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
신조
문밖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준이는 눈을 떴다. 두터운 흑갈색 카텐과 창문 사이의 얼마 안되는 틈으로 해빛이 꾸역꾸역 방안으로 기여들어오고 있었고 흐릿하던 눈동자의 초점이 점점 모여들면서 방안 정경이 하나 둘 눈망울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준이가 누워있는 2인용 침대 그리고 침대 왼쪽에는 노트북과 갖가지 배달용 전단지가 어지러이 널려있는 작은 책상이 보였고 그 밑으로는 책가방이 걸려있는 걸상 하나가 빠금히 뒤태를 보이고 있었다. 침대 오른쪽에는 나무로 된 량문형의 큼지막한 옷장 하나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천으로 된 간이옷장 하나가 나무옷장과 출입문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출입문을 열면 금세 부딪칠 것만 같이 위태해 보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로도 모자라 이제는 쏴- 하는 물소리까지 고요한 준이의 방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준이의 방과 함께 북쪽에 붙어있는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이다. 그리고 이 소리가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준이는 귀찮다는 얼굴로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10평방 남짓한 이 방에 오게 된 지도 벌써 석달여,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짧은 시간도 아니였다. 준이가 살고 있는 집은 원래 남향의 방 2개와 서재용으로도 볼 수 있는 북향의 방 1개를 가지고 있는 3방 1거실의 90평방이 조금 넘는 25층 아빠트의 9층에 위치한 집이였다. 하지만 집주인이 거실을 막아 방을 하나 더 만들다 보니 집은 거실이 없는 4방짜리 아빠트로 바뀌였고 준이는 그중 북향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남북 방향으로 되여있는 이 집은 서쪽에 문이 있고 문에 들어서서 오른손 편에 거실을 변형시켜 만든 방에는 동년배 조선족 녀자 두명이, 그리고 바로 그 옆의 작은 방에는 입주한 이래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조선족 남자 한명이 살고 있었고 그 옆의 화장실이 달린 큰 방에는 한족 커플이 살고 있었다. 남쪽의 거실이 막힌 데다 북쪽에 유일하게 남은 베란다마저 빨래가 빼곡이 걸려있어 집안은 늘 어두컴컴했다.
조선족 녀자 두명은 늘 아침 8시 쯤에 집을 나가 저녁 7시 쯤에 귀가를 하는 평범하면서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고 조선족 남자는 아침 8시 30분 쯤에 집을 나가 저녁 10시 쯤에 귀가하는 빡센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으며 한족 커플은 저녁 6시 정도에 집을 나가 새벽 2시가 넘어 귀가를 하고는 11시 좌우에 기상하는 결코 평범해보이지 않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석달이 넘는 백수생활이 알려준 집안의 기본정보를 리용하여 준이는 그들과 거의 마주치지 않는 생활을 해왔고 사실상 별로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원래 준이가 살던 집은 여기가 아니였다. 시중심은 아니지만 그동안 준이는 꽤나 괜찮은 지역의 2인1실의 집에서 합숙하면서 나름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녀자친구가 편히 놀러 올 수 있게 혼자 집을 잡고 살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사실 월급의 반 가까이 월세로 나가는 것을 고려하면 그 집도 준이에게는 사치라면 사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녀자친구가 놀러 오면 금요일, 토요일 이틀씩은 준이네에게서 편히 쉬고 갈 수 있다는 것과 회사가 도보로 15분 거리라는 것이 위로 아닌 위로였다.
“미안해, 준이씨.”
열심히 일했던 직원에게 퇴사통보를 해야 하는 상황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회사가 부도가 난 것이 아쉬워서인지 판단이 안되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사장님이 귀퉁이에 김준이라는 이름이 씌여있는 봉투 하나를 내밀었던 것이 석달 전의 일이였다.
그동안 몸이 아파도 이를 악물며 출근을 견지하고 어떻게든 회사에 보탬이 되고저 했던 하루하루를 통하여 준이는 어느 정도 감이 왔다. 이 회사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준이는 이 회사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벌써 회사를 몇번이나 옮겨다니며 겨우 잡은 기회였다. 단지 돈벌이 수단이 아닌 커리어를 쌓기 위한 미래에 대한 투자였었는데 쥐꼬리 만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시간도 겨우 반년이 고작이였다.
돈봉투를 건네는 사장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회사의 모든 직원이 며칠간 밤을 새면서 준비한 계약이 무산되는 순간 지금의 이 자리는 이미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되여버렸다. 준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 뿐이였다. 이 회사에서의 경력 그리고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 만큼의 시간, 어렵게 잡은 기회였건만 그것도 이젠 여기까지인 것이다. 그래서 준이는 사장님이 부를 때 이 방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다. 벌써 준이 먼저 몇명이 사장실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나왔다. 몇 안되는 직원이 벌써 반이 넘게 사장실을 오갔다. 저기에서 어떤 말들이 오갔을지 눈에 선했다. 그럼에도 준이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최소한 너는 남아달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례외는 없었다. 결국 준이는 사장님과 마주앉게 되였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준이는 자신을 향해 내민 그 봉투에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봉투를 반납하는 대신 조금만 이 회사에 머물게 해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욕심이라는 생각에 준이는 저도 몰래 눈물이 났다. 어떻게 통과한 면접인데,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겨우 잡은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번 달 급여에 조금 더 넣었어. 알다 싶이 더 이상 회사운영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아. 이 돈이 얼마나 보탬이 될지 모르지만 하루라도 빨리 안정적인 회사 찾기 바란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준이는 그런 사장님이 야속하기만 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돈이 아니였다. 원하는 것이 돈이였다면 준이는 스쳐갔던 그 몇몇 회사들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회사에서 받는 월급보다 훨씬 나은 혜택을 보장받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준이는 그 회사들을 과감하게 버리면서 지금의 이 회사를 선택했다. 도무지 맞지 않는 적성에 매일매일을 쌓여만 가는 스트레스를 준이는 감당할 수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두번의 업종변경과 일곱번의 직장이동을 경험했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이 좋아할 수 있고 견지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힘들게 들어온 회사인데 하필…
“아무런 경험도 없는 저를 받아주시고 가르쳐주셔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준이는 봉투를 꽈악 움켜쥐고 사장실을 나섰다. 자리에 돌아온 준이는 컴퓨터에 있던 자료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그리고 혹시라도 남았을 자신의 개인정보를 삭제하기 위하여 드라이브 하나하나를 포맷하기 시작했다. 포맷 완료를 기다리면서 준이는 그사이 정이 무척이나 들어버린 사무실 구석구석에 눈길을 주었다. 때가 가득 낀 중고랭장고, 쩍하면 고장이 나 모두를 곤욕에 빠뜨렸던 구식 프린터,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사훈과 함께 계획표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벽, “지성이 곧 경쟁력이다”라는 의념하에 조금씩 채워가던 책장, 고물 책상과 의자, 밥상 겸 회의용 탁자였던 거무틱틱한 타원형 회의용 책상 우에 어지러이 널려진 서류들까지… 준이는 지난 반년간의 체취 하나하나가 묻어있는 이 50평방 남짓한 사무실과 서서히 리별을 준비해야만 했다.
문이 두개나 닫혀있는 데도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쏴- 하는 소리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한여름이라 땀이 많이 난다고 하지만 아침 출근시간에 샤워를 하는 것도 모자라 공용화장실을 30분 넘게 리용하는 것은 사실 너무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백수생활을 하는 준이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속되는 물소리와 함께 며칠 전 그 일이 떠오르면서 한창 젊은 나이의 준이 몸에 금세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짜증이 나버린 준이는 베고 있던 베개로 귀를 틀어막으면서 속으로 젠장을 련발했다.
며칠 전 아침이였다. 합숙인들이 집을 비우기 전에는 거의 자신의 방을 나서지 않던 준이가 방을 나서게 된 건 지나치게 부지런한 택배아저씨 때문이였다. 전화소리에 잠을 깬 준이는 대충 옷을 걸쳐입고 까치둥지머리를 손볼 여유도 없이 살금살금 자신의 방에서 나와 1층까지 내려가 택배를 받았다. 엘레베터에서 주민들의 힐끔거리는 눈길을 온몸으로 받으며 준이는 속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온 택배아저씨와 고장나버린 벨을 저주했다. 빼앗듯이 받아든 택배를 가지고 다시 조용조용 자신의 방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고 준이는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그리고 눈길이 문을 연 이가 아닌 그 뒤의 사람에게로 이동해감과 동시에 이른아침의 적막을 산산히 부셔버리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팬티만 입고 있던 녀자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쳐버렸기 때문이다.
두팔로 가슴을 가리며 그대로 주저앉는 녀자를 뒤로 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던 녀자가 급히 뛰쳐나오며 문을 거세게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또 한번 집안을 뒤흔들었다.
“화장실 앞에서 뭐 하는 거야!”
거침없는 반말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준이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 녀자의 속사포 같은 욕설이 뒤를 이었다.
“사람이 있는 화장실을 기웃거리다니. 너 변태야? 어? 무슨 이런 미친 놈이 다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생긴 것도 돼지처럼 생겨가지고 감히 이런 변태 짓거리를 하다니.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야! 어?”
“난 그냥 택배…”
그 녀자는 도무지 준이의 말을 들어볼 념을 안하면서 계속해서 듣기 거북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 쯤 되니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여버렸다. 제일 먼저 그동안 본 적이 없던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고 그 뒤를 이어 한족 커플이 나왔지만 그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그런지 그냥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물론 자신들의 단잠을 깨웠다는 짜증을 얼굴에 그대로 달고 말이다. 그들의 등장으로 좀처럼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녀자의 욕설이 겨우 멈췄다. 준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저기요. 저는 다만 택배 받으러 나갔다가 지금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게 절대 아닙니다.”
“그 말을 지금 나 보고 믿으라고? 뭘로 증명할 건데?”
“금방 누군가 밖에 나갔다 온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아침에 화장실을 너무 오래 쓰는 건 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소리 때문에 화장실에 있던 녀자들은 듣지 못했지만 방에 있었던 앞방 남자는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들었는지 조용히 한마디 거들었다. 얼마 전 화장실을 오래 쓰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서 언성이 높았던 적이 있은 건 준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준이는 그 때 방안에서 듣기만 할 뿐 나서지는 않았다. 물론 준이도 불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갑자기 배가 너무나 아픈데 도무지 비여지지 않는 화장실로 인해 방안 휴지통에서 급한 일을 해결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변태라는 락인이 찍히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였다. 조선족 바닥은 거기서 거기였다. 이 집을 벗어난다고 해서 결코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준이도 잘 알고 있었다.
“네. 저는 택배를 받아가지고 방으로 가던 길이였습니다. 진짭니다. 갑자기 화장실 문이 확 열려서 너무 놀라서 멈춰섰을 뿐 절대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닙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놀래우려고 했던 건 진짜 아니였는데…”
서둘러 사과까지 한 준이는 조심스럽게 그 녀자의 반응을 살폈다. 한참 씩씩거리던 녀자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가면서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언제 한번 걸리기만 해봐. 바로 신고해버릴 테니까.”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개자식이라는 소리를 언뜻 들은 것 같았지만 준이는 개의치 않고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쿵쿵 뛰였다. 차라리 큰소리를 내면서 나갔다 올걸, 차라리 같이 욕이라도 해줄걸 하는 생각들이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였다. 준이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앞방에 살고 있던 남자까지 출근을 해버리자 집은 또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저녁이 되자 녀자들이 어김없이 귀가를 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지 주방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그녀들이 하는 대화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조용한 준이의 방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조심해야 돼. 남자들도 있는 집이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니까.”
“그러게 말야. 아침에 놀란 걸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진정이 안된다니까.”
분명 준이에게 들으라고 하는 날 선 말이였고 준이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준이는 이를 악물고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면 아닌 것이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는 없다. 녀자와 싸워봐야 남는 것도 없다는 생각만 머리 속을 온통 지배했다. 화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정신없이 그 작은 방을 왔다갔다하면서 준이는 하루라도 빨리 이 작은 방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뿐이였다. 꽈악 움켜쥔 주먹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앞방 남자까지 귀가를 하고 집에는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준이는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아침의 그 소동이 떠오르면서 그 녀자의 욕설이 귀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준이는 결국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주방으로 가 랭장고문을 열고 자신의 캔맥주를 모조리 꺼내왔다. 마른 명태도 몇마리 있었지만 한가롭게 그걸 뜯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준이는 자신의 작은 방 책상에 앉자마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요동을 치며 식도를 지나 텅 빈 위장을 헤집고 다녔다. 그제서야 끓어오르던 화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래. 참자, 참아. 이미 밟아버린 똥 어쩔 수도 없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직장을 구해 이 방구석을 벗어나야지. 더러워서 원.”
준이는 입속으로 낮게 되뇌이며 부지런히 맥주를 위안에 쑤셔넣었다. 비여가는 캔이 점점 많아질수록 준이도 서서히 취기를 느꼈다. 저녁을 걸러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빨리 취하는 것 같았다. 준이는 자신의 작은 방에 꼭 어울리는 하나 밖에 없는 작은 창을 통해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정이 다되였는데도 길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경주하듯이 달리고 있었다. 저들은 누군가가 기다리기에 저리도 분주하게 달리는 거겠지,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기에 돌아가는 길이 저리도 당당한 거겠지… 준이는 갑자기 녀자친구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그 작은 품에 안겨 괜찮다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이렇게 힘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술기운 때문이였을가? 준이는 갑자기 녀자친구를 안고 싶어졌다. 몸은 점점 달아올랐고 도저히 주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준이는 노트북을 열어 성인영화를 틀어놓고 마스터베이션을 했다. 홀로인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끔 있는 일이였고 또 익숙한 일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떠오른 얼굴은 녀자친구가 아닌 아침에 보았던 그 녀자들이였다. 뽀얀 살결과 탐스러운 가슴, 잘록한 허리와 미끈한 다리, 손바닥 만한 팬티에 은근히 비치던 검은 숲 그리고 자신을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던 녀자의 반팔티에 가려졌으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존재를 도드라지게 알리던 볼록한 돌기 두개… 온몸 구석구석을 휘감아치던 희열이 절정을 지나 서서히 잦아들 때까지도 준이의 머리 속에는 온통 그녀들 생각 뿐이였다. 하지만 작은 방에 또다시 적막이 찾아오자 준이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그녀의 욕설에 화조차 내지 못했던 자신이 한심했으며 화장실 사용 문제로 당당하게 말하던 앞방 남자와는 달리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과 비교되면서 더더욱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먹고 살기 힘든 이 와중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욕망에 몸부림치는 이 배알 없는 몸뚱이도 저주스러웠다. 준이는 결국 그 날 밤 모든 맥주를 마셔버리고는 치우지도 못한 채 침대에 쓰러졌다.
직장을 잃은 첫 몇주는 그나마 괜찮았다. 이곳저곳 리력서도 보내고 그동안 시간이 없어 밀렸던 애니메이션도 밤을 새우면서 보았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녀자친구와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였다. 준이는 포서에, 녀자친구는 포동에 살고 있었다. 거리가 먼 탓에 주말에만 겨우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모자라 그동안 주말마저 반납하고 일한 탓에 만나기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매일이다 싶이 하던 전화는 한주일에 한번으로 바뀌였고 주말마다 하던 데이트도 한달에 한두번으로 줄어들었다. 출근이라는 좋은 핑게거리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렇게 힘들게 관계를 유지해왔었다. 그런 준이였기에 녀자친구와 수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방 하나 달랑 있는 집에서 친구랑 같이 살고 있었기에 준이는 그녀의 집에서 머무를 수가 없었고 시간이 늦어지면 호텔을 잡거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호텔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고 그녀와 데이트를 하고 두시간이 넘는 시간을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 역시 고역이였다. 편해지면 자주 만날 수 있을 거라던 생각은 허황된 상상일 뿐이였다.
포동에서 회사를 구해 그리로 이사를 가는 것, 그것이 준이의 다음 목표로 되였다.
전공은 별로였지만 준이가 졸업한 대학은 번듯했다. 다녔던 대학이 있던 도시에서는 그래도 나름 알아주는 학교였고 그 학교 졸업생이라는 리유 하나만으로도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었다. 남자가 어찌 좁디좁은 웅뎅이에서 살 수 있냐며 더욱 큰 도시에서 보란듯이 성공하겠다며 다니던 회사를 뒤로하고 객기를 부리면서 찾아왔던 이곳, 상해는 결국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름 중점대학이라는 곳을 졸업했지만 이 도시에는 그보다 뛰여난 학교들이 수두룩했고 졸업장 하나만을 믿고 뛰여들기에는 상해라는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피 튀기는 치렬한 경쟁, 졸업을 했던 도시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 돌멩이를 던져서 맞히는 사람들 중 십중팔구는 명문대 졸업생이였고 그중 절반은 류학파였다. 작은 도시의 중점대학에, 거기에 보잘 것 없는 전공으로는 그야말로 명함을 내밀기도 쑥스러울 지경이였다.
준이는 거의 매일이다 싶이 모든 구직사이트를 뒤지면서 관련 업종이 보이는 족족 리력서를 넣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이 보낸 리력서가 통과된 곳은 겨우 세곳, 그마저도 두곳은 준이의 관련 경력이 별로 없어 어려울 것 같다는 뉘앙스를 면접을 보는 내내 은근슬쩍 흘려댔다. 마지막으로 면접을 봤던 회사는 경력을 보지 않는다고 하여 은근히 기대를 하고 갔지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빈번하게 바꿔온 직장, 이런 저런 리유를 댔지만 면접관의 얼굴은 굳어있었으며 별로 볼 것도 없는 리력서를 신경질적으로 번져가면서 몇번이고 보고 또 봤다. 준이에게는 별로 눈길도 안 주면서 말이다. 면접실을 나오는 순간까지도 면접 볼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인사치례로 하긴 했지만 준이의 속은 편치 않았다. 한편으로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직장을 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준이는 머리를 휘저어 불길함을 쫓아내려고 애썼다.
“어째 배가 더 나온 것 같다. 오빠 요즘 전혀 운동 안하지?”
오랜만에 놀러 온 녀자친구가 준이의 아래우를 훑어보며 눈살을 찌프렸다. 그런 그녀에게 준이는 허허 웃어버렸다.
“좀 바빴어. 나도 나름 먹고 살려고 열심히 하다 보니.”
“아무리 바빠도 운동 좀 해. 출근할 때야 바쁘니까 어쩔 수 없다지만 요새는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여유를 낼 수 있잖아.”
“알았어. 헬스장은 좀 그러니까 가끔 나가서 뛸게.”
준이의 말에 녀자친구는 활짝 웃어보이며 아직까지 걷어내지 않은 두터운 카텐을 열어젖히고는 준이의 침대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러면서 눈길은 책상 우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배달전단지에 가 멈췄다.
“귀찮아도 집에서 밥 좀 해먹지. 맨날 시켜먹으면 몸에 안 좋잖아.”
“나중에 같이 살게 되면 너가 해주는 밥 먹으면 되지. 그 때까지는 참을란다.”
피식 웃으며 언제나 그리 될지 하면서 넉두리를 하던 그녀는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얘기해주었고 준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련애한 지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 작은 키에 평범한 외모, 통통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또 뭐든 열심히 하는 온천한 스타일이였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잘 몰랐는데 그녀와 함께 지내다 보니 그녀의 진가가 서서히 빛을 발했다. 자신 스스로도 열심히 사는 사람이였지만 자신의 주위 사람들한테도 그 열정을 나눠줄 줄 아는 녀자였다. 준이는 그런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왜냐하면 대화의 끝은 늘 준이가 외면하고 싶은 화제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오빠. 이젠 아무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냐? 일을 그만둔 지 벌써 반년이 돼가. 나 너무 걱정돼. ”
“네 눈에는 내가 놀고 있는 것으로 보여? 나도 나름 일자리 구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안 그래도 일이 안 풀려서 짜증 나는데 볼 때마다 꼭 이래야 돼?”
듣기 좋은 말도 세번 들으면 질리는 법이다. 하물며 자신의 아픈 부분을 만날 때마다 얘기하는 녀자친구의 말이 이쁘게 들릴 리가 만무했다. 조곤조곤한 그녀의 말투에 결국 준이는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런 그에게 녀자친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나는 그냥 오빠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그걸 누가 몰라서 그래? 한다고, 하고 있잖아.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너랑 같이 살려고 포동 쪽에 일자리도 찾고 있어. 그런데 잘 안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오빠 지금 그게 말이나 돼? 아직도 하고 싶은 일 타령이야? 오빠 그러다 진짜 길 바닥에 나앉을 수 있다고. 일단 아무 일이나 하면서 생활하는 게 우선 아니야? 일단 정기적인 수입이라도 있어야 오빠가 하고 싶은 일을 구하든 말든 할 거 아니냐구?”
“수입은 걱정 마. 안 그래도 요즘 아르바이트로 번역일을 구해놨어. 일을 마치면 적어도 2만원은 받을 수 있어. 그 정도면 한동안 버틸 수 있으니 괜찮을 거야.”
하지만 준이의 말에 녀자친구는 전혀 수긍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대화를 하는 내내 작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하, 오빠, 진짜… 그건 말 그대로 아르바이트야. 오빠가 무슨 프리랜서야? 그런 불안정한 거로는 안된다니까.”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내가 남이야? 그건 그렇고. 저번에 내가 리력서 보내보라는 데는 보냈어?”
준이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여버렸다. 영어 6급, 관련 직종 경력 최소 2년… 준이가 유일하게 한국말을 류창하게 할 수 있는 조선족이라는 것 외에는 회사가 원하는 자격 중 어느 하나 부합되는 것이 없었다. 눈빛을 피하는 준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녀자친구가 채근을 시작했다.
“설마 진짜 안 보낸 거야? 대체 왜 그러는데?”
“얘기했잖아. 거기는 조건이…”
“꼭 그런 것이 아니래두 그러네 진짜. 그리고 오빠 경력으로는 웬만한 회사는 조건 만족시키기 어려워. 되든 말든 일단 리력서라도 넣어보라니까.”
“됐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신경 꺼!”
“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래? 맨날 오빠 걱정하는 내 생각은 안하는 거야?”
“한번으로 끝내자. 어차피 얘기 길어져봤자 답이 없는 건 너도 알잖아.”
준이는 마주보고 있던 그녀를 외면한 채 창문가로 다가가 창문을 확 열어젖히고는 담배 한대를 빼여물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준이식 의사표현이였다. 그걸 모를 녀자친구도 아니였다. 결국 녀자친구는 그 길로 준이의 작은 방을 나가버렸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랜만에 왔는데 자고 가라는 얘기를 준이는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돌아선 등뒤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각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어 쾅 하는 문소리에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홀연 가슴에서 무언가 새나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작은 방에 언제는 홀로가 아니였던 것처럼 갑자기 허전함이 찾아왔다. 그렇게 작았던 방이 오늘따라 어쩐지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준이는 한참이나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요즘 들어 준이의 일과는 단순했다. 잠에서 깨여나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다양한 구직사이트를 훑으며 리력서를 넣는 일과 이젠 떨어질 대로 떨어져 기사회생할 가망조차 보이지 않는 자신의 주식과 펀드상황을 살피는 일과 길어질 대로 길어져버린 하루하루를 한숨으로 흘려보내는 일이였다. 그나마 번역일이라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직 준이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였다. 며칠 전 석달치 월세인 5000이 넘는 거금이 통장을 빠져나갔다. 백수가 된 지 반년, 드디여 준이의 통장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름 아껴쓴다고 해도 다달이 빠져나가는 식비와 생활비는 도저히 줄일래야 줄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술과 담배값까지 소소하게 나가다 보니 얼마 안되는 잔고가 결국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준이는 녀자친구와 가끔 통화를 할 뿐 만나자는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호텔비는 고사하고 데이트 비용까지 줄여야 했던 준이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였다. 그렇다고 부모님한테 손을 벌리거나 그녀한테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다. 차라리 안 만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준이는 지금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비가 들어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남은 돈으로 그 때까지만 잘 나눠쓰면 또 반년은 버틸 수가 있다, 그 사이에 일자리를 구하면 된다. 준이의 머리 속에는 온통 그 생각 뿐이였다.
라면 하나를 끓여먹고 또다시 일을 시작하려던 순간 전화가 울렸다. 혹시 하는 생각에 급히 휴대폰을 집어들었지만 기다리던 면접전화가 아닌 친구 호석이의 이름이 액정에 찍혀있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던 준이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응, 호석아. 잘 지내고 있지?”
“요! 브로. 나야 늘 잘 지내고 있지. 그런데 우리 브로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나야 늘 그렇지. 한동안 잠잠하더니 무슨 일이냐?”
“육아에 바빠 도통 시간이 나야 말이지.”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호석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육아?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든 준이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를 속으로 되뇌였지만 설마는 역시나 사람을 잡았다. 호석이네 공주님이 다음주 토요일에 첫돌 생일을 쇤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꼭 오라는 얘기를 몇번이나 강조했다. 축의금 같은 건 필요없으니 그냥 오면 된다, 그래도 아이의 첫돌 생일인데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 준이는 어쩔 수 없이 그러마 하고 통화를 끝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는 못할망정 호석이의 그 한마디는 웃는 얼굴로 돌멩이를 쥐여준 격이 되여버렸다. 준이는 한숨을 내쉬면서 휴대폰을 들어 통장 잔고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편으로는 머리 속으로 돌잔치 축의금을 내면 번역비가 들어올 때까지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어느 정도인지 빠른 속도로 계산해봤다. 답이 없었다. 입에서 또다시 긴 한숨이 새여나왔다. 호석이는 몇 안되는 친구였다. 그리고 상해에 처음 왔을 때 물심량면으로 준이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호석이에게 그 날 일이 있다고 참여가 힘들다는 얘기를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일이 없이 집에서 놀고 있는 것을 빤히 알고 있기에 축의금 같은 건 필요없다고 얘기를 한 것일 테지만 준이는 그런 호석이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런 자리에 빈손으로 가기에는 준이의 그 얄팍한 자존심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준이는 라면그릇도 치우지 않은 채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불쌍한 머리칼을 쥐여뜯었다. 아직까지 쳐져있던 카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작은 방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만 같았다.
무정한 시간은 단 1분 1초도 기다려주지 않고 느긋하게 흘러갔고 결국 호석이네 공주님 첫돌 생일날이 되였다. 느긋하게 잠에서 깬 준이도 슬슬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집을 나서는 준이의 기분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사람 죽어라는 법은 없는지 다행히 주말에 통역일이 생기는 바람에 1600원이라는 생각지 못한 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 준이는 오랜만에 사우나에 가서 묵은 때도 벗겨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발걸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물론 그건 준이만의 생각이였다. 오랜만에 찾아 입은 셔츠는 불어날 대로 불어난 준이의 몸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금방이라도 터질듯 빵빵하고 셔츠가 벌려지지 않도록 불안불안하게 잡고 있는 단추들은 위태로워보이기만 했다.
“살을 빼기는 빼야겠구나.”
준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여나왔다. 어제 저녁 오랜만에 올라선 체중계를 보면서 준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173cm의 준이가 어느새 110키로가 넘어갔다는 것은 스스로도 몰랐다. 날씬하지는 않았어도 비게가 출렁이지는 않았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여있었다. 한달 가까이 밤 늦게까지 일하면서 뭘 자꾸 주어먹었더니 그것이 모조리 살로 갔나 보다. 물론 그동안 출근을 하면서 잦아진 야근 때문이 더욱 컸겠지만 준이는 그것마저 의식하지 못했다. 운동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동안은 말로만 한다한다 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조차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자각했기 때문이다.
식장에 도착할 때 즈음 준이는 땀으로 샤워를 한 것만 같았고 어느새 속옷도 축축히 젖은 것 같았다. 뻐스를 타고 왔기에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날씨가 무덥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식장의 1층 로비에서 한참이나 땀을 들이고서야 준이는 식장으로 이동했다.
돌잔치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해주었고 준이도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몇달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했다는 포만감이였다. 집으로 들어가 또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술은 자제를 했던 터라 오히려 음식을 더 많이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돌잔치가 마무리되자마자 귀가를 하려던 준이를 친구들이 잡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녁까지 신나게 달리자. 주말인데 급히 들어갈 필요는 없지?”
“그래. 어차피 노래방도 잡아놨으니 오랜만에 한곡 뽑아야지?”
호석이까지 만류하고 나섰고 다른 친구들은 준이가 백수가 된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호석이에게 준이는 왠지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준이도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인지 그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버렸다. 오케이 싸인을 보내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대 태우고 있는데 익숙한 전화벨이 울렸다. 녀자친구만을 위해 설정한 벨소리, 반가운 마음에 준이는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오빠 어디야? 지금 좀 만나.”
“응. 지금 친구 딸아이 돌잔치에 와있어. 오후에 오랜만에 애들이랑 어울리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야? 저녁에 보면 안될가?”
“괜찮아. 잠간이면 돼.”
잠간이라는 말에 준이는 친구들에게 량해를 구하고 부랴부랴 그녀를 만나러 달려갔다. 그리고 둘의 만남은 그녀의 말대로 진짜 너무나도 잠간이였다. 커피숍에 앉아 아직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녀자친구는 리별을 고했고 커피가 나왔을 때에는 녀자친구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준이는 아이스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모조리 녹고 플라스틱컵에 맺혔던 물방울들이 모두 사라지도록 오래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깊은 신음과 함께 무거운 머리를 든 준이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이나 앉아있다가 겨우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밤새 얼마나 마셔댔는지 그리고 또 언제 집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으나 아직도 하늘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준이는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엉금엉금 정수기로 기여가 물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오늘따라 비게가 출렁이는 몸뚱아리가 한결 더 무겁게 느껴졌다.
두터운 흑갈색 카텐 사이로 빛이 꾸물꾸물 기여들어오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방안은 어둠이 떡진 준이의 머리칼 만큼이나 두텁게 깔려있었다. 물을 마시고 벽에 기대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달랜 준이는 벽을 짚어가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바지를 내리려다가 그대로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변기를 부여잡고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토악질을 해대도 어제 저녁의 한심했던, 지금 현재 가장 버리고 싶은 그 기억들은 결코 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비여지는 위 속에까지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이 차곡차곡 들어차는 것 같아 준이는 변기를 잡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눈물이 났다. 토악질에 쓰라린 비강 때문인지 아니면 이 령혼을 점점 잠식해가는 괴로운 기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눈물이 났다. 취기에 사라졌다고 믿었던 어제 저녁의 일들이 꾸역꾸역 밀려와 준이의 목을 조여왔다. 준이는 더 이상 토가 나오지 않는 그 입을 통하여 새여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입을 앙다물고 견뎌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 중 하나가 바로 망각이라고 했다. 그 어떤 괴로운 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농도가 희석되여 결국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을 수 있으니 말이다. 준이는 할 수만 있다면 불도 켜지 않은 이 어두컴컴한 화장실에서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지금 이 찢어질듯이 아픈 기억도, 물밀듯이 밀려드는 후회도 모두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그리 되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지는 그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준이의 몸뚱아리가 먼저 신호를 보내왔다. 안 그래도 팽창할 대로 팽창해졌던 오줌보는 쭈그리고 앉은 덕분에 아예 터지기 일보 직전이였고 눈물이 흘러나오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비상을 보내는 뇨의는 그의 슬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우기 이 화장실은 준이 혼자만이 사용하는 공간도 아니였다. 결국 준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아내며 화장실 청소까지 마치고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고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기 그지없었으며 속은 쓰리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살짝 들려진 카텐을 정리하러 가는 그 짧은 순간마저도 준이에게는 크나큰 고역이였다. 카텐 사이를 비집고 힘겹게 흘러들어오던 빛 한줄기마저 차단되니 순간 방을 가득 채운 어둠의 무게가 배는 되여버린듯 싶었다. 결국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준이는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뉘였다. 적막의 밀도마저 높아져버렸는지 유일하게 슬픔을 흘려주던 눈물샘마저 막혀버렸다. 이 작은 공간은 시간마저 멈춰버린듯했다. 준이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대도시 상해에 온 지도 어언 5년차, 준이는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현실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지난 5년 동안 두번의 업종변경과 일곱번의 직장이동은 조금씩 준이를 스스로 하고 싶어하는 일에 가까이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넘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급여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운명의 녀신은 더 이상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마지막 직장이 부도가 나면서 출근한 지 반년 만에 또다시 직장을 잃고 이사까지 한 준이에게 지난 4개월 동안 그 어떠한 회사도 단단히 닫혀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쓰린 속을 달래며 겨우 눈을 뜬 준이는 침대에 누운 채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였다. 오전 11시 11분, 휴대폰 시계의 수자가 모두 같은 수자로 보여진다면 누군가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과연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을 그리워할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면서 준이는 힘없이 휴대폰을 제자리에 다시 돌려놓았다. 그동안 면접통지 한번 없이 집을 사라느니, 영어교육 학원이니, 거기에 잘못 걸려온 전화까지 빼면 준이의 휴대폰은 그야말로 스마트한 시계에 불과했다. 가끔씩 술 한잔 하자던 친구들도 요즘은 련락이 뜸해졌고 잘 지내냐는 안부 한번 없는 위챗에는 무음으로 해놓은 여러가지 모임들의 메시지 수자만 멈출 줄 모르고 증가하고 있었다.
맞은편 방에 살고 있는 커플이 점심을 하고 있는지 향기로운 냄새가 문틈을 스멀스멀 비집고 들어왔다. 한참 전에 한 토악질 때문인지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준이는 시장함을 느꼈다. 주방에는 엄연히 준이만의 공간이 배정되였지만 거기에는 가끔씩 준이한테 들리던 녀자친구가 밥을 해준다고 사들였던 식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먼지만 먹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준이는 밥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재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준이는 자신의 비대한 몸을 겨우 일으켜 책상으로 다가가 어지러이 널려있는 음식물 배달전단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해장국을 배달해줄 조선족 식당을 찾아 해장국을 시키고는 컴퓨터를 켰다. 지금 이 상황에서 컴퓨터를 켜봐야 일을 할 수는 없어도 그거라도 켜지 않는다면 완벽한 혼자라는 사실에 더욱 서글퍼질 것이 자명했다. 아무 소리라도 이 어두컴컴한 작은 방을 메워야만 했다. 평소에 즐겨보던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을 틀어놓았지만 준이는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방청객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지금의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아서 오히려 기분이 더욱 다운되였다.
해장국 한그릇, 밥 두도시락, 서비스로 온 깍두기 몇점, 이것이 준이의 점심식사였다. 준이는 아무 드라마나 하나 틀어놓고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밥을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틀어놓았지만 그의 몸은 계속하여 땀방울을 쏟아냈고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니 겨우 속이 풀리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오자 준이는 순간 편안함을 느꼈고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밥 한그릇이 슬픔으로 차고 넘쳤던 마음을 위로해서가 절대 아니였다. 오히려 그것은 어제 저녁의 그 곤혹을 치르고도 변함없이 허기를 느끼는 배알 없는 자신의 몸뚱이 때문이였고 녀자친구로부터 받은 질책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였으며 구제불능의 자신에 대한 끝없는 패배감 때문이였다.
실컷 울고 났더니 어제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커피숍으로 들어오던 그녀의 싸늘한 눈빛은 평소에 익숙했던 그녀의 것이 아니였다. 순간 불안감이 준이를 두텁게 감쌌다. 잘 지냈냐는 안부 말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던,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던 그녀의 그 아름다운 붉은 입술 사이로 헤여지자는 말이 튀여나오는 순간 준이의 령혼은 나락으로 떨어지는듯하였다. 지금의 준이에게 그녀의 리별선고는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준이는 묻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었냐고, 그동안의 추억이 소중하지 않았었냐고, 함께 미래를 꿈꾸지 않았었냐고, 지금 빈털터리여서 리별을 고하는 것이냐고, 너한테 나는 겨우 이 정도의 사람이였느냐고… 하지만 준이는 그 말들을 결코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자비감이 아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입술에 닿았던 그녀의 그 아름다운 입술에서 긍정을 얘기할가봐 오는 두려움 때문이였다.
모든 감정을 무너지는 억장 속에 감춘 준이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여나왔다. 나와 헤여지려는 리유가 나의 뚱뚱함 때문이냐고. 어쩌면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비참함을 감추려는 준이의 마지막 절규였을지도 몰랐다.
그 말을 하던 순간 준이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올라 겨우겨우 내뱉은 그 한마디는 결국 울먹임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되돌아온 그녀의 대답에 준이는 그녀에게 한번만 용서해달라는, 앞으로는 진짜 잘하겠다는, 제발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애원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결코 뚱뚱한 오빠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자신의 뚱뚱함을 비관으로 일관하는 자신감 없는 오빠가 싫을 뿐이고 자신의 뚱뚱함을 혐오하면서도 그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오빠가 싫을 뿐이고 날씬함을 동경하면서도 도전조차 하지 못하는 겁쟁이 오빠가 싫을 뿐이야.”
일정한 속도로 높낮이 없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던 그녀의 리별에 대한 리유, 노트에 적어 달달 외우고 나온 것이 아니였나 의심이 갈 정도로 조리정연한 그녀의 말은 결코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너무나도 비참했다.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했고 좀처럼 곁을 주지 않던 녀자친구로 인해 끓어오르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성인영화를 틀어놓고 그 날 아침 보았던 이웃 녀자의 뽀얀 젖가슴을 상상하며 마스터베이션을 했던 그 날 밤보다도 더욱 비참했다.
또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울었을가? 실컷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흘러나올 눈물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칠 대로 지친 준이는 한결 편해져버린 마음으로 어제 저녁 그녀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감, 노력, 겁쟁이… 처음 상해에 왔을 때만 해도 이러한 단어는 자신의 사전에는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위해 미친듯이 뛰였던 추진력과 실수는 단지 경험일 뿐이라는 패기는 준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엔진과도 같았다. 준이는 멈출 줄 몰랐고 반복되는 야근에 야식으로 인해 뚱뚱해져가는 몸매와 떨어져가는 체력을 위하여 평소에는 시도조차 안했었던 산책을 시작했고 스스로 자신을 가꾸려는 시도도 했었다. 그 때의 자신은 그랬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의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은 명백한 루저였다.
마음이 차분해지니 그녀의 리별통보 역시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어쩌면 그녀는 일찍부터 조금씩 조금씩 준이와의 리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전화를 하면 예전처럼 따듯하게 대화를 이어나간 것이 아니라 일이 바쁘다든지 아니면 졸리다든지 하면서 서둘러 대화를 끝냈고 만나자고 하면 몸이 안 좋다든지 친구가 놀러 왔다면서 만남을 피해왔었다. 몇 안되는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 둘 챙겨가거나 실수라는 리유로 준이가 주었던 집의 열쇠를 두고 가기도 했다. 번호를 바꾼다는 리유로 준이와의 커플료금제 서비스를 끊었을 때 이미 깨달았어야 했다. 아니, 준이가 사준 옷과 액세서리가 보이지 않았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그리고 늘 바르던 향수가 바뀌였을 때, 무언가 결단을 할 때면 늘 횡액을 당해야만 했던 긴 생머리가 짧아졌을 때, 어머니가 늘 건강하시라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너희들 무슨 일이 있냐고 자신을 다그치던 그 모든 순간 알았어야 했다. 그녀는 이미 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점 하나가 더 붙어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대가 치고는 너무나도 컸다. 그 날 밤 준이는 자신의 작은 방에 꼭 어울리는 그 작은 창문가에 서서 고요히 잠들어버린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손가락을 꼽아가며 찾고 또 찾았다.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시간은 알아서 흘러갔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슬퍼 9층의 단칸 방 그 작은 창을 통해 확 뛰여내릴가 하는 생각을 했던 시간도, 밥은 잘 먹고 있냐는 어머니의 따듯한 말 한마디에 통화를 끝내고 눈물을 흘렸던 시간도, 집을 사라는 부동산의 광고전화에 처음으로 욕설을 퍼붓고는 바보 같이 가슴 졸였던 조마조마했던 시간도 어느덧 모두 흘러간 시간이 되여버렸다. 준이는 매일매일 잠자는 시간과 먹고 싸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미친 사람처럼 번역일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마감일 2주 전에 일을 마무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준이는 오랜만에 보람을 느꼈다. 지난번 통역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 주 주중에 또다시 통역을 나가게 된 것도 조금의 여유를 만들어주었다. 친구의 공주님 돌잔치에 내여놓을 축의금 500원에 똥줄이 바짝바짝 탔던 시간은 어느덧 희미해져갔다.
준이는 오랜만에 외출을 준비했다. 돌잔치에서 만났던 또 다른 친구의 권유로 바드민톤을 하러 가려는 것이다. 일도 마무리했고 준이도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기에 오늘의 약속을 펑크낼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물론 다음 주와 다다음 주에 들어오게 될 돈들이 준이의 망설임을 깨끗이 없애준 것도 한몫 했지만 말이다.
친구와 함께 들어간 바드민톤 구장은 동네 중학교의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준이는 구장에서 확 뿜어져나오는 열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합성과 함께 흘러나오는 투지도 있었겠지만 문자 그대로 구장은 엄청나게 더웠다. 한여름이라 밖의 날씨도 무더웠는데 구장은 그보다 더했다. 준이는 순간 저번에 갔던 사우나가 떠올랐다. 이것이 정녕 사람한테서 뿜어져나오는 열량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에 놀라웠고 이렇게 더운 곳에서 저렇게 즐겁게 운동할 수 있다는 것이 준이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이 없었다.
바드민톤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고향에 있을 때 길가에서 친구들이랑 가끔 해봤을 때는 몰랐는데 정작 해보니 잘 맞추지도 못했고 멀리까지 콕을 날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이였다. 결국 준이는 15분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포기를 선언했다. 숨은 턱끝까지 차올랐고 요동치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여나올 것 같았다.
“어때? 생각보다 쉽지 않지? 이거 은근 운동 된다니까. ”
맨땅에 축 늘어져있는 준이에게로 다가와 큭큭거리면서 웃는 친구에게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숨을 헐떡이던 준이는 그만 가보라는 손시늉을 하고는 열심히 반복 동작을 련습하는 사람들을 존경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이렇게도 나약한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한참을 쉬고 난 준이는 코트가 비자 다시 도전을 했다. 몇번이고 쉬고 재도전하기를 반복한 준이는 활동이 끝날 즈음에는 완전 녹초가 되여버렸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동공은 풀려버렸다.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 속으로는 이걸 계속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까지 들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땀을 듬뿍 쏟아내서 그런지 가슴만은 후련했다.
집으로 돌아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겨우 달래며 샤워를 마친 준이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준이가 깬 것은 밝음보다는 아직 어둠이 좀더 많은 새벽이였다. 몸 구석구석이 쑤셔났지만 준이는 씨익 웃을 수 있었다.
준이는 참으로 오랜만에 아침산책을 나왔다. 어제 무리한 운동을 했으니 자기 전에 찜질이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지를 못했으니 이렇게라도 근육을 풀어주면 근육통이 줄어들 것이라는 걸 준이도 잘 알고 있었다. 산책을 하는 내내 준이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운동을 했다는 희열보다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는 것이 준이의 가슴을 설레게 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신입이라고 준이에게 이것저것 얘기해주던 동호회 회원들과의 만남도 너무나 신선했다. 준이는 그 때 자신의 가슴을 뛰게 했던 대화들을 다시 떠올렸다.
“바드민톤은 처음이라고 하시던데 생각보다 빨리 배우시네요.”
“네. 맞아요. 배운 걸 금방 금방 소화하시고. 혹시 다른 데서 하다 오신 것 아니예요?”
여기저기에서 듣기 좋은 얘기들이 들려왔다.
“처음 맞아요. 사실 저도 왕년에는 운동 좀 했는데 보다 싶이 지금 요 모양 요 꼴이라 너무 힘드네요.”
준이는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누군가의 칭찬도 오랜만이라 살짝 어색하기도 했다.
“하다 보면 살은 빠지게 돼있어요. 이거 운동량 생각보다 많거든요.”
“네. 여기 다이어트 성공하신 분들 꽤 돼요. 그리고 힘도 좋으시니 금방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능성이 보여요.”
준이는 자신의 비대한 몸을 가리키면서 이 거대한 몸뚱아리를 지탱해나가는데 그 정도 힘도 없다면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힘을 얻은 대신 민첩함과 지구력을 잃었다는 말 한마디로 주위 사람들을 온통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저들의 웃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준이는 좋았다. 가능성이 보여요라니, 이 얼마 만에 듣는 희망찬 단어란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준이의 입에서 저도 몰래 웃음이 터져나왔다. 산책하는 와중에 팔을 주무르고 어깨를 휘휘 돌리던 준이는 내친 김에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빠트단지 둘레에 나있는 길을 반도 뛰지 못하고 준이는 다시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뛰기에는 아직 무리인듯 싶었다.
그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던 준이의 일상에 바드민톤이라는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였다. 준이는 여전히 찾아주는 통,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기회만 되면 이곳저곳 리력서를 넣었고 면접을 보고 퇴짜를 맞았다.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재삼 확인하는 와중에도 준이는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산책과 함께 간단한 조깅을 곁들였고 한주일에 두번 있는 바드민톤 동호회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준이가 처음으로 동호회 회식에 참여한 것은 찌는듯한 무더위가 한풀 꺾인 늦가을이였다. 술잔을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준이는 아늑함을 느꼈다. 자신과 함께 어울리며 웃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준이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것이 회식은 비용이 얼마가 나오든 무조건 더치페이라는 말에도 이 자리에 당당히 나올 수 있는 리유이기도 했다. 그동안 작은 방에서 홀로 외로움을 삭혔던 시간들이 오히려 억울하게만 느껴졌다. 왜 그 작은 방을 진작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지 후회가 되기까지 했다.
준이도 이제는 초보티를 완전히 벗어나 어느덧 다른 회원들과 경기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실력도 조금 붙었고 말이다. 무르익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준이는 동호회 회장에게 어떻게 하면 바드민톤을 잘 칠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누군가에게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는 것은 언제나 준이에게는 망설여지는 일이였다. 경쟁이 치렬한 회사생활에서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잠재적인 경쟁자를 만든다는 인식이 짙게 배여있던 준이에게는 무언가 하는 방법을 묻는다는 그 간단한 행위마저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였다. 하지만 생각 밖으로 시원하게 답이 흘러나왔다.
“간단해요. 모르는 것은 묻고 배우고 나면 반복적으로 련습하고 그러다 보면 잘 치게 돼있어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바닥에서부터 한걸음 한걸음 걸어야 정상 가까이라도 가는 거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르면 물어보고 틀리면 고쳐야 한다는 것이예요. 안 그랬다가는 누구처럼 맨날 제자리 걸음만 한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해요.”
회장의 눈길은 친구녀석에게로 향했고 모두가 맞는 말이라면서 왁자지껄 웃어댔다. 지적을 당한 친구녀석은 머쓱한지 앞으로는 정말 잘하겠습니다를 웨치며 건배를 제안했고 다들 그에게 호응해줬다. 준이는 조금 놀랐다. 자신이 보기에도 친구 녀석은 꽤나 실력이 있어보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였던듯 싶었다.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온 준이는 동호회 회장이 했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동안 준이는 잘 묻지도 않았고 어떻게든 스스로 방법을 찾으려고 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말해줘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을 신념이라고 믿었으며 언젠가는 저들보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겨우 그것이 어쩌면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숨 좀 돌리는 중. 그러는 넌?”
“난 화장실 잠간. 야, 담배 좀 줘봐.”
“여기.”
“근데 너 생각보다 인기 있더라?”
담배를 받으면서 친구 녀석이 툭 던진 한마디에 준이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냐?”
“누구 너 녀자친구 있냐고 은근슬쩍 떠보길래 있다고 그랬거든.”
“누가 그랬는데?”
“녀자친구도 있는 녀석이 별거 다 궁금해한다. 얼른 들어와. 너 신고식 해야 한다고 다들 난리다.”
가게로 들어가는 친구녀석의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준이는 자신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 대학교 때를 제외하면 참으로 오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준이는 가게 유리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잔뜩 부풀었던 몸은 어느새 많이 줄어있었고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찾기 힘들었던 목 우에는 턱선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이 은근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듯했다. 이제는 거울을 외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녀자친구라… 준이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번호를 눌렀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련락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폰에서 지워버린 번호지만 마음에서까지 지워진 건 아니였나 보다. 한번도 잡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놓아버린 것도 아니였나 보다. 이 번호 너머에 그리운 그녀의 목소리가 있을 테지만 준이는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녀를 잊은 것은 결코 아니였다. 그녀가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였다. 지금도 그 작은 방에 적막이 찾아올 때면 그리고 혼자라는 것을 의식할 때면 늘 그녀가 먼저 떠올랐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제보를 받지만 않았어도 전화를 했었을가?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매달렸었을가?
헤여진 녀자친구를 떠올리던 준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스스로에게 변화를 주기까지 준이는 적지 않은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한테 필요했던 시간 만큼 그녀 역시 리별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저런 리유로 자신과의 만남을 피하고 열쇠를 돌려주고 어쩌면 그녀는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오는 만큼 자신을 밀어낸듯 싶었다. 이 모든 것이 준이 자신만의 상상이고 핑게였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배신했다는, 자신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패배자의 자격지심이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이는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시간은 흘렀고 그 자리에 멈춰서있던 것은 자신 뿐이였으니까.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이 떠안아야 할 인과응보였으니까. 그것들을 인정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결국 준이는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였다. 다만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기를 바랐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색다른 느낌보다 더.
몸을 돌리니 가게 유리창으로 아직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얘기가 오고가는 것인지 친구 녀석이 자리에 선 채 손짓발짓을 하고 있었고 그 녀석한테 눈길을 주고 있던 사람들은 손벽을 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역시나 재주가 좋은 녀석이였다. 저들한테 완전히 녹아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았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이름 정도는 부를 수 있으니까. 아직 신고식이 남았다고 했나? 저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걸린 준이는 힘차게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온 준이는 습관처럼 컴퓨터를 켰다. 이 작은 방에서 준이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준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면접소식이 와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 만에 받아본 면접소식인지 준이는 마냥 기쁘기만 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는 아니였다. 그가 8개월 정도 일하면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업종의 면접통지였고 준이는 가능하다면 자신이 원하는 업종의 면접통지를 받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기회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지나간 시간들이 충분히 인지시켜주고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게 업무 내용은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준이는 그동안 했던 면접들을 떠올리며 예상질문과 표준답안들을 하나하나 머리 속에 적어나갔다. 왠지 느낌이 좋은 밤이였다.
준이는 참으로 오랜만에 일찍 깨여났다.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든 것도 있겠지만 그동안 알람 작용만 열심히 해왔던 폰이 드디여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 것도 리유라면 리유였다. 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두텁게 감싸고 있던 카텐을 열어젖혔다. 아직 이른 시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창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준이는 오라지 않아 자신도 저들 사이의 한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깊게 심호흡을 한 준이는 어제저녁 잠들기 전 머리 속으로 떠올렸던 사항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스스로를 가다듬어나갔다.
준이에게 아침이 온다는 것은 늘 그랬던 것 같다.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자박자박하는 발걸음 소리, 아마도 조금만 지나면 하얀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또다시 그 눈부신 동체를 자랑하며 샤워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동거인은 언제나 그랬듯이 파수군이라도 된듯 함께 화장실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화장실에 온갖 체취를 남긴 채 솔로인 자신과 앞방 남자를 홀릴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준이는 충분히 그 모든 것들을 미소로 화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다시 자신의 작은 방을 가득 메우는 샤워기의 물 뿌려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준이는 카텐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창문으로 창턱을 종내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뜨거운 해살이 지저분한 준이의 작은 방에 물밀듯이 밀려들면서 두텁게 깔려있던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이는 얼마 만인지 모를 아침해를 온몸으로 느꼈다. 눈부셨다. 따스했다. 그리고 달콤했다. 작은 방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해살과 함께 이른 아침의 열정이 함께 밀려들었다. 준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화장실이 비워지기만을 기다렸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드디여 화장실의 문이 닫혔다. 그리고 자박자박하는 발걸음소리와 함께 그녀들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준이는 앞방 남자에 앞서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아직 그녀들의 체취가 짙게 묻어있는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세안하고 머리를 감았다. 여기저기 흥건히 젖어있는 물기와 그녀들이 떨어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준이에게 묘한 흥분으로 다가왔다. 화장실 바닥에 빈틈없이 배여있는 물기로 넘어질 번한 순간까지 말이다.
화장실 문을 나선 준이는 앞방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등뒤로 그녀들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준이는 처음으로 앞방 남자한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그 남자의 인사를 받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막 집문을 나서는 그녀들의 뒤모습을 맞이했다. 뒤모습까지 아름답다는 생각에 준이는 씁쓸함을 느꼈지만 준이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저기요. 두분, 저 잠간 보실가요?”
느닷없는 준이의 부름에 막 집문을 나서려던 두 녀자는 몸을 돌려 준이이게 눈길을 주었다. 대답 하나 없이 오로지 혐오로 가득한 그녀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준이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기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아침에 샤워를 하더라도 최소한 물기 정도는 제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청소하는 아줌마가 올 건데요.”
“네. 그렇겠죠. 어지러이 널려있는 머리카락은 치워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쪽 분들 뒤에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물기 정도는 치워주는 것이 례의가 아닐가 생각합니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준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조차 않는 그녀들에게 향했던 눈길을 돌려 앞방 남자한테 보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신기한듯한 눈빛을 보내는 앞방 남자와 그녀들을 뒤로 하고 준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막 닫히려는 문틈 사이로 의외라는듯한 앞방 남자의 눈빛과 재수없다는 말을 꺼리낌없이 하는 그녀들의 소리가 함께 새여들어왔다. 그래도 준이는 기분이 좋기만 했다. 준이가 들어선 방은 더 이상 그 어두컴컴한 작은 방이 아니였다. 그 방은 따스한 아침해살이 가득찬 밝고 활기찬 방이였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준이는 하루라도 빨리 이 좁아터진 방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준이는 오랜만에 몸에 착 달라붙는 셔츠의 그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다. 그리고 숨통을 조여오는 넥타이의 꽈악 조여오는 압박감도 좋았다. 작은 방을 빈틈없이 메워오는 샴푸의 그 익숙한 향도 달라보였다. 구석에서 먼지만 먹어가다 오랜만에 준이와 함께 뾰샤시한 모습으로 나타난 구두도 반가웠다.
준이는 가방을 둘러메고 방을 나섰다. 닫히는 방문 뒤로 앞으로도 한동안은 준이와 함께해야 할 오래된 노트북과 간이옷장이 준이를 배웅하며 작은 방을 꽈악 채운 해빛 속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출처:<장백산>2019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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