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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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엄마
2016년 02월 27일 16시 58분  조회:5447  추천:1  작성자: 최균선
                                                                  두 엄마
 
    보통 경우 누구에게나 엄마는 한분이 계신다. 만약 한 사람의 인생에 엄마가 한분 이상 있게 된다면 그것을 벌써 정상을 벗어난 어떤 사연이 얽혀있음을 말해준다. 엄마를 가리키는 말로는 자기를 낳은 친엄마, 길러준 양엄마, 젖을 먹여준 젖엄마 그리고 이붓엄마, 숙모 등을 들수 있다.
    나에게는 두 엄마가 계셨다. 큰엄마로 모신 아버지의 본댁 정금순과 작은댁으로 들어와 우리 오남매를 낳으신 작은엄마 리성화였다. 나를 낳아주신 친엄마는 혈육의 정으로 얽혀있기에 영원히 기리여도 백번 지당하지만 자신이 배아프게 낳은 친아들처럼 추울세라 더울세라 키워주시고 성가시켜주신 큰엄마도 나에게는 친엄마 못지 않게 귀중하고 존경스러운 분이다.
        나의 큰엄마는 열아홉살에 두살 아래인 나의 아버지 최정묵에게 시집와서 딸을 하나 낳고 그만 어찌해서 단산하게 되였다. 맏며느리로 최씨가문에 들어와 대를 끊게 한다는것은 녀자로서 용서못받을 죄라고 생각한 큰엄마는 남편도 모르게 사람을 내세워 아들딸을 주렁주렁 낳아줄 녀자를 물색해 새댁을 맞아주리라 은근히 왼심을 썼다. 사람을 내세워 알맞춤한 녀자를 물색하던중 룡정시내에서 홀몸으로 하숙집을 꾸려 연명하던 녀자가 재가할 의향이 있다고 해서 몸소 찾아가 선을 보았다.
    달덩이같이 환한 얼굴에 두눈은 더없이 착해보였고 몸집은 암팡지게 생겼지만 서른살을 갓넘긴 젊은 녀자여서 아이낳이는 무척 잘할것 같아 대번에 마음이 들더란다. 아들하나늘 믿고 살다가 얼마전에 불치병으로 먼저 보내고나서 눈물로 지내는 모습을 보니 더구나 측은히 생각되여 빌듯히 해서 집으로 데려오게 되였다고 자주 옛말삼아 들려주시던 큰엄마를 나는 몇번이고 다시 바라보았다.
    가세가 넉넉하면 축첩도 가당한 일로 여긴 구사회였지만 큰엄마는 녀자의 본성인 투기도 없이 자청해서 작은댁을 맞아왔다니 알고도 모를 일이다. 대를 이어주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있었더라도 혈기방장한 녀자로서 남편의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길수도 있는데 그렇게 한다는것은 조련찮은 일이다. 나는 그것이 관용인지 포용력인지 알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큰엄마에게 꼬치꼬치 캐물을수도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젊은 두 녀인이 한남편을 섬기며 시앗싸움도 없이 오손도손 화목하게 살아오셨단다. 낮이면 한뉘 농군인 남편을 거들어 밭일도 하고 온 집안의 궂은일 마른일을 도맡아하시면서 마치 새며느리가 아이를 가지기를 학수고대하듯이 새댁이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면서 밤이면 남편을 가운데 눕히고 아무 말썽도 없이 살았다는 실로 우습기도 하고 천방야담 같기도 한 일이였다.
    새댁이 이듬해 남자쌍둥이를 낳자 큰엄마는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듯이 그렇게 즐거워하셨단다. 그후 엄마는 련이어 내 누이를 낳고 셋째인 나를 낳고 아래로 또 녀동생까지 낳으셨다. 큰엄마는 새댁은 아이들만 잘 기르라면서 집안에 눌러앉혀두고 궂은일은 혼자 도맡아하시며 억척같이 일하셨다. 원래 서울에서 태여나 힘든 일은 손에 대보지도 못한 나의 생모는 그렇게 호강하며 살았다.
    옛날엔 고부가 앞뒤방에서 한날한시에 몸을 풀었다더니 아닌게 아니라 생모가 쌍둥이를 낳은 그해 시집간 큰누님도 첫아들을 낳았다.
    새댁이 아들딸 다섯이나 가지런히 낳아서 온 집안이 시끌벅적하게 살아가다가 토지개혁이 터지면서 우리 가정은 일조에 몰락하게 되였다. 설상가상으로 나의 아버지가 50대에 전염병으로 돌아가다보니 두 청상과부가 한구들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워갈 일이 얼마나 막막했으랴,
    두 엄마는 분공을 하여 각자 책임을 다하기로 약조하였단다. 그래서 약삭빠르고 작식솜씨가 있고 장사머리도 좋은 작은엄마는 남자들처럼 밖에서 나돌고 워낙 현처량모인 큰엄마는 가정일을 하며 우리 오남매를 키우셨다. 그러다보니 나는 어려서부터 누가 생모인지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고 큰엄마의 손에서 자라게 되였다. 새로 분배받은 서덜밭 서너짐을 혼자몸으로 부치노라니 고생인들 얼마였고 남편없는 설음인들 얼마였으랴!
    그렇게 집을 나선 엄마는 장춘이요, 할빈이요 하는 큰도시로 전전하면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내가 열네살 잡던 해 우리는 정든 고향 룡강촌에서 쫓겨나 모아산아래 모아툰에서 살게 되였다. 이미 청년이 된 쌍둥이형제는 제가끔 앞날을 개척한다고 나가고 누이와 나, 녀동생이 큰엄마의 곁에서 잔뼈를 굳히게 되였다.
    그러나 큰엄마의 고생은 여전했다. 더구나 문화대혁명때 이미 해골이 된 남편의“덕”을 보느라 쩍하면 투쟁대회에 나서게 되여 정신적인 고생도 얼마였는지 모른다. 나는 큰엄마가 사망할 때까지 생모처럼 여기면서 달리 대하지 않았지만 별로 효도를 하지는 못하였다.
     곁에 하나 남은 아들이라고 그렇게 마음을 써주시며 나를 장가보내고 손주를 안으면 죽어도 원이 없으시겠다던 큰엄마는 내가 늦게야 장가들어 겨우 생긴 첫애가 태여나기 얼마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사람이 늙으면 세상과 고별하는것은 섭리이건만 나는 해마다 큰엄마이 묘지앞에서 참회를 한다.
    큰엄마가 그렇게 병에 시달리다가 운명하실 때 내가 집에서 지켜드리지 못하고 홀로 내이름을 부르며 돌아가셨을것을 생각하면 나는 스스로 불효를 울고운다. 더구나 큰엄마는 폭설이 내리던 날 사망하여 장례도 겨우 치렀다. 총각의 몸으로 상두를 메는 법이 없다지만 나는 내엄마가 사망하면 동네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것이라고 생각하고 평소 초상집을 쫓아다니며 굴혈을 하고 시체를 들어내고 상두를 메며 왼심을 썼건만 결국 내집에 초상이 나니 들여다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마을 어른들이 초상집에 와서 혼을 불러주는 법인데 모두 오기를 꺼렸다. 상두도 못쓰게 하여 소수레에 실어서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안치할수밖에 없었다. 소수레를 몰고 허리를 치는 눈길을 헤칠 때 나는 울음도 나지 않았고 또 눈물로 나약함을 보이고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 별렀다. 이제부터 다시는 어느 집 초상에도 얼씬하지 않을것이고 상두같은건 더구나 메지 않겠다고 이발을 뿌드득 갈았다. 사실 그후 남의 죽음에 가슴 한번 쓸지 않았다.
     한평생 허리 펼 사이도 없이 일만 하시며 고생고생하시다가 한많은 세상을 등진 큰엄마는 죽어서도 그렇게 어렵게 저승길을 떠나셨다. 그래서 나는 생전에 다하지 못한 인륜지정을 미봉이나 하듯이 한번도 거르지 않고 인정많은 안해와 함께 봄가을로 큰엄마의 묘소를 찾아 엎드려 절을 하며 후반생에 운이 트인 셋째아들ㅡ이미 로옹이 된 이 불효자를 보아달라고 빌어본다.그리고 나어린 손자를 묘소앞에 세워놓고 큰 소리로 되뇌인다.
    “큰엄마, 이 셋째가, 이와조가 왔수꾸마. 크게 성공한 당신의 손자의 아들ㅡ 증손자놈도 데리고 왔수꾸마, 구천에서 한을 푸시고 안식합소이, 엄마 명복을 비나이다…”  
    불효자인 나에게는 나를 낳아주신 친엄마의 유체를 모신 묘소가 없다. 그래서 늘 비명에 가신 엄마를 기리는 글토막이나 지어서 구천에 보내려고 하다가 마침내 자신도 북망산을 저만치 바라보는 때에 그 심정을 담아“내 마음속의 빈 무덤”이라는 글제를 떠올리게 되였다.
    국말국초에 삶을 영위한 엄마는 째진 가난에 부대껴도 말 한마디 틀릴세라 조심하며 눈물에 옷고름이 썩어도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죽이며 살아오셨다. 친엄마의 일생은 참으로 가혹한 운명속에 피멍이 들고 짓찢긴 일생이였다. 나의 생모은 원래 서울내기였는데 무슨 운동을 한다며 집을 뛰쳐나간 남편이 중국 간도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세살내기 아들애를 업고 두만강을 건너 사처로 찾아다니다가 남편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된후 다시 고향 서울에 가지 못하고 룡정에서 삶의 보따리를 풀었단다.
    엄마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승살이가 그렇게 기구하였던가? 아들 하나를 태산같이 믿고 살다가 아홉살나던 해에 이름모를 급병으로 잃고 서른한살 청상과부의 설음에 하늘땅이 그대로 무너져내렸을것이다. 그러다가 큰엄마의 알선으로 해주최씨네 가문에 들어오게 되였던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나는 서자인 셈이다.
    아버지는 두 형이 아홉살 나던 해 청산투쟁을 맞고 그 미열로 50대초반에 젊은두 안해와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남겨놓고 황천길을 가셨다. 몰락세가의 살림을 어찌 한두입으로 서술하랴. 녀동생이 젖을 떼고 혼자 놀수 있게 되지 생모는 우리들을 공부시키려고 룡정의 “백만려관”에 들어가서 식모살이를 했다. 내가 여덟살때 엄마는 장춘으로 가셨고 거기서 다시 할빈으로 들어가 흑룡강성민족간부학교식당의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퇴직한후 이집저집 식모살이로 전전하셨다. 그러다가 할빈사법학원 총무주임의 집에서 환갑을 앞두고 한많은 수난의 인생을 마치시였다.
     아마 친엄마가 사망한 이튿날 밤이였을것이다. 그날 저녁을 먹는데 큰엄마가 말씀하셨다.
      “큰것들은 다 집을 떠나고 너만 남았지만 십여년을 객지에서 고생한 네어미를 인젠 모셔오너라. 명년이 환갑인데 늘그막까지 고생시켜서야 쓰겠냐? 환갑상이나 받게 하고 한집에서 죽이면 죽, 밥이면 밥을 먹으며 함께 살아야지.”
    그전에도 그런 생각이 없은것은 아니였지만 환갑을 쇠여드릴 생각은 미처 못했던 나인지라 얼굴이 뜨거워났다. 그래서 작은엄마의 얘기를 하며 환갑쇨 일을 의논하는데 뒤집 친구가 느닷없이 문을 떼고 들어와서 전보를 불쑥 내밀었다. 등잔불밑에서 읽어보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어머니께서 전날 저녁무렵에 뇌익혈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부고였다. 나와 녀동생은 대성통곡하고 큰어머니는 돌아앉아 눈물을 훔치시다가 울고만 있을게 아니라 부채골에 큰매부에게 알리고 얼른 할빈에 가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알아보는게 급하다고 일깨우셨다. 사실 너무나 뜻밖의 비보를 받고보니 내 사유도 멈추고 시간도 정지되고 하늘땅이 꺼져내리는듯싶어 무엇이 무엇인지 그저 얼이 쑥 빠져있었던것이다.
    그런데 거북한 놈이 가루팔러 가면 바람이 분다더니 그날따라 큰눈이 펑펑 쏟아졌다. 부채골로 가려면 룡정을 거쳐 40리 밤길을 걸어야 했다. 나는 눈물을 짓씹으며 무거운 발길을 재우쳤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내 눈물도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한밤중에 매부네 집에 들어섰을 때 나는 눈사람이 되였고 귀뿌리가 작열하고있었다. 더운 집에 한참 앉았노라니 두귀가 말귀처럼 되였다. 중의를 아는 매부가 귀를 얼궜다며 어린조카들을 깨워 헛간에 가서 찬 콩을 퍼온다 앞내가에서 얼음을 꺼오게 한다 하며 야단법석을 했다.
    귀에서 진물이 줄줄 흘러도 그것을 아랑곳할 새가 없었다. 눈한번 붙이지 못하고 앉았다가 매부와 함께 녀동생을 데리고 할빈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할빈에 도착하여 주인집에 들어서니 저녁때였다. 퇴근하고 돌아온 주인집 나그네가 엄마의 사망경위를 이야기해줄 때 나와 녀동생은 그저 소리없이 울었다. 울지 않고 무엇을 더 할수 있단말인가?
    그날 해질무렵 주인량반이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엄마는 창턱아래 쓰러져있었는데 숨이 경각에 달려있더란다. 엄마는 철창속에 있는 둘째와 조선으로 건너간 맏아들과 큰딸, 그리고 모아산밑에 있는 막내아들과 막내딸을 생각하며 홀로 서럽게 울고계셨을것이다. 그리고 너무 상심한 나머지 혈압이 높아지면서 뇌익혈이 왔을것이다. 엄마는 힘겨운 식모살이에 육체상으로 지쳤다기보다 정신상에서더 지쳐서 병든 마음을 버텨주던 마음의 기둥마저 철저히 무너졌을것이다.
    이튿날 주인량반의 인도를 받으며 병원의 사체실에 들어서니 20여구의 시체가 맨봉당에 줄느런히 놓여있었다. 가슴이 섬뜩해났다. 죽음의 문턱이 그렇게 몸서리쳐질줄은 몰랐다. 스믈한살, 아직 죽음에 대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나인지라 친엄마가 누워있는 사체실이였건만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들었다. 그많은 시체들속에서 어머니의 유체를 찾기까지는 한참 걸렸다. 백포를 덮어놓아서 누가 누군지 알수 없었던것이다. 마침내 백포를 하나하나 제끼고 엄마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나는 또 한번 몸서리를 쳤다. 엄마의 얼굴을 밀랍처럼 창백했고 사지는 차디차게 굳어져있었다.
    나는 인간의 죽음이란 얼마나 랭혹하고 허무한것인가를 절감했다. 아직 응석을 부릴 나이에 내곁을 떠나서 청년이 되도록 애절한 모자의 정을 나누지도 못하고있다가 마지막 만남으로 사체를 마주했으니 그때 나의 심정을 표달하기엔 나의 언어가 너무나 창백하였다. 비록 남들처럼 생모의 사랑을 넘치게 받아보지 못했지만 필경은 열달을 배속에서 키워주시고 인간으로 태여나게 해주신 생명의 모체이니 억장이 무너지였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유체를 부등켜안고 울지 못했다. 울려고 결심했더라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을것이다. 나는 이미 오는 길에 눈물이 다 말라버렸 억지로 짜낸다면 피눈물이였을것이다.
    할빈서북쪽에 있는 금산포공동묘지에 엄마를 묻고돌아설 때 나는 너무 억이막혀 다하지 못한 불효를 두고 하늘을 우러러 통탄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통탄이 아직 가벼운 통탄이였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3년후 금산포의 공동묘지에 주택구가 들어서고 임자없는 묘소를 그대로 밀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 늦었다. 그저 마른 가슴만 뜯었다. 그렇게 엄마의 한이 말라붙은 해골이 어디로 실려가 산산히 부서져버렸는지도 모르게 되였으니 이 아니 통탄할 일인가?
       그렇게 나는 생전에 나를 낳아준 엄마를 곁에 모시지 못하였고 사후에도 모실수 없게 되였다. 해마다 청명이 돌아오 큰엄마의 묘소게 가토를 하고 술석잔을 붓고 절을 할 때면 생모의 묘소를 앉히지 못한것이 한이 되고 부끄러움이 되여 더구나 가슴이 알찌근해남을 어쩔수 없다. 내 마음속에 분묘가 커질수록 불효막심한 자신이 미워진다. 지금 엄마의 령혼은 황천에서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리라.
        사람이 자식으로 태여나 불효가 따로 있는가? 효도함에는 시기가 따로 없다지만 사후효도는 빈집에 불때기와 같은 부질없는 짓이다. 오늘 백골이 진토가 되고 넋은 천애이역에서 안식을 모르고 떠도실 엄마를 생각하매 그 명복을 빌 명분마저 서지 않으니 더구나 구곡간장에 회한만 서리고 얽힐뿐이다.
        아, 서러운 원혼이여!나의 어머님이여!  
 
 
                            2007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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