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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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운대영의 기이한 사랑
2009년 05월 30일 22시 28분  조회:3808  추천:0  작성자: 人和

 

 

운대영은 중국공산당 조기의 중요한 지도자이다. 저명한 청년령수와 확고부동한 혁명가로서의 운대영의 영용한 사적은 수많은 중국청년들을 고무격려했다. 또한 운대영의 애정생활도 마찬가지로 무수한 청년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운대영은 강한 반봉건의식을 가지고있었고 혼인자유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오히려 부모가 마음대로 정하고 중매인이 줄을 단 혼인에 직면했다. 심씨네와 운대영네는 한고향출신으로서 두 집은 관계가 친밀했다. 운대영의 부모는 그를 심씨네 둘째딸 심보수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운대영은 부모가 정한 이 혼인에 맞서 대항했지만 끝내 어머니의 눈물을 이기지 못하고 핍박에 의해 혼사를 동의하고말았다. 1915 10, 운대영은 심보수와 결혼했다.

 

신혼날밤에 마음이 울적한 운대영은 신방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방에서 잤으며 신부와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서방의 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로서 운대영은 애정에 대해 자신의 동경을 갖고있었다. 그는 자기의 두터운 일기책을 신부에게 주면서 먼저 서로 료해하고 감정이 생긴후 다시 부부로 되자고 제기했다. 련며칠 두 사람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결혼후 삼일에 신부는 친정집으로 돌아가 어머니한테 울면서 하소연했다. 어머니는 딸의 말을 듣고 몹시 놀랐지만 운대영의 행동에서 그가 보통인물이 아님을 느끼게 되였다. 하여 어머니는 딸에게 “내가 보건대 운대영은 재능있고 뜻을 가진 청년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한테 먼저 편지를 써보아라.”라고 말했다.

 

심보수는 어머니의 말대로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그날 저녁 그녀는 회답편지를 받았다. 운대영은 안해의 편지를 보고 아주 뜻밖이였으나 한편으로 각별히 기뻤다. 그는 회답편지에서 책을 많이 읽고 도리를 잘 알아야 한다고 안해에게 말했다. 이튿날 심보수는 또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신혼부부는 이렇게 벽을 사이두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시간이 지나 피차간에 료해가 깊어지자 진정한 사랑이 싹트게 되였다.

 

운대영은 몸집이 웅장하고 생활이 소박하였으며 성격이 너그럽고 큰 소리 한번 치지 않았다. 심보수는 총명하고 부드럽고 남을 잘 생각해주는 등으로 정말 명문집 녀자다왔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운대영은 안해에게 새 사상을 말해주고 일기를 쓰도록 가르쳤으며 영어를 배워주었다. 보건대 연약한것 같지만 큰 뜻을 지닌 심보수는 진리를 위해 싸우려는 남편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8 2 25일에 심보수는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다. 운대영은 안해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죽은 안해한테 인공호흡을 시키고 진맥해보면서 안해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모든것은 다 소용없었다. 운대영은 거의 기혼해 넘어질번했다. 그는 다급히 달려온 장인, 장모앞에 꿇어앉아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극도의 비통에 빠진 운대영은 다시는 장가를 들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는 일요일마다 일기책을 가지고 안해의 무덤으로 찾아가서는 일기를 읽는가 하면 무덤앞의 풀을 어루만지면서 묵묵히 눈물을 흘리였다.

 

다시는 장가를 들지 않겠다는 운대영의 맹세는 가정, 사회, 친척, 친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친구 사원정은 그한테 “너는 옛사람들의 ‘죽을 때까지 한사람만 따른다’는 말을 고집하고있지 않아?”라고 물었다. 그러자 운대영은 “나는 그걸 제창하지 않지만 반대하지도 않아. 문제는 자원에 달린거야. 억지로 자기희생을 하라고 하는것도 틀린것이지만 진짜 애정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려는 사람을 막는것도 합리하지 않아. 재혼하는가 안하는가 하는것은 완전히 자유적이여야 해.”라고 대답했다.

 

사원정은 “그럼 네가 이 세상을 개조하려고 재혼하지 않고있는거야?”라고 물었다. 운대영은 “그것도 있지. 중국녀자들은 남자들의 압박을 너무 받았어. 남자들은 늘 이런저런 리유로 자기의 욕심을 다 채우지만 녀자들에게 정조를 지키라고 강박하고있잖아. 두고봐, 나는 이런 불공평한 세상을 개변시킬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더러 나를 따르라는 말은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내가 재혼하지 않는것은 이런 리유뿐만이 아니야. 죽은 안해에 대한 나의 감정은 나를 그렇게 시키고있어.”라고 정중하게 강조했다.

 

애정에 대한 운대영의 변함없는 마음은 심씨네 넷째딸 심보영 즉 심보수의 녀동생을 깊이 감동시켰다. 심보수가 난산으로 죽었을 때 심보영은 12살이였다. 운대영은 안해에게 한 낙언을 충실하게 리행하면서 늘 처가집에 가서는 심보수의 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심보영이 호북녀자사범학교에 입학한후 운대영은 자기가 주필로 있는 《중국청년》잡지를 그녀에게 부쳐주었으며 부지런히 공부하여 인류의 해방사업을 위해 분투하라고 고무격려했다. 그의 도움으로 심보영은 아주 빨리 진보하여 1924년에 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고 이듬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몇년동안에 운대영은 혁명의 용광로속에서 연약한 서생으로부터 강철전사로 성장했다. 그와 심보영 사이에는 늘 편지가 오갔다. 공동한 리상으로 하여 형부에 대한 심보영의 존경과 동정이 점점 사모로 변하게 되였고 동시에 운대영의 마음속에도 일종 신기한 힘이 생겨나 저도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어느날 광주에 있던 운대영은 무한에서 보낸 심보영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애정이란 말이 한마디도 없었지만 그는 혁명적녀청년의 용감하고도 깊은 사랑을 읽을수 있었으며 또 그런 사랑을 거절할수 없었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운대영과 심보영은 무한에서 만났다. 그때 운대영은 무한중앙군사정치학교 총교관이였고 22살되는 심보영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성립제1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다. 운대영은 요청에 의해 성립제1소학교에 가서 연설하게 되였다. 심보영은 교원들속에 서서 운대영을 정깊게 바라보면서 조용히 그의 연설을 들었다. 연설이 끝나자 그들 두 사람은 심보수의 묘지로 찾아갔다. 길에서 운대영은 안해를 추모하여 지은 시 《강성자》를 낮은 목소리로 읊었다.

 

운대영은 죽은 안해앞에서 10년동안의 어려웠던 행정을 이야기한후 “오늘 나는 무산계급혁명전사로 되였고 당신의 녀동생 심보영도 어른으로 자라났으며 무산계급전사로 되였소. 우리들의 공동한 혁명리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그녀와 어깨겯고 싸우기를 바라고있소. 당신이 구천에서 알고있다면 나의 생각에 동의하겠지.”하고 정깊게 말했다.

 

여기까지 말한 운대영은 눈물투성이가 되였다. 그는 몸을 돌려 심보영을 미안스레 바라보면서 “량해해주오. 동의도 얻지 않고 이런 말을 하였소. 나와 혁명적반려로 되기를 바라지 않으면 언니한테 말해도 되오.”라고 말했다.

 

심보영은 말없이 울먹이면서 운대영한테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1927 1 16, 32살되는 운대영과 22살되는 심보영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7월에 왕정위가 혁명을 배반했다. 국민당의 수배령속에서 운대영은 심보영과 리별하고 중앙림시위원회의 명령을 받들고 구강, 남창으로 가 공산당의 혁명무장부대와 합류했다. 그후 몇년간 그는 남북을 전전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혁명의 승리를 위해 용감히 싸웠다.

 

1930 5 16, 운대영은 상해에서 체포되였다. 1931년 봄에 중공중앙에서는 여러측의 력량을 조직하여 아직 신분이 폭로되지 않은 운대영을 구출하기로 결정하였고 심보영더러 감옥에 가 운대영과 면회하면서 출옥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일이 거의 되여갈 때 뜻밖에 반역자 고순장의 밀고로 운대영의 신분이 폭로되고말았다.

 

하여 운대영은 1931 4 29일에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해 그는 36살이였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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