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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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수>(首)는 수(秀)작이다
2012년 09월 19일 07시 22분  조회:2443  추천:0  작성자: 최룡관
한국제5회 청마문학연구상수상작

청마 유치환의 시
<수>(首)는 수(秀)작이다


최룡관


들어가는 말


필자가 청마유치환시를 제일 처음으로 접촉한것은 지난세기 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후의 일이다. 한국에서 우리 작가협회에 많은 책을 보내왔는데 그속에는 홍윤기선생이 집필한 <<현대시해설>>이란 책도 있었다. 거기에 실린 청마유치환의 시 <<기발>>이 인상이 깊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며 노스탈쟈의 손수건이며 하는 시구들과 처음으로 표대 끝에 기발을 단 이가 누구인가고 질문하는 종결구는 필자를 진동시키고도 남은이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의 리상규씨가 찍어낸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 제6집에서 유치환의 시 <<수>>룰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6집에 실린 시가 죄다 친일시라는 모자를 씌운 작품들이였다. <<수>>를 찬찬히 읽어보고 필자는 어리둥절하였다. 이 시는 친일시 같지 않는데 아니, 친일시가 아닌데 왜 친일시라고 했을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느날 친일문학을 연구편집한 연변의 최삼룡선배님과 이런 말을 했다. <<형님, 청마의 시 <수>가 제가 보건대는 친일시가 아니던데요.>> 최형은 한국에서 친일시로 이미 정평이 난지가 오래다는것이였다. 그후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필자의 졸견도 한번 내놓을 필요가 있지 않을가 하는 념원을 품었댔는데 오늘 기회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왜 필자는 청마의 시 <<首>>를 친일시로 보지 않는가를 아래에 설명해 보려한다.


1. 시 <<수>>의 층차


시 <<수>>의 전문을 먼저 읽어보자.


유치환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희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시 <<수>>는 현대적인 기법으로 쓴 시이다. 이 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가고 생각하니 폴 발레리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비가 온다고 말하고싶으면 비가 온다고 말하십시오! 라고, 그러나 시인의 목적이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럴수도 없습니다. >> (<시에 대한 담화론>, <시의 리해>242쪽. 민음사출판)현대시란 이런것이 아닐가. 외연속에 외연과 다른 내연이 잠재해 있는 시가 현대시일것이다. 시 <수>가 말하는 외연속에는 어떤 내함이 잠재해있을가? 이미지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가? 이러한것을 알자면 시를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분석을 해보아야 할것이다
.
청마의 시 <<수>>는 세 개층차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첫층차는 처음부터 <<산하를 바라보고있도다>>까지이고, 두 번째층차는 <<너의 죽어>>로부터 <<피의 법도로다>>까지이고,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로부터 마지막까지 세 번째층차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2. 첫번째층차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상기한 것이 <<수>>의 첫층차로서 시의 서두라고 할수 있겠다. 청마는 시적대상의 환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적대상을 어떤한 것이란것을 떠올리고 있다. 어떤 환경인가?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이 적은 가성 네거리>>다. 시인은 점층적인 방법으로 큰 것으로부너 작은 것에로 환경을 이동시킨다. 12월의 북만으로부터 흑룡강, 흑룡강으로부터 다시 가성네거리로 초첨을 맞추고있다.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하는데 12월의 북만은 눈의 계절이여서 눈이 안올 리가 없다. 그런데 왜 눈도 안오고 하였겠는가? 필경 눈은 왔겠는데 시인은 왜 눈도 안오고 하였는가? 북만에 눈이 안 왔다는 것은 북만이 자연의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바로 청마의 의도가 슴배여 있다고 할수 있다. 청마가 북만에 있을 때는 그곳이 일제침략자의 구두발에 짓밟혀 황량한 고장이 되었을 때다. 사람이 살곳이 못되는 고장이다. 그래서 청마는 눈도 오지 않은 곳이라고 했을것이다. 일제가 통치하는 고장은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설정은 일제에 대한 청마의 타매이고 야유이며 조소이다.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로 시적환경을 마무리짓고 있는데 이것은 눈이 와야 할 곳에 눈이 오지 않는 원인을 밝힌 것이라고 할수 있다. 오직 만물에 대한 가혹과 혹독만으로 넘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흑룡강 또는 가성 네거리다. 그러니 하늘도 노여워서 12월이 되었건만 눈도 보내지 않는 고장이다. 이 고장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대답하지 않아도 불보기처럼 뻔하다. 일제침략자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로선이 빚어낸 것이라고 삼척동자라도 말할수 있는 대답이 나오게 된다. 이런 악렬하고 암흑한 고장에서 <<수>>의 사건은 벌어지고 있다.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비적의 머리 두 개 내결려있는데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서 소년같이 작다. 반쯤 뜬 눈은 저물어가는 차디찬 하늘과 삭북의 산하를 모호하게 바라보는 일이 발생하였다. 당년에 <<비적>>은 누구였던가? 민족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일제와 싸운 사람들이 <<비적>>이였다. 다시 말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항일하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을 잡아 릉지처참을 만들고도 성차지 않아서 머리를 베여 네거리에 높이 걸어놓고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으며 왕도락토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일제의 만행인 효수였다. 효수자체가 극악무도한 짓인 것이다. 청마는 아주 대담하게 일제의 만행을 시로써 질타하고 있는것이다. <<검푸른 얼굴이 말라 소년같이 적고>>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겠다. 이따위 망년된 짓으로 민중을 억눌러 식민통치를 보호유지하려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는 이런 짓을 하루이틀에 벌린것이 아니라 검푸른 얼굴이 말라서 소년같이 적게 될 때까지 장시간으로 하였다는것이다. 그래서 하느님도 보다못해 노하여 12월의 북만에 눈도 보내주지 않았으리라.
<<반쯤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시구는 청마의 마음을 한결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직도 반이라도 눈을 뜨고 있다는 자체가 <<비적>>이라는 죄명에 대한 불복과 원한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세상에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는것이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여기서 <<삭북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고 하였는데 흑룡강의 삭북에는 만백성이 우러러보던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이 있었다. 우리의 많은 항일용사들은 쏘베트처럼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면서 민족의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몸을 던져 항일하였던 것은 당년의 현실이였다. 일제의 압박과 착취와 략탈이 없는 사회가 <<비적>>들의 추구였고 리상이였던 것이다.
<<비가 온다고 말하고싶으면 비가 온다고 말하십시오! 라고, 그러나 시인의 목적이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럴수도 없습니다.>> 시인청마유치환은 시 <<수>>에서 언어의 기능을 변화시켜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는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3. <<수>>의 두 번째층차


두 번째 층차를 고찰하기 전에 당년에 청마유치환시인이 어떠한 사상으로 살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두 번째층차의 분석에 유리한 길을 닦아주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서려명박사가 쓴 <<청마유치환의 북만 기행시>>를 론한 문장에 이런 단락이 있다. 청마는 김좌진의 희생에 대하여 <<백야 김좌진 장군이 간첩의 흉탄에 쓰러져 그의 붉은 의혈의 물든 절치切齒의 땅도 바로 이 부근이다.>> (15쪽) 청마유치환은 김좌진 장군의 희생을 <<붉은 의혈>>이라고 명백하게 밝히였다. 이 <<붉은 의혈>>이란 말은 청마의 당년의 사상을 말해준다. 청마유치환이 당년에 항일을 옹호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옥같은 말이라고 아니 할수 없다. 그런데 청마는 두 번째층차를 이렇게 쓰고있다.


너희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이 시구들은 일제침략자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의 동북까지 강점하고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의 악착스러운 정체를 변호하기 위하여 애쓰던 당년의 선전구들과 일맥상통하다. 아마 이 단락의 내용이 있어서 박태일교수가 <<수>>를 친일시라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왜 이 시에 이런 얼토당토 않는 말을 차용하였는가이다. <<붉은 의혈>>을 내세웠던 청마가 이 시구들로 일제의 침략을 변호하거나 효수를 당연지사라고 한 증거가 아닌가 하고 혹자는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대답은 간단하다. 아니다! 이 시구들은 일제침략자가 어떻게 눈을 감고 야웅하는가를 표현한것이다.
중국에 독은 독으로 친다는 속담이 있다. 청마는 독은 독으로 친다는 수법으로 피는 피로 값는다는 수법으로 두 번째 층차를 쓴 것이다. 원쑤의 말로 원쑤의 론리로 원쑤의 악랄함을 백일하에 드러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인정된다. 1련에서 12월에도 북만에 눈이 오지 않았다는 그 원인을 사회적인 각도에서 다시 한번 해명해 본 것이기도 하다. 바로 네놈들이 효수까지 하면서 이런 지껄이를 하고있으니 12월이 되어도 눈이 오지 않는 다고 증언을 하고 있는것이다.
앞에서는 자연환경을 빌어서, 효수라는 문명치 못한 수작을 부리는 사실을 빌어서 원인을 까밝히였다면, 여기서는 일제침략자들이 괴까리는 유론으로 한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북만이 되었다고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억지공사인가? 아니다. 청마는 일제침략자의 이런 황당한 유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불모한 사변의 풍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시를 보면 <<불모한 사변의 풍경>>을 그리는 내용이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효수이고 다른 한가지는 일제침략자가 자신의 통치를 변호하는 제2층차의 말이다. 제2층차의 말이 효수를 비호하고 있는 일제의 더러운 낯짝을 드러낸것이며 식민통지를 합법화하려는 본질을 드러낸것이다. 청마는 일제의 말을 빌어 일제의 뺨을 치며, 일제의 허울을 효수로써 벗겨버리여 만천하에 그 죄악을 밝아놓고 질책하고 있다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언어표현속에 시인의 예리한 마음이 숨겨져있다고 하겠다. 이런것을 두고 <<어떤 광채를 숨기게 되면 안광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할것이고, 어떤 예리함이 언어속에서 드러나게 되면 식견이 높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게 될것이다>>(문심조룡 557쪽. 연변인민출판사.)라고 하였으리라.
사실 시에서 이런 수법을 쓴다는것은 용의한 일이 아니다. 독을 독으로 치는 수법은 일상적으로 말하면 어떤 비평문장이나 서사작품에서 쓰는 수법이지 정서를 읊는 시의 수법이 아니다. 청마는 간이 크게 다른 장르에서 쓰는 수법을 운문인 시에 도입하였다. 이런 수법을 쓴 시는 찾아보기 힘든 흔치 않는 사례이다. 언어마다 시구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풍자와 조소의 운치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제2층차라 하겠다.

중국의 <문심조룡>에 이런 말이 있다. <<문학작품들은 뜬 구름처럼 변화가 무쌍하기 마련이고, 예술작품들은 파도처럼 다양함이 로정되기 마련이다. 문장과 론리상의 평범함과 특출함은 그 사람의 재능과 분리될 수 없고, 풍경과 취미상의 강건함과 유약함은 그 사람의 기질과 구별될 수 없으며, 작품안에 인용된 것과 진술된 것의 깊고 얕음은 그 사람의 학식과 별개일 수 없고, 작품의 체제상의 방정하고 우아함과 비속함은 그 사람의 습관과 상반될수 없다. 그렇듯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개성에 따라 창작을 하는 것이기에 작품들의 독특함은 마치 사람의 얼굴모양이 저마다 다른 것과도 같다>>(문심조룡 389쪽. )

제2층차의 시구들은 왜놈들 말이였지만 <<뜬 구름처럼 변화가 무쌍한>> 표현으로써 청마의 <<수>>가 <<파도처럼 다양하게 로정>>되게 한것이다. 이 층차는 청마유치환시인의 시적재능이 발휘된것으로서 시의 <<독특함과 특출함>>을 획득시키며 시인 풍격의 <<강건함>>을 현시하고 있으며, 학식이 있고 <<체제가 방정>>하면서도 신랄하다는 결론을 우리들에게 시사한다. 여기서 청마는 풍자와 조소로, 독은 독으로 친다는 수법으로 한 층차를 구사함으로써 시의 기이함과 신선도를 높이고 있다겠다.


4.<수>의 세 번째 층차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던 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이것이 세 번째 층차이다. 이 마지막 층차를 따져보면 두가지 내용으로 나뉘여져 있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여기까지 하나의 내용이라고 하겠다. 풍요로운 거리가 아닌 각박한 거리를 지나가면서 시적 자아는 생명의 위험함과 그 결의를 깨닫는다.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한 넋을 청마는 눈을 감으라고 한다. 눈을 뜨고 죽은 자를 눈감기는 일은 사랑이 없으면 할수 있는 일이 아니고 친근하지 못하거나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아니 하는 일이다. 눈을 감으란것은 효수된 자에 대한 련민과 동정과 사랑을 보여주는것이며, 효수된 자에 대한 명복을 비는 주정토로이며 호소이다. 여기서 시인의 애증이 더욱 분명하고도 명랑하게 드러난다.


아아 불모한 사변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청마는 아아 탄식하면서 <<불모한 사변의 풍경>>이라고 현실을 질타하고 있다. 불모한 사변의 풍경, 이 시구는 전반시의 핵심이고 주제이며 당년의 사회에 대한 청마의 개괄이며 효수에 대한 청마의 태도이다. 청마는 도리도 시비도 통하지 않는 불모지라고 당년을 못밖는다. 그러니 어찌 12월이 온들 눈이 내릴 수 있었으랴.

하늘이여 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시인이 웨친 마지막 시구이다, 이 시구는 청마의 마지막 바람을 보여준다. <<불모한 사변의 풍경>>속에서는 그어떤 구도도 구할수 없으므로 시인은 자기의 소원을 하늘에 대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눈이라도 함빡 >> 내려달라고 빈다. 눈이 내리면 겨울도 겨울 다와지고, 12월도 12월 다와지고, 북만도 북만 다와지고, 가성네거리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될것이다. 눈이 내리면 그 <<비적>>의 머리도 눈에 파묻치게 되어 다른것으로도 보일수 있는것이고, 눈이 내리는 틈을 타서 누군가가 효수를 없애버릴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이 마지막 한마디 시구는 말그대로 천만냥이 싸다. 효수당한 자에 대한 청마의 련민과 사랑의 감정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각인시켰다고 하겠다.
<<하늘이여>> 하는 호곡소리를 가슴에 담노라면 <<청마유치환의 북만기행시>>를 평할 때 서려명 비평가가 청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또다시 떠오른다.
유치환은 1940년대 초기의 할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바가 있다. <<암울한 계절의 이 하늘 아래를 나는 그저 집시처럼 방황하여 지향할 곳을 몰랐던 것입니다.>>(<<청마유치환의 북만기행시>> 6쪽)
<<이때 내자신을 스스로가 주체 못하는 밑 없는 절망속에서 아프게도 나를 불러 손짓하고 또한 내 스스로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망향의 먼 향수는 어쩌면 현실의 나의 고향이나 조국에 대한 그것이 아니라 령혼이 돌아가 의지할 그러한 정신의 안주지가 아니였던지 모릅니다.>>(동상 10쪽)
청마유치환의 이런 말씀들은 당년의 그의 심정의 고백으로써 청마는 극한의 상황에서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무주의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오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부정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월인데도 눈이 오지 않는 북만, 효수를 하고있는 가성네거리, 식민지유설로 백성을 유린하는 세상, 량심이 있는 지성인이라면 그 누구인들 허무속에서 몸부림치지 않으랴. 일제치하의 백색공포속에서 허무를 초극할수 없는 청마, 그래서 <<하늘이여>>를 부르짖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청마가 아니였으랴. 시인은 허무에 빠졌을 때 자연스럽게 고독하게 되고 증오하게 되며 분노하게 되고 심장으로 부르짖게 된다. 그 부르짖음을 가슴속으로부터 토해놓은 것이 시 <<수>>가 아니랴!


나오는 말


<<시적언어는 기능에 의해서만 영속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기능이란 속성이 아니라, 어떤 주어진 현상의 속성들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 백번지당한 말은 얀 무카로브스키가 <<시적언어란 무엇인가>>에서 한 말이다. (<시의 리해> 44쪽) 시적언어의 기능으로 하여 시언어는 일상어와 다르다. 시언어는 일상어보다 다른 내포를 가지고 있다. 즉 시인은 일상어로 시를 쓰지만 일상어속에다 다른 함의를 부여하게 되는것이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하여 시인은 언어를 재구성함으로써 다른 함의를 부여하여 언어를 다시 깨우고 새롭게 하며 그로인하여 시의 새로운 창의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시인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게 되고 언어의 연금사라고 하게 된다.
청마의 시 <<수>>를 읽을 때 우리는 청마가 쓴 시어의 새로운 함의에 모름지기 류의하여야 한다. <<비적>>이나 <<무뢰한 넋>>과 같은 반어에 대하여 잘 리해하여야 이 시의 진실한 맛을 볼수있다.
시의 이미지는 어떤 사실을 알려주려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상적일지라도 ) 그런 이미지를 통하여 새로운 깨침을 주려는데 있다. 우리 눈앞으로 흘러가는 시의 이미지 밑바닥에는 언제나 새로운 함의가 용해되여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은 직설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사물에 의탁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통하여 새로운 감수를 받는것이 시의 기쁨인것이다. 청마의 시에서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나 <<불모한 사변의 풍경>>같은 이미지들은 말밖에 말이 있는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에 대한 음미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청마의 시 <<수>>를 헛 읽게 되며 시의 진미를 감수할 수 없게 될것이다.
독을 독으로 치는 청마의 표현력은 뛰여난 표현력이다. 이 장치를 수용한 청마의 스찔에 대하여 심각하고도 올바른 리해를 가져와야지 텍스트에 나타난 그대로 수용한다면 오독을 초래하게 된다. 수박 겉 핥기를 하지 말고 수박을 깨여서 달콤하고 시원한 맛을 보아야지 타매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총적으로 청마의 시 <<수>>는 친일로 표현된 시인 것이 아니라 일제침략자에 대한 반발이며 공소이며 단죄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수>>는 친일시가 아니라 <<수>>는 반일 수작秀作이다.

문화시대 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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