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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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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월: 정주와 떠돔을 소멸시키는 여섯개의 편린들(소설평)
2019년 07월 15일 11시 01분  조회:432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정주와 떠돔을 소멸시키는 여섯개의 편린들

김홍월

 

1. 삶과 존재의 본질

정주定住와 떠돔에 갈 수조차 없음을 일깨우는 박초란의 여섯개의 소설들은 각자의 밀당이 많았다. 정주와 떠돔을 줄다리기시키며 끝없이 밀고 당겨 끝내 소멸시키는 과정, 다시 말하면 정주와 떠돔 사이의 끈을 팽팽히 당겼다가 끝내 끊어버리는 과정을 겪을 수 있다. 정주와 떠돔 어느 쪽에도 안착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고 또한 삶과 존재의 본질이다. 정주와 떠돔 어느 쪽에도 긍정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성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주와 떠돔 사이의 문제 속에서 항상 헤매고 있다. 이러한 삶과 존재의 본질을 박초란은 <장자의 고양이>, <무화과나무>, <향기와 벽>, <블루베리농장>, <월광곡>, <이기다의 선물>을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여섯개의 소설에서는 정착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물론 떠남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까지를 모두 보여주고 있다.

 

 2. <장자의 고양이>, 

존재하지 않는 욕망의 끝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자연에 맡겨둔다는 뜻으로 아버지는 ‘재유在宥’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재유는 《장자庄子》에서 따온 것인데 아버지가 아들에 대한 교육방침이기도 하다. 재유는 한국 류학을 갔다 와서 북경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 그가 몸이 아프다는 어머니의 소식으로 고향에 오게 된다. 서른이 되기 전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재유는 별로 련락이 없었던 고향 동창 김인후의 생일 초대에 선뜻 대답을 한다. 김인후의 안해 서해영의 친구인 묘와 재유는 그렇게 만났다. 묘는 성이 장씨이고 이름이 미묘연인데 사람들은 그를 고양이 ‘묘’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재유와 달리 묘는 한국으로 류학을 갈가 망설이는 중이다. 고향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묘는 더 큰 세상을 떠돌고 싶어한다. 한국에 머물고 있는, 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남자친구를 찾아가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재유와 묘는 고향을 벗어나도 고향이 그리워지고 고향에 와도 고향을 벗어나고 싶어지는 사람을 각자 대표하는 것이다. 

재유와 묘는 김인후의 집에서 나와 사우나로 향한다. 사우나에서 재유는 이름도 나이도 배경도 모르는 묘에게 갑자기 키스를 하고는 “내가 널 책임질게. 우리 결혼하자.”고 한다. 그리고 원한다면 북경에서 집도 장만해주겠다고 한다. 묘는 그런 재유의 행위에 어이없어한다. 다음날, 묘가 깨여나 휴대폰을 보니 둘이 키스한 장면을 찍어 누가 위챗에 올린 것을 발견한다. 그렇게 둘은 사우나에서 헤여지고 묘는 련락이 두절된다. 묘에 대해서 일말의 료해도 없는 재유가 묘에 대한 급격한 태도는 자칫 개연성이 떨어져보일 수 있다. 사실 재유는 나비가 꿈을 꿔서 장자가 되였듯이 고향을 떠나있다 보니 고향이 무조건적으로 좋아져서 고향의 묘에게 느닷없이 청혼한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재유가 고향을 떠나고저 하는 묘를 희구하는 것은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였다가 나비가 꿈을 꿔서 다시 장자가 되는 것과 같다. 

 

“지하철 안에는 이미 콩나물시루 같이 사람들로 꽉 찼는데 자꾸만 사람들을 밀어넣는 거야. 꽉꽉 더 차야 출발할 수가 있다는듯이… 너무 덥고 숨까지 막혀. 깨고 보니 꿈이였는데 너무 더운 거야. 아버지가 그래도 오랜만에 온 아들이 추워할가봐 아궁이에 장작을 많이 밀어넣은 거지…”

 

재유는 고향에서 자신이 북경의 지하철 안에 있는 꿈을 꾼다. 깨여보니 아버지가 불 땐 뜨거운 방에 누워있었다. 이는 대체 자신이 꿈속에서 북경에 있는 것인지, 북경에서 고향의 불 때는 방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마치 장자가 나비인지 장자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재유는 정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장자가 나비인지 장자인지 정체성을 잃은 것처럼 재유는 자신이 찾아헤맨 대상이 고향을 상징하는지 타지를 상징하는지 알 수 없게 되였다. 즉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며 자기 정체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두터운 책 속의 삽화 하나가 떠올려졌다. 나비꿈을 꾸는 장자의 삽화.

나비꿈을 꾸고 있는 장자의 침대나 나무밑둥이나 그늘 속에 혹은 동자 하나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차를 끓이는 화로 뒤쪽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고양이 한마리가 숨어서 하품을 하다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삽화 속 어디에도 없는 고양이 한마리를 재유는 정말이지 너무 찾아내고만 싶었다.

그 때 재유는 왜 하필 고양이였는지, 왜 보이지도 않는 고양이를 찾고 싶었는지를 알지를 못했다.

뒤이어 재유의 휴대폰으로 끝없이 이어진 위챗 알림소리가 사정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유는 아무리 ‘고양이’를 찾고 싶었으나 고양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묘, 다시 말해서 욕망의 끝은 장자의 꿈과 같이 우리의 인생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는 어디에도 결혼으로 상징되는 행복, 욕망의 끝은 없다는 것이다. 고양이를 찾는 재유에게 련락이 한꺼번에 오는 것은 자기를 찾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지는데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였다는 의미이다. 

 

3. <무화과나무>, 

이방인이 아닌 토착민

‘나’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퇴직을 하고 유명한 출판사 편집 직을 사직한 ‘그녀’와 북경 교외에 나와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배낭을 메고 배낭려행을 떠나기 시작한다.

 

나는 이 동네에서는 제일 근사해보이는 호텔 입구에서 민박집 따거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기다린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있는 시간들이 싫다. 아니, 불안하다. 그녀가 내 어린 시절을 비난했던 것도 그 때문이였다. 어릴 때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나’는 어릴 적 상처로 누군가를 잃어버리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것에 상처를 입고 불안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나’는 가족과 함께하듯 사람들과 따뜻하게 함께할 수 없다는 어릴 적 상처로 인해 사람이 그립지 않은 것처럼 교외로 가기도 하며 외롭게 살아가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처 때문에 만든 거짓 자신이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젊은이와 아이들은 보기가 힘들었고 양지바른 곳에는 로인들이 몇몇이 앉아서 지나가고 있는 나를 신기한듯 쳐다보았다. 간혹 뭐 하러 온 거냐고 먼저 물어오는 로인네들도 있긴 했다. 꽤 유명한 려행지인 수장성과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에 알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겉으로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누구나 사람을 그리워한다. ‘나’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사람이 낯선 사람을 경계한다면 사람은 더더욱 사람을 그리워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교외의 산골 마을에서 조용히 살아가려고 하였으나 사실 마음 깊은 곳의 진짜 자신은 보통사람들처럼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 

 

문득 나는 내 삶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간 뒤에 결국은 사람이 남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대도시의 인파 속에서 정작은 사람이 그리웠다는 걸 알았다.

(…중략…)

이제 돌아가면 그녀를 위해서 무화과나무 한그루를 심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무화과가 주렁주렁 열리도록. 꽃이 피지 않는 과실이라고 해서 무화과라고 하나 실제는 과실 안에서 꽃이 핀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녀’가 떠나간 후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새 가족을 꾸렸던 어머니까지도 ‘그녀’와 함께 돌아오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쉽게 갈라지지 않고 끈끈하게 이어져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이 무화과 같은 꽃이 없는 이방인인 줄 알았는데 무화과를 좋아하는 ‘그녀’를 통해 알고 보니 무화과에는 열매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열매는 맛있었다. 즉 자신은 차거운 이방인이 아니라 열매가 있는 따뜻한 사람인 것이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다시 어머니 그리고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였다. 

 

4. <향기와 벽>, 

의미 있음의 의미 없음

누군가의 분주함이 좋다. 수저와 그릇, 컵을 정연하게 격식 대로 차려놓고 차 한잔을 따라주는 그런 잘 짜여진 서비스에 익숙한 몸짓마저도. 결국 깨닫게 된 건 그런 와중에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움직임, 그래서 서로가 영향을 주고 서로가 긴밀히 련결되여있는 것일지도…

 

낯설지 않은 사거리동네에 있는 모임장소에 도착한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모임에서 누군가가 남경대학살 때 조선인들이 앞장서서 살육을 했다는 화제를 던지고는 토론을 벌인다. 한 사학자가 그것은 포털사이트에 떠도는 근거 없는 류언비어라고 주장한다. 

모든 사건은 련결된다. 그 먼 남경대학살과도 우리는 모두 관계된다. 지금은 풍요로운 시대라 관계 없어보여도 학살의 끔찍한 진실과 현재의 삶은 관련이 있고 우리는 그 관련 만큼 책임을 갖는다. 그 관련, 관계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진짜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이다. 

‘나’는 북경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동업자이자 남자친구인 율과 창평昌平구의 사거리동네에서 서점을 오픈한다. 창평구에 있는 친구인 한과 ‘나’는 서점 근처에 위치한 초향로草香芦 가게에 들린다. 워낙 념주를 좋아하는 한은 평소에도 한두개를 꼭 몸에 하고 다녔다. 한의 손목에 금강보리념주가 감겨져있는 것을 보고 가게 주인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일 때가 더 좋은듯해서요. 좋은 것도 너무 많으면 소중하지가 않거든요…”라고 한다. 이것은 가게주인의 입을 빌어 우리들의,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의 틀을 보여준 것이다. 즉 지금의 행복이 너무 과해지면 그것은 남경대학살과 같은 불행하고 어두운 삶의 면을 잊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셋의 인연은 시작된다. 

 

우리는 정신적인 것들이 물질적인 것보다 더욱 위대하고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부류에 속했다. 아직까지 한번도 처절한 가난도 굶주림도 전쟁의 상처나 느닷없이 찾아든 불행 따위를 겪어보지 못했다. 의미 있음의 의미 없음에 대해서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의미 없음의 의미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의미만 쫓는 것은 허무한 탁상공론과 같다. 삶은 의미와 실천이 병행될 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잘 호응할 때 가치를 지닌다. 정신적인 것만 따지는 것은 의미 있음의 의미 없음과 같다는 것이다. 

한편, 율은 출장 간다는 핑게로 ‘나’의 돈을 빼서 달아난다. 이십대 대부분을 들여 모은 돈도 그리고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도 한순간에 사라진다. 서점을 정리하고 집에만 숨어있는 ‘나’에게 초향로 주인은 수제향을 만드는 일을 가르쳐준다. ‘나’는 그녀를 따라 향을 만들고 향기를 맡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심적 안정감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한이 남경대학살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 

 

“누군가의 롱간일 수도 있어.”

그녀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고마웠다.

“혹여 그렇다 하더라도 쟤 잘못은 아닌 거잖아.”

그녀가 아까부터 걸고 있던 향낭을 걸며 한마디 더 붙였다.

 

이 같은 생각은 현재의 물질적 풍요에 만족해서 과거의 아픔, 즉 그 아픔의 실제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즉 ‘쟤 잘못은 아닌 거잖아’ 하면 과거와의 관련을 외면하는 편의주의로서 ‘우리의 잘못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당장의 윤택한 시대와는 별 상관 없어보인다는 리유로 남경대학살을 구체적으로 살피지 않고 편리하게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흐릿한 과거로 치부하면 과거의 아픈 력사라는 실제를 버리는 것과 같다. 실제를 외면하는 정신적 편의주의 사고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쟤 잘못은 아닌 거잖아’는 과거를 잊어버리는 태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나’가 향을 맡고 있는 것은 향을 맡으면서 율이 떠난 것을 정신적으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율의 실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가 향을 피우며 향에 취해서 실제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은 실제 사건에서 정신적으로 도피하는 행위이다. 

향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날아가버리는 것이기에 안온한 정신에 대한 상징이고 벽은 존재하는 것이기에 어두운 실제를 상징한다. 어떤 문제 앞에서 벽은 현실적인 문제에 해당하고 향은 정신적인 도피에 해당한다. 남경대학살이라는 실제 사건 그리고 율이 돈을 훔치고 도망간 실제 사건을 두고 우리는 ‘쟤 잘못은 아닌 거잖아’라고 하거나 향을 피우며 잊어버리는 행위를 한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만 따지는 것이다. 즉 의미 있음의 의미 없음이다.

 

5. <블루베리농장>, 

락원의 불가능성

<블루베리농장>은 왕건의 아버지가 일하다 죽었던 것처럼 죽어서도 ‘일’을 해야 한다는 우리 삶의 비극이 잘 나타나는 소설이다. 어릴 적 왕건은 시골을 떠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공부를 한다. 그는 원하던 대학에 붙었고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모든 저축을 학비로 보낸다. 왕건의 대학 뒤바라지를 위해서 부모님은 집을 팔았고 아버지는 곧바로 한국으로 나가서 일을 한다. 왕건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왕건이 대학원을 마친 그 다음해 아버지는 출근하던 길에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왕건이 취직을 해서 겨우 북경에서 안정될 만할 때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한국으로 갔고 왕건이 결혼을 하면서 집을 살 때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이렇듯 왕건은 ‘떠남’의 련쇄로 나은 삶을 찾았지만 돈에 허덕이지 않는 삶과 행복은 없었다. 태여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을 위해 수입이 안해보다 적은 왕건은 직장을 그만둔다. 대도시에서 돈 버는 일도 아이 키우는 일도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게다가 딸 지운은 아토피를 앓고 있었다. 바다와 가까운 산골동네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다형이 생각이 난 왕건은 지운을 데리고 찾아가본다.

 

다형의 농장은 웅기중기 들어선 산 밑에 있었는데 아득하니 넓었다. 낮다란 블루베리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가서 맘껏 따먹으렴.”

다형이 나무 밑에 지운을 내려놓았다. 산자락 아래로 멀리 잔잔한 바다가 바라보였다. 구수하게 몸안 깊숙이 파고드는 흙냄새, 모든 게 싱그러웠다. 지운은 벌써 몇개째 블루베리를 따먹었는지 손바닥까지 보라빛이다.

한가롭게 그냥 나무그늘 밑에서 누워자고만 싶은 오월의 끝자락이였다. 다형과 나란히 블루베리나무 밑에 앉았다. 블루베리밭 아래로 비닐하우스가 일여덟개 이어져있었고 거기엔 겨울채소와 딸기를 심는다고 했다.

(…중략…)

“초창기라서 수입은 적지만 이제 다음해부터는 블루베리도 대량으로 판매하게 되면 수입도 꽤 될걸세. 자신이 하고 싶은 생활을 하면서 돈걱정 없이 살 수가 있다는 게 참 행복이지 않겠니?” 

 

농장은 다형네 부부 뿐 아니라 화가부부도 함께 경영하고 있었다. 왕건은 딸이 화가부부의 쌍둥이 아들과 블루베리농장에서 뛰여다니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을 찾은 거라고 확신한다. 왕건과 안해 해도는 북경의 집을 팔고 시내 변두리의 자그마한 아빠트를 사고는 아주 간추린 살림으로 농장에 입주한다. 그리고 남은 90만원에서 50만원을 떼여 농장의 투자로 다형에게 건넨다. 그들은 농장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는듯하였다. 하지만 농장의 어려운 사정이 이내 드러난다. 농장 경영을 반대했던 다형의 안해는 남편이 모든 재산을 농장에 넣는다는 것을 계기로 다형에게 리혼을 요구한다. 화가부부는 2년 뼈빠지게 일을 했건만 투자한 돈은 한푼도 받지 못했거니와 일한 보수도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쌍둥이 아들을 학교에 보낼 형편도 안된다. 이처럼 시골에서조차 돈문제에 허덕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어디에도 돈에 허덕이는 삶을 피할 락원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왕건이 대학을 다닐 때도, 대학원을 마칠 때도, 직장을 얻었을 때도 행복이 없었던 것처럼.

“엄마, 민수오빠한테 나 시집갈 거야!”

지운은 쌍둥이들과 잘 어울려 다녔다. 민수는 쌍둥이 형제 중 형이였다. 동생은 민석이였다.

“왜 민수오빠야?”

해도가 목욕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닦아주다가 물었다.

“민수오빠 멋있어.”

“그래? 민수랑 민석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그럼 민석오빠도 멋있지.”

“아냐, 민수오빠가 더 멋있어.”

“뭐가?”

“음… 민수오빠가 수제비 날리는 거 더 멋있어요.”

 

아이들은 돈 문제에 허덕이거나 돈에 욕심을 갖지 않고 순수하게 수제비 잘 던지는 것을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다. 수제비는 순수한 어린 시절 그리고 그 어린 시절의 순수한 욕망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그런 순수한 아이들이 어둠이 옅게 깔릴 때까지 바다가에서 놀던 중, 민수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죽은 것은 어디에도 없는 ‘락원’을 찾느라 그리고 돈 문제에 허덕이느라 아이로 상징되는 ‘미래’를 우리 사회가 놓친다는 의미이다. 

 

6. <월광곡>, 

찾게 된 욕망의 근원

청도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심수로 옮겨다니는 ‘나’는 여기저기 직장을 기웃거리며 저축 같은 것 해본 적이 없고 늘 돈이 모자라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카드빚을 갚아달라고 언니에게 몇번 도움을 청하나 언니마저 련락을 끊어버린다. 그런 ‘나’를 북경으로 부른 건 중학교 동창 신희이다. ‘나’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지저분한 동네에서 사는 조촐한 옷차림의 신희를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그녀의 적금통장을 보았을 때에 ‘나’는 신희가 결코 궁색하지도 결핍하지도 않다는 것을 확신한다.

 

내게 빡빡한 이 세상을 신희는 즐기면서 살고 있듯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마음 붙이지 못하고 살아온 나와는 완연 다른 삶의 자세였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그 순간 분명하게 알게 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탓하고 이 불공평한 세상과 운명을 탓하느라 온 기운을 모조리 소모해왔다는 걸.

 

세상이 뒤틀려있고 불공평해보이지만 우리는 그 세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또한 똑 부러진 신희가 의외로 술만 마시면 짐승이 되여버리는 전남편과 다시 함께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그 ‘세상’이다. ‘나’가 명품을 쫓으며 ‘불공평한 세상과 운명을 탓하느라’ 기운을 소모한 것은 어릴 적 상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섯살 때, 어머니는 일년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으로 ‘나’에게 피아노를 사주었고 집안의 수입 대부분은 피아노 레슨비로 들어갔다. 한겨울에도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어머니와 함께 레슨을 받고 귀가하는 길에 ‘나’는 눈구덩이에 빠진다. 어머니는 주저없이 눈구덩이 안으로 뛰여들고 ‘나’를 올려보내고는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한다. 어머니가 아래서 손을 저으며 ‘나’에게 지은 웃음이 마지막 웃음이였다. 그 후 아버지는 피아노를 불살라버리고 ‘나’와의 대면도 대화도 회피한다. ‘나’가 사치를 부리는 것은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 피아노가 불타버린 것에 대한 대리만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실, ‘나’가 미운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가 사치를 부리는 대리만족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리해로 바뀔 때, 어릴 적 욕망의 대상이였던 피아노를 다시 찾게 될 때 진정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해결을 하려는지 ‘나’는 어릴적 상처가 되였던 불타버린 피아노를 대체해 고급 피아노를 산다. 즉 어릴적 상처의 중심, 그 피아노에 다시 접근한 것이다. 

 

호흡을 다잡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달빛을 타고 선률이 흐른다. 애잔한 음들이 어둠을 간지럽힌다. 이제 고조로 치닫기 시작한다. 눈먼 소녀가 달빛 아래서 춤을 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어느새 나는 웃고 있었다. 손가락 끝마다 뼈에 사무치는 행복이 부딪쳐서 찡찡 맞혀온다. 그리고 춥다.

그 때였다. 창문이 탁 열려젖혀지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 꼭대기에서 웬 사내의 술 취한듯한 거친 욕설이 우박처럼 투두둑 하고 피아노 우로 내 정수리로 쏟아져내렸다.

“몇시야! 잠이나 퍼질러 자자. 좀! 할 지랄이 없어? 미친 년!”

거의 동시에 창문을 걷어닫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텅텅 울렸다.

나는 미친듯이 정말이지 달빛 아래서 춤이라도 추어대고 싶어졌다.

 

어쩌면 ‘나’는 신희가 전남편을 리해하고 다시 만나듯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고 원망스런 세상을 리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신희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로 피아노를 친 적이 있지만 오로지 자신을 위하여 친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타인이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해서 타인의 손가락질까지 받아가며 이루는 연주, 그것은 진정한 ‘나’의 욕망이다. 

 

7. <이기다의 선물>, 

‘기다’와 ‘이게 아니다’ 사이에서 

<이기다의 선물>은 이기다라는 도시에서 네티와 네티가 처음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어떻게 된 거지?” 네티는 자신의 팔다리를 차례로 쓰다듬어보고 배와 가슴께를 쓸어본다. 그러다가 생각난듯 꽉 닫힌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앗!”

네티는 가볍게 비명소리를 냈다.

(…중략…)

네티가 자그마한 소리로 불렀다.

“네티!”

꼬마 네티가 그 부름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잠결에 샐쭉 웃었다. 티없이 맑은 이슬 같은 얼굴이였다. 네티는 꼬마 네티를 이슬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충동을 그 순간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네티의 입가에도 웃음이 상현달 같이 걸렸다.

그것이 네티와 네티의 첫 만남이였다.

 

이기다에서는 영아가 어머니를 필요치 않는다. 다시 태여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삶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다. 모두가 그렇게 새로 태여난다. 이기다는 그런 도시이고 이기다는 모든 불만이, 모든 결함이 만족스럽게 변할 수 있는 희망의 자궁이다. 이기다의 네티는 이기다의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스물일곱번째의 네티로 거듭나고 있다. 하지만 스물일곱번째 네티와 스물여덟번째 네티의 만남은 전에는 한번도 없던 일이다. 안교수가 이기다의 모든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자궁을 가지고 있는 네티를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기고 아이 네티를 잉태시킨 것이다. ‘네티’는 벗겨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본질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게 아니다’라는 뜻이다. 안교수는 2천년 전 생명과학원의 교수였고 한 녀자의 남편이였다. 11년간 아이를 가지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안해의 자궁은 아이를 잉태하기를 거부했다. 몸도 정신도 힘들어가는 안해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안해의 이름은 ‘기다’였다. 

안해는 ‘기다’이고 네티는 ‘이게 아니다’이다, 안해는 현실의 보통 사람이고 네티는 리상적으로 만든 존재이다. 불완전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기다’, 즉 ‘맞다’라는 수긍의 삶이고 ‘이게 아니다’라는 것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 그 부정하는 것을 리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리상적인 삶, 즉 ‘이게 아니다’라는 네티를 이기다에서 만들어냈다. 네티는 양파 같이 계속 벗겨도 새로운 것이 나오는 ‘이게 아니다’이다.

 

“한겹한겹 다 벗겨내고 나니 마지막에 이게 남았어. 네티도 이렇겠지?”

나는 엄마의 텅 빈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엄마는 거기 소중한 것이 담겨져있기라도 하듯 두 손바닥으로 떠안고 있다.

“이걸 기억해야 돼. 언젠가 너도 양파처럼.”

엄마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엄마의 눈동자 안에서 양파 하나를 보았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고 내가 엄마에게 쏘아붙였다.

“싫어. 나는 양파가 아니란 말이야!”

 

양파는 이것이 양파다 혹은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한껍질 더 벗기면 그게 아닌 것이 된다. 이거다고 하면 한껍질 더 벗기면 이게 아니다가 되여버린다. 그런 련속적인 부정의 의미로 네티가 ‘이게 아니다’라는 뜻이 되여있는 것이다. 

이처럼 뭐든지 무조건 긍정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이 리상적인 삶이고 제대로 된 삶이다. 그리고 ‘기다’, 즉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고 무비판적으로 수긍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긍해야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의 삶이고 수긍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의 리상적인 마음일 수 있다. 우리는 사실 수긍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현실을 수긍하고 싶지 않을 때 리상이 생긴다. 리상은 만족하지 않을 때 꿈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족하는 삶은 수긍하는 삶이다. 따라서 ‘기다’, 즉 맞다라는 것은 수긍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삶을 뜻하고 ‘이게 아니다’는 수긍하지 않고 부정하는 리상의 삶을 뜻한다. 

그래서 엄마 네티는 자신을 억압하는 안교수를 죽이게 된다. 네티라는 의미는 부정의 의미이다. 리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 리상은 부정으로서의 리상이다. 현실을 수긍하지 않고 현실을 부정할 때 리상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작자는 네티라는 리상적 존재를 설정한 것이다. 네티의 본질은 부정이다. 그래서 자신을 속박하는 안교수를 부정해서 죽인다. 그리고 아이 네티는 그런 자신을 낳았던 엄마조차도 부정해서 죽인다. 부정의 련속인 것이다. 즉 리상적 세계는 부정의 련속이다는 의미이다. 

수긍하는 삶, 혹은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삶이 현실이고 현실을 수긍할 수 없을 때 리상이 생긴다. 현실에 완전히 만족하면 리상은 생길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자가 리상의 본질을 부정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양파처럼 까도 까도 계속 새롭게 갱신되는 부정만 해야 되는 부정의 련속, 그것이 리상의 본질이다. 

 

8. 정주와 떠돔의 단면들

이처럼 여섯개의 소설은 모두 정주와 떠돔이라는 테마로 얽혀있다. 이들은 정주와 떠돔에 관한 주제로 여러 단면을 보여주었다. 정주와 떠돔 사이의 문제는 곧 삶과 존재의 본질이다. 정주의 부정성, 떠돔의 부정성이 인간의 비극이다. 또한 정주와 떠돔 어느 것에도 안착할 수 없는 것도 인간의 비극이다.

정리를 하자면 <장자의 고양이>에서의 재유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반면, 고향에 있는 묘는 타지로 떠나려고 한다. 즉 안에 있으면 밖이 그립고 밖에 있으면 안이 그립게 되는,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은 계속 떠도는 것이고 인간은 정주하고 안착할 곳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 소설이다. 인간이 정주할 수 있는 욕망은 없고 정주할 수 있는 정체성도 없다. 사람의 욕망은 자꾸 바뀌기 때문이다. 재유는 고향이 그리워서 고향으로 왔는데 고향의 묘는 타지로 가고 싶어한다. 욕망이 정주하지 못하는 것이다. 

혼자 외로이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정착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소설은 <무화과나무>이다. ‘나’는 사람은 혼자라고 생각하다가 혼자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과 가족을 꾸려서 함께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처음에는 스스로 외면했을 뿐이며 이는 자기 방어적인 외곡이였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없는 나무이다. ‘나’는 무화과 같은 꽃이 없고 외로운 인생을 살 줄 알았는데 ‘그녀’를 통해서 무화과에는 열매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무화과를 무조건 이방인의 성격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고 자신도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정주하는 토착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무화과나무>에서는 사람 사이에 정착이라는 정주의 긍정성, 긍정적인 면을 보여준다. 정주의 긍정성은 떠돔의 부정성과도 같다. 

반면, 정주의 량면성에서 부정성,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소설은 <향기와 벽>이다. ‘벽’이라는 것은 실제 사건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향기와 벽>은 제목 자체에서 드러나듯이 향기만 맡고 살면 마치 아편에 취해 살듯이 실제 세계와 벽을 치고 살게 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향기는 정신적인 것에 취함, 벽은 실제 세계를 외면한다는 의미이다. 정신적인 것에 취하면 실제 세계를 외면하게 된다. 그래서 의미 있음의 의미 없음에 대한 비판이다. 즉 실제를 외면하는 정신적 편의주의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정신적 편의주의, 거기에만 정주하는 것이다. 향기 같은 정신적인 것에만 정주하면 그것은 편의주의일 수 있다. 현실을 외면하고 당장의 편안함에만 향기에 취하듯 정착하고 있기에 이 소설은 안온한 정신에만 취한 부정적 정주를 보여주는 것이다. 

<장자의 고양이>에서 욕망은 정주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였다면 <블루베리농장>에서는 이 사회에 정주할 곳은 없다, 즉 떠돔의 련쇄성을 다루었다. 왕건은 시골에서도,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닐 때도, 북경에서 직장을 얻었을 때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런 그가 바다가에 있는 농장은 정주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곳인 줄 알았는데 그 곳도 락원은 아니였다. 이렇듯 이 소설은 어디에도 우리가 정주할 곳은 없고 반복하는 떠돌이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월광곡>에서는 테마가 두개다. 하나는 과소비이고 다른 하나는 떠돌이 삶이다. ‘나’는 결핍의 근원을 잃어버려 결핍의 본질을 몰라서 정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을 살게 된다. ‘나’가 결핍한 것은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 속에 나온다. 아버지가 피아노를 불태워버린 후,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피아노의 꿈을 모두 잃어버렸다. ‘나’는 그 본질을 모른 채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과소비와 떠도는 삶으로 채우려고 한다. 이렇듯 이 소설은 정주하지 못하는 리유를 설명해나간다. 어릴 적 상처의 근원을 치료하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어서 우리는 영원히 독에 물을 채울 수 없고 따라서 영원히 정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주하지 못하는 리유는 진짜 ‘나’를 찾지 못해서 생겨난 것이다. 정주를 위한 진짜 방법은 결핍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진짜 욕망을 찾지 못하는 리유로 정주의 불가능성, 혹은 떠돔이 생겨난다.

<이기다의 선물>에서는 ‘기다’, 즉 수긍이라는 정주와 ‘이게 아니다’, 즉 부정이라는 부유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정주와 떠돔의 원론적 문제, 즉 인지의 기초 차원에서 정주와 떠돔을 설명한다. 

무조건 정착이 좋거나 떠남이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존재의 본질은 정착과 떠남, ‘기다’와 ‘이게 아니다’ 사이의 문제 속에서 항상 헤매고 있는 것이다. <장자의 고양이>처럼 인간의 욕망의 끝은 보이지 않는 것, 즉 내면에서의 정주의 불가능성이 있고 <블루베리농장>처럼 이 사회에 정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즉 외면에서의 정주의 불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와 <향기와 벽>은 긍정적 정주와 부정적 정주를 보여주는데 또한 떠돔의 부정성과 떠돔의 긍정성에 해당되기도 한다. <월광곡>에서는 정주를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기다의 선물>에서는 정주와 떠돔의 본질적 관계, 즉 정주와 떠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그래서 끝내 소멸시키는 과정을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출처:<장백산>2018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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