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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력사적착오, 문화적반성-<<<볼쉐위크>의 이미지>>
문학이 인간경험을 다룬다고 하는데 인간경험에서 력사적 경험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삶의 현장과 멀어진 과거형으로서 일종 전통성 내지 습관성을 강하게 나타낸다. 그런데 그것은 또 그런 전통성 내지 습관성에 힘입어 과거의 현재적 존재성을 잃지 않고 있는것이며 그만큼 력사의 질곡조차도 아직 력사와 현재가 반성적 의미에서의 구조적 단절을 철저히 하지 않았을 경우 현실의 련쇄반응을 통해 새로운 력사의 질곡을 만들어낼 수 있는것이다. 력사의 체험적 아픔을 문명의 발전적 차원에서 재인식하는것은 그래서 필요하다.
정세봉은 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장백산>> 1991년 2호)에서 력사의 한 세대를 오늘의 의식의 현장에 옮겨놓고 한 참다운 인간이 어떻게 외곡된 력사에 조종되여 자아가 변형되고 지어는 거세되여버렸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체험적 인생의 재조명과 반성을 꾀하고 있으며 력사의 질곡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묻고있다.
주인공 윤태철은 이데올로기에 투철하고자 몸부림쳤던 그 시대 인간들의 상징으로 되고있을뿐더러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려고 무작정한 순응주의적반응을 보인 과거형 인간의 상징으로도 되고있다.
일상성의 생활조차 정치적 오염으로 하여 숨막혔던 그 당시의 력사적 상처 내지 비극은 우선 개인적 차실이기전에 벌써 사회적, 집단적 차실이였다. 다시말하면 차실자체가 객관적으로 불가항력적일 때 리성은 오히려 한 개인만이 아닌 그 시대자체가 상실하고 있다는 비평이 성립되는것이다.
적대적 투쟁의 승리를 쟁취하였으나 아직 적대세력이 존재하고 있고 특히 신생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진영의 겹겹한 포위속에 있다는 현실적 의식과 판단은 우리 당으로 하여금 계급투쟁확대화를 범하게 하였다. 타도된 적대세력이 저들의 세계적 세력에 힘입어 잃어버린 <<천당>>을 되찾으려 한다는것은 리치에 맞는 판단이다. 그런데 결국 이런 판단은 쉽게 <<싸리그루에서 싸리가 난다>>는 과잉판단을 인출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사회의 련좌법이 꺼리낌없이 살판쳐 일상성의 생활조차 인정이 메마르고 지어는 피로 얼룩지고말았다.
이에 순응적으로 착취와 피착취, 압박과 피압박, 통치와 피통치의 체험적 인간인 윤태철이가 인식적, 행위적으로 이런 계급투쟁확대화를 긍정, 채납할수 있고 인정에 매이지 않고 기치선명하게 투쟁의 선두에 설 수 있으며 지어는 생명이 다 하도록 이데올로기에 충성, 복종할 수 있는 것은 그런대로 그의 인생의 목적에 의하여 당위성까지를 확인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윤태철의 인생의 목적에 대한 정리를 잘 한다면 쉽게 그의 비극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것이다.
첫째, 윤태철은 지주의 압박과 착취를 받은 계급대항의 사회에서 생활하였다. 그만큼 그가 혁명에 참가한 초기의 목적은 바로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분배받아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였다. 그것은 계급적 대항, 즉 직접 지주계급과 맞겨룸하는 혁명이였던만큼 지주계급은 그의 직접적인 적이였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그는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하던 세월에 지주, 부농분자와 가장 철저하게 맞서서 <<독재>>를 진행할 수 있었을뿐더러 지어는 <<싸리그루에서 싸리가 난다>>고 그들의 자식과도 철저히 <<계급계선>>을 나누어야 철저한 <<혁명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믿어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력사에 투철한 현실인식은 천륜의 문제에조차 철저한 <<혁명성>>을 강요함으로써 아들 윤준호와 순정이의 애정비극을 초래하는 것이다. 천륜의 문제는 분명 정치이전의 문제, 사상이전의 문제이다. 더우기 윤준호와 순정이 사이에는 윤태철과 허수빈 사이와 같은 그런 직접적인, 체험적인 계급갈등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한고향에서 오손도손 함께 자란 향토적 정이 오가고 있는 것이다. 극단으로 대결했던 아버지세대에 비해 자식의 세대는 이미 그 대결의식이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는 착취와 피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계급적 존재와 갈등이 객관적으로 해제될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사이에는 사랑까지도 스스럼없이 묵인 내지 추구할 수 있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윤태철한테는 접수될 수가 없었다. 반동의 자식과 혁명자의 자식이 결합된다는 것은 철저한 <<혁명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의 인생의 본적지를 념두에 두면 이것은 그 당위성이 승인되는 력사적 인식이다. 어찌보면 부자와 빈자라는 력사적 문벌의식이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재단하는 시대에 정치적 계급의식으로 자리바꿈한 것이리라. 여기에서 윤태철은 기성된 력사인식에 집착하는 과거형인간이라면 윤준호는 싹트는 현실의식에 눈뜨는 미래형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준호를 구태여 현재형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미래형인간이라고 하게 되는 것은 그의 반역정신이 과연 론리사유적인 현실의식에 립각한 것이 아니라 기성된 력사세대와 체험론적으로 력사적 인식차이를 갖고있는 세대의 현실감각적인 감정발로에 다름아니기때문이다. 이것이 오히려 시대적 합리성을 보여주는 인물형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현실인식은 체험론적으로 력사적 인식차이를 갖고 있는 두세대사이에서 틈서리가 생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론리체계적인 충돌로 인발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일상성에서 현실감각적으로 생성하는 것이기때문이다. 윤준호의 형상은 새로운 력사적 인식을 가진 인간의 생성을 암시하고 있을따름이다. 그만큼 사회는 아직 완숙한 현재형인간을 배출하기에는 시기상조한 것이였다.
둘째, 윤태철의 소박한 혁명성과 력사적 인식과 함께 그의 락후한 농민출신의 신분적 제한성이 인과적으로 금그어준 현실파악과 문화적 자아실현의 한계성을 홀시할 수 없는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이 그의 삶의 인격을 정립시켜준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인으로 될 것이다. 가난이 선물한 무식함은 그를 경험-유전형의 인간으로 키워왔기에 론리-사유형의 인간과는 너무나 아름찬 거리를 두고있다. 이것은 필연코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자기 자세에 대한 조절 내지 규범에서 모호성과 전통성 및 의뢰성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특히 이런 비자각적인 문화바탕으로서는 우리 당의 사상리론체계에 대해 령혼적으로 올바르게 해득할 수 없는 것이다. 하기에 그는 다만 우리 당은 인민을 이끌어 통치계급을 뒤엎고 인민을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한 위대한 당이라는 극히 소박하고 거의 상식에 가까운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상급의 말만 들으면 틀림없다는 심리적 자세를 갖춘것이다. 하기에 사실상 그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그 자신의 자치적 노력보다는 관념적인 것을 모방하고 색맹이 되도록 정치에 훈련된 의뢰적인 것이였으며 그의 인생적 자세조차 적극적이고 자각적인 목적추구가 아니라 다만 시키니 한다는 심리로 삶을 조직한 순응주의적인 것이였다. 이처럼 그의 력사적인 현실참여가 표면적으로는 희극적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벌써 비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가난이 선물한 무식함이란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에도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의 구축을 위해 혁명한다는 균형잃은 자세가 허영 내지 맹종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허영과 맹종이 개인적인 충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시대의 력사적 면모의 한 양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데 사회력사적 문제성은 심각히 제기되는 것이다.
우리는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개혁개방의 시대가 열린 벽두에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다시 자기의 생활능력을 실험코자 애쓰는 윤태철의 창백한 모지름에서 사회와 인간의 균형잃은 갈등을 재확인하게 된다. 비록 시대가 어느정도로 력사의 한 물결에 휩쓸렸던 개인들에게 심각한 사고와 자아발견적인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음에도 윤태철은 우리 당이 자기의 오유를 철저히 반성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자 도리여 자기 모멸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파산당하고 만다. 다만 <<<볼쉐위크>적 오기>>로써 <<자신에 대한 력사의 희롱을 달갑게 받아안으리라 했고 아들놈 앞에서 주저치 않고 <두뇌없는 순복도구>질 하리라 했다.>> 그렇게 가냘프던 정신조차 허물어져버린 윤태철에게 남은 것은 행위 외엔 아무것도 없다. 행위자 목적이요, 행위자 동기요, 행위자 인생이였다. 하기에 그는 다만 <<흘러간 력사에 대한 울분>>과 <<아들놈한테 향하여진 <볼쉐위크>적 오기>>때문에 허수빈네를 도와주는 것을 <<삶의 내용>>으로까지 여겨 <<그가 새롭게 걸아나갈 인생의 길인것처럼>> 느끼는 것이였다. 인젠 자기 몸을 주체하기도 바쁜 로인이면서도 그 육체를 허물어서라도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기어코 훌륭한 배역을 담당해보려는 거기에 정신적 공허와 창백함이 드러나고 있으며 자아희생적으로 자기의 약점을 표현하는 비극성이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달리 풀어말하면 생리적 년령은 이미 인생의 황혼빛을 띄고 있으면서도 비여있는 정신적 공간때문에 쇠약한 육체만을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기에 그의 인과적인 희생이 확정되여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와 사회구성원간의 균형잃은 갈등이라는 시점에서 소설의 주제에 접근할 수 있으며 또 이런 주제적 포착은 문화반성적 의미에서 시사해주는바가 많은 것이다.
2. 우물안의 개구리, 닫힌 공간-<<새벽새는 울고있다>>, <<어제도 오늘, 오늘도 래일>>
오직 주어진 울타리안에서 자급자족에 만족하거나 지어는 초근목피로 육체적인 생명만을 연장하는 원시적인 삶에 불편함이 없이 안주할 때 가엾게나마 평화와 행복과 화목과 인정이 넘칠 수 있었다. 그런데 옹근 지구덩이가 인젠 인류에게 주어진 울타리로, 지구촌으로 좁혀진에 따라 그런 닫힌 공간과 원시적인 삶은 우승렬패의 치명적인 충격에 존재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였으며 상승적 경쟁력이 외면된 원시적인 평화와 행복과 화목과 인정은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승화를 저애하는 게으름과 무지에 동조하게 되였다.
조광명의 소설 <<새벽새는 울고있다>>(<<문학과 예술>> 1991년 3호) 에서의 궁재씨의 죽음은 바로 상술한 바와 같은 의미확대를 훌륭히 형상하였다는데서 문화적 반성의 무게를 크게 한다.
궁재씨는 가난과 고통과 불행에 너무도 어색해진 인간이다. 그런데 그는 노력과 분발 아니면 발악적으로라도 가난을 털어버리려고 한것이 아니라 새빚으로 낡은 빚을 메꾸어버리면서 술과 화투로 세월을 멋없이 죽여준다. 둘째는 돈이 없어 학교에 못하고 큰아들은 아직 <<왕바신>>신세도 벗지 못했지만 일년내내 술값만은 떨구지 않는다. 한창 젊음이 파랗게 자라는 나이인데다가 문명의 세례를 생활적으로 접수한 그들이 도저히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아버지의 중독된 삶을 본뜰수는 없는것이였다. 둘째는 집을 뛰쳐나가고 큰아들 영호는 마침내 아버지와 대항해 나선다. 일찍 가난은 영호를 실련의 <<선수권소유자>>로 되게 하였다. <<왕바신신세>> <<시계한번 못차보구...>>, 워낙 자부심이나 자존심이란것이 다만 정신적인것만이 아니다. 바로 영호의 자존심은 가난때문에 여지없이 꺾이웠던것이였다. 단순히 가난때문만이 아니다. 아들한테 신 한컬레, 아니 치솔약 한통도 안사주면서 일년에 360여원이란 술값만은 눅거리 쌀돈을 가져와서라도 물어대는 아버지 궁재씨의 타락때문이였다. 그 많은 꿈이 좌절되고 수정되여버리는 사이에 영호도 관념도덕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찢어진 마음의 쪼각들을 인내와 침묵으로 주어맞추면서 도덕의 방패로 자기의 들뛰는 마음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도 끝내는 남과 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생의 욕망과 최저한의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마저 실현할수 없다는 현실앞에서 도저히 참을수 없어 비명을 지르고야 만것이다. 정에도 한이 있는것이고 례에도 한이 있는것이다. 현실성을 배제한 마음만의 저이나 례는 가식밖에 남을것이 없다. 이제는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인간은 오로지 자기의 의지대로 할뿐이다. 바로 자기 삼촌한테 억지당한적 있고 또 <<본가집에 왔다가 아이를 죽인죄로 시집에서 쫓기워와 있는>> 죽은 계모의 딸을 억지강요하여 데리고 살려하는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궁재씨가 자기의 인생은 마비되여가지고도 도덕적 방패를 들어 막으려하고 지어는 죽음에로 협박할 때 화해의 접점이란 전혀 존재할수 없게 된다.
<<니 능력있어 다른 놈들은 다 련애하는데 나는 못한다. 니는 <보토리>질해라. 나는 않한다. 내하구 살자는 녀자가 없으니까 봉녀하고 잔다. 어째? 니덕에 우리 둘다 거지다. 거지끼리 사는데 에째?...>>
이것이 영호가 궁재씨를 구박하면서 악에 받쳐 외쳐댄 말이다. 인간은 동물적본능도 자기의 리익에 복종시킨다. 어찌보면 실련의 <<선구권소유자>>인 연호가 한번 당한적이 이써고 또 시집에서 쫓겨난 봉녀와 결합하는 것이 훨씬 계산적이고 경재적이며 현실적이라고 행각했음직한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 창졸하게 사회관념도덕을 전달하는데 그치거나 극단적인 흑백론리로 영호의 행위만 뽑아 도덕적재단을 할수 없다. 왜냐하면 영호의 행위는 결코 그 행위자체에 의미가 매겨지는것이 아니라 바로 강한 삶의 욕구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한다는 그 지점의 상태를 확대시키고있다는데 자리매김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의 성행위의 의식심층에는 억압당한 삶에의 갈구가 눈물져있다. 성은 륜리이고 더덕이기 전에 생명이라는 원색적인 인간선언이라 할수 있는것이아. 하기에 궁재씨는 영호가 결코 일시적인 본능욕구의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의 욕구내지 종족보존의 생육을 목적으로 하는 결혼까지를 추구한다는 사실에 눌려 자기의 도덕적방패를 던져버리고만것이다. 그는 자기의 허무한 삶에 대한 ㅃ저린 참회와 함깨 그들 둘의 장래를 기도한다. 찌들어버린 육체, 창백한 령혼, 술에 절은 인생, 이 모든것이 그한테 필연적인 죽음의 가능서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의 현장에서 부활의 의미를 읽에 된다. 말하자면 종족보존의 체계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연장이므로 아버지의 무의미한 소비인생의 종말은 곧 아들의 강렬한 창조적인생의 모지름을 통해 새롭게 바람직하게 부활하리란는것을 묵시하는것이다. 이처럼 그의 죽음이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력사적교체라는 의미매김에 감동된다. 궁재씨는 문명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졌던 릉욕의 인생을 조용히 잠재우는 비장한 행위를 한것이다. 그이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의 좌표와 현주소가 확인되고있다.
장혜영의 소설 <<어제도 오늘, 오늘도 래일>>(<<흑룡강신문>>1992년 4월 25일)은 황페하지 않은 농촌에서 황페화의 길을 걷는 농민들의 현실을 해부하고있다. 민수는 주어진 자연적인 생존공간에서 고정불변적인 생물과정 즉 어제 오늘, 미래가 무의미한 반복만 거듭하는 소비적인생에 지치고 변질해가고있다. 도거리농사가 농민들에게 아름차게 한가한 시간을 가져다주었지만 민수랑한테는 그 한가한 시간을 죽여주는 일이 훨씬 지겨운것이였다. 농사지어 밥먹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였고 1년 365일에서 절반도 넘는 시간을 타산없고 할일없어 쩔쩔매였다. 너무도 단순하고 쉽게 사는 인생이였다. 기실 쉽게 산다는것이 허무한 삶을 의미한것이다. 자기를 승화시키고 참된 인생을 고양시키는 정신적독방이 없고 따라서 조금의 문화적투자도 없이 단지 생명연장의 생물과정내지 자연과정으로만 머물러있을 때 얼마만큼이나 인간성의 참된 모습을 찾아볼수 있겠는가. 더우기 현사회는 그 문명발전의 주기성으로 하여 개체의 사회화를 일생의 과업으로 제기하고있으므로 우리는 자기의 인생에 대한 문화적인 신변정리에 게으를수 없게 되였다. 생산성문화의 퇴화내지 답고, 생활문화의 고갈내지 빈혈증으로 질병을 앓고있는 민수의 형상은 교체시대의 시자로에서 갈팡질팡하는 사회구성원의 앓는 모습이기도 하다는것으로 주제적확장은 가능한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예술적측면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새벽새는 울고있다>>가 비극적인 모순갈등으로 주제를 날카롭게 날세우고있는데 반하여 이 소설은 아무런 자극적인 사건이나 비극적인 결말도 없이 퍽 시시껄렁해보일 정도의 일상성의 생활로 꾸며지고있다는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 일상성의 생활현장에서조차 문화반성적의미를 조명해낼수 있다는 작가적안목에 힘입어 그 심미적가치가 그런대로 무겁다. 이처럼 예술성보다 생활현장감을 강조하는 형식의 거칠음에는 모름지기 생활에 더 살바투 접근하려는 의도적추구가 안받침되여있을것이다. 그만큼 반성문학은 인간을 그린다는 인식보다는 인간을 해보한다는 휴머니즘에 더 집착하는것 같기도 하다.
3. 산업시대의 뿌리뽑힌 인간들-<<빈곤>>
격변기에 있어서 문제의식을 사회의 기본적인 사유형태로 자리잡게 된다. 사회의 돌변적인 변화, 발전은 기성인들의 체험론적인 경혐내지 전통적인 사유형식의 준확성이나 지어는 존재적가치를 여지없이 충격하였다. 매기 사회성원마다가 전통적인 기성인식과 존재적인 현실인식, 그리고 리상적인 미래인식 사이에서 선택의 아픔에 모지름쓰며 신음하고있다.
긺일의 소설 <<빈곤>>(<<장백산>> 1992년 2호)은 바로 이처럼 농경사회로부터 산업화사회로 과도하는 격변기에 기성가치규준의 변질과 함께 뿌리뽑힌 인간들이 허물어지든가 변질해가는 비평적인 형상을 통하여 변종하는 사회에서의 인간상실의식을 꼬집어 일깨우고있다.
돈있는자의 정신적빈곤, 글읽는자의 물질적빈곤, 극덧이 사회객관내지 일반으로 설명되여야 할 경우 치원이나 김일의 형상은 자기의 <<비극적운명>>으로 그런 사회적빈곤을 폭로하고 호소하기에는 너무나도 가냘프고 자살적인것이다. 틀림없이 비극이란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한 미의 훼손이다. 그런데 치원이의 경우 그는 그런 불가항력적힘의 강타를 받기에 앞서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철학적 빈곤으로 하여 스스로 정신질환을 앓고만다. <<상점에서 나와 가게방뒤벽에 대고 오줌을 쏴쐬 내갈기>>고 <<한달 로임을 봉투채 밀어넣는>> 행위는 결코 <<금전만능의 인격론>>이란 현대문명과는 전혀 무관환 미개병이다. 사실 그의 모대김과 신음소리는 사회적빈곤에 해한 대항적인 비명인것이 아니라 물가의 모래탑처럼 너무너무 쉽게 씻겨져내리는 그 자신의 허탈한 령혼을 두고 부르는 영탄곡이다.
김일의 경우 얼핏보면 그는 글읽는자로서 물질적빈곤에 모대기고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준 단색테레비죤까지 팔아먹고>> <<그 돈으로 사흘마작>>을 논 김일, <<그제 하두 심심하니 친구들끼리 좀 놀구 또 뚜드려먹구 소일하>>는 김일의 형상은 물지적빈곤내지 사회적빈곤을 호소하기에는 너무도 멀리 정신이 먼저 시들어버린것이다.
그러고보면 돈있는자 치원이의 정신적빈곤, 글읽는자 김일의 물질적빈곤이란것은 일종의 가면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두 정신질환자가 같지 않은 가면을 쓰고 같은 극을 표현한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것이다.
물론 그들이 고통내지 넉두리의 근원은 그런대로 사회에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사회학적 진단을 하면 경제발전기에 과연 여러가지 페단과 부식작용이 훨씬 맹렬한것이다. 이것은 계절이 바뀔 때의 발병률이 많은것과 같은 도리일것이다. 특히 농경사회로부터 산업화사회로 넘어들어오면서 사회에는 인격론에에서조차 상대방의 지갑의 크기에 절대적인 긍정을 보내는 현대문명병이 류행성감기처럼 성행하고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매개 사람들의 신체소질과 항역능력을 간과할수 없다. 특히 특정한 환경이 아니라 일반적인 환경에서 누구나 다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고험을 통해 승패의 두 부류가 있을 때 우리의 가치판단은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것인가.
사회적빈곤 즉 돈있는자의 정신적빈곤과 글읽는자의 물질적빈곤은 류행성감기균으로서 수시로 사람들을 질병에로 몰아가고있다. 이는 객간적현실이다. 그다음 제기되는것이 개체의 <<철학적빈곤>>이다. <<철학적빈곤자>>는 오뉴월 고뿔도 쉽게 걸리고마는것이다. 불가항력적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겨나갈수 있는 충격앞에서 그 자체의 취약성때문에 허리꺾고말 때 우리는 거기에서 얼마만큼의 비극성을 눈물머금고 읽을 수 있을까. 자기의 라태, 무지, 무능을 덮어놓고 일방적으로 억울한체, 슬픈체, 고독한체, 지어는 인류의 위기감같은것까지도 느낀체 하는 어리광대같은 연기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희생을 밑거름으로 하여 성장하는 사회의 모진 진통을 절감할수 있는것이다.
4. 사치한 도덕과 계산적인 리기주의-<<슬픈계률>>
도덕과 질서가 필요한가 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은 해답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기성된 도덕과 질서가 게속 사회구축의 구조적 요소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계산적인 리기주의의 사치한 도독적 방패로 변질하고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회현실적을 던져진 부진이냐 발전이냐 하는 선택의 질문이다. 례컨대 부담거리로 여겨 홀로난 부모를 시집 혹은 장가를 보내거나 반대로 재산을 넘겨보고 극력 시집 혹은 장가를 가지 못하게 하는 계산적인 리기주의앞에서 기성도덕은 과연 어느만큼의 치유력을 갖고있는것인가 등등>>
허련순의 소설 <<슬픈 계률>>(<<천지>> 1992년 4호)은 이른바 자기는 사회의 <<정신당원>>이고 정상인이라는 월등감을 스스로 가지고 자기보다 약하거나 어딘가 좀 부속품이 모자란 사람을 악마처럼 억지로 인간대렬에서 밀어내려하는 김씨댁 등의 형상을 통하여 자기들은 오장륙부가 하나도 세탁되지 않아가지고 남을 험담하는데는 열을 올리는 인간추악상과 계산적인 리기주의에 복무하며 인간성을 외면하고있는 기존도덕적인 성륜리의 허위성을 고발하고있다.
<<그녀>>로 등장하는 녀주인공은 <<처녀때 너무 못생겨서 청혼하는 남자가 없었다.>>고 한다. 서른살에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한 홀애비와 결혼했으나 아들 하나 남기고 죽어버리는 결핵병환자였었다. 후에 남의 소개로 아이 셋짜리 남자한테 시집갔으나 남편아이들이 어찌나 이악스럽게 나오는지 자기 자식이 주눅이 들어 기를 못펴는것이 가슴에 걸려 일년만에 리혼을 하고 나와버렸다. 그뒤 떠돌이 세방살이로 수모를 받으며 살다가 신계촌에 홀로 사는 홀애비가 좀 부실하기는 하나 일은 제대로 하고 집 하나를 쓰고 산다는 말을 듣고 자처하여 김부실댁으로 들어왔다. <<남자에 대해선 애초부터 큰 기대같은걸 픔어보지 못했던 그녀로서는 사랑이고 뭐고 단지 피곤한 몸을 담을수 있는 처지면 된다고 생각했고 아들애 하나만 눈치밥 안먹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생존본능의 가장 원색적인 추구인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명의 원색적인 추구마저 이른바 주위의 <<정상인>>들에 의해 여지엾이 허물어진다. 부실이한테 시집온 근거로 같은 부실이 취급을 당하고 정상적인 성의 욕구마저 망측한것으로 비난받으며 지어는 <<온갖 랭대와 멸시도 넉넉하게 받아당하는것>>마저 <<그녀>>가 <<부실하기때문에 치욕을 못느끼는거야>>라고 놀림을 받는다. 그야말로 살아도 밉고 죽어도 밉다는식의 철저한 버림을 당하고있는것이다. 이런 버림은 첫째, 자기 몸에도 그냥 더러운 똥집을 달고있으면서 남이 똥누는건 흉보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몰렴치하고 루추한 심태에서 조성되고 둘째, 김씨댁과 같이 리해관계를 같이 하는 인간들의 너무도 계산적인 리기주의에서 조성되는것이다. 일 잘하고 돈 잘버는 시동생을 하루새에 <<그녀>>한테 빼았겼다는것이 김씨댁의 분노를 불러일으킨것이다.
그들이 새살림을 꾸렸음에도 김씨댁은 아에 두 사람 다 손아귀에 넣고 부려먹으려 한다. <<그래서 머리쓴것이 경제권을 틀어쥐는 방법이였다. 농사수입이고 남새판 돈이고 모두 바쳐야 하고 돈을 쓸 때는 맡아내가고 밥쌀을 한주일에 한번씩 내가야 한다는 규정을 세웠다.>> 못난것, 부실한것이라는 근거로 생활자립권마저 박탈하고 그들을 노예내지 지어는 말할줄 아는 로동도구로 취급해버리는것이였다. 김씨댁이 자기의 이런 행위를 정당하게 위장하는 수단이 바로 자기몸에도 그냥 더러운 똥집을 달고있으면서 남이 똥누는건 흉보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몰렴치하고 루추한 심태를 리용하여 <<그녀>>와 시동생을 아주 자립할수 없는 천치로 확인시켜버리는것이였다. 인간의 상정으로 말하면 시동생이고 동서이기에 김씨댁은 그들을 몰렴치한 인간들의 비난과 타격에서 구해내고 감싸주어야 할 가장 자격적인 보호자인것이다. 그런데 공짜로 부려먹을수 있다는 계산적인 리기주의는 그녀로 하여금 악의 수단마저 서슴치 않게 하였던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계산적인 리기주의앞에서 기성도덕은 또 과연 어는만큼의 치유력을 갖는것일가. 외적으로 못생긴 <<그녀>>와 내적으로 좀 부실한 김부실의 본능에의 추구와 그것을 비난하고 헐뜯고 제약하고 압제하는 김씨댁을 비롯한 주변인간들의 소행은 실상 생활의 바탕과 인간성을 멀리 떠나버린 관념도덕의 허위적인 위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벗겨버리고있다.
이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내지 인간성까지를 위협하는 사실에 천착하는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일것이다. 그만큼 휴머니즘에 철저한 문학일수록 인간경험에 해한 반성적의미가 깊을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여기서 라도향의 <<벙어리 삼룡>>에서의 천치의 의미를 재확인하게 된다. <<그녀>>나 <<김부실>>은 결코 바보와 무지의 개념으로서의 일상적, 상식적 차원에서의 천치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 성실로서의 환상적차원에서의 천치이다. 이때의 천치는 인간을 타락과 허위에서 구제하는 천사의 얼굴 바로 그것이다. 약자에의 학대, 형식으로만 제약된 도덕이 그앞에서 여지없이 몰골을 드러내고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인간의 버림을 당하면서도 죽지 않고 필사적으로 살아온것은 아들을 위해서였다는 여기에서 우리는 본능에 다름 아닌 가장 원색적인 모성애를 눈물겹게 확인하는것이다. 자기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 되여가지고 잡초처럼 살아가면서도 아들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여기에 어머니로서 인간버림을 자기만의 수단으로 한정시키기 위해 절망적인 치욕의 목숨이나마 이어간다는 론리가 성립되는것이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진지한 인간탐구이다. 말하자면 소설 <<슬픈 계률>>을 과념적인 도덕이나 륜리 이전에 인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인간선언이라 할수 있다.
이상에서 문화반성적의미라는 좁혀진 구역에 립각하여 문학정신의 한 기질적측면인 비평정신을 진단확인해보았다. <<문학은 인간탐구이다>>라는 명제에 의하여 인간의 본질과 인간성의 밝힘은 문학의 첫째가는 작업으로 되는것이다. 그만큼 문학가의 선도적역할과 희생적모험은 불가피면적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문학은 구체적으로 인간경험을 다루는것이고 인간경험은 거듭나는 침적을 통하여 거의 구조적내지 제도적으로 규제력을 갖고있으므로 거기에 반성적의미까지를 매길 때 자칫하면 사회반역의 십자가조차 멜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또 그만큼 문학가는 인생투자에 바람직한 정보내지 가치판단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있다.
문학이 인간경험을 다루는것은 바로 인간을 원색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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