컥 마셔댔는데 녀자의 주관에 의하면 이것은 일종 ‘와인세례’를 향수하는 특별한 수행이라는 것이였다. 그동안 사놓고 바쁘다는 핑게로, 피곤하다는 리유로 채 마시지 못했던 와인들을 이런 기회에 한잔이라도 더 맛볼 수 있다는 희열과 특수성 뿐만 아니라 꼭 축제날이나 기념일에 정식으로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추하지 않게 마셔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강박증에서도 벗어나 자유로와지면서 하루하루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즉흥적인 경험을 하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숨겨둔 애인도 아닌, 쿵짝이 잘 맞는 친구도 아닌 한낱 와인 따위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녀자 주변을 뱅뱅 도는 남자들은 그래서 하나같이 남존녀비의 사상을 들먹이며 보잘 것 없어보였던 취미를 질책하며 헤여지는 기회로 간주하고 하나 둘씩 그녀 곁을 떠났다.
처음 녀자는 화이트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였다. 슴슴하고도 가벼운 맛이 마치 무뚝뚝하고 깊이 없는 남자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체적으로 레드와인은 포도의 껍질과 함께 발효시키는 반면 화이트와인은 쥬스만 발효를 시켜 마치 어린애들 동화책 서두처럼 간결하고 얕아 녀자로 하여금 편견일 수 있겠지만 깊은 마력으로 각인을 받지 못하고 쉽게 잊혀지고 말았다. 그래서 딱 한번인가 호기심으로 구입한 화이트와인은 한잔도 채 마시지 못한 채 수납장 구석에 박혀버렸다. 그런데 지금 녀자가 와인바에서 여유롭게 마시고 있는 와인이 바로 화이트와인이였다. 왠지 훨씬 산뜻하게 화려하게 그녀의 혀를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녀자는 감미로운 맛에 취해 화이트와인을 끈질기게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마주앉은 남자는 현재 리혼소송 중이라고 했다. 그 사연을 녀자는 친구의 남자를 통해 알게 되였다. 전국 여러군데 가맹점을 보유하고 있는 이 남자는 막대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녀자도 많다는 소문이였다. 그녀도 만나고 있는 녀자들 중 한 사람일 것이였다. 능청스럽게도 남자는 마치 그녀한테만 빠져버린 척 상황을 연출해나가고 있었는데 바로 그런 진지해보이는 모습이 녀자는 일단 싫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녀 뿐만 아니라 해도 그런 자상한 진심이 녀자 역시 마주한 남자 외에도 여러 남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파격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의지로 기인된 것이였다. 스릴 넘치게 모든 만남이 따로따로 이어지든, 한마디로 스토리 전개가 없는 게임이였든, 그러니까 녀자는 남자들을 순번으로 만나오면서 몇번이나 원점으로 돌아가 결론적으로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존재를 확인했다. 녀자가 볼 때 그 만남들은 장편소설이 아닌 결말을 빠른 속도로 예측할 수 있는 단편소설과 진배없었다. 모든 만남은 식상했고 아무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매력이 아직까지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론거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중간중간 혼선이 겹치면서 얼마 안 지나 수면으로 떠오를 비밀들이 밝혀질 것 같아 순간순간 불안했던 것이다. 녀자 자신도 왜 이 남자를 만나고 있는지 잘 알 순 없지만 굳이 리유를 따져본다면 아직까지 남자는 그녀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며, 그래서 녀자가 만취한 날, 온전히 그녀를 챙겨줄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남자였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녀자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더라도 지금 눈앞의 보이는 것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허구 같은 건 어디까지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것들이니까. 그런데 어긋나는 부분들을 일일이 상기시켜보면 가끔 거짓말의 냄새가 묘하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남자가 처음에는 뜨겁게 구애하다가 뜸해지면서 사라지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녀자는 작가의 글 속에서 존재하는 거짓말쟁이들의 세계를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선의적인 거짓말은 나쁘지 않았다. 녀자는 그들의 거짓말 같은 고백을 받으면서 자신 또한 기막히게 완벽한 존재로 멈춰있거나 아니면 거짓말 같은 환상에 빠져보고 싶었던 것이였다. 하지만 녀자 본연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피동적인 편이였다. 그래서 거짓말이든 거짓말 같은 일이든 행동에 옮길 용기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쩐지 녀자는 자꾸 그런 거짓말을 너무 사랑한 그 결말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살짝 미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듯 치렬하게 거짓말 속으로 녹아들어도 좋을 사람처럼 말이다.
주변에서는 주로 녀자를 사근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투로 인식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 녀자가 아는 자신은 자존감이 낮고 억눌려있으며 될 수 있는 한 지금보다 더욱더 무언가로부터 부지런히 탈피하고 싶은 인간이였다. 어쩌면 지금껏 남자들이 녀자를 떠난 리유도 술은 핑게일 뿐 녀자의 대책없는 기피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녀자 자신은 심각한 문제를 떠안고 있는 모양이다. 원래 소극적인 녀자가 갑자기 진취적이고 심지어 지구력 있어보인다는 건 녀자가 언제부터인가 남들 앞에서 자기의 그런 모습을 은연중 어필하려 한다는 증거였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너무 바보 같이 느껴져 견딜 수 없었고 앞으로는 지금과 판이한 삶을 시작하려고 다짐했지만 정작 한편으로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착잡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일상들이 대부분 최대한 생산성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렇다고 잊어버리려 해도 아직까진 그것이 극심한 고통으로 자극해왔고 그래서 새로운 삶으로 갈아엎어야 할 필요성을 극심하게 느꼈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녀자와 자신이 아는 녀자는 줄곧 겹치는 교차점 없이 평행을 이루었다. 실제에 더 가까운 녀자의 배역에서 진행되는 각본이 지루하고 뻔하게 느껴질 때면 녀자는 쏘파 맞은켠 벽에 걸린 그림 속 집시녀인처럼 긴 손톱을 기르고서는 와인을 들이켰다.
벽 그림 속 집시녀인은 잠들어있다. 동굴도 아니고 그냥 거친 들판에 담요 한장만 깔아놓고 자고 있다. 그 뒤로 강인지 호수인지 모를 큰 물이 흐르고 꽤 높아보이는 산들이 이어져있으며 검푸른 하늘에는 창백할 정도로 차거운 달이 대지를 비추고 있다. 녀인의 손에는 지팽이가 하나 쥐어져있다. 긴 려행길 지친 몸을 가누는 도구로 보여졌다. 머리맡에는 물병이 덩그러니 놓여있고 옆에는 만돌린처럼 생긴 악기 하나가 려행자의 분신인듯 같이 잠들어있다. 빨강, 파랑, 노랑, 록색, 주황 등 화려한 색 줄무늬가 있는 그녀의 옷이 달빛을 받아 무지개처럼 밝게 빛나면서 녀자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어쩌다 취기가 잔뜩 오른 날 녀자는 그 화려한 옷을 입고 만돌린의 경쾌한 선률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나도 저리 곤히 잠들 수만 있다면… 하면서 되뇌이곤 했다. 사실 녀자는 눈을 뜨고 있는 순간에도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딱히 없었다.
여기까지는 별로 의문스러운 점이 없었다. 집시녀인이 려행중 들판에서 잠을 자는 모습일 뿐이였고 사자 한마리가 그림을 더욱 생경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자는 꼬리를 세운 채 녀인의 냄새를 맡고 있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이 <잠자는 집시>이다. 녀자는 그림의 설정으로 봐서는 ‘사자의 공격을 받고 있는 집시’ 정도로 제목을 붙여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자의 아가리 밑에 위태롭게 누워있는 녀인을 그려놓고 <잠자는 집시>라니…
그녀가 훌쩍 떠난 국내려행에는 위태로운 장면이거나 기억에 오래 남는 추억이 별로 없이 무난했다. 우연히 와인바 옆에 미술관이 눈에 띄여 자연스럽게 그 곳에 들어가서 달라지는 화면들에 시선을 준 것 뿐이였다. 왜 매번 녀자가 가는 곳마다 미술관이 존재하고 있는지 몰랐으나 어쨌든 녀자는 그 때마다 규격화된 삶을 거부하는 집시 그 그림보다 더욱 인상 깊은 그림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그림들을 스쳐지나기만 했다.
보석 같은 별이 쏟아지는 밤, 녀자는 〈잠자는 집시〉에 대한 루소의 해설을 떠올렸다.
-만돌린을 연주하며 방랑하는 흑인녀인이 곁에 물항아리를 놓고 피로에 지쳐 잠들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사자가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의 냄새를 맡아보지만 잡아먹지 않았다. 집시녀인은 동양적 의상을 입었으며 삭막한 사막에는 달빛이 시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그리 대단한 그림도 아니였고 대단한 해설도 아니였다.
녀자는 매번 려행지에 막 다달아 와인바로 발길을 옮길 때마다 마치 애초부터 목적지는 와인바였을 거라는 현념 속에 잠겨버렸다. 녀자가 가고 싶은 곳은 어쩌면 세상 곳곳에 널려있는 와인바 천국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갑작스레 시작된 와인바 려정은 녀자가 새로운 자신을 만나보려는 필사의 노력이기도 했다. 더 완미해질 것도, 더 다른 무언가를 갈구할 것도 없이 녀자는 지금보다 더더욱 녀자 자신과 거리를 줄이고 싶었는데 와인바를 돌아다니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녀자 본능에 가까웠다. 녀자는 틈만 나면 휴대폰으로 일일이 검색하면서 그 곳들을 사뿐히 들려서 레드와인을 맛보았다.
와인바는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어떤 와인바는 은은한 조명 아래 감미로운 재즈음악이 깔려있었고 투명한 잔들이 가지런히 진렬되여있었으며 어떤 와인바는 복층 형태로 꾸며졌는데 전체적으로 인테리어 하나하나 무심한듯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살렸고 칠레산 하우스와인이 가장 인상 깊을 정도로 맛이 산뜻하고 음식들과도 찰떡궁합이여서 좋았다. 그러면 녀자는 한동안 칠레산 와인만 유독 마셨고 어차피 그건 녀자의 신앙과도 같은 일이니 일말의 시간랑비 따위 없이 새로운 와인들을 들이켜고 싶다는 생각에만 젖어들었다. 어떤 와인바는 규모가 작고 메뉴도 적지만 무슨 리유에서인지 그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어떤 와인바는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마음이 닿지 않아 곧바로 나와버리고 싶었다. 대체적으로 거기 손님들의 인수와 무관했는데 그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아도 왠지 거기 있는 게 불편했고 마음이 안착되지 않는 곳이 있었다. 녀자는 입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나고 불안정한 호흡으로 하여 공연히 우왕좌왕 망설일 것 없이 그 바를 바로 뜨는 게 상책이라고 여겨졌다. 그런 곳에는 대개 손님들의 성별을 막론하고 콕 집어낼 순 없어도 개인적 취향이 돋보이는 와인바라기보다는 일종의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곳이였다. 어쨌든 묘하게 기분이 나빠서 바로 뒤돌아서 문을 박차고 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였다. 반면, 들어서는 순간부터 로비가 탁 트이고 독특하고 새로운 와인들이 정연하게 진렬된 곳이라면 아주 자연스럽게 곧추 들어가 달빛이 잘 드는 창가로 착석했다. 녀자는 주변 련인들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와인잔을 쨍그랑 하며 사랑을 숙성시키고 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곤 한다. 하지만 녀자에게 오히려 그런 주변은 문제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들 곁에 있으면 온몸에 엔돌핀이 감돌았다. 어쨌든 성소수자를 상대로 혼이 나간듯 굳어진 표정으로 마지못해 구석진 곳에 앉아있기보다는 유리로 되여있는 창가자리, 조금 낮은 테이블, 와인을 좋아하는 련인들을 이웃하여 자리하는 게 훨씬 더 편했다. 대체적으로 그런 와인바들은 둘이서 오붓하게 앉아서 마시기에 최적화된 와인바들이였고 당연히 새로운 레드와인들이 륙속 등장하는 곳이기도 했다.
녀자의 구미 대로라면 녀자가 즐겨찾을 곳은 몇군데 정해져있었는데 오늘 녀자가 와인을 마시고 있는 곳은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였다. 그렇다면 굳이 남은 와인바들을 계속 더 탐색할 필요가 있는지 녀자는 이 려정을 이쯤에서 그만둘가도 진중하게 고민해봤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얼굴을 만나보는 게 더 바람직해보였다. 그것은 와인바의 인테리어나 그 안에 있는 손님들과 상관없이 와인바 스스로 떠안고 있는 탄탄한 내용물들이 존재해있었고 내포하고 있는 내용들을 한번씩 샅샅이 훑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외딴 곳에 덩그러니 위치한 바를 어렵사리 찾아갔는데 막상 문을 떼고 들어가보니 녀자가 즐기는 레드와인도 몇 없고 까탈스런 그녀 입맛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것 같은, 딱 봐도 허름한 곳일지라도 와인바의 특유의 단단한 얼굴이 있다면 높은 천정과 카운터의 특유의 풍경에 넋을 잃고 오랜 시간 서있어도 좋다. 그럴 때마다 녀자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포토샵 모드로 설정하고 가급적 예술적인 각도로 그 아련한 공간들을 빈틈없이 기념으로 남기곤 하였다. 그런 곳은 비록 완벽한 구조를 구비하지 않아도 종종 들려서 멍하니 앉아 몽상에 빠져도 좋을 법한 공간이였다. 아마도 이런 곳에 앉아있으면 그동안 차겁게 식어있던 령감의 원천이 물고를 트면서 쏟아지는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쓰지 않으면 안될듯했다. 녀자는 와인 한잔의 여유가 넘치는 공간 만큼이나 그동안 업악되였던 감정의 선들을 한올한올 풀어헤치며 그 속에서 어떤 진솔한 언어들이 자연스레 흘러나오게끔, 차마 그것들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공간을 이제까지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2
바람결 한가운데서 적요의 염기서렬은 재배치된다
어떤 뼈가 박혀있길래
저리 미친 피리인가
들꽃의 음은 천갈래로 비산한다
돌의 비명은 꼬리뼈 쯤에서 새여나온다
현수막을 찢으면서는 처음 듣는 母語를 내뱉는다
생사를 넘나드는 음역은 그러니까 눈에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후에는 공중에 뼈를 묻을지라도
후미진 골목에 입을 댄 채 쓰러지더라도
저 각골의 력사에 인간의 사랑이 속해있다
그러니까 모든 뼈마디가 부서지더라도 가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파렬은 생각처럼 슬픈 일은 아니다
하루종일 풍경은 바람의 뼈를 분다
來世에는 언젠가 잠잠해지겠지만
한없이 스산하여 망연하여 그리움이라든지 애달픔이라든지
그런 음계에 이르면 오히려 내 뼈가 깎이고 말겠지만
한 사람의 귀불을 스쳐오는 소리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음성을 전해주는 바람소리
그대와 나 사이에 인간의 말을 웅얼거리며 가로놓인 뼈의 소리
저것은 가장 아픈 악기다
온몸에 구멍 아닌 구멍이 뚫린 채
떠나가거나 속이 텅 비여야 가득해지는
- <바람의 뼈> 중에서
녀자는 와인 한잔을 굽내면서 지난날에 대한 유서 같은 회억록을 쓰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그걸 읽다가 식상한 스토리 때문에 이 작가는 어쩌다 운 좋게 이런 걸 책이라고 뻔뻔스럽게 출판할 수 있었나 싶어 팽개쳐버리려다 그래도 일말의 호기심을 갖고 결말까지 읽어내려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고 보니 녀자는 사랑받는 기술보다는 서로의 교감과 호흡에 더욱 의미를 두고 있었다. 밀고 당기기에 능숙하지도 못했고 늘 밀고 당기기에 귀차니즘을 느꼈다. 모든 만남은 끝이 있다면 만남 자체는 스쳐지나가는 바람일 테고 이리저리 불어치다 사라지면 그만이다.
와인을 거하게 마신 뒤 녀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바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다가올듯 말듯하면서 결국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슬슬 새여가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존재들, 무형의 공간을 거슬러 부풀었던 욕망의 포획망 속으로 표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바람은 기록이 없는 계절에 그리움으로 자꾸만 부풀리다 지는 향기이기도 했다.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향기는 온통 바람이라고 스스로 단정했다.
처음에 녀자는 적절한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추억의 편린들이 목구멍 깊이까지 파고들 만큼의 공간이 필요했다. 미로의 길을 헤매는 열망처럼 나아갔다 되돌아오더라도, 뭔가 꼭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간절하게 사는 것이 꽤나 바람직한 일이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예상컨대 사람들은 무언가에 진지하고 나면 금세 허무맹랑해져서 이내 체념을 해버린다. 끝내는 모든 게 슴슴하고 무의미해져 결국 단념하고는 드라마거나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하면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뭔가에 집착하기보다는 기대를 버리고 닥치는 대로 사는 게 가장 최선일지도 모른다.
녀자는 자신조차 실체도 형체도 없는 바람으로 시작해서 언젠가 삶의 려정을 마치게 될 거라는 사실이 문득 느껴져 슬퍼졌다. 죽어서 한줌의 재가 되면 지금 쯤 땅 어딘가에 묻혀져있거나 우주 가운데 하나의 점으로 사라질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와인을 찾는 사람들 중 한사람이 이 세상에서 줄어든다는 건 어쩐지 쓸쓸한 일인 것 같다. 녀자는 튤립형 와인잔을 마치 하나의 얼굴이기라도 한듯 볼에 대고 애틋하게 비벼보았다. 비비다가 한잔 마시고 그러다가 또다시 상념에 빠졌고… 녀자는 잔과 이미 한몸이 되여 와인 속으로 녹아들고 있는 중일 것이다.
녀자는 애초부터 인위적인 발란스보다는 긴장을 풀어주는 술이 더 좋았다. 녀자와 사귄 남자들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는데 그중에는 의아한듯 빤히 쳐다보는 남자도 있었다. 또 어떤 남자는 새삼 경이로운 눈빛으로 녀자를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녀자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런 반응에 무심한듯 지나쳤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녀자를 눈꼴 사납게 보기도 했는데 그런 때도 녀자는 극히 자연스레 무시했다. 녀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은 아무나가 너무 많았고 아무나가 아닌 사람은 너무 적었다. 이 녀자가 죽기 전에 이 세상 좋은 와인을 다 맛볼 수 없을 정도로 와인은 날마다 새롭게 생산되고 있다. 게다가 가소로운 사람들 틈에 치여 소중한 순간들을 빼앗기는 바람에 정작 녀자가 좋은 와인들을 즐기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비참한 일이였다. 녀자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와인들을 즐기는 데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기로 계획했다.
녀자는 와인을 마시면서 오르가슴 비슷한 황홀경을 경험할 수 있었다. 잔뜩 마시고 나면 배만 더부룩이 나오는 맥주보다는 차라리 지금처럼 살짝 미친듯 와인의 포로가 되여주는 게 훨씬 생산적인 일이였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두운 청사를 지나치게 되였다. 달빛 속에 우두커니 서있는 청사는 마치 누군가 고의적으로 루락한 물건 같았다. 녀자에게 실망감만 안겨주던 이곳은 며칠 전 서류를 출시하면서 새로운 ‘자유’를 획득하였던 곳이기도 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어지는 휴게실에는 남녀들이 인감도장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녀자가 그 곳에서 증명사진을 찍을 동안 일하는 직원 한명이 위자료며 양육비며 재산분할에 관한 사항들을 아주 사무적인 어투로 설명했다. 무엇보다 2층에 있는 합의실까지 올라갔을 때에는 밖을 향해 탁 트인 전망 좋은 창가도 회색빛으로 감돌고 있었다. 녀자는 그 암울한 회색빛 창가에 앉아 저 멀리 멀어져가는 것들을 막연하게 바라보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녀자는 와인이 필요했다. 한잔, 두잔으로부터 시작하여 뼈속까지 젖어든 취기가 서서히 그녀를 천국으로 이끌어주었다. 표연히 가정주부의 배역에서 벗어나 하늘하늘 치뜨는 느낌이 좋았다. 짙은 어둠의 한순간 꿈을 맘껏 부풀리고 싶었다. 녀자는 마침내 와인을 떠날 수 없는 존재로 되고 말았다.
녀자에게는 유일하게 와인바 그리고 와인바 주변마저도 더욱 친절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녀자의 걸음은 홀린듯이 와인바가 자리하고 있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와인바 주변에는 하얀 이팝나무가 눈이 내린듯 둘러져있었고 그 너머로 음산한 기운을 뿜고 있는 호수가 보였다. 호수 가운데로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고 그 속에 몸을 박고 있는 나무들이 많았다. 뿌리는 산에 박혀있는데 가지는 물에 드리워있어 얼핏 환상 속의 나무처럼 느껴졌다.
밤하늘 아래 호수로 향하는 녀자의 발걸음은 서서히 느려지고 머리 속은 점점 가벼워졌으며 자연의 은총을 받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한결 맑아졌다. 두손에 사탕 한가득 쥐고 마냥 즐거워하는 아이처럼 녀자는 훔쳐온 것 같은 이 순간을 홀로 만끽하며 걸었다.
호수는 무척이나 음산했다. 녀자는 이름 모를 마력에 이끌려 호수의 깊은 곳으로 걸어들어갔다. 모든 게 다 어둠 속으로 차츰차츰 묻혀지고 있었다. 녀자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가냘픈 몸으로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바야흐로 결핍의 계절이 흐르고 있는 이 호수에서, 이 어둠 속에서 녀자는 려정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은 왜 그랬는지 늘 녀자를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밖으로만 나돌았다. 남편을 보면 마치 같은 지붕 아래 다른 꿈을 꾸는 이방인 같았다. 남편으로 인해 녀자 존재 자체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몰랐다. 녀자에게 남편은 겉도는 행성이였다. 그런가 하면 세살배기 딸애는 녀자 혼자 키우다 싶이 했는데 부시시한 산발로 늘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누구나 그러하듯 녀자 역시 누군가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었기에 그런 자기 인생이 얼마나 정처 없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길 없었다. 다만 무슨 리유에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린 시절에도 녀자는 부성애를 거의 느끼지 못했고 부친은 그녀가 의지할 대상이 되여주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태여난 순간부터 남자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 녀자에게 그야말로 충격적이였다. 유독 또래에 비해 일찍 셈이 든 녀자는 늘 취한 아버지의 신발을 챙겨드리고 밥가마에 밥을 안치고 바닥을 쓸고 사발을 씻는 등 눈에 보이는 가사일이라면 두팔을 걷어붙이고 했다. 모친은 어쩐지 칭찬에 린색하였다. 그러니 고작 열살짜리 꼬마가 집안청소를 척척 하는 게 칭찬받는 일로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찌기 학교를 그만두고 여러군데 취직을 했다. 녀자는 평범한 련애를 했고 따뜻한 자궁에 한점의 생명이 생기자 서둘러 민정국으로 찾아가 등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남아돌지 않았는지 나중에 결혼식조차 치르지 못한 채 곧 육아에 전념하게 되였다. 그리고 전업주부로 눌러앉은 녀자는 짙은 향수를 뿌리며 한껏 치장에 신경쓰고 외출하는 남편을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면서도 저지시키지 못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망각한 채 이미 녀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지도 한참 되였다. 녀자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불길한 예감으로 남편의 외도를 알아챘다. 거울 속으로 녀자는 군데군데 살찐 영낙없는 아줌마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 한발 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 같은 령역이였다. 스스로도 자신이 어딘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녀자는 지금보다 더욱더 치렬하게 미쳐보고 싶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지 그 한계를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차겁게 서있는 운명의 벽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훨훨 높이 날아보고 싶었다.
녀자는 검푸른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어 더듬어보았다. 순간 이곳은 어둠의 퍼즐들로 맞추어놓은 세계에 들어선 것 같았다.
이윽고 녀자는 한발 더 내디뎌보았다. 그리고 웃옷을 한겹한겹 벗어버렸다. 정지된 어둠 속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울려퍼졌다. 녀자는 오래동안 묶어둔 무거운 세상을 훌훌 털어내듯 억눌렀던 가슴을 활짝 폈다. 그리고 비장한 가슴으로 호수의 시린 감촉을 맞받으며 신성하게 눈앞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호수에서 파도 같은 물결이 세차게 일렁이고 있었다. 쏴-쏴- 가슴을 향해 솟구치는 물결은 쉬임없이 녀자를 관통하였고 마침내 공허감을 뚫고 시원하게 통과하였으며 녀자의 귀속으로 더 이상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출처:<장백산>2019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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