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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목
송련희
뻐스는 내가 사는 작은 현성을 벗어나자 그리 넓지 않은 향촌길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의 미끄러지듯 스쳐가며 물러가는 한그루 또 한그루의 가을나무들을 바라보며 난 나도 몰래 깊은 상념에 잠겼다. 아- 소학교를 졸업한 후 30년 만에 소학교 담임선생님을 뵈러 떠나는 이 심정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가.
내가 졸업한 동광소학교는 흑룡강성 계림조선족향 로씨야 변경에 위치한, 전교 학생이라야 마흔두세명 밖에 안되는 작은 시골 소학교였다. 이처럼 작고 편벽한 시골 학교에서 우리들의 생활이 얼마나 단조로왔을가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린 박철규 담임선생님께서 항상 함께 해주셨기에 잊지 못할 동년의 추억들이 참으로 많았다. 남녀, 학년의 계선이 없이 함께 고무줄 뛰기, 제기차기를 놀던 일, 파란 운동장에 발자국 찍으며 박선생님이랑 함께 뽈을 차고 술래잡기를 놀던 일, 박선생님의 경쾌한 손풍금 소리에 맞추어 〈아동단단가〉를 배우던 일…
매양 아침이면 우리 9명 꼬맹이들은 박선생님의 손을 잡기 위하여 서로 승벽을 내며 학교로 일찍 갔었다. 운동장에서 뛰여놀다가도 우린 먼곳에서 선생님의 모습이 언뜻 보이기만 하면 죽기내기로 선생님께 뛰여갔다. 먼저 달려가 선생님의 손을 잡고 학교로 오는 것이 어쩌면 그처럼 즐거웠던지. 그 때 선생님의 손을 잡지 못한 애들은 선생님의 옷자락을 쥐고 뾰로통해 따라오면서 투덜거렸다.
“야- 선생님의 손이 세개였으면 좋겠다야…”
“애두, 그러면 선생님 《서유기》에 나오는 요귀가 되라고.”
매양 그 때면 박선생님은 제자들이 종알거리는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며 “허허-” 웃으시군 하셨다.
선생님은 또 손마디가 불뚝불뚝 튀여나온 손으로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익살을 부려가며 날마다 우리들의 연필을 정성 들여 깎아주었다. 선생님께서 연필을 깎을 때면 우린 선생님의 주위에 오구구 모여앉아 살진 고사리 같이 포동포동한 손으로 연필을 높이 쳐들고 서로 자기의 연필이 더 뾰족하다고 자랑하였다. 그 때 코흘리개들의 눈엔 농촌 일에 장알이 큼직큼직하게 박힌 선생님의 투박한 손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였다.
3학년 때의 어느 겨울날 방과 후였다. 우리들이 박선생님이랑 함께 눈싸움을 마치고 짝짜그르르 웃으며 집으로 가는데 불쑥 몇몇 웃학년 애들이 길목을 막는 것이였다.
“야, 너들은 손이 없어? 왜 절로 청소를 하지 않고 계속 선생님만 청소 시켜? 너들 박선생님 얼마나 바쁘신 줄 알기나 알어!”
그들의 노기등등한 모습에 기가 눌려 우리는 두눈이 올롱해졌다.
“선생님은 우리가 아직 어리다구 비자루를 들지 못하게 하는데 뭐. 그리구 우리가 학교에 등교했을 땐 선생님께서 이미 청소를 다해놨어…”
그 날 우리는 찍소리도 못하고 웃학년 선배들에게 호되게 닦이웠다. 그리고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박선생님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겨울철 날 밝기 전에 출근하여 난로불을 후끈후끈 지펴놓고 교실 청소를 깨끗이 해놓는가를 알게 되였다.
동광소학교는 교사가 엄중하게 부족한 상황이라 학과 분공이란 것이 없었으며 한 교원이 담임 직을 맡으면 거의 그 학년의 모든 과목을 도맡았다. 게다가 향촌 교사들은 한편 농사까지 지어야 했기에 더욱 팽이처럼 돌아쳤다. 하지만 박선생님께서는 이런 육체적인 고달픔보다도 더욱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아픔이 있었다. 바로 뇌성마비脑瘫로 다리를 심하게 절고 생활을 자립하지 못하는 4살 난 아들 상민이였다. 선생님은 퇴근 전후의 시간을 타 짬짬이 농사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또 공급판매합작사供销合作社에 출근하는 사모님과 륜번으로 상민이를 돌봐야 했던 것이였다. 박선생님이 우리들의 담임을 맡았을 땐 둘째아이 딸 건아를 금방 보았을 때였다.
일상 생활 속에서의 선생님은 우울한 눈빛의 과묵한 분이셨다. 흥성흥성한 놀음자리, 회식자리를 피하셨고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셨으며 조용히 책읽기를 즐기셨다. 하지만 선생님은 학생들 속에만 오면 완전 눈부셨다. 밝게 웃었고 목소리가 우렁찼으며 온몸이 활기로 넘쳤다. 우리가 제일 애타게 기다린 날은 매주 금요일이였다. 금요일 소선대활동 시간만 되면 선생님은 전교 학생들을 5학년 교실에 모여놓고 《홍길동전》, 《림해설원》, 《몽떼 크리스토 백작》 등 재미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기 때문이였다. 우리들이 가장 인상 깊게 들은 이야기는 곡파曲波의 《림해설원》이였다. 창밖엔 흰눈이 펄펄 날리고 교실엔 눈 덮인 망망한 림해林海를 누비며 적들을 소멸하는 소분대의 이야기가 한창 절정으로 치닫고… 선생님께서는 손짓 발짓 해가며 이야기를 하셨는데 우리들은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숨을 모으고 조마조마해 앉아있기도 하였고 두눈이 휘둥그래서 “어머나!”하며 새된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으며 서로의 잔등을 콩콩 두드리며 박장대소하기도 하였다. 박선생님은 《림해설원》 중의 호접미蝴蝶迷의 모양에 대하여 어찌나 생동하게 묘사하였는지 “얼굴이 옥수수대처럼 길다랗고 얼굴에 잔뜩 난 주근깨를 덮어감추기 위하여 분을 떡반죽처럼 발랐는데 눈을 끔쩍끔쩍할 때마다 분이 찔끔찔끔 떨어졌다”는 호접미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보는듯 생생하다. 내가 문학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부터였다.
박선생님과 함께 한 나날들 중 우리들의 성장에 참으로 큰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바로 영화 《소년범죄자少年犯》를 관람한 것이였다.
소학교 5학년 때 《소년범죄자》란 영화가 20여리 상거한 향소재지 계림영화관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며 상영되였다. 보고 온 사람마다 교육가치가 대단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허나 그 땐 계림으로 뻐스가 통하지 않을 때여서 우리 시골 애들은 그저 귀동냥이나 하여 영화 줄거리를 둬마디씩 주어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 때 박선생님은 참 큰 결정을 내렸는데 바로 마을의 핸드트랙터手扶拖拉机가 있는 학부형을 동원하여 우리 9명을 싣고 계림에 가서 그 영화를 관람시키는 것이였다. 아, 북경유람을 갔으면 그처럼 신났을가! 우린 너무 흥분되여 밤잠마저 이루지 못하였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동지달, 핸드트랙터의 뒤바구니에 앉아 20여리 길을 달려가 영화관람을 한다면 지금 애들은 무슨 고역인가고 아우성을 칠 테지만 우리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었다. 곧 영화를 보게 된다는 흥분 그리고 우리들이 선생님과 함께 그 어떤 장거를 이루어내는듯한 격동은 우리들로 하여금 매서운 북방의 추위를 거뜬히 이겨내게 했던 것이였다.
우린 추위로 덜덜 떨면서도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선생님- 저 길가의 나무들 봐요. 막 뒤로 휙휙 달아나는 것 같아요!”
“야! 나무에 하얀 눈꽃이 피니 진짜 예쁘네!”
“선생님, 선생님- 근데 저 나무들이 이렇게 추운 겨울에 나무잎들이 하나도 없어 춥지 않을가요?”
우린 확 다가오다가 어느새 훌쩍 멀어지는 겨울 벌판의 라목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까륵까륵 웃음을 토했다. 《소년범죄자》는 내가 여직 본 영화 중 그 어린 나이에도 ‘난 꼭 착하게 살아야지!’ 하며 눈물을 펑펑 쏟으며 본 가장 감명 깊은 영화였다.
세월은 흘러흘러 우리들이 선생님의 품을 떠난 지도 어언 30년이 되였다. 수십년의 흐름 속에서 선생님의 한기 또 한기의 제자들은 모두 큰 도시로, 외국으로 지구가 작다고 이 세상을 주름잡았고 한번 떠나간 제자들은 황페해진 고향으로 거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허나 선생님만은 여전히 교육의 터전을 경건히 지켰다. 변한 것이라면 선생님의 허리가 휘여지고 귀밑머리가 희슥희슥해진 것이였으며 조선족학생들이 적어지며 시골학교들이 페교되여 인젠 전교 학생이라야 역시 50명도 안되는, 예전 몇백명 학생들로 흥성했던 계림향중심소학교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였다.
선생님의 제자들 중 난 유일하게 고향에 남은 제자였다.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평생 직업으로 교사직을 선택하였고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계동현조선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전 현 조선족 교사 연수회에서 여전한 중산복 차림의 선생님을 가끔 만난 적도 있었지만 내가 “아! 선생님-” 하며 반색하며 달려가 선생님의 팔에 매달릴 때면 선생님은 어른이 되여 나타난 제자를 보고 몹시 쑥스러워했다.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 조선어문 교사로 성장한 것을 무척 기뻐했다.
“음- 련희가 계동조중에서 조선어문을 잘 가르치고 있단 얘길 들었어. 학생 때부터 조선어문을 남달리 좋아했잖아. 훌륭해! 그래, 참 훌륭해!”
하지만 그것 역시 아주 잠간, 선생님은 인츰 우울한 눈빛의 조용한 선생님으로 변했고 선생님의 그 짙은 고독 속엔 일종 범접하기 어려운 엄엄함이 흘렀다. 그 때 선생님과 한학교에서 근무하는 선배가 하던 얘기는 지금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이, 박선생님께서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 첨 봐요. 평소 학교에선 다른 교원들과 얘기도 별로 하지 않고 동료들의 크고 작은 대사에도 일절 다니지 않죠. 십여년을 함께 근무하였지만 박선생님 댁에 가본 사람은 손 꼽을 수 있답니다. 모두들 뒤에서 박선생님을‘갑속에 든 사람’이라고 부르죠…”
난 선배님으로부터 박선생님과 사모님은 이미 헤여진 상태고 선생님 혼자서 뇌성마비에 걸려 행동이 불편한 상민이를 돌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공급판매합작사는 부도가 나 사모님은 직장을 잃게 되였고 사모님은 선생님이 박봉의 교사 직업을 버리고 애들을 친척집에 맡긴 후 함께 한국으로 나가 돈을 벌기를 바랐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직업과 상민이 그 어느 하나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였다.
선생님과 헤여진 후 난 선생님이 애달파 내내 가슴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박선생님을 만나기가 두려워졌다.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 나와 선생님 사이에 두터운 장벽이 형성되였을가 두려웠고 현재 꽁꽁 닫힌 선생님의 심문을 열 수 있을가고 심히 고민되였다.
2017년 9월 18일, 내가 박선생님을 추억하며 쓴 수필 〈저 멀리 아름다운 별이 있다〉가 한국 KBS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서 우수작품으로 선정되여 전파를 타게 되였다. 내 글이 처음 한국 KBS한민족방송에서 방송되여 설레이고 가슴이 부풀기도 했지만 그 때 심사위원장이신 이상문선생님의 한 한마디가 참으로 채찍처럼 내 가슴을 아프게 때려오며 날 내내 부끄럽게 하였다.
“네, 그렇다면 세월이 흐른 뒤에 인생의 존경하는 큰 별이신 선생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어떠했을가요? 무척 궁금하시죠? 문장의 결말에서 선생님과 제자들의 이야기가 따뜻하게 씌여졌더라면 더욱 좋았을것 같습니다. 왜냐면 어렵게 큰 은혜를 입었으면 잊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가능하면 작은 것으로도 갚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거든요…”
방송을 들을 땐 깊은 밤 홀로였지만 난 가슴이 저려오며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아- 난 왜 글로만 떠벌이며 불과 10여리 밖에 떨어져있지 않는 은사님과 따뜻한 밥 한끼 함께 나누지 못하였고 작은 선물 하나 드리지 못했으며 참으로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 직접 전하지 못했을가? 삶은 파란만장하고 세월의 강은 분명히 앞으로 흘렀지만 치졸한 난 선생님과 우리들의 이야기에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동화童话식 결말을 맺곤 선생님의 오늘은 아예 직시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였다. 한세대 또 한세대의 동년을 밝혀주신 선생님- 선생님은 분명 저 멀리에서만 아름다운 별이 아닌, 우리 삶의 영원한 멘토였던 것이다!
솔직히 사람들과의 만남을 싫어하는 선생님께 제자로서 30년 만에 불쑥 만나뵙고 싶다는 전화를 올리는 데는 참으로 용기가 필요했다. 조마조마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선생님은 전화 너머 내 목소리를 듣고는 마냥 목소리도 밝아졌고 만남을 부담스러워했지만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을 동의했다. 난 선생님께 드릴 선물로 피천득선생님의 수필집 《인연》과 근년 한국 KBS방송국에서 조직한 ‘북방동포체험수기공모’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을 작품집으로 묶은 책자 세권을 준비하였다.
추억의 늪에 잠기다가 갑자기 뻐스가 “칙-” 하고 멈춰서더니 주위가 소란스러워졌고 어느새 선생님이 살고 있는 계림촌에 도착한 것이였다. 그제야 난 깊은 추억 속에서 헤여나오게 되였다. 하지만 차창 밖을 내다보는 순간 난 그만 “아!” 하고 환성을 지르고 말았다. 선생님이 마중을 나왔다. 선생님은 재빛 티셔츠에 미황색의 코트를 입었고 눈빛은 웅숭깊으면서도 평화로왔다.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선생님을 보는 순간 난 마치 또다시 동년의 세계로 돌아간듯 싶었다. “와! 우리 선생님 여전히 멋지십니다!” 난 저도 몰래 또 한번 환성을 터뜨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얼굴을 붉히시며 “에이- 퇴직을 앞둔 령감이 멋지긴. 오랜만에 학생을 만난다고 머리랑 염색해 그렇지. 아니면 온통 흰머리요.” 하며 수줍게 웃었다.
나와 선생님은 자그마한 간이음식점에서 식사를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4학년 적 교사절 축하공연 때 우리 반 애들이 〈금실북과 은실북金梭和银梭〉이란 류행가에 맞춰 처음으로 디스코를 선보여 전교 사생들의 찬탄을 받은 일, 진달래가 온 산을 연분홍빛으로 물들이던 봄날 남산으로 원족을 가기 위하여 선생님들이 나루배로 황니하黄泥河 량안을 수없이 오가며 학생들을 실어나르던 모습, 계림향조선족소학생 운동대회에서 우리 학교가 기타 6년제 학교들과는 아예 비기지도 못하고, 교사의 부족으로 역시 5학년제로 꾸린 유일한 경쟁자인 동명소학교를 이기고는 전교 사생들이 북을 치고 징을 울리며 환락의 도가니 속에 빠지던 장면도 떠올렸다. 허나 감회에 젖어 옛이야기를 하던 선생님은 동광소학교는 한족들의 소외양간牛棚으로 변했다며 깊은 한숨을 쉬셨다.
다음 난 또 선생님과의 얘기 중에서 제자인 나마저 2014년에 이미 중학교 고급교사로 평선되였는데 래년이면 퇴직을 맞게 되는 선생님이 여직 소학교 특급교사(소학교 특급교사는 중학교 고급교사에 해당함)로 평선되지 못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선생님은 예전 동광소학교에서 대과교원으로 있다가 썩 늦어서야 정식교원으로 되였고 게다가 동광소학교가 페교되며 교원들이 여러 학교로 배치되였는데 대부분 변두리 교원 취급을 받으며 중시를 받지 못하였다는 것이였다. 특히 직함평의는 학력, 임무량, 공개수업, 론문발표 등을 종합적으로 보는데 한창 학교 골간으로 활약하는 젊은 교원들과는 아예 비길 수 없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애석해하는 나와는 달리 선생님은 “허허-” 웃으시며 소탈하게 말했다.
“그래두 지금 정책이 좋아 해마다 로임이 올라 얼마나 좋소. 우리 딸애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여 내 로임으로 나와 상민이가 생활하는데 매달 다 쓰지 못하고 남소.”
내가 상민이의 안부를 묻자 선생님의 얼굴은 금시 환해졌다.
“양, 그 앤 지금 못하는 게 없소. 노래랑 한번 척 들으면 흥얼거릴 수 있고 컴퓨터랑 휴대폰이랑도 얼마나 통달했는지 이웃들 전자제품이 고장 나면 모두 우리 상민이를 찾소. 요 몇년 전엔 또 전기자전거电动自行车를 운전하는 것을 배워 마을 젊은이들 하구 전기자전거 몰고 연길까지 갔다왔소.”
선생님은 퇴근 후의 시간엔 손풍금을 치고 터전과 과일나무를 가꾸는데 올해엔 사과가 참 잘 달렸다는 것이였다.
“난 지금 소학교 2학년을 가르치오. 애들 모두 둘이요.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애들에게 사과를 한호주머니씩 뜯어다 주는데 허허허- 두 꼬맹이 놀가지처럼 홀짝홀짝 뛰며 와늘 맛있다고 야단이요.”
신나 두 꼬맹이의 이야기를 하시는 선생님의 얼굴엔 어느새 풋풋한 웃음이 싱싱하게 피여났다. 하지만 불현듯 잠간 침묵하더니 “사실 오늘 련희에게도 사과를 가져다 주고 싶었소. 그러다 다시 생각한 것이 몇십년 만에 제자를 만나는데 촌스럽게 터전의 사과를 들고 다니는 것 같아서…” 하며 쑥스러움에 넘쳐 얘기하시는 것이였다.
아! 순간 난 눈시울이 확 뜨거워났다. 불혹의 문턱에 올라서도록 여직 철 못 든 우리들,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선생님의 마음속엔 우리가 여전히 사랑하는 아이였기 때문이였다. 난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축축히 젖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선생님, 분명히 사랑하여 교사사업을 선택하였지만 오늘까지 걸어오며 참 많이 방황했었습니다. 세상은 크고 눈부신데 젊은 난 편벽한 현성에서 청춘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우울했고 또 내 자신이 있는 자리와 자신이 하는 일의 소중함을 깨닫고 뜨거운 땀방울을 쏟고 있을 때 조선족 학교들이 하나하나 페교되여 혹 저희 세대 교사들이 우리 조선족 학교 력사상의 마지막 조선어문 교사로 남지 않을가 하는 애끓는 아픔을 면대하게 되였습니다. 하지만 외롭고 힘들 때마다 전 선생님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같은, 학생들의 삶을 밝혀주는 따뜻하고 사명감 있는 교사로 성장하겠다는 초심을 더욱 굳건히 하였습니다.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천만번이라도.’ 선생님께서 훤한 미소를 지으시고 늘 하시던 그 말씀 영원히 가슴 속에 새길 것입니다. ”
“련희가 훌륭하게 커줘서 정말정말 고마워!”
선생님의 두눈도 어느새 흥건히 젖어있었다.
난 나를 향해 오래오래 손을 저으시던 선생님과 작별하고 뻐스에 몸을 실었다. 뻐스는 무연하게 펼쳐진 논밭들 사이를 질주했고 나무잎이 한잎 두잎 지기 시작하는 백양나무들은 누런 논판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북방의 나무답게 어깨 겯고 름름히 서있었다. 겨울날의 가장 감동스러운 풍경이 될 나무들을 바라보며 난 그 추웠던 겨울 선생님과 나눈 대화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였다.
“선생님, 선생님- 근데 저 나무들이 이렇게 추운 겨울에 나무잎들이 하나도 없어서 춥지 않을가요?”
“허허- 물론 추울 테지. 하지만 이 라목들에겐 겨울 내내 소중히 품었다 봄이면 혼신의 사랑으로 키워야 할 어린 싹들이 있기에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거란다…”
출처:<장백산>2018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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