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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김연
무려 10년간 얼굴 못 봤던 엄마가 집을 방문한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혼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은호는 남편 지훈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채 겉으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련락해온 것은 점심을 먹고 동료들과 한참 수다를 떨고 있던 때였다. 휴대폰에 낯선 번호가 떴을 때 그저 스펨전화인 거 같아서 받기가 싫었다. 휴대폰이 지치지도 않고 5번이나 울리고 동료들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서야 그녀는 통화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가에 가져갔다.
“엄마다.”
전화기 너머로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호가 12살 되던 해 아버지와 리혼을 한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 때 은호는 공교롭게 생애 첫 생리가 시작되였고 어린 소녀에게 그건 대참사였다.
“생리대를 갖고 다니는 걸 잊지 말고, 생리 그거 별거 아니야.”
짐을 싸면서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그녀에게 말했다. 처음 생리대를 사용할 때 은호는 속옷이 아닌 자기 몸에 붙여버렸다. 아픈 건 둘째 치고 너무 불편했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 같아서 수업시간에 은호는 옆자리 친구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생리할 때 화장실은 어떻게 가는 거야?”
친구가 얼굴을 붉히며 설명을 해주어서야 그녀는 생리대의 정확한 사용방법을 알게 되였다.
엄마는 늘 집으로 전화를 해왔지만 마침 사춘기였던 은호는 엄마한테 버림받은 기분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채 분노했고 전화기는 항상 아버지한테 돌아갔다. 반년 후, 엄마는 당신이 처녀시절부터 동경했다던 S도시로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호 부모님들은 각자 재혼하였다. 련락은 점점 줄었고 직접 만나는 건 더더욱 어려웠다. 그런 엄마가 주말에 은호가 사는 T도시로 오고 그녀의 집을 방문하겠다고 한다.
엄마가 오기로 한 토요일, 오전 내내 은호는 주방에 틀어박혀 청소를 하였다. 그릇과 수저들을 꼼꼼히 씻고 후라이팬 두개를 반짝반짝하게 닦았다. 가스레인지도 왠지 더러워보여서 광이 나게 빡빡 닦아냈다. 그러고 나니 주방 환풍기에 씌인 먼지가 거슬렸고 그 다음엔 찬장도 맘에 안 들었다. 점심에 라면을 끓여먹고 나서야 은호는 거실이 전혀 정리가 안되여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늘 정작 중요한 문제를 외면하고 있으며 그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뭔가 기대를 가지는 것을 애써 경계하기 위함이였음을. 이 때 초인종이 울렸다. 시계바늘은 정확히 오후 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관문을 여니 엄마가 문밖에 서있었다. 엄마는 마치 어제도 다녀갔던 사람처럼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엄마라는 부름 대신 은호는 짧고도 낮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계산해보니 엄마는 올해 57살이였고 얼굴은 10년 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잘 정돈된 짧은 매직머리에 회색의 트렌치코트와 검정색 베이직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디자인이 심플한 커피색 토치가방을 들고 있었다. 얼굴엔 연한 화장을 하고 있었고 주름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나 새 슬리퍼 줘.”
엄마는 허리를 꼿꼿이 한 채 집안으로 들어왔다.
머리 속에 수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은호는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거실을 제대로 치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90평방메터의 아빠트가 괜히 허접하고 지저분해보였다. 은호는 엄마에게 뭘 마시겠냐고 물었다. 엄마는 커피를 달라고 했지만 집에는 커피가 없었다. 랭장고에 커피음료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꺼내서 엄마한테 흔들어보였다.
“그냥 물 줘.”
은호는 왠지 꿈을 꾸는 기분이였고 이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서로가 서먹한 모녀는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각자 손에 물컵을 들고 있었다. 은호네 집 식탁은 집 실내구조 중 가장 북쪽에 놓여져있어서 대낮에도 어두운 편이였다. 그래서 집에 사람이 있으면 식탁 우 천장의 상드리에에는 늘 불이 들어와있었다. 밝고 환한 조명을 통해 엄마 얼굴을 찬찬히 보게 된 은호는 그제서야 엄마와의 사이에 놓인 10년의 세월을 실감했다.
엄마는 확실히 예전보다 늙었고 머리는 흰 머리카락을 감추려고 염색한 티가 났다. 탱탱하던 얼굴 피부도 느슨하고 처져있었으며 잔주름들이 눈에 띄였다. 상대도 분명 자신의 변화를 눈치챘을 것이다. 이제 서른두살이 된 딸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떨지 궁금했다. 은호는 엄마가 그녀를 떠났던 그 때의 모습을 애써 떠올렸다. 20년전, 그 때 자신은 12살이였고 엄마는 37살이였다. 그 때 엄마는 일말의 망설임이 없이 아버지와 자신을 떠났었다.
“너 결국 그 남자랑 결혼했구나.”
엄마의 말투에는 실망보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단정이 묻어있었다. 은호가 지훈이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가 전화로 엄마한테 결혼소식을 전했고 은호는 아버지의 재촉에 마지못해 청첩장을 엄마에게 보냈다. 물론 엄마는 그녀의 길고 정신 없었던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축하전화조차도 없었다. 은호와 지훈의 웨딩사진은 현재 거실 한가운데에 걸려져있었고 사진 속 신혼부부의 진한 웨딩화장과 촌스러운 가짜 유럽 배경에 엄마가 얼마나 한심해할지 그녀는 짐작이 갔다.
22살이 되던 해, 엄마는 은호가 다니는 대학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막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불안한 상태였다. 별 야망이 없는 남자친구는 졸업하면 현지인 T시에 남아 공무원시험을 봐서 편하게 나머지 인생을 보내려고 하였고 은호는 외국 아니면 수도인 B시로 가서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었다.
엄마와 은호는 학교 대문 근처의 작은 음식점에서 10년 만에 만났다. 엄마의 얼굴에는 긴 세월 무관심하게 방치해두었던 딸에 대한 그 어떤 미안함도 자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엄마가 집을 떠난 1년 후, 은호는 부주의로 팔에 화상을 입었고 선명한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날 은호는 반팔을 입어 상처자국이 확연히 눈에 띄였음에도 엄마는 그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대신 은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물었다. 남자친구가 있냐고도 물어서 은호는 기숙사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지훈이를 음식점으로 불러냈다. 셋이서 식사를 마친 엄마는 은호한테 혼자서 공항까지 배웅해달라고 하였다. 탑승게이트로 들어가면서 엄마가 은호에게 말했다.
“그 남자랑은 헤여져. 걔는 전도가 없어. 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졸업 후 은호는 B시로 가서 직장을 찾고 취직을 하였다. 지훈이와는 서로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리별을 하고 말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 빨리 자리잡으려고 급히 찾은 첫 직장은 엄청 바빴고 그만큼 재미없었다. 아침 일찍 붐비는 지하철을 견디며 출근을 했고 늘 잔업때문에 막차를 놓칠가 뛰여다녔다.
반년 후의 어느 주말 반지하 세집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은호는 해질녘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로 기차역으로 간 은호는 T시로 가는 티켓을 끊고 지훈한테 문자를 보냈다. 기차는 한밤중이 되여서 T시에 도착하였고 지훈이가 마중나와있었다. 둘은 서로 시선만 주고받은 채 나란히 말없이 걸었다. 늦은 밤, 적막한 거리는 뿌연 가로등이 길을 밝혀주었고 말로 내뱉지 않은 모든 감정이 그 순간 확인되였다. 이건 사랑이라고… 엄마는 죽어도 모르는 사랑이라고 은호는 그 때 속으로 곱씹었었다. T시로 돌아온 은호는 3년 후 지훈이와 결혼을 하였다.
“나 리혼해. 세번째야. 이젠 다신 결혼을 안할 거다.”
아버지랑 리혼 후 S시로 간 엄마는 중한합작회사에 출납으로 취직했고 얼마 안 지나서 한국에서 파견 나온 한국인 로총각과 결혼했다고 한다. 1년 후 그 한국인 남편을 따라서 한국에 갔던 엄마는 7년 후에 또다시 리혼녀가 되여서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세번째 남편은 S시에서 만난 중국인 홀아비라는 얘기는 아버지한테서 얼핏 들은 바가 있었다.
“은호 너 말고 따로 자식을 안 낳았으니 니가 내 유일한 딸이야. 나도 점점 늙어가니 나중에 너한테 신세 질 것 같기도 하네.”
엄마는 남 얘기하듯 표정이 흐트러짐이 없었다.
은호는 엄마한테 시선을 똑바로 고정시킨 채 자신에게 물었다.
“이 녀자, 내 눈앞에 있는 이 녀자가 나랑 무슨 상관이지?”
엄마는 의자를 앞으로 끌어서 좀더 은호 쪽으로 다가오면서 비밀을 얘기해주는듯한 은밀한 어투로 말을 계속했다.
“이번에 리혼하면 재산분할을 하게 되는데 액수가 상당해. 지금 소송 중이라 변호사도 있어. 은호 니가 내 유일한 자식이니 앞으로 내 재산은 전부 니 거가 되는 거야. 너 내 말 안 듣고 결혼하더니 상태를 보니 그다지 넉넉치는 않은 것 같구나.”
“나 잘살고 있는데요.”
은호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엄마는 앞으로 쏠렸던 웃몸을 다시 의자 등받이 쪽으로 옮겨갔다.
“나 이번에 마무리되면 고향에 돌아갈거야 . 돌아가서 가게를 하나 할려구. 좋은 곳으로 구해서 이미 계약했고 지금 인테리어 중이야.“
엄마가 자신의 얘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들려준 적은 처음이였다. 10년 만에 찾아와서 왜 이런 얘기를 소상하게 하는지 은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가게 세맡고 인테리어 하는데 돈을 좀 쓰다 보니 내가 살 아빠트를 사려니깐 돈이 좀 부족하네. 재산분할을 하게 되면 아빠트 하나 사는 건 문제도 아닌데 리혼소송은 시간이 좀 걸려서 그 쪽 돈은 지금 쓸 수 없거든. 그래서 너한테 20만원을 꾸려고 해. 걱정하지 마, 소송이 끝나면 내가 리자까지 쳐서 돌려줄 테니깐. 그리고 어차피 그 집은 나중에 니 거야.”
엄마의 전화를 받고 지금까지 비록 수많은 시물레이션을 해봤지만 은호는 엄마의 오늘 방문이 돈을 꾸기 위해서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잠간 말문이 막힌 그녀는 한참을 엄마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와 동시에 은호의 머리 속은 어이없게도 은행계좌에 25만원 정도의 돈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 그렇게 많은 돈이 없어요.”
은호는 천천히 한글자 한글자 내뱉았다.
엄마의 입매가 살짝 우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웃몸은 완전히 의자등받이에 기대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가? 너 이제 서른도 넘었잖아.”
어릴 적 엄마는 은호가 학교에서 갖고 온 시험지를 보면서 얼굴은 늘 웃고 있었다.
“왜 백점을 못 맞은 거지? 넌 백점 맞을 수 있는 아이잖아.”
그 생각에 은호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고 식은땀이 쫙 났다.
하지만 이제 은호는 어린 애가 아니였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엄마한테 소리 지르고 싶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하냐고 소리쳐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심장만 쿵쿵 뛸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엄마가 문밖에 서있던 그 순간 자신이 이미 22살, 아니 12살로 돌아가 엄마 품에 뛰여들어가 엉엉 울고 싶었었다는 걸 은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는 엄마한테 안기지도, 울지도 않았다.
은호는 최대한 딱딱하게 말했다.
“나도 돈이 필요해요. 나 임신했어요.”
임신 소식은 자신을 제외하고 엄마한테 처음 하는 거고 아직 지훈이한테도 알리지 않았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아이를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두렵고 자신이 없었으며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여있지 않았다.
“난 또 네가 아이를 못 낳는 줄 알았지. 결혼한 지 꽤 됐잖아.”
“일이 바빠서요. 그리고 난 내가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거든요.”
“무슨 자격?”
“좋은 엄마가 될 자격이요.”
“이 참에 날 비난할 생각을 하지 마. 내가 니 우상도 아니잖아.”
엄마의 말투도, 표정도 차겁기 그지없었다. 은호는 아래입술을 깨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던 중 웃층에서 뭔가 둔탁한 물체가 넘어지는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금새 탁탁 하는 분주한 발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니?”
엄마가 짜증을 냈다.
“늘 그래요. 웃층이 남자아이를 키우는 집인데 애가 맨날 신발 신고 뛰여다니나 보더라구요.”
“가서 따져봤니?”
“어린 애랑 뭘 따져요?”
“가정교육 제대로 못 받은 애들이 제일 싫어.”
엄마는 고개를 들어 웃층을 향해 눈을 흘기기까지 했다.
“너 나중에 애 낳으면 다른 데로 이사해. 이 집 너무 작다. 주변 환경도 안 좋고.”
“그래서 돈을 꿔줄 수 없는 거예요.”
“내가 공짜로 꿔달라고 했니? 투자한다고 생각해.”
은호는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엄마는 다시 은호 쪽으로 몸을 가까이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좀전보다 낮은 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사실… 네가 낳고 싶지 않으면 안 낳아도 돼. 요즘은 수술도 쉽고 안전하다잖아.”
“엄마는 외할머니가 되고 싶지 않나요?”
이 식상하고 멍청한 질문을 은호는 그 후 며칠 동안 내내 후회하였다.
“별로.”
은호의 손을 놓아버린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손목시계를 본다.
“나 있다가 누구 만나기로 했어. 지금 가야 해.”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더이상 앉아있기 싫다는듯이.
문가로 간 엄마는 신발을 신고 가방을 든 채 스스로 문을 열었다. 문밖으로 나가려다 다시 몸을 돌려 은호를 향해 말했다.
“내 은행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줄게. 다음주까지 돈을 보내줘 알았지?”
시끄럽던 웃층은 한참 후에 조용해졌다. 식탁 우에 식어버린 물컵이 아니였으면 엄마가 다녀간 흔적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물 한잔 마시지 않은 채 바람처럼 왔다가 가버렸다.
20년 전 엄마가 떠난 후 적어도 세명의 녀자가 은호의 엄마가 되고 싶어했다. 그녀들은 은호에게 다가와 환심을 사려고 했고 집에 올 때마다 은호에게 선물을 줬다. 다정한 말투로 그녀를 대했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면서 아버지의 호감을 사려고 했다. 그녀들은 서로 성격이 달랐지만 공무원이였거나 학교 선생님이였다. 엄마처럼 대학을 나왔고 현명했으며 엄마보다 더 상냥했다. 그 중에 한 녀자는 엄마보다 더 이뻤다.
후에 아버지는 재혼을 했고 재혼대상은 공장에 출근하는 평범한 녀자였다.
그 날 저녁, 잔업을 마친 지훈이는 은호가 저녁상을 차려놓은 후에야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설겆이까지 마친 지훈이가 거실 쏘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을 때 은호는 임신테스트기를 그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지훈이는 처음에 놀라더니 바로 희색이 만면하여 드라마 속 수많은 남자들이 그러했듯 은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더 잘할게.”
어쩜 대사마저 똑같았다.
사실 은호는 지훈이가 좀 다른 반응을 보여주길 바랐었다. 조금은 객관적이고 진지하게 지금 상황에 대해서 고민해보기를 바랐지만 이 남자는 각박한 현실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아예 없었다.
“아이를 낳으면 자기 어머니가 분명히 애 봐주러 온다고 할 거고, 그럼 지금 집은 방도 없고 작잖아.”
“괜찮아.”
“이 근처 학교들도 별로고 나중에 애가 학교 가는 문제는 어떻게 해?”
“그 때 가면 방법이 생길 거야.”
“난 이 동네 사람들이 싫어.”
“난 괜찮은데…”
“어떡해?”
“다 방법이 있을 거야.”
지훈이는 지나치게 락관적이였다.
더 이상 이 화제는 계속할 수 없었고 은호는 낮에 엄마가 돈 꾸러 왔던 걸 얘기했다.
“그 리혼소송은 확실히 이길 수 있는 거야?”
지훈의 첫 반응은 이러했다.
“당연하지! ”
왠지 모르게 거슬려서 은호는 볼멘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네가 꿔주고 싶으면 꿔줘 … 그래도 엄마잖아.”
지훈이는 딱 한번 만난 엄마한테 유치한 호감이 있었으며 웃기게도 그녀도 자신을 맘에 들어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은호는 더욱 화가 났다.
“만약 엄마가 돈 안 갚으면 어떡해? 우리한테도 돈이 얼마 없잖아.”
“내가 더 노력할게.”
지훈이가 태평스럽게 말했다.
다음날, 은호는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냈고 바로 지훈에게 얘기했다.
“엄마가 다시 돈 꿔달라 그러면 우리 돈 없어서 남한테 꿔야 한다고 하자. 그러니깐 엄마가 차용증을 써줘야 한다고 하는 거야. 어때? 이 방법이 괜찮지 않아?”
3일 후 엄마가 문자를 보냈다. 문자는 간단했다.
우리 딸, 엄마다. 이건 내 은행계좌야~
‘우리 딸…’이라는 세글자를 노려보던 은호의 머리 속은 순식간에 뒤죽박죽이 되였다. 불신과 계산으로 가득한 준비됐던 말들이 차마 쉽게 내뱉어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점차 리성은 감정을 이겨냈고 그녀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차용증 얘기를 했다. 엄마는 별다른 감정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
그리고 이틀 후 그녀는 엄마가 택배로 보내온 차용증을 받았다. 차용증 아래부분에는 엄마의 싸인과 더불어 붉은 손도장까지 찍혀있었다. 택배 속에는 차용증 뿐만 아니라 엽산과 종합비타민이 함께 들어있었다.
임신은 예상보다 더 힘든 일이였다. 입덧이 시작된 은호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고 갈수록 구토가 심해졌다. 몸이 힘든 것보다 더 괴로운 건 아직도 확신이 안되는 마음이였다. 그녀는 이 결정이 옳은 건지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했고 고민했다. 필경 임신은 그녀의 인생 계획을 파괴하는 중대한 사안이였다.
두달 전, 중요한 프로젝트를 완성시킨 그녀에게 회사는 래년 해외근무를 약속했었고 얼마 전 공교롭게도 B시의 헤드헌터로부터 업계 유망한 회사로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동안 성실하게 묵묵히 달려온 그녀에게 32살이 되던 해에 마침내 눈에 띄는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던 차에 임신은 이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치명적인 것이였다.
하지만 임신은 또 은호로 하여금 엄마를 자주 떠올리게 했다. 어쨌던 엄마도 수많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열달 동안 수고스레 잉태하여 그녀를 낳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은호의 손을 잡고 ‘낳고 싶지 않으면 낳지 않아도 돼.’라는 말을 해주었다. 어쩌면 오로지 엄마만이 딸에게 할 자격이 있었던 조언이였고 그건 또 같은 녀자로서 녀자의 삶에 대한 리해를 동반한 련민이라고 은호는 생각했다. 그 장면은 반복적으로 은호의 머리 속에 떠올려졌다. 엄마는 자기 딸이 자신과 같이 랭정하고 무정한 녀자가 되여 그저 자신의 인생을 즐기길 바랐던 걸가?
임신 4개월이 지나자 지훈이는 자가용차를 사야겠다고 했다. 임산부정기검진을 위해서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했고 차가 없으니 확실히 불편했다. 엄마가 돈을 꿔간 지 두달이 지났고 그 두달 동안 엄마는 감감무소식이였다. 지훈이는 은호에게 엄마한테 련락해서 언제 쯤 돈을 돌려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넌지시 말했다. 그래야 자신이 몇달을 할부해서 차를 살지 결정할 수 있잖냐고 하면서.
“그래서… 자긴 아직도 엄마를 믿을 수 없다는 거네.”
“적어도 소송이 어떻게 되는지는 물어볼 수 있잖아.”
“그 때 자기 어머니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우린 차를 사고도 남았어.”
결국 은호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어떤 때 보면 엄마가 없는 게 훨씬 나아.”
얼굴색이 확 바뀐 지훈이가 몸을 돌려 침실을 나갔다. 그리고 그 날 밤 지훈이는 거실의 쏘파에서 잠을 잤다.
밤새 은호는 실면했다. 지훈이와 련애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호는 그에게 엄마에 관해 얘기해줬다. 화목한 부모 슬하에서 곱게 자란 지훈이는 그 후 은호를 무슨 깨지기 쉬운 도자기 쯤으로 여겼다. 은호네 가족사가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었고 지훈이는 그녀를 각별한 사랑이 필요한 녀자로 대했다.
결혼 후 은호는 지훈이가 시시때때로 보여주는 ‘내 안해는 엄마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야’라는 태도 때문에 조금은 어이없고 화도 났다. 어느 날 그녀가 부주의로 울 니트를 세탁기에 돌리는 바람에 니트가 확 줄어버렸다. 지훈이는 은호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랍시고 말했다.
“괜찮아. 아무도 너한테 이걸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어.”
그녀가 무지해서가 아니고 그냥 부주의로 인한 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훈이는 은호가 엄마가 없어서 모르는 거라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재작년에 시어머니가 지병으로 몇달간 입원하여 지훈이도 은호도 지쳐 나가떨어질 번한 적 있었다.
‘엄마가 없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잖아.’
은호는 입밖으로 나오려는 이 말을 계속 꾹꾹 속으로 삼켰었다.
다음날, 은호는 아빠트 엘레베터에서 웃집 사람들을 만났다. 한 할머니가 예닐곱살짜리 남자아이의 손목을 잡고 있었으며 두 사람 모두 표정이 구겨져있었다. 남자아이는 처음에 7층 스위치를 누르더니 련이어 그 웃층 스위치들을 전부 눌러버렸다.
은호가 6층을 누르자 로인은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했다.
“임신이 뭐 별 거라구… 사람들 다 그렇게 사는 거구만. 집안에서 소리가 날 수도 있지. 자네도 아이가 있으면 알게 될 거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로인이 자신을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아서 은호는 되물었다.
“자네 엄마가 그 날 올라와서 란리 친 거 모르나? 우리 집 초인종이 아주 부서져라 누르더니 문앞에서 욕도 하고 갔구만.”
6층에 도착하여 은호는 엘레베터에서 내렸다. 아직 문이 닫기지 않은 틈을 리용해 그녀는 남자아이를 향해 말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애들이 제일 싫어.”
바로 그 날, 은호는 엄마의 문자를 받았다.
-너의 은행계좌를 확인해줘. 이번 주일내에 돈을 돌려줄게. 시간 있으면 너 보러 가마.
문자 맨 마지막에 ‘엄마’라는 두글자가 적혀져있었다.
지훈이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은호는 그에게 사과했다.
“어머님 이제 괜찮아졌잖아, 모든 게 좋아질거야. 엄마가 돈을 돌려주면 우리 차 사러 가자.”
둘은 언제 싸웠냐 싶게 머리를 맞대고 무슨 차를 살 것인가 열렬히 토론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크고 널직한 모델로 사기로 약속했다. 지훈의 장농 면허가 곧 쓸모가 있어질 것 같았다.
은호는 이제 옆으로 누워서 자기 시작했다. 아직 초반이여서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그녀는 배속의 새 생명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이제 배가 나와서 청바지를 입을 수 없었고 그녀는 허리가 넉넉한 배바지를 입고 임산부처럼 걸어다녔다. 임신 후 호르몬의 변화로 피부가 나빠졌고 이몸에서는 피가 났다.
약간의 자신감도 붙었다. 어쩜 자신을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될 자격도 자신도 없어서 수없이 망설였던 것을, 심지어 류산에 관해서 검색을 해본 것에 대해서도. 그녀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고 용기를 내기로 했다. 신기하게 그 용기의 근원은 엄마였다. 엄마처럼 리기적인 사람도 그녀에게 엄마로서의 존재의 가치와 모성을 보여주고 있고 힘들지라도 이 세상을 보고 경험하게 해주지 않았던가.
주말, 지훈의 배석하에 은호는 병원에 가서 임산부 검진을 받았다. 길고 번거로운 각종 검사를 하고 또 그 결과를 기다렸다. 혈압을 재던 중 휴대폰에 문자가 들어왔고 은호는 흘낏 한번 보고 가방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의사는 이제 태심을 들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녀를 침대에 똑바로 누우라고 하였다. 은호의 배 우로 차겁고 끈적한 젤를 바른 후 초음파 기계를 이리저리 조절했다. 상대적으로 긴 시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고 그녀가 조바심이 날 무렵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선명한 소리가 점점 빨라졌고 뭔가 재촉하는듯한 그 소리는 심장 뛰는 소리라기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선언하는 움직임 같았다.
“태아의 심장박동소리는 원래 빨라요.”
의사가 말했다.
“자기야!”
은호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지훈이를 불렀고 밖에 있던 지훈이가 뛰여들어왔다.
검사가 끝난 후, 지훈이와 함께 병원 앞에 공원으로 갔다. 맑고 따뜻한 봄날이였다.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잔디 우를 걷고 있었다. 젊은 부부도 있고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도 있고 휠체어를 탄 로인도 보였다. 그들을 둘러보면서 은호는 그 사람들에겐 또 어떤 많은 사연들이 있었고 그들은 또 어떤 의미 있으면서도 피곤한 삶을 살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천천히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좀전에 들어온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엄마가 보낸 것이였다.
“20만원을 보냈어. 리자는 네가 먼저 갚아줘.“
별다른 해석은 없었다. 어쩌면 엄마는 처음부터 그 돈이 은호 자신의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되였다. 은호의 의식 깊숙이 박혀있던 불안과 두려움이 이제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지훈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이 감정을 확인했다. 저주가 풀린 것 같은 기분이였다. 지난 20년간 엄마에 대한, 엄마의 사랑에 대한 갈구가 이제 마침내 사라져버렸다. 사랑을 받지 않아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였다. 이제 그녀는 누구의 딸이 아니라 한 생명을 책임질 엄마가 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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