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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월: 관념세계의 실존, 그 안의 수많은 존재들(수필평)
2019년 07월 19일 10시 06분  조회:753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관념세계의 실존, 그 안의 수많은 존재들

김홍월

 

허무궁의 네편의 수필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마치 대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바람이 밀려오는 것과 같은 환청이 들린다. 수많은 인파, 수많은 존재들의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압도하듯 우리 앞에 놓인다. 그 환각은 너무나 뚜렷해서 그 대지와 수많은 존재들이 실존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환각의 세계는 너무나 거대한 미지여서 인간의 자대로는 쉽게 단정하고 평가할 수 없는 무위(无为)자연의 실존과 같다. 다시 말해 허무궁은 네편의 수필을 통해 수많은 존재들이 있는 어떠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세계는 실제 존재하는 것만 같아서 실존적이며 잘 정돈된 세계가 아닌 혼란스럽고 복잡한 무위의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인 것만 같아서 실존적이다.

허무궁이 전하는 환각, 그 세계는 바로 관념의 세계이다. 네편의 수필 속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화자의 공상들은 수많은 관념들로 이루어져있다. 이러한 수많은 관념들을 화자는 마치 눈에 보이는 사람, 사물처럼 대한다. 이러한 관념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떠한 사건들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현실 세계 이외의 관념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가 탄생된다고 볼 수도 있다.

허무궁은 관념세계가 실존한다는 인상을 강화하기 위해 두가지 교묘한 방법을 쓴다. 그 첫째는 관념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타자들의 부각이다. 그는 화자 이외의 수많은 타자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념의 세계에도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하여 관념세계가 실존한다는 인상을 강화한 것이다. 두번째로는 관념세계의 무위성의 부각이다. 그는 관념세계를 잘 정돈된 세계가 아닌 여전히 미스테리하고 고민스럽게 남아있는 무위의 자연으로 보여줌으로써 실존한다는 인상을 강화한 것이다.

관념세계의 실존성과 그 안의 수많은 존재들의 등장을 공통적 기반으로 하여 네편의 수필 속에서 화자는 각기 다른 색채의 고민을 한다. 각기 다른 색채의 고민이기는 하지만 네편의 작품은 〈눈섭이 없는 녀자〉,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 〈감지하는 가을〉을 순서로 련결되며 하나의 일종의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눈섭이 없는 녀자〉,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없는 눈섭이 놓여있다.

없는 모습으로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없는 게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없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모순일 수 있다. 없다와 있다는 동시에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왜 없는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일가? 눈섭이 없는 녀자에게 눈섭은 없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있는 것은 무엇인가? 눈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있는 것, 존재하는 것은 화자의 ‘없다’라는 관념이다. 없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없다’라는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자는 관념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함을 전하려 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대상은 ‘없다’라는 관념 이외에도 많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모든 관념들이다.

 

트윗이 매일 매스컴을 못살게 군다. 혹시 이 땅에 무서운 전쟁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없던 전쟁도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공포심, 그 두려움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가상의 전쟁이 벌어진다. 사람들의 마음속 전쟁이 관념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관념으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요소들은 때에 따라 부정적인 모습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화자는 군중을 이리저리 휩쓰는 다양한 정보 매체와 그것에 휩쓸려다니는 군중을 비꼰다. 그러나 정작 〈눈섭이 없는 녀자〉에서 중요한 것은 화자가 관념이 물질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다.

 

눈섭이란 꼭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일반 물질로서는 인간의 눈 우에 붙어있는 것이 상례다. 그 모양에 따라서 인물이 평가되기까지 하는 것을 봐선 미크론물질(청화대학 생명과학 학자 시일공)의 세계에서는 한 물질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화자는 일반적 물질과 미크론 세계의 물질을 나누고 있다. 심미적 령역, 즉 관념적 령역은 당연히 일반적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미크론 세계의 물질에 해당할 것이다. 화자는 관념을 물리적 실제라고 주장할 만큼 관념세계의 실존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타자들에 대응하는 개인

〈눈섭이 없는 녀자〉에서 그려진 군중은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에서는 그 군중에 대응하는 화자 개인이 함께 부각된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의 화자는 민주가 가로막혔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민주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집중은 고독이다. 민주를 집중시켜야 하는 행위는 홀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독단적으로 받아안아야 할 고독이다.

 

여기에서의 집중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중 다양한 의견을 모아 하나의 방향을 도출해내는 것으로서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의견이 있는 민주를 집중시키는 것은 다수의 타자들의 의견에 개인이 대응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대응이 쉽지 않다. 다양한 의견중 하나의 방향만을 도출해내는 것은 화합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소외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충족되는 것은 리상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만인에 대한 개인의 투쟁’으로서 그 집중이 이뤄질 수 밖에 없다. ‘만인에 대한 개인의 투쟁’은 곧 개인에게 고독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다수의 타자의 의견에 대한 개인의 대응이 곧 투쟁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집중의 무게를 두고 화자는 끝내 이렇게 말한다.

 

고독할 때 생각한다.

고독할 때 랭정해진다.

고독할 때 성장한다.

고독을 터득하면 훌륭한 경영자로 될 수 있다.

거짓말 같지만.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 분렬된 미시적 개인

타인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어떤 면에서 우리는 소외를 느낀다. 화자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친구들마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불안을 느낀다.

 

‘나’는 부모님이 불러주시던 어린 나의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여기에 버젓하게 남아있는 ‘나’는 나와는 다른, 나의 흉내를 내는 ‘내’가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내 이름이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대체될 때부터가 아니였던지 모르겠다.

 

이러한 자아의 정체성에 화자는 자신의 본명에 대한 고집을 꺾음으로써 해결한다. 화자는 자기 자신을 고정시켜둘 필요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즉 자기에 대한 자기의 편견을 벗어던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 클락에 와서는 또 영어로 폴이라고 불리워 난 이젠 아예 자기가 대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다. 얼렁뚱땅 얻어가진 영어 이름인데 일사천리로 성장하는 나의 인생의 궤도에 따라 이 폴이라는 이름도 하얀 셔츠에 잉크가 스며들듯이 쫙 펴지기 시작한다.

나의 인생이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피여가는 것이다.

나의 새로운 하루하루가 시작이 되여가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렇게 영원히 매일 하루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다른 내가 존재를 약속하고 있는 하루도 있다.

 

화자는 계속해서 새롭게 태여날 수 있는 다수의 타자인 ‘나’와 투쟁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대신 화자는 덤덤히 다수의 타자와 같은 다수의 ‘나’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분렬된 나들은 분렬된 나중에 하나인 나의 립장에서 보면 다수의 타자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내’가 밀려나는 것에 부정적 반응도 하지 않는 것처럼 공평하게 또 다른 ‘나’를 환영하지도 않는다. 그저 덤덤히 다수의 ‘나’에게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감지하는 가을〉, 개인적 관념세계의 사건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관념적 측면이 개입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다 보면 그것에는 의미나 감성이 생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 속에 세계를 관념적으로 승화시키며 변형한다. 세계를 적절한 비유들로 설명하고 리해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기본적 습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감지하는 가을〉에서는 현실을 관념을 통해 리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자체를 현실에 앞서게 만드는 인상을 준다.

 

오는 것인지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하여튼 모두가 가을을 ‘온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화자는 시작부터 의심을 품는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계절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려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한 계절은 ‘올’ 수 밖에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화자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의심은 결국 화자가 가을을 ‘우연히 만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된다.

 

가을을 갖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을이 있는 곳에 내가 찾아온 것이다.

바꿔말하면 내가 찾아간 곳에 가을이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방식에 있다. 화자는 현실의 시간을 잊음으로써 현실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위치한 현실의 공간에는 가을이 없다. 그러나 화자는 여전히 현실의 계절체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4계절 세분화된 계절을 망각하지 않는 이상 그는 가을이 없는 남국의 계절체계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다. 그의 관념중 일부는 현실의 계절을 빠져나와 가을이 있는 관념의 계절을 재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의 계절을 넘어선 계절은 일반적인 시간개념에서처럼 천천히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념이 언제 어디서든 상관없이 불쑥 재생될 수 있듯이 관념 속의 계절은 우연히 마주치듯, 누군가 가져다놓은 듯이 공간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즉 화자는 관념 속의 계절을 통해 현실의 계절의 법칙인 ‘온다’를 깨뜨리고 ‘만났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만남은 ‘무한히 즐거운 자극’이 되였다.

 

관념세계의 스펙트럼-군중에서 개인까지, 투쟁에서 수혜까지

각기 다른 주제와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네편의 수필은 저마다 다른 층 우에서 관념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눈섭이 없는 녀자〉에서는 없는 것의 존재함을 보여준다. 또한 〈눈섭이 없는 녀자〉에서는 ‘관념’들을 물리적 실제로 만들어낸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에서는 군중과 개인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관념세계를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은  〈눈섭이 없는 녀자〉와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에서 다뤄지고 있는 다수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두 작품에 등장하는 다수의 존재들의 성질을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에서는 군중의 다수의 의견들 속에서 고독해지는 화자를 그리고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여기에서의 의견이라는 것은 관념에 해당하기도 한다. 따라서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에서도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관념세계 속의 군중·타자들과 나·개인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에서는 ‘나’의 분렬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분렬된 수많은 미시적 군중이자 타자임을 보여준다.

이렇듯 〈눈섭이 없는 녀자〉,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는 각각 관념세계에 존재하는 ‘타자들의 집단(군중)-타자들과 개인-미시적인 타자와 미시적 개인’을 그리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점진적으로 그 관념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나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점차 더 작은 존재, 더 작은 개인에 초점을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즉 관념세계의 거시적인 사회를 그린 후에 그 안의 미시적인 구체적 존재를 그리는 것이다. 허무궁은 군중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제시함으로써 관념세계의 실존적 성격을 부여한다.

한편 〈눈섭이 없는 녀자〉,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는 순차적으로 군중·타자들의 공포스러운 거대한 힘을 묘사하는 데에서 시작해 군중·타자 앞에서 용기를 내는 개인을 묘사하는 것으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즉 관념세계의 존재들의 부정성을 강조하다가 점차 긍정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부정성과 긍정성은 전체적인 초점에만 그칠 뿐 화자는 관념세계 자체에 대한 부정성이나 긍정성을 확정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 화자는 자연계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전달하듯 담담하게 관념세계에 관한 일들을 전달한다. 관념세계는 실제 현실의 세계와 같이 무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은 관념세계에 대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대응은 투쟁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한 반응에 불과할 수도 있고 수혜일 수도 있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 〈감지하는 가을〉에 나타난 화자는 점차 세계에 대한 대응을 ‘투쟁-반응-수혜’로 바꿔간다. 이는 인간의 세계에 대한 ‘부정-긍정’의 스펙트럼을 꼼꼼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관념세계에 실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감지하는 가을〉에서는 관념세계에 대한 긍정성이 최고점에 이른다. 화자가 우연히 행복을 얻었기 때문이다. 〈감지하는 가을〉에서는 앞서 언급한 관념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의 구체성이 최고점에 이른다. 〈감지하는 가을〉에서는 관념세계의 화자·개인에게만 주어진 상황과 또 그 개인의 상황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룸으로써 개인을 좀더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허무궁은 군중에서부터 미시적인 개인까지, 관념세계에 대한 투쟁에서부터 수혜까지 꼼꼼히 그리고 있다. 이러한 넓은 스펙트럼에 이를 만큼 관념세계는 실존하는 것으로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허무궁은 관념세계를 실존하는 것처럼 그릴가?

허무궁은 관념세계를 실존으로 그림으로써 세계에 대한 리해의 폭을 크게 확장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허무한 공상에 그쳐 쓸모 없을 것만 같은 생각들은 관념세계를 실존하는 세계로 뒤바꾸는 그의 묘수를 통해 흥미롭고 의미 있는 것으로 뒤바뀐다.

출처:<장백산>2017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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