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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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가 정률성
2009년 07월 22일 13시 51분  조회:3909  추천:1  작성자: 人和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률성은 1914 7월 한국 전라남도 광주의 한 혁명가정에서 태여났다. 1933 5월에 그는 중국에 와서 “의렬단”이 남경에다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들어가 학습하면서 반일비밀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로씨야의 이름난 음악가 크리노아를 만나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친 정해업과 모친 최영은 사이의 5 3녀중 5남인 정률성은 원명이 부은이였는데 음악에서 성공한다는 뜻에서 음률과 이룰성을 따 률성으로 고쳤다.

1937, 일본침략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률성은 항일근거지인 연안으로 갔고 여기서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문학학부의 동창생인 막야더러 혁명의 정열로 넘치는 가사 《연안송》을 쓰게 하고 거기에 곡을 달았다.  이렇게 불멸의 송가인 《연안송》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이 노래는 연안으로부터 각 항일전선에,  지어 멀리 동남아시아나라에까지 보급되였으며 수천수만의 청년들을 항일투쟁에로 불러모았다.  1938 8월에 로신예술학원을 졸업한 그는 연안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 배치되여 사업하게 되였다. 1939  1월에 정률성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때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말려들어 정치생명에 새로운 시련을 겪었야 했다.  해당부문에서는 “조선인들의 사회배경이 복잡하므로 더는 그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지 않는다.  이미 가입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적을 정지시켜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당시 해당부문의 지도자는 “정률성은 《연안송》 등 혁명가사를 창작했고 표현도 좋으므로 잠시 당적을 보류한다. 하지만 정률성은 연안에 오기전의 상세한 정활을 조직에 회보해야 한다.  특히 남경에 있을 때 어떻게 일본사람의 정보를 수집했는가?  수집한 정보를 어디에 보냈으며 누구에게 주었는가…등 사실을 진실하게 밝혀야 한다.”고 명확히 표시했다.

정률성은 남경에 있을 때 조선인들로 뭉쳐진 “의렬단”에 가입하여 반일비밀사업에 종사했다.  이 조직은 극비에 속하는 조직이여서 단선련계를 맺었다. 그의 직접적인 지도자는 김약산이였는데 김약산은 “대한민국림시정부”를 따라 대후방인 중경으로 갔다.

조국을 떠나 타향에서 친인들이 그립고 동지들이 그리웠다. 당시 정률성은 연안녀자대학 학생회 부주석인 정설송(丁雪松)과 련애를 했다. 정률성은 녀자친구를 찾아가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정설송도 남자친구의 일에 애간장을 태울뿐 그로서는 어찌할 힘이 없었다. 정설송은 정률성을 보고 이렇게 위안했다. “동무,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당조직을 믿어요. 난 동무를 어띠까지나 사랑해요.

사랑하는 녀자친구의 고무격려하에 정률성은 혁명에 대한 신심을 굳게 다지였다.  다행히 당시 팔로군포병퇀 퇀장 무정(장정중에서 생존한 조선인)이 선뜻이 나서서 “정률성은 정치상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증명을 섰다.  또 진운 등 동지들의 신임으로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정률성도 해방되였다.

정률성은 자신의 일생을 중국인민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 바쳤다. 정률성은 한침실에 있는 전우 공목(시인)과 함께 한가마밥을 먹으면서 손잡고 《팔로군군가》,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과 신사군》등 8수의 가사로 된 《팔로군대합창》가사를 창작하고 자신이 직접 작곡하였다.

《팔로군행진곡》은 해방전쟁시기에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되였다.  1988 7 25,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였던 등소평이 서명한 명령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되여 모든 군내의 행사나 의식에서 의식곡으로 널리 불리우게 되였다.

1941, 정률성은 정설송과 결혼했다. 부인 정설송과는 슬하에 딸 정소제를 두었는데 현재 정소제는 북경 모 합창단의 단장으로 일하고있으며 사위 김인섭은 중국인민해방군 소장으로 있다.

정률성이 1941년에 작곡한 “《조선의용군행진곡》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때 평양공항에 내린 한국 김대중대통령을 맞으며 환영곡으로 연주되였었다.

1942 8,  정률성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무장으로 임명되여 태항산근거지로 갔다.  1945 8, 일제가 투항한후 정률성은 조직의 결정에 따라 한때 조선에 가서 사업하였다.  그는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책임을 맡았다.  그는 인민군장병들을 승리와 영광의 한길로 고무하는 영생불멸의 노래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였다.  이 노래는 후에 《조선인민군 군가》로 되였다.

1950 10월에 중국에 다시 온 정률성은 1951년에 또다시 가렬처절한 조선전선에 나가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을 창작하였다. 전투기백으로 차넘치는 이 노래는 중조 두 나라 인민들을 승리에로 고무하였다.

해방후 정률성은 1952년부터 1966년까지 중국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창작조, 중앙악단 등 중국 최고의 음악단체들에서 음악활동에 종사했다.  그는 새생활창조와 생기가 들끓고있는 공장,  농촌과 부대로 다니며 수십수의 노래를 지었다.  1959년 반우파운동때 “반당분자”라는 루명을 쓰고 1966년 “문화대혁명”초기에는 “특무”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4인무리”의 압제와 타격을 받을 때에도 그는 송백같은 굳은 절개로 모택동의 시사에 곡을 다는 작곡사업을 계속하였다.

1976, 4인무리”가 거꾸러진후 음악창작활동을 재개했지만 고혈압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체는 북경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팔보산 정률성묘지앞에는 부인 정설송의 위탁을 받고 친구 교우가 쓴 글이 새겨져있고 묘비뒤편에는 그의 리력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정률성동지는 1914년 음력 7 7일에 한국 전라남도 광주의 한 혁명가정에서 태여났다. 소년시절에 반일애국독립활동에 참가했고 1933년 중국에 와서 선후로 남경과 상해 일대에서 항일구국활동에 종사했으며 1937 10월 연안으로 갔고 1939 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일생을 중국인민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 바쳤다. 그는 충성스러운 국제주의전사이다.  1976 12 7일 북경에서 세상을 떴고 향년 62세였다.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였던 왕진은 “정률성동지를 추모하여”란 글에서 “정률성동지는 현대중국에서 섭이,  선성해의 뒤를 이어 나온 걸출하고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이라고 하였다. 정률성은 일생동안에 서정가곡을 포함해 군가, 합창, 동요, 영화음악, 기악곡을 망라해 360여편의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곡으로는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 즉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들수 있는데 이 두곡은 중국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랑받는 노래로 중국현대음악사에서 대체할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이로써 정률성은 섭이, 선성해와 더불어 중국근대음악사의 3대 음악가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1990년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그의 대표곡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연주된바 있고 2001년 가을에 북경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태양을 향하여》가 개봉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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