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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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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옥: 엄마의 살구나무(단편소설)
2019년 07월 12일 19시 18분  조회:622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엄마의 살구나무

박명옥

 

“어머! 살구네.”

윤은 불어오는 바람에 젖은 머리를 손빗질하며 걷다가 동네 과일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빠트 커뮤니티에서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였다. 과일가게는 이제 막 문을 열고 통로를 향한 창가 쪽에 과일을 예쁘게 진렬하고 있었다. 사과와 배는 물론 복숭아와 멜론, 수박과 같은 제철 과일이 바구니나 나무박스에 수북수북 담겨있었다. 살구는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구석 쪽 작은 바구니에 소복이 담겨있었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소박한 비주얼이였다. 

윤은 살구가 담긴 바구니 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살구를 한알 집어들었다. 주황과 빨강으로 적당히 물든 살구는 입에서 군침이 돌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윤이 관심을 보이자 과일가게 사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요즘 살구 맛있어요. 싸게 드릴게 한봉지 담아가셔요.”

평소 같으면 무슨 과일이 이리 비싸냐고 타박을 했을 윤이지만 아무 소리 안하고 과일가게 사장이 담아주는 대로 살구 봉지를 받아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엘레베터를 기다리면서 윤은 봉지를 살짝 열고 코끝에 갖다 댔다. 달콤하고 향긋한 과일향이 풍겨왔다. 윤의 마음은 어느덧 35년 전 작은 시골마을 뒤마당에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는 풍경 속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형체도 없지만 윤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집 마당에도 큰 살구나무가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수령이 꽤 됨직한 살구나무는 해마다 4~5월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7~8월 되면 노랗게 익은 살구를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윤이네 살구는 보기 드문 참살구였는데 알이 굵고 겉모습은 허여멀쑥하지만 진한 맛이 덜한 백살구나 비주얼 만큼은 화려해 맛있어 보이지만 정작 먹어보면 시큼털털한 개살구와는 달리 진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이였다. 잘 익은 살구를 힘줘서 누르면 반으로 톡 쪼개지면서 살구씨가 톡 튀여나온다. 살구씨는 따로 모아두었다가 말려서 한약으로 쓰기도 했다. 

마을 맨 뒤편에 자리잡고 있던 터라 다른 집에 비해 유난히 마당이 컸던 윤의 고향집에는 앵두, 배,  자두 등 여러가지 과일나무가 있었지만 그중 으뜸은 단연 살구나무였다. 나무가 어찌나 큰지 거짓말 안 보태고 장정 둘이 마주서서 힘껏 팔을 벌려야 간신히 껴안을 정도였다. 나무가 크니 살구가 많이 열릴 때는 앞집, 옆집, 뒤집에서 빌려온 고무 다라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 때는 과일이 많이 열려도 팔 생각은 못하고 동네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살구가 빨갛게, 노랗게 익다 못해 바닥에 한두개씩 떨어지면 엄마는 가족들을 불러모았다. 엄마, 오빠, 윤과 녀동생이 나무 밑에서 큰 비닐을 한 귀퉁이씩 잡고 서있으면 아버지는 긴 나무막대기로 살구나무 가지를 툭툭 건드렸다. 살구가 후두둑 비닐 우로 떨어질 때마다 윤과 녀동생은 살구가 머리 우로 떨어질가봐 “아악~” 비명을 질렀고 오빠는 그 때마다 “호들갑 좀 떨지 마.” 하면서 눈을 부라렸다. 비닐 우로 떨어진 살구들은 고무 다라에 모았다가 다시 크고 작은 대야와 바가지에 가득가득 담겨졌다. 윤과 녀동생은 바가지를 들고 앞집으로 옆집으로 뒤집으로 심부름을 갔다. “엄마가 갖다 드리래요~” 하면 동네사람들은 “아이구 맛나겠다. 엄마한테 잘 먹겠다고 전해~” 하면서 빈 그릇을 그대로 돌려주는 법이 없이 뭐라도 채워서 윤의 손에 들려줬다. 시골에 살기는 하지만 농사를 짓지 않았던 엄마는 그녀가 받아온, 밭에서 방금 따온 배추며 무우, 상추, 쌀독에서 퍼온 쌀과 잡곡, 하다못해 집에서 먹다가 덜어준 반찬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살구 덕을 톡톡히 보네.” 하고 뿌듯해했다. 

살구 덕을 보기는 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잘난 척하고 까칠하게 굴던 친구들도 살구가 익을 때가 되면 괜히 그녀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친한 척을 했다. 어떤 아이는 아끼는 공책이나 연필 지우개를 통 크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 아이들에게 살구를 한줌씩 주고 “넌 좋겠다. 이렇게 맛있는 살구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서…” 부러움을 한눈에 받을 때는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한철이긴 했지만 윤은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할 수 있었고 한때나마 아이들에게 떠받들려 지내던 기억은 오래도록 윤에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어느 해엔가 살구나무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살구가 많이 열려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주고도 남게 되였다. 엄마는 “썩여버리느니 한번 팔아나 보자.” 하며 고무 다라를 이고 마침 동네서 열리던 체육대회로 향했다. 그 때 일년에 한번 열리는 체육대회는 향乡에 소속된 근처 마을 사람들이 바쁜 농사일을 잠시 내려놓고 배구, 축구와 같은 경기를 하며 먹고 즐기는 동네 잔치 한마당이였다. 윤이네 살구는 체육대회에서도 단연 인기를 차지해 담배 한대 필 새에 살구 한다라는 매진되였다. 엄마는 생각보다 큰 돈을 손에 들고 약간 떨떠름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해에도 엄마는 살구 다라를 이고 체육대회로 향했다. 한다라를 금방 팔고 들어와 또 한다라를 이고 갔다. 엄마의 살구 장사는 그 뒤로도 쭉 이어졌고 몇년 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벽돌집으로 이사한 뒤 엄마는 집 앞에 딸린 작은 방에 길가로 향한 출입문을 따로 내고 작은 식료품가게를 오픈했다. 수년간의 살구 장사 경험이 엄마가 가게를 오픈하는 데 큰 도움이 되였을 거라고 윤은 생각했다. 

사실 엄마의 장사 경험은 살구가 처음이 아니였다. 윤이 어릴 때 아버지는 농구창(농기구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엄마를 비롯한 공장 식구들은 여름 한철 공장측에서 마련해준 얼음과자 기계로 얼음과자를 만들어 판매했다. 사탕 과자가 귀했던 시절이라 달콤한 얼음과자는 더운 여름에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였다. 비록 물에 사카린을 대충 타서 틀에 얼린 이름 뿐인 얼음과자였지만 아이들은 다 먹은 나무막대기까지 쪽쪽 빨아먹을 정도로 얼음과자를 사랑했다. 밖에서 뛰놀다가 땀을 흠뻑 흘린 상태에서 시원하고 달콤한 얼음과자를 한입 베여물 때의 그 기분이란.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엄마가 일하는 얼음과자 공장에 들리면 그 맛있는 얼음과자를 량껏 먹을 수 있었다. 윤의 어린 시절 또 다른 행복한 추억이였다. 

얼음과자 공장은 많이 팔든 적게 팔든 월급만 받으면 그 뿐이였지만 엄마는 다른 돈벌이 방법을 생각해냈다. 일이 끝난 늦은 저녁이나 주말이면 엄마는 얼음과자가 든 아이스 박스를 경운기에 싣고 몇십리 떨어진 근처 마을로 장사를 다녀왔다. 근처 마을은 윤이 사는 소재지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져있어서 어른들은 가끔 소재지 마을로 볼일을 보러 왔다가 집에 있는 아이들이 생각나 얼음과자를 사주고 싶어도 가는 길에 다 녹을가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개당 5전 하는 얼음과자에 조금씩 마진을 붙여 팔아도 너무 고맙다고 좋아했다. 공장측에 재료비 떼주고 경운기 기사 수고비 챙기고 남은 돈은 오롯이 엄마 몫이였다. 엄마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이들의 학용품을 사주었고 철마다 옷과 신발도 바꿔주었다. 새옷과 신발을 받는 것은 기쁜 일이였지만 윤은 엄마가 무거운 얼음과자 상자를 내리다가 발등에 찍힌 상처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 늘 일에 쫓기던 엄마는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다. 그 상처들은 오래도록 엄마를 괴롭혀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엄마는 묵은 상처에서 오는 통증 때문에 힘들어했다. 

엄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집과 멀찍이 떨어진 마당에 나무토막으로 대충 우리를 만들고 돼지 두세마리씩 키웠다. 봄에 아기돼지를 사다가 여름 내내 열심히 키워 가을에 팔면 꽤 쏠쏠한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 엄마는 마당에 낡은 솥을 따로 걸어놓고 아침마다 돼지한테 먹일 죽을 한솥 끓여놓고 일하러 가면서 윤에게 학교 다녀오면 돼지죽을 챙기라고 신신당부했다. 윤은 대답은 시원스레 했지만 학교 끝나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다 보면 늘 엄마의 부탁을 까먹기 일쑤였다. 그 때는 벼농사와 함께 담배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담배를 건조시키기 위해 만든 흙집이 빙 둘러서있는 가운데 자연스레 공터가 생겨 아이들이 뛰놀기에 딱 좋았다. 책가방을 한켠에 집어던지고 신나게 술래잡기도 하고 고무줄 놀이도 하다가 퍼뜩 엄마 부탁이 생각나서 헐레벌떡 뛰여가면 엄마는 벌써 돌아와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땀 범벅이 된 윤의 몰골을 보고 짐작이 된다는듯 혀를 끌끌 차며 “또 돼지죽 주는 거 까먹었지? 엄마가 뭐라고 그랬어? 놀더라도 돼지죽 먼저 주고 놀라고 안했어?” 야단을 쳤다. 

엄마는 닭도 여러마리 키웠다. 덕분에 윤이 형제는 매일매일 신선한 닭알을 먹을 수 있었다. 여름이면 닭 배설물 냄새 때문에 좀 불편하긴 했지만 아침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마자 닭장으로 달려가 금방 낳은 신선한 닭알을 꺼내올 때면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매번 닭장 앞에서 어린 윤은 제발 닭이 알을 많이많이 낳았기를 기도했다. 엄마는 늘 아버지와 오빠를 먼저 챙겼기 때문에 한두알 뿐이라면 윤의 몫은 없었기 때문이였다. 특히 병약한 오빠는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여서 엄마는 아침마다 찹쌀가루에 닭알 한알을 톡 깨서 넣고 뜨거운 물에 개서 주곤 했는데 윤은 그것이 너무 부러웠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오빠만 편애한다고 여기고 나중에 크면 찹쌀가루 반죽을 원 없이 먹어야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식료품가게를 차리고 난 후 엄마는 그나마 자질구레한 부업에서 해방되였다. 적어도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할 필요가 없었고 그 자리에서 돈을 받고 물건만 건네주면 다였다. 대신 자유가 없었다. 일년 365일 쉬는 날 없이 문을 열어야 했고 문에 매단 종이 딸랑 울리면 밥을 먹다가도 뛰여나갔고 화장실도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번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해서 그런지 엄마는 점점 무릎이 아프다고 했고 일어날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신음을 하곤 했다. 

가게를 차린 뒤에도 엄마의 넉넉한 인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는 지나가는 아이들을 불러들여 사탕 몇알씩 쥐여주었고 무게로 파는 술이나 사탕 과자도 저울추가 쑥 올라갈 정도로 넉넉히 담았다. 덕분에 윤이네 가게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랑방이 되여갔다. 사람들은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윤이 엄마 있소?” 하면서 들어와 한참을 수다를 떨다 돌아갔고 은행이나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도 꼭 들렸다 가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가까운 상점을 놔두고 굳이 윤이네 가게에서 물건을 사기도 했다. 

윤이 현성에 있는 고중을 마치고 대도시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그리고 결혼할 때까지 엄마는 작은 식료품가게를 계속했다. 말단 공무원이였던 아버지의 월급만으로 다섯 식구 먹고 살기 힘들던 때 엄마의 식료품가게는 생계에 큰 보탬이 되였다. 윤은 그 후로 오랜 시간 동안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살구가 가득 담긴 커다란 고무 다라를 이고 가던 엄마의 뒤모습과 식료품가게 출입문에 매단 종소리를 듣고 에구구 무릎을 짚으며 일어나던 엄마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곤 했다. 

“별일 없냐? 왜 전화도 안하고… 하도 전화가 없어서 무슨 일이 있나 근심했다.” 

전화기에서 아버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주에 한번, 늦어도 2주를 넘기지 않으려고 하지만 전화할 때마다 아버지는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정년퇴직을 하고 아버지는 별다른 소일거리 없이 집에서만 지냈다. 오전 오후 30분씩 산책하는 것 말고는 TV를 보거나 담요를 펴놓고 카드놀이를 했다. 친구들 만나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늘 아팠다.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다는 타박과 여기저기 아프다는 하소연이 아버지가 무한 반복하는 레퍼토리였다. 다리도 아프고 가슴도 답답하고 심지어 치아가 안 좋아 잘 씹을 수 없다고 했다. 그마저도 아프지 않을 때는 화장실 가기 힘들다고 했다. 변비약을 매일 먹는데도 화장실 가기 힘들다며 어쩌겠냐, 나이를 먹었으면 죽어야지 하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아버지 자꾸 아프다고 그러는데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오히려 건강념려증에 걸린 것 같아.” 

녀동생은 아버지의 증세를 그렇게 단정지었다. 

“어디 조금만 불편해도 바로 병원부터 뛰여가는데 뭐. 저번에도 변비 심하다고 대장내시경 하러 갔더니 의사가 그만 오라고 했대. 대장내시경도 너무 자주 하면 안 좋다고. 아마 아버지도 할머니처럼 오래오래 사실 거야.”

처음에는 윤도 녀동생처럼 아버지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온갖 약이며 건강보조제품을 바리바리 사서 보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대신하고 싶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아버지마저 떠나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 같은 것도 있었으리라. 지금은 레퍼토리의 후유증 때문인지 아버지가 아프다고 해도 덤덤하게 래일 병원 다녀오세요 하고 만다.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윤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었다. 한창 나이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망하게 세상을 뜬 엄마를 생각하면 그 모든 게 아버지 탓인 것 같아서 리유 없이 막 밉다가도 또 엄마가 없는 십수년의 세월을 마음 붙일 데 없이 여기저기 떠돌며 눈칫밥 먹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없이 짠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 모순된 마음으로 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다가 머뭇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몇년에 한번 볼가말가한 물리적인 거리, 눈에 띄게 로쇠해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여든을 바라보는 년세를 새삼스레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있을 때 잘해야지 하다가도 아버지가 한번씩 엄마 얘기를 하며 윤의 속을 긁을 때면 한동안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곤 했다. 

윤이 기억하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의 모습은 늘 엄격하고 딱딱했다. 잘 웃지도 않았고 늘 뭔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말투도 윽박지르듯했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벌컥벌컥 냈다. 집안 분위기는 늘 가라앉아있었고 식구들은 아버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지금 아버지의 늙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 아버지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아버지는 관공서에 볼일을 보러 가는 것도 두려워했고 사람들이 자신을 늙고 병든 로인네 취급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할 수 없지 뭐. 다 늙은 로인네를 누가 대우해주겠냐.”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윤은 가끔 아버지가 마흔을 훌쩍 넘긴 자식의 건강을 걱정한다거나 손주들과 함께 있을 때 껄껄 웃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늙긴 늙었구나 싶어 마음이 씁쓸했다. 

아버지는 5남매의 장남이였다. 할머니는 자식을 9명이나 낳았지만 5남매만 살아남았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밑에 동생들과 나이 차이도 꽤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군대 가있을 때 할머니가 막내삼촌을 낳았다는 전보를 받았다는 얘기를 하며 “그 때는 시어머니랑 며느리랑 같이 출산하는 일이 많았지 뭐.” 하고 혀를 끌끌 찼다. 할머니가 그 때까지 생산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당시 중학생이였던 윤은 적잖이 충격이였다. 실제로 막내삼촌은 윤의 오빠와 6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시집왔더니 막내삼촌이 얼굴에 때국물이 꾀죄죄한 채 엉덩이를 드러낸 내복을 입고 누룽지를 먹고 있더라.” 라는 얘기는 윤이 자라면서 엄마에게서 수십번도 더 들은 얘기였다. 

6살 짜리 막내시동생이 있는 집으로 시집온 엄마, 시작부터 험난한 시집살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부모님과 시누이, 시동생 거기다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살았다. 열명도 넘는 대식구가 전부 엄마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마흔 후반 밖에 되지 않았던 할머니는 며느리를 보자마자 부엌일에서 손을 떼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식구의 삼시세끼와 청소, 빨래는 아무 것도 아니였다. 엄마는 대부분 시간을 밭에서 보냈다. 군대에서 10년 가까이 복무한 경력으로 정부기관에서 말단 공무원 직을 맡고 있던 윤의 아버지는 농사를 짓지 않아 월급으로 쌀을 사먹어야 했다. 쥐꼬리 만한 월급은 대식구가 먹을 쌀과 부식품을 구입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엄마는 동네를 지나다가 손바닥 만한 자투리 땅만 보여도 호미로 밭을 일구고 가지, 고추, 오이 등 닥치는 대로 심었다. 엄마는 쉼 없이, 매일매일 투쟁하듯 일만 했다. 새벽에 별을 이고 나갔다가 밤 늦게 달을 이고 돌아왔다. 다람쥐 채바퀴 돌듯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해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누이, 시동생들이 시집 장가갈 나이가 되여 없는 살림에 넷이나 되는 동생들을 결혼시키고 나니 숟가락 몇개 남지 않았다. 식구는 줄었지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했다. 엄마는 쉴 수 없었다. 엄마가 하루라도 쉬면 당장 다음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 때 얘기를 하자면 “아마 책을 몇권 써도 모자랄 거야.” 하며 엄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에야 그렇게 살라고 하면 싫다고 하겠지만 그 때는 왜 바보 같이 그리 살았나 모르겠다.”

동생들을 시집 장가 보내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실질적으로 동생들의 부모역할을 했던 아버지는 유난스럽다 할 정도로 동생들을 챙겼다. 엄마가 뼈빠지게 일해서 모은 돈은 거의 동생들 뒤바라지에 들어갔다. 마냥 순둥이 같던 엄마도 끔찍할 정도로 내 부모형제만 챙기는 아버지가 얄미웠는지 한번씩 대들기도 했지만 아버지를 이기지는 못했다. 

“넌 나중에 절대 장남 만나지 말아.” 

윤이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엄마가 입버릇처럼 되뇌던 말이였다.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는데 너희들은 절대 엄마처럼 살지 말아.” 

운명의 장난인지 윤과 녀동생 모두 장남을 만났지만 엄마의 기도가 통했던 건지 엄마가 걱정했던 만큼 시집살이가 힘들지는 않았다. 

윤은 엄마가 오랜 세월 짊어졌을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지금의 윤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였다. 그 무게를 버티느라 정작 엄마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엄마의 인생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과정이였다. 모든 걸 내려놓고 오롯이 가족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 과정. 하지만 지금 어느 누가 엄마의 그런 헌신을 기억하고 있을지.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삼촌과 숙모들, 심지어 엄마가 업어키운 사촌동생들마저 엄마의 빈자리를 조금도 애틋해하지 않았다. 가끔 명절에 한자리에 모이거나 결혼식 같은 집안 행사가 있을 때 윤은 그들이 빈말이라도 엄마를 찾으며 “형(수)님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과 같은 인사를 해주지 않을가 기대했지만 번번이 실망했다. 너무나 빨리 가족들에게 잊혀진 엄마, 그것이 엄마가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대가였다. 

 

뒤마당에 살구나무가 있던 허름한 초가집에서 마을 한복판에 있는 으리으리한 벽돌집으로 이사를 하고 작은 식료품가게를 경영하면서 아버지의 월급 외에 어느 정도 수입이 보장되자 엄마의 살림에도 윤기가 돌았다. 먹을 것이 귀해서 고기나 사탕 과자 같은 귀한 음식이 생기면 서로 눈치 보며 양보하던 일도 옛말이 되여버렸다. 엄마의 가게는 윤이 형제들에게 천당 그 자체였다. 엄마가 팔다 남은 사탕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윤은 너무 행복했다. 가끔은 아이들에게 사탕 한알씩 나눠주며 생색을 내기도 했다. 그 옛날 살구를 나눠먹을 때처럼 아이들은 또다시 윤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엄마는 저녁이면 가게 문을 닫고 시내 장마당에서 산 금고를 열고 하루치 판매수입을 정산했다. 습관적으로 손에 침을 뱉고 하나 둘, 지페를 세던 엄마의 모습, 그 순간 엄마의 얼굴에 피여오르는 뿌듯함과 환희를 지켜보는 일이 윤에게는 또 다른 행복이였다.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찬란한 시절이였다. 윤은 그 행복이 오래오래 가기를, 그래서 엄마가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기도했다. 

그 시절이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만 더 오래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가. 하늘은 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병약해 제 앞가림도 간신히 하던 오빠도 장가를 가 색시를 맞이하고 윤도 대도시에 있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착한 신랑을 만나 결혼하고 녀동생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취직하고 이제 자식들 효도 받으며 복을 누릴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엄마는 거짓말처럼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은 아직도 엄마가 떠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비라도 금방 내릴 것처럼 잔뜩 흐린 수요일,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와 며칠 전 Y시 병원에 입원한 엄마가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저편에는 엄마 대신 외삼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삼촌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젖은 목소리로 조금 전에 엄마가 떠났음을 윤에게 알렸다. 윤은 누군가 망치로 세게 후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뗑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화기에서 외삼촌의 말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12층 회사 사무실이 금방이라도 땅속으로 푹 가라앉을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풍덩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윤을 보고 지나가던 직장 상사가 놀라서 윤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은 남편이 데리러 올 때까지 회사 건물 로비 귀퉁이에 기대서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윤은 엄마가 아픈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아픈 줄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윤에게 그 사실을 속이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되면 나중에 사돈들 볼 면목이 없지 않겠느냐가 아버지가 윤에게 사실 대로 알리지 않은 리유였다. 윤은 그 때 임신 8개월이였다. 윤의 출산에 맞춰 엄마는 윤의 산후조리 해주러 온다고 배내저고리부터 포대기, 천기저귀까지 다 준비해놓고 기차에 오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윤은 엄마와 통화를 했었고 엄마는 “수술만 하면 금방 나을 거야.” 하며 윤을 안심시켰다. 

“엄마 가실 때 눈도 감지 못하고 가셨어. 얼마나 억울했으면…”

엄마의 림종을 지켰던 녀동생은 그렇게 말하며 흐느껴 울었고 윤도 녀동생을 붙잡고 같이 울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병세를 윤에게 뿐만 아니라 엄마 본인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엄마는 돌아갈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으므로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였을 때 윤의 이모가 엄마를 붙잡고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이 어쩌다가 그런 몹쓸 병에 걸려가지고 하는 바람에 대충 짐작을 했는지 엄마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았다고 하면서 녀동생은 또 통곡을 했다. 

가벼운 염증인 줄 알고 입원한 엄마가 다시 병원에서 나올 때는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하루 반나절 걸릴 거라던 수술은 한시간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미 다른 부위로 전이가 많이 되여 더 이상 손쓸 수 없다는 게 병원 측의 설명이였다. 아버지는 객지에서 운명할 수 없다며 기어이 의식이 없는 엄마를 구급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갔다. 구급차가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릴 때마다 엄마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많이 힘들어했다. 당시 동행한 녀동생은 구급차가 출발하기 전 의사에게서 건네받은 모르핀주사는 까맣게 잊은 채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마지막 가는 길에 엄마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녀동생은 지금까지 후회로 가슴을 치고 있었다. 왜 주사가 있다는 걸 몰랐을가. 그랬으면 엄마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아버지는 왜 엄마에게까지 그 사실을 숨겼는지 윤은 리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버티다가 한순간에 무너진 엄마의 기대, 그 순간 절망했을 엄마를 생각하면 윤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듯 아팠다. 

윤은 지금까지도 그 때문에 아버지한테 서운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아버지 때문에 엄마의 림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윤에게 한이 되였다. 적어도 사실 대로 얘기해주었으면 엄마의 림종은 지키지 못하더라도 엄마와 마지막 인사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도 가족 친척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윤은 결국 엄마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윤보다 윤의 아이를 걱정한 아버지와 친척들이 비행기를 타겠다는 윤을 극구 말렸고 윤 대신 장례식에 다녀오겠다던 남편도 혼자 남을 윤이 걱정되여 결국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몇날 며칠을 밥도 못 먹고 울다가 어느 날 배속의 아이가 먹을 걸 달라고 발로 차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남편의 손에 이끌려간 집 앞 식당에서 남편이 구워주는 고기를 꾸역꾸역 삼키며 윤은 또 통곡을 했다. 엄마가 떠났는 데도,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데도 나는 이렇게 밥을 먹고 사는구나… 생각을 하자 먹은 음식을 다 토해내고 싶도록 후회스러웠다. 엄마에게 너무 큰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 미칠 것만 같았다. 

그 후로 오래동안, 배속의 아이가 성장하여 고중생이 될 때까지 윤은 엄마를 잃은 슬픔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한동안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고 윤이 부르기만 하면 엄마가 어디선가 짠 하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엄마와 관련된 대목이 나올 때마다 윤은 눈물을 한바가지씩 쏟았다. 예쁜 옷이나 화장품, 맛있는 음식을 보면 엄마 생각부터 났고 동네 아줌마들이 친정엄마 어쩌고 얘기할 때마다 부러워 미칠 지경이였다. 지금이라면 엄마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엄마는 옆에 없었다. 

엄마의 빈자리는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컸다. 아이 둘을 다른 사람 손 하나 빌리지 않고 오롯이 혼자 키우면서 윤은 엄마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엄마는 늘 일에 쫓기면서 아이 셋을 어떻게 키웠을가. 새댁 시절 국이나 반찬이 생각했던 만큼 맛이 안 날 때도 엄마에게 전화해서 양념 비법을 물어보고 싶었다. 둘째를 낳고 이름 지으러 간 철학관에서 엄마, 아빠의 사주도 필요하다며 윤의 태여난 일시를 물었을 때 윤은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음력 생일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정확한 시간까지는 몰랐다. 엄마가 계실 적에 얼핏 저녁 7~8시 사이로 들은 것 같아 아버지에게 확인했지만 아버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작고 소소한 일부터 크고 중요한 일까지 엄마가 필요한 곳은 많았지만 엄마는 없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확인할 때마다 후회는 늘 뾰족한 칼날이 되여 가슴을 찔렀다. 엄마를 좀더 아껴줄걸. 좀더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줄걸. 아프다고 할 때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좀더 새겨들을걸.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엄마를 혼자 내버려두지 말걸. 

돌아가시기 전해 엄마는 윤이 사는 도시로 려행을 다녀갔다. 엄마의 고질병인 관심병과 관절염이 마음에 걸렸던 윤은 엄마를 병원으로 모시고 가 검진을 받았다. 엄마가 다른 데가 아플 수도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던 윤은 부분 엑스레이만 간신히 찍고 검진을 마쳤다. 엄마가 돌아간 뒤에야 윤은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그 때 제대로 된 검진을 받았더라면 엄마는 좀더 우리 곁에 있었을 텐데…

아버지를 탓하고 싶은 건 결국 그런 죄책감에서 피면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아프게 한 건 아버지였고 엄마를 지키지 못한 건 윤이였다. 엄마가 평생 이루어놓은 질서는 엄마의 부재와 함께 한순간에 무너졌고 남은 가족은 우왕좌왕 헤매다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각자의 슬픔에 빠져 상대방의 상처를 외면했고 엄마의 부재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물으며 서로를 탓하고 질책했다. 원래부터 사이가 버성겼던 아버지와 오빠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멀어져갔다.

몇년 후 녀동생마저 결혼과 함께 타지로 떠나자 고향에는 아버지와 오빠만 남겨졌다. 처음 몇년은 오빠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으나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돌아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오빠는 틈만 나면 아버지를 향해 으르렁댔고 그 때까지 서슬이 퍼런 성격을 버리지 못했던 아버지도 가만있지 않았다. 어쩌다 한번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와 오빠의 피 튀기는 싸움을 목격하는 것도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 되였다. 엄마의 삼년상이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듯 동네 사람들이 주선하는 대로 이웃 마을에서 혼자 된 아주머니를 데려와 살림을 합쳤다. 뾰족한 하관과 옴폭 들어간 눈 때문에 까칠한 인상의 아주머니는 들어온 지 한달도 안돼 오빠의 호칭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아버지의 옆구리를 찔렀고 아버지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앞뒤 사정 따지지 않고 오빠를 혼냈다. 오빠는 어떻게 처음 보는 아주머니한테 엄마 대접할 수 있냐며 언성을 높였고 화가 난 아버지는 작은 집을 하나 얻어 오빠네를 분가시켰다. 가뜩이나 과묵한 오빠는 점점 말이 없었고 가끔 술에 취해 엄마 무덤 앞에 쓰러져있다 오곤 했다. 명절에 한자리에 모일 때도 오빠는 아주머니가 만든 음식을 거부하고 깡술만 마셨고 아버지 또한 그런 오빠를 가만두지 않았다. 즐거워야 할 명절 마무리는 항상 아버지와 오빠의 잦은 다툼으로 끝났다. 

물리적으로 떨어져있는 거리 만큼이나 멀어진 마음의 거리, 엄마가 남기고 간 가장 큰 숙제였다.  오빠처럼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윤도 아버지가 서둘러 살림을 합친 것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내가 달래 로친네를 얻었겠냐. 며느리 손에서 밥 얻어먹는 것도 눈치 보이고 다 늙어서 쭈그리고 앉아 혼자 속옷 빨아입는 것도 그렇고. 니네는 모를 거다. 내 심정이 어떤지. 어떤 때는 죽지 못해 산다.” 할 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난 아주머니와 오래 갈 줄 알고 그 자식들 생일까지 챙기며 정성을 쏟아부었지만 아주머니는 2년이 채 안된 어느 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무척 락망했다. 하지만 공백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닥친 끼니와 빨래를 걱정하던 아버지는 서둘러 다른 사람을 만났고 곧바로 새로운 만남과 헤여짐을 반복했다. 몇년에 한번씩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아버지 옆에는 항상 새로운 사람이 있었다. 윤은 남편 보기가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미웠지만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처음 만난 아주머니가 집을 나간 후 윤은 아버지가 만나는 아주머니들한테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잘 챙겨달라는 부탁과 함께 옷과 화장품을 바리바리 선물했다. 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지 괜히 심통이 나기도 했다. 

“어쩌겠냐. 그 사람들이 뭐가 좋다고 다 늙은 령감 시중을 들어주겠냐. 다 돈 보고 하는 짓이지.”

아버지는 어쩔 수 없는 만남과 헤여짐의 리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공무원이였던 아버지의 퇴직금은 적지 않았지만 리해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손해보기 싫어하는 아버지의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평생을 힘들게 살아온 만큼 아버지는 돈에 린색했다. 경제권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었고 필요할 때마다 고양이 오줌 누듯 찔끔찔끔 생활비를 타쓰던 아주머니들은 진저리를 치며 집을 나갔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신세 한탄을 했다. 

“부모 복도 자식 복도 없는 놈이 무슨 처복이 있겠냐.”

아버지의 이상한 론리에 따르면 아버지 불행의 모든 원인은 결국 엄마에게 있었다. 엄마와 결혼으로 불행이 시작되였고 엄마가 일찍 떠남으로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불행해졌다는 것이다. 처음 아버지에게서 그 말도 안되는 론리를 들었을 때 윤은 파르르 몸을 떨며 분노했다. 엄마와 결혼이 잘못된 거라면 우리가 태여난 것도 잘못된 거네? 그게 지금 자식 앉혀놓고 할 소리냐고 바락바락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돌아가서도 아버지에게 그런 대접을 받는 엄마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련민이 깡그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리기적일 수 있는지.

나이를 먹으면서 윤은 엄마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다. 지금의 윤과 비슷한 나이대의 엄마, 엄마는 그 때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가. 엄마는 늘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곤 했다. 엄마 주변에는 엄마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세월 엄마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는 아무도 들여다봐주지 않았다. 엄마 혼자 힘으로는 풀기 어려웠던 그 상처들은 좀벌레처럼 엄마의 몸을 조금씩 해치고 있었다. 

윤은 자라면서 한번도 아버지가 엄마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어쩌다 화장품이라도 바를라 치면 쭈그렁 호박탱이에 그런 걸 바른다고 누가 쳐다보기나 하냐고 비아냥 댔고 아이들이 남긴 밥 한주먹이 아까워 먹고 있으면 배살이 남산만해가지고 뭘 또 먹느냐고 타박을 했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 트러블이 있을 때도 무턱대고 엄마부터 나무랐다. 

윤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엄마는 웃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고 할머니는 미닫이문 옆에 다리를 가슴에 붙인 채 쪼그리고 앉아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밖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해오면 할머니는 아버지를 붙잡고 울며불며 하소연을 했고 아버지는 집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며 엄마를 윽박질렀다. 엄마는 처음에는 뭐라고 항변을 했지만 곧 그것이 아무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아예 엄마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편들어주는 아들을 믿고 기고만장해진 할머니가 입에 거품을 물고 “거짓말하지 마오.” 소리를 지르던 모습. 그 앞에서 엄마는 너무 힘 없고 약해보였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트집을 잡는 또 다른 리유는 오빠 때문이였다. 아버지는 오빠가 병약한 걸 모두 엄마 탓으로 돌렸다. 외가에서 유전되였다는 말도 안되는 리유를 대면서. 오빠는 물론 태여날 때부터 병약한 건 아니였다. 돌을 갓 넘기고 한번은 고열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데 그 때 집안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할머니가 돈을 주지 않아서 병원도 못 가고 동네 돌팔이의사를 찾아가 뜸만 죽어라고 떴다고 한다. 아이는 고열로 축 처져있는데 거기다가 뜨거운 뜸을 계속 떴으니. 엄마에게 두고두고 한이 되여버린 그 일을 아버지는 어떻게 엄마 탓으로 돌릴 수 있는지.

늙은이가 이제 앉으면 얼마나 오래 앉겠다고 그걸 하나 제대로 모시지 못하냐고 엄마를 나무라던 아버지의 말과는 달리 할머니는 엄마가 돌아가고도 십오륙년을 건재하다가 몇년 전에 95세로 타계하셨다. 윤의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는 아버지가 만나는 녀자들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아버지가 초반에 만난 녀자들과 헤여질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경제적인 리유 외에 할머니도 한몫 하고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풀도 나지 않는다는 최씨네 녀자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할머니는 많이 차겁고 정에 린색한 사람이였다. 어릴 적 윤의 형제들이 안아달라고 엉금엉금 기여가면 나는 팔이 아파서 하며 슬며시 밀어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윤은 할머니에게 안기거나 업힌 기억이 전혀 없었다. 

“독한 년이 글쎄 집을 나갈 거면 곱게 나갈 것이지. 감자 깎는 칼까지 싹 챙겨서 나가지 않았겠니. 괘씸한 것, 길 가다가 다리나 확 부러져라.” 

아버지가 맨처음 만난 아주머니랑 헤여졌을 때 할머니는 입술을 앙다물고 악담을 했다. 아버지만 모시면 되는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림을 합쳤던 녀자들은 의외의 복병을 만나고 질겁해서 도망쳤다. 아버지는 녀자 복이 없어도 너무 없다며 한숨만 쉴 뿐 할머니를 탓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결국 양로원에서 돌아갔다. 엄마 말고도 며느리들이 셋이나 있었지만 아무도 모시려 하지 않았다. 숙모들은 하나 같이 할머니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도리머리를 저었다. 젊었을 때 할머니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고 했다. 엄마라면 그래도 서운한 감정을 꽁꽁 숨기고 할머니를 모시지 않았을가. 윤은 할머니가 마지막 순간 적막한 양로원에서 한번이라도 엄마 생각을 하지 않았을가 궁금했다. 

엄마에게 고마웠다, 미안했다고 얘기해야 할 사람은 또 있었다. 윤은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먼저 떠난 배우자를 그리워하며 좋아하는 음식을 해준다거나 매일같이 예쁜 꽃을 놓아준다거나 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고집스런 얼굴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평생을 자기애로 똘똘 뭉친 아버지, 아버지는 언제 쯤 아버지 인생에서 본인 말고도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가. 언제 쯤 엄마를 일찍 놓친 것이야말로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가. 

아버지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였을가. 엄마를 사랑하기는 했을가.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련민의 정도 없었을가. 엄마가 없는 세월 동안 대여섯번의 만남과 헤여짐을 반복하며 떠돌이 인생을 사는 아버지와 한창 나이에 미처 손쓸 새도 없이 허망하게 눈을 감은 엄마 중에 누가 더 불쌍한지 윤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둘은 상대방을 만나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중학생 딸아이가 신발을 벗고 현관에 들어섬과 동시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의 가슴에 달려와 팍 안긴다. 밖에서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있었다. 윤은 딸아이의 머리에서 풍기는 향긋한 땀 냄새를 킁킁 들이마셨다. 

“엄마 품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정말 좋아. 히히…”

딸아이가 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윤은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건 어째 엄마가 뚱뚱하다는 얘기 같은데?”

딸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윤은 딸아이의 천진란만한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요즘 아이들답게 키는 벌써 윤을 훌쩍 넘기게 성장했지만 하는 짓을 보면 영낙없는 어린 아이다. 나에게도 저만한 시절이 있었던가. 윤은 아득한 기억 저편 동네 병원 벤치에 누워있던 풍경이 떠올랐다. 첫 생리를 시작하고 심한 생리통 때문에 데굴데굴 구을 만큼 힘들어하자 엄마는 윤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진통제를 맞고 병원 마당 벤치에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기억, 그 때 윤에게 쏟아지던 따뜻한 봄 해살 그리고 윤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엄마의 손길. 가끔 손바닥으로 부채를 만들어 윤의 눈을 부시게 하는 해빛을 막아주던 엄마의 손길을 느끼며 윤은 어느새 소르르 달콤한 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왜 엄마가 계시는 동안 그런 소중한 추억을 더 많이 만들지 못했는지. 윤이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부분이였다.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그 몇 안되는 추억을 꺼내여 곱씹고 곱씹으면 내가 정말 엄마에게 해준 게 없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 왜 엄마가 언제까지나 옆에 있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가. 세상 두려울 것 없고 못할 것도 없는 엄마도 사실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고 외롭고 힘들 때는 혼자서 울기도 한다는 걸 왜 미처 몰랐을가. 

언젠가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을 가장 하고 싶은지,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지 물었다.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윤은 생각만 해도 황홀하고 행복했다.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엄마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해주고 미처 못했던 말들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해주고 싶었다. 죄송하다고, 감사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엄마 왜 그래요?”

딸아이가 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윤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윤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응. 엄마 잠간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했어.”

윤의 눈앞에는 커다란 살구 다라를 이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엄마의 뒤모습이 떠올랐다. 엄마, 윤은 목놓아 불러보고 싶었다. 엄마가 한번이라도 뒤돌아봐주기를 바라면서. 엄마의 모습은 가물가물 아지랑이 속에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보이지 않았다. 윤은 또다시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엄마가 사라진 길에서 엄마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듯했다.

“윤아, 울지 마, 이제 그만 울어도 돼.”

 

하늘나라에 가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으로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여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 정채봉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출처:<장백산>2018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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