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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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철학
2015년 04월 19일 23시 03분  조회:5963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자리철학
 
   항간에서는 분수를 모르고 제멋대로 처신하면 앉을자리 설자리를 모른다고 힐난한다. 그 힐난의 의미도 좋으려니와 보다 깊이 파고들면 엄숙한 인생철학을 읽을수 있다.
  자리란 곧 위치로서 문자 그대로 사람이 설자리이다. 이 위(位)는 사람의 립각점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적공용을 내포하고있다. 공용(功用)이란 곧(功效)로서 보람, 효험이다. 바로 그래서 위치문제는 치렬한 경쟁이 수반되는 사활적문제요, 만사에 선행되는 급선무로 된다. 그만큼 자리의 기능은 다종다양하고 자리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인류사회의 원시적평등이 찢어지여 계급과 신분이 체크되고 부귀빈천이 갈라지게 되고 화복이 조석으로 바뀌는것이니 인생의 전부의 내용이 응축되여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말은 아닐것이다.
  하기에 붐비는 이 인생극장에서 제 앉을자리 설자리를 옳게 척척 찾는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배우의 위치에서는 응당히 연기를 배워야 하고 관중의 위치에서는 마땅히 감상하는것을 배워야 하건만 우리는 때로는 배우가 되여야 할지 관중이 되여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가 있다. 혹 생활자체가 우리들로 하여금 관중의 위치에서 연기를 하게 하고 배우의 위치에서 감상을 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또 인간자체가 워낙 복합동물이고 생각하는 갈대여서 자기가 놀아야 할 각색에 대하여 헛갈리기도 하고 때로는 본의 아니게 가면구를 쓰고 이런저런 위치에 앉아 아닌보살하게도 되고 그리고 보다 많이는 의도적으로 격에 맞지도 않는 배역을 담당해 놓고 제 잘난체 어깨힘을 팍팍 살리기도 하는지 모른다.
  수림이 깊고보면 별의별 새가 다 있는법이요, 천층만층 구만층의 인간세상이니 류류별별의 사람들이 있기마련이라 저마다 제 잘난멋에 살아가더라도 제가 원해서 하든 어떤 불가피한 경우이든 제발 자기를 기만한 유취만년의 남곽선생만큼 야비하지는 말아야 하겠다. 전혀 불줄모르는 생황을 부는체 하노라니 자신인들 얼마나 고달팠으랴.
  붐비는 이 사회극장에 의자는 적고 지원자들은 너무 많아서 어디서나 비좁다는 괴탄이 터지는 판이다. 렬차에서도 뻐스에서도 선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자리, 자리다툼에 시끌벅적한다. 이런 공간위치문제는 구름이 엉키여 바람에 흩어지듯 하겠지만 문제의 엄중성은 사회적위치문제이다. 공장과 기업, 상점과 학교들, 각종 사업단위와 행정기관…어데라없이 자리가 넘쳐나고 자리에서 밀려난 실업자들이 자리타령에 목이 갈릴 지경이다.
   옛글에《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才必有用)》이라 했지만 자고로 적재적소(适材适所)란 한낱 희망사항으로 남았을뿐이다. 제자들에게《불환무위,환소이립(不患不为患所而立)이라고 가르친 공자님 자신도 한자리 얻어하려고 주유렬국(周游列国)하면서 혀가 닳도록 유설하여 마침내 로나라에서 미관말직인 사관벼슬을 하였다. 그러나 한 달만에 밀려나서 다시 포의한사로 글이나 가르치다가 죽었다.
  《자리없다고 근심할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어떻게 지킬것인가를 걱정해야 하느니라.》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불세출의 공자성인께서 천생자질을 가지고도 뜻을 펴지 못했으니 자아풍자라 할가? 아니면 력사의 희롱이라 할가? 로자가 자기를 보러온 공자에게《군자라도 때를 만나면 수레를 타는 몸이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쑥밭을 타박타박 걷는 신세가 되는거라오.》라고 했다는  데 세상이 돌아가는 리속을 언녕 꿰 뚫어보고 한 개탄이 아니랴!
   로자가 말한 때란 곧 자리이다. 위대한 사람은 언제나 위치가 그를 선택하지만 용속한 사람은 자기 자리를 찾느라고 여념이 없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이 세상에서 그렇게 배포유하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가? 세속적인 관념에서의 자리란 바로 권력의 보좌를 의미하기도 한다. 목숨을 나누어가질수 없듯이 이 세상에서 나누어 가질수 없는것이 권력이다. 하다면 해답은 자명하지 않을가,
   세월의 뒤뜨락에 해묵은 락엽처럼 썩고있는 력사의 페지, 피로 얼룩진 자리다툼의 기록에서 우리는 자리가 어떻게 인성마저 싹 말아먹었는가를 몸서리치며 읽을수 있다. 제왕과 수재들의 력사라고 개괄할수 있는 중국의 력사, 승리한자의 꾸며진 회억록에 불과하기도 한 정사(正史)에서 왕권쟁탈의 혈전들과 궁중에서 벌린 골육상잔의 비극이 주선이 아니였던가? 그래서 정계에는 량심과 인의가 앉을자리가 없다고 인의지사들이 통탄했을것이다.
   그 모든것이 력사의 앞마당에서 벌어졌던 시끌벅적 요란스러운 인간활극이였다면 정계의 뒤골목에서 벌어졌던 소인배들의 암투는 또 얼마나 불인정시(不忍正视)의 추태극이였던가? 유사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눈이 어두워서 량심을 버리고 인격과 존엄을 넝마처럼 팔며 권력자의 발바닥을 핧았는지 모른다. 그 쟁투속에서 인재죽이기 비극인들 또 얼마나 재연되였으랴.
   하여 매관매직이라는 불치의 사회악성종양이 생성되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만연되고있으니 바로 이 자리에서 인간의 또 하나의 비애가 잉태되였다고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하긴 금강산 그늘이 관동팔십리라고 옛날에 한집안에 누가 고관대작하면 그 집의 닭개도 지붕에 오른다고도 했으니 그까짓 량심과 존엄이 다 어느 빌어먹을 놈의 뒤씻개냐고 코웃음 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자리다툼으로 서로 물고뜯고 할퀴며 충량지재를 사경에 몰아넣고 저희들 간사한 무리들로 둥지를 틀고앉아 나라를 망쳐먹은 치욕의 력사가 우리 민족의 사책에도 있다. 력대의 그런 간특한 무리들이 마른 뼈다귀를 가지고 바자굽에서 으르렁거리는 개들처럼 물고뜯다가 누가 어떻게 한자리 차지하고 어떻게 재미를 보았는가 하는것은 그자들 개체생명의 활동이지만 결과적으로 국계민생에 소급된 문제로서 개탄이 아니 나올수 없다.
   서구라파의 한 현자가《흔히 용속한자가 왕이 된다는걸 당신은 믿지 않는단말인가?》라고 엄청난 질문을 던졌듯이 자고로 덕재가 겸비한 충의지재는 모난돌 정맞듯이 거개 뒤전에 밀려나고 무지무덕한자가 일세영달하는 인생마당이였다. 주임(主任)이라는 옛현인이 이를 두고《대저 자리에 림할때는 먼저 자신을 잘 알고 앉아야 하느니라. 가진 재능도 없으면서 아무자리에나 앉았다가 소임을 감당해내지 못하면 시위소찬(尸为素餐)이니라.》하고 경계한바 있다.
   시위소찬이란 시체에 음식을 먹인다는 뜻으로서 맡은 소임을 감당해내지 못하면서 그냥 틀고앉아서 봉록을 타먹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청운에 뜻을 둔 사람들로 말하면 과시 좌우명으로 삼을만한 금과옥조(金科玉条)이지만 예로부터 이런 사치스러운 고훈에 발목을 잡힌 사람이 없었으니 말세의 풍조라고나 할가부다.
   속담에도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하였으니 래일은 삼수갑산 가더라도 한자리하고 옆채기 두둑하게 챙기면 그게 난놈이 아니겠느냐? 돈도 아니나올 자각이니 도덕이니 사명감이니 민생고니 하는것을 앞세우고 벼슬할 쓸개빠진 놈이 몇이니 될가부냐? 그게 다 실의한자들이 불평불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붓장난이나 하면서 포도는 시여서 못먹는다고 했다는 여우놈처럼 허튼수작을 하는것이 아니냐? 옛노래에도《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주인이 따로 있나ㅏ? /앉으면 주인인데 사람이 없어 빈의자는 없더라.》고 했거늘 무슨 놈의 말라비틀어진 적재적소냐?… 물론 이는 득의한자들의 론리이다.
   옛날에는 확실히 백치라도 어찌해서 관모를 척 쓰고 당상에 높이 나앉아 경당목을 탕탕 두드려대면서 엉터리 판관질을 하여도 분명히 지엄하신 관장어른이였다. 그 때는 봉건사회여서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문명개화한 현시대에도 이런 착위(错位)현상이 존재한다면 멋모르는 젊은세대들은 옛말처럼 귀등으로 흘려버릴것이다.
   보통농민이 일약 국무원 부총리로 둔갑했고 공장의 한갖 보위간사가 일국의 수뇌자후보로 선정되기도 하였던 중국식유모아는 결코 현대 아라비안나이트는 아니였다. 다만 자리철학의 오묘함을 어찌다 터득하랴싶을뿐이다. 제 분수에 없이 너무 높이 올라가면 그처럼 일락천장하기도 십상이라는것을 그네들은 미리 알고나 있었는지…지금도 흔히 보게 되는 평지돌출과 착위현상을 한입으로 일일이 다 말할수 없으니 이만 생략해버린다.
   아무튼 자리의 기능은 다양하다. 일단 한자리 하게 되면 누구라도 환골탈태(换骨脱胎)를 한다. 기색도 거동도 사상면모도…석수쟁이 눈깜짝이는것부터 배운다고 틀거지부터 갖추고 배를 내밀면서 제세부리는 어마어마한 모양을 볼 때 겁이 더럭 나기도 하고 웃이 킥 나오기도 해서 왼고개가 탈린다. 한자리 하면 저렇게들 자아팽창증이 오는걸가?
   과대의식이 못말리는 직업병이라면 큰 야단이 아니냐?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 다리가 찢어진다는데도 말이다.《사람이 겸손하여 자기를 적게 나타내고 크다고 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큰 일을 이룩할수 있느니라.》는 로자의 금언을 새격보지 않을수 없다.
   기실 자리와 인격력량이 정비례되는건 아니다. 머리 하나 더 달린것도 아니고 눈이 더 뚫린것도 아니여서 본인도 별로 변한게 없다는것을 모를리 없지만 어떤 자리에 앉게 되면 그림자처럼 어떤 비젼이 따라서거니 하고 착각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자신을 더없이 고명하다고 자긍한다. 당사자는 얼빤해도 곁에서는 빤하다는 명구는 아마도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만들어진것이리라.
   자리는 하찮은 인간을 일조에 귀인으로 만들기도 한다.《수호전》에 나오는 고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현대판고구가 많고도 많다. 그런 사람은 먹어둔 먹물이 없어 머리속이 텅 비여있으면서도 하급들이 전심전의로 받들어 모시기를 바라고 자기의 말을 마다마디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며 절대복종하기를 바란다. 하긴 이런 사람들의 주위에는 상급의 방귀도 참 달다고 할만큼 아첨하는 무리들이 맴돌기마련이다. 술은 스스로 취하지 않는데 사람이 절로 취한다고 할가?
   이제 본론으로 돌아오자. 혼잡한 이 세상을 자기답고 옳바르게 살아가자면 자리철학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인생마당에는 오르는 사다리와 내리는 사다리가 놓여있다. 물은 낮은데로 흐르지만 사람은 높은데로 오른다. 이것은 인간상정이고 또 본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오르는 사다리를 일반적향상으로가 아니라 권력의 보좌에 오르는 사디라로만 간주하고 너무 집착한다면 기로에 빠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우만 쳐다보다가 자신이 너무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망양지탄(亡羊之叹)에 빠져있다. 반대로 자신은 늘 남의 위에 앉아있다고 새각하면서 아래를 굽어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안하무인이 된다. 코대가 너무 높으면 자주 벽에 부딪치게 되는데도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보다 뒤떨어져있다고 생각하면서 발밑을 잘 살피지 않고 청방지축 덤벙대다가 곤두박질하고도 운수를 탓하면서 그냥 앙앙불락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늘 앞에서 달린다고 자족하면서 뒤만 돌아보다가 궁둥방아를 찧고서야 뛰는 놈우에 나는 놈이 있다는 사실에 한탄한다.
   이렇듯 시선은 위치를 결정하지 못하지만 그 시선때문에 오히려 위치가 영구적인 존재로 남는다. 기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있든지 시선은 사면팔방으로 개방되여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자기 위치를 잘 확인하고 튼튼하게 지켜나가야만 주위의 모든것이 정신이 지배속에 있게 될것이다. 그러지 않고 노상 우왕좌왕한다면 주위의 모든것이 주인이 되여 자신을 지배하려 들것인바 노상 아첨과 굴종을 앞세우고 전전긍긍할것이다. 그리고 종당에는 자기 정신의 노예로 전락되고말것이다.
    가령 사람을 금,은,동이나 혹은 거석, 조약돌, 거목이나 작은 풀 등으로 비교해서 나눌수 있다고 할 때 아무도 돌멩이거나 잡초의 위치이기를 원하지 않을것이다. 금덩 이는 돌무지속에 놓았다 해도 금덩이의 위치로 확인되지만 돌멩이는 금무지속에 놓았 다 해도 의연히 돌멩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영원한 순금일수 없고 또 영원히 돌멩이일수도 없다.
    자신을 순금으로 생각하는 과대망상이나 자신을 돌멩이로 여기는 자비감은 다 자 아훼멸의 징표이다. 어떤 자리에서 자기가 적재적소인가 아닌가는 자신이 잘 안다. 병사의 당면 위치는 전방이다. 나뽈레옹이의《훌륭한 병사가 될수 없다면 훌륭한 장군도 될수 없다.》는 명언은 바로 위치의 당위성을 강조한 말이 아닐가?
    자리는 흔히 그 임자를 나쁘게 만든다. 훌륭하신 많은 사람들이 홍익인간에 투신하여 공덕을 쌓아갈 때 반대 일부 사람들이 지금 권력이 있을 때 챙기지 않으면 후회해도 쓸데없다고 관리병에 걸려서 욕심쓰다가 일패도지(一败塗地)아니면 인과보응의 죄값을 목숨으로 결산할것이다.
   자리에 대한 이런 사람들의 관념은 너무나 진부하고 수구적이며 그 집착성은 가련할만큼 유치하다. 십년을 적게 살망정 권력없이는 하루도 못산다고 해석하고 올라앉을수 있으되 내려앉는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란다. 뉘라서 청산만 늙지 않는다던가? 인간의 자리욕도 인간의 세월과 더불어 영원히 젊어서 살거니...
   그러나 자리에 대한 민초인생의 요구는 소박하다. 땀흘려 일할수 있고 자기 거처에서 편안히 살면서 자기 직업을 즐길뿐이다. 이런 시점에서 자리는 곧 직업과 이어 진다.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빛나게 지킨다는것은 자기 직업에 전심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인생백사에서 직업보다 더 긴요한것이 없기때문이다.
   세속적인 관념에서는 직업의 명칭에 높고 낮음이 있지만 일의 성질을 학리적( 学理的)으로 해부할 때 높고 낮음이 따로 없다. 가령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신심이 있고 그에 따른 자질과 능력이 있어서 대통령보좌에 앉았다면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명실공히 잘해나가면 되는것이요, 삼륜차를 모는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기쁘게 잘만 해나가면 되는것이다. 이것이 합리한 생활이며 직업의 신성함이다.
   부언하거니와 한 사람이 만약 자기 재능과 처지에 알맞는 일을 맡아서 원만히 해나가면 곧 고귀한 사람이며 자기 가치를 창조해나가는 사람이며 공덕을 빛내는 사람일진대 운명을 내걸만큼 권력보좌에 너무 집념하는것은 허황하고 부질없는 일이다.
 
                         2002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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