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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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아름다운 착각
2012년 11월 29일 18시 07분  조회:11442  추천:1  작성자: 최균선
 (중편소설)                      아름다운 착각
                                            
                                            최 균 선                          
                              
                                        실락자의
 
    세상만사가 조화라더니 내운명이야말로 조화가 아닌가, 그렇듯 모질게도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던 설한풍을 간신히 몰아내고 뒤늦어 깃든 두번째 봄날에 사랑의 꽃나무를 알뜰히 가꾸고있는데 실종된지 8년이나 되는 안해 경이가 어느 구름에서 비방울이 떨어질지 알수 없는 비운을 몰고왔으니말이다.
    나는 3년전에 벌써 경이의 사망신고서를 내였었다. 그런데 새안해가 될 리미와 막 결혼하려는 때에 경이의 사망신고를 취소해야 하였으니 신혼차야에 구곡간장을 찢는게 아니고 무엇이냐, 내곁에서 자취를 감춘 기나긴 세월, 지지리도 나를 울리였던 그녀가 저때도 아니고 딱 이때에 살아서 돌아왔으니 일희일비라고 해야 할지?
   10년전, 나는 친구안해의 소개로 경이를 알게 되였다. 듣던바처럼 기막히게 매혹적인 미녀였다. 인형처럼 정교한 얼굴에 살갗은 우유빛인데 꿈꾸는듯 몽롱한 눈길, 조금은 파리하고 우울한 기색은 가슴저린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다병한 미인을 련상시켰다. 몸매는 물찬제비처럼 매끈하게 쭉 빠졌지만 너무 가냘프고 온몸에 애수가 뚝뚝 흘러서 측은하게 여겨지기까지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도전이라도 하려는듯 유별나게 높은 가슴을 쑥 내밀고있어서 조금도 헝클어지지 않은 곡선미속에 미인의 도고함을 과시하고있었다.
    그녀는 일찍 부모의 사랑을 잃고 외할아버지손에서 어렵게 자라왔다고 한다. 동정의 닭알에서 여러번 사랑의 암탉이 기여나왔다지만 남자인 내가 오히려 애틋한 동정심으로부터 녀자애를 아껴주고 싶었고 목숨으로 지켜주고 싶었으니 동정의 닭알 에서 수탉이 기여나왔다고나 할가부다. 아무튼 나는 하늘이 점지해준 가연이라 생각하고 즉석에서 맺고끊었다. 
    그런데 흥소리가 방간이라고 경이를 본 아버지는 별스러운 선견지명을 내놓았다. 사상학의사인 아버지는 계집애가 얼굴이 저렇게 요망스러울만큼 생기고서야 력사가 복잡하지 않을수 있느냐고, 녀자의 과거는 곧 미래이기도 하다면서 그만큼 사연많은 녀자는 믿음성도 없다고 점이라도 친듯이 딱 찍어말했다. 그야말로 되는 호박에 손가락질이였다.
    마가 한자 오르면 도(道)도 한자 오르는법이다. 워낙 쇠힘줄인 내가 부득부득 우겨대자 아버지는 마지못해 응낙은 했지만 밤이 길면 꿈자리 사납다면서 내막을 캐여볼새도 없이 총망히 결혼식을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사랑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오해이던가?결혼후 나는 너무나 담담한 경이에게서 인차 향기없는 모란을 련상하였다. 어쩌면 아버지의 예감이 맞아떨어지는지 몰랐다.
    동방화촉의 밤은 서먹서먹해 그렇더라도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그냥 새초롬한 얼굴이였다. 날이 가고 달이 가도 경이는 웃음을 잃은 천사였다. 말하지 않는 그 내속을 어찌 알랴만 나는 무턱대고 신혼의 불붙는 정열로 경이의 마음속 고드름을 녹여 주려고 왼심썼다. 포사를 한번 웃기려고 봉화대에 불을 질러 제후들을 롱락했다는 주유왕이 부러웠다. 만약 경이가 한번이라도 웃을수만 있다면 내사 골목길에 불이라도 확 싸지를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경이의 얼굴을 아직 철이 되지 않아 망울을 터치지 않은 한송이 꽃으로 좋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세괃은 성미를 싹 죽이고 장비바느질같이 서투르나마 경이의 웃음을 창출하기 위한 애정유희도 많이 구상했다. 모두 허사였다. 다행 이도 이성지합의 필연적결과는 속이지 않아서 이듬해에 옥동자를 낳아주었다.
    모성애가 녀자를 새롭게 태여나게 한다더니 경이에게 차차 반가운 변화가 생겼다. 고운웃음은 종시 피여날줄 몰랐지만 시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내게도 더없이 곰살갑게 굴었다. 너무 유순했고 얼이라도 빠지지 않았나 의심이 갈만큼 절대순종이여서 그만하면 옥에 티라고 사랑더하기만 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변함없는 사랑의 열화속에 살을 섞으며 사노라면 그녀의 마음속에도 사랑의 봄이 오고 웃음꽃도 만발할 날이 있을것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그만큼 나는 성애에 들어가서는 경이가 고달파할 정도로 극성을 부렸고 왕후처럼 떠받들었다. 그러는 나를 두고 어머니가 무골충같이 색시버릇 잘못 굳힌다고 야단이였지만 나는 오히려 더 엎어졌다. 미인안해를 얻으면 단명하다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의 결혼생활의 전부의 내용은 미인안해에게 끝까지 헌신하는 그속에서 나도 이성지합의 락을 누리는것이였다.  
   내가 하도 귀중한 꽃병을 다루듯 매사에 극성을 부렸기에 우리의 신혼생활은 고요한 늪처럼 평온했다. 하긴 버젓한 남편으로서 전혀 웃지 않는 안해의  얼굴을 마주하는것보다 더 속상한 일이 없었지만 얼음장속에서도 해동의 봄물이 흐르지 않던가, 내심하게 기다려야 했다. 나는 그렇게 죽을둥살둥 모르게 경이를 사랑했던것이다. 사랑의 계산식에는 더하기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그렇게 출중한 인물이면 돈많고 지위높은 사람을 톡톡 튕겨가며 고를수 있었 으련만  미남도 아니요 가진것도 없는 남자에게 일생을 기탁해준것이 은근히 고마워 서 더하기에 더하기 사랑만 샘솟았는지 모른다. 나는 바보같이 경이를 위해서는 불가능이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히다고 아들애가 돌을 잡던 그해 어느날 아침 슬며시 집을 나간 경이가 종시 돌아오지 않을 줄이야, 그렇게 귀애하던 아들마저 내버리고 훌쩍 떠나갈 독종일줄은 정말 몰랐다. 하루아침에 안해를 잃은 나는 미칠것 같았다. 실종신고를 낸후 몇년을 두고 공안국에서 확인해보라는 녀자시체란 시체는 다 보았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속에 잦아들었는지 경이는 그냥 종무소식이였다. 가슴찢기는 하루하루의 사연을 일기로 적었다면 아마 애정3부곡은 되였을것이다. 
 
                                        운명의 숨박곡질
 
    그동안 수십번이나 가택수색을 하듯이 집안을 발칵 뒤집고 책장속도 몇십번이나 뒤져냈지만 이렇다 할 선색을 찾지 못하다가 집을 바꾸게 되여 낡은 침대를 마스면서 비자를 받지 못한 한국려권과 웬 려행지도책이 나졌다. 지도에는 광동까지 색필로 붉은선이 그어져 있었고 한귀퉁이에 (불산) 두글자가 적혀있었다
   나는 어떤 직감의 충동하에 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무작정 광동으로 떠났다. 그러나 감자밭에서 바늘찾는격으로 반년남아 고생만 죽게하고 안해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다. 려비도 다떨어져 날품을 팔며 근근득실하다가 우연히 만난 고향친구를 따라 청도에 와서 한국기업의 잡역으로 취직하였다. 차차 나의 내속을 알자 사장이 정식직원으로 써주었고 몇년후 시장개척부경리로 발탁시켜주었다.  
   무정세월은 모든것을 망각의 푸른 이끼속에 지워버린다지만 나는 내내 경이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조화많은 내운명속에 두번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한 녀자가 불쑥 뛰여들었다. 명문대학을 졸업한 리미라는 청순하게 생긴 처녀가 비서로 들어왔던것이다. 매일같이 상종하면서 서로에게 어떤 자기감응이 있었던지 우리는 얼마후 친해졌다. 하지만 애숭이 젊은이들처럼 그렇게 서뿔리 염정에 빠져들어 죽자살자 할 그런 심리여유는 없었다.
    나이도 들고 아이도 커가는지라 나는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내내 분촌있게 대하면서 사업적인 일이 아니고는 그 이상으로 가까이하지 않기로 작심했던것이다. 그런데도 리미가 집요하게 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나로 말하면 호박이 절로 넝쿨채 떨어진격이였지만 그냥 경이의 그림자를 느끼다보니 덥석 받아안을수 없었다.
   어느 비오는 날 저녁, 그가 나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내가 말없이 우산을 받아 들고 사무실문을 나설 때 리미도 따라나섰다. 숙소까지 묻어설 잡도리같았다. 나는 아무래도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쏘파에 걸터앉았다. 역시 그녀가 비슷한 대화의 계주봉을 먼저 내밀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걸어가려 하지요?》
《리미, 난 너보다 열살이나 년상이고 아이두 있는 나그네야, 넌  아직 너무 젊고 예쁜데 너로서의 행복이 따로 있을거 아니야, 나를 자꾸 딱하게 굴지말아주렴, 그러지 않아도 죽을것만같은데…》
《지나간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건 사내답지 않아요. 자기 심장을 속이지도 말고 거짓말도 하지 말아요. 더구나 군자연하는 자세로 나를 거절하지도 말구요. 난 경요소설에 홀린 그런 애숭이소녀가 아니라요. 그리구 감각에 떠밀려 갈팡질팡하는 정이 헤픈 모던껄도 아니구요. 난 진우씨의 인생그라프와 마음의 골짜기를 다 훓고있고 나의 선택에도 절대적으로 자신이 있어요. 나 진우씨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거야요.》
《어쭈, 이 엉뚱한 아가씨야, 한국물이 잘들었네. 내가 무슨 네가 가지고 싶으면 가지는 물건이라구 포기고 아니고야, 나 참, 한국 련속극들에서 그런말 들을때면 정말 우습더라.》
   말은 가볍게 받아챙겼지만 속으로 웬간히 당황했다. 지금 계집애들의 감각지상주의를 조금 경험해보기도했지만 이런 막밀어부치기에는 왼고개가 탈리지 않을수 없었다.
《우스워도 이 리미아가씨는 절대 포기안해!이렇게 꽉 잡아둘거야, 알아서 하라요.》
    리미는 기관총쏘듯 단숨에 말을 내뱉고는 어느새 나의 가슴에 포탄처럼 날아들었다. 나도 본능적으로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작은 입에서 굵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마 내가 어망결에 숨이 막히도록 그러안았던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절레 절레 흔들며 그녀를 밀어내며 길이 탄식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그러는 그녀가 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때아니게 일찍 시들어버린 사나이가슴에 청춘의 불길을 지펴주는듯 싶어지면서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던 극적장면이였다. 리미는 얼굴이 아주 잘생긴것처럼 속창도 알짜배기였다.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도 투철하게 보아냈고 무엇하나 빗보지 않았다. 세워놓고 눈빼먹을 장사판에서 판단도 빨라서 경험을 쌓았다는 나로서도 혀를 내두를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비서로는 대낮에 등불을 켜고 찾아도 못찾을 당찬 처녀였고 유능한 사업형이 면서도 현숙하고 다정다감한 녀자였다.
   녀자들이란 천성적으로 뛰여난 관찰력이 있는걸가, 그리고 본능적으로 부드러운 심정을 갖추고 있는걸가? 하는 생각을 리미에게서 계발받았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였다. 그녀가 일상적인 말을 할 때에도 그렇게 하는것이였다. 사실 나는 녀자들이 부드러우면서도 심오한 말을 얼마나 잘 하는가에 대해서는 경험결핍자였다.
    리미에게 매료되면서도 나는 처음엔 제딴에 아주 순결한 인간애에 만족할뿐이라고 자긍하고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리쳐버릴수 없는 남자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발견하고 펄쩍 놀래군하였다. 세상에서 기침과 가난과 사랑 세가지를 숨길수 없다더니 사랑이야말로 첫째로 숨길수 없는것이였다. 리성은 단속의 채찍질을 하자만 남자의 야성적인 본능은 야릇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내육신을 뜨겁게 달구고있었다.  
   제아무리 결백한 넋이라도 아릿다운 이성과의 오랜 교제에서 언젠가는 련인만이 갖게되는 신비스럽고 격렬한 감정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가뭄이 든 밭에는 작달비가 제격이듯이 멍이든 마음에 수요되는 녀성의 사랑과 애무는 아무도 말릴수 없는 욕구인것이다. 리미가 늘 내곁에 있으므로해서 어둡고 황페하던 나의 정신가원에 꽃피고 산새우짖는 두번째 봄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즈음 제나름의 애정론으로 자신을 변호하고있었다. 나는 사람이 일생동안 오직 한번만 사랑해야만 한다는 신조를 그리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도《사랑합니 다》를 껌처럼 씹는 빙충맞고 야비한 인간도 질색이다. 이른바 사랑의 차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기때문이다. 사랑의 용량은 한사람의 참된 심령의 용량이 아니겠는가?만약 한사람의 마음을 심곡이라 한다면 한차례 사랑은 한 갈래의 강물과 같은것이고 여러차례의 애정은 수많은 파도와 같다. 한사람의 마음이 모래톱과 같다면 한차례 사랑은 다만 한가닥 작은 홈채기만 낼것이요 여러차례 애정은 수많은 물거품에 불과할것이다,
   성패로 전반 인생을 론할수 없듯이 성패로 사랑을 론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기실 잊지 못하는 사랑이란 바로 실패한 사랑으로서 한생을 두고 미련이라는 무거운 보따 리를 지고다닐것이고 만약 자기가 싫증난것이라면 곧 잊고 새로운 추구를 할것이다. 사랑은 한사람의 인생마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이 된다. 그러나 아무도 성공한 꿈만 꾸었다고 장담할수 없다.
   사랑이냐 아니냐에 금을 긋게된다면 좀 너그러워서 안될것 없다. 그러면서도 인생길에 있을수 있는 종종의 아름다운 조우를 보류할 권리가 있는것이다. 항구의 풋사랑같은 잠간의 해후이든 백년을 기약한 장구한 얽힘이든, 그리고 늦게 만난것을 한탄할 행운스러운 인연이든 잃어버린 녀자에 대한 끈끈한 정이든, 서로 용서못하는 오해이든 사소한 분규이든 사랑에서 출발한것이라면 모두 관용의 대문안에 일이다.
   살아서 펄펄 뛰는 사람에게는 애정생활이란 불멸의 기념비가 아니라 흐르는 물결과 같은것이다. 그러기 우리들은 서로 지난날의 한단락의 애정생활에 숨겨진 아픈 사연을 자백하고 철저히 망각하도록 대방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이런 생각은 리미가 나에게 계발해준것이기도 하다.
  사랑에 정의를 내린다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쨌거나 한사람을 사랑한다는것은 곧 마음이 아파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깊고 진정일수록 거의 부성애나 모성애 비슷한 감정이 끼여든다는것을 지성적인 사람이면 절실히 느겼을것이다. 그저 성적 으로 반했다면 그것은 동물의 발정과 다를배 없으며결코 사랑때문에 마음이 아파하지 않을것이다. 이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여서 격렬한것 같지만 깊이가 없으며 원천이 없는 시내물처럼 미구에 고갈되고말것이다.
   사랑이란 이성세계의 탐험으로서 새록새록의 발견이 가져다주는 희열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수 없다. 바로 그 희열이 이성의 신변에 정착하게 하며 가정에 안녕을 가져다준다. 지금 리미가 그것을 안겨주고있다. 그러나 사랑은 렵기도 아니고 려행도 아니며 더구나 점유로 끝나는 등산과 같이 후회없이 내리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훌륭한 사랑은 서로의 해탈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 사랑의 자유를 람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흔히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떠난다고 말들 하는데 기실 아름 다운 거짓말이다. 그러기에 경이가 나를 사랑하기에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야말로 최고의 진통제라더니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나는 그렇게 이갈리게 밉게만 생각되던 경이가 지금은 마음의 뒤뜨락에 묻혀지고 분하다는 마음도 색바래여서 그저 회색바탕우에 새겨진 그림자를 보는 그런 느낌으로 가끔씩 그녀와 더불어 보내버린 청춘을 회고하게 되였다. 하지만 사랑의 나무는 쉽게 심어지는것도 아니고 간단히 뿌리를 뽑을수도 없다는것을 내가 배우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가버리고 만사가 엉뚱하게 번져진후이다. 사람은 항상 뒤늦게 배우고 경험선생은 언제나 꿩구 어먹은 자리에서 강의해 주는법이던가, 
    경이가 존재하지 않아도 지구는 잘만 돌아간다. 나와 리미사이에서는 화제가 샘물처럼 솟아났고 내삶과 희망이 새로운 빛갈로 물들어갔다. 비록 한사람이 시련의 강을 건너서 늦게 만났지만 우리는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녀가 된셈이다.
어느날, 함께 광주에 갔다가 호텔에 든 밤이였다. 늦도록  이야기하다가 가서 자겠노라고 일어서는 그녀를 뒤에서 와락 그러안았다. 한껏 성숙한 처녀의 젖무덤이 두손에 가득 넘쳐났다…나의 조심스러운 손놀림을 기다릴것 없다는듯 어느새 껍질을 홀랑 벗어버리고 알몸이 된 리미의 옥체가 리성을 송두리째 뺐다. 리미의 아름다운 가슴에 얼굴을 묻은 나는 오로지 성에 허기진 넋뿐이였다. 뜨거운 불덩이가 속깊은 곳을 태우는 작열이 정염의 불길을 지폈는지 리미도 고운신음을 물고 몸부림쳤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였다. 고통과 불행의 페허우에 세워준 사랑 탑에 어찌 감격해 하지 않으랴!사랑!이 얼마나 감미로운것인가, 어쩌면 삶이란 또 수없이 반복되는 성애의 시도가 아니겠는가? 나는 새로운 삶의 내용을 쓰고있다고 생각하며 미친듯 열정을 달구었다. 섹스가 사랑이라는 잠옷을 입고있는 동안은 아름다운 행위로 착각되는 법임에랴! 이제 밝는 날 마주앉으면 서로 머쓱해 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젊은 생명력의 확충을 만끽하며 서로를 즐기는것뿐이였다. 이것이 인간이고 이것이 남녀의 본능이 아니겠는가?
    …꽃도시라더니 그야말로 그윽한 꽃향기가 실린 밤바람이 별빛과 함께 방에 흘러들었다. 그런 향기속에 남녀의 포옹은 사랑이상의 의미를 가지고있다. 봄밤은 깊어가는데 열정은 조을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애무하며 서로의 마음도 보듬어 주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두번다시 얻을수 있은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나는 드디어 리미와 결혼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녀도 나의 불쌍한 아들 진표의 좋은 새어머니로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제 우리가 할일은 더욱 뜨겁게 포옹하고 가슴을 밀착시키며 개간된 처녀지에 행복의 새씨앗을 뿌려가는것이다.
그러나 재미난 곳에 늘 범이 나온다고 내가 망각속에 그 모든 한과 눈물을 겨우 묻어두고 결혼을 준비하는 나날에 난데없는 편지가 날아들었다. 얼핏 보아도 눈에 익은 글발이였다. 환한 대낮이였건만 나는 저승사자의 최후통첩이나 읽는듯 떨리는 손으로 겨우 봉투를 찢었다. 거의 단편소설원고에 해당한 만장지서였다.
   
     ㅡ안녕하세요?저 경이예요. 너무 놀라지 않았는지요?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쓸 자격이 없는 저인줄 알아요. 지난 8년동안 당신이 저를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망령으로 여겨주길 바랐어요. 당신은 두말할것없이 나를 세상에서 더없이 랭혹무정한 몹쓸년이라고 저주했을거예요. 달갑게 받겠어요. 그래요. 제가 한일은 저로서도 량심적으로 용서할수 없는것이예요. 다만 정에 약한 녀자의 첫사랑은 원점으로 돌아간다는것만 알아주세요.
    이제와서 할말이 없지만 생각되는것이 너무 많아요. 어떻게 하든 당신과 내아들에게 입힌 상처와 손실은 미봉할수 없는거예요. 이제 저승에 가서 다시 당신의 곁에 갈수 있다면 저를 하녀로 받아주세요. 진우씨, 난 여러번 당신의 눈빛에서 당신이 저의 과거에 대해 궁금해 한다는걸 직감했어요. 제가 당신곁을 떠나 조용히 말없이 사라져버리기로 마음먹은 리유도 바로 나의 말못할 과거와 태산같은 감정빚 때문이였어요. 이 세상에서 영원히 갚을수 없는 빚이야말로 감정의 빚인가바요……
    유식한 멍청이는 무식한 멍청이보다 더 심한 멍청이라더니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멍청인가 싶다. 나는 편지를 읽다말고 얼이 쑥 빠진 멍청이처럼 경이가 걸어왔을 지나간 시공간속을 환각속에서 방황했다…
 
                                  꽃은 누구를 위해 피였는가,
 
    딸은 제어머니의 운명을 답습하기 일쑤라더니 경이도 뛸데없이 어머니의 인생길을 답습했다. 경이의 어머니는 자기 미모와 다혈질적인 그 기질때문에 처녀때부터 뒤소리를 달고다닌 녀자였다. 그러다가 가다오다 만난 남자와 결혼은 했지만 늘 뜬 구름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경이도 실은 남편의 씨앗이 아니였다. 마침내 그녀는 어린 딸을 남겨두고 영영 떠나가버렸다. 후에야 안일이지만 그때까지 그냥 그리워 하였던 자기의 첫사랑과 만나 함께 도주해버린것이다.
   그들은 수만리나 떨어진 광동 불산속의 절에 가서 이승의 마지막 정을 다 불태우 고 함께 호수에 몸을 던졌다. 그것도 희한하게 두몸이 한데 친친 감긴채 수면에  떠올라 기문을 남겼던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한이 되여 한짓이였는지 그네들 두넋만 알고있을 일이였다. 
    그후 경이의 아버지는 정신타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숨이지는 순간까지도 경이를 자기의 피줄로 알고 매정하고 불충한 안해의 뒤를 쫓아가고말았다. 그런데 피는 못속이는 법이라 할지? 운명이 미리 써놓은 인생극본이라 할지, 경이도 커서 드디어 제어머니의 운명을 답습하게 될줄이야. 경이는 워낙 머리가 남달리 좋아서 공부를 잘했지만 경제난에 시달리는 외할아버지의 고집대로 대학꿈을 포기하고 지구사범 학원에 지망하고말았다. 역시 운명신이 쓴 경이의 인생각본이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었다 경이는 자기를 가르친 문학선생을 사랑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곧 중년이 될 남자였고 꽤 큰 딸도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손꼽는 수재로서 박학다재하였고 한창 풍도가 넘치는 멋진 정열의 시인이기도 했다. 경이는 숙명처럼 자기 선생님의 그 멋과 뜨거운 정열에 매료되였던것이다. 그는 경이만이 아니라 조숙한 녀학생들이 은근히 따르는 우상이였다.
    그렇게 점잖고 우아했던 남자가 본의 아니게 한 소녀의 감정의 건반을 세차게 두드렸고 그로해서 아직 꼭 닫겨있던 그녀의 사랑방을 기둥채 흔들리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미구에 신들린것처럼 소녀가 살며시 열어놓은 사랑방속으로 서서히 끌려들 어가고 말았다. 교정은 에덴동산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기회를 타서든지 만나기마련이다. 그들은 만나면 약속한듯 침묵속에서 몇시간이고 앉아있을수 있었고 경이가 스승으로가 아니라 한 남자로서 여기고 기대여 울때 그는 말없이 받아주었다.
    그도 한창 멋모르고 덤벼치는 녀자애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지만 결코 본분이 무너지는것을 원치않았고 덕성과 명예가 부서지는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량심과 책임감으로부터 가정을 버릴수 없다는것은 무엇보다 명백했다. 그러나 경이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현대파소녀들의 그런 무서운 정애로 끈덕지게도 추구했다.
   사랑에 갓 눈이 뜬 처녀애들의 직감은 무서우리만치 예리하고 관찰도 세심하다. 경이가 바로 그런 직감과 사랑의 눈으로 시간마다 교묘하게 선생님을 훔쳐보면서 많고 많은것을 읽었고 또 자기가 읽은 그 내용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듯 유능하고 경험많은 박사처럼 강의에 막힘없이 침착하고 당당하게 자가의 해박한 지식을 펼쳐 보이는 자신감속에서 얼핏얼핏 드러나는 고달픔의 정체는 무엇일가?열림과 닫힘의 기묘한 부조화와 열정과 허무가 교차하는 미묘한 표정은 어째서 나올가? 물론 경이 혼자만이 느끼는 리성과 정감의 뉴앙스였다. 
    경이자신은 자기 사랑의 감정이 그동안 받은 그 고마운 물심량면의 관심과 배려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고 고집했지만 백설 (그 선생의 필명이 백설이였다)은 어쨌든 사전에 꾸민 불명예스러운 감정교역과 같이 황당하다면서 내켜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는 철저한 도덕가였고 엄연한 스승이였다. 그럴수록 심혼을 달군것은 녀자애였다. 그녀는 스스로도 놀랄만큼 엉뚱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 세상에는 열려진 녀성의 신비의 문앞에서 무릎꿇지 않을 군자란 없다고 믿는 그녀 자신의 말대로 한다면 류행 소녀애들의 유치한 불장난이 아니라 운명을 내건 비상한 그런 사랑이였던것이다.
 
                     답이 나오지 않는 사랑계산식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하던 은밀한 정을 용케도 감춰온 긴5년이 지나가고 마침내 그녀는 학교문을 나서게 되였다. 이젠 가슴을 조이면서 선생님의 사무실에 새여들 필요도 없었다. 사제간에 지켜야 할 법규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무서워할 일도 없고 낡은 인습이 내리는 불륜이라는 평판도 두려울것 없었다.
    숨기고 감추고 쌓이고 포개졌던 정한이 드디어 화산처럼 폭발해 세인을 깜짝 놀래워도 좋았다. 그저 사랑하는 남자와 녀자가 남았을뿐이다. 나차이가 현격하면 어떠랴. 지금 세상에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해 사는 애젊은 녀자가 어디 한둘인가?다른 녀자애들은 돈잎에 순정을 말아먹기가 일쑤이지만 경이ㅡ자기만은 순수한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는터이다.
    그렇게 정열에 넘친 멋진 남자, 감정은 늙을줄 모르며 사랑은 퇴직을 모른다고 말하던 남자가 아닌가, 또 사실 선생님은 나이 보다 너무 젊어보이고 어느모로 보나 쨍그랑 소리가 나는 분이다. 불가사의한 일이란 없이 막되는대로 번져가는 이 시대 에 단 직업도덕감에 얽매여 자기를 찾지 못하고있는 불쌍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경이는 그래서 더구나 숭배로부터 샘솟은 자기 사랑이라고 설교하고있었다. 
   경이는 고향에 가지않고 선생님의 숨결이 흐르는 K시에 영원히 남아있으려고 마음먹었다. 돈 만원쯤 어느 교장의 옆채기에 찔러주면 이 도시의 어느 교단에 오를수 있었지만 그렇게 구지레하게 놀고싶지 않았다. 일단 담임을 맡아 일이년쯤 약삭 빠르게 돌면 만원 하나 쏙 빠져나온다는 선배들의 말에 귀가 솔깃하기도했지만 혈혈 단신이나 다름없는 그가 어디서 목돈을 마련하랴,
    사랑하는 자기 님은 고향에 돌아가서 수속을 제대로 밟고 훌륭한 인민교원이 되라고 강요하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교직도 사기밥통인데 어느놈의 배를 채우라고 아까운 돈을 망탕 밀어넣는단말인가, 그렇게 옥생각을 먹고 결단을 내린 경이였다. 이리저리 떠돌다가 어느 광고회사에 취직하였다. 급한 돈부터 좀 벌어놓고 백설씨가 기어이 교원이 되여야 한다면 아까운대로 돈을 먹일 타산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자기 사랑책의 첫페지에《즐거워라!》를 썼지만 부록에《괴로워라!》를 써야 한다는것을 안것은 졸업하고난 뒤였다. 그저 졸업하면 만사대길인줄 알았던 그녀는 괘씸한 선생님이 자기를 그냥 울릴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야 말로 자기에게 애인이 생겼다고 느낄때 참인생이 시작되였다고 기뻐했으나 뒤미처 고뇌의 수렁에 빠지게 된것이다. 잘 만나주지 않는 선생님에게 많은 편지를 썼다. 비록 회답이 올가말가했지만 경이로서는 그 이상으로 사랑을 할수가 없었다. 이젠 모교에 들어설멋도 없고 더구나 선생님의 사무실에 살짝 새여들어갈 리유도 없었다. 전화도 감히 걸지 못하고 그저 편지지만 죽어났다. 그러나 선생님은 무엇이 바쁜지 회답도 잘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누구나 다 시인이 되고 사랑의 편지는 곧 결말이 없는 서정시가 되는법이라던가, 경이는 이밤도 자취방에서 숨벅찬 편지를 썼다. 번마다 새로 시작하는것이 아니라 그냥 이어서 쓰는 편지였다. 그녀는 그렇게 이어가는 대화가 좋았다. 그래서 안녕히도 절대 쓰지 않는다.
    …돌아서서 가없는 하늘과 넓은 대지사이에 조그마한 점으로 서있는 외롭고 무력한 저를 느낄때마다 전 먼저 선생님을 생각해요. 오색령롱한 희망과 꿈과 발발하는 야망이 저멀리 아득한 지평선으로 흘러가버릴가 두려워요. 이러는 제가 싫어요. 내 작은 가슴엔 하소연과 탄식만 남았어요. 선생님 말처럼 이 모든것이 시작만 있다가 훌쩍 깨져버리는 허황한 꿈이란 말인가요?한순간의 신기루란 말인가요?
    선생님은 이 시대엔 오직 계산된 감정이 있을뿐이지 사랑의 기적은 없는법이라고 했지요?아니예요. 나. 이 경이가 사랑의 기적을 쌓아서 온세상에 자랑할거예요!선생님을 만나기전까지는 저의 인생마당은 웃음꽃도 없고 기쁨의 잔물결도 없는 황량한 사막이였고 동토대였으니까요. 선생님이 바로 행운스럽게도 만난 나의 유일한  오아시스예요. 감로수가 흐르고 행복의 숲이 무성하는 오아시스이예요.
    너무 방종하다고 핀잔해도 두렵지 않아요. 저는 선생님에게서 한녀자애가 응당 차지해야할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선생님은 스승으로가 아니라 한남자의 신분으로 말없이 가르쳐주었지요. 물론 선생님의 잘못은 조금도 없어요.
    아무튼 우리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기전까지는 저는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자신을 맡겨볼가, 고요한 작은 저수지처럼 소리죽여가며 한생을 살아볼가, 하고 생각하였어요. 그러나 선생님을 알고부터는 잃어버렸던 내인생에 대한 신념과 랑만을 되 찾았어요. 그보다 더 소중한것은 남자의 진실한 이미지를 알았고 그것이 발산하는 거대한 추진력을 가슴으로 느낀것이예요.
    저의 인생항로에는 선생님을 사랑하는 이외에는 딴길이 없고 내사랑의 동산밖에는 엉겅퀴만 무성하다는걸 예감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랑의 늪에 뛰여들어 나에게만 속하는 대안에로 노저어가기로 목숨을 내걸었어요. 사랑은 애꾸눈, 미움은 장님이라지만 이 경이는 장님이 되고 바보가 되여도 좋아요. 선생님이 곧 제 인생항로의 등대예요. 사랑의 심연에 빠진 저에게는 해도 달도 보이지 않고 오직 한껏 좁아진 선생님과 나만의 공간이 있을뿐, 이미 맨발이 되여진 마당에 물을 두려워할가요?
    저를 어린애로만 보지 말아요. 처음엔 자신도 기약없이 불쑥 뛰여든 사랑에 불안하고 당황했어요. 아지랑이같은 꿈과 동경속에 (꿈과 동경은 그렇게도 비실체 적이여서 흔히 물거품이 되기가 십상이라고) 귀에 못박히도록 말씀했지만 어쩔수 없었어요. 선생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소원이 마술사의 손에서 굴러다니는 불덩이처럼 내작은 가슴에서 나날이 커가고있는것을 말려낼수 없었어요.
    사랑은 생명의 성스러운 첫연소가 아닐가요? 처녀애들이 사랑에 깊이 빠지면 으례히 겪게되는 애틋한 번민, 때도없이 솟구치는 눈물, 쓰거운 단맛, 아름다운 괴로움과 슬픔이 내작은 가슴을 꽉 채워서 선생님을 마주하면 그냥 그렇게 울고싶었던거예요. 고독하고 외로운 소녀가 흔히 뜨거운 사랑독에 잘 빠진다더니 아마 저를 두고 한 말같아요. 사람이 그리워 울면서 자란 나, 그저 속절없는 정많고 눈물이 많고 가진것이란 선생님에 대한 숭배와 애모뿐이였던 풋병아리같던 소녀, 그게 저였지요, 지금은 아네요. 선생님의 이 경이는 인차 멋진 숙녀로 탈바꿈할테니 지켜보세요.
    인젠 알았죠?그런데 여보세요!(이렇게 불러보는 제 얼굴이 얼마나 빨갛게 달아 오르고있을가를 좀 상상해 보세요.) 아, 하지만 지금껏 그렇게 혼신을 다바쳐 노를 저어왔건만 대안은 보이지 않아요?왜 뽀얀 안개만 감돌뿐 빛이라곤 한가닥도 없나요?내 마음의 등불은 언제 밝혀지나요?
    나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날마다 눈물로 하소하고있어요. 선생님은 이슬머금은 한송이 순정의 꽃이 불쌍하지도 않아요?이러다가 자칫 스러져버릴 내희망의 꽃을 살뜰하게 일구어줄 마음이 정녕 없나요?사랑해주세요.《경이야!》하고 불러보세요. 그러면 제가슴에서 터져나오는《자기야ㅡ》하는 절규가 메아리쳐갈거예요. 저는 때때로 선생님에게서 제가 그렇게 목마르게 동경하던 부성애같은 감정도 느끼며 혼자 감동에 울기도했어요. 얼마나 비장하고 어마어마한 사랑인가요? 이런 사랑은 나, 경이만이 할수 있는거애요.
     이제 우리 손잡고 사랑속에서 꽃피는 인생의 봄을 즐기고 우리 둘이 가꾼 사랑의 열매가 주렁질 인생의 가을을 흔상할 때 나 경이는 너무 행복해서 기절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인생의 막바지에 오를 때 제가 당신을 부축하면서 걸어간다면 우리는 헛되이 사랑하지 않았다고 웃어도 보고 울어도 보겠지요. 이것이 저의 숙명적인 인생그라프라고 생각해요. 아니라고 하지 말아요, 이 경이가 왈칵 울어버릴테니까. 녀자의 눈물은 말없는 웅변이라는걸 잘 아실 당신이 아닌가요?            
    …경이가 이렇게 결말없는 편지를 수없이 날려보내도 선생님은 말이 없었다. 그래도 락심할줄 모르는 경이는 그냥 편지를 이어간다.
     ㅡ너무도 하늘이 맑아었요. 너무도 하늘이 맑아서 슬퍼졌던가봐요. 눈물이 나온걸 보면, 눈물을 흘리고나니까 제마음도 하늘처럼 맑아진것같아요. 이제부터 맑은 하늘을 볼때마다 맑은 하늘이야말로 선생님이 맑게 웃으면서 힘내라고 보낸 선물처럼 생각할래요. 그런데 또 갑자기 맑던 하늘이 시꺼멓게 흐려지면서 비가 쏟아지네요. 선생님 창가에 흐르는 비물이 다 흘리지 못한 저의 눈물이라고 여겨주세요. 부디 매정하게 닦아버리지 말구요.
    …홀로 세방에 앉아있으면 너무너무 외롭고 슬퍼요. 이런 밤이면 하늘에는 별하나 유별나게 밝게 속삭여요. 저 별이 선생님이 아니고 누구겠어요?별을 바라보노라면 안개속같은 혼미함이, 꽃밭같기도 한 현란함이, 별같기도 한 찬란함이, 파도 같은 격렬함이 선생님 숨결과 뒤섞여 휘감기며 소용돌이치고있어요.
    소녀같은 감상이라고 웃지말아요. 나는 대낮에도 선생님의 꿈을 꾸고있어요. 선생님이란 존재때문에 아침은 항상 보라빛으로 밝았고 낮은 장미빛으로 물들었고 밤은 달과 별무리로 장식되여있어요. 내운명이 구멍이 숭숭한 우산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기워주는 손이 되여 주셔야 해요? 아니면 나 못살테니까요.
   언제면 만나주실지 알수 없지만 세월의 흐름에 서로를 떠내보내지 말자요, 시간속에 허물어질 저의 사랑탑이 아니니깐요. 터무니없는 고집이라고 하지 마시고 서로 생각하는 기쁨으로 새날을 기약하자요. 선생님생각에 너무 힘겨울 때 지꿎은 그 생각을 잠시나마 떨쳐버리려고 눈을 꼭 감아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잠을 청하기도 무서운 일이예요. 꿈속에서 그냥 울다가 님이 탁 밀쳐버리면 울면서 깨여나고 깨여나서는 그냥 울어야 하기때문이예요.
   그러나 랭장고문을 쾅 닫으며 먹어서는 안돼! 하고 으름장을 놓을 때 그게 무얼가?금하는 음식일수록 구미가 더 당기듯이 잊어버리려고 애쓸수록 놓치기 싫은 마음, 추억의 불씨로 솟구쳐 정감의 사르개를 활활 태운다구요.
   ㅡ선생님의 뜨거운 숨결이 방불히 들려옵니다. 저의 가슴속에 선생님께서 살아계시여 숨소리는 그냥 울리고있습니다. 저는 학교때 방학이 제일 두려웠어요. 긴긴 방학간에 선생님이 나모르게 어데론가 훌쩍 사라져버릴가봐서요. 력서장을  뜯으면서 난 어쩔줄 몰랐어요. 지금 가까이 살면서도 볼수 없으니 더 보구싶어요…울고싶어요.  
   그렇듯 황홀한 사랑에 혼신을 맡기고 있음에도 저의 마음속에 이름할수 없는 애수가 차분히 깃들어 눈물이 샘처럼 솟는것을 선생님은 해석할수 있나요?더없이 숭고한 사랑의 표식이 때에 따라서 억누를수 없는 애틋한 슬픔이 되는때가 있다는 것은 녀자애들만의 수수께끼이지요. 언젠가 선생님이 이 신비한 수수께끼를 풀어주기를 기다릴테예요…
    …어느새 또 귀뚜라미 구슬프게 울어싸는 서러운 가을이 왔군요. 선생님, 정다웁던 시내물속에도 가을의 찬기운이 흐르네요.  불러봐도 울어봐도 대답이 없는 나의 무정한 선생님! 졸업하고 선생님곁을 떠나 두번째로 맞는 이 가을은 그리움때문에 참을수가 없어요. 단풍은 불타다못해 저렇게 검누렇게 보기싫어져가고…
    불치의 사랑병도 세월속에서는 숙어든다고 하지만 내사랑은 영생의 상록수래요. 밤마다 이맘때면 우썩 키돋움하는 내그리움의 꽃나무를 뿌리채뽑아 체념의 칼로 오리오리 찢어서 한숨으로 삶고 짓이겨서 이렇게 엷은 종이장마다에 바르노라면 밤하늘에 오락가락하는 저 구름처럼 내 속절없는 편지들도 흘러가버리고 영영 소식이 없을가봐 가슴이 미여져요.
    베여버리면 더구나 무성하게 자라서 온몸을 짓눌러 숨도 못쉬겠기에 이렇게 편지에 덜어내야 하고 그 덜어낸 사연들은 미처 보내지 못하고 서랍속에서 박정한 주인에게 침묵의 항의를 하고있지요. 림대옥이 울기위해 가보옥의 신변에 왔다면 저는 운명적으로 선생님 한분만을 사랑을 위해 이 세상에 온것이 아닐가요? 선생님에게는 저의 사랑이 인생의 삽화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인생의 전부이며 삶 그 자체예요. 믿어달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믿으니까요.
   ㅡ선생님, 저 하늘에서 깜박이던 별하나가 영문없이 사라져버리고나면 제마음이 평온할가요?내사랑이 끝끝내 용납되지 못한채 묵묵히 고통을 짓씹어야 함을 처음부터 알기에 여태 제나름의 소망을 안고 이 슬픈 계절도 용케 넘겨왔겠지요.
   선생님, 지금 나는 그런 황이든 슬픔과 속절없는 미련때문에 내마음 그대로가 참사랑이였음을 믿으면서도 더는 지탱하기 어려워졌어요. 정말 사랑의 극치가 체념이 되는거나 아닌지, 혜지로 빛나는 선생님의 눈에 넘치던 미소도 이제 겨울이 오면 가을을 잊고 봄이 오면 또 겨울을 잊듯이 그렇게 조금씩 잊을수만 있다면 이제라도 먼곳으로 훨훨 날아갈거예요.
    이럴때면 선생님이 우스꽝스레 곡을 붙이며 느러지게 읋던 “청산별곡”이 생각 나고 그것을 내좋도록 “사랑별곡”으로 고쳐읊어요. 열번, 스므번…
        살어리 살어리랏다. / 사랑애 살어리랏다./그림움이랑 눈물이랑 먹고 / 사랑에 살어리랏다. /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내님이여. // 울지마, 울지마 비둘기야 /
        마당앞에 구구구하는 비둘기여./ 너처럼 시름많은 나는 /자나깨나 우니노라. /야속해 야속해 야속한 님 어서오세요 얄라 // 이렇게 저렇게 하여 / 낮은 어정쩡 보냈지만 / 편지도 전화도 없는 / 밤에는 또 어찌하리까 / 누구를 맞히려던 살인가 / 쥬피터의 살은 아니네 / 맞지도 맞히지도 못하고 / 혼자서 우니노라.
   이렇게 나혼자 외우는 사랑시는 끝나는듯 그냥 이어지고 그리움은 갈수록 가슴에 씨앗처럼 알알이 차네요. 만약 저 하늘에서 희미한 별찌 하나 떨어지면 (믜리도 괴리도 없을)테지요.
   …언젠가 사랑은 영원히 미완성인것을 사람들이 완성으로 만들려한다고 하셨지요. 유한한것을 무한으로 만들려는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라고, 그러나 저의 사랑은 저의 생명의 불꽃이 꺼져버리는 순간까지 타고야 말거예요. 목숨을 건 사랑은 청춘의 정열과 신념의 기름을 한방울도 남김없이 불사른 뒤에야 꺼지는법. 이것이 사랑의 운명이라고 하겠지요. 인간의 본능이라 하겠지요?
    그런데 왜서 자신의 모든것을 기꺼이 내바치려 하는데도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혼자 속썩야 하나요?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때문에 죽을수도 없는 어려운 인생의 짐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저는 돈이 흩날리고 순정이 팔려가는 어지러운 이 시대의 풍조에 둥둥 떠가는 그런 허랑한 녀자애가 아니예요.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저는 선생님이라는 한 인간을 진정 사랑하기에 지칠줄은 모르고 살아요. 진실한 령혼과 령혼, 뜨거운 가슴과 가슴의 운명적인 만남이 허무하게 무너진다는것은 죽기보다 더 슬픈 일이 아닐가요?
     그러나 언제면 나 할말이 궁해져 사랑시도 시들어질가요? 아니예요. 충정은 시작만 있고 끝은 없을거야요. 내것인줄만 알고 사랑하는 그날까지 들숨과 날숨이 있는한 정다운 당신의 이름을 부를거야요. 언젠가 혹시 누구에겐가 시집을 가야한다 면 정없이 돌아서는 박정한 당신을 더는 잡아둘수 없음을 확인하며 나는 울어야겠지요. 그리고 주어진 내운명만큼 만족해야 하겠죠. 할말은 다한듯싶건만 쓸모없는 편지나마 자꾸 써내려가야하는 저 너무 가슴아파요. 한사람 사랑하는 일 너무나 신이 날텐데 왜 이렇게 힘이 드나요?오가는 세월에 생각은 많이 달라지고 불붙던 정애도 사그라지면 눈물이 핑 돌아 추억에 매달리겠지요?
    아, 내 심장이 다 빠져나간 그때에 허전해진 마음을 누가 달래줄수 있을가요? 당신이 곁에 없는 길따라 슬픈 내인생길에 나혼자 그림자만 밟으며 걸어가야겠지요? 길잃은 유령처럼 정처없이 ……
 
                                 사랑은 2×2 5인가?
 
    백설씨는 경이의 편지들을 매번 감동없이는 읽을수가 없었다. 그저 련정의 편지가 아나라 자기로서도 그렇게 진지하게 쓸수 없는 한편 또 한편의 서정수필이여서만이 아니였다. 푸르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것은 일종 행복의 노을빛이 아닐수 없었다.
    기실 회답을 하지 않았을뿐이지 백설씨도 경이를 잊고있는것은 아니였다. 처음 경이에게서 색다른 기미를 감촉했을 때 그저 생활에서 소설을 읽게 되였다며 웃어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였다. 련정이란 한 처녀애의 몸에 기묘하고도 명백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것을 처음 발견하고 놀랐다. 그저 앳된 풋병아리로만 보아 오는새에 마치 꽃이 하루아침새에 활짝 피듯이 훌쩍 커버린것이다. 온몸에 둥그스레 살이 오르면서 갓왔을때의 모나던 부분들이 부드러워져갔고 녀성미에 자신만만함이 은근히 내비치고있었다.
    어쩌면 자기 생활에 전설같이 뛰여든 이 불나비소녀는 자기를  골려주려고 이 세상에 태여난것인가? 골샌님의 가슴속 골방에 속절없이 쌓아둔 량심과 도덕을 송두리채 빼앗아갈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참으로 의상하게 변해가고있음을 자각할 때 체념을 웨쳐댔지만 자기를 이겨낼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애와 함께 있으면 오가는 말이 없어도 주위의 생물은 더 말할것 없고 죽은 사물도 생기가 살아났다. 창가로 내다보이는 낮다란 서쪽산등성이까지도 룡처럼 꿈틀대는 것같은 환각을 주었고 사무상우에 올려놓은 그애의 하얀손도 보잘것없는 책상도 조화로운 배경으로 되여주는것 같았다.
    사무실의 지저분한 분위기도 경이가 뿜어내는 신비한 힘때문에 향기로 가득차 버린다. 그애의 얘기를 듣는것은 일종의 생명감과 정감의 향수였다. 경이에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무형의 장치가 있어 그 장치를 풀어놓으면 무심히 내뱉는 평범한 말도 일종의 환희를 느끼게 하니말이다. 그애가 소리없이 울때는 더구나 어쩔줄 모르고 그저 자기 가슴에 기대는대로 가만히 지켜볼수 있을뿐이였다. 흔히 녀자의 한방울의 눈물이 남자의 깊은 동정을 살수있다더니 경이의 눈물은 방울방울이 그대로 눈의 웅변이였고 말없는 명령이였으며 그대로 련민이였고 동정심을 초월시키는 신비였다.
    그러나 그는 애써 자기를 다잡아야 했다. 그럴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메마르기 시작한 자기 마음의 보리밭에 모닥불을 질러놓고 언젠가는 포르르 날아가버리고말 한마리 파랑새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수 있는가?진실이 침묵하고 돈이 란무하는 세월에 세대차이를 무시하고 년장자에게 달라붙는 녀자애들이 그래 돈냄새에 취해서 하는 선택이 아니던가? 정애도 돈으로 빚는 세월이 아니던가? 
   돈도 없고 지위도 없는 일개 서생에게 녀자애가 련정을 가진다면 그게 무엇인가?결과는 후회로 얼룩진 쓰디쓴 악과일뿐이 아니겠는가?그게 아니라면 정말 사랑의 기적이라도 생기는걸가?알수 없었다. 알려고도 생각하지 말아야 했디. 언젠가 동년의 꿈을 다시 찾고싶다며 응석부리는 경이의 고집에 못이겨 스키장으로 갔었다. 호되게 추운 일요일이였다. 그는 경이가 뺨을 에이는듯한 눈보라쯤은 아랑곳없이 눈동자가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며 이글거리고 있는것을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인채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눈발속으로 시선은 엉켰고 어쩌다 호젓한 곳에서 시름놓고 바라보고 싶었다는 표시를 서로 말없는 미소속에 확인했다. 경이가 그의 가슴에 차분히 기대여 정차게 올려다보았다.
   《사랑해요, 선생님!》
  《얘, 그런 말은 그렇게 가볍게 내뱉는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애매하게 했지만 눈에서 불꽃이 튀였다. 경이의 눈에서도 광채가 이는것을 그는 확인했다. 녀자애의 입김은 천도복숭아의 새콤한 향기같이 유별나게 싱그러웠고 그 향기는 그를 후끈 달게했다. 그는 폭발할것같은 정열을 리성의 마지막 방선으로 자제하며 심장에 압축된 호흡을 조금씩 쏟아냈다. 그러자 경이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막으며 말하는 인형처럼 쏙닥거렸다.
  《불씨를 당기면 저는 재가 되여버릴거예요. 전 자신이 류별나게 뜨거운 체질을 가진 녀자라는것을 잘 알고있거든요. 그 후과를 지금의 선생님은 감당해낼수 없을거얘요. 안그래요?나의 훌륭하신 서ㅡ언생님!》
    그 순간 그는 스스로 얼굴이 확 달아오를는감을 느꼈다. 심장속에서 끄르륵 소리가 나는것같았다. 정녕 피가 쫄아붙는 소리였을가?그는 경이를 말없이 굽어보았고 경이는 아직 삭이지 못한 열기가 그의 눈동자속에 흔들거리는것을 보자 금방 하늘에 날아올라 울어대는 종달새처럼 까르르ㅡ하고 웃으며 새매처럼 그의 팔에서 빠져나가 눈발위를 달려갔다.《날 붙잡아요ㅡ》생긴 그대로 청춘의 폭발력이였다. 그는 달리는 녀자애의 뒤모습을 얼없이 바라보았다. 북국의 설원에서 붉은 여우에게 홀린듯한 짜릿한 전률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하얀 은세계속에 멀리 사라져가는 이 유별난 처녀애의 웃음저편에서 자기를 기다리는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것같았다.
   그해 겨울방학은 경이에게서 아무소식도 없었다. 옳았다. 오는가 하면 어느새 훌쩍 사라져버리고 이제 다시 안오나 싶을 때 나타나서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듯 시치미를 뚝 뗀다. 가는새없이 가버린 청춘이 아쉬워 주눅이 들어있는 남자의 가슴에 무지개를 띄울듯말듯 하다가 씻은듯 소식을 끊었던 아지랑이같은 소녀…한 순간의 회오리였으려니 생각하고 겨우 잊을만하니 개학에 홀연 다시 나타났고 그렇게 티없이 밝게 웃어주었다.
  《안녕하세요?제가 오지말았으면 했죠?》
   …참된 사랑은 거의 사색을 대신한다. 사랑은 그밖의 모든것을 불사르는 세찬 불길이다. 정열에다 론리를 요구하는것은 범에게 날고기를 먹지 말라는것과 같은것이다. 천체력학에 완전한 기하학적 형태가 없듯이 인간의 정욕에도 절대적인 론리적판단이 있을수 없다. 지금은 다 제잘난 멋에 사는 시대이다. 모든것이 멋대로이고 무질서가 질서가 되고 부도덕이 도덕화되는 때에 사랑이 2×2=5가 되지 못한다는 법이 없지 않은가?
    그는 불현듯 다 퇴근하고 혼자남아서 무엇인가 끄적이고있는 사무실로 처음 찾아왔던 소심스러운 처녀애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 그는 그저 놀랐을뿐이였다. (먼지바람 사나운 이 세상에 어쩌면 저렇듯 청초한 아름다움이 존재할수 있단말인가?) 순간순간 마주치는 소녀의 눈빛은 전혀 때묻지 않은 수정 그자체였다.
    아직 보슴털도 채가시지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보드랍고 우아한 관능미를 구비한 애련한 얼굴은 비너스니 선녀니 요정이니 하는 잡스러운 말로는 그 표현이 절대 충분하지 않는 그런 미모였다. 몸매는 아직 야위였으나 한마디로 금방 물속에서 나온 인어를 방불케했다. 소녀는 분명 어리였지만 지금껏 그가 보아왔던 귀염성있는 녀자애들과는 완연히 다른 타잎의 미소녀였다.
   《선생님,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방해되지 않나요?》
    열여덟 햇병아리의 입에서 나오는 인사치례도 제격이였다. 말끄러미 건너다보는 시선은 아편꽃처럼 애련하기만한것이 아니라 어떤 신비의 그것이였다…소녀는 정색해서 응시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열정이 서린 시선이 자기 마음의 진실을 나에게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다……
  ㅡ경이는 처녀애들이 다 그러하듯 강추위에 앵두볼이 되여가지고 그냥 깔깔거리며 눈속에서 딩굴어댔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백설씨는 완전히 시적경지에 빠져들며 아무 구속도없는 대자연속에서의 그들 둘만의 만남을 련상하였다. 진달래꽃 붉은 불길이 대지의 묵은 가슴을 불태우는 봄날, 어느 산등성이 꽃떨기속에서 산들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나비처럼 팔랑이는 경이의 뒤모습이며 뒤를 돌아보며 쌩긋 웃는 맑진 그 미소는 순결무후한 순정의 표시일것이다.
    자기의 두눈처럼 그윽해진 가을하늘을 머리에 떠이고 불타는 단풍을 바라볼때 사색하는 그 모습은 성숙에로 치닫는 조약일수도 있고 그리고 오늘처럼 눈보라치는 어느 겨울 밤거리에서 갑자기 가볍게 손저으며《선생님, 잘있어요, 나는 가요.》할 때 그것은 이미 돌이킬수 없는 인생의 패필(败笔)일것이다…하지만 그는 도덕과 인격을 버리고 황당한 추리로써 자기의 불가사의한 사랑에 연막을 치기시작했다. 그후부터 기회를 만들어가면서 사랑의 기적을 야금야금 쌓아갔다. 정다운 눈길로 남이 알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사소한 일로 녀자애를 울리고 오해도 하고 얼굴도 붉히며 탄식하기도 하였고 의미심장한 침묵도 지키였다.
    그러면서 경이의 응석을 받아주었다. 일단 녀자를 진짜 좋아하게 되면 녀자의 아무리 버릇없는 행동도 애교로 받아들이는게 나이 든 남자들인것이다. 그래서 경이가 걸맞지 않게 당신이라 한던가 별스럽게《자기야,》하고 불러도 그저 빙그레 웃으 며 묵인했다. 스스로도 바보가 된것이 면괴했지만 웃음이 전염되는데야,
 
                                           아름다운 착각
 
   백설씨는 드디어 경이를 데리고 경박호로 갔다. 그는 호젓한 호수가 숲속에서 경이가 내미는 작고 보드라운 손을 자기의 커다란 손안에 감싸쥐였다. 서로 바라보며 눈길로 많은 정회를 주고받았다. 얼마나 아릿답고 천진하고 활발한 녀자애인가, 다정 다감하고 청신한 그 얼굴에서 내비치는 청춘의 희열이 생명의 찬가를 부르고있다. 경이가 끌리듯 던지듯 상체를 실어왔다.
    생생한 육체에서 풍기는 체취는 향그럽고 달콤하였다. 그는 눈을 꼭감고 엉뚱한 화면들을 떠올렸다. 그는 도덕, 명예, 신분같은 거치장스러운 장애물우로 둥ㅡ둥 떠올랐다. 그는 벌써 해가 지지않는 행복의 만리창공에 날고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갑자기 호수물이 쫙 갈라지면서 거울을 잃었다는 전설속의 공주가 사뿐사뿐 걸어나와 자기곁에 다가서는 황홀경밖에 없었다.
    그들은 달이 솟을때까지 호수가에서 거닐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신비하고 매혹적인 신화속의 밤이였다. 밝은 달빛은 수림을 야릇한 몽환경으로 색칠하고있었다. 그들은 발길가는대로 정처없이 걸었다. 마음을 한껏 취하게 하는 현실의 동화속을 걷고있는 그들은 자신의 사랑과 무시무시한 정적속에 숨이 막힌듯 말한마디 없었다. 경이는 그것이 좋았다.
   그들은 밤이 이슥해서야 하숙방으로 돌아왔다. 며칠 세맡은 집은 마을과 떨어져 호젓하였다. 밤, 곡조가 전혀 맞지않는 개구리합창만이 이 마을에 생명이 존재한다는것을 알리고있는 산촌의 깊은 밤이다, 정부가 없는 남자는 반병신이라고 여기는 열려진 시대에도 백설씨로 말하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샌님이였다. 그러나 열광의 녀자애는 청교도같은 사내를 가만두지 않았다. 녀자애의 달콤한 목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찢어놓았다.
  《이런 밤을 꿈속에서도 기다렸어요. 선생님… 》
  《여긴 선생이 없잖아…》조금 떨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우습게 들렸다. 녀자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입을 감싼다.
 《그래요, 여기엔 제멋대로 풀어놓은 자아감각밖에 없어요.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그 고전적인 틀을 마사버리는거예요. 한 남자와 한 녀자의 데이트, 이것만이 진실이죠. 이밤은 우리 둘꺼야…》
    그랬다. 경이로서는 힘겹게 마련한 이 밤이 너무너무 행복하였고 성스러웠다. 겁이 많던 그의 마음은 그토록 당돌해졌고 구속이 없어졌다.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동안 진정 우수를 몰랐고 애달픈 눈물을 흘린적이 없었던것처럼 느꼈으며 오로지 환락에 찬 눈부신 해빛만이 있었던듯 싶었다. 
《너 인젠 제법이구나. 지금 계집애들이란…》
《그래요. 제가 제법인게 있다면 이렇게 선생님을 내꺼로 만들게  된거예요. 저의 사랑은 눈앞에서 가물가물하다가 스러지는것이 아니였어요. 씨실과 날실이 한코한코 얽혀서 베천이 되듯이 그렇게 엮어온거예요. 당신이 생각한것처럼 현대소녀의 불장난 이 아니였어요. 이래도 안믿을래ㅡ요?》
    경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따뜻한 모습으로 남자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어린 눈, 따뜻한 웃음이 남실거리는 타는듯한 입술, 그렇게 청초하고 다정스럽게 보이는 경이의 얼굴에서 백설씨는 지금 감당하기 어려운 벅찬 호소가 자기에게로 다가오는것을 느끼면서 몸을 떨었다. 두눈길이 허공에서 작열했다. 녀자애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경이는 진실을 말할 때 눈속에 밝은 빛이 움직였다. 이 시각엔 또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자 더욱 진한 색갈을 띠고있었다.
《오늘 절 마음껏 차지해요. 당신에게만 주려고 고스란히 지켜온 저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예요. 그리고 제가 줄수 있는 유일하고 영원한 선물이기도 하구요》
   숨을 할딱거리는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갈대처럼 한들거렸다. 백설씨의 마음속에 따뜻한 사랑이 솟구쳤다.
《이러면 안되는거야, 그리고 너도 곧 후회하며 나를 원망할것이고…난 널 사랑하기에 허무게 망가뜨리고 싶지않은거야. 한송이 청초한 꽃그대로 곱도록 지켜보는것으로 만족하자꾸나. 내마음을 알겠니?이 못된 계집애야!》
《선생니ㅡ임ㅡ나ㅡ안…난… 당신꺼예요. 그리구 당신도 다 내것이야!당신의 이 심장도, 그 상상력도, 멋진 미소도…》
    그의 가슴에 쓸어지듯 안겨든 녀자의 입술이 막 벌어진 석류처럼 빨갛게 물들면서 소로록 뜨거운 숨소리가 새여나왔다. 배설씨는 참지 못할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는 금방 터져버릴것같은 흥분을 억지로 짓누르며 조용히 천천히 녀자애의 동실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랑해요!정말 후회없이…》귀가에 산새소리가 울리며 그녀의 따가운 입술이 솟구쳐왔다. 녀자는 아직 경험이 없으련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입술을 맡겼고 남자는 그녀의 심연속에서 솟아나오는 명주오리같은 보드라운 숨결을 그대로 빨아들였다.
경이는 다급한듯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더듬었다. 위에서부터 네개의 단추, 그 하나하나가 따일때마다 처녀의 마지막 방선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표식이련만 아무 미련도 없는듯이 손길이 더 빨라졌다. 앞섶이 열리자 눈이 부시게 선명한 물방울 무늬가 시선을 빨아버렸다. 두개의 풍만한 봉우리가 숨을 쉬고있었다.
    마침내 라체가 된 순백의 육체가 환영처럼 눈앞에 조용히 펼쳐졌다. 그것은 완연한 조각예술품이였다. 분명 그것은 생동하는 한폭의 명화 그대로였다. 장엄한 신의 걸작이다. 턱에서 목으로,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가슴으로 유연하게 뻗어내린 상체 의 곡선미는 어떤 유능한 화가라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할것이다. 허리의 연한 곡선은 둔부를 따라 휘영청 타고돌아 비단실이 끌려내려간것럼 발끝까지 줄달음 쳐내려갔다. 그것은 사람의 육체라기보다 너무나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래서 성스럽기까지 한 절대적인것이였다. 
    백설씨는 경이가 이끄는대로 부드러운 몸위에 올랐다. 경이가 머리를 부둥켜안으며 입안에 달콤한 노래를 넣어주자 문득 그 노래는 시간이 생겨나기 이전에 처음 부른 그 입으로부터 자기에게까지 전해온것이며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한 계속 불려질 애욕의 노래를 경이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른 입에 넣어주려고 온몸을 불태웠다.
   …경이는 어느새 끝없는 신비의 세계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렸다. 마음속에서 남성에 대한 놀라움이 눈을 뜨기시작했다. 남자!자기 가슴우에서 느껴지는 그 남성의 힘에 대한 첫감각과 동시에 자신의 성결한 처녀성이 떠나가는 마지막 몸짓으로 격정을 숨기며 눈물을 흘렸다. 아ㅡ아ㅡ!그녀가 그렇게도 목마르게 바라던 사랑의 전부의 내용이 그렇게 씌여지고있었다…
    경이는 자꾸 선생님을 부르며 달큰하게 속삭였다. 아픔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라고, 행복해서 짓는 줄끊어진 구슬이 흐른다고, 오래동안 사무치게 마음속으로만 풀리기 바랬던 그 안타까운 정한이 비로소 희열속에 풀리는 소리라고…
 《아이, 난몰라, 어쩜 좋아!사랑해요. 선생니임ㅡ》
    오래오래 하나로 녹아붙었던 육체가 둘로 나뉘여졌을 때 경이는 얼굴을 가리고 울다가  이윽해서《선생님, 나의 님…우린 지금 어데 있나요?》하고 부르며 남자의 가슴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사람들은 밤을 육체와 령혼을 달근질하는 황금시간이라고 좋아한다, 그러나 밤 그자체는 그저 랭담하게 인간사회의 치부를 덮어버리는 장막일뿐이다. 실한오리 걸치지 않은 음양의 인간들이 뒤엉켜 뒹굴면서 구비구비 풀어내는 그 욕정의 신음에도 눈이 멀어있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은 수치란말을 만들지 않았을것이다.
    남자의 넓은 가슴에서 어린애처럼 엎드려 자는듯 꼼짝도 않던 경이가 잠꼬대같이 속삭이였다. 비둘기가 구구하는 소리를 알아들을수 없어도 싫지  않은것처럼 그 종알대는 소리가 듣기좋았다. 그 소리는 정에 달뜬 녀자가 내는 노래의 곡조와 시가 어울린 기묘한 애욕의 피리가 아니겠는가?녀자는 뇌까리고 남자는 침묵으로 답복해도 서로의 가슴에 전파로 전해지기에는 충분하였다. 정애에는 설명이나 해석이 필요없는 법이다. 백설씨는 잠기가 실린 경이의 상기된 얼굴을 조심스레 받쳐들었다.
《저 하늘에 별들을 봐, 별들이 몇억광년의 아득한 하늘에서 너의 눈동자속에 고이기 위해 건너온것이 아닐가?나는 늘 너의 눈에서 별을 보고있었지!너의 눈이 그대로 한쌍의 별이거든, 저 하늘에 별들은 새날이 밝으면 사라져버리지, 그러나 경이야, 너의 눈동자속에  별들은 언제나 나를 향해 반짝이겠지?응! 》
《새날이 밝아오면 별들이 사라진다구요, 기막히게 처량하고 심각한 서정이예요. 새빛이 우리에게 이를때면 별들이  숨어버린다구요?이 행복한 순간이 아득한 별처럼 사라질가봐 이 경이가 두려워하는데 무슨 그런 다짐을…으응! 당신과 난 죽을때 까지 꼭 하나인거야, 알았지?! 》
   둘이는 다시 가슴과 가슴을 녹여붙였다. 그렇게 온밤 밀려오고 밀려가는 격정의 파도속에서 밤을 하얗게 빨래질했다. 창가에 내려앉았던 별들도 무색해서 서둘러 숨어버렸다…그러나 치정에 빠진 남녀는 그런줄도 몰랐다.
 
                                 별은 창백해졌을가?
 
    그러나 그들이 진실한 넋으로 이룩한 사랑의 기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았다. 백설씨의 안해가 남편의 염사를 알게 되자 사태는 더 수습할 여지가 없게되였다. 그녀는 리혼을 제기하고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다. 작은 도시가 들썽했다. 비록 법에 걸리는 일은 아니였지만 백설씨는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다. 풍문에는 남방에서 떠돌다가 절친한 동창의 연줄로 미국으로 날아가버렸다고 했다…
    경이만 끈떨어진 뒤웅박신세가 되여버렸다. 진우가 그녀를 소개받았을때가 바로 그 무렵이라고 편지에 쓰고있다.
    ㅡ진우씨는 몰랐지만 저는 껍데기만 남은 녀자였지요. 이미 자기를 잃고있는 녀자를 진우씨는 좋아했지요. 물론 그것은 저의 잘못이여요. 진우씨도 많은 녀자들이 진우씨와 결합하여 아이를 낳고 싶어할 그런 훌륭한 남자였지요. 진우씨의 살뜰한 사랑에 목이 멜때가 많았지만 이미 한남자에게 쏟은 감정의 격류를 돌려세울수가 없었어요.
    진표가 생긴후 저는 꿈에서 깨여났어요. 전 그애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미음먹고 진우씨를 사랑하려고 무척 노력하였어요, 그러나 그게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어요. 진표가 돐을 잡던해에 멀리계신 그이께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어요. 몇십장의 편지였어요. 그이는 자신이 살아서 숨쉬는 한 심장속에 새긴 새별을 잃을수 없다며 자기 신변에로 불렀어요.
   저는 항거할수 없는 그이의 사랑의 힘에 끌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어요. 나는 날개라도 돋혀 한달음에 그이의 품속으로 날아가고싶었요. 렴치없는 말이지만 진심이 그랬어요. 시인도 아니건만 시줄이 엮어질만큼 그렇게 격동되여 곧장 회답을 했어요. 이몸이 죽어 열백번 죽어서 넋이라도 있고없고 날아가겠노라고….
                         
                         나혼자 애모쁘게 생각한 사람
                         끝끝내 마음닫고 떠나간 당신
                         눈물로 슬픈사연 헹구던 일을
                         세월이 흘러간들 잊을수 있나
 
                         두번을 다시못할 내사랑 당신
                         나몰래 혼자떠난 무정한 님아
                         아픔에 찢기여도 가슴을 치며
                         혼자서 당신만을 그리던 나야
 
                         아직도 소원하나 있으라 하면
                         두몸이 하나되여 사랑을 하며
                         당신을 보듬다가 죽어갈 때에
                         내곁을 지켜줄이 당신이 하나 
                        
                         다시는 찾지못할 내사람 그대
                         그리워 가슴곳곳 피멍이 들고
                         가슴타 재되여도 몾잊을 당신
                         세월도 씻어가지 못하는 사람

    나 미친년이지요. 그만큼 그이는 내게 둘도없이 소중하고 귀중한 분이였어요. 설사 그이의 정식안해가 될수 없더라도 가고싶었고 한평생 그이만 바라보며 살고싶었어요. 그러나 천진란만한 우리 진표가 불쌍해서 차마 훌쩍 가버릴수 없었어요. 지어내는 거짓말같지요 ?
    어떤 때엔 엄마처럼 호수밑에 푹 갈앉아 세상의 모든 영욕을 잊고싶기도 했어요. 죄많은 어머니의 넋이 몸부림치고있는 차디찬 그 호수물로 내가슴을 태우는 괴로움의 불을 끄고싶어서 정말 지도에 그려져있는 그 이름모를 절로 가는길에 오를번 했어요. 그때마다 선생님에 대한 나의 참을수 없는 마음이 내발목을 잡았어요.
   그러면서도 이승에서 단하나의 선택이 허용된다면 아무리 굴욕적일지라도 그이와 함께 생활하고싶었어요. 저는 그이 모르게 죽어서는 안된다고 고쳐생각했어요. 나는 그이 먼저 떨어지는 별이 되지 않겠다고 그이의 눈을 보며 맹세를 했어요. 그리고 그이도 내허락없이는 죽을수 없어요. 그이는 나를 꼭 불러들일 그런 훌륭한 분이라고 믿고 기다렸어요. 나는 죽을때도 그이의 품속에 안겨서 눈을 감을거예요.
    나는 먼저 한국에 가려고 로무송출수속을 했어요. 그러나 일이 생각대로 되여 주질않았어요. 귀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나는 밀항이라도 해서 한국땅에 들어서고 그이를 오라고 부를작정을 했어요. 나는 모든 사연을 당신에게 말할수 없었어요. 정직하고 선량한 당신이 내가 기로에 빠지는것을 말렸을거니까요. 그래서 간다온다 소리없이 집을 나갔어요. 진표때문에 울면서 떠났다고 한다면 진우씨는 믿지 않겠지요. 사랑은 배반했지만 모성애야 배반할 있겠나요. 비웃어도 좋아요…
    사랑을 각양각색의 책이라한다면 저의 애정사야말로 사연많은 한부의 심령소설이라 할수 있겠죠. 이런 말을 새겨들을 진우씨의 심정이 아닌줄 알지만… 저로서는 소녀시절의 활발했던 사랑은 한부의 재미나는 련화화였어요. 진우씨가 저에게 쏟아부은 그 장중하고 자중하던 애정은 수정본이라 할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사랑을 받을 체질이 못되였어요.
    그이와 파란곡절속에서 동고동락한 사랑은 한글자 한글자 내 심혈로 쓴 초사본이라할수 있어요. 헤여졌다가 다시 맺은 저의들의 사랑은 수정보충한 재판서라고 하겠구요. 우리의 생사불변의 사랑은 절판이 난 책일것이예요. 무슨 정신여가가 있어 서 글장난인가고 불만이시겠지만 진우씨가 이제라도 그이에 대한 경이의 사랑이 어떤것이였는가를 리해해 달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니 그렇게 알아줘요. 저로서는 달리 표현할수 없어요.
    이제 본제를 말씀드리겠어요. 사랑한다는것은 곧 둘이서 하나를 완성해가는것이라지만 나에게는 행복과 고통과 슬픔이 함께 그려진 모순된 미완성의 풍경화라고나 할가요. 그이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니 진표에 대한 엄마의 애정이 그을린셈이랄가요, 그이를 만나고 저는 제가 환상하던것처럼 완미하게 행복해질수 없는것이 한없이 슬펐었어요. 모성애와 사랑의 갈림길에서 그냥 도덕의 견책을 받으며 시달렸으니까요. 역시 사랑을 받는 녀자와 사랑을 주어야 할 엄마는 이률배반적인가봐요.
    진표가 보고싶어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요. 제가 직접 당해보고서야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을 뜯으며 사랑하는 애인 우론쓰끼와 아들사이에서 방황하던 안나 까레니나의 심정을  절실히 알았어요. 그이가 아무리 따뜻하게 품어주어도 도저히 아들을 잊고 살수가 없었요. 내같은 몹쓸년에게도 모성애만은 살아있다고 한다면 세상사람들이 비웃을테지요. 그러나 그건 사실이였어요. 진우씨만은 믿어주길 바래요. 엎지른 물같은 과거지사이지만도…
    …마침내 저는 절로 자기 신체를 망가뜨린셈이 되였어요. 너무 울고 속을 태워서 심장병에 걸렸어요. 그것도 아주 가망이 없는 정도이지요. 업보라고 말해도 할말이 없어요. 그러나 나는 그이에 대한 나의 사랑과 아들에 대한 사랑을 의심해본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그 모든것이 다 내손으로 씌여진 인생극본이니까요.
    다만 마지막 소원하나가 있어요. 이번에 제가 여기로 온것은 꿈에도 보고싶던 진표를 딱 한번만이라도 볼수 있을가해서였어요. 허락해주세요. 초롱속에 새의 울음은 처량하고 곧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은 선량하다하지 않나요. 그저 친척아줌마의 신분 으로 한번만 보고가면 전 죽어도 눈을 감을거예요.
    당신앞에 용서못받을 죄인이지만 마지막 소원을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허락을 기다리겠어요.…

                                                에필로그
      
    편지를 간신히 다 읽은 나는 분통이 터졌다. 가슴속에서 증오와 저주가 화산처럼 치솟았고 나중엔 자기 마음같지 않게 련민과 관용이 화산재로 갈앉았다. 경이는 긴 편지를 넘을수 없는 골짜기 저쪽에서 쓰고있었다. 결혼후 당신이라 불러준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생각까지 새삼스레 나면서 이가 뿌드득 갈렸다. 그러나 리미가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을 잃을수는 없었다.
나는 그 진정책으로 자기를 달랠수 있는 온갖 구실을 찾았다. 애정이란 대방을 리해해주고 그의 의사에 따라 순응하는 유순한 정이며 리기와 구속에서 벗어나 자기의 모든 용기를 대방에게 바치는것이다. 이런 정과 용기야말로 특이한 애정이라 할수 있다…그럴수밖에 있으랴!그렇게 흔하게 들리는《당신》소리도 그녀는 아끼고 있지 않은가, 경이에게는 오직 하나의《자기야!》가  있을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눌러생각해도 분하고 절통했다. 나의 눈속에 쌍심지가 거꾸로 서는듯 싶었다. 아래위 이가 맞쫓기면서 덜그럭소리가 나서 자신도 몸서리쳐졌다. 열이 올라서 얼굴이 주홍빛이 되여버렸을것이 분명했다. 가슴속에 무서운 복수의 우뢰가 울었다. 나의 표정을 말없이 지켜보고있던 리미가 련민의 정으로 젖어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랭정하세요. 오늘은 정말 당신답지가 않네요. 남자들은 첫사랑을 잃은후에도 자신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아닌가요?그렇지만 마지막사랑을 잃는다면 생활의 의의와 자기에 대한 신심과 삶에 대한 기쁨, 모든것을 잃게 되지 않을가요?물론 진우씨가 저를 진정 사랑하고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예요. 이 배속에 있는 아이의 장래를 봐서라도 너그럽게 대하세요.》
   나는 잠자코 들으면서 그저 코김만 거세게 내뿜었다. 나는 끝내 자기를 다잡았다. 다행히도 나는 불을  달아놓기만 하면 극도로 흉악해지는 그런 악착한 성질의 남자는 아니였다.
《그의 사망신고를 철소하세요. 그로하여금 많지 않은 여생에 당당정정하게 이승에서의 인륜지락을 누리게 해주세요. 전번에 내가 당신 대신 비행장에 나가 마중했는데 정말 피골이 상접해서 내가슴이 다 찌르르해났어요. 그는 한남자의 팔에 매달려 겨우 지탱하고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다는 그 선생님이겠지요. 그의 표정도 착잡하기 그지없었어요.… 》
   욱하는 내성미를 랭철함으로 잘 조절할줄 아는 리미의 충고처럼 종용과 관용은 별개이다. 관용과 용서는 동전의 앞뒤면과 같은것으로서 진정 의지가 강한 사람만이 할수 있는 절제심 그 자체이다. 관용이란 마음가짐이요 용서란 력동적이고 적극적인 힘이다. 관용과 용서란 대방만이 아니라 자신도 수련시킨다. 나는 마침내 관용의 대문을 빠끔히 열고 그렇게도 저주했던 경이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용서하지 않으면 이제와서 무엇이 달라진단말인가, 사람은 완성된것도 없거니와 완성될수도 없다. 사랑에 완성이 없을진대 관용의 대문을 활짝 열어주는것이 그녀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길인지도 모른다. 
   …며칠후, 나는 진표를 데리고 경이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갔다. 나는 경이의 망가진 모습을 측연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아름답던 사람이 저렇게 변할수 있단말인가 련민의 정이 왈칵 치밀어오르면서 목이 꺽 메였다. 그녀에게서 이젠 곱게 생긴건 눈과 입뿐이였다 (무엇이 녀자를 그렇듯 사랑에 활활 불타오르게 했을가?이 녀자의 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할수 있은 유일한 남자란 어떤 남자일가?지금 저 녀자는 몹시 괴로와하고있다. 그녀가 지금 무엇을 괴로와 하는가?이제 바랄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한 남자애의 탄생은 한녀자가 두남자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한다는것을 의미한다던 말이 안타깝게 떠올랐다…)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리워 전구들의 불빛이 반디불처럼 아롱거렸다. 눈물이 글썽한 그녀의 눈속에서 수천개의 별들이 반짝이는건만 같았다. 이 녀자는 세속의 관념을 물리치고 사랑에 자기의 전부의 운명을 걸고 떠났다가 회한을 안고 내앞에 나타난것인가?아닐수도 있다. 그녀에게서는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한것이였니까. 그러면 그게 무엇일가?오직 내가 절감할수 있은것은 미모는 스러졌으나 가치는 의연 히 눈부시는 극히 희소한 그런 녀자가 바로 경이라는것이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토로할수 없었지만 이윽토록 바라볼수 있었다. 무슨 할말이 더 있으랴, 그저 마주보는 청산도 유정하다 하거늘…그러나 나는 그 이상 경이를 괴롭히고싶지 않아서 나와버렸다. 뒤에서 뼈를 깎는듯 오열을 토하는 소리와 흐느낌 소리가 뒤통수를 쳤다.
   병실에서 멀리 걸어나왔지만 목덜미에 그냥 바늘이 꽂히는것 같았다. 어쩐지 따끔해지다가도 확대경의 초점에 모아진 해빛을 쐬는 그런 견디기 어려운 느낌이기도 했다. 그만큼 경이의 회한많은 눈길이 내뒤를 바싹 쫓고있는듯싶었다.
    그렇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공간에서 오직 한사람에게만 확실한 감정을 가지고 그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반복하지 않는 녀자는 독종이 아니면 너무 숭고하다 해야 하리라. 참된 사랑을 함에서 유일한 정신적기둥은 맑은 량심과 인격력량이다. 이왕자사를 돌이켜볼 때 유일하게 안위되는것은 자기 행위의 정직과 진정이다. 지금 내게 만약 이런 안위마저 없다면 나는 정말 미쳐버릴것이다.
    행복에로 가는 길은 따로 없다. 행복의 길은 현재 내가 걷고있는 이 길 자체일뿐이 아니겠는가?내가슴속에 별은 지지않았지만 리미의 손을 잡고 사랑의 페허우를 걸어가야 한다. 이제 더는 리미의 손을 놓는 일이 없어야 할것이다.
   …한달후 나는 결혼식을 올렸고 건강이 조금 좋아진 경이와 그녀의 유일한 남자는 다시 한국으로 날아갔다. 거기서 다시 미국으로 간다고했다. 머리우로 떠가는 비행기를 망연히 바라보는 나는 차라리 진표를 경이에게 딸려보냈을걸… 하고 후회해 보기도 했다. 그가 언제면 다시 자기의 생명을 탕진하면서까지 그리워한 아들을 볼수 있겠는지…그리고 아들은 커가면서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용서할런지…경이는 자기에게 첫사랑의 결실이 있다면서도 왜 진표를 못잊어 하는지…
   누군가 인생의 의미는 사랑의 슬픔에서 깨우쳐지고 사랑의 의미는 인생의 실패를 통해서 강화된다고했다  나는 그 모든것이 인생의 조화가 아니라면 아름다운 착각이 빚은 인생희비극이라고 생각할수밖에 없었다.
            
       별처럼 아름다름다웠던 사랑이여,
               꿈처럼 행복했던 나의 사랑이여,            
                       잠간 머믈고 간 이른 봄바람처럼
                             기약없이 멀어져간 아픈 사랑아,

      아, 사랑은 타버린 불꽃이던가,
            아, 사랑은 추억의 강물이던가,
                     아, 한으로 까맣게 잊으려해도
                               왜 나는 너를 못잊고 있는거냐,
                     
 
                2004년 10 월 5 일
 
             《연변문학》 2005년 제 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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