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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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출세기
2012년 10월 13일 20시 52분  조회:10243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출세의 길
 
                                                 최 균 선
 
                                                       1
 
    대학을 졸업할때까지만도 꿈도 푸르렀고 패기도 넘치던 그였다. 다른 동학들은 일체 “련합군”을 출동시켜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뚫으려고 동분서주할 때 그는 배포유하게 도서실에 가서 싱갱이질했다.
 《야, 이 연변시골내기야, 너에겐 노을길만 펼쳐질줄 아느냐? 어느때라구 죽치구 앉아서 백일몽을 꾸냐?》
    한침실에 친구들이 답답해서 지청구를 대면 영균이는 사람좋게 히죽이 웃기만했다. 사실 친구들에게 내색을 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도 속에 이미 타산이 서있었던것이다. 이 몇년래 졸업생들은 저저히 정부기관이나 합자기업에 들어가려고 뛰여 나녔지 학교에 남아서 분필가루를 먹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영균이는 어릴때부터 교원이 되는것이 최대의 리상이였는데 대학을 졸업하고나서도 자기의 개성으로 볼때 교원이 가장 합당하다고 여기고있었다. 그는 장차 대미술가가 되려고 윽벼르고 있었다.
  《나 학교에 남아 석사공부할 작정이야, 늬들 먼저 나가 돈많이 벌어라. 나중에 웃는놈이 제일 통쾌하게 웃는다더라. 이제 두구보라구.》
  《어랍쇼, 꿈만은 알락달락하군그래, 하하하…》
    영균이의 대답에 모두 왼고개를 탈았다. 하긴 지금 세월에 학교에 남아서 교편을 잡는다는것은 미친놈으로 간주되였다. 그러나 영균이, 그 자신은 확실히 교단에 희망을 세워둔지 오래다. 그는 자기의 오래 묵은 리상의 나무가 허무하게 말라죽지는 않 을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시골의 코흘리개시절부터 그는 교원을 너무너무 숭상해왔다. 선생님은 지고무상의 사람이였고 선생님의 말이면 곧 성지였다.
    소학교 다닐때 일이다. 한번은 선생님이 회충약을 나누어주면서 한번에 열알씩 먹으라고 지시했다. 그의 엄마는 외동아들에게 무슨 탈이라도 생길가봐 몇번에 나누어 먹으라고 얼리고 닥치고 했지만 선생님의 말인데 어떻게 어기는가고 고집을 부리 며 시킨대로 다먹어버렸다. 그처럼 선생님을 하늘같이 우러러 모시던 영균이였다. 
    그러나 친구들의 말처럼 세상은 그런게 아니였다. 친구들이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뛰여보라고 권유했지만 그저 시무룩히 웃어넘겼다. 그러나 그 웃음이 똥집을 달게 하는 한숨으로 되여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친구들의 말이 적중했다. 그의 꿈이 잔 뜩 불구었던 고무풍선처럼 터질줄이야, 금테안경을 건 계주임이 말하기를 시교육 위원회에 올려보내기는 했지만 그만이 비준되지 않았다는것이였다. 원래 학교에서는 학생을 더많이 모집하기 위해 새로 숱한 전업을 설치하기로 하고 백여명의 우수생을 학교에 남기였는데 유독 영균이만 실망을 안았던것이다. 영균이는 그만 울상이 되였다. 계주임을 비롯하여 보도원, 학생처장 등이 영균에게 사상공작을 들이댔다.
    아직 반에는 사범전과대학에 갈수 있는 명액이 하나 있다면서 무마하였다. 만약 영균이 자신이 그 학교에라도 가겠다면 얼마든지 추천할수 있다는것이였다. 영균이는 같은 도시이고 해서 장차 그곳을 발판으로 다시 모교에 와서 교편을 잡을 장원한 타산을 하고 동의하였다. 그러자 계주임은 립공속죄라도 하듯이 적극적으로 전화련계를 달아주며 활동하였다. 원래 대학에 남기려던 우수생이니 사전에 가면 중용할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며칠후 영균이는 사범전과대학으로 찾아갔다. 사전의 중문계주임이란 사람은 빙글의자에 앉은채 눈길도 돌리지 않고 쌀쌀한 말을 짜내듯 띄염띄염 내뱉았다.
    ㅡ아, 전화는 받았는데 그 문젠 안될것 같소. 이미 편제가 다찼으니까말이요. 만약 정오겠다면 후근부문은 좀 고려할수 있지…
    사범전과대학에서 그렇게 삐딱하게 나오자 학교에서도 어떻게 해볼수 없다면서 맥을 놓아버렸다. 결국 영균이는 제쪽지에 물러나서 시드는 애호박신세가 되였다. 평소에 영균이를 될성부른 젊은이라고 좋게 보아오던 한 교수가 가만히 알아보았는데 결코 편제문제가 아니였다. 배가 유난히 나온 사범전과대학의 그 중문계주임이란자가 사사로이 말했다는 내용을 전해 듣는 순간 영균이는 뒤잔등에 랭수를 뒤집어쓰는 것같았다. 그는 그의 말을 두고두고  되새겼다.
    ㅡ흥, 그 자식도 계주임이고 나도 계주임인데 그가 무슨 직접상급이라구 누굴 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거야,
    ㅡ지금 세상이 이렇게 돼먹었다구, 알겠나? 달리 생각해보게…
    영균이는 쓰디쓴 웃음을 짓씹어삼켰다. 결국 애매하게 뽈처럼 이리저리 채워다닌것이 분하고 절통하였다. 제2차분배로 지구에 내려갈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구에서도 빽이 없는 그는 현에 돌아올수밖에 없었다. 군이는 현정부선전부에나 들어갈가 하고 애를 쓰다가 역시 빽이 없는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몇번이나 체념을 불러보았다.
    영균이는 배치를 기다리는 동안 고향마을 하마래에 돌아와 막연한 기다림에 시달리며 속절없는 나날을 보내였다. 밥술을 놓기 바쁘게 두만강가의 떨어져나간 벼랑턱에 걸터앉아 해를 동무하였다. 령혼의 크낙한 고통과 인격유린의 불만을 넘치게 안아 보고나서야 그는 자신의 어리숙함에 침을 뱉지 않을수 없었다. 시간은 그 어떤것도 색바래게 하는 법이다. 상당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졸업후의 그 나날에 있었던 희노애락을 여유롭게 돌이켜볼수 있었다.
    오늘도 석양은 평두산으로 넘어가는 산마루에서 저혼자 얼굴을 붉히고있다. 영균이가 저혼자 망망한 세사와 불만가득한 자기 인생길에 속절없는 회한을 널고있 든말든 서쪽하늘을 곱게 물들이던 장미색 저녁노을이 비단필을 펼친듯 수림과 곡식밭 과 그리고 지붕위에 소리없이 흘러내리며 저녁연기 피여오르는 시골의 평화를 감싸안 고있었다. 한여름의 푸른산과 황혼녘의 시원한 골바람이 그의 긴머리카락을 보듬어주었다. 그는 버릇처럼 환상같은 자기 세계에 빠져들었다…
    복지는 결코 대도시나 번거로운 벌방지역에만 아니라 인간의 진실한 마음이 서로 얽히는 이 시골에서도 찾을수 있을것이다. 탐욕과 암투와 음모와 교역이 아직 꿈틀대지 않는 이 한적한 마을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수는 없을가? 그런 케케묵은 생각속에서 이 저녁처럼 호젓하게 저므는 날이면 영균이는 소외와 슬픔과 고독이 무엇인가를 새삼스레 되씹지 않을수 없었다.
석양의 잔광이 피빛으로 타다가 바야흐로 암담한 색채의 너울을 뒤집어쓰고있는 어스름속에 침묵으로 밤을 맞는 백바위를 바라볼때면 인간의 끓는 정열과 욕망이 너무도 사소한 빛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천년고독에도 말이 없는 산은 그의 가가슴의 상처에 참고견디는 철학을 주었다.
    이 마래곡에서 지금 유일하게 속심을 나눌수 있는 친구인 인표가 문득 생각났다.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아쥐고도 돈이 없어 못가고 심통만 부리는 인표가 말한적이 있 었다.
 《형님, 나는 요즘 한가지 철학을 터득했어, 슬픔의 진의를 깨달으면 삶은 더소중해지는것이라구, 비록 어둡고 슬픈 자각이지만 말이야…》
    그는 영균이를 자기보다 더불운한 처지라고 곧잘 위로했다. 인표는 영균형의 체념비슷한 자각이 어느 대학교단에서 손을 젓고있어야 할 모습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때 울분이 터지는것을 숨길수 없었다. 그것은 찢어진 기폭같은것이였 고 피가 퇴색한 청춘의 기발이기도 했다. 한많은 시름을 싣고 흘러내리는 두만강물결 에 흘려보낸 사연같이 다시 거슬러 올라올길 없는 자탄같기도 한것이였다.
 《쓴맛에서 단맛을 그리는게 인생인지도 모르지》
 《흥, 셈평좋은 소릴 하구있네. 속은 시래기가 되여가지고 공연히 단맛을 찾는체 하는게 아니요? 랭수먹고 된똥을 누려하듯이 말이요. 미각을 아예 상실했다는게 오려 솔직한 고백이잖아?》
 《아니, 미각이 망각된 곳에서 새맛을 보게될지도 모르지 않니? 좀 막연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기대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는 영균이를 알수 없다는듯 바라보다가 기어이 부르튼 소리를 한마디 한다.
  《형님, 난 죽지부러진 기러기야, 모두가 날고있는데 젠장, 난 이 시골의 외로움에 참을수 없어, 아예 떠나버리고 말거야》
그리고는 다잡을길 없는 마음을 위로하기나 하듯이 품속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여 애절한 가락을 뽑아낸다.
 《야, 나도 그래. 외로움을 겪는다는것은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지. 쓸쓸히 지는 락엽을 보는때처럼 말이다. 가을마다 그렇게 떨어지고 다시 가지에 이파리가 돋고… 내생각의 나무에도 움이트고 그리곤 또 바람에 날려가고…내 인생이 그렇구 그런지도 몰라, 후유…너 참 피리를 귀신처럼 잘부는구나. 언제 배웠길래?》
  《난 피리를 입으로 부는게 아니라 심장으로 부는거야, 마음이 찢기며 새여나오는 구슬픈 소리가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거든.》
  《그래, 음악은 즐거워서 만든것이라기보다 비애를 쏟아내느라고 만들어졌을수도 있지. 난 외롭고 고달플 때에는 저 명동골에 깊이 들어가서 이 가슴이 터지도록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군했지. 지금은 그저 휘파람만 불어도 모든 잡념들이 비애를 얼싸안고 달려온단 말이야, 사람은 슬프면 눈물이 나온다지않아? 어찌생각하면 눈물이 나니까 슬프다고 하는것인지, 에익, 정말 개떡같은 내인생, 보잘것없고 하찮 은 인생살이야…》
    단둘이 산마루에 앉아 한탄소리로 시간을 삶을때면 오랑캐령너머로 눈길을 돌리며 한숨을 토했다. 고개너머로 흰구름이 흘러가고 어느 수풀에서 해설피 게으른 울음을 우는 황소의 목멘 영각소리가 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형님, 그 좋은 조각기술이랑 배웠다가 이 마래곡을 조각하겠소? 어디가서 그림이라도 그려서 팔구려. 나같으면 언녕…》
인표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언제까지나 땀에 젖어 밭에서 돌아오는 아버지의 등 허리를 훔쳐보며 안스러움을 삼키는것도 일은 아닌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을 좇아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 움직임은 결단내리면 어떤 테두리를 과감히 벗어나서 부정적적이거나 아니면 습관된 행위로 굳어져내려온 관념의 계률을 마사버리고 제한 몸을 내댈 결심이 앞서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그저 서생으로 운치있는 미술가로 한생을 장식하려했던것이니 그 꿈이 부당하게 깨여져야 하는 아쉬움이니 아픔과 슬픔을 그리고 몸부림이 이제 평생의 한으로만 남아야 할지도 모른다.
《 형님, 우리 이렇게 썩지 말고 얼른 떠나버립시다. 하다못해 어느 건축장에서 모래치기를 하더라도 여기보다야 가슴이 열릴거 아니요?》
    영균이는 고집을 쓰면 벽이라도 박차고 나갈 인표의 칼칼한 성미기 부러웠다. 그리고 그라면 어떤 곳에 가든지 기죽지 않고 뚫고나갈것이라는 믿음이 앞섰다. 그런데 자기는 고향집뜨락에 줄느런히 선 포풀라나무에 넓다란 잎사귀가 한여름 푸른 꿈을 키우다가 다시 황들어 지던 지난 가을, 영균이는 밀리고 밀리다가 마침내 본지방에 떨어져서 분배문제로 뛰여다녔다.
그런데 조락의 가을처럼 간곳마다 실망이 흩날리고 다시 산기슭에 희망의 봄꽃이 피였다. 포풀라가지마다에 푸른기운을 떨치건만 영균의 직업분배는 결국 환멸로 끝 나버리고 이렇게 시골바닥에 주저앉아 묵은 꿈을 찢어발기여 짓씹고있으니 한심하지 않으랴, 분노의 웨침같기도 하고 때로는 막무가내한 신음소리를 오랑캐령너머로 날려 보내는게 하는 일이였다. 두만강물결에 구름이 떠가듯이 세월은 흘러가건만 지나간 일들은 제자리에 굳어진채로 다가만 온다.
    그의 일기장에는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기록이 담겨있었다.
    92년 7월 3일:
    나는 끝내 4년이란 짧고도 긴 대학생활을 마치고 졸업식이 끝나자 이튿날로 귀향의 려로에 올랐다…
    7월 6일:
    나는 한가슴 부푸는 희망을 안고 고향의 현성에 돌아왔다. 고향은 날따라 일신해가고있었다.…
    7월 10일:
    분배수속에 수요될 모든 증건을 챙겨가지고 교육국에 갔다. 부임증에 부임단위가 여기가 아니라며 인사국으로 가라고했다…
   7월 14일:
   현인사국에 갔다. 8월초에야 본인이 어디로 가게 될 지 알수 있으니 집에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8월 5일:
    현인사국에 가서 문의하니 아직 결론을 짓지 못했다면서 더 기다리라고 했다. 9월초에 다시 와보라고 했다. 큰맘 먹고 조심스레 문의했다. 어느 단위와 협의가 잘 안되여서 이렇게 시일이 걸리는가고 했더니 전현내의 모든 대학, 중등전문학교. 전과대학생. 전업군인들이 모두 도착해야 통일적으로 규획할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인사방면의 사업실질에 대해 무지하다는것을 시인하면서도 시종 불길한 예감이 갈마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9월 9일:
   고향마을 소학교의 전화를 빌어 현인사국에 문의하였더니 10월초에 다시 보자고 대답이 왔다. 속에서 열불이 터졌지만 내 손에 자루가 없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견지하는자가 승리한다니까 기다릴수밖에 없다.
   10월 9일:
    현인사국에 가니 등기표를 내주며 필요한 등기를 하라고 했다. 마음이 격동 되였던 탓인지 워낙 박필이 아닌 나였지만 글씨가 엉망이 되여진것 같았고 갑자기 사유가 막힌듯해서 잡다한 여러가지 등기란을 한참씩이나 연구해 보고서야 써넣을수 있었다.
   10월 14일:
    마침내 현문화국에 부임장을 가지고 들어섰다. 국에 인사과장이 웃음띤 얼굴로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그러면서 갓졸업한 대학생들은 반드시 기층에 내려가서 일년간 단련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감개무량한 어조로 이미 고향건설에 이바지하려고 돌아온 이상, 그리고 원래 농민의 아들이기에 어떤 단련도 겪어낼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비록 오른 손을 들고 당기앞에서 선서하는것처럼 숭엄한 분위기는 아니였지만 아무튼 나로서는 장엄한 맹세였다.인사고장은 뜻이 있는 젊은이라고 한바탕 추어올리더니 신덕진정부로 발령을 내렸다. 그러나 발령장은 93년 4월1일에야 직접 받을수 있다고 했다. 다음 구체 사업은 부임지에 가서 진정부의 지시에 따르라고 했다. 나는 실망했지만 금방 제입으 로 한 맹세가 있어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여 땀만 뻘뻘 흘렸다.
 
                                                                  2
 
    인표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마래곡에는 더 이상 영균이를 잡아둘 리유가 없었다. 일찍 당당한 대학생이 될수도 있었으나 출신때문에 꿈이 깨여져버린 아버지는 한사코 시골선비냄새을 피우며 훈계한다. 등산은 꼭대기부터 내려오는것이 아니라 맨골짜기에서 한걸음씩 올라가는것이라고, 인생이 어찌 고봉에서부터 시작되겠느냐며 당이 시키는대로 복종하고 차차 노력하여 향상하라고, 그래도 지금 세월에는 철밥통을 차지하고있는것이 당상이란다. 
    93년 4월1일:영균이는 마침내 발령장을 받아쥐고 기쁜지 슬픈지 모를 범벅이 된 심정으로 고향에서 60여리나 떨어져있는 신덕진에 도착했는데 공교롭게도 일요일 이여서 려관방에 행장을 풀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영균이는 신덕진정부의 선전간사로 다사다난한 인생행로를 시작했다. 진정부의 선전간사란 심부름군으로서 삐치지 않는 일이란  없었다. 령도의 발언고도 작성해야 하고 흑판보, 선전란도 책임져야 하고 구호도 써야 했다. (자넨 이 향에서 제일 많이 먹물을 먹은 사람이니까 이 일이야 아무래도 자네가…)하는 식이였다. 그러나 영균이는 (못하겠소.)하는 소리 한마디 없었다.
    그러다보니 영균이는 누구나 일을 부탁하기 쉬운 사람으로 알려져서 너나없이 벼라별 자질구레한 일까지 다시켰다. 정 일이 딸려서 좀 밀렸다가 하면 안되는가 사정하면 적반하장격으로 재세를 부린다니, 사람이 게으르다느니 하면서 오히려 뒤공론들이 분분했다.
    그도 속밸이 없는것이 아니였다. 속으로 (자기들은 하지 않고 차물이나 마시며 신문이나 보고 할일이 있으나 없으나 트럼프를 치면서도 국록은 국록대로 타먹으면서…) 하고 듣지 못하는 욕질도 해댄다.
    어느 날, 현에 회의를 갔다가 돌아온 향당위 곽서기의 얼굴에 언제 소나기가 울지모를 검은구름이 잔뜩 끼여있었다. 현위서기가 신덕진의 선전사업이 형세에 바짝 따라서지 못한다고 지명비판을 했던것이다. 하긴 신덕진이 어느 한번 유선방송에 방송된적도 없었고 신문에 난일도 없었으니 비판을 받아도 싼일이였다. 하지만 서울서 매맞고 송도서 주먹질이요 시에미 역증에 개배때기를 차는격이라 현에서 당한 수모를 영균에게 화풀이하는 그 자신도 속으로는 허구펐을테지만 서슬이 퍼랬다.
    《동무, 선전간사란 무엇을 하고 밥을 먹는 사람이요? 초중학생들처럼 그저 선전란이나 꾸리고 바람벽에 구호나 써갈기는게 선전간사가 하는 일인가말이요? 비슷한 신문보도 한편 만들어 못낸단 말이여? 대학은 다닌거 사실인가?》
    영균이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인격모욕이였다. 억이막혀 말도 나가지 않았다. 취임한지 겨우 다섯달밖에 안되는데 신덕진이 이름이 못난게 내탓이란말인가? 그래 그 모든일이 당신들 령도들이 시켜서 한일이 아니고 내가 심심해서 한 일이란 말인가? 영균이가 입을벌려 발명이나 하려는데 서기는 아예 들을것도 없다는듯 손을 홱 저어버리고는 지시를 내렸다.
    《지금 무엇을 해석할 때가 아니란말이요. 자기 위치를 얼마나 잘 지켰는가를 잘 검토해보고 우리 진의 선전사업을 어떻게 혁신할것인가를 생각하란말이요.》
    진당위에서는 련며칠 연구하고 선전사업을 억세게 틀어쥘데 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면 우선 진정부임직원들 모두가 선전사업에 뛰여들도록 고무격려할수 있는 기제를 마련해야 했다. 만약 현급이상의 간물이나 방송에 채용되면 부동한 급별에 따라 현금으로 장려하기로 결정하고 즉시 선포했다.
    영균이는 아주 영명한 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중상금의 자극하에 잠자고있던 문필 가들이 용솟음쳐나올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한달, 두달이 지나도 향응하는자가 하나도 없었다. 알고보니 갑산에 개는 많아도 잡아먹을것이 없다더니 진정부내에 사람은 득실거려도 글을 좀 쓴다하는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원고비가 형편없는지라 누구도 흥미를 가지지 않은탓도 있겠다고 좋게 생각했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짐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끄는 소가 늘 채찍을 맞는법인가, 바빠맞은것은 영균이였다. 다른 사람들이 쓰지 않는다해서 자신도 쓰지 않는다면 실직행위가 될게 뻔했다. 그는 선전간사로서 솔선수범해야겠다고 작심했다. 그런데 실속있는 신문보도를 쓰려 면 군중속에 깊숙히 침투해야 했다.
    그는 아예 사무책상을 내치고 각 향촌대대, 학교, 향진기업에 내려가 함께 먹고 함께 일하면서 수많은 감동적인 보도감들을 발굴해서는 밤도와 가며 원고를 정리해서 투고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가리지 않고 자전거 만리행을 하면서 줄기차게 페달을 밟은만큼 연줄연줄 써냈다.
    그런데 처음에는 한강에 돌을 던진격이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피는 법이요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는법이라고 자신을 편달 하면서 끈덕지게 해냈다. 마침내 현유선방송에 신덕진의 사적들이 음파를 통해 전현 에 울려퍼졌고 신문에도 두부모만큼이라도 륙속 활자화되여 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질투의 눈길로 보는것도 모르고 그 자신은 격동에 가슴을 들먹이였다.
    곽서기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젊은이 제격이라니, 이 곽모가 사람을 잘못 받지 않았군, 자, 힘을 더 내라구, 응? 이후부턴 다른 일은 관계하지 말고 전문 원고조직만 하라니, 뒤는 내가 드팀없이 받쳐 줌세나.》
   서기가 친히 고무격려하고 뒤심이 되여주니 고생도 락이였다. 더분발했고 글이 나가는 차수에 따라 필력도 부쩍 늘어갔다.   신문원고는 현의 범위를 벗어나서 지구. 성급신문에도 꽝꽝 발표되였다.
    영균이는 진에서 명인이 되였고 수재로, 보배로 떠받들리였다. 현선전부에서도 매우 중시하고있단다. 자칫하면 승진할지도 모른다고 수군수군했다. 자연히 눈들마다 에 피발이 서기시작했다. 시기와 질투와 암해의 화살들이 아무데서나 날아왔다. 얼토 당토하지 않는것이였지만 여론은 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할수도 있었다.
 《그게 뭔가말이여, 진정부의 돈을 타먹으면서 본진의 사무실이나 지키면서 간사질이나 잘 할일이지, 아무일도 관계하지 않고 그저 제글이나 쓰려고 눈이 빨개가지고 돌아다니니, 아까운 공가의 전기나 랑비하면서 밤을 새우고…》
    그러나 이미 천리초원을 질주하기 시작한 준마를 아무도 말려낼수 없었다. 신문원고로부터 한차원 높여서 이젠 시도 한수 한수 발표하기시작했고 수필도 나갔다. 년말이 되였다. 군이는 문자로 나간 신문원고와 문학작품을 복사하여 책으로 묶고 목차까지 달았다. 그리고 별책으로 원고의 급별에 따라 명세서도 만들어서 서기에게 바쳤다.
    실물앞에서 사람들의 심사는 더구나 비틀려졌다. (흥, 그자식 잘한다고 잔뜩 추어올리니 써갈기기도 써갈겼군, 도대체 장금이 얼마나 되는거야, 786원이나 되잖아? 년말 장금보다 더 많으니…원고비는 또 얼마겠냐? )
    의견들과 불평들이 홍수처럼 쏟아져나왔다. (선전간사가 선전원고를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가? 로임에 원고비에 장려금에…이건 너무 공평하지 못해,) 아래우가 들끓는 바람에 난처해진것은 곽서기였다. 처음엔 아주 건설적인 동기로 통크게 제정한 일이고 당위성원들이 다수가결한 일이건만 원계획에 무슨 차실이 없나해서 다시 검토해보기도 했다.
    년초에 제정한대로 그많은 장금을 내주자니 여론이 끓는 팥죽가마이고 안주자니 당위서기로서 말이 서지 않는것이 되고 별로 두려운것은 아니지만도 본인이 어떤 정서로 나올지 몰라서 고려되였다. 문필가가 일단 옥필을 꺾는날엔 신덕진의 선전 사업은 령으로 내려갈것이 불보듯했다. 신덕진이 또 다시 무명무실해진다는것은 안될 일이였다.
    신덕진의 일호인물로서 실언하고 유예미결해서야 체통이 서겠는가고 마음이 바른 사람들이 암시할 때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면서 공연히 글을 너무 많이 써낸 영균이가 밉기까지 했다. 진당위확대회의에서 재삼 심중하게 연구토론한후 영균에게 진재정이 잠시 곤난하기에 장금은 후에 정황을 보아가며 체현시키겠다고 통지하였다.
    영균이는 이미 짐작했던 일인듯이 아무 내색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부터 영균이는 신문원고를 한편도 쓰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보기조차 싫어하였다. 그대신 문학작품을 쓰느라 밤을 새였다. 쓰기는 숙사에서 가만히 썼지만 발표는 세상에 하는 일이였다. 그래서 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사람이 어떻게 돼먹은 사람인가? 선전 간사로서 신문원고도 쓰지 않고 제글만 써내갈기니? 명색에 맞게 처사해야지…
    영균이의 소설이 나가면서부터 여기저기서 바지런히 3~4백원짜리 송금표가 올 때마다 배를 앓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영균이는 본직업에 충성하지 않고 군중 단결이 아주 차하므로 행정사업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결을 받았다. 얼마후 그를 진에서도 제일 편벽한 소학교에 교원으로 내려보내고 말았다.
    진정부를 떠나던 날, 누구도 내다보지 않았다. 마치 정배살이를 가는 죄인을 내다볼것 무어냐? 하는 심사들이였다. 다만 곽서기가 체신을 지키느라고 대문밖까지 나와서 례절성적으로 영균이의 손을 잠간 잡았다놓았을뿐이였다.
  《태양아래 가장 신성한 천직을 맡게 되였으니 본직업에 충성하고 특장도 계속 발휘하기 바라오. 동문 전도가 양양하니까 앞으로 어찌될지 누가 알겠소?》
    영균이는 서글프게 웃고말았다. 곽서기자신도 자기가 한말이 먼 후날 현실로 될번할줄은  몰랐을것이다. 
 
                                                                               3
 
    5년 세월이 흘러갔다. 그동안 최하층민중의 생활속에 자연히 파묻히게 된 그는 몸은 비록 시골소학교에 묻힌 로총각의 신세가 되였지만 성내외에 지명도가 있는 중견작가로 성장했다. 요즈음 성작가협회회원까지 된 당당한 명인이였다.
    그동안 현성의 중심소학교에서는 물론 중학교들에서도 욕심을 냈지만 어찌된 감투끈인지 끝내 시골학교를 벗어나지 못했다. 교육국국장도 그를 접견하였고 현위선전부장도 그를 표양하였고 현의 령도에서도 매우 중시한다고 했다. 처음에 난생 처음 모모한 사람들의 륭숭한 접대를 받고 떠받들리다보니 꿈속에서도 미소를 지었고 늘 마음이 둥둥 떠다녔다.
    《젊은이, 훌륭하네. 젊은인 우리 현의 교원대오의 보배이고 자랑이란 말일세.》
    교육국장이 영균이의 손을 굳게 잡아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젊은 작가동지, 대단하오. 우리현의 선진인물들을 모델로 소설을 많이 쓰오. 시대정신과 개혁개방의 아주 좋은 형세를 많이 반영하여 주오.》
    선전부장이 영균이의 손을 굳게 잡고 친절하게 고무격려해주었다. 영균이는 늘 격동되여있었다. 현문련같은데서 전문 문예일군으로 활약하면 창작조건도 좋지 않을 가 하는 제좋은 궁리도 자주 하였다. 그래서 한번은 기회를 엿보다가 말김에 하는것 처럼 자기의 욕망을 선전부장에게 넌지시 여쭈어보았다.
    《오! 그것참 생각을 잘했소. 내 연구해보지. 아까운 인재를 놓치기는 하지만 전반국세를 돌보아야지. 좋소. 별로 문제없을같구만.》
    교육국 하국장이 통쾌하게 대답했다. 소뿔은 단김에 빼라고 이튿날 현위의 맹서기를 찾아가서 쭈밋거리며 자기의 포부와 리상을 삼가 아뢰였다.
    《좋은 포부요. 그 뜻이 맘에 드는구만, 문제없소. 우리가 먼저 유망한 작가들의 고충을 헤아려서 해결해 주어야했었는데… 》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 그해 교육계통에서 직업을 바꿀수 있는 명액이 세개 내려왔다. 영균이가 뒤심이 단단하기에 가능성이 제일 많았다.
    이 문제를 가지고 현위에서 전문 확대회의를 열었다. 맹서기가 현중학교의 한 사람과 영균이를 제기했다. 선전부장이 중심소학교 교장과 영균이를 추천했다. 교육 국하국장이 신덕진의 중심소학교의 한 녀교원을 제기했다. 세사람의 이름을 적고보니 한명이 초과되였다. 부득불 민주가결을 짓기로 했다. 한사람이 한사람씩 추천하기로 했다. 결국 영균이를 누구도 추천하지 않았다.
    후에 영균이는 세분 령도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교육국 하국장이 영균이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고 미소를 머금었다.
    《금년에 정말 가석하게 되였소. 명년에 우선 고려하겠소.》
    영균이는 감격해마지않았다. 선전부장도 군이의 손을 잡아쥐고 친절하게 말했다.
    《명액이 넷이였다면 되는건데…참 어쩌겠소. 일이란 순으로 해야 하는게 아니겠소? 명년엔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지…》
영균이는 눈물이 글썽해서 감지덕지했다. 안된다고 하기보다 기다라는것은 얼마 나 신나는 일인가? 현의 맹서기도 자애롭게 손을 잡아주며 고무격려하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오. 원칙과 민주를 체현하다보니 섭섭하게 되였구 만…락심하지는 마오. 교육일선에 더 적극적으로 투신하면서 누구에게 부끄럼없는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좋은 작품도 많이 창작하기 바라오…》
영균이는 말없이 고개만 힘있게 조아렸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영균이는 다시 전근을 제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장편소설이 나가면서 명성이 더구나 들썽해졌다. 그렇게 또 5년 세월이 흘렀다.
    새로 임명된 현위선전부장은 작가 영균이를 알아보았다. 무척 반가와하였다. 그는 황망히 일어나 차물을 붓는다, 담배를 권한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양부장은 영균이가 온 뜻을 말하자 선선히 응낙했다. 영균이는 백락을 너무 늦게 만났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일년이 다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었다. 순진하기만했던 영균이는 그제야 세상이 돌아가는 내막을 깨닫고 출세의 길을 철저히 체념해버렸다.
    영균이의 장편소설《인생은 비탈길》이 성의 우수도서상을 타게 되였을뿐만 아니라 영화로까지 개편되여 인기를 끌었다. 성작가협회에서는 작가의 고향에서 시상식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지금은 현위서기로 된 10년전의 선전부장였던 황도씨는 전화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10년전 자기가 한 낙언이 떠올랐고 그렇게 감지덕지해 하던 서생티가 넘치던 어줍은 얼굴이 방불히 눈앞에 서있듯싶었다. 그는 전화를 걸어 영균이를 찾았다. 그러나 영균이는 문예계통에서 사업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유관령도를 찾아 한바탕 훈계하였다.
    《어찌된 일이요? 인재를 그렇게 중시하지 않다니? 성에서도 이름을 꼽는 인재를 그렇게 파묻어두어도 되는거요? 말짱 관료주의자들이구만. 당장 현문련에 와서 사업하도록 즉각 발령을 내리시오. 이게 무슨 망신이요? 표창대회가 열리기전에 일을 다 마무리해야지 큰 일 날줄아오.》
    영균이는 정말 꿈에도 바라던 일이 갑작스레 해결되여 심장이 터져나갈듯이 부풀 어올랐지만 인차 마음의 평온을 찾고 례절스럽고 완곡하게 사절해버렸다.
    표창대회에 참석한 황서기는 격앙된 목소리로 강화하였다.
    《영균작가는 우리 상길현의 태생이고 고향에서 잔뼈가 굳어 지식의 날개를 키운 후에도 나서자란 고향을 잊지 않고 여기서 사업하고 고향의 물을 마시며 거작들을 륙속 펴냈습니다. 물론 본인의 재질도 우선이겠지만 우리 현에서 알심들여 배양하고 육성한 인재라고 부끄럼없이 말할수 있습니다. 그의 오늘의 성취는 력대의 현당위와 해당부문의 관심과 배려와 갈라놓고 생각할수 없습니다. 예,우리 현위에서는 시종 인재를 중히여겼지요…》
    현임 양선전부장도 10년래 어떻게 생활상, 창작사업상 관심하고 배려를 돌렸 는가를 감개무량해서 역설했다. 영균이는 어이없어 재채기가 나왔지만 바보처럼 웃는체했고 본능적으로 박수를 쳤다. 아마 거울을 보았으면 그보다 더 멍청스러운 표정은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후 성작가협회에서 전업작가로 초빙한다는 공문을 현위에 내려보냈다. 현위 황서기는 본때스럽게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였다. 전근수속을 밟으러 온 영균이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무는 우리 현의 특수인재이기에 다른 보통교원과는 다르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에 청시하고 연구토론해야 결정을 지을수 있습니다. 》
    결국 영균이의 대붕의 꿈은 깨여졌다. 그냥 소학교에 주저앉아야 할 운명이였다. 황서기가 각부문에 지시를 내린것이다.
    《이 몇년래 교원대오내에서 인재류실이 엄중한데 더구나 영균이같은 대작가를 우리 현에서 떠나보낼수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 현의 간판을 없애는것과 같은것 이다》라는 황씨의 어명이 영균에게 전해진것은 썩 후의 일이였다. 생각하던 끝에 어쩌는가 보느라고 양부장에게 이제라도 문련에 갈 의향이 있다고했더니 대답이 아주 맺고 끊는듯이 단마디 명창이였다.
    《아! 그것말이요? 이미 편제가 다 차서 자리가 없소!》
    영균이는 고향에 더는 미련이 없었다. 이튿날 그는 현교육국에 사직서를 바쳤다. 그리고 그 걸음으로 역전에 나갔다. 아무도 그가 어데로 갔는지 모른다. 
    그런데 석달후 그가 다시 나타났다. 사람들의 의론처럼 갈곳이 없거나 고향에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래동안 끌어오던 결혼문제를 락착짓기 위해서였다. 그의 안해될 처녀는 황서기의 천금녀였다. 둘다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나이였다.
    녀자의 집에서 견결히 결혼을 반대하자 둘이는 손에 손잡고 만리이역에로 날아가버렸다. 소문엔 군이를 현문련주석자리에 위임하겠으니 함께 돌아오라고 황도씨가 딸에게 수차 전화를 띄웠다는둥 현공안국에서 현위서기의 천금녀를 유괴해간 영균이 를 잡으려 갔다는둥 시골현성에 벼라별 소문으로 파죽가마끓듯 했다…
 
                              2008년 6 월 23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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