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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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시(다선시)에 대한 탐색
2013년 07월 10일 09시 05분  조회:2331  추천:1  작성자: 최룡관
하이퍼시(다선시)에 대한 탐색

최룡관



들어가는 말

필자의 저서 [이미지시창작론]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여 있다.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 방법은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필자는 이 일곱가지 방법을 치중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 일곱가지 방법은 어떤 근거를 잡으면서 한 방법이다. 그러나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는것들이 있다. 이미지란 현실을 초월하여 쓰는것이 중점의 하나인데 무슨 근거가 필요한가? 이 말은 맞는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것은 지적인 지위를 삭감해버리는것으로서 우리들이 연구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당대 영미 초현실주의자들이 이에 속한다고 생각 된다. 그들은 환상적이고 몽상적인 이미지를 제작해내고 파편문체를 많이 쓰는데 필자는 그런 이미지에 대한 연구가 너무 천박하여 여기에서 피력하지 못하고 과제로 남기면서 독자들에게 량해를 구하는 바이다.]

[이미지시창작론]을 쓰기 시작해부터10년이 지난후인 2007 년에 필자가 한 말이다. 그로부터 어느덧 또 여러해가 지난 2013년이 돌아왔다. 오늘은 2013년 2월 20. 오늘부터 [독자들에게 량해를 구하던것을] 나름대로 풀어보려고 펜을 들었다. 그답을 한국의 하이퍼시클럽시인들과 그들의 시에 대한 글에서 찾게 되였고 그 원천적인 근거를 조지P 란도의 [하이퍼텍스트]에서 찾아볼것 같다. 2011년에 한국의 김규화와 심상운이 편찬출간한 시집 [하이퍼시]시집과 심상운시론 및 문덕수의 많은 시론들이 해답을 주었다고 생각되여 나는 컴퓨터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게 되였다.

그 고리는 다선

한국의 하이퍼시클럽에는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들이 [하이퍼시] 시집을 묶어낸데는 20명시인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들로는 강영은, 고종목, 김규화, 김금아, 김기덕, 김영찬, 김은자, 박이정, 손해일, 송시월, 신규호, 신진, 심상운, 안광태, 위상진, 이선, 이솔, 정연덕, 조명제, 최진영이다. 한국에 시인이 만명이라고 하는데 이 20명시인들은 사막속에 있는 한알의 모래알에 불과할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혁신은 언제나 다수가 하는 일이 아니다. 언제나 한줌도 안되는 혁신자, 개혁자들이 먼저 시작을 하게 되는것이다. 지금 연변도 그렇다. 다선시를 하는 시인들이 열명정도이다. 비례를 따지면 한국보다 많지만 한국보다 우리가 더 어려운것이다. 한국은 그래도 시문학이란 잡지를 거점으로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시잡지가 없는 연고로 다선시를 연구하고 창작하는 시인들이 독안에 갇겨있다고 할수 있겠다. 갇겨있고싶어서가 아니라 여러가지 문화여건이 따라가지 못하고있다.

다선시의 개념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 다선시라는 언어는 우리로 말하면 너무 생소하다고 할수 있겠다. 하지만 확실히 다선시가 존재하였으며 존재하고 있다. 다선시라는 말은 최근에 한국의 시인이며 리론가인 심상운이 내놓은것으로 알고 있다.

다선시는 지금 여러가지 명제로 해석되고 있는 같다. 하이퍼시라고도 하고 디지털시라고도 한다. 다선이란 쉬운 말로 하면 선이 여러개란 말이 되겠다. 한수의 시에서 한가지 이미지를 둘러싸고 쓰는 재래종의 시인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여러가지로 나타난다는 말이 되겠다. 필자가 알건대는 다선시를 제일 왕성하게 쓴 시인은 프랑스의 S.J 페르스인것 같다. 물론 보들레르나. 랭보나 몰리에르나 발레리나 엘리아르와 같은 시인들한테서 다선적인 시들이 나왔지만 다선으로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은 생종.페르스가(1960년노벨문학상) 아닌가 싶다. 독일 류학을 하고 외교관 시험에 합격되여 북경, 조선, 외몽골 등 나라에서 사업한적이 있는 외교관 생종페르스는 전문적으로 다선시를 창작한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는) 독일의 후고. 프리드리히 말씀을 들어보면 오늘의 다선시를 당년의 파편문체시로 해석되는 같다. 필자는 다선시=파편문체시라고 생각한다. 2011년 수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그의 시도 파편문체로 된 다선시였다. 그러고 보니 21세기 시의 시대는 다선시 시대가 도래한것이 아닐가 하고 필자는 생각해본다.
먼저 생종. 페르스의 시 [비]의 전문을 보기로 하자.



생종페르스

비의 용수(榕树)는 거리에 뿌리 내리고
때이른 호수가의 탁한 물속의 벌레들,
산호의 혼인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물로 싸우는 투우사와 같이 벌거벗은 ‘사고’

공중의 뜰에서
헝클어진 녀인의 머리카락을 빗긴다.
파도의 웨침에 주제의 절박함을 노래하라 시여,
파도의 출렁거림에 도망하는 주제를 노래하라 시여
예언하는 처녀들의 허리에 지나친 애욕

밤에 황갈색의 늪에서 부화하는 금빛의 알
오 기만이여! 이같은 꿈의 기슭에도
나의 정돈된 잠자리
그곳에서 음란한 장미는 시로 선명히 자라
바퀴되여 돌기 시작한다.

나의 비웃음인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것은
짐승의 고기맛에 김 뿜는 땅과 처녀수밑의 과부의 점토,
잠 못 이룬 내 사내의 발에 다져진 땅이니
포도주처럼 가까이 가 냄새를 맡을 때
그 땅은 진정 기억의 상실을 시인할것인가?

주여, 내 비웃음의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것은
층을 이룬 바다의 겹쳐진 부분의 높은 모래언덕의
응답과 같은, 지상에서 표현되는 꿈,
여기 이곳에 있는 땅은 모두 씁쓸한 땅
새로 태여남의 시간,
그리고
알수 없는 모음의 방문을 받는 나의 령혼.

생종페르스의 [비]를 읽노라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수 없다. 시행마다 거이 모두가 이질적인 이미지로 라렬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련계되는것이 아니라 서로 단절되여 있고, 그런 단절들이 모여서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어떠한 통일적인 해석을 요구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것이다. 프랑스의 외교관이였지만 시에서 그가 추구한것은 어떤 윤리도, 사상도, 철학도 아니다. 그저 그의 령혼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집합하여 한수의 시로 만들었을뿐이다. 한국 태학당에서 출판한 생종페르스의 시집은 [이국의 녀인에게 바치는 시]라는 제목으로 되였는데 모든 시가 다 이런 파편문체의 시 즉 다선시다. [감각적 비 실재성이란 말은 생종페르스 시에도 유용한 말이다. 그의 시를 내용상으로 리해하기란 거이 불가능하다] 하고 독일의 석학 후고 프리드리히는 론하고 있다.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생소한 이미지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반짝이는 이미지들이 장엄한 소리를 내면서 독자를 아연해지게 한다. 그것은 상상력에 대한 자극이다. 이미지들은 조밀하게 배렬되여 어느 한 이미지도 부정할수도 없다. 령혼속에서 끓고 있는 이미지들은 낯설고도 환각 적이여서 이방의 나라에서 온 사물들의 움직임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아래에 201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를 한수 보기로 하자

기상도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월 바다가 신기루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슴프레한 호박빛이 마을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위의
대기중에 그려진 상형문자다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기상도] 전문이다. 기상도란 날씨를 알려주는 도해라고 해석할수 있다. 그런데 날씨를 알려준다는것이 오늘은 몇도며 바람이 몇급이며 구름이 어쩌며 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비가 오는가 눈이 오는가 하는 말따위도 물론 없다. 기상도를 보면서 10월의 바다, 요트경기, 호박빛, 개짓는 소리, 정원의 과일나무들을 쓰고 있다. 사실 이러한 사실들은 또 너무 낯선 사물들로 변형되고 있다겠다. 10월의 바다는 신기루등지느러미로, 요트경기는 백색현기증으로, 호박빛은 음향으로 , 개짓는 소리는 상형문자로, 과일은 나무를 바보로 만드는것으로 변형되고 있다. 각련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데 이미지들마다 어떤 련계성도 보이지 않는다. 각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각자의 독존이 집합되여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한국의 조향의 시 [바다의 층계]도 이러하다.

바다의 층계

조향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 뽄 다리야>>
<<마주르카>>
<<디젤엔징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手话机
녀인의 허벅지
낚지 까만 눈동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웅에 손을 흔드는 하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끝에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바다의 층계>>의 전문이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단절되여 있고 아무련 련계성도 없다.. 우리는 아주 괴상하고 기이한 그림앞에 서있게 된다. 여러가지 기이하고 괴상한 사물들이 모여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다겠다. 여기서 그 어떤 사상을 추구한다는것은 거이 불가능하다. 시인의 의식의 뛰여다니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을뿐이라겠다. 의식은 그 어떤 장애도 받지 않고 한순간에 자유자재로 번개처럼 하늘을 가를수도 있고 산처럼 솟을수도 있고 물처럼 흐를수도 있고 천년만년을 거스를수도 있고 고금중외를 빛의 속도보다도 더 멀리 날아다닐수도 있는것이다. 조향의 <<바다의 층계>>가 바로 이런한 시라고 볼수 있을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의 생종페르스의 <<비>>나,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의 <<기상도>> 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시라고 볼수 있겠다.

이러한 시를 필자는 후고프리드리히 말로 하면 파편문체시라고 할수 있고 심상운의 말대로 하면 다선시라고 할수 있겠다. 모두어 말하면 시에 등장하는 사물이 하나인것이 아니라 여러가지이다. 이 여러 가지 사물들은 다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미지들은 각각 홀로걷기를 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한수의 시에 하나의 주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주제가 동시에 병존하고, 여러가지 주요 인물(혹은 사물)들이 활동한다고 하겠다. 뒤의 이미지는 앞의 이미지와 아무런 련계성도 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미지들은 물결이 흘러가는것처럼 흘러간다고 하겠다. 료리로 말한다면 순수한 닭고기로만 된 료리인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고기와 여러가지 채소로 된 잡탕료리라 하겠다. 과거에 우리는 이러한것을 구성이 흩어졌소 째이지 못했소 이런 시가 어떻게 시로 되오 하면서 나무리였다. 그런데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할 시가 오늘은 탐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를 심상운 시인과 김규화시인은 [하이퍼시발간사]에서 이렇게 긍정하고 있다.

[한국현대시를 오래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벗어나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서술을 객관적이미지로, 정적이미지를 동적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개혁성(改革性)이 들어있다.]

두 시인은 재래의 현대시와 하이퍼시(다선시)와의 다른점 6가지를 론하였는데 우리가 심사숙고할만한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할수 있다. 이 여섯가지 구별을 잘 인식하고 리해하는것은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에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오늘의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되는가를 가리켜준다고 생각된다.

다선구조시를 일종 하이퍼시라고도 하는데 하이퍼시란 어떤것인가? 이에 대한 문덕수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면 꽤도가 올것같다.
문덕수는 [하이퍼(hyper)란 말은 ‘과도(过渡)한’, ‘과다(过多)한’, ‘초월하여’, ‘넘어서’, ‘초(超)…’, ‘3차원보다 높은’ 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 일종의 련결어]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해석하고있다.

[하이퍼는 본의의 세계에서 유의의 세계로 뛰여넘는(초월해서), 현실세계의 상식을 초과할 때 일컫는 일종의 하이퍼적특징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 하는것은 시의 본질적구조자체를 부정하는것과 같습니다… 하이퍼시는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적 균열을 초월하여 ‘’상상세계’’와 연결하는 작시에서 얻어진것입니다… 하이퍼시는 초월세계와 연속하려고 하는 정신적, 언어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시 209쪽)

문덕수는 하이퍼시에서의 현실과 초월의 관계를 극명하게 밝히면서 하이 퍼시에 대한 사유방식은 시의 본질적구조에서 나온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특성은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격 균열을 초월하는것이며 현실과 초월세계를 연속하는것이라고 하였다. 재래의 현대시는 이렇지 못하였다. 유추되는 사물이 꼭 어떤 련계성이 있어야 하고 한수의 시는 하나의 단선구조로 되여야 하였다. 시력사를 보면 우리 시가 백여년을 (아니 수백년동안이래도 과언이 아닐것임) 단선구조를 추구하여 왔다고 할수 있다. 오늘 21세기 디지털시대를 맞으면서 우리 시에도 그것을 타파하라는 나팔소리가 울리였다. 나팔소리는 그렇듯 우렁차다. 이는 시에서의 신생사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신생사물은 력사의 근본 흐름을 대표하는것으로서 낡은것은 그앞에서 점차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게 될것이다.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시]에서 조향의 [바다의 층계]와 문덕수의 [마릴린 몬로] 등 시를 례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론리적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가진다…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게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게에서 형의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게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결합방식은 김춘수의 ‘무의미시의 기법’과는 다른 ‘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할수있다](하이퍼시224-225쪽) 심상운은 하이퍼시를 아주 쉽게 [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이라고 명명하고있다.
초월성과 의식의 건너뛰기가 하이퍼시의 핵심이라고 해도 무방할것이다.
현대시와 다선시는 어떤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는가를 살펴보는것은 다선시를 리해하는데 큰 도움으로 될것이다.


문둥이

서정주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시 [문둥이]에서는 전반시에 하나의 사물의 이미지에 대한 서술만 있는것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시는 문둥이가 어쩌는가만 쓰고있는것이다

아마 서정주시의 다른 시들도 이렇게 한가지 사물을 둘러싸고 씌여져있는 같다. 하지만 오늘의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는 이와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문둥이가 아주 짧은 시니까 [하이퍼시]시집에서 짧은 시 한수를 보자

북소리

김은자

Scene# 8

고무줄놀이를 한다
엄마는 장사 나가고
저녁이 줄을 뛰여넘는다
나는 엄마를 기다린다
지구를 한바퀴쯤 돌면
아빠가 나올가

이 시는 [문둥이]보다 한줄이 더 많다. 하지만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단선이 아니라 다선이다. 소제목부터 야릇하다. 영어에다 우물정자같은 글이 아닌 부호에다 아라비아수자 8을 조합하여 쓴것이 이색적이 아니라 할수 없다. 시가 시작되자 북소리가 고무줄놀이를 한다는 변형부터 창의적이다. 청각을 시각화한 공감각의 응용이 이채롭다. 그아래에 엄마가 나오고 저녁이 나오고 지구가 나오고 아빠가 나온다. 시의 행마다 성질이 다른 사물들이 나타난다. 이 성질이 다른 사물들 자체가 련계성보다도 분리성이 강하다. 시에서 이런 이미지들의 횡적배렬을 파편문체라고 할것이며 다선시라고 하지 않을가 생각된다. 이질적인 사물들의 이미지라렬이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이미지와 이미지사이에는 일상적인 사유로는 넘지 못할 벽이 장용하고 있다겠다. 북소리가 줄뛰기를 한다는것은 청각적이미지를 시각적이미지로의 전환이 이색적 이다. 그다음은 엄마는 장사 나가고 했으니 뒤에 엄마에 대한 해설이 있으려니 했는데 저녁이 줄뛰기를 한다고 한다. 엉뚱하다. 그담 엄마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다음에 나오는것은 지구를 한바퀴도는 일이나오고 기다
리는 엄마대신 또 아빠가 나온다. 시를 통하여 어느 하나도 [나]라는 사람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것이 없다. 좌절에 좌절을 거듭하다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시라고 할가.
시의 구성이 여러가지 색갈의 쪽을 묶어서 하나의 담요를 만든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쪽들의 색갈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현현이라는것이다.

다선시의 합리성

다선시가 왜 오늘에 우리의 훈민정흠시단에 나타나게 되는가를 필자는 생각해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아래와 같은 원인이 아닐가 생각한다
  1. 다선시는 오늘의 시대에 부응하는 시적구조가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해본 다. 지금은 생산이 다국적인것이 많다. 자동차공장하면 여러나라에서 부속을 끌여들여 하나의 차를 만드는가 하면 한나라에서 생산하는것도 여러지구에서 부속품들을 모아서 조립하는 경우가 있는같다. 유리는 어디서 생산하고 바퀴는 어디서 생산하고 엔징은 어디서 생산하고 모형은 어디서 생산하고 등등. 아마 어느 자동차공장이 한공장에서 모든 부품을 생산하여 차를 만드는 공장은 아마 없을것이다. 어느 한 나라에 어떤 큰 일이 벌어져도 영향이 그 나라에만 미치는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반응을 일으키거나 세계적인 참여를 초래하게 되는경우가 많다. 이런 이미에서 한시인이 시를 쓰자면 여러가지 인소들이 작동 하게 되는것이고 여러가지 사물과 사건들이 현실을 초월하여 상상도 되고 환상도 되는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의 바탕이 되여서 그런 같다.
  2.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다선적이다. 한사람이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는것이다. 누구와 대화하면서 그가 아닌 어떤 사람의 어떤 모습이나 일을 생각할수도 있고, 미국의 뉴욕이나 오스트라리아의 사자, 중국의 고궁…. 이러한것들을 거이 동시에 생각할수도 있고 련속적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떠오른 사물들은 실제상 아무런 련계도 없고 성질이 완전히 이질적인것들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다각적이고 다시점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이 오늘의 다선시에
사유의 기교를 주지 않을가고 생각된다.
  1. 자연도 다종적으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다. 한마을이 있다고 하자. 거기에 사람이 있고 물이 있고 나무가 있고 흙이나 돌이 있고 또 도야지가 있고 닭이 있고 개가 있고 소가 있고,,,,,,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들을 종합하여 버들골이요 남평이요 도문이요 하고 말하게 된다. 손바닥만큼 자그마한 땅의 구조도 그렇게 된다. 거기엔 흙이 있고 풀이나 나무가 있고 또 귀뚜라미나 개미같은것, 지렁이, 혹시 토끼도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사물을 통칭해서 어느한 자그마한 곳이 어떤 개념으로 존재하게 되는것이다. 다선시란 이런 자연의 특성과 무관한것이라고 말할수 없을것 이라고 생각할수 없게 된다.
  2. 인간의 문화는 또한 다층차적이다. 연길하면 고층건물이 즐비한 거리가 있고 거리에선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다니고 여러가지 백화나 가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게 된다. 백화에 들어가면 적어도 수천종에 달하는 여러가지 상품들이 있는데 이러한 상품들은 다 성질도 다르고 용처도 다르다는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진렬해 놓은 과자와 옷들, 전기제품들, 악세사리들, 시계들… 다 상품이라는 이름으로도는 통용으로 명명하겠지만 그 한종한종의 상품들의 용도와 성격들은 각각 다른것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선시는 현실문화에 부응하는것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3.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눈, 귀, 코, 입, 귀, 눈섭 등이 보인다. 이 눈귀코입눈섭은 다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모임이라고 할수 있으며 이것들이 모여 얼굴이라는 명명을 받게 된다. 어느 한가지를 가지고는 얼굴이라는 이름을 받지 못할것이다. 한수의 시에도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눈섭이 있게 되는것이 오늘의 다선시라고 생각하게 되는것이 아닐가. 얼굴의 오관은 겉으로는 살에 의하여 련결되였고 안으로는 뼈에 의하여 련결되였다. 살에 의하여 련결되였다는것은 누구나 다 직감할수 있지만 뼈에 의하여 련결되였다는것은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것, 보아내는 사람과 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다선시의 이미지들이 어떤 련관성이 있는가를 보아내는 사람과 보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마 따로 있을것 같다. 실제는 이러한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사물은 모두 각자의 개성이 있지만 모두 이 세상에서 살아 간다는것만으로 벌써 련계되여 있는것이다. 더 나아가 말한다면 광활한 우주속에 있는것이며 한시인의 령혼속에서 산생되는 상상이나 환상일것이다. 사유하는 방법, 추구하는 예술기교가 다를뿐이라고 해야할것으로 알고있다.
  4. 오늘의 시대는 디지털시대라고 하는데 이 디지털시대는 컴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컴은 인간의 사유를 초월한 마술을 부리고있다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것이다. 쑤뾰로 툭 찍으면 술이 나오기도 하고 노루가 나오기도 하고 나비가 나오기도 하고 삼국연회소설이 나오기도 하고 북경이 나오기도 하고 미국이 나오기도 하고 단마르크가 나오기도 한다. 그외에도 현실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상황이 그것도 미세한 상황까지 다 드러낸다. 이렇게 바뀌는 시간은 정말 눈깜박할사이이다. 툭찍으면 변하니까. 이러한 컴은 우리에게 다시각, 다시점 사유를 부여한다고 하겠다. 이것도 다선시의 한개 기초가 되지 않을가

나오는 말

21세기는 21세기의 문학이 있어야 하고 시가 있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다선시가 21세기 시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 조지P란도와 한국의 다선시주창자들의 어록이나 일부문장들을 중요한 참고서로 절록해 본다.




《하이퍼텍스트3.0>>의 말씀
조지p 란도

하이퍼텍스트와 문학리론에 관한 글을 쓴 [자크데리다. 롤랑 바르트, 데오도오 넬슨 안드리에스 반담을 가리킴.] 많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 네명은 중심, 주변, 위계구조와 선형성에 대한 생각에 바탕을 둔 개념체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중선형성, 노드, 링크, 네트워크중의 하나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사고에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런 패러다임이다[2쪽]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리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많은 네트워크가 상호작용 하며 그중 하나가 다른것보다 우위에 서지 못한다. 이 텍스트는 기의의 축조물이 아니라 기표의 은하계이다. 이것은 시작이 없으며 되돌아갈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출입구를 통해 이 텍스트에 접근할수 있으며, 그 경로중 어떤것도 주된 출입구라고 강변할수 없다.[3쪽]

하이퍼텍스트[넬슨이 1960년도에 만들어낸 말]라고 할때 나는 비연속적인 쓰기를 의미한다. 즉 분기점이 있어서 독자가 선택할수 있도록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링크들로 련결된 일군의 텍스트덩어리이다. [4쪽]

하이퍼텍스트는 비선형적, 아니 좀더 적절하게는, 다중선형적 혹은 다중순차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동상]

사람의 마음은 … 련상에 따라 움직인다. 한가지 생각을 부여잡게 되면 련상을 통해 제시되는 다음 생각을 바로 붙잡게 된다. 이때 뇌세포가 수행한 흔적들의 복잡한 거미줄구조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16쪽]

하이퍼텍스트는 현대문학과 기호학리론의 일부 주요 론점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갖고있다. 특히 탈중심성에 대한 데리다의 강조, 읽기텍스트와 쓰기텍스트라는 바르트의 개념이 특히 그렇다. 실제로 하이퍼텍스트는 바르트와 데리다의 두 개념과 당혹스러울 정도로 유사한 문학적형상들을 창조해냈다. 그리곤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낸 문학적 형상물은 그 개념들, 통찰과 력사적관련[혹은 새겨넣기]의 흥미로운 결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80쪽]

하이퍼텍스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용과 분리가능성에 대한 암시는 데리다가 다음과 같이 추가할 때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주어진 문맥과의 관계를 끊을수 있으며, 전적으로 제한이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문맥을 무한대로 만들어낼수 있다[82쪽]

바흐친은 다의적문학에 대해 ”한가지 감각으로 구성한뒤 다른 감각을 객체로 끼워넣는 방식으로 구성된것이 아니라 여러감각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한다 감각들중 어떤것들도 다른 감각의 객체가 되는 일은 없다.” [86쪽]

하이퍼텍스트는 무제한으로 재중심화할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 시스템에서 일시적인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는것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독자가 된다. 하이퍼텍스트의 기본적인 특징의 하나는
조직의 중심축이 따로 없이 링크로 련결된 텍스트 몸체들로 구성되여 있다는 점이다. [87쪽]

데리다는 “민족학은 탈중심이 생기는 순간에만 과학으로 탄생할수 있다” [89쪽]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련결접속되여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91쪽]

하이퍼텍스트의 읽기와 쓰기의 하나는 –인쇄본이 보관된 도서관을 탐구하는 것처럼- 아무곳에서나 시작해 서로 련결할수 있다는 점이다.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처럼 “각 고원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읽어도 상관 없으며, 이들은 다른 고원들과 서로 련결되여 있다.”
이런 특징적인 조직 [혹은 그것의 결여]은 리좀이 기본적으로 위계질서와 반대되는 특징, 즉 들뢰즈와 가타르가 나무에서 발견했던 구조적형태로부터 유래된것이다.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련계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특질들과 련계되는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다른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상태를 작동시킨다.” [92쪽]

하이퍼텍스트는 위계보다는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어떤것을 구현한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는 가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정보를 결합하며, 또 가끔은 우리가 독립된 인쇄텍스트와 장르, 형태라고 리해하고 있는것을 위반하면서 “어떤 지점을 다른 지점과 련결한다”
… 다의성은 리좀적이며, 그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수목적인 사이비다의성을 드러낸다. 객체에서 주측역활을 하거나 , 주체를 나눌수 있는 독립성은 없다”하는 들뢰즈, 가타리의 론점에서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따라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려되는 하이퍼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리좀은 어떤 구조적 혹은 발생적모델에 순종적이지 않다. 계보학축이나 심층구조라는 생각에는 낯선 존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설명하듯이 리좀은 “지도적이지 사본이 아니다” 【94쪽】

리좀을 담론의 한 모델로 묘사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의미작용이 없는 단절의 원리 즉 근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하며 불련속적인 경향을 불러온다….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은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성장하고 넘친다” [95-96쪽]

푸코는 사물의 질서에세 자신의 프로젝트는 동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은 “찬양받을 론쟁”을 거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시적인 그리고 외견상으로 모순된 의견이 상호작용할수 있도록 하는 사고의 일반적인 시스템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논쟁이나 문제를 가능하게 만들고 , 지식의 력사성을 떠맡도록하는 조건을 규정하는것은 바로 이 시스템이다” [99쪽]

전자컴퓨팅, 특히 하이퍼텍스트와 과거 30,40년의 문학리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힐리스 밀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 관계는… 다중적이며, 비선형적, 비인과적, 비 변증법적이고 몹시 과잉결정적이다. 그것은 관계를 결정하는 대부 분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는 맞지 않는다”[101쪽]

하이퍼텍스트는 두가지 방식으로 텍스트를 조각내고 , 흩어놓고 원자화한다. 첫째, 인쇄물의 선형성을 제거함으로써 개별구절을 단일한 순서로 배치해야 한다는 원칙
-즉 련속성-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해서 텍스트를 혼란상태로 바꿔놓는것이다. 둘째,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단일한 텍스트라는 개념을 파괴한다.
조각은 첫번째 형태를 만들어내는 부품과 관련하여 전체 텍스트를 고려하며, 변형적읽기와의 련관성상에서 그것을 고려하게 되는것이다. [152쪽]

텍스트를 설정하는 방식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텍스트 다형태성은 텍스트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있으며, 변화하고 , 역동적이며, 열린 형태를 갖게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167쪽]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그리고 경험]은 선형성을 암시한다. 선형성의 주된 지배를 받지 않는 텍스트성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이퍼텍스트성에는 선형성과 련속성이란것이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다중련속성을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엔 여러개의 시작과 끝을 갖고있다는것이 앞의 질문에 대한 한가지 대답이 될것이다.[169쪽]

간단하게 말해서 시작은 일반적으로 결과로 나타나는 의도라는 의미를 포함하는것이다. [171쪽]

마지막 단어라는것은 없다. 마지막판본, 마지막 생각도 없다. 항상 새로운 관념과 아이디어, 재해석이 있다. … 바흐친에게 전체는 종결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관계이다. 따라서 전체는 종결지을수도 무시할수도 없다. 전체가 실현될 때 개념상으로는 벌써 변화를 면할수 없다…. 하이퍼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용어들로 규정하고 묘사하기 어렵다. [172-173쪽]

글쓰기는 결코 존재하기를 멈춰서서는 안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즉 하나의
부속물, 사건, 그리고 잉여로 말이다. …. 우리는 플라톤적인 텍스트, 즉 그자체로 닫혀있으며 내부와 외부를 갖고있는 완성된 테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텍스트라고 불리곤 했던것, 한때 이 단어가 동일시한다고 생각했던것-즉 작품의 시작과 끝, 한가지 총체의 통일성, 제목, 여백, 쪽지표시, 기본구성의 바깥에 있는 참고문헌령역 등- 의 지속적인 경계를 형성하는 모든 한계를 무력화 한다.[174-175쪽]

중심성이란것은 오로지 순간적으로 존재한다. [189쪽]

하이퍼텍스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저자를 재구성-재작성-한다 [190쪽]

상징으로서의 유추는 그것이 뛰여넘는 경계로부터 힘을 얻는다. 경계가 없다면 링크에 의해 만들어진 링크들은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것이다. … 내가 빈약하거나 비효률적이라고 한것은 그것들이 명백하게 선형적인 텍스트에 멋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308쪽]

(소설에서) 개별 렉시아((돌진, 급격한 증가)는 독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부가적인 링크들을 따라가길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하이퍼텍스트는 여전히 텍스트이며, 글쓰기이다. 우리는 좋은 글쓰기의 많은 장점들과 링크가 있는 글쓰기를 구분한는것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말로 하면 뛰여난 하이퍼텍스트는 링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이다. 링크를 둘러싸고 있는 텍스트가 또한 문제로 된다. 왜냐하면 개별 렉시아안의 글쓰기와 이미지의 품질이 하이퍼텍스트의품질에 핵심적인 역활을 하기때문이다. 특정 렉시아의 콘텐츠(내용, 목록)에 만족한 독자가 그 렉시아에서 다른 렉시아로 향하는 링크를 따라가고싶어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작가든, 아니면 단순한 텍스트 작가든, 작가라면 누구나 직면하는 문제는 단순하게 정의하면 어떻게 하면 독자를 계속 읽게 만들것이냐로 요약할수 있다.[309쪽]

하이퍼텍스트시를 써왔던 월리엄 디키는 다음과 같은것들이 하이퍼텍스트시의 훌류안, 혹은 유용한 특징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하이퍼텍스트시는 그것의 부분, 연, 이미지 중 어떤것으로부터 시작한 뒤 시의 다른 부분이 그것을 이어갈수 있을것이다. 이런 조직체계는 어떤 한 카드에 기술되는 시의 부분은 그 시에 포함된 다른 어떤 진술의 뒤나 앞에 나올 때도 시적의미를 생성할수 있도록 충분히 독립적인 진술이 되여야 한다 ” [340쪽]

시의 목적은 텍스트의 조건을 보여주는것이다. 시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의 텍스트적활동을 자신의 기본주제로 삼는것이다. …시는 또한 하이퍼텍스트 웹내에서 가장 예기치 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399-400쪽]

아래에 <<하이퍼텍스트3.0>>에서 인용한 하이퍼시 한수

영웅의 얼굴
조슈아 래파포트

늙은 바이나모이네넨이 노래부른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지구가 흔들리며
구리산이 떨어진다
억센 옥석들이 덜커덕 굴러가며
절벽이 둘로 갈라지고
돌들이 해변을 철썩 때린다
그는 젊은 요우카하이넨을 노래한다
그의 칼라활에 묘목을 얹고
말의 멍에엔 버드나무 관목
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그의 금테 두른 썰매를 노래하며
바닷가에 있는 갈대에
구슬로 매듭지은 그의 채찍을 노래한다

바이나모이넨; 영원한 현자라는 뜻, 칼레라바의 주인공
요우카하이넨; 바이나모이넨의 라이벌. 둘은 노래 경연을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면 녀동생을 바이나모이겐에게 주기로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고 그의 녀동생이 자살을 택하자 요우카하이넨은 바이나모이넨을 죽이려고 하나 성공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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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찌부튼 소리
날자:2013-08-01 05:31:26
이미지시는 정신환자들의 생각을 써낸것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멋에 좋아서 자위를 하는 암컷들이나 수컷들의 행위같다는 견해도 들구요. 이런시가 한때 우리문단을 일색으로 만들었으니 지금 글쟁이들은 밥먹고 죽벌이도 못하는겁니다. 이런 시와 소설로하여 독자들을 모두 잃지않았습니까? 작가라는 명색을 띤 사람들마저도 문학잡지를 보지않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인상주의문학을 반대하는건 아닙니다. 그것 역시 문학예술로서 즐기는 독자들이 있기에 말입니다. 한때 인상주의 창작방법으로 전반 문단을 일색으로 만들고 통치하였기에 지금 우리 문단은 독자들을 잃은 비참한 문단이 된겁니다. 연변문단을 번영시키려면 창작에서 한곬으로만 기울어지는 경향을 극복하고 각가지 창작방법들이 백화처럼 만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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