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작가들 역시 형태의 문제를 알고 있었겠지만, 론쟁은 글쓰기들의 다양성 및 의미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언어의 구조와는 더욱 관련이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설득 목적에 따라 생각된 담화의 질서만이 문제가 되였다. 따라서 부르죠아적 글쓰기의 특이성이 대응하는 것은 수사학의 다양성이였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 54)
모파상, 졸라, 도데의 그 글쓰기는 문학의 형식적 기호 들 (단순 과거, 간접화법, 씌여지는 리듬)과 사실주의의 역시 형식적인 기호들(민중언어의 덧붙혀진 조각들 거친 말, 방언 등)의 결합체이다.
(롤랑 바릍트 ‘글쓰기 0도’62)
공산주의 작가들은 부르주아 작가들이 오래전부터 단죄했던 부르주아적 글쓰기를 요지부동으로 지지하는 유일한 자들이 된다.(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67)
프랑스 소설은 선들, 능동적 도주선이나 긍정적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기보다는 점을 찍느라 시간을 보낸다. 영미 소설은 전혀 다르다, 떠나라, 떠나라, 나가라!...... 지 평선을 가로 질러라…분리선을 찾고 그것을 따라가거 나 창조하라, 그것을 배반하는 지점까지.
(질 들뢰즈/필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355)
어떠한 변동이 있다할 지라도 실재계 자체는 다른 것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늘 그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것들이 다른 곳으로 망명해갔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121)
주체가 서로 자리를 바꾼다.(동상128)
모방에 대해 많은 론의가 이루어졌지만 그중 상당수는 엉터리다. 모방 현상을 적응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바로 그 한 례다. 나는 모방이 결코 적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동상206)
장자의 꿈 전문; 언젠가 장자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펄펄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여 유쾌하 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자임은 알지 못했다. 갑자기 꿈에서 깨여나보니 엄연히 자신은 장자였다. 그러니 꿈에서 장자가 나비가 되였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되여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자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물화라 부른다. 이때 물화란 사물의 변화, 만물의 끝없 는 유전(流转)을 의미한다.(동상209)
주체로부터 생겨나고 주체에게 애도를 요청하는 틈새, 혹은 구멍은 어디에 생기는가? 그것은 바로 실재계에 생긴다. 그리고 이 구멍에 의해 주체는 내가 앞 세미 나에서 배제라는 이름으로 제시했던 것과 상반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상징계에서 거부된 것이 실재계에 다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의해 생겨난 실재계 속의 구멍 역시 기표를 작동시킨다. 이 구멍은 없어진 기표가 투사될 수 있는 자리로서 작용하고 이것이 타자의 구조 속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이 기표가 없어지면 타자가 우리의 질문에 반응할 수 없게 된다. 이 기표는 우리 자신의 살과 피를 지불했을 경우에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면을 쓰고 있는 남근이라는 기표다.
바로 그 구멍에 남근의 기표가 자리 잡는다. 그러나 동 시에 그곳에 자리 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남근의 기표는 오로지 타자의 차원에서만 표출되기 때문 이다. 그 구멍으로 정신병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미지들이 남근의 자리를 차지하러 몰려든다 …. 수많은 이미지들이 남근의 자리를 차지한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178)
글쓰기는 말하기가 갖는 효과 즉 단순히 기교적인 차원을 넘어 새로운 것을 형성하는 효과를 가져야 한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 53)
사회주의적 현실에 완전하게 상응하는 공용어가 가능하다면 어떤 문학적 형식주의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56)
자신(<<랑세의 삶>>을 쓴 샤토브리앙)의 마지막 그림속에 그 최상의 신비한 불완전성을 담아놓은 푸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불완전성은 완성된 예술보다 더 아름다운데, 시간의 떨림이다. 추억은 글쓰기의 시작이고 차례로 글쓰기는 죽음의 시작인 것이다.(그것이 아무리 젊은 때 시작된다 하더라도 말이다)(동상128)
문학은 분리시키고 일탈시킨다(동상 134)
대립들이 엄격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을 두개이상의 상이한 풍경이 아래로 쫙 펼쳐지는 산정상의 능선처럼 얇고 날카로우며 결정적인 일회식 사건을 통해 분리시켜야
한다….문학은 우연적인 진실을 영원한 개연성 (필연 성)으로 대체 한다(동상135)
백과전서적인 시적 세계는 언제나 어떤 비현실주의로 규정된다. (자크 라캉 ‘욕망 이론’121)
문학은 정치적으로는 모든 독단론을 불신하고, 모든 전 제를 심지어 책임의 윤리나 책임의 정치에 깔려있는 전제조차 분석하여 어떠한 문제라도 제기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리를 부여받는다. 문학은 말의 자유 및 생각의 자유와 불가분하게 련결되여있다. … 문학 은 어떤 사회에서든지 내 머릿속의 비밀장소안에서 있을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식으로 무엇이든지 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15)
문학에는 한정된 의미나 정착 지점이 없다. 특별히 비평 적 방식이나 생산적 방식에 한해서 한정된 의미와 정착 지점의 탐색을 허용하긴 하지만 말이다. 문 학작품에는 결코 휴식이 없다. 그것은 소속도 없 다. 문학에는 돌아갈 집이 없다. 그것은 이상한 방랑자, 이상한 자유인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16)
텍스트는 ‘현재하지 않는 잉여’ 론리의 지배를 받는 ‘흔적들의 직조물’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155)
철학에서든 문학에서든 아니면 다른 무엇에서 든지 간에, 위대한 작품들의 등장은 변함없이 어느 정도의 몰이해와 당황, 망설임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위대한 작품에 대한 수용의 맥락이 바뀌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동상163)
해체는 문학에 어울린다… 해체는 모든 문학작품의 내부에서 특히 문학작품 내부에서, 언제나 이미 작동하고 있다.(니콜러스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85)
문학 없는 민주주의는 없으며 민주주의 없는 문학도 없다.(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86)
그(데리다)의 관심을 끄는 문학작품은 더욱 보편적인 변형에 참여한 작품들, 즉 우리끼리는 그것을 해체 라고 말했던것인데 서구적 사유를 뒤흔들고 전복 시키는 작품들이다.(동상 187)
궁극적인 아포리아는 아포리아 그자체의 불가능성이다. (아포리아란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뜻한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198)
쉐익스피어의 업적처럼 데리다의 업적 또한 비범하고, 경이로우며, 거창하고, 괴상하고, 비정상인 것처럼 보인 다.(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220 )
‘나는 글이라고는 한번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쓰는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글을 쓴다… 새로운 글 을 시작할 때마다, 그것이 아무리 평범한 글일지라 도, 나는 마치 미지의 것 혹은 범접할수 없는 것을 대면할 때처럼 당황스어울 뿐 아니라, 어색하 고, 서툴고, 무기력한 느낌에 시달린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221)
‘내가 한 말이 나를 놀라게 하고 나에게 내 생각을 가르쳐주 기도 한다’… ‘글쓰기가 위험하고도 괴로운 일인 까닭은 순수한 의미에서 그것이 창립적이기 때문이다.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223)
어째서 ‘문학이… 언제나, 말하자면,다른 어떤 것을 행 하고, 제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존재하 는지, 다시 말해서 어째서 문학자체는 제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일 뿐인지, 그 일관된 불일치성의 비밀 혹은 신비한 이질성과 관련되는 것이다.’ 데 리다가 보기에, 덱스트를 ‘위대하게’만드는것은 ‘의미로 탕진되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유발하는’능력에 있다. 그것은 또한 특히 메시지라는 보편적 자원을, 서 명이라는 궁극적 독서불가능성, 특히 문학작품이거 나 철학작품 개념에 관심을 보인다.(동상267)
나의 글씨를 먹고, 마시고, 삼켜서, 그것을 네속으로 져 날라라. 나로 하여금 너의 감로가 되게 하라. (니콜러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276)
책의 첫번째 유형은 뿌리ㅡ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 방하듯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할 수
없게 된 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천개의 고원14-15)
고전주의 예술가의 사명은 신의 사명과 똑같이 카오스에 질서를 부여하는데 있다. 그는 그저 “창조해라! 천지 창조다! <창조의 나무를 세워라!>”라고 외칠 뿐이 다. 랑만주의는… 새로운 외침이 울린다” <대지>다. 영토와 <대지>다!” 낭만주의의 도래와 함께 예술가들은 권리상의 보편성에 대한 야심과 함께 조물주의 지위도 포기한다. 그는 스스로를 영토화하고 영토적 배치물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제는 계절들도 영토화된다. (천개의 고원642-643)
낭만주의에 의한 근본적인 혁신은,,, 형식에 대응하는 실체적 부분이 없고, 코드에 대응하는 환경도 없으 며, 형식의 범위 내에서 코드에 의해 질서를 부여받 는 카오스 상태의 질료도 없는 것이다. 대신 부분들은 표 층에서 성립과 해체를 반복하는 배치물에 가깝 게 되였다. 형식자체도 연속적 전개 상태에 놓인 대 규모 형식이 되며 모든 부분을 하나로 묶고 있는 대지의 힘들을 받아들이게 되였다. 질료 자체도 종속시키고 조직해야 할 카오스가 아니라 연속적 변주중에 있는 운 동상태의 질료가 되였다. 관계나 변화가 보편적인 것이 되였다. 질료의 연속적인 변주와 형식의 련속적인 전개, 이처럼 배치물들을 통과하면서 질료와 형식 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질료는 내용의 질료가 되 기를 그치고 대신 표현의 질료가 되며, 형식도 카오스 의 힘들을 억제하는 코드가 되기를 그치고 스스로 힘 이 되고 대지의 힘들의 집합이 되려고 한다.
(천개의 고원 645)
고전주의적 연속체는 밀도가 동등한 요소들의 연속인데, 이 요소들은 차안된 것같은 개인적 의미작용에 대한 모든 성향을 제거하고 동일한 감각적 압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시적어휘 자체는 창안이 아니라 관 례의 어휘이다. 그속에서 이미지들은 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습을 통해 고립되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특수하다. …고전주의적 기교적 수식은 낱말들이 아니라
관계들의 기교적 수식이다. 그것은 창작의 기교가 아 니라 표현의 기교이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 0도’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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