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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동안 형을 잊지 않은 모안청
2009년 06월 05일 10시 58분  조회:6236  추천:0  작성자: 人和

 

모택동의 둘째아들 모안청은 2007년 3월 23일 오전 4시 18분에 84세를 일기로 북경301병원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모안영이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된후 모택동의 유일한 아들인 모안청은 각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왔다. 등영초, 강극청, 왕진 등 로동지들이 생전에 그와 그의 가족을 아주 관심하였고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도 여러번 그와 그의 가족을 찾아주었다.

 

동 년

 

모안청은 1922년 11월 13일에 호남성 장사시 동향 판창에서 모택동과 모택동의 첫번째 부인인 양개혜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모안청이 4살되던해 가을에 모택동은 중공중앙이 한구에서 소집한 긴급회의에 참가한후 부인 양개혜, 보모 진옥영과 모안영, 모안청, 모안룡 삼형제를 비밀리에 장인네 집인 장사 판창의 양가댁으로 보내고나서 명령을 받들고 추수봉기를 일으키러 떠났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나서야 모택동, 모안청부자가 다시 상봉할수 있었다.

 

모택동이 떠난후 3년동안 모안청은 장사 판창에서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다. 1930년 11월 14일, 양개혜가 호남군벌 하건에게 살해되자 모씨3형제는 외할머니 향진희와 함께 살았다. 얼마후 상해로부터 향진희더러 아이들을 상해로 보내라는 모택민의 편지가 왔다. 주밀한 배치끝에 60여세의 향진희할머니와 20여살의 며느리 리숭덕이 친척방문가는 사람으로 분장하고 삼형제를 데리고 기차에 앉아 무한으로 갔으며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서 모씨3형제는 지하공산당이 꾸리는 상해대동유치원에서 공부하게 되였는데 후에 상해지하당이 엄중하게 파괴를 당하면서 대동유치원도 해산되여 모안영, 모안청형제는 동건오의 집에 맡기여졌고 그후부터 두 사람은 끝없는 생활의 어려움을 맛보게 되였다.

 

모안영이 후에 그때의 처참한 생활을 회억하며 한 말이 있다. “나는 그때 도적질하지 않고 부자밑에서 일하지 않은외에는 모든 생활이 《삼모류랑기》의 삼모와 다를바 없었다. 거리바닥에서 자고 남의 마루바닥을 닦아주었으며 쓰레기통에서 누데기를 줏는 등 무슨 일이나 다 하였다. 상해에는 외백도교라는 곳이 있는데 인력거가 올라가기 힘드므로 나와 동생 안청이 뒤에서 떠밀어주고는 돈을 좀씩 얻어가지군 하였다…”

 

아 픔

 

더욱 불행한것은 이 시기에 모안청이 구타당하여 머리에 상처입고 뇌진탕이란 병을 얻어 일생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된것이다.

 

1936년, 동건오를 위수로 한 상해지하당원들의 도움으로 모안영과 모안청 두 형제는 동북의용군사령 리두장군이 서유럽으로 고찰가는 기회를 타서 프랑스를 거쳐 쏘련에 도착하였다.

 

1937년초, 모스크바에 이른 두 형제는 선후로 모스크바교외의 모니노국제 제2아동병원과 이완노브성의 국제 제1아동병원 등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때 모택동은 이미 홍군을 거느리고 섬북에 이르렀고 거기서 연안을 중심으로 한 항일근거지를 세웠다.

 

1938년, 누가 쏘련으로부터 안영과 안청의 사진을 가져왔었는데 모택동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얼마후 모택동은 편지를 써서 쏘련으로 가는 사람한테 부탁했다. “사랑하는 안영, 안청아! 늘 너희들을 생각한다. 너희들의 형편이 좋고 진보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또 너희들의 사진까지 받아보았기에 아주 기쁘다. 지금 인편으로 이 편지를 보내니 너희들도 나한테 편지를 보내오기 바란다. 나는 너희들의 편지를 기다린다! 나의 형편은 좋은편이니 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편지를 쓰겠다…”

 

바로 그해에 쏘련에 있는 모택동의 두번째 부인 하자진이 모안청형제와 련계를 갖고 늘 두 사람을 보살펴주었다.

 

1947년, 모안청은 귀국후 리부춘, 채창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후에 흑룡강 극산현의 토지개혁시점에 참가했다.

 

1949년 7월, 모안청은 북경에 돌아와 중공중앙 선전부 맑스-레닌저작편역실에서 로어번역을 맡았다. 그는 10여부의 맑스-레닌경전저작과 정치리론서적을 번역출판하였고 10여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상해에서 상처받은 머리는 나을리 없었다.

 

모택동의 보건의사 왕학빈의 회억에 의하면 한번은 모택동이 편지 한통을 왕학빈에게 보여주었는데 모안청이 모택동한테 쓴것이였다. 편지내용은 모안청이 자기 머리속에 한 “녀석”이 들어있는데 자기는 그 “녀석”과 끝없이 싱갱이질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후 모택동은 하는수 없이 모안청을 쏘련에 보내 병치료를 받게 했다.

 

혼 인

 

1959년, 쏘련에서 치료를 받고 귀국한후 모안청은 대련 남산호텔에서 휴양하고있었다. 그때 모안영이 이미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되였다. 대련시공안국 경위처 원 처장 장세보의 회억에 의하면 모택동의 사돈 장문추가 모택동과 계속 인연을 맺겠다고 원하면서 모안영의 안해인 류송림의 녀동생 소화를 데리고 대련에 와 휴양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 휴양은 “맞선을 보는 색채가 얼마간 있었다.”

 

뜻밖에도 모안청과 소화는 보자마자 익숙한 사이처럼 이야기를 잘하였다. 그후 두 사람은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이 일을 안 모택동은 특별히 모안청에게 편지를 썼다. “네 병이 많이 나았다니 아주 기쁘다. 의사동지들과 너를 도와주고있는 다른 동지들의 의견을 잘 듣고 잘 휴양하면서 치료를 잘해야 한다. 절대 성급해서는 안된다. 너의 형수 사제와 그 녀동생 소화가 너를 보러 왔고 또 너의 병상황을 아주 관심하고있으니 너는 그녀들을 잘 대해주어야 한다. 네가 소화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던데 너희들은 친구로 사귈 의향이 있니? 소화는 좋은 아이이다. 잘 이야기해보아라…”

 

1960년의 5.1절전야에 모안청과 소화는 대련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1970년에 아들을 보았는데 모택동은 “신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 향

 

1931년에 장사 판창을 떠난후 모안청은 여러해동안 고향으로 가보지 못했다.

 

1952년에 그는 처음으로 소산으로 갔었다. 모안청의 사촌동생 모안평의 회억에 의하면 모안청은 그때 모택동의 고향집을 참관하고 촌에서 일부 로인들을 만났는데 그속에는 그의 할머니도 들어있었다. 떠날 때 모안청은 특별히 200원을 꺼내 로인한테 드리면서 “이것은 아버지가 주는것이 아니라 내돈”이라고 말했다 한다.

 

모택동이 서거한후 모안청부부는 여러번 소산으로 가보았는데 갈적마다 소산호텔에 들었고 또 모택동의 고향집과 적수동으로 가보았으며 소산에다 중로 두 나라 문자로 “나는 소산을 몹시 사랑한다”는 제사를 썼다.

 

“이 말은 우리가 그한테 아무런 제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생각해낸것이다.” 모안평은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의 출생지인 판창에 대해 모안청은 더욱 깊은 감정을 품고있었다. 어릴적 그는 줄곧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고 “양영수”라는 이름도 가지고있었다.

 

몇십년후 그는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묘에 와 성묘한 다음 서명책에다 “양안청”이라고 썼다. 모두들 그가 잘못 쓰지 않았는가고 여겼지만 그의 유년시절 감정의 문이 그때까지 열려있었는지도 모른다.

 

만 년

 

쏘련에서 11년간 사업하고 학습하였기에 모안청은 로어로 사고하는 습관이 양성되였고 일상생활양식도 유럽식의 풍격을 확보했다.

 

음악을 좋아하는것은 모안청의 큰 애호이다. 젊었을 때 그는 피아노 등 악기를 다룰줄 알았고 작곡도 할줄 알았다. 모안청의 생활은 주로 텔레비죤을 보고 책을 읽고 신문을 보는것인데 로어를 한어보다 더 잘 알기에 특히 로씨야문학을 즐겼다.

 

모안청의 집에서 비서장으로 4년간 있은 장정걸은 “모안청은 성격이 아주 좋다. 정말 좋다!”고 말했다.

 

장정걸의 회억에 따르면 모택동이 혁명하러 떠나고 양개혜가 일찍 희생되여 모안영, 모안청 형제는 오래동안 서로 의지해 살아온 까닭에 그들 “형제의 감정은 특별히 깊다.”

 

“안영의 희생은 그한테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장정걸은 모안청이 여러번 “나는 형을 보았다. 나는 그와 산보하러 갔다”고 말하는것을 들었다고 했다.

 

《환구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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