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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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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2014년 03월 24일 15시 09분  조회:1370  추천:0  작성자: 도라지

▣ 수필/ 김순희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그를 봤다. 14년만에 보는 그가 반가웠다. 달려가 손이라도 잡고싶은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얼결에 피해버렸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  
뭐라고 말할가? 뭐라고 말해야 그가 알가? 지금의 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그가 리해를 할가?
그렇게 하루 또 하루가 흘렀다. 그를 만날가봐 조마조마하다.  
30대초반에 부푼 꿈과 미래에 대한 설레임, 자못 “웅대한 포부”를 품고 방송국을 떠났는데 다 잃고 다 던지고 찬바람이 휭휭 부는 가슴을 안고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귀가 있고 입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뭐라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미 많은걸 포기하고 체념한 뒤라 맘대로 생각하고 맘대로 씹으라는 배짱이였다. 이제 나는 남들의 말 같은것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들을수도 말할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왜 방송국을 떠났는지, 왜 다시 돌아왔는지, 그동안 어디서 뭘 하다가 왔는지 다 모른다. 그런 그에게 이 14년의 내 인생행로를 차근차근 설명할수도 또 요약해 설명할수도 없었다.  
내 고민은 나날이 깊어갔고 아무리 고민을 해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와 정면으로 딱 부딪쳤다. 그는 나오고 나는 들어가는 찰나였다. 어디로 숨어버릴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십여년이나 못본 나를 마치 어제 본듯이, 아니 매일 본듯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는것이였다. 나도 얼결에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수천수만마디의 말보다 그 하나의 행동이 나를 목이 메이게 하고 가슴 따뜻하게 할줄 몰랐다. 내가 속으로 끙끙 앓던 일이 이렇게 한방에 쉽게 해결될줄 몰랐다.
그가 뭐라 손시늉을 하길래 잘 몰라서 그를 쳐다봤다. 아참, 이래서 눈을 마음의 창문이라고 하는구나. 그의 눈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오랜만이다, 반갑다, 어디 갔다 인제 왔니…  
이 큰 방송국 울안에서, 수백명 직원들중에서 나한테 확실하게 환영의 표시를 한건 그 사람- 벙어리뿐이다. 비록 입으로는 말을 안했지만 나는 그의 눈에서 그 뜻을 충분히 읽었다.  
그래, 이런 간단한 방법도 있었구나. 그런데 난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했을가? 나는 구경 그한테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걸가?  
겉으로는 말 많은 세상에서 말하지 않는 즐거움을 즐긴다고 했지만 사실 난 아직도 말하고싶은 충동을 못참고있다. 아직도 사람들이 몰라줄가봐 오해할가봐 전전긍긍하면서 급급히 해석하려 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끊임없이 지껄이고 표현하는데 길들여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답답한것이다.
말을 안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고도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거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말을 하게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도 하지만 마음에 없는 말도 한다. 마음에 없는 말은 그렇다치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일지라도 상대에게 진실되게 전달되는 말들이 얼마나 될가? 많은 말들이 얼마후면 불필요한 말, 부질없는 말, 금방 후회할 말이 된다.
사람들은 진심을 터놓으면 리해하고 마음이 통할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사람을 믿었고 진실하면 벽을 허물수 있다고 천진하게 생각했던 나는 바닥까지 다 보여주고 모든 진실을 아낌없이 다 털어놓았다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고 그로 인해 많은 아픔과 후회를 남겼다.  
진심으로 터놓고 한 말이 자기 좋게 해석이 되고 별별 거짓말이 다 보태져 순간에 사람이 우스워지고 그것이 화살이 되여 나한테 날아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듣고싶지 않았다. 말을 해도 상처가 되고 말을 들어도 상처가 됐기에 아예 입을 다물었고 아예 귀를 막아버렸다. 이 세상엔 말로 할수 있는게 아주 많지만 또 말로 설명할수 없는게 얼마나 많은가를 그때 알았다. 뭐라고 설명하고 대꾸를 하기보단 시간이 흘러가고 말들이 묻히고 사람들이 나를 잊어주기를 바랐다.   
그날 그와 인사를 하고나서 나는 새삼 말의 가벼움을 절실하게 느꼈고 입으로 말을 안하는 그한테 더더욱 믿음이 갔다.  
방송국 울안에 들어서면 나는 그가 있는가부터 살핀다. 방송국 울안은 아침마다 주차전쟁이다. 조금 늦게 출근하면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되돌아나가야 한다. 대문을 통과하면서부터 어디 빈자리가 없나 차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두리번거린다. 
저쪽에서 그가 나를 보고 손짓한다. 수백대의 차가 꽉 박아선 곳에 유일하게 날 위해 남아있는 빈자리를 보면 참으로 반갑다. 주차를 하고 내리면서 그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성공적으로 주차한 나보다 그가 더 좋아한다.  
지나가던 한 후배가 말을 건넨다.
“선생님, 벙어리와 친한 사이인가요?”
“어 그래, 친한 사이야…”
그 말을 하고보니 그렇게 마음이 따뜻할수가 없었다. 그는 내 친구이고 또 나의 가장 든든한 빽이다.
26년전 대학교를 졸업하고 방송국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그 기숙사에 불을 때주고 더운물을 끓여주는 사람이 그였다. 언어장애가 있는 그를 사람들은 벙어리라 불렀다.  
처음엔 그와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서 그와 눈을 맞추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그와 소통할수 있다는걸 알았다. 그에게 있는건 표정뿐이고 그의 눈빛이 말을 대신하고있었다. 기쁘면 활짝 웃고 화나면 찡그리고… 그의 얼굴표정과 눈빛을 보면 그의 마음까지 읽을수 있었다.  
요즈음도 나는 늘 그의 도움을 받는다. 주차장에 정 자리가 없을 때면 그가 창고앞 비상용 자리를 내준다. 평소엔 차를 세울가봐 그 자리에 늘 커다란 돌이 놓여있다. 그는 끙끙거리며 그 돌을 옮기고 나보구 그 자리에 차를 세우라고 한다. 
내가 그한테 뭘 해준게 있다고 그가 나한테 이렇게 일편단심인지 그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은 자꾸 무언가 확인하고싶어하고 자기가 준만큼 받고싶어한다. 나는 그한테 아무것도 준게 없다. 그저 웃어주고 쩍하면 엄지손가락을 펴보인다. 그게 다다. 하지만 그가 나한테 굉장히 고마워함을 나는 안다. 그의 눈이 그걸 말해주고 그 마음을 나는 다 읽을수가 있다.  
어느날 친구와 함께 등산을 하다가 등산로에서 그를 만났다. 여직껏 나는 방송국 울안을 벗어나서는 그를 만난적이 없다. 밖에서 그를 만난게 하도 신기해서 저 멀리서부터 환성을 질렀다. 가까이 가보니 그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왔다. 그는 가족들에게 열심히 나를 소개했다. 뭐라고 했는지 그 집 식구들이 나한테 허리를 굽히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나보다 년세가 많은분들이 나한테 꾸벅꾸벅 절하자 나도 얼떨결에 꾸벅꾸벅 머리를 숙였다. 다들 굉장히 고마워하는 눈치와 표정들이다. 날 뭐라고 소개했을가? 참 궁금하다. 하지만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번마다 나는 나름대로 그의 뜻을 짐작하고 아마 그도 나와 같을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의 진심을 안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읽는다. 그의 진심은 말을 통하지 않고도 나한테 전해져 감동으로 내 마음을 적신다.  
대화는 말로만 하는것이 아니라 눈으로 마음으로 할수 있다는것을 그에게서 배웠다.   
뜻이 통했는데, 그의 생각 그의 마음을 아는데 새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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